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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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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1. 08:23 백두산을 가다

 

3
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201165일 새벽 530. 냉장고가 없는 호텔에도 모닝콜은 우렁차게 울립니다.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달려가 커튼을 열어 제치고 긴장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이, 아니 날씨가 오늘의 운명을 가름하기 때문입니다. 참 애매합니다. 맑다고 하기도 그렇고 흐리다고 하기도 그렇고. 1년 중에 백두산을 올라갈 수 있는 기간은 석 달 남짓, 그 중에서도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3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구름과 안개, 비바람으로 천지는커녕 앞사람 뒤통수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가이드 역시 그런 점을 내내 강조했습니다. “백두산을 올라간다고 반드시 천지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니 기도 잘 하세요.”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리산 일출을 보는데도 이 말이 적용되든가요? 아무튼, 제가 백두산에 간다니까 모두 한마디씩 했습니다. “2대는 몰라도 당대는 좀 의심스러운데?” 질풍노도의 삶에 대해 반성 많이 했습니다. 헌데, 제 집안과 저만 덕이 있으면 뭐합니까. 일행 중에 개차반으로 살아온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공염불이 될 텐데요. 그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목욕재계하고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던 어젯밤의 분위기와는 달리 뷔페식 식당은 인파로 북적거립니다. 한국인, 중국인들이 마구 섞여 있습니다. 모두 백두산에 가는 사람들일까? 이들 중에 악업을 쌓은 사람은 없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유난히 깔깔한 아침식사를 마칩니다.

백두산을 향하여
차에 오르니 역시 어른들이 먼저 앉아 계십니다. 그분들의 눈 속에도 기대와 우려가 한데 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나빠질 기색도 좋아질 기색도 아닙니다. 그런 차에 가이드가 희망의 한마디를 던집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요. 기대해볼 만 하겠는데요.” 그러면서 절망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어제 올라간 분들은 천지를 못 봤다고 합니다.”

통화에서 백두산 아랫동네인 송강하(松江河)까지는 4시간30분 정도 걸립니다. 명색이 백두산의 관문도시에서 입구까지 가는데 또 4시간이 넘게 걸린다니. 아무튼 버스는 힘차게 백두산을 향해 달립니다. 같은 영화를 연달아 돌리는 듯, 비슷한 창밖 풍경이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희망과 절망을 버무린 가이드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백두산이 왜 백두산인 줄 아세요? 번 중에 번만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백두산이랍니다.” 아예, 악담을 해라. 악담을. 버스는 작은 도시들과 농촌, 그리고 산촌을 번갈아 지나칩니다. 하지만 산악지대에 가까워지는 건 확실한 듯 침엽수가 자주 눈에 띕니다.

장백산이냐, 백두산이냐

사진 아래 자그맣게 서 있는 저 자가 바로 이 글을 쓴 자입니다. 클릭은 하지 마십시오.

하얀 살결의 나부(裸婦) 같은 자작나무도 언뜻 언뜻 모습을 드러냅니다. 백두산 권역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가이드 말로는, 화산재 토양의 백두산에서는 자작나무가 잘 자란다고 합니다. 백두산은 동물보호구역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호랑이나 곰이 10여 마리 살고 있다고 합니다. 천막에 기거하며 벌을 치는 사람들도 가끔 눈에 띕니다. 꽃이 피면 벌통을 지키며 산속에서 한 계절을 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늘 삶의 종착지가 은둔이기를 꿈꾸는 저로서는 부럽다는 생각에 자꾸 뒤를 돌아봅니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가이드가 백두산에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전달합니다. “플래카드나 태극기를 들고 사진 찍는 행위는 절대로 안 됩니다. 무속 같은 기도행위도 안되고요.” 2007년 장춘(長春, 창춘) 동계아시안게임에 참가했던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들이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는 문구를 적은 종이피켓을 들고 세리머니를 펼친 뒤 한국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됐다고 합니다.

끝없이 달릴 것 같던 버스가 어느 순간 멈춰 섭니다. 드디어 백두산의 들머리인 송강하입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백두산에 오른다고 합니다. 아침 먹은 게 미처 꺼지지 않았지만 산을 올라가야 하니 든든히 먹어둬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로 치면 가든정도 되는 집에서 차려낸 음식은 지금까지 먹은 것보다 부실한 편입니다. 그래도 먹는 게 남는 것! 열심히 먹습니다. 음식점에서 백두산 입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백두산은 꽤 화려하게 지어놓은 건물을 통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매표소 겸 대합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바라보는 순간 턱, 하고 걸리는 게 하나 있습니다. 높다랗게 올라간 입간판에 쓰인 글자는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라 장백산(長白山, 창바이이산)입니다.

백두산의 중국 이름이 장백산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돌고 돌아 찾아온 우리의 산이 장백산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걸 보고서 속이 편할 리 없습니다. 중국은 백두산 개발에 유난히 힘을 쏟고 있습니다. 동북공정을 펼치는 김에 백두산이라는 상징물을 중국의 것으로 말뚝 박아놓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래서 장백산 공항과 관광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물론 장춘 동계아시안게임 때는 백두산에서의 성화를 채화했고 백두산이란 이름이 붙어 있던 학교들을 장백산으로 바꿨습니다. 눈앞의 근사한 건물도 그런 과정의 하나로 지어진 게 아닌지 짐작을 해봅니다.

백두산에 들어서다
입장권을 손에 쥔 가이드를 따라서, 마치 지하철 개찰구와 비슷한 곳을 통과합니다. 진짜 백두산 영역에 접어들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조금 올라가니 버스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습니다. 백두산까지 오르내리는 셔틀버스라고 합니다. 이 버스로 약 9부 능선까지 오르면 서백두(西白頭)주차장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계단을 걸어 올라가게 됩니다. 주차장까지는 40~5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차 안에는 한국인 중국인들이 마구 섞여있습니다. 다행히 자리를 잡아 카메라를 꺼내들고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눈을 차창에 고정시킵니다.

