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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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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31. 09:00 사라져가는 것들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월이 호환(虎患)이나 마마보다 무섭다는 걸 실감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세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게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주름살을 그려놓고 등을 휘게 할 뿐 아니라, 눈 깜빡할 새에 주변에 있던 것들을 훑어가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라진 것 중에는 다양한 ‘직업’도 있는데, 언뜻 떠오르는 것만 해도 땜장이, 굴뚝청소부, 엿장수, 버스 차장 등 헤아리기 숨찰 정도입니다.
돌아보면 그리 먼 시절도 아닌데 말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땜장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땜장이가 있어서 그나마 덜 팍팍했지요.
지금이야 뭐든지 쓰고 버리는 게 당연한 줄 알지만, 뚫어지고 찌그러지고 깨져도 모양만 남아있으면 깁고 때우고 묶어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전문으로 하는 땜장이는, 3년 가뭄 끝에 쏟아지는 비처럼 반가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지요.

땜장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솥땜장이입니다.
“솥이나 냄비 때워요~ 뚫어진 그릇 때워요~”
단골로 땜장이의 목소리가 고샅을 한 바퀴 휘돌면 동네 자체가 술렁거리기 마련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면 한참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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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땜장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야 되거든요.
땜장이는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린 다음, 동네에서 가장 큰 마당의 느티나무 아래에 자리를 폅니다.
그러면 동네사람들이 솥이든 그릇이든 구멍 난 것 하나씩 들고 모여듭니다.
때울 게 없는 사람도 구경삼아 나옵니다.
사실 하늘이나 강물, 혹은 사람의 마음 같은 것만 아니라면 땜장이가 때우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각종 솥이나 냄비는 물론이고 화로, 그릇, 아이들 도시락까지 구멍 뚫린 것들은 몽땅 땜질의 대상이 되지요.
느티나무 아래로 어른들만 모여드는 건 아닙니다.
변변한 구경거리가 없던 시절, 땜장이의 감쪽같은 재주야말로 놓치고 싶지 않은 볼거리입니다.
그러니 뒷방 노인들부터 아이들, 강아지까지 신이 나서 마당을 채우게 마련이지요.

솥이나 냄비를 때우는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제법 재미있습니다.
아주 작은 구멍은 알루미늄이나 납 재질의 납작머리 리벳(금속재료를 결합하는 못)을 대고 망치질 몇 번으로 때우기도 합니다.
그보다 큰 구멍은 조금 거창한 수술 과정을 거치게 되지요.
땜장이는 사람들이 모여들면 우선 납 녹일 준비부터 합니다.
숱이 담긴 조그만 화로에 용광로 구실을 하는 작은 도가니를 얹고, 그 안에 납 조각을 몇 개 넣습니다.
그리고 숱에 불을 붙이고 풍구를 돌리면 도가니가 달아오르면서 납이 녹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땜질을 할 차례입니다.
손잡이를 구멍 한쪽에 대고 납물을 떠서 부은 뒤 다른 손잡이로 꾹 눌러줍니다.
그러면 납이 감쪽같이 붙어 구멍을 메우게 됩니다.
조그만 망치로 톡톡 두드려 고르게 한 뒤 물을 부어서 새는지 확인만 하면 모든 공정은 끝납니다.
말로 하니 쉬울 것 같지만, 땜질 과정은 나름대로 고도의 기술입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납땜이 끝난 뒤에야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큰 숨을 몰아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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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땜장이는 솥이나 냄비만 때우는 건 아니었습니다.
뚫어지고 깨어진 것이라면 무엇이건 그의 손을 거쳐 멀쩡한 물건이 되고는 했지요.
아이들 돌팔매질로 깨진 간장독이나 긴 세월이 무거워 금이 간 김칫독도 그냥 버리는 법은 없었습니다.
깨어진 독이나 항아리는 원래 형태대로 잘 맞춘 뒤 접착제를 바르고 철사 같은 것으로 얽어서 고정시킵니다.
이렇게 때운 독은 곡물을 담거나 허드레용으로 또 한세월을 나게 됩니다.
그밖에도 땜장이의 손이 필요한 곳은 많았습니다.
동네 우물의 두레박이 망가지면 새것처럼 만들어놓고, 덜렁거리는 문틀이나 비새는 지붕을 손봐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땜장이가 마을에 들어오는 날은 아이들이 경을 치기도 했습니다.
땜질을 하려고 한쪽에 잘 보관해뒀던 냄비를 어른들 몰래 엿으로 바꿔먹는 녀석들이 가끔 있거든요.
멀리서 “솥이나 냄비 때워요~“ 하는 소리가 들리면 일을 저지른 녀석들은 슬금슬금 꼬리를 감추기 바쁩니다.
하지만 도망친다고 용서 받을 턱이 있나요.
일을 마친 땜장이가 길어진 그림자를 끌며 마을을 떠날 때쯤이면, 어미에게 뒷덜미를 잡혀온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담을 넘는 건 예사였지요.

