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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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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흐맛 강이 있는 다렌데.

다렌데로 가는 길에 만나는 산들은 황량하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이 지역엔 10년 전보다 눈()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막화는 분명 아닌데. 신기한 게 하나 있다. 아나톨리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삭막한 땅 천지다. 그런데 이 나라는 7,0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먹고 남을 정도의 식량대국이다. 비옥한 토지는 대체 어디에 숨겨놓은 것일까. 다렌데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 이곳은 말라티아주 서쪽 끝에 있는 조그만 읍이다. 말라티아 시내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토흐맛강 주변에 형성된 유원지 덕분. 버스에서 내리니 조그만 광장이 인파로 북적거린다. 마침 인근의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마친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활기가 넘쳐서 좋다. 동네 한 가운데로 토흐맛강이 힘차게 흐른다. 물은 석회 성분이 섞인 듯 뿌연 색을 띄고 있다. 산은 나무 한 그루 품지 못하는데 어디서 이런 물이 나올까? 아마 지하에서 솟은 물이겠지.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강변마을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아니, 음식점 빼면 별게 없다. 커다란 모스크와 우뚝 선 미나레트가 차라리 이질적으로 보인다. 강 위엔 엄청나게 큰 수차가 돌아가고 있다. 지금은 구경거리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물방앗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밀을 찧어 가루를 만들고 그 밀가루로 빵을 만드는 빵집이 생기고 동네 사람들은 아침마다 빵을 사러오고. 사는데 없으면 안 되었던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그저 풍경으로 남거나 등을 돌려 떠나야 한다. 사람이라고 안 그럴까.

 

토흐맛 강.

소문주 바바 사원의 미나레트.

점심식사로 나온 송어구이.

풍경이 좋은 강가에 앉았지만 내게는 어떤 음식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곳 역시 송어구이가 나온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송어요리와 다른 점은 양념을 안 하고 구웠다는 것. 아마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요리인 모양이다. 귀한 손님은 아무나 하나? 내 위장에 앉은 커다란 바위덩어리 하나는 꿈쩍도 안 한다. 소화제를 먹고 응급조치를 취해보지만 나아질 기색이 없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음식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물이나 마시자니 보통 고역이 아니다. 정말 걱정되는 건 체력이 급격이 떨어지면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데 타격이 크다는 것. 차차 나아지겠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강 건너편에는 잘 지어진 정자들이 서 있는데 가족이나 친구들과 소풍을 온 사람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남자들은 불을 피우느라 연기와 싸우고 있고 여자들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불을 피우는데 영 재주가 없는 가장도 있다. 30분 째 부채질을 하지만 여전히 연기에게 쫓겨 다니기 바쁘다. 저러다 저 가족 굶는 거 아냐? 공공기관에서 세운 정자들은 이용료를 받지 않는단다. 이곳 사람들은 좋겠다. 유원지에 돗자리 하나 까는데도 돈을 내느니 마느니 싸워야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은 부럽기만 하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길에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코레가지의 손자와 만났다. 이름은 이 나라에 흔한 메흐메트. 15살의 고등학생이다. 물론 그냥 평범한 동네 아이들 중의 하나다.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온 할아버지는 18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토흐맛 강의 수차.

토흐맛 강에 소풍 나온 연인들.

한국전에 참전한 '코레가지'의 손자.

아이가 코레라는 나라를 어찌 알 것이며, 설령 안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60년도 더 지난 과거에 그 나라에 가서 싸웠다는 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아이에게는 반가움보다 어색함이 더 크다. 하지만 내 감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산골에서 내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던 한 촌부의 손자를 만난다는 게 우연에 기대는 것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아이와 악수를 나누고 훌리아를 불러 통역을 부탁한다.

네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우리는 영원한 형제다.”

느닷없이 형제라고 우기는 낯선 사내가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아이와 헤어져 소문주 바바 박물관으로 간다. 소문주 바바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 테니 잠깐 설명하고 가자. 소문주 바바(Somuncu Baba)는 사람의 이름이다. 투르크족의 정복 전쟁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소아시아로 이주한 그의 집안은 오스만 제국을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훗날 이슬람의 저명한 학자가 된 그는 긴 여행 끝에 부르사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는 빵을 구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선행이 계속되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는 빵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보시만큼 큰 보시가 어디 있으랴. 그의 큰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사원을 짓고 박물관을 만들었다.

 

 

소문주 바바 박물관에 전시된 빵.

소문주 바바 사원의 아름다운 뜰.

소문주 바바 사원 내부.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니 이 나라, 아니 최소한 이 지역 사람들이 소문주 바바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땅에서 꽃피운 그리스-로마에 비해 문화나 인물의 빈곤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터키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큰 자부심을 주는 지도 짐작이 간다. 박물관은 소문주 바바를 기리는 사원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모스크는 지금까지 본 어느 사원 못지않게 아름답다. 특히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서 토흐맛강을 내려다보는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파란 물빛을 자랑하는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다. 소문주 바바의 후손이 지금도 이 모스크의 이맘(이슬람교에서 예배를 선도하는 사람)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 또한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겠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는 작지만 무척 짜임 새 있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한 가운데에는 소문주 바바의 유해를 안장한 목제 구조물이 있고 그 앞에서 무슬림들이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온 무슬림 여인의 간절한 얼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재미있는 건 실내에 토흐맛강의 근원이라는 수원(水源)이 있다는 것. 조그만 틈으로 들여다보니 정말 물이 흐르고 있다. 또 옆방에는 소문주 바바의 후손들을 안장한 무덤도 있다. 모스크에서 나오니 말라티아 주정부에서 토흐맛강 래프팅을 준비했다고 한다. 래프팅? 물속에 들어가는 거잖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건 아무리 재미있어도 무효. 나만 남기로 한다.

 

 

한국-터키인 혼성 래프팅 팀.

인공폭포.

