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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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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탁심 광장.

트램에다가 빵을 파는 아저씨까지 마구 얽혀있다.

한 여름의 군밤장수.

나는 지금 이스티크랄 거리의 시작점인 탁심 광장으로 가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퇴근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거리에는 오가는 차들과 인파가 정신없이 얽혀있다. 이스티크랄 거리는 이스탄불 최고의 번화가다.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신시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등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금각만이라고도 불리는 골든혼을 건너면 바로 신시가지에 닿는다. 여기도 유럽에 속한다. 이곳에서 보스포루스대교를 건너면 아시아 땅이다. 신시가지라고는 하지만 구시가지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시가지가 조성된 건 제법 오래 전이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제노바 상인이 자치권을 쥔 칼라타 지구였으며 거리의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 인근은 페라 지구였다. 지금은 베이오울르라고도 부른다. 탁심 광장에서 튜넬까지 1km가 조금 넘는 이스티크랄 거리를 걷기로 한다. 초입부터 넘치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거리를 걷는 것 같다. 거리 한 가운데로는 노면전차, 즉 트램(트란바이)이 지나다닌다. 물론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보행자들에게 전혀 위험요소가 되지 않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매달려 가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적, 동네에 자동차만 나타났다하면 쫓아가 매달리던 생각이 난다. 어른들은 성화를 부렸지만 얼마나 재미있던지. 개구쟁이들의 장난기는 동서나 고금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거리는 트램 외에 일반 차량은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보행자 천국이라고 부른다.

 

인파로 가득 찬 이스티그랄 거리.

반은 벗어버린 여자도 있고.

전신을 감싼 여자도 있다.

거리에는 온갖 사람들이 섞여있다. 서양인과 동양인, 백인과 흑인, 내국인과 관광객. 거의 벗다시피 한 서양 여자와 온몸을 감싼 채 걸어가는 무슬림도 재미있는 대비를 연출한다. 이스탄불이 국제도시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 거리에서는 무엇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다. 상업지구인지라 은행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명품 숍이나 화장품 가게도 즐비하다. 패스트푸드점, CD 판매점, 빵집, 피자가게. 입구에는 노점상들도 포진하고 있는데 역시 군밤장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더운 여름에 군밤을 팔고 사먹는 사람들은 또 뭐람. 돈두르마나 하나씩 먹으면 딱 좋을 것 같구먼. 한쪽에는 전단지 돌리는 청년도 있다. 얼른 돌리고 갈 심산인지 내게도 한 장 쥐어주길래 들여다보니 피자 할인문구가 들어있다. 곳곳에 좌판도 눈에 띈다. 가장 많은 것이 복권을 파는 노점이다. 장사가 제법 잘된다. 이 나라 사람들도 복권에 희망을 파종하는구나. 하긴 복권 없는 나라가 어디 그리 흔하랴. 모래 위의 집처럼 금방 무너질 꿈이라도 꾸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 조그만 함지 같은 곳에 생수를 대여섯 병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가 보인다. 저 노인은 또 어떤 사연이 있어 이 더위에 저리 나와 앉아있는지.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내 어머니의 얼굴과 오버랩 된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지근한 물이라 갈증 해소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얼른 한 병을 손에 쥐고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드린다. 오늘 가지고 나온 물을 모두 팔아도 내가 드린 돈만큼은 안 될 것 같다. 내 작은 돈이 저 노인의 한 끼 식사에 도움이 되기를.

트램에 매달려 가는 개구쟁이들. 

수박에 새긴 인물상.

케밥집 진열장의 수박 조각(彫刻)에 마음을 빼앗기는 바람에 유리창 앞에 서서 혼자 실실 웃는다. 얼굴을 새긴 주방장의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오래 이러고 있다가는 더위에 맛이 갔다는 소리를 듣기 딱 알맞겠다. 어디선가 아코디언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의 음악인이 곳곳에 있지만 이 아코디언 소리는 유난히 내 발목을 잡는다. 유모차를 앞에 세워둔 젊은 여자 하나가 유치원생이나 쓸법한 작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세련된 음악도 아닌데 왜 나를 이렇게 불러대지? 의지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할 땐 육신이 하는 대로 맡기는 수밖에. 가까이 가보니 유모차에는 아기가 잠들어 있다.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6개월이나 됐을까. 다행히 무더위 속에서도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천사 같은 모습에 또 마음을 뺏긴다. 대체 이 엄마는 무얼 어쩌자고 이 어린 것을 데리고 거리에 나온 것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이란 뜻일까? 여인과 아기를 싸고 흐르던 축축한 슬픔이 내게 전이된다. 그렇다고 추하다거나 비참해 보인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냥 지나가도 되련만 송진이라도 밟은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배낭을 내려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내고 마침 근처에 있던 일행에게 달려가 동전을 얻어온다. 여인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슬픔과 수줍음이 적절히 섞인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이왕 음악을 멈췄으니 한마디 물어나 보자.

아기가 참 예뻐요. 몇 개월이나 됐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만다. 그냥 돌아서는 수밖에.

 

복권 파는 아저씨.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소녀.

차마 사진을 찍지 못한다. 그저 가슴에 담는 수밖에. 저만치서 나 하는 짓을 바라보던, 그리고 동전을 빌려준 일행이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그런 마음으로 제대로 된 여행자가 되겠니?’ 그런 눈초리다. 아니다. 괜한 지레짐작일 뿐이다. 측은지심이야 말로 사람이 가진 근본 심성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여행 내내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챙긴 사람이다. 내가 특별히 갸륵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할머니의 미지근한 물을 사고 아기 엄마에게 동전을 털어준 것은 아니다. 그저 인연이 그리 이어졌을 뿐이다. 세상엔 지갑이 가난한 대신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 덕에 그나마 이 사회가 지탱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아흔아홉 개를 가진 사람 중에서 나온다. 그는 남의 한 개를 빼앗아 백 개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주변을 돌볼 틈이 없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건 자신이 가진 한 개를 어려운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이들이다. 그야말로 용기고 사랑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들 축에 끼어들기에는 반 푼어치의 자질도 없는 사람이다. 겉모습은 비슷해도 내가 호주머니를 터는 것은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서다. , ‘이기(利己)’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제발이 저려서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주고 나니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다. , 하필 이런 때 밀려오는 이 날카로운 요의(尿意)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내 방광이란 녀석은 눈치가 엄청 빠르다. 내 인생 최악의 안티 세력임에 분명하다.

 

 

특별 세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곳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괜한 호기심으로 뒷골목을 흘끔거린다. 과감하게 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니지 못하는 까닭은,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젊은 친구 몇 명이 아무 생각 없이 뒷골목에 들어갔다가 몽땅 털릴 뻔했던 걸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고도 내 뒷골목 탐사의 열망은 가시지 않고 있다. 어느 곳을 가든 뒷골목부터 기웃거린다. 그 나라, 그 도시의 진실은 뒷골목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먹는 음식이 그 나라의 진짜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그리 위험한 도시는 아니다.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완벽한 곳이 어디 있으랴. 어느 여행책자에서 이스티크랄 거리에 가면 술집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본 기억이 난다. 대충 더듬어 보면 그런 내용이었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뒷골목에는 바와 클럽이 많은데 수상한 분위기의 술집에 들어가는 건 피해야 한다. 특히 여자 손님을 끌고 가려고 하거나 여자 직원이 있는 곳은 위험하다. 터키에서는 술집에 여성들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나는 술을 마실 것도 아니고 지금은 한낮인데 뭘. 골목은 아직 조용해 보인다. 그럼 별 재미가 없다. 나를 다시 큰 거리로 끌어낸 건 어디선가 들리는 묘한 소리다. 누군가 부르는 노래가 분명한데 정말 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음색이다. 저런 소리를 영혼의 울림이라고 하나? 발길은 끌려가다시피 그쪽으로 향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내면의 경고 따위는 무시한지 오래다. 길 한쪽 공터에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다. 이스탄불에도 약장수가 있나?

 

집시 여인.

