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갈라타 탑

이제 탁심(Taksim) 광장 방향으로 내려가 버스로 공항까지 가면 된다. 트램을 타고 전철로 갈아타는 방식, 즉 역순으로 되짚어 가도 되지만 멀기도 하려니와 환승이 귀찮아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저만치에서 재미있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어라? 저걸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지. 갈라타 탑 주변에는 늘 택시 몇 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헌데 택시와 지나가던 자가용 운전자 사이에 시비가 붙은 것이다. 우리 같으면 삿대질을 동원해 열심히 싸우다가 경찰을 부르거나, 지칠 때쯤이면 못이기는 체 서로 갈 길을 갈 텐데 이들의 싸움은 갈수록 거칠어진다. 재미있는 건, 처음엔 분명 둘 만의 싸움이었는데 조금 지나니 집단 싸움으로 판이 커졌다는 것이다.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고 다혈질인 터키 아저씨들은 싸움도 버라이어티하게 한다. 처음엔 관객이었던 사람들 중 한 둘이 심판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못 이겨 느닷없이 그라운드로 진입한다. 아저씨, 좀 참으시고요. 차분하게 말씀해 보세요. 조금 더 지나면 심판들끼리 시비가 붙는다. 네가 뭔데 저 아저씨 편을 드는 거야. 그러는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야. 택시기사가 먼저 잘못한 거잖아. 무슨 소리야 자가용이 잘못했지. 뭐야? 이게 어디다 대고. ? 이거 봐라? 한번 해보자 이거지. 싸움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판도 서너 개로 분화된다. 노인도 청년도 배불뚝이 중년남자도 최선을 다해 싸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원래 싸우던 두 사람은 각자 갈 길로 가버린 지 오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마치 축제현장 같다. 끝까지 지켜보고 그 결과를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께 전해야한다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저 노란 택시들 중 하나로부터 사건은 일어났다.

아쉬운 마음만 그 자리에 남기고 천천히 일어서서 길을 잡는다. 한걸음 한걸음이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여행 내내 땀을 배출한다는 기능성 등산복의 신세를 졌는데, 이스탄불에서는 워낙 많이 걷고 땀을 흘려서 그런지 별 도움이 못 됐다. 민감한 쪽의 피부가 옷에 쓸려서 벗겨지기라도 한 듯 쓰리고 아프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러니 걸음걸이는 당연히 똥 싼 놈 스타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스탄불의 미아가 되고 싶지 않다면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는 수밖에. 버스정류장인 건 분명한데 공항버스는 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 찾아왔나? 혹시 공항버스가 안 서는 정류장인가? 슬슬 걱정이 돼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 영어가 제법 잘 통용되는 나라고 더구나 여긴 국제도시 이스탄불인데. 잠시 망연히 서 있는데 택시 한 대가 내 앞에서 끼익~ 하고 급하게 서더니 운전사가 내린다. 어라? 날 바래주라고 이 나라 대통령이 보냈을 리는 없고.

탁심광장으로 가는 길에 만난 건물들

차에서 내린 기사는, 구겨진 여행자 정도는 쳐다보지도 않고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댄다. 택시를 보니 한마디로 가관이다. 이 나라에서는 이런 정체불명의 물건을 택시라고 부르는구나. 여기저기 벗겨진 거야 시간 탓이라고 돌린다지만, 물리고 긁히고 깨진 저 숱한 상처는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는 투견이나 투우처럼 택시싸움도 하나보지? 상처가 전부는 아니다. 그나마 흉내 내듯 남아있는 범퍼는 거의 떨어져 덜렁거리는 것을 대충 얽어놓았고 엉덩이 쪽은 페인트보다 테이프가 더 많은 면적을 차지했다. 지금도 어디서 사고를 당했거나 사고를 치고 온 모양이다. 전화 내용을 짐작하건대 보험사하고 뭔가 타진 중인 것 같다. 나는 돌아갈 길이 급하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택시기사가 하는 짓에 푹 빠져버린다. 특이한 건, 이 친구의 얼굴이나 목소리 어디에도 사고를 당한 사람 특유의 낭패한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고처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아침저녁으로 늘 하는 일을 하듯 자연스럽다. 통화를 끝낸 그가 범퍼 쪽을 발로 툭툭 차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서른 한 둘쯤 됐을까?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청년이다. 그가 길을 지나다 똥을 본 강아지처럼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온다. 어디 가슈? ? 공항 가려고 버스 기다리는 거야. 이왕이면 편하게 택시 타고 가지 그러슈? 돈이 얼마 없어. 사실 잔돈을 남기면 뭐하나 싶어 버스비+알파만 남겨놓고 다 써버렸다. 하지만 이 친구 이대로 물러날 기색이 아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요? 정말 별로 없다니까. 보라는 듯이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보지만 모두 동전뿐이다. 이 친구, 내가 세는 게 답답했던지 얼른 빼앗아 제 손으로 헤아려 본다. 돈 세기를 끝내더니 고개를 한참 갸웃거린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다. 돈을 돌려주더니 자기 차를 타라고 손짓한다. 그래? 나야 좋지만. 너 택시 사고 난 거 아니었어? 얼른 뒤처리를 해야지. 괜찮유. 일 끝내고 처리하면 되쥬 뭐. 이 정도면 미국도 가유. 이 친구 “No problem”을 연발하며 나를 뒷자리에 밀어 넣는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고양이

그런데 나 정말 이런 차 타도 괜찮은 거야? 테이프로 때워놓은 차가 굴러가긴 하고? 온갖 생각이 빛의 속도로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금방 의혹을 놓아버리고 만다. 그래, 설마 공항까지 못 가겠나. 편하게 한번 가보자. 편하게. 그 기대가 얼마나 오산이었는지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머플러를 떼놓은 오토바이처럼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하면서 내 입에선 비명이 저절로 터진다. ? ? 이거 뭐야. 총알 택시였어? 이 친구 차는 차가 아니듯이 운전도 운전이 아니다. 마치 뱀장어가 장애물경주를 하듯 지그재그로 도심을 헤엄쳐 나간다. 마침 퇴근시간이라 길이 제법 복잡한데 어떻게 이렇게 달릴 수 있는 건지. 차선을 바꿀 때도 깜박이를 켜는 법이 없다. 아마 이 차에는 아예 깜박이가 안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겁이 슬슬 나기 시작한다. 슬쩍 계기판을 들여다봤더니 시속 120~130km를 오르내린다. 물론 다른 차, 특히 택시들은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다. 두 손은 저절로 손잡이에 매달리고 잠시 뒤에는 흥건하게 고였던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오늘 저 세상으로 가는구나. ! 어머니. 이 못난 자식은 낯선 땅에서 이렇게 떠납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이 나라 교통경찰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파트

그가 공포의 시간을 위해 마련된 이벤트는 그걸로 끝이 아니다. 대체 뭘 얼마나 준비한 거야. 최대볼륨으로 라디오를 켜더니 노래에 맞춰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대체 운전을 하는 건지, 클럽에 왔다고 생각하는 건지. 잠시 뒤에는 끊임없는 통화가 시작된다. 그것도 슬쩍 슬쩍 나를 돌아보면서 슬슬 웃기까지 한다. 아마 자기 친구에게 나 지금 파김치처럼 후줄근하게 늘어진 촌놈 하나 태우고 겁을 주고 있는데, 엄청 쫀 거 같아. 아마 오줌을 지리지 않았을까? 에이, 시트 닦으려면 큰 일 났네.” 어쩌고 중계방송을 해주는 모양이다. 한참 통화하다가 나를 돌아보더니 내 친구가 아저씨한테 hello라고 말해달래!!! 그런 건 안 전해줘도 되거든. 제발 운전이나 똑바로 해. 하지만 그는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리며 통화를 계속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았다는 것. 공포에 질린 내 눈으로 저만치 아타튀르크 공항이 들어온다. 아아, 이렇게 반가울 데가. 밤새 산속에서 헤매다 아침을 맞은 기분이 이럴까. 차에서 뛰듯이 내려서 동전 한 푼까지 몽땅 털어줬더니, 얼른 챙겨 넣고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내 덕분에 스릴 있지 않았어?” 묻기라도 하듯이. 헌데, 나도 묘하지. 그 웃음이 밉지 않다. 그래, 수고했다. 다음에는 널 만나지 않도록 기도 할게.

돌고 돌아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오다.