버스가 앞으로 갈수록 계절은 농익은 늦봄에서 연초록의 초봄으로, 눈이 녹아 흐르는 늦겨울까지 조금씩 뒷걸음질 칩니다. 어느 순간 차 안에 아! 하는 탄성이 울려퍼집니다. 시선을 들어보니 저 멀리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봉우리가 보입니다. 아직은 작아서 형태를 제대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두 말 할 것 없이 백두산입니다. 말 그대로, 머리에 하얀 눈을 쓰고 있다는 백두(白頭). 드디어 백두산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납니다. 차가 올라갈수록 눈은 더욱 풍성해지고 산의 윤곽도 뚜렷해집니다. 여기서부터는 주변 풍경도 달라집니다. 고사목들은 세월을 이불 삼아 덮은 채 곳곳에 누워있고 살아있는 나무들도 아직 한겨울 속에 서 있습니다. 녹지 않은 눈들이 길 가에 그대로 널부러져 있습니다. 버스가 헐떡거리며 마지막 고비를 오릅니다. 뒤를 돌아보니 버스가 지나온 길이 둥근 원을 반복해서 그려놓았습니다.

어느 독자분이 이 사진이 궁금하다고 물어오셨습니다. 만년설입니다. 눈이 사람의 몇 길은 되게 쌓인 것이지요. 저 눈은 여름에도 다 녹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험해도
목적지에 도착한 버스가 지친 몸을 세웁니다. 주차장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이크! 몸이 저절로 움츠러듭니다. 미처 물러가지 못한 겨울이 늙고 지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 , . 바람은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을 함부로 휘두릅니다. 배낭에서 얼른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어 입습니다. 아예 겨울 파커를 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늘까지 닿은 듯, 계단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1340개의 계단. 저 계단을 모두 올라가야 천지에 닿습니다. 하늘 못(天池)으로 가는 계단이니 그곳에 정말 하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걸어올라갑니다. 그리 만만한 계단은 아닙니다. 중간 중간에 가마꾼들이 호객을 하고 있습니다. 돈이 뭔지. 맨 몸으로 올라가기도 벅찬 계단인데 사람을 태우고 가다니. 실제로 일행 중 한 분은 허리가 안 좋아서 가마를 빌렸다가 중간에 내리고 말았습니다. 가마꾼의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휘청거리는 다리가 가슴 아파 더 이상 타고 있을 수 없더라고 합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절경입니다. 중간 중간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오르다보니 정상이 저만치 다가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한번 올려다봅니다. 구름 사이로 파란하늘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희망적입니다. 정상을 눈앞에 둔 순간, 숨이 차서인지 기대에 차서인지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마지막 계단, 그리고 정상. 몸은 주저앉고 싶은데 마음은 앞으로 달려 나갑니다. ! 하늘은 무심치 않았습니다. 시선이 닿은 그곳, 천지가 활짝 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시원(始原)의 호수. 할아버지, 아버지. 고맙습니다. 제 일행의 조상님들도 감사합니다.

! 천지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천지는 그 푸르디푸른 속살을 감춰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감동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호수 주변에 눈이 얼마나 쌓여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집니다. 한참동안 천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자꾸 하얗게 바래갑니다. 평생 글밥을 먹고 살아왔는데도 어떤 언어를 동원해야 이 순간을 제대로 표현할지 막연할 뿐입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 가릴 것 없이, 중국과 북한을 가르는 ‘5호경계비에 올라 경쟁적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한쪽은 中國다른 한쪽은 조선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혼자 그 경계선을 왔다갔다 해봅니다. 두 나라를 수십 번 오가는 셈입니다. 누구도 말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에는 북한군 병사들이 주둔하면서 월경하는 것을 막았다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른쪽엔 가장 높은 봉우리 장군봉이 하얀 눈을 고깔처럼 쓴 채 천지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듯 가까워 보입니다. 느닷없이 경계도 이데올로기도 미움도 다 부질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칩니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백두산이 백두산이란 이름조차 얻지 못했을 때, 그 어디에 네 것 내 것이 있고 그 어디에 금이 그어져 있었으랴. 천지는 말없이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백두산을 가다는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말로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백두산을 내려오면서 동양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금강대협곡의 웅장한 모습도 보았고, 다음날 심양에서 북릉공원 들렀지만, 그 역시 기록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백두산에 올랐고 천지를 보았을 뿐입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 큰 질책 없이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sagang
2011. 7. 25. 08:43 백두산을 가다

 

통화로 가는 길, 저녁 무렵의 농촌 풍경. 대부분의 사진은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찍었기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사진을 못 찍은데 대한 변명입니다 ㅠㅠ)

 

냉장고 없는 호텔
광개토대왕 혹은 장수왕이 뿌려주신 비를 흠뻑 맞은 채 버스에 올라 통화(通化, 퉁화)로 향합니다. 통화는 길림성에 있는, 백두산으로 가기 위해 들러야하는 관문 도시입니다. 서파코스를 택한 사람들은 전날 저녁 보통 이곳에서 숙식을 하게 됩니다. 아예 백두산 아랫마을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화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가이드의 예고에 의하면 시내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마사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전신마사지냐 발 마사지냐의 선택을 놓고 격론이 오간 끝에 저의 강력한주장에 의해 발마사지로 통일하기로 합니다. 분위기를 깰까봐 혼자 안 한다고 버틸 수는 없지만, 조상들의 피와 눈물이 배인 이 곳에서 벌거벗은 몸을 타국의 여인들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참 까다로운 여행객입니다.

모를 심을 때 우리처럼 한 줄로 서서 심는 게 아니라, 영역을 정해놓고 각자 심는 게 이채로웠습니다.

마사지를 받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분위기가 좀 수상합니다. 간판에 그렇게 썼으니 호텔은 확실한데 사람 기척은 별로 없고 로비도 컴컴합니다. 이거 혹시 유령호텔 아냐? 천장을 올려다보니 샹들리에라는 게 매달려 있긴 한데, 불을 켠 것인지 외부의 불빛을 반사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어둡습니다. 고급호텔이 아니란 얘기도 미리 들었고 또 제 자신이 거친 음식과 잠자리를 마다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습니다.(본전 생각이 났다는 얘깁니다)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얘기는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가서도 불이란 불은 다 켜봤지만 밝아질 기미가 없습니다. 갈아입을 옷을 꺼내는데 눈이 아니라 더듬이를 사용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라도 한 자루 가져올 걸. 결정적인 사건은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찾다가 일어났습니다. 냉장고가 있음직한 여닫이문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습니다. 분명히 소형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두리번거려 보니 페트병에 담긴 물이 미지근하게 몸을 데운 체 TV 옆에 놓여있습니다. , 냉장고 없는 호텔이라니. ‘범국가적인 전기 절약에 동참하기 위해 TV도 안 켜고 간단하게 샤워만 한 채 침대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건 인색해도 침대는 운동장만큼 넓었습니다. 친구들 불러다 족구나 한 판 할까 싶을 정도로.

