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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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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들'에 해당되는 글 165

  1. 2007.04.25 [사라져가는 것들 5] 대장간2
  2. 2007.04.19 [사라져가는 것들 4] 염전9
  3. 2007.04.12 [사라져가는 것들3] 보리밭2
  4. 2007.04.09 [사라져가는 것들2] 장독대3
  5. 2007.04.05 [사라져가는 것들1] 돌담4
2007. 4. 25. 19:01 사라져가는 것들

화덕 있던 자린엔 잡초만 무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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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살던 마을의 조씨네 대장간은, 거북고개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장장이 조씨의 집이자 일터인 대장간은 누가 파먹고 버린 게딱지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눈 밝지 못한 외지사람은 못 알아보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움막 같은 대장간도 막상 들여다보면 필요한 건 모두 갖추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웃통을 벗어붙인 조씨가 땅땅거리며 쇠를 아우르거나 치익치익 소리를 내며 담금질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담배 한 대를 물고 먼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는 조씨의 모습도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씨익~ 한번 웃어주는 게 조씨의 인사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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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홀아비였다. 원래 홀아비였던 것은 아니고, 그의 아내가 어느 날 새벽 갓난아이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 뒤 홀아비가 되었다. 어른들이 수군수군 한 이야기를 주워 모아 엮어보면 그랬다. 어른들은 조씨가 좀 모자라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는 꽤 오랫동안 '모자라다'는 말이 '착하다'는 말과 같은 줄 알았다. 대장장이 조씨가 젖동냥으로 키운, 아내가 떨구고 간 혈육은 커서 그의 조수가 되었다. 조씨의 '훌륭한 조수' 만복이는 아이와 동갑이었다. 만복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대장장이 아버지로부터 풀무질 하는 법이나 쇠 잡는 법을 배웠다.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풀무를 돌리는 만복이가 마냥 부러웠다. 하지만 누룽지 따위를 주고 역할을 바꿀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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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대장간에 들렀다. 어린 아이가 대장간에 볼 일이 있을 턱은 없었다. 대장간 앞에 멀찌감치 쪼그리고 앉아서 조씨가 일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아이 눈 속에 들어온 조씨는 마술사가 되었다. 뭉뚱그려지고 닳고 못 쓸 것 같았던 낫이나 괭이나 도끼, 보습이 그의 손을 한번 거치면 날이 씽씽하게 선 새것이 되었다. 아이는 그 과정이 좋았다. 쓸모 없을 것 같았던 쇳덩이가 괭이가 되고 칼이 되는 과정을 보는 건 산수문제를 풀고 국어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파란 불꽃 속에 몸을 담그고 나온 쇠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쇳덩이를 앞에 두고 옷을 벗어 던질 때마다 조씨의 어깨와 팔뚝의 근육들이 아우성치며 일어섰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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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쇠를 집게로 꺼내어 모루 위에 얹어놓고 쇠메를 내리치며 모양을 만들어 나갈 땐 오줌이라도 질금질금 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끝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조씨의 작업은 단조롭게 반복되었다. 쇠메질을 어느 정도 하면 물에 담그고, 그것이 식으면 다시 화덕에 넣어 풀무를 돌리고, 그렇게 달궈진 다른 쇠를 꺼내어 쇠메질을 하고….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원하는 모양이 갖추어지면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우고 자루를 끼우면 낫이나 도끼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쇠를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하는 과정 속의 조씨는 마치 신내린 무당 같았다. 아무 잡념도 번뇌도 없는, 무아지경 속에 있는 이처럼 거룩한 얼굴이었다.

