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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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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5. 10:25 사라져가는 것들

헛헛한 마음으로 내성천 강변길을 오른다. 알게 모르게 강은 원래의 형태를 잃어 가는 중이었다. 하류 쪽의 모래를 얼마나 퍼냈는지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의 교각은 뿌리까지 드러낸 흉한 모습이다. 금강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댐에 물이 차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저 강은 자신이 물에게 길을 열어주는 통로가 아니라 물을 가두는 감옥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경북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의 내매라는 작은 마을이다. 영주시에 속해 있지만 봉화에서 2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그곳에 105년 역사를 지닌 내매교회가 있다. 물론 곧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는 곳이다. 이 골짜기에 100년도 더 된 교회가 있다니. 좁은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빨간 벽돌의 아담한 교회 건물이 빨려들 듯 눈에 들어온다. 높은 종탑과 작은 부속건물이 둘, 비교적 단출하다. 큰 마을도 아니고 아무리 둘러봐도 그 옛날 교회가 터를 잡을만한 곳은 아니다. 일요일, 예배시간이라 교회 주변은 고요하다. 교회 옆집의 개만 요란하게 제 본분을 다한다. 그렇다고 내다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단 아래 백목련이 막 봉우리를 터트리려다가 낯선 기척에 주춤한다. 짓던 개마저 허무한 짓임을 깨달은 뒤 세상은 고요 속으로 누워버린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교회를 돌아보기로 한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비가 먼저 눈길을 잡는다. 창립 100년을 맞던 2006년에 세워졌다고 쓰여 있다. 내매교회를 그렇고 그런 시골교회 중 하나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긴 세월 쌓인 사연도 첩첩이고 배출한 인재도 많다. 설립자는 강재원이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교회를 세우기 전 대구에 나가 살았는데, 그곳 약령시에서 미국선교사 배위량의 전도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대구지역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다니다가 1906(고종 43) 내매마을로 돌아왔다. 고향에 오자마자 그는 유병두라는 사람의 사랑방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자신의 집에 십자가를 달고 예배처소를 만들어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 내매교회의 시작이었다. 경북북부에서 설립된 최조의 교회였다. 초기에 부흥사 길선주, 김익두 목사 등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여는 것은 물론 개화운동과 신농법 교육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내매교회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건 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목회자로는 영락교회를 공동설립하고 새문안교회에서 24년간 목회활동을 한 강신명 목사, 계명대학교를 설립한 강인구 목사, 창신대학교 강병도 학장 등이 이 교회 출신이다. 또 강진구 삼성반도체 회장, 강신주 삼성전자 사장 등 기업인 10여명도 배출했다.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교회의 자취를 훑고 있는데 찬송가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열 명 남짓? 나중에 물어보니 전부 스무 명이 좀 넘는다고 한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던 아주머니 한분이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왠지 기다렸다는 것 같은 표정이라 잠시 의아해진다.
오늘 오시기로 한 분이지요?”
? 아뇨. 목사님을 좀 뵈러사전 약속은 안했는데요?”
누군가 나하고 비슷한 목적으로 인터뷰 예약을 했던 모양인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메고 서성거리니 당연히 오기로 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를 맞이한 사람은 목사 사모였다.

사모가 안내한 곳은 교회 왼편에 있는 자그마한 부속건물이다.
여기가 바로 내명학교에요.”
내명학교? 교회에 학교가 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예습을 덜 하고 온 탓이다. 사모의 설명이 이어진다. 사립내명학교는 내매교회 강병주, 강석진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설립한 학교다.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최초의 기독 사립학교였고 순흥학교와 풍기학교에 이어 영주에서 세 번 째 초등학교였다. 개화기의 신문화 도입과 문맹퇴치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일제 때 궁성요배를 거부하다 박해를 받는 등 항일운동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수몰예정지를 찾았다가 우연하게 유서 깊은 문화재급 초등학교를 만난 셈이다. 단층으로 된 건물뼈대는 그 때 그대로지만 지붕이나 외장은 세월 따라 대부분 바뀌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자그마한 공간이다. 교실이었다는 곳은 방으로 쓰고 있지만 과거의 체취가 제법 남아있다. 100년 전에 이곳에서 공부했을 학동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났을 그분들은 자신들이 글을 깨우치고 꿈을 키우던 이 곳이 물에 잠길 거라는 사실을 알까.

