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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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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7. 20: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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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기차. 서울에서 청춘기를 맞이한 이 치고, 이 다섯 글자에 추억 한 자락 걸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MT를 가기 위해 연인과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젊은이들은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유장하게 흐르는 북한강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던,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으로 낭만이 넘실대던 열차. 누구는 사는 게 유난히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면 기름칠 하는 셈 치고, 누구는 이별의 아픔으로 생긴 가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경춘선을 탄다고 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고 내렸던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그 기차가 사라진단다. 시대에 밀리고 첨단에 쫓겨 이별을 고한단다. 역마다 다 참견하고 다니던 비둘기호나 그보단 조금 빠르지만 특별할 것도 없었던 통일호가 사라질 때까지만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이제 ‘기차’라는 이름의 추억은 종착역에 섰다. 2010년12월20일부로 모든 건 과거로 흘러가버린다. 하행선 열차는 20일 밤 10시 15분 청량리역을 마지막으로 출발하고, 상행선은 남춘천역에서 밤 9시 25분에 출발, 11시 12분에 청량리에 도착한다. 그게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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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떠난 자리를 전철이라는 매끈한 전동차가 대신 달린다. 21일 05시10분 상봉역을 출발하는 첫차부터 전철로 바뀐다. 그 순간 다른 세상이 열린다. 무궁화호는 청량리역에서 남춘천역까지 1시간50분 걸렸지만 복선전철은 급행 63분, 일반 79분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운행횟수도 하루 38회에서 137회로 크게 늘어서 출퇴근 시 12분, 그 외에는 20분 간격으로 배차된다. 서울 상봉역과 춘천역에서 상ㆍ하행선 첫 열차가 오전 5시 10분에 각각 출발해 오전 6시 13분에 춘천역과 상봉역에 도착한다. 마지막 열차는 오후 11시에 출발해 0시 19분 종점에 도착한다. 결국 춘천에서 수도권으로 출퇴근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요금도 종전 무궁화호의 5600원에서 절반도 안 되는 2500원으로 싸진다. 이렇게 바뀐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면 ‘춘천이 수도권의 품 안에 들어갔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춘천 역세권의 집값이 뛰고 있다고 한다. 그 정도 출퇴근 시간이라면 환경 좋고 집값 싼 춘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느는 건 당연한 일.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편리해지면 모두 좋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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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날이 오기 전에 경춘선 기차를 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자꾸 등을 떠민다. 부랴부랴 표를 예매하고 토요일(18일) 청량리역으로 나갔다. 쇼핑센터와 연동된 매끈한 신청사. 청량리역도 추억 속의 그 역은 아니다. MT의 집합장소는 늘 역 앞의 시계탑이었다. 이제 그런 건 없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별 감흥도 없이 예약된 표를 받아들고 개찰구를 빠져나간다. ‘경춘선 매진’이라는 글자가 잠시 시선을 잡을 뿐이다. 계단을 다 내려 갈 때쯤에야 반가운 이라도 만난 듯 걸음이 빨라진다. 눈에 익은 열차가 서 있다. 경춘선 무궁화호. 추억을 찾아온 건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열차 안팎에는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초로의 남자들 대여섯 명도 서성인다. 그들이 청춘의 페이지를 넘겨보는 소리가 요란하다. 열차는 정확하게 10시20분에 출발한다. 1호차 43번 창측. 5600원을 내고 부여받은 권리다. 이제는 천금을 들고 와도 경춘선에서 이 권리를 살 수 없으리라. 감회가 스멀스멀 일더니 전신을 훑는다. 춘천에 사는 어느 소설가를 찾아가기 위해 이 열차를 탔던 날의 두근거림이 엊그제 일인 양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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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슬금슬금 출발하나 싶었는데 금방 성북역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춘선의 구간을 청량리에서 춘천까지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성북에서 춘천까지다. 청량리에서 성북까지는 수도권 1호선 전철 선로의 신세를 지고 있다.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경춘선이 개통될 때는 지금의 경동시장근처인 성동역이 시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시가지 확장에 따라 성동역∼성북역 구간은 철거됐다. 성북역에서 타는 승객이 꽤 많다 했더니, 빈자리를 모두 채우고 몇 사람은 서서 간다. 열차가 화랑대역을 지나면서 서서히 전원풍경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엊그제 내린 눈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저만치서 카트가 다가온다. 옛날엔 ‘홍익회’라는 대명사로 불렸던 간식 카트. 과자나 김밥, 삶은 달걀, 음료수는 물론 맥주까지 즐길 수 있었던 ‘기차여행의 꽃’. 오랜만의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이어서 그런지 객지에서 만난 친구처럼 반갑다. 그 반가움은 나뿐만이 아닌 듯, 간식을 사는 사람이 제법 많다. 그것도 하나의 추억 쌓기일 테다. 전철로 바뀌면 최소한 경춘선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재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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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벗어나면서 열차는 구불구불한 철로를 뱀처럼 미끄러져간다. 북한강 구비 따라 달리는 경춘선 기차여행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선물처럼 받아들고 가는 여행이었다. 새로 만든 전철구간은 직선화에 치중하다보니 터널 구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당연히 운치는 줄어들 수밖에. 