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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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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2012. 12. 17.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꽃살문에 담긴 뜻은

 

내소사 일주문

내소사 가는 길, 걷는 자의 행복으로 온 세상이 빛납니다. 굴강(屈强)한 기세로 높다랗게 솟은 전나무들이 달려 나올 듯 반깁니다. 전나무는 주변 숲이 가을색으로 치장하든 말든 신경도 안 씁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암청(暗淸)의 무게를 더해갑니다. 그 타협 모르는 색()에 대한 고집은, 눈 내리는 한 겨울에 청청하게 빛날 것입니다. 걸음걸음에도 푸른빛이 뚝뚝 묻어날 것 같아 자꾸 돌아봅니다. 내소사 전나무 길은 광릉수목원, 오대산 월정사 길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으로 불립니다. 500m 정도 이어지는 이 길에는 수령 150년 이상, 높이 30~40m의 전나무들이 소풍 길의 아이들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일주문에서 내소사까지 10분 넘게 걸어야 하지만 전나무들의 열병식 덕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눈이 가는 곳마다 황홀한 풍경이 그림처럼 이어지는 변산반도지만, 내소사 전나무 숲이 없었다면 이 빠진 듯 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전나무 숲이 생겼을까요? 이 정도 숲이라면 일부러 심은 게 틀림없을 텐데. 이유가 없을 수 없지요. 원래 대가람이었던 내소사는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됐다고 합니다. 바다를 눈앞에 두었으니 왜적의 침탈을 피할 수 없었겠지요. 왜가 물러간 뒤 다시 절집을 짓기는 했지만 옛날의 위용을 되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전한 빈 자리에 전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나가면 되련만, 또 그놈의 궁금증이 발동하는 바람에 기어이 손을 꼽아보고 맙니다. 임진란에 이은 정유재란이 1598년에 끝났으니 지금으로부터 414년 전. 그런데 왜 나무의 수령은 150년밖에 안되지? 둘러봐도 어긋난 세월을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땐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 절집을 짓고 나무를 심은 걸까? 아니면, 저들은 원래 심었던 나무들의 두어 대() 후손일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절에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알밤을 혼자 주운 아이처럼, 모처럼 길을 독식한 행복을 만끽합니다. 큰 숨을 들이쉴 때 감긴 눈을 뜨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뗍니다. 전나무 특유의 향기가 온몸을 감쌉니다. 가슴을 활짝 열고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십니다. 향기가 모공마다 파고들어 가슴까지 푸르게 적십니다. 이곳은 여름밤이 되면 별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그 사이로 반딧불이 유영한다고 합니다. 그 풍경을 그려보는데 왜 자꾸 천국이 떠오를까요?

 

조금 걷다가 밑동만 남은 나무를 발견합니다. 천재지변을 당했는지 한 살이를 마치고 세상과 이별했는지 모르겠지만 싸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가로지릅니다. 세상에는 전설 한 자락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한 존재가 떠난 자리엔 슬픔이 고이기 마련입니다. 몸을 낮춰 그루터기를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하나 둘 셋. 어찌 그 긴 세월을, 가물거리는 눈으로 헤아리려 한 것인지. 조금 세다가 포기합니다. 나이테 속에는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방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간격과 모양. 조금 더 걷다가 또 걸음을 멈춥니다. 이번엔 더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베고 지납니다. 전나무 몇 그루가 뿌리를 온전히 드러낸 채 쓰러져 있습니다. 땅 속을 벗어나, 줄기와 잎을 키우지 못하는 뿌리는 더 이상 뿌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니 뎅겅뎅겅 머리를 잘린 나무들도 많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지난여름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이 저지른 짓이겠지요. 볼라벤이니 산바니, 이름도 낯선 큰 바람들은 이 작은 반도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마침 이곳이 바람이 지나가고 싶은 길이었나 봅니다. 안온하던 숲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나무들은 하나 둘 부러지고 쓰러졌겠지요.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그 많은 길을 두고, 바람은 하필 이 길로 지나갔을까요? 그걸 따져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바람이라 했거늘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바람이야 자신이 가는 곳이 곧 길이지요. 하필 그 길에 나무들이 서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기억이 지워져서 그렇지 이 숲이라고 시련이 왜 없었겠습니까? 어느 때인가는 더 무서운 바람이 지났을 수도 있고 우듬지의 눈을 이기지 못해 뚝뚝 가지를 잃은 날도 부지기수였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씨줄 날줄로 직조되고, 그 직조물을 인생이라 부릅니다. 느닷없이 바람이 들이쳐서 뺨을 때리거나 넘어트리거나 아예 부러트리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불행을 원망하며 울부짖어봐야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바람도 그냥 지나가는 그물에, 불행인들 걸리겠습니까? 원망이나 한탄보다는 추스르고 일어나는 게 먼저여야겠지요. 눈 속에 피어난 꽃을 칭송하는 건 시련을 이기고 선자에 대한 경의이기도 합니다.

 

태풍에 머리가 뚝뚝 꺾인 나무들

제겐, 유별날 정도로 젊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이제 젊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습니다. 그렇게 인연 속을 걷다 보니, 40대에 결혼식 주례를 10건 가까이 해치운어처구니없는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건 들을 이야기도 많다는 의미입니다. 행복한 이야기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불행하고 아픈 이야기가 더 많기 마련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제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합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의 불화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온 친구도 있습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생사의 문턱을 오락가락 하는 이도 있고, 이혼 뒤의 아픔을 안고 찾아오기도 합니다. 직장 문제는 가장 빈번한 소재입니다. 상사와의 불화, 막연한 장래, 이직의 유혹과 불확실성.

 

어떤 친구들은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을 안고 찾아옵니다. 애써 울음을 구겨 넣지만 통곡보다 더 아프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타나 편작 같은 명의(名醫)가 아닌 저로서는 그 고통 앞에서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 땐 그저 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아픔에 시정(市丼)의 잣대를 들이댈 일이 아니라는 것, 당의(糖衣) 같은 위로가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심력을 다해 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동조(同調)시키는 것입니다. 동조나 공감은 동정이나 연민과는 다르지요.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을 누군가가 이해하고 있다는, 혹은 공유하고 있다는 안도는 때로 큰 위로가 됩니다. 가끔은, 앓고 난 아이에게 미음 먹이듯 아주 조금씩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합니다.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지.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이도 어느 순간 조금씩 수긍하기 시작합니다. 새로 발견한 스스로를 낯설어하기도 합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하다고 절규하는 친구들에게는 한마디밖에 해줄 말이 없습니다.

고통이 거의 끝났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까.”

 

내소사 부도들

가장 힘든 건 고치 속에 갇힌 친구를 만났을 때입니다. 당신은 囚人(수인)이라는 한자를 기억하는지요. ()라는 글자의 모양을 보면 사람()이 사방을 둘러친 공간()에 갇혀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건 그 감옥을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감옥 속에 들어가 꼼짝도 안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곳은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으면 소멸의 시간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자신을 세상 밖으로 데려갈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뿐이거든요. 어떤 이들은 스스로 사랑받지 못했음을 한탄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일이지요? 이야기를 듣다보면 남들보다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살아온 이도 많습니다. 망각의 강이라도 건넌 듯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진정 가난한 이들은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 한 가닥에도 눈물겨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시 한 줄뿐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이해인 <어떤 결심>

 

내소사 벚나무길

쓰러진 나무 앞에서 서늘한 가슴을 추스른다는 게, 너무 멀리 나가고 말았습니다. 나무든 사람이든 쓰러지지 않는 세상이길 소망하지만 자주 어긋나고 맙니다. 설령 그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질서라고 하더라도 눈앞에 두고 보는 일은 고통입니다. 예까지 왔으니 내소사를 보고 가야겠지요. 전나무 숲을 벗어나면 늙은 벚나무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고운 가을빛 속에서 나무들은 이별의 예감으로 수런거립니다. 이들은 이별을 거스르려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봄부터 여름까지 애써 피워낸 융성을 지워 내년을 기약합니다. 이들의 이별은 존재의 존속을 위한, 새로운 탄생을 위한 합의입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한번 쥔 것을 절대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고 가는 숙명이겠지요.

