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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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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11. 08:42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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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지금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언젠가는 너희들 안에서 펄펄 뛰는 물고기처럼 살아날 것이다.” 
우리를 암기기계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었던 그때, 지리 선생님만은 살아있는 지식, 아니 지혜를 가르치려고 애쓰고는 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종교에 빠진 어른들의 기대에 어긋날까봐 조급증이 난 우리에게, 예비고사에 나오지 않는 지식은 이미 썩은 동태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지리 선생님의 열정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스위치백이라는 대목을 가르칠 때도 그랬다. 선생님은 유난히 그 부분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기차가 산을 넘는 원리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 단원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산악지대의 교통’ 쯤을 가르칠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산악지대 사람들의 삶을 반드시 전해줘야 하는 사명이라도 띠었다는 듯, 목소리에도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평야지대에 사는 우리는 스위치백이라는 게 예비고사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 점치기에 바쁠 뿐이었다. 그리고 예비고사가 끝난 뒤 스위치백이란 단어는 각자의 뇌리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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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죽었던 단어가 뜻하지 않게 부활한 건 얼마 전이었다. 필요한 자료를 찾다가 스위치백이라는 말과 느닷없이 만나게 됐고, 국내에 단 한 곳 남은 스위치백 구간이 곧 사라진다는 소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반가움보다는 경이롭다는 생각이 먼저 등골을 훑고 내려갔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뻥뻥 구멍을 뚫고, 산 하나 정도야 순식간에 뭉개서 길을 만드는 용감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걸 남겨뒀다니. 태백으로 달려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위치백이란, 산악지대의 경사가 심한 비탈을 기차가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Z’자형으로 설계한 선로를 말한다. 여러 개의 차량이 연결된 기차는 기관차의 견인력에 한계가 생기게 되며, 기울기가 80% 이상이면 한 번에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철로를 지그재그(zigzag)로 설계해서 경사를 완만하게 한 것이 스위치백이다. 즉 열차가 톱질하듯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목적지까지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강원도 도계의 흥전역(상부역)과 나한정역(하부역)간에 이 스위치백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동백산~도계역간 16.2km의 솔안터널이 공사 중이어서 폐선이 오래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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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백 구간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취재를 나눠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 날은 나한정역부터 찾았다. 이 역도 전에는 주변에 민가들이 많아서 승객들의 발길로 분주했지만 이젠 스위치백의 반환점 역할만 하고 있다. 어렵게 찾아간 건물은 예상보다 번듯하고 깨끗하다. 역무원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는데 마침 화물차 한 대가 들어온다. 그런데 먼저 보이는 건 머리인 기관차가 아니라 꼬리인 객차다. 아하! 바로 저거구나. 통리역에서 흥전역까지 간 기차가 급경사 때문에 다음 역까지 단번에 내려가지 못하고, 나한정역까지 뒷걸음질 쳐 반을 내려오고, 거기서부터 다시 앞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화물차가 뭔가 기다리는 눈치더니 여객열차가 들어온다. 이 열차는 머리부터 보인다. 화물차와 반대방향인 도계에서 들어온 것이다. 잽싸게 차를 몰아 고지대에 있는 심포리 스위치백쉼터로 달린다. 흥전역을 거쳐 오는 열차를 만나기 위해서다. 휴게소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니 씩씩거리며 열차가 달려온다. 심포리건널목을 지키는 역무원으로부터 스위치백에 얽힌 이 얘기 저 얘기를 듣는다. 대놓고 내색은 안 하지만 그 분의 말에도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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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태백역으로 향한다. 직접 타보고 스위치백을 제대로 느껴볼 심산이다. 역무원에게 바쁜 기색으로 기차시간을 물었더니 지금 통리역으로 가면 바로 기차를 탈 수 있을 거란다. 돌아오는 기차는 통리역에 서지 않으니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가란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어차피 스위치백은 통리에서 도계 구간에 있으니. 역 앞에 서 있는 택시를 타고 통리역까지 달린다. 표를 끊고 역 주변을 구경하고 오니 마침 열차가 도착한다. 청량리역을 출발해서 강릉까지 가는 기차다. 객차는 거의 비어있다. 드문드문 앉아있는 승객들은 기차가 스위치백을 이용하든 터널로 들어가든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사진을 제대로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는 건 나뿐이다.