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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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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백두산 금강대협곡 사진.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도시 카쉬

협곡을 빠져나오니 흠뻑 젖었던 옷이 그새 거의 말랐다. 극한상황 뒤의 안도감 때문인지 온몸이 나른하면서도 가뿐하다. 속옷을 갈아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캐리어를 꺼내달라고 하는 것도 미안하려니와 갈아입을 곳도 마땅치 않아 포기한다. 버스가 샤클르켄트를 출발하려는 순간, 지난봄에 다녀왔던 백두산 금강대협곡이 생각난다. , 그게 왜 이제야 생각나지? 그러고 보니 금강대협곡이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멋있었다. 이곳이 조금 음울해 보인다면 금강대협곡은 훨씬 밝고 웅장했다. 금강대협곡은 백두산 아래쪽에 있는 V자의 협곡으로 화산 폭발 때 만들어진 것이다. 길이는 약 15km이며 절벽의 높이는 100m~200m. 협곡에 가기 위해 원시림을 통과해야 하는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신비롭고 장엄하다. 샤클르켄트가 계곡에서 트레킹을 직접 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면 그곳은 협곡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난간만 만들어놓았다. 아찔한 절벽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줄기란. 더구나 내가 갔을 땐 절벽 중간 중간에 진달래까지 만개했었다. 물론 그곳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는 중국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원래 땅주인인 우리는 외국 관광객이 되어 갈 수 밖에 없다.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텐데. 그래서 잘 지켜야 하거늘. 괜한 아쉬움으로 입맛이 쓰다.

페티예에서 카쉬로 가는 길. 산을 깎아서 도로를 만들었다.

카쉬에 내리자마자 내 마음을 빼앗았던 오래된 카펫가게.

카쉬로 가기 위해 버스는 해안도로를 달린다. 산을 깎아서 만든 길은 구절양장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구불구불 끝이 없다. 도로의 왼쪽으로는 산, 오른쪽으로 파란 바다가 이어진다. 산과 바다가 씨줄 날줄처럼 엮여 꿈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카쉬에 도착하니 오후 231. 아직 점심 전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오래된 것만 보면 자석 만난 쇠붙이처럼 끌려가는 이 고질병. 다큐팀은 부두 쪽을 향해 가는데 내 발길은 자꾸 그 고택을 향해서 간다. 그 건물이 있는 쪽을 옛날 카쉬라고 부른다고 한다. 집을 반으로 나눠 왼쪽엔 부동산사무실이 있고 오른쪽은 카펫가게가 자리를 잡았는데 마당까지 카펫을 널고 깔아놓았다. 세월을 듬뿍 담은 카펫과 오래된 건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 앞에서 한참 서성거린다. 한눈에 봐도 카쉬는 천혜의 관광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시는 크지 않지만 뒤쪽으로 거대한 바위산이 솟아있다. 그 산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안정감과 강한 인상을 준다. 산이 품은 골짜기마다 하얀 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옥색 바다와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부두에 빽빽하게 들어선 배들. 이런 풍경 때문에 사람들은 카쉬를 일러 터키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라고 하는구나.

바다에서 바라본 카쉬. 골짜기마다 하얀 집들이 들어서 있다.

일행이 탔던 유람선.

드디어 배를 타다


카쉬는 BC 6세기에 세워진 고대도시로, 그 때 이름은 안티펠로스(Antiphellos)였다. 지리적으로 리키아 연맹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대외 창구 역할을 했다. 항구도시로 누린 번영을 말해주듯이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 양식의 극장과 도리아 양식의 무덤들이 남아있다. 카쉬는 패러글라이딩, 암벽등반, 스쿠버다이빙과 트레킹, 래프팅 등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어 숱한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섬들을 돌아보는 보트투어의 거점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1인당 60리라 정도를 내면 아침에 출발해서 섬들을 돌아보고 오후에 돌아오는 코스다. 조금 길게 해상투어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Blue voyages를 이용하면 된다. Blue voyages란 배에서 며칠간 지내면서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해변에 중간 중간 들르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이용하면 육로로는 찾아가기 어려운 고대 리키아의 유적들을 둘러볼 수 있다. 다큐팀과 합류해보니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우리 일행도 보트투어를 한단다. 풀코스나 Blue voyages는 아니지만 근해에 나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코스가 예약돼 있단다. 야호! 철없는 아이들처럼 환호가 터진다. 저걸 못 타보고 가면 여행기가 앙꼬 없는 찐빵이 될 뻔했는데.

우리가 탔던 유람선 곁으로 지나던 다른 유람선.

유람선만 배냐? 요트도 지나간다.

우리가 탈 배는 일반적인 보트보다는 제법 크고 보드롬 해변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범선보다는 작다. 선미(船尾) 쪽에는 가운데에 놓인 식탁을 중심으로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고, 뱃머리 쪽에는 누워서 일광욕을 즐길 수 있도록 매트리스가 깔려 있다. 일광욕이라면 목을 매는 백인들이 참 좋아하게 생겼다. 선실에는 화장실과 주방이 있다. 작은 배지만 있을 건 모두 있는 셈이다. 근처에 정박된 다른 배들도 모두 고만고만한 모습이다. 배에서 일행을 맞은 사람은 40대쯤의 강건한 인상의 남자. 조금 뒤에는 선실 쪽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나와서 수줍은 미소로 반긴다. 선장의 아내인 모양이다. 남자가 배의 시동을 걸자 여자가 선미로 가서 말뚝에 매어 있는 줄을 푼다. 배는 답답했다는 듯이 파란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늘 바라만 보던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서니 색다른 기분이다. 바다는 맑고 푸르다. 배가 지나가고 있는 곳의 수심이 최소 7m라고 하는데 바닥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거짓말 좀 보태면 지나가는 물고기 눈 흘기는 모습이 보일 정도다. 지중해의 시원한 바람이 귓불과 뺨을 스치고 온 몸을 간질인다. 또 한 번 전신을 적시는 평화. 배 옆으로 하얀 돛을 단 요트들이 날치처럼 지나고 점, , 점 작은 섬들도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이 물빛을 보라. 에머럴드인들 이렇게 아름다우랴.