 

내소사 경내의 당산나무절 마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시선을 당기는 게 커다란 느티나무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요? 그냥 느티나무가 아니라 분명 당산나무입니다. 금줄을 칭칭 동여맨 것도 그렇지만, 당산나무는 나름의 특별한 기운을 갖고 있거든요. 절에 당산나무가? 그러고 보니 일주문 앞에서도 당산나무를 본 기억이 납니다. 둘이 참 많이 닮았네요. 모를 땐 물어볼 수밖에. 그렇답니다. 당산나무가 맞는다는군요.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는 할아버지 당산나무고 일주문 밖의 나무는 할머니라는데, 할아버지는 1000년을 살았고 할머니는 700년을 살았답니다. 절 안의 당산나무, 좀 낯설지 않은가요? 믿음의 대상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제 눈에는 왜 이리 보기 좋지요? 네 신(), 내 신 따지며 싸우는 것보다 이렇게 함께하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쓴 터키 여행기에서 여러 번 한 소리지만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안에는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교 문화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제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풍경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공존이 있었군요. 미신이라고, 그 구박을 받던 당산나무가 절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모습. 이거야말로 포용이고 어울림이고 사랑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렇게 조화롭게 흐른다면 싸우고 미워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에서는 해마다 스님과 주민이 어울려 당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날짜를 알아봐서 꼭 참가해야겠습니다.

 

내소사 대웅전

내소사 경내

능가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곳에 자리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633) 창건됐다고 전해집니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내소사를 한국의 5대 사찰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산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이 매력이라고 했던가요? 내소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절을 중창할 때 단청을 하기 위해 화공이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나올 때까지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하지만 한 달이 되도록 화공이 나오지 않자 궁금증을 못 견딘 사미승 하나가 살짝 법당 문을 열었다지요,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은 이렇게 곳곳에 전설을 낳습니다. 사미승이 보니 화공은 없고 영롱한 새(觀音鳥 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더랍니다. 사미승을 본 새가 날아간 건 예견된 결과. 그래서 지금도 단청 한 부분이 미완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전설은 두 가지 교훈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인간의 천박한 호기심에 대한 경계겠지요. 다른 하나는 비움의 미학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는 미완성을 아쉬워하지만, 제게는 그 비움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붓질처럼 보입니다.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되레 아름답다는말도 안 되는 역설인가요?

 

내소사 대웅전 꽃살문

비어있음은 대웅보전 외양에서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보물 291호인 내소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단청을 안 한 건지, 세월이 벗겨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다른 절들이 화려함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일 때, 나무 고유의 색깔로 비바람을 견뎌왔다는 게 또 하나의 비움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소사를 상징하는 두 가지를 꼽는다면 전나무 숲과 꽃무늬 문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양 중의 으뜸은 꽃 공양이라고 했던가요? 여덟 짝의 꽃무늬 문살은 막 피어나는 꽃잎의 요철을 반영한 정교한 조각으로 마음을 당깁니다. 나무의 질감은 세월에 씻겨 무뎌졌지만, 꽃들은 아침이슬에 피어난 듯 생생합니다. 모란과 연꽃 수천 송이를 연년세세 피워내어 사바세계의 어리석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꽃 하나하나엔 깨달음을 희구하는 서원이 담겨 있을 테지요. 저도 꽃살문 앞에 서서 서원 하나 세워봅니다.

 

말로 말하지 않고, 바람으로 듣지 말고, 밥으로 마음 부르지 않도록.

posted by sagang

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원.

아타튀르크 댐이 만들어 낸 풍경.

이제는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한다. 터키의 숨겨진 속살을 관통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말라티아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샨르우르파에서는 깨달음을 준 옛 스승들을 만났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으로부터 갈대우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험난한 여정도 들었고, 선지자 욥을 만나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야기도 가슴에 담았다. 샨르우르파 공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아쉬운 눈길을 창밖에 고정시킨다. 여전히 황량한 벌판에는 나스카의 지상그림처럼 생긴 도형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그 한 가운에 있는 마을은 고립된 듯 외로워보인다. 저 안에 갇힌 저들은 무엇을 꿈꾸며 살까. 아니다. 그들은 저 광활함 속에서 한없이 자유롭거늘, 정작 갇혀 있는 사람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잠시 뒤에는 사방팔방으로 물길이 뻗어나간 거대한 늪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니 늪이지 사실은 엄청나게 큰 호수고 강이다. 댐에 막혀 길을 잃어버린 유프라테스강은 바다를 흉내 내고 있다. 정녕 인간이 자연을 이긴 것일까. 상념이 낳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이스탄불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스탄불 시내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분주하다. 이스탄불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역시 단 하루. 꼭 들르고 싶었던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아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찾아다닌 이스탄불의 유적들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에 몰려있었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갈라타 다리를 건너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올라가는 신시가지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곽 뜰. 바다와 아시아 땅이 코앞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제1문.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그만 만()을 메운 매립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 바다였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가득 찬 정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지금의 궁전이 들어서 있었던 건 아니고 17세기 초 아흐메드 1세가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돌마바흐체라 불렀다. 그때의 건축물들은 1814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궁전 외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전망 좋은 곳에는 넓은 야외 카페가 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건너편의 아시아 땅과 바다 위의 유람선들이 어울린 그림 같은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카페는 그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곳에 비비고 앉아 점심을 먹을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무 그늘이 드리운 잔디밭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는다. 궁전 앞의 점심식사도 제법 괜찮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볼까.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람하려면 표를 예매하는 게 좋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입하려면 줄을 서야 한다. 나는 미리 준비한 덕에 길게 늘어선 줄 옆을 자랑스럽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러게 누가 무작정 오래? 사람들이 말이야, 준비성이 있어야지. 쯧쯧! 입장료는 30리라. 환율을 700원 씩 계산해도 21,000. 궁전 구경 하다가 등뼈 휘어져서 가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와봐야 할 곳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문을 들어선다.

문 위의 조각들. 

안쪽 문.

 

궁전 본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걸어야 한다. 화려한 문도 두 곳이나 통과한다. 다른 오스만 건축양식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유럽풍인데 무척 호화롭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하니 까딱 잘못하면 파리쯤에 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일 것 같다. 이 궁전을 착공한 건 1843년이다. 압둘메지드 황제의 지시로 짓기 시작했는데 13년만인 1856년에 완공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가라베트 발안과 그의 아들 니코코스 발안이 설계했다. 이 궁전이 완공되기 전에는 술탄들이 톱카프 궁전에서 기거했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톱카프 궁전 역시 어느 곳 못지않게 크고 화려한 궁전이다. 그러니 살만한 궁전이 없거나 곳간에 돈이 남아돌아서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회복해보겠다는 염원이 투영됐을 것이다. 왕권시대에는 동서를 불문하고 나라의 기운이 쇠했다 싶으면 궁전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땅의 흥선대원군도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임진왜란 때 불 타 무너진 경복궁을 새로 짓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뭐하나. 그 역시 약발이 별로였던 것 같다. 새 궁을 지은 지 얼마 안 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으니. 건물 따위로 국운을 돌려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쓸모없는 삽질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셈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은 너도 나도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센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여려 가지 모습.

