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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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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성채로 올라가기 전 나는 자꾸 미루나무에 눈을 빼앗겼다.

새벽 두 세 시나 됐을까? 살얼음처럼 얇던 잠은 금세 금이 가고 만다. 민감한 신경줄을 가진 사람은 시차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 몇 시간 늦춰 산다는 것조차 이렇게 힘이 드는구나. 예외 없이 머릿속에는 ‘생각충’들이 바글거린다. 밑 짧은 잠으로는 다 털어내지 못한 피곤을 안은 채 몸을 일으키다 하릴없이 거울과 눈이 마주친다. 익숙하고도 낯선 사내가 하나 서 있다. 이 사람은 왜 이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일까. 근 9개월 만에 나선 긴 여행, 쉬는 동안 제멋대로 이완된 근육들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마음은 서울에서의 번잡을 그대로 껴안고 있다. 얼마 전부터 가슴에 자리한 은은한 통증은 지병으로 자리 잡을 모양이다. 비온 뒤 솟아나는 잡초처럼 자꾸 고개 드는 잡념을 누질러보지만 제멋대로 분열과 번식을 거듭할 뿐이다. 나는 얼마나 더 걸어야 마음에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 창공을 날 수 있을까.

멀리서 바라본 반 성채. 역광이라 별로 아름답진 못하다.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본 반 성채.

아침 일찍 찾아간 반 성채(Van Kalesi) 앞에서 잠시 문제가 생겼다. 영상카메라는 들어갈 수 없으니 수도인 앙카라에 가서 허가증을 받아오란다. 여기서 앙카라가 얼마나 먼 곳인데. 결국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는 것이다. 유연성 없는 관료주의에 기가 질린다. 내가 멘 스틸카메라는 되고 뒤를 따라오는 영상카메라는 안 된다? 요즘은 대부분 전문가용 스틸카메라를 영상용으로 쓴다. 다만 필요에 따라 보호용 외장 케이스나 마이크를 장착하기 때문에 커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외장만 벗기고 올라가면 되겠네? 아주 간단한 잔머리에도 무사통과다.

 

대부분은 흙벽이다.

반 호수의 동쪽이자 반 시 외곽 거대한 바위산에 쌓은 토성(土城). 하얀 눈을 머리에 쓴 반 성채는 마침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장엄하게 빛난다. 이 성은 고도의 문명을 구축했던 우라루트 왕국의 사르두르 1세에 의해 BC 825년에 세워졌다. 3,000년 가까이 된 고대의 유물이란 뜻이다. 너비는 70~80m에 길이 1.5km, 높이는 80m.

2월 말인데도 눈이 녹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관람객은 거의 없다. 두껍게 쌓인 눈 위에 어제 찍힌 발자국이 분분하게 남아있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저 아래로는 성냥갑처럼 작은 집들이 낮게 엎드려 있다. 마치 미니어처로 꾸며진 동네를 보는 것 같다. 반호수로 가는 길에는 키 큰 미루나무들이 그림처럼 서 있다. 하늘에 닿으려는 열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곳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가슴에 잔물결로 자리한다. 긴긴 세월 이곳이 전쟁터였다는 사실을 누가 일부러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셀 수없이 많은 왕국과 권력이 이곳에서 영욕을 맛보았다. 지리적으로 근접한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리스‧로마‧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셀주크와 오스만투르크. 그들은 이 성을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 각자의 흔적을 조금씩 남겼다. 그래서 각기 다른 건축자재가 섞인 복합적 구조의 성이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바위 위에 쌓은 흙벽. 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기도 했고 흙벽돌에 밀짚 같은 섬유질을 넣기도 했다. 과거 우리 땅에서 흙벽돌을 찍을 때 볏짚을 썰어 넣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튼튼하게 짓기 위해 흙에 타조알을 섞기도 했단다. 그런 다양한 공법들이 세월과 지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별 보호조치가 없기 때문에 날마다 비바람에 마모돼 가고 있다.

 

멀리 반 시내가 보인다.

성 꼭대기에 올라가도 특별히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우라르트 왕 아르기스티 1세의 무덤 등 몇몇 유적이 있지만 특별한 감흥을 줄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반 시내와 반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경치가 일품이다. 내 시선을 잡고 오랫동안 놓지 않은 것은 남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원. 아니, 폐허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이는 거대한 공터다. 성에서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다. 성 위에는 가드레일 같은 것을 전혀 해놓지 않아서 나 같은 중증 고소공포증 환자는 언뜻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폐허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역사의 비극 속에서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기둥은 찬바람 속에 을씨년스럽다. 세상에는 살아 있어서 슬픔을 전하는 것도 있구나. 지금 내려다보이는 저 폐허가 바로 원래의 반이 있던 곳이다. 새로 세워진 반의 반대쪽인 셈이다. 그 도시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았다. 하지만 1915년 이후 이 인근에서 아르메니아인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3,000년 동안 번성했던 도시도, 그곳에서 누대로 살아온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저렇게 황량한 폐허만 남은 것일까.

 

흙벽들이 세월에 녹아가고 있다.

