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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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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9. 08:30 길따라 바람따라

3호선 원당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여기서 출발. 도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길이 나온다.

경기도 고양시. 3호선 원당역 6번 출구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며느리 친정나들이 보낸 시어머니 얼굴처럼 편안하지 않다. 그렇다고 금방 비가 올 기세도 아니다. 기상청 예보에도 비 얘기는 없었다. 요즘 예보는 신경통 앓는 노인보다 훨씬 정확해졌다. 믿자, 믿어. 오늘 걸어야 할 길은 서삼릉(西三陵)누리길. 지금까지 걸었던 길 중에서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길 소개는 천천히 하고, 일단 출발이다. ? 그런데 어디로 가지? 늘 그렇듯이 첫 걸음을 떼는 게 문제다. 전철역을 뒤로 하고 직진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내판이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조금 망설이다가 일단 직진해서 큰 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는 고가도로가 오른쪽 하늘에는 전철이 다니는 길이 걸려있다. 저 길을 계속 가면 우주정거장이 나올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버릇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조금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작은 길이 보인다. 맞아. 저 길이었어. 얼른 밭을 가로질러 그 길로 접어든다. 걷는 이에게 찻길은 늘 부담이다. 조금 가면 첫 번째 경유지인 배다리술박물관이 나올 것이다. ‘이라는 단어에 입에 침이 고인다. ,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길로 가야되는데 처음엔 큰 길로 갔다. 길치 같으니...

여기서 다리 쪽으로 좌회전

! 최소한 코스는 숙지하고 가야지. 서삼릉누리길은 총 8.28km로 여유롭게 걸으면 2시간15분가량 걸린다. 전철 3호선 원당역과 삼송역 사이에 있어서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코스는 원당역배다리술박물관수역이마을서삼릉종마목장농협대학솔개약수터삼송역 순이다. 물론 반대로 삼송역에서 출발해도 뭐라는 사람은 없다. 걷는 도중에 세계문화유산인 서삼릉과 원당종마목장 등을 경유하기 때문에 역사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따라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너무 이른 시간인가? 그렇지도 않은데. 시계를 보니 10. 혼자면 어때? 길을 걷는다는 건 배낭에 외로움을 지고 가는 것이다. 자꾸 동반자를 찾기 시작하면 길의 참맛을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이다. 조금 벗어나니 서삼릉누리길이라는 첫 번째 알림기둥이 보인다. 거기서 조그만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접어든다. 길가의 텃밭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키를 재고 있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와 새 생명들을 저만큼 키워놓았다.

 

배다리술박물관 전경

증류주를 만들고 있다.

곳곳이 박물관

5분쯤 걸었을까. 저만치 배다리술박물관 간판이 보인다. 그냥 지날 수 없지. 마당에 들어서니 여기 저기 놓여있는 술독부터 예사롭지 않다. 한 바퀴 돌아보다가 마당가에 허술하게 지은 작은 집을 들여다본다. 노인 한 분이 술을 빚고 있다. 아궁이에서는 장작이 끄느름하게 타고 있고 소줏고리의 주둥이를 타고 내려온 맑은 술이 유리병으로 들어간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제사장처럼 경건해 보이는 노인의 뒷모습에 말도 못 붙이고 조용히 물러나온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말 그대로 박물관이다. 1, 2층으로 구성돼 있는데 현관에서부터 유물들이 빽빽하게 전시돼 있다. 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빚기에서부터 보관까지 온갖 도구들이 다 있다. 술 뿐 아니라 제례혼례 와 관련된 각종 전통용구와 옷들도 진열돼 있다. 이 집 주인의 관심과 취미가 보일 듯하다. 하긴 전통 관혼상제 어딘들 술이 빠지던가. 특히 눈에 띄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한 자료들. 막걸리를 마시는 밀랍인형도 있고 벽에는 생전의 사진도 붙어있다. 배다리술도가의 막걸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애용주로 이름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거기서 확인한다.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는 박관원 관장

옛날에 썼던 술 빚는 도구들

각종 전시물들

관혼상제 때 쓰던 옷들

1층으로 내려오다가 술을 빚던 노인과 마주친다. 언뜻 봐도 장인들이 가진 꼿꼿한 기운이 전신에서 풍겨 나온다. 적어도 80은 돼 보이는데 석양에 든 세대가 갖기 쉬운 열패의 기운은 조금도 없다. 묻지 않아도 배다리술도가의 4대 가주(家主)이자 박물관을 세운 박관원 씨라는 걸 알 수 있다.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묻는다.

지금도 술을 직접 빚으세요?”

그럼요. 내년이 우리 술도가 100주년이거든. 직접 100년 주를 만들 거예요. 외국에 가보면 몇 백 년 된 술, 코냑 그런 게 있잖아. 그런데 우린 그런 전통술이 없어요. 일제 때문에 전통주가 모두 사라진 거지.”

그냥 지나갔으면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말문이 터지자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지금은 5대째인 아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지만 손자가 합류해 6대로 이어질 거라고 자랑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긍심이 묻어있다.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배다리막걸리 한 잔 하시려우?

너무 오래 지체했나싶어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갑자기 우르르 쾅쾅!!! 소리가 나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진다. 어라? 천하의 술꾼이 술도가에 와서 술 한 잔 안 마시고 간다고 하늘이 노했구나. 이러니 내가 술을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가 없지. 배낭에 맥주를 충분히 넣어갖고 왔는데 어쩐담. 그래도 하늘의 뜻을 무시할 수 있나. 점심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박물관 한쪽에는 술과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비가 장엄하게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막걸리와 안주를 시킨다. 어차피 마음 한켠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내가 술도가를 그냥 지나친다는 건 개가 X을 보고 그냥 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막걸리 맛은 자랑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맛이 좋다. 하긴 지금 내 입에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는 내 손도 좀처럼 쉴 줄 모른다. 에헤야~ 데헤야~ 길이 늦어지면 어떠랴.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지. 역시 술이 좋긴 좋다.

 

비가 그친 뒤의 싱그러운 숲길

위의 숲길을 가지고 장난도 치고

숲길을 벗어나니 동네가

저곳이 바로 주꾸미로 유명한 수역이마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던 비는 내가 마지막 술잔을 비우자 거짓말처럼 그친다. 역시 술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뜻임이 확인됐다. 비가 그친 대지는 싱그럽다. 진흙길을 피해 조심스레 걷다가 숲길로 접어든다. 카메라로 줌인 샷 놀이도 하고 동네 개들과 메롱놀이도 하면서 가다보니 골프장을 끼고 도는 길이 나타난다. 높은 담장너머 골프장의 잔디들이 비를 맞아 푸른 보석처럼 빛난다. 하지만 공이 날아올지 모르니 출입을 삼가 달라는 입간판 앞에서 살짝 정이 떨어진다. 내가 그곳을 들어갈 일도 없겠지만, 저런 류의 경고문은 늘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날아오는 공에 안 맞으려면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골프장을 지나니 수역이마을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식당들이 나란히 서있다. 그 유명한 주꾸미 마을이다. 수역이마을의 어원은 수역(水域)이 마을이라고 한다. ‘물의 경계. 뭔가 있어보인다. 원래는 넓은 들을 낀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 식당들이 한 둘 들어서면서 지금은 유명한 먹거리촌이 됐다고 한다. 특히 주꾸미 요리로 유명하다. 하지만 배부른 자는 주꾸미 아니라 낙지로 미끼를 삼아도 유혹당하지 않는 법. 배고플 때 찾아오리라 다짐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다시 숲길이 이어지고

여기서 우회전

이제부터 능역이다. 또 우회전

맞으면 너만 손해니 알아서 피하라는 거야?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2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만난다. 깊 옆에는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왜 나는 찔레꽃만 보면 소복 입은 여인이 생각나는지. 가객(歌客) 장사익의 찔레꽃을 흥얼거리며 한국스카우트 연맹이라는 알림기둥을 따라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아스팔트길을 걸어야한다. 걷기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구간이 나타난 것이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참 걷다보니 저만치 넓은 숲이 보인다. 이제 서삼릉 언저리에 들어선 셈이다. 그렇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한국스카우트연맹 중앙훈련원을 지난 뒤에도 서삼릉은 까마득하다. 도중에 비닐하우스도 만나고 골프장도 만난다. 역시 골프공을 조심하라고 써 놨다. 언젠가는 골프공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오겠다. 왕릉 유역에 골프장은 또 뭔지. 조상님들이여. 얼마나 속상하십니까? 날이면 날마다 굿 샷!” 소리 들으며 잠에서 깨시는 건 아닌지요. 다행이 길 옆으로 인도를 만들어 놓아서 걷기는 수월하다. 드디어 허브랜드 간판과 만난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만큼 아스팔트길을 걷는 건 피곤하다. 이제부터 서삼릉 들어가는 길의 시작이다.

 

차도를 줄여 인도를 만들어놨다. 나야 고맙지 뭐.

