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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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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3. 09:0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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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백화점 때문입니다.”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 풍덩 빠져있는 내게, 청년 하나가 다가와 화두 같은 한 마디를 던진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청년이 아퀴라도 짓겠다는 듯 반복한다. 이번엔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간다. 마치 은퇴 성명을 발표하는 늙은 정객 같은 표정이다.
“저 백화점 때문이라니까요? 저게 완공되면 교통량이 훨씬 많아질 것이고, 결국 이 다리로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철거하는 겁니다.”
아! 그런 뜻이었나? 청년의 날선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공사 중인 건물 하나가 손가락 끝에 올라서 있다. 낡은 다리와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거대한 건물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자, 그제야 청년의 시선이 바다 쪽으로 향한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수첩에 뭘 적고 있으니 언론사에서 취재라도 나온 줄 알았나보다. 설마 백화점 하나 짓기 위해 멀쩡한 다리를 철거하랴. 시간 탓일 것이다. 시간이 날라다 준, 폭주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어느 구조물도 영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청년의 눈빛에서 이 다리에 애착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읽는다.

*영도다리를 찾아간 건 2009년 11월초였는데, 당시의 정황을 살리기 위해 그 시점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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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다리 끝으로 나와 천천히 걷는다. 입구에 새겨진 ‘影島大橋(영도대교)’라는 글씨가 음울한 모습으로 동공에 얹힌다. 언제부터 대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영도다리다. 그것도 ‘영돗따리’ 정도는 발음해 줘야 제 맛이 난다. 75년을 꿋꿋하게 버텨온 저 영도다리가 세상과 이별을 앞두고 있다. 차량 통행이 중지된 왕복 4차선의 다리는 공원으로 변신이라도 한 듯,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몫이 됐다. 지역 주민도 있고 일부러 찾아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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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판을 들어올린 영도다리(자료사진)

어떤 중년 사내는 난간에 기대어 시선을 바다에 끝없이 담그고 있고, 어떤 노인은 동행한 젊은이들에게 연신 무언가 설명한다.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느리게 혹은 빠르게 지나다닌다. 영도다리 밑으로도 배가 오간다. 위에서 보니 마치 다리가 배를 낳는 것 같다. 배가 지날 때마다 늦가을 햇살이 만들어낸 물비늘들이 자반 뒤집듯 몸을 뒤챈다. 활기찬 바다와 달리, 다리는 이별의 예감으로 쓸쓸하다. 난간에는 숱한 낙서들이 새겨져 있다. 낙서도 시간이 낳은 것이다. 다리 아래 저만치에는 허름한 집들이 여전히 점집 간판을 내걸고 있다. 궁합, 작명, 이사, 방위, 가출… 영도다리와 한 시대를 공유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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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214.6m. 너비 18m. 부산시청 남쪽에서 부산항 앞 섬인 영도의 북서단 연결. 1931년 착공해서 1934년 3월 준공. 영도다리의 간단한 이력이다. 이 다리가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건 배가 지나갈 때 상판을 들어 올리는 개폐교(開閉橋)였기 때문이다. 다리가 들려지면 그 사이로 배들이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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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녔다. 다리가 들려지는 장관을 보기 위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개통하던 날은 6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고 한다.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 명이었다.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다리 하나 준공하는데 그만한 인파가 몰렸으니 어느 정도 관심의 대상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다리가 들리는 오전10시와 오후4시에는 지나가는 차나 보행자들이 기다리다 지켜보고는 했다. 