땜장이계의 대표선수 중에는 고무신땜장이도 있었습니다.
돈이 샘물 흐르듯 하는 부잣집이야 모르겠지만, 보통은 구멍 난 신발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었지요.
몇 번씩 깁고 때워 쓴 뒤 정말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나야 엿가락이나 빨래비누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고무신도 함께 때우는 솥땜장이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고무신 땜장이는 동네마다 돌아다니지 않고 장을 따라 돌았습니다.
솥하고는 달리 고무신은 비교적 쉽게 들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또 장비가 꽤 무거워서 동네마다 지고 다니기도 불편했을 테고요.
고무신 때우는 것도 솥 때우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습니다.
먼저 구멍보다 조금 크게 고무를 오려놓고, 고무신의 덧댈 면을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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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솔이나 사포로 문지릅니다.
솔질은 찌든 때를 벗기려는 목적도 있지만 고무에 미세한 흠집을 만들어 접착력을 높이는 역할도 합니다.
다음으로 구멍 주변과 덧댈 고무에 고무풀을 바르고 약간 기다린 뒤 양면을 붙여 꾹꾹 눌러줍니다.
여기서부터는 기름 짜는 기계와 비슷하게 생긴 고무신 수선 기계가 쓰입니다.
먼저 여러 개의 바닥쇠틀 중에 맞을만한 것을 골라 고무신을 고정시킵니다.
그 위로 쇠틀을 올려놓고 축을 돌려 압착시킵니다.
이때 누름쇠는 사전에 뜨겁게 달궈서 고무가 떨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물이 질질 새던 고무신도 감쪽같이 때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고무를 덧댄 신발이 새 것처럼 예쁘기야 하려고요.
아이들은 새 신발을 얻어 신을까 기대하다가, 고무를 덧댄 헌 신발이 돌아오면 입이 나팔만큼 나오기도 하지요.

가마솥이나 고무신조차 볼 수 없는 지금, 아이들에게 그 시절 얘기를 들려주면 ‘전설의 고향’이라도 듣는 기분이겠지요?
솥을 때우는 땜장이든, 고무신을 때우는 땜장이든 세월의 뒤안길로 걸어 들어간 지 오래니까요.
재활용이란 단어조차 사망해버린 세상에 때운다는 말 자체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실을 증명하듯 땜장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녀봤지만 사진 한 장 제대로 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게 풍부하고 편리해진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살벌할까요?
왜, 제겐 여전히 “솥 때워요~ 냄비 때워요~” 하는 소리가 눈물을 동반하는 그리움일까요?
어쩌면 땜장이들은 솥이나 고무신뿐 아니라, 구멍 난 세상을 몰래 때우면서 세상을 돌아다녔던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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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17. 09:1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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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때처럼, 온몸에 고집스레 들러붙는 겨울을 떨쳐버리려 남녘땅으로 도망쳤던 어느 이른 봄이었나봅니다.
그 때 비가 왔는지, 아니면 오다가 그쳤는지, 그 순간이 지난 뒤 내리기 시작했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습니다.
손이라도 닿을 듯 낮게 가라앉았던 하늘만 뇌리 어딘가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온기와 멀어진 지 꽤 오래인 듯, 썰렁하기 그지없는 어느 폐가 옆을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애당초 사람의 자취를 몰랐던 곳보다, 사람이 살다 떠난 곳은 훨씬 더 눈물겹습니다.
역마살을 천형처럼 등에 지고 이 땅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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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런 곳을 지날 때마다 발목에 납덩이 하나쯤 더 붙인 듯 허둥거립니다.
서설(序說)이 너무 길어 ‘새살’이 되고 말았네요.
아무튼, 텅 빈 눈길로 그 집 옆을 지나다 돌담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그 무엇을 보았습니다.
저게 설마… 하눌타리?
하도 오랜만에 보는지라 금방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른 달려가 보니 아, 역시 하눌타리였습니다.
여름부터 매달려 가을햇살에 몸을 익히고 바람과 비와 눈을 맞으며 겨울을 났을 열매들.
이파리들과는 오래전에 이별을 하고 실낱처럼 여윈 줄기에 몸을 맡긴 채 오가는 바람에 그네를 타고 있었습니다.
어느 것은 썩고 어느 것은 그런대로 제 모습을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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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
근사한 이름이지요?
하늘타리라고도 부르지만 표준말은 하눌타리로 되어있습니다.
하눌타리든 하늘타리든, 어디 열매나 식물 이름에 ‘하늘’이 들어간 게 그리 흔한가요?
어쩌다가 하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인지 확실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늘다래’라는 말이 어원이란 말도 있고 한자 ‘천원자(天圓子)’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렇게 됐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 좋은 하눌타리를 볼 때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슬그머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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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겉만 번지르르 하고 실속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 연상되기도 하고요.
하눌타리는 사실 그 화려한 외양에 비해서 그리 사랑 받는 열매는 아닙니다.
