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석양을 받은 크즐쿨레가 붉게 빛난다.

조선소 쪽에서 바라본 크즐쿨레.

크즐쿨레의 꼭대기층. 가운데에 물 저장고가 있다.


크즐쿨레와 테르사네

오후 일정은 크즐쿨레와 테르사네에서 시작한다. 크즐쿨레는 높이 33m8각형 5층탑을 말한다. 단순히 기념물로 세운 탑은 아니고 직경이 29m나 되는 작은 성이다. 알란야 성이 산 위에 있는데 반해 크즐쿨레는 바다 곁에 세웠다. 두 곳은 서로 마주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셀주크 튀르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 1세 때인 1226년에 지었다. 테르사네는 역시 셀주크 튀르크 지배시기인 1228년에 완공한 조선소다. 그 당시 지어진 조선소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두 곳은 위치도 가깝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크즐쿨레를 지은 목적이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조선소 테르사네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탑 내부에는 대포도 설치했었다고 한다. 시리아의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이 탑은 튼튼하기로도 유명하다. 두꺼운 곳은 벽 두께가 무려 12.5m나 된다. 어지간한 대포 정도로는 눈도 깜짝 안하게 생겼다. 단단하게 짓기 위해서 시멘트 반죽을 할 때 달걀을 섞었다는 말도 있다. 건축에는 문외한인지라 달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먹을 것 안 먹고 탑을 짓는데 썼다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겠다. 또 중간 기둥은 신전에서 뜯어다 썼다고 한다. 기둥이 탑보다 훨씬 오래된 셈이다. 1951년에 수리를 하면서 크즐쿨레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붉은 탑이란 뜻이다. 석양 무렵이면 탑 전체가 붉은 보석덩어리처럼 빛난다. 장관이다

.

크즐쿨레 내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각종 사진과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탑으로 올라가는데 계단이 얼마나 좁고 가파른지 금세 등에 땀이 밴다
. 이 건물은 현재 민속 박물관으로 쓰고 있지만 그렇게 특별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각종 사진과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셀주크 튀르크제국의 인장도 눈에 띄는데 독수리 머리가 둘, 즉 양두독수리다. 하나는 소아시아를 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두 곳을 점령하면 세상 모두를 점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비잔티움제국 역시 양두 독수리를 인장으로 삼았다. 2층에는 산꼭대기에 있는 알란야 성채와 통하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비상시에는 이 길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맨 위층 한 가운데는 물탱크가 있다. 비상시에 대비해서 빗물을 받아서 보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장기간 농성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탑의 맨 꼭대기에서 보는 풍경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알란야 성채에서 절경에 취했던 끝이라 감동은 좀 무디다. 이번엔 조선소인 테르사네로 간다. 크즐쿨레에서 내려와 서쪽 성벽 끝 쪽을 보면 다섯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게 바로 테르사네다. 폐쇄된 상태로 있던 이 조선소가 수리를 거쳐 일반인에게 공개된 건 올 528일부터였다고 한다. 믿음 씨도 처음 가본다고 기대에 찬 표정이다.

크즐쿨레에서 내려다 본 알란야 언덕의 주택가.

동굴처럼 보이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조선소 테르사네다.

테르사네의 도크와 도크 사이.


세계 最古의 조선소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세계 최고(最古)의 조선소를 볼 수 있으니 나 역시 운이 좋은 편이다. 생각해 보면 독특한 의미를 지닌 조선소인 건 분명하다. 셀주크든 오스만이든 튀르크라는 이름이 붙은 민족이야 말로 근본이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이들 아닌가. 호수 정도에 배를 띄워봤을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전선을 타고 전쟁을 한다는 걸 꿈이나 꿔봤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만든 조선소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튀르크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조선술과 해전을 배웠다고 한다. 그렇게 확보한 배나 해전술로 그리스를 지배했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기는 하지만. 그런 역사를 거치다 보니, 두 나라는 지금도 원수나 다름없다. 아무튼 오스만 튀르크가 해양까지 장악하는 기초가 된 조선소가 바로 이 테르사네다. 키프로스를 정복하러 갔을 때도 바로 이곳에서 만든 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소로 가는 길 옆에는 올리브 열매가 소담지게 달려 있다. 오렌지 나무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고 풍성하게 자란 아주까리도 자주 눈에 띈다. , 아주까리.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것인데. 조선소는 다섯 개의 도크가 있다. 맨 첫 번째 도크에는 목제 기중기가 전시돼 있다. 세월의 때가 덜 묻어 있어 아직은 도크와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한다. 다음 도크에는 건조 중인 목선이 전시돼 있다. 이것 역시 최근에 만든 것이다. 여기서 건조된 배는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만조가 되면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테르사네 도크에서 바라본 지중해.

배를 만들 때 쓰던 기중기.

배의 골조.

조선소에서 나오니 날이 저물어가고 있다
. 일행과 합류한 뒤 호텔로 돌아간다. 이제 알랸야에서, 아니 지중해에서의 공식일정은 끝났다. 나는 내일 새벽 이스탄불로 떠나야 한다. 저녁을 마치고 일찌감치 다큐팀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들은 저녁 촬영 일정이 있어서 나가야하고 나는 일찌감치 쉬어야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이 같으니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공항이나 인천공항에서 잠시 만나기는 하겠지만 제대로 인사를 나눌 틈은 없을 것 같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서로 다른 일을 했지만 편치 않은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동지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어지간하면 알란야의 밤 문화도 함께 둘러보고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알란야는 지중해의 휴양지 중에 밤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차피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을 어쩌랴. 그것보다는 새벽에 안탈리아까지 가는 게 더 걱정이다. 알란야는 공항이 없기 때문에 다시 안탈리아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야한다. 아침 650분 비행기니까 새벽에 출발해야하는데 그 시간에는 버스가 안 다닌다. 택시를 타자니 너무 비싸고, 믿음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호텔 측과 얘기한 끝에 싼값에 미니버스를 내어준단다. 하지만 그 싼값이 내겐 거액이다. 그래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짐을 정리하다보니 올 때보다 많이 줄었다. 새로 추가된 거라고는 카쉬의 거리에서 산 가죽신 하나.

알란야의 부두.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안탈리아 외곽.

이스탄불로 가는 길. 바다, 산맥, 그리고 도시들이 교대로 나타난다.

지중해와 작별하다

일찌감치 누워보지만 이 생각 저 생각이 거미줄처럼 얽혀 잠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집을 떠나온 지 몇 년은 된 기분이다. 그렇게 뒤척이다가 깜박 잠에 들었나 했는데 알람이 울린다. 새벽 3. 부지런히 샤워하고 옷 입고 호텔 문을 나서니 작은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 혼자 버스를 전세 내보기는 처음이다. 출발하려는데 믿음 씨가 눈을 비비며 로비로 내려온다. 운전사와 내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안탈리아 공항까지 잘 태워다주라고 부탁하러 나온 것이다. 고마운 친구. 서울에 오면 내가 쏘가리 매운탕 곱빼기로 쏠게.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자 버스는 온통 캄캄한 새벽길을 달려간다. 안탈리아 공항에 도착해 보니 제법 시간 여유가 있다. 안도감 때문인지 그제야 미뤄뒀던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까딱 잘못 졸았다가 비행기 놓칠라. 캐리어를 인천공항까지 보내고 일찌감치 수속을 밟는다. 650분 이스탄불행 비행기 이륙. 지중해여, 안녕.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아나톨리아 땅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떠도는 영혼들, 그리고 바다, 나무, 바람 한 자락에게까지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내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안탈리아에서 이스탄불까지는 한 시간 남짓. 올 때도 그랬지만, 비행기가 비교적 낮게 날아가기 때문에 산과 바다와 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드디어 이스탄불에 도착.

낮은 집들도 보이고.

잠시 뒤, 눈에 익은 지형이 들어온다. ? 벌써 이스탄불이네. 보스포루스 해협이 저만치 보인다. 754분 아타튀르크 공항 착륙. 하늘은 시리도록 맑다. 기온은 지중해보다 제법 낮아서 비교적 청량하다. 이제부터 혼자 이스탄불을 탐험해야 한다. 저녁 이맘때까지는 공항으로 돌아와야 하니 주어진 시간은 열두 시간. 한정된 시간의 외출을 허락 받은 무기수가 이런 심정일까? 낯설고 설레는 것 투성이다. 출발선에 선 스프린터처럼 온 몸의 근육에 긴장을 불어넣고 눈을 부릅뜬다. 지금부터는 버스를 태워줄 사람도 없고 길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다. 조금 무식하고(솔직히 말하면 엄청나게 무식하고 전혀 준비가 안 된)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배낭여행자일 뿐이다. 이거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아무튼 힘차게 출발!! 공항서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구시가지의 술탄아흐메트(Sultanahmet)까지는 전철(metro)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트램으로 갈아타야 한다. 전철을 타러 가는 길도 만만찮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 물어물어 역에 도착한다. 어라? 여기는 아직도 토큰을 쓰네. 눈치를 보자 하니 우리처럼 전자식이 아니라 플라스틱 코인 같은 것을 넣고 전철을 탄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걸 제톤(Jeton)이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이건 웬 돌발 상황? 서울에서 표를 끊어서 전철을 탈 때처럼, 넣은 코인이 나와야 나갈 때 쓸 텐데 감감 무소식이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에 역무원이 있다. 객지에서 오촌당숙이라도 만난 듯 반갑게 부른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 메트로를 타러 가는 길이다.