내가 래프팅을 안 한다니 훌리아도 그냥 남겠단다. 오해할라. 내가 안 하겠다고 해서 남은 게 아니라 원래 그녀도 물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게다. 이렇게 말하면 더 변명 같은가? 래프팅 팀은 강의 상류로 올라가고 훌리아와 나는 점심을 먹었던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래프팅 팀이 내려오는 걸 볼 수 있는 위치다. ! 이제 청춘(?) 남녀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공간에 남았으니 뭔가 비밀스런 일이라도 일어나야 되지 않을까? 훌리아가 내 곁으로 바투 당겨 앉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선생님, 제가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호오! 비밀? 좋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훌리아는 자꾸 뜸을 들인다. 사랑 고백을 하려고 그러나?

그만 뜸들이고 얼른 말해봐.”

사실은요.”

, 그래. 그래.”

저 폭포짝퉁이예요.”

? 그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망설인 거야? 멋대가리 없이 험악하게 생긴 바위산에서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가 하나 있다. 소문주 바바 사원 바로 옆인데 음식점에서 바로 코앞이다. 나는 처음 보는 순간 물을 퍼 올려서 내려 보내는 가짜 폭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훌리아가 아주 엄청난 비밀을 가르쳐준다는 듯이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난 또. 애가 순진한 거야? 키들거리고 있는데 저만치 래프팅 팀이 내려온다. 모두들 흠뻑 젖어있다. 거봐. 안 가길 잘했지.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찾아온 꼬마손님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일행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동네 아이들과 사진놀이를 하면서 논다. 너도 나도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아우성이다. 제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가져온 녀석들도 있다. 맨 처음엔 초등학교 고학년 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려와 수줍게 모델 노릇을 하더니 잠시 뒤에는 수염까지 듬성듬성 난 녀석들이 와서 줄을 선다. 웬 아저씨들? 나이를 물어보니 열여덟 살이란다. 방학을 맞이해서 집에 내려온 학생들이다. 녀석들~ 아들벌도 안 되는 것들이 수염은 많아가지고 사람 쫄게 만들고 있어. 그 중 하나는 아까 길에서 살구 팔던 녀석이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갓 따온 오이처럼 싱싱한 표정들이다. 방학이고 뭐고 공부에 치여서 파김치가 다 돼 있을 우리 아이들이 생각난다. 아무튼 동네 아이들 다 모였다. 하나 둘 셋 카운터에 들어갔다가 카메라 배터리 떨어졌다고 집으로 달려가는 녀석, 전화 왔다고 셔터 누르는 걸 잠깐 유예해 달라는 녀석. 가지각색이다. 아무렴 어떠랴. 행복한 시간이다. 이번엔 이 동네 사는 유치원부터 초등학생들이 다 모였다. 녀석들 줄 세우는 것도 일이다. 제대로 됐나 싶으면 딴전 피우는 놈, 저는 왜 안 찍어주느냐고 징징거리는 녀석. 얌마! 너희들이 가만히 있어야 찍지. 그걸 못 기다리고 그냥 집으로 가는 녀석은 또 뭐람. 작은 동네에 이렇게 아이들이 북적거리니 활기가 가득하다. 이 아이들이 터키의 미래다. 사진을 다 찍고 강을 따라 가는 협곡 트래킹을 하기로 한다. 내가 래프팅은 싫어도 트래킹은 자신 있다.

 

동굴 수영장.

음식을 조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강가의 화덕.

지난해 폐티예에서 카쉬로 가던 길, 샤클르켄트 협곡에서 트래킹을 하다가 웅덩이에 빠지고 수첩을 잃어버렸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번엔 물속으로 가는 길이 아니니 위험할 게 없다. 경치는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아름답다. 길도 안전을 고려해서 제대로 만들어놓았다. 노인이든 아이든 누구나 갈 수 있을 것 같다. 강변에는 음식을 해먹으며 쉴 수 있도록 정자를 세워두었다. 물론 이용료는 없다. 정자에는 전기 콘센트까지 달아두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화덕을 세워놓았다. 음식재료만 싸오면 한곳에서 모든 게 해결되도록 했다. 그것 뿐 아니다. 곳곳에 어린이 놀이터도 만들어놓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주민복지가 뭐 별것인가.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제대로 쉬게 해주는 게 최고지. 국격(國格)이 어떠니 하는 거창한 구호 한마디보다 이런 배려가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조금 내려가니 수영장이 나온다. 이곳의 물이 바로 소문주 바바 사원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천연동굴 수영장도 있는데 동굴에서 나오는 물은 항상 22도라고 한다. 동굴 속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수영을 즐긴다. 수영장이라기보다는 온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잖아도 신경통을 앓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내려갈수록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절벽에는 5000~7000년 전에 쌓았다는 다렌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 그 옛날에도 이 골짜기에 사람이 살았구나. 단 하나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면 곳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 여기 사람들도 좀 문제가 있다.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각자 가져가면 얼마나 좋을까.

 

까마득한 절벽에 놓인 길.

폭포 앞의 음식점.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넥타이처럼 좁은 길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힐끗 쳐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누가 저 길을 지나간단 말이냐. 나는 돈을 지게로 담아준다 해도 못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협곡이다. 협곡을 벗어나 균프나르라는 동네로 간다. 계곡 사이로 들어가니 바위 사이로 거대한 폭포가 굉음을 내며 쏟아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풀 한포기 깃들 여지도 없는 바위산에 어떻게 저런 폭포가 생겨났을까. 저 물 역시 지하에서 용출한 것이겠지. 폭포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단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의 아름다운 곳은 모두 음식점이 차지했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은근히 겁이 난다. 도대체 몇 끼를 굶은 거야. 여행자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래도 남들보다 더 돌아다니고 사람을 더 만나는 걸 보면 아직은 견딜만 하다는 것이겠지? 뭐 안 먹고 일하면 경제적인 거지. 남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하염없이 폭포나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저 거대한 폭포도 내겐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 스토리가 없는 풍경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촌로의 깊은 주름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저 기념사진 몇 장 찍을 거리에 불과하다. 먹는 것도 없이 폭포 앞에 앉아 있으려니까 몸에 한기가 든다. 한낮의 폭염은 기억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저녁을 먹고 나니까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부탁했던 동굴 사람들의 인터뷰가 성사됐단다. 내일 새벽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배고픈 게 싹 가시며 몸에 기운이 솟아오른다.

 

균프나르 폭포.