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더니 금세 고지를 달리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사열이라도 하듯 터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이런 터널마저 뚫기 어려웠으니, 알프스 같은 곳에서 관광용 열차를 위해 쓴다는 스위치백에 의지했겠지. 창밖 까마득하게 보이는 협곡에는 옥빛을 머금은 냇물이 힘차게 흐른다. 괄콸콸 우당탕 소리가 객차 안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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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심포리역이라는 간판이 후다닥 지나간다. 심포리를 지났으니 곧 스위치백 구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방송이 뒤따른다. "우리열차는 잠시 후 흥전역에서 나한정역까지 스위치백 구간을 운행하게 됩니다…." 고도가 499m란다. 카메라에서 시작된 긴장이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흐른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긴장이라는 건 나 스스로 잘 안다. 항공사진, 아니 항공 비디오를 찍지 않는 한 무슨 재주로 스위치백을 담는단 말인가. 그래도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는 수밖에. 헐떡거리며 달리던 열차가 흥전역에 닿았는가 싶더니, 곧 이어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즉, 객차가 앞서고 기관차가 따라간다. 속도는 무척 느리다. 뒤로 가는 만큼 위험 요소가 많기 때문이란다. 스위치백 구간이라는 걸 모르거나, 안내방송이 없었다면 미끄러지는 줄 알고 놀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뒤로 가는 구간은 그리 길지 않다. 1.5km 정도라는데 5분 정도 걸린다. 곧 나한정역이 나타난다. 잠시 멈춰 섰던 열차가 이번엔 머리를 앞세워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속력을 높여 제법 완만해진 길을 달리더니 금세 도계역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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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에서 10시44분에 타서 도계에 도착한 건 11시 10분. 30분도 안 걸렸다. 도계역에서 서성거리다가 반대쪽으로 가는 11시 34분 기차를 탄다. 일요일이라서인지 서울로 가는 기차는 사람이 제법 많다. 조금 달리자 역시 스위치백 구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되짚어 가는 길도 지그재그로 경사도를 줄이는 방식에 변함이 없다. 나한정역까지 정상적으로 간 열차가 거꾸로 움직여 흥전역에 도착하더니 다시 앞으로 달린다. 태백역에 도착한 것은 12시12분. 왕복 1시간 30여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먼 길을 다녀온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전설 속에 있는 어느 곳을 다녀온 느낌이다. 고등학교 시절 지리 선생님의 말씀이 문득 가슴으로부터 서늘하게 살아난다. 1936년 영동선이 개통된 이래,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한 시절을 지고 늙어가다,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스위치백. 2012년이면 더 이상 그 길을 지나갈 수 없다. 일대를 리조트로 꾸며 스위치백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도 있다지만, 그래봐야 그건 박제된 유물일 뿐이다. 한 시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내 작은 동공에 잠겨 오래도록 떠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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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27. 08:40 사라져가는 것들
(上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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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날마다 난리 굿을 해대니 건물 관리인도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제발 좀 나가 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슨 돈이 있어서 이사를 갈까. 그 때 소위 ‘시발연(詩發硏, 시인통신발전연구회)’이란 게 만들어졌다. 단골들이 형편 되는대로 외상값을 갚고 화가들은 그림을 기증하고 문인들은 원고료 일부를 내놓아 돈을 마련했다. 한귀남 씨는 거기에 빚을 내고 그동안 번 돈을 합쳐 이사를 했다. 1992년 5월이었고, 시인통신이 탄생된 지 10년만이었다. 시인통신 2세대를 연 곳은 종로1가 피맛골, 훗날 르메이에르빌딩이 들어선 자리였다. 꽤 넓어지는 바람에 1, 2층을 합하면 20평이나 됐다. 이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술꾼들의 세대교체도 이뤄졌다. 언론사 노조나 운동권 인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다. 한귀남 씨는 그 시절을 그렇게 회고했다.
“그때 많은 노조가 태동했어요. 학생들도 자주 오고. 덕분에 정보부 사람들에게 주목 받았지요. 무슨 비밀결사대라도 만드는 것으로 알았던지, 그 사람들이 손님 틈에 끼어 앉아 대작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누가 누군지 아무도 따지지 않을 때였으니까. 결국 몇몇 사람은 끌려가기도 하고. 그래도 밤 아홉시만 되면 하나 둘 모여들어 자리를 채우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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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는 세대와 시인통신을 드나든 시기를 떠나서, 훗날 국회의원에 대선후보가 됐던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에 대한 추억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홀씨 같이 미미했던 존재를 그분들이 다 키워줬지요. 시인통신 드나들던 분들 중에 금배지를 단 이도 일곱이나 돼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도 그 중 한 분입니다. 자신이 힘든 가운데에도 ‘귀남아, 힘내레이. 단디 해라’라며 다독이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도 어른스러움을 잃지 않았지요.”