총알택시를 탄 덕에 예정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지? 우선 먹을 걸 좀 찾아봐야겠지? 집에 갈 때가 돼서 그런지 따뜻한 국물이 있는 면이 먹고 싶다. 아무리 잡식성인 나지만, 그래도 수십 년 먹어온 가락이 있지. 케밥은 이제 질렸다. 잔치국수가 가장 좋겠지만 언감생심일 테고, 혹시 일본식 우동집이라도 있을까 싶어 공항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지만 파스타 파는 집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돌아다닐 힘도 없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계속 아우성이고 온 몸의 에너지는 전부 빠져나갔다. 밥이야 참았다가 기내식으로 때우면 되지. 돌고 돌아 다시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돌아온 지금, 절에 간 새색시처럼 얌전히 앉아서 터키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본다. 몇 년이 흐르기라도 한 듯 지나온 날들이 아득하다. 소태처럼 쓰디쓴 날도 있었고 솜사탕처럼 감미로운 날도 있었다. 숱한 것을 배웠고 가슴에 퍼 담았다. 그 아름답던 풍경들,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귀에 목이 박히게 들었던 “Where are you from” “my brother!!!” 그 따뜻한 음성이 환청처럼 여전히 귓전을 맴돈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이 기다리고 있는 12시간 저쪽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콩나물시루 같은 공항에 서서, 나만의 작별 의식을 치른다. 터키여, 내 형제들의 땅이여! 나는 지금 떠나지만 끝내 이별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일 뿐. 멀지 않은 날 그대의 대지에 엎드려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것이니.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작년 9~10월에 걸쳐 여행을 다녀와서 1010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여행기가 이제야 끝났습니다. 손을 꼽아보니 정확하게 반년이 지났군요. 1주일에 1,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글을 올리는 동안 전 무척 행복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을 보내주셨고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행복한 일은 또 있습니다. 연재가 진행되는 중에 출판사가 선정되고, 또 그곳에서 출판 펀딩에 성공해서, 안정된 조건으로 출간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 책이 시장에서 팔릴 것이라는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는 측면에서 무척 고무적인 일입니다. 물론 이번 여행은 이게 시작입니다. 머지 않은 날 다시 터키 땅을 밟을 것입니다. 그만큼 매력이 넘치는 곳 터키, 저는 그곳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제 여행을 만들어주신 분들, 그리고 응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의 가슴에 이 봄, 행복이란 꽃 하나씩 피어나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sagang

 

posted by sagang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성소피아 성당 앞의 노점상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예레바탄

예레바탄 입구

지하저수지 예레바탄에서

성소피아 성당에서 나오니 길에는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리어카에서 파는 군것질거리가 예사롭지 않다. 군밤과 구운 옥수수. 이건 코리아 콘셉트인데? 이 나라 사람들도 저런 걸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건너 예레바탄 지하저수지로 향한다. 소위 지하궁전이라고 일컫는, 이스탄불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다. Yerebatan에서 Yere땅에라는 뜻이고 Batan빠지다라는 뜻이란다. 결국 땅 속에 빠진 궁전이란 말인데 지하저수지 치고는 제법 호사스런 이름을 얻은 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가 물을 저장하기 위해 532년에 건설했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어 놓고 ! 솔로몬이여~” 어쩌고 하며 감격을 금치 못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지하 저수지는 궁전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길이가 140m, 70m, 높이 9m8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적에게 포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물 비축용으로 지었다는데, 당시 도시 규모와 인구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은 도시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이 저수지에는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병사들이 열병하듯 서 있는데, 기둥마다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재미있는 건 기둥의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예레바탄의 기둥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천형처럼 거꾸로 선 메두사의 머리

맨 오른쪽 '수공'이란 글씨가 보이는지.

성소피아 성당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 동네는 무엇을 지을 때마다 석재를 고대 신전에서 뽑아다 쓴 모양이다. 그러니 출신지에 따라 생김새가 모두 다를 수밖에. 이것도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 해야 하나? 바깥세상은 땀을 흘릴 만큼 더운데 안으로 들어서니 으스스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시원하다. 조명을 받은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지하세계에서 일평생을 마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조금만 나가면 태양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이 곳의 진짜 명물은 메두사의 머리다. 맨 안쪽으로 가면 돌로 조각한 2개의 메두사 머리를 만날 수 있는데 하나는 뺨을 바닥에 댄 채로, 또 하나는 아예 머리를 땅 쪽에 박은 채 서 있다. 저들은 왜 저런 모습으로 저 곳에 있는 걸까. 1984년 보수공사를 할 때 발견됐다는데, 지금도 왜 그곳에 그 모습으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듯, 마법에 걸린 메두사의 형상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하는 저주가 내려진다는 이야기만 그럴 듯하게 뒷받침해줄 뿐이다. 되짚어 나오다보니 입구에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재미있는 걸 발견한다. CD와 엽서 등을 판매하고 있는데 판매대에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대여섯 개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뜻밖에 한글도 있다. ‘수공손으로 직접 그렸다는 것이겠지. 우와! 심봤다. 그렇다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중 한국인들이 5~6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이거 좋은 일인가?

점심을 먹은 카페거리. 오른쪽 조금 흔들린 여인들이 바로 헤매던 동포

이스탄불의 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지하 저수지에서 나오니 더 이상 걷기 어려울 만큼 허기가 진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나온 게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가 이스탄불에 가면 꼭 들러보라고 추천해 준 음식점이 생각난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만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면.” 그렇다면 이 근처인데. 문제는 한참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음식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골목에는 카페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데 그 집이 그 집 같다. 에라, 모르겠다. 입구 쪽에 있는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찾아갈 힘이 없을 만큼 배가 고프다. 케밥과 맥주를 한 잔을 주문해 허겁지겁 점심을 때운다. 케밥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입에 더 반갑다. 서울 가면 이놈의 맥주 마르고 닳도록 마셔야지. 맥주회사들 잘 들어. 나 귀국하기 전에 여유분 좀 만들어놔야 할 거야. 입에 케밥을 구겨넣고 맥주를 들이키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왔다 갔다 한다.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어느 집이 마땅한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해서 느닷없이 이 집 음식 먹을 만 해요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온다. 친구들끼리 터키 중부를 돌고 와서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을 탐색하는 중이란다. “혹시 두 분은 안 싸웠어요?” 함께 온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유령마을 카야쾨이를 찾아왔던 아가씨가 생각나서 물었더니 싸울 일이 있어야지요.”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래,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좋은 경험 하자고 떠난 여행, 힘들고 피곤할수록 양보하고 배려하면 될 것을.

톱카프 궁전의 문들

그녀들과 헤어져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엔 톱카프 궁전. 내가 가고 싶은 모든 곳이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다. 트램이나 택시를 타고 다녀야 한다면 또 얼마나 번거로울까. 트램이 천천히 오가는 길을 따라 톱카프 궁전으로 간다. 이곳은 한 때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영토로 거느리며 대제국을 형성했던 오스만의 황제들이 살던 궁전이다. 1453년 우여곡절(배를 끌고 언덕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흐메트 2. 남이 지어놓은 궁전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새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세 대륙을 지배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 골든혼으로 둘러싸여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이 자리였다. 1472년 착공해서 1478년에 준공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저 궁전이라고 불렀는데 후대로 오면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이름이 톱카프로 굳어졌다. 70의 넓은 부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투르크 족 전통의 흔적이 배어 있다. 마치 유목민들이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게르를 치는 것처럼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건물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지었다. 많을 땐 이곳에 5000명 넘게 거주했다고 한다.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인 황제의 문을 지나서 만나는 곳이 제1정원. 이곳은 개방 공간이다.

톱카프 궁전 내부

톱카프 궁전을 거닐다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부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원에는 잘 손질된 녹색 잔디가 깔려 있다. 잔디 위에 큰 그늘을 내리고 있는 플라타너스에서 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 이젠 이곳에도 어쩔 수 없이 가을이 오려나보다. 그래, 명색이 10월인데. 그러보니 나뭇잎들도 조금씩 누런 색깔을 띠고 있다. 내 나라에는 지금쯤 가을이 깊겠다. 길지도 않은 여행에 벌써 향수병이 들었나? 잡념을 털어버리려 얼른 두 번째 문인 평안의 문을 지난다. 이곳에서 제2 정원을 만나는데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궁전의 시작이다. 이 정원에서는 출정식, 공주의 결혼식 등 각종 국가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또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한 디반 건물과 왕실 주방건물도 있었다. 왼쪽으로는 하렘 입구가 있다. 술탄의 어머니, 부인 등 여자들만 생활하는 하렘은 아랍어 하림이 어원으로 금지된 곳이라는 뜻이다. , 황제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 하렘에는 약 250개의 방이 있다. 한번 하렘에 들어간 여자는 죽어서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황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 희망치고는 참 비참한 희망이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슐레이만 시절에는 하렘에 머무는 여인이 1000여 명에 이르렀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가는 비밀 통로도 있었다고 한다.

궁전내부의 이곳 저곳. 맨 아래 사진 수도꼭지는 황제가 밀담을 할 때 보안을 위해 틀어놓았다지.