숙소로 가는 길에 훌리아가 터키에서 운전면허 따는 법을 들려준다. 먼저 학원에 등록해서 석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비행기나 탱크 면허 따는 것도 아니고 석 달씩이나 걸린담. 2개월은 집중 교육을 받는데, 차가 고장이 날 경우 직접 고칠 수 있도록 엔진구조까지 가르친단다. 모든 국민을 정비사로 만들 생각 아닐까? 그래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면 각국에 취업을 시키는 거지. 물론 나 혼자만의 상상이다. 그러고 보면 장점도 꽤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차가 고장 나도 보닛조차 열지 못하고 발을 구르는 경우가 한 두 번인가. 두 달의 공부가 끝나면 남은 1개월은 진짜 운전 연습을 한다. 필기와 기능은 우리처럼 학원에 위탁해서 시험을 본다. 시험에 합격하면 학원에서 국가에 기록을 보내고 면허증이 발급된다. 절차가 길고 복잡해서인지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우리나라보다 적은 것 같다. 최소한 직진만 3시간짜리 초보운전자는 없을 것 같다.

 

 

동굴로 가는 길가의 양귀비꽃.

아침 다섯 시. 부랴부랴 일어나 샤워를 한다. 오늘 아침에도 코피는 어김없이 흐른다. 뱃속에 들어앉은 돌멩이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힘차게 숙소를 나선다. 동굴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말라티야 시내에서 한 시간 넘게 달려가야 한다. 지대가 높아지면서 차도 헐떡거린다. 가드레일도 없는 절벽 길의 연속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차 안에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렇게 돌고 또 돌아 산정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아래서는 위가 까마득해 언제 가나 싶더니, 이제는 저 아래가 까마득한 세상이 돼버렸다. 이 길이 생기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꽤 오래 전 동굴에 사는 가장이 수상에게 편지를 썼단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최소한 길은 뚫어줘야 할 것 아니냐고. 그 수상 착하기도 하지. 주 정부에 지시를 내려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어줬단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편하게 올라간다. 하지만 어느 지점쯤 가니 차도 주저앉는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야한다. 차에서 내려 보니 모든 게 저 아래 엎드려 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저절로 왕이 될 것 같다. 세상이여, 내게 경배하라! 중간 중간에 집들이 보이고 손바닥만큼 작은 밭들도 여기 저기 박혀있다. 척박한 환경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의지가 읽혀진다. 이른 아침이고 2000m가 넘는 고지대다 보니 제법 쌀쌀하다. 배낭에 넣어뒀던 점퍼를 꺼내 입는다. 엉겅퀴와 꽃양귀비가 햇살에 꽃잎을 널어놓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양귀비, 고독해 보여서 더욱 아름답다. 사람도 가끔은 그렇게 홀로 서 볼 일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대중 속에서 떠나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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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 입구.

박물관에 전시된 칼.

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은 인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지금 터키가 자리 잡고 있는 땅, 아나톨리아는 굴러다니는 돌 하나까지 문화재급이다.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별로 크지는 않지만 아슬란테페 유적 등 다양한 유물들과 만날 수 있다. 아슬란테페 유적? 이름 자체가 낯설 테니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히타이트 제국 등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명멸한 문명들이 남긴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라고 해두자. 낯선 단어만 나오다 유프라테스 강 하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학교에서 들어본 단어 아니던가. 물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난 유프라테스 강이 터키 땅에 있어? 에이, 금시초문인데. 이렇게 되면 또 막막해진다.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하단 말이냐. 그나마 조금 덜 낯선 히타이트 문명부터 풀어가자. 이름이 낯선 사람도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하던 제국이라고 하면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히타이트 제국은 BC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 하투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이다. 당시 유럽은 청동기 문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철로 만든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이 나타났으니 양들 한가운데에 늑대를 풀어놓은 격이었을 것이다. 파죽지세의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과 시리아 북서부, 남쪽으로는 지금의 레바논까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했다. 그때 인류의 가장 오래된 평화 조약인 카데시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항아라등 도자기류.

고대 쐐기문자.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카데시라는 벌판에서 전쟁을 벌였다. 소설 람세스로 유명한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 역시 용감무쌍했지만 무른 청동칼로 단단한 쇠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때 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평화조약이 카데시 조약이다. 히타이트는 철 생산기술을 절대 다른 나라에 알려주지 않았다. 돈을 가져와 사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값이 금값의 5, 은값의 40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그렇다면 철을 기반으로 지중해가 마르고 아라랏산이 닳도록 번영을 누려야 했을 그 거대한 제국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답은 예상 외로 좀 싱겁다. BC 1180년 이후 사라진 건 분명한데 뚜렷한 이유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바다의 민족(그리스계 도리아인으로 추정)에 의해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갑자기 그런 종족이 하늘서 떨어진 걸까? 엄청난 화재를 겪었다는 설도 있다. 또 전염병에 의한 멸망설도 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전쟁을 할 때 히타이트에 사로잡힌 이집트 포로들은 천연두에 감염돼 있었다고 한다. 결국 군인들은 물론 히타이트 왕과 그의 후계자까지 천연두에 전염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여 멸망했다는 설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생물학전의 원조가 아닐까. 아무튼 아무리 강한 자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은 분명히 남겼다. 주먹 세다고 너무 큰 소리 칠 건 없다. 히타이트 얘기는 이쯤 하자. 남의 땅의 문명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한반도에 찍힌 공룡발자국만 하랴. 지금 나는 히타이트 제국이 융성했던 땅에 서 있고, 내가 들어서는 이 박물관에 그들의 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설명이 좀 길어졌다.

 

화살촉 등 석기.

각종 장신구.

아기 옹관. 어린 아이의 뼈가 보인다.

