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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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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13. 08:5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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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통신. 네 글자를 적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가 과연 시인통신을 기록할 자격이 있을까? 고개가 저어진다. 자의적 분류지만, 시인통신은 이사 다닌 장소를 기준으로 4세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세대에 맞는 ‘시통가족’이 있었다. 내 스스로를 그 가족에 편입시키는데 망설여진다. 1세대 때는 학생과 군인, 졸병기자를 오락가락하던 하느라 아예 인연이 없었고 2세대에는 선배 기자들 따라 나무의자에 엉덩이 몇 번 걸쳐본 게 고작. 물론 정을 붙였으면 끝자리쯤 끼어 앉았을 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난 시인통신에 어울릴 만한 술꾼이 아니었다. 물론 아주 인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큰누님’ 한귀남 씨와 신문 전단짜리 인터뷰를 할 만큼 많은 얘기를 나눴으니. 하지만 이미 시인통신이 쇠락의 길을 걷던 3세대 때였다. 어쩌면 한귀남 씨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였을 것이다. 그리고 4세대, 꽤 자주 드나들었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은 거의 무너진 뒤였다. 난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내겐 기록할 만한 재산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쓸 만한 사진도 없다. 하지만 이 시대 사라져가는 것들의 ‘기록꾼’으로서 어떻게든 한 줄 적지 않을 수 없다. 역사책에 쓰여 지지 않을 시인통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고스란히 비춘 거울이고 골목 술꾼들의 고갱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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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통신은 그냥 허름한 술집이다? 선술집처럼 생긴 카페다? 목로주점이다? 술집보다는 문화사랑방이다? 모두 맞는 말 같은데 뭔가 부족하다. 시인통신은 장안의 ‘가난한’ 시인 소설가 화가 기자 노동운동가 연극인 정치지망생… 그보다 좀 나았을지도 모르는 출판인 사업가… 아, 숨이 찰 정도로 많은 그들을 어찌 헤아리랴. 아무튼, 그들이 모여 마시고 싸고 토론하고 떠들고 욕하고 울고 싸운 술집이요 카페요 목로주점이요 문화사랑방이다. 그래도 역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듯 어딘가 미흡하다. 그만큼 시인통신은 정의하기 쉽지 않은, 아니 굳이 정의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는, 춥고 어둡던 시대의 숨은 아이콘이었다. 제1세대 시인통신의 주소는 서울 종로구 청진동 300번지였다. 지금으로 보면 엄청난 규모의 빌딩을 짓기 위해(훗날 무슨무슨 빌딩 자리라 불리겠지) 많은 집들이 쓰러지고 땅이 600년 속살을 드러낸 교보문고 옆 구역이다.(기준으로 삼을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지라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프다.) 아무튼 과거 피맛길이 시작되던 그 언저리다. 그곳에 있던 시절에는 두 평짜리 공간에 탁자가 달랑 두 개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구분하지 않고 엉덩이를 붙이면 여남은 명은 앉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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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크고 작은 게 뭐 그리 문제랴. 그곳에 드나들며 엉덩이를 붙이고 마음을 붙였던 사람들을 보면 만주벌판에 데려다놔도 그리 넓다고 하지 않을 사람들인데. 위에 예를 든 직업군(노동운동가나 정치지망생도 직업이라면) 외에도 평론가 영화감독 사진작가 작곡가 전위예술가 자유기고가 교사 겉멋 든 학생 등이 문지방 닳는 것 걱정 안하고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던 곳이 시인통신이다. 암울한 시대가 만들어낸 게 그곳일지도 모른다. 16년을 집권했던 독재자가 비명에 가더니, 제 어깨에 별을 척척 붙이면서 나타나 군사정권의 ‘찬란한’ 맥을 이은 한 무리의 군인들. ‘서울의 봄’이라는 이름의 김칫국부터 들이키던 정치인들은 입에 문 떡을 미처 삼키기도 전에 갇히거나 연금되거나 멀리 튀거나 땅굴이라도 파야했다. 여름이 와도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추운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의 숨통, 혹은 해방구가 바로 시인통신이었다. 추위를 못 견디던 이들은 그곳에 모여 울분을 토하고 허공에 대고 감자를 먹였다. 누구는 통곡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고, 누구는 담벼락에 오줌으로 욕을 써 갈겼다. 그러고도 못 다한 말들은 술집 벽에 적었다. 빈 공간이 없어질 때까지 낙서를 했다. 그 낙서는 천장까지 가득 채웠는데, 그 중에는 명문이나 명필도 많았다. 그도 그럴 만하지, 시인묵객들 솜씨 어디 갔으려고. 그런 시인통신도 처음부터 술집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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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김화성 기자는 <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라는 글에서 시인통신의 출생을 이렇게 적었다. 