늘 그렇듯이, 빠르고 편리한 것들은 무언가 달라고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사실 지금 열차가 달리는 이 길도 원래의 경춘선은 아니다. 이미 상당 구간 새로 이설된 전철용 경춘선을 지나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의 철로로 달리는 곳은 성북~퇴계원, 상천~남춘천 등 시점과 종점 구간뿐이라니 반쪽짜리 경춘선여행인 셈이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젖어 있는데 대성리역이라는 안내가 나온다. 시계를 보니 11시6분이다. MT의 대명사 대성리. 어쩌면 MT가 만들어낸 동네일지도 모른다. 한때 서울에서 MT를 가자는 말이 나오면 장소는 당연히 대성리로 알았다. 그 당시 열차는 늘 청춘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통로건 어디건 주저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 지금이야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그 때는 고성방가까지도 너그러운 미소로 용납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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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탓인지, MT시대가 어느덧 지나간 것인지 대성리에서 내리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다. 열차는 급하게 숨을 고른 뒤 다시 출발한다. 얼마 달리지 않아 도착한 곳은 청평역. 11시 16분이다. 청평호가 있는 이곳도 여름이면 젊음의 천국이 된다. 새로 지은 전철역들이 산뜻한 모습을 자랑하며 서 있다. 그동안 봐오던 허름한 기차 역사들이 촌부의 반백 머리라면, 새로 지은 전철역들은 깔끔하게 빗어 넘긴 신사의 머리 같다. 하지만 천생이 촌놈에게는 별 정이 가지 않으니 어쩌랴. 허리 굽은 옛날 역사들은 넉넉한 품으로 허허롭게 비어버린 가슴을 달래줬다. 하얀 눈 뒤집어쓰고 웅크린 작은 역사에 눈길을 빼앗겨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제 그들은 박제가 되어 세상의 한쪽에서 시나브로 늙어갈 것이다. 옹송그리고 서 있는 길가의 나목들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가평역에 도착한 건 11시30분. 제법 많은 승객들이 내린다. 사계절 내내 인기를 누리는 관광지, 남이섬으로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제 그곳을 갈 때도 전철을 타겠지. 빈자리가 제법 많이 생긴다. 열차는 이제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 땅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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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강촌역이다. 11시48분. 역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가평 못지않다. 강촌역 역시 추억의 보물창고다. 자리에 앉은 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가슴 속에도 강물 한 줄기가 흐른다. 눈을 돌리니 강촌역의 명물인 낙서들이 기다리고 있다. 장난기와 하고 싶은 말이 적당히 버무려진 각종 언어들. 치졸한 그림과 무질서하게 나열된 단어들 속에 MT, 젊음, 연인, 통기타, 맥주, 낭만, 해방감… 한 시대가 모두 들어있다. 그 낙서들 사이를 열병하듯 지난 열차는 다시 앞으로 나간다. 이제 종점이 코앞이다. 정각 12시에 김유정역을 지나간다. 쓸쓸한 묘지 위로 잘 헹궈 널은 빨래 같은 햇살이 이불처럼 깔려있고 망루 위에 선 초병들의 어깨가 참나무처럼 단단해 보인다. 12시7분. 드디어 남춘천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예정보다 3분 연착이다. 추억을 따라나선 1시간 47분의 여행도 끝났다. 세월을 거꾸로 돌리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이 열차를 탈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성북역에서 다시 한 번 이별의 문구와 조우한다. ‘2010년12월21일부터 우리 역의 국철승차권 판매업무를 중지하오니…’ 시야가 흐린 탓일까? 바람도 없는데 벽에 붙은 플래카드가 펄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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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6. 13:4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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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늘 ‘과장(誇張)’이라는 질 좋은 포장지에 싸여 저장되기 마련이란 걸 감안해도, 그 시절은 요즘보다 두 배쯤은 더 추웠던 것 같습니다.
어지간한 추위 정도는 그러려니 하는 어른이 돼서도 등굣길 위를 달음박질치던 그 작은 아이를 생각하면 괜스레 몸이 옹송그려지거든요.
제가 태어난 곳은 농촌이었지만 바다도 그리 멀지 않아, 가끔 마실가듯 갯벌에 나가 게나 조개를 주워오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집에서 국민(초등)학교까지는 한 시오리길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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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에겐 제법 먼 길이겠지만, 그땐 시오리라면 쉽사리 다녀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보다 두 배쯤은 먼 곳에 사는 아이들도, 농사일을 돕느라 혹은 노는데 팔려서 학교에 빠진 적은 있어도 길이 멀다고 결석하는 경우는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 씩씩한 아이들에게도 겨울은 고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야 눈구덩이에 묻어놔도 한숨 자고 나올 만큼 따뜻하게 입히지만 그 시절은 어디 그랬나요.
좀 산다는 집 아이들이나 솜 넣은 누비옷에 무릎 나온 내복이라도 챙겨 입었지, 샅이나 겨우 가리고 겨울을 나는 아이들도 없지 않았으니까요.
등굣길은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이었지요.
바닷바람 무서운 거 아는 분은 날마다 아이들에게 닥치는 추위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갈 겁니다.
차디찬 바닷물에 밤새 몸을 얼렸던 바람이, 신작로 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후다닥 달려들어 뺨을 할퀴고 도망치고는 했습니다.
아! 피가 얼어붙는 것 같던 그 추위….
그렇게 늘 찬바람, 찬 물에 노출 된 아이들의 손은 툭툭 터서 피가 흐르기 일쑤였습니다.
그 터진 손을 덮치는 바닷바람은 저주처럼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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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학교에 도착해도 추위는 여전히 따라다녔습니다.
교실이라고 해봐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게 예사였으니 한데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었습니다.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난로를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불을 내뿜는 시대라야 그것도 만만하지요.