박물관은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 하지만 전시물들의 이력은 만만치 않다. 유물 중에는 BC 6000년경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옛날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면역이 돼서 BC 6000년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떡 끄덕 하지만 따지고 보면 놀랄만한 것들이다. 단순하게 비교해보자.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BC 2333년으로 본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의 유물들이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뒤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은 것보다 무려 3,600년 전쯤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단군이 남긴 유물들이 있던가? 각설하고 고고학의 문외한인 내 눈에는 별로 특별해 보이는 게 없다. 돌화살 같은 석기시대 유물과 그 뒤에 만들어졌을 각종 토기, 그리고 히타이트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칼들이 눈에 띈다. 아슬란테페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폭풍의 신이 뱀과 벌이는 전투, 문의 사자, 타르훈자 왕의 조상, 생명의 나무, 풍요의 여신 쿠바바, 사슴사냥 등의 이름이 붙은 유물들이다. 이름들은 멋지지만 뭐가 뭔지 알 방법이 없다. 1986년 유프라테스 강에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유물도 많다고 한다. 역시 삽질은 반문명적이라니까. 밖으로 나오니 거리의 온도계가 34도에서 36도를 오르내린다. 서울보다는 높지만 이 정도야 뭐. 점심을 먹을 곳은 말라티아 전통가옥. 도심의 시네마 거리에 있는 이 가옥들은 1900년대에 지어진 2층집들이다. 2008년에 복원했는데 박물관, 예술의 집, 전통음식 음식점 등으로 쓰이고 있다.

 

1900년대 지어진 전통가옥.

우리로 보면 삼청각 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음식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다. 역시 빵과 케밥이 주류. 하지만 역시 고급음식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입맛이 썩 당기지는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어디를 가도 없어서 못 먹는 내가 이번 여행엔 자꾸 입맛 타령을 하게 된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음식을 앞에 놓고 깨작깨작 속투정을 하다 보니 어제 이젯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이젠 제법 친해져서 농담까지 스스럼없이 할 정도가 됐다.

일본 사람들 재미없어요. 심각해서 농담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정말 재미있어요.”

정말? 혹시 일본 사람 만나면 한국 사람 재수 없다고 그러는 거 아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한국 사람이 훨씬 재미있어요. 한국 음식도 훨씬 맛있어요.”

그래? 내가 좀 재미있기는 하지. 그런데 한국에 갔을 때 뭐가 가장 맛있었어?”

김치찌개요. 그리고 라면.”

에이 참. 그게 뭐니? 입이 왜 그렇게 싸구려야?”

그런 대화를 나눴다. 헌데, 그런 말을 한 게 후회된다. 김치찌개와 라면이 싸구려라니. 그 맛있는 음식이? ,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찌개 먹고 싶다. 고급음식 앞에서 김치찌개 타령을 하고 있자니 내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나도 배부른 여행자가 다 된 게야. 그러다 벌 받을 텐데.

 

점식식사로 나온 빵과 샐러드.

괜히 말 시켰나봐. 이젯의 김치찌개에 대한 열망은 집요했다.

그런데,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안 넣었으면 좋겠어요.”

? ? 김치찌개하고 돼지고기가 궁합이 얼마나 잘 맞는데 그래. 그거 없으면 고무줄 없는 거시기지.”

말을 하다 보니 아차 싶었다. 이슬람국가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실수를 한 셈이었다. 절에 가서 스님에게 왜 맛있는 새우젓을 안 드세요하면 기분 좋겠는가. 무슬림들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걸까.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누가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슬람국가에서 왜 돼지고기를 안 먹는 줄 아세요? 옛날에 어느 힘 있는 사람이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만 먹으려고.”

, 그건 종교를 모독하는 발언이지. 혹시 먹는 것에서 초탈하라는 교훈 때문이면 몰라도.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근거가 분명하다. 역사 공부를 하느라 머리도 아플 테니 잠시 그 얘기를 풀어놓고 가자. 우선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꾸란)을 읽어보면 돼지고기에 대해 분명히 언급해놓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먹지 말라고 써놓은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취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만을 숭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한 분이니라. (코란 2172~173)

 

 

말라티아의 일반 가옥.

 

말라티아 거리 풍경.

코란의 저런 말씀은 왜 나온 걸까. 일반적으로 돼지고기에는 여러 가지 병원균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해롭다, 돼지의 품성이 게을러서 가까이 할 게 못된다, 고기가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사막의 기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들 말 한다. 그것 말고도 돼지고기가 이슬람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막이나 평원에서는 이동 거리가 넓기 때문에 육포를 만들어서 갖고 다니며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한다. 헌데, 돼지고기는 그 조건에 완전 미달이다. 지방질이 많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건조되는 대신 부패되기 쉽다. 지금이라면 통조림이라도 만들었겠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젖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선택받지 못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먹기만 하고 나눠주지를 않다니, 고연 것. 뭐 이렇게 미움을 받지 않았을까. 또 잡식성인 돼지야말로 풀만으로는 키울 수 없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곡식을 나눠주다니. 안 키우고 말지. 사막이든 산악지대든 초식동물의 배설물은 대부분 말려서 연료로 쓴다. 헌데 아무거나 먹어대는 이 돼지란 녀석의 배설물은 석 달 열흘을 말려도 냄새만 날뿐이다. 남 흉볼 것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뿐인가. 다른 곳에도 쓸모가 별로 없다. 등에 짐을 나를 수 있나? 타고 적과 싸우러 전쟁터에 나갈 수 있나? 털로 실을 만들 수 있나? 그런 돼지고기가 한국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니, 이슬람 전파에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다.

 

간이 점포에서 옥수수 등을 팔고 있다.

지나가던 훌리아가 자신이 빠지면 큰 일 날세라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음식 얘기는 끝난 지 오래였다.

터키 여자들이 가장 즐겨 입는 옷이 무슨 색깔인 줄 아세요?”

글쎄, 나는 뭐 여자들을 유심히 안 보는 점잖은 사람이라.”

킥킥!(뻥 치시네) 빨간 색 옷을 많이 입어요.”

?”

터키 국기가 빨간색이니까요.”

이거 진담이야? 사실이라면 대단한 애국심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가 이념싸움에 볼모로 잡혔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훌리아가 빨간 옷을 입었네? 진즉에 예쁘다고 해줄 걸.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터키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어딘 줄 아세요?”

으음~ 글쎄? 한국?”

물론 한국도 좋아하지만 미국을 가장 가깝게 생각해요. 경제적으로 가까운 곳은 유럽이지만.”

그럼,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어딘데?”

그리스요.”

터키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스 사람은 터키 사람을 죽도록 싫어한다. 원래 이웃이란 건 그렇게 가깝고도 먼 것인가? 잠시 일본이라는 나라가 떠올랐다.

 

거리의 작은 가게.