입에서 꺼내기조차 저어돼 미뤘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여기서 털고 가야겠다. 바다처럼 넓은 반 호수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5,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한때 번성을 누렸던 우라루트 왕국이 사라진 다음, 이곳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그 사이에 숱한 왕조가 명멸했던 사연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때는 페르시아와 로마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고 비잔티움 제국을 거친 뒤에는 이슬람시대가 열렸다. 1045년 셀주크투르크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한 아르메니아 왕국의 1,000년 역사는 기록 속으로 사라진다. 셀주크투르크의 뒤는 오스만투르크가 이었다. 왕국이 사라진 뒤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이곳에 삶터를 잡고 살아갔다. 사람살이에 왕국이나 제국이나 공화국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참담한 비극이 닥친 건 근세 들어서였다.

 

저 아래 보이는 공터가 원래 반이 있던 곳.

1877년 발발해 2년 동안 계속된 오스만투르크-러시아 간 전쟁에서 오스만이 패한 게 화근이었다.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에 사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투르크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더욱 증폭됐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 격이지 뭐. 그런 와중에 1894년 오스만투르크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세금을 고의적으로 무겁게 매기자 반란이 일어났다. 오스만과 쿠르드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학살을 시작했다. 1894년 이후 2년 동안 10만 명에서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4년 오스만은 러시아를 재차 침공했지만 역시 지고 말았다. 오스만은 국경지대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1919년 4월20일 반에서 군인들에게 희롱당하는 여인을 구하려던 아르메니아 청년 둘이 사살 당하자 또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빌미로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들이 줄줄이 체포되고 모든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법이 입안됐다. 강제 수용되는 과정에서 숱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범죄와 기아, 질병으로 죽어갔다. 수용소 안에서도 조직적인 학살이 이뤄졌다. 3,000년 역사의 반 시는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미나레트만 을씨년스럽다.

한마디로 증오와 광기가 난무한 인종청소였다. 이 과정에서 죽은 사람을 터키 측에서는 30만 명이라고 강변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은 150만 명이이라고 주장한다. 제 3자적 시각으로도 최소한 50만에서 60만 명 정도는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주 먼 옛날이 아닌 190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세기의 비극이다. 어떤 설명으로도 그 같은 범죄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스만투르크를 이어받은 터키에게도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일 수밖에 없다. 내 역시 아무리 터키에 우호적이라고 해도 이 비극을 외면하고 갈 수는 없다. 반 호수를 둘러싼 너른 평야에서 양떼를 몰고 밀농사를 지으며 평화의 노래를 불렀을 아르메이아인들. 그들은 간데없고 기둥 몇 개만 남아 비극을 애기해주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가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아득한 절벽은 또 아득한 세월이기도 하다.

성의 맨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반 호수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풍경 앞에서는 역사가 흘렸던 숱한 피조차 무색해진다. 성의 맨 꼭대기에 올라 넋을 놓고 사방을 바라본다. 그러다 선글라스를 쓰고 언덕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운전사 베이셀과 눈이 마주친다. 이 친구는 선글라스만 씌워놓으면 영화배우 부럽잖게 멋있다. 느닷없이 장난기가 돌아 손가락을 치켜들며 “You look great” 했더니 이 친구 “Thank you” “Thank you” 어쩔 줄 모른다. 짧지만 영어를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대화는 문제가 없다. 베이셀은 칭찬 받아 마땅한 친구다. 터키에 갈 때마다 보는 것이지만 운전사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차 안에서 쉬거나 본인의 볼일을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친구는 늘 제작팀을 따라다닌다. 그것도 그냥 구경 삼아 가는 게 아니라 트라이포드나 렌즈 가방을 들고서.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Thank you”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 친구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고백하듯 말한다. “I am happy” 그래, 그래. 나로 인해 네가 행복하다면 나야말로 행복하다. 사실은 나도 너를 볼 때마다 행복해. 세상에 성실한 청년만큼 아름다운 존재가 어디 있으랴. 아르메니아인 인종청소가 떠오르는 바람에 마음에 드리워졌던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저 멀리 반 호수가 보인다.

양지바른 언덕 쪽엔 벌써 봄이 푸르게 깔려있다. 땅은 젖가슴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틈틈마다 작은 풀들을 밀어올리고 있다. 아, 먼저 살다간 이들이여. 그대들의 욕망이 아무리 하늘을 찔러도 이 풀잎 하나만도 못한 것을. 그대들은 사라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해매다 싹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 홀로 미리 온 봄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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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키르 세케 씨의 딸과 아들. 아이들부터 사진을 찍어주면 그 집에서 환영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샤키르 세케 씨의 농가를 찾은 건 애당초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저 시골길을 지나던 중이었을 뿐이다. PD의 제안이었겠지. 그는 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니까.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얼마나 양을 많이 찾아다녔든지 양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양을 사고파는 시장에 가봤으니 이왕이면 목축 농가도 들러보자는 PD의 주장을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내 일만 많아진 거지 뭐.