교실이었던 곳을 둘러보는데 신도들과 인사를 마친 목사가 들어온다. 올해 68세의 함오호 목사다. 다짜고짜 어쩌다 이 궁벽한 곳까지 와서 목회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한다. 교회와 학교의 역사와 배출한 인물들을 소개하던 그에게 수몰과 관련된 질문을 하자 담아뒀던 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이렇게 유서 깊은 교회가 물에 잠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나요. 수몰 자체를 막을 힘은 없다고 해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보전할 방법이라도 찾아야지요. 우선 문화유산으로 지정돼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전국 각지에 있는 내매교회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와 학교를 이전복원해서 기독교 역사의 교육장과 박물관으로 활용하자는 운동을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함 목사는 청와대와 문화관광자원부 등 각계에 근현대사 유산 영구보존 청원서를 보내고 있다.
많은 기관에서 긍정적인 회신이 오고 있습니다. 다행이지요. 수몰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를 소망해본다. 105년의 역사를 몽땅 수장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는 없는 것이니.

학교에서 나와 예배당으로 들어가 본다
. 교인들이 떠난 예배당은 고요에 잠겨 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두 손을 모아 집주인에게 인사를 한다. 이 교회를 스쳐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도 교감을 나눈다. 2000년 전쯤 한 성인이 겪은 고난으로도 세상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목사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강가로 돌아오는 길,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저 작은 교회가 물에 잠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겁다. 물속에 잠겨서도 종소리 울려 퍼지고 찬송가소리 들려올까. 다시 내성천을 따라 곳곳을 훑어본다. 오래 전에 지어진 평은역도, 수백 수천 년 사바세계를 지켰을 돌부처도, 세월을 이고 진 고가들도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데 무심한 봄꽃들만 아우성으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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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13. 16:02 사라져가는 것들

소백산맥의 남쪽 기슭, 경북 봉화군에서 시작해서 영주안동·문경과 예천을 거친 뒤 용궁(龍宮) 남쪽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길이 106.29km의 강. 내성천(乃城川)에 대한 사전적 설명이다. 용궁이란 단어가 잠시 시선을 끌지만, 지명이란 게 조금씩 과장되기 마련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 뜻 정도는 금세 잊어도 좋다. 내성천의 진가를 아는 이들에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한마디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섬(물 위의 섬이란 뜻)마을이라 불리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바라보는 강은 넓은 모래밭, 외나무다리와 어울려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내성천은 뱀 모양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산을 만나면 산을 감싸 돌고 들판을 만나면 들판을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흐른다. 우당탕탕! 급하게 달려가는 기세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래서인지 강을 따라가다 보면 어디가 상류고 어디가 하류인지 자주 헷갈리게 된다. 물 흐름을 한참 들여다봐야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내성천을 무엇보다 내성천답게 만드는 건 풍성한 금빛 모래다. 강가에 앉아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래알들이 사르르 사르르 흘러내려가는 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내성천을 모래강이라 부른다. 물과 함께 금빛 모래가 흐르는 강.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큰 축복이다.

 
그 아름다운 강을 막는단다. 이름 하여 영주댐. 완성되면 영주시 평은면과 이산면 일부를 물속에 가둔다는 댐 공사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다. 소위, 4대강 사업의 일환이라고 한다. 전기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라는데, 대체 그 골짜기에 왜 댐이 필요할까? 여기저기 알아봐도 시원한 대답은 없다. 다목적댐이란다. 용수확보, 홍수방어, 수질개선, 관광자원 확보 등 목적은 줄줄이 많은데 딱히 고개가 끄떡거려지지 않는다. 영주가 물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내성천이 홍수로 자주 범람한다는 기록을 본적도 없다. 수질개선이야말로 서천 쇠가 웃을 말이다. 그대로 떠먹어도 좋을 만큼 그 맑은 물을 개선한다니. 그렇다면 관광자원? 지금 그대로가 천혜의 자원이다. 댐을 막는 대신 세계자연문화유산 지정운동이라도 하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금모래가 흐르는 길을 막으려고 하는 것일까. 모래도 모래지만 더 걱정되는 건 물속에 고스란히 잠길 유구한 역사와 문화다. 강을 중심으로 생겨난 마을마다 수백, 수천 년을 머금은 유물이 지천이다. 물에 잠기기 전에 어딘가 옮겨놓기야 하겠지만, 태자리를 떠난 순간 박제로 전락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유서 깊은 안동 장씨의 집성촌, 금강마을은 통째로 잠긴다고 한다. 어찌 사람의 흔적뿐이랴. 강가를 지켜온 왕버들, 강둑을 집 삼아 살던 수달, 자유롭게 헤엄치던 물고기들. 그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까?