우리의 선장 아저씨. 물론 물고기도 굽는다. 전직은 어부.

배 끝에 이런 그릴이 마련돼 있다.

선장은 어부보다 행복할까?


카야쾨이를 돌아볼 때 이미 이야기 한 적 있지만, 터키로서는 볼 때마다 배가 아파도 한참 아플 섬들이다. 세계 1차 대전에서 괜히 독일 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터키.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1923년에 연합국과 맺은 로잔조약에 의해 이스탄불을 되찾는 대신 그동안 차지하고 있던 섬들을 그리스에 내줬다. 유럽에 한 발을 걸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섬을 내줬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터키의 앞바다인데도 섬 근처에서는 휴대전화에 그리스의 와이파이가 잡힌다고 한다. 와이파이도 제 국적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조금 더 나가니 물은 푸르다 못해 검은 색을 띤다. 햇살을 듬뿍 머금은 물비늘이 배가 지나가는 길 옆으로 잇달아 자지러진다. 부부는 항해 중에도 분주하게 오간다. 승객들이 시원한 바람과 검푸른 바다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아내는 주방장이 되어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선장인 남편은 선미의 그릴에서 생선을 굽는다. 투어코스의 하이라이트가 점심식사기 때문이다. 남편의 직업은 어부였는데 작년에 배를 사서 해상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건져 올리던 손으로 관광객이 탄 유람선을 몰고 물고기를 굽는다. 이 배는 그가 평생 키워온 꿈의 결정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꿈을 이룬 지금 그는 행복할까?

선장의 아내이자 부선장이고 주방장까지 겸하는 그녀. 카메라를 절대 피하지 않는다.

가끔은 발로 배를 모는 서비스 묘기를 보이기도.

선장이 구워낸 도미. 얌마! 눈 깔어.

낯선 사람들과 만나 일하려니 힘들기도 하지만 즐거운 점도 있어요.” 말을 극도로 아끼는 그 대답에서 힘들기도 하지만이라는 부분에 좀 더 큰 무게가 실렸다고 생각하는 건 내 억지일까? 차라리 파도나 물고기와 씨름하는 게 낫지 낯선 이방인들을 태우고 고기를 잡던 바다를 돌고 도는 게 뭐 그리 신이 날까. 굳이 송충이와 솔잎까지 들먹일 생각은 없다. 돈을 벌기 위해 평생 꿈꾸던 것이겠지만, 난 그의 얼굴에서 보람대신 후회를 읽고 만다. 아무리 봐도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배를 모는 유람선 선장보다는 힘찬 몸짓으로 그물을 던지는 어부가 잘 어울릴 것 같다. 지금 굽고 있는 도미도 그가 직접 잡은 것이라고 한다. 잠시 뒤에는 아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하나씩 내오기 시작한다. 소박한 밥상이다. 감자, 치즈, 샐러드, 마카로니. 그리고 생선구이. 음식 솜씨를 일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배어 있는 정성만큼은 천하진미다. 그녀 역시 어부의 아내에서 어느 날 유람선의 주방장 겸 부선장이 됐을 것이다. 식사를 하는 중에 선장의 아내는 입가에 순박한 미소를 띤 채 이방인들을 살짝살짝 훔쳐본다. 그러다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대신 배를 몰기도 한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생각보다 능동적으로 포즈를 취해준다. 가끔은 배를 발로 운전하는 묘기도 보여준다. 얼굴에는 신산한 날들이 고랑으로 그려져 있지만 열심히 살아온 한 여자의 자긍심도 함께 배어있다.

수영 삼매경에 빠진 젊은 친구들. 물이 얼마나 파란지 사람까지 파랗게 물들 것 같다.

배 위와 앞머리에는 일광욕을 할 수 있도록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엄상욱 씨의 경우


지중해를 가르는 배에 비스듬히 누워 바람을 즐기는 시간,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다. 여행자로서는 조금 과분해서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마친 젊은 친구들은 언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는지 놀란 개구리처럼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든다. 덩치 큰 믿음 씨도 멋진 수영솜씨를 자랑한다. 내가 3년만 젊었어도. 아참, 난 수영을 못하지. . 물이 얼마나 파란지 수영하는 사람들까지 파란색으로 물들 것 같다. 몇몇 사람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물이라는 듯 물끄러미 구경만 한다. 그 중엔 바다에서 용이 단체로 승천해도 모른 척 할 사람도 있다. 바로 앞에서 몇 번 언급했던 엄상욱 씨. 그는 주변 풍경엔 아랑곳 않고 양산을 쓴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일을 할 때는 철저한 프로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늘 양산을 쓰고 다니는 바람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가 양산맨이란 별명을 하사했다. 그러고 보니 양산과 관련해서 그가 해준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이스탄불에서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무조건 한국 여성으로 보면 된단다. 혼자든 단체든 차에서 내렸다 하면 양산부터 펴들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은근히 흉보던 그대는 왜 우산도 아닌 양산을 그리 열심히 쓰고 다니는 거야.

이 분이 바로 양산맨 엄상욱 씨. 어디에 있든 양산과 함께 한다.