권영길 위원장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끝까지 꼿꼿하게 앉아있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귀남 씨는 후배들 쫓아다니며 외상값 갚아주고 따끔하게 야단치고 하던 선배들이 여전히 성성하던 시절이었다고 그 때를 기억했다. 또 외상값은 쌓여 가는데 갚을 길은 없고, 그래도 술은 마시고 싶어서 꾸준히 드나들던 한 시인이, 첫 원고료를 받자마자 몇 년 치를 갚겠다며 찾아온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좋은 소식도 있었다. 1993년 한귀남 씨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문학계간지 ‘포스트모던’에 시부문 신인상을 받은 것이다. 문인들과 10년 넘게 부비고 살다 보니 어느덧 시인이 돼 있었던 것이다. 또 2000년에는 계간지 ‘지구문학’에 소설 ‘피맛골에 부는 바람’이 실리면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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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만 있을 것 같았던 시인통신에 먹구름이 드리운 건, 이사한지 10년이 조금 넘은 2003년이었다. 사실 어두운 그림자는 훨씬 전부터 드리워져 있었다. 피맛골에 재개발의 음습한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서민들의 가벼운 주머니와 애환을 달래주던 오래된 골목의 숱한 명소들과 함께 시인통신도 전성기였던 2세대를 접어야했다.
“어디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요. 처음 두 달 동안은 아무 일도 못했어요. 재개발이라는 걸 우리가 직접 겪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싸우고 버텨도 봤지만 스스로 무력한 존재라는 걸 확인했을 뿐이지요. 간판이라도 지키기 위해선 빨리 추스르고 새 출발을 할 수밖에.” 
쫓겨나다시피 인사동으로 이사한 뒤, 2004년에 만난 한귀남 씨의 표정은 여전히 처연했다. “인사동이 재미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주인은 같은데도 피맛골의 시인통신과 인사동의 시인통신은 달랐다. 환경이나 음식도 어느덧 ‘인사동화’ 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영 겉도는 것 같았다. 단골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시인묵객들의 난장판이 아니라 ‘점잖은 손님’이나 아베크족이 드나드는 그 곳은 이미 시인통신이 아니었다. 가끔 열리는 시낭송회 같은 게 그나마 시인통신의 존재를 확인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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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서 맞은 3세대 시인통신은 어느덧 60줄에 접어든 한귀남 씨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도 꽤 지친 표정이었다. 그나마 막내아들이 같이 장사를 하는 덕분에 몸은 좀 편해진 것 같았다. 경기도 어디에 땅을 조금 마련해놓고 주말마다 가서 흙을 만지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과거에 비해 없어진 게 많아요. 정이 없어졌고, 외상 달라는 사람이 없어졌고, 싸울 일이 없어졌고….
그러면서도 시인통신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옛 얼굴을 볼 때마다 시인통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더 굳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덧 우리 막내의 시대로 바뀌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 있으렵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흘러버린 세월에 그들도 놀라고 나도 놀라지요. 얼마나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것인지…. 지금도 옛날 외상장부를 보관하고 있어요. 기록돼 있는 사람이 700명도 넘어요.”
하지만 시인통신이 하락기를 걷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으로 봐도 확연했다. 사회적으로도, 숨 막히는 시대가 저만치 뒤에 있었다. 장사가 안 돼 집세가 밀리기도 했다. 그녀는 피맛골로 돌아가고 싶다고 몇 번 되뇌었다. “옛집 근처를 서성이다 그냥 돌아갈 사람들이 생각나서”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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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 이뤄진 걸까. 2004년 11월 시인통신은 청진동으로 돌아가 4세대를 열었다. 2세대 시통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해장국 골목 근처였다. 짐을 옮긴 지 며칠 지난 뒤 한귀남 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사도 했으니 한번 들러 가라는 것이었다. 한옥을 그대로 살린 제법 운치 있는 집이었다. 환경은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 집에서 한 씨는 거의 주방에 틀어박혀있다시피 했다. 서빙은 막내아들이 전담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한 씨는 새로 이사한 시인통신에 정을 못 붙이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인사동으로 쫓겨 갈 때부터 모든 정이 떨어져 있었는지 모른다. 후배기자들과 여러 번 찾아갔지만 한 씨를 보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졌다. 손님은 제법 있는데 주인이 없으니 영 낯설었다. 옛사람들의 발걸음도 거의 끊어진 것 같았다. 헌데 훗날 확인된 것으로 보면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귀남 씨는 시인통신에 정이 떨어진 게 아니고, 재개발에 질려버린 것 같았다. 