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2012. 4. 30. 08:30 사라져가는 것들

 

 

개미마을을 다녀온 건 봄꽃들이 막 기지개를 켜던 4월 첫째 주 토요일이었다.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3호선 홍제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7번을 타고 10분쯤 달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버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창밖의 풍경도 조금씩 채색을 바꾼다. 언제 도심을 지나왔느냐고 시침 떼며 묻듯, 납작하게 엎드린 집들이 강낭콩처럼 박혀 있는 풍경이 이어진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담장그림들. 허름한 집들과 화려한 그림, 어찌 보면 극단적 부조화다. 그런데 묘하기도 하지. 그 부조화가 유난히 마음을 당긴다. 마을 입구쯤에서 내려야하나 종점까지 가야하나 망설이다가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오는 게 편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도 없지 않다. 그동안 개미마을을 몰라서 안 찾아가본 건 아니었다. 이곳이야말로 이름이 제법 알려진 곳 중 하나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린 뒤로 벽화마을로 알려지면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진쟁이들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내가 방문을 자꾸 뒤로 미룬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제 모습을 간직한 달동네가 아니라 이미 반은 관광지화 돼 버린 그런 곳 아닐까 하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또 서울에서 숱하게 많은 곳을 돌아다녀봤지만 제대로 된 달동네를 못 찾은 탓에 거의 포기상태였다는 점도 한몫 했다. 달동네라는 곳을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뷰파인더 안에 멀쩡한 건물이 끼어들거나 아파트촌이 먼저 손을 흔들고 나서기 일쑤였다. 내 사진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천덕꾸러기나 다름없었다.

 

 

해수천식이 골수에 박힌 노인마냥, 골골골 언덕을 올라간 버스가 끄응~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승객들을 내려놓는다. 이 동네에 사는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 두어 분, 그리고 나처럼 카메라를 든 남녀 네댓 명. 동네 사람보다는 구경삼아 오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이곳은 정확히 서대문구 홍제39-81번지다. 등산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눈에 띄는 것으로 봐서는 인왕산 등산로 나들머리 중 하나로 짐작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시선으로 동네를 훑어본다. 순간 내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이 곳에 삶터를 열고 사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완벽한혹은 순정(純正)달동네가 내 시선 속에 있다. 이제 이 정도의 달동네는 서울 어디에서도 보기 쉽지 않다. 전남 순천 드라마세트장 윗동네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의 달동네를 본 적이 있지만, 이미 사람이 떠나고 박제돼 걸린 곳이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저만치 시선의 끝머리쯤에 들어서 있는 아파트들조차 그리 거슬리지는 않는다. 이곳이 달동네임을 강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소품이 서 있는 것 같다. 대비는 또 하나의 조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맨 먼저 화장실에 들른다. 달동네에 와서 화장실을 들른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소변이 급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동네의 상징에 대한 신고식이기도 하다. 과거 달동네에는 오로지 공중화장실이 있을 뿐이었다. 집에 화장실을 둘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이 달동네에서 살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침마다 전쟁이 벌어졌다. 한 손에 휴지를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한번 들어간 사람이 영 함흥차사로 나오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벌집 쑤신 듯 아우성이 일기도 했다. 그뿐인가. ‘내가 먼저 왔네, 새치기를 하네고성까지 심심찮게 오고가고는 했다. 하지만 이 동네의 화장실은 이미 과거의 그림자를 말끔하게 지우고 현대식으로 치장돼 있다. 다행이다. 먹는 것도 그렇지만 배설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얼마나 치사하게 만드는지. 하지만 이렇게 공중화장실이 번듯하게 지어졌다는 건, 아직도 집에 화장실을 두지 못하는 집들이 많다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소변을 보는데 초로의 남자 하나가 들어온다. 밤새 일을 한 뒤 잠깐 눈을 붙이고 나왔거나, 아니면 아직 알코올 기운에서 해방되지 못한 초췌한 모습이다. 일을 볼 생각은 안 하고 소변기 옆에 설치돼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계속 손에 말아 감는다. 저 정도면 열 번은 사용할 분량인데. 하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화장실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동네 탐색을 시작한다. , 먼저 개미마을의 유래나 현황 정도는 알고 가야지. 이 마을이 서대문구 홍제동에 속해 있다는 소개는 이미 했고, 굳이 따져 말하면 홍제동에서 세검정으로 가는 방향이다. 34,000m²의 면적에 216세대 46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09년 기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언덕에 기대어 살고 있는 셈이다.

 

개미마을이 유래는 6·25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폐허 속을 헤매던 사람들이 이 언덕까지 올라와 천막을 치거나 판자를 엮어 바람을 피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다른 달동네들이 생기게 된 사연과 그리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인디언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옹기종기 들어선 천막이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마을 같아서였다나? 누구는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처럼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디언촌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1983년부터는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민들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글쎄 뭔가 좀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사실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동네는 이곳 하나만은 아니다. 송파구 문정동이나 종로구 행촌동에도 그렇게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개미처럼 모여 사는 마을을 일컫던 보통명사 급의 마을이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맨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마을 구조는 간단하다. 한 가운데에 큰길(커봐야 차 두 대 비켜가는 것도 허덕거린다)을 중심으로 집들이 양쪽으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생선가시처럼, 중간 중간에는 작은 골목들이 가지를 치고 있다. 그리고 그 작은 골목의 끝에는 어김없이 가파른 언덕이나 계단이 있다. 어느 계단은 얼마나 길게 뻗어있는지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노인들에게는 나들이 자체가 고역일 것 같다.