난로를 피우려면 먼저 당번이 창고에 가서 조개탄을 타 와야 했습니다.
저학년 아이들은 선생님이 대신해 주기도 했지만, 일꾼 하나 몫을 하는 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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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스스로 피우는 게 원칙이었지요.
곱은 손으로 바께쓰라 부르던 함석양동이를 들고 창고 앞으로 가면 하루 분량의 장작과 조개탄을 나눠 줍니다.
조개탄이란 무연탄에 목탄분말(숯가루)과 펄프폐액(廢液)을 혼합해서 조개처럼 뭉친 고체연료를 말합니다.
난로를 피울 땐 종이를 불쏘시개 삼아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장작이 타오르면 그 위에 조심스럽게 조개탄을 올립니다.
한꺼번에 많이 올리면 장작불마저 꺼지게 되기 때문에 적절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한참 뒤 조개탄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교실을 점령했던 냉기는 조금씩 물러가고 온기가 돌기 시작하지요.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들어설 무렵이면 교실은 제법 훈훈해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들어오자마자 난로 곁으로 달려듭니다.
꽁꽁 얼었던 손에 갑자기 열기가 닿으면 깨질 듯 아프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추위보다는 덜 무섭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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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가 몸만 덥혀주는 건 아니지요.
젖은 옷이나 양말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주는 것 역시 난로였습니다.
얌체들은 젖은 양말을 연통의 철사에 걸기도 했습니다.
양말을 매일 갈아 신던 시절이 아닌지라(그럴 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냄새가 향기로울 리는 없었습니다.
결국 선생님께 꿀밤 한 대 맞고 걷을 수밖에요.
난로가 달아오르면 위에 올려놓은 커다란 주전자에서도 물이 펄펄 끓어오릅니다.
수증기의 몸짓에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장단을 맞추면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가슴까지 훈훈해집니다.
언뜻 내다본 창밖으로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이면, 온몸이 가라앉을 듯 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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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곤 했지요.
세월이 온갖 것을 덧칠한 지금 생각해봐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난로와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찰떡궁합’이 하나 있지요.
바로 ‘벤또’라 부르던 도시락입니다.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선생님이 나가시기도 전에 아이들은 도시락을 꺼내 들고 부리나케 난로가로 달려갑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지요.
뭐, 가장 좋은 자리는 늘 한 주먹 하는 ‘일그러진 영웅’들이 차지하기 마련이지만요.
그때쯤이면 난로가 약간 식은 뒤기 때문에 도시락을 그대로 올려놓아도 밥이 금세 타지는 않습니다.
칠이 벗겨지고 찌그러진 도시락들이 제법 열을 받아들일 무렵에는 냄새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반찬 째 올려놓은 도시락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맨 아래 도시락의 밥이 눌어붙는 구수한 냄새….
밥이 데워지기를 기다리는 순간은, 기대가 주는 행복과 기다림이 주는 고통이 반반씩 교차했습니다.
확실한 거 하나는, 훗날의 어떤 진수성찬도 그 때의 그 ‘가난한 밥’을 따라갈 수 없더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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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의 추억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군에 입대해서 정점을 찍게 되지요.
요즘은 군에서도 보일러 난방을 한다지만 그 시절에는 ‘뻬찌까(페치카)’라고 부르던 벽난로나 경유난로를 주로 썼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대에서는 소위 벌통난로라고 부르던, 겉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경유난로를 사용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기름통을 들고 보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날들은 추억보다는 고통에 가깝게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기름을 제 때 못 타거나, 밤에 난로를 꺼트려서 하늘같은 고참병들을 떨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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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가 한 겨울에 팬티바람에 운동장을 돌던 추억은 지금도 끔찍합니다.
요즘에도 난로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전기나 가스난로는 난방용구로서 여전히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들에게서 어린 시절의 정감을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새벽시장의 드럼통 난로나 오래된 이발소를 지키고 있는 무쇠난로 쯤은 돼야 마음이 훈훈해 지지요.
그들 앞에 서면 운동장을 가로질러 씩씩하게 달려가는 추억 속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리창에 낀 하얀 성에가 온갖 그림을 그리던 아침, 곱은 손 호호 불며 난로를 피우던 아이.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에 몰래 가져온 가래떡이나 고구마를 올려놓고 침을 꿀꺽꿀꺽 삼키던 아이.
젖은 단벌 나일론양말을 말리다가 호르르 태워먹고 울먹이던 아이.
그 아이들이 저만치서 환하게 손짓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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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5. 19:1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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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과 만나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다른 자료사진을 찾던 중, 바늘로 찌르듯 강렬하게 눈을 끌어당기는 흑백사진 세 장.
그 속엔 아주 오래 전의 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 초겨울쯤이었던 모양입니다.
잔뜩 야윈 나무들이, 바람을 피하느라고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고, 그 길을 나무처럼 생긴 아이들이 걸어갑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교복 ‘비슷한 걸’ 입고 짧은 머리엔 교모로 보이는 모자도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중학생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옛날엔 국민학생(초등학생)도 교복처럼 생긴 걸 입기도 했지요.
아, 물론 중학생이어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발에는 고무신을 신은 것 같습니다.
검정 고무신이겠지요.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책보입니다.
어느 아이는 끈을 길게 늘여 핸드백처럼 메었고, 어느 아이는 어깨에 꽁꽁 묶었고, 또 어느 아이는 손에 들거나 옆구리에 끼었습니다.
공통점이라고는 책을 담은 게 가방이 아니라 보자기라는 사실 하나뿐입니다.
