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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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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27. 08:40 사라져가는 것들
(上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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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날마다 난리 굿을 해대니 건물 관리인도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제발 좀 나가 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슨 돈이 있어서 이사를 갈까. 그 때 소위 ‘시발연(詩發硏, 시인통신발전연구회)’이란 게 만들어졌다. 단골들이 형편 되는대로 외상값을 갚고 화가들은 그림을 기증하고 문인들은 원고료 일부를 내놓아 돈을 마련했다. 한귀남 씨는 거기에 빚을 내고 그동안 번 돈을 합쳐 이사를 했다. 1992년 5월이었고, 시인통신이 탄생된 지 10년만이었다. 시인통신 2세대를 연 곳은 종로1가 피맛골, 훗날 르메이에르빌딩이 들어선 자리였다. 꽤 넓어지는 바람에 1, 2층을 합하면 20평이나 됐다. 이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술꾼들의 세대교체도 이뤄졌다. 언론사 노조나 운동권 인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다. 한귀남 씨는 그 시절을 그렇게 회고했다.
“그때 많은 노조가 태동했어요. 학생들도 자주 오고. 덕분에 정보부 사람들에게 주목 받았지요. 무슨 비밀결사대라도 만드는 것으로 알았던지, 그 사람들이 손님 틈에 끼어 앉아 대작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누가 누군지 아무도 따지지 않을 때였으니까. 결국 몇몇 사람은 끌려가기도 하고. 그래도 밤 아홉시만 되면 하나 둘 모여들어 자리를 채우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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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는 세대와 시인통신을 드나든 시기를 떠나서, 훗날 국회의원에 대선후보가 됐던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에 대한 추억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홀씨 같이 미미했던 존재를 그분들이 다 키워줬지요. 시인통신 드나들던 분들 중에 금배지를 단 이도 일곱이나 돼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도 그 중 한 분입니다. 자신이 힘든 가운데에도 ‘귀남아, 힘내레이. 단디 해라’라며 다독이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도 어른스러움을 잃지 않았지요.”
권영길 위원장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끝까지 꼿꼿하게 앉아있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귀남 씨는 후배들 쫓아다니며 외상값 갚아주고 따끔하게 야단치고 하던 선배들이 여전히 성성하던 시절이었다고 그 때를 기억했다. 또 외상값은 쌓여 가는데 갚을 길은 없고, 그래도 술은 마시고 싶어서 꾸준히 드나들던 한 시인이, 첫 원고료를 받자마자 몇 년 치를 갚겠다며 찾아온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좋은 소식도 있었다. 1993년 한귀남 씨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문학계간지 ‘포스트모던’에 시부문 신인상을 받은 것이다. 문인들과 10년 넘게 부비고 살다 보니 어느덧 시인이 돼 있었던 것이다. 또 2000년에는 계간지 ‘지구문학’에 소설 ‘피맛골에 부는 바람’이 실리면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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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만 있을 것 같았던 시인통신에 먹구름이 드리운 건, 이사한지 10년이 조금 넘은 2003년이었다. 사실 어두운 그림자는 훨씬 전부터 드리워져 있었다. 피맛골에 재개발의 음습한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서민들의 가벼운 주머니와 애환을 달래주던 오래된 골목의 숱한 명소들과 함께 시인통신도 전성기였던 2세대를 접어야했다.
“어디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요. 처음 두 달 동안은 아무 일도 못했어요. 재개발이라는 걸 우리가 직접 겪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싸우고 버텨도 봤지만 스스로 무력한 존재라는 걸 확인했을 뿐이지요. 간판이라도 지키기 위해선 빨리 추스르고 새 출발을 할 수밖에.” 
쫓겨나다시피 인사동으로 이사한 뒤, 2004년에 만난 한귀남 씨의 표정은 여전히 처연했다. “인사동이 재미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주인은 같은데도 피맛골의 시인통신과 인사동의 시인통신은 달랐다. 환경이나 음식도 어느덧 ‘인사동화’ 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영 겉도는 것 같았다. 단골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시인묵객들의 난장판이 아니라 ‘점잖은 손님’이나 아베크족이 드나드는 그 곳은 이미 시인통신이 아니었다. 가끔 열리는 시낭송회 같은 게 그나마 시인통신의 존재를 확인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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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서 맞은 3세대 시인통신은 어느덧 60줄에 접어든 한귀남 씨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도 꽤 지친 표정이었다. 그나마 막내아들이 같이 장사를 하는 덕분에 몸은 좀 편해진 것 같았다. 경기도 어디에 땅을 조금 마련해놓고 주말마다 가서 흙을 만지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과거에 비해 없어진 게 많아요. 정이 없어졌고, 외상 달라는 사람이 없어졌고, 싸울 일이 없어졌고….