이스탄불에서 '어리버리'


어이~ 역무원 아저씨. 얘가 내 코인 삼키고 안 내놓는데? 헌데 이 친구 반응이 또 엉뚱하다. 가까이 와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질문은 못 들은 척하고 카메라를 얼마에 샀느냐고 자꾸 묻는다. , 인간아!! 묻는 것에 대답부터 해야지. 이젠 카메라 얼마냐 소리 아주 지겹다. 한참 뒤 설명을 듣고 보니 코인을 넣고 그냥 가면 되는 것이란다. 그럼 나갈 땐? 그냥 나가면 된단다. 하지만 이미 코인으로 인한 불행이 잉태됐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탄 전철,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구조 자체가 시쳇말로 대략 난감이다. 폭이 좁디좁아서 앞에 사람과 겸상 받듯 가까이 앉아야 한다. 잘하면 얼굴 맞닿겠다. 다행히 내 앞에는 예쁜 여자가 앉아있다. 물론 딱 거기까지만 다행이다. 그녀 옆에는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있다. 이들 역시 외국에서 온 여행객인 것 같다. 두 정거장을 간 뒤 내리더니 이번엔 아가씨가 탄다. 이번에야 말로. 어라? 이 아가씨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이게 웬 ㄸ…. 그런데 가만히 보니 눈의 초점이 내게서 약간 비껴나 있다. 그럼 그렇지. 내 옆에 그녀의 남자친구가 서 있다. ! 열차는 지상과 지하를 교대로 달린다. 내가 내려야하는 역은 가만, 가만, 굉장히 어려운 역인데? 맞다. 제이틴부르누(Zeytinburnu). 이 역에서 트램으로 갈아타고 구시가지까지 가야한다. 전철역과 트램이 붙어 있기 때문에 종점인 악사라이 역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것보다는 편리하단다.

메트로 정거장 풍경.

트램을 타고 가는 길.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다행히 하늘이 어여삐 여기고 순국영령이 보우하사 제이틴부르누 역을 안 놓치고 제대로 내렸다. 트램으로 갈아타기 위해 사람들을 졸래졸래 따라가는데, 또 한 번 문제가 터졌다. 모두가 거기서 다시 코인을 넣고 트램 쪽으로 넘어간다. ? 난 코인이 없는데? 아까 안받아왔단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코인을 갖고 있지? 그 역무원이 날 속인 거야?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없고 트램은 코앞에 서 있는데 게까지 갈 방법이 없다.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이번에도 착하게 산 덕분인지 역무원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 역무원 아저씨, 이차 저차 해서 코인을 못 받아왔는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면 좋겠수? 손짓에 발짓까지 섞어서 물어보니,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갈아타려면 제톤을 두 개 사야한단다. 전철과 트램의 코인이 각각 필요하다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당연한 얘기네. 알아들었으면 저쪽 가서 제톤을 다시 사오란다. , 무슨 국제 관광도시가 이래. 어디다 좀 써놓든가. 역무원에게 물어볼 때 카메라만 신경 쓰지 말고 그런 것도 알려주든가. 괜스레 등에 땀이 흐른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떠난 내 스스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책에 다 쓰여 있는 것을. 이스탄불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교통카드를 사는 것이다. 악빌(Akbil)이라고 부르는데 역 같은 곳에서 판다. 이거 하나면 버스, 지하철, 트램, 페리 등 뭐든지 만사 오케이라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한 개로 여러 명이 쓸 수도 있고 다 쓰면 충전할 수도 있다.

저 멀리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보인다.

저만치 블루모스크가


다 쓰고 난 악빌은 출국하기 전에 가까운 판매점에 반납하면 보증금도 돌려준다. 깨달은 진리 하나. ‘무식하면 용감하고, 용감하면 고생한다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트램으로 갈아탔다. 이제 구시가지의 술탄아흐메트역에서 내리는 것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좀 마음이 놓이니 별 쓸데없는 게 궁금해진다. 출근시간인데 왜 이렇게 트램이 한가하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떠오른 생각. 그래, 오늘 일요일이잖아. 왠지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많더라니. 요일이야 어떻든 나는 지금 로마 땅을 달리고 있다. 사는 사람들은 바뀌었지만 이곳은 1000년 넘게 로마의 수도였던 곳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대륙이 걸쳐 있는 도시이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터키 최대 도시다. 동양과 서양 문화, 고대와 현대, 기독교와 이슬람이곳에서는 무엇이든 만나고 융합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공화국의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갔지만 이스탄불은 여전히 이 나라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보노라니 가슴이 벅차게 뛰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에 유적들도 보인다. 내가 드디어 이스탄불 한 가운데에 발을 디뎠구나. 트램이 서고 드디어 술탄마흐메트 정류장에 나를 내려놓는다. 저만치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어서 오라고,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 손짓한다. 야호!! 나는 지금 이스탄불로 걸어들어간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알란야의 호텔에서 내려다본 바다 풍경.

알란야에서 묵었던 호텔.

드디어 10월을 맞이하다

아폴론신전의 야경에 흠뻑 취한 채 시데를 출발한 시간이 720. 이대로 숙소로 들어가 씻고 누우면 얼마나 좋을까만 지금부터 알란야(Alanya)로 가야한다. 그곳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버스가 안탈리아 시내를 벗어나니 오로지 캄캄한 세상.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머릿속으로만 그려볼 뿐이다. 그래, 때로는 상상 속의 풍경이 더욱 아름다울 때도 있는 법. 알란야는 안탈리아에서 동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져 있다. 도착했을 땐 이미 이슥한 밤이다. 이러다 저녁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는지 원. 설마 굶기기야 하겠나. 알란야 시내에 도착해서도 버스는 골목골목을 누비더니 해변 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색이다. 창밖 가로등 아래, 빵을 사들고 절룩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여인의 실루엣과 조우한다. 여기도 생로병사, 부와 가난,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곳. 낯선 도시에 대한 이질감이 반으로 줄어든다. 호텔에 도착하니 늦은 밤인데도 뷔페식 식사가 마련돼 있다. 다른 손님들이 없는 것을 보니 따로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미리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허겁지겁 식사를 하다가 창밖을 보니, ! 그곳엔 또 특별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호텔 아래 도로 건너가 바로 바다인 듯, 정박한 배들과 길게 이어진 방파제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무슨 조명을 쓰기에 저런 황금도시를 만들었을까. 식사를 하다말고 굳이 창문에 카메라를 대고 풍경을 찍는다. 좀 흔들리면 어때. 부랴부랴 밥을 먹고 나니 씻고 잠자기도 바쁘다.

딤 동굴로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알란야 전경.

딤 동굴의 종유석들.

아침에 일어나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101일 토요일이라고 가르쳐 준다. 드디어 달이 넘어갔구나. 10월이란 단어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 쯤 내가 사는 땅에는 가을이 물씬 익어갈 텐데. 내겐 오늘이 지중해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다큐팀은 내일을 쉬는 날로 잡았지만, 나는 그들과 헤어져 이스탄불로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올 곳이지만 터키까지 와서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 이스탄불을 그냥 스쳐 지나간다는 건 예의가 아니다. 외로운 길이겠지만 어차피 여행이란 외로움을 담보로 내놓고 신천지를 보는 것. 떠나는 건 떠나는 것이고 알란야도 충분히 탐색해볼 일이다. 아침식사 후 맨 먼저 길을 잡은 건 딤(Dim) 동굴. 종유석과 석순이 장관이라고 한다. 가는 길에 현대자동차 매장을 만난다. 괜스레 뿌듯하다. 여기서는 현대를 휸다이로 읽는단다. 그럼 삼성은? 삼숭이란다. 그렇게 읽힐 줄 알았으면 애당초 이름을 좀 더 쉽고 글로벌하게 지었을 텐데. 창업주들이 옛날 기업을 일으킬 때, 이렇게 세상을 누비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딤 동굴은 산 중턱에 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비치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진을 쳤다. , 이 사람들아. 이젠 10월이라고 10. 내 조국에서는 서리가 내릴 판인데 어쩌려고 홀딱 벗고 물로 뛰어들어. 하긴, 자신들이 좋다는데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딤 동굴은 버스로 한참 올라간 뒤 다시 조금 걸어가야 한다. 해발 240m라니 그리 높지는 않다.

온갖 형상의 석순과 종유석.

딤 강 유원지.

400가지의 메뉴에 질리다

산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당연히 솔방울도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어릴 적 땔감을 찾아 솔방울을 주우러 다니던 생각이 난다. 저 정도면 밥 한 끼는 거뜬히 할 텐데. 이 촌놈 냄새는 언제나 내 몸을 빠져나가려는지. 아마 운명처럼 끌어안고 죽을 것이다. 동굴은 우리의 석회동굴과 그리 다르지 않다. 조금 더 아기자기 하달까. 종유석과 석순들이 재주껏 삼라만상을 만들었다. 부처도 있고 해파리도 있고, 어느 건 폭포처럼 우르르 소리 내며 흘러내릴 것 같고. 형성된 지 100만년 정도로 추산된다는 이 동굴은 길이가 총 360m. 터키에서 손꼽히는 것은 물론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동굴이란다. 맨 앞에서 열심히 가다보니 작은 못이 나오고 거기가 끝이다. 곳곳에서 파닥 파닥 머리 위를 나는 박쥐 떼를 만난다. 너희들의 영역에 이방인이 침입한 셈이구나. 주는 것 없이 단잠을 깨워서 미안하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 나와, 길가 매점에서 차이를 한 잔 마시며 일행이 오기를 기다린다. 다음 목적지는 딤 강(). 딤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러고 보면 딤이라는 게 이 지역의 이름인 모양이다. 특별히 찾아간다기에 대단한 강인가 했더니 폭이 개천 수준이다. 대신 수량은 제법 많다. 여길 왜? 궁금했는데 다큐팀의 일정에 포함됐단다. 우리의 유원지와 비슷한 곳이다. 한탄간 유원지, 송추 유원지그런 식. , 강물을 끼고 장사를 하는 곳인데 우리의 유원지보다 훨씬 잘 만들어놓았다.