 

멀리서 보는 금강마을은 물속 마을처럼 고요했다
. 행정지명으로는 경북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지만, 보통 금강(錦江)마을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비단 같은 강이 흐르는 마을이다. 물이 휘돌아 섬처럼 생긴 곳이라 제법 긴 다리를 건너야 마을로 들어설 수 있다. 오랜 전통을 자랑이라도 하듯 맨 먼저 운곡서원(雲谷書院)유허비가 객을 맞이한다. 낮은 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제법 너른 들판, 전체적으로 안온하면서도 만물을 품에 싸안는 느낌의 지형이다. ‘전통의 얼 금강마을이란 이름의 마을유래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조선 선조(宣祖)때 장여화(張汝華) 선조께서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있는 노승을 구제한 일이 있는데 훗날 그 노승이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마을의 터를흔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선조 재위기간이 1552~1608년이니 언뜻 계산해 봐도 터를 잡은 지 400년이 넘는다. 마을 안쪽도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농사철이니 두엄 내는 경운기소리라도 들려야 할 텐데 그 흔한 강아지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곳곳에 빈집도 눈에 띈다. 마을길을 올라가다 고색창연한 집을 한 채 만난다. 안내판에 장씨 고택이라 쓰여 있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이 집은 조선후기 민가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형 기와집으로. 
집의 뼈대는 멀쩡해 보이지만 곳곳에 퇴락한 흔적이 역력하다
. 생기를 띤 것이라고는 아우성치며 솟아오르는 잡초뿐이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중문 안쪽 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라디오 같기도 하고 TV소리 같기도 하다. 빈집이 아니었구나. 대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주인을 불러본다. 한참 뒤에 방문이 열리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분이 나온다. 걸음이 불편해 보인다. 인사를 하니 경계의 기색도 없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여기서 혼자 사세요?”
이리와 앉아요
자제분들은 도시로 나가고요?”
그렇지요
이 큰집을 혼자 지키시려면 적적하지 않으세요?”
별 수 있나요. 죽을 때까지 지키다 가는 거지
수몰된다고 이사 가라고 안 해요?”
한참 시끄럽더니 요샌 조용하네. 금방 가라고야 하겠어요? 물이 차려면 한참 걸릴 텐데.”
그래도 어디로 갈지 준비는 하셔야 할 텐데
가기는 어디로 가요. 사는 대로 살다가 갈 데 없으면 저승길로 가야지.”

노인과의 대화는 한참동안 이어진다
. 올해로 여든 셋, 수도리 무섬마을에서 스무 살에 시집 와 63년을 살았다고 한다. 시집오기 전에는 일본에서 공부도 했다. 공직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 대처에 나가 살기도 했지만 남편의 은퇴 뒤에는 금강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자식들은 영주와 서울로 나가 살고 있다. 이 참에 자식들과 함께 사시는 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고 만다. 허리와 다리가 좋지 못해서 오래 걸을 땐 보조기를 사용한다. 그래서 집 앞의 텃밭도 손을 못 댄다고 살포시 한숨짓는다. 댐이 완성되고 물이 차오르면 노인은 갈 곳이 없다. 다른 이들은 보상을 받아서 영주니 어디니 간다고 하지만 금강마을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살 만큼 살다가 가면되지가 입에 붙었다. 자신의 삶터에서 남은 생을 마치겠다는 욕심밖에 없는 이 노인을 밀어내는 게 대체 누군지. 노인은 모처럼 찾아온 젊은 손이 반가운 모양이다. 인터뷰는 곁다리고 말벗을 하다가 예정된 시간을 한참 넘기고 만다. “점심이라도 해야 할 텐데걱정하지만 차려낼 만큼 변변한 밥상이 없음을 섭섭해 하는 눈치다. 되레 미안해진 객이 얼른 일어서는 수밖에.

바깥마당까지 따라 나온 노인의 길고도 긴 전송을 뒤로 하고 마을길을 걷다 다시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 인사도 차리기 전에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아들이라도 보듯 반갑게 맞는다.
이사 가라니 섭섭하시지요?”
왜 안 그려. 열 몇 살에 시집와서 70년을 산 동넨데.
어디 가서 사실 건데요?”
저 건너 어디로 가라는데.”
저 건너가 어디쯤 될까. 어디까지 물이 차오르고 어디부터 새 동네가 될까. 노인의 손끝을 따라가는 나그네의 눈길도 허허롭다. 마침 바깥노인이 나오기에 인사를 했더니 웃음으로 답한다.
그래도 올해 농사는 지으실 거죠?”
노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떡인다. 이분들의 미래가 보상 받은 돈 아들딸에게 나눠주고 도시 언저리를 전전하는 잉여인간의 모습이 아니기를.
길을 재촉해 낮은 산등성이를 오른다. 다 오르고 보니 마을 바로 너머가 댐 공사현장이다. !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굴삭기가 연신 강바닥을 파고 덤프트럭이 부지런히 오간다. 잘려진 산과 파헤쳐진 강이 무참하게 널브러져 있다. ‘건설이라는 이름의 파괴현장에서 나그네의 발걸음은 얼어붙고 만다.