그 유명한 화장실
냉장고 없는 호텔 얘기가 나온 김에, 제가 본 중국인들의 문화나 습성에 대해 몇 가지 얘기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며칠 다녀왔다고 문화와 습성 운운이냐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저 주마간산으로 훑어본 것만 전할 뿐이지요. 물론,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또 하나, 분명이 밝혀두지만 중국이나 중국인들을 흉보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와 좀 다르다고 남의 나라 흉이나 보는 사람은 여행객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휴게소 옆의 화장실. 이곳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오물이 뒤에 보이는 밭으로 바로 흘러들어갑니다. 차마 내부는 찍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의 화장실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여러 번 들어서 새로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중국, 특히 이번에 다녀온 동북부에는 고속도로에도 휴게소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현대식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있지만, 제가 만난 휴게소는 대개 음식점 하나 달랑 있고 마당보다 조금 큰 주차장이 전부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화장실은? 밥을 사먹지 않는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볼 일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신축건물 자체를 통째로 잠가버린 곳도 있었습니다.

중국의 장날. 마치 축제가 벌어진 것처럼 화려했습니다.

첫 번째 만났던 화장실을 소개합니다. 버스가 선 주차장 가에 작은 화장실이 하나 있어서 우르르 몰려갔는데, 황당한 상황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들어가는 길부터오물이 산재해 있어 마치 지뢰지대를 통과하는 기분입니다. 내부는 우리나라 60년대쯤의 화장실과 비슷합니다. 변기(?)2개인데 가운데를 뻥 뚫어 놓은 게 전부. 소변기가 따로 없다보니 바닥은 이미 물바다, 아니 오줌바다입니다. 가운데에 칸막이라고 해놓긴 했는데 워낙 낮아서 옆에서 볼 일 보는 사람이 다 보입니다. 그나마 남녀가 구분돼 있는 게 다행입니다. 떨어진 오물을 가두는 탱크는 따로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커다란 독 같은 걸 묻었지요. 대소변은 그냥 밭으로 흘러가게 돼 있습니다. 개가 아닌, 닭 몇 마리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역시 장날 풍경입니다.

남자들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여자 화장실 쪽에서 연이어 터지는 비명.몇몇 분은 결국 볼일을 보류하고 버스에 오르고야 맙니다. 도로를 달리는 내내 이런 화장실들과 정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나마 깨끗하게 해놓은 곳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깨끗함은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습니다. 문제는 화장실의 구조보다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에 익숙해진 우리는 깨끗이 사용하는 습관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중국에는 화장실의 청결 자체를 그리 중시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더러운 걸 버리는 곳이니 적당히 더러워도 된다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닐까요? 일반 가정집은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제 친구 K는 여행 내내, “이게 바로 2% 부족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건물이나 도로는 금세 만들 수 있지만 의식이나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라고, 2%를 채우려면 꽤 긴 세월이 필요할 거라고. 여행 내내 저는 고개만 끄떡거렸습니다.

창밖으로 결혼식 행렬차가 보입니다. 부자들은 저렇게 화려하게 꾸민 차를 수십대씩 동원한다고 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화장실 얘기 하나만 더 하고 끝내겠습니다. 백두산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은 지은 지 오래지 않은 현대식 건물입니다. 하지만 소변기가 없고, 사람 수에 비해 변기 수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에 줄이 길게 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순서가 되어 들어가 보니 역시 소변의 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바닥도 바닥이고 줄도 길어서 큰일은 아예 엄두를 낼 수도 없습니다. 건물이 아깝다는 말이 혀끝에서 맴돕니다. 문제는 중국인들은 화장실 앞에서 줄 서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줄이 있건 없건 밀치고 쑥 들어와 그냥 볼 일을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래 참고 서 있던 한국인들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지요. 여자화장실은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고 합니다. 새치기로 당당하게 볼일을 본 한 여자는, 큰 소리로 밖에 있는 친구를 부르더니 인수인계를 하고 나가더랍니다. 줄을 섰던 한국인들의 표정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백두산 가는 길, 휴게소 안마당에 세워져 있던 현대차.

목숨 걸고 달린다
이번 여행에서는 보너스로 제법 스릴까지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교통문화 때문이었는데요. 우선 시내에서는 빵빵거리는 경적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습니다. 경적소리 챔피언이 되기 위해 특별 경적을 주문해서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자랑하듯 경적을 울리던 시절이 있었지요. 양보하거나 비켜주는데도 인색해보였습니다. 아참, 그 얘기 먼저 하고 가야겠네요. 중국에 처음 갔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 비싸다는 외제차,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차들이 도로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 졸부가 많다더니 사실이구나했지만, 뒤에 알고 보니 전부 현지생산 차들이었습니다. 넓은 시장을 노리고 세계의 한다는 차들은 전부 중국에 공장을 세운 것이지요. 한국의 현대차도 제법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렇게 뭔가 허전해 보이는 3륜자동차가 꽤 많았습니다. 트럭, 승용차 할 것 없이...

이야기가 샛길로 새고 말았는데요, 정작 생명의 위협을 느낀 건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을 때입니다. 2차선 도로에서 대부분의 차들은 1차선으로 달립니다. 그야 운전자의 취향이려니 하면 되지만 앞차를 추월 할 때가 문젭니다. 2차선, 즉 오른쪽 차선이 비었어도 거기로 안 가고 반대쪽 도로 1차선 쪽으로 건너갑니다. 문제는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차가 오는데도 과감하게 월선을 한다는 것이지요. 반대쪽 차가 거의 눈앞에 와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누가 먼저 비키나 보자는 듯, 경적을 울리며 달립니다. 마치 치킨게임(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게임이론)의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우연이겠지 했는데,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간이 오그라든다는 게 뭔지 실감할 수 있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중국 동북부에서(거기만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남부를 갔을 때는 모르고 지나쳤습니다.) 차를 타고 갈 때, 특히 그것이 버스라면 그냥 눈을 감고 가시기 바랍니다.