강 위에 설치된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나무판자로 강을 덮고 철제 기둥으로 칸을 나눈 다음에 고급스런 등받이 의자를 설치했다. 칸과 칸 사이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이 보이도록 해놓았다. 이 정도 환경이라면 닭백숙에 소주 혹은 파전에 막걸리가 제격인데 이곳 사람들은 주로 차를 마신단다. 싱거운 사람들 같으니. 그런데 차만 파는 것은 아니다. 다큐팀이 작업을 하는 동안 한쪽에 앉아 슬그머니 메뉴판을 열어봤더니. 이런. 대체 이 메뉴가 다. 마시는 것만 해도 soft drink’s, local drink’s, shot drink’s, wine, import drink’s, cocktail’s. 읽다가 숨이 넘어갈 정도다. 여기에 식사(또는 안주가 될 만한 것들)가 수백 가지. 눈대중으로 세어보니(아니 할 일이 없어서 열심히 세어봤더니) 400가지가 넘는다. , 이곳 주방장은 천수관음이냐? 비슷비슷한 재료를 가지고 조금씩 변형시키니 견디는 거겠지? 예를 들면 설렁탕 한 솥 끓여놓고 육개장 시키면 고춧가루 좀 타서 내보내는. 딤 강을 떠나 향한 곳은 유명한 알란야 성채. 그 전에 알란야 성이 왜 유명한지. 알란야가 대체 어떤 곳인지 공부를 안 하고 갈 수는 없다. 중부 지중해에 위치해 있는 알란야는 인구 12만 명의 작지 않은 도시다. 이곳을 중심으로 서쪽은 팜필리아, 동쪽은 킬리키아((Kilikia)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코라케시온이라 했는데, 기원전에는 동지중해를 누비던 해적들의 소굴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알란야 성채

알란야 성채.

알란야 성채에서

2세기경의 해적 두목 다아도토스 트리폰이란 자는 왕권까지 넘볼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긴 도둑이건 해적이건 나라를 세우면 왕인 게지. 한고조 유방이나 명태조 주원장의 근본이 왕후장상의 피였더냐. 으음, 이런 소리 함부로 하다가 사회 불만 세력으로 찍힐라. 암튼 그렇게 대단했던 해적도 로마인들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세력이 약해지게 된다. 이곳은 십자군전쟁과도 인연이 있다. 3차 원정 때에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리페가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13세기 이곳을 점령한 셀주크 튀르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가 자신의 이름을 따 알라니예(Alaniyye)로 부른 것이 오늘날 알란야의 어원이 됐다. 셀주크의 술탄들은 겨울이면 이곳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겨울 수도 역할도 했다. 1471년에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로 편입됐다. 알란야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알란야 성채는 BC 67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소탕하고 쌓은 것이라는데 1226년에 조금 전 등장했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가 대대적으로 증축했다고 한다. , 지금의 성채는 대부분 셀주크 튀르크 때 쌓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성채까지는 제법 높은데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걸어가는 게 만만치 않다. 하지만 시간이 넉넉한 여행객이라면 천천히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올라가는 길 곳곳에 유적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다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을 권한다. 40~1시간 정도 걸린다.

여기서부터 환상의 풍경이 연출된다.

교회도 자미도 세월에 닳고 무너지고.

나도 혼자라면 당연히 걸어갔겠지만 일행과 함께 움직이려니 버스를 타는 수밖에. 주차장에서 내려다보니 알란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탄성이 저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지역을 다니다 보면 평생 사용한 감탄사보다 더 많은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믿음 씨 말에 의하면 터키야말로 유럽에서 가장 싸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라고 한다. 자신의 나라를 자랑하려고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다. 또 지중해의 여행지는 유럽 각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다르단다. 예를 들면 안탈리아는 러시아인, 보드롬은 영국인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이곳 알란야는? 독일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한다. 다른 곳에 비해 비용이 비교적 싸게 먹히고 덜 복잡하기 때문이라나. 그런데 상당수의 관광객은 투어보다는 진짜 휴식을 위해 휴양지를 찾는단다. 유적을 순례하기보다는 호텔을 정해놓고 그곳에서 축구도 하고 쇼핑을 즐기고 저녁에는 쇼를 보고. 골프를 치러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여름은 덥기 때문에 10월말에서 5월까지가 본격시즌이다. 안탈리아 인근만 해도 20여개의 골프장이 있는데 그린피는 한국보다 비싼 편이란다. 티켓을 끊고 입장해서 본격적으로 성채 탐색에 나선다. 성 안쪽에는 긴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특히 이 지역을 차례차례 차지했던 세력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와,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제국 초기의 자미.

성벽에는 철망을 씌워놓았다.

돌틈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또 지고...

폭탄테러 소식을 듣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넓은 정원을 만나게 된다. 전쟁을 전제로 만든 성이지만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기운만 가득하다.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커다란 물 저장고(사르느즈)가 눈에 들어온다. 저장고는 성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하긴 싸움을 하든 족구나 하며 놀든 물만큼 중요한 게 있으랴. 골조만 남아 조금은 흉물스러워 보이는 비잔티움 교회를 지난다. 내 삶을 지키거나 상대방의 죽음을 전제로 한 성채와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교회. 극단적인 이질감 속에서도 또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느낀다. 병사들은 포화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 보면 전쟁과 평화는 애당초 남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처럼 나란히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류의 역사를 직조해온 것일지도. 도저히 틈이 없을 것 같은 메마른 성벽에도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냈다. 꽃 한 송이를 통해, 난 지금 평화로운 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안도를 얻는다. 얼마 안 가 성벽의 끄트머리에 도달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니 정말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 나타난다. 이곳야말로 아름답다는 말이 얼마나 옹색한지 실감나게 해준다. 그동안 내지른 감탄사들이 조금 아깝다. 저만치가 바로 클레오파트라 해변이라지? 클레오파트라는 저 아름다운 해변에서 무엇을 했을까. 시퍼렇다 못해 시커먼 바다. 누가 잉크를 저리 엎질러 놨길래. 막혔던 가슴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곳이 클레오파트라 해변이라지. 숨이 턱 막히더니 가슴이 뻥 뚫렸다.

성채에서 바라본 알란야 시내.

성채에서 내려오는 길, 예쁘게 가지를 펼친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들인다. 달력이 한 장 넘어간 턱을 하느라 그런지 더위가 조금 주춤한 것 같다. 어디선가 철없는 닭이 구성지게 울어댄다. 다행히 꼬끼월월(무슨 소린지 잘 모르는 분은 5회를 읽어보시길)은 아니고 그냥 꼬끼오다. 그런데 이게 웬 환청. 닭 울음이 느닷없이 병사의 외침으로 바뀐다. “적이 쳐들어온다, 적이 쳐들어온다. 세시 방향, 세시 방향으로 대포를.” 에구, 이제 별 소리가 다 들리는구나. 얼른 내려가야겠다. 내려오는 길에 가로수에 늘어져 있는 능소화가 눈길을 잡는다. 10월의 능소화라. 여긴 뭐든지 철이 없구나. 내려오는데 코디네이터 엄상욱 씨가 어제 우리가 있던 안탈리아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고 전해준다.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별 일 없느냐고 친구가 연락을 해왔단다. 그런데 터키인인 믿음 씨는 그 사실을 아예 모른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몇 가운데 연락을 해보더니 확인이 안 된단다. 하긴 이 동네에서 쿠르드족의 테러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외신에서나 다루는 뉴스란다. 지진과 쿠르드족은 터키의 풀리지 않는 숙제다. 쿠르드족은 아나톨리아 동부에 분포돼 있는데, 산악지대의 주민은 반()유목민이며 평야지대에서는 농경으로 삶을 꾸린다. 16세 초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점령당했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뒤 거주지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분할되면서 3000만 명이 터키와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흩어져 살게 됐다.

저 푸른 바다를 지나는 배도 파랗게 물들 것 같다.

풍덩 뛰어들고 싶은 심정들일까?

떠돌이 개의 천국 터키

그중에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는 터키로 1200만 명에서 1500만 명 정도를 헤아린다. 1970년대 들어 터키의 쿠르드노동자당(PKK), 이라크의 쿠르드애국동맹(PUK)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으로 각국에 내전이 발발, 10년간 4만 명 이상이 죽고 25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터키 남동부에 대한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는 PKK는 지난 1984년 이후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에 본거지를 두고 터키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어제 안탈리아의 폭탄테러도 그런 무장 투쟁의 일환으로 일으킨 것이다. 테러를 할 때는 외국인들이 없는 군사지역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지만 그래도 어찌 아나, 폭탄에 눈이 없으니. 은근히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오늘 메뉴는 햄버거란다. 원래 즐기는 음식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 보조를 맞출 수밖에. 찾아간 곳은 익숙한 간판 버거킹. 전에 먹어본 기억이 있길래 베이컨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아차! 여긴 이슬람국가지. 돼지고기가 있을 턱이 있나. 그럼 치킨!! 닭 안 먹는단 얘긴 없더라. 가게 앞 큰 길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햄버거를 베어 무는데 덩치 큰 검정개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슬그머니 길 가운데 눕는다. 길 양쪽으로 테이블을 놓았고 그나마 터놓은 길이 거긴데 개가 누워버렸으니 오가는 사람에게는 난감한 일이다. 그래도 다들 건드리지 않고 슬그머니 피해서 간다.

길을 턱하니 막고 있는 떠돌이 개. 음식도 골라먹는다.