그래서 과루등ㆍ하늘수박ㆍ천선지루 등 그럴싸한 이름을 많이 갖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개수박ㆍ쥐참외 등으로 더 자주 불리는 편입니다.
어렸을 때, 하눌타리를 보면서 실속 없이 군침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워낙 배고프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오렌지색으로 익어갈 무렵에는, 꼭 잘 익은 과일에 못지않게 먹음직스럽거든요.
동네의 못된 개구쟁이들은 이 하눌타리로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참왼지 하눌타린지 잘 구분이 안 되는 꼬맹이들을 데려다 먹어보라고 꾀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참혹하지요.
그렇게 생으로 먹을 만 한 게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비위 약한 사람들은 토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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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는 박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덩굴식물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요.
산기슭이나 밭둑 같은 인가 근처에 자생하는데, 가까이에 있는 나무를 타고 오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담장에 담쟁이 대용으로 심기도 했지요.
여러해살이이고 번식력이 좋기 때문에 한번 심어놓으면 해마다 알아서 담을 감싸주었습니다.
지금도 하눌타리와 수세미오이가 주렁주렁 열려 키를 재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암수딴그루인데 7~8월의 뙤약볕 아래서 하얀 꽃을 피워냅니다.
꽃받침과 화관은 각각 5개로 나눠지고 화관의 각 조각은 다시 실처럼 갈래갈래 갈라집니다.
어찌 보면 천사의 옷깃처럼 아름답고, 어찌 보면 빗질 안한 여자의 머리처럼 헝클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잎은 어긋나고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집니다.
10월쯤이면 열매가 익어 오렌지색을 자랑하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제 어릴 적 보던 것은 주먹만 하게 둥근 것이었는데, 남쪽에서 본 것은 타원형으로 조금 길쭉했습니다.
다 익은 것은 속까지 노란색으로 변하고 박씨처럼 생긴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뿌리는 고구마처럼 굵고 길게 자라는데, 전에는 기근이 들면 이 뿌리를 우려내어 먹었다고 합니다.

제가 앞에서 하눌타리를 ‘이름과 겉만 번지르르 하다’고 하찮은 듯 말했지요?
그런데 어쩌면 그 말을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선배에게 하눌타리 얘기를 했더니, 대뜸 반색을 하는 겁니다.
“나 어렸을 때는 그것 따다가 한약방에 주면 돈을 줬다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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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타리는 한방에서는 버릴 게 별로 없는 꽤 중요한 약재로 칩니다.
열매는 화상이나 동상을 치료하는데 쓰고 거담ㆍ진해제로 이용합니다.
열매 삶은 물로 술을 담가 마시면 통증 완화에 좋다고 합니다.
또 뿌리는 녹말을 채취하여 찜질약으로 이용하거나 강장ㆍ해열ㆍ거담제로 씁니다.
잎 역시 더위를 먹고 열이 나는데 특효약이라고 합니다.
하눌타리가 약재로 쓰이는 것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언제 쓰자는 하눌타리냐’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지요.
하눌타리는 담을 없애는 데 효험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담에 걸렸는데도 그걸 모르고 벽에 걸어두기만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집에 놀러왔던 사람이 벽에 걸린 하눌타리를 보고는 “담을 앓으면서도 왜 저 하눌타리를 걸어놓기만 하는 거요?” 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이게 담을 치료하는 데 쓰는 물건이란 말이요?” 하더랍니다.
이때부터 어떤 물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쓸 곳에 쓰지 않을 때 ‘언제 쓰자는 하눌타리냐’ 라고 했답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旬五志)’에 실려 있는 이야깁니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느끼는 거지만, 쉽사리 예단하고 무시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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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눌타리라는 이름조차 낯선 젊은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돌담이나 나무에, 탯줄처럼 이어진 줄기에 매달려 바람 따라 그네를 타던 열매들.
누가 특별히 챙겨준 적 한번 없지만, 그들은 늘 그 자리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을 산 사람들에게는, 열매로서가 아니라 추억으로 뼈마디마다 각인되어 있겠지요.