책보자기 혹은 책보따리라고도 부르던 책보.
낡은 흑백 사진에 담겨 제 눈을 찌르고 들어온 게 바로 그것이었지요.
지금 눈으로 보면 가난에 찌든 듯, 어찌 보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이들 모습이지만, 제 눈엔 얼마나 정답고 아름다운지요.
사진 속으로 풍덩 빠지기라도 할 듯, 코를 박고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70년대 이전에 농어촌, 혹은 산골에서 자란 이라면 누구나 책보를 기억할 것입니다.
학교가 드물던 시절이라 최소한 몇 리, 심하면 몇 십 리를 걸어서 등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등굣길의 풍경은 비슷비슷했습니다.
사내아이들은 책보를 어깨에 대각선 방향으로 매고 학교에 갑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멋을 낸다고 끈을 늘여 가방처럼 메거나 들고 다니기도 했지만 대세는 어깨에 비껴 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보통 허리에 둘러서 매지요.
누가 따로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그게 원칙이었습니다.
책을 싸는 보자기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광목이 주 재료였지만 삼베 같은 천도 썼습니다.
때가 탈 것에 대비해서 보통은 짙게 물들인 천이 많았지만, 울긋불긋 한 것도 있었고 구멍이 나서 군데군데 꿰맨 것도 흔히 볼 수 있었지요.
아침이면 학교 가기 전에 보자기를 펼친 뒤 그날 필요한 책을 올려놓고 김밥 말듯 둘둘 말아서 어깨나 허리에 매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책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필통이나 주판, 삼각자 같은 것들도 따라 들어가지요.
그런데 이 필통이 문제였습니다.
지금처럼 고급스러운 게 아니라, 대부분은 깡통 출신의 양철로 만든 것이었지요.
그 양철 필통에 든 몽당연필 두어 자루, 칼, 지우개, 컴퍼스 같은 것들이 학교에 가는 내내 달그락거리며 잔소리를 해댑니다.
천천히 걸을 땐 그나마 조용하지만, 뛰어갈 땐 달그락 딸그락 소리도 덩달아 빨라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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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 속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귀한 손님은 도시락입니다.
벤또, 혹은 변또라고 부르던 시절이지요.
도시락은 별도의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는 게 보통이었지만, 두 손이 자유롭고 싶은 아이들은 그걸 책보 안에 같이 쌌습니다.
문제는 손은 편해서 좋은데 가끔 속 뒤집어지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땐 도시락도 양철이나, 양은으로 만든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곰국을 담아도 새지 않는 도시락이야 상상도 못할 때지요.
밥을 풀 때, 도시락 한쪽을 조금 비우고 그곳에 작은 반찬통을 함께 넣는 그런 구조였습니다.
그렇게 싼 도시락을 책과 함께 싸서 어깨에 매고 학교에 가다보면 뭔가 찝찝한 게 흐르는 느낌이 듭니다.
벌써 그 ‘뭔가’는 코를 자극하기 시작하지요.
책보를 풀어보기도 전에 김칫국물이란 걸 압니다.
아우!! 그 쉰 냄새.
꽁보리밥에, 반찬이라고는 김치나 장아찌가 전부인 도시락이 줄줄 샜으니, 냄새가 요란한 건 당연하지요.
김칫국물을 실컷 마신 책은 벌겋게 취해있고, 밥과 김치는 제멋대로 붙잡고 도는 바람에 비빔밥이 된지 오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도시락의 추억은 쌓이기 마련이지요.
도시락 속의 젓가락들이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필통 정도는 기가 죽어 입도 벌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소풍 갈 때도 책보는 긴요하게 쓰입니다.
보리밥이 담긴 도시락과 삶은 달걀 두어 개가 싸입니다.
사정이 좀 나은 집 아이들의 책보에는 막사이다라고 부르던, 상표도 없는 사이다가 한 병 추가되기도 하지요.
그래도 책보를 들고 떠나는 소풍 길은, 어찌 그리 재미 있던지요.
엄마를 졸라 받은 동전 두 개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못 쓰고 그냥 돌아오는 때도 있었습니다.

옛날 시골아이들은 일꾼 하나 몫의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도시아이들보다는 훨씬 여유로웠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손짓하는 것도 많았지요.
빨리 가서 일손도 돕고 동생도 봐야 한다는 생각이 꼬리처럼 따라다니지만, 대개는 자연의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각종 열매의 달콤함에 주저앉기도 하고, 꽃마다 몰려든 꿀벌을 잡는다고 고무신을 돌리다 몇 시간씩 보내기도 했습니다.
책보에서 책을 분리해놓은 뒤 망또라도 되는 양 어깨에 매고 칼 싸움에 해지는 줄 모르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냇가의 물고기는 또 얼마나 매력적이었는데요.
책가방 집어던지고 물고기를 따라다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어? 책보를 어디에 뒀더라? 당황하는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대부분은 금방 찾지만, 영영 잃어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아서 학기 내내 옆에 남의 책으로 동냥 공부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엔 부지깽이가 엉덩이에서 춤추는 건 안 봐도 뻔하지요.
책보에 얽힌 사연은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옆집 필순이는 학교에 갈 때마다 눈물바다였습니다.
필순이 아버지가 “지지배가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 공부는 무슨 공부냐”고 책보를 감추는 바람에 아침마다 책보를 찾으러 다녔습니다.
어느 땐, 굴뚝 사이에서 어느 땐 장독대에서 책보를 찾아들고 엉엉 울며 학교에 갔지요.