 

배가 고픈가 싶어서 햄버거 조각을 줬더니, “네 정성이 갸륵해 먹어준다는 듯 심하게 게으른 동작으로 다가와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는다. 세상의 양반 개는 여기 다 모였나. 그리고는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더니 참선에 들어간다. 이왕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터키는 집 없는 동물(반드시 유기동물은 아니다)의 천국이다. 특히 개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오가며 산다. 복잡한 거리에서도 아무데나 턱, 하고 누우면 그 영역이 절대 보장된다. 보드롬 오래된 빵집 앞의 그 좁은 길에서도 다리를 꼬고 앉아 행인들을 품평하는 개를 보았고, 알란야 성채에서도 송아지만한 개가 저 멀리 클레오파트라 해변을 바라보며 견생무상(犬生無常)’을 참구(參究)하는 것을 보았다. 어디가나 마찬가지다. ’늘어진 개 팔자라는 말이 이 나라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의 떠돌이 개들이 비루해 보이는 것과 달리 하나같이 깔끔하고 영양상태도 좋다. 먹는 건 이 사람 저 사람이 챙겨주니 별 걱정 안 해도 되고, 건강관리는 관공서에서 해준단다. 귀에 관리를 위한 인식표가 달려 있다나. 동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 천국처럼 느껴진다. 대한민국의 떠돌이 개들이여. 편도 비행기 값만 벌면 터키로 가시라. 그곳에 그대들의 파라다이스가 있나니. 눈치 보며 쓰레기통이나 뒤져야 하는 이 나라는 깨끗이 잊으시라. 그나저나 개 얘기 하다가 날 새겠다. 햄버거 하나 먹었으니 힘내고, 또 배낭 메고 일어서야지.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멀리서 본 페르게 고대도시의 아고라.

고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의 안내판들.

지금은 폐허가 되어

930일 금요일 0830, 호텔 체크아웃. 오늘은 안탈리아를 떠나 지중해의 마지막 목적지인 알라니아로 가는 날이다. 도중에 페르게 고대도시,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아폴론신전 등을 들러야하기 때문에 역시 강행군이 예고돼 있다. 하지만 육체적 피로 따위에는 더 이상 쫄지 않기로 했다. 몸은 늘 엄살을 부리기 마련이다. 자꾸 걷고 움직이다보면 알아서 따라오게 돼 있다. 배의 기름기가 허벅지의 근육으로 둔갑하는 그날까지 가열 차게 걷고 또 걸을 일이다. 오늘 첫 번 째 목적지인 페르게는 팜필리아의 고대도시다.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현장에 가 보면 거대했던 도시의 규모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의 어원이 된 스타디온(stadion), 그리고 주거 도시로 나뉘어 있다. 우선 주거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로마의 문을 만난다. 바로 서울의 남대문에 해당하는 문이다. 지금은 거대한 돌덩이들의 집합체에 불과하지만 도시가 번성했던 시절의 위용을 전해주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 문을 지나자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옛 성문(hellenistic door)과 두 개의 탑이다. 탑들은 반쯤 무너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수리를 하는 중인지 구조물로 가려져 있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도시가 형성된 이후 계속해서 덧 지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비잔틴의 건축 양식들이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무너진 성곽.

옛 성문.

여기서 고대도시 페르게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를 하고 지나가자. 안탈리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 페르게는 안탈리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팜필리아의 수도였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12만 명이었다니 어느 정도 큰 도시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멀지않은 곳에 악수강이 흐른다. 이곳에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바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다. 그리스 신화에는 BC 1200년 경, 의사 모프소스와 예언자 칼카스가 여러 종족으로 이뤄진 무리를 에올리아 지방에서 이끌고 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BC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 페르게를 장악하고 인근 도시인 아스펜도스와 시데를 공략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의 지배를 거쳐 로마의 영토로 편입 됐으며 BC 129년에는 속주가 된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도 독자적으로 은화를 주조했다는 것으로 봐서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번영을 누린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페르게는 쇠퇴를 거듭한다.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중기까지는 그럭저럭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었지만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으로 수차례 초토화가 되는 참화를 겪는다. 결국 주민들은 페르게를 버리고 이웃도시인 안탈리아로 떠나기 시작했다. 1078년에 이 지역은 셀주크터키 제국에 편입되고 1392년에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두개의 탑. 하나는 수리중?

곳곳에 이런 조각들이 굴러다닌다.

바울과 마가의 애증

이 페르게에서 우리는 반가운 이의 자취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교 최고의 전도자 사도 바울(바오로, Paulus). 서기 47, 바울은 첫 번째 전도여행 중에 이곳을 방문했다. 성서에는 페르게를 버가라고 표기한다. 정작 유명한 건 바울의 전도활동이 아니라, 바울과 훗날 마가복음을 쓴 마가(요한)의 복잡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는 동역자였던 바나바, 그리고 마가가 순종자로 동행하게 된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이 마가는 철딱서니가 없는데다 무척 나약했던 것 같다. 문제는 타우르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산맥을 넘어야 목적지인 팜필리아(밤빌리아)로 갈 수 있는데 귀하신 도련님 마가가 해발 2,000m의 험준한 산맥을 보고 아 뜨거라, 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말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버렸다. (사도행전 13:13) 바울의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마찰은 2차 전도여행 때에 또 한 번 일어났다. ‘배신자에 대해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바울은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기면서까지 마가대신 실라를 데리고 떠났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훗날 마가는 다시 바울을 따랐으며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정성껏 돌봤다고 한다. 그 과정에 이러저러한 사연이야 없을까만은 우리는 종교가 내포한 본질을 보면 된다. 용서, 그리고 사랑.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아고라 외곽의 기둥들.

멀리서 본 목욕시설.

로마의 문을 지나면서 관람객에게는 두 장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중앙의 큰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아고라(Agora), 왼쪽에는 목욕시설이 펼쳐져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가 눈치를 보니 관광객의 대부분이 목욕시설 쪽에 몰려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고라 먼저.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polis)에 형성된 광장을 말한다. 아고라라는 말은 시장에 나오다’, ‘사다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나왔다고 한다. , 아고라의 원래 의미는 시장인 셈이다. 하지만 시장의 기능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일상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게 됐다. 지금 나는 1500년도 넘는 아득한 옛날에 세워진 아고라 앞에 서 있다. 일렬로 선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장관이다. 4세기에 형성된 이곳 아고라는 한 변의 길이가 75m의 정사각형 구조다. 단순히 물물교환이 이뤄지던 시장이 아니라 경제 활동과 여론 형성의 중심지였음을 웅변해주는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외곽에는 월세로 점포를 얻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포진하고 중심부에는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물건을 파는 프리마켓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리고 맨 가운데에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움과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둥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가 어느 순간 환상의 문으로 들어가, 로마의 한 시민이 된다.

잔해조차도 아름답다.

아고라 한 가운데 있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

로마가 망한 이유는?

조금만 더 깎아 달라니까요” “이게 웬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여흥정하는 촌부와 장사꾼.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달뜬 표정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아이. 한 중년남자는 머리에 구멍 뚫린다는 쇠고기 수입이 웬 말이냐고 침을 튀기고, 또 다른 쪽에서는 머리 허연 노인 몇이 옹기종기 앉아 호민관 거시기란 놈이 뻘건 물이 들었느니 퍼런 물이 들었느니 열을 올린다. 지중해서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면서 문득 환상에서 깨어난다. 아아, 모든 것이 부질없다. 말없는 돌덩어리들만 폐허 속에 묻힌 아득한 시절을 노래한다. 발길을 돌려서 목욕시설 쪽으로 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얀 대리석들. 번성하던 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는 것. 로마가 왜 망했을까? 라는 질문에는 수십, 수백까지의 가설과 이유가 나온다. 훈족의 이동, 윤리적 퇴폐, 지도층의 질적 저하, 수도관 납중독, 페스트의 창궐. 혹시 목욕탕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치와 퇴폐의 극치를 달린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는 망했다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목욕시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목욕을 하기 위한 시설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찜질방 그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탈의실은 물론 냉탕, 온탕, 미지근한 탕, 증기탕, 마사지실까지 갖췄다. 구들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수영장보다 훨씬 큰 공중목욕탕의 욕조가 그 흔적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오수 배출시설도 보인다.

공중목욕탕.

목욕시설의 수로.

중앙도로의 가운데를 달리는 수로는 물이 철철 넘쳐흘렀으며 집집마다 물을 받아썼다고 한다. 그 아득한 옛날에 말이다. 화려함과 사치는 차치하고 우선 그런 시설을 만들고 유지한 기술력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벽마다 구멍이 뽕뽕 뚫려있다. 총탄이나 포탄자국은 아닌데 저게 뭘까, 믿음 씨에게 물어봤더니 대리석에 구멍을 뚫고 철판이나 납판을 붙였던 자리라고 한다. 그것 역시 화려한 도시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훗날 폐허가 되면서 너도 나도 훔쳐다 엿을 바꿔 먹었기 때문에 지금은 흉한 구멍만 남아 있단다. 궁금한 건 또 있다. 어떻게 주춧돌에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세울 수 있었을까. 기둥이 들어갈만한 구멍을 판 것도 아닌데. 그 궁금증도 믿음 씨가 풀어준다. 주춧돌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서부터 밖으로 조그만 길을 낸다고 한다. 기둥을 세운 뒤 그 홈으로 쇳물을 부어넣으면 쇠가 식어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직접 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데 말로 설명하려니 쉽지 않다. 큰 기둥을 붙일 때는 구멍을 여러 개 뚫었다고 한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구경 삼매경에 빠졌는데, 뭔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동양인 부부다. 이렇게 피가 끌리는 사람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국인이다.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해보니 45일 동안 터키를 일주하는 중이란다. 우와! 45. 부러워라. 앙카라에서 출발해서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내려와서 에페소 등 에게해 인근을 가쳐서 이스탄불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여기도 목욕시설.

이렇게 홈을 파고 길을 낸 뒤 쇳물을 부어서 주춧돌과 기둥을 접합시켰다.