 

샤키르 씨네 집. 왼쪽이 정부에서 새로 지어줬다는 집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고백하고 가자. 방송이 나간 뒤에도 여러 번 들은 질문이지만 세계테마기행에는 각본이 없다. 오로지 무대뽀 정신만 갖고 다닌다. 촬영기간 내내 대본을 받거나 연출 지시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든 걸 맨땅에 헤딩으로 해결하라니. 촬영장소를 미리 헌팅한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출연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길을 지나다가 저만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럼 정 PD가 말한다. “그림 괜찮지 않아요?” , 말은 쉽지. 안 괜찮다면 안 찍을 거야? 이미 익숙해진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한번 올라가볼까요?” 그러면 카메라가 따라오고 나는 안녕하세요보다 더 익숙해진 인사 메르하바!(안녕하세요)”를 외치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워낙 방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미리 섭외할 틈도 없고, 그럴 인력도 없다. 또 섭외를 해놓으면 찍을 때 뭔가 어색하다는 카메라감독의 지론도 한몫을 했다. 그래, 출연자 피 짜내서 좋은 영상 실컷 만들어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피디나 카메라 감독, 코디까지 호흡이 척척 맞는 촬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는 없다.

 

비닐하우스 속의 양들.

이쯤에서 본론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길을 가다 무작정 찾아들어간 농가가 샤키르 씨의 집이었다. 알라쾨이라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양은 봄부터 가을까지 방목을 하지만 겨울에는 우리에 두고 먹이를 주기 때문에 그림이 될지 여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도 무대뽀 정신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구멍가게에 들러 양치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뒷집을 가리킨다. 그걸 말로 하면 이 동네는 모든 집이 목축을 한다는 얘기다. 무조건 찾아가 기척을 하니 초로의 사내가 나온다. 사내 뒤로는 남녀 꼬마 둘이 따라 나온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첫 인상이 할아버지 같았던 사내, 샤키르 씨는 기껏 50대 초반이었고 손자손녀 같던 아이들은 아들과 딸이었다. 아무튼 어김없이 메르하바”, “호쉬 겔디니스”(어세오세요) 인사가 오간 뒤 사정을 얘기하니 타맘”(OK) “타맘이 터져 나온다. 아무 약속도 없었는데도 마치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거리낌이 없다. 아니, 슬쩍 훔쳐보니 이게 웬 떡이냐하는 표정이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통째로 내 집에? 알라신에게 감사기도라도 드릴 태세다.

 

지진의 흔적. 여기도 갈라지고 저기도 무너지고.

앞장서서 걷는 샤키르 씨의 걸음걸이에 신명이 붙는다. 이거, 일이 커지겠는 걸. 그를

따라가 보니 안마당에 사과나무까지 심어놓은 꽤 넓은 집이다. 이곳도 마당이든 어디든 가축의 배설물로 도배를 했다. 마른 데를 골라 디디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했던가. 밟자, 밟아! 샤키르 씨가 먼저 축사로 안내한다. 비닐하우스 같은 가건물의 문을 열자 꽤 추운 날씨인데도 열기가 확 밀려나온다. 어디 열기뿐이랴. 기다렸다는 듯 코끝으로 달려드는 잘 발효된 분뇨 냄새.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축사에 몸을 들이미는 순간 헉! 하는 비명이 터진다. 생각해 보라. 컴컴한 곳에서 수백 쌍의 눈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장면을.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좁은 곳에 서 있는(누울 틈이 없어서인지 원래 그런 건지 모두 서 있다) 양의 숫자가 무려 150마리라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당나귀도 있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아무튼 그들도 주인과 낯선 사람을 구별할 줄 안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밥 때도 아닌데 느닷없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온 이상하게생긴 사내.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입만 터졌다면 가축시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동이 벌어졌을 뻔 했다. 아무튼 양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든 말든 나는 그곳에 들어가야 했다. ?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오니까. 분뇨, 열기, 냄새, 그리고 경계를 담은 300개의 눈동자.

 

기어이 2층까지 올라가 지진피해를 설명한다.

양과 염소들은 하루 종일 축사에 있다가 밥 때만 하루 두 번 바깥 구경을 한다. 원래는 축사가 따로 있었다는데 2011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거의 무너지는 바람에 이곳에 임시 축사를 지었다고 한다. 축사는 건성건성 소개하던 샤키르 씨가 나를 끌고(나 하나만 움직이면 수행원들이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허름한 건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곳을 일일이 설명해준다. 여기는 이렇게 갈라졌고 저기는 저렇게 무너졌고. 정작 샤키르 씨가 내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정부에서 새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내가 그 은혜로운 사실을 잊을까봐 여러 번 반복한다.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새 집이 생겼으니 그에겐 불행이 행운이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양에 올인하고 싶은 제작진의 소망과는 반대로 샤키르 씨는 오로지 지진에 올인할 태세다. 원래는 인부들의 숙소였다는 2층까지 데리고 올라가 일일이 피해상황을 브리핑한다.

 

건초더미에서 건초를 내리는 샤키르 씨.

그렇게 다니는 사이에 나는 이 집 막내아들과 친구가 돼 버렸다. 귀염둥이로 자라서인지 별 거침이 없는 이 녀석은 계속 나를 졸졸 따라 다닌다. 카메라 감독 좀 피곤하겠는 걸. 이 집으로는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 위로 딸만 넷이 있었는데 끝없는 노력 끝에 이 아이를 낳았다고 자랑한다. 아직 아들 선호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반증이다. 유목민들의 피가 흐르는 이곳 사람들이야말로 아들을 귀하게 여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들을 바라보는 샤키르 씨의 눈길은 귀한 보석을 보는 듯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

 

건초를 저렇게 싣고 가서 눈 위에 뿌린다.