그래도 책 보따리를 아궁이에 던져버렸다는, 삼숙이 아버지보다는 훨씬 나은 경우였지요.
책보를 목숨처럼 알고 지킨 덕분에 필순이는 훗날 대처에 나가 공부를 하고,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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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책보에 얽힌 잊지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동회 연습을 할 때니 아마 초가을쯤 되었을 겁니다.
우리 반은 그날따라 교실이 아닌 운동장 가에 책보를 놓고 연습을 했습니다.
운동회야말로 그 일대 모든 동네에 가장 큰 잔치였으니 연습은 전쟁이라도 치루 듯 치열했습니다.
오전 연습을 마친 뒤, 허기진 배를 안고 모두 허겁지겁 달려간 목적지는 책보를 둔 곳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도시락이 있는 곳이지요.
모두 3년 가뭄에 단비 만난 듯, 감격적인 표정으로 도시락과 조우하는 순간, 저는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도시락이, 아니 책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책보가 제 발로 걸어서 한양 길을 떠난 것은 아닐 테고, 누군가가 가져갔단 말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를 뺑뺑 돌며, 교실의 쥐구멍까지 뒤지며, 혹은 우물의 두레박까지 끌어올리며, 가끔은 알지도 못하는 신께 기도까지 하며 찾아봤지만 책보는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아아, 내 책보, 내 도시락…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저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수색작전은 그날뿐 아니라, 이튿날도 이어졌고,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책보는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훗날 세월이 흘러, 책보가 아픔보다는 추억이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배고픈 이가 있어 도시락을 가져간 것이라고.
나보다 더 공부하고픈 이가 있어 책을 가져간 것이라고.

책보에 얽힌 추억은 하루 종일 얘기해도 모자랄 만큼 많습니다.
6년 내내 아이들 곁을 지키는 게 책보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연이 쌓였겠습니까.
어쩌면 책보 안에는 책이나 도시락뿐 아니라 아이들의 꿈이 고스란히 싸여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책보를 붙들어 매고, 먼지 이는 신작로를 딸그락거리며 달리던 그 시절은 눈물까지도 꿈이었으니까요.
보자기라는 게 그렇잖아요.
서양에서 온 가방이 일정한 틀 안에만 물건을 담을 수 있다면, 우리의 보자기는 담을 수 있는 것의 형태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이 가능하거든요.
그러니 웃음인들 눈물인들 꿈인들 소망인들 담기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조금 억지를 부리자면, 그 보자기에 담겨있던 것들이 그 시절 우리를 키워주었는지도 모르지요.
이제 책보를 볼 수는 없습니다.
보자기야 아직도 어머니의 장롱 속에 남아있지만 그 안에 책이 담긴 보자기, 책보가 사라진 것이지요.
혹시 박물관에는 있을까 찾아가 봐도, 책보 따위는 보관 대상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가 과문한 건지도 모르겠고요.
지금도 깊은 산골, 어느 한적한 비포장도로를 지나노라면, 검정고무신을 신은 채 어깨에 책보를 매고 뛰어가는 어릴 적 제 모습을 봅니다.
주린 배에 밥 대신 꿈을 채워 넣던 그 아이가 저만치서 달려갑니다.
제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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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8. 08:30 사라져가는 것들
“당신 정말 계속 그러고 있을 거유? 그러다 그거 다 닳아 문드러지겄수. 지극 정성두 분수가 있지. 하루 이틀두 아니고, 그걸 밤새 닦을 건 뭐래유. 낼 새벽에 비 그치면 리아까 끌구 나갈 양반이… 할 일 없으면 다리나 주물러 주든지.”
구멍 난 양말을 꿰맨다고 초저녁부터 뻗정다리를 하고 앉아 졸다 말다하던 아내, 청양댁이 자리를 깔고 누우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고봉 씨는 눈길 한번 힐끔 준 뒤, 후후 입김까지 불어가며 무릎 위에 놓인 문패 닦는 일을 계속한다. 까만 바탕에 박힌 자개가 파리똥 덕지덕지 붙은 알전구의 불빛만으로도 영롱하게 빛난다. 문패의 오른 쪽 위로부터 집주소가 내리닫이로 적혀 있고 한 가운데는 큼직한 글씨로 許高峰(허고봉)이라고 쓰여 있다.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듯 제법 멋을 낸 필체다. 그걸 들여다보는 고봉 씨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 한 가닥이 걸린다. 이번엔 구두를 닦듯, 손가락에 천을 단단히 감은 고봉 씨가 좀 더 빠른 속도로 문패를 문지른다. 잠시 뒤엔 문패를 조금 멀리 밀어놓고, 가느스름한 눈으로 바라본다. 좀 더 큰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청양댁의 코고는 소리와 어울려 장단을 맞춘다. 장마가 시작된 지 나흘이 지났다. 고봉 씨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더니 그리움 한 덩어리를 연기에 담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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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꼭 문패를 달고 살거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다시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남들은 아들에게 “장관이 돼라” 혹은 “선생님이 돼라”, 하다못해 “펜대를 굴리고 살아라”라고 당부한다는데 고봉 씨의 아버지 만복 씨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문패를 달고 살라”는 말을 남기고 저승길로 떠났다. 운명을 하기 전, 가릉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가 갑자기 억센 손아귀로 고봉 씨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보물이 묻힌 장소라도 말해주듯 귓속말로 남긴 말이 문패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금세 숨을 거뒀다. 잠시 어리둥절한 채 앉아있던 고봉 씨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난과 집 없는 설움이 얼마나 뼛속 깊이 박혔으면 ‘문패’를 유언으로 남겼을까. 아버지는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 소작인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부치던 땅을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하층민의 배고프고 서러운 삶을 살다 갔다. 평생 한 일이라고는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남들이 싸지른 똥을 퍼 나른 게 전부였다. 농사지을 땐 생산을 위해 똥을 펐지만 도시에 와서는 버리기 위해 똥을 펐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여름에는 빗물에 넘쳐흐르는 똥을 펐고 겨울에는 꽁꽁 언 똥을 깨트려가면서 펐다. 