다시 걸음을 옮겨 지복의 문을 지나니 제3 정원이 나온다. 이곳에는 황제 알현실이 있다. 오스만의 황제들은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고 외교사절도 이 방에서 만났다고 한다. 오른쪽 건물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호박만한 금덩이라도 전시돼 있나? 얼른 쫓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가 바로 보물 전시실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이후 약탈을 당할 일이 없었던 터키는 각종 유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세계 최대의 에머랄드로 장식된 단검, 황금 의자, 보석이 촘촘히 박힌 주전자, 86캐럴짜리 다이아몬드 등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온갖 보물들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노래를 부르고 있다. 모조품이 아니고 전부 진품이라니 그 가치가 얼마며 이만한 보물을 모을 수 있었던 황제의 권세는 대체 얼마만큼 컸던 것인지. 문제는 워낙 보석이 많으니 어지간한 건 그저 돌처럼 보인다. 카메라를 든 내가 들어서면서부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발광을 시작하더니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셔터를 누르려는데, 병아리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내 팔을 잡는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셔터 소리에 보석이 경기라도 일으킨다더냐? 워낙 보석 같은 것에 흥미가 없는데다가 박절한 경비원의 눈초리가 싫어 건성으로 돌고 그냥 나온다. 3 정원을 벗어나니 제4 정원이 이어진다. 이곳은 황제와 가족들의 휴식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는데 왜 이곳에 궁전을 지었을지 바로 알아차릴 만큼 전망이 좋다. 마르마라해, 보스포루스 해협이 코앞에 있다.

저렇게 바다가 코앞에 있다.

세 갈래로 나눠진 바다

난 지금 유럽에서 아시아를 건너다보고 있다. 대륙과 대륙이 이리 지척이구나. 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질곡이 있었을지. 궁전의 해안 쪽 끝에는 규율을 어긴 하렘의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참 끔찍한 일이다. 자유와 희망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여인들. 아름다운 바다가 지척인데도 죽기 위해서나 갈 수 있었다니. 이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누가 발목에 납덩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2정원으로 다시 나와서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쉼을 한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쓸쓸해진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땐 얼른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한다. 톱카프 궁전에서 나와 그랜드바자르로 가고 싶었는데 마침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있나. 이스탄불까지 와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다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유럽의 물산이 아시아로 전해지고 아시아에서 온 물품들이 유럽으로 넘어간 곳이 바로 그랜드바자르다. 30의 거대한 면적에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입점한 점포가 5000개를 헤아린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그랜드바자르를 들른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거기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길 잃고 못나올 수도 있어요겁을 주길래 코웃음을 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본 풍경들. 저 갈라타 다리 1층에 한 많은 고등어 케밥집이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에미뇌뉘 선착장에 이르자 해협을 오가는 유람선과 광장을 오가는 인파, 그리고 해변에서 낚시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늦여름(?)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철없는 강아지처럼 길 위를 뒹굴뒹굴 구른다. ! 옷 버린다. 그 모습이 지친 몸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조금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이곳은 두 개의 해협과 하나의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다. 조금 전 다녀온 톱카프 궁전이 있는 쪽, 즉 오른 쪽은 마르마라해이고 앞으로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이 해협은 흑해로 연결된다. 그리고 저만치 갈라타 다리가 보이는 왼쪽으로는 골든혼이라는 바다의 지류가 뻗어있다. 굳이 말로 된 지도를 그리는 이유는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해를 조금 넓히기 위해서다. 이스탄불은 이렇게 바다에 의해 크게 세 쪽으로 나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 속한 구시가지, 그리고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다음이 아시아다. 지금까지 봐온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 지하궁전, 톱카프 궁전 등 대부분의 이름 있는 유적은 구시가지에 있고, 구시가지에서 골든혼 위의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신시가지가 시작된다. 신시가지에서 차를 타고 보스포러스 다리를 건너야 아시아에 닿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시가지에서 직접 배를 타고 아시아로 건너가는 방법도 있다. 무슨 도시가 이렇게 복잡한지 원. 갈라타 다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간다. 2층으로 되어 있는 다리는 아래 위 모두 인파로 북적거린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들. 저 아이 큰 낚시꾼 될게다.

갈라타 탑에서 본 이스탄불

다리 1층에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곳에서 그 유명한 고등어 케밥을 판다는데. 잠시 서서 입맛을 한 번 다셔보지만 결국 그냥 지나친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들를 만한 시간이 없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고등어케밥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석양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다음에 올 땐 오늘의 아픔을 반드시 보상 받고 말리라. 다리 한 가운데로는 트램 철로가 있고, 양쪽 난간에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남녀노소, 아니 여자는 없다. 암튼, 온갖 사람이 없이 쏟아져 나와 다리 아래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정말 물고기가 잡히는 것일까? 다가가 보니 숭어처럼 생긴 물고기들이 그릇마다 잔뜩 들어 있다. 어떤 꼬마 아이는 피라미를 닮은 작은 물고기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고 있다. 너 크면 큰 낚시꾼 되겠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서 찾아갈 곳은 갈라타 탑.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다.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걸어올라가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 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굳이 이 갈라타 탑을 찾은 것은 탑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528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항구를 지키기 위한 감시탑으로 세웠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됐다고 한다. 그걸 갈라타 지구를 차지한 제노바 자치구가 1348년에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으로 재건축했다. 한 때는 포로 수용수나 기상관측소로도 쓰였다니, 팔자가 드난살이로 평생을 마친 여인만큼이나 험했던 모양이다. 

갈라타 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풍경

탑 아래에는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들 역시 이스탄불 전경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겠지. 꽁무니에 서서 한 참 지난 다음에야 입구의 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11층 높이의 이 탑은 10층까지만 엘리베이터가 가고 맨 위층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10층은 전망대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이 들어서 있다. 발코니 난간에 서면 누구나 아! 하는 감탄사를 아끼지 못한다. 말 그대로 이스탄불 시내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기 조금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 저곳은 골든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보스포러스 해협 저기 어디에서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 골든혼으로 들어갔다지. 하지만 지금은 산도 언덕도 흔적조차 없다. 대신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성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등 조금 전에 다녀왔던 건물들도 저만치서 손을 흔든다. 우리의 남산타워처럼 최고의 전망대다. 문제는 난간이 너무 좁고 관람객은 너무 많다는 것. 줄을 서서 천천히 도는 게 아니라 먼저 온 사람 나중에 온 사람이 마구 섞여서 엉덩이를 비비고 새치기를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친 몸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얼른 다시 내려온다. 갈라타 탑을 빠져나와 광장의 벤치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이스탄불에서, 아니 터키에서 내 공식 일정은 끝났다. 이젠 공항으로 가야한다. 이율배반적인 감정, 허전함과 안도감이 전신을 엄습한다. 게 바로 시원섭섭하다는 건가? 그나저나 정말 여기서 끝일까?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멀리서 본 블루모스크

히포트롬에 서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고향 떠난 오벨리스크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이스탄불을 하루 만에 돌아보겠다는 것은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주마간산으로 둘러볼 곳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어쩌랴. 이번에는 신이 내게 준 시간이 그뿐인 것을. 맛보기라도 하려면 뛰듯이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세운 여행 철학과는 어긋나지만 이런 기회라도 주어졌음에 감사해야지. ! 어서 가자. 트램을 내린 술탄아흐메트 정류장에서 로마와 비잔틴 시대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히포드롬은 코앞이다. 보통은 성소피아 성당(아야소피아 박물관)에서 출발해서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자미(블루모스크), 이곳 히포드롬 순서로 돌아보게 되지만 1분이라도 아까운 나는 그 코스를 거꾸로 잡았다. 세로 500m, 가로 117m의 히포드롬은 공원이 돼 있다.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국가행사가 치러지던 곳이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높다랗게 솟아있는 기둥. 이집트 오벨리스크(Egyptian Obelisk). 지금부터 3500년 전인 BC 16세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룩소르의 라크라크 신전에 세운 2개의 기둥 중 하나라고 한다. 신전 이름이 어떻게 간이침대 이름 같냐. 지금 그거 신경 쓸 땐 아니지.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가져와서 지금 있는 자리에 세웠다. 오벨리스크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는데, 그 상징성에 눈독을 들인 것이겠지. 이집트가 로마의 속국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짐작은 가지만 한 나라의 상징물이 점령자의 욕심에 의해 제 땅을 떠난 건 마뜩치 않다.

오벨리스크 기단에 새겨진 부조.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뱀기둥.

 이 오벨리스크는 기단에 새겨진 부조로 유명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명령에 의해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마차 경주를 관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무지함으로 뒤덮인 내 눈에는 숱한 조각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게 뱀이 휘감은 듯 나선으로 된 기둥. 재료는 청동으로 보인다. 이 뱀기둥은 BC 478년 페르시아를 물리친 기념으로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운 승전탑이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제가 있던 곳에서 살 팔자가 못 됐던지 콘스탄티우스 대제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원래는 높이가 8m에 달했지만 머리 등이 파손되고 5m정도만 남아 있다. 본의 아닌 타향살이도 서러울 텐데 훼손까지 당한 걸 보니, 꿈도 의지도 사라지고 몸까지 쇠락해버린 망명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떨어져 나간 뱀 머리 가운데 하나는 이스탄불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또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니 이별이 멀고도 길다. 광장을 벗어나 블루모스크로 접어든다. 블루모스크, 정식 이름은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자미는 이슬람 사원을 말하는데 터키어로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모스크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두 단어 사이의 정확한 차이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길게 풀어 써보자면 오스만 제국의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지은 이슬람 사원정도가 될 것 같다.