하지만 그 좋은 구경거리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산업화ㆍ도시화는 교통량의 폭증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영도다리라고 그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결국 개폐를 중단하기로 하고 1966년 8월 31일 오후 5시 마지막으로 다리를 들어올렸다. 준공된 지 32년만이었다. 다리 위에 부설돼 있던 전차궤도 역시 폐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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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의 이력이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굳이 ‘사라져가는 것들’ 목록에 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온갖 사연을 간직한 다리가 전국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영도다리의 진정한 의미는 이 땅 백성이 겪었던 근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데 있다. 일제 때는 이 다리 밑으로 수탈품을 실은 배들이 지나다녔다. 시민들과 함께 해방의 감격도 맛보았다. 무엇보다도, 6.25라는 동족전쟁을 빼놓고 영도다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이 부산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진 가족들이, 재회의 장소로 정해둔 곳이 바로 영도다리였다. 그 여파로 생겨난 것들이 바로 영도다리 밑의 점집들이었다. 헤어진 가족의 소식을 듣기위해, 전쟁터로 나간 자식의 생사를 묻기 위해, 지푸라기 잡던 심정으로 찾았던 곳이다.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끼고 있는 영도다리 주변은 늘 북새통을 이뤘을 것이다. 피란민은 끊일 새 없이 들어오고 땅덩어리는 늘어날 줄 모르고. 헤어진 가족을 찾아야지, 먹을 걸 해결해야지…. 잠자리인들 마땅했을까. 남의 집 처마 밑에라도 깃들면 좋았겠지만, 다리 밑이나 백사장인들 마다할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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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후략)

입에 풀칠을 하는 것과 잠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늘 발등의 불이었을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좌판을 벌인 이든, 부두에서 지게를 지는 이든, 온몸을 누르는 삶의 무게는 천근보다 무거웠으리라. 그때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가 바로 현인이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한겨울, 바람 차가운 흥남부두를 떠나야 했던 한 사내. 아내인지 동생인지, 혹은 애인인지… 북새통 속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시작한 피란살이는 고달프고 서러울 수밖에. 늦은 밤, 소주 한잔으로 팍팍한 속을 달래며 영도다리를 바라보면, 꿈결인 것처럼 고향의 그 초승달이 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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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눈물의 영도다리’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 자리에 21세기형 새 다리가 세워진다. 그동안 논란도 많았다. 70년 넘는 세월을 넘어오는 동안 철거 위기도 숱하게 겪었다. 그때마다 시민들의 반대가 거셌다. 학계나 문화재 전문가는 물론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서 다리의 생사를 놓고 숱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철거하되 원래 영도다리의 의미를 최대한 ‘복원’하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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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새 다리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으로 2009년 7월 27일부터 차량 통행을 중단하고 임시다리로 우회시키기 시작했다. 해체가 완료되면 곧바로 복원 작업에 들어가 2012년 6월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이다. 새 영도다리는 왕복 4차로에서 6차로로 넓어지고 다리 밑으로 통행하는 선박이 대형화 된 것에 맞춰 상판이 현재보다 조금 높아진다. 또 상판 한쪽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도개식(跳開式)으로 설계했다. 물론 상판을 들어 올리고 배가 지나다닌다고 해서 과거의 영도다리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배인 세월과 애환까지 물려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나는 영도다리가 절망의 세월을 눈물로 견뎌낸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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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 08:4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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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오늘 같은 밤이었어. 