 

그러잖아도 가끔 눈에 띄는 주민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다. 직업은 상당수가 일용직’. 국민기초생활수급에 삶을 의지하는 사람도 많다. 겨울이면 무엇보다 난방 대책이 가장 큰 문제다. 언덕바지니 평지보다 훨씬 더 추운데 형편상 연탄을 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눈이 와서 얼어붙으면 연탄을 사다 쓰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마침 길 옆에 연탄재 2개와 빈 상자에 담긴 새 연탄 두 장이 눈에 띈다. 분명 낱개로 사다 쓰는 집이리라. 태우고 버린 연탄재는 담장 옆에도 텃밭 가에도 지천이다. 이곳 사람들이라고 모두 자기 집에서 사는 건 아니다. 전세, 월세로 사는 주민이 절반, 나머지 절반이 이곳에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언덕 끝까지 달음질치듯 올라간 집들은 형태도 다양하다. 제법 번듯에 가까운 기와집도 있고 마지못해 흉내만 낸 집들도 많다. 하지만 대개는 세월의 때가 켜켜이 얹혀 있다. 지붕은 요즘 보기 드문 슬레이트가 많다. 원래 기와였던 지붕도, 비가 새다보니 여기 저기 천막으로 때우는 바람에 아예 천막지붕이 돼버렸다. 손바닥만 한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집도 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많다더니만 전부 일터로 나간 걸까. 오고가는 주민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모처럼 오가는 건 대개 구경삼아 온 사람들이다. 빨랫줄에 줄줄이 걸린 가지각색의 빨래들만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이 마을을 가장 큰 특징은 벽마다 그린 그림이다. 칙칙하고 스산한, 전형적 달동네의 모습이던 이 마을이 환하게 바뀐 건 지난 2009년부터라고 한다. ‘빛 그린 어울림 마을 1라는 작업이 계기가 됐다. 금호건설이 진행했고 서대문구청과 홍제3동 주민센터가 후원했다. 그림을 그린 이들은 건국, 상명, 성균관, 추계예술, 한성대학교의 미술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에 들어와 하나둘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회색빛으로 죽어있던 담장들은 꽃으로 동물로 바다로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 ‘환영’, ‘가족’, ‘자연진화’, ‘영화 같은 인생’, ‘끝 그리고 시작등 다섯 개의 주제를 담은 51가지의 그림들이 마을 곳곳에 입주해 새 식구로 자리를 잡았다. 그림들을 따라가다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혓바닥을 내놓고 눈이 감기도록 웃는 개 앞에서 웃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심장에 철판을 깐 게 틀림없다. 엄마와 아기 돼지, ‘반가워라고 말하는 고양이 앞에서는 걸음이 절로 멈춰진다. 담장뿐 아니다. 가파른 계단에도 빨간 마크가 잘 익은 사과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사랑에 상처 받아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도 계단을 전부 오르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새로운 사랑의 싹이 움을 틔울 것 같다. 대학생들의 그림에 덧칠한 듯한, ‘아무새라는 제목이 붙은 서툰 솜씨의 그림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싶어요. 새로운 세상이 찾아올까요. 그럼 오고 말고그럼 오고 말고, 오고 말고혼자 되뇌며 걸음을 옮긴다.

 

길가에서 만난 수십 개의 화분들은 아직 아무 것도 품지 못했다. 저 화분들의 주인은 누굴까. 작년에는 어떤 꽃들을 피워냈을까? 배추나 상추 같은 푸성귀를 길러 냈을까? 인상이 제법 험악한 얼룩 개와 마주친다. 녀석은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게으르게 잠들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눈만 게슴츠레 뜨고 바라볼 뿐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다. 험한 인상과 달리 눈빛은 순하기 그지없다. 그럼 너도 과대 포장이구나. 녀석이 경계선을 넘은 내게 조용히 경고한다. 당신 같은 사람 한 두 번 보는 거 아니거든? 제발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가. 그래도 나는 무시하고 셔터를 누른다. 이 동네에서는 그쯤은 용서가 된다. 동네의 중간쯤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길을 잡아 올라가니 할머니 한 분이 텃밭을 매고 있다. 일을 나갈 수 없으니 농사에 매달린 모양이다. 밭이라봐야 손바닥만 하지만, 이곳에서 희망도 일구고 가족들의 부식도 가꿔내겠지. 이 동네는 바늘 꽂을 만한 땅도 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여린 손을 내밀고 있는 돌나물 군락에는 제비꽃인지 얼레지인지 작은 꽃들이 봄을 노래하고 있다. 저만치 건너편 언덕에는 밭에서 무언가 태우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봄 농사를 준비하는 농촌마을 같다. 언덕에서 내려오니 작은 가게와 딱 마주친다. 등산객 두 명이 툇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간판도 없이 담장에다가 동래수퍼라고 써놓았다. 동래수퍼라. 혹시 주인이 부산 동래 출신?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누군가가 작은 글씨로 동래아래에 동네라고 써놓았다. , 원래는 동네슈퍼라고 쓰고 싶었구나. 더욱 정겹다.