언덕 위에는 제법 세월을 머금은 과일나무들이 꽃눈을 틔우고 있다. 올 봄, 주인은 가지치기를 건너 뛴 모양이다. 밭가의 굵은 산수유도 노란 꽃을 지천으로 내뱉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미륵당에 들러보지만 미륵은 어디로 떠나고 금줄만 빈집을 지키고 있다. 미리 옮겨둔 것일 게다. 미륵이 이사를 가야하는 세상에도 미래불은 오는 걸까? 오후 햇살이 자리를 편 무덤 앞에서 할미꽃을 만난다. 조금 전에 만났던 할머니들을 꼭 닮았다. 무덤 앞에는 비석 대신 이장공고팻말이 붙어있다. 물속에서는 할미꽃들도 꽃을 피워내지 못하겠지. 구제역이 다녀간 우사(牛舍)에는 소들의 울음소리가 간데없다. 저곳에 송아지들이 다시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의관댁, 만연헌, 장석우 가옥, 까치구멍집. 마을 전체가 유적이고 문화재다. 누가 이런 마을을 물속에 수장시킬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다른 곳에 옮기면 되지라고 쉽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문화유산이 아니다. 배어있는 숨결이나 혼은 날아가고 껍데기만 남은 건축물일 뿐이다. 돌아오는 길, 다리를 건너 차를 세우고 다시 마을을 한번 바라본다. 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마을은 봄 햇살 속에 푹 잠겨 있다. 햇빛을 머금은 금모래들이 반짝, 손을 흔든다.

 

posted by sagang
2011. 3. 30. 19:20 사라져가는 것들



혼자 나왔는가?”
, 혼자 왔네. 자네는?”
마누라랑 같이 왔네. 병원에 데려다 주고난 그냥 구경이나 허다 갈라구.”
술 한 잔 할 텐가?”
이 시간에 벌써?”
아따, 원제 시간 봐감서 술 먹었남. 가세!!”
가세, 소리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의 호령처럼 힘차다. 장터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두 노인은, 안부 인사조차 중동무이하고 어깨동무 하듯 서로를 당겨 선술집골목으로 사라진다. 장을 보러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헷갈리지만, 새삼 따져 무엇 하랴. 술보다는 정이 더 고팠던 거겠지. 어차피 공치기로 한 하루, 얼큰하게 한 잔 마시고 장 구경 실컷 한 다음 고등어 한 손 들고 가면 그만일 터. 5일장은 시골노인들의 사교장이다. 농사에 휘어진 뼈골을 잠시라도 펴보는 날이다. 장에나 가야 이웃 마을 친구도 만나고 재 너머 사돈도 만난다. 그래서 특별히 사고 팔 게 없어도 장날이면 엉덩이가 들썩거리게 마련이다. 그렇게라도 숨을 돌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너른 장터는 노인 일색이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노인이다. 가끔 젊은 사람이 지나가면 이방인이라도 보는 듯 낯설다. 논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젊은이가 장터라고 흔전만전 넘쳐나랴.