아이는 커서 조씨를 떠올릴 때마다, 그는 어쩌면 쇠를 두드린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살아도 살아도 헛헛하기만  한, 가슴속의 바람구멍 같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그렇게 두드려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이가 성인이 되어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 고향을 찾았을 때 대장간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움막 같던 그의 집과 풀무와 모루, 그리고 조씨와 그의 아들 만복이가 있던 자리에는 풀만 무성하게 자라 바람결에 고개를 휘휘 내젓고 있었다. 그들이 있었다는 존재 자체를 부인이라도 하듯… 어느 시골마을이나 그렇듯 지나다니는 강아지 한마리 없어 그들의 행방을 물을 길도 없었다. 어른이 된 아이는 하릴없이, 이제 이 나라에서 대장장이를 찾기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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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19. 18:27 사라져가는 것들

염부의 땀, 육각의 결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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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에 살면서 먼 세상을 꿈꾸던 바닷물이, 어느 햇살 좋은 날 한반도 서해안으로 나들이를 나온다. 사리 때를 손꼽아 기다리던 염부는 바닷물을 퍼 올려 넓은 염전에 냉큼 가두어 넣고 나갈 길을 막아버린다. 바닷물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이글이글 불타는 여름의 태양은 바닷물을 뜨겁게 달군다. 바닷물은 서서히 졸아든다. 비명을 질러보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물이 조금씩 줄면서 염도는 점점 높아지고 진득한 소금물이 되었다가 결국은 육각의 하얀 결정체가 태어난다. 소금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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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을 만드는 과정에서 흘리는 염부들의 땀은 갓 만들어진 소금만치나 짜디짜다.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증발시키고 소금을 거두고 창고에 쌓기까지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온몸을 뜨거운 태양아래 고스란히 내맡겨야한다. 염부의 야윈 몸이 까맣게 탈수록, 더욱 하얗고 맛좋은 소금이 태어나는 것이다. 더구나 소금을 만드는 과정이 매번 순서대로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뜬금없이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염부들은 마음까지 까맣게 탄다.

소금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가난했던 시절, 촌부들의 소원 중 하나는 소금을 온전한 포대로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다. 소원으로 말하면 어찌 소금뿐이었을까. 겨울나기에 지장 없을 만큼의 양식, 어린 자식들 춥지 않게 할 만큼의 땔감…. 소금은 그 자체로도 음식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1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간장과 된장 및 김장을 담그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소금에서 나온 간수는 두부를 만드는데도 없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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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소금도 무조건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땐 약이 되고, 어느 땐 독이 되기도 한다. 소금의 주성분인 나트륨은 혈액과 체액의 양을 적절히 유지하게 하고 산과 알칼리의 균형을 지켜준다. 또 세포에 영양분이 흡수되는 것을 돕고 신경계의 신경전달신호와 근육이 수축할 때 절대 필요한 성분이다. 소금을 너무 적게 섭취하면 신진대사가 마비되고 혈압이 떨어져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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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하게되면 고혈압으로 인한 혈관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또 암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위 속에서 소금농도가 높아지면 위를 보호하는 점막이 파괴되어 위가 헐고 염증이 생기게 되어 암으로 진전될 수 있는 위축성변화가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골다공증과 요로결석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이런 경우는 그 좋은 소금이 독이 되는 것이다. 과해서 좋을 것은 없다는 진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그 많던 염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요즘은 바다에 가도 염전을 구경하기 쉽지 않다. 우리 주변에 있던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세월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가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중국산 싼 소금에 뒷덜미를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남은 염전들도 어느 곳은 생태공원으로 어느 곳은 광광코스의 하나로 변해가고 있다. 하긴 그렇게라도 남아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고마워 해야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바닷물이 하얀 소금이 되는 그 경이로운 과정을 실험실에서나 보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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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12. 19:06 사라져가는 것들