 

 

 

음료수라도 하나 살까 싶어 안으로 들어가니 70년대 풍경이 펼쳐져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에 들어선 것 같다. 과자 몇 봉지, 세제 조금, 캔 음료 두어 박스, 간장. 그리고 음료나 맥주를 넣은 냉장고. 그게 전부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진열대는 빈칸이 더 많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소주병 두 개. 저런 소주가 어떻게 아직도 남아있는 건지. 큼직한 두꺼비가 그려져 있고, ‘眞露라고 한자로 써 있다. 물론 개봉한 흔적이 전혀 없는 새 병들이다. 여든 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물건은 할아버지가 내주고,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는 앉아서 계산을 한다. 사실 둘이 손을 나눠야할 만큼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해온 듯 자연스럽다. 소주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저런 게 아직도 남아있어요?” 물었더니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을 한다. “작정하고 보관한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아직까지 있네요하지만 분명 어쩌다보니남아있는 건 아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골동품처럼 애지중지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두 노인이 참 곱다. “어쩌면 그렇게 고우세요대답은 없지만 두 분이 수줍게 웃는다. 아무리 살아내도 곱다는 말만큼 좋은 말이 있을까. 가게를 나와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다가 낯선 간판을 하나 발견한다. ‘(가칭) 홍제3동 개미마을 지역주택조합설립 추진위원회’.

 

재개발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가건물 벽에도 그림꽃들이 피어났다. 이곳도 재개발이냐 보존이냐 문화특구 지정이냐를 싸고 논란이 오고 간지 오래다. 재개발을 주장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맞서는 형국이다. 문제는 워낙 가파른 산자락이고 용적률 확보가 안 되기 때문에 그만큼 경제적 가치가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마을을 다녀온 며칠 뒤 서대문 구청에 문의했더니 개발제한구역에서 지구단위계획지로 풀리긴 했지만 재개발 시행 여부에 대해 별 진전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누군들 시간의 덫을 피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이 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든 또 다른 용도로 쓰이든. 주민들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됐으면 좋겠다. 집집마다 관리번호라는 게 붙어 있다. 105, 106, 107. 하나씩 헤아리며 내려오다가 지붕 위에 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고양이들을 만난다. 세상사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뒤로 눕고 옆으로 눕고 엎드리고. 하긴 너희들이 무슨 걱정이 있겠니. 겨울이 온다고 연탄 걱정을 하겠니, 쫓겨나듯이 떠날 걱정을 하겠니. 천천히 걸어 황금색의 봄 햇살이 누추를 감싸는 마을을 벗어난다. 금세 공간이동이라도 한 듯 질주하는 차들과 인파 속에서 비틀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꿈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마을을 돌아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특별한 기억으로 남길 건 없어. 사람이 사는 마을을 다녀왔을 뿐.

posted by sagang
2011. 9. 5. 09:18 사라져가는 것들

먼저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팥빙수를 사라져가는 것들 항목에 넣으면 그게 왜 사라져? 어제도 먹었는데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빙수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구차하지만 옛날 팥빙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계를 손으로 돌려서 대팻밥처럼 깎은 얼음에 팥을 넣었던 그 팥빙수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그날은 설악장날이었습니다.
홍천강으로 가는 길에 물건 몇 가지를 사려고 들른 참이었습니다.
꽤 여러 번 간 곳인데도 오일장과 마주친 건 처음이었습니다.
발길은 천관녀의 집을 찾아가는 김유신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장터로 향했습니다.
이곳저곳 쏘아 다니기를 일삼아 하다 보니, 장이 열린 걸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지병이 생기고 만 탓입니다.
살 물건이 있건 없건, 동네강아지처럼 껄렁껄렁 돌아다니다 보면 어머니 품에 안긴 듯 마음이 한없이 풀어지는 곳이 장터입니다.
세상이 투전판처럼 각박해진지 오래지만 장터에는 아직도 따뜻한 정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한 여름에 열린 오일장, 그러잖아도 손바닥만 한 장인데 뙤약볕까지 내리쪼이다보니 파리만 이곳저곳 구경 다니느라 분주할 뿐이었습니다.
배추 몇 포기와 양파 몇 단 들고 나온 촌부도, 눈에 백태 낀 생선 몇 마리 늘어놓은 어물전 사내도 흥이 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팔아도 그만 못 팔아도 그만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앉아, 돈 대신 장대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이나 세고 있었습니다.
장 구경에 나선 저도 금세 무료해졌습니다.
그렇게 초점 없이 흐르던 제 눈길이, 어느 순간 한 지점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아니, 저게 뭐야?
장꾼들을 상대로 군것질거리를 파는 간이 점포 안의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란 기계 하나.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빙수기였습니다.
스위치 한번 누르면 순식간에 얼음을 갈아놓는 요즘 빙수기가 아니라, 재봉틀 같기도 하고 머리에 바퀴를 달아놓은 에펠탑 같기도 한 그 파란 기계 말입니다.
고물상에나 있어야 할 물건이 장터 한 귀퉁이를 당당하게 지키고 있다니.