외채는 계속 늘어나고 국가의 재무 상태는 빈사 위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 창고 바닥 긁는 소리가 요란했을 것 같다. 참고로 궁전을 지은 압둘메지드 황제는 이곳에서 단 6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죽 쒀서 뭐 줬다고 하던가? 들어가는 길 내내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접시꽃이 활짝 웃는 얼굴로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특히 분수대가 있는 연못 앞에 서서 바라보는 궁전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궁전 입구에서는 덧신처럼 생긴 비닐봉지를 하나씩 나눠준다. 신발에 씌우라는 뜻이다. 터키 사람들이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하는 인원도 적절히 시간차를 두어서 복잡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문을 들어서면서 사진을 한 장 찍는데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No Photo!!!" 여기도 촬영금지야? 대체 그 비싼 돈을 받아먹고 사진 한 장 못 찍게 하는 건 무슨 심보야. 톱카프 궁전에서도 불만을 토로했지만,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한 유물이나 전시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상식이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이런 엄격한 규제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통째로 뭉개 버린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그 수단을 빼앗겨 버리면 존재가치가 희미해진다.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다니긴 하지만 흥미는 이미 반감된 상태다. 관람은 1층 입구에서 시작하는데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궁전의 본 모습이 펼쳐진다.

 

궁전에서 바라본 아시아 땅.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서 찍은 첫 번째 사진.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도둑 셔터로 찍었다.

고국에 뭔가 전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뷰파인더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셔터를 몇 번 눌러보지만 사진이 제대로 나올 턱도 없고 굳이 도둑 사진까지 찍어야 되나 싶어 그만 둔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경비원들이 서서 네가 무슨 짓 하려는지 다 알고 있으니 쫓겨나기 싫으면 그냥 구경이나 해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는 탓에 자꾸 움츠려든다. 사실 궁전은 바깥보다 내부가 더욱 화려하다. 곳곳의 천장마다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정도로 크고 호화롭다. 이 궁전을 지을 때 내부 장식에만 총 14t의 금과 40t의 은이 사용됐다고 한다. 총면적은 15,00m²인데 궁전 내부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셀람륵과 황제 외에 남성의 출입을 금하는 여성의 영역 하렘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렘지역은 파란방이라고 부른다. 방은 총 285개고 홀이 43개인데 그밖에도 68개의 화장실과 11개의 목욕탕이 있다. 방이나 홀의 장식도 제각각 다르다. 바닥에 깔린 수직 양탄자의 넓이는 4,455m²나 되며 벽에는 600점이 넘는 명화가 붙어있다. 많은 때는 5,320명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화려함의 극치다. 물론 내게는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곳 이상은 아니다. 잘 따라 다녀야지 괜히 잘난 체 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밤새 헤맬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이 궁전 내부를 전부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사실 내게는 그 방이 그 방 같고 그 홀이 그 홀 같아서 그저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보냈다는 샹들리에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찍었다.

아타튀르크를 기려 09시05분에 멈춰진 궁전 내부의 시계.

황제 일가의 일상생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궁전 내에는 황제의 아이들을 가르치던 작은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을 위한 교무실도 있다. 물론 황제가 썼다는 화장실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별게 다 기념물이 되는 세상이다. 또 궁전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전시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유럽에서 보내왔다는 수많은 보석과 도자기, 그릇들이 눈부시다. 거북 껍질로 만든 수저도 있다. 거대한 곰 가죽은 러시아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처럼 생긴 기둥은 진짜 대리석이 아니다. 밤나무에 석회를 바르고 대리석처럼 칠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다. 별 기술이 다 있구나. 정말 감쪽같다. 거대한 시계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다. 시계바늘은 95분에서 잠들어 있다. 태엽을 주지 않았거나 건전지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여기서는 참았던 도둑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 시계를 보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시계 자체야 별게 있을 턱이 없지만 아타튀르크라는 위대한 독재자가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궁전을 완공한 뒤 이곳에서 살았던 오스만 황제들은 모두 6명이었다. 1877년에는 오스만 제국 사상 처음 개원된 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터키공화국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1938111095분 집무 중에 이 궁전에서 사망했다. 건국의 아버지인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95분에 멈춰져 있다. 터키 사람들이 아타튀르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나라 전체가 존경할 사람을 가졌다는 건 무척 부러운 일이다. 드디어 그랜드 홀에 들어선다. 관람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

 

저 문을 나가 걸어가면 바다에 닿는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안내를 하던 훌리아가 멈춰서더니 눈을 감으란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 둘 셋을 세면 눈을 뜨고 천장을 보란다. 셋을 세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탁 트인 공간에 매달린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거대한 샹들리에도 한몫했다. 36m 높이에 매달려있는 이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무게만도 4.5t이나 나가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750개의 등이 달렸는데 1912년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수백 개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이 방에는 재미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원래 천장은 삼각형인데 그림으로 동그란 돔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삼각형의 흔적은 없다. 76개의 대리석 기둥역시 모두 나무다. 이곳에서는 대형 연회가 열렸다는데 2층에는 연주자들의 자리가 있다. 지금도 이 그랜드 홀은 결혼식장으로 대여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돈이다. 1년에 2~3회 정도 아랍의 부호들이 거액을 주고 빌려 쓴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황금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호사를 누리게 하는 셈이다.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연회를 열 수도 있구나. 괜한 심술로 혼자 중얼거려본다. 전투 장면 등을 그린 그림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눈이 시원해지니 섭섭함도 별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다에 푹 빠져 있다. 나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메마른 가슴에 꿈 씨 하나쯤은 파종하고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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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0. 08:5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소금 꽃이 필 때까지

 

염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큰길 옆 휴게소 마당에 눈처럼 소금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염전에서 대파(소금물을 미는 고무래)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보다는, 소금도 팔고 대처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테니까요. 하지만 제 말은 괜한 억지입니다. 염부에게 소금을 만드는 일은 내림굿과 같아서,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태양도 바람도 염부도 기다리는 시간일 뿐입니다.

 

 

이곳은 전남 부안읍 진서면 진서리. 보통은 그냥 곰소라고 부릅니다. 부안읍에서 서남쪽으로 6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 마을입니다. 원래 곰소염전으로 이름을 좀 날렸지만 최근에는 지척에 있는 곰소젓갈단지가 더 유명해졌습니다. 대처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젓갈을 사러 올 정도니까요. 저는 곰소염전의 석양에 반해서 이곳을 가끔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풀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왜 곰소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설마 산에 사는 곰 때문에? 충남 공주의 옛 이름이 곰나루(熊津), 곰재니 웅산(熊山)이니 이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있으니 한번 넘겨짚어 보는 것입니다. 헌데, 확인을 해보니 그 설마가 맞는답니다. 지금은 육지인 곰소가 옛날에는 세 개의 섬이었다고 하네요. 그중 한 곳에 곰 두 마리가 살았답니다. 섬에 곰이 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청구부터 앞세울 일은 아닙니다. 전설은 현실보다 더 너른 품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다가 섬이 육지가 됐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전설이 아닌 역사의 영역입니다. 이곳 역시 일제의 수탈기지였다고 합니다. 농산물을 반출하는 항구로 쓰기 위해 진서면 연동마을과 곰소, 작도마을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고 도로를 만들었답니다. 그 와중에 곰은 어디론가 떠났겠지요.

 

오늘은 일진이 썩 좋지는 않은 날입니다. 날씨조차 확인하지 않고 길을 떠나는 제 준비성 탓이지요. 우선 하늘이 저를 반기지 않습니다. 구름이 저렇게 잔뜩 끼었으니, 염전으로서는 뒷짐이나 지고 있을 수밖에요. 오늘따라 바람도 마뜩치 않고 철도 어긋나 있습니다. 염전이라고 사시사철 소금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보통 4월 중순에 시작해서 9월말까지 바닷물을 졸이는데 지금은 이미 10월입니다. 하지만 곰소염전은 아직 소금걷이를 끝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을 햇볕도 잘만 거둬 쓰면 소금가마나 만들어내니까요. 그 증거로 결정지에는 막 엉기고 있는 소금이 보입니다. 염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염창(소금창고) 옆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기다려볼 심산입니다. 원래 염전은 기다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이곳에서 바다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타래 풀 듯 길길이 뻗어 나간 수로들이,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염분 가득 머금은 바닷물을 데려 오겠지요.