2지진피해현장에서 내려와 잠시 쉴까했더니 샤키르 씨가 또 은밀한 몸짓으로 다가오더니 손목을 잡아끈다. 카메라 따위는 오든지 말든지. 주인이 다큐멘터리의 진행에 연출까지 다 맡아버리니 PD는 할 일이 없어진다. 창고의 문을 여는 그의 얼굴에 환희가 꽃으로 피어난다. 대체 뭐가 있길래 보물창고를 여는 표정이지? 들어가 보니 커다란 트랙터가 점잖게 앉아있다. 얼마나 아끼는지 겨우내 닦고 문질러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롤스로이스도 이 정도로 빛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끼고 아끼던 걸 보여줄 때의 그 희열에 가득 찬 몸짓. 하긴 농부에게 이만큼 소중한 재산이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2대 보물, 즉 아들과 트랙터를 모두 본 셈이다.

 

마당에서 딴 사과. 정말 맛있다.

카메라가 스케치를 하는 동안 샤키르 씨가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쟁반에 사과를 가득 담아 내온다. 지난 가을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수확한 거란다. 한 조각 입에 넣어보니 이럴 수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지금까지 먹어본 사과 중에 가장 맛있다. 어떻게 사과에서 이런 맛이 나지? “촉 레젯틀리, 촉 레젯틀리”(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저절로 나오는 나의 예찬에 샤키르 씨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다. 그가 또 뭘 보여줄 게 없나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 손을 잡아끌자 이번엔 정 PD가 과감하게 막아선다. 계속 끌려 다니다 보니 작업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이젠 양 먹이 주는 걸 찍고 싶은데.”

타맘(OK), 타맘

그의 사전에 ”(안 됩니다, 없습니다), “하이으르”(아니요) 같은 단어는 없다.

 

양들이 풀을 맛있게 먹고있다. 그 사이에 한 녀석은 탈출을 감행한다.

밥을 먹이긴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그는 서슴없이 마른풀을 손수레에 싣는다. 여름에 베어서 말린 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풀이다. 겨우내 먹여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모든 식구가 꼴을 베는데 동원된다고 한다. 이래서 식구가 많은 집이 부자라니까. 양들은 겨우내 이렇게 들어앉혔다가 들판에 봄을 알리는 아지랑이가 깔릴 무렵 교배를 시키고 풀이 자라서 방목을 시킬 무렵 새끼를 낳게 한다. 초유를 아기양이 먹은 다음부터 상품이 될 수 있는 젖을 짠다. 절차상의 실수로 겨울에 낳는 새끼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그 원칙을 따른다. 샤키르가 풀을 거의 날랐을 무렵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양을 풀어서 길가로 몰아간다. 바깥구경에 얼마나 신이 났는지 가끔 엉뚱한 길로 새는 녀석도 있기 때문에 한곳에 모으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나도 카메라와 배낭을 벗어던지고 양몰이에 나선다. 결국 흥에 겨워 샤키르 씨의 손에서 풀 나르는 손수레까지 빼앗는다. 헉헉! 이것도 쉽지 않은 걸. 그래도 이 녀석들아. 너희는 운이 좋은 줄 알아. 나 같은 스타에게 밥 얻어먹는 게 쉬운 줄 아냐?

 

 

샤키르 씨네 가족. 동네 아저씨 하나 동네 꼬마 둘도 끼어있다.

양들이 먹이를 다 먹고 나니 이번엔 사람이 출출하다. 그걸 눈치 못 챌 샤키르 씨가 아니다. 어느 새 마당에는 점심이 한 상 차려졌다. 집에서 직접 구운 빵, 뒤뜰에서 뜯은 약초를 넣어 만들었다는 치즈, 조금 거칠지만 개운한 차이까지. 차려진 건 점심뿐이 아니다. 제작팀이 왔다는 게 벌써 소문이 났는지 동네 사람들이 슬슬 모여든다. 내가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아니지. 잘만 하면 TV에도 나올 텐데모두의 얼굴에 그런 결의가 씌어있다. 헌데 재미있는 건 서로 아저씨 아니면 조카다. 샤키르 씨에게 물어보니 이 동네 사람 모두가 일가친척이란다. 한 마디로 씨족사회의 원형을 보고 있는 셈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수다는 가능하다. 그 사이에 셋째 딸, 넷째 딸과도 친구가 됐다. 특히 학교에 다니는 셋째 딸은 무척 똑똑하다. 나를 선망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더니 장 선생에게 저 사람이 한국의 유명한 앵커냐고 묻는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걸 보니 커서 훌륭한 방송인이 될 것 같다.

 

차이를 다 마시고 잔을 놓는 순간 샤키르 씨가 또 은근하게 나를 부른다. 나도 이쯤 되니 그의 부름이 조금 겁난다. PD 역시 은근히 피하는 눈치다. 이번엔 뭘 자랑하려고? 버텨봐야 소용없다. 결국 따라가는 수밖에.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지진 피해농가에게 정부에서 지어줬다는 새 집. 아까 피디가 방해하는 바람에 자랑의 순서에서 빠진 게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집의 형태는 거의 갖췄다. 샤키르 씨가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내게 들이대고 이것저것 설명한다. “여기는 큰 방이고, 여기는 애들 방, 주방도 멋있지?” 결국 화장실 앞에서 촉 귀젤!(엄청 멋져요)”을 선언하고서야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먼 나라 사람에게 자신의 새 집을 보여주고 싶어서 가슴 졸이는 소박한 마음이라니.