빙수기를 본 순간, 느닷없는 갈증으로 목이 컬컬해지더니 입안이 푸석푸석 말랐습니다.
발걸음은 벌써 간이점포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팥빙수 하나 만들어 주세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는 주문(呪文) 같은 주문(注文)이 쏟아졌습니다.
팥빙수!
어렵던 시절을 산 사람들에게달콤한 추억의 정점에 있는 그 이름.
에어컨, 냉장고, 선풍기 같은 단어를 책으로 배우던 시절, 더위를 식힐 것이라고는 냉수, 냉차, 미숫가루, 아이스케키가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팥빙수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귀한 것이었지요.
세상에는 팥빙수를 먹을 수 있는 아이들과 먹을 수 없는 아이들, 두 부류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 그 달고 시원한 팥빙수가, 먹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고통을 동반하는 남의 떡이었습니다.
팥빙수의 그 황홀한 맛은, 만들어지는 동안의 기다림과 비례했습니다.
기계에 큼직한 얼음을 올려놓고 손잡이를 돌리면 대팻밥처럼 스윽스윽 밀려나온 결 고운 얼음.
그렇게 갈린 얼음은 꽃잎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하얀 꽃들이 그릇에 소복이 쌓이는 순간, 아이들은 얼음구덩이에 오줌이라도 내갈기고 난 듯 진저리를 치고는 했습니다.

팥빙수가 돼가는 진짜 과정은 이제부터입니다.
소복이 쌓인 얼음꽃 위에 뭉글뭉글한 미숫가루와 팥을 올리고 연유를 뿌리고.
그 위에 얹어지는 쫄깃한 떡은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마지막으로 뿌리던 파란 물과 빨간 물, 그 달콤해 보이던 물들이 색소에 불과했다는 것은 훗날 알았습니다.
하지만 입 뿐 아니라 눈으로도 먹어야하는 팥빙수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결정적 요소였습니다.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그 옛날 가슴 설레게 하던 광경과 마주친 감동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몇 십 년 전의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발걸음을 그냥 돌릴 수 있겠습니까.
주문을 한 뒤 간이의자에 앉아 얼음 덩어리가 팥빙수로 변신해 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봤습니다.
부부가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기계를 돌려 얼음을 깎아 내는 건 바깥 분 담당이었습니다.
기억 속의 풍경과 다른 것은 4각 얼음이 아니라 둥근 얼음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나머지는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듯, 모든 게 똑같았습니다.
기계에서 얼음꽃이 피어나는 순간 제 가슴도 봉우리를 열기 직전의 꽃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듯 침까지 삼키고 말았습니다.
다 갈린 얼음을 이어받은 아주머니의 손에서 본격적인 팥빙수가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팥과 미숫가루, 연유가 부어지고 쫄깃한 젤리가 얹히고.
그걸 바라보면서 저는 정말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 팥빙수가 등장한 건 일제 강점기였다고 합니다.
얼음에 단팥을 얹어 먹는 수준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과 함께 상륙한 연유가 섞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1980년대 중후반 경기가 상승기로 접어들면서 제과점의 인기품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세월과 소득수준에 따라 내용물이나 모양도 점점 화려하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급카페나 대학가를 중심으로 다양한 빙수가 등장하면서 생과일이나 달콤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필수조건이 되었습니다.
어느 새 팥은 첨가물 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팥빙수라는 이름도 조금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녹차빙수, 와인빙수, 커피빙수, 아이스크림빙수, 과일빙수별별 이름의 빙수가 등장했지요.
저 같은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저 화려한 음식의 하나일 뿐, 아릿한 기억의 그 팥빙수와는 애당초 한 공간에 나란히 세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최근 몇 년 간은 팥빙수를 먹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다 시골장터에서 만난, 과일이나 아이스크림은 구경조차 못 해본, 그 멋없는 팥빙수가 저를 끌어당긴 것입니다.
앞에 놓인 팥빙수를 급하게 섞어서 입에 떠 넣는 순간, !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이 입속에서 와르르 아우성을 쳤습니다.
회색의 땅에서 회색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입맛은 인스턴트 과자처럼 근본을 상실했지만, 추억까지 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몇 수저 떠 넣지도 않아서 등에 흐르던 땀이 식더니, 금세 뼛골까지 얼얼해졌습니다.
가슴은 고향동네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 누운 듯 환희로 가득 찼습니다.
정적만 떠도는 여름장터에 중년 사내 하나가 허허허! 실없이 웃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1. 8. 16. 08:30 사라져가는 것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DJ, 박민입니다.
오늘도 잊지 않고 음악다방 랑데부를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 창밖엔 대지를 적시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이면 왠~지 첫사랑 순심이가 떠오르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추억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 첫 곡으로 CCRwho'll stop the rain 들으며 여러분과 함께 추억 속으로 흠~뻑 빠져 들어가 보겠습니다.