"용이 승천한들 휴대전화만 하랴"

그는 다팀의 코디네이터 자격으로 이스탄불에서 합류했다. 방송 내용에 맞는 주변 환경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코디네이터라고 하는 모양인데 스튜디오 작업만 주로 해온 내겐 조금 낯설다. 현지인 가이드인 이믿음 씨, 즉 규벤이 있으니 가이드라고 하긴 그렇고, 촬영을 좀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고용한 일종의 로드매니저 역할이다. 섭외는 주로 믿음 씨가 하고 엄상욱 씨의 일은 대부분 다큐팀 통역이다. 여행 당시 36세였으니 이제 37세가 됐다. 인물과 풍채는 훤하게 좋은데 아직 싱글. 그의 공식 직함은 FT TOUR라는 회사의 실장이다. 실질적으로는 대표지만(아주 작은 회사니 대표든 과장이든 별 차이가 없다) 실장이라는 직함을 쓴다. 회사를 차리고 처음 맡은 일이 이번 다큐팀의 코디네이터다. 그 전에는 가이드로 일했다. 터키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국내 여행 한번 변변히 가본 적이 없단다. 그런데 훗날 생각해보니 핏속에 역마살이 흐르더란다. 이스탄불에 있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터키행 비행기를 탔던 게 타국살이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눌러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 따라 장 구경 갔다가 장돌뱅이가 된 셈이다. 가끔 고국에 들르긴 하지만 아주 귀국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헥토르에이전시의 한국인 아가씨도 그렇고 이 엄상욱 씨도 그렇고. 그만큼 터키가 매력 있는 곳이란 얘기인지. 뭔가 핏줄을 당기는 게 있는 건지.

저 멀리 그리스 섬이 보인다.

이곳에서 배가 회항한다. 난 저 집이 무척 궁금했다. 아니 살고싶었다.

연락처를 알려드립니다

아무튼 그는 혼자 살지만 럭셔리한 생활을 한다고 자랑한다. 김치도 직접 담그고 우리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단다. 타향살이도 제대로 하려면 역시 음식 솜씨가 좋아야. 카야쾨이의 조용한 마을에서 배회로 한나절을 보낼 때, 나를 찾으러 왔던 사람이 바로 이 엄상욱 씨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어디에 어떤 끈으로 연결돼있을지 정말 알 수 없다.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와 나는 무관한 관계가 아니었다. 지금은 한국으로 들어와 살지만, 가까운 내 친구 하나가 그리스에서 여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와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엄상욱 씨의 말에 따르면 내 친구가 여행사 대표로 터키 관광시장을 개척할 당시, 자신은 가이드로 일했다는 것이다. 하긴 그리스와 터키는 보통 하나의 관광코스로 묶기 때문에 만나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어디 가서, 아는 사람 없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아무튼 이 엄상욱 씨는 무척 성실한 데다 터키어 실력도 뛰어나보였다. 다음에 전문적으로 터키를 탐구할 일이 있으면 꼭 이 친구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 혹시 독자들 중에 터키에 가실 분이 있으면, 가이드가 필요한 여행이라면, 슬그머니 비밀댓글로 연락하시길.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전액 무료로 팡팡!!!

절벽 위에 보이는 작은 구멍이 리키아 무덤이다. 저건 또 어떻게 만들었을까.

바다 위에서 보내는 꿈같은 시간은 길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 절벽에서 다시 리키아시대의 무덤들을 본다. 먼저 아민타스 석굴무덤에서도 그랬듯이 저 절벽에 어떻게 저런 무덤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몸을 던져 저 무덤 하나를 만들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와 그리스 간의 전설을 하나 얘기해준다. 지금은 그리스 땅으로 돼 있는 코스라는 섬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이란 뜻인데, 터키 땅의 카쉬는 눈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 하나였던 눈과 눈썹이 헤어져 있는 셈이다. 배는 나갈 때보다 더 빨리 돌아와 일행을 부두에 내려놓는다. 이제부터는 눈썹인 카쉬의 구시가지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시간. 낯선 땅은 늘 설렘을 먼저 선물한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샤클르켄트 협곡의 바위들. 저 틈으로 길이 있다.

멀리서 본 협곡. 두 개의 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산이 갈라져 협곡이 생겼다.

 

샤클르켄트 계곡으로

페티예에서 카쉬(Kaş)로 가는 길에는 트레킹의 명소 샤클르켄트(Saklikent) 계곡이 있다. 도시를 탈출한 버스는 신나게 시골길을 달린다. 버스를 운전하는 하산도 한적한 도로로 나오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휘파람이라도 나올 것처럼 밝은 표정이다. 하산은 결혼을 몇 달 앞둔 예비신랑이다. 운전을 하지 않을 때는 늘 휴대전화를 끼고 산다. 이스탄불에 있는 약혼녀와 밀어를 속삭이는 것이다. 믿음 씨는 그런 하산을 자꾸 놀린다. “너 그러다가 나중에 큰 문제 생긴다여행객을 태우고 며칠씩 돌아다니다 보면 아내와 떨어져 있는 날이 많을 텐데, 결혼한 뒤에도 지금처럼 전화를 하지 않으면 바가지를 긁힐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하산은 그런 말에 꿈쩍도 않고 틈만 나면 애인과 통화를 한다. 사람에게 적절치 않은 표현일지 몰라도, 이 청년은 갓 잡아 올린 꽁치처럼 날렵하고 싱싱하다. 성격도 깔끔해서 늘 하얀 셔츠를 입고 차도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해 놓는다. 늦은 저녁에 일행을 내려주고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아침에 약속시간이 되면 정확히 버스를 대기시킨다. 운전사들이 먹고 자는 숙소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긴 여행을 하다보면 불편하거나 불쾌할 일도 생길 텐데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어느 집 규수인지 시집 한 번 잘 가는 셈이다.

협곡에 들어가기 전 상가. 냇물이 제법 많이 흐른다.

협곡으로 들어가는 다리. 저곳은 수심이 무척 깊다.