이곳이 바로 허브랜드

허브랜드에 핀 꽃들

핀 꽃을 그냥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지. 허브랜드에 들러 이 꽃 저 꽃을 둘러본다. 허브 향기가 피로를 한결 덜어준다. 힘을 얻었으니 이제 서삼릉으로 갈 차례.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차와 사람이 엉켜 무척 혼잡하다. 조금 들어가니 오래된 은사시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은사시 나무. 이름만 들어도 뭔가 있을 것 같은 이 느낌은? 은사시나무는 잎의 뒷면이 하얀 솜털로 덮여 있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마치 사시나무가 떠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 은색 사시나무다. 하지만 은사시는커녕 사시나무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시나무처럼 떤다는 표현이 실감이 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또 자연공부를 좀 하고 갈 일이다. 사시나무는 한자로 백양(白揚)이라고 한다. 나뭇잎이 팔랑팔랑 움직인다고 '팔랑버들' 또는 '파드득나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왜 이 나무는 떠는 나무로 알려져 있을까. 사시나무는 생장이 무척 빠르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물을 뿌리에서 잎으로 빨아올린다고 한다. 그렇게 생긴 수분을 공기 중에 빨리 방사하기 위해 잎을 마구 떨어댄다는 것이다. 우리가 손에 물이 묻으면 탈탈 터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과학 공부를 꽤 열심히 한 나무인 것 같다.

 

서삼릉 들어가는 길

종마목장의 풀밭

사시나무 잎이 팔랑거리는 이유를 독특한 구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사시나무 잎은 커다란 부채 모양으로 생겨서 바람을 잘 받는다. 또 잎자루가 가늘고 길기 때문에 탄력성이 뛰어나다. 그러니 조그만 바람에도 민감하게 움직일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과학의 시대라도 나무에 전설이 빠질 수는 없는 법. 중국 주나라에는 묘지에 심는 다섯 가지의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지에는 측백, 고급관리는 회화나무, 학자는 모감주나무를 심었다. 그렇다면 장삼이사 서민들의 무덤에는? 바로 사시나무를 심었다. 문제는 한번 서민은 죽어서도 서민이라는 것. 서민 무덤에서 자란 사시나무들은 높은 사람만 지나가면 말 그대로 사시나무 떨 듯떨었다는 것이다. 에구,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은 죽어서도 불쌍한 존재다. 고개를 넘으니 눈앞에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다. 종마목장(경마연수원)에서 가꾼 초지(草地). 방금 풀을 베어낸 듯,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풀들이 흘린 피 냄새다.

 

표부터 끊으세요.

난 이런 숲이 좋더라.

 

먼저 서삼릉에 들르기로 한다. 현재 이곳 능역은 관리주체가 나뉘어져 있어서 허가 없이 서로 통행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지. 그래서 일반 시민들은 효릉을 뺀 예릉과 희릉, 즉 서이릉만 볼 수 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서삼릉에 대해 공부 좀 하고 지나가자. 서삼릉은 앞에 밝힌 대로 효릉과 예릉, 희릉을 일컫는 말이다. 효릉(孝陵)은 중종의 아들인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의 능이다. 이 능에는 슬픈 사연이 배어있다. 인종은 단명한 왕이었다.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했는데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는 소망대로 아버지 중종과, 자신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에 요절한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곁에 묻혔다.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그의 계모였던 문정왕후가 훗날 지아비 중종의 능을 한양으로 이장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간절한 소망은 한 여인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철종과 철인왕후가 누운 예릉

봉분이 잘 안보인다.

정자각 내부. 제례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 놓았다.

희릉(禧陵)은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능이다. 장경왕후는 태종의 능인 헌릉에 안장됐다가 지금의 장소로 이장됐다. 중종이 승하하자 비()가 묻힌 이곳에 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그 상태로 두었으면 아무 일 없었으련만, 앞에서 나온 문정왕후의 왕릉 이장이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었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 질투였는지 자신의 죽음 이후를 계산했는지 중종의 능을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으로 이장해 버렸다. 결국 부부를 떼어놓아 장경왕후만 남은 희릉이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이장의 이유로 중종의 능자리가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점을 들었지만, 옮긴 곳은 지세가 낮아 홍수가 나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조금 더 계속된다.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문정왕후 역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의 단릉(單陵)에 안장됐다. 결국 중종은 시샘 많은 두 번째 계비 탓에 죽어서도 쓸쓸히 지내고 있는 셈이다. 예릉(睿陵)은 농투성이에서 졸지에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된 비극의 왕 철종과 철인왕후 안동김씨가 묻힌 능이다. 철종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은 생략한다.

 

장경왕후가 혼자 누워있는 희릉

 

효릉은 가볼 방법이 없으니 건너뛰고 먼저 예릉에 들른다. 철종을 생각해본다. 강화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원범으로 살았으면 훨씬 행복하지 않았을까. 안동김씨의 세력에 눌려 뜻 한번 펼쳐볼 새 없이 살다가, 30대 중반에 승하하고 말았으니 그 또한 신데렐라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능은 잘 가꿔져 있다. 하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다.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과 신도비가 안치된 비각을 둘러보고 먼발치에서 봉분을 휘휘 둘러보고 돌아설 뿐이다. 장경왕후가 혼자 누워있는 희릉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이곳 서삼릉에는 지금까지 본 능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만행은 이곳에도 숨어있다. 강점자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던 왕들의 태실과 후궁왕자공주들의 묘들을 서삼릉의 경내로 이장했다. 집중 관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조선 왕릉의 격을 훼손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공통된 해석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만 제 가치를 발한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서삼릉엔 3개의 능과 효창원의령원 등 3개의 원, 후궁들과 왕자 공주의 묘 46, 태실 54기가 있는 커다란 능역이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의 회묘도 이곳에 있다.

 

종마목장 들어가는 길

말 팔자가 상팔자

홍당무를 얻어먹겠다고...

능을 벗어나 종마목장으로 향한다.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마연수원은 경주마와 종마의 육종보호를 위해 만든 곳이다. 질 좋아 보이는 말들이 푸른 초원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다. 저 정도면 개 팔자가 아니라 말 팔자가 상팔자다. 하지만 그리 흔쾌하지만은 않다. 왕릉 곁에 종마장이라니. 지하에 묻힌 왕들은 골프 치는 소리로도 모자라 배설물의 냄새까지 맡아야 할 것 같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법 치고는 좀 고약스럽다. 종마목장에는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 많다. 설렁설렁 둘러보고 되짚어 나온다. 서삼릉 입구에서 다시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역시 아스팔트길이다. 더구나 인도를 따로 내놓지 않아서 영 불편하다. 가족단위로 걷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서삼릉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농협대학을 지나고 솔개약수터를 가리키는 알림기둥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여기서 좌회전해야 할 것 같은데 확신이 안 선다. 길 입구에 홍익교회 큰숲비전센터라는 간판과 돌문이 서 있어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에라, 일단 가고 보자. 게다가 교회인데 누군들 못 들어가랴. 다행이 길은 교회 옆으로 이어져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솔개약수터라고 쓴 작은 알림기둥이 서있다.

 

다시 걷는다. 위험한 이차선 도로를.

농협대학

교회라고 겁내지 말고 그냥 들어가시길.

이제 거의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느닷없이 도로공사현장이 나오면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삼송역으로 방향을 잡아야하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산등성이를 넘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등성이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거야말로 낭패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길을 잃었으니 뭐라고 전해줘야 한단 말인가.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내 길눈이 어둡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안내된 길에서 길을 놓친 경우는 없다. 길이 제대로 돼 있는데 못 찾은 것이라면 안내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길 찾기의 천재들만 걷는 게 길이 아니다. 또 도로공사 때문에 지형이 바뀌었다면 임시 안내판이라도 설치했어야 했다. 길을 만들고 사람을 초청한 이들의 예의다. 이리저리 헤매는데 빗방울까지 떨어진다. 아무도 없는 공사장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다. 굴러다니는 토관에라도 들어가 비를 피할까 하다가 무슨 험한 꼴인가 싶어서 큰 길로 방향을 잡아 뛰듯이 걷는다. 도로공사 뿐 아니라 곳곳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도로공사현장. 이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

드디어 삼송리. 야호!!

길의 종점인 삼송역. 제법 복잡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허덕거리며 걷다보니 조그만 도시가 나온다. 다행이 오늘의 종착점인 삼송리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만난 삼송역. 전철역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역사로 들어가 젖은 옷을 말리며 오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아스팔트 구간이 꽤 길고 마지막에 길을 못 찾아 불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서울 근교에 이만한 길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특히 곳곳에 이야기를 품고 있는 길은 보석보다 더 귀한 존재다. 심신에 배인 길의 향기가 흩어질세라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전철에 오른다.

 

 

 

 

 

 

 


 

 

 

 

 

 

 

posted by sagang
2012. 6. 4. 08:41 길따라 바람따라

희망천 굴다리에서 바라본 '오월'

5월 초순의 새벽길. 세상은 오월이라는 단어가 간직한 이미지만큼 푸르게 채색돼 있다. 죽령옛길을 걷기 위해 소백산으로 가는 중이다. 워낙 일찍 나선 터라 고속도로는 한산한 편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 그리고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 때까지 내 낡은 차는 콧노래라도 나올 듯 신이 났다. 단양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와 2차선으로 접어든다. 충북 단양에서 경북 영주, 정확하게 풍기로 넘어가는 길 주변은 금방 머리를 감고 나온 새댁만큼이나 싱그럽다. 소백산 자락을 타고 구불구불 달리는 길은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을 준비해놨다. 죽령 고개를 넘고 희방사 올라가는 길을 지나 조금 내려가다가 소백산역 쪽으로 우회전한다. 과수원 길을 끼고 조금 더 들어가니 바로 소백산역. 그 옆으로 죽령옛길이라는 이정표가 반긴다. 차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세워두고(이 녀석 오늘 호강이다) 행장을 둘러멘다. 산자락에 기대어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은 무척 안온해 보인다. 산촌이 흔히 갖기 쉬운 궁색의 기운은 어디에도 없다.