남녘 어느 동네에서 홀로 빈집을 지키던 하눌타리 몇 개를 보고, 그렇게도 반가워했던 이유도 그것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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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3. 09:34 사라져가는 것들
밤깐산 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동네를 내려다보던 해가,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동시에, 툇마루에 앉아있던 아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린다. 멈춰주기를 그리도 소망했던 시간은 성큼성큼 걸어와 운명의 순간을 코앞에 데려다 놓았다. 지금쯤 동네사람들은 모두 철구네 집 큰방에 앉아 있을 것이다. 재채기라도 하면 눈총을 받을까봐 숨을 죽인 채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몇 번 몸을 들썩거려보지만 엉덩이는 마루에 그대로 붙어있다. 제갈공명과 장자방이 한꺼번에 온대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발톱 빠진 늙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담을 넘고 뒤란을 지나온 땅거미가 마당에 수묵화 한 점을 깔아놓는다. 아이 얼굴에 후회의 그림자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아! 그 순간만 잘 넘겼더라면…. 문제는 학교에서 시작됐다. 점심시간이었다. 꽤 빨리 도시락을 까먹고 나갔는데도 몇몇 아이들은 벌써 나와 운동장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자 애들은 축구를, 몇몇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거기엔 애경이도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가슴을 방앗간집 발동기처럼 쿵쾅거리게 만드는 애경이. 앞에만 서면 숨이 차올라와 말 한번 제대로 못 붙여본 애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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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하는데 끼어볼까, 플라타너스 아래서 말뚝박기를 할까, 아니면 딱지를 칠까, 망설이고 있던 아이의 눈에, 철구의 수상쩍은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뭔가 감추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표범처럼 조심스럽고도 탐욕스런 모습이었다. 아이가,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일이 저질러진 다음이었다. 철구가 날쌔게 달려들어, 숨겼던 칼로 고무줄을 끊어놓은 것이었다. 여자애들의 비명이 새떼처럼 푸드득 푸드득 날아올랐다. 아이에게는 오로지 애경이의 비명만 들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후벼 파는 듯 아팠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자애들 편을 든다는 건, 거시기를 떼고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늘은 테레비에서 레슬링을 하는 날이었다. 아! 김일 선수의 그 시원스런 박치기. 그걸 못 보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철구에게 잘못 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눈을 꾹 감고 돌아섰지만,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악운과 이미 악수를 나눈 뒤였다. 전쟁에서 이긴 로마 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다가온 철구가 아이의 어깨를 툭 쳤다. 아이가 주먹을 한번 부르르 떨었지만 금세 웃음을 얼굴에 깔았다. 테레비라는 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아이가 왕이라면 철구는 마부에도 못 미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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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딱지 치자.” 철구가 명령이라도 하듯 내뱉더니, 대답 따위는 아랑곳없이 한 동네에 사는 아이 몇 명을 불렀다. 모두 ‘황공무지로소이다’ 하는 표정을 앞세워 모여들었다. 하필 그 순간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시작된 딱지치기가 비극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이상한 날이었다. 아이가 치기만 하면 철구의 딱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너부죽 너부죽 넘어갔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일부러라니…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살살 쳤다. 얼마 안 있어 철구의 딱지가 바닥을 드러냈다. 철구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과 비례하여, 아이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갔다. 씩씩거리던 철구의 입에서 저주의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넌 우리 집에 오지마!!!” 그리고는 약이라도 올리듯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 집에 올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뉘라서 그 암흑 속의 등불과 같은 손가락에 경배하지 않으랴. 철구가 아이를 바라보며 비리게 웃더니 침을 탁 뱉었다. 거기까지도 잘 참아 넘긴 것 같았다. 아이의 눈이 뒤집어진 건, 철구에게 달라붙은 아이들 가운데서 애경이의 단발머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때 무릎이라도 꿇고 사정을 했어야한다. 이 딱지 모두 갖고 마음을 돌려달라고. 하지만 그런 쓸모 있는 생각은 꼭 나중에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그저 주먹 한번 휘둘렀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널브러진 철구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모든 건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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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 철구가, 마을 아이들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 건 테레비가 나타난 뒤부터였다. 월남(베트남)에서 돌아온 철구 막내삼촌, 영팔씨를 따라온 것이었다. 꽤 오래 전이었다. 그 귀한 것도 처음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동네에 테레비가 웬말이냐고, 되레 웃음거리가 되었다. 철구 아버지가 그걸 팔아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전기 없이 텔레비전을 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동네에 느닷없이 전기가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읍내와 마을 사이에 큰 공장이 들어서면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듯 마을까지 전봇대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애물단지로 전락해 통한의 세월을 보내던 텔레비전이 드디어 세상을 호령하기 시작했다. 