자욱한 담배연기 사이로 유영하듯 흐르는 선율
. 구석진 자리에 앉아 황홀한 듯, 넋이 빠진 듯 초점이 흐려진 두 아가씨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유리 상자 같은 뮤직 박스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을 만난다. 이름 하여 DJ(disc jockey). 빽빽하게 꽂힌 LP를 병졸처럼 거느리고 앉아 가끔은 무심을 가장한 시선으로 다방 안을 훑는다. , 오늘도 왔군. 리퀘스트(request, 음악신청서)를 보내주는 단골들에게 가끔 눈인사도 던진다. 길게 기른 머리, 멋들어지게 감은 빨간 스카프, 체크무늬 셔츠는 단추 두 개를 풀어 놓았다. 폼생폼사! 야성미는 DJ의 생명. 뒷주머니에는 흑선풍 이규의 도끼를 빼닮은 도끼 빗이 꽂혀 있다. 가끔은 그걸 꺼내어 머리를 빗어주거나 흘러내린 머리칼을 멋지게 채어 올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걸어놓은 음악이 끝났다. 오늘은 무슨 얘기로 한 시간 반을 채워볼까. 어차피 팝송 해설은 변두리다방 수준에 어울리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최고다. 참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고 약간은 느끼한 음성, 발음은 을 닮아있다. 오늘은 평소보다 목소리를 한층 더 깔아본다.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DJ의 미덕은 분위기. “오빠. 멋져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 오늘도 음악과 팬이 있어 행복하다.

음악다방
. 분명히 말해두지만 명동의 필하모니나 르네상스 같은 음악 감상실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1960년대에서 80년대 초중반, 변두리까지 빠지지 않고 들어섰던 그 다방들 중 하나라야 이야기가 펄펄 뛰는 잉어마냥 재밌어진다. 약간 어두컴컴하고 퇴폐적인 냄새도 섞인, 그래서 조금은 추레하고 2% 정도는 부족해 보이던 그곳. 그곳의 DJ라야 팝송의 영어단어 한 둘쯤 꼬여도 괜찮다. 우리의 이웃, 아니 친구 같고 형 같고 오빠 같은 그들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였다.
손님도 그리 잘날 필요는 없다. 오로지 남진의 님과 함께만 좋아해도 상관없다. 대학생 배지를 달고 발끝을 까딱거리는 손님 중 하나 둘은 가짜일지도 모른다. 언니의 가발을 쓰고 온 여고생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캐묻거나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차와 음악과 DJ지 족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의와 희망을 반반쯤 어깨에 지고 다니는 재수생이 좀 길게 죽친들 어떠랴. DJ의 안개처럼 모호한 목소리에 묻어 있던 마약 같은 위안. 집에 갈 버스비까지 탈탈 털어 쓰디 쓴 한 잔의 커피와 바꿔도 아깝지 않은 날은 있는 법. 회색빛으로 암울했던 시대, 퇴락한 골목에도 청춘이 아우성처럼 피어나던 시절이었다.

전설이 되어버린 DJ. 그들 중 누구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은밀한 목소리로 음악과 사랑을 얘기하고 있을까? 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그 흔적을 따라 먼 길을 떠났다. 부산시 사직동 사직구장 근처의 라이브카페 하늘소. 그곳에서 DJ, 김래진씨를 만났다. 50세를 눈앞에 둔 그는, 지금도 뮤직 박스에 앉아 음악을 들려주는 현역 DJ. 음악다방 DJ의 족보로 보면 막내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음악과 함께 살아서일까. 30대로 보일만큼 동안이다. 앞에서 나왔던 변두리다방 DJ보다는 훨씬 세
련된
중심가DJ’였을 거라는 건 이야기 몇 마디로 알 수 있다. 1980년대 초 대학 1학년 때 입문한 뒤, 몇 년간의 직장생활을 빼놓고는 계속 DJ로 살았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함께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영화 졸업을 보러갔습니다. 그때 들은 OST에 반해 그 영화를 세 번이나 봤습니다. 그 길로 음악의 세계에 풍덩 빠져버렸지요.”
 DJ
인생의 단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음악다방에서 DJ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전공이 교육학이었습니다. 얌전하게 교사가 될 줄 알았던 장남이 다방에서 음악이나틀어주고 있으니 집안 어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찾아오기도 하고.”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책을 잡았지만 이미 물 건너간 공부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교사가 아닌 일반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방향을 튼 운명의 지침은 그를 얌전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게 놔두지 않았다. 내림굿을 거부한 처녀처럼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군요. 온갖 음악들이 환청처럼 따라다니는 겁니다.”
결국 4년 만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말았다. 신내림이라도 하듯 퇴직금에 빚까지 내
어 이미 끝물에 접어들었던 음악다방을 열었다
. 지인들은, 하던 것도 접어야 할 판에 음악다방이 다 뭐냐고 난리였다. 하지만 뮤직 박스를 떠나서는 죽을 것 같았다. 그가 회사원에서 DJ로 돌아간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뮤직 박스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과거의 인기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390분짜리 한 타임에 12만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법 인기가 좋은 편이라서 하루에 세 네 곳씩 뛰었지요. 음악다방 사장보다 DJ 파워가 더 셀 때였습니다. DJ 하나 잘 만나면 돈을 버는 거고 인기 있는 DJ가 떠나면 파리 날리게 되는. 그러니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미련이 남는 게 당연했을 것 같다. 한 곳에서 12만원이면 세 곳만 해도 36만원. 그 당시 어지간한 샐러리맨의 한 달 봉급과 별 차이 없는 돈이었으니 얼마나 많이 벌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 세상이 돈 짝만 하게 보이고 간은 배 밖으로 나올 수밖에. 직장생활이 불가능한 체질로 바뀌었을 것이다.
철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음악다방 주인을 보면 당신 장사는 내가 다 해준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DJ가 모두 그런 인기를 구가했던 건 아니다. 청년 10명 중에 2~3명은 LP라도 뒤집어봤다고 손들고 나서던 시절이니, 그들이라고 왜 급수가 없었을까.
“DJ협회라는 게 있었는데요, DJ가 가장 많았을 때는 100만 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종류도 무척 많았어요. 음악 해설을 주로 하는 정통DJ 외에도 입담을 위주로 하는 개그DJ, 시사를 소재로 삼는 시사DJ. 물론 멘트는 생략하고 LP만 뒤집는 DJ도 있었지요. 더 재미있는 건, 그 시절엔 DJ가 없는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음악다방은 말할 것도 없고 레스토랑, 학사주점, 떡볶이 집, 미용실까지.”