 
바깥노인들만 장에 오는 건 아니다. 한쪽엔 안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보따리 대신 얘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 글쎄. 40평짜리 아파트를 샀어. 이번에
잘혔네. 잘혔어. 종숙이 걘 잘 살 줄 알었어. 보통 바지런해야지. 딸 잘 두면 뱅기 탄단 말두 있잖여
에이, 뭐 뱅기까지야. 암튼, 새 아파트도 가볼 겸 혀서
말은 땅바닥만치 낮지만 얼굴은 자랑의 기색으로 하늘에 떠 있다. 정담만 오가는 건 아니다. 한쪽에서는 좀 젊은 아낙이 서툰 흥정을 붙여본다.
아니, 그새 이만큼이나 올랐어요?”
어딜 댕겨왔길래 소식이 이렇게 캄캄허댜? 채소값이 금값 됐단 말 못 들어봤어? 지난 장끔 생각하면 안되어
그래도조금만 깎아주세요
아이구, 남는 게 있어야 깎아 먹든지 벗겨 먹든지 허지. . 내 이만큼 더 줄게
젊은 아낙이 40년 장꾼을 어찌 당하랴. 봄이 더디게 오는 길목, 시골장은 일찌감치 무르익어간다. 여기저기서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 지각한 장꾼들의 전 펴는 소리. 배추장수 할머니는 여전히 연탄화덕을 끼고 있지만 봄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충남 홍성의 홍성장은 큰 장이다
. 농산물장이자 어물장으로 충남 서부지역 오일장의 어른 노릇을 해왔다. 바다와 기름진 들을 동시에 끼고 있어서 물산이 풍부한 덕이다. 하지만 장터 풍경은 여느 오일장과 다르지 않다. 터줏대감들이야 운동장만한 점포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펼쳐놓고 손님을 끌어 모으지만, 갯벌에 나가 캔 바지락이나 푸성귀 조금 들고 나온 장꾼들은 신문지만한 공간에 앉아 시간이나 접을 뿐이다. 어물전 한 귀퉁이는 어촌에서 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았다. 고무함지에 생선 너 댓 마리 담아온 노인도 있고, 껍질 째 가져온 굴을 까는 노인도 있다. 손길은 분주하지만 표정은 동구 밖 장승이라도 닮은 듯 무심하다. 농촌에서 온 이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시금치, 양파, 감자, 시루 째 들고 나온 콩나물. 메주를 몇 덩이 들고 온 노인도 있고 집에서 먹던 된장을 퍼 와 해바라기 하는 노인도 있다. 손자가 군것질거리를 사달라고 졸랐는지도 모른다. 늘 그 모습인 것 같아도 장은 계절마다 조금씩 표정을 바꾼다. 봄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는 이 계절은 장터에도 봄기운이 완연해진다. 조막만한 함지박마다 담겨 나온 달래와 냉이가 전령 역할을 한다. 어쩌면 봄은 시골장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쇠전 열리나요?”
무슨 전요?”
쇠전, 쇠전!! 우시장요
, 우시장! 그거 안 열린지 꽤 됐어요. 구제역 때문에.”
말린 생선 두어 마리를 사면서 주인에게 쇠전이 열리냐고 물었지만,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비교적 젊은 댁이라 그런지 쇠전이란 단어를 낯설어한다. 기실 홍성장이 이름을 떨치게 된 데는 쇠전의 역할이 컸다. 국내 최대 축산단지가 바로 홍성이다. 축산단지가 아니더라도 예로부터 너른 내포평야에서 키운 소들이 모여드는 게 홍성장이었다. 하지만 전국에서도 손꼽힌다는 홍성 쇠전도 역병만큼이나 무서웠던 구제역에는 두 손 다 들 고 만 것이다. 물론 머지않아 다시 열리기야 하겠지만 농민들이 겪었을 아픔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쇠전이야 그렇다고 하고, 모처럼 나선 장 구경이나 계속 하기로 한다. 커다란 무쇠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집 앞에서 저절로 걸음이 멈춰진다. 어릴 적에는 저 국밥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나 어머니는 늘 그 소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먹지 못한 국밥은 내 상상 속에서 이 세상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찐빵집 앞도 그냥 지나지 못한다. 소담지게 쌓여있는 하얀 찐빵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배고프던 시절엔 그 앞에 서 있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그리고 그 고통을 얼마나 자주 찾아다녔던지. 광밥이라 부르던 튀밥 집 앞을 지나고 옹기점도 지나고 여전히 메질 소리 땅, , ! 울려 퍼지는 대장간도 흘깃거린다. 슬쩍 들여다본 대장간은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문에는 기능보유자 21-2라는 자랑스러운 인증패가 붙어있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데 유난히 눈길을 잡아당기는 곳이 있다. 국밥집보다도 더 푸짐하게 김을 피워 올리는대체 뭐가 저리. 가까이 가보니 팥죽이다. 아 팥죽집이 아직도 있구나. 새알심이 듬뿍 든 팥죽도 허기를 부추기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보니 장구경은 어느덧 먹고 싶었던 것을 찾아 떠난 여행이 돼버렸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가끔 장터거리를 배회하고는 했다. 학교와 장터는 지척이었다. 점심시간에 학급비품을 사러간다고 교문을 나서서 장터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땐 떠돌이약장수나 땜장이에 온갖 신기한 물건을 갖고 다니는 장돌뱅이들이 많았다. 어느 땐 그들을 구경하느라 점심시간이 끝나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장돌뱅이가 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이 떠나간 시골장은 어딘가 비어 있는 듯 허전하다. 왕년의 유행어 마냥 앙꼬 없는 찐빵이 되었다.