그날두 이렇게 달이 징그럽게 밝았으니께. 희다 못혀서 파르스롬한 빛이 그 넓은 목화밭에 비단처럼 깔리는디 참 환장하것더라구. 노랗구 허옇게 피어난 꽃은 말할 것두 웂구, 막 깍지를 까구 시상에 얼굴을 내민 목화솜에도 퍼런 달빛이 얹히니께, 그 뭐시냐. 애머랄두? 아녀, 루빈가? 암튼 뭐 그런 보석이 따루 웂더라구. 그게 보기 좋아서 환장혔냐구? 안 그랬다구 허긴 좀 거시기 허지만, 마냥 좋기만 헐 수 있나. 오밤중에 남의 밭에서 목화 도둑질을 허는 처지니…. 깜깜혀야 안 들키는디. 밝을수록 가심이 두근세근 방맹이질 허지. 더구나, 그 목화밭이 혹부리영감네 밭이었거든. 그 냥반이 보통 숭악혀? 목화 따다 들키는 날엔 다리몽뎅이 부러지는 건 아무 것두 아니구 동네에서 쫓겨날 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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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째서 목화를 도둑질허냐구? 아, 이 사람아. 그걸 심심파적 놀이 삼어 했것남? 오죽혔으면 남의 밭에 들어가겄어. 바늘 꽂을 땅 한 평 웂는 집이서, 아버지 일찍 여우구 병든 홀엄니 모시고 살라니께 연명할 방도가 있으야지. 처녀 몸뗑이구 뭐구 이 집 저 집 날품팔이 혀서 입에 풀칠은 허것는디, 병든 엄니 약값을 대야 허니…. 그려서 엄니가 평생 업으로 삼었던 질쌈이라두 헐라는디, 남은 밭뙈기까장 팔아먹은 뒤니 그놈의 목화가 워디 하늘서 떨어지남. 목화가 있으야 솜 맹글어 실두 잣구 무명을 짜지. 메칠 고민허다가 결국 솜이 다 피지두 않은 넘의 집 목화밭에 들어간 겨. 지금 생각허먼 내가 미쳤던 게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두 그러질 말아야는디, 그 벌루다가 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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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디, 달빛이 도깨비마냥 사람 맴을 홀린다는 말이 사실이긴 헌개벼. 그날 내가 제 정신이 아녔으니께. 아, 이 사람이 워째 장기 두다 장이 갔다 온 사람마냥 딴소리를 헌다나? 온제긴 온제여. 달빛이 징그럽게 내리던 그날 밤이라니께. 그날 저것, 두식이 아배를 만났으니께. 에구, 퇴깽이 같은 내 새끼, 잘두 자네. 내가 저눔으 자석 땜이 속이 상허니께 별 말을 다 허네. 죽을 때꺼정 가슴에 묻었다가 흙속으로 데꾸 갈라구 혔던 얘긴디. 징글맞은 달빛 때문이여. 암튼지간에 이 말은 자네헌티만 허는 겨. 그러니 절대 입밖으루 내지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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츰엔 동구 밖에 서 있는 장승이나 삼불산 미륵부처가 걸어오는 줄 알었네. 금빛마냥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그득허니 등에 업구, 지드란 그림자는 땅에 깔고 전봇대만헌 게 뚜벅뚜벅 걸어오는디, 대체 그게 꿈인지 생신지…. 그러잖어두 목화 도둑질 허느라구 간이 콩알만큼 쪼그러 들었는디. 느닷웂이 그런 모냥을 보니, 거품 물고 기함해버리고 만 게지. 한참 뒤 정신을 차리구 보니께 사내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날 내려다보고 있지 않겄나. 장승두 부처두 아닌 사람인 건 확인혔는디, 얼마나 허우대가 장엄헌지 냇가 미루나무가 와 앉아 있는 줄 알었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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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판서 일 허는 황씨 총각이라는 걸 알아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었네. 이 동네에는 그렇게 큰 사람이 웂었거니와, 전에두 그 총각을 몇 번 본적이 있으니께. 그 때가 바루, 저 송우산 아름드리 소낭구들을 비내느라구 큰 산판이 생겼을 때였으니께, 외지서 인부들이 많이 들와 있었지. 자네 시집 오기 한참 전이니께 잘 물르지. 그런디 이상헌 건, 다른 인부들은 전부 산판서 가까운 웃골에서 먹구 자는디, 그 황씨 총각만 이 동네에 와서 밥을 붙여먹구 살았다는겨. 그것두 승질 드럽기가 염라대왕 싸대기를 후려갈긴다는 혹부리영감네에 말여. 오죽허먼 그 황씨 총각이 혹부리영감 싯째딸헌티 눈독을 들인다는 소문이 동네에 짜허게 돌았겄남. 원체 키두 헌칠헌디다 인물두 깎아논 밤처럼 훤허게 생겨서 입맛 다시는 사람이 한 둘이 아녔지. 그날두 그 사람이 다른 일꾼들허구 술추렴을 허구 자러오는 참에 목화밭에서 사람 기척이 나니께 와본 것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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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서 그날 밤에 뭔 사단이 났느냐구? 이 사람이 참…. 쑥씨럽게. 뭐시여? 말이먼 다 말인 줄 아는 겨? 혹부리영감헌티 이를까봐서 거시기 헸냐구? 허참 기가 맥혀서. 목에 관운장 청룡언월도가 쌍으루 들어와두 그건 아닐세. 자꾸 그르케 애먼소리 허먼 얘기구 뭐구 때려 치구 잠이나 잘 텨. 그려, 진즉 그럴 것이지. 글쎄…. 나두 모르겄네. 강제로 그리 된 것두 아니구, 그렇다구 내가 옷고름 풀구 밭고랑에 나자빠진 건 더욱 아니니…. 울 엄니가 날 그리 허투루 갈치진 않았응께. 그러니 그저 모른다구 헐 수밖에. 굳이 핑계를 댄다믄 달빛 탓이라고나 헐까. 사람을 홀릴만큼 황홀했으니께. 땅꾼 만난 배암이나 배암 만난 개구락지마냥 꼼짝헐 수 웂었다는 기억만 또릿허네. 나중에 정신채리구 나서 달빛에 비친 내 몸뚱아리가 월매나 부끄럽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 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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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구 나서 열한 달 만에 낳은 게, 저 애물단지라네. 