 

헤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가족사진. 이번엔 동네 사람이 좀 더 많이 섞였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이별은 오는 법. 이젠 정말 떠나야할 시간이다. 목축 농가를 살짝 스케치 한다는 게 거의 한 나절 이상을 머물렀으니. 하지만 아무리 짧은 정이라도 이별이 그리 쉬운가. 동네 사람들은 물론 아이들, 강아지까지 모두 나와 손을 흔든다. 저 순박하고 선량한 눈들.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는데 막내가 달려와 내 손을 꼭 잡고 자꾸 뭔가 이야기한다.

? 뭐라고?”

사진! 사진 꼭 보내달라고요

, 사진! 보내주고 말고. 당연히 보내줘야지. 아이와 약속을 하느라고 이별의식은 좀 더 연장된다.

호쉬차 칼른”(안녕히 계세요)

귤레 귤레”(안녕히 가세요).

이 길고 긴 이별의식 오늘 중에 끝날 수 있을까?

 

 

posted by sagang

 

시장 전경

아침 일찍 보스타니치라는 마을의 가축시장으로 간다. 첫 일정이 하필 가축시장이야? 물을 필요는 없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반 지역은 목축이 주업이다. 아니 목축을 빼놓고는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가장 활기 있는 곳을 찾으려면 가축시장으로 가면 된다. 가축시장의 첫 인상은 삭막과 번잡으로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다. 배타적이어야 할 두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곳이 있다니. 시장이 자리 잡은 장소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다. 그나마 저만치 설산이 없었다면 사방으로 지평선만 보일 뻔했다. 그래도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곳곳에서 온 차들과 속속 모여드는 사람들. 그리고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소와 양.

 

검은 옷이나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맨 먼저 마주친 건 그리 달갑지 않은 풍경이다. 시장 입구 노지에서 양을 도살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법도축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공도축장이 있지만 이런 식의 야매도축이 싸기 때문에 늘 성업을 이룬단다. 고급차를 몰고 온 사람도 길바닥 업자에게 도축을 맡긴다. 칼만 하나 들고 나타난 도축업자는 능숙한 솜씨로 양의 목을 따고 가죽을 분리하고 내장을 들어낸 뒤 고깃덩어리를 고객에게 건넨다.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사서 회를 떠갖고 가는 절차와 비슷하다. 그 모든 게 맨 땅에서 진행된다. 조금 전까지 펄펄하게 살아있던 녀석들, 칼날 하나에 온기를 내준 육신은 금세 허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나는 차마 그곳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한다. 한 생명을 보내는데 대한 경건함은 어디에도 없는 현장.

 

멀리 설산이 보이고

양들도 서로 기대 온기를 나눈다.

장이 워낙 크다보니 온갖 부설시장도 생겼다. 닭을 파는 트럭, 빵과 사과를 파는 손수레. 그 틈을 뚫고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나타나자 고요하게 가라앉았던 시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양과 소와 검은 옷을 입는 사람만 있어야 할 시장에 느닷없이 원색의 옷을 입은 동양인과 듣도 보도 못한 카메라가 나타나다니. 그런 의아심을 눈 가득 담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내 주변을 감싼다. 시장이 생긴 이래 최대의 이변이 일어났다는 표정들이다. 헌데 내 눈에는 좀 이질적인 게 먼저 보인다. 노인, 장년, 청년, 아이, 강아지까지 있지만 여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이슬람의 전통이 극명하게 반영된 곳이 바로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물건을 파는 것은 물론 장을 보는 일까지 모두 남자의 몫이다. 애당초 여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나타나면 안 되는 존재다.

 

기념 사진 찍어주세요!! 가운데 꼬마는 어른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 사진마다 등장한다.시장바닥은 사정없이 질척거리며 신발에 매달린다. 밤새 얼어있던 땅이 풀린 데다 소와 양의 배설물이 두툼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을 땐 편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가축 분뇨를 양탄자라도 되는 양 마구 밟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신발은 신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어려울 만큼 괴물이 돼버린다. 쌓이고 쌓인 배설물 역시 그 자체로 역사고 문화다. 누구는 이 시장이 1,000년은 됐을 거라고 하고 누구는 그걸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하긴 그렇지. 사람이 사는 곳에 동물이 있었고 동물이 있으니 사고 팔 시장이 생겨난 건 당연한 것. 이 시장은 매일 열리는데 하루에 1,000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외탄자쾨이라는 동네에서 왔다는 노인에게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곳이냐고 물으니 60km 정도 될 거란다. 100km나 되는 곳에서 양을 팔거나 사러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네 5일장처럼, 사고팔기 보다는 사람이 그리워서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양을 팔러온 사람도 사러온 사람도 급할 거 하나도 없다는 표정이다. 양을 팔아버린 아저씨도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그렇다고 우리네 장날처럼 걸쭉한 술판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차이 한 잔 사마시며 이리저리 오가는 게 전부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유?