 

버스 앞에 서 있는 저 당당하게 생긴 사람이 바로 '관따꺼'입니다.

운전사 관따꺼의 경우
우리 일행이 탄 노란 버스의 운전사 이름은 관따꺼였습니다. 본래 이름이 관따꺼는 아니고 관() 씨 성에다 형님, 큰형이란 뜻의 따꺼(大哥)’를 붙인 것이지요. 가이드가 그리 부르라니 그러는 수밖에. 여행 내내 우리의 목숨을 책임진(가끔은 치킨게임으로 위협한), 말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말을 하고 싶어도 한국말을 모르니 할 방법이 없었겠지요. 그의 얘기를 꺼낸 것은, 그가 치킨게임의 주인공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놀라운 체력 혹은 정신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거의 쉬지 않고 운전을 하는데도 늘 꿋꿋한 표정이었습니다. 34일 동안 그가 차를 몰고 움직인 거리를 생각해보면 초인이란 단어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우리 일행이 타고 다녔던 버스. 꽤 고급스러워 보이지요?

물어 본 건 아니지만 그가 운전하는 노란 버스는 자신의 차인 것 같았습니다. 소위 지입(일본식 한자)’방식으로 관광회사에 들어간 것이겠지요. 한번은 제가 다리를 꼬고 앉는 바람에(나쁜 습관 ㅠㅠ) 버스 안쪽 벽에 신발자국이 살짝 남았습니다. 전 모르고 있었지요. 관람을 마치고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관따꺼가 일그러진 얼굴로 다가옵니다. 제 옆에 서더니 다리를 꼬는 시늉을 해보이면서 손을 살래살래 흔듭니다. 아하! 다리 꼬고 앉지 말라는 소리구나. 눈치가 10단이다 보니 보디랭귀지쯤은 금세 알아먹지요. 그 순간 조금 으스스해졌습니다. 그는 따꺼잖아요. 홍콩산 필름 느와르를 보면 따꺼는 큰형님, 즉 조폭 두목 아닙니까. 다행히 화장실 뒤로 따라오라는 제스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차를 아꼈습니다. 가족의 생명줄일 테니까요. 여행기간 내내 차는 번쩍거릴 정도로 깨끗했습니다.

자동차의 증가에 따라 주유소도 크게 늘고 있었습니다.

반은 일하고 반은 놀고
중국은 지금 건설 중입니다. 특히 도로를 새로 놓거나 보수하는 현장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도로공사 현장 풍경이 우리와 다른 점은 기계보다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건 반쯤은 일을 하고 반쯤은 서거나 앉아서 노닥거린다는 것입니다.

어딜 가도 이런 공사현장이 흔하게 눈에 띄었습니다.

가이드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오랜 습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에는(물론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정해놓은 목표만 달성하면 됐기 때문에 서둘러 마칠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을 많이 해봐야 개인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으니 적당히 하는 게 습관이 됐다는 것이지요. 중국인의 특성으로 일컬어지는, 만리장성을 쌓던 정신 만만디(慢慢的)’와의 결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해치운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장경제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한 뒤에는 이 만만디 정신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콰이콰이디(快快的, 빨리빨리)정신이 빠르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제가 다닌 지역은 만만디가 남아 있었을까요. 글쎄요. 아직은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성때문이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태극기와 태능불고기라는 한글간판이 반가워서 찰칵. 소위 단고기라고 부르는 보신탕집이 무척 많았습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보고 느낀 것을 모두 쓰려고 하면 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화장실에서 음식점에서 공공버스를 타면서, 좀 낯설고 불편했지만 그 또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와 모든 것이 똑같고 집에서 만큼 편안했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겠지요. 나와 다른것은 잘못된 게아니라 잠시 불편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낯선 것과의 만남입니다. 내내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다음 회엔 정말 백두산 올라가겠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posted by sagang
2011. 7. 18. 10:54 백두산을 가다

 

 

공주릉? 임자 없는 무덤들
집안에서 급한 숨 돌린 버스는 또 힘차게 길을 나섭니다. 오후 일정은 고구려 공주릉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그리고 장군총이라고 불리는 장수왕릉을 돌아보도록 잡혀 있습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조금 달리는가 싶더니 어느 한적한 골짜기에 일행을 내려놓습니다. 야트막한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묘 몇 기, 바로 고구려 공주들의 능이라고 합니다. 말이 공주릉이지 어느 시기의 어느 공주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남은 기록도 없고 증명할 만한 부장품도 없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공주릉이라는 이름도 그저 갖다 붙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재 집안 곳곳에는 고구려시대의 묘가 12000기나 남아 있다는데 제대로 조사가 이뤄졌는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데다,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오랜 세월 버림받았던 묘들에게 동북공정이란 우산을 씌우기 위해 급하게 꾸며놓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어느 묘는 잔디가 잘 입혀져 있지만 어느 묘는 거의 벌거벗고 있습니다. 둘레에 철망을 쳐놨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득한 시절에 귀한 신분으로 살다 갔을 그들과 묘지 앞에 서 있는 후세의 이름없는 한 사내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도 흐르지 않습니다.

가이드도 설명할 만한 게 없는지 아니면 별 흥이 나지 않는지 바로 차를 출발시킵니다. 버스가 가는 곳은 광개토대왕 능과 비가 있는 통구(通溝, 퉁거우)입니다. 좁고도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달리다 도착한 곳은 평원 한가운데 있는 주차장. 버스를 내리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능이 아니라 중국 지도와 장뇌삼을 파는 이들의 어눌한 한국말과 끈적거리는 눈빛입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백두산 장뇌삼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곳에서 사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헌데, 가격이 들쑥날쑥합니다. 차에서 내릴 땐 몇 만원(이곳에서는 모든 돈의 단위가 한국의 입니다)까지 했다가 차로 돌아올 땐 만원, 차를 타기 직전엔 몇 천원. 가이드 말로는 천원까지 내려간답니다. 그 정도면 실팍한 도라지 한 뿌리 값이나 될런지. 대체 어디에 어떻게 심어 뽑아오기에.