땅이나 파먹고 살던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가 노래도 하고 춤도 추니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라디오 안에도 사람이 들어있을 거라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말도 많고 해석도 구구했다. “저기 나오는 사람들이 ‘라지오’ 안에 있던 그 사람들이여? 그런디 저 사람들은 뭘 먹구 산디야?” 하는 걱정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근처 3개 면(面)에서 최고의 바보로 공인된 삼룡이가 울고 갈만한 말도 오갔다. “즌기가 나가면 워떻게 본댜?” “아, 걱정도 팔자여. 테레비 뒤에다 촛불을 스무 개쯤 켜놓으면 지가 안 나오고 배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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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과 여닫이문까지 달려 제법 위엄을 갖춘 텔레비전은 금세 동네 명물 자리를 꿰찼다. 철구 아버지는 누가 몰래 훔쳐볼세라 여닫이문에 수박만한 자물쇠를 달아두었다. 텔레비전이 제 구실을 하면서 그는 일약 동네 유지로 부상했고, 날마다 쥐어 박히고 얻어터지는 게 일이던 철구는 꼬마대장으로 등극했다. 철구 삼촌 영팔씨를 떡 훔쳐 먹은 옆집 개 보듯 하던 사람들도, 아부를 콩고물처럼 묻혀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말이여. 영팔이가 큰 인물이 될 중 알었어. 개천에서 용 난다고 허잖여. 어릴 적버텀 싹수가 퍼러스롬한 게 남달렀다니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싸가지가 바가지만도 못헌 놈”이라고 욕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멋쩍은 웃음을 선물 삼아 저녁마다 철구네 마당을 들어섰다. 어른들은 그렇게라도 때우면 됐지만,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왕자’ 철구는 아이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평소에 눈이라도 한번 잘못 흘긴 애들은 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 황홀함으로 가득 찬 텔레비전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하는 아이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읍내 만화방에 가면 10원씩 내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게까지 갈 엄두도 돈도 없었다. 결국 뇌물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딱지, 구슬, 새총 같은 귀한 것들이 철구에게는 늘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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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구를 발톱의 때만치도 안 여기던 아이 역시 아부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여로, 타잔, 전우, 수사반장, 웃으면 복이 와요…. 텔레비전에서는 눈깔사탕 따위는 비교도 안될 만큼 달콤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걸 맘 놓고 볼 수 있다면 철구의 까마귀 발에 키스한들 어떠랴. 그동안 그렇게 잘 견뎌왔었다. 오늘 그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학교에 다녀온 뒤 해결 노력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집안에 있던 모든 딱지와 구슬을 모아 철구네 집으로 갔었다. 하지만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작대기를 들고 나온 철구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넋을 놓고 마루에 앉았던 아이가, 결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김일의 박치기가 작렬할 시간이다. 어느덧 떠오른 달이, 강아지처럼 아이 뒤를 따랐다. 철구네 집 앞에서 잠시 기웃거리던 아이가 살금살금 뒤란 쪽으로 향했다. 굴뚝 옆으로 가더니 사다리를 끌어다 지붕에 걸쳤다. 처마 끝에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매어져 있었다. 아이가 성큼성큼 사다리를 올라가 안테나를 묶은 철사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이마에 금세 땀이 흘렀다. 한참 지나자 안테나가 끼기긱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잽싸게 사다리를 내려온 아이가 땅에 떨어진 안테나를 콱콱 밟기 시작했다. 잠시 뒤, 집안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는 소리와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달이 키득키득 웃으며 아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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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19. 09:39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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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라는 제목을 써놓고 꽤 오랫동안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공황상태라도 빠진 듯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버린 때문이다. 가슴에서는 쏴아 쏴아~ 파도가 끊이질 않고, 휘이유~ 숨비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두드린다.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기껏 제주도 몇 번 다녀온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껍질만 핥아보고 수박의 맛을 안다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건 아닐까. 더구나 해녀들에 관한 기록은 넘칠 정도로 많아, 내가 덧댈 게 있기나 할지. 천형처럼, 아니 축복처럼 바다에 작은 몸 기대어 평생을 사는 해녀들. 살아가기 위해 6~7kg의 납덩어리를 허리에 차고 바다 깊이 잠수하고, 호흡이 멎기 직전에 그 납덩어리를 이끌고 수면으로 박차 올라야하는 연명의 고통. 그녀들의 궤적은 문자 몇 줄이나 사진 몇 장으로 기록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막막하다. 하지만 써야한다. 내가 본 것만큼이라도 기록해야한다. 다리든 머리든 코든 허리든, 각자 만져서 그려낸 것을 합하면 코끼리 하나가 완성되겠지. 나도 장님 중 하나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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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우뭇개 해안에서 만난 오순덕(71세ㆍ가명) 할머니는 반(半)쯤 은퇴한 해녀다. ‘반’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쯤’까지 덧붙인 까닭은, 날마다 물에 들어가긴 하지만 본격적인 물질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할머니는 여전히 자신을 해녀라고 믿는다. 성함을 묻자 망설임 없이 밝혔지만 피해드리는 게 예의일 듯싶어 가명을 쓴다.