그렇게 똥을 퍼서 가족의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고봉 씨도 공부 같은 건 꿈도 못 꾼 채 또 하나의 ‘준비된 빈민’으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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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떠난 뒤 고봉 씨의 삶의 목표는 문패가 되었다. 문패를 달기 위해서는 대문이 있어야 되고, 대문에 내 이름을 걸 수 있다는 건 내 집을 가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집이란 게 어디 장에 가서 검정고무신 사오듯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배운 것 없이 몸뚱이 하나만 달랑 가진 고봉 씨로서는 사다리를 놓고 달나라에 가겠다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꿈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밑천 삼을만한 건 없었다. 물려받은 거라고는 보증금 없는 월세 방과 멜빵 나달거리는 지게 하나, 바퀴에 바람 빠진 리어카 한 대뿐이었다. 아니, 또 하나, 남 다른 솜씨가 있었다. ‘재주 많은 사람은 밑구녕 찢어지게 산다’는, 덕담보다는 어깃장에 가까운 옛말이 있었지만 고봉 씨에게는 그게 유일한 밑천이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처음엔 하수구 치우기, 굴뚝청소, 아버지의 평생사업이었던 똥 푸기 같은 막일을 했다. 조금 지나면서 리어카에 고물을 수집하는 일로 전업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고물장수에 머물지 않았다. 각종 도구를 싣고 다니며 땜장이도 하고 수리공도 했다. 물론 하수구를 치워달라면 치우고 굴뚝을 뚫어달라면 뚫어주고 칼을 갈아달라면 갈아줬다. 새는 지붕을 고쳐주고 깨어진 유리창을 갈아주기도 했다. 그를 불러 해결되지 않는 일은, 할머니에게 애를 점지해달라거나 게으름뱅이를 부자 되게 해달라는 거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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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리어카는 만물창고였고, 그의 직업은 만능 해결사였다. 어느 동네에서도 그는 인기가 좋았다. 동네 입구를 들어서며 “고물 팔아요~ 솥이나 냄비 때워요~ 굴뚝 뚫어요~ 지붕 고쳐요~” 외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고 그에게 손짓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동네에서는 하루 종일 잡혀있기 일쑤였다. 일을 하면서도 그의 눈길은 자주 이집 저집의 대문에 머물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패에 가 있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태어난 다음이었지만, 고봉 씨의 문패를 향한 꿈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문패는 집을 가졌다는 상징이고 징표였다. 그래서 누구나 집을 마련한 순간 자랑스럽게 문패부터 내걸었다. 문패도 가지각색이었다. 거친 판자에 조악한 솜씨로 직접 쓴 것, 잘 깎은 나무에 전문가의 손으로 쓴 뒤 니스 칠을 한 것, 돌에 이름을 새겨 넣은 것, 자개를 붙여서 만든 것…. 얼떨결에 부자동네에 들어가는 때도 있었는데, 거기서도 고봉 씨의 시선은 문패에 가있고는 했다. 그런 동네의 문패는 서민들이 사는 동네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드문 일이었지만, 부부 이름을 나란히 적은 집도 있었다. ‘남우세스럽게 문패에 마누라 이름을 적누. 이 인간은 처가살이를 하든가. 마누라한테 잡혀 사는 못난이가 틀림없어…’ 그는 혼자 씨익씨익 웃으며 부자 동네를 구경하고 다녔다. 그런 동네에서는 그의 손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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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처럼 일하고 개미처럼 먹었지만, 집을 살만한 돈은 쉽사리 모아지지 않았다. 청양댁도 남의 식당에서 밤늦도록 일했지만 돈은 늘 저만치서 꼬리만 흔들었다. 더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돈 들어갈 일은 자꾸 생겨났다. 고봉 씨는 이러다가는 살아생전 아버지 유언을 못 들어드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유달리 힘든 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패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유리창 안으로 견본을 들여다보면서 “난 저걸로 해야지, 저 글씨가 좋겠군….” 혼자 흥을 돋우기도 했다. 집을 살 기회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하지만 좋아할 일이 아니라 땅을 치고 통곡할 사건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청양댁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당한 사고였다. 집을 빨리 마련하겠다고 늦게까지 일한 게 화근이었다. 골반이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이었다. 몇 달 간 병원에 누워있다 퇴원하는 길에는 목발과 약간의 보상금이 따라왔다. 눈물에 젖어 지내던 청양댁이 어느 날 고봉 씨를 부르더니 보상금과 그동안 모은 돈을 합쳐 집을 사자고 했다. 결국 놔두면 쏠락쏠락 푼돈으로 사라질 테고, 다리 한쪽과 바꿀 만큼 가치 있는 건 집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고봉 씨로서야 유구무언이었다. 청양댁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며칠 산동네를 돌아다니더니 덜컥 집 하나를 계약했다. 세를 사는 동네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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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라고는 하지만 양지바른 곳이었다. 누군가가, 그곳이 물길을 메우고 집터를 닦은 곳이라 비가 많이 오면 산사태가 날지도 모른다고 귀띔했지만, 그 말을 흘려들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물론 판잣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허름한 집이었다. 원래 방 두 개 부엌 한 칸인 집이었는데, 전 주인이 처마 끝에 사람 두엇 누울 만한 방을 더 들여서 방이 세 개나 되었다. 번듯한 대문은 아니었지만, 양쪽에 든든한 말뚝을 세우고 함석 문을 달아놓아서 문패를 다는 것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고봉 씨는 계약금을 건네자마자 문패집부터 찾아갔다. 아내의 다리를 팔아 산 집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울하고 무거웠지만, 드디어 아버지의 유언을 이룬다는 가쁨에 날아갈 것 같기도 했다. 문패장수가 문패는 나무로 하는 게 가장 좋다고, 괜히 겉멋 든 사람들이 자개니 금박이니 찾는 거라고 거들었지만, 고봉 씨는 자개문패를 고집했다. 스스로도 손바닥만한 판잣집에 자개문패가 과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문패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가슴에 달아드리는 이름표였다. 평생 짐승처럼 살다간 아버지에게 “당신의 자식이 이렇게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고하는 선언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금이라도 박아 넣고 싶었다.