나는 여전히 미꾸라지들 틈의 메기처럼 퍼덕거리며 쏘아 다닌다. 그런 나를 둘러싼 열기도 갈수록 뜨거워진다. 소를 끌고 온 할아버지는 고삐를 쥔 채, 양을 몰고 온 아저씨는 지팡이를 든 채, 담배를 팔던 아이는 장사하는 것도 잊은 채 모여든다.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내가 언제 이렇게 주인공이 된 적 있더냐. 말이 통하지 않아도 온갖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수다를 떨다 보면 누구는 소를 보여주겠다고 손을 끌고 누구는 내 양이 얼마나 많은지 봐달라고 반대쪽에서 당긴다. 또 한 사람은 30분 넘게 따라다니며 귀네코레(남한)? 쿠제이코레(북한)?를 반복해서 묻는다. 이들에게 북한은 전쟁터에서 싸웠던 적이기 때문에 북한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이곳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나이보다 무척 늙어 보인다는 것. 70은 된 것 같은 노인도 나이를 물어보면 대개 40~50대다. 하지라는 친구(60세쯤 된 줄 알았는데 역시 40대다.)가 양 한 마리의 입을 벌려 이빨을 보여주더니 값이 낮은 양이라고 설명해준다. 이빨이 거의 없는 늙은 양이기 때문이란다. 새끼는 9만원, 어미는 24~25만원, 이빨이 없는 늙은 양은 20만 원 정도에 거래된다.

 

새끼양 이쁘지요?

대대로 물려줄 사진이니 잘 좀 찍어봐.

가격을 흥정하는 장면도 재미있다. 양을 살 사람이 나타나면 팔 사람과 손을 마주잡는다. 보통은 중개인인 제3자가 서로의 손을 쥐어준다. 잡은 손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가격을 맞춰나간다. 깎고 버티고, 그런 과정은 꽤 길게 진행된다.

한 마리에 30만 원씩만 내

무슨 소리야. 너무 비싸. 20만원으로 하지

에끼, 이 사람. 그건 개 값도 안 돼. 그러느니 늙혀 죽이고 말지. 28만원 내

애들이 늙었던데 뭘좋아, 내가 통 크게 양보해서 23만원 줄게

허어, 이 사람아. 저렇게 통통하게 잘 키운 애들을 늙은 양 취급하면 어쩌나. 좋아. 내가 손해 보는 셈 치고 26만원까지 맞춰줌세

이런 식으로 가격을 맞춰나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도저히 가격이 안 맞으면 손을 놓고 돌아선다. 거래가 깨졌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흥정을 하다가 소리를 높이거나 싸우는 경우는 없다. 안 팔면 그만이고 안 사면 그만이기 때문에 얼굴까지 붉히면서 거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로의 눈을 보고 체온을 나누며 하는 거래에 속일 일도 없다. 긴 세월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들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가운데 낀 아저씨의 표정을 보라.

애들도 한몫. 그런데 애들 맞아? 이 나라는 낳자마자 얼굴이 늙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특히 극성스러울 만큼 나를 환대한다. 가축시장에 웬 아이들? 그들 역시 모두 제 일을 한다. 아버지와 함께 양을 몰고 온 아이도 있고 차이나 담배를 파는 아이도 있다. 심지어는 구두 통을 멘 녀석도 있다. 이 오물천지에서 구두를 닦는 사람도 있을까? 구두 닦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동부지역에서 겨울에 장사가 가장 잘되는 3대업종이 세차장과 구두닦이, 차이장수라고 한다. 차이야 언제나 마시는 거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세차와 구두는 왜? 여기 사람들은 깨끗하고 꾸미는 걸 좋아한단다. 헌데 도로환경은 기대치를 영 못 따라가니 매일 세차하고 구두를 닦을 수밖에.

 

우린 친구여

시장 사람들 이야기나 계속 하자. 대충 봐도 30명은 포진해 있다. 이쯤 되면 뭔가 개인기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슬슬 걱정된다. 하지만 그럴 것까지도 없다. 내가 수첩에 뭘 기록하고 사진만 찍어도 그들은 자지러진다. 어른이고 애고 내 글씨를 들여다보며 돌아가며 품평을 한다. 대체 처음 보는 이 글씨가 잘 쓴 글씨냐, 못 쓴 글씨냐. 자기들끼리 격렬하게 토론을 벌여보지만 결론이 날 턱이 있나.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한 녀석은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뷰파인더 속에 들어와 있다. 양을 찍어도 이가 몽땅 빠진 노인을 찍어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다. 말리고 끄집어내도 소용없다. 그 녀석은 그날 내 사진에 수십 번 등장했다. 얇은 홑겹 옷 하나 입고 퍼렇게 언 얼굴로 배회하는 게 가슴 아파서 꼭 안아준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그 순간 녀석은 나에 대한 특권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난 독사진 아니면 안찍어. 뒤에 붙은 놈 누구여?