 

남자 악사가 두 명, 그리고 한 여인이 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저 여자가 바로 집시야.” 어디선가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른 건 그녀의 노래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 우리네 창과도 다르고 영혼을 두드리던 마두금의 음색과도 다르다. 한때 마음을 빼앗겼던 중국 소수민족의 노래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핏속을 흐르는 슬픔만 골라내 세상을 향해 내던지는 듯한 소리. 콰지모도가 사랑한 여인, 에스메랄다의 영혼 색깔이 저랬을까. 집시라는 족속은 원래 무당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고 땅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무리. 아득한 옛날에는 그들이 제사장이고 세상의 지배자였다. 북을 치는 손놀림이 이별을 앞둔 연인을 향한 손길처럼 부드럽고 서럽다. 길게 길러 풀어헤친 머리, 선 굵은 귀고리, 멋 같은 건 고려하지 않은 하얀 색깔의 상의, 그리고 통 넓은 치마. 옆에 놓인 기타 케이스에 CD 몇 장이 놓여 있다. 그걸 팔기 위해 노래를 하는 모양이다. 내가 소스라치며 뒷걸음질을 친 건 그녀의 눈을 본 순간이다. 우물처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이, 어느 곳에도 초점을 두지 않은 눈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대체 이게 뭐지? 이런 걸 무슨 느낌이라고 하지? 첫 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정상적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늪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의 소처럼 나는 혼신을 다해서 뒷걸음을 친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진 뒤에야 철퍼덕 주저앉는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음 한 쪽에서는 돌아가서 CD라도 사오라고 꼬드기지만 다른 한쪽은 극구 손사래를 친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온 것일까.

 

갈라타 탑 갈라타 탑 앞의 여인들.

케밥 사세요. 고등어케밥!!

고등어케밥 이렇게 만듭니다.

완성 직전.

이스티크랄 거리의 끄트머리에서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갈라타 탑을 만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의미가 있는 곳이다. 지난해 지중해 여행의 끝을 이곳에서 장식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사실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 바로 이 갈라타 탑이다. 하지만 한참 줄을 서고 좁은 곳에 올라가 엉덩이를 비벼야 하는 과정이 끔찍하다. 뭐 그냥 지나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한번 가봤다는 것이지만. 그리고 또 하나. 갈라타 다리로 얼른 가고 싶다는 조급증도 한몫했다. 걸음을 재게 놀린다. 갈라타 다리를 오가는 인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낚시꾼들은 여전히 바다에서 반짝거리는 물고기들을 건져 올린다. 잡상인은 작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 사이 실업자가 늘어난 건가? 이웃인 그리스의 재정파탄이 세계 경제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도 터키가 흔들린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이곳 사람들은 갈라타 다리를 백수다리라고도 부른다. 직업 없는 사람들이 새벽 다섯 시부터 나와서 낚싯대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공간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도 백수들에게 낚시터를 마련해주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진다. 복지가 뭐 별건가? 일단 다리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엔 벼르고 벼른 고등어케밥을 꼭 먹어볼 작정이다. 이곳은 고등어케밥의 천국이다. 다리가 2층 구조로 돼 있는데, 맨 위가 낚시꾼들의 영토라면 1층은 고등어케밥을 위해 존재한다. 다리를 따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은 물론 바다에도 큰 배에서 케밥을 판다.

 

이 배에서도 고등어케밥을 판다.

저무는 이스탄불.

다리 옆은 해산물 시장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해물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구경하는데도 한참 걸린다. 멀리 흑해에서 온 함시(멸치보다 조금 큰 생선으로 밀가루를 입혀 튀겨먹는다)도 보인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고등어케밥을 파는 리어카 좌판. 하얀 상의에 요리사 모자, 앞치마까지 둘러 그럴듯하게 보이는 아저씨가 고등어케밥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손님은 거의 없다. 대개 제대로 된, 에어컨이 나오는 음식점으로 찾아가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근사한 음식점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맥주 한잔 곁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좌판 아저씨에게 고등어케밥을 주문했더니 신이 나서 만들기 시작한다. 헌데 이것도 간단한 게 아니네? 빵을 반으로 갈라 잘 구워진 고등어를 얹고 그 위에 익힌 양파와 고추를 올리고 소스를 뿌리고 각종 채소를 얹고 다시 향신료를 뿌리고. 에구, 숨 가쁘다. 벼르고 벼르던 고등어케밥의 맛은? 그저 그랬다. 고등어의 비린 맛 때문에 거부반응이 일었다든가, 아니면 한 개쯤 더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든가 하는 특별함은 없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나라의 특별한 음식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니까. 이것으로 이번 여행 일정은 모두 끝났다. 다시 이스탄불과 이별을 해야 한다. 갈라타 다리 위에 서서 저물어가는 도시를 바라본다. 유람선이 오가는 바다 건너 저만치에는 석양을 비껴 안은 모스크들의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건물들은 하나 둘 불을 밝혀 12시간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는 한 사내를 전송한다. 작년에 했던 인사를 다시 반복한다. 다시 오리라. 내 형제, 내 친구의 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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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원.

아타튀르크 댐이 만들어 낸 풍경.

이제는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한다. 터키의 숨겨진 속살을 관통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말라티아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샨르우르파에서는 깨달음을 준 옛 스승들을 만났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으로부터 갈대우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험난한 여정도 들었고, 선지자 욥을 만나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야기도 가슴에 담았다. 샨르우르파 공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아쉬운 눈길을 창밖에 고정시킨다. 여전히 황량한 벌판에는 나스카의 지상그림처럼 생긴 도형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그 한 가운에 있는 마을은 고립된 듯 외로워보인다. 저 안에 갇힌 저들은 무엇을 꿈꾸며 살까. 아니다. 그들은 저 광활함 속에서 한없이 자유롭거늘, 정작 갇혀 있는 사람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잠시 뒤에는 사방팔방으로 물길이 뻗어나간 거대한 늪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니 늪이지 사실은 엄청나게 큰 호수고 강이다. 댐에 막혀 길을 잃어버린 유프라테스강은 바다를 흉내 내고 있다. 정녕 인간이 자연을 이긴 것일까. 상념이 낳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이스탄불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스탄불 시내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분주하다. 이스탄불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역시 단 하루. 꼭 들르고 싶었던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아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찾아다닌 이스탄불의 유적들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에 몰려있었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갈라타 다리를 건너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올라가는 신시가지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곽 뜰. 바다와 아시아 땅이 코앞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제1문.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그만 만()을 메운 매립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 바다였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가득 찬 정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지금의 궁전이 들어서 있었던 건 아니고 17세기 초 아흐메드 1세가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돌마바흐체라 불렀다. 그때의 건축물들은 1814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궁전 외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전망 좋은 곳에는 넓은 야외 카페가 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건너편의 아시아 땅과 바다 위의 유람선들이 어울린 그림 같은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카페는 그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곳에 비비고 앉아 점심을 먹을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무 그늘이 드리운 잔디밭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는다. 궁전 앞의 점심식사도 제법 괜찮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볼까.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람하려면 표를 예매하는 게 좋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입하려면 줄을 서야 한다. 나는 미리 준비한 덕에 길게 늘어선 줄 옆을 자랑스럽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러게 누가 무작정 오래? 사람들이 말이야, 준비성이 있어야지. 쯧쯧! 입장료는 30리라. 환율을 700원 씩 계산해도 21,000. 궁전 구경 하다가 등뼈 휘어져서 가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와봐야 할 곳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문을 들어선다.

문 위의 조각들. 

안쪽 문.

 

궁전 본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걸어야 한다. 화려한 문도 두 곳이나 통과한다. 다른 오스만 건축양식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유럽풍인데 무척 호화롭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하니 까딱 잘못하면 파리쯤에 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일 것 같다. 이 궁전을 착공한 건 1843년이다. 압둘메지드 황제의 지시로 짓기 시작했는데 13년만인 1856년에 완공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가라베트 발안과 그의 아들 니코코스 발안이 설계했다. 이 궁전이 완공되기 전에는 술탄들이 톱카프 궁전에서 기거했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톱카프 궁전 역시 어느 곳 못지않게 크고 화려한 궁전이다. 그러니 살만한 궁전이 없거나 곳간에 돈이 남아돌아서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회복해보겠다는 염원이 투영됐을 것이다. 왕권시대에는 동서를 불문하고 나라의 기운이 쇠했다 싶으면 궁전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땅의 흥선대원군도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임진왜란 때 불 타 무너진 경복궁을 새로 짓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뭐하나. 그 역시 약발이 별로였던 것 같다. 새 궁을 지은 지 얼마 안 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으니. 건물 따위로 국운을 돌려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쓸모없는 삽질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셈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은 너도 나도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센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여려 가지 모습.