“시인통신은 원래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시인 겸 소설가 조해인, 시인 김선유 이도윤 이생진 이승철 임문혁 최정자, 추리작가 정건섭, 소설가 김우영, 문학통신 이지룡, 화가 김문조 박광호 서영준, 사진작가 김종구, 자유기고가 공정희, 교사 안철상, 문학청년 노광래 박경남, 해냄출판사 송영석, 출판인 이정한, 사업가 김명성, 방송인 김경원 등이 그 멤버였다. 가끔 천상병 시인이나 걸레스님 중광 그리고 소설가 이호철 이외수, 전위예술가 무세중도 얼굴을 비쳤다. 이들은 1982년 종로통에 연락사무소 ‘시통’을 만들어놓고, 틈만 나면 하나둘 모여 세상사는 이야기나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다. 술이 생각나면 서로 주머니를 털어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다 마셨다. 안주는 인근 밥집에서 동그랑땡이나 생선구이 혹은 순대국을 시켜다 먹었다. 낮엔 누구든 커피 한두 잔 알아서 타 마시곤 바구니에 500원씩 넣으면 됐다. 그 돈은 시통 운영비로 썼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주인 역할을 했던 시인 박종수 씨가 그때그때 필요한 비용을 갹출해서 근근이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 달이지, 해가 넘어가자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박 씨는 두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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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시인통신, 인사동 시절의 한귀남 씨

‘결국 박 씨는 두 손을 들었다’는 대목이 나오면서, 드디어 ‘지하 문화계의 대모’ ‘문인들의 영원한 누님’이라 불리는 한귀남(1944년생)씨가 등장한다. 당시 한 씨는 아이가 셋이나 딸린 홀어미였다.
“나도 이런 삶을 살줄은 몰랐어요. 제품(의류사업)에 실패한 뒤 남편이 종적을 감추면서 졸지에 아이들 셋을 거느린 가장이 되었지. 참 막막하더군요. 어디 일할 곳이 없나 싶어서 종로의 먹자골목을 기웃거렸지요.”
네 식구 입에 풀칠할 목적으로 종로 뒷골목을 탐색하던 그녀는 민속찻집에서 차 끓이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시인통신에 우연히 들른 순간, 이미 제2의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탈출을 꿈꾸던 박종수 씨는 한 씨에게 운영을 맡아보라고 꼬드겼다. 고소원(固所願)일지언정 불감청(不敢請)이라고, 사실 그녀는 찬밥 더운밥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떡거린 순간, ‘한귀남의 시인통신’ 시대는 시작됐다. 하지만 장사는 아무나 하나. 그녀의 눈에 비친 시인통신은 아비규환의 세계였다. 총 대신 권력을 잡은 군인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가, 토론에 욕설에 싸우는 것도 마다않던 술꾼 중 일부는 술값 계산만큼은 천재적일만큼 잘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린 게 아니라 낼 수 없는 형편인 경우가 많았다. 오죽했으면 그녀는 수필집 ‘간 큰 남자’에서 그 시절을 “외상은 60년대식이었고 격한 분노는 80년대식이었다.”고 적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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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기자의 기록은 그 시절 한귀남 씨의 형편과 술꾼들의 행태를 그림처럼 전해준다.
“한 씨는 하루 3만~4만원 벌면 그 중 7000원은 옛 주인인 박 씨가 시통을 담보로 빌려 쓴 일숫돈을 갚아야 했다. 거기서 남은 돈 중 1000원으로 쌀을 사다가 먹고 살았다. 굶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고마웠다. 바쁠 땐 자리를 비워도 별 문제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돈을 놓고 가거나, 외상 땐 벽에다가 ‘아무개 맥주 몇 병 먹고 간다’고 써놓고 갔다. 그게 외상 장부인 셈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외상값을 갚고 나선, 그 벽 낙서를 쓱쓱 지워버렸다.(중략) 한 씨가 시통을 맡은 이듬해인 85년부터 손님들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초기 터줏대감들이 하나둘 이런 저런 사정으로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대신 화가 서영준과 시인 김홍성 을 필두로 서라벌예대 출신의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술버릇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당시는 소위 ‘심야영업금지’라고 해서 12시 이후에는 영업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통식구들은 그런 것에 구애받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먹고 떠들고 춤추고 싸우다가 결국 한귀남 씨가 새벽에 종로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다.
(下편에 계속)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전문기자의 <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에서 일부 인용․참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진은 간판을 내리기 직전, 4세대 시인통신의 외관과 내부 모습들입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