 

죽령옛길 표지석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도 들었단다.

소백산역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소백산역은 내려오다 둘러보기로 하고 죽령옛길이라는 이정표 쪽으로 내려가 걷기 시작한다. 마을과 소백산역 사이에 난 길이다. 조금 지나니 굴다리가 나온다. 길은 다리 아래로 이어져 있다. 한쪽으로는 맑은 물이 힘차게 흐르고 한쪽에는 사람 다니는 길을 냈다. 물과 사람이 함께 흐르는 셈이다. 내 이름이 희망천이란다. 다리 안쪽, 어둑한 곳에서 바라본 신록의 세상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다리를 빠져 나가니 조그만 공원이 나오고 세워놓은 돌에는 무쇠다리 옛터라고 새겨져 있다. ? 코스 안내에는 이런 곳이 없었는데?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이게 웬 떡이냐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길을 기록하는 자에겐 어디든 사연이 담긴 곳은 반가운 법이다. 높다란 느티나무가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한쪽에는 작은 다리형상을 만들어놓았다. 이 정도면 무언가 이야기가 묻혀 있다는 뜻이다. 무쇠다리라, 무쇠다리. 마징가Z의 다리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하여튼  낯선 이름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가보니 안내판에 익히 들어온 전설이 적혀있다.

 

신라 선덕왕 12년 서라벌의 호장 유석이 호랑이에게 잃은 딸을 구해준 희방골 스님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코자 희방사를 창건하고 나서 절로 통하는 앞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은 사실이 희방사지에 전해지고 있다. 무쇠다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인 듯 근래까지 뚝다리로 있어오다가 중앙선 철도가 나면서 그나마 없어져 버렸다.(이하 줄임)’

 

무쇠다리 모형

나와 놀던 사과꽃. 잘 보면 벌도 있다.

무쇠다리 안내석

아하, 그 전설이 태어난 땅이 이곳이로구나. 희방골에 은거하던 두운조사란 분이 어느 날 산길을 가다 신음하는 호랑이를 만났는데 잘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걸렸더라지. 사람을 삼켰으니 고연 놈이긴 하지만 그 또한 생명이니 어쩌겠나. 비녀를 빼줬더니 은혜를 갚는다고 양가집 규수를 산채로 덥석 물고 왔더라네. 그래봐야 도 닦는 스님에게는 그림의 떡인 걸, 이 머리 나쁜 짐승이 알 턱이 있나. 아무튼 그 규수가 바로 경주호장의 무남 독녀였고 고이 집에 데려다 주었더니 호장이란 양반이 보답으로 절을 지어줬다는. 나는 지금 그 전설의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무쇠다리 터를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출발하려니 좀 막막하다. 어느 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없다. 저만치 간이다리가 하나 있고 과수원길이 보이길래 무조건 그쪽으로 길을 잡는다. 사과 꽃이 한창이다. 사과 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골길에 만난 여인처럼 검박(儉朴)한 맛이 있다. ,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호박벌을 사진 찍어준다는 핑계로 불러내 한참 놀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과수원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드디어 큰 길이? 아니, 길은 거기서 끝났다. 애당초 잘 못 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이 소백산역을 지나쳐 곧장 올라가던 게 생각난다. 그게 바로 죽령옛길로 향하는 길었구나. 왜 나는 그런 깨달음이 늦게 와서 늘 헤매고 다니는 걸까. 길 걷는 게 평생의 업이라는 자가 이렇게 둔해서야. 호를 도맹(道盲)’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자주 든다.

 

아름다운 곤충과도 놀았다. 이름을 아시는 분?

소백산역. 원래 이름은 희방사역이었다.

지도를 못 구해서 대신 사진으로

 

길을 되짚어 가다보니 그제야 소백산자락길-2자락이라는 자그마한 안내판이 보인다. 아무튼 중요한 건 늦게 찾는 게 내 특기다. 초등학교 때도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면 가장 못 찾는 아이가 나였다. 문제는 보물찾기 시간이 끝나고 도시락을 먹으러 갈 때면 쪽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더 행복했던 적도 많았다. 이번에도 길눈 어두운 덕분에 전설의 현장을 볼 수 있지 않았던가. 죽령옛길을 걷고 싶은 이들이여!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출발 전에 무쇠다리를 꼭 다녀오시길. 아 참, 말이 나왔으니 소백산자락길 이야기를 하고 가자. 죽령옛길은 18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독립된 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조성된 소백산 자락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자락길은 소백산둘레에 있는 3개 도 4개 시군(영주시, 단양군, 영월군, 봉화군) 170km를 잇는 길로 모두 12자락으로 돼 있다. 달밭길, 보부상길, 과수원길, 서낭당길정겨운 이름들이 많다. 이 자락길의 지도를 보면 마치 고깔모자에 둘러놓은 띠처럼 보인다. 물론 고깔모자는 소백산이다. 총 열두 자락 중 세 번 째 자락이 바로 오늘 걸어갈 죽령옛길이다.

 

 

이런 안내표지를 잘 봐야한다.

작은 폭포

길은 자꾸 산으로 꼬리를 감춘다.

누워 있는 장승, 근무 중에 뭐하는 겁니까?

원점으로 돌아와 소백산역에서 다시 출발한다. 역 앞마당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한참동안 철도와 나란히 달린다. 그리고 머리 위를 지나는 거대한 고가도로. 저게 바로 중앙고속도로겠지. 다닐 땐 편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멘트 구조물은 괴물이라도 되는 듯 이질감이 든다. 길은 금세 숲속으로 몸을 누인다. 느린 걸음으로 올라가다보니 조그만 폭포도 보이고 장승들도 만난다. 장승 중 한 분은 피곤했던지 아예 누워서 이리 저리 뒹굴 거린다. 이왕 만들어놓은 길, 관리 좀 잘하시지. 그래도 산길에 들어서니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거기까지 차를 끌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사람이 다닐 좁은 길을 차들이 달리니 피하는 것도 곤욕스럽다. 먼지는 또 어떻고. 조금 올라가니 세상이 느닷없이 환해진다. 갑자기 나타난 사과과수원 덕분이다. 우와! 이 산속에 이렇게 넓은 과수원이. 나무들은 하나같이 작고 하얀 등을 내어걸었다. 밤이라면 더욱 예뻤을 텐데. 흥에 겨워 과수원 길을 걷는다. 사과나무는 물론이고 길 옆에 싶어놓은 호두나무 자두나무 산수유나무. 꽃이 피었건 졌건 하나하나가 조화고 아름다움이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도랑물에 손을 담가본다.

 

산속에서 느닷없이 만난 사과과수원

나무 아래는 민들레 영토다.

과수원에는 이런 연못도 있다.

사과나무 아래는 민들레의 영토다. 지금까지 살면서 본 민들레보다 더 많은 민들레를 한꺼번에 보는 것 같다. 신기한 건 노란 민들레와 하얀 민들레가 어울려 피어있다는 것이다. 노란 꽃의 민들레는 외래종, 하얀 꽃은 토종으로 함께 어울리지 않는 걸로 아는데. 산속에서 만나는 공존과 평화의 현장이다. 결국 또 그들과 어울려 한참 놀아버리고 말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더냐, 예가 바로. 가만, 복숭아꽃이 지천인 곳이 무릉도원이니 사과꽃이 지천인 여기는 무릉사()일까? 떼기 싫은 걸음을 옮겨 깊은 숲으로 꼬리를 감춘 길을 찾아 나선다. 신록의 계절은 황홀하다. 특히 가만히 서서 눈을 감으면 온갖 생명의 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조금 올라가니 조그만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누군가가 소원을 빌면서 쌓은 것일 게다. 아니면 나그네가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 하나 둘 던진 게 쌓였을지도.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호환(虎患)을 피하게 해달라고 도적떼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댈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게다.

 

자! 다시 걸어보자.

이게...으음, 으름나무 꽃이던가?

중간 중간 역사와 전설을 적어놓은 안내판들이 있다.

이왕 옛날얘기가 나온 김에 이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고 가보자. 지금은 소로로 변했지만 과거에는 곳곳에 마방(馬房)과 주막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큰 길이었다.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이 길이 열린 건 신라 때였다. 죽령 일대는 신라고구려백제가 치열하게 영토싸움을 벌이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 마디로 죄 없는 3국의 병사들이 피를 섞은 역사적 장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158)에 춘사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고, 고구려 장수왕(450년경)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 진흥왕(551)때 다시 신라가 회복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왜 대나무()가 하나도 없는데 죽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대나무와는 무관하게 죽죽이라는 이가 길을 열었다고 해서 죽령이 된 것이다. 큰일을 한 사람이니 죽죽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보고 가자.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신라의 죽죽이 왕명을 받아 죽령 길을 만들고 기력이 다해 숨졌으며,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력이 다해 죽을 때까지 혼신을 다한 1854년 전의 한 인물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그를 위해 세웠다는 사당은 지금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길 옆의 돌무더기가 품은 뜻은?

나뭇잎과도 놀았다.

이 길을 지날 땐 황홀했다.