외채는 계속 늘어나고 국가의 재무 상태는 빈사 위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 창고 바닥 긁는 소리가 요란했을 것 같다. 참고로 궁전을 지은 압둘메지드 황제는 이곳에서 단 6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죽 쒀서 뭐 줬다고 하던가? 들어가는 길 내내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접시꽃이 활짝 웃는 얼굴로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특히 분수대가 있는 연못 앞에 서서 바라보는 궁전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궁전 입구에서는 덧신처럼 생긴 비닐봉지를 하나씩 나눠준다. 신발에 씌우라는 뜻이다. 터키 사람들이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하는 인원도 적절히 시간차를 두어서 복잡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문을 들어서면서 사진을 한 장 찍는데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No Photo!!!" 여기도 촬영금지야? 대체 그 비싼 돈을 받아먹고 사진 한 장 못 찍게 하는 건 무슨 심보야. 톱카프 궁전에서도 불만을 토로했지만,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한 유물이나 전시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상식이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이런 엄격한 규제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통째로 뭉개 버린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그 수단을 빼앗겨 버리면 존재가치가 희미해진다.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다니긴 하지만 흥미는 이미 반감된 상태다. 관람은 1층 입구에서 시작하는데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궁전의 본 모습이 펼쳐진다.

 

궁전에서 바라본 아시아 땅.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서 찍은 첫 번째 사진.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도둑 셔터로 찍었다.

고국에 뭔가 전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뷰파인더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셔터를 몇 번 눌러보지만 사진이 제대로 나올 턱도 없고 굳이 도둑 사진까지 찍어야 되나 싶어 그만 둔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경비원들이 서서 네가 무슨 짓 하려는지 다 알고 있으니 쫓겨나기 싫으면 그냥 구경이나 해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는 탓에 자꾸 움츠려든다. 사실 궁전은 바깥보다 내부가 더욱 화려하다. 곳곳의 천장마다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정도로 크고 호화롭다. 이 궁전을 지을 때 내부 장식에만 총 14t의 금과 40t의 은이 사용됐다고 한다. 총면적은 15,00m²인데 궁전 내부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셀람륵과 황제 외에 남성의 출입을 금하는 여성의 영역 하렘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렘지역은 파란방이라고 부른다. 방은 총 285개고 홀이 43개인데 그밖에도 68개의 화장실과 11개의 목욕탕이 있다. 방이나 홀의 장식도 제각각 다르다. 바닥에 깔린 수직 양탄자의 넓이는 4,455m²나 되며 벽에는 600점이 넘는 명화가 붙어있다. 많은 때는 5,320명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화려함의 극치다. 물론 내게는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곳 이상은 아니다. 잘 따라 다녀야지 괜히 잘난 체 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밤새 헤맬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이 궁전 내부를 전부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사실 내게는 그 방이 그 방 같고 그 홀이 그 홀 같아서 그저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보냈다는 샹들리에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찍었다.

아타튀르크를 기려 09시05분에 멈춰진 궁전 내부의 시계.

황제 일가의 일상생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궁전 내에는 황제의 아이들을 가르치던 작은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을 위한 교무실도 있다. 물론 황제가 썼다는 화장실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별게 다 기념물이 되는 세상이다. 또 궁전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전시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유럽에서 보내왔다는 수많은 보석과 도자기, 그릇들이 눈부시다. 거북 껍질로 만든 수저도 있다. 거대한 곰 가죽은 러시아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처럼 생긴 기둥은 진짜 대리석이 아니다. 밤나무에 석회를 바르고 대리석처럼 칠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다. 별 기술이 다 있구나. 정말 감쪽같다. 거대한 시계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다. 시계바늘은 95분에서 잠들어 있다. 태엽을 주지 않았거나 건전지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여기서는 참았던 도둑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 시계를 보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시계 자체야 별게 있을 턱이 없지만 아타튀르크라는 위대한 독재자가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궁전을 완공한 뒤 이곳에서 살았던 오스만 황제들은 모두 6명이었다. 1877년에는 오스만 제국 사상 처음 개원된 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터키공화국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1938111095분 집무 중에 이 궁전에서 사망했다. 건국의 아버지인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95분에 멈춰져 있다. 터키 사람들이 아타튀르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나라 전체가 존경할 사람을 가졌다는 건 무척 부러운 일이다. 드디어 그랜드 홀에 들어선다. 관람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

 

저 문을 나가 걸어가면 바다에 닿는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안내를 하던 훌리아가 멈춰서더니 눈을 감으란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 둘 셋을 세면 눈을 뜨고 천장을 보란다. 셋을 세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탁 트인 공간에 매달린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거대한 샹들리에도 한몫했다. 36m 높이에 매달려있는 이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무게만도 4.5t이나 나가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750개의 등이 달렸는데 1912년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수백 개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이 방에는 재미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원래 천장은 삼각형인데 그림으로 동그란 돔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삼각형의 흔적은 없다. 76개의 대리석 기둥역시 모두 나무다. 이곳에서는 대형 연회가 열렸다는데 2층에는 연주자들의 자리가 있다. 지금도 이 그랜드 홀은 결혼식장으로 대여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돈이다. 1년에 2~3회 정도 아랍의 부호들이 거액을 주고 빌려 쓴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황금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호사를 누리게 하는 셈이다.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연회를 열 수도 있구나. 괜한 심술로 혼자 중얼거려본다. 전투 장면 등을 그린 그림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눈이 시원해지니 섭섭함도 별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다에 푹 빠져 있다. 나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메마른 가슴에 꿈 씨 하나쯤은 파종하고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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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테페 발굴 현장.

아슬란테페 유적지 입구의 석상.

아슬란테페 유적을 찾아간다. 말라티아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곳이다. 유적은 말라티아에서 6~7km 떨어진 오르두주라는 동네에 있다. 민가가 없어서 그런지 주변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중국 지안(集安)으로 광개토대왕릉을 보러갔을 때의 그 썰렁하던 풍경이 생각난다. 시간은 잠시만 한눈을 팔면 무엇이든 지우려 든다. 아슬란테페를 올려다보면 엄청나게 큰 능처럼 보인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비잔티움 시대에는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거대한 사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BC4000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이다. 이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1930년대였는데 1961년부터 발굴에 착수해서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초기에 참여했던 사람은 늙어서 세상을 떠났겠지? 하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부분이 더 많다고 한다. 발굴 속도가 늦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거대한 유적이란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BC3000년부터 BC1000년까지 형성된 7개 시대의 흔적이 떡시루처럼 층층이 쌓여있다는 것. 실제로 지금까지 발굴해놓은 8m 높이의 흙벽을 보면 시대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이 그리 멀지 않다. 물이 풍부하니 농사를 짓기 좋았을 것이다. 농경이 일반화됐다는 증거도 있다. 불에 그슬린 자국이 확연하게 남아있는데, 화재 때문이 아니고 불을 피워 요리를 한 흔적이다.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는 고도로 발달된 사회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가면 쓴 사람을 그린 벽화.

 

이 유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면 쓴 남녀를 그린 벽화. 남녀는 가면을 쓰고 무엇을 했을까. 가장무도회? 수천 년 전의 가장무도회라. 물론 가면을 쓰고 진행하는 제의(祭儀)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도회라고 설정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 몰래 땡땡이 쳐서 흐드러지게 놀아보려고 가면을 쓴 건 아닐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뭐. 요즘으로 보면 아버지 몰래 클럽에 놀러가는 젊은 남녀들. 상상이 과도했나? 기록 없는 오래된 것들은 얼마나 많은 상상거리를 제공하는지. 밖으로 나와 언덕을 오르니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여 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저 골짜기 어디쯤에 논밭을 일궜겠지. 6,000년 전이 엊그제인 듯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흙 언덕에 오르니 사람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동묘지였다는 증거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 위에 무덤이 들어서고 그 무덤도 잊혀지고 풍화되고. 수천 년 시간이 지금 내 앞에 엎드려 있다. 무덤을 지나 한참 더 걸어가니 저만치 유프라테스 강의 도도한 물결이 보인다. 드디어 인류 문명을 낳고 또 긴 세월 보듬어 키워온 강 앞에 선 것이다. 저 강은 기억하고 있겠지. 이 땅에 묻힌 인간들의 영욕을. 한낮의 태양은 그 영욕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불타고 있다. 출국 전에 누군가 챙겨준 면 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안전한 여행을 빌어준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따뜻한 응원이 등을 민다. 가자. 또 가보자.