여러 방향에서 본 블루모스크. 세번 째 사진에서 여섯개의 미나레트를 확인할 수 있다.

블루모스크에 담긴 사연

블루모스크는 1609년에 착공돼 1616년에 완공됐다. 이 사원이 유명한 것은 내부의 아름다움에 있다.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실내를 비추는데, 그 빛이 21000장의 푸른색 타일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온다. 그 때문에 블루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보통은 맞은편의 성 소피아성당을 먼저 둘러보고 블루모스크를 보는데 거꾸로 들어가다 보니 역사를 거꾸로 걷고 있는 셈이다. 순서야 어쨌든 이 두 건물은 가까이 있다는 것 이상으로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사연을 잠깐 듣고 지나가보자. 오스만 제국의 14대 황제였던 아흐메트 1세는 성소피아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그 무엇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 성당에 미나레트(첨탑)를 세우고 모스크로 바꾸긴 했지만 비잔티움제국이 세운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찜찜하기도 하고 열도 받았던 것이다. 고심 끝에 그는 성소피아 성당보다 더 멋진 모스크를 하나 세우기로 한다. 결국 블루모스크라는 역작은 성소피아라는 불세출의 걸작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셈이다. “그래, 결심했어술탄은 그 당시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 메흐메트 아가를 불러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문제는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의 경제력은 그 정도 건물을 지을 형편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충성스런 건축가였던 아가, 그런 현실과 지금은 때가 아님을 간곡히 진언했지만 왕이라는 캐릭터는 원래 주변 말을 안 듣고 어깃장 놓는 게 주특기 아니던가

.

블루모스크의 안뜰.

뭔 잔말이 그렇게 많다냐? 그냥 지어. 특히 미나레트는 본때 있게 황금으로 떡칠 혀봐.” 그래서 할 수 없이 짓기 시작한 게 이 블루모스크다. 술탄은 기공식에 직접 나와 삽질을 하고 흙을 나를 만큼 기대가 컸단다. 쯧, 삽질 좋아하는 거 하고는그런데 특이한 건 이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6개라는 점이다. 이웃의 성소피아 성당 등 대부분의 모스크는 2~4개의 미나레트가 고작이다. 미나레트 자체가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오로지 이슬람 성지 메카의 모스크만 6개를 세운다고 한다. 완공 후 현장에 간 술탄이 기가 막혀 물었다. “아니, 저것이 워째서 여섯 개랴?” “아따, 시방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허신대유. 원래 여섯 개 세우라고 혔잖유?” 이렇게 어긋나게 된 사연이 있다. 물론 기록에는 없는 야사(野史). 터키어로 6알투(Altu)’, 황금은 알툰(Altun)’이다. 왕은 알툰, 즉 황금 미나레트를 세우라고 지시했는데, 건축가는 그걸 알투, 즉 여섯 개를 세우라는 말로 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 건축가의 귀가 어두워서 그리 된 걸까? 그렇지 않았다는 후문이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린다. 술탄은 철없이 고집을 피우지만, 미나레트마저 황금으로 세우면 나라 곳간이 완전 바닥날 걸 염려한 건축가가 미친척하고 알툰대신 알투미나레트를 세웠다는 것이다. 물론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말도 있다. 술탄이 원래 여섯 개를 세우라고 해놓고 메카의 눈치를 보느라 건축가의 어두운 귀를 탓했다는 설이다.

블루모스크 내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환상적이다.

 
환상의 푸른빛을 보다

이제 블루모스크에 직접 들어가 볼 차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만찮은 위용에 감탄사부터 나오게 된다. 지금까지 터키에서 본 건축물 중 가장 크고 당당하다. 높이 43m, 직경 27.5m의 거대한 중앙 돔을 4개의 중간 돔이 받치고 있어 무척 안정적이다. 또 그 주변으로 또 30개나 되는 작은 돔들이 배열돼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마치 크고 작은 몽골 게르들을 보는 것 같다. 본당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6개의 미나레트 앞에 서서 역사의 기록이 숨겨뒀던 뒤안길을 더듬어본다. 실내로 들어가면 감탄사는 더욱 커진다. 수없이 많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들이 쳐놓은 환상적인 푸른 커튼. 아름답다. 어쩌면 이 빛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나머지 까마득한 돔형 천장이나 거대한 샹들리에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밖으로 나와 잘 가꾼 정원에서 조금 전 본 걸작을 되새김질 해본 뒤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한다. 블루모스크와 성소피아 성당 사이에는 깔끔하게 단장된 광장이 있다. 그곳에는 각국에서 온 관광객과 한가한 고양이들이 햇볕을 즐기고 있다. 나도 잠시 돌 의자에 몸을 기댄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의 하나. 교과서에서 시작해 숱하게 듣고 사진으로 봤던 성소피아 성당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감동스런 순간은 잠깐의 뜸을 들인 뒤 마주칠 때 더 가슴을 뛰게 하는 법이다.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의 원래 명칭은 그리스어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였다. 신성한 지혜라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뒤에는 아야소피아(Ayasofya)라고 불렀다. 지금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성소피아 성당, 이슬람 세계에서는 성소피아 사원이라고 하는데 1934년 박물관으로 지정된 뒤 공식이름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멀리서 얼핏 보면 블루모스크와 비슷한 것 같은데, 또 집중해서 보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지은 사람이나 시기의 차이일까. 높이 54m, 동서 길이 77m, 남북 길이 71.7m. 정사각형의 벽 위에 지름 32.96m짜리 돔 지붕을 올린 비잔티움 시대의 대표적인 성당. 우선 외관부터 기가 질릴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성소피아 성당도 덩치나 역사만큼 숱한 이야기와 사연을 품고 있다. 지금의 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비잔티움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0년에 세운 큰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불타버리고 416년에 다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 역시 532년에 일어난 시민들의 폭동(니카의 반란)으로 불타는 비운을 맞이한다. 창녀 출신이었다는 말도 있는 여걸 테오도라 황후 덕분에 반란을 평정한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는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견고한 성당을 짓도록 명령한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것이 동원됐다. 목수 1000 명과 노동자 21만 명이 투입됐고 최고의 건축자재를 사용했다.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공식명칭인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라고 써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기 전의 회랑.

회랑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화.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성소피아 성당이 생긴 사연

특히 목재로 지었기 때문에 화재가 잦았다는 핑계로, 고대 신전의 기둥까지 뽑아다 썼다. 이때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델피 신전의 대리석 기둥도 징발돼 머나먼 이곳으로 옮겨졌다. 황제의 성당 욕심에 나라의 기둥뿌리가 남아나지 않은 셈이다. 5322월에 착공한 성당은 510개월 만인 53712월에 완공됐다. 준공테이프를 끊고 성당에 들어서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외쳤다는 한 마디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아무튼 황제 정도 하려면 뭔가 멋있는 말 한 둘쯤은 준비하고 다니나 보다.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아름다운 걸작을 자기 대에 완성했다는 감동에서 나온 말이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돔 양식 건축물의 백미로 꼽힌다. 중앙 내부 면적은 7000m². 엄청나게 넓다. 비잔티움 석조 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이 성당은 동방 정교회 수장인 대주교가 머무는 곳으로 비잔티움 제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진, 화재 등으로 수난을 겪다가 1204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성상과 성물들이 대거 약탈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이교도도 아닌 기독교도가 기독교의 상징을 턴 것이다. 결정적인 시련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에 의해 함락 당하면서 일어난다.

성소피아 성당의 내부. 숱한 샹들리에와 이슬람문자가 새겨진 원판이 눈에 띈다.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의하면 점령지에는 3일 간의 약탈이 허용된다고 한다. 당연히 성소피아 성당도 약탈 대상이 됐다. 하지만 성당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점령군주 메흐메드 2세는 병사들에게 건물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 뒤 이 성당에 미나레트를 세워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고 모자이크로 된 기독교 성화 위에 회칠을 해서 가려버렸다. 비극이지만 부숴 없애지 않을 것만으로도 고마워 할 일이다. 그렇게 회칠로 덮여졌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회반죽벽에 그려진 벽화기법)1931년 미국인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역사를 훑어봤으니 이제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씩 확인할 차례. 성당은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넘쳐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와 관광객들이다. 문을 들어서니 본당 앞에 큰 회랑이 나타난다. 기도를 준비하던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본당으로 들어서는 문은 모두 9개인데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문이 황제만 드나드는 전용 문, 황제의 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황제는 간데없고 세상의 온갖 장삼이사들이 그 문을 드나든다. 물론 나도 잠시 황제가 되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들어선다. 황제의 문 바로 위에 모자이크화가 보인다. 성당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성화다.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천사 가브리엘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비잔티움 황제 레오 6세다.

내부 천장. 두번 째 사진 가운데 상단에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보인다.