한국인 부부를 만나다

대화는 주로 바깥 분과 나눌 수밖에 없다. 부인은 자외선차단제를 두껍게 바르고도 모자라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싸맨 채 그늘에 숨어있다. 구경이고 뭐고 화살처럼 햇살을 쏟아내는 태양에 수박만한 감자라도 먹이고 싶다는 표정이다. 이미 얼굴이 까맣게 타버려 흑백 구분이 안 되는 남편은, 아내가 그러건 말건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몸 동작이 다람쥐처럼 날래다. 터키는 20년 전에 배낭여행을 와보고 두 번째란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다. 20년 전에 유럽도 아니고 터키를 돌아다녔을 정도라면 그야말로 배낭여행의 선구자 아닌가. 그럼 그렇지. 얘기를 나누다보니 세계 구석구석 안 다녀본 곳이 없단다. 내가 늘 꿈꾸는 여행전문가를 만난 것이다. 부인은 이번에 처음 따라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끝마다 입이 두어 발씩 길어진다. ‘이럴 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도 집을 나서면 고생이거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여행 내내 과일만 먹었다고 하소연이다. 그나마 과일값이 싼 나라니 다행이지. 게다가 지적 호기심이 넘쳐나는 남편을 따라다니려니 지칠 수밖에. 그녀의 얼굴에 김치, 된장찌개, 갈비찜그리운 이름들이 둥둥 떠다닌다. “선생님은 점점 힘이 나는데 사모님은 갈수록 지치지요?” 물었더니 어쩌면 그렇게 잘 아느냐고 용한 점쟁이라도 만난 듯 반색을 한다. 내가 며칠 뒤 귀국한다니까 따라나서고 싶은 표정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대중교통만 이용하려니 힘들어 죽을 지경이란다.

물을 데우던 구들이 아닐까?

벽에 있는 저 구멍들이 바로 철판이나 구리판을 붙였던 흔적.

터키 여행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주로 오토뷔스(Otobus)와 돌무쉬(Dolmush). 오토뷔스는 우리로 치면 시외버스 혹은 고속버스. 터키의 면적은 우리 남한의 대략 8배 정도가 되는데 철도망은 낙후돼 기차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고속도로나 국도변의 휴게소주유소와 연계돼있는 마피아들의 방해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설마 하면서도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다. 대신 도로망은 잘 연결돼 있어서 어느 곳을 가더라도 큰 불편은 없다. 바로 그 길을 달리는 주인공이 오토뷔스인데 시스템이나 서비스가 무척 발달돼 있다. 운행편수가 많고 시간대도 다양하며 장거리는 밤에도 운행한다. 보통 남자차장 한 두 명이 차와 간식을 제공하며 일행이 아닐 경우 남녀를 따로 앉힌다. 장거리 요금은 정찰제로 돼 있지만 돈이 없다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깎아주기도 한다니 도전해볼 만하다. 오토뷔스를 타려면 오토가르라는 곳에 가야 하는데 바로 우리의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장거리 버스의 승차권을 빌렛(Bilet)이라고 하는데 오토가르의 버스회사나 시내 대리점에 가서 사면된다. 같은 구간을 운행하는 회사가 여러 곳이기 때문에 시간대가 다양하고 선택의 폭도 넓다. 요금은 버스회사마다 조금씩 다른데, 당연한 얘기지만 비쌀수록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 물론 장거리 이동을 할 때는 조금 비싸더라도 좌석이 편한 버스를 택하는 게 좋다.

노섬에서 파는 액세서리들.

각종 장신구를 파는 소녀. 제법 장사를 잘한다.

로마황제와 마주 앉아서

오토뷔스에서 내려서 좀 더 작은 지역으로 갈 때는 돌무쉬를 타면 된다. ‘봉고정도의 미니버스다. 이 돌무쉬의 뜻이 '다 차면 간다'라니 말 그대로 출발하는 시간은 운전사 마음이다. 대신에 내리고 싶을 때는 아무 곳에서나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니까 버스와 택시의 중간쯤 되는 존재? 직접 타본 건 아니지만, 차장이 없기 때문에 버스비를 앞사람에게 주면 앞사람이 자기 또 앞사람에게 전달해서 기사에게까지 간다고 한다. 잔돈이 없을 땐? 그냥 큰 돈 내면 된다. 기사가 거스름돈을 주면 뒤로 또 뒤로 전달해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간에 가로채는 사람은 없는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터키의 시골에서는 교통수단 그 이상으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이 돌무쉬다. 물건이나 편지를 전달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아무튼 터키에서 대중교통으로 여행을 하려면 바로 이 두 가지 교통수단, 오토뷔스와 돌무쉬를 잘 이용해야 한다. 다음에 이 땅에 오면 꼭 경험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45일이나 그런 식으로 여행하는 부부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부인은 자신을 그렇게 끌고 다니는 남편이 미운 모양이다. 남편을 보는 눈에 검은자위보다 흰자위가 더 많다. 그러건 말건 남편의 얼굴은 여행의 희열이 넘쳐흐른다. 역시 여행 체질은 따로 있는 법. 여행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고 했더니 먹을 것까지 아끼면서 알뜰하게 다닌다고 대답한다. 그래, 돈 보다 의지가 중요하지. 가장 부러운 건 건강과 시간이다.

아크로폴리스. 역시 폐허다.

스타디온이라 불렀던 원형경기장. 마차경기와 검투가 벌어졌다.

스타디온에 흩어져 있는 돌들.

길의 끝에서 아크로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에 있는 언덕)를 만난다. 이 곳 역시 폐허가 된지 오래. 잡초만 무성하다. 페르게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폐허 속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함께 왔던 일행은 지금 어디쯤 있는지. 폐허의 영향일까. 조금은 쓸쓸한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온다.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노점상들이 길게 진을 치고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나 머플러 등을 판다. 노점을 펼쳐놓은 소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엊그제 안탈리아의 마리나항구시장에서 만난 소년이 다시 생각난다. 하지만 이 소녀는 그 소년보다 훨씬 씩씩하다. 수완이 좋은지 물건도 제법 잘 판다. 먼 발치에서,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가난이 온몸에 미농지처럼 배어 있는 소녀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혼자 터벅터벅 스타디온으로 간다. 구르는 돌마다 새겨진 조각들이 자꾸 발걸음을 붙잡고 늘어진다. 뭐 하나 예술품 아닌 게 없다. 길이 234m에 폭 34m인 이 경기장은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결투가 주로 이뤄진 곳이라고 한다. 12000명 정도를 수용했다니 대단히 큰 경기장이다. 객석은 지금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갖추고 있어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스타디온으로 꼽힌다. 객석 아래에는 30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다. 아치 안을 들여다보니 하나하나 독립된 공간으로 돼 있다. 도대체 이 아치는 왜 필요했을까. 나중에 물어보니 세 개마다 하나씩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스타디온을 드나드는 출입구로 쓰였고 나머지 스무 개는 물건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스타디온의 아치들. 뒤가 트여 있는 것은 출입구, 막힌 것은 가게들이었다.

가게로 쓰이던 아치의 내부모습.

원형극장. 발굴이 덜 돼서 출입금지란다.

경기도 보고 쇼핑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다목적 경기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그렇게 즐길 때 글래디에이터(gladiator)라 불리던 검투사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수없이 오갔겠지. 설령 이긴다 해도 살육에 불과한, 그런 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했던 검투사들. 튀어 오르는 피를 보며 환호성을 질러댔을 로마시민들. 인간은 애당초 잔인하게 태어난 동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역시 카메라가 부서질까봐 두 손을 번쩍 든 우스운 꼴. 돌무더기 위로 넘어졌으니 등뼈가 부러져도 할 말이 없을 뻔 했다. 평소에 착하게 살았기 망정이지. 원형극장에 가봤지만 발굴이 덜 돼서 입장 불허란다. 울타리 밖에서 까치발 몇 번 하다가 포기하고 돌아온다. 이곳은 어디를 파건 유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이 스타디온도 발굴이 덜 돼서 어디가 정문인지 아직 확인이 안됐단다. 로마인들이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혈투에 열광하던 스탠드에 앉아 지중해의 바람을 만끽한다. 돌은 무너지고 깨어졌지만 바람은 여전히 그때 그 바람이겠지. 검투사의 피에 흥분하는 로마의 귀족이 돼보기도 하고 칼 하나에 목숨을 맡긴 검투사가 돼 보기도 한다. 그 두 계급 사이를 흐르던 강은 그 얼마나 멀었던 걸까. 두두두두~ 말이 달리고 와와와~ 함성이 들린다. 좋은 세상이다. 동양의 끄트머리, 반도에 사는 한 사내가 지금 로마황제와 마주앉아 있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듀덴 폭포.

듀덴 폭포 앞을 지나는 해적선을 닮은 배.

듀덴 폭포의 위용

터키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 대한 믿음 씨의 품평은 계속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한국인 흉도 보겠지? 외국에 나가서는 품행을 더욱 방정하게 해야겠다는 갸륵한 생각이 든다. 사고를 쳤을 때는 일본에서 왔다고 해야지. 국위선양이 따로 있나. 이 한 몸 바쳐서 나라 욕 안 먹이는 게 애국이지. 좀 특이한 건, 광수입 의존도가 높으면서도 터키의 관광호텔에는 카지노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한 때 카지노를 허가한 적이 있었는데 내국인들이 드나들면서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속출하더란다. 노름에 미치면 마누라까지 팔아먹는다더니, 터키라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카지노를 없애고 말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정선카지노 생각이 난다. 언젠가 지나다가 본, 사람이 사는 집보다 전당포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이던 풍경. 그리고 어깨를 늘어트리고 걷던 군상들. 그 뒤 그들은 잭팟이 터져서 태평양에 요트라도 띄웠을까? 카지노를 차려 손 짚고 헤엄치듯 거둔 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얼마나 쓰이고 있을까? 버스는 시내를 다시 거쳐 일행을 듀덴(Duden)폭포에 내려놓는다. 듀덴 폭포는 시내와 붙어있는 지중해 쪽에 있다. 꿩 대신 닭? 쿠르순루 폭포에서 물 먹은 대신 듀덴 폭포라도 보라는 뜻인가? 하지만 폭포 앞에 서는 순간잠시 비비 꼬였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와!!! 하는 탄성이 터진다. 대체 저 폭포가 어떻게 생긴 것이란 말인가?