 

공동묘지 자리. 뼈들이 드러나 있다.

저 멀리 구름 아래 유프라테스 강이 보인다.

라반사라이(karavan sarai), 즉 대상숙소는 말라티아의 구읍(舊邑)인 바탈가지에 있다. 바탈가지,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마누라의 바가지'를 상상하지는 마시라. 대상숙소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를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카라반사라이를 찾아 헤맨다. 모든 게 변한 지금 대상들이 실크로드를 오갔다는 유일한 증거가 이 카라반사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흔적조차 지워버린 곳이 대부분이다. 헌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건 좀 심하게 현대식이다. 최근에 수리해서 오픈했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세련됐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68˟76m의 사각형 건물에는 3방향으로 회랑이 있다. 그리고 정문 맞은편에 대상들이 묵던 숙소가 있다. 카라반사라이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밖에서 보면 마치 작은 성채처럼 생겼다. 문을 닫아버리면 날개가 없는 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마당은 정원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가운데는 돌이, 양 옆으로는 잔디가 깔려 있다. 이곳에 말이나 낙타를 매어두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 무라트4세 때인 1637, 재상이었던 무스타파 파샤가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370년이 넘은 건물인데 지을 때도 지금의 모습이었을까? 내 괜한 의심증이 도진 것이기를 바라면서 안으로 들어가 본다. 실내도 무척 화려하다. 돌로 된 굵은 기둥과 샹들리에. 어지간한 호텔은 울고 갈 정도로 잘 꾸며 놨다. 한쪽에는 식사를 준비하던 화덕이 있다. 대상들은 여기서 잠을 자고 음식을 해먹었다.

 

카라반사라이 전경.

 

카라반사라이 실내.

아나톨리아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들의 왕래가 잦았다. 실크로드는 몇 가지 루트가 있었지만 동쪽의 끝, 즉 출발지가 중국의 옛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쪽 끝은 이스탄불이었다. 이 개념을 신라에서 로마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 억지스러워 보인다. 상품이 거기까지 갔다고 해서 실크로드가 연장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바탈가지도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대상 교역이 크게 활성화 된 건 셀주크 투르크와 룸 셀주크 시대였다. 이 두 제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따라서 대상들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대상들은 9시간에 40km 정도를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40km마다 숙소를 하나씩 세웠다. 우리의 역참처럼 관급(官給) 숙소를 만든 것이다. 숙소 이용료는 3일까지는 무료였다. 방이 없는 경우에는 마당에서도 잤다. 10시에 문들 닫았으며 아침 7시부터 출발했다. 이 숙소에 머무는 동안에는 마음 편하게 먹고 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품들을 보관하고 지켜주기도 했다. 중간에 도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게 되면 물건 값만큼 돈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 일종의 보험제도가 시행된 셈이었다. 그러니 교역이 활기를 띨 수밖에. 중국의 비단이 유럽의 귀족들을 환호하게 했는가 하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가져온 유리병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카라반사라이 조감도.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

 

아나톨리아 자체에서 생산되는 물품도 짭짤하게 팔려나갔다. 이곳에서 기른 양털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다. 질 좋은 모직물을 뜻하는 앙고라라는 말은 앙카라 지방에서 수출된 염소의 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대상이 오가던 그 시절을 상상해본다. 낙타에 의지해서 수천km(이 길을 직접 걸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2,000km라고 썼다)를 오갔을 대상들. 오가는 길에 병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했겠지. 한번 다녀가면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었겠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두고 또 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 예나 지금이나 산다는 게 참 만만치 않다. 상념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다. 아마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시절처럼 중국에서 대상이라도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바탈가지 읍장도 나왔다. 한국말로 된 설명서를 만들어 비치겠다고 요구하지도 않은 약속을 한다. 고마운 일이지. 대상들이 머물던 방은 오스만 시대의 전통공예품이나 미술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으로 변신했다. 하긴 놀려두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사람들 틈을 벗어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작은 방에 들어가 본다. 꼬마아이 하나가 커다란 개 그림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듯 음이 제멋대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웠는지 그림 속의 개가 두 눈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놀러왔단다. 대상이 별을 꿈꾸던 곳에서 이젠 아이가 키를 키우고 있다.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개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멀리서 온 손님들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

 

땀을 들이고 있는데 누군가 빈 공간에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놓는다. 배치가 완료되자 수염을 기른 청년 하나가 기타 같이 생긴 걸 들고 나온다. 자세히 보니 줄이 세 개뿐이다. 터키 전통악기 바흘라마란다. 이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연하는 청년인데 먼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겠단다. 터키 사람들이 이렇다니까. 손님 대접을 못해서 안달이다.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시작한다. 곡조가 무척 슬프다. 혹시 대상들이 먼 길을 걸으며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아닐까? 아니면 옛날부터 내려오던 터키 전통가요? 노래가 끝나고 물어봤더니 둘 다 아니다. 1960년대 어느 맹인가수가 부른 대중가요라고 한다. 왠지 한() 같은 게 깔려 있더라니. 대상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로 밝혀졌지만 가슴은 이미 촉촉해졌다. 앙코르를 요청했더니 이번엔 신나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그린 노래라는데 당신을 본 순간 세상은 끝났습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된단다. 호오! 멋진데. 졸지에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세 번째 노래가 나올 때쯤은 국적이고 뭐고 다함께 춤을 추며 어울린다. 나도 신나게 춤을 춘다. 어디서 그런 신명이 나왔을까. 내 나라에서도 사양하는 춤을(솔직히 말하면 출 줄 모르는) 터키의 시골마을에서 추다니. 혹시 내 전생이 멀고 먼 길을 걷던 대상은 아니었을까. 그 대상이 내 몸에 빙의되어 이렇게 춤을 추는 건 아닐까.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신나는 시간이 그렇게 계속된다. 여행은 예측하지 못한 선물이기도 한다.

 

 

목걸이 만드는 처녀.

 

살구를 나눠주는 꼬마천사.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내게 급히 뛰어오더니 조그만 돌 하나를 내민다. 이게 뭐지? 돌 위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오늘 춤을 가장 열정적으로 춘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얼마나 급히 그렸는지 그림 위에 칠한 바니시가 덜 말랐다. 이곳에서 일하는 화가 중 하나가 작정을 하고 그린 모양이다. 에구, 이런 영광이. 그나저나 태극 문양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튼 이 나라 사람들 사람 감동시키는 데는 특별한 자질을 타고 났다니까. 또 한 번 가슴이 흠뻑 젖어버린다. 아무리 좋아도 한없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법. 오른쪽 회랑을 통해 나오다가 눈에 확 뜨이는 아가씨와 만난다. 얼굴을 조금 숙인 채 목걸이 공예를 하고 있는데 예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사진 찍어도 돼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마음의 교환까지 안 될까. 사진을 보여주며 시시덕거리다 보니 주위가 허전하다. 이러다 혼자 남을라. 밖으로 뛰어나오는데 이번엔 한 아이가 앞을 가로 막는다. 손에는 허름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이거 드세요

드세요? 사세요가 아니고? 비닐봉지에는 아직 덜 익은 살구들이 잔뜩 들어있다. 아이는 외국인들을 찾아다니며 그걸 나눠주고 있다. 저게 절대 공짜는 아닐 텐데. 받아먹는 사람도 있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고개를 흔드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미술의 거리 입구.

 

내내 카메라를 따라다니던 꼬마들.