그리스 하면 대개 발칸반도 남단의 반도 국가를 떠올린다. 틀린 건 아니지만 거기서 끝나면 반만 알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는 국가 이전에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정석이다.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 그리스 문화는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로 발전했고,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또 하나, 그리스는 국가라는 틀 이전에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먼저다. 그들이 문화를 꽃피운 곳, 즉 그리스화가 가장 잘 이뤄진 곳이 바로 지금 터키가 차지한 아나톨리아 반도다. 숱한 사람이 오가고 숱한 국가가 명멸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오랜 시간 이 땅에서 살아왔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의 새 주인은 오스만이 되었다. 오늘 날 앙숙이 된 결정적 계기였다. 비잔티움 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백성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름이야 어떻든 그리스인들로 보면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오스만 체제하에서 간헐적으로 독립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스라는 국가가 태어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8세기부터 불기시작한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이 그리스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829325일 정식으로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 , 지금의 그리스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패하면서 동네북이 된 터키는 왕년에 우습게 보던 그리스에게도 핍박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거리의 온도계. 현재 온도 34도.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고토를 수복하고,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19년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를 공격한다. 1920년에는 아나톨리아 서부 대부분을 차지했다가 후퇴하면서 도시들에 불을 질러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21년에 또 다시 침공했지만 무스타파 케말에게 패퇴한다. 더 큰 미움의 씨앗은 1923년 체결된 로잔조약이었다. 세계 1차대전 패전국 터키와 연합국간에 체결된 이 조약에서 터키는 이스탄불을 지키는 대신 에게해의 섬들을 그리스에게 내주고 만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 이 조약에 의해 자국 국민이 교환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살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이 터키를 떠났고 그리스 땅에 살던 40만 명이 터키로 돌아갔다. 터키인들은 지금도 바다만 바라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코앞의 섬들이 전부 그리스 영토니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를 수밖에. 증오가 얼마나 큰지 터키에서는 TV에 그리스인이 나타나기만 해도 토마토를 던지며 괴성을 지른다고 한다. TV 깨질까봐 차마 돌은 안 던지는 것 같다. 이 정도면 견원지간이란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얼마나 '다정한' 이웃인지. 끝으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더. 우리나라 사람들, 그중 세계 역사 좀 안다는 사람에게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가 태어난 곳은 어디지요?’라고 물으면 터키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혼동 때문이다. , 우리처럼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땅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헤로도투스든 사도 바울이든 소아시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터키 땅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터키 사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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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야기, 그 두 번째 장정을 시작합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4월까지 연재했던 터키, 지중해를 따라 걷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산후 조리도 못한 채 이스탄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일종의 신고 의식이 필요했던 셈이지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번엔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블로그에 연재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냥 책으로 낼까.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는 오랜 원칙을 깰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부터 또 긴 여정에 들어갑니다. 읽은 뒤 그냥 가지 말고 한 줄 답글로 아는 척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권과 마찬가지로 댓글로 격려해주신 분들에게는 2권이 출간된 뒤 저자 사인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사진 왼쪽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오른쪽으로 꺾어진 해협이 흑해와 연결되는 보스포루스, 가운데 강 같은 곳이 골든혼이다. 육지는 맨 왼쪽 반도처럼 나온 곳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 골든혼을 건너 펼쳐진 땅이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그리고 앤 앞쪽에 보이는 것이 아시아 땅이다.

전쟁? 절대 안 나요.”

새벽 430.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두 명의 청년. 시리아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냐고 들이대듯 묻자, 모루에 해머를 내리치듯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 왜 안 난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쟁을 해서 이득을 보는 쪽이 아무도 없거든요. 시리아는 물론이고 터키 역시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나면 관광산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잖아요. 또 전쟁에서 이긴다고 땅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옛날하고는 달라요.”

으으음”(엄청나게 감탄했다는 듯 끄떡끄떡)

미국도 이스라엘도 이득 볼 게 없고중국 역시 반대하는데다 NATO도 전쟁에 참여할 생각 같은 건 아예 없어요.”

그렇구나. 전쟁이 안 일어나는구나. 헌데, 이 친구들 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해박하지? 내가 장군 출신의 군사평론가들을 만난 건가? 그나저나 안 물어봐줬으면 얼마나 섭섭할 뻔 했니? 나는 감탄을 지나 감동까지 하고 만다. 하늘의 점지로 우연히 만나게 된 터키 청년들. 한국에서 3년가량 일하고 돌아왔다는 그들과의 질펀한 수다가 시작된다. 너희들 딱 걸렸어. 내가 바로 그 유명한 호기심 사나이거든.

 

하늘에서 본 이스탄불.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이 가장 걱정한 게 더위전쟁이었다. 더위야 최종 목적지로 잡은 샨르우르파란 곳이 섭씨 50도를 넘나든다니 염려해주는 게 당연하지만 느닷없이 전쟁 걱정은 왜? 출발을 코앞에 두고 터키와 시리아 간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예고하는 사건이 터졌다. 먼저 시리아가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며 지중해 연안에서 터키 전투기를 격추했다. 불뚝 성질 하나만큼은 선불 맞은 멧돼지도 부럽지 않을 터키가 넙죽 엎드려 있을 턱이 있나. 반응은 즉각 나왔다. 국경에 접근하는 시리아 군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하고 대공포와 미사일 발사기 등을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여기까지가 출발 직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문제는 내가 갈 곳이 바로 잘못 넘어지면 배꼽이 국경선을 넘어갈 정도로 시리아에 가까운 접경지역이라는데 있었다. 몇몇 사람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고 몇몇 사람은 뭔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등을 떠밀었다. 이참에 날 치워버리겠다는 심보겠지? 나는 잘하면 종군기자 한번 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전혀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현실성 떨어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목표로 했던 지역을 가지 못할까봐 노심초사였다.  그러다보니 공항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전쟁’일 수밖에 없었. 터키 사람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공항이나 이스탄불, 그리고 훗날 접경지역에서 만난 그 누구도 전쟁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걱정 따위는 서리서리 접어 배낭에 넣어두고 어렵게 만난 청년들하고 놀아볼 일이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터키 청년들.