새로 둥지를 튼 그 곳 역시 사형통보를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막내아들도 갈수록 의욕을 잃는 것 같았다. 학원에라도 등록해서 자신의 길을 가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시인통신의 마지막 불꽃은 그렇게 사위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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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드디어 그 골목이 재개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7월31일 시인통신의 간판이 영원히 내려졌다. 다른 곳에서 그 간판을 다시 건다고 해도 그건 내가 아는 시인통신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라는 말을 거둬들일 생각은 없다. 시인통신. 시통이라고도 불렸던 그 곳. 그곳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림으로 그려지고 글로 쓰이고 노래 불린 곳이었다. 아니, 피맛골 자체가 그랬다. 애당초 피맛길은 서민들의 자유와 평등의 상징으로 태어났다. 말을 타고 종로를 지나던 벼슬아치들에게 머리 조아리기 싫어 숨어든 길이었다. 침도 한번 뱉어보고 휘파람 휘휘 분다고 뭐라는 이 없던, 누구에게도 평등하고 누구나 자유롭던 피맛길. 그 길을 중심으로 피맛골이 생겼다. 어둡고 암울하던 시절에 최루탄의 매운 연기를 피해 숨어들던 곳. 그 곳의 머리와 허리와 다리를 개발이라는 이름의 포식자가 탐욕스럽게 삼키고 있다. 그 덕에 호주머니 가볍고 가슴이 서늘하던 사람들이 비 맞은 새처럼 깃들던 곳, 시/인/통/신이 사라졌다. ‘누님’ 한귀남 씨도 떠났다. 술꾼들도 떠났다. 대신, 그들을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잘 갖춰 입은 21세기 인간들이 통조림처럼 빛나는 거대한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전문기자의 <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에서 일부 인용-참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진은 간판을 내리기 직전, 4세대 시인통신의 내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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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13. 08:5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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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통신. 네 글자를 적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가 과연 시인통신을 기록할 자격이 있을까? 고개가 저어진다. 자의적 분류지만, 시인통신은 이사 다닌 장소를 기준으로 4세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세대에 맞는 ‘시통가족’이 있었다. 내 스스로를 그 가족에 편입시키는데 망설여진다. 1세대 때는 학생과 군인, 졸병기자를 오락가락하던 하느라 아예 인연이 없었고 2세대에는 선배 기자들 따라 나무의자에 엉덩이 몇 번 걸쳐본 게 고작. 물론 정을 붙였으면 끝자리쯤 끼어 앉았을 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난 시인통신에 어울릴 만한 술꾼이 아니었다. 물론 아주 인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큰누님’ 한귀남 씨와 신문 전단짜리 인터뷰를 할 만큼 많은 얘기를 나눴으니. 하지만 이미 시인통신이 쇠락의 길을 걷던 3세대 때였다. 어쩌면 한귀남 씨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였을 것이다. 그리고 4세대, 꽤 자주 드나들었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은 거의 무너진 뒤였다. 난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내겐 기록할 만한 재산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쓸 만한 사진도 없다. 하지만 이 시대 사라져가는 것들의 ‘기록꾼’으로서 어떻게든 한 줄 적지 않을 수 없다. 역사책에 쓰여 지지 않을 시인통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고스란히 비춘 거울이고 골목 술꾼들의 고갱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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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통신은 그냥 허름한 술집이다? 선술집처럼 생긴 카페다? 목로주점이다? 술집보다는 문화사랑방이다? 모두 맞는 말 같은데 뭔가 부족하다. 시인통신은 장안의 ‘가난한’ 시인 소설가 화가 기자 노동운동가 연극인 정치지망생… 그보다 좀 나았을지도 모르는 출판인 사업가… 아, 숨이 찰 정도로 많은 그들을 어찌 헤아리랴. 아무튼, 그들이 모여 마시고 싸고 토론하고 떠들고 욕하고 울고 싸운 술집이요 카페요 목로주점이요 문화사랑방이다. 그래도 역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듯 어딘가 미흡하다. 그만큼 시인통신은 정의하기 쉽지 않은, 아니 굳이 정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는, 춥고 어둡던 시대의 숨은 아이콘이었다. 제1세대 시인통신의 주소는 서울 종로구 청진동 300번지였다. 지금으로 보면 엄청난 규모의 빌딩을 짓기 위해(훗날 무슨무슨 빌딩 자리라 불리겠지) 많은 집들이 쓰러지고 땅이 600년 속살을 드러낸 교보문고 옆 구역이다.(기준으로 삼을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지라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프다.) 