 

한 사람이 아이를 부르더니 돈을 쥐어준다. 아이가 손을 흔들며 뒷걸음친다. 어라? 파는 게 아니네? 그럼 왜? 현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자신들도 왜 저걸 나눠주는지 모르겠단다. 그럼 하늘에서 살구천사가 내려온 건가? 자신이 따온 살구를 관광객에게 나눠주는 아이, 돈을 달랄까봐 손사래를 치는 어른. 또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이의 얼굴에는 나눠주는 사람 특유의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오늘도 길에서 배운다. 아이와 헤어져 바탈가지 읍내 구경을 나선다. 바탈가지(Battalgazi)BC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도시지만 지금은 인구 16000명의 작은 마을일뿐이다. 1837년 오스만 제국이 주민들을 현재의 말라티야로 강제 이주시켰단다. 고대 성벽 등의 잔해가 곳곳에 남았지만 누구도 돌보지 않아 쓸쓸함만 더해줄 뿐이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 조금 걷다보니 단순한 골목이 아니다. 밖에서 볼 땐 오래된 골목 특유의 궁색함만 눈에 들어오더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이 바뀐다. 담장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예쁜 조형물들이 손을 흔든다. , ‘미술의 거리구나. 소위 벽화마을이라고 부르는 통영의 동파랑마을이나 홍제동 개미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런 골목에서는 사람도 소품이 된다. 아이들이 가을날 잠자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포즈를 취해준다. 한 녀석은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조금 있다 제 동생을 데려온다. 골목을 벗어날 때쯤에는 제 누나와 함께 서서 카메라를 키다리고 있다. 에구, 귀여운 것들.

 

허름한 담장에 걸린 시인의 사진.

미술의 거리에 그려진 그림과 조형물.

미술의 거리 전속모델들(?)

무너져가는 집의 담장에 큼지막하게 확대한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누구냐고 물으니 시인이란다. 시인이 왜 저곳에? 존경 받기 때문이란다. 부럽다. 시인이 존경받는 나라는 이미 부자다. 나는 사진 아래 쪼그리고 앉아 경탄의 눈으로 한없이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과 고풍스런 집들, 그 집들 사이의 골목. 그리고 담장의 그림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그들이 하나로 어울려 지상 최고의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가장 부러운 점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 학원에 가야하고 컴퓨터와 놀아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절대 예술작품의 될 수 없다. 작품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들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다. 담장 앞에 여자들이 나란히 서 있길래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줍게 웃으며 모델이 돼준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골목의 끝에서 울루 자미를 만난다. '울루'’ '거대한'이란 뜻을 가진 터키 말이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의미하는 터키어. 결국 울루 자미는 지역에서 가장 큰 사원, 즉 대사원을 가리킨다. 과거 바탈가지가 큰 도시였음을 말해주듯, 모스크는 제법 규모가 크다. 1224년 셀주크 투르크 때 지었다니까 굉장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벽돌은 당시 지어진 그대로고 한쪽 면이 중앙 홀로 열린 형태의 4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 돔을 올려다보니 청색과 보라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다. 이 청색 염료는 이란에서만 생산되던 아주 귀한 것이어서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됐다고 한다.

 

울루자미의 실내.

청색과 보라색으로 치장된 돔.

울루자미 안에서 바라본 하늘.

예배시간이 아니라서인지 사원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소(聖所)에 왔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예의를 지켜야지. 빨간 카펫의 촉감을 즐기며 천천히 걷다가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되새김질한다. 카펫은 온 몸을 감쌀 듯 편안하고 주변은 고요하다.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의 속에 있다. 여행자에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집을 떠나 낯선 땅을 헤매는 자체가 틈을 찾는 과정 아니던가. 삶의 본질 역시 그 틈을 통해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온몸은 땀에 젖고 배낭에 짓눌린 어깨는 벗겨져서 쓰리다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난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안온을 맛보고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세상의 근심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무엇을 성취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생각 같은 건 없다. 세상을 떠돌며 산다고 소망조차 없지는 않지만 떼를 쓴다고 될 일은 아니다. 대신 오욕으로 가득한 업장(業障) 보따리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가벼워진 몸뚱이 주억주억 조아린다. 신이시여! 그 정도는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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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한 ‘Simit Saray’.

카페 Simit Saray에 진열된 아침식사.

아침 식사를 위해 찾아간 곳은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한적한 골목. ‘Simit Saray’라는 간판이 붙은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너무 일러서일까, 주인의 눈이 화등잔 만해지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양에서 진출한 떼도둑이라도 든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런 판이니 음식준비가 제대로 돼 있을 턱이 있나. 사실 나는 아침식사가 그리 당기는 편도 아니다. 어디 가서 밤새 고아놓은 해장국 한 그릇 먹는다면 몰라도. 비행기에서 새벽에 먹은 기내식이 아직도 위장에서 저항군처럼 버티고 있다.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실내를 벗어나 옥상으로 올라간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순간, 이건 또 무슨 징조? 난데없이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늘이 내내 무겁더라니. 이스탄불은 비가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라 당황스럽기보다는 차라리 신기하다. 우리 땅이 가뭄으로 쩍쩍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온 터라 하늘에 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하긴 내가 뭐라 한들 눈 하나 꿈쩍 안 하겠지만.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차려진 아침 식사는 딱딱한 빵이다. 이름을 물어보니 시미트란다. 한국말로 하면 깨빵이라고 훌리아가 보충설명을 해준다. , 그래서 가게 이름이 Simit Saray였구나. 몇 조각 떼먹다가 그냥 내려놓는다. 있을 때 먹어두라는 내 여행수칙이 깨지는 순간이다.

 

 

Simit Saray에서 빵을 파는 아가씨.

하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다 보니 실내에도 손님이 여럿 앉아있다. , 이곳도 아침식사를 밖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홍콩이나 중국의 대도시에서 보았던 아침식사 대열이 생각난다. 문을 나서려는데 빵을 파는 아가씨가 자꾸 흘끔거리며 나를 훔쳐본다. 역시 내가 한 인물 하지? 헌데 자세히 보니 시선이 꽂힌 곳은 내가 아니라 카메라다. 그럼 그렇지. 수줍어하는 모습이 예쁘다. 터키 아가씨들 예쁜 거 한 두 번 보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나가기엔 아쉽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어도 돼요?” 물으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린다. 영어는 못 알아듣지만 너 하는 짓 보니 무슨 소린지 알만하다는 표정이다. 아무려나 땡큐다. 사진을 찍고 나니 얼른 보여 달란다. 수줍은 척 하면서도 할 건 다한다. 자기 얼굴을 확인하더니 “Good”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래, 내겐 그대가 Good이야. 식사를 마친 뒤 히포드롬(Hipodrome) 광장 쪽으로 걷는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하지만 우산은 캐리어에 들어있어 꺼낼 수 없다. 뭐 어때. 가끔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괜찮지. 어릴 적엔 매번 맞고 다녔는걸. 비를 무서워하지 않기는 길 위에서 뒹구는 고양이나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지나가는 트램도 마찬가지다. 이번 이스탄불 탐색은 히포드롬에서 시작해서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그리고 성소피아 성당으로 불리는 아야소피아 박물관 순으로 잡았다. 년에 혼자 돌아봤을 때와 똑같다.

  새벽 거리를 오가는 트램.

 

히포드롬에서 '깨빵' 시미트를 파는 청년.

9개월 만에 다시 찾은 이 위대한 유산들 앞에서 난 또 무엇을 배워야할까. 조금 고민스럽다. 그때 느닷없이 떠오르는 경구.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라. 모든 사물은 다른 각도로 볼 때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그래. 다른 시각으로 보면 되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스쳐간 곳들 중에는 미처 못 보고 지나간 것이 얼마나 많으랴. 놓치고 지나간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으랴. 비에 젖은 바닥에 엎드리는 한이 있어도 본질을 보려 애쓰리라.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전쟁 전인 1901년 오스만의 34대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게 기증했다는 육각정앞에 서 있는데 저만치 재미있는 모습의 청년 하나가 눈에 띈다. 키가 훌쭉하게 큰 청년이 꽤 높이 쌓은 무언가를 머리에 인 채 걸어오고 있다. 재주도 좋지. 멀리서 봤을 때 꽤 높이 쌓은 무엇이던 그것은 눈앞에 오면서 도넛으로 쌓은 탑이 된다. 재미있어서 사진을 몇 장 찍는데 그가 내 앞에 와서 선다. ! 탑은 도넛이 아니라 조금 전 카페에서 아침으로 먹은 깨빵, 시미트. 그러니까 이 청년은 탑처럼 쌓은 시미트를 이고 아침 굶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1개에 1리라, 1달러를 내면 3개를 준단다. 이거 미안해서 어쩐담. 사진을 찍었으니 몇 개 사주는 게 예의일 텐데 조금 전에 먹고 왔으니. 청년은 살 기색이 없는 걸 보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른 손님에게로 간다. 비가 내리는 히포드롬은 맑은 날과 또 다른 운치가 있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지 않아서 사람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광장을 오간다.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가 기증했다는 정자.