이 길은 삼국시대 뿐 아니라 그 뒤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물론 온갖 장사꾼들이 넘나들었다. 재미있는 건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 해서 과거를 보러가는 이들은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럼 그들은 어디로? 문경 새재(조령)를 넘었겠지. 아무튼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길손들을 위한 주막과 마방이 들어서서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얼마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산적까지 횡행해서, 그들을 소탕하는데 일조했다는 다자구할머니 전설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떠나던 마의태자가 걷던 길이고 풍기 군수 주세붕이 낙향하던 선배 이현보와 회포를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길도 계속 각광만 받은 건 아니었다. 무엇이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1940년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고갯길을 넘나드는 발길이 점점 줄어들더니 1960년대에는 포장도로가 신설되고 2001년 국내 최장터널인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고갯길은 숲으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까맣게 지워졌다. 그러다가 근래 들어 시작된 걷기 열풍으로 다시 발길이 잦아진 것이다.

 

낙엽송길

바람과 머리 풀어헤치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중간중간에 있는 쉼터

공부는 이쯤 하고, 다시 길을 잡아보자. 길 주변에는 다래넝쿨이나 온갖 잡목이 얽히고설켜 마치 원시림을 걷는 것 같다. 중간 중간에 안내판을 세워 길에 얽힌 이야기와 전설들을 자세히 적어 놨다. 왕건도 나오고 다자구할머니도 나오고 주세붕도 나온다. 또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놓았다. 길을 걷는 재미중 하나는 길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기대어 사는 생명들을 만나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길을 꾸민 이들은 꽤 사려가 깊어 보인다. 새로운 길을 여는 단체나 자치단체들이 참고 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쉼터를 마련해놓아서 아이들과 힘께 걷기에도 좋도록 해놓았다. 조금 더 올라가니 느닷없이 낙엽송(일본 잎갈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활엽수 숲을 걷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침엽수들을 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아마 인공조림으로 생긴 숲일 것이다. 길은 걷기에 숨차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옹달샘

생명

길옆에서 조그만 옹달샘을 발견한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서 물을 마실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에 쌓아놓은 돌들은 무너지지 않고 샘을 지키고 있다. 잘만 손질하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감로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에는 얼마나 반가운 존재였을까. 샘을 지나 다리쉼을 하고 있는데 청춘남녀가 내 앞을 지나다가 그 중 남자가 주뼛거리며 다가온다.

저기, 물을 좀 얻을 수 없을까요? 제 친구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그럼요. 그런데마시던 건데 괜찮아요?”

, 괜찮습니다.”

남자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여자는 내가 건네준 물을 달게 마신다. 자신의 여자를 위해 낯선 사내에게 물을 얻으러 온, 용기 있는 젊은이에게 한마디 한다.

이런 산속에서는 흘러가는 냇물을 그냥 마셔도 아무런 문제없어요. 그리고 저쪽에 가면 옹달샘도 있고

청년이 조금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는다. 물이 아깝다거나 냇물을 꼭 마시라는 뜻은 아니었다. 나 어릴 적엔 밤을 따러 갔다가 땔감을 모으다가 아무 물이나 마셔도 별 탈 없었다. 하긴 페트병에 들어있는 물만 생명을 지켜준다고 믿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흐르는 물이나 옹달샘 물을 마시라면 독을 마시라는 말로 알아듣겠지. 남녀는 목례를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숲이 된다.

 

드디어 죽령루가 보이고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선

죽령주막

낙엽송들이 뜸해질 무렵부터 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죽령마루에 거의 다다랐다는 신호다. 숨이 턱에 찰 무렵 저만치 우뚝 선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도 현판이 또렷하게 보인다. 죽령루(竹嶺樓). 보수공사를 시작하려는 것인지 파이프로 비계를 설치하고 있다. 헐떡거리며 고갯마루로 올라선다. 거친 숨을 가라앉힌 뒤 시간을 본다. 안내에는 총 2.5km40분 혹은 50분이 걸린다고 돼 있었지만 이것저것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하긴 길을 걷는데 시간이 무슨 문제가 되랴. 둘러보니 아까 차를 타고 지나간 길이다. 저만치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영주와 단양의 경계임을 알리는 안내판들이 매달려 있다. 내친 김에 여기서 단양 쪽으로 내려가서 보국사지, 죽령분교, 용부사를 거쳐 죽령터널 입구까지 걷는 사람들도 많다. 하긴, 그 정도 걸어야 트레킹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아쉽지만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한다. 죽령루에 올라가 풍기 쪽을 굽어보기도 하고 죽령주막의 장독대를 구경하기도 한다. 이젠 다시 내려가야 한다. 출발지까지 가면 5km 남짓 걷는 셈이다.

 

소백산 산신령님이 감춰둔 비밀의 화원

주막터. 무너져가는 담장만 쓸쓸하다.

담장 위로 자꾸 기어오르는 손들.

내려가는 길에 올라 올 때 보지 못했던 주막 터를 발견한다. 고백하건대 남몰래 소변을 보려고 올라갔다가 우연히 안내판을 본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노상방뇨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고개 정상에서 본 주막거리가 가장 컸고 이곳은 좀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담장이 남아있고 구들장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구멍도 있다. 하지만 , 여기 탁배기 한 잔 하고 국밥 한 그릇 말아 달라니까.” “, 조금만 기다려요. 애를 배기도 전에 내 놓으래.” 떠들썩하던 광경은 아련한 옛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고요 속에 잠겼다. 넝쿨들이 담장으로 자꾸 손을 뻗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까지 오를 수 없음을 그들은 알까. 비껴드는 햇살이 쓸쓸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내려오는 내내 길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 가득 찬 느낌이다. 나는 1800년의 시간 속을 다녀온 것이다.

내려오다 만난 집. 이번엔 저 집에서 살고 싶었다.

 

 

 

 

 

 

꼬리) 소백산을 끼고 있는 경상북도 영주는 다양한 이야기와 볼거리를 지닌 곳입니다. 죽령옛길 가까운 곳에 희방사가 있고 또 천년고찰 부석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등은 꼭 가봐야 할 문화유산입니다. 소수서원 옆의 선비촌은 다양한 전통생활공간을 재현해 놓아서 아이들과 함께 가볼만 합니다. ‘잊혀진 고장순흥은 한 때 영주 풍기를 아우르던 큰 고을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단종의 삼촌인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 복위운동으로 고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수면 쪽으로 가면 제가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모래강, 내성천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류에 댐을 쌓는 바람에 지금은 망가진 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영주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osted by sagang
2012. 5. 21. 08:32 길따라 바람따라

 

 

 

통점절길. 이곳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하나일 뿐이다.

충남 보령시 주산면 금암리. 그 동네에 도착 때만 해도 딱히 을 걸어야겠다는, 아니 길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형님 한 분의 고향이 그 동네였고, 그가 고향에 가는 길에 지인 몇이 봄 소풍 차 따라나선 터였다. 헌데 누군가 예비한 듯, 그곳에서 통점절길을 만났다. 우선 통점절길이라는 발음조차 잘 안 되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릴 분도 많을 테니 소개하고 가기로 하자. 미리 고백하건대 통점절길이란 이름은 내가 붙인 것이다. 통점절은 주산에서 바라보이는 산 중턱(산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에 있는 용주사(龍珠寺)라는 작은 절을 그 동네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용주사보다는 통점절이 훨씬 정감이 있지 않은가. 왜 통점절인지는 그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형님도 설명해 내지 못했다. 아무튼 통점절길은 요즘 흔히 부르는 둘레길이나 마실길, 자드락길 같은 이름을 얻지 못한, 이름 없는 산길이었다. 그리고 꽃이 김춘수를 만나듯, 산길이 나를 만나 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별 볼 일 없는 길이겠지? 라고 예단을 한다면 그리 생각한 사람만 손해일 뿐이다. 가보면 안다.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지.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인지. 이 길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세상 어느 길도 소개할 자신이 없다.  

주차의 신세를 졌던 주산초등학교.

주산초등학교를 나와 오른쪽으로. 여기서부터 벚꽃길이다.

조금 더 걷다보면 이런 전원풍경이...

예로부터 자원이 풍부하며 산 좋고 물 맑은 땅에 대대손손 평강을 누리며 산다는 뜻으로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던 보령. 내 낡은 기억에 의하면,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장항선 열차를 타는 게 가장 좋다. 특히 우리가 목적지로 정한 주산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자동차를 택하고 말았다. 주산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주산초등학교.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차를 위해서다. 차를 놓고 학교 정문을 나와 오른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도로 옆에는 청년기의 짱짱한 벚나무들이 미처 꽃을 다 떨어내지 못한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초봄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다. 지난주 내린 비에 꽃들과 조금 일찍 이별했나보다. 벚나무 길을 따라 올라가다 오른쪽 철길로 방향을 잡는다. 그곳에서 내 개인의 앨범 속에 있는 바로 그 역과 만난다. 아니, 그 역이 아니다. 간이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모습. 서너 사람 비를 그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시멘트 구조물이 달랑 서 있다. 쓰레기가 쌓인 지저분한 바닥. 버림받은 것 특유의 쓸쓸한 모습이다. 내 기억에 특별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다면 이 근처엔 분명 역사가 있었다. 주산역.

 

철길을 따라 걷다.

간이역의 기능마저 잃어버린, 초라한 주산역.

안내판도 저렇게 쓸쓸히 늙어간다.