 

장터를 빠져나올 무렵 모녀의 실랑이를 본다.
됐다니께 그런다
그러지 말고 가져가시라니께유
딸로 보이는 중년의 아낙은 이것저것을 자꾸 싸 주고, 어머니로 보이는 허리 굽은 노인은 사양하기에 바쁘다. 혼자 사는 어머니가 모처럼 시집간 딸이 장사하는 곳에 들른 모양이다. 애틋한 마음에 딸은 이것저것 싸 보내려 하고, 딸이 한 푼 어치라도 더 팔기를 바라는 어머니는 자꾸 뿌리치는 것이다. 주책없이 시선을 뺏긴 나그네 마음까지 짠해진다. 장터머리를 나서기 전에 가장 연세가 많아 보이는 노인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달래 조금, 냉이 조금, 미나리, 시금치, 무 몇 개. 노인 앞에 놓인 상품 목록이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맞게 달려드는데 무릎 덮을 담요 한 장 없다.
할머니, 이 냉이 온상에서 나온 거지요?”
무슨 소리대유. 내가 어제 들에 나가서 하루 죙일 캔 거구먼
노인은 도시물이나 먹었음직한 자식뻘 사내의 대책 없는 막말이 영 섭섭한 모양이다. 얼마 받으실 건데요?”
이천 원만 줘요
고개를 끄떡거리기도 전에 까만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봄의 전령들을 담는다. 2천원이라그렇다면 오늘 가져온 걸 전부 합쳐도 대체. 5일장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 정이 먼저 흐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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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24. 08:3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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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던 동네에서는 서당을 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허가를 받아야하는 것도 아니니 서당이라는 이름에 인색할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그리 부른 걸 모면 대충 짐작이 가시지요?
이제야 말이지만, 사실 글방이란 이름조차 조금 과분한 형편이었습니다.
남의 집 사랑방에 아이들 서넛 불러놓고 반은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에 반만 공부라고 했으니 이름에 매달릴 처지는 아니었지요.
그래도 훈장과 학동이 있었으니 서당의 요건을 갖춘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분, 윤 주사라고 부르던 훈장님도(사실, 그가 주사가 된 건 글줄깨나 읽을 줄 안다고 누가 장난삼아 부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훈장이라는 호칭이 썩 어울리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전쟁 뒤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뜨내기나 다름없는 이였습니다.
그의 직업은 근동 최고의 부자라고 소문난 장 부자네 집 집사였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왔는데, 장 부자가 두 말없이 들어앉혔다고 하지요.
집사라는 이름으로 그가 하는 일은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외모도 깎아놓은 밤톨 같고 언변도 참기름에 밥 말아먹은 듯 매끄러운지라 남의집살이를 하기에는 아깝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 직후에 말 못할 사연 가슴에 품고 떠도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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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윤 주사가 어느 날 학교에 못 간 아이들 서넛을 불러 모아놓고 하늘 천 따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바깥사랑채가 안채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 부자네 집에 누가될 일은 없었습니다.
장 부자가 훗날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특별히 까탈을 부렸다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방’은 일약 ‘글방’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방에서 새끼 꼬고 가마니치고, 가끔 막걸리 내기 고스톱이라도 치던 동네 머슴들만 입이 대여섯 발은 나왔다지요.
서당은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삼국시대까지 닫는, 전통적인 사설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원래는 사족(士族)들이 자식을 집에서 가르치기 위해 독선생을 불러 모신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요?
이왕 가르치는 거 이웃 집 아이들(그것도 양반집 자제쯤 돼야 자격이 있었겠지만) 몇 명 모아서 함께 가르치다 보니 글방 형태를 갖추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커지게 되면서 훗날에는 제법 학교 규모를 갖춘 서당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훈장이 직접 연 서당도 있었습니다.
글 좀 읽었다는 양반 끝물이 벼슬길은 멀고 나이는 먹고 하니 소일거리 삼아, 아니면 입에 풀칠이라도 해볼까 하여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 경우가 바로 그것이지요.
또 “우리 동네 아이들도 까막눈을 면하게 해보자”는 거룩한 뜻에서, 마을 사람끼리 돈을 걷어서 훈장을 모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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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얘기가 옆길로 샜습니다만,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기만 해도 이 땅에서 서당은 이미 거의 사라진 뒤였습니다.
가난하고 힘들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어지간하면 초등학교 정도는 다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동네든 그 ‘어지간만’에도 못 들어가는 아이들이 꼭 있었습니다.
학교는 엄두도 못 내고 농사를 돕거나 남의 집 꼴머슴을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
설령 입학이란 걸해도 결국 중동무이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바로, 낮에는 집사 밤에는 훈장인 윤 주사의 학동들이 되었습니다.
아홉 살 먹은 아이도 있었고 열 예닐곱 짜리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제멋대로 글방이었던 셈입니다.
그런 형편에 훈장이라고 선생님 대우를 제대로 받을 턱이 있었나요.
원래 전통적인 서당에서는 훈장과 그 가족의 생활비를 학부형이 부담하는 것은 물론,
봄과 가을이면 곡식을 걷어서 수업료로 냈다고 합니다.
독신인 훈장에게는 식사나 세탁도 주선해주었고요.
하지만 윤 주사는 쌀 한 톨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 말로 야학 자원봉사를 했던 셈이지요.