폭포는 저렇게 건물 아래에서 느닷없이 솟아나온다.

폭포의 하단. 가운데쯤 아주 작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시는지.

폭포 위에는 그저 평범한 건물들에다가 잔디가 깔린 공원뿐인데, 느닷없이 허연 물줄기가 나타나 엄청난 물을 시퍼런 바다에 쏟아 붓는다. 이 물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안탈리아를 감싸고 있는 타우르스산이 출발지라고 한다. 그곳에서 발원한 물이 30km를 땅 밑으로 달려와 도시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단 한번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폭포는 해적선을 닮은 유람선과, 개구쟁이들처럼 바다를 질주하는 작은 쾌속정들과 어울려 한편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헌데 속물근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혼자 드는 생각. 저 엄청난 물이야말로 오염되지 않은 천연수인데. 그냥 바다로 흘려보내지 말고 병에 넣어 팔면 돈 좀 될 텐데. 아무튼 삶을 위해서라면 눈먼 돈 한 푼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별 상상을 다 하고 있다.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햇볕이 쏟아지는데도 심신이 모두 시원하다. 다음 행선지는 안탈리아 고고학박물관. 터키 최고의 고고학 박물관 중 하나라니 기대될 만도 하건만 폭포 곁을 떠나기 싫다. 믿음 씨의 재촉에도 뭉그적거리고 있다가 느릿느릿 삐거덕거리는 몸을 일으킨다. 예까지 와서 박물관을 들르지 않을 수는 없지. 박물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까지 거쳐 오면서 본 어떤 박물관들보다 규모가 크다.

안탈리아 고고학박물관.

안탈리아 박물관 입구의 깨진 석상들 중 하나.

안탈리아 박물관에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품인가.

섬세한 옷주름을 보시라.

안탈리아 인근의 페르게와 아스펜도스에서 출토된 고대 유물들이 전시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한다. 시대별로는 선사시대에서 오스만 제국까지 모두 아우른다. 이곳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머리 없는 석상들. 머리가 있으면 팔이나 다리를 잃었고,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는가 싶어서 가까이 가보면 코가 깨져있다. 전쟁터의 부상병동이 따로 없다. 어매, 어쩔거나. 이 아까운 예술품들을. 하지만 그렇게 몸의 한 조각씩을 잃고서도 석상들은 여전히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좀 억지스런 역설일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상실의 미()’, 그런 조어(造語)도 가능할까? 그런 말이 가능하다면 지금 이 순간 딱 어울릴 만한 말이다. 특히 눈길을 자꾸 끌어당기는 건,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 옷의 주름 하나하나가 바람이 불면 팔랑거리기라도 할 것 같다. 이들이 정말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특히 관람객을 가장 많이 불러 모으는 건 4~8번 전시관의 로마시대 유물들이다. 로마 황제는 물론 여러 신들의 석상, 그리고 웅장하고 세밀한 조각을 온 몸에 두른 대리석관들은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 로마의 영광을 웅변해주고 있다. 박물관 2층에는 뎀레에서 만났던 산타클로스, 즉 성 니콜라스의 초상과 성모마리아의 성화 등도 전시돼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보고 찍어야할 유물이 너무 많다는데 있다. 이 박물관은 사진 촬영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 미처 반도 돌아보기 전에 지치기 시작한다.

고대의 각종 도자기들.

사람의 손으로 빚은 게 맞나?

엄청난 유물들 앞에서 괜스레 심통이 나기도 한다. 원래 그리 많지도 않았던 유물을 일제의 도둑놈들에게 이리 저리 약탈당하고, 잔챙이들까지 소중하게 전시해 놓은 우리나라의 박물관이 생각나서다. 빼어난 작품들이 워낙 많다보니 나중엔 뭘 봐도 그저 돌덩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박물관은 문화의 감옥이라는 내 지론은 바꾸지 말아야할 것 같다. 이들이 수천 년 동안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면 질릴 틈이 어디 있으랴. 결국 후반부는 건성건성 본 뒤 남들보다 먼저 전시실을 빠져 나온다. 나야말로 문화인으로 훈련받지 못한 무식한 여행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저 소중한 인류의 유산들을 이렇게 처삼촌 묘 벌초하듯 대충 대충 훑다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진리지만,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교육된 자만이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진리다. 야외전시장으로 나가는 길에 입구 쪽에 비치해둔 방명록을 들여다보다 외국어들 사이에서 한글 이름 몇 개를 발견한다. 한국인들도 제법 많이 오는 모양이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 때문에 비껴지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곳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동료애(?) 느낀다. 나는 물론 나는 사인을 생략한다. 어디 가서 흔적을 남기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다. 박물관 뜰로 나와 보니 그곳 역시 또 다른 박물관이다. 마치 둘 곳이 없어 마당에 세워둔 것처럼 각종 석상과 석주들이 이곳저곳에 서 있다.

석관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오스만터키 시대의 생활상.

외계인이 만든 유물들

석상에 새겨진 저 조각들을 보라.

거대한 관들은 화려하고도 위압적이다. 죽은 뒤 드러누울 관 하나에까지 저렇게 신경을 썼다는 건 내세를 그만큼 기대했다는 것이겠지.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유물들이 지닌 아름다움은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진부할 정도다. 그럼 무슨 말이 어울릴까. 누군가가 말했듯 사람의 솜씨만은 아닌 것 같다. 전에 그 말을 들을 땐 황당하다고 웃고 말았지만 정말 외계인들이 만들어놓고 떠난 건 아닐까. 사실 유럽 사람들이 침이 마르게 자랑하는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작품이란 게,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의 작품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악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한꺼번에 눈앞에 있을 땐 두 눈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오감으로 느끼려고 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야 가슴 속 깊이 담아갈 수 있다. 카메라를 아예 배낭에 갈무리 하고 햇살이 명주실처럼 가닥가닥 흘러내리는 벤치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잠시 뒤 내 곁으로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작은 내로 졸졸졸 흐르기도 하고 커다란 강이 되어 도도하게 흐르기도 하고 폭포가 되어 우르르 쾅쾅 떨어지기도 한다. 시간의 곳곳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리스 사람, 로마 사람, 터키 사람그들과 대화하고 밥을 먹고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본다.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거리를 걷는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조그만 장애물에 불과할 뿐이다.

마당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돌들 중에도 예술품 아닌 게 없다.

오스만 시대(?)의 가옥.

이슬람시대 이후의 유물은 아예 보는 걸 포기하고 만다. 이 이상의 예술을 담아가기엔 내 안의 그릇이 너무 작다. 언젠가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박물관을 떠날 무렵, 길게 키를 늘인 햇살이 땅 위에 비껴 내리기 시작한다. 다음 목적지는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라알리오을루(Karaalioglu) 공원. ‘가장 아름답다는 수식어만으로도 가슴은 부풀어 오르는데 그 이름이 문제다. 외우려다가는 날을 새야할 것 같아서 믿음 씨에게 수첩을 내밀고 써달라고 부탁한다. 공원의 위치는 어제 탐색했던 칼레이치 구역 남쪽 끝에 바다와 잇닿아 있는 곳. 역시 아름다운 공원이다. 아니, 공원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공원 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파랗게 빛나는 지중해와 그 건너편으로 펼쳐진 산들은 어느 명장의 손을 거친 듯 조화롭다. 마침 석양이 조금씩 짙어지면서 풍경은 조금씩 채색을 바꿔나간다. 공원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산책하기에는 딱 좋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그예 콧노래까지 불러낸다. 공원에는 산책 삼아 나온 동네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찾아온 관광객들도 많이 눈에 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의 발자국마다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가 고여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경계 삼아 쌓아놓은 담장에 기대거나 올라앉아 저물어 가는 하루를 눈에 담고 있다.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라알리오을루 공원

연인들? 그냥 여자들.

한 남자에 마음을 빼앗기다

그 중 한 남자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저런 걸 아우라라고 하나?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서 앉아 있는데 다른 이들하고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 무엇이 있다. 처음에는 역광 속의 뒷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워 도촬을 하려고 접근했다. 헌데 뷰파인더 속에 들어온 그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다. 사진을 찍고서도 눈을 떼기 힘들다. 맨발에 소매 없는 셔츠만 걸친 가벼운 옷차림, 금빛 나는 갈색 수염과 잘 빗어서 묶은 긴 머리. 옆에 놓인 배낭과 물통은 그가 홀로 떠도는 나그네임을 설명해준다. 청년이라기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중년이라는 표현은 당치도 않고. 하나씩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데 왜 내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놓는 것일까. 어쩌면 그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고독? 인연을 내려놓고 떠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잘 걸러진 고독이 침몰된 어선을 숙주로 삼은 따개비들처럼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저런 고독을 가진 이에겐 고독과 행복이 각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을 터. 나는 지금 그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에 시선을 깊이 박아 넣고 있다. 어쩌면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다가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질 것 같다. 물론 그는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는다. 천천히 일어나 배낭을 어깨에 멘 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다.

내가 반했던, 아니 부러워했던 사내.

태양은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고.