주산에 딱 한 번 와본 것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우리를 가르치던 국어선생님이 본인의 행동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로 좌천(?) 당해 이 동네까지 전근을 온 적이 있었다. 문예반을 이끌던 선생님이라 그랬는지 제법 친근의 염()을 품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을 뵙겠다고 어느 날 장항선 열차를 타고 내린 게 이 곳이었다. 하지만 역은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폐역, 역으로서의 역할을 잃은 지 오래인 모양이다. 추억 한 자락이 뭉텅 잘려나간 느낌에 가슴 속의 강물이 거친 소리를 내며 흐른다. 철길 걷는 것을 중동무이하고 주산산업고등학교로 들어간다. 전에는 주산농업고등학교였다. 전근 온 국어선생님이 재직하던 학교라 아직도 기억 속에 있다. 세월은 기차역 하나를 지운 것뿐 아니라 농업학교를 산업학교로 바꿔놓기도 했다. 농업실습장이 있던 곳들은 새 건물이 들어서서 식품가공실습장의 이름표를 달았다. 이쯤 해야지. 길을 안내하는 자가 개인의 추억에 오래 휩싸여 있으면 안 된다. 학교 정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니 작은 차도로 이어진다. 길 주변에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빨갛고 파란 함석지붕을 덮고 서 있다.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풍요로운 기색도 내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다. 모처럼 고향을 찾은 형님은 여기저기서 추억을 캐내느라 여념이 없다. 저 집에는 도장 파는 이가 살았고, 저긴 내가 좋아하던 아이가 살던 집이고.

 

주산산업고등학교에서 나오면 나타나는 마을. 이곳이 바로 '형님'의 고향동네다. 저집이 도장집?

마을이 안온하다.

'형님'이 어릴 적 살던 집 맞을 걸?

저만치 서 있는 앞산에는 산 벚꽃이 한창이다. 산 벚은 꽃이 늦게 피어 늦게 지는 편이니 제법 세찬 비에도 별 탈이 없었나보다. 산 벚꽃이 있는 산은 파스텔 그 자체다. 우리는 지금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통점절 역시 저 벚꽃 사이 어딘가에 숨어있다. 길가 도랑에서 돌미나리를 캐는 할머니와 만난다. 일행 중 한 분이 몇 마디 말을 건네더니 미나리를 한 줌을 산다. 2천원을 드렸단다. 팔려고 뜯은 건 아니겠지만 할머니에게는 용돈이 생겨서 좋고 우리는 싱싱한 저녁 찬거리를 얻어서 좋다. 열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기서 저 속도면 역시 주산역에서는 서지 않은 것이다. 알고 있는 것도 눈앞에서 확인 되면 섭섭함은 배가 된다. 차도를 버리고 냇둑 길로 접어든다. 금암3(통점), 그리고 그 아래 용주사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서 있다. , 동네의 속칭이 통점이라 통점절이라고 불렀구나. 이제야 궁금증을 푼다. 여기서부터는 차도 없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이도 없다. 걸음이 한없이 늘어진다. 온 세상에 참견할 것들이 널려있다.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쑥, 노란 꽃 하얀 꽃을 피워 낸 민들레, 보기만 해도 입맛 도는 씀바귀, 주인 없는 머위. 너도 나도 봄이 차려낸 성찬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누구는 냇가로 내려가 돌미나리를 뜯어온다. 아까 할머니에게 산 미나리보다 훨씬 실하다. 이렇게 지천인데 괜히 샀나? 하지만 그것도 이것도 선물이다. 오늘 저녁 식탁에는 풀 잔치가 벌어지겠군.역을 무시하고 달리는 열차. 서! 섰다 가란 말야!!!

네 갈래길에서 동네가 보이는 왼쪽 길로 들어섰다.

밭에서 일하는 아낙들에게 쓸데없이 말도 걸어보고.

그렇게 느리게 걷다가 네 갈래 길을 만난다. 어느 길이 좋을까? 이곳을 고향으로 둔 형님도 어릴 적에 떠난지라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어차피 모든 길은 산으로 향하는 것. 별 망설임 없이 동네가 있는 왼쪽 길로 접어든다. 개천을 따라 가는 길이다. 사람 없는 길을 내쳐걷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늘 순박한 이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동네 이름을 물어보니 안태란다. 누군가가 ? 우리 고향에도 안태가 있는데하며 반가워한다. 돌아다니다 보면 이 안태라는 마을 이름은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작명의 근원은 알 수는 없지만 그만큼 안온한 동네라는 뜻이겠지. 마을 입구 사래 긴 밭에서 고랑을 일구는 아낙들을 만난다. 저 넓은 밭을 둘이 언제 다 일구나, 별 도움도 안 되는 걱정을 한다. 걱정은 기어이 큰 목소리가 된다.

거기에 무얼 심으실 거예요?”

, 고추 모종내려고요

그럼 비닐도 씌우셔야겠네요?”

, 고랑 다 만든 다음에요.”

써놓고 보니 참 알맹이 없는 대화였다. 가던 길이나 내처 갈 것이지 별걸 다 참견한 셈이다. 하지만 내가 길을 걷는 이유는 길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이 품은 존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람도 그들 중 하나다.

내가 살고 싶었던 바로 그 대숲집.

일하는 사람보다는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군데군데 빈 집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 길에서 조금 떨어진 빨간 함석집(원래 빨간 색인지 녹이 슬어서 빨간 색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이 자꾸 시선을 잡아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한 칸인 일자집이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다. 사람이 떠난 지 제법 된 듯, 부엌 문짝도 덜렁거리고 쇠락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원래 지녔던 기품은 꼿꼿하게 남아 집을 지킨다. 저 곳에 살던 주인을 닮았을 것이다. 어쩌다 집을 떠나게 됐을까. 노랗게 여문 햇살이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핥는다. 저런 곳에 살고 싶다. 누구에게도 잊힌 이름이 되어, ‘이름 없는 이름으로 살고 싶다. 친구를 두고 가는 듯,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돌아본다. 동네는 조용하고 평화롭다. 늙은 개조차 화적 떼처럼 찾아온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기색이 없다. 안태라는 이름이 왜 지어졌는지 알 것 같다. 조금 더 올라가다가 모판 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소독한 볍씨가 뿌려진 모판을 논에 나란히 설치하는 작업이다. 저기서 난 싹이 모가 되고, 벼가 되고 쌀이 된다. 온 가족이 모두 논으로 나왔나보다. 그냥 가족이 아니라 도시에서 온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이 틀림없다. 아이들까지 섞이다 보니 노는 건지 일하는 건지 좀 애매하지만 그래도 보기 좋다. 아이야, 지금 너는 더불어 사는 것과 생명에 숨을 불어넣는 걸 배우고 있는 중이란다.

 

나무, 빨간 함석집... 평화롭다.

일하는 어른에게 통점절 가는 길을 물으니 논두렁을 가로지르는 길을 가르쳐 준다. 일하는 이들에게 방해될까봐 조심조심 논둑을 지난다. 그리고 다시 닿은 동네. , 조용하다. 농사철이 시작됐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농촌에 노인들만 남아서일까. 어느 집 밭둑에 두릅이 탐스럽게 순을 내밀었다. 일행들이 입맛을 쩝쩝 다신다. 자연이 품은 맛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밭둑에 있다는 것은 주인이 있다는 뜻이다. 쑥이나 씀바귀와 달라 함부로 따면 안 된다. 마침 중년 사내가 지나길래 길도 물을 겸 말을 건넨다. “통점절이 아저씨 길은 안 가르쳐 주고 엉뚱한 농담을 한다. “저 두릅, 사진 찍는 건 돈을 내야하고요, 따가는 건 공짭니다.” 이쯤에서 낚시 밥 물듯 밭둑으로 달려가면 바보가 된다. 통점절을 모르는 걸 보니 이 동네 사람이 아니다. 외지에 오래 나가 있다가 다니러 온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런 때는 그저 껄껄 웃고 돌아서는 게 최선. 이름이 정해지고 공식 길로 지정된 길들은 안내판도 있고 지도도 있지만, 이렇게 이름을 얻지 못한 길은 물어물어 가는 수밖에 없다.

여기부터 통점절 올라가는 길. 통점절에 핀 동백꽃. 화려하다.

통점절 마당의 우물. 물맛이 달았다.

그 와중에도 일행의 눈은 이곳저곳 풍경에 푹 빠져 있다. 까치집을 이고 있는 키 큰 나무 아래 빨간 양철집이 보기 좋다. 적당히 낡아서 더욱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도 낡을수록 정감 있고 보기 좋아지면 좋겠다. 물론 이 집은 주인이 살고 있다. 다시 길을 잡는다. 동네를 벗어나니 드디어 통점절로 올라가는 외길이 나타난다. 길은 여느 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해 놓았다.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더욱 고즈넉하고 편안하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산길을 오른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잠시 자리를 펴고 배낭에 넣어온 술을 한 잔씩 나누는 호사도 누린다. 휴식 끝!! 조금 가팔라진 길을 따라 가쁜 숨을 내쉬며 오르니 드디어 통점절, 즉 용주사가 나타난다. 위치는 좋은데 절 자체는 시멘트로 지어놔서 특별히 볼 건 없다. 대처승이 거처하고 있는 개인 절이라고 한다. 꽃들이 아름답다. 대체로 대처승이 거처했거나 거처하고 있는 절은 꽃밭이 잘 가꿔져 있는 편이란다. 부인들이 심심하니까 꽃밭에 전념한다나? 물을 한잔 씩 마시고 절을 나와 반대쪽 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본격 트레킹. 꽃인지 보석인지.