“나? 하군은 무슨 하군. 나는 똥군이요. 하하”
상ㆍ중ㆍ하군 중에 하군쯤에 속하시느냐는 속 쓰린 질문에, 오 할머니는 거침없이 자신을 똥군이라 이르며 껄껄 웃는다. 하지만 웃음 속 빈자리에서 ‘화려했던’ 날들에 대한 향수를 캐내고 만다. 병이 깊어 이젠 더 이상 깊은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할머니는 ‘해녀의 집’ 소속으로 관광객을 위한 ‘공연’을 한다. 얕은 바다에서 하루 두 번 씩 물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전복ㆍ소라ㆍ멍게를 관광객에게 파는 게 일이다. 할머니가 더 이상 먼 바다에서 물질을 못하는 건 나이 탓만은 아니다. 제주도에서, 그깟(?) 일흔 한 살 정도는 한창 나이다. 90세 현역 해녀도 있는 마당이니. 제주 여자들은 물속에서 숨만 쉴 수 있다면 일흔이든 여든이든 고무옷을 입고 바다에 들어간다. 나이가 아니라 오로지 건강과 체력이 물질을 허락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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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덕 할머니는 인터뷰 중에도 연신 터져 나오는 기침을 주체하지 못했다. 금방 물에서 나온 터라 숨이 가쁜 탓도 있지만, 평생 물질로 얻은 병이 꽤 깊은 것 같았다. 안타까운 눈빛을 읽었는지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오늘따라 약을 안 가져와서 그래. 해녀로 살다보니 남은 건 병 뿐이여. 심장이 안 좋아서 깊은 델 못 들어가. 당뇨도 있고…. 사리돈을 하루 두 번은 먹어야…. 작년만 훨씬 못혀. 아마 내년이면 그나마 똥군도 못할 것 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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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기침은 각혈 같은 한숨을 동반한다. 바다 깊은 곳에서 전복이니 소라니 따 올리던 시절이 다시 한 번 파노라마처럼 노인의 눈동자를 달음질친다. 물위로 솟구치며 내뱉는 숨비소리가 금세 입술 사이를 비집을 듯하다.
“열여덟 살에 시작했어. 혼인하기 전이었지. 처녀 때 시작해야지, 시집가서는 못해. 왜 하게 되었냐구? 그땐 당연한 줄 알았어. 다들 그랬지. 뭐, 하고 싶어서 했겠나? 배운 것도 없고 먹고살려니까….”
열여덟 살에 시작해서 일흔 하나면 53년을 물속에서 살았다. 직장생활 30년도 돌아보면 까마득하다고들 하는데, 물질 50년이라….
“그래도 이거 해서 아들 3형제 다 공부시키고, 먹고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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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허려는 사람이 없어. 누가 이 힘든 일을 허나. 옛날에는 물질 안 하면 구박을 받고, 또 그거 아니면 살 길이 없었지만 지금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어. 젊은 사람들은 물질 같은 거 쳐다도 안 봐.”
새로 물질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물음에 고개부터 내젓는다. 하긴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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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든 일을 배우려고 할 것인가.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해녀학교도 만들고 장려도 한다지만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물론 아직도 해녀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제주도의 해안을 따라 돌다보면 곳곳에서 ‘어촌계’나 ‘해녀의 집’을 볼 수 있다. 심각한 건 숫자가 아니라 고령화다. 2009년 말 현재 제주 해녀는 5095명이었다. 이는 2005년에 비해서 450명(8.1%)이나 줄어든 숫자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연령대로 볼 때 감소 그래프는 급격히 가팔라질 것이다. 최연소 해녀는 대정읍 가파도에서 물질하는 33세의 김 모 씨다. 하지만 30~39세의 해녀는 고작 7명(0.1%)에 불과하다. 연령대로 보면 40~49세 206명(4.0%), 50~59세 1043명(20.5%), 60~69세 1818명(35.7%), 70세 이상 2021명(39.7%)이다. 결국 10명 중 7명이 60대를 넘긴 노인이란 뜻이다. 조천읍 신촌리의 한 모 할머니는 90세에 물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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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든 때? 물질 할 때보다 고무옷을 입고 벗고 할 때가 더 힘들어. 뭣보다 물질을 마치고 나올 때…. 힘은 부치는데, 그득 찬 망사리(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망태기)를 끌고 나올라믄…. 그리 무섭든 안 혀. 아프지만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두….”
그들은 바다가 있고, 그 바다가 키워내는 소라ㆍ전복ㆍ성게가 있기에 숙명처럼 물에 들어간다. 하지만 물질은 매번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데도 삶을 마치는 날까지 그 곳을 잊지 못한다. 세포마다 뼈마디마다 각인됐기 때문일까. 고통도 몸 안에서 화석처럼 굳어지면 그리움이 되는 걸까. 해녀들이 바다에 한번 나가면 적어도 4시간 이상 물질을 한다. 자맥질 숫자로 보면 300번 정도라고 한다. 한번 잠수하면 물속에서 2분 정도를 견디는데, 그 정도면 보통 소라 5~6개를 건져 나올 시간이다. 바다와 인간의 몸은 그 이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조금만, 몇 개만 더, 욕심을 부리다가 아예 숨을 놓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늘 허락 받은 만큼만 손에 쥐어야한다. 상군이 그렇게 하루 물질을 하면 15만~20만 원 정도 벌 수 있다고 한다. 언뜻 보면 상당한 액수 같아도 따져보면 그리 실속 있는 벌이는 아니다. 물때와 날씨를 감안하면 한 달에 바다에 들어가는 날은 보름을 넘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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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라고 해녀들이 쉬는 건 아니다. 밭에서 김을 매거나, 남의 집 삯일을 하기도 한다. 바다를 나서는 순간 농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쉴 틈 없는 그녀들을 일러 ‘제주해녀에게는 밭이 두 개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 하나의 밭이 바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지금은 남자들이 도와주기라도 하니 다행이다. 