성소피아 성당에 들어가다

그림의 내용은 황제가 예수 앞에서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황제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신권, 새삼 경외심이 든다. 오른쪽 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콘스탄티노플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고 있다. 왼쪽은 성소피아 성당을 지은 유스티아누스 황제인데 그가 지은 성당을 봉헌하고 있다. 봉헌이라는 단어를 입에 되뇌다 보니 서울시를 자신이 믿는 신에게 봉헌했다는 전직 시장님이 떠오른다. 원래 이렇게 봉헌들을 하는구나. 시장은커녕 통반장 할 자격도 못되는 난 뭘 봉헌하지? , 다행스럽게도 내겐 봉헌 받을 신이 없구나. 본당으로 들어서면 누구나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거대한 돔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빛, 숱한 샹들리에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종교와 상관없이 온몸은 성스러움으로 충만해진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충동이 든다. 중앙 돔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자가 크게 새겨진 원판이 시선을 잡는다. 무하마드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란다. 직경이 7.5m나 된다는 이 글씨 판은 이슬람 세계 최고의 달필로 손꼽힌다는데 이 까막눈이 제대로 알아볼 수나 있나. 금색으로 치장한 이슬람교 예배의 표상 마흐라브(Mihrab)는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는데 이는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당 내부 모습.

마흐라브 옆에는 설교단인 밈베르(Mimber)가 있고 왼쪽은 술탄이 앉던 자리가 있다. 천장에는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쏟아지는 빗살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별 사전 지식 없이 이 글을 읽는 분은 이 친구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야? 대체 기독교 성지에 간 거야, 이슬람 성지에 가 있는 거야한 마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슬람 술탄 얘기를 하다 느닷없이 아기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튀어나오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난 두 눈으로 본 대로 전할뿐이다. 현장에 있는 사람도 정신없을 정도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상징물들이 혼재돼 있다사람에 따라서는 정체성을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엉덩이를 조금씩 좁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촌로들처럼 보기 좋다. 칼을 맞대고 싸우던 종교 간에 이런 공존도 가능하구나낯선 자각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강제로 지워지는 게 인류가 남긴 궤적 아니었던가. 그런데 난 두 개의 종교가 한 공간에서 기나긴 세월을 동거해온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하긴, 문제는 신의 뜻 보다는 해석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신은 애당초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라고 일렀을 것이다. 그래서 신(어느 쪽이라고 규정할 건 없다)은 이런 공존의 현장을 남겨 욕심과 아귀다툼으로 날을 새우고, 나와 다른 건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건 아닐까. 이교도의 상징물을 차지하고도 예술품들을 파괴하지 않고 미래의 어느 날을 열어뒀던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에게 새삼스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땀 흘리는 기둥에 붙어 있는 동판. 저 구멍에 엄지를 넣고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2층으로 올라가는 경사로.

경사로 바닥의 돌은 세월을 흠뻑 머금고 있다.

모자이크화가 주는 감동

인간이 반드시 파괴적이고 잔인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가슴은 더 없이 포근해진다. 감동은 감동, 탐색은 탐색!! 2층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입구 쪽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떡이라도 나눠주나? 비집고 들어가 본다. 떡은 없고 그 유명한 땀 흘리는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이 땀을 흘린다고? 하긴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도 있고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어대는 나무도 있다는데 기둥이 땀 좀 흘린다고 흉 될 건 없을 게다. 기둥에는 구멍이 뚫린 동판이 있다. 줄을 선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동판의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씩 돌린다. 완전히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세상에 소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줄이 길어질 수밖에. 줄에는 기독교인도 이슬람교도도, 동양인도 서양인도 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도 소망을 빌기 위해 어두운 통로를 한 바퀴 도는 사람들을 봤는데. 소망을 이루겠다는 마음은 어디든 다르지 않구나. 돌부처 앞에서 손금이 닳도록 무언가 간구하던 우리네 민초들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오버랩 된다. 나도 잠깐 망설인다. 줄을 섰다가 한 바퀴 돌려? 에라, 나 같은 속물이야 기껏 복권 어쩌고 할 텐데, 그냥 팔자대로 살다 가자. 그 시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지. 1층 탐색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간다. 회랑의 왼쪽 끝에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2층은 여성들이 예배를 보던 곳이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벽화. 가운데가 예수, 왼쪽이 성모 마리아, 오른쪽이 세례 요한이다.

성소피아 성당의 외부.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닌 자 모양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로 만들어 놨다. 조금 어두컴컴한 길은 붉은 조명을 받아 약간의 으스스한 느낌과 경외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돌로 된 바닥은 시간을 흠뻑 머금어 반질반질 빛을 발한다. 2층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것은 모자이크화다. ‘천국의 문이라 이름 붙은 대리석 문을 지나면 익히 보고 들은 모자이크화가 기다리고 있다. 가운데 예수가 있고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 그리고 왼쪽에 성모 마리아가 있는 그림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회칠을 하고 벗기는 과정에 겪었던 시련 때문인지 상당 부분 훼손돼 있다. 그 상처가 있어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해 보인다. 모자이크화에 시간이 남긴 이야기가 얹힌 셈이다. 이밖에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엄마, 이쪽으로 와봐!” “어이구, 다리 아퍼 죽겄다중간 중간에 우리말도 제법 많이 들린다. 이스탄불에서 한국인과 부딪히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1, 2층을 한 바퀴 돌고 났더니 급격하게 피로가 밀려온다. 사람들 틈을 헤치고 밖으로 나와 뜰에 잠시 앉는다. 건물의 엄청난 규모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른다. 이런 작품을 남긴 옛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긴다. 메두사의 머리로 유명한 지하궁전으로 갈 시간이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석양을 받은 크즐쿨레가 붉게 빛난다.

조선소 쪽에서 바라본 크즐쿨레.

크즐쿨레의 꼭대기층. 가운데에 물 저장고가 있다.


크즐쿨레와 테르사네

오후 일정은 크즐쿨레와 테르사네에서 시작한다. 크즐쿨레는 높이 33m8각형 5층탑을 말한다. 단순히 기념물로 세운 탑은 아니고 직경이 29m나 되는 작은 성이다. 알란야 성이 산 위에 있는데 반해 크즐쿨레는 바다 곁에 세웠다. 두 곳은 서로 마주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셀주크 튀르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 1세 때인 1226년에 지었다. 테르사네는 역시 셀주크 튀르크 지배시기인 1228년에 완공한 조선소다. 그 당시 지어진 조선소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두 곳은 위치도 가깝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크즐쿨레를 지은 목적이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조선소 테르사네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탑 내부에는 대포도 설치했었다고 한다. 시리아의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이 탑은 튼튼하기로도 유명하다. 두꺼운 곳은 벽 두께가 무려 12.5m나 된다. 어지간한 대포 정도로는 눈도 깜짝 안하게 생겼다. 단단하게 짓기 위해서 시멘트 반죽을 할 때 달걀을 섞었다는 말도 있다. 건축에는 문외한인지라 달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먹을 것 안 먹고 탑을 짓는데 썼다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겠다. 또 중간 기둥은 신전에서 뜯어다 썼다고 한다. 기둥이 탑보다 훨씬 오래된 셈이다. 1951년에 수리를 하면서 크즐쿨레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붉은 탑이란 뜻이다. 석양 무렵이면 탑 전체가 붉은 보석덩어리처럼 빛난다. 장관이다

.

크즐쿨레 내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각종 사진과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탑으로 올라가는데 계단이 얼마나 좁고 가파른지 금세 등에 땀이 밴다
. 이 건물은 현재 민속 박물관으로 쓰고 있지만 그렇게 특별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각종 사진과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셀주크 튀르크제국의 인장도 눈에 띄는데 독수리 머리가 둘, 즉 양두독수리다. 하나는 소아시아를 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두 곳을 점령하면 세상 모두를 점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비잔티움제국 역시 양두 독수리를 인장으로 삼았다. 2층에는 산꼭대기에 있는 알란야 성채와 통하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비상시에는 이 길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맨 위층 한 가운데는 물탱크가 있다. 비상시에 대비해서 빗물을 받아서 보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장기간 농성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탑의 맨 꼭대기에서 보는 풍경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알란야 성채에서 절경에 취했던 끝이라 감동은 좀 무디다. 이번엔 조선소인 테르사네로 간다. 크즐쿨레에서 내려와 서쪽 성벽 끝 쪽을 보면 다섯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게 바로 테르사네다. 폐쇄된 상태로 있던 이 조선소가 수리를 거쳐 일반인에게 공개된 건 올 528일부터였다고 한다. 믿음 씨도 처음 가본다고 기대에 찬 표정이다.

크즐쿨레에서 내려다 본 알란야 언덕의 주택가.

동굴처럼 보이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조선소 테르사네다.

테르사네의 도크와 도크 사이.