오매 뱃속이 뭐 그렇게 좋다구 열한 달씩이나…. 근디 남들은 열 달을 못 채우구 나와두 야물기가 밤톨 같은디 저것은 워찌 된 것이 한 달을 더 있다 나왔는디두 저 모양인지. 커나먼서 말이나 걸음이 늦는다는 생각은 혔지만, 애덜 크는 거야 오이 자라듯 제 각각이니께 큰 걱정은 안혔지. 그런디 네 살이 되구 다섯이 되구, 지 애비 지게를 끌구 댕길 나이가 되두 영 어린애 짓만 허는겨. 내가 션찮은 애를 나놨구나 하는 걸 받아들일 수밖이 웂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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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아버지? 결국 그 얘기까지 허게 되는구먼. 데쳐논 호박잎마냥 시들어가던 울 엄니가 돌아가시구 나서 얼마 안 있다 떠났지. 죽었냐구? 아녀, 그건 아니구. 엄니 장례를 치루구는 장작을 산데미처럼 패놓구 뒷간두 치구 울바자두 손 보구 부지런히 집안일을 하더라구. 않던 짓이니께 뭔가 이상하단 생각은 혔지. 그러던 어니 날 새복에, 부시럭 부시럭 소리가 나서 잠이 깼는디, 그 사람이 문을 열구 나가더라구. 문을 나서다 말구 방안을 한참 쳐다보대. 그 순간 느닷웂이 그런 생각이 들더구먼. 저 사람이 떠나는구나. 그런디두 잡을 수가 웂었네. 언젠가 그런 날이 있을 거라구 각오하고 살었던 셈이네. 그 새복,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구는 소리죽여 우는 것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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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오래 버틴 셈이었네. 그나마 새끼를 낳아놨으니 못 떠나고 그리 질게 맴돈 것이었지. 들짐승을 집에 가둬놓는다구 집짐승이 되든가. 애당초 워디 뿌리박구 살 사람이 아녔어. 산판마다 쫓아 댕기먼서 이리저리 떠도는 맛으루 사는 사람이었응께. 시상 워디나 늘 그렇게 바람 같은 사내덜이 있잖은가. 훗날 누가, 어디 어디 산판에 애 아버지가 있더라구 전해줬을 때두 안 찾아갔네. 그 사람 뒷덜미를 끌구 올 자신두 웂었지만, 설령 끌구온다구 혀두 눅진하게 녹인 엿마냥 늘어붙어 있을 사람두 아니니께. 그렇게라두 소망대루 살먼 됐다 싶은 생각이 들더구먼. 원망해본 적? 웂네. 길진 않었어두 내 평생 누릴 행복은 다 누린 셈이니께. 반편이나마 저 두식이 크는 거 보먼서 살게 해줬으니 그 또한 고마운 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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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두 내겐 금쪽같은 새끼 아니것나. 그런디 그 빌어 처먹을 눔덜이…. 어이구, 억장이 또 무너지네. 이눔의 눈물은 왜 요래 시두 때두 웂이…. 저게 잘못되먼 내가 워찌 살어. 누구긴 누구 것나? 지 할애비 꼭 닮은 혹부리영감네 손자 영석이란 눔이지. 그 호랭이두 안 물어갈 눔 허는 짓이 똑 놀부잖는가? 호박밭에 말뚝 박구 똥 누는 애 주저 앉힌다더만, 그 못지않게 심술루 그득헌 눔이지. 그려, 남의 귀헌 자식헌테 우째 그걸 멕이누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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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랄 게 뭐 있겄나. 메칠 전에 두식이가 국민핵교 애덜 갈소풍 가는델 따러 갔었내벼. 재? 2학년 댕기다 말았잖여. 학교 댕기는 거버덤 개구락지 잡구 머루 따는 걸 더 좋아허는 눔이니께. 그리두 소풍 가는 건 부러웠던 모냥이지. 짐승마냥 싸댕기는 눔이니 가는지 마는지 워찌 알었겄나. 아무튼 게서 애덜 먹는 솜사탕을 읃었던가 줏어먹은 모냥인디, 그 맛을 못잊구 솜사탕 사달라는 말을 입에 달구 댕기대. 헌디, 돈두 돈이지만 이 골짜기서 솜사탕장수를 만날 수 있남? 그게 화근이었던 게지. 솜사탕을 염불허구 댕기는 걸 영석이눔이랑 똘마니 멫눔이 본 모냥이여.

아, 글쎄. 애를 데리구 목화밭에 가서 목화를 멕였다네. 왜 애덜 때야 목화다래를 따먹을라구 목화밭을 자주 드나들잖남. 꽃이 지고 스무날쯤 지나믄 다래가 손톱만 허게 크는디, 그때 까먹으먼 들큰한 게 올마나 맛있나. 그려. 그렸지? 자네두 많이 먹었지? 촌에서 그거 안 먹구 큰 애덜이 멫명이나 되겄어. 목화라는 게 7월이먼 꽃이 피기 시작허는디, 가을에 하얀 목화송이가 벌 때까지 쉬잖구 꽃피고 다래 맺고 허지 않는감. 벌 나비가 웂어도 열매를 맺는 게 목화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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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디 워째 얘기가 일루 빠졌댜? 내가 워디까지…. 아참, 그려. 그런디 이 급살 맞을 눔덜이, 우리 두식이헌티 다래가 아니라 깍지서 나온 솜을 멕인겨. 그게 솜사탕이라구 꼬드겨 갖구. 이 미련탱이가 그게 워쩐 것인지, 뭔 맛인지두 물르먼서 꾸역꾸역 먹었내벼. 나중에 들으니께, 계속 먹으먼 솜사탕처럼 단맛이 나온다구 해서 그렸다는 겨. 더구나 안 넘어간다구 도리질을 허니께, 이눔덜이 작당허구 입에 집어쳐늫기까지 혔다네. 최 주사네 밭을 매구 있는디 한 녀석이 쫓아왔지 뭐여. 두식이가 다 죽어간다구. 부리나케 쫓아가보니께…. 애가 벌써 숨이 넘어갔어.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구 눈은 허옇게 뒤집었구. 하늘이 무너지대. 혀라두 물구 같이 죽어야 쓰것는디 그리두 혹시 살릴 방도가 웂을까 혀서 울먼서 문질르구 뒤집어보구…. 그런디 마침 벌려진 입 속에 솜이 가득헌 게 보이는겨. 볼 것두 웂이 손가락을 집어느서 끄집어냈지. 올마나 많이 쳐늫는지 한 주먹이나 끄내니께 그때야 숨을 돌리는디…. 목화밭이서 생긴 눔이 워째 또 목화밭이서….