빛은 화가다.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이제부터 걷는 길은 임도(林道). 본격적인 트레킹은 여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산림관리나 나무를 실어내기 위해 설치한 차도가 걷기 좋은 트레킹 코스로 변신했다. 구불구불 모롱이를 따라 돌고 도는 길은 일일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길은 차의 통행이 끊기고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아서인지 온갖 식물을 키워내고 있다. 특히 작은 돌 틈 사이로 군집을 이룬 민들레꽃들은 보석처럼 빛난다. 카메라를 든 일행이 한참동안 떠나지 못한다. 아무리 잘 찍어도 본래의 모습만큼 나올까. 오후의 햇살이 연초록 나뭇잎을 투과하면서 그린 빛 그림이 황홀하다. 자연 그 자체가 최고의 화가다. 이곳의 색들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대들지 않는다. 봄이 되면 그저 옅은 물감을 너도 나도 조금씩 내어 공동의 그림을 그릴 뿐이다. 이곳 저곳에서 연신 감탄사가 터진다. 산 벚꽃 그늘 아래를 걷는 이들의 표정이 마치 어린아이 같다. 그들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이런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황홀하다.

잘 보면 길을 걷는 여인이 있다. 

 

여길 돌면 끝일까? 글쎄...

길 옆에는 유난히 두릅나무가 많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두릅나무들의 목이 전부 잘려져 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그리 된 걸 보니 누군가가 일부러 잘라간 게 확실하다. 누굴까. 이건 만행이다. 살아 있는 나무의 목을 댕강댕강 자르는 심보라니. 전에 들었던 두릅 이야기가 생각난다. 두릅은 봄이 되면 척박한 땅 속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물로 소담스런 새순을 만들어 낸다. 겨우내 입맛을 잃었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싹을 달랑 잘라간다. 세상을 향해 피어보고 싶은 꿈을 포기할 수 없는 두릅은 다시 한 번 새순을 낸다. 그 순이라고 가만 놔둘 리 있을까. 또 한 번의 수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두릅은 포기하지 않는다. 잎을 펼쳐보고 싶다는 염원 하나로 다시 한 번 싹을 낸다. 하지만 그렇게 낸 세 번째 새순마저 잘라내면 삶 자체를 포기한다. 그래서 내년에도 두릅 먹기를 원하는 농부는 마지막 순은 절대 자르지 않는단다. 이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의 것을 얻으려면 최소한의 양심과 배려는 필수라는 것만

가슴에 두면 된다.

저만치 논밭이 보이니 이제 마을이 나오겠지.

그래. 이젠 살았다.

누군지 모를 가 두릅의 목을 댕강 잘라갔다고 먹을 게 아주 없을 리는 없다. 봄은 지천에 온갖 선물을 마련해두고 오가는 사람에게 조금씩 나눠준다. 우리의 걸음은 여전히 느리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한참. 모두들 시장기가 도는 눈치다. 하지만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다. 워낙 행복한 걸음을 걷다보니 마음이 불러서? 길이 그리 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먹을 걸 안 싸온 게 문제였다. 휴게소에서 라면이나 우동 한 그릇씩 먹은 게 전부인데 시간은 두 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다. 종국에는 나물이고 뭐고 걸음을 재촉한다. 모롱이를 돌고 또 돌고. 이제 끝이겠지 싶으면 또 다른 모롱이가 나타나고. 풍경만 아름답지 않았으면 일행 중 두어 명은 넉장거리를 놓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걸어가서야 저만치 산 아래로 동네와 논과 밭이 보인다. 산을 내려와 동네에 들어설 무렵, 안도감과 아쉬움이 같은 비중으로 교차한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기도 하지. 영화 세트장처럼 조용한 동네의 한 가운데쯤 들어서니 서서히 아쉬움의 비중이 커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년 봄에 찾아올 수 있을까. 또 찾아오면 똑같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돌아가야 할 회색빛의 냉정한 도시가 가슴에 무지근하게 얹힌다.

주산의 번화가? 영화 세트장처럼 조용했다.

이번 길 여행, 통점절길 걷기는 따로 안내하거나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길은 으로 시작해서 으로 끝나는 게 가장 적절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감춰두고 남 몰래 야금야금 걷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그 동네, 그 길, 그곳 사람들, 모든 것을 대표하는 말은 평화한 단어면 충분했다. 걷는 내내 카메라를 들이대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사진들이 별로 없다. 셔터 누를 시간을 모두 풍경에 할애한 셈이다. 세상살이가 유난히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의 아우성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당신느닷없이 충남 보령 주산으로 가볼 일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통점절 가는 길을 물어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볼 일이다. 걷기가 끝나는 순간 몸 안에 충만한 그 무엇이 채워졌음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통점절길에 중독된 것이다.

기대하시라, 허벌냉면.

꼬리)그날 점심은 그 동네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님이 냈습니다. 길을 안내하고

점심까지 내고. 저는 제 고향에 지인들을 절대 데리고 가지 말아야겠습니다. 말이 점심이지 진정 호화로운 밥상이었습니다. 밥을 먹은 곳은 허벌냉면이라는 간판을 크게 내세운 평화냉면촌이란 식당이었는데, 헛개나무와 벌나무를 넣은 육수를 쓰기 때문에 허벌

세숫대야만에 나온 허벌냉면. 들어간 게 없어도 최고의 맛.

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허벌나게 맛있다고 그리 이름을 지은 줄 알았습니다. 헛개는 알지만 벌나무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냉면 정도 먹고 나서 호화로운 밥상이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님다. 그날의 진정한 주인공은 소고기였습니다. 주산은 한우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합니다. ‘주산한우마을이라는 공동상표도 있습니다. 마침 형님의 친구 분이 평화냉면촌 앞에서 정육점(황률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는 터라,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온갖 종류의 고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했던 게지요. 그곳도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다 식당에서 구워먹는 시스템입니다. 그날 먹은 고기를 일일이 열거하기는 좀 벅찹니다. 등심, 안심, 치마살, 살치살혹시 침 넘기다 익사하는 분이 생길까봐 상세 묘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그날 태어나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를 포식했습니다. 냉면요? 두 말 하면 잔소립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광고는 절대 아닙니다.^^

 

 

 

 

 

 

 

 

posted by sagang
2012. 5. 14. 08:30 길따라 바람따라

 

‘길따라 바람따라를 연재합니다. 지자체나 개인, 단체에 의해 끊임없이 이 생겨나거나 복원되고 있지만 아직 그 길들을 통칭할 만한 이름은 없습니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생기더니 지리산과 북한산에 둘레길이라는 명찰을 단 길이 태어났고, 또 어디엔 마실길이 또 어디엔 자드락길, 자락길이또 아직은 이름 없는 길, 잊혀진 길들도 많습니다. 주말마다 그 길들을 순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보다는 길을 걸으며 저만의 시각으로 본 풍경,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 숨어 있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출발지인 모항 어촌체험관에서 바라본 개펄

 

 

변산마실길 안내도. 확인하실 분은 클릭!

 

시인 김춘수가 꽃이라고 부른 순간 꽃이 꽃이 되었듯이, 길은 사람의 발자국과 만나면서 비로소 길이 된다. 꽃이 꽃이 되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듯이, 길도 길이 되기 전에는 그저 산이고 들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길은 사람과 대지가 설레는 몸짓으로 나눈 교감의 흔적이다. 길은 또 망각의 존재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스스로 흔적을 지우며 다시 산이 되고 들이 되고 물이 되고 풀과 꽃받이가 된다. 그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걷는다.

  풀과 낮은 꽃들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바로 갯벌체험관

출발지 근처에 있는 안내도와 이정표. 거리표시는 제각각이었다.

 

 

나무마다 저렇게 안내 리본이 달려있다.

 

길을 만나기 위해 새벽길을 달린다. 오늘의 목적지는 전라북도 부안, 그 중에서도 변산반도 일대다. 천지에 길 아닌 곳이 없거늘 굳이 그곳까지 가는 이유는? 당연히 만나고 싶은 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부안, 특히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우리 땅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 중 하나다. 우리나라 최고의 반도공원인 이곳은 흔히 말하는 천혜(天惠), 즉 하늘이 선물한 땅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적절히 안배된 바다와 산, 그리고 숱한 섬들. 해수욕장만 해도 위도해수욕장 모항·상록·격포·고사포·변산섬은 또 어떤가. 위도·식도·정금도·달루도·대외치도·소외치도. 국가어항으로 격포항과 위도항이 있다.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내소사는 고졸한 멋으로 사시사철 손짓한다. 그리고 곰소염전과 솔섬. 저녁 무렵 그 앞에 서보라. 아름다운 앞에서 몸이 떨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는 해안절벽이다.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은 채석강,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놀았다는 적벽과 닮은 적벽강. 이쯤에서 마쳐야 한다. 부안 자랑을 하자면 길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날이 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출발하자마자 산길로 이어진다.

산길에는 당연히 묘지도 있고. 햇살이 곱다.

위에는 마실길 가는 길이라 써놓고 아래에는 위험지역이니 접근금지란다.