세계 最古의 조선소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세계 최고(最古)의 조선소를 볼 수 있으니 나 역시 운이 좋은 편이다. 생각해 보면 독특한 의미를 지닌 조선소인 건 분명하다. 셀주크든 오스만이든 튀르크라는 이름이 붙은 민족이야 말로 근본이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이들 아닌가. 호수 정도에 배를 띄워봤을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전선을 타고 전쟁을 한다는 걸 꿈이나 꿔봤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만든 조선소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튀르크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조선술과 해전을 배웠다고 한다. 그렇게 확보한 배나 해전술로 그리스를 지배했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기는 하지만. 그런 역사를 거치다 보니, 두 나라는 지금도 원수나 다름없다. 아무튼 오스만 튀르크가 해양까지 장악하는 기초가 된 조선소가 바로 이 테르사네다. 키프로스를 정복하러 갔을 때도 바로 이곳에서 만든 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소로 가는 길 옆에는 올리브 열매가 소담지게 달려 있다. 오렌지 나무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고 풍성하게 자란 아주까리도 자주 눈에 띈다. , 아주까리.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것인데. 조선소는 다섯 개의 도크가 있다. 맨 첫 번째 도크에는 목제 기중기가 전시돼 있다. 세월의 때가 덜 묻어 있어 아직은 도크와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한다. 다음 도크에는 건조 중인 목선이 전시돼 있다. 이것 역시 최근에 만든 것이다. 여기서 건조된 배는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만조가 되면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테르사네 도크에서 바라본 지중해.

배를 만들 때 쓰던 기중기.

배의 골조.

조선소에서 나오니 날이 저물어가고 있다
. 일행과 합류한 뒤 호텔로 돌아간다. 이제 알랸야에서, 아니 지중해에서의 공식일정은 끝났다. 나는 내일 새벽 이스탄불로 떠나야 한다. 저녁을 마치고 일찌감치 다큐팀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들은 저녁 촬영 일정이 있어서 나가야하고 나는 일찌감치 쉬어야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이 같으니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공항이나 인천공항에서 잠시 만나기는 하겠지만 제대로 인사를 나눌 틈은 없을 것 같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서로 다른 일을 했지만 편치 않은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동지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어지간하면 알란야의 밤 문화도 함께 둘러보고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알란야는 지중해의 휴양지 중에 밤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차피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을 어쩌랴. 그것보다는 새벽에 안탈리아까지 가는 게 더 걱정이다. 알란야는 공항이 없기 때문에 다시 안탈리아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야한다. 아침 650분 비행기니까 새벽에 출발해야하는데 그 시간에는 버스가 안 다닌다. 택시를 타자니 너무 비싸고, 믿음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호텔 측과 얘기한 끝에 싼값에 미니버스를 내어준단다. 하지만 그 싼값이 내겐 거액이다. 그래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짐을 정리하다보니 올 때보다 많이 줄었다. 새로 추가된 거라고는 카쉬의 거리에서 산 가죽신 하나.

알란야의 부두.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안탈리아 외곽.

이스탄불로 가는 길. 바다, 산맥, 그리고 도시들이 교대로 나타난다.

지중해와 작별하다

일찌감치 누워보지만 이 생각 저 생각이 거미줄처럼 얽혀 잠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집을 떠나온 지 몇 년은 된 기분이다. 그렇게 뒤척이다가 깜박 잠에 들었나 했는데 알람이 울린다. 새벽 3. 부지런히 샤워하고 옷 입고 호텔 문을 나서니 작은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 혼자 버스를 전세 내보기는 처음이다. 출발하려는데 믿음 씨가 눈을 비비며 로비로 내려온다. 운전사와 내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안탈리아 공항까지 잘 태워다주라고 부탁하러 나온 것이다. 고마운 친구. 서울에 오면 내가 쏘가리 매운탕 곱빼기로 쏠게.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자 버스는 온통 캄캄한 새벽길을 달려간다. 안탈리아 공항에 도착해 보니 제법 시간 여유가 있다. 안도감 때문인지 그제야 미뤄뒀던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까딱 잘못 졸았다가 비행기 놓칠라. 캐리어를 인천공항까지 보내고 일찌감치 수속을 밟는다. 650분 이스탄불행 비행기 이륙. 지중해여, 안녕.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아나톨리아 땅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떠도는 영혼들, 그리고 바다, 나무, 바람 한 자락에게까지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내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안탈리아에서 이스탄불까지는 한 시간 남짓. 올 때도 그랬지만, 비행기가 비교적 낮게 날아가기 때문에 산과 바다와 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드디어 이스탄불에 도착.

낮은 집들도 보이고.

잠시 뒤, 눈에 익은 지형이 들어온다. ? 벌써 이스탄불이네. 보스포루스 해협이 저만치 보인다. 754분 아타튀르크 공항 착륙. 하늘은 시리도록 맑다. 기온은 지중해보다 제법 낮아서 비교적 청량하다. 이제부터 혼자 이스탄불을 탐험해야 한다. 저녁 이맘때까지는 공항으로 돌아와야 하니 주어진 시간은 열두 시간. 한정된 시간의 외출을 허락 받은 무기수가 이런 심정일까? 낯설고 설레는 것 투성이다. 출발선에 선 스프린터처럼 온 몸의 근육에 긴장을 불어넣고 눈을 부릅뜬다. 지금부터는 버스를 태워줄 사람도 없고 길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다. 조금 무식하고(솔직히 말하면 엄청나게 무식하고 전혀 준비가 안 된)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배낭여행자일 뿐이다. 이거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아무튼 힘차게 출발!! 공항서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구시가지의 술탄아흐메트(Sultanahmet)까지는 전철(metro)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트램으로 갈아타야 한다. 전철을 타러 가는 길도 만만찮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 물어물어 역에 도착한다. 어라? 여기는 아직도 토큰을 쓰네. 눈치를 보자 하니 우리처럼 전자식이 아니라 플라스틱 코인 같은 것을 넣고 전철을 탄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걸 제톤(Jeton)이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이건 웬 돌발 상황? 서울에서 표를 끊어서 전철을 탈 때처럼, 넣은 코인이 나와야 나갈 때 쓸 텐데 감감 무소식이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에 역무원이 있다. 객지에서 오촌당숙이라도 만난 듯 반갑게 부른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 메트로를 타러 가는 길이다.

이스탄불에서 '어리버리'


어이~ 역무원 아저씨. 얘가 내 코인 삼키고 안 내놓는데? 헌데 이 친구 반응이 또 엉뚱하다. 가까이 와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질문은 못 들은 척하고 카메라를 얼마에 샀느냐고 자꾸 묻는다. , 인간아!! 묻는 것에 대답부터 해야지. 이젠 카메라 얼마냐 소리 아주 지겹다. 한참 뒤 설명을 듣고 보니 코인을 넣고 그냥 가면 되는 것이란다. 그럼 나갈 땐? 그냥 나가면 된단다. 하지만 이미 코인으로 인한 불행이 잉태됐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탄 전철,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구조 자체가 시쳇말로 대략 난감이다. 폭이 좁디좁아서 앞에 사람과 겸상 받듯 가까이 앉아야 한다. 잘하면 얼굴 맞닿겠다. 다행히 내 앞에는 예쁜 여자가 앉아있다. 물론 딱 거기까지만 다행이다. 그녀 옆에는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있다. 이들 역시 외국에서 온 여행객인 것 같다. 두 정거장을 간 뒤 내리더니 이번엔 아가씨가 탄다. 이번에야 말로. 어라? 이 아가씨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이게 웬 ㄸ…. 그런데 가만히 보니 눈의 초점이 내게서 약간 비껴나 있다. 그럼 그렇지. 내 옆에 그녀의 남자친구가 서 있다. ! 열차는 지상과 지하를 교대로 달린다. 내가 내려야하는 역은 가만, 가만, 굉장히 어려운 역인데? 맞다. 제이틴부르누(Zeytinburnu). 이 역에서 트램으로 갈아타고 구시가지까지 가야한다. 전철역과 트램이 붙어 있기 때문에 종점인 악사라이 역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것보다는 편리하단다.

메트로 정거장 풍경.

트램을 타고 가는 길.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다행히 하늘이 어여삐 여기고 순국영령이 보우하사 제이틴부르누 역을 안 놓치고 제대로 내렸다. 트램으로 갈아타기 위해 사람들을 졸래졸래 따라가는데, 또 한 번 문제가 터졌다. 모두가 거기서 다시 코인을 넣고 트램 쪽으로 넘어간다. ? 난 코인이 없는데? 아까 안받아왔단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코인을 갖고 있지? 그 역무원이 날 속인 거야?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없고 트램은 코앞에 서 있는데 게까지 갈 방법이 없다.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이번에도 착하게 산 덕분인지 역무원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 역무원 아저씨, 이차 저차 해서 코인을 못 받아왔는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면 좋겠수? 손짓에 발짓까지 섞어서 물어보니,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갈아타려면 제톤을 두 개 사야한단다. 전철과 트램의 코인이 각각 필요하다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당연한 얘기네. 알아들었으면 저쪽 가서 제톤을 다시 사오란다. , 무슨 국제 관광도시가 이래. 어디다 좀 써놓든가. 역무원에게 물어볼 때 카메라만 신경 쓰지 말고 그런 것도 알려주든가. 괜스레 등에 땀이 흐른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떠난 내 스스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책에 다 쓰여 있는 것을. 이스탄불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교통카드를 사는 것이다. 악빌(Akbil)이라고 부르는데 역 같은 곳에서 판다. 이거 하나면 버스, 지하철, 트램, 페리 등 뭐든지 만사 오케이라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한 개로 여러 명이 쓸 수도 있고 다 쓰면 충전할 수도 있다.