 

바닷물을 가둬두면 소금이 생기는 줄 알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복잡한 절차와 숱한 땀이 필요합니다. 먼저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저장지에 가두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저장지의 바닷물은 곧 증발지로 갑니다. 1차 증발지에서 어느 정도 졸여진 소금물은 또 2차 증발지로 보내집니다. 갈수록 수분이 증발하면서 염도가 높아지지요. 2차 증발지를 거쳐 염도가 정점에 오른 바닷물은 마지막으로 결정지에 도착합니다. 볕이 좋은 날 새벽에 결정지로 들어간 소금물은 하루 종일 졸이고 졸여져 저녁 무렵이 되면 하얗게 엉기기 시작합니다. 이걸 일러 소금 꽃이 핀다고 하지요.

 

소금 꽃은 홀로 피어나는 게 아닙니다. 햇볕은 물론 적당한 바람과 염부의 땀과 시간을 품어야 피는 꽃입니다. 염전에서는 바닷물만 졸이는 게 아니라 시간도 함께 졸입니다. 시간의 정수(精髓)가 순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요. 그래서 6각형의 작은 결정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탄을 아낄 수 없습니다. 소금은 계절, 햇볕, 바람은 물론 만들어지는 시간에 따라 굵기와 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북서풍이 부는 날 엉긴 소금은 입자가 단단하고 굵으며 동풍이 부는 날 거둔 소금은 밀가루처럼 곱습니다. 조건에 따라 맛이 쓴 소금도 있고 짜기만한 소금이 있는가 하면 짜면서 향기로운 소금도 나옵니다. 좋은 소금을 만들려는 염부의 일상은 고단합니다.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바닷물과 씨름합니다. 그들이 흘리는 땀은 소금만치나 짭니다. 염부의 몸이 까맣게 탈수록, 더욱 하얗고 맛좋은 소금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소금을 만드는 과정이 매번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비라도 내리면 염부들은 마음까지 까맣게 탑니다. 애써 조린 소금물에 빗물이 섞이면 만사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해도 바닷물을 열 말 가두면 한 되의 소금밖에 안 나온다고 합니다. 한여름 햇볕이 좋을 때는 사나흘 만에 거두기도 하지만 봄가을은 보통 열흘에서 스무 날까지 걸립니다.

 

엉기기 시작한 소금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발췌)

 

강화도에 삶터를 튼 시인 함민복은 소금 한 되를 300원짜리 싸구려 인세에 비했지만, 시도 소금도 눈물 겹게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소금 속에 담겨 있는 열 말의 바닷물도 기억해야 합니다. 소금은 생명입니다. 얼마나 귀했으면 하얀() ()이라고 불렀을까요. 고대 중국이나 로마에서는 국가 전매품으로 아무나 거래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사에서 소금 전쟁도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지요. 제 할머니 역시 소금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어렵게 소금 한 포대를 들여놓으면 토방 기둥에 기대놓고 간수를 받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쓴맛 나는 간수를 빼야 소금이 제 맛을 내거든요. 물론 그렇게 받아놓은 간수도 두부를 만들 때 응고제로 긴요하게 쓰였습니다. 요즘은 무기약품의 중요한 자원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오가는 길에 소금포대를 한 번씩 쓰다듬었습니다. 사랑만 주면 소금포대가 쑥쑥 자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많던 염전도 보기 어려워진지 오랩니다. 소금의 질이 좋기로 소문난 곰소염전도 새우양식장으로 둔갑하고 80ha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싼값으로 무장한 중국산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사양길의 염전들, 오래 묵은 존재 특유의 진득함으로 시대의 격랑에 맞서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요. 자신의 역할을 방기(放棄)해본 적 없는 그 진득한 존재들이 생명을 보듬어왔다는 사실은, 자주 망각의 늪 빠져 존재를 지웁니다. 그게 안타까워 저는 저무는 염전에 오랫동안 시선을 담가두고 있습니다.

 

 

염부는 끝내 오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파질이 들어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건 포기한지 오래지만,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달콤하고도 쌉쌀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염전에 비친 구름과 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 전부입니다. 누군가 제 기다림을 헤아린 걸까요?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마치 이불 개듯 차곡차곡 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저로서야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반가운 일이지요. 기다림은 이렇게 예기치 않는 행복을 주기도 합니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벌건 해가 얼굴을 내밉니다. 고대하던 곰소염전의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정지에서 혼자 자맥질하는 저녁 햇살이 수돗물을 그냥 틀어놓은 듯 아깝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저녁나절의 햇볕은 바닷물을 졸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쪽 하늘이 벌겋게 타오르면서 염전에도 황금빛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저도 분주해집니다. 얼마나 별렀던 풍경인데요. 부리나케 둑으로 올라가 셔터를 누릅니다. 산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키를 부풀립니다. 먼 산들은 자꾸 흔적을 지워가고 붉은 해는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어느 순간 주변 공기가 팽팽해지더니 붉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빈 하늘에 대고 마지막 셔터를 누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공복이 전신을 훑습니다.

 

작고 허름한 식당을 골라 들어갑니다. 오래 떠돈 자들은 호화로운 음식점을 피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허름해 보이는 집에서 의외로 입에 맞는 음식을 만날 가능성이 높거든요. 이 동네는 젓갈백반이 유명합니다. 1인분이라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야 없지요. 손님은 저 하나뿐입니다. 젊은 여자와 허리 굽은 안노인이 단 하나의 손님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고부간일까, 모녀간일까? 심심한 저는 괜한 걸 점쳐봅니다. 저만치 서서 밥 먹는 걸 지켜보던 노인이 다가오더니 젓갈을 고루고루 더 얹어놓습니다. 젊은 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노인의 마음이 음식의 맛을 더합니다. 이런 경우도 악순환이라고 하나요? 즐거운 악순환이겠지요. 먹으면 또 채우고, 준 사람 실망할까봐 또 열심히 먹고. 입안이 짜고 매운 기운으로 얼얼할 지경입니다. 노인과 나그네의 은밀한 거래는 젊은 여자의 등장으로 끝나고 맙니다. 주방에서 나오던 여자의 눈동자가 고등어 뱃바닥처럼 하얗게 변합니다. 노인은 생선전의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 칩니다. 아마 초범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혼자 오는 손님만 보면 저러신다니까.” 젊은 여자가 입속에서 웅얼거립니다.

 

그녀 역시 야박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혼자 먹는 밥상에 짜디짠 젓갈을 자꾸 얹으면 결국 남지 않겠느냐는 걱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노인들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자식 같은 사람은 자식이나 진배없고, 그 입에 밥이 들어가면 흐뭇한 것이지요. 옛날 제 할머니가 그랬고, 지금의 제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괜히 무람해진 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혼자 서 있던 가로등이 씨익 웃습니다. 밤은 까만색으로 자꾸 무게를 더합니다. 숙소로 가는 길, 바람은 차갑지만 마음은 포근합니다. 새 울음소리가 제법 깊어졌습니다. 숙소의 창문을 조금 열어놓습니다. 희미하게 비껴드는 달빛을 당겨 덮고 모처럼 꽃잠에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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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위에서 바라보면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고대인들이 돌을 이용해 팠다는 물저장고.

다시 샨르우르파. 괴베클리테페로 가는 길에는 평원과 낮은 구릉이 교대로 출렁인다. 내 가슴도 함께 출렁거린다. 30분쯤 달렸을까. 포장도로를 벗어난 차가 심하게 덜컹거린다 싶더니 황량한 산악지대가 불쑥 다가선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제 저녁에 잠깐 있었던 해프닝이 생각난다. 함께 여행 중인 고참 기자 한 사람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샨르우르파의 관계자에게 농담 삼아 한 마디 던졌다. 아마 이지역의 유적, 특히 괴베클리테페에 대한 자랑을 잔뜩 들은 다음이었을 것이다.