 

변산 마실길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외변산에 생긴 길이다. 마실은 마을(을 가다)’의 사투리. 추억의 샘을 자극하는 이름이다. 트레킹의 시작을 마실길의 3구간 1코스의 출발점인 모항어촌체험관으로 잡았다. 이곳에서 시작해서 왕포까지 11km를 걸어갈 계획이다. 이 길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 없다. 먼저 걸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보면서 가장 아름다울 것 같은 코스 하나를 찍었을 뿐이다. 물론 채석강과 적벽강을 거쳐가는 코스 역시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지만 이미 그곳은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됐다. 자동차를 어촌체험관 주차장에 두고 배낭에 비상식량과 물을 챙긴 뒤 씩씩한 걸음으로 출발한다. 그깟 11km 정도야. 수년 간 전국을 누비질 하듯 돌아다닌 내게는 걷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마실길은 총 4구간으로 이뤄져 있다. 노을길이라 이름 붙여진 1구간은 새만금 서두터-대항리패총-고사포 해수욕장-성천마을-하섬전망대-채석강 코스. 체험길이라는 이름의 2구간은 해넘이공원-이순신 세트장-상록해수욕장-솔섬-모항 갯벌체험장. 문화재길인 3구간은 모항-마동방조제-작당마을-진서리도요지-곰소염전. 자연생태길인 4구간은 곰소염전-구진마을-호암마을-호암저수지-줄포 자연생태공원까지다.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손짓한다.

걷다 보면 이런 비석도 만나고

꽃들과 한참 놀았다.

 

어촌체험관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국도를 조금 걷다가 바로 해안 쪽 소로로 들어선다. 나뭇가지에 마실길 리본을 달아두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길 안내 리본은 물론이고 코스 지도, 이정표 등이 어린아이라도 찾아갈 만큼 친절하게 준비돼 있다. 길을 조성한 이들의 정성과 수고로움에 감사를 표한다. 그래도 하이에나처럼 냉혹한 내 눈은 옥에 티를 하나 발견하고 혼자 흐뭇해한다. 안내판 하나에 변산 마실길 가는 길해놓고 바로 밑에는 위험지역 접근금지라고 써놓았다. 여보세요, 아저씨! 저더러 가라는 말입니까, 가지 말라는 말입니까. 조금 걷자 길은 산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다. 나뭇가지의 여린 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가 가슴까지 파랑으로 채색해준다. 길에는 참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작은 꽃들 사이를 조심조심 지나니 봄 햇살을 듬뿍 머금고 누워있는 묘지가 나타난다. 어느 분인지 저승에 가서도 팔자가 좋다. 늘 파도소리와 갈매기를 벗할 수 있을 테니. 조금 더 걷자 비석 하나가 반긴다. 사물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고 쓰다듬다보니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하지만 어떠랴. 어차피 이들을 만나러 온 것을. 

 

길이 깔아준 양탄자. 미안해서 조심조심 걸었다.

아우!! 뛰어들고 싶다.

다 걷어내지 못한 철조망이 날카로운 이빨로 으르렁거린다.

산 속 오솔길이지만 전혀 험하지 않다. 산과 바다 사이에는 철조망이 쳐진 곳도 있다. 전에 쳤던 것을 미처 거두지 못한 모양이다. 미처 날카로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가시들이 냉랭한 눈길도 틈입자를 지켜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 이 곳은 군사지역, 즉 민간인 통제구역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자연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이데올로기가 낳은 불행은 가끔 이렇게 의외의 선물을 잉태하기도 한다. 전쟁 따위는 망각한 잔잔한 바다가 은빛 비늘을 반짝거리며 손을 흔든다. 구릉을 하나 넘어서니 느닷없이 개활지가 펼쳐진다. 누군가 농사를 짓다 묵힌 듯, 풀만 아우성치며 솟아오르는 묵정밭이 쓸쓸하다. 길은 연초록의 풀들을 양탄자 대신 내어 드문드문 찾아오는 손님을 환영한다. , 푹신하고 황홀한 이 감촉. 이렇게 마구 밟아도 되는 거야? 미안하기 그지없지만 돌아서 가는 길이 따로 없으니 신세를 지는 수밖에. 가지를 제멋대로 뻗은 개복숭아 나무가 연분홍꽃잎을 살짝 열었다. ‘자 붙은 이름과는 안 어울리게, 시집온 다음 날 새벽 우물가에 나온 새색시처럼 다소곳하다. 나무와 풀과 꽃과 새와 놀아주느라 걸음은 자꾸 늦어진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길에서는 적막도 친구가 된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작은 백사장(?)

길에서 만난 옹달샘.

굴 혹은 조개 캐는 아낙들

 

철조망 너머로 혹은 철조망이 걷힌 자리에 군데군데 작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 길이 마실길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는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었던, 숨겨진 해수욕장이었을 것이다. 여름 날 가족이나 친구끼리 와서 오붓하게 쉬고 가기에는 딱 좋을 것 같다. 이참에 두어 평 말뚝이나 박아두고 갈까? 이마에서 송글송글 땀이 솟아날 무렵, 작은 옹달샘을 만난다. 주둔하던 군인들이 물을 긷던 샘터일까? 지금은 갈잎들이 차지하고 앉아 몸을 적시고 있지만 청소만 잘 해주면 길을 걷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감로수가 될 것 같다.(마실길을 관리하는 관계자가 이 글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잠시 산길에서 벗어난 길은 바닷가에 새로운 길을 연다. 저만치 굴을 따는 아낙네 둘이 햇볕 아래에 정물처럼 앉아있다.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달려가 말을 걸고 싶을 만큼 반갑지만 그들은 굴을 따야 하고 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에서는 사람도 그저 풍경일 뿐이다.

 

구름은 저렇게 아름답고

드디어 대숲을 만나다.

저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닷가의 자갈들은 모처럼 만난 나그네가 반가운지, 발길마다 덜그럭거리며 노래를 한다. 길은 다시 산으로 향한다. 이 구간의 바다 풍경은 아름답다는 말의 한계를 실감할 만큼 황홀하다. 서해에도 이런 색깔의 물이 있었나? 옥색으로 빛나는 바다 위에 작은 어선들이 점점점 떠 있다. 이곳의 어부들은 물고기 대신 보석을 낚아 올릴 것 같다. 한참 걷다보니 느닷없이 대숲이 나타난다. , 여기구나. 사실 3구간 1코스를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인터넷에서 발견한 이 대숲 사진이었다. 시누대들이 빽빽하게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 어릴 적 시누대를 깎아 연을 만들고 칼싸움도 하던 생각이 난다. 대숲은 제법 길게 이어진다. 중간에 군인들의 막사로 쓰였음직한 시멘트 구조물도 나타난다. 건물이 제법 큰 것을 보니 분대 병력 이상이 생활했을 것 같다. 지금은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문만 비바람에 늙어가고 있다.

 

산을 내려오니 이런 제방이...

마동마을을 설명하는 입간판

아무도 없는 방조제를 걷는다.

대나무터널을 나오니 드넓은 개펄이 눈앞에 펼쳐지고 길은 길게 이어진 방조제로 향한다. 산길의 끝에서 입간판을 발견한다. ‘옛날 선비가 이곳을 유람하던 중 유유동의 말재를 넘어 마동을 지나다 말이 쉬기에 알맞은 곳이라 하여 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동네 유래를 적어놓은 것이다. 말이 쉬기 좋은 곳이라 해서 마동(馬洞)이라딱히 전설이랄 것도 없고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길손에게 무언가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와 닿는다. 숱한 길들이 생겨나고 복원되고 있지만 단순히 걷기만을 위한 길은 별 의미가 없다. 세월에 묻혀 잊어버린 이야기들을 캐내고 그걸 잘 포장해서 걸어놓을 때, 그 길에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나마 구전이 가능한 노인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채집하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외지 사람들을 부를 목적으로 길을 만드는 지자체에게 충고 삼아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뭔가 좀 이상하다. 몸은 최소한 7~8km는 걸었다고 말하는데 이정표는 여전히 절반도 못 왔다고 쓰여 있다. 거리를 재는 센서에 이상이 왔나? 어쨌든 걷고 또 걷다보면 목적지가 나타날 터. 긴 마동방조제의 끝은 차도로 이어진다. 모처럼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로 올라선다. 고맙게도 인도 에 가드레일을 설치해놓았다.

 

 

잠시 차도와 조우. 인도를 잘 분리해 놓았다.

작당마을의 우물

근사한 카페를 지나친 길은 다시 몸을 낮춰 마을로 들어선다. 출발 이후 처음 만나는 마을이다. 헌데 동네 풍경이 범상치 않다.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느티나무와 세련된 집들. 특히 언덕 위 느티나무 곁에 지은 집은 어지간한 별장은 울고 갈 만큼 근사하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역시 마을을 설명하는 입간판이 있다. ‘마을 뒷산 까치봉에서 까치 자웅이 마을로 내려와 정자나무에 둥지를 틀면서부터 풍어의 전성기를 이룬 칠산어장의 요충지로 각처에서 모인 등불들이 밤이면 꽃밭처럼 장관을 이뤄어법은 에헤야~ 데헤야~ 숨 쉴 곳 찾기 어려운 만담조로 늘어지지만 내용은 금세 이해가 간다. 까치가 둥지를 틀면서 풍어를 이뤘고 그 덕분에 마을 이름이 작당마을이 됐다는 얘기겠지. 왠지 느티나무마다 까치집이 주렁주렁 열렸더니. 까치에 얽힌 전설도 전설이지만 칠산어장의 요충지였다는 기록에 더욱 눈이 간다. ‘고기 반 물 반이라는 허풍까지도 허풍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조기가 많이 잡혔다던 어장. 칠산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많고도 많다. ‘칠산바다 조기튀난 제주바당 복쟁이 튄다라는 제주 속담도 있다. 칠산바다 조기가 뛰니 제주바다의 복어가 뛴다는 뜻이렸다. 오버하지 말고 분수껏 살라는 얘기겠지. 저 앞바다 어디쯤에 어선들이 힘차게 오가고 불끈불끈 힘줄이 튀어나온 어부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경로당이 예쁘다.