저 멀리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보인다.

저만치 블루모스크가


다 쓰고 난 악빌은 출국하기 전에 가까운 판매점에 반납하면 보증금도 돌려준다. 깨달은 진리 하나. ‘무식하면 용감하고, 용감하면 고생한다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트램으로 갈아탔다. 이제 구시가지의 술탄아흐메트역에서 내리는 것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좀 마음이 놓이니 별 쓸데없는 게 궁금해진다. 출근시간인데 왜 이렇게 트램이 한가하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떠오른 생각. 그래, 오늘 일요일이잖아. 왠지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많더라니. 요일이야 어떻든 나는 지금 로마 땅을 달리고 있다. 사는 사람들은 바뀌었지만 이곳은 1000년 넘게 로마의 수도였던 곳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대륙이 걸쳐 있는 도시이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터키 최대 도시다. 동양과 서양 문화, 고대와 현대, 기독교와 이슬람이곳에서는 무엇이든 만나고 융합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공화국의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갔지만 이스탄불은 여전히 이 나라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보노라니 가슴이 벅차게 뛰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에 유적들도 보인다. 내가 드디어 이스탄불 한 가운데에 발을 디뎠구나. 트램이 서고 드디어 술탄마흐메트 정류장에 나를 내려놓는다. 저만치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어서 오라고,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 손짓한다. 야호!! 나는 지금 이스탄불로 걸어들어간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알란야의 호텔에서 내려다본 바다 풍경.

알란야에서 묵었던 호텔.

드디어 10월을 맞이하다

아폴론신전의 야경에 흠뻑 취한 채 시데를 출발한 시간이 720. 이대로 숙소로 들어가 씻고 누우면 얼마나 좋을까만 지금부터 알란야(Alanya)로 가야한다. 그곳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버스가 안탈리아 시내를 벗어나니 오로지 캄캄한 세상.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머릿속으로만 그려볼 뿐이다. 그래, 때로는 상상 속의 풍경이 더욱 아름다울 때도 있는 법. 알란야는 안탈리아에서 동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져 있다. 도착했을 땐 이미 이슥한 밤이다. 이러다 저녁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는지 원. 설마 굶기기야 하겠나. 알란야 시내에 도착해서도 버스는 골목골목을 누비더니 해변 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색이다. 창밖 가로등 아래, 빵을 사들고 절룩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여인의 실루엣과 조우한다. 여기도 생로병사, 부와 가난,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곳. 낯선 도시에 대한 이질감이 반으로 줄어든다. 호텔에 도착하니 늦은 밤인데도 뷔페식 식사가 마련돼 있다. 다른 손님들이 없는 것을 보니 따로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미리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허겁지겁 식사를 하다가 창밖을 보니, ! 그곳엔 또 특별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호텔 아래 도로 건너가 바로 바다인 듯, 정박한 배들과 길게 이어진 방파제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무슨 조명을 쓰기에 저런 황금도시를 만들었을까. 식사를 하다말고 굳이 창문에 카메라를 대고 풍경을 찍는다. 좀 흔들리면 어때. 부랴부랴 밥을 먹고 나니 씻고 잠자기도 바쁘다.

딤 동굴로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알란야 전경.

딤 동굴의 종유석들.

아침에 일어나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101일 토요일이라고 가르쳐 준다. 드디어 달이 넘어갔구나. 10월이란 단어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 쯤 내가 사는 땅에는 가을이 물씬 익어갈 텐데. 내겐 오늘이 지중해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다큐팀은 내일을 쉬는 날로 잡았지만, 나는 그들과 헤어져 이스탄불로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올 곳이지만 터키까지 와서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 이스탄불을 그냥 스쳐 지나간다는 건 예의가 아니다. 외로운 길이겠지만 어차피 여행이란 외로움을 담보로 내놓고 신천지를 보는 것. 떠나는 건 떠나는 것이고 알란야도 충분히 탐색해볼 일이다. 아침식사 후 맨 먼저 길을 잡은 건 딤(Dim) 동굴. 종유석과 석순이 장관이라고 한다. 가는 길에 현대자동차 매장을 만난다. 괜스레 뿌듯하다. 여기서는 현대를 휸다이로 읽는단다. 그럼 삼성은? 삼숭이란다. 그렇게 읽힐 줄 알았으면 애당초 이름을 좀 더 쉽고 글로벌하게 지었을 텐데. 창업주들이 옛날 기업을 일으킬 때, 이렇게 세상을 누비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딤 동굴은 산 중턱에 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비치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진을 쳤다. , 이 사람들아. 이젠 10월이라고 10. 내 조국에서는 서리가 내릴 판인데 어쩌려고 홀딱 벗고 물로 뛰어들어. 하긴, 자신들이 좋다는데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딤 동굴은 버스로 한참 올라간 뒤 다시 조금 걸어가야 한다. 해발 240m라니 그리 높지는 않다.

온갖 형상의 석순과 종유석.

딤 강 유원지.

400가지의 메뉴에 질리다

산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당연히 솔방울도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어릴 적 땔감을 찾아 솔방울을 주우러 다니던 생각이 난다. 저 정도면 밥 한 끼는 거뜬히 할 텐데. 이 촌놈 냄새는 언제나 내 몸을 빠져나가려는지. 아마 운명처럼 끌어안고 죽을 것이다. 동굴은 우리의 석회동굴과 그리 다르지 않다. 조금 더 아기자기 하달까. 종유석과 석순들이 재주껏 삼라만상을 만들었다. 부처도 있고 해파리도 있고, 어느 건 폭포처럼 우르르 소리 내며 흘러내릴 것 같고. 형성된 지 100만년 정도로 추산된다는 이 동굴은 길이가 총 360m. 터키에서 손꼽히는 것은 물론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동굴이란다. 맨 앞에서 열심히 가다보니 작은 못이 나오고 거기가 끝이다. 곳곳에서 파닥 파닥 머리 위를 나는 박쥐 떼를 만난다. 너희들의 영역에 이방인이 침입한 셈이구나. 주는 것 없이 단잠을 깨워서 미안하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 나와, 길가 매점에서 차이를 한 잔 마시며 일행이 오기를 기다린다. 다음 목적지는 딤 강(). 딤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러고 보면 딤이라는 게 이 지역의 이름인 모양이다. 특별히 찾아간다기에 대단한 강인가 했더니 폭이 개천 수준이다. 대신 수량은 제법 많다. 여길 왜? 궁금했는데 다큐팀의 일정에 포함됐단다. 우리의 유원지와 비슷한 곳이다. 한탄간 유원지, 송추 유원지그런 식. , 강물을 끼고 장사를 하는 곳인데 우리의 유원지보다 훨씬 잘 만들어놓았다.

강 위에 설치된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나무판자로 강을 덮고 철제 기둥으로 칸을 나눈 다음에 고급스런 등받이 의자를 설치했다. 칸과 칸 사이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이 보이도록 해놓았다. 이 정도 환경이라면 닭백숙에 소주 혹은 파전에 막걸리가 제격인데 이곳 사람들은 주로 차를 마신단다. 싱거운 사람들 같으니. 그런데 차만 파는 것은 아니다. 다큐팀이 작업을 하는 동안 한쪽에 앉아 슬그머니 메뉴판을 열어봤더니. 이런. 대체 이 메뉴가 다. 마시는 것만 해도 soft drink’s, local drink’s, shot drink’s, wine, import drink’s, cocktail’s. 읽다가 숨이 넘어갈 정도다. 여기에 식사(또는 안주가 될 만한 것들)가 수백 가지. 눈대중으로 세어보니(아니 할 일이 없어서 열심히 세어봤더니) 400가지가 넘는다. , 이곳 주방장은 천수관음이냐? 비슷비슷한 재료를 가지고 조금씩 변형시키니 견디는 거겠지? 예를 들면 설렁탕 한 솥 끓여놓고 육개장 시키면 고춧가루 좀 타서 내보내는. 딤 강을 떠나 향한 곳은 유명한 알란야 성채. 그 전에 알란야 성이 왜 유명한지. 알란야가 대체 어떤 곳인지 공부를 안 하고 갈 수는 없다. 중부 지중해에 위치해 있는 알란야는 인구 12만 명의 작지 않은 도시다. 이곳을 중심으로 서쪽은 팜필리아, 동쪽은 킬리키아((Kilikia)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코라케시온이라 했는데, 기원전에는 동지중해를 누비던 해적들의 소굴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알란야 성채

알란야 성채.