풀수록 신나는 추억의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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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대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박치규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아니, 나타난 정도가 아니라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출입이 찾아졌다. 그는 내가 다니는 읍내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총각 선생님이었다. 내 상식으로 박 선생님이 우리 동네에 출현할 이유는 누에씨만큼도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가정방문이 있을 턱도 없었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내가 모르는 가정방문이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소문은 잘 익은 보리들을 간지럽히며 지나는 바람을 타고 금세 온 동네에 퍼졌다. 선생님이 맞선을 본 여자가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 여자가 다름 아닌 빨간기와집 순자누나라는 소식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담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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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소문은 두어 주일이 지날 무렵 친구 상길이가 전해줬다. 상길이는 그날따라 아주 은밀한 목소리로, 아끼던 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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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도 나눠주듯 그 소식을 전했다. 박 선생님이 우리 동네를 다녀갈 때마다 보리밭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유 없이 밭 한가운데의 보리들이 땅바닥에 눕기도 하고, 사람 한 둘이 누울만한 공터가 생기고…. 그 날 이후에도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골목길을 배회했다. 누군가가 박 선생님과 순자누나가 보리밭에서 같이 나오는 걸 봤다느니, 그 때 순자누나의 옷에 지푸라기가 잔뜩 묻었더라느니…. 그 해 가을, 박 선생님과 우리 동네의 가장 예쁜 처녀 순자누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순자누나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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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에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보리밭은, 언제 풀어도 신나는 일이 툭툭 튀어나오는 추억의 보따리일 것이다. 보리밭은 그 혹독한 겨울의 추위 속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여리고 때로는 흔들리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민초들의 희망처럼. 봄이 되면 잔설을 뚫고 웅성웅성 올라오는 보리들 사이로 달래, 냉이 등 나물이 얼굴을 내민다. 나물 뜯는 보리밭의 누이들은 아름다웠다. 보리가 조금 자라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언덕에 누워 보리밭 사이로 총알처럼 솟아오르는 종달새를 보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뱃가죽이 등에 닿을 무렵이면 잊지 않고 보리는 익어갔다. 아이들은 자나깨나 배가 고팠다. 밀서리 보리서리에 빠진 아이들의 입 주변은 늘 거뭇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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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했다.

지금은 농촌에 가도 보리를 보기가 쉽지 않다. 거의 심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의 수요가 없기도 하지만, 벼를 벤 자리에 보리를 뿌리는 이모작을 할 만큼 그악스럽게 농사를 지을 사람도 없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 그래도 보리밭을 보고싶은 이가 있으면 남도 땅으로 가면 된다. 경남 하동이나 전남 보성, 벌교, 순천 등 넓은 벌을 지나노라면, 지금도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가 손짓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리타작을 할 때는 온 들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다. 보릿짚을 태우는 연기다. 길가에 서서 가만히 보노라면 그 연기 속에 우리들의 추억이 성큼성큼 걸어나온다. 박치규 선생님이나 순자누나, 그리고 나물 뜯던 누이들, 장난꾸러기 상길이가 손을 흔들거나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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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9. 18:58 사라져가는 것들

한 가족이 세워놓은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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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난 뒤, 뒤란 우물 곁 장독대에 놓여진 독들은 더욱 빛이 났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장독대에 가서 살았다. 이른 아침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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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을 머리에 쓰고 밭으로 나가기 전에도, 하루종일 뙤약볕에 시달리고 해거름에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장독대를 먼저 찾았다. 그리고는 티베트 사람들이 마니차(法輪-불경이 새겨진 불구. 안에 경문이 들어 있는데 마니차가 한 번 돌아갈 때마다 경을 한 번 읽은 것이라고 한다)를 돌리듯 독들을 정성스레 닦았다.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너무 경건해 보여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징징거리며 달려들기 힘들었다. 독들은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한숨이 깊고 길어질수록 반짝거리며 빛났다. 지금도 시골마을을 지나다 장독대를 보면 거기 어머니가 서 있는 듯하여, 눈을 자꾸 비비고는 한다.