이쯤에서 히포드롬을 소개하고 가야 예의겠지? 히포드롬은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과 나란히 배치돼 있는 로마시대의 유산이다. 훗날 지어진 정식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지만 히포드롬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쓴다. 뜻은 말 운동장이란다. 말 운동장? 그럼 경마장? 말이 끄는 전차경주장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길이 130m, 너비 450m의 말굽모양으로 40열의 객석에 10만 명까지 수용했다는 굉장한 규모의 광장이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제국의 중심이었다. 주요 국가 행사는 여기서 치러졌다. 또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도 열렸다. 광장에는 갖가지 유물이 남아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리고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 뱀의 기둥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고 있는 기구한 운명들이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지금 높이의 세 배인 60m였고 무게도 800t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세 도막으로 나눠 윗부분만 가져왔다. 이산가족이 아니라 이산 몸통이 돼버린 셈이다. 뱀 기둥도 머리를 잃고 몸통만 남았다. 내 눈에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남긴 흉물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광장 자체가 무사했던 것도 아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제4차 십자군은 히포드롬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가톨릭)의 군사가 또 다른 기독교(정교회)의 나라를 철저하게 유린한 것이었다. 그 뒤로 광장에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역사는 신의 논리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쓰는 걸일까.

 

 

히포드롬 주변의 카페.

나는 이 히포드롬에 서면 각종 사연을 지닌 유적들보다는 사람 이야기가 먼저 난다. 특히 심약한 범부에서 위대한 황제가 된 한 남자, 그리고 매춘부에서 황후가 되어 위대한 황제를 만든 여자. 이왕 왔으니 그들을 잠깐 만나고 가자. 1000년 이상 로마의 수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정도는 기본 예의다. 그렇다고 절대 딱딱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니 긴장할 건 없다. 유스티니아누스 1.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고 잃어버렸던 로마의 영토를 회복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긴 황제의 이름이다. 그가 황제가 되는 자체에 우여곡절 있었다.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는 그의 외삼촌이다. 트라키아의 가난한 농민출신이었던 유스티누스는 말 그대로 ()’으로 군에 입대했다. 밥이라도 실컷 먹으려고 병졸이 된, 내 땅의 옛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서 멈출 사람은 아니었다. 운이 좋았던지, 아니면 피눈물 나게 노력했던지 황실 경비사령관이 되었고 결국 518년에 황제가 되었다. 공부할 틈이 없어 까막눈이었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던 황제는 누이의 아들인 사바티우스를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나라 일을 맡긴다. 또 제법 일을 꼼꼼하게 한다 싶으니 양자로 삼았다. 그 조카가 바로 외삼촌이자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 이름까지 바꾼 유스티니아누스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자신이 죽기 몇 달 전에는 조카를 공동황제로 임명해 황제의 길을 열어준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런 과정을 거쳐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의 인생은 배우자 테오도라를 만나면서 또 한 번 바뀐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남자에 달렸다고? 테오도라는 그걸 뒤집어서 남자 팔자가 여자에 달렸다는 걸 증명한다. 그녀는 원래 전차경기장인 히포드롬에서 곰을 관리하던(말을 관리했다는 설도 있다) 사내의 딸이었다. 신분으로 보면 바닥 중의 바닥이었을 것이다. 경기장에서는 전차 경기 뿐 아니라 검투사나 맹수들의 싸움, 연극, 서커스가 열렸다. 서커스에 출연하는 동물들의 사육사가 필요했던 건 당연한 일. 가설이긴 하지만 서커스에서 공연을 하는 여인들은 화류계에도 몸을 담았을 것이다. 테오도라도 그 중 하나였지 않을까. 소속이 어디였든 그녀는 유명한 매춘부 혹은 무희였다고 전해진다. 매춘부니 집창촌이니 자꾸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 되는데. 이러다가 점잖은 독자 다 떨어지겠네. 그래도 전할 건 전해야지.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 히포드롬 광장을 누비던 그녀는 어느 날 느닷없이 그쪽 생활을 청산하고 양모를 짜서 생계를 꾸리는 요조숙녀로 변신하더라는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걸까? 크게 될 사람은 그렇게 뭔가 다른 점이 있는 법. 유스티니아누스가 조신한 여자테오도라를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남자, 즉 유스티니아누스는 여자의 미모와 정숙함에 반해서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하단에 새겨진 부조들.

그렇다고 모든 게 일사천리는 아니었다. 당시 로마법으로는 귀족과 평민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콩 껍질로 이중 도배했는데 그냥 물러날 총각이 있나.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인 삼촌을 졸라 귀족도 하급계층과 결혼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하도록 한다. 일은 술술 풀려 그들은 마침내 결혼에 이른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 또 한 번 히포드롬이 등장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외삼촌과 테오도라를 만난 것에 이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찾아온 세 번째 전환점은 532년에 일어난 니카반란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전차경주팀이 2개 있었다. 지금의 인기 프로축구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듯.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둘로 나뉘어져 청색당과 녹색당으로 부르게 됐다. 전차 경기의 팀들이 입는 옷 색깔에서 시작됐지만 시민들까지 두 당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귀족들이 지지했고, 녹색당은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지지 세력이었다.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청색당을 지지했다. 532110일 드디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히포드롬의 전차경기에서 두 당파의 충돌이 있었는데 결국 싸움으로 번지게 됐다. 황제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주동자 7명을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됐는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그 가운데 각 당의 한 명씩이 칼을 맞고도 살아남는 일이 생겼다. 이때 민중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인들은 냉정하게 다시 사형을 집행해서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양당이 합세해 폭동을 일으켰다.

 

세 마리의 뱀 기둥.

3일 뒤인 113. 황제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히포드롬에 들어서자, 폭도들은 황제를 향해 전차경주 선수들을 격려하는 응원 구호 니카!(이겨라!)’를 외쳤다. 번역하면 황제 타도? 이쯤 되면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겠지. 사실 이 폭동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배경이 있었다. 그 시대 비잔티움의 황제들은 벼슬을 팔아 축재를 하는 매관매직을 밥 먹듯 했다. 그렇게 쌓인 돈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각종 축제와 운동경기를 열어주면서 황제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이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런 관행을 폐지했다. 빵과 전차경주에 중독된 시민들로는 그런 황제가 '빵을 빼앗은 놈' 정도로 보일 수밖에. 밥 한 술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게 민초들 아니던가. 공짜로 먹고 즐기던 걸 빼앗았으니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그래도 좀 그렇다. 황제가 상대방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들여온 쇠고기를 먹고 백성 몇 사람 두개골에 구멍이 났다든가, 황제의 친인척이 물불 안 가리고 해먹다 보니 나라가 거덜나게 생겼다든가, 강이란 강은 전부 파헤쳐 비만 오면 '노아의 방주'를 사겠다는 주문이 빗발친다면 몰라도 빵 좀 안 줬다고 폭동까지 일으킬 거야. 폭동은 급기야 반란으로 확대돼 폭도들이 황궁에까지 몰려들었다. 그게 바로 니카반란이다. 잠깐. 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배경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고 왔다 갔냐 하냐고?

 

십자군이 발가벗긴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

생각보다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교를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니카반란이 일어난 532년 전후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신라가 금관가야를 복속했고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가 공인됐다. 백제는 사비성으로 천도했다. 그런 사실을 적은 기록들이라 봐야 몇 줄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이든 서든 자세한 건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히포드롬에서 시작된 폭동은 결국 새 황제를 뽑는 데까지 이어지고 만다. 성소피아 성당도 불길에 휩싸인다. 그 소용돌이 속에 서 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래 담이 그리 크지 못한 사내였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함성이 담을 넘어오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황제는 어마, 뜨거라!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다.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기는데 담 큰 마누라님, 아니 황후인 테오도라의 호통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어딜 가신다는 겝니까? 황제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 황궁입니다. 어의(御衣=황제의 옷)보다 더 좋은 수의(壽衣=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는 없습니다. 지금 도망치면 다시는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을 겝니다.” (대부분은 내가 재구성한 문장이다. 대충 그랬을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죽어도 여기서 싸우다 죽으라는 것이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혹은 마누라가 무서웠던 황제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벨리사리오스라는 장군을 불러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진압은 성공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폭동에 참여했던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6분의 1이라는 엄청난 숫자였다.