알란야 성채에서

2세기경의 해적 두목 다아도토스 트리폰이란 자는 왕권까지 넘볼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긴 도둑이건 해적이건 나라를 세우면 왕인 게지. 한고조 유방이나 명태조 주원장의 근본이 왕후장상의 피였더냐. 으음, 이런 소리 함부로 하다가 사회 불만 세력으로 찍힐라. 암튼 그렇게 대단했던 해적도 로마인들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세력이 약해지게 된다. 이곳은 십자군전쟁과도 인연이 있다. 3차 원정 때에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리페가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13세기 이곳을 점령한 셀주크 튀르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가 자신의 이름을 따 알라니예(Alaniyye)로 부른 것이 오늘날 알란야의 어원이 됐다. 셀주크의 술탄들은 겨울이면 이곳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겨울 수도 역할도 했다. 1471년에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로 편입됐다. 알란야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알란야 성채는 BC 67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소탕하고 쌓은 것이라는데 1226년에 조금 전 등장했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가 대대적으로 증축했다고 한다. , 지금의 성채는 대부분 셀주크 튀르크 때 쌓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성채까지는 제법 높은데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걸어가는 게 만만치 않다. 하지만 시간이 넉넉한 여행객이라면 천천히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올라가는 길 곳곳에 유적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다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을 권한다. 40~1시간 정도 걸린다.

여기서부터 환상의 풍경이 연출된다.

교회도 자미도 세월에 닳고 무너지고.

나도 혼자라면 당연히 걸어갔겠지만 일행과 함께 움직이려니 버스를 타는 수밖에. 주차장에서 내려다보니 알란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탄성이 저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지역을 다니다 보면 평생 사용한 감탄사보다 더 많은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믿음 씨 말에 의하면 터키야말로 유럽에서 가장 싸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라고 한다. 자신의 나라를 자랑하려고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다. 또 지중해의 여행지는 유럽 각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다르단다. 예를 들면 안탈리아는 러시아인, 보드롬은 영국인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이곳 알란야는? 독일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한다. 다른 곳에 비해 비용이 비교적 싸게 먹히고 덜 복잡하기 때문이라나. 그런데 상당수의 관광객은 투어보다는 진짜 휴식을 위해 휴양지를 찾는단다. 유적을 순례하기보다는 호텔을 정해놓고 그곳에서 축구도 하고 쇼핑을 즐기고 저녁에는 쇼를 보고. 골프를 치러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여름은 덥기 때문에 10월말에서 5월까지가 본격시즌이다. 안탈리아 인근만 해도 20여개의 골프장이 있는데 그린피는 한국보다 비싼 편이란다. 티켓을 끊고 입장해서 본격적으로 성채 탐색에 나선다. 성 안쪽에는 긴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특히 이 지역을 차례차례 차지했던 세력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와,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제국 초기의 자미.

성벽에는 철망을 씌워놓았다.

돌틈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또 지고...

폭탄테러 소식을 듣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넓은 정원을 만나게 된다. 전쟁을 전제로 만든 성이지만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기운만 가득하다.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커다란 물 저장고(사르느즈)가 눈에 들어온다. 저장고는 성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하긴 싸움을 하든 족구나 하며 놀든 물만큼 중요한 게 있으랴. 골조만 남아 조금은 흉물스러워 보이는 비잔티움 교회를 지난다. 내 삶을 지키거나 상대방의 죽음을 전제로 한 성채와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교회. 극단적인 이질감 속에서도 또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느낀다. 병사들은 포화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 보면 전쟁과 평화는 애당초 남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처럼 나란히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류의 역사를 직조해온 것일지도. 도저히 틈이 없을 것 같은 메마른 성벽에도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냈다. 꽃 한 송이를 통해, 난 지금 평화로운 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안도를 얻는다. 얼마 안 가 성벽의 끄트머리에 도달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니 정말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 나타난다. 이곳야말로 아름답다는 말이 얼마나 옹색한지 실감나게 해준다. 그동안 내지른 감탄사들이 조금 아깝다. 저만치가 바로 클레오파트라 해변이라지? 클레오파트라는 저 아름다운 해변에서 무엇을 했을까. 시퍼렇다 못해 시커먼 바다. 누가 잉크를 저리 엎질러 놨길래. 막혔던 가슴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곳이 클레오파트라 해변이라지. 숨이 턱 막히더니 가슴이 뻥 뚫렸다.

성채에서 바라본 알란야 시내.

성채에서 내려오는 길, 예쁘게 가지를 펼친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들인다. 달력이 한 장 넘어간 턱을 하느라 그런지 더위가 조금 주춤한 것 같다. 어디선가 철없는 닭이 구성지게 울어댄다. 다행히 꼬끼월월(무슨 소린지 잘 모르는 분은 5회를 읽어보시길)은 아니고 그냥 꼬끼오다. 그런데 이게 웬 환청. 닭 울음이 느닷없이 병사의 외침으로 바뀐다. “적이 쳐들어온다, 적이 쳐들어온다. 세시 방향, 세시 방향으로 대포를.” 에구, 이제 별 소리가 다 들리는구나. 얼른 내려가야겠다. 내려오는 길에 가로수에 늘어져 있는 능소화가 눈길을 잡는다. 10월의 능소화라. 여긴 뭐든지 철이 없구나. 내려오는데 코디네이터 엄상욱 씨가 어제 우리가 있던 안탈리아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고 전해준다.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별 일 없느냐고 친구가 연락을 해왔단다. 그런데 터키인인 믿음 씨는 그 사실을 아예 모른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몇 가운데 연락을 해보더니 확인이 안 된단다. 하긴 이 동네에서 쿠르드족의 테러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외신에서나 다루는 뉴스란다. 지진과 쿠르드족은 터키의 풀리지 않는 숙제다. 쿠르드족은 아나톨리아 동부에 분포돼 있는데, 산악지대의 주민은 반()유목민이며 평야지대에서는 농경으로 삶을 꾸린다. 16세 초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점령당했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뒤 거주지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분할되면서 3000만 명이 터키와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흩어져 살게 됐다.

저 푸른 바다를 지나는 배도 파랗게 물들 것 같다.

풍덩 뛰어들고 싶은 심정들일까?

떠돌이 개의 천국 터키

그중에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는 터키로 1200만 명에서 1500만 명 정도를 헤아린다. 1970년대 들어 터키의 쿠르드노동자당(PKK), 이라크의 쿠르드애국동맹(PUK)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으로 각국에 내전이 발발, 10년간 4만 명 이상이 죽고 25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터키 남동부에 대한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는 PKK는 지난 1984년 이후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에 본거지를 두고 터키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어제 안탈리아의 폭탄테러도 그런 무장 투쟁의 일환으로 일으킨 것이다. 테러를 할 때는 외국인들이 없는 군사지역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지만 그래도 어찌 아나, 폭탄에 눈이 없으니. 은근히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오늘 메뉴는 햄버거란다. 원래 즐기는 음식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 보조를 맞출 수밖에. 찾아간 곳은 익숙한 간판 버거킹. 전에 먹어본 기억이 있길래 베이컨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아차! 여긴 이슬람국가지. 돼지고기가 있을 턱이 있나. 그럼 치킨!! 닭 안 먹는단 얘긴 없더라. 가게 앞 큰 길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햄버거를 베어 무는데 덩치 큰 검정개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슬그머니 길 가운데 눕는다. 길 양쪽으로 테이블을 놓았고 그나마 터놓은 길이 거긴데 개가 누워버렸으니 오가는 사람에게는 난감한 일이다. 그래도 다들 건드리지 않고 슬그머니 피해서 간다.

길을 턱하니 막고 있는 떠돌이 개. 음식도 골라먹는다.

 

배가 고픈가 싶어서 햄버거 조각을 줬더니, “네 정성이 갸륵해 먹어준다는 듯 심하게 게으른 동작으로 다가와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는다. 세상의 양반 개는 여기 다 모였나. 그리고는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더니 참선에 들어간다. 이왕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터키는 집 없는 동물(반드시 유기동물은 아니다)의 천국이다. 특히 개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오가며 산다. 복잡한 거리에서도 아무데나 턱, 하고 누우면 그 영역이 절대 보장된다. 보드롬 오래된 빵집 앞의 그 좁은 길에서도 다리를 꼬고 앉아 행인들을 품평하는 개를 보았고, 알란야 성채에서도 송아지만한 개가 저 멀리 클레오파트라 해변을 바라보며 견생무상(犬生無常)’을 참구(參究)하는 것을 보았다. 어디가나 마찬가지다. ’늘어진 개 팔자라는 말이 이 나라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의 떠돌이 개들이 비루해 보이는 것과 달리 하나같이 깔끔하고 영양상태도 좋다. 먹는 건 이 사람 저 사람이 챙겨주니 별 걱정 안 해도 되고, 건강관리는 관공서에서 해준단다. 귀에 관리를 위한 인식표가 달려 있다나. 동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 천국처럼 느껴진다. 대한민국의 떠돌이 개들이여. 편도 비행기 값만 벌면 터키로 가시라. 그곳에 그대들의 파라다이스가 있나니. 눈치 보며 쓰레기통이나 뒤져야 하는 이 나라는 깨끗이 잊으시라. 그나저나 개 얘기 하다가 날 새겠다. 햄버거 하나 먹었으니 힘내고, 또 배낭 메고 일어서야지.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prev 1 2 3 4 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