뭔 달이 이렇게 밝댜…. 징글징글 헌 거, 오늘 밤두 실타래마냥 질기두 허것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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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16. 08:4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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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를 훑어 올라온 털이꾼들의 기척이 턱밑에 있다. 이젠 막바지다. 어디선가 꿩이 튀어오를 것이다. 오늘은 장끼라도 몇 마리 건지려나. 새벽녘에 꾼 꿈이 제법 괜찮았다. 산마루에 세워놓은 장승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봉받이(매를 부리는 사람, 매받이라고도 한다) 김 영감이 가볍게 몸을 떤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순간 속에 서 있었건만, 긴장은 늘 같은 무게로 전신을 훑는다. 어쩌면 통증, 아니다, 쾌감에 가깝다. 그는 잠깐, 이 순간 때문에 매를 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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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버렁이(매를 받을 때 발톱으로부터 팔목을 보호하기 위해 끼는 두터운 장갑)에 박제처럼 앉아 눈만 굴리고 있던 참매 수지니도 몸을 한번 푸르르 턴다. 이 녀석도 긴장이란 걸 하는 것일까. 순간 김 영감의 머리가 곤두선다. 예감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다. 털이꾼들의 함성이 먼저였는지 푸드득!! 소리가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수탉만큼 큰 꿩이 하늘로 치솟는다. 새삼 당황할 건 없다. 김 영감이 팔을 가볍게 앞으로 민다. 입에서는 “매 나간다!!!”하는 소리가 터진다. 수지니가 버렁이를 박차고 오른다. 마치 힘껏 던진 돌멩이 하나가 하늘로 풍덩 빠져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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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도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 같다. 구원의 빛이라도 갈구하듯 높이 솟구쳐 오른다. 하지만 하늘로 솟든 땅으로 꺼지든 놓칠 수지니가 아니다.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는 것 같더니 총알처럼 목표물을 덮친다. 두 마리의 날것이 교접이라도 하듯 공중에서 엉킨다. 꿩의 깃털이 흩날린다. 둘은 곧 한 덩어리가 된 채 숲으로 곤두박질친다. 김 영감이 그들이 떨어진 방향으로 달려간다. 털이꾼 두엇이 뒤를 따른다. 그나마 가까운 곳에 떨어져 다행이다. 꿩이 멀리 날아간 뒤 매가 덮쳐버리는 날에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멀리 떨어지면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방향을 잡고 쫓아가보지만, 도착했을 땐 수풀 속에 잠긴 뒤니 어디 박혀있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런 때 유용한 것이 시치미(매 주인의 이름표. 꽁지 털 속에다 네모꼴의 뿔과 빼깃을 단다)와 함께 달아둔 방울이다. 쫓아가다가 방향을 잃게 되면 잠시 귀를 기울여 방울 소리를 찾는다. 매가 날카로운 부리로 쪼면 꿩이 몸부림치고 그때 방울이 울린다. 사냥꾼이 일찍 도착하면 살아 있는 꿩을 빼앗아 낼 수 있지만, 웬만큼 늦으면 꿩은 많이 상해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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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몇 번 쪼이긴 했지만 비교적 성한 걸 건졌다. 많이 늦을 땐 매가 저 혼자 포식하고 날아가 버리는 수도 있다. 매는 아무리 잘 길들여도 배가 부르면 사냥을 안 하거나 달아난다. 어쩌면 매란 녀석은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게 아니라 단지 먹이에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기질 만큼 먹여야한다. 김 영감이 허리에 맨 먹이주머니에서 닭다리를 꺼내 수지니 부리에 들이댄다. 그러면서 서서히 꿩을 빼내기 시작한다. 떼어낼 때에는 꿩을 쥔 다음 조금씩 빼앗아야 한다. 사냥을 한 매는 발톱에 온 힘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잡아당기면 발톱이 빠져 버리기도 한다. 김 영감의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떠오를 때 얼핏 본 것보다 꿩이 소담지다. 역시 꿈 덕 좀 보려는가 보다. “여남은 마리는 잡을 수 있으려나.” 혼잣말이 꽤 호기롭다. 열 댓 마리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이젠 꿩도 적어졌고 전만큼 흥도 오르지도 않는다. 김영감이 수지니 다리에 맨 끈을 감아쥐면서 닭다리를 입에서 떼어낸다. 사냥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먹이를 빼앗긴 수지니가 못마땅하다는 듯 푸르르 몸을 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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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인 매를 날려 보내 꿩이나 토끼 등을 잡는 것을 매사냥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방응(放鷹)이라고도 했다. 매사냥의 역사는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해서 중국, 한국, 일본, 유럽 등으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생계수단으로 매사냥을 했으며, 삼국시대에는 왕족 및 귀족들이 레저로 즐겼다. 고려시대에는 매의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응방(鷹坊)까지 설치했는데, 충렬왕은 매사냥에 빠져서 민간에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왕조실록에 응방과 응방군까지 언급된 걸로 볼 때 매사냥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태종은 매사냥을 자주 즐겼으며, 연산군 때는 매사냥 때문에 백성이 고통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종 때는 일부 폐지하기도 했지만 민간의 매사냥은 금지하지 않았다. 후대로 가면서는 일반 백성의 놀이문화로 정착되어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자료에는 매사냥 허가를 받은 사람이 1,740명에 달했다고 기록돼 있다. 매사냥에 쓰는 매는 크게 매목의 매과와 매목 수리과 두 분류로 나눈다. 일반적으로는 두 분류를 합쳐서 ‘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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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매과는 송골매인데, 날개폭이 좁고 길이가 길어 빠른 스피드가 주특기다. 공중에서 급강하하여 사냥감을 채며, 날면서도 먹이를 뜯어 먹는 습성이 있다. 또한 부리에 포유류의 송곳니와 같은 한 쌍의 치상돌기(부리칼)가 있어 일격에 사냥감의 목뼈를 부러트려 즉사 시킨다. 수리과를 대표하는 것은 참매(보라매)다. 날개폭이 넓고 길이가 짧아 장애물이 있는 산속이나 들판에서 사냥을 잘 한다. 이 매는 지상에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냥감의 숨통을 쥐고 질식시킨 뒤 부리로 가슴팍을 뜯어내고 심장을 터트려 죽인다. 송골매는 거의 사라져버리고 요즘 매사냥은 대부분 참매를 길들여서 쓴다.