길 옆에는 올리브나무와 옥수수밭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곳곳에서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관광입국을 실현하기 위해 온 나라에 삽을 들이댄 것 같다. 그래도 제발 마구잡이 개발은 하지 말기를. 자연의 선물은 한번 망가뜨리면 억만금으로도 되사기 어려운 법이니. 집집마다 심은 석류나무들이 농익은 여인네의 가슴 같은 탐스런 열매를 매달고 있다. 조금 더 달리자 드디어 샤클르켄트. 페티예에서 남동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페티예 여행자들이 꼭 들러 가는 코스기도 하다. 샤클르켄트 협곡은 황소처럼 길게 누운 타우르스 산맥이 중간에 뚝 끊어지면서 생겨났다. 마치 누가 거대한 칼로 내리친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전설이나 신화 몇 개쯤은 품고 있을 법하다. ‘옛날에 옛날에 하늘에서 큰 칼을 가진 장군이 내려와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산이 쫙 갈라지면서 그 자리에 알 하나가…' 하지만 그런 전설이나 신화를 얘기하는 사람도 써놓은 곳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옛날 리키아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 살던 시절에는 분명 전설이 입을 타고 전해졌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튀르크인들이 들어와 살다 보니 전설조차 땅속에 묻혀버린 게 아닐까. 낯선 땅에 정착해서 삶터를 일구는 사람들에게 남의 전설 보다는 한 끼의 밥에 더 관심이 갈 수도 있을 테니.

깊은 곳은 물이 퍼렇지만 우윳빛이 섞여있다.

협곡으로 들어가다

계곡에서 나온 물은 인근의 큰 하천인 에센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협곡의 길이는 총 18km. 수량은 계절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갈수기인 여름에는 물이 거의 없고 가을부터 불어나기 시작해서 많을 때는 사람의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다. 그래서 수량이 많을 때나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는 혼자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는 권고도 한다. 잘 알다시피, 계곡 트레킹은 물속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물에 젖어도 상관없는 옷을 입어야 한다. 춥지 않은 계절엔 짧은 반바지가 좋다. 신발은 미끄럼 방지 처리가 된 샌들이 좋은데, 만약 준비가 안됐으면 근처 가게나 식당에서 유료로 빌릴 수도 있다. 나는 그냥 긴 바지 등산복에 여행 내내 신고 다닌 간이샌들을 신고 들어가기로 한다. 엄상욱 씨는 그런 복장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싸구려 샌들임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치란) 고개를 흔들지만, 무식과 깡다구로 뭉쳐진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리고 만다. 정 안되면 맨발로 걸으면 되지. 여름의 끝인데도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수량이 제법 많고 우유처럼 뿌옇다. 석회질이 많이 섞여서 그런 게 아닐까. 저런 물은 미끄럽기 쉬운데. 그래도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야.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전의를 불태워본다.

곳곳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저 다리를 내려서면 본격적인 트레킹 코스가 시작된다.

이곳도 예외 없이 입장료를 받는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절벽 옆으로 나무다리가 이어진다. 협곡으로 들어가는 사람, 트레킹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연신 엇갈린다. 조금 더 올라가니 매점이 나온다. 거길 지나자 냇물이 기세 좋게 흐른다. 저 내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량은 걱정할 정도로 많지는 않다. 입구에는가이드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협곡에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지만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라고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바지를 둥둥 걷어붙이고 물에 발을 살짝 넣어보니 냉기가 짜르르 흐른다. 온 몸의 세포들이 움찔, 아우성친다. 하지만 물이 차다고 돌아설 수는 없는 일. 저벅저벅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느닷없이 청년 하나가 나타나더니 뒤를 따라온다. 딱 보니 동네청년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부유해 보이는 유럽인도 많은데 하필 왜 나를 따라오지? 그가 이것저것 말을 붙이기 시작한다. 약간의 무안과 약간의 뻔뻔함을 적절히 버무린 미소도 가끔 버무려 넣는다. 영어도 제법 한다. “100m쯤 올라가면 폭포가 있는데 풍경이 기가 막히다” “그런데, 그 카메라는 얼마냐?” 여보게 청년, 나도 자네처럼 관광지에서 자랐다네. 거기서 세상의 쓴 맛을 배운 대신 함부로 호주머니를 열지 않는 법도 알게 되었지. 선수끼리는 이러는 게 아니네.

 

트레킹의 시작. 저 물을 건너는 게 첫 시험이다.

나를 따라온 동네 청년

청년은 관광객을 안내해주고 푼돈을 챙기는 걸 취미 겸 업으로 하는 게 틀림없다. 특별히 안내가 필요한 곳도 아닌데 장사가 될까? 아무튼 자네는 사람 잘못 골랐네 그려. 선구안을 좀 길러야지. 돈 많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을 잡아야지, 하필 나처럼 젊고(?) 튼튼한데다 돈까지 없는 최악의 카드를 선택하다니. 이번에도 카메라가 문제였을 것이다. 이렇게 큰 카메라를 가졌으니 푼돈 정도야 쉽사리 내놓지 않으랴, 라고 혼자 결론을 내린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건 그대의 선택일 뿐. 난 그가 뭐라고 하던 묵묵부답으로 걸음을 재게 놀린다. 물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 차고 더 탁하고 더 깊다. 느닷없는 냉기는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조금씩 깊어지니까 약간의 공포감마저 인다. 하지만 맞은편에 닿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왜 위험해보이기까지 하는 이곳에 다리를 놓지 않을까. 수량 등을 감안한 물리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처음에 쉽지 않은 고비를 넘기게 해서 경각심을 북돋워줄 생각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어차피 버릴 옷, 처음부터 젖게 만들어 옷 따위에 연연하지 않게 하려 했는지도.

우윳빛 물이 쏟아지는 계곡. 이 곳을 지나가면 검은 빛 물이 흐른다.