너희들은 뭐든지 세계 최초, 인류 최고(最古).”

그 말이 통역을 통해서 전달되는 순간 그 친구의 얼굴 표정이 싹 바뀌었다. 싸늘하다 못해 푸르딩딩해지는 표정. 제법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느닷없이 가라앉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신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내색할 건 뭐람? 성질머리 하고는. 물론 그 말을 한 사람은 모욕을 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분위기를 띄우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워낙 대단한 유적들이 즐비하다 보니 배도 살짝 아프고 해서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괴베클리테페를 자랑스러워하는지 확인하기 딱 좋은 해프닝이었다. 샨르우르파 사람들은 심지어 세상의 모든 교과서는 바뀌어야 한다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괴베클리테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과문한 탓도 있지만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큰 바위 구덩이를 파는 과정. 작은 구멍을 계속 뚫어나간다.

너럭바위를 지키는 개.

차는 공사용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선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크고 작은 구릉, 끝이 안 보이는 평원이 저만치 엎드려 있다. 이곳은 아직 발굴 중이기 때문에 관광지로 개발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들었던 자랑에 비해서는 조금 초라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발굴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널따란 바위에 뚫린 크고 작은 구멍들이 눈에 들어온다. 안내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큰 바위구덩이는 물 창고로 쓰인 곳이라고 한다. 지하수가 없기 때문에 빗물을 받아 쓴 것 같다. 그럼 작은 구멍은? 큰 구멍을 만들기 위해 파놓은 것들이다. 금속은 구경도 할 수 없던 시대에 저렇게 큰 구멍을 어떻게 팠을까 궁금했는데 작은 구멍에 해답이 있었다. 단단한 돌을 정()으로 삼아 바위에 작은 구멍을 여러 개 뚫고, 구멍 이외에 남아 있는 부분을 자르고 또 구멍을 뚫고 자르고 해서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로 하니까 두꺼비 파리 잡듯 쉬워 보이지 실제로 하라고 하면 거품부터 물 일이다. 돌로 돌에 구멍을 내고 주변을 깎아내는 과정을 거듭해서 물탱크를 만든다고? 모르긴 몰라도 1~2년이 아니라 최소 수십 년이 걸리는 공사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12,000년이 흐른 지금, 그 위대한 작업의 흔적에는 토사가 쌓여있고 누군가 던진 종이컵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다. 헌데 이상한 일도 있지. 아까부터 개 한 마리가 깎아놓은 돌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있다. 사람들이 오고가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뭔가를 고집스레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저 개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눈인사로 작별을 하고 발굴 현장으로 간다.

 

발굴 중인 신전

석상들이 둥그렇게 서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웅덩이. 이곳이 발굴 현장이다. 웅덩이 안에는 큰 돌들이 둥그렇게 늘어서 있고 주변에는 작은 돌을 담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발굴 작업을 위해 만들어 놓은 나무 발판들이 웅덩이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건 돌기둥들. 어느 건 T자형으로 어느 건 갓을 쓴 비석처럼 생겼다. 받침대 위에 점잖게 서 있는 것들도 있다. 사람으로 보면 양반의 씨를 타고 난 돌들인가 보다. 하지만 어느 건 중간에 잘려서 뭉뚝한 게 변방의 수자리를 살다 온 백성처럼 궁기가 흐른다. 대부분은 스스로 서 있거나 자기들끼리 어깨를 겯거나 지지대에 기대고 있지만 아예 누운 것도 없지 않다. 그런 돌기둥들이 회의라도 하는 듯 5~10m의 간격으로 원을 그리고 서있다. 선사시대 거석 유물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돌에는 각종 동물들이 양각돼 있다. 마모되는 바람에 제대로 알아보긴 어렵지만 소나 사자, , 뱀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도마뱀? 악어? 아니, 늑대나 여우를 닮은 형상도 있다. 그림들이 낯설지 않다 했더니 샨르우르파 박물관에서 본 것들과 닮아 있다. 어느 돌기둥에는 사람의 형상을 표현한 듯 손가락이 그려져 있고 허리 부분에 여우가죽 같은 것을 두르고 있다. , 사람이 여우 가죽을 벗겨서 허리에 둘러 치부를 가린 형상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결론적으로 사냥과 관련된 조각들이다. 마모되기 전에는 무척 정교했을 것 같다. 이 조각들을 새기기 위한 도구도 돌이었겠지.

 

멀리서 바라본 발굴지.

 

바위에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석기 시대 유물이라고 하면 기껏 돌도끼나 돌칼 정도만 봐온 나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석기라는 것들도 손에 쥐기 좋게 깨진 것을 골라 쓴 건지 정말 사람이 두드리고 갈아 만든 것인지 늘 의심스러웠다. 그런 수준의 원시인들이 이런 작품들을 남기다니. 상상을 해보자. 원숭이나 벗어났을 정도의 인간들(창조론자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그림일까?)이 겨우 앞이나 가리고 앉아 돌로 돌을 조각한다. 이 거대 유적이 조성된 건 BC 9500년에서 BC 8500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12,000년 가까이 된 까마득한 옛날이다. 그게 어느 정도의 옛날인지 감이 안 잡히는 이들을 위해 또 예를 찾아보자.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친절한 작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거석문화를 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은 서남아시아에서는 요르단 지역에 BC 4000년경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에 걸쳐 서부와 북부 유럽에서 많은 거석기념물이 건립되었다. (중략) BC 3000년대에 속하는 것이 많다.’ 여기에서도 거석문화의 기원을 기껏 BC 4000년으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거석문화의 대표 선수로 꼽히는 영국의 스톤헨지는 얼마나 됐을까. 이왕 불러온 김에 지식백과를 더 찾아보자. ‘선사 시대인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해서 기원전 1400년경에야 완성된 스톤헨지는여기도 BC 3100년이다. 그렇다면 BC 9500년에 세워졌다는 이 돌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려 6,0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12,000년 전, 인간들은 기껏 해야 동굴에서 살면서 채집과 수렵으로 연명했을 것이다. 샨르우르파 사람들의 말대로 나는 지금 인류사를 새로 써야 하는 혁명적 유물 앞에 서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곳.

 

사람의 형상을 새긴 돌. 손과 허리띠, 중요 부위를 가린 짐승 가죽 등이 보인다.

헌데 원시인들이 왜 이런 거대 유적을 만들고 동물들을 새겨 넣었을까. 이곳이 사원이나 신전이었을 것이라는 게 그 답이 될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접신(接神)을 위한 장소를 치장하는데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니까. 사원이나 신전이었다는 추정은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걸로 더욱 신빙성을 얻는다. 하늘에 제를 지낼 때나 장례의식 때만 찾아오는 신성한 곳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걸 확인해주는 조각도 있다. 새들이 시신을 먹는 장면이 표현돼 있다. 그렇다면 조장(鳥葬)을 치렀다는 얘기다. 지금도 티베트 등 일부에는 조장 풍습이 남아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다.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도 그런 장례 풍습을 지킨다고 한다. 더 이상 의심할 것도 없이, 나는 지금까지 확인된 세계 최초의 사원, 즉 최초의 종교건축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를 새로 써야한다는 말이 이제 조금 실감으로 다가온다. 그건 그렇고 12,000년 전의 사람들, 즉 원시인들은 아무런 도구도 없이 이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확보했을까. 가장 큰 것은 높이가 5.5m, 무게가 20t씩이나 한다고 한다. 또 길들인 동물도 없던 시절, 이 돌들을 어떻게 날랐으며 또 이 조각들은 어떻게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스터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도구라고는 우리가 봐온 돌도끼나 돌칼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기계를 동원할 수 있는 지금이라고 해도 쉬운 공사는 아닐 것 같다. 그 방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2년이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에 걸쳐 공사를 계속했을 거라는 짐작 외에는.