유리창 안의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 묘역은 깔끔하게 잘 가꿔놓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을 위한 게 아니라, 소위 동북공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반가움보다는 착잡한 심정이 앞섭니다. 잘 아시다시피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2002년부터 시작된 국가차원의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조선, 발해, 고구려가 모두 중국 역사라는 논리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억장이 무너질만 한 역사왜곡이지만 그들은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광개토대왕 묘역이 조성된 것이니 반가워 할 일 만은 아닌 것이지요.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급하게 공사를 해놓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왕의 비와 능으로 가는 길에는, 토끼풀이라 부르는 클로버가 지천입니다. 이곳의 클로버는 잎이 얼마나 큰지 과장 좀 보태서 거의 손바닥만합니다. 몇몇 여자 분들은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누려보겠다고 풀 섶을 뒤지기도 합니다. 마치 여고시절 쯤으로 돌아간 듯 얼굴마저 발그레해졌습니다. 조금 걷자 광개토대왕비를 모셔둔 커다란 보호각(비각)이 보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집니다. 두만강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괜스레 호흡이 빨라집니다. 유리로 사방을 둘러싼 보호각 안에 거대한 돌이 서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광개토대왕비입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능비입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 젊은 나이로 세상 떠날 때까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대제국으로 건설한 왕 중의 왕.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이 세상을 뜬지 2년 뒤(414)에 건립했습니다. 비석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씌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릅니다. 높이는 6.34m, 각 변의 길이는 1.5~2m인 자연석으로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의 표면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습니다.) 비가 세워질 당시에는 삼국이나 중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거대한 비가 없었다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끝없이 길어질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 두겠습니다. 일 삼국이 모두 관련된, 가장 논란이 많은 역사유물이 바로 이 광개토대왕비니까요.

보호각 유리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있지만 사진 촬영은 금지돼 있습니다. 안내가 아닌, 경비가 주업인 것으로 보이는 중국인 여성 관리원이 의자에 앉아서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밖에서 사진을 찍자니 유리창에 어리는 그림자 때문에 맘에 드는 컷을 건지는 게 불가능합니다. 안타깝지만, 보호를 위해서 그런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역사가 남긴 비석을 남의 땅에서 봐야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지만, 이곳이 여전히 내 나라 땅이었다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보존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관람객들은 한국인 일색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 머나먼 곳까지 불러왔을까.
 
! 대왕이시어
광개토대왕릉은 비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의 주인을 설명하기 위한 비()이니 멀리 떨어져 있을 리는 없겠지요. 비에서 조금 걸어올라가다 보니 작은 동산 크기의 능이 보입니다. 우리가 흔히 봐온 조선왕조의 능과는 크기나 형태 자체가 다릅니다. 한 변이 66m라니 원래의 규모가 어렵잖게 짐작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한 모습의 돌무지일 뿐입니다. 장수왕릉의 5배 크기였다지만 상당 부분은 이미 허물어져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지금도 돌들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기계충을 앓아 군데군데 헐어버린 아이의 머리처럼 흉한 모습입니다. 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철제계단을 놓았습니다.

계단 끝에는 벌겋게 녹슨 철문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석실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16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무덤, 대체 무엇을 간직하고 있을까. 드디어 내 차례, 버릇이 되다시피 한 가슴 울렁증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예 고질병이 되지 않았나 의심스럽습니다. 묘 안에 다 들어간 순간! 그곳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모꼴의 천장, 때우듯 곳곳을 발라놓은 세 방향의 벽, 그리고 바닥에는 2개의 널방(관을 안치한 네모형의 방). 그것이 전부입니다. 허무한 세월의 그림자만 벽마다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왼쪽이 광개토대왕의 널방이고 오른쪽이 왕비의 널방이라고 하는데 원래의 모습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바닥에는 지폐들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습니다. 대왕의 영험으로 인생길에 고속도로 좀 깔아달라는 염원이 담긴 돈인지도 모릅니다. 중국 돈과 우리 돈이 섞여 있는데 우리 돈은 1000원짜리뿐입니다. 이왕 뭘 좀 바랄 거라면 팍팍 좀 쓸 것이지 1000원짜리가 뭐람. 농담을 해보지만 지저분한 모습에 마음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누군가 정성껏 엮어서 널방 앞에 놓은 클로버 꽃입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넓은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저만치 북한 땅도 보이고 집안시도 가까이 있습니다. 전에는 광개토대왕비와 능 사이의 초원에 400여 가구가 살았다는데, 고구려 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면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후예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갑니다.

장수왕릉에서 비를 맞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서 장수왕릉으로 향합니다. 광개토대왕릉과는 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고구려 묘 12000기 중 외형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장수왕릉 뿐이라고 합니다. 7층 높이의 능은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입니다. 이 능을 중국에서는 장수의 무덤 중 하나일 거라고 추정, 장군총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화강암을 쌓아올린 높이 12.4m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입니다. 1,100여 개의 잘 다듬어진 돌을 쌓고 그 안을 조약돌로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맨 아래의 4개면에는 돌이 밀려 나지 않도록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을 3개씩 세워두었는데, 지금은 하나가 없어져 모두 11개가 남아 있습니다. 이 능은 일찌감치 도굴당해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전에는 철제계단을 통해 능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막아놔서 겉모습을 보는데 만족해야 합니다.

안내하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근처에는 광개토대왕비나 능, 그리고 장수왕릉에 쓰인 거대한 돌들이 분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돌들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광개토대왕비만 하더라도 30이고 장수왕릉에는 50t 짜리 돌도 있다는데. 멀지 않은 곳에 채석장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백두산 인근에서 옮겨왔다는 설명이 더 무게감 있게 와 닿습니다. 문제는 350km나 떨어져 있다는 백두산에서, 별 장비도 없이 그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겨왔느냐에 있습니다. 배에 싣고 압록강을 타고? 어림도 없습니다. 50t짜리 돌을 실을 만한 배를 만들기도 쉽지 않지만 강의 깊이 때문에 배가 바닥에 닿겠지요. 그런 문제를 풀어준 게 겨울의 강추위였다고 합니다. , 강이 꽁꽁 얼었을 때 그 위로 돌들을 옮겼다는 것이지요.