아무튼 수량이 많을 때나 비가 오는 날은 함부로 뛰어들 건 아닌 것 같다. 트레킹도 좋지만 목숨을 걸 필요야 있나. 건너편에 도착할 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따라오던 청년은, 내가 반응이 없자 몇 번 아쉬운 눈초리를 던지더니 쩝쩝 입맛을 다시며 돌아선다. 몇 리라라도 쥐어줄 걸 그랬나? 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호주머니를 열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지갑은 편하지 않다. 지금의 내가 그런 처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겐 동정심마저도 사치가 될 때가 많다. 유료화장실을 안 가려고 소변조차 참는 게 여행자다. 동정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특이한 건 터키를 돌아다니는 내내 거지를 못 봤다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장애인도 저울로 몸무게를 재주고 돈을 받거나 엽서라도 들고 나와 팔지, 그냥 적선해 달라는 경우는 없었다. 우연히 내 눈에만 띄지 않은 걸까. 아니면 거지가 없을 정도로 나누는 사회가 된 걸까. 청년도 가버렸겠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협곡탐험이다. 처음 깊은 물을 건너고 나니 그 다음엔 수월한 코스가 이어진다. 첨벙첨벙, 어린아이처럼 물길을 헤치면서 걸어가다 보니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진다. 빛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본다. 황금색 햇살이 연신 쏟아져 내리는데 그 끝은 어디쯤인지 아득하다.

하늘에서는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들어온다.

위기의 순간을 맞다

바닥엔 시커먼 진흙이 깔려있어서 물은 탄광촌의 그것처럼 시커멓다. 물과 대조적으로 바위는 하얀 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바위 군데군데에 낙서를 해놓거나 진흙 손도장을 찍어 놔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냥 보기만 하면 어디 부러지나? 그 중에 한자로 써놓은 낙서가 있길래, 혹시나 해서 가까이 가 봤더니 다행히 간자체가 섞였다. 먼 이국 땅에 가죽 대신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중국인이 다녀간 모양이다. 제발 세계 어느 곳의 유물에서도 한글로 된 이름 석 자는 볼 수 없기를. 앞으로 나갈수록 오가는 사람이 적어진다. 처음에는 다큐팀 카메라맨도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다. 꽤 오래 함께 걷던 K도 중간에 돌아갔다. 이젠 우락부락한 청년들만 씩씩한 걸음으로 오고간다. 으슥한 곳을 지날 땐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한다. 홀로 걷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저 젊은이들 중에 누군가가 안 좋은 마음을 갖고 달려들면 나는 속수무책이다. 빈 몸으로도 힘겨운 길을 카메라 장비가 든 배낭을 메고 땀에 절어 걸어가는 자그마한 동양인 사내. 한번 불안한 생각이 드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혹시 다른 마음을 먹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른 시선을 비킨다. ,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허약하구나. 두려움은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거늘.

본격적으로 트레킹 코스에 접어들었다. 검은 물이 흐른다.

나름대로 수양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궁핍한 처지가 되니 의심부터 하려드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저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읽는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할까. 길이 많이 험해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간에 돌아선다. 나도 진퇴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어느 책에선가 샤클르켄트 협곡을 끝까지 가봤다는 한국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 때문에 더욱 오기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물론 나 역시 18km를 끝까지 가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상으로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는 데까지는 가봐야 할 것 아닌가.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겠다는 욕심도 한몫을 했다. 가도 가도 비슷한 길의 연속이다. 위기는 아무런 징후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한 순간 몸이 허청, 기울더니 깊은 웅덩이에 쑥 빠지고 만다. 물이 탁하기 때문에 깊고 얕은 걸 구분할 수 없던 게 화근이었다. 급하게 균형을 잡는 바람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옷은 몽땅 젖었다. 속옷까지 물들이는 흙탕물의 축축한 감촉. 그 와중에도 카메라를 보호하려는 본능은 두 손은 높이 치켜들게 만들었다. 허리 가까이까지 차는 물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허둥대는 사내. 내가 생각해도 참 우스운 꼴이다.

하얀 바위에 써놓은 낙서와 손 도장. 한자 이름이 눈에 띈다.

여음곡(女陰谷)’에서 돌아서다

길이 이곳밖에 없을까? 웅덩이를 빠져나와 차분하게 살펴보니 바위 뒤쪽으로 샛길이 있다. 그럼 그렇지. 마음이 흐트러지니 쓸데없이 허둥대다 길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왕 옷도 버렸는데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절경을 구경할지 알아? 혹시나 혹시나여태껏 걸어온 인생길과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너무도 닮았다. 길은 갈수록 험해진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물을 피해 돌아가다 또 한 번 아뜩한 일이 생긴다. 뭔가 적으려고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수첩이 사려졌다. 조금 전까지 메모를 하고 꽂아두었는데.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행 내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수첩. 내 여행의 전부가 사라진 것이다. 어디쯤에서 흘린 걸까? 물에 떠내려갔거나 진흙에 묻혀버린 건 아닐까? 다스리기 힘든 공포가 머리를 타고 내려와 등골을 지나 발끝까지 훑는다. 세상이 다 아득하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지난 며칠이 고스란히 지워지는 것이다. 기록하는 걸 낙으로 삼는 자가 기록할 기회를 잃는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절감한다. 차라리 지갑을 잊어버리는 게 낫지.

마지막으로 돌아서며 '여음곡'이라 이름 붙여준 거대한 바위.

허둥지둥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아무리 둘러봐도 수첩은 없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 조급해도 안 된다. 높은 바위를 낑낑거리며 넘어왔던 기억이 나서 그곳을 다시 힘들게 올라간다. ! 있다. 내 수첩이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잃어버렸던 가족이라도 만난 듯 부둥켜안는다. 남들이 보면 우습겠지만, 내겐 둘도 없는 환희의 순간이다. 온 몸을 팽팽하게 당기던 긴장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이젠 정말 내려가야겠다. 시간도 꽤 흘렀고, 무엇보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또 미친병이 발동한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안 될까? 마음 약한 나는, 고집스런 또 다른 나에게 두 손을 들고 만다. 없는 힘까지 끌어내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번엔 수첩을 꼭꼭 여며둔다.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가다 거대한 바위 앞에서 멈춘다. 바위 사이로 좁은 틈이 있긴 한데, 아무리 봐도 그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바위들로 구성된 골짜기의 구조가 참 특이하게 생겼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 골짜기는 오늘부터 여음곡(女陰谷)’이야. 그럴 듯하다.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할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거의 다 내려올 무렵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행과 만난다. 초로의 한 사내가 내 얼굴을 유심하게 보더니 느닷없이 곤니찌와를 외친다. 곤니찌와? 이 시간에 무슨 곤니찌와야, 그리고 난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고생 끝이라 그랬을까, 돌아오는 길은 이렇게 평탄했다.