그러면서도 시인통신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옛 얼굴을 볼 때마다 시인통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더 굳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덧 우리 막내의 시대로 바뀌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 있으렵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흘러버린 세월에 그들도 놀라고 나도 놀라지요. 얼마나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것인지…. 지금도 옛날 외상장부를 보관하고 있어요. 기록돼 있는 사람이 700명도 넘어요.”
하지만 시인통신이 하락기를 걷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으로 봐도 확연했다. 사회적으로도, 숨 막히는 시대가 저만치 뒤에 있었다. 장사가 안 돼 집세가 밀리기도 했다. 그녀는 피맛골로 돌아가고 싶다고 몇 번 되뇌었다. “옛집 근처를 서성이다 그냥 돌아갈 사람들이 생각나서”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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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 이뤄진 걸까. 2004년 11월 시인통신은 청진동으로 돌아가 4세대를 열었다. 2세대 시통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해장국 골목 근처였다. 짐을 옮긴 지 며칠 지난 뒤 한귀남 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사도 했으니 한번 들러 가라는 것이었다. 한옥을 그대로 살린 제법 운치 있는 집이었다. 환경은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 집에서 한 씨는 거의 주방에 틀어박혀있다시피 했다. 서빙은 막내아들이 전담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한 씨는 새로 이사한 시인통신에 정을 못 붙이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인사동으로 쫓겨 갈 때부터 모든 정이 떨어져 있었는지 모른다. 후배기자들과 여러 번 찾아갔지만 한 씨를 보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졌다. 손님은 제법 있는데 주인이 없으니 영 낯설었다. 옛사람들의 발걸음도 거의 끊어진 것 같았다. 헌데 훗날 확인된 것으로 보면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귀남 씨는 시인통신에 정이 떨어진 게 아니고, 재개발에 질려버린 것 같았다. 새로 둥지를 튼 그 곳 역시 사형통보를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막내아들도 갈수록 의욕을 잃는 것 같았다. 학원에라도 등록해서 자신의 길을 가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시인통신의 마지막 불꽃은 그렇게 사위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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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드디어 그 골목이 재개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7월31일 시인통신의 간판이 영원히 내려졌다. 다른 곳에서 그 간판을 다시 건다고 해도 그건 내가 아는 시인통신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라는 말을 거둬들일 생각은 없다. 시인통신. 시통이라고도 불렸던 그 곳. 그곳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림으로 그려지고 글로 쓰이고 노래 불린 곳이었다. 아니, 피맛골 자체가 그랬다. 애당초 피맛길은 서민들의 자유와 평등의 상징으로 태어났다. 말을 타고 종로를 지나던 벼슬아치들에게 머리 조아리기 싫어 숨어든 길이었다. 침도 한번 뱉어보고 휘파람 휘휘 분다고 뭐라는 이 없던, 누구에게도 평등하고 누구나 자유롭던 피맛길. 그 길을 중심으로 피맛골이 생겼다. 어둡고 암울하던 시절에 최루탄의 매운 연기를 피해 숨어들던 곳. 그 곳의 머리와 허리와 다리를 개발이라는 이름의 포식자가 탐욕스럽게 삼키고 있다. 그 덕에 호주머니 가볍고 가슴이 서늘하던 사람들이 비 맞은 새처럼 깃들던 곳, 시/인/통/신이 사라졌다. ‘누님’ 한귀남 씨도 떠났다. 술꾼들도 떠났다. 대신, 그들을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잘 갖춰 입은 21세기 인간들이 통조림처럼 빛나는 거대한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전문기자의 <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에서 일부 인용-참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진은 간판을 내리기 직전, 4세대 시인통신의 내부 모습입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