담배 파는 아이는 피우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 따라다니며 시가라(sigara)”를 외친다. 반에는 담배 파는 아이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심심해서가 아니라 아이들도 벌어야 먹고살기 때문이다. 담배는 이라크 등에서 밀수한 것이라고 한다. 차이를 파는 아이는 말만 잘하면 공짜로 줄 수도 있다는 눈빛을 자꾸 보낸다. 아참, 차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나를 꽤 힘들게 하는 어른도 있었다. (촬영)에 집중할 만 하면 어깨를 툭 치면서 차이를 마시러 가자고 조른다. 자기가 한 잔 내겠다는 것이다. 그 눈빛이 얼마나 순수하고 기대에 차 있는지 박절하게 거절하기도 어렵고, 일을 하다말고 따라갈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계속된다. 사람들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쏟아진 별들이나 진창 속에서 피어난 꽃들 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별이나 꽃들이 원하는 대로 수백 번의 사진을 찍고 수백 번을 함께 웃었다.

 

우리가 좀 노는 애들이랍니다.

 

그 녀석들이 나타난 건 그런 소동이 한 풀 꺾일 무렵이었다. 홍해를 가르듯 인파를 헤치며 천천히 등장한 두 녀석. 거뭇한 수염으로 한껏 성인을 가장했지만, 스무 살도 안됐다는 걸 간파하기 어렵지 않다. 그 바닥에서 논다는 녀석들인 게 틀림없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카메라를 만져보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포즈를 취한다. 그마저 넉넉한 웃음으로 받아들이자 녀석들은 느닷없이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장 선생에게 찾아가 저 형이 좋다고 고백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형이라니, 이 녀석들아. 그래도 기분은 좋은데? 녀석들의 친밀감은 무한대다. 내가 쉬는 틈이면 어깨동무를 하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 녀석은 내게 춤을 추자고 계속 졸라댄다. 그래 해보자. 결국 스텝을 맞춰보지만 내가 몸치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말았다. 내 주제에 무슨 춤을. 녀석들이 깔깔거리고 배꼽을 잡는다.

 

 

시장을 벗어나면 설국이 펼쳐진다.

당혹스러운 일은 잠시 뒤에 일어났다. 지금까지는 서막에 불과했다는 듯 뜻밖의 반전이 벌어진다. 두 녀석 중 하나가 내게 느닷없이 묻는다.

“What do you think about Kurdistan”

나는 잠시 멍한 상태가 돼버리고 만다. 지금까지 쓰던 말이 아닌 영어. 그리고 쿠르디스탄? 쿠르드족이 모여 사는 산악지역을 그렇게 부르지만, 녀석이 물은 건 쿠르드인들의 나라(아직 가상국이다)가 틀림없다. 자신들 외에는 누구도 나라로 불러주지 않는 나라. 그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아이. 표정에 장난기 같은 건 없다. 평생을 독립투쟁에 바친 늙은 전사의 얼굴만 거기 있다.

“I love Kurdistan”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 귀젤”(매우 좋다, 훌륭하다, 예쁘다 등으로 감탄사 비슷하게 쓰이는 말) 등으로 장난스럽게 할 대답은 아니다. 그리고 그건 내 진심이다. 내 핏속에는 억압 받고 지배 받는 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DNA가 숙명적으로 존재하니까. 긴장했던 녀석의 얼굴이 물에 던져 넣은 물감처럼 풀어진다. 그리고 거침없이 포옹을 해온다. 마주 안은 몸이 용광로처럼 뜨겁다.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노는 녀석까지 간절히 원하는 소망이 꼭 이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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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 밤거리는 조금 음울하다.

입영장정들의 무운(武運)’을 빌며 차에 오른다. 다치지 말고 마음 상하지 말고 부모 품으로 무사히 돌아가렴. 이 세상에서 싸움과 분쟁이 사라지면 무기상들이 모두 굶어 죽을까봐 그렇게 부지런히들 싸우는 걸까? 이쯤에서 다큐 제작팀의 인원점검을 하고 갈 필요가 있겠지. 우선 한국에서 출발한 사람은 나 외에도 정 모 PD, 조 모 카메라 감독이 있다. 그리고 현지에서 합류한 코디 장 선생과 운전사 베이셀. 총 다섯 명이다. 덩치 큰 사람들이 장비까지 들고 앉으니 차는 몸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빡빡하다. 이 상태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야하다니. 대장정인지 대고생인지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반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45. 노란색 커튼이라도 치는 듯 벌써 석양 기운이 곳곳에 드리우기 시작한다. 저 멀리에서는 어둑어둑한 산그림자도 걸어 나온다. 아무리 고원지대라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일찍 먹고 일찍 자기경진대회라도 열리는 날인가? 장 선생 말로는 평상시 해지는 시간이 이렇단다. 그 와중에도 나는 여행자 특유의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없다. 예상보다 더 삭막해 보이는 도시다. 눈이 덮인 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 터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삭막한 풍경을 많이 봐왔지만 여긴 정도가 좀 더 심하다. 어떻게 저렇게 솔직한 민둥산이 있을 수 있담. 차가 시내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낯선 풍경이 눈으로 들어온다. 저녁안개처럼 희끄무레한 기운이 일시에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스모그인가? 아니면 해발 1,700m 고원 특유의 현상? 이런 때 물어보라고 장 선생을 모신 것이지.

 

번화가. 배회하는 청년들이 많다.