능의 사면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광개토대왕릉에서 내려올 때쯤부터 하늘에 먹장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탈이 난 것입니다. 남의 땅이 되어버린 곳에서 곁방살이를 하고 있는 조상들의 설움이 비가 되어 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아니면 '에라이 무심한 놈들아. 줄 건 없고 비나 한번 맞아봐라' 하는 노여움이 아닌가 하는, 평소의 저 답지 않은 생각에 걸음이 무겁습니다. 비는 금세 폭우로 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가는데도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카메라만 갈무리한 뒤, 천천히 내려옵니다. 그깟 비를 피하려 허둥지둥 뛰기에는 오랜 날들 버려진 채 눈비를 맞고 서 있었을 돌무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1. 7. 11. 10:23 백두산을 가다

 

5시간 30분을 달려가다
밤새 늘어지게 쉰, 우리의 노란버스는 심양 시가지를 씽씽 달려갑니다. 0715. 아직 출근시간 전이라서 도로는 한산한 편입니다. 조금 달렸는가 싶었는데 마술이라도 부린 듯 풍경이 싹 바뀝니다. 빌딩은 사라지고 논과 밭이 이어집니다. 심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동북평원, ‘만주벌판으로 불렸던 이름에 걸맞게 끝이 없습니다. 논마다 모내기가 한창입니다. 우리보다는 꽤 늦은 편입니다. 기계이양은 찾아보기 어렵고, 과거에 우리가 그랬듯이 손으로 모를 심습니다. 차는 열심히 달리지만 달라지지 않는 풍경에 슬슬 질리기 시작합니다. 설친 잠을 벌충한다고 눈을 감아보지만 온갖 상념이 장마철 개구리처럼 울어댑니다.

심양에서 집안까지는 5시간 30분 거리. 요녕성에서 길림성으로 넘어가야 하니 그리 만만한 여정은 아닙니다. 중국 땅이 한반도의 100배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도를 보면 바로 옆 동네인 것 같은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보다 더 걸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이드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우스갯소리를 보탭니다. 중국 사람들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열 시간 스무 시간 가는 것을 이웃에 마실 가는 것 정도로 여긴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다 목적지가 두 시간쯤 남으면 거의 다 왔다고 짐을 챙긴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남으면 짐을 들고 문 앞에 서있는답니다. 킬킬 웃으면서도 괜히 드는 주눅을 감추지 못합니다.

중국에는 묘지가 없다
?
여행길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갸륵한 조선족 청년,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집니다. 요즘은 중국에서도 개인 땅이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아직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소유는 아니고, 30~50년간 장기임대 형식으로 땅에 대한 권리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그 임대권이 자식에게 넘어간다면 거의 완전한 소유나 마찬가지겠지요. 가이드 자신이 조선족이기 때문인지, 소수민족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54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대부분은 언어와 문화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한족(漢族)에 동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다행히 조선족은 잘 지켜내고 있다니 고맙고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다 깨다 이야기를 듣다 잠시 화장실을 들렀다가. 여정은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요녕성과 길림성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먼저 자동차들의 번호판이 요녕성의 (간자체로 씀)’자에서 길림성(吉林省, 지린성)吉'자로 바뀐 것이 눈에 띕니다. 드문드문 산들이 차창 밖으로 달음질치는 게 산악지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일행 중 한 분이 묻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왜 무덤이 없지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무덤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이드의 목소리에 신명이 오릅니다. 역시 질문은 시어머니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맞나봅니다. 애당초 묘지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이 국가 정책으로 묘지를 못 쓰게 했다고 합니다. 등소평 자신부터 화장을 선택했다고 하지요.

그가 걸출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집계된 인구만 해도 13억이라는 중국이,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매장을 한다면 아마 모든 땅이 묘지로 변할 게 뻔합니다. 산 자들이 살아야 할 땅을 사자(死者)들이 차지하는 셈이지요. 우리나라도 묘지문제는 이미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거꾸로 달리는 이는 어디든 있는 법. 지금도 몰래 매장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봇대는 주변을 도톰하게 쌓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는 그 안에 부모의 시신을 묻는 사람도 있답니다. 차가 산골 쪽으로 들어가면서 이제 우리 곁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간간히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냇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가슴 저릴 만큼 아름답습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저로서는 그냥 지나치는 것도 고역입니다.

고구려의 땅에 도착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험하고 계곡도 깊어집니다. 창밖으로 철도 하나가 길게 누워 있는 게 보입니다. 바로 북한과 연결된 철도라고 합니다. 남북 간에는 끊어진 철도가 이 오지와는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헐떡거리며 달리던 버스가 작은 도시로 들어섭니다. 드디어 고구려의 땅집안(集安, 지안)입니다.

 주몽이 부여를 빠져나와 고구려를 세웠을 때 첫 수도는 이곳 집안이 아니라 졸본성(卒本城)이었습니다. 졸본성은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桓仁縣) 오녀산에 있는 산성이라고 합니다. 지도를 보면 집안에서 심양 방향으로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유역입니다.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3년까지 34년간 동안 그곳에 있다가 유리왕 22년에 국내성, 즉 지금의 집안으로 옮겼습니다.(그보다 한참 뒤에 천도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후 장수왕 15(427) 남진정책을 위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게 됩니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라 요녕성 태자하유역의 요양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집안은 중국의 3대 국경도시로, 북한의 만포진과 손끝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습니다. 도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편으로 인구가 30만 정도입니다. 집안은 우리에게는 많은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북한과 인접해 있다는 것 말고도 고구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성터나 환도산성,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군총(장수왕릉) 등 고구려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불고기가 그 불고기?
집안 시가지를 가로지른 버스가 어느 음식점 앞에서 섭니다. 압록강이 코앞인데 웬 음식점?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아침을 먹은 뒤 내내 차를 탄 기억밖에 없는데. 안내서에 오늘 점심은 불고기라고 쓰여 있던 게 기억납니다. 예까지 와서 무슨 불고기람? 썩 마음에 드는 메뉴는 아닙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 가면 아무리 거친 음식이라도 현지식을 먹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는 음식에 집약돼 있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저게 불고기야? 야외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상을 차렸는데, 가운데에 숯불화덕이 놓여있고 그 위에 철망 석쇠가 놓여있습니다. ‘불고기? , 제가 생각하던 그 불고기가 아닙니다. 쟁반에 생고기와 양념고기가 푸짐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다고 해서 불고기?!!