 

이 바위에도 동물이. 전갈처럼 보이는 게 새겨져 있다.아득한 구릉들과 평원.

괴베클리테페는 배꼽언덕이란 뜻이다. 괴베클리가 배꼽이고 테페가 언덕이다. 평원 위에 느닷없이 솟은 구릉이 배꼽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터키 사람들의 배꼽은 제법 높은 모양이다.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시야의 끝은 지평선이다. 애당초 신전 같은 것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지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만 년 넘게 길고 긴 잠에 빠져있던 괴베클리테페가 존재를 드러낸 건 1964년이다. 미국 고고학팀이 터키 남동부의 한 외딴 곳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이 언덕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 불쑥 솟아난 언덕이 수만 개의 깨진 돌조각들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발굴 작업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자연적인 지형은 아니지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 ‘비잔티움 시대의 무덤이 아닐까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덕분에 유적은 잠자는 시간을 조금 더 늘릴 수 있었다. 미국 고고학팀으로는 소위 큰 건을 놓친 셈이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괴베클리테페의 존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목동이 가축을 몰고 가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흙으로 뒤덮여 있던 낯선 모양의 돌들이 햇빛 속에 드러난 것이었다. 그 소식은 샨르우르파 박물관 큐레이터의 귀에 들어갔다. 박물관 측은 중앙 정부에 연락을 했고, 이스탄불에 있던 독일 고고학자들이 조사차 오게 된다. 1994년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 박사가 책임자가 되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다. 처음 발굴할 때만 해도 이런 거대한 유물이 묻혀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장하는 광경을 새긴 듯. 새가 보인다.

지금까지 밖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6개의 신전을 발굴했는데, 조사 결과 모두 24개의 신전이 더 묻혀 있다고 한다. 이 거대한 구릉 전부가 신전이었던 셈이다. 석상들 틈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올려다보니 정점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외로워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고고하다고? 그러니까 그런 그림이다. 끝없는 평원에 배꼽처럼 언덕이 하나 불쑥 돋아있고 그 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는. 나무 주위에는 돌로 담을 만들어 놨다. 가까이 가 봐도 언뜻 무슨 나무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뽕나무 같기는 한데 잎이 작아서 확신하기는 어렵고, 우리 땅에도 작은 잎 뽕나무가 있으니까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그렇다. 나무 이름을 물어보니 그곳에서는 드드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나 같은 문외한이 봐도 무척 경건한 풍경이다. 나무 옆에 서니 저 아래 낮은 구릉들과 세상 만물이 모두 한꺼번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 같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이 드드안 나무가 서 있는 장소는 유적이 발견되기 전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신성시 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도 이 자리에서 희생제를 치루는 등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인류가 탄생한 때부터 대대로 성스러웠던 이곳. 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묻혀 있는 것일까. 조사 결과 유적이 땅 속에 묻히게 된 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신전의 흔적은 두 개의 시대로 나눠진다. 1차는 BC 9500~8500. 그리고 약간의 공백기를 가졌다가 BC 8500~8000년에 다시 인공의 흔적이 나타난다. 문제는 그 뒤다. BC 8000년 뒤에는 사람의 손길이 완전히 사라진다.

 

저 곳 어디쯤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곳을 인위적으로 덮어버리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부분 역시 미스터리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었으며 1,000년 이상 성스러운 곳으로 삼았던 곳을 왜 떠났을까. 그리고 왜 그냥 떠나지 않고 흙으로 덮었을까? 이 광대한 지역을 덮는 데만 해도 수십 년이 걸렸을 텐데. 느닷없이 또 추리소설을 써야말 할 것 같은 예감에 시달린다. 이 대답은 상상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보다 먼저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가장 그럴 듯한 상상을 한 사람은 톰 녹스(Tom Knox)라는 기자 출신의 소설가였다. 그는 어느 날 TV에서 괴베클리테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뭔가 을 받은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기획기사를 썼고 2년 뒤에는 <창세기 비밀(THE GENESIS SECRET)>이라는 팩션 소설을 내놓았다. 소설을 홍보하자는 건 아니고 그의 상상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내용을 좀 빌려서 이야기를 풀어보려는 것이다. 톰 녹스는 브라이트너 박사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단서를 풀어놓는다.

“1만 년에서 12000년 전에 이 지역은 지금처럼 메마른 땅이 아니었다오. 오히려 아름답고 목가적인 땅이었지. 사냥감들이 초원을 뛰놀고 나무에는 야생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강에는 물고기가 가득했을 거요. 조각상에 지금 이곳에 살지 않는 동물들이 조각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

지금은 황무지처럼 보이는 저 넓은 땅이 인류가 잃어버렸던 낙원이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저 들판 어디에 이곳을 신전으로 둔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이 지역이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상상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가까운 데다 석상에 새겨진 동물들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언덕 맨 꼭대기에 있는 '드드안 나무'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진다. 그들은 사냥감이 코앞에서 뛰놀고 열매가 입 안으로 뚝뚝 떨어지고 물 반 고기 반이었던 이 땅을 왜 떠났을까. 답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소설 속 브라이트 박사의 생각을 좀 더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는 성서 속의 에덴동산과는 조금 다른 에덴동산이다. 그는 에덴동산 이야기가 인간의 수렵채집 시대를 묘사한다고 전제한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 사는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로 형상화 됐다는 것이다. 그들의 풍요로웠던 삶은 채집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바뀌면서 훨씬 더 많은 노동과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삶으로 전락했다. 그 시기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시기로 규정한 것이다. 소설까지 인용하면서 이 괴베클리테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받은 충격이 크다는 것이다. 12,000년 전의 신전이라니. 우리가 단군 이래 반만년 어쩌고 하는 것도 신화쯤으로 치부하는데, 그보다 7,000년이나 앞선 시대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 지금 내 앞에 햇볕을 받고 서 있다니.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자. 그들은 왜 이 낙원을 버리고 떠났을까. 역시 채집수렵과 농경문화 어쩌고 하면서 얼렁뚱땅 덮어버려야 할까. 고고학적 지식이라고는 쌀 한 톨만치도 갖지 못한 나로서는 또 다시 소설가의 상상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톰 녹스는 외래인의 유입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난 이유로 제시한다. 기원 전 1만 년경, 한 인종이 북쪽에서 살기 좋은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들은 이곳에 사는 왜소한 사람들보다 몸집도 크고 힘도 세고 난폭했다.

 

어딘지 모르게 성스러운 풍경이다.

또 이곳에 살던 사람들보다 훨씬 똑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현지 종족과 어울려 살면서 건축, 조각, 종교 같은 첨단 문물을 가르친다. 따라서 괴베클리테페 역시 외래인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괴베클리테페는 이들 왜소한 수렵채집인들에게는 일종의 낙원이었을 겁니다. 말 그대로 신이 인간과 함께 거니는 에덴동산인 거죠. 그러나 어느 날,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자원이 줄어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 결과 북쪽에서 온 거인족은 열등한 현지 종족을 노예로 부려 쿠르드 평원의 야생 곡식을 거두게 했습니다.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농부 신세로 전락하게 된 거죠. 왜 갑작스럽게 농경문화가 시작되는지 그 수수께끼의 실체가 바로 이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 타락 신화의 정체라는 말이군요. 에덴동산에 추방당한 진짜 이유 말입니다.”

소설 속 대화를 빌려온 것이다. , 이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겐 그럴 듯한 이야기로 들린다. 게다가 소설에 의하면 북부인들은 왜소한 수렵채집인 여자들을 성적으로 타락시킨다. 여자들은 새로운 종족과의 성교를 통해 새로운 성에 눈을 뜨게 된다. 이종교배에 의한 후손들도 태어난다. , 이젠 땅에 묻힌 괴베클리테페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시달리다 못한 수렵채인민들은 북부의 침략자들에게 맞서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압도적인 숫자에 의지에 북부인들을 모조리 살육하는데 성공한다.