아무튼 과거 피맛길이 시작되던 그 언저리다. 그곳에 있던 시절에는 두 평짜리 공간에 탁자가 달랑 두 개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구분하지 않고 엉덩이를 붙이면 여남은 명은 앉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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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크고 작은 게 뭐 그리 문제랴. 그곳에 드나들며 엉덩이를 붙이고 마음을 붙였던 사람들을 보면 만주벌판에 데려다놔도 그리 넓다고 하지 않을 사람들인데. 위에 예를 든 직업군(노동운동가나 정치지망생도 직업이라면) 외에도 평론가 영화감독 사진작가 작곡가 전위예술가 자유기고가 교사 겉멋 든 학생 등이 문지방 닳는 것 걱정 안하고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던 곳이 시인통신이다. 암울한 시대가 만들어낸 게 그곳일지도 모른다. 16년을 집권했던 독재자가 비명에 가더니, 제 어깨에 별을 척척 붙이면서 나타나 군사정권의 ‘찬란한’ 맥을 이은 한 무리의 군인들. ‘서울의 봄’이라는 이름의 김칫국부터 들이키던 정치인들은 입에 문 떡을 미처 삼키기도 전에 갇히거나 연금되거나 멀리 튀거나 땅굴이라도 파야했다. 여름이 와도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추운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의 숨통, 혹은 해방구가 바로 시인통신이었다. 추위를 못 견디던 이들은 그곳에 모여 울분을 토하고 허공에 대고 감자를 먹였다. 누구는 통곡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고, 누구는 담벼락에 오줌으로 욕을 써 갈겼다. 그러고도 못 다한 말들은 술집 벽에 적었다. 빈 공간이 없어질 때까지 낙서를 했다. 그 낙서는 천장까지 가득 채웠는데, 그 중에는 명문이나 명필도 많았다. 그도 그럴 만하지, 시인묵객들 솜씨 어디 갔으려고. 그런 시인통신도 처음부터 술집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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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김화성 기자는 <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라는 글에서 시인통신의 출생을 이렇게 적었다. 
“시인통신은 원래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시인 겸 소설가 조해인, 시인 김선유 이도윤 이생진 이승철 임문혁 최정자, 추리작가 정건섭, 소설가 김우영, 문학통신 이지룡, 화가 김문조 박광호 서영준, 사진작가 김종구, 자유기고가 공정희, 교사 안철상, 문학청년 노광래 박경남, 해냄출판사 송영석, 출판인 이정한, 사업가 김명성, 방송인 김경원 등이 그 멤버였다. 가끔 천상병 시인이나 걸레스님 중광 그리고 소설가 이호철 이외수, 전위예술가 무세중도 얼굴을 비쳤다. 이들은 1982년 종로통에 연락사무소 ‘시통’을 만들어놓고, 틈만 나면 하나둘 모여 세상사는 이야기나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다. 술이 생각나면 서로 주머니를 털어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다 마셨다. 안주는 인근 밥집에서 동그랑땡이나 생선구이 혹은 순대국을 시켜다 먹었다. 낮엔 누구든 커피 한두 잔 알아서 타 마시곤 바구니에 500원씩 넣으면 됐다. 그 돈은 시통 운영비로 썼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주인 역할을 했던 시인 박종수 씨가 그때그때 필요한 비용을 갹출해서 근근이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 달이지, 해가 넘어가자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박 씨는 두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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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시인통신, 인사동 시절의 한귀남 씨

‘결국 박 씨는 두 손을 들었다’는 대목이 나오면서, 드디어 ‘지하 문화계의 대모’ ‘문인들의 영원한 누님’이라 불리는 한귀남(1944년생)씨가 등장한다. 당시 한 씨는 아이가 셋이나 딸린 홀어미였다.
“나도 이런 삶을 살줄은 몰랐어요. 제품(의류사업)에 실패한 뒤 남편이 종적을 감추면서 졸지에 아이들 셋을 거느린 가장이 되었지. 참 막막하더군요. 어디 일할 곳이 없나 싶어서 종로의 먹자골목을 기웃거렸지요.”
네 식구 입에 풀칠할 목적으로 종로 뒷골목을 탐색하던 그녀는 민속찻집에서 차 끓이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시인통신에 우연히 들른 순간, 이미 제2의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탈출을 꿈꾸던 박종수 씨는 한 씨에게 운영을 맡아보라고 꼬드겼다. 고소원(固所願)일지언정 불감청(不敢請)이라고, 사실 그녀는 찬밥 더운밥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떡거린 순간, ‘한귀남의 시인통신’ 시대는 시작됐다. 하지만 장사는 아무나 하나. 그녀의 눈에 비친 시인통신은 아비규환의 세계였다. 총 대신 권력을 잡은 군인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가, 토론에 욕설에 싸우는 것도 마다않던 술꾼 중 일부는 술값 계산만큼은 천재적일만큼 잘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린 게 아니라 낼 수 없는 형편인 경우가 많았다. 오죽했으면 그녀는 수필집 ‘간 큰 남자’에서 그 시절을 “외상은 60년대식이었고 격한 분노는 80년대식이었다.”고 적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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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기자의 기록은 그 시절 한귀남 씨의 형편과 술꾼들의 행태를 그림처럼 전해준다.