그렇게 인기를 누리던 음악다방은 왜 사라졌을까. 그 많던 DJ들은 어디로 갔을까. 진행은 서서히 됐겠지만 결과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쳤다.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음악다방들은 서리 맞은 배추처럼 시들어갔다. 김래진 씨는 듣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칼라TV가 집집마다 보급되고 댄스음악이 음질 좋은 싱글로 쏟아져 나오면서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지요. 젊은이들은 음악다방을 찾는 대신 클럽으로 갔습니다. 음악을 앉아서 듣는 시대는 가고 춤추며 듣는 시대가 찾아온 겁니다. 그러면서 디스코DJ라는 새로운 장르도 등장하게 됐고요
그 시절을 회상하는 김래진 씨의 얼굴에 잠시 빈 하늘같은 허허로움이 머물다 간다. 긴 기다림에 대한 보답일까? 요즘 대중음악 세상은 또 한 번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김래진 씨는 아날로그의 시대가 돌아왔다고 강조한다. 최근 아날로그 음악을 듣기 위해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70~80이나 세시봉같은 복고 바람이 한몫을 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행복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니 행복하지요. 집에서도 떳떳해졌고 또 언론에서 취재를 올 만큼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고. 죽는 날까지 DJ로 살아갈 겁니다.”

인터뷰 말미에 김래진 씨에게 아날로그 음악과 디지털 음악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다.
아날로그, LP로 듣는 음악은 수고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간을 갖춰야 하는 건 물론, 스위치 하나로 듣는 디지털 음악보다 여러 절차가 필요하지요. 그 대신 LP음악은 다도(茶道)를 즐기며 차를 마시듯 몸으로 느끼는 맛이 있습니다. 먼저 상상하고 맛을 보고 듣고우러나는 맛이 두 배 정도는 더 크지요. 엄마 품 같은 푸근함이 있다고 할까요

한번 터진 그의 음악 이야기는 좀처럼 끝날 줄 모른다. 열정이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기차시간은 다돼가는데.
아날로그 음악이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 든다면 디지털 음악은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냉정한 음악입니다. 직선적이고 정이나 여운이 없이 스쳐지나가는 음악이지요.”
어디 음악뿐일까. 빛의 속도로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감성이나 여운이란 단어는 사어(死語)가 된지 오래다. 그 대가로 사람들은 하나하나 섬이 되었다. 비바람은 몰아치는데 연락선마저 끊겨버린 섬. 그런 세상에 DJ가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전설이 되어 액자 속에 들어간 그 시절과 삭막한 이 시절을 연결해 주는 끈 같은 존재, 그들을 통해 꽃처럼 아름답던 날의 우리를 만날 수 있기에.

 

posted by sagang
2011. 6. 15. 19:47 사라져가는 것들

 