그의 모습을 저녁 어스름이 지워버리자, 구름 한 자락에 매달려 있던 해가 바다 속으로 몸을 담근다. 날이 어둑어둑해져가면서 공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저만치서 누군가가 부르는 노랫소리도 들린다. 제법 듣기 좋아서 가까이 가보니 한 청년이 기타를 치고 다른 하나는 신나게 노래를 한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이 청년들 더욱 신났다. 잠시 뒤에는 노래를 멈추고 콜라를 한 잔 가져와 내민다. 오늘의 첫 청중이 돼줘서 고맙다는 뜻이리라. 고맙긴 뭐, 사진을 찍게 해줬으니 내가 더 고맙지. 그나저나 여행지에서는 남이 주는 음료를 함부로 마시지 말라는 여행자 수칙을 어쩐담.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다. 청년들의 눈빛을 보니 절대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못된다. 그들은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나는 콜라들 마시면서 노래를 듣고. 난데없는 호강이다. 노래를 마치고 잠시 쉬는 동안 그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터키 사람 특유의 호기심으로 눈까지 반짝거린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이번에는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에 'I love core'를 넣어서 후렴구처럼 부른다. 이런 환영이 있나. 공원에 나온 사람들이 청년들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자연스레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청년들은 토크쇼를 하듯 중간 중간 관중과 이야기도 나눈다. 관광객에게는 안탈리아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접대성 멘트도 아끼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저물어간다.

공원서 노래하는 청년들.

 공원에서 노래하는 청년들

청년들은 콜라는 마시지만 술은 절대 사양이다. 소위 말하는 공원에서 껄렁대는청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왼쪽에 기타 치는 청년은 열아홉 살로 고등학생이라고 한다. 노래를 하는 청년은 스물 셋이라는데 바에서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둘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절친이란다. 함께 공원서 노래를 한 건 2년 째. 노래를 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느냐고? 그런 건 없고 그냥 노래가 좋을 뿐이란다. 앙코르 신청을 했더니 혼신을 다해 불러준다. 목소리 톤이 아까보다 한 옥타브 올라갔다. 어이, 청년들. 무리는 하지 말어. 그러다 목 상할라. 지나가던 외국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쳐준다. 안탈리아의 저녁은 그들의 노래가 있어 한층 빛난다. 세상은 아직 온전히 저물지 않았다. 청년들과 헤어져 다시 바닷가 쪽으로 걷다가 어느 순간 몸을 낮춰 앉는다. 사물은 조금씩 희끄무레 하게 자취를 흐려간다. 나는 이런 시간이 좋다. 특히 여행을 할 때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즐긴다. 몸을 한껏 낮추고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엔 요술나라처럼 신기한 것들로 그득 차 있다.

안탈리아 밤거리는 화려하다.

호텔 창문을 통해 바라본 지중해.

신의 안배는 얼마나 절묘한지. 뛰어갈 때보다는 천천히 걸어갈 때 훨씬 많은 것을 보기 마련이다. 물론 걷는 것보다 서 있을 때, 서 있을 때보다는 앉아 있을 때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몸을 한껏 낮추고 고개를 숙여야 드디어 보이는 것들도 있다.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다. 눈으로 보는 걸 포기할 때도 있어야 한다.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을 열어 세상을 보는 순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여행은 좋은 스승이다. 어느 순간 살아가는 이유가 궁금해지거나, 스스로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 배낭을 꾸려볼 필요가 있다. 나그네가 되어 떠돌다 보면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잃어버렸던 자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다큐팀의 저녁 풍경 촬영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간다. 안탈리아 시내는 대도시답게 화려하다. 느닷없이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에 괜스레 눈을 크게 떠본다. 절대 그럴 리 없지.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다른 날보다 일찍 끝난 일정 덕분에 안탈리아의 두 번째 밤은 비교적 여유롭다. 식사를 한 뒤 야간 촬영을 나간다는 다큐팀과 떨어져 혼자 남는다. 이렇게 버는 시간은 얼마나 행복한지. 책을 읽다 창문을 열어보니 멀리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배 하나 꼬박꼬박 졸고 있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하드리아누스 문을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하드리아누스 문에서

오스만 전통가옥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하드리아누스 문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은 말 그대로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130년에 안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이 세운 문이다. 황제의 위세가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살다 간 것도 아니고 다녀가기만 했는데도 이만한 기념물을 짓다니. 하지만 어떤 삶에도 빛과 그림자는 공존하는 법. 황제라는 자리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3세기 중반을 로마의 군인황제시대라고 하는데,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등극하고 사라졌다. 평균 2년도 못하고 죽거나 축출된 것이다. 그깟 거 안 하고 말지,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까. 죽은 사람들 걱정 그만하고 산 사람은 다시 하드리아누스 문으로 돌아가 보자. 대리석을 재료로 해서 2층으로 건축됐다는 이 문은 이오니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3개의 아치가 인상적이다. 아치 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가족의 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어느 마당에서 개집이나 지키는 석상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터키는 고대유물도 냇가의 돌처럼 굴러다닌다. 문 양 옆으로는 사각형의 성탑이 있는데 왼쪽 건물은 로마시대에 지어졌고 오른쪽은 13세기 셀주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가 세운 것이다. 알라딘 케이쿠바드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지 않은가? 바로 이블리 미나레트를 세운 그 술탄이다. 이 사람도 삽질하는 게 취미였던 모양이다.

하드리아누스 문의 양쪽 성탑.

호텔로 가던 길에 만난 개구리공원.

하드리아누스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이 문은 우리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처럼 박제로 전시돼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통행로 사용되고 있다. 문의 한가운데 유리(?)가 깔려있고 그곳을 통해서 큰 도로와 구시가지 사이를 사람들이 오간다. 관리만 잘하면 우리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 따지고 보면 하드리아누스 문이 훨씬 긴 풍상을 견뎌왔다. 거긴 돌이고 우리는 나무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할까? 또 홀라당 타는 꼴을 보고 싶어 이도 안 들어가는 소리를 하느냐고 할까? 아무튼 나는 박제가 싫다. 문 앞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있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저만치서 걸어온다. 똑같이 터키풍의 시원한 옷을 입고 있다. 인사를 했더니 지쳐서 사진 찍을 힘도 없다고 하소연이다. 나도 그대들과 대화 나눌 기력도 안 남았소. 이제 한국인을 만나도 그러려니 한다. 하드리아누스 문을 떠나 안탈리아 도심을 걷는다. 오늘 묵을 호텔이 지척에 있다고 해서 걸어가기로 한 참이다. 석양이 커튼을 드리우기 시작한 거리는 터키 최고의 관광지답게 화려하다. 10분쯤 걸어가서 만난 호텔도 지금까지 묵었던 어떤 호텔보다 크고 화려하다. 로비로 들어가니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체크인 하고 들어간 방도 마찬가지다. 샤워와 간단한 빨래를 한 뒤 식당으로 내려간다. 이런! 식당 역시 지금까지 본 곳 중 최고급이다. 규모도 크려니와 음식의 수도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호텔 것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이렇게 느닷없이 호강해도 되는 거야?

안탈리에서 묵었던 라마다호텔.

호텔 내부. 터키 체재 중에 만난 호텔 중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주방장은 부산 사람?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높다랗게 솟은 모자를 쓴 중년 사내가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이 정도 모자 높이면 주방장 쯤 되겠군. 한국에서 왔다니까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피어난다. 그러면서 몇 년 전에 부산에 가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밝힌다. 한국에 다녀왔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다. 몇 년 있었지만 한국말은 배우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면서 음식 고르는 것을 도와준다. 고향사람을 만난 듯 반갑다. 음식도 맛이 있다. 결국 몇 번 가져다 먹는 바람에 과식을 하고 말았다. 에구, 여행 와서 배만 더 나오겠다. 929일 아침. 여행도 이제 후반을 향해 달리고 있다. 편안한 잠자리였고 비교적 오래 잤는데도 피곤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남들보다 많이 움직이고 많이 기록하고 많이 찍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육체에게는 고통스런 짐을 지울 수밖에 없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젖었지만 빨래는 뽀송뽀송 잘 말랐다. 그나마 다행이다. 지쳤다고 누워 있을 수야 없지. 이 호텔에서 하루 더 묵을 계획이라니까 간단하게 배낭을 꾸려 또 길을 나선다. 오늘은 안탈리아 외곽에 있는 명승지들을 돌아보는 날이다. 지중해 쪽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안탈리아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땅이다. 리키아 산맥과 타우로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주고 있는데다 동쪽으로는 비옥한 평원이, 남쪽으로는 지중해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안탈리아 거리.

안탈리아 시가지.

이 지역은 한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은 물론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관광지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안탈리아도 다양한 역사적 부침을 거친 도시다. 고대에는 이곳을 팜필리아(Pamphylia, ‘모든+민족의 합성어)라고 불렸다. 지금의 안탈리아에서 시데, 킬리키아까지 아우르는 해안지대를 말한다. 팜필리아는 BC 7세기에 리디아에 점령된 뒤 BC 546년에 페르시아의 속국이 됐으며 BC 334년에는 알렉산더의 영토가 됐다. BC 323년 알렉산더가 사망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로 편입됐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귀속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누렸다. 안탈리아에 최초로 도시를 세운 사람은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2세였다. 그때부터 아탈로스의 도시라는 뜻의 아탈레이아(Attalea)로 불렀는데 그것이 훗날 안탈리아가 되었다. 페르가몬 왕국은 바다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항구에 성을 쌓았는데, 로마시대에 재건축을 거쳐 지금까지 일부가 남아있다. 이 곳에는 기독교가 일찍부터 들어와 주요 기독교 도시 중 하나가 됐고, 7세기에는 아랍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십자군전쟁 때에는 동부로 진출하는 십자군들의 중간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078년에는 셀죽터키의 영토가 되었고 1932년에는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로마시대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한 팜필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거나 조그만 시골마을로 변했는데, 오로지 안탈리아만 관광도시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쿠르순루 폭포 입구. 결국 저곳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폭포는 못 들어가고 강아지와 놀고 있는 다큐 출연자.