매사냥꾼들은 매를 잡는 것을 ‘하늘에서 받는다’고 한다. 가을걷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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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뒤 날을 받아 목욕재계하고 제를 올린다. 매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기둥을 세우고 그물을 쳐야한다. 미끼는 살아있는 비둘기를 쓴다. 보이지 않게 숨어서 비둘기 다리를 묶은 끈을 2~3분에 한번 씩 당겨줘야 한다. 매는 경계심이 많기 때문에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길어질 수도 있다. 경계가 풀린 매가 어느 순간 비둘기를 덮치면 그물에 걸린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놀라지 않게 눈을 덮어주고 매를 보내준 하늘에 감사를 드린다.
이 땅에 남아있는 전문 매사냥꾼(응사 鷹師)은 단 2명이다. 그 중 하나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8호 매사냥 기능보유자인 박용순씨다. 그는 대전시 동구 이사동에 고려응방을 열고 매사냥을 전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산에 놀러갔다가 새매새끼를 주워와 기르기 시작한 게 40년 인연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매에 대한 사랑과 매사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응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연을 좋아하고 매와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될 수가 없지요.”
평생을 매와 함께 해온 박용순씨. 매를 손 위에 올려놓은 그와 마주 서 있으면 사람이 매인지 매가 사람인지 혼돈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매에 ‘미친’ 가장과 살아간다는 건, 가족들에게는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생업이 안 되니 가족들이 좋아할 리 없지요. 한 때는 마누라가 '매하고 살라’면서 이혼하자고 합디다. 허허”
매는 국가에서 지정한 천연기념물이다. 그래서 잡거나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무형문화재인 박용순씨조차 관리자 자격으로 임시로 맡아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매사냥 자체를 배우려고 해도 배울 방법이 없다.
“매사냥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풍류이자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민속입니다. 수천 년 동안 위로는 왕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즐겨오던 것이지요. 그 명맥을 이어 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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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제가 할 일입니다.”

그의 소망은 매사냥을 조건부로라도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즉, 일정한 시설을 갖추고 교육을 받은 사람에 한해 매사냥을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레저 활동이 뭐 있습니까? 그러니까 기껏 PC방이나 틀어박혀 있는 것이지요. 그 아이들을 들과 산으로 불러내어 심신수련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걸 위해 10년 넘게 쫓아다녔는데, 그때마다 공무원들은 ‘억울하면 법을 만들어라’고만 합디다.”
어차피 매사냥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날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매도 드물거니와 설령 있다고 해도 매를 받고 길들일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더구나 바쁜 요즘 사람들이 엽총을 놔두고 매사냥에 매달릴 턱이 없다. 하지만 이 땅에 긴 세월동안 매사냥이란 게 존재했다는 걸 후세에 전해주고자 하는 목소리가 그냥 스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
사진제공 : 서울신문 안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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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1. 09:1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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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중략)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고 하잖아요? 당신이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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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포로수용소를 재현한 모형이고 아래는 당시와 같은 모습으로 지어놓은 천막막사

거제포로수용소라는 단어는 늘 이명훈이라는 이름을 동반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의 가상인물이지만, 소용돌이 치는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질곡을 고스란히 겪은 상징적 이름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 그리고 전쟁을 차례로 경험한 그는 조국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제 3국행을 택했다. 제3국이라니…. 민족이란 이름을 오밤중의 등불처럼 앞세우기 좋아하는 이 땅 백성의 상식으로는 비극적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남이든 북이든 주어진 광장에서는 국외자처럼 맴돌다가, 자신의 틀에 맞는 광장만 찾으려한 기회주의자라는 칼질 따위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경남 거제시 시청로 302번지. 그곳에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이 있다. 아픈 역사가 박제가 되어 걸려 있는 곳이다. 온갖 전시물을 좌판처럼 늘어놓은 한쪽 구석에는, 미처 흔적을 지우지 못한 포로수용소의 잔해들이 어색한 몰골로 서있다. 곳곳에 배어있는 상처의 흔적은 아직도 찬바람에 서럽다. 그 어느 전쟁인들 총칼 들고 죽어가는 당사자의 손으로 시작한 적이 있던가. 부모 봉양하고 자식 키우는 걸 낙으로 알았던 장삼이사들이 스러져간 곳. 그들의 억울한 넋이 낡은 시멘트벽에 기대어 통곡하고 있다. 핏빛으로 각인된 아픔조차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점 지워져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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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거제도에 수용소를?