#2 그런 노래가 있었다.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이 노래가 나오기 전이지만, 태자리를 뒤로하고 고향을 떠날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질구레한 세간을 실은 손바닥만한 트럭에 어머니가 타고 먼저 떠난 뒤 할머니와 나, 동생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린 동생도 그 날은 아무 말 없이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따라 내쳐 걷기만 했다. 우리 가족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명원네 대모가 항아리를 하나 머리에 이고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도 대모의 머리에도 선택받지 못한 독과 항아리들은 버림을 받았다. 대모가 머리에 인 항아리는 할머니, 어머니가 아끼던 것들 중 하나였다. 쏟아진 햇살은 항아리 위에서 연신 자반뒤집기를 했다. 나는 자꾸만 눈을 깜박거렸다. 우리 가족이 남기고 떠난 장독 뒤에 옆집 아이 순이가 숨어서 보고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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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항아리가 닳도록 닦던 어머니나, 항아리를 이고 먼길을 걸어간 어른들 심정의 한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내가 깨달은 장독의 의미는, 한 집안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그 구성원들이 세워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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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이었다. 비록 경제적 곤궁과 뺨을 할퀴어대는 세월의 삭풍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지라도, 유리왕자의 '부러진 단검'처럼, 품고 가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장독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회색 빛 도시에서 장독대를 가진 집도 별로 없거니와, 길 떠난 가장의 안전을 기원하며 장독대를 닦는 아낙 역시 없다. 요즘의 며느리들에게 장독대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이다. 김치는 김치냉장고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하다.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된장과 고추장은 세월이 가도 그 환한 빛을 잃지 않는다. 양조간장은 언제 먹어도 입에 붙을 듯 달다. 그럴 뿐이다. 새삼 슬퍼할 일은 아니다. 세월에 쫓기어 꼬리를 말고 사라진 게 어디 장독대뿐이랴. 하지만 난 매일 궁금하다. 우리가 아울러 잃어버린 정과 사랑은 지금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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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5. 19:12 사라져가는 것들

햇살마저 사랑에 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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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의 첫 구절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읊조리다보면, 눈물 한방을 찔끔 솟고 육신을 벗어난 마음은 어느새 둥실 떠올라 고향으로 내닫는다. 어쩌면 이 비정한 회색도시에서 오늘도 견디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나마 가슴에 지닌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괜히 간지럽고 기쁘고 슬프고 조금은 어지럽고… 조금은 은밀함까지 내포한…. 돌담은 그런 복합적 서정을 품고 있다.

마을마다 어지간하면 앞자락에 내 하나씩을 끼고 있었다. 거기서 건져 올린 아이들 머리 만한 호박돌이 돌담을 쌓는 재료였다. 하긴 산에서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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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내려온 막돌이나 밭에서 캐낸 잡석인들 돌담의 재료로서 모자람이 있으랴. 시골마을 대부분의 집들은 그만그만한 돌담으로 네 집 내 집을 구분했다. 한 집의 담을 따라서 가면 또 다른 집의 돌담이 이어지고 그렇게 어깨를 겯고 달리며 한 동네를 이루고 살았다. 여린 백성들이 사는 동리의 돌담은 솟을대문 우뚝한 대갓집의 담처럼 배타적이지 않았다. 집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라기보다는 그저 최소한의 영역을 구분하는 선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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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집 사이에 쌓은 돌담은 그리 높지 않아 이웃 간에 정을 나누는 곳이었다. 아낙네들은 담을 사이에 두고 낭자한 수다를 아끼지 않았고 쑥 넣고 버무리라도 찐 날이면 식을세라 순자야! 철수야! 불러서 넘겨주고 받고는 했다. 겨울 한낮,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약속하지 않아도 돌담 앞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햇살은 돌담을 사랑했다. 돌담 앞에 머물며 고운 손길로 오래 애무했다. 겨울바람도 돌담 앞에서는 칼날을 거두고 얌전해졌다. 아이들은 그 햇살 아래서 딱지도 치고 구슬치기도 하고 연도 날렸다. 어른들 몰래 킬킬거리며 담배도 한 모금씩 빨아보고 저녁의 닭서리를 모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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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뿐이 아니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도 양지바른 돌담은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터였다. 콧궁기 벌름거리며 곰방대 베어 물면 연기 한 줄기 푸른 꼬리를 남기며 하늘로 올랐다. "내 소싯적에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만주벌판을 달리기도 하고 종로 뒷골목의 주먹패가 되기도 했다. 가끔은 막걸리 내기 윷놀이 한판에 동네가 떠내려가라 흥에 겹기도 했다. 그런 돌담이 어느 순간부터 시멘트 벽돌담으로 바뀌고, 그 시점에 맞춰서 농촌에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담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골목에서 아이들의 힘찬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돌담이 사라진 지금 영랑의 햇발은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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