 

히포드롬 주변에 활짝 핀 자귀나무 꽃.

폭동과 진압. 지금 내가 서 있는 히포드롬에는 핏물이 냇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황제의 기록으로 보면 위대한 승리일지 모르지만 민초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적인 역사다. 더구나 빵 때문에 죽었다는 건 가장 슬픈 일이다. 아무튼 니카반란 진압을 계기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결국 위대한 황제로 훗날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가 이룬 업적들을 새삼 나열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지금 나는 정의와 불의, 혹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자는 게 아니라 히포드롬 이 품은 이야기를 하나 전하고 싶은 것이다. 광장을 밑천으로 미천한 삶을 살던 한 여자가 황후가 되고 황제의 지위를 잃을 뻔한 남편을 호통 쳐서 위대한 황제가 되게 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너무 길었나? 그래도 딱 히포드롬 이야기 하나만 더. 광장의 남쪽 끝에는 흉물스런 외관을 갖고 있는 탑이 하나 서 있다. 이름도 길기도 하지.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라는 이름의 탑이다. 원래 32m 높이로 쌓은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물을 입힌 아름다운 기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제 4차 십자군의 폭거로 인해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했다. 성전이라기보다는 난전이 되어버린 전쟁,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처음의 뜻은 오간데 없이 같은 기독교의 나라로 쳐들어온 그들은 이 탑조차 발가벗기고 말았다. 무기를 만든다는 영분으로 탑에 있는 청동을 몽땅 떼어낸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리석만 남은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비잔티움의 황제, 즉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옛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히포드롬의 관광객들. .

다른 사람들이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세 마리 뱀의 기둥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나는 흉물스러운 형태의 오벨리스크 앞을 홀로 서성거린다. 역사는 미명(美名)만 기록하는 게 아니라 악명(惡名)도 기록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쥐고 잠시 고뇌한다. 탑 옆에는 비 맞은 자귀나무 꽃이 탐스럽다. 여기서는 이 꽃을 무어라고 부를까. 잠시 나무에 기대어 말 없는 역사를 곱씹어본다.

 

 

 

 

 

 

 

 

 

 

 

 

posted by sagang

터키 이야기, 그 두 번째 장정을 시작합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4월까지 연재했던 터키, 지중해를 따라 걷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산후 조리도 못한 채 이스탄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일종의 신고 의식이 필요했던 셈이지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번엔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블로그에 연재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냥 책으로 낼까.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는 오랜 원칙을 깰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부터 또 긴 여정에 들어갑니다. 읽은 뒤 그냥 가지 말고 한 줄 답글로 아는 척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권과 마찬가지로 댓글로 격려해주신 분들에게는 2권이 출간된 뒤 저자 사인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사진 왼쪽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오른쪽으로 꺾어진 해협이 흑해와 연결되는 보스포루스, 가운데 강 같은 곳이 골든혼이다. 육지는 맨 왼쪽 반도처럼 나온 곳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 골든혼을 건너 펼쳐진 땅이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그리고 앤 앞쪽에 보이는 것이 아시아 땅이다.

전쟁? 절대 안 나요.”

새벽 430.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두 명의 청년. 시리아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냐고 들이대듯 묻자, 모루에 해머를 내리치듯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 왜 안 난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쟁을 해서 이득을 보는 쪽이 아무도 없거든요. 시리아는 물론이고 터키 역시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나면 관광산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잖아요. 또 전쟁에서 이긴다고 땅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옛날하고는 달라요.”

으으음”(엄청나게 감탄했다는 듯 끄떡끄떡)

미국도 이스라엘도 이득 볼 게 없고중국 역시 반대하는데다 NATO도 전쟁에 참여할 생각 같은 건 아예 없어요.”

그렇구나. 전쟁이 안 일어나는구나. 헌데, 이 친구들 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해박하지? 내가 장군 출신의 군사평론가들을 만난 건가? 그나저나 안 물어봐줬으면 얼마나 섭섭할 뻔 했니? 나는 감탄을 지나 감동까지 하고 만다. 하늘의 점지로 우연히 만나게 된 터키 청년들. 한국에서 3년가량 일하고 돌아왔다는 그들과의 질펀한 수다가 시작된다. 너희들 딱 걸렸어. 내가 바로 그 유명한 호기심 사나이거든.

 

하늘에서 본 이스탄불.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이 가장 걱정한 게 더위전쟁이었다. 더위야 최종 목적지로 잡은 샨르우르파란 곳이 섭씨 50도를 넘나든다니 염려해주는 게 당연하지만 느닷없이 전쟁 걱정은 왜? 출발을 코앞에 두고 터키와 시리아 간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예고하는 사건이 터졌다. 먼저 시리아가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며 지중해 연안에서 터키 전투기를 격추했다. 불뚝 성질 하나만큼은 선불 맞은 멧돼지도 부럽지 않을 터키가 넙죽 엎드려 있을 턱이 있나. 반응은 즉각 나왔다. 국경에 접근하는 시리아 군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하고 대공포와 미사일 발사기 등을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여기까지가 출발 직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문제는 내가 갈 곳이 바로 잘못 넘어지면 배꼽이 국경선을 넘어갈 정도로 시리아에 가까운 접경지역이라는데 있었다. 몇몇 사람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고 몇몇 사람은 뭔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등을 떠밀었다. 이참에 날 치워버리겠다는 심보겠지? 나는 잘하면 종군기자 한번 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전혀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현실성 떨어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목표로 했던 지역을 가지 못할까봐 노심초사였다.  그러다보니 공항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전쟁’일 수밖에 없었. 터키 사람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공항이나 이스탄불, 그리고 훗날 접경지역에서 만난 그 누구도 전쟁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걱정 따위는 서리서리 접어 배낭에 넣어두고 어렵게 만난 청년들하고 놀아볼 일이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터키 청년들.

주로 이야기를 나눈 청년의 이름은 이브라힘이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유일신 3대 종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슬람식 표기가 바로 이브라힘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에는 드물지 않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한국에서 일했다는 경험이상의 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갔을 때 서울에서 일했어요?”

아뇨, 저는 주로 지방에 있었어요. 혹시 예산이라고 아세요?”

예산?(사람들이 놀라 돌아볼 만큼 목소리가 커진다) 아다 마다야? 그쪽이 바로 내 고향이에요. 수덕사라고 들어봤어요? 내가 거기서 자랐거든.”

정말요?(기특한 것. 한국식 추임새까지 넣을 줄 알고). 제가 바로 예산에서 일했어요. 수덕사도 당근 알지요. 덕산을 거쳐서 가는.”

어라? 어라?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야. 이 머나먼 곳에 와서. 이 정도면 고향 동생? 아니, 동생이라기에는 나이차이가 좀 나고. 아무튼 객지에서 고향의 조카쯤 만난 듯한 감동이 물밀 듯 몰려온다. 이야기는 거침없이 달려 나간다. 말투도 은근히 내려간다. 그의 소망은 한국에 가서 식당을 차리는 거란다. 전에 돈을 좀 벌어서 식당을 열었는데 망했다고 아쉬워한다. 터키에도 코리언 드림을 품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하고 약간은 불안하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공항 내부.

식당을 차리면 서울은 좀 어려울 것 같고. 대전이나 천안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저 개업하면 형이 신문에 내줄 수 있어요?”

그럼, 내주다마다. 신문이 문제야? ‘테레비에도 빵빵 때려줄 테니 차리기만 해.”