모든 게 푸짐합니다. 고기도 밥도 상추도. 일행은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둘러앉아 고기를 굽습니다. 젓가락이 빛의 속도로 오갑니다. 옆 테이블에서 소주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래, 뭔가 허전하다 했지. 저도 질세라 소주를 시킵니다. 평생 기자질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점심시간에도 적정량의 알코올을 섭취할 수 있는 능력뿐입니다. 소주는 한국에서 건너온 것들입니다. 주인도 종업원도 우리말을 합니다. 돈도 한국 화폐가 기본. 소주 한 잔에 알딸딸해진 머릿속은, 예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고기는 먹고 남을 만큼 충분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하물며 압록강이야. 구워라, 부어라, 마셔라. 배가 부르고 나서야 고국에 두고 온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모두들 배가 남산 만해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 압록강 푸른 물이여
드디어 압록강을 만날 시간입니다. 음식점 문을 나서자마자 술기운은 슬며시 가시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음식점에서 압록강까지는 지척입니다. 조금 걸어가니 저만치 강물이 보입니다. 달리 듯 걸음을 재촉합니다. ‘鴨綠江이라고 새긴 표지석 앞에 서니 가슴은 더욱 뜁니다. 강은 그저 강일뿐인데 어인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강폭은 예상했던 것보다 넓지 않습니다. 상류 쪽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물은 푸르고 푸릅니다. 강물을 훑던 눈길은 천천히 강을 건너 맞은편 기슭에 가 닿습니다. 저곳이 바로 북한 땅. 그리 넓지 않은 강인데, 눈길은 건너도 몸은 건널 수 없습니다. 타인의 땅에 서서 우리의 강토를 바라만 봐야하는 심정은 그저 안타까움입니다.

그런데, 강의 이쪽과 저쪽 땅이 너무 다릅니다. 중국 쪽의 산들은 나무들로 푸르게 우거져 있는데 북한 쪽은 벌겋게 발가벗고 있습니다. 산어귀뿐 아니라 등성이까지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설명을 해줍니다. 북한의 모든 농토는 국가 소유지만,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개인이 산에 작물을 심어 수확하는 건 허용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저 비탈을 벗겨서 무슨 농사가 된다고. 비라도 내리면 모두 씻겨 내려갈 텐데. 그래도 자신의 수확물이 생긴다는 희망 하나로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집단농장의 공동경작이 끝나는 여섯시가 넘으면, 너도 나도 산으로 올라가 물도 주고 김도 맨다는 것이지요. 내 손으로 심어 내가 거두는 것만큼 소중한 게 있을까요. 하지만 낱알 몇 줌을 얻기 위해 산비탈에 흘려야할 땀과 노고, 상상만으로도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찌릅니다.

 
벌거벗은 산들과 목탄차
가이드는 산을 벗겨먹는 것도 순서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로 치면 이장이나 통장 쯤 되는, 힘 있는 사람은 아래쪽을 차지하고 그나마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은 꼭대기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또 아무 산이나 벗기도록 허용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법 푸른 산도 간혹 보입니다. 망원렌즈로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산 밑 도로를 따라 일렬로 서 있는 단층집들을 발견합니다. 기계로 찍어놓은 듯 똑같이 생긴 집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한참 뒤 트럭 한 대가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지나갑니다. 연기가 심상치 않아 물어보니 나무를 때서 움직이는 목탄차라고 합니다.

 

강 위에는 모터보트가 굉음을 쏟아내며 물살을 가릅니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관광 상품입니다. 너도 나도 한 번씩 타보겠다고 줄을 섭니다. 하지만 저와 제 친구들은 망연한 눈길을 북한 땅에서 떼지 못합니다. ‘뱃놀이만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도 모릅니다. 괜한 감정낭비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가슴 속의 납덩어리는 쉽사리 내려앉을 기미가 아닙니다. ‘보다는 건너 쪽에 있는 사람들때문일 겁니다. 이제는 그만 돌아서고 싶습니다. 가이드를 재촉해서 버스에 오릅니다.

 

다음엔 공주릉,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장수왕릉고구려의 유적을 돌아봅니다. 

posted by sagang
2011. 7. 4. 08:38 백두산을 가다

조상의 발자취 아득한데
공항을 나선 버스는 심양시내를 달립니다. 목적지는 심양의 한인촌(코리아타운)인 서탑가(西塔街). 심양(瀋陽), 중국 발음으로는 센양(Shenyang)쯤 되는 도시. 요녕성(遼寧省, 랴오닝성, Liaoning)의 성도(省都)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곳은 아닙니다.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고 발해의 영향권에 있었던 곳이지요. 그 뿐 아닙니다.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혹은 나라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큰 뜻을 품고, 그도 저도 아니면 먹고 사는 게 좀 나아질까 해서 국경을 넘은 우리 선조들 중에 심양까지 간 분들도 있었습니다. 자주 듣던 만주 봉천이 바로 이곳입니다. 농담 삼아 하는 말로 만주에서 개 타고 말 장사할 때.” 어쩌고 하는 소리 들어본 분들도 많을 겁니다.

여진족이라 불렸던 만주인이 세운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 이곳 심양에서 깃발을 올렸습니다. 청 태조(누루하치), 태종 때에는 수도로 삼아 성경(盛京)이라 불렀지요. 그 후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게 됩니다. 그 심양이 2차대전이 끝난 뒤 길림성(지린성, 吉林省요녕성(랴오닝성, 遼寧省흑룡강성(헤이룽장성, 黑龍江省)을 아우르는 중국 동북3성의 최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중국에서도 10번째 이내에 드는 도시라고 합니다. 개발붐은 중국의 변두리라고 할 수 있는 이곳까지 예외가 아니어서 곳곳에 빌딩이 키를 재고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요란합니다.