부럽고 또 부러웠던 언덕 위의 집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걷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부수적으로 제공한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경로당이 예쁘다. 그 옆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식수로 쓰지는 않지만 잘 단장돼 있어 보기 좋다.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덕 위 느티나무집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아침마다 느티나무에서 좋은 글이 하나씩 뚝뚝 떨어질 것 같다. 할머니 한분이 저만치서 걸어오길래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고개만 까딱하고는 그냥 지나간다. 최소한 어디서 왔수?”쯤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좀 무색하다. ‘이 생긴 뒤로 마을을 지나는 나그네들이 많아서인가? 조금 더 안 쪽으로 들어가니 할머니 두 분과 아직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젊은 초로의 아저씨가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 중 할머니 한 분이 소쿠리에 가득 담긴 무언가를 다듬는다. 그냥 지나갈 수 있나. 인사를 하고 말을 붙인다.

할머니 뭘 다듬으세요?”

이거? 민들레라우

나물해 드시려고요?”

아니, 약에 쓰려고

초로의 아저씨가 거든다.

서방 해줄라고 이렇게 열심히 다듬는대요. 이게 거시기에 그렇게 좋다네

거시기에 좋다고? 거시기가 뭐지? 아저씨의 짓궂은 웃음으로 봐서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저씨, 일은 안하고 쓸데없이 앉아서 누님들을 놀리고 있구먼.

 

길을 잘못 들어 느닷없이 걷게 된 갈대 길.

바닷가에는 쭈꾸미 포획용 소라껍질이

개펄...바다...그리고 배

아저씨와 비밀이라도 나눠가진 듯, 묘한 웃음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마을을 벗어난다. 한참 걸어가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이게 아닐 텐데. 길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로 향해 있다. 그 흔하던 이정표도 없고 나무마다 달렸던 리본도 안 보인다. 표식을 놓친 건 아닌지 잠깐 돌아가 보기도 하고 수풀까지 뒤져보지만 마실길은 감쪽같이 꼬리를 감췄다. 마을을 벗어날 때쯤 안내판이 좀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아무래도 차도는 아닌 것 같다. 목적하는 방향과 비슷하다고 짐작되는, 제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길로 내려간다. 기대하지 않았던 갈대밭이다. 사람이 다닌 지 오래인 듯 길은 이미 흔적을 지워가고 있지만 갈대 사이를 걷다보니 예상 못했던 선물을 받은 듯 행복해진다. 우리네 삶도 가끔은 이렇게 길을 잃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뜻밖의 행운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니. 아서라, 말아라, 이제 모험을 할 나이는 지났거늘.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제방으로 올라가 한참 걷다가 다시 나무에서 리본을 발견한다. 집 나간 강아지라도 만난 듯 반갑다. 안도감이 드니 맥주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저만치 보이는 동네에는 구멍가게라도 있을까? 걸을 때마다 고민하는 부분이 짐을 꾸리는 것이다. 좋아하는 맥주를 충분히 지고 다니면 좋겠지만, 그러다가는 짐에 눌려서 발병 나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시원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때 마시는 맥주는 그 자체가 천국인데. 중간중간 나그네를 위한 가게를 두면 안될까? 물고기를 입에 가득 문 갈매기 한 쌍이 맥주나 그리워하는 중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머리 위를 선회한다.

 

이곳이 왕포마을

왕포마을의 동백

왕포마을을 벗어나서 과수원길을 걷는다.

제방이 끝난 곳에서 만난 마을 이름은 왕포마을. 이름 한번 거창하다. 이정표를 찾아보니 아직도 5.9km밖에 걷지 못한 것으로 돼 있다. 오늘따라 내 걸음이 왜 이리 더딘 거야. 길옆에 활짝 핀 동백이 자꾸 놀다가라고 손짓하지만 오래 눈길을 줄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는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왕포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차도를 따라가다 보니 걷는 재미가 반감된다. 권선마을이라는 곳을 지나친 뒤 잠시 다리쉼을 하는데 이정표가 눈에 띈다. ‘모항 갯벌체험장 7.5km’ ‘곰소염전 5.3km’ 가만, 가만!! 뭔가 이상하다. 부랴부랴 프린트 해 온 안내 팸플릿을 꺼낸다. 어어? 이게 뭐야. 안내서에는 모항 갯벌체험장에서 왕포마을까지가 11km이고, 다시 왕포마을에서 곰소염전까지 12km로 돼 있다. 합하면 23km인데 눈앞에 있는 안내판 숫자는 합쳐봐야 12.8km밖에 안 된다어라? 왕포마을? 조금 전 지나온 그 마을이잖아. 그곳이 오늘의 목적지인데 왜 까마득하게 몰랐지? 맞다. 이정표 때문이다. 이정표에는 분명 5km 밖에 걷지 못한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니 11km를 걷기로 한 나로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1km5km로 둔갑한 사연은 뭘까? 아무튼 한참 지나치고 말았다.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더라니. 더 걸은 게 억울한 게 아니라, 엉터리 이정표가 당혹스럽다. (뒤에 확인해보니 모항 갯벌체험장 출발지에 서있는 안내도에도 곰소까지 23km로 돼 있고 바로 옆의 이정표에는 12.5km로 돼 있었다. 어느 장단에 춤을?)

 

나를 돌아서게 한 이정표. 갯벌체험장 7.5km 곰소염전 5.3km라고 적혀있다.

나물 캐러 가는 할머니를 보면서 마음을 달래야지.

이제 돌아가야 한다. 갈 때는 버스를 타기로 했으니 버스 정류장까지 되짚어 걸어 올라간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다. 버스정류장에는 과일과 채소를 가득 실은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아저씨는 큰 비닐봉투에서 나물을 꺼내 작은 봉투에 나눠담고 있다.

여기서 모항까지 가는 버스 있을까요?”

딱 한 마디 대답하더니 얼른 트럭을 몰고 가버린다.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 내가 강도같이 보이나?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올 기미가 없다. 이러다가는 다음 일정이 펑크 날 것 같다. 혹시나 싶어서 가져온 택시 전화번호를 꺼내 한참 망설이다가 전화를 건다. 위치를 대고 모항까지 택시비를 물으니 15천원이란다. 생각보다 싼 편이다. 블로그에서는 채석강까지 3만원 정도한다는 정보가 있었는데. 할 수 없지. 딱 오늘만 택시로 돌아가기로 한다. 대신 다음 여행지에서는 벌칙으로 걸어서 돌아가기로.

 

관선마을. 이곳에서 돌아섰다.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내 배낭만 쓸쓸하다.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버스가 안 왔던 이유를 듣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안 오지요?”

, 그렇네요

그럴 이유가 있어요. 이 코스를 다니는 버스회사 사장이 돈을 떼어먹고 튀었거든요. 어차피 정부에서 받는 50% 지원금으로 운영하는 게 시골버스인데, 사장이 튀어버렸으니 기사들만 골탕을 먹었지요

기사들만 골탕 먹은 건 아니다. 나처럼 버스를 타고 출발지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도 골탕이다. 아니, 정말 난감한 건 버스에 의지해서 장이라도 봐야하는 촌부들이다. 왠지 버스정류장에 누군가를 규탄한다는 표어가 덕지덕지 붙었더라니. 택시를 타니 모항까지는 금방이다. 짧지만 길었던 일정은 끝났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름다운대로 가슴에 남고, 해프닝은 또 해프닝대로 가슴에 남는다. 걷는다는 행위, 가장 원초적인 몸짓은 걸은 만큼의 뿌듯함으로 내 안에 기록된다.

 

 

 

[꼬리] 마실길을 걷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이 코스가 변경됐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 뉴스대로라면 그날 걸은 곳은 6코스 쌍계제 아홉구비길이었고 역시 11km였습니다. 찾아가실 분들은 아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안군은 종전의 변산 마실길인 새만금전시관~부안자연생태공원 664구간 7코스와 내륙 마실길 746코스를 연결해 총 길이 14013코스로 연장, 개통키로 했다.

명칭도 부안 마실길로 통일키로 결정했으며 지역특성을 고려해 노선명도 변경됐다.

부안 마실길은 1코스-조개미 패총길(새만금전시관~송포, 5km),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송포~성천, 6km), 3코스-적벽강 노을길(성천~격포해수욕장~격포항, 7km), 4코스-해넘이 솔섬길(격포항~솔섬, 5km), 5코스-모항갯벌 체험길(솔섬~모항해수욕장, 9km), 6코스-쌍계제 아홉구비길(모항해수욕장~왕포, 11km)이다.

7코스-곰소 소금밭길(왕포~곰소염전, 12km), 8코스-청자골 자연생태길(곰소염전~부안자연생태공원 11km), 9코스-반계선비길(개암사~우동마을, 14km), 10코스-계화도 간제길(계화도~석불간, 16km), 11코스-부사의 방장길(석불산~부안댐, 24km), 12코스-바지락 먹쟁이길(변산해수욕장~부안댐, 10km), 13코스-여인의 실크로드(성천~유유저수지~격포항, 10km)로 확대됐다.

이 같은 마실길을 탐방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총 34시간 30분 정도로 한번에 완주하는 데는 34일이 필요하다.

(나머지는 생략)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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