주로 이야기를 나눈 청년의 이름은 이브라힘이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유일신 3대 종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슬람식 표기가 바로 이브라힘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에는 드물지 않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한국에서 일했다는 경험이상의 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갔을 때 서울에서 일했어요?”

아뇨, 저는 주로 지방에 있었어요. 혹시 예산이라고 아세요?”

예산?(사람들이 놀라 돌아볼 만큼 목소리가 커진다) 아다 마다야? 그쪽이 바로 내 고향이에요. 수덕사라고 들어봤어요? 내가 거기서 자랐거든.”

정말요?(기특한 것. 한국식 추임새까지 넣을 줄 알고). 제가 바로 예산에서 일했어요. 수덕사도 당근 알지요. 덕산을 거쳐서 가는.”

어라? 어라?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야. 이 머나먼 곳에 와서. 이 정도면 고향 동생? 아니, 동생이라기에는 나이차이가 좀 나고. 아무튼 객지에서 고향의 조카쯤 만난 듯한 감동이 물밀 듯 몰려온다. 이야기는 거침없이 달려 나간다. 말투도 은근히 내려간다. 그의 소망은 한국에 가서 식당을 차리는 거란다. 전에 돈을 좀 벌어서 식당을 열었는데 망했다고 아쉬워한다. 터키에도 코리언 드림을 품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하고 약간은 불안하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공항 내부.

식당을 차리면 서울은 좀 어려울 것 같고. 대전이나 천안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저 개업하면 형이 신문에 내줄 수 있어요?”

그럼, 내주다마다. 신문이 문제야? ‘테레비에도 빵빵 때려줄 테니 차리기만 해.”

내가 준 명함에서 신문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 친구, ‘실속하나 챙긴다. 나는 훗날 걱정 같은 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덜컥 굳은 맹세부터 한다. 내가 무슨 재주로 음식점 개업 소식을 신문에 내고 TV에 때려준단 말이냐. 하지만 그 소망 가득한 눈망울 앞에서 차마 “No”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용기부터 주는 거야. 그나저나 언제부터 우리가 형 동생이 됐지? 아무렴 어떠랴. 터키에 어린 동생 하나 생겼으니 좋은 일이지. 우리는 공항 대합실 한 가운데 서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사진도 신나게 찍어댄다. 남들이야 흘끔거리건 말건. 그러다가 결국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말았다. 그의 뜨거운 피가 내게로 내 피가 그에게 흐르는 느낌이 선연하다. ! 너와 나 사이엔 원래 하나의 이름을 가진 강이 흐르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번 여행 일정에 넴루트 산이 있다니까 그쪽의 아드야만이 자기 고향이라고 또 한 번 팔짝 뛰며 반가워한다. 그래, 인연이라는 게 이렇다니까.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니 안내하고 싶다며 금방이라도 따라나설 기세다. 하지만 그도 직장생활을 하는 몸. 말만으로도 고맙지. 작별을 하기 전에 터키인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새벽 승객을 기다리는 공항택시들.

내 동생, 이브라힘아, 너는 네가 유럽인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해?”

유럽이든 아시아든 아무 상관없어요. 우린 터키사람이거든요.”

우문에 현답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물어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알다시피 터키는 국토의 97%가 아시아 땅(아나톨리아)에 있고 단 3%(트라키아)만 유럽의 끝 발칸반도에 걸쳐 있다. 영토의 비중으로 보면 아시아에 속한 국가라고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의 일원이 되고 싶은 열망을 오랫동안 품어왔다. 오스만 제국이 세계를 호령할 때, 동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삼고 아시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기억을 갖고 있는 투르크족. 그 위대했던 시절에 대한 미련일까. 세계 1차 대전에서 참패하고 1923년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에게해의 섬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스탄불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유럽 땅을 갖는다는 상징성과 서구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켜야 한다는.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는 아시아의 이름으로 살기보다는 영광이 대대손손 계속 될 것 같은 유럽에 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찬반 논란이 거세긴 했지만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도 ‘EU Style’이다. ‘준비된비회원국인 셈이다. 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에서는 달러보다 유로화가 주로 통용된다.

 

세상은 아직 박명 속에 잠들어 있다.

하지만 터키는 여전히 유럽연합의 외곽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회원국인 그리스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과 인권이나 키프로스 갈등’, ‘쿠르드족 문제등을 가입 거부 이유로 들지만 까놓고 말하면 유럽은 터키가 싫은 것이다. 과거의 정복자에 대한 공포의 잔해도 있을 테고, 어쩌면 기독교 문화권에 이슬람 문화를 끼어주기 싫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터키 경제에서 별로 덕 볼 것도 없으니 잘(?) 나가는 자기들끼리 놀아보겠다는 수작이기도 하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요즘은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 역시 유럽이 전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등 몇몇 나라의 경제가 도미노 게임이라도 하듯 무너지면서 세계 경제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판이니 그 아수라장에 무엇 하러 낄 것인가. 더구나 이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아시아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당신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 거야? ‘유럽이든 아시아든 상관없다. 우리는 터키 사람일뿐정답이다. 스스로의 자존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뒤에 몇몇 사람에게 물어봤을 때도,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듯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얘기가 잠시 무겁게 흘러갔다. 읽다가 덮은 독자는 없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임을 알아야 된다. ‘아빠 좋아? 엄마 좋아?’ 식의 선택지는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니. 아무튼 공항에서 금방 만난 동생 이브리힘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드디어 가이드들을 만났다. 맨 오른쪽이 이젯, 가운데가 훌리아.

한국에 오면 꼭 전화해. 알았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멀어지는 그의 어깨가 듬직하다. 근처에 서 있다가 잠깐 눈이 마주친 여행작가 P가 감탄사를 섞어 한마디 한다.

참 빠르시네요.”