코리아타운, 서탑거리
퇴근길의 복잡한 도로를 한참 달리던 버스가 비교적 한적한 거리에 일행을 내려놓습니다. ‘西塔街라고 쓰인 커다란 입간판을 지나자 느닷없이 눈이 휘둥그레 해집니다. 여기 중국 맞아? 곳곳에 낯익은 한글 간판들. 한국의 어느 거리로 순간 이동한 것 같습니다. 말은 안 붙여봤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한국 사람일 것 같다는 착각이 듭니다. 횟집도 있고 백화점 같은 큰 상점도 있고. 가장 눈에 띄는 건 룸살롱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KTV(원래는 가라오케TV에서 나온 말로 노래방에 가까웠지만 요즘은 룸살롱처럼 여자들이 나오는 술집이 됐다고 한다)와 구분하기 위

해서인지 한글로 ‘**룸싸롱이라고 분명하게 써놓아 더욱 눈에 띕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역시 물장사가 최고인 모양입니다.

 코리아타운이라고는 하지만 관광객이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습니다. 특히 애당초 쇼핑은 안 하기로 했기 때문에 물건을 살 일도 없고, 가이드를 따라 설렁설렁 돌아보는 게 전부입니다. 구경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들이 우리 민족이 지고온 고난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얹힙니다.  이 낯선 땅에 집단 거주지가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눈물이 있었으랴. 중심가를 벗어날 무렵 가이드가 한 식당으로 일행을 안내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입니다. 기내식으로 먹은 밥은 아직도 뱃속에 원기왕성하게 남아 있는데.

북한식당에서 벌어진 일
들어가면서 보니 간판이나 분위기로 볼 때 말로만 듣던 북한식당입니다. 규모가 굉장히 큽니다. 전에 중국을 몇 번 왔지만 북한식당에서 식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거부감이 들 이유 같은 건 없고, 되레 좀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일행들 사이에서 약간의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한두 분은 조금 당황한 표정까지 짓습니다. 평화보다는 냉전의 시대를 더 오래 살아온 분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복을 날아갈듯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밝은 인사로 맞이합니다. 역시, 곱긴 곱구나. 새삼 남남북녀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2층에 있는 방 중 하나로 안내돼 들어갔는데 14명 전부가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원탁형 식탁이 놓여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어른들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 마당에,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에 바늘을 찌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가씨가 들어와 물병과 김치를 갖다 놓더니 그 다음은 감감무소식입니다.

표정이 내내 굳어있던 어른 한 분이 아가씨를 부르더니 음식은 언제 주려고 김치만 갖다놓고 마느냐고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나무랍니다. 아가씨의 표정이 거북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그녀가 나가자 이번엔 가이드가 불려 들어와 경을 칩니다. 친구로 보이는 다른 한 분도 옆에서 거듭니다. “누가 북한식당으로 오랬어.” 가이드가 이곳은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 아니고 중국인이 주인인데 북한 아가씨들을 고용했을 뿐이라고 설명하지만, 고성과 짜증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북한 사람이라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고 다시 자는 체질인 것 같습니다. 집권자가 밉다고 해서 타국까지 돈 벌러 나온 사람들까지 그리 취급할 건 뭐람? 저 역시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좀 황당해하는 표정입니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이고 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니 분위기는 썰렁하다 못해 싸늘하게 변합니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북한 아가씨는 아예 들어올 생각도 안 하고 가이드만 불난 집 며느리처럼 들락거린 뒤에야 음식이 나옵니다. 준비가 안 돼 있었거나 다른 손님들이 많아서 늦어진 것 같습니다. 모두들 묵묵히 밥을 떠 넣습니다. 식사시간이 아니라 벌 받는 것 같은 시간. 중국에서의 첫 식사가 이 모양이라니. 슬그머니 화가 치솟지만 그저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화를 낸 어른은 6.25때 피난을 내려온 분이라고 합니다. 먼발치에서나마 고향 땅을 바라보기 위해 압록강, 금강산을 찾아온 것이지요.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났지만 북쪽의 위정자들에 대한 증오는 조금도 식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니 갈수록 더해 가는지도. 남의 나라에서 민족의 비극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박카스가 기가 막혀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었습니다. 호텔은 비교적 양호합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쉐라톤호텔. 내일부터는 호텔의 급수가 여기보다 떨어진다니 오늘 밤이라도 만끽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방을 혼자 배정 받은 제게는 쓸쓸한 밤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술을 마시거나 이국의 밤을 쏘아 다니는 걸 즐기지 않는 체질들이거든요. 마눌님들을 호위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뒤 감감무소식입니다. 의리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혼자 밖으로 나가기는 그렇고,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해간 술을 혼자 마신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전화벨이 마구 떠들어댑니다. 예고됐던 모닝콜.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입니다. 이건 뭐 군대보다도 더 고된 여행입니다. 호텔식으로 아침으로 먹고 차에 오르니 어른들은 벌써 앉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젊은 것들이 게을러 터져서하는 소리가 쏟아질 것 같아 슬슬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습니다. 어젯밤의 그 험악했던 분위기가 파노라마처럼 스칩니다.

그런 분위기를 한방에 깨버리는 작은 해프닝은 출발 바로 전에 일어났습니다. 일행 중에 혼자 오신 어른이 계셨는데, 누가 와서 호텔로 다시 모셔갑니다. 한참 뒤에 나온 어른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더니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느냐는 듯 큰 소리로 외칩니다. “무슨 박카스가 6천원이나 혀! 우리 동네 같으면 그 돈으로 열 병도 더 마셔박카스가 6천원? 이게 무슨 소리? ! 그걸 드셨구나. 대충 상황이 그려졌습니다. 침대 머리맡에는 우리나라 박카스와 흡사하게 생긴 음료수가 하나씩 놓여있었습니다. 세상을 똘똘하게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바가지라는 걸 알고 소 닭 보듯 했지만, 그 어른은 이까짓 거 돈을 받겠느냐 생각하고 덜컥 마셔버린 겁니다. 그런데 6천원 씩이나 내라니. 불만 가득 찬 목소리는 좀체 그칠 줄 몰랐습니다. 덕분에 냉랭했던 차 안은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를 한방에 바꿔주신 어른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드립니다.

오늘 일정은 고구려 땅 집안(集安, Jian))의 압록강과 광개토대왕비, 그리고 장수왕릉.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실은 버스가 심양을 힘차게 출발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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