 

괴베클리테페는 엄청난 노력 끝에 땅에 묻히게 됩니다. 거인족과 수렵채집인 사이의 이종 교배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악의 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말이죠. 수렵채집인들은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의도적으로 땅속에 매장했습니다.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쓰라린 낙원 추방의 기억을, 악과 함께 참혹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개와 교대로 바위를 지키는 청년.

소설을 가지고 맞다, 그르다를 판정하려 드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내겐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 그렇다고 눈앞의 유적을 보면서 기껏 소설이나 인용하느냐고 타박해도 부끄럽지는 않다. 나 자신이 상당부분 소설 속 상상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훗날 이 가설을 뒤집을 수 있는 학술적 결과가 나오면 앞장서서 전하면 되겠지. 나는 지금 에덴동산에 서 있다. 사과나무가 서 있고 뱀이 이브를 유혹하는 장면은 없지만, 드드안 나무가 있고 뱀의 조각이 새겨진 거석들이 있는 그 에덴동산. 낙원을 잃어버린 인류의 후손으로 이 언덕에 서 있는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햇살이 사선으로 비껴들고 황막한 평원에서 올라온 바람이 슬며시 옷자락을 들춘다.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다. 나오는 길에 보니 들어갈 때 개가 있던 그 자리에 한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잠들은 걸까? 민가가 무척 멀리 떨어진 곳인데. 개가 사람으로 바뀌었을 리는 없고 저들은 무슨 사연이 있어 이곳을 교대로 지키고 있는 것일까.

 

posted by sagang
2012. 12. 3.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조기가 우는 까닭

 

왕포마을 전경. 바다가 저만치 멀다.

지금은 썰물때,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멀고 파도소리 오랜 추억처럼 아득합니다. 작은 배 몇 척이 갯벌에 누워 쪽잠을 청합니다. 지난 밤 제법 먼 길을 다녀왔는지 온몸에 고단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바닷가 마을엔 가을이 일찍 와 있습니다. 은행에서 저금 찾듯, 나무에서 갖가지 색깔을 인출해 치장한 잎들이 훨훨 날아오릅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허공에 가득합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이별의 아픔은 없습니다.

 

 

왕포(旺浦)마을. 한때는 왕포(王浦)라고 불렸다니, 왕에 어울리는 무언가 있을 법해서 한 바퀴 돌아보지만 그저 조용한 어촌일 뿐입니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전북 부안군 진서면 문호리.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속한 조그만 마을입니다. 제가 이 마을을 찾은 건 마실길을 걷기 위해서입니다. 마실길은 서해의 진주라 부르는 변산반도를 따라 걷는 해안 둘레길입니다. 개복숭아 꽃 곱던 지난봄, 3구간 1코스인 아홉구비 돌아가는 길을 걸은 뒤 그 풍경에 반해 오늘은 3구간 2코스의 출발점에 섰습니다. 왕포에서 곰소염전까지 이어진 길의 이름은 제방 따라 청자골 가는 길이랍니다. 이름들도 참 예쁘게 짓습니다. 12km 거리에 3시간 걸린다고 써놨는데 걸어봐야 알 일입니다.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고통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 그림자와 대화하며 걷는 시간은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가 존귀한 충만의 시간입니다. 출발 직전, 느닷없이 정적을 깨는 소리에 풍경은 저만치 물러나고 각박한 삶이 코앞에 섭니다. 골목 안쪽에서 주민들끼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가는데 걸리적거렸던 모양이지요? 그런 것도 싸움이 될까 싶은데도 목소리는 갈수록 날이 섭니다. 퍼붓는 쪽은 원주민인 듯 하고, 수세에 몰린 쪽, 염치없이 나뭇가지를 담 밖으로 내보낸주민은 타지에서 들어온 모양입니다. 시골살이를 꿈꾸고 있는 제게는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싸움 구경이 발목을 잡아도 갈 길은 가야지요. 낮은 담 사이 골목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납니다. 길은 언덕을 향해 굼실굼실 앞서 갑니다. 사람 대신 늙은 감나무가 나그네를 전송합니다. 누군가 감춰뒀던 보석을 달아 놓은 듯, 작은 감들이 가지마다 반짝거립니다. 언덕에 오르자 저만치 바다가 보입니다. 바닷물은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저 바다를 칠산바다라고 부릅니다. 연평어장과 함께 우리나라 2대 조기어장으로 이름을 날렸지요. 그리 오래지 않은 날인데도 지금은 전설처럼 멀기만 합니다. 전설, 이라고 소리 내어 말했더니 갑자기 조기울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칠산바다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조기가 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저는 설마 했는데, 관해기(주강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라는 책을 보니 정말로 조기 우는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산란 때면 시끄러워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지요. 그 울음의 정체는, 참조기가 부레 근육을 움직여서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신호라는데, 그걸 운다고하는 것이지요. 어부들은 그 조기울음을 고기 잡는데 이용했다고 합니다. 구멍 뚫린 대나무 통을 바닷물에 넣은 뒤 울음소리로 위치를 파악해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겐, ‘부레음이라는 과학적 설명이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그저 울음으로 기억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요. 조기들은 왜 우는 것일까요?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아 바다를 짜디짠 눈물로 적셨을까요.

 

영광굴비 혹은 법성포굴비라는 불세출의 이름을 남긴 칠산바다는, 법성 근역의 칠뫼(七山)부터 변산반도 앞 위도까지 아우르는 넓은 바다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그 북쪽 끝에 가까운 곳이지요. 칠산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조기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 증거로 일찍이 신안 지도군수를 지낸 오횡묵(吳宖默)이라는 이는 1897년에 제작한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칠산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고기를 사고팔며 오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연평어장이 그렇듯 칠산어장도 지금은 쓸쓸한 바다일 뿐입니다. 영광굴비, 법성포굴비도 칠산바다 출신들은 아니지요. 잠을 앗아갔다는 조기의 울음소리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을 <풍장소리>도 그저 바람결에 몸을 싣고 빈 바다나 오갈 뿐입니다.

 

얼시구 좋다. 절시구 좋와, 얼시구나 좋네.

헤헤 허야허아 허어 허어허어 좋와요.

칠산바다에 들어온 조구

우리배 망자(網子)로 다 들어왔다.

에헤 좋네. (중략)

들물에 천냥, 썰물에 천냥

안안팟 네물에 사오천냥 실었다.

에헤 좋와요.

에헤 허아허아 허아 허아허아 좋와요. (하략)

 

조금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면 여러 길들이 각기 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게 선명합니다. 어느 길은 술 취한 50대 가장의 넥타이처럼 풀어져 있고 또 어느 길은 사관생도의 바지 주름처럼 절도 있게 뻗어나갑니다. 세상은 낮잠에라도 든 듯 조용합니다. 낯선 발자국소리에, 노란 햇살이 놀란 꺼병이처럼 갈대숲으로 숨습니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을 나눈 강아지

길은 긴 제방과 만납니다. 제방 옆 작은 집 마당에서 꼬박꼬박 졸던 개 한 마리가 나그네를 보더니, 사위 맞는 장모 걸음으로 달려옵니다. 아까 동네에서 만났던 개들의 앙칼진 경계는 애당초 배운 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봄 이곳에서 보았던 강아지들 중 한 마리인 것 같습니다. 조막만 하더니 제법 커서 걸음마저 으쓱거립니다. 어미와 형제는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모양입니다. 달려들어 비비고 뛰고 온갖 재롱을 다 떱니다. 만남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몸짓입니다. 개와 저 사이의 벽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경계를 지우고 마음을 내려놓은 만남만큼 편안한 게 있을까요. 소통이니 화합이니 하는 수사의 번거로움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아무리 행복해도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지요. 아쉬운 걸음을 떼는데 녀석이 졸졸 따라옵니다. “애야, 그러다가 길 잃을라.” “걱정 마세요. 동네에서 길 잃는 개 봤어요?” 그도 그렇군요. 제방 중간쯤에서 쓸쓸하게 돌아가는 녀석을 인사 차 불렀더니 금세 돌아서서 달려옵니다. 저도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안 부르고 그냥 갔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그런 반복이 여러 번 계속되다 제방 끝쯤 닿아서야 진짜 이별을 합니다. 사람이나 개나 외로움이 주는 고통은 뼈에 각인되는 것 같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라고, 숙명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해도, 행복으로 치환하는 경지는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관선마을 전경