쿠르순루 폭포에서 을 먹다

해가 뜨면서 대지는 금세 달아오른다. 내일모레면 10월인데 연일 30도를 웃도는 날씨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어제는 32도였고 오늘도 그 정도는 될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지금 서울은 비가 온다는데, 가을이 오고 있다는데. 문득 그 회색빛 도시가 그리워진다. 오늘 맨 먼저 찾아갈 곳은 쿠르순루 폭포. 폭포라니까 우선 느낌부터 시원해서 좋다. 안탈리아 내륙에는 하천이 많기 때문에 곳곳에서 폭포를 볼 수 있다. 그중 쿠르순루 폭포는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데다 수량도 많아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모처럼 시원한 곳에서 땀 좀 식혀볼까. 폭포로 가는 길은 시내를 거쳐야한다. 이곳도 아침에는 도로 곳곳이 막힌다. 시내를 벗어나서 한적한 길을 조금 달리자 금세 폭포 입구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보통 유적지나 관광지는 믿음 씨의 ()’ 하나면 무사통과다. 다큐촬영팀은 터키관광청이 자국의 관광산업을 홍보하기 위해 초청한 사람들이고, 믿음 씨는 관광청에 고용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르순루 폭포는 개인이 조성한 곳이기 때문에 공짜 입장은 어림도 없다는 반응이다. 촬영을 하려면 900리라를 내놓으라는데 그야말로 턱없는 가격이다. 믿음 씨가 난감하게 됐다. 체면도 말이 아니다. 일행은 하릴 없이 공터에 앉아 강아지하고 놀고 있는데 믿음 씨는 이리저리 분주하다. 아무리 개인 것이라고 해도 외국에 홍보되면 좋을 텐데 왜 그러지?

해변에는 이런 으리으리한 호텔도 있다.

이곳도 호텔.

믿음 씨는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여기저기에 전화를 한다. 관광청장과 직접 통화까지 했지만 우리는 끝내 폭포를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더럽다 더러워. 그깟 폭포 우리나라에도 많다. 너희들이 구곡폭포를 알아? 천지연폭포라고 들어나 봤나? 박연폭포는 또 어떻고? 홍보를 해주겠다는데 그깟 문 한번 못 열어 주냐? 열김에 꿍얼거려보지만 돌아가는 길의 분위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다. 미안해진 믿음 씨가 이 얘기 저 얘기로 분위기를 띄워보겠다고 애 쓴다. 그 중 러시아 사람들이 호텔을 이용하는 습관은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하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호텔에는 객실마다 미니바라는 게 있다.(물론 없는 호텔도 있다.) 미니바라고 대단할 건 없다. 우리나라 여관에도 있는 조그만 냉장고일 뿐이다. 거기에 물, 음료, , 가벼운 안주, 초콜릿까지 넣어놓고 일종의 장사를 하는 것이다. 호텔에서는 그 객실에 묵었던 손님이 체크아웃 할 때 뭘 먹었는지 조사해서 비용에 추가시킨다. 그런데 이 미니바가 가끔은 사람을 당혹시킬 때가 있다. 타인의 부담으로 간 여행이라도 미니바 이용 요금은 개개인이 부담해야한다. 문제는 가격이 시중보다 훨씬 비싸다는데 있다. 술 가운데 양주는 보통 미니어처 병에 들어있는데, 서비스로 넣어둔 줄 알고 마구 마셨다간 주머니를 털리는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미니바를 공짜로 이용하는 특출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러시아 사람들이다.

거리의 작은 공원.

저곳도 러시아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는 호텔이다.

집시 여인을 만나다

그들의 수법 중 가장 흔한 게 물을 마시고 빈 병에 수돗물을 채워 넣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술병에 물을 채워 넣기도 한다. 단체 관광객이 오면 객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손님을 내보내기에는 시간이 벅차다. 그러니 물병 뚜껑까지 돌려볼 틈은 없을 수밖에. 또 어떤 여자들은 가방에 미니바의 내용물을 몽땅 쓸어 넣고 간다고 한다. 하긴 미니바를 통째로 메고 가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떠난 다음 호텔 측에서 연락을 하지만 쓸어갔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니 호텔에서도 대비책을 세울 수밖에. 최선의 수단이 바로 러시아인들이 예약을 한 날에는 미니바에 있는 걸 몽땅 치우는 것이란다. 관광을 다니고 호텔을 이용할 정도면 가난 때문에 가져가는 건 아닐 텐데, 견물생심이겠지. 무한한 인간의 욕심에 대해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물론 러시아 관광객이라고 모두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버스는 다시 시내를 달린다. 출근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도로는 아까보다 한산하다. 어라? 저게 뭐야? 당나귀 달구지를 몰고 천천히 지나가는 고색창연한 여자가 시선을 잡는다. 높은 빌딩, 달리는 차들 속에 흡수되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풍경이다. 믿음 씨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집시란다. , 집시들이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터무니없는 동지의식(?)에 눈길은 자꾸 지나온 길을 더듬는다. 사실 직접 집시를 보는 건 처음이다. 그들이라고 머리에 뿔이 돋았으랴만 늘 궁금했던 터였다.

당나귀 달구지를 몰고가는 집시여인. 버스와 멀어서 선명하게 찍을 수 없었다.

라라비치의 모래조각들. 어떤 영화인지는 각자 알아맞혀 보시길.

집시(Gypsy), 흔히 인도 북서부에서 9~10세기에 출발한 유랑민족이라고 말하지만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히말라야산맥의 산록이나 평야가 고향일 거라는 설은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들이 왜 그곳을 떠나서 세상을 유랑하는지에 대해서도 이거다라고 설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고유의 언어를 지키는 등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초에 동유럽을 거쳐 유럽 각지에 퍼졌는데 지금은 유럽·소아시아·아메리카 대륙 등에 흩어져 있다. 인구는 약 180~4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지금의 터키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를 소아시아라 부르니 이곳에 집시가 있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들은 포장마차를 집 삼아 여기저기 떠돌며 음악사, 땜장이, 점술사 등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요즘은 우리의 봉고차 같은 미니버스에 거주하는 집시도 많다고 한다. 집시란 이름은 영국에서 그들의 발상지를 이집트(, Egyptian)라고 오해한 데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보헤미안이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문학작품 등을 통해 알려져 있다. 특히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콰지모도가 사랑하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는 세월이 가도 가슴에 눈물로 각인돼 있다. 난 그들의 정착하지 않는 삶이 아닌 정착할 수 없는 삶을 동경한다. 대대손손 핏 속을 흐르는 그 역마살. 몸이 타버릴 것을 알면서도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구속 없는 세상을 향해 끝없이 방랑하는 그 유전자를 사랑한다. 느닷없이 만난 집시 덕분에 이야기가 옆길로 샜다.

역시 모래조각 퍼레이드.

누드비치 아닌 샌드비치

지금 일행이 가는 곳은 라라비치. 안탈리아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모래해변이다. 그중에서도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땐 입장료를 받는다. 대체 이곳에 무엇이 숨어 있길래 사방에 담을 두르고 돈까지 받지? 혹시 말로만 듣던 그 누드비치? 후르륵! 일단 가출하는 침부터 단속하고. 믿음 씨를 따라 문을 들어서니 아! 바로 sand land, 모래천국이다. 물론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남녀는 없다. 한 눈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숱한 모래조각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재연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눈에 들어오더니 그 옆에는 킹콩과 타잔이 금방 밀림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한 모습으로 서 있다. 다른 쪽에는 스타워즈 군단과 토이스토리의 주인공들이 추억을 자극하고, 터미네이터의 주인공은 모래가 되어서도 “I will be back”을 외치고 있다. 벽에는 커다란 글씨로 ‘lara SANDland HOLLYWOOD’라고 새겨놓았다. 그런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비가 오면 어쩌지? 뭘 어쩌겠어, 완전히 날 새는 거지. 워낙 넓어서 지붕을 씌우기도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잖아도 한쪽에서 수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반바지를 입은 한 여성이 물을 뿌려가며 무너진 모래를 다듬고 있다. 손길이 무척 섬세하다. 최근에 비가 왔기 때문에 수리하는 것이란다. 조금 더 나가니 이번엔 전쟁시리즈가 기다리고 있다. 비교적 최근 영화인 ‘300’을 지나고 라이언일병과 반갑게 조우한다.

비로 망가진 모래조각을 수리하는 여인.

화려한 호텔 문. 러시아인들은 저런 호텔을 통째로 전세 내기도 한단다.

이 모래조각공원이 만들어진 건 2006년부터라고 한다. 안탈리아가 천혜의 관광지이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테마공원을 만든 것이다. 휴가철이면 각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올 여름만 해도 20만 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1인당 입장료가 8리라니까 대체 얼마를 번거야. 라라비치를 나와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믿음 씨의 러시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창밖을 스쳐가는 화려한 호텔들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동기가 됐다. 이번엔 부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는 전세 비행기로 안탈리아에 와서 호텔이나 빌라를 통째로 세내서 즐기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모텔이나 펜션도 아니고 저 으리으리한 호텔을 통째로? 기가 막힌 내가, 대체 누구길래 그리 돈이 많으냐고 물으니 믿음 씨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마피아 아니겠어요?” , 마피아. 나도 진즉에 그런 직업이나 해볼 걸. 아무튼 어떤 부자는 하루 저녁에 6500달러 씩 하는 빌라를 빌려서 92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그럼 대체 얼마지? 대충 계산해 봐도 숙박비만 7억 원이 넘는다. !! 러시아에도 밥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한 때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다는 거 맞아? 앞에서도 안탈리아가 터키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밝힌 적이 있지만, 참 다양한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중 가장 많은 건 역시 러시아사람들이란다. 격세지감이란 말을 곱씹는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prev 1 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