비는 아침에도 그치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 붓는다.
“에이, 이게 벌써 며칠 째여”
쪽마루에 앉아서 원망스런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던 고봉 씨가 끄응!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비가 오면 일을 나갈 수 없다. 아내도 일을 못하는데 자신마저 며칠 씩 놀고 있다는 생각에 영 바늘방석이다. 방에서는 청양댁이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혼자 이삿짐을 싸고 있다. 이삿날이 한참 남았는데도 조급증이 난 것이었다. 그 꼴을 보니 버럭 화증이 인다. ‘장마가 오기 전에 이사를 했어야하는데… 우리 주제에 뭔 남의 사정을 봐준다고…’ 새로 산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옮길 곳을 못 구했다고 울며 사정하는 바람에, 잔금까지 치르고도 이사를 연기한 참이었다.
“거, 라지오 좀 틀어봐. 대체 이놈의 비가 언제까지 온다는 거여”
라디오에서도 악마구리 우는 소리가 난다. 물난리… 산사태… 참사… 어쩌구하는 흥분된 목소리가 다급하게 튀어나오는 걸 보니 뭔가 큰 난리가 나긴 난 모양이다.
“가만 가만, 시방 저게 뭔 소리여? 저기가 거기, 거기, 우리 집 있는 데 아녀?”
고봉 씨의 더듬거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양댁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다리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내닫는다. 고봉 씨가 따라 나갔을 땐 이미 빗속으로 뛰어든 뒤다.

산 한쪽이 뭉텅 떨어져 나갔다. 드러난 속살이 뻘건 황토물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린 뒤였다. 그 속에 묻힌 집들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몇몇 집은 내동댕이쳐진 채 장난감처럼 부서져 있었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하늘에서는 화살 같은 햇살이 연신 쏟아져 내린다. 여기저기서 통곡이 봇물처럼 터진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고봉 씨에게 기대고 있던 청양댁의 몸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이봐! 이봐!” 소리치며 아내를 들쳐 업던 고봉 씨의 몸에서 문패가 툭! 떨어진다. 황토에 누운 작고 까만 몸피가 유난하게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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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25. 08:4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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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人力車) 타보신 분들 있나요?
일본, 중국의 관광용 인력거나 인도에서 ‘비인간적 노동’이라 칭하는 릭샤 말고요.
1800년대 말에 이 땅에 들어와서 해방 전에 대부분 자취를 감췄으니까, 직접 타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인력거.
말 그대로 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끌어서 움직이는 1~2인승 수레를 말합니다.
구조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자전거바퀴처럼 생긴 큰 바퀴 2개, 한 두 사람이 앉을만한 공간, 비나 햇볕을 가릴  포장, 붙잡고 끌 수 있는 손잡이….
바퀴는 처음에 철제였다가 점차 통고무 소재로 바뀌었고, 더욱 진화해서 1910년대에는 압축공기를 넣은 타이어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인력거는 일본인들이 서양마차를 본 따 1869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요.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건 고종 31년(1894년)년이었습니다.
처음 도입될 때는 사람의 힘으로 끈다고 하여 완차(腕車) 또는 만차(挽車)라고 했다지요.
하나야마(花山帳長)란 일본인이 10대를 들여와서 현재 영락교회 부근에 점포를 내고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이 일어나 경인간에 교통량이 폭주하는 바람에 톡톡히 재미를 봤다고 합니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 안에 (거기도 문 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차 길까지 모셔다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주기로 되었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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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인력거꾼은 전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그것도 기술이라고, 서투른 이 땅 일꾼들이 인력거를 몰다가 손님을 메다꽂기 일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력거는 돈 푼깨나 쥔 사람들의 교통수단으로 서울은 물론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까지 급속히 보급됐습니다.
이런 토양 속에서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 개벽)이 태어나게 됩니다.
비극의 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희화화한,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만들어내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 땅 유민의 역사나 달동네의 생성 과정에서 보듯이 비참한 배역은 늘 민초의 몫이지요.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던 농투성이들이 그나마 소작하던 땅까지 떼이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습니다.