코리언이란 말에 더욱 반가운 표정이 된 이 아저씨, “아프다, 아프다를 연발한다. 아프다고? 당신 아픈 걸 왜 내게 말해. 나도 여기저기 아파 죽겠거든. 그런데 얼굴엔 아픈 기색이 조금도 없다. 가만, 아프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예쁘다구나. 어디선가 한국인을 만나 한마디 배운 말이 예쁘다인데, 그걸 아프다로 기억한 모양이었다. 이런 때 그냥 지나가면 안 되지. 저만치 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예쁘다라는 발음을 확실히 교육시킨다. 그리고 아저씨. 그건 인사가 아니라 ‘pretty’‘beautiful’이란 뜻으로 쓰는 말이거든요. 한국식 인사는 안녕하세요라고 해요. 앞으로 곤니찌와 같은 천박한 말은 쓰지 말고 안녕하세요라는 우아한 말만 쓰세요. 알았지요? 에구, 오지랖도 넓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뛰다시피 협곡을 빠져나온다. 출발지점까지 오니 일행들이 음료수를 마시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걷다가 돌아간 K를 빼고는 협곡을 제대로 들어간 사람이 없단다. 난 다들 따라오는 줄 알았지. 그렇다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담.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홀로 걷는 길.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먹고 섭섭했던 마음을 싹 지워버린다. 이래봬도 난, 당신들이 못 본 거 다 보고 온 사람이야.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우연히 머물게 된 마을의 모스크와 첨탑.

식물학대? 조롱박에 새겨진 이니셜이 재미있다.


시골동네를 혼자 거닐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큐팀의 일정을 체크해보니 울트라마라톤 참가 선수들 인터뷰가 잡혔다고 한다. 울트라마라톤은 2000년 전 리키아의 도시들을 달리는 것인데 그 거리가 무려 240km, 정식마라톤의 6배에 가깝다. 공식명칭은 리키안웨이 마라톤. 올해가 2회째다.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니 그때나 만나볼 생각으로 다큐팀과 따로 움직이기로 한다.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은데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혼자 걷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행과 헤어진 곳은 유령도시카야쾨이로 들어가기 전의 조그만 마을. 마라톤 출발지가 그 근처다. 동네 이름은 KÖI MUHTARLIGI(?) 이 이름을 100% 장담하지 못하는 건 말이 통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돌무시(Dolmus, 미니버스) 정류장의 간판을 베꼈기 때문이다. 터키의 시골동네는 우리의 시골과 별로 다르지 않다. 마치, 아주 오래된 면소재지쯤 거니는 것 같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잘 가꿔놓은 화단. 한쪽에는 조롱박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그 중 하나에 누군가 ‘GS’라고 큼직하게 새겨놓은 걸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심은 사람이 이건 내거야하는 뜻에서 이니셜을 새겨놓은 것일까? 한쪽에서는 석류가 익어간다. 터키, 지중해 쪽을 돌아다니면서 많이 본 과일 중 하나가 석류다. 시장에서는 빨갛게 벌어진 석류를 즉석에서 주스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마을 곳곳에 석류가 지천이었다.

이발소 앞의 평상? 손님이 없을 때 이발사가 쉬는 곳인 듯.

조롱박과 석류를 구경하다보니 ‘BERBER’이라고 세로로 써놓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발소라는 말 ‘barber’의 터키식 표기인 모양이다. 아니면 barber의 오기(誤記)일 수도. 터키는 라틴문자를 빌려서 만든 문자로 자신들의 말을 표기한다. 과거 튀르크 제국 시대에 세워진 오르혼(Orkhon) 비문을 보면 자체적인 문자를 갖고 있었지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문자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나라가 망하면 글자까지 조국을 잃는 것이다. 그 뒤 튀르크인들은 오랫동안 아랍 문자를 빌려서 자신들의 말을 적었다. 하지만 배우기가 무척 어려울 뿐 아니라 악센트가 거의 없는 터키말의 특징을 표현하는 데는 2% 부족한 감이 있었다. 여기서 다시 터키의 아버지 아타 튀르크, 즉 무스타마 케말이 등장한다. 터키공화국이 건립될 당시, 인구의 90% 가까이는 문맹이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케말은 쉽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로 한다. 우리의 세종대왕이 그랬듯이, 위대한 통치자(혹은 독재자)들은 백성을 위하는 것부터가 남다르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케말 정부는 1928년 새로운 문자를 발표한다. 학교에서는 새로운 글자를 가르쳤고 온 국민이 익힐 수 있도록 교육했다. 새 문자는 배우기가 쉬워서 요즘은 문맹률이 거의 0수준이라고 한다.

아주 작은 동네 이발소.


터키 글자 한번 배워볼까요?