할머니는 뒷산을 넘어온 땅거미가 마당을 서성거릴 무렵이면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폈습니다.
밥을 지으려 불을 피우는 걸 뭐랄 사람은 없겠지만, 땟거리가 떨어져 빈 속에 물이나 채우고 잠들어야 하는 날에도 건너뛰는 법이 없었습니다.
솥에 부은 물이 와글거리며 끓어오를 때까지, 아궁이에 땔감을 밀어 넣는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 당신의 표정은 처자식을 베고 황산벌로 떠나는 계백처럼 경건했습니다.
겨울에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따로 온기가 필요 없는 계절에도 불을 지피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선산마저 넘어간 뒤라, 남의 산에 가서 도둑나무를 해 와야 하는 어린 손자에게는 속이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으면 허리가 아파서라거나 방이 눅눅해서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는 했지만, 진실과 먼 대답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눅눅한 계절도 아니었거니와 방구들이 뜨겁다고 함부로 눕는 법이 없는 할머니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을 지피는 걸로 그날의 의식이 끝나는 건 아니었습니다.
바깥마당 감나무 아래 앉아 굴뚝마다 연기를 내뿜는 양지뜸, 아니 그 보다 먼 길 거북재에 시선을 얹는 게 부엌에서 나온 당신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작은 몸피가 어둠속으로 조금씩 녹아 들어가 결국 어둠과 하나가 될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그
이상행동을 이해하게 된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소년 적에 집을 떠난 아들, 즉 제 삼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들이 지친 몸으로 돌아와 고갯마루에 섰을 때, 자신의 집 굴뚝에서 연기라도 나야 한 달음에 달려올 거라 믿었던 거지요.
그래서 하루라도 불 지피는 일을 거를 수 없었던 겁니다.
어디를 떠돌지 모르는 아들을 부르기 위해 굴뚝의 연기로 신호를 보냈던 겁니다.
굴뚝은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들판에서 놀던 아이들도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듯 논둑길을 달렸습니다.
굴뚝을 통해 올라오는 연기는 아이들의 가슴에 깊은 화인(火印)으로 찍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렇게 새겨진 굴뚝의 추억은 아이들이 자라 객지로 나간 뒤에도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로 펄럭이게 됩니다.
어느 저녁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어귀에 섰을 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눈에 들어오면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느닷없는 안도감에 휩싸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궁이에 묻어둔 감자 익는 냄새라도 맡은 듯, 괜히 목이 메고 눈물마저 찔끔거리던 그 기억은 죽음이나 맞아야 지울 수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굴뚝은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집 외곽에 설치하는 구조물입니다.
보통은 뒤란의 추녀 근처에 내기 마련이었습니다.
아궁이, 방고래, 구들장 등과 함께, 온돌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전통가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요.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연기와 화기(火氣)가 방고래를 타고 가면서 구들장을 데운 뒤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는 구조입니다.
굴뚝의 모양이 가지각색이었듯이 재료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둥근 토관(土管)을 그대로 세우거나 흙과 돌을 섞어, 혹은 벽돌을 층층이 쌓아올렸습니다.
나무나 양철, PVC관이 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굴뚝은 난방이나 밥을 짓는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연기를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면 불을 제대로 피울 수가 없고, 그렇다고 너무 잘 빨아들이면 온기까지 한꺼번에 내보내게 돼 적절한 수준으로 필요했습니다.
굴뚝의 모양이나 높이도 기후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함경도나 강원도 북부지역 같은 추운 곳에서는 굴뚝을 비교적 높이 쌓았는데, 연기를 천천히 배출시켜 열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는 비교적 낮게 세웠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 보면 연기가 제대로 빠지지 않거나 역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구들장이 무너지거나 그을음으로 굴뚝이 막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기압과 바람 탓이었습니다.
굴뚝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심술을 부리면 불은 자꾸 꺼지고 연기가 들이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는 했지요.
굴뚝에 바람 들었나하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왜 우느냐는 뜻인데, 굴뚝에 바람이 들면 연기가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나는 걸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서글펐던 삶이 투영된 속담도 있습니다.
바로 굴뚝 보고 절한다는 말인데,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인사는 할 수 없고 하는 수 없이 굴뚝을 보고 절을 한 뒤 떠난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그 집의 먹고 사는 상태를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는 것은 그 집이 그 날의 끼니를 해결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떠돌이나 거지들은 남의 집 굴뚝의 온기에 기대어 잠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닥친 추위에 저승길로 떠나는 일도 없지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것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죽음과 가까이 있었던 게 바로 굴뚝이기도 했던 셈이지요.

도시에도 아파트가 점령하기 전에는 집집마다 굴뚝이 있었습니다.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뚫어~”를 외치던 굴뚝청소부란 직업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굴뚝과 종말을 함께 했지요.
소외되고 억눌린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난장이와 대비되는 거대한 굴뚝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아버지가 벽돌공장 굴뚝에 올라가 고단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굴뚝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시대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현대화라는 이름의 식성 좋은 괴물은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굴뚝들을 삼켜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저녁 집집마다 내뿜던 연기도 사라졌습니다.
굴뚝이 없는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아이들은 굴뚝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을 통해서 오고간다는 얘기도 더 이상 해줄 수 없게 됐습니다.
놀던 아이들이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어머니에게 달려가던, 그 정감 넘치는 풍경은 박제된 지 오랩니다.
감나무 아래 앉아 저 멀리 거북재로 시선을 던지던 할머니 역시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으로만 남았습니다.

삼촌은 어찌 됐냐고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1. 5. 30. 08:30 사라져가는 것들

 

미선나무라는 이름과 처음 마주친 건 충북 괴산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던 중이었다. ‘세계에서 한 종밖에 없는 한국 특산식물이란 설명이 뇌리에 와서 박혔다. 그런 게 있는데도 아직 모르고 살았다니. 마침 그쪽 지역을 한 바퀴 돌려고 벼르던 참이었던지라,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해 볼 틈도 없이 괴산으로 향했다. 여름을 턱 밑에 둔 6월이었다. 미선나무는 충북 괴산군과 진천군, 영동군과 전북 부안 등 소수 지역에서만 자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괴산군 칠성면 추점리와 장연면의 율지리, 송덕리가 주 자생지라고 할 수 있다. 공부 안한 학생이 고민도 없이 시험문제를 찍듯, 사전 정보도 없는 내가 선택한 곳은 추점리였다. 도착해 보니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었다. 세계에 단 하나뿐인 천연기념물이 있는 곳이니 번듯한 안내판라도 있거나 뭔가 그럴 듯하게 꾸며놨으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여기 저기 기웃거려 봐도 특별하다싶은 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마을을 한참 돌아본 뒤에야 트럭을 몰고 가는 청년을 만났다. 근처에 미선나무 군락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선선하게 설명해 준다. 청년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동네를 꽤 벗어난 곳이었다.