지게꾼도 치열한 경쟁이 있어야 한 자리 차고앉을 수 있고, 똥을 푸거나 굴뚝을 뚫는 일이라고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나마 인력거꾼이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도록 해주는 수단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래서 운수좋은 날의 ‘김 첨지’가 양산되었겠지요.
우리 근대사의 아픔을 천형처럼 등에 진….

첫째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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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고위관리들이 인력거를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또 기차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좁은 골목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점과 인력거꾼들이 지리를 잘 알고 있어서 집을 찾는데 편리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기생들도 단골손님이었다지요.
요릿집에 간 손님이 종업원에게 기생을 지명하게 되면, 즉시 기생조합에 연락되어 인력거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도로망이 확충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늘어나는 인력거는 보행자들에게 위험요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땅에 최초의 교통법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908년(순종 2년) 경무청이 마련한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바로 그것인데요.
인력거의 영업허가, 인력거꾼의 자질, 운임, 속도, 정원(定員), 서로 길을 비켜주는 규칙 등을 규정했습니다.
또 1914년 7월에는 인력거취체규칙(人力車取締規則)이라는 게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각 경찰서에서는 이 규칙에 따라 정한 날짜에 인력거 검사를 실시했는데 대개 인력거의 수선 상태 차부의 복장 단정여부를 검사했습니다.
아무튼 높은 사람들만 탈 수 있던 교자나 가마, 혹은 말이 전부였던 시대에 인력거는 꽤 유용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력거가 들어온 지 30년 가까이 된 1923년 말 서울에 1816대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국에 4647대가 있었으니 약 37%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던 셈입니다.

그 학생을 태우고 나선 김 첨지의 다리는 이상하게 거뿐하였다. 달음질을 한다느니보다 거의 나는 듯하였다. 바퀴도 어떻게 속히 도는지 끈다느니보다 마치 얼음을 지쳐나가는 ‘스케이트’모양으로 미끄러져가는 듯하였다. 얼은 땅에 비가 내려 미끄럽기도 하였지만. 이윽고 끄는 이의 다리는 무거워졌다. 자기 집 가까이 다다른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염려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런 말이 잉잉 그의 귀에 울렸다. 그리고 병자의 움쑥 들어간 눈이 원망하는 듯이 자기를 노리는 듯하였다. 그러자 엉엉 하고 우는 개똥이의 곡성을 들은 듯싶다. 딸국딸국 하고 숨 모은 소리도 나는듯싶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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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를 부르는 방법은 요즘의 콜택시와 비슷해서 타려는 사람이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면 보내주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대절인 셈이지요.
돈 많고 힘깨나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도 자가용 인력거를 두었다고 하네요.
물론 부르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빈 인력거를 탈 수 있었고, 역 앞이나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는 인력거꾼들이 진을 치기도 했지요.
물론 그곳에도 텃세가 있어 인력거가 있다고 해서 아무나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운수좋은 날’을 읽으면서 궁금한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인력거를 가졌는데 왜 그렇게 가난한 걸까?
지금의 개인택시쯤으로 생각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영업용 택시가 그렇듯이 대부분은 ‘회사 인력거’였다고 합니다.
즉, 차를 소유한 사람(車主)과 그것을 끄는 인력거꾼(車夫)이 따로 있었던 거지요.
인력거꾼들은 차주의 횡포로 인해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형편이니 꾹꾹 참으며 감수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견디다 못해 인력차부조합(人力車夫組合)이란 걸 만들어서 공동투쟁을 펼쳤지만, 예나 지금이나 노동력이 자본력을 이기는 게 어디 그리 쉬웠을라고요.

정거장까지 끌어다주고 그 깜짝 놀란 일 원 오십 전을 정말 제 손에 쥠에, 제 말마따나 십 리나 되는 길을 비를 맞아 가며 질퍽거리고 온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나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 자식뻘밖에 안 되는 어린 손님에게 몇 번 허리를 굽히며, “안녕히 다녀옵시요.”라고 깍듯이 재우쳤다. 그러나 빈 인력거를 털털거리며 이 우중에 돌아갈 일이 꿈밖이었다. 노동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옷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일 원 오십 전이란 돈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절히 느끼었다. 정거장을 떠나는 그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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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은 지금 시세로 정확하게 환산하긴 쉽지 않겠지만, 서울에서 인천을 가는데 쌀 반 가마니 값이 넘었다고 합니다.
1922년에는 승객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인력거요금을 내렸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보면 ‘종래 10리(里)에 80전 하던 것을 60전으로, 하루에 5원 하던 것을 4원으로 인하한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인력거꾼에게는 워낙 박한 수입인지라 손님과의 요금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인력거시대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각종 교통수단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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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년에는 임대승용차(택시)라는 게 등장했고, 그밖에도 전차, 버스 등이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한참동안은 인력거와 신문물의 공조가 가능했겠지요.
하지만 영세한 자본과 절대수송량의 빈곤을 이길 방법은 없었을 겁니다.
결국 인력거도, 거기에 기대어 입에 풀칠이나마 하던 인력거꾼도 서서히 도시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1923년에 전국적으로 4647대였던 인력거는 1931년에 2631대로 줄었습니다.
반대로 자동차는 4331대로 늘었고요.
해방 무렵에는 서울에서 구경조차 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기록에는 일부 지방도시에서 6·25전쟁 후에도 인력거조합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때쯤에는 이미 운송수단으로의 가치는 모두 상실한 다음이었겠지요.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버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느냐, 응.”
하는 말끝엔 목이 메었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에 어릉어릉 적시었다. 문득 김 첨지는 미칠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