해녀들이 물질을 마칠 무렵이 되면 지게를 지고 마중 나온 남정네들이 해안가에 서성이는 풍경을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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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어렵지 않게 됐다. 옛날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라고 한다. 오순덕 할머니에게도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많이 도와주셨어요?” 하고 여쭸더니, “그럼 도와줬으니 이만큼 살았지.” 대답하면서도 뒷말은 흐린다. 하지만 제주의 여자들에게, 바다는 외면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여자로 태어나면 7∼8세 때부터 헤엄을 배우기 시작하여 12∼13세가 되면 물려받은 두렁박(테왁)을 들고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15∼16세에는 본격적인 물질을 배워서 해녀가 되고, 17∼18세부터는 짭짤한 한 몫을 한다. 이때부터 40세 전후까지가 가장 왕성하게 물질을 하는 시기이다. 그동안에 혼인도 하고 물질과 밭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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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는 해녀를 잠수(潛嫂), 혹은 잠녀라고 불렀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일부지역만 있다고 한다. 그 기원은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힘든 만큼 멀다. 인류가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시작한, 까마득한 옛날에 시작됐을 것이다. 조선조에는 진상품에 시달리기도 하고 탐관오리들에게 수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진상의 압박에서 벗어나면서 물질이 활발해졌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제주 해녀들은 육지는 물론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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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해녀에게도 오랜 세월을 따라 만들어진 계급이 있다. 상군(대상군)ㆍ중군ㆍ하군으로 분류되는 계급은 작업능력을 기준으로 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상군이 중군으로, 중군이 하군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상군은 보통 배를 타고 나가 10m정도 깊은 바다에서 자맥질을 한다. 당연히 작업강도도 높고 수확도 많다. 중군은 6~7m에서 작업하는 60~70대들이다. 하군은 3~4m 얕은 바다를 차지한 70~80대 노인들이다. 마음은 늘 바다 깊은 곳에 머물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 뭍 쪽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평생 몸을 혹사하는 해녀들에게는 직업병이 있다. 잠수병이라고도 한다. 오랫동안 바다 속에서 자맥질을 하면 수압으로 질소가 몸에 쌓이고, 이 때문에 머리와 온 몸에 통증이 지속된다. 그래서 대부분은 오순덕 할머니처럼 진통제를 입에 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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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들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여자’라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들도 고무옷을 입고 물에만 들어가면 돌고래처럼 힘차게 물살을 가른다. 그리고 다시 뭍으로 나오는 순간 늙고 병든 노인이 된다. 온몸의 진을 내어준 대가를 자식들을 가르치는데 아낌없이 쓰는 여인들. 자식들이 자란 뒤에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거나 부담 되지 않으려고 물질을 멈추지 못하는 어머니들. 그녀들이 습관처럼 털어 넣는 진통제는 약이 아니라 아픔의 덩어리일 것이다. 해녀의 집에서 그냥 나오기 미안해 급하게 소주 몇 잔을 마신 뒤, 몇 번이나 망설이다 부엌으로 들어갔다. 인터뷰를 마칠 새도 없이 급하게 불려 들어간 오순덕 할머니는 고무옷을 벗지도 못한 채 손님들이 주문한 전복죽을 끓이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덥석 잡은 손에는 등걸처럼 마디진 세월과 거친 파도가 뒤채고 있었다.
“할머니, 건강 잘 챙기세요. 이제 그만 댁에서 쉬셔야지요. 이렇게 편찮으시면서 어떻게 맨날….”
“이놈의 약값 땜에 쉴 수가 있나. 한 푼이라도 벌어야….”
소금기 묻은 미소로 버무려 감춘 서러움이, 달궈진 인두처럼 가슴을 지져대는 바람에 서둘러 등을 보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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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5. 09:04 사라져가는 것들
가객 장사익은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고 노래했지만 저는 옛 정취가 그리워서 시골장을 기웃거립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와 똑같은 체취를 가진 노인들 틈에 섞여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보면, 거북등처럼 갈라졌던 마음도 어느덧 말끔하게 때워지고는 합니다.
아직도 시골장터에는, 도시를 떠돈 뒤로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이 어항속의 금붕어처럼 유영합니다.
예고 없이 마주치는 추억들은 가슴을 설레게 하지요.
그들 중 하나가 고무줄이라고 하면, “별 싱거운 사람도 다 있네.” 하고 웃는 분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제겐, 아니 저와 비슷한 시절을 사신 분들에게는 그리 싱거울 일 만은 아닙니다.
지금은 세월에 묻혀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었지만, 과거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골장 한 모퉁이 잡화코너에 조금 부끄러운 듯 걸려있는 고무줄을 마주치면 금세 머릿속에 주마등이 하나 걸립니다.
코흘리개 아이 때처럼 신명이 전신을 훑기도 하고, 오래 전에 이별한 할머니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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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장에 갈 때면, 어머니는 고무줄을 잊지 마시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고는 했습니다.
그만큼 아녀자들에게 중요한 게 고무줄이었거든요.