내가 준 명함에서 신문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 친구, ‘실속하나 챙긴다. 나는 훗날 걱정 같은 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덜컥 굳은 맹세부터 한다. 내가 무슨 재주로 음식점 개업 소식을 신문에 내고 TV에 때려준단 말이냐. 하지만 그 소망 가득한 눈망울 앞에서 차마 “No”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용기부터 주는 거야. 그나저나 언제부터 우리가 형 동생이 됐지? 아무렴 어떠랴. 터키에 어린 동생 하나 생겼으니 좋은 일이지. 우리는 공항 대합실 한 가운데 서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사진도 신나게 찍어댄다. 남들이야 흘끔거리건 말건. 그러다가 결국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말았다. 그의 뜨거운 피가 내게로 내 피가 그에게 흐르는 느낌이 선연하다. ! 너와 나 사이엔 원래 하나의 이름을 가진 강이 흐르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번 여행 일정에 넴루트 산이 있다니까 그쪽의 아드야만이 자기 고향이라고 또 한 번 팔짝 뛰며 반가워한다. 그래, 인연이라는 게 이렇다니까.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니 안내하고 싶다며 금방이라도 따라나설 기세다. 하지만 그도 직장생활을 하는 몸. 말만으로도 고맙지. 작별을 하기 전에 터키인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새벽 승객을 기다리는 공항택시들.

내 동생, 이브라힘아, 너는 네가 유럽인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해?”

유럽이든 아시아든 아무 상관없어요. 우린 터키사람이거든요.”

우문에 현답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물어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알다시피 터키는 국토의 97%가 아시아 땅(아나톨리아)에 있고 단 3%(트라키아)만 유럽의 끝 발칸반도에 걸쳐 있다. 영토의 비중으로 보면 아시아에 속한 국가라고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의 일원이 되고 싶은 열망을 오랫동안 품어왔다. 오스만 제국이 세계를 호령할 때, 동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삼고 아시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기억을 갖고 있는 투르크족. 그 위대했던 시절에 대한 미련일까. 세계 1차 대전에서 참패하고 1923년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에게해의 섬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스탄불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유럽 땅을 갖는다는 상징성과 서구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켜야 한다는.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는 아시아의 이름으로 살기보다는 영광이 대대손손 계속 될 것 같은 유럽에 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찬반 논란이 거세긴 했지만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도 ‘EU Style’이다. ‘준비된비회원국인 셈이다. 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에서는 달러보다 유로화가 주로 통용된다.

 

세상은 아직 박명 속에 잠들어 있다.

하지만 터키는 여전히 유럽연합의 외곽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회원국인 그리스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과 인권이나 키프로스 갈등’, ‘쿠르드족 문제등을 가입 거부 이유로 들지만 까놓고 말하면 유럽은 터키가 싫은 것이다. 과거의 정복자에 대한 공포의 잔해도 있을 테고, 어쩌면 기독교 문화권에 이슬람 문화를 끼어주기 싫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터키 경제에서 별로 덕 볼 것도 없으니 잘(?) 나가는 자기들끼리 놀아보겠다는 수작이기도 하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요즘은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 역시 유럽이 전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등 몇몇 나라의 경제가 도미노 게임이라도 하듯 무너지면서 세계 경제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판이니 그 아수라장에 무엇 하러 낄 것인가. 더구나 이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아시아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당신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 거야? ‘유럽이든 아시아든 상관없다. 우리는 터키 사람일뿐정답이다. 스스로의 자존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뒤에 몇몇 사람에게 물어봤을 때도,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듯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얘기가 잠시 무겁게 흘러갔다. 읽다가 덮은 독자는 없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임을 알아야 된다. ‘아빠 좋아? 엄마 좋아?’ 식의 선택지는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니. 아무튼 공항에서 금방 만난 동생 이브리힘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드디어 가이드들을 만났다. 맨 오른쪽이 이젯, 가운데가 훌리아.

한국에 오면 꼭 전화해. 알았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멀어지는 그의 어깨가 듬직하다. 근처에 서 있다가 잠깐 눈이 마주친 여행작가 P가 감탄사를 섞어 한마디 한다.

참 빠르시네요.”

뭐가 빠르다는 거지? 사람 사귀는 게? 내 삶이 그래요. 나는 오로지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여행을 하는 걸. 그리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또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걸. 이별은 상봉을 낳는 것일까? 이브리힘과 헤어지는 찰나에 가이드들이 허겁지겁 나타난다. 그들이 지각하는 바람에 일행은 잠시나마 공항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새로운 사람을 사귈 기회를 얻었지만. 가이드는 남녀 2명이다. 그들 눈에는 옆 사람과 내가 닮아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들 둘이 무척 닮아 보인다. 혹시 남매나 부부 아닐까? 뭐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둘 다 키가 크지 않고 아담하다.  내가 큰 키가 못돼놔서 작은 사람들을 만나면 형제애부터 느낀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큰 사람은 가까워지는 단계부터 약간 부담을 느낀다. 가끔은 터키 사람들이 유럽인처럼 키가 큰 줄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큰 사람은 크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작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생긴 것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짐작이긴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 몽골초원에서 돌궐족으로 살 때는 우리네 생김새와 많이 비슷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중앙아시아를 지나며 적절히 피를 섞고 또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또 다른 피를 섞으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의 멀고먼 여행 이야기는 터키 역사를 말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하자.

 

여자 가이드의 이름은 훌리아(Fulya). 이들의 한국말은 조금 전에 헤어진 친구들보다 어눌하다.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 훌랄라라고 할 때 훌리아예요.”라며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준다. 훌랄라? 이거 또 괴물 하나 나타난 거 아냐? 그 순간 그녀가 말한 훌랄라는 훗날 많은 사람의 입에서 울랄라가 되기도 하고 얼랄라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지만 한국에는 단 하루만 가봤다는 스물일곱의 그녀. 명물이다. 남자 가이드의 이름은 이젯 혹은 가제트를 연상시키는 이제트(Izzet). 어라? 이제트? 이집트에서는 여자 이름인데? 람세스 2세가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잖아. 이 친구는 비교적 과묵한 편이다. 스물여덟 쥐띠라고 한국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역시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포항에 있는 선린대에서 6개월 어학연수를 받았다. 그 역시 숱한 전설을 남겼다. 한국에 하루 가본 훌리아나 현지에서 6개월 공부한 이젯이나 말이 유창하지 못하긴 마찬가지. 나는 내가 터키말을 배우느니 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로 한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의 한국어 교사다. 하드트레이닝을 시킬 테니 각오하라. 속으로 하는 생각을 그들이 알 턱이 있나. 물론 암울한 미래도 알 수 없겠지. 비행기가 도착한 게 현지시간으로 4시 40분. 새로 만난 동생과 수다를 떨고 가이드들과 감격의 상봉을 해도 아침 먹을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다. 공항을 한 바퀴 돌아본다. 밖으로 나가니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맑은 날이 많은 터키에서는 보기 드문 하늘이다. 9개월 전에 만났던 폭주족 택시운전사가 생각난다. 생명을 담보로 유희를 즐기던 그, 잘 있겠지? 별 사람이 다 보고 싶다.

 

 

차 안에서 찍은 이스탄불의 주택가.

이스탄불 시내로 가는 길. 새벽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오욕칠정. 그리고 밝음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음습한 뒷골목 풍경. 사람 살이가 모두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이 아니던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게  느닷없이 생각 나 이젯에게 묻는. 이 느닷없음이야말로 나의 오랜 지병이다.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어요?”

? 무슨촌요?”

단어 자체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하긴 학교에서 그런 말을 가르칠 리 있나. 하지만 무슬림이 대부분인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이리 저리 설명해 보지만 성매매라는 단어조차 모르니 요령부득이다. 이게 어디 온갖 단어를 동원해 설명할 일이던가.

돈 주고 여자를 사는 곳, 몰라요?”

그 말은 효과를 본 모양이다. 잠시 얼굴이 붉어지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있어요.”

정부에서 인정하는 건가요?”

그렇구나. 있구나. 그것도 공식적으로. 하긴 인류역사와 함께 해온 게 그 직업이라지 않던가. 에페소에 가면 고대에 창녀촌을 안내하던 세계 최초의 광고도 있는 판인데.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동행자들의 눈초리가 약간 새치름해진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이건 순전히 학문적 궁금증이라니까요. 공부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이스탄불 시내.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새벽, 도시는 여전히 적막에 싸여있다. 그리고 모든 갈등은 평화라는 위장막에 덮여있다. 나는 지금 터키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푸듯, 이 도시에 수천 년동안 고인 이야기를 퍼내야 된다. 숙련된 백정처럼 도시의 정수리에 잘 벼린 펜과 카메라를 들이대야 된다. 느닷없이 불타오르는 전의로 온 몸이 뜨거워진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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