물론, 그런 환경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대충 가르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훗날 든 생각이지만, 어쩌면 윤 주사의 실력(?)이나 열정이 동네 사람들이 짐작하는 수준을 훨씬 넘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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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글방은 신기하기도 하고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초저녁에 근처를 지나다 보면, 글 읽는 소리가 무논에 개구리 합창처럼 어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게 ‘하늘 천 따 지~’ 정도일 때는 어깻짓으로 장단을 맞추며 지나가기도 하지만, 조금 진도가 나가서 ‘엎드러질 전(顚)’이나 ‘자빠질 패(沛) 같은 글자들이 나오면 괜히 기가 죽어서 걸음을 재촉하기 마련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기껏 ‘철수야, 영희야~ 나하고 놀자’나 배우는 주제에 어디 감당할만한 깜냥이 돼야지요.
학교도 안 가고 들로 산으로 다니다가 저녁에 한문을 배우는 아이들이 부러워서, 저도 그래보겠다고 부모님을 졸랐다가 경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공부는 갈수록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달라졌습니다.
동문선습이니 명심보감이니 하는 데까지 나가면 이미 다른 세상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물론 윤 주사가 통감이나 소학, 더 나아가서 사서오경 같은 높은 수준의 글을 가르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설령 윤 주사에게 그런 실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에게 그런 정도의 글이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배운 글이 세상을 향한 눈을 뜨는 데는 약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에 제대로 다녔던 아이들은 부모 곁을 떠나지 못했지만, 글방에 다녔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도시로 나가고는 했습니다.
그 중에는 훗날 양복 입고 자가용 몰고 나타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글방에서 배운 글월 덕분이었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살얼음 같은 세상을 한발 한발 걷는 데 힘이 됐던 건 분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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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서당에 입학하는 날은 훈장에게 술이나 고기를 대접했다고 합니다.
책을 한 권 뗄 때도 떡을 한 시루해서 자랑삼아 돌렸다고 하고요.
하지만 납의집살이를 하는 훈장, 그리고 머슴살이하는 학동들이 다니는 그 글방에서 술이나 떡이 나왔다는 얘기는 끝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날갯죽지에 힘이 오른 새들이 둥지를 떠나듯, 아이들이 사랑방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서 글방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땐 이미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훈장선생님, 윤 주사도 그 무렵 그 마을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건, 훗날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가 언제 어떤 계기로 마을을 떠났는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뒤, 아주 빠른 속도로 글방도 훈장도 학동도 옛날이야기가 되어갔습니다.
훗날 고향을 찾아가 장 부자네 사랑방 근처를 어슬렁거려봤지만, 서당의 흔적은커녕 구부정하게 늙은 소나무조차 모르쇠를 할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은 하늘 천 따아 지~ 소리가 자꾸 발길을 잡아 다녔습니다.
어쩌면 개구리들의 합창소리였을지도 모르지요.
시속 수백 킬로미터의 기차가 국토를 달리는 시대에, 천자문이나 읊조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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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10. 08: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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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제대로 된 신당을 찾는 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그 신당을 만난 게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와 묶인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있어서  그곳으로 당겼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내가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부터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의 추억’, 즉 근현대 생활유산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그와 관련한 짧은 기획물을 만들기로 했다. 제작회의를 하는 중에 데스크의 눈이 내게 멈췄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추억’ 이라는 콘셉트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한 모양이었다. 군말 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비록 케이블TV라고 해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직접 현장에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취재원 접촉. 전화 통화를 통해 알게 된 분이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오문선 학예사였다. 여자 분이었는데 역사박물관에서 근현대생활유산 수집을 전담하는 분이었다. 오 학예사가 처음 제안한 것은 세운상가 취재였다. 세운상가에 오래된 시계수리점이 있는데, 일제 때부터 쓰던 수리용 공구를 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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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에 맞춰 대본을 쓰고 촬영동선을 짰다. 맨 먼저 시계수리점에 들러 물품 수집 과정을 담고 기증한 분의 인터뷰를 따고, 다음에 재개발 중인 모래내시장을 들러서 촬영하고…. 맨 마지막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그동안 수집한 것들을 찍고 관장 인터뷰를 따고….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동선이라 하루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촬영 당일 생겼다. 대본을 완성하고 PD, VJ와 시간을 조율하는 등 준비를 마쳐놓고 출발하려는데 오 학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수리점의 주인이 갑자기 병환이 나서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하는 오 학예사도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다행이 다른 아이템으로 부랴부랴 때웠지만, 언제 퇴원할지 모르니 다음 일정을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주일 쯤 지난 뒤 다시 전화를 했더니, 그 분이 퇴원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오문선 학예사가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곳이 보광동 신당이었다. 