뭐가 빠르다는 거지? 사람 사귀는 게? 내 삶이 그래요. 나는 오로지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여행을 하는 걸. 그리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또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걸. 이별은 상봉을 낳는 것일까? 이브리힘과 헤어지는 찰나에 가이드들이 허겁지겁 나타난다. 그들이 지각하는 바람에 일행은 잠시나마 공항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새로운 사람을 사귈 기회를 얻었지만. 가이드는 남녀 2명이다. 그들 눈에는 옆 사람과 내가 닮아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들 둘이 무척 닮아 보인다. 혹시 남매나 부부 아닐까? 뭐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둘 다 키가 크지 않고 아담하다.  내가 큰 키가 못돼놔서 작은 사람들을 만나면 형제애부터 느낀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큰 사람은 가까워지는 단계부터 약간 부담을 느낀다. 가끔은 터키 사람들이 유럽인처럼 키가 큰 줄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큰 사람은 크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작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생긴 것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짐작이긴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 몽골초원에서 돌궐족으로 살 때는 우리네 생김새와 많이 비슷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중앙아시아를 지나며 적절히 피를 섞고 또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또 다른 피를 섞으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의 멀고먼 여행 이야기는 터키 역사를 말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하자.

 

여자 가이드의 이름은 훌리아(Fulya). 이들의 한국말은 조금 전에 헤어진 친구들보다 어눌하다.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 훌랄라라고 할 때 훌리아예요.”라며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준다. 훌랄라? 이거 또 괴물 하나 나타난 거 아냐? 그 순간 그녀가 말한 훌랄라는 훗날 많은 사람의 입에서 울랄라가 되기도 하고 얼랄라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지만 한국에는 단 하루만 가봤다는 스물일곱의 그녀. 명물이다. 남자 가이드의 이름은 이젯 혹은 가제트를 연상시키는 이제트(Izzet). 어라? 이제트? 이집트에서는 여자 이름인데? 람세스 2세가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잖아. 이 친구는 비교적 과묵한 편이다. 스물여덟 쥐띠라고 한국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역시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포항에 있는 선린대에서 6개월 어학연수를 받았다. 그 역시 숱한 전설을 남겼다. 한국에 하루 가본 훌리아나 현지에서 6개월 공부한 이젯이나 말이 유창하지 못하긴 마찬가지. 나는 내가 터키말을 배우느니 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로 한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의 한국어 교사다. 하드트레이닝을 시킬 테니 각오하라. 속으로 하는 생각을 그들이 알 턱이 있나. 물론 암울한 미래도 알 수 없겠지. 비행기가 도착한 게 현지시간으로 4시 40분. 새로 만난 동생과 수다를 떨고 가이드들과 감격의 상봉을 해도 아침 먹을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다. 공항을 한 바퀴 돌아본다. 밖으로 나가니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맑은 날이 많은 터키에서는 보기 드문 하늘이다. 9개월 전에 만났던 폭주족 택시운전사가 생각난다. 생명을 담보로 유희를 즐기던 그, 잘 있겠지? 별 사람이 다 보고 싶다.

 

 

차 안에서 찍은 이스탄불의 주택가.

이스탄불 시내로 가는 길. 새벽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오욕칠정. 그리고 밝음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음습한 뒷골목 풍경. 사람 살이가 모두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이 아니던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게  느닷없이 생각 나 이젯에게 묻는. 이 느닷없음이야말로 나의 오랜 지병이다.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어요?”

? 무슨촌요?”

단어 자체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하긴 학교에서 그런 말을 가르칠 리 있나. 하지만 무슬림이 대부분인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이리 저리 설명해 보지만 성매매라는 단어조차 모르니 요령부득이다. 이게 어디 온갖 단어를 동원해 설명할 일이던가.

돈 주고 여자를 사는 곳, 몰라요?”

그 말은 효과를 본 모양이다. 잠시 얼굴이 붉어지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있어요.”

정부에서 인정하는 건가요?”

그렇구나. 있구나. 그것도 공식적으로. 하긴 인류역사와 함께 해온 게 그 직업이라지 않던가. 에페소에 가면 고대에 창녀촌을 안내하던 세계 최초의 광고도 있는 판인데.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동행자들의 눈초리가 약간 새치름해진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이건 순전히 학문적 궁금증이라니까요. 공부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이스탄불 시내.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새벽, 도시는 여전히 적막에 싸여있다. 그리고 모든 갈등은 평화라는 위장막에 덮여있다. 나는 지금 터키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푸듯, 이 도시에 수천 년동안 고인 이야기를 퍼내야 된다. 숙련된 백정처럼 도시의 정수리에 잘 벼린 펜과 카메라를 들이대야 된다. 느닷없이 불타오르는 전의로 온 몸이 뜨거워진다.

 

posted by sagang


이번 주부터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카메라 배낭에 밴 땀이 하얀 소금 꽃으로 피어날 정도로 많이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떠난 일행이 있었지만, 각자의 일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혼자 걷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을 제 여행길에 모십니다. 읽고 나서 댓글도 남겨주시고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의 모습. 여긴 조금 변두리?

비행기 안에서 잠이 깨다

뭔가 불편한 느낌에 자꾸 몸을 뒤척인다. 요의로 하복부가 묵지근한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잡은 잠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본능으로 조금씩 돌아오려는 의식을 향해 자꾸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손짓 정도로 막을 상황은 아니다. 꿈이 가득 찼던 자리를 의식이 대체하기 시작한다. 혼미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 여기가 어디지? ! 그래. 비행기 안이었구나. 그래. 난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어. 내 생애에 가장 긴 휴가를 가고 있는 중이야. 콧물이 흐른다. 머리도 띵하고 몸도 무겁다. 감기몸살 기운은 엊그제부터 찾아왔다. 며칠 무리한 탓이리라. 열흘 넘게 자리 비우는 턱을 한다고 불난 집 며느리처럼 대중없이 종종걸음을 치다보니 자연스레 얻은 전리품이다.

저 아래 경기장이 보인다. 터키 사람들도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애당초 무리한 여행이었지만

열흘 이상 자리를 비운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처음 터키 여행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팀을 이끄는 후배가, 내 개인작업(여행, 사진촬영, 쓰기)과 성격이 맞으니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물론 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저은 건 아니었다. 아니, 내 평생 가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그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로 달리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몇 달 쯤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중국의 윈난성(雲南省) 리장(麗江)에 가서 하릴 없이 배회하고 싶고, 터키에 가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지났던 실크로드를 걷거나 세계사의 용광로에 몸을 담그고 싶고. 늘 꿈꾸는 것들이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는 얼마나 터키에 대한 열병을 앓게 했던지. 고통과 위험에 가득한 그 길이. 비록 제안 받은 곳이 실크로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땅에 가고 싶었다.