글자는 영어 알파벳과 비슷하고 어순은 우리말과 같아서 한국인도 배우기 쉽다고 한다. 다큐팀의 코디네이터로 현지에서 합류한 엄상욱 씨 말에 따르면, 빠른 사람은 3개월이면 어느 정도 익힐 수 있다고 한다. 자모체계는 자음 21개와 모음 8, 모두 29개로 이뤄져 있는데, 순서는 알파벳과 똑 같고 발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중간 중간에 Ç Ü Ö 등이 추가돼 있다. 영어와 비슷한 단어들도 많다. 예를 들면 은행이라는 단어 bank‘banka’로 쓰고 반카로 읽는다. 느닷없는 터키어 공부는 이쯤 하고, ‘BERBER’라 썼든 barber’라 썼든 내가 서 있는 곳이 이발소 앞인 것만은 틀림없다. 손님은 단 둘.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지고 수염이 탐스러운 이발사는 꼬마아이의 머리를 깎고 있다. 사방이 유리로 돼 있어서 이발소 안의 풍경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의자도 사람도 우리의 옛 모습과 비슷하다. 아이의 찡그린 표정도 어찌 그리 정겨운지. 마치 거울 속에 있는 어릴 적 나를 만나는 것 같다. 키가 작은 저 아이의 엉덩이 아래에는 빨래판 같은 게 놓여 있지 않을까? 혹시 머리에 땜빵(기계충 자국)은 없을까? 괜스레 머릿속에 온갖 그림을 그려본다.

 

저 개에게 심한 위협을 당했다. 저만치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

어디 가나 개조심!!

기웃기웃 들여다보다 소파에 앉아있던 노인과 눈이 마주친다. 쉽게 웃어주는 터키의 젊은이들과 달리 엄숙한 표정에 변화가 없다. 한마디로 네 이놈, 거기서 뭐하는 게냐?’ 하는 얼굴. 그러고 보니 터키의 젊은이들과 달리 노인들의 표정은 좀 무겁다. 석관이 있던 거리에서 마주친 노인들도 정물화속 인물 같았다. 격동의 시절을 살아온 우리네 노인들처럼, 삶의 핍박이 표정마저 빼앗아간 것일까. 이발소 앞에서 한참 서성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작정 같은 건 없다. 그저 두 다리를 내비게이션 삼아 걸을 뿐. 마을 한 가운데로 난 길을 지나가는데 커다란 철대문 안쪽에서 작은 여자 아이 하나가 낑낑거리며 문을 열고 있다. 집에서 타고 나온 자전거는 곁에 자빠트려 두었다. 도와주려고 가까이 가는 순간,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린다. 헛걸음!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간 소녀는 금방 돌아온다. 손에는 달걀이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 있다. 이번엔 문을 여는데 애 좀 먹는다. 한손에 달걀을 들었으니 놓을 수도 없고. 얼른 뛰어가 문을 밀어준다. 문이 쉽게 열린 건 좋았는데, 그 대가로 나는 위기에 직면한다. 저만치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컹컹거리며 바람처럼 달려온다. 낯선 사람이 제 어린 주인을 해치는 줄 안 모양이다. !! 이 먼 곳까지 와서 개한테 물려죽는구나.

개에게 놀란 내게 미소를 보여주던 카페 여주인.

저 여인은 지붕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을 닫은 또 하나의 이발소.


개에게 물릴뻔한 순간

다행이 안으로 들어간 아이가 얼른 문을 닫는다. 그러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얼마나 큰 집에서 살기에 집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나. 경황없는 중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집자리의 규모에 감탄부터 한다. 개는 아직도 대문 앞에서 컹컹 짖어대며 을 공격할 기회를 노린다. 엄청나게 크고 무섭게 생겼다. 그제야 대문에 그려놓은 개 조심이라는(이라고 짐작되는) 글자가 보인다. 겁을 주려는지 개도 함께 그려놨는데 실제보다 더 무섭게 생겼다. 저게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캉갈이란 개인가? 그냥 지나갈 걸 괜히 오지랖 넓은 짓을 해가지고. 놀란 가슴을 달래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여주인이 지켜보고 있다가 눈을 마주치자 빙그레 웃는다. 저게 무슨 뜻이지? 고소하다는? 괜찮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아니면 너 맘에 든다는? 그래도 그녀의 미소를 보니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된다. 몇 마디 나눠보고 싶지만 손짓 발짓만 하다 그칠 것 같아서 그만 둔다. 다시 걸음을 옮겨 돌무시 정류장에도 앉아보고 여기저기 사진도 찍는다. 지붕 위에 올라가 뭔가 일을 하는 여인의 뒤로 모스크의 첨탑이 파랗게 빛난다. 아직도 이렇게 뜨겁지만 가을이 저만치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이 조금씩 여물어 가고 있다.

축구공을 굴리며 친구를 찾아가는 아이.

옛날 우물에 간판과 메뉴를 달아놓은 카페.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들.

걸음을 옮기다가 축구공을 몰고 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씩 웃어줬지만 공에 정신이 빼앗긴 녀석은 그냥 지나간다. 짜식~ 한번만 웃어주지. 잠시 뒤 또 다른 이발소와 마주친다. 그런데 여긴 BERBER가 아니라 BARBER라고 썼다. 하지만 문을 닫은 듯 쇠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저쪽의 BERBER는 목하 성업 중인데 BARBER는 망하다니. 간판을 영어식으로 써서 그랬을까? 그럼 BERBER네 아저씨 머리는 누가 깎아주나? 나그네는 쓸데없이 궁금한 게 많다. 우물이 있던 자리를 예쁘게 꾸며놓고 간판을 세워둔 카페 앞에 이른다. 마당 그늘에는 노인들이 여럿 앉아서 무언가 하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주사위와 말판이 보인다. , 저게 타블라스라는 게임인 모양이구나. 모두들 게임에 푹 빠져서 누가 왔는지 가는지도 모른다. 고스톱이라면 나도 한판 끼어볼 텐데. 다시 이리저리 배회한다. 평생 살면서, 아니 어른이 되어서 이런 시간을 가져본지가 언제던가. 전국을 내 집 마당처럼 쏘아 다니면서도 늘 쫓겨 다녔다. 오늘은 맘 놓고 게으름 한번 피워보자. 조금 커 보이는 슈퍼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베개만한 빵들이 진열돼 있다. 이젠 시골에서도 식사용 빵을 직접 만들지 않고 가게에서 사다먹나 보다. 물을 사러오는 사람도 많다. 터키는 물에 석회질이 많아서 그냥 먹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밖에도 수박, 메론, 사과, 감자 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슈퍼마켓.