“한 씨는 하루 3만~4만원 벌면 그 중 7000원은 옛 주인인 박 씨가 시통을 담보로 빌려 쓴 일숫돈을 갚아야 했다. 거기서 남은 돈 중 1000원으로 쌀을 사다가 먹고 살았다. 굶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고마웠다. 바쁠 땐 자리를 비워도 별 문제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돈을 놓고 가거나, 외상 땐 벽에다가 ‘아무개 맥주 몇 병 먹고 간다’고 써놓고 갔다. 그게 외상 장부인 셈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외상값을 갚고 나선, 그 벽 낙서를 쓱쓱 지워버렸다.(중략) 한 씨가 시통을 맡은 이듬해인 85년부터 손님들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초기 터줏대감들이 하나둘 이런 저런 사정으로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대신 화가 서영준과 시인 김홍성 을 필두로 서라벌예대 출신의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술버릇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당시는 소위 ‘심야영업금지’라고 해서 12시 이후에는 영업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통식구들은 그런 것에 구애받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먹고 떠들고 춤추고 싸우다가 결국 한귀남 씨가 새벽에 종로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다.
(下편에 계속)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전문기자의 <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에서 일부 인용․참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진은 간판을 내리기 직전, 4세대 시인통신의 외관과 내부 모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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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0. 08:5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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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차 기억하시지요?
소독차라고도 부르고 방구차, 모기차… 그러고 보니 이름도 참 많았네요.
여름해가 서산에 걸리고 저녁 땅거미가 슬금슬금 골목으로 스며들 무렵, 방역차가 나타납니다.
아, 방역차보다는 소리가 먼저 달려오지요.
부릉 부릉이나 부웅 부웅~이 아니고 방․방․방 바아앙~ 에 가까운 그 요란한 소리.
그 소리 뒤에는 뭉게구름처럼 쏟아지는 연무와 특유의 냄새 -석유? 소독약? 그 무엇도 아닌- 가 뒤를 따라오지요.
멀리서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아이들의 귀가 쫑긋 세워지고 지금까지 하던 모든 동작을 멈추게 됩니다.
골목에서 놀던 아이도,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다녀오던 아이도,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아이도 미친 듯이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그저 달리고 봅니다.
이른 저녁을 먹던 아이도 수저를 내동댕이치고 뛰쳐나갑니다.
어른들이 고래고래 소리 질러 봐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연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차를 따라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지요.
손을 마구 휘저으며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꽥꽥 지르기는 아이도 있습니다.
차 꽁무니에서 내뿜은 흰색 연무가 순식간에 아이들과 동네를 지워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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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방역이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니 그 이후 성장한 사람들은 방역차에 대한 추억을 어딘가에 조금씩 숨겨놓고 있을 겁니다.
주위 몇 사람에게 넌지시 화두처럼 던졌더니 별별 사연이 쏟아져 나옵니다.
누구는 연무 속을 달리다가 전봇대에 부딪혀 별을 몇 개 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에 누워 있더라나요.
누구는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와 부딪혀서 물건 값을 몽땅 물어주기도 했고요.
또 누구는 정신없이 달리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날은 어두워져서 울면서 돌아왔다지요.
다른 동네까지 따라가는 바람에 아예 길을 잃었던 한 중년 사내는 방역차 말만 꺼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군요.
그런데, 어느 집 엄마는 방역차 소리만 나면 아이들을 일부러 내보내기도 했답니다.
소독약으로 전신을 흠뻑 적시면 이도 없어지고, 실컷 들이마시면 뱃속의 회충까지 전멸시킬 수 있다나요.
참 어처구니없는 믿음이었지요.
그렇게 골목마다 방역을 한 이유는 모기나 파리를 잡기 위해서인데요.
경유나 석유에 살충제를 섞어 방역기로 가열하면, 점화되면서 연기모양으로 쏟아져나가는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방역차의 소독효과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랍니다.
방역에 쓰이는 살충제는 농도를 무척 옅게 하기 때문에(짙게 하면 여럿 잡겠지요) 모기가 맞아도 잠시 기절하거나 행동이 둔하게 되는데 그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옷 속의 이나 뱃속의 회충까지 잡는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구충제를 사는 것조차 쉽지 않아 학교에서 나눠주던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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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아이들은 방역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걸 왜 그리 좋아했을까요?
멀리서 바앙~ 바앙~ 하는 소리만 들려도 왜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졌을까요.
냄새가 좋아서? 그 냄새를 아련한 기억 속에 ‘향기’ 쯤으로 간직한 사람도 제법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좋을 리는 없습니다.