길은 길을 밟으며 자꾸 앞으로 갑니다. 관선(觀仙)마을이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면서 자꾸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풍경이 낯설지 않은 걸 지나서, 언젠가 이 길을 걸어간 것 같다는 기시감마저 듭니다. 무엇 때문일까? ! 순간 떠오른 기억 한 자락에 무릎을 치고 맙니다. 정말 그렇군요. 어릴 적 할머니와 걷었던 그 길을 꼭 닮아 있습니다. 할머니와 걷던 길수룽구지로 가던 길. 그 길이 수십 년 만에 제 앞에 돌아와 있습니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제게 애써 가벼움을 두른 한마디를 던집니다. “수룽구지 안 갈라냐?” 저는 달다 쓰다 따라 나섭니다. 가부 간을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만한 아이였으니까요. 그런 때 할머니 곁에 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수룽구지는 조그만 포구였습니다. 조금 전 지나온 왕포나 관선마을과 비슷했지요. 어촌보다는 산촌에 가까웠던 제 고향에서는, 손이 잠시 남으면 그곳으로 새우젓이나 비린 것을 사러갔습니다. 돈은 밭에서 거둔 푸성귀나 시금털털한 과일이면 충분했습니다. 농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과 어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쉽게 교환이 됐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빈손이었습니다. 속바지에 달아놓은 호주머니에는 아끼고 별렀던 동전 몇 닢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소주 두어 잔 값, 어린 손자이자 동행인 제 입에 물릴 사탕 두어 개 값. 그것만 가지고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저도 그 뒤를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워낙에 말이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그런 날에는 침묵이 길었습니다. 그렇게 걸은 길이 십리였는지 이십 리였는지는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는 조금 벅찬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들을 지나고 산을 넘어 걷다보면 갯내음이 먼저 달려와 코를 찌르고, 곧 이어 저만치 작은 포구가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수룽구지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할머니는 갯것을 사고파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두어 평쯤의 허름한 가게, 그 시절엔 그런 곳을 송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소주를 시켰습니다. 제 입엔 ‘10리사탕이라고 부르던, 단단하고 하얀 사탕을 물렸습니다. 가게 주인이 병마개를 빼고 작은 유리 잔 가득 소주를 부어주면, 할머니는 조금 전 다급했던 시간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마셨습니다. 대포나 다모토리(선술집에서 큰 잔으로 파는 소주를 가리키는 우리 말)에는 어림도 없는 눈깔만한 잔. 가슴에 일렁이는 불길을 잡기에는 턱도 없었겠지만 그 순간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약이었을 겁니다. 저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쪽마루 끝에 앉아 작은 사탕 하나를 아끼면서 빨았습니다. 안주는 가게에서 내놓는 새우젓이 전부였습니다. 소주와 새우젓, 지금 생각하면 어색한 조합이지만 갯가에서는 별로 낯설 것도 없었습니다. 10리는커녕 앉은 자리에서 녹아버린 사탕 때문에 허무함에 시달리던 저는 새우젓을 곧잘 집어먹었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라며 웃었습니다. 농담이라도 빌려 손자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송방에서 나와 할머니가 가는 곳은 작은 배 몇 척이 노고를 내려놓는 포구였습니다. 그곳이라고 당신을 기다려주는 게 있을 리는 없습니다. 바다 쪽에 시선을 두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가끔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확인하려고 애써봤지만 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무심하게 오가는 갈매기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 떠가는 배나 구름을 보고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울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조바심으로 저는 애먼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울지 않았고, 대신 갈매기가 머리 위를 맴돌며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당신도 어린 손자의 초조를 알고 있었겠지요. “이젠 그만 가자.” 어느 순간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생솔가지를 태운 듯 매캐한 내음이 묻어있었습니다. 비린 것 한 손 들지 않은 가난한 귀가는 쓸쓸했습니다. 소주 두어 잔 외에 하루 종일 빈 속이었을 할머니의 걸음은 자주 허청거렸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게 흔들리는 걸음과 달리 당신의 표정은 조금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소풍이 할머니에게는 설움 받힌 가출이었고 최소한의 일탈이었고 오욕을 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방탕과 방랑 사이를 오가다 빚더미만 남겨놓고 떠난 남편, 현실에 무너진 큰 아들, 집을 떠나 소식조차 없는 작은 아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잊지 않는 빚쟁이들. 무엇보다 남들이 씨를 뿌리고 거두는 수많은 논과 밭이, 한때 자신의 소유였다는 기억이 가장 큰 절망이었겠지요. 하지만 할머니는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습니다. 소라껍질 같은 단단함이 그나마 집을 지탱하는 힘이었으니까요. 저를 불러 수룽구지에 가는 날은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었겠지요. 소리 없는 통곡을 위해 나선 길이었겠지요. 산길 하나 넘으며 화를 삭이고 들길 하나 건너며 원을 내려놓고나머지 찌꺼기는 바다에 떨치는. ! 늦은 깨달음은 더욱 큰 아픔입니다.

 

수룽구지가 수룡동이라는, 의외로 멋진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먼 훗날 알았습니다. 차를 타고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을 지나는데, 길가의 수룡동이라는 입간판이 시선을 당겼습니다. 저는 그 수룡동이 과거 할머니와 가던 수룽구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음운변천을 거쳐 수룡동이 수룽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느낌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수룽구지의 실체에 대해 약간의 의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어릴 적 꿈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까. 가족 중에도 수룽구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수룡동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송방이라 부르던 가게와 갈매기 날던 선창과 설움 가득하던 하늘을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지만, 그냥 미뤄두기로 했습니다. 첫 사랑은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듯이, 환상 같은 기억 하나쯤은 남겨둘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은 절망이 온몸을 조일 때, 비린내 나는 선창에서 보았던 할머니의 처연한 눈을 생각합니다.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 이명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마음을 기댑니다.

 

어쩌다 보니 길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하필 오늘 같이 기분 좋은 걸음에 왜 그 칙칙하던 날이 떠올랐을까요. 살다 보면 이를 악물고 갈무리해서 삭혀야 하는 아픔이 있고 털어놓아서 덜어지는 아픔도 있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또 절실하게 그리운 역설의 먼 시간. 오늘은 수십 년 지고 다니던 짐 하나 내려놓고 갑니다. 짐 내려놓기는 여행길 내내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진정한 목적 중 하나가 내려놓고 가벼워지기이고, 가벼워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치유니까요.

 

논길을 지나고 억새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는 모롱이를 도니 다시 바다가 나옵니다.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만치 보이는 작은 항구가 곰소항이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젓갈단지, 그리고 곰소염전이 나옵니다. 작은 항구, 손이 아닌 눈으로 만져보기 위해 이만치 떨어져 앉습니다. 혼자 걷다보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바다는 멀리 있습니다. 긴 이별에 지친 갯벌은 침묵으로 엎드려 있습니다. 침묵으로아니군요. 침묵만 본 건 제가 부주의한 탓이었습니다. 갯벌은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폐타이어, 플라스틱 조각, 슬레이트, 가스통까지 온갖 쓰레기가 진을 치고 있는 이 죽은 듯한 갯벌에도 작은 생명들의 화려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손톱만한 게, 짱뚱어,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이 전해주는 충만과 열락(悅樂). 힘을 내어 다시 휘적휘적 걷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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