슈퍼마켓의 베개만한 빵들.


슈퍼에서 만난 소녀

목이 마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소녀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다. 초등학교 6학년쯤? 부모님 대신 가게를 지키는 것 같다. 아이가 참 예쁘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고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상냥하게 웃는다. 귀여운 것. 이 정도면 OK라는 뜻. 찰칵! 셔터를 누르는데 손을 흔들며 또 한 번 살짝 웃어준다. 심봤다!!! 소녀와 눈인사를 하고 나와 가게 맞은 편, 길 건너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것저것 메모를 한다. 한참 뒤 심상찮은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동네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동네사람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관심 가득한 눈길로 나를 흘끔거린다. 심지어 아이들은 내 곁을 뱅뱅 돈다. 소문이 났는지 일부러 구경삼아 나와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느닷없이 나타난 작달막한(그렇다고 그들이 큰 건 아니지만) 동양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동네에 앉아있는 걸 처음 보는 모양이다. 양 손에 생수통을 들고 가던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이가 거의 빠져서 입이 동굴처럼 컴컴하다. 내 할아버지를 먼 나라 땅에서 만난 기분이다. 이번엔 서양인이 지나간다. 그도 눈웃음을 짓는다. 에라, 이런 땐 무조건 “Hi”. 그도 “Hi”로 대답한다. 나그네끼리 인사쯤이야 인색할 게 뭐 있으랴. 마음이 넉넉해진다.

 

슈퍼마켓의 예쁜 소녀.

어차피 줄 것도 없는데 구경거리 좀 된들 어떠랴. 이 나라 사람들 호기심 많은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예쁜 아가씨 둘이 힐끗 힐끗 쳐다보며 가길래 손을 흔들어줬더니 웃음이 구슬처럼 쏟아져 길 위에 구른다. 그래, 떨어지는 낙엽에도 깔깔거릴 나이긴 하다. 이 동네 괜찮은데 눌러 살까? 잠시 뒤 아이 아버지, 즉 슈퍼의 사장이 돌아온다. 이 친구는 내가 좀 구체적으로 이상한 모양이다. 자기 가게 앞에 앉아서 수첩에 연신 뭔가 적지를 않나,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질 않나. ‘저놈이 대체 누구지? 세무서에서 나왔나? 애들 시켜서 확 묻어버려?’ 그의 복잡한 머릿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사실 그는 순둥이처럼 생겼다. 그래서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인데도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주위를 맴돌기만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용기를 내어 곁으로 오더니 수첩을 들여다본다. “Do you know Korea?” “”(이 자식, 뭐라는 거야?) 돌아오는 건 어색한 표정뿐이다. 영어가 금시초문인지 코리아가 초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양쪽 모두일 것이라고 짐작만 해본다. 터키에 와서 코리아라는 단어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하긴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한글이라고 알 턱이 있나. 수첩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뭐 이런 글씨가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가 떠날 때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 자전거를 타고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아저씨의 순박한 미소

이렇게 말도 안 통하는 상태에서 착한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겉보리 훔쳐 먹은 말처럼 잇몸까지 보여주며 히히힝~ 웃어주는 수밖에. 그제야 그도 경계를 풀고 미소를 베어 문다. 얼굴 가득 순박이라고 씌어있다. 어쩌면 이 미소를 보기 위해 이 동네를 서성거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잃어버린 웃음. 그렇지만 그는 웃음 정도로는 확신이 안 서는지 뭉그적거리고 서서 탐색을 계속한다. 세무서에서 보낸 간첩 아니라니까요. 에구, 답답해라. 당신의 딸이 예쁘니까 좋은 얘기만 써줄게요. 아참, 내겐 무기가 있지. “아저씨, 가게 앞에 가서 서보세요. 사진 멋있게 찍어줄게영어를 못 알아들으니 손짓 발짓이다. 그래도 뜻은 금세 통한다. 얼른 가게 앞으로 가서 선다. 하지만 표정은 밀랍인형처럼 굳어있다. 그래도 기념으로 찰칵!!!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진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긴, 피곤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고 저녁 무렵인데도 ISO를 안 높였으니 흔들릴 만도 하다. 주소를 모르니 어차피 보내줄 수도 없지만, 성의껏 포즈를 잡아준 아저씨에게 미안하다. (미안해요, 슈퍼아저씨!) 어느덧 석양이 산마루에 걸린다. 이제 돌아갈 시간. 오랜 시간 신세를 진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자전거를 세워놓고 놀던 아이가 힘차게 손을 흔든다. 근처에 있던 동네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배웅을 한다. 나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마치 명예주민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나 정말 여기서 살까봐.

 

미소로 정을 나눈 슈퍼마켓 사장님. 피곤이 극에 달해 사진이 형편없이 흔들렸다.

일행과 합류해서 돌아오는 길에도 자꾸 마을 쪽으로 시선이 간다. 이 작은 동네에서 보낸 한 나절이 화석처럼 가슴 깊이 박혔다. 시간은 어찌 그리 느릿느릿 흐르던지, 그곳에서는 하루가 48시간은 될 것 같았다. 이 글을 읽은 분 중에 터키 카야쾨이에 가셨다가, 어느 작은 마을에서 EKiZLER MARKET라는 간판을 보시거든 꼭 들어가 보시길. 간판 끝에 적힌 TEL 618 0106 같은 숫자는 신경 쓰지 마시길. 가게 안에 예쁜 소녀가 앉아있거든, 어느 늦여름 날 다녀간 동양인 하나 기억하느냐고 물어봐 주시길. 고개를 끄떡이거든, 그 사내가 두고 떠난 영혼 한 자락 아직 잘 있느냐고 물어나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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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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