전쟁은 국가 간에 싸우든 내전이든 반드시 포로를 만들어낸다. 6.25전쟁 역시 다르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개전 이후 첫 포로가 수용된 곳은 대전포로수용소였다. 그때만 해도 몇 명 되지 않는 규모였으니 그리 골치 아플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포로수용소 역시 대구, 부산 등으로 남하하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9월 15일에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포로를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죽지세의 북진이 시작되면서 포로수용소도 북으로 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번엔 중공군이 전세를 뒤집어놓았다. 후퇴 행렬을 따라 남하하던 포로들은 결국 부산에 집중됐다. 유엔군사령부에게는 전쟁도 전쟁이지만 포로대책을 찾는 것도 만만치 않은 숙제였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고 육지와도 격리된 섬으로 포로를 모아 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1차로 거론된 곳이 제주도였다. 하지만 이미 제주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수용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또 부산에서부터의 이동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대안을 모색하던 끝에 찾아낸 곳이 거제도였다. 물론 그 당시 거제도는 다리가 놓이지 않은 섬이었다. 또 육지로부터의 이동 거리 등에서도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란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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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포화상태가 돼버린 섬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를 세울 장소로 결정되면서 1951년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구상은 6만 명 정도를 수용한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22만 명 수용규모로 확대됐다. 먼저 도착한 포로들은 자신들이 수용될 곳에 울타리를 만들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거제도 들판은 금세 천막으로 뒤덮였다. 막사는 처음에는 천막들뿐이었으나, 해가 지나면서 흙벽돌로 구조물을 쌓았다. 또 3,000개의 침대를 보유한 제64야전병원과, 2,500개의 침대를 가진 2개의 별관부속병원(요양소)이 설치됐다. 공사를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에 부산에 있던 포로들이 수송되기 시작, 3월 말까지 약 10만 명이 이송됐다. 포로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용소는 갈수록 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인력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로 이송은 계속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인민군 15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17만 3천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그 중에는 여자포로 300명도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포로를 경비하는 부대병력과 행정인원 등이 합쳐지면서, 약 10만 명이었던 거제도 인구가 금세 세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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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 수용소에 해방구를 만들다

처음 몇 개월간은 비교적 평온했다. 가끔 경비병과 포로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우발적인 것이었다. 포로들의 집단 저항은 1951년 6월부터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수용된 제7구역의 제72소구역에서 맨 먼저 문제가 발생했다. 위생검사와 급식문제가 발단이 되어 포로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소요가 과격해지자 경비병들이 사격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3명의 포로가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소위 ‘해방동맹’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들이 조직화된 뒤 벌인 최초 행동은 수용소 내에서 ‘적기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별 제재가 없자 인공기를 게양하고 인민군 복장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특히 포로교환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소요와 유혈사태는 가열되기 시작했다. (소요의 원인과 관련 포로들에게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과 고문을 하자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주장과, 고문 주장 자체가 날조며 평양 측의 지령에 따른 조직적 반란이었다는 반박이 대치하고 있다.) 결국 이런 사태는 당시 포로수용소장이었던 F.T.도드 준장 납치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납치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포로수용소의 실정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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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공-반공포로, 또 하나의 전쟁

수용소에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혼합 배치돼 있었다. 반공과 친공의 성분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은데다가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이 이 문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친공과 반공세력 간에 대립이 격화됐다.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반목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고, 구실과 기회만 있으면 습격과 난투극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수용소 각 구역별로 친공 또는 반공의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하였다. 즉, 어느 구역에서 친공세력이 통제권을 장악하면 그 수용소는 친공구역이 되고, 반공세력이 그 곳을 장악하게 되면 반공구역의 성격을 띠게 되는 식이었다. 친공포로에 의한 대표적 반공포로 학살은 1951년 9월 17일에 일어났다. 이날 밤 친공포로 측 해방동맹 본부에서는 "부산이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 고 선전했다. 이와 같은 선동에 자극된 친공포로들 중 일부가 반공포로들을 운동장으로 끌어내어 타살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로 전 수용소에서 희생된 숫자는 무려 300명에 달했다. 9·17사건이라 불리는 이 폭동은 20일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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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남으로,혹은 제3국으로

유혈사태가 극심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 포로들의 분산이었다. 그 결과 친공ㆍ반공포로는 따로 수용되게 된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부상을 입었거나 병든 포로를 우선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본격적인 포로송환은 1953년 8월5일부터 시작됐다. 북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는 대부분 거제도와 제주도에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해로와 육로를 통한 일련의 수송 작전이 전개됐다. 이 송환 작전은 한 달 넘게 계속돼 9월 6일 완료되었다. 물론 반공포로들은 대부분 남한에 남았다. 하지만 남도 북도 희망하지 않은 이들은 제 3국(인도→브라질)으로 떠났다. ‘광장’ 속의 이명훈도 미지의 세계로 가는 배를 탔다.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이명훈의 비극이야 그렇다고 쳐도, 무사히 제3국으로 간 사람 중 그 누구도 이상향을 만났다는 소식은 없었다. 조국과 민족을 버리고 개인의 안위만 추구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한 이들도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조국을 선택할 수 없었던 그들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포로들이 떠난 뒤 용광로처럼 들끓던 수용소는 폐쇄되고 찾는 이 없는 마당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간 이름 없는 포로들의 피를 양분삼아….