차라리 역하다는 표현이 더 가깝겠지요.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좀 엉터리 같지만 저는 환상이나 익명성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짙은 안개 속으로, 아니 구름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해주거든요.
밤도 아닌데 앞이 캄캄하고,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쳐도 누군지 구별도 안 되고.
그렇지요.
세상의 눈에서 자신을 잠시 숨길 수 있는…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마련인 익명의 바다에 잠시 풍덩 빠질 수 있는….
옆에서 달리고 있는 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그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해방감.
쓸데없이 심각한 해석 붙일 필요 없다고요?
그 시절엔 별로 놀고 즐길 거리가 없어서 신기한 마음에 따라다닌 가지고 별 시답잖은 소릴 늘어놓는다는 말씀이지요?
뭐, 그것도 옳은 말씀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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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성장과정을 함께했던 방역차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영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대단위아파트촌은 자체 방역을 하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기회는 우연히 왔습니다.
남녘 땅 어느 자그마한 동네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떠나려는 순간 느닷없이 방역차와 만난 것입니다.
차 백미러로 뭉글뭉글한 연무덩어리가 들어오는 순간, 생각이고 뭐고 할 틈 없이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집어 들었지요.
아, 방역차!
차도 세련되게 바뀌고 소리도 달라졌지만, 꽁무니에서 짙은 연기를 뿜어내는 건 똑같았습니다.
연무가 구멍가게와 미장원과 기름집의 간판을 쓱쓱 지워버렸습니다.
금세 추억 속으로 달려 들어갈 수 있었지요.
헌데, 다른 건 똑같은데 결정적인 게 하나 달라졌더라고요.
시골이라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지, 모두 학원에 갔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소리를 지르며 꽁무니를 따라가는 꼬마들은 없었습니다.
하릴 없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배회하던 조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페달을 힘차게 밟아 연무 속으로 뛰어드는 게 전부였습니다.
한 여자아이는 용기가 없었는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고요.
연무 속으로 사라진 아이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눈에 고여 있어서 그랬던지, 석양을 머리에 인 마을 풍경이 갑자기 쓸쓸하게 다가왔습니다.
혼자 방역차를 쫓아간 그 아이도 익명의 해방감을 누리고 있을까?
방역차도 아이도 사라진 골목은 적막 속으로 깊게 가라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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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23. 08:57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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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을 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응칠아저씨가 둘도 없는 뻥쟁이라는 건 석 달 된 강아지까지 다 알고 있었거든요.
더구나 내용도 얼마나 구질구질 한지, 모두 밥 먹던 중에 입에 파리라도 들어간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요.
아저씨 말에 의하면, 제주도에 가면 돼지가 사람 똥을 먹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특히 남자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강조하는 거 있지요.
돼지란 놈이 떨어진 똥을 얌전히 주워 먹는 게 아니라, 학교 운동회 때 줄에 매달린 과자 따먹듯 점프를 해서 받아먹는다는 거지요.
문제는 돼지란 놈의 시력이 별로였는지, 남자의 거시기가 떨어지는 똥인 줄 알고 덥석 물어버린답니다.
그래서 거시기를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도 제법 된다고, 직접 본 것처럼 늘어놓는 겁니다.
그곳 사람들은 뒷간에 갈 때 돼지를 쫓을 수 있는 작대기를 필수적으로 지참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고요.
여자들도 안전한 건 아니랍니다.
섬사람들이야 작대기라도 들고 가지만, 뭍에서 구경 간 사람들은 뒷간에 돼지가 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하겠지요.
볼 일을 보다 갑자기 나타나 꿀꿀거리는 시커먼 놈 때문에 아예 정신 줄 놓은 여자도 한 둘이 아니라고 또 입에 침을 튀기더라고요.
지도책에서나 제주도를 본 아이들이야, 그런 험한 곳에 갈 일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냔 듯 한숨까지 포옥 쉬었지만, 사실 대부분 아이들은 그저 뻥 치는 거 하나 또 들었으려니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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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신기하지요.
훗날 들어 보니, 그 거짓말 같던 얘기가 상당 부분 사실이더라고요.
제주도에서는 뒷간을 통새 또는 통시라고 부른다지요?
그 통시는 돼지막인 돗통과 사람의 공간인 뒷간으로 구성됩니다.
돗통은 돼지의 공간만큼 돌로 담장을 두르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뒷간은 다른 쪽의 약간 높은 곳에 디딤돌 두 개를 놓고 사람이 앉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담장을 두릅니다.
비 가릴 지붕? 돼지에게는 있지만 사람은 없습니다.
비오는 날은 작대기 들고 우산 쓰고 가서 담배까지 한 대 피워 물려니 절차가 제법 복잡했겠지요.