보광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장남옥이란 큰 무당이 몇 달 전에 타계했는데, 유품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수거작업을 할 때 촬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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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이라…. 낚시미늘을 물어버린 물고기처럼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확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일이 내게 오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방송도 방송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굿하는 과정을 밤새워 취재하고 글로 쓴 적이 있지만 도심에 있는 신당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촬영 약속을 잡은 날은 12월17일. 눈이 제법 내렸다. 아침 일찍 도착해보니 골목마다 떡가루 같은 눈이 흩뿌려져 있었다. 신당이 있다는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바깥풍경을 스케치하는 중에 오 학예사가 도착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따라 들어가다 보니 약간은 냉랭하고 음습한 기운이 돌았다. 신당은 전실과 신당으로 구분돼 있었고 살림을 하는 공간은 별도로 있었다. 신당의 문 앞에 서면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꼭 불편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렇다고 안온하거나 평안한 것과는 조금 다른…그물에 갇혔는데 그리 심하게 옥죄이지는 않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 기침 참듯 안으로 꼭꼭 갈무리 하는 수밖에. 오 학예사에 따르면, 이 신당은 서울 무당의 전통신당을 제대로 갖춘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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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수거팀이 도착하기 전이라 오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당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징, 기물(器物), 종, 북, 명두 등 각종 무구(巫具)가 금방 사용하기라도 한 듯 제 자리에 놓여있었고 산신도, 최영장군상 등 무신도(巫神圖)들도 눈을 부릅뜬 채 낯선 방문객을 내려다봤다. 살림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이나 요도 펴진 채 그대로였다. 누군가 잠을 자고 아침에 급히 나간 듯 모든 게 생생했다. 큰무당 장남옥 씨는 지난해(2010년) 10월에 타계했다. 1928년생으로 17세에 무당이 된 뒤 40년 동안 용산구 보광동에 거주하며, 둔지미 부군당의 당주무당으로 활동했다. 장남옥씨나 신당을 이해하자면 몇 가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한다. 당주무당이란 과거에 마을마다 있었던 신당의 의례를 주관하는 무당을 말한다. 또 부군당(府君堂)은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만 그렇게 불렀으며 서울에만 15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곳의 당에서는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이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당주무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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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옥씨가 당주무당으로 있던 둔지미부군당은 원래 지금의 용산로 6가(현 국립중앙박물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둔지미 마을이 1930년대 일제의 군사용지로 수용되면서 보광동으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 앉게 되었다. 어찌 보면 기구한 사연을 지닌 부군당인 셈이다. 장남옥 씨는 둔지미부군당뿐 아니라 서빙고부군당, 동빙고부군당, 압구정동, 잠원동, 신사동 일대의 마을굿을 주관하던 큰 무당이었다. 굿거리와 재담에 능했다고 한다. 장남옥 씨의 유품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된 데에도 사연이 있다. 장 씨에게는 신내림을 해준 김점례라는 신어미가 있었다. 장남옥씨가 거주하던 신당의 원래 주인이었다. 이 분이 타계하기 전에 집을 보광동3경로당에 기증했는데, 조건은 신딸인 장남옥 씨가 살아있는 동안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리 정리가 되는 바람에, 장 씨가 타계한 뒤 집에 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무구 등 유품이 문제였다. 장 씨에게는 자식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계륵인 셈이었다. 그래서 경로당에서는 유품의 처리와 관련해서 회의를 열었고, 결국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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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선 학예사가 신당에 얽힌 사연을 거의 얘기했을 무렵 유품 수거팀이 도착했다. 훗날 신당을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기 때문에 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거 며칠 전에는 실측 및 촬영 작업을 했다. 유물을 포장하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정교했다. 얼핏 보면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경로당에서 감사를 맡고 있는 김영달 할아버지(69세)을 만날 수 있었다. 보광동 토박이라는 김 할아버지는 동네뿐 아니라 신당의 역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김 할아버지의 안내로 둔지미부군당을 찾았다. 부군당에는 마을신으로 제갈무후(제갈공명)를 모시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여러 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만 부군당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이 명멸했다. 신당이나 무당, 무구들. 그리고 부군당.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일지도 모른다. 갈수록 잊혀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건, 무속 자체를 미신이니 혹세무민이니 하여 경원시 하는 시각이야 말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속은 수천 년을 이어온 이 땅 고유의 신앙이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고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이들을 무당이라 불렀다. 그렇게 긴 세월 백성 곁을 지켜왔으니 전통문화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훗날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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