그런 열망에도 터키행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1주일에 한번 씩 하는 방송이었다. 케이블TV 시사뉴스의 앵커, 대체요원조차 없는 그 자리는 내가 마음에 내킨다고 함부로 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방송을 맡은 뒤로는 감기 한번 마음 놓고 앓아보지 못했다. 목이 상할까봐 노래방 가는 것조차도 참았다. 게다가 기자 또는 신문사 뉴미디어 분야의 책임자로 평생 일하면서 3~4일 이상의 연속휴가를 가본 적이 없던 내게, 11일이란 숫자는 느닷없이 등에 날개가 솟는 것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방송부서 데스크를 맡은 후배 부장에게 슬그머니 의중을 털어놓았다. 찔러나 보자는 심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OK가 떨어졌다. 이 참에 늙은 기자가 아닌 젊은 대타 한번 써보자는 심리였을까? 이거, 이러다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앵커 자리 날아가는 거 아냐?

역시 이스탄불의 모습. 가운데 흐르는 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후반 '이스탄불편'에 나온다.

그건 훗날 닥칠 문제. 그 순간 내 등에는 정말 날개가 돋았고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바빠졌다. 방송 외에 맡은 일도 이것저것 챙겨야 하고, 신문의 인터뷰 기사도 써놔야 하고 블로그 연재물도 미리 채워놔야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취재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맡은 잡지 편집도 잠을 줄이는 걸로 해결했다. 출발 전에 꼭 만나봐야 할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자 진리의 신봉자로서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자료만도 책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렇게 13~4역을 했지만 몸은 핑핑 날아다녔다. 나는 터키 땅으로 간다. 그러다 얻은 몸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11922일 금요일. 정신없이 방송녹화를 마치고 메이크업을 지울 새도 없이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115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야, 내가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함께 떠나는 일행과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눴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해준 K뿐이었다.

이스탄불 주택가. 높은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잦은 지진의 영향일까?

비행기는 실크로드 위를 날고

잠은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밥 먹으라고 깨울 텐데 뭐. 장거리 비행은 식사시간이 문제다. 먹고 싶든 아니든 잠에서 깨는 수밖에 없다. 남들 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퍼져 잘 만한 배짱이 없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앞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2시간 남짓 남은 것으로 표시돼 있다. 이스탄불공항에서 갈아타고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을 합하면 열 두 시간이 넘는 긴 비행이다. 배낭에서 몸살 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는다. 이 약으로 깨끗이 나아야 하는데. 감기몸살 정도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비행 항로를 보니 실크로드와 거의 비슷하게 날고 있다. 실제로는 많이 다른 길이겠지만 축약된 길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니터 화면의 지도는 끊임없이 광활하고 황량한 산악지대 위를 달리고 있다. 아니, 지도가 아니라 비행기가. 언젠가 저 길을 가리라. 시속 746km, 바깥기온 섭씨 56.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이 저 쪽에 있다.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장사를 위해, 또 누구는 말을 타고 정복을 위해 지났을 저 길. 나는 비행기를 타고 쉽게도 지나고 있다. 내 나라 땅은 신발이 몇 켤레 닳을 정도로 돌아다닌 나지만 이렇게 해외로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빗소리처럼 귀를 파고든다. 어느 산사에서 빗소리를 듣는 듯 나 혼자 고즈넉하다. 가만히 개인 등을 켜고 책을 꺼내 읽는다.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한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이다. 처음 읽을 때처럼 프랑스의 퇴역기자와 고통과 기쁨을 공유한다.

여명 속의 아타튀르그국제공항. 환승을 위해 기다리는 중에 찍었다.

조금 있으니 아침 식사가 나온다. 잠을 깨우는 건 불편하지만 밥 먹는 걸 불편해 할 내가 아니다. 어디 가든지 안 줘서 못 먹는타고난 식성 덕분에 주는 몫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뭘 찾아먹을 땐 평소와 달리 영어까지 유창하게 나온다. 이름도 모르는 식사를 하고 없어 못 마시던 와인까지 두 번이나 주문한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곧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니 준비하라는 멘트가 나온다. 창문 블라인드를 올리니 이스탄불 시내의 불빛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터키 하늘에 진입한 것이다. 저 아래에 수천 년의 영욕이 잠들어있겠지. 내내 잠을 자던 터키 사내(로 보이는)가 비행기에서 지급한 양말에 슬리퍼까지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텅!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다. , 나도 몰라. 이젠 돌아가라고 해도 못가. 방송 펑크 나든 말든 내 책임 아냐!!

이 비행기가 보드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줬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환승하다

이스탄불공항의 공식명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이다.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말 그대로 터키의 국부(國父)인데 앞으로 제법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한다. 시간을 보니 0552. ? 이것밖에 안됐어? 당연하지, 시차를 계산해야지. 한국과 터키는 여섯 시간의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몸을 적응시키는데 애 좀 먹어야한다. 하지만 아직 어리바리해서 시차고 뭐고 느낄 틈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하는데 척 봐도 한국인인 수녀님들이 뒤에 서 있다. 대체로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얼굴에 설렘이 이스탄불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한국 떠난 지 몇 시간 안됐지만 이국땅에서 듣는 우리말이 반가운 모양이다.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한다.
수녀님들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성지순례 왔어요. 맨 먼저 소피아성당을 갈 거예요.”
소피아성당, 그 역사의 도가니. 마치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이름이다.

입국수속은 빠르고 간단하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터키에서 형제의 나라’ KOREA가 찍힌 여권은 대부분 무사통과란다. 무비자 체류기간은 90일인데 연장도 그리 어렵지 않단다. 수녀님들과 눈짓으로 작별을 하고 다시 간단한 검색과정을 거친 뒤 국내선으로 이동해 휴게실에 자리 잡는다. 몇 시간 뒤에 보드롬(Bodrum)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이번 여행은 에게해(Aegean Sea)의 맨 끝에서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따라 쭉 내려가는 코스다. 맨 먼저 가보고 싶던 곳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위안한다. 일행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다 그저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비행장에 깔렸던 어둠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불빛이 옅어져 간다. 나는 지금 이국땅에서 새 아침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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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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