참고자료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홈페이지,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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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 18. 08:44 사라져가는 것들
저는 지금도 펌프보다는 뽐뿌라고 불러야 제 맛이 납니다.
펌프라는 말이 어떻게 뽐뿌가 되었는지 몰라서는 아니고요, 그렇다고 어릴 적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불렀다고 해서는 더욱 아닙니다.
억지 같겠지만, 뽐뿌라고 발음해야 뭔가 힘이 좀 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대지 깊숙한 곳에서 생명수를 불러내는 도구쯤 되려면 힘이 좀 있어야 하니까요.
물론 제가 사랑하는 건 물을 길어 올리는 도구, 즉 펌프의 실체지 이름 따위는 아닙니다.
펌프는 ‘기억창고’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추억들을 퍼내어 햇빛 아래 널어놓는 마술 같은 존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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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 하면 한 여름에 옷을 훌훌 벗고, 등목 하던 기억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겨울 풍경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려웠던 추억이 더 뼛속깊이 고갱이로 박히는 모양이지요?
겨울아침이면 물을 데워서 펌프를 녹이는 게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전날 밤에 펌프 안에 고여 있는 물을 빼내면 얼 일이 없지만, 그걸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통째로 얼어버린 날은 팔팔 끓는 물을 몇 바가지 부어야 물을 펌프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았다고 고역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펌프질을 할라치면 손이 쇠 손잡이에 쩍쩍 달라붙고는 했지요.
제 어머니 말씀대로 ‘징그럽게도 춥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다행이 물이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그런대로 고생은 끝납니다.
지구가 가슴에 품었던 물인지라,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를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그 물을 받아서 세수도 하고 밥도 짓고 걸레도 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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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얕은 지식으로 펌프가 어찌 물을 끌어올리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기압의 차이를 이용해서 유체를 이동시키는 원리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지요.
펌프 안에는 바깥 공기가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고무 패킹(packing)이 있습니다.
펌프질을 하면 관에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그 아래에 있던 물을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펌프를 설치하는 방식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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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맥이 흐르는 곳까지 관을 박거나, 기존의 우물에 관을 넣고 뚜껑을 덮는 방식이지요.
지하수 사정이 안 좋은 동네는 샘도 관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맥을 찾거나 펌프를 설치하는 일이야말로 전문가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집에 펌프를 박는다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을 갈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지요.
어찌어찌 설치한다고 해도 속을 썩이는 펌프가 없지 않았습니다.
한번 쓰고 나면 물이 저절로 빠지는 것도 많았는데, 그런 땐 마중물을 부어줘야 했습니다.
마중물을 붓고, 빠르게 펌프질을 하면 어느 순간 저 깊은 곳의 물과 만나는 느낌이 전해져옵니다.
웃물이 관을 타고 내려가서 아랫물을 데려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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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여름이 되면 펌프에 매달려 놀았습니다.

땅속에서 퍼 올리는 물은 냉장고에 보관한 것만큼이나 시원했지요.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쓰기도 하고, 아예 큰 ‘다라’에 받아놓고 철퍽거리기도 했습니다.
한손으로 펌프질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 구멍을 막았다가 물을 받아먹는 재주쯤은 누구든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른들도 웃통을 훌훌 벗고 펌프 앞에 엎드려 등목을 하고는 했지요.
어푸! 어푸! 쏟아지는 비명에 펌프질은 더욱 신명이 붙었습니다.
먼 길을 다녀온 아버지는 마루에 앉자마자 시원한 물 한 잔을 청하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펌프질을 한참 해서 관에 고였던 물을 빼낸 다음 한 바가지 떠다 드리지요.
땅 속 깊은 곳의 물을 불러내지 않으면, 미지근하거나 녹 냄새가 나기도 하니까요.
“어이, 시원하다” 한마디로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때, 이유 없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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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시골동네를 지나다, 어느 집 마당에서 녹슬어 가는 펌프를 만나는 적이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손잡이를 잡아보지만, 쿨럭 쿨럭 해소기침이나 쏟아낼 뿐입니다.
저 깊은 곳에서 땀으로 길어내던 생명력, 그 물이 그립습니다.
발가벗고 깔깔거리던 여름날뿐 아니라 손이 쩍쩍 달라붙던 한 겨울의 풍경마저 애틋해지는 건, 나이 먹는 탓만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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