아래속옷을 ‘빤스’도 아닌 ‘사리마다’ 쯤으로 부르던 때였으니, 어쩌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돼버렸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사리마다’에는 고무줄이 꼭 필요했습니다.
요즘이야 밴드 처리가 잘 돼 적절한 탄력을 주는 제품이 쏟아지지만, 전에는 고무줄을 넣어야 흘러내리지 않았거든요.
속옷의 윗부분, 지금으로 보면 밴드 처리된 부분에 고무줄이 들어갈 만큼 틈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줄을 넣습니다.
옷핀이나 가는 머리핀에 고무줄을 매달아 틈새에 넣고 반대쪽까지 조금씩 밀고나간 뒤 양쪽 끝이 만나면 묶어줍니다.
여기엔 조금 값이 헐한 까만 고무줄이 주로 쓰입니다.
지금도 침침한 등잔불 아래서 속옷에 고무줄을 넣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고무줄을 한번 넣었다고 끝까지 입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속옷 한 장을 만들면 낡아 떨어질 때까지 입던 시절이니, 고무줄이 삭아 끊어지는 일도 흔했지요.
새로 짱짱하게 고무줄을 넣은 속옷을 입고 나서면,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허리에 힘을 주며 으쓱거리기도 했습니다.
엉덩이는 헤져서 몇 번씩 기운 걸 입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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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줄이 꼭 필요한 데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기저귀입니다.
요즘은 대부분 펄프로 만든 일회용 기저귀를 쓰니 천기저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출산을 앞둔 집은 맨 먼저 천기저귀를 준비했습니다.
아기의 여린 피부를 감안해서 소재는 부드러운 면을 쓰지요.
이때 필요한 것이 노란 고무줄입니다.
노란 고무줄은, 까만 고무줄이나 납작한 찰고무줄과는 달리 가운데가 빈 원통형의 고무줄입니다.
다른 것보다 값도 좀 비싸고 탄력도 좋지요.
기저귀를 댄 위에 묶어 흘러내리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너무 탱탱하면 아기가 불편하고 너무 느슨하면 흘러내리기 때문에 잘 조정해줘야 합니다.

사실, 고무줄은 아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놀이도구였습니다.
남자애들은 고무줄이 있어야 새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까만 고무줄은 새총에는 잘 쓰지 않았습니다.
찰고무줄이나 기저귀 고무줄에 비해서 탄력이나 내구성이 형편없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어린 동생의 기저귀 고무줄에 눈독을 들이는 녀석들도 많았습니다.
고무줄 하나 구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양쪽으로 균형 있게 벌어진 나뭇가지를 자른 뒤, 깎고 다듬어 거기에 고무줄을 묶고 가죽을 대어 새총 하나를 완성하면 세상 모든 새가 내 손 안에 있는 듯 뿌듯했지요.
하지만 새총이 있다고 새가 절로 잡히나요?
가죽에 작은 돌이나 콩을 먹여 참새 떼를 향해 연신 쏘아보지만, 약 올리듯 포롱포롱 날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새 중에도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녀석들이 있어 맞아주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땐 최소 3박4일 자랑거리가 되었지요.
조금 큰 아이들은 나무를 깎아 장난감 권총을 만들기도 했는데, 격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탄력 좋은 고무줄이었습니다.
화약을 쓰도록 만든 이 총은 꽤 위력이 있어서 어른들은 ‘위험물건’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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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들에게 고무줄은 더욱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바로 고무줄놀이 때문이었는데, 이땐 까만 고무줄이 적격이었습니다.
고무줄 여러 개를 이은 긴 줄을 가진 아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엄마 ‘사리마다’에서 고무줄을 몰래 빼냈다가 종아리에 퍼런 줄 빨간 줄 그은  애들도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은 놀이를 한번 시작하면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습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해만이냐…‘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느티나무집 너른 마당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가,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 귓전을 간질이던 시절의 필름은 언제 돌려봐도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습니다.
잘 하는 아이들은 고무줄이 머리 위, 아니 팔을 최대한 뻗을 만큼 높아져도 펄펄 날면서 넘고는 했지요.
개구쟁이 사내 녀석들은 연필 깎는 칼을 갖고 다니다가 몰래 다가가서 고무줄을 끊어놓기도 했습니다.
심술보다는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랬다고들 하는데, 어디 그 심중을 확인할 방도야 있나요.
그 덕분에 오래된 고무줄은 잇고 이어서 철조망 가시 같은 매듭이 수십 개 씩 되곤 했습니다.
지금처럼 리본이 흔하지 않던 시절, 여자아이들의 머리를 묶는 데도 고무줄은 꼭 필요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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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무줄 정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더 이상 고무줄이 필요한 놀이를 하지 않지요.
아직도 속바지 정도는 손으로 기워 입는 시골노인들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존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찮은 물건이 되었는데도, 가끔 까맣고 노란 고무줄을 보러 시골장에 가고 싶으니 이걸 고질병이라고 하나봅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