그런 마당에 문짝인들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문짝도 없이 대충 만드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지요?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 볼일 보면서도 늘 경계를 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후다닥 도망치기 위해서 그랬답니다.
또 볼일을 볼 땐 자주 헛기침을 해야 된답니다.
그래야 지나가던 사람이 적당히 외면해준다나요.
통시의 바닥은 마당보다 낮게 만들어 오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와 같은 통시는 반드시 안거리 정지(부엌)와 반대쪽 큰 구들의 황벽 옆 또는 멀리 떨어진 밖거리 옆 울담에 덧붙여 만들었답니다.
제주도의 ‘남선비 설화’에 의하면 조황신과 측간신은 처첩 사이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부엌과  통시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믿었기 때문이라지요.
제주에서는 가장 무서운 동티를 측간 동티라 부르고, 측간의 돌멩이 하나라도 함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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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통시라고 해서 돼지를 똥만으로 키우는 것은 아닙니다.
돗통 한쪽에 먹이통을 놓아두고 거기에 음식물 찌꺼기 같은 걸 넣어주었습니다.
사실은 그게 주식인 셈이지요.
하지만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오로지 사람의 배설물로만 키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돼지란 녀석은 시력은 좀 떨어져도 후각과 청각은 무척 발달한 모양입니다.
오밤중에 조용히 볼 일을 보려고 살금살금 통시에 가도 어느 틈엔가 먹을 게 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재빨리 달려 나온답니다.
그리고 제법 깔끔을 떨어서 몸에 오물이 묻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지요.
그래서 뭔가 묻은 느낌이 들면 정신없이 털어댑니다.
여기서 또 낭패를 보는 사람이 허다하게 등장하지요.
큰일을 보는 중에 배설물이 돼지 입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몸에 떨어지면 인정사정없이 털어대는 겁니다.
그때 흘러가는 구름이나 감상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오물을 뒤집어쓰지 않으려면 괴춤이고 뭐고 챙길 새 없이 후다닥 도망치는 게 장땡입니다.
통시 바닥에는 보리 짚이나 볏짚을 깔아줍니다.
돼지는 먹거나 잠잘 때를 빼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분뇨를 배설하고 짚을 다집니다.
그렇게 돼지분뇨와 적당히 섞인 짚이 쌓이고 발효해서 질 좋은 거름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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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긴 세월 자리 잡고 살던 재래돼지는 오래 전 만주지역에서 소형종이 들어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들이 제주도까지 유입돼 토착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도에는 뱀이 많았는데, 뱀을 잡아먹는 돼지의 특성을 활용하기 위해서 집집마다 길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주도의 토종돼지는 검은 색 털로 완전히 덮여있으며 얼굴이 좁고 주둥이가 길다고 합니다.
또 몸집이 작고 엉덩이와 배 부분이 좁지만 가슴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입니다.
다리는 짧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종의 돼지보다 육질과 맛이 좋다는 것이고요.
보통 한꺼번에 5~8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새끼는 개량종들보다 성장이 느린 편입니다.
체질이 강건해서 전염병 등에 강하며 환경변화에도 잘 적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번식력이 좋고 덩치가 큰 외국 개량종들이 대량 유입 되고, 또 토종돼지와 교잡되는 바람에 순수 혈통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지금은 제주도에도 순수한 토종 돼지는 없다고 합니다.
단지 그 혈통이 섞여있는 흑돼지가 남아 있을 뿐이지요.
물론 이 흑돼지들도 똥을 먹이는 게 아니라 보통 돼지처럼 사료를 줘 사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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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돼지가 제주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뭍에도 인분을 돼지먹이로 삼은 곳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지리산 깊은 산골에서는 최근까지도 똥돼지를 키웠다고 하지요.
하지만 노인들만 사는 그 골짜기에 돼지 먹을 인분인들 제대로 생산되려고요.
게다가 그런 식으로 돼지를 기를만한 뒷간이 어디 남아있나요.
제주도에서도 민속마을이나 가야 똥돼지의 잔재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느닷없이 거시기를 물리는 남자나 오밤중에 놀라자빠지는 여자를 볼 일은 없어진 셈이지요.
도시에서 가끔 길을 걷다보면 ‘제주도 똥돼지’라고 버젓이 달아놓은 간판을 봅니다.
‘제주 직송’이란 선전문구도 빠지지 않고요.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야말로 과장광고일 뿐이지요.
하긴 찾아가 먹는 사람이라고 진짜 똥돼지인 줄 알고 먹겠습니까?
어느덧 전설이 되어버린 똥돼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옛날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던 응칠아저씨가 그리워지네요.
그 양반도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나셨지요.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가보지도 않은 제주도 이야기 한 자락 깔아놓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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