군락지는 양지바른 언덕 쪽에 있었다. 보호목책이 둘러쳐져 있어서 금세 눈에 띄었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가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 미선나무라는 거지? 목책 안에는 덩굴식물에 가까운 관목들만 낮은 가지를 뻗고 있었다. 키가 큰 활엽수일 거라고 근거 없는 예단을 했던 나로서는 당혹스런 풍경이었다. 사전에 공부를 안 한 탓이었다. 그 작은 나무들이 바로 미선나무였다. 터무니없는 기대 때문인지 실망스럽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언덕 아래 길가에서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미선나무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꽃필 때 와야 볼게 있지, 여름 다 돼서 미선 찾는 사람은 첨 보네유, 그렇구나. 나무가 아니라 꽃을 보러 와야 하는구나. 사진 한 장 못 건지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돌아와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미선나무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미선나무의 이름은 한자어 尾扇에서 나왔다고 한다. , 열매의 모양이 둥근 부채를 닮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열매의 위쪽은 꼭 옛날이야기책에 나오는 궁중 부채처럼 오목하게 패어있다. 말이 열매지 잎으로 착각하기 좋게 생겼다. 그 잎처럼 생긴 열매 속에 2개의 씨가 들어있는 것이다.

미선나무는 성격이 조금 독특하다.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을 좋아하는데 돌밭 같은 척박한 땅을 택한다. 나무줄기는 보통 원통형이지만 어릴 때는 각진 연필처럼 사각형이고 속은 비어있다. 1m 정도까지 자라며 3월에 잎보다 먼저 꽃이 핀다. 꽃은 보통 흰색으로 개나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작은 편이며 훨씬 총총하게 달린다. 개나리처럼 생긴 꽃 모양 때문에 영어 이름이 흰색 개나리를 뜻하는 White Forsythia이다. 연분홍색 꽃도 있지만 흰색에 비해 흔치않은 편이다. 분홍색 꽃이 피는 것을 분홍미선이라고 한다. 또 상아색 꽃이 피는 것도 있는데 이를 상아미선이라고 하고 꽃받침이 연한 녹색인 푸른미선도 있다. 열매 끝이 오목하게 파이지 않고 둥근 모양은 둥근미선이라고 한다. 비슷하게 생긴 개나리꽃에 향기가 없는 것과는 달리 미선나무의 꽃은 뛰어난 향기를 자랑한다. 그 향기는 반경 2km까지 퍼진다고 한다. 꽃받침은 종 모양의 사각형으로 길이가 33.5mm이며 네 개로 갈라진다. 갈라진 조각은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다. 번식은 주로 꺾꽂이로 한다. 종자번식은 쉽지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많은 연구를 통해 휘묻이, 분주법 등 여러 가지 번식법이 개발됐다.

미선나무는 1917년 정태현 박사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서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1919년 일본인 학자 나카(中井)라는 사람이 새로운 종()이란 것을 확인했고, 1924년 이시토야 쓰토무(石戶谷勉)가 학계에 처음 보고함으로써 ‘Abeliophyllum distichum’이라는 학명을 얻었다. 1997년 산림청이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 제173호로, 1998년 환경부가 보호양생식물 제49호로 지정했다. 내가 다시 미선나무를 찾아간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이번에는 꽃피는 계절에 맞췄다. 목적지도 추점리가 아니라 장연면의 율지리로 잡았다. 하지만 두 번째도 그리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율지리에 도착해서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미선나무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뜨뜻미지근했다. “글쎄유. 우리 집에 두어 그루가 있긴 헌디, 많이 피는 데는 모르것는디유?” 이 동네가 율지리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틀림없단다. 동네사람이 모른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미선나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주민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추점리로 향했다. 역시! 그곳엔 미선나무들이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파른 언덕이고 목책을 둘러놓아서 접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랴. 어렵게 만난 미선나무꽃인데.

미선나무를 그리 어렵게 찾아다니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서울에 돌아온 뒤였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지인이 창경궁에도 미선나무가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지척에 두고 그 먼 길을 찾아다녔다니. 조금 허탈했지만, 어차피 한 번 갔어야할 자생지를 다녀왔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창경궁으로 찾아갔다. 홍화문을 지나 옥천교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춘당지로 가는 길목. 미선나무꽃들이 지천이었다. 토양이 달라서일까. 꽃들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마치 꽃방망이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자생지에서는 드물었던 분홍미선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미선나무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나는 보물이라도 만난 듯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을 원()으로 바꾸고 벚나무를 심었던 일제의 잔재를 파내는 김에, 미선나무 같은 우리 고유 수종을 옮겨 심은 모양이었다. 객지에 와서도 자리를 잘 잡은 걸 보니 번식이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유일의 희귀식물 미선나무, 그 나무가 이 땅에 뿌리 내리게 된 데는 깊은 뜻이 있을 터.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퍼트려서 이 나라의 봄을 가장 먼저 여는 꽃으로 자리 잡게 하면 어떨지. 향기가 2km나 퍼진다니 그 얼마나 황홀한 봄이 될까. 미선나무 곁에서 생각은 자꾸 곁뿌리를 내리고, 고궁의 봄은 초록빛을 자꾸 토해내고 있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