지금 깔린 게 뭡니까?”

난로연기예요

? 난로연기가 이렇게 일시에 온 도시를 덮어요?”

연기라고 사연이 없을 까닭은 없지. 2011년 지진을 복구하면서 가스가 보급됐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값싼 석탄난로를 땐단다. 어느 곳이든 가난은 사람을 불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우리네 시골 어른들이 기름보일러를 설치하고도 화목보일러를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도 낮에는 냉기 속에서 견디다가 저녁 무렵이 되면 일제히 난로를 피우는데, 그때 나오는 연기가 온 도시를 덮는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후줄근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도시를 덮은 회색연기. 마음이 무겁다. 이쯤에서 반이란 도시를 좀 들여다봐야겠지. 대체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이길래.

 

터키 동부 중에서도 맨 끝에 있는 반(VAN)은 반주()의 주도로 반 호수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BC 9~6세기에 번영을 누렸던 우라르투 왕국의 수도였다. 왕국의 역사는 BC 2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때는 아르메니아 고원 전역을 지배할 정도로 강성했다. 이 왕국은 아라라트라는 이름으로 구약성서에도 등장한다. 한 마디로 지금은 변두리의 초라한 도시에 불과하지만 왕년엔 한 가닥 했다는 얘기다. 반은 그 후 아르메니아 왕국의 중심지로 시대에 따라 숱한 영욕을 겪는다. 그리스, 로마를 거쳐 동로마(비잔티움)제국에 의해 합병됐다가 1045년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이를 기점으로 1,000년 이상 맥을 이어온 아르메니아 왕국은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나라는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 법이니 아르메니아인들은 계속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비극은 1900년대 초에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벌어지면서 그들의 터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금의 도시 반은 1920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는 뒤에 다시 이야기 하자. 박제된 역사를 더 이상 캐어본들 무엇하랴. 로마 시대 살았던 장삼이사나 오스만 시대에 잘 나갔던 갑남을녀도 이제 한 줌 흙으로 스러진 것을.

 

 

반 주 전체에는 약 100만 명, 주도인 반에는 30만 명이 산다. 앞에서 밝힌 대로 대부분이 쿠르드족이고 투르크족은 약 15%를 차지한다. 산악지역에 사는 일부 주민은 터키어를 모른다. 골짜기마다 별도의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쿠르드족끼리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동부의 이슬람은 교조적 색채가 강해서 서부의 유연한이슬람과는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다. 경전이고 뭐고 무대포로 믿는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동부지역이 대부분 그렇지만, 반도 쿠르드족과 투르크족 간의 괴리가 심각하다. 15%의 투르크족이 관료교사은행원 등 소위 고급 직종을 차지하면서 상류사회를 독점하고 있다. 이곳의 투르크족은 쿠르드족을 검둥이’(쿠르드족의 피부가 좀 까만 편이긴 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고 부르면서 무시하기도 한다.

 

청년들이 길거리에 모닥불을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목축이나 농사에 참여하지 않는 쿠르드족 중에는 실업자가 많다. 산업화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오고서도 빈둥빈둥 놀거나 일자리를 찾아 서부의 대도시로 흘러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서부 사람들이 동부 사람들은 할 일이 없으니까 아이만 낳는다고 농담을 할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어서 아이를 7~8명씩 낳는 건 보통이다. 극심한 취업난을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운전을 맡은 베이셀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안 돼 여행사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 그나마도 일이 없으면 놀아야 하는 임시직이다. 그래도 베이셀은 나은 편이다. ‘반 사람들은 생업이 밀수라는 말도 있다. 말 그대로 헤로인무기기름(석유) 밀수가 판치는 곳이 반이다. 기름 밀수는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수법은 이렇다. 먼저 트럭의 연료탱크를 최대한 크게 개조한다. 국경을 넘어 기름이 싼 이라크로 간다. 탱크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돌아와서 싸게 판다. 제재는 없느냐고? 말리기는커녕 교통경찰도 밀수해온 기름을 파는 곳에서 주유를 한단다. 또 이 나라에서는 개인도 총기 소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무기 반입도 빈번하다. 동부에 가서 운전할 사람은, 교통사고가 나면 성격 죽이고 바짝 엎드리는 게 좋다. 괜히 열 받게 했다가 총을 빼드는 수도 있다. 자나 깨나 몸조심이 최고지.

 

저녁으로 먹은, 아니 먹으려고 했던 모듬케밥.

운전을 하던 베이셀이 장 선생에게 뭐라고 말을 건넨다. 제작팀 일행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얘기란다. 대단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 떼도둑인지 사기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초대부터 하겠다니. 베이셀은 부모님과 함께 산다. 위로 형이 하나 있는데 분가한 상태다. 앞으로 계속 겪을 일이지만 이슬람교도들의 손님 접대는 유난하다. 손님을 신과 동급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가장 좋은 자리, 요즘으로 보면 난로 옆에 모신다’.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먹을 것을 내오고 차를 끓인다. 숙소로 가는 길 곳곳에 공터나 비어있는 건물이 눈에 띈다. 20111023일 일어났던 반 지진의 잔해다. 1년도 훨씬 넘었지만 복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반의 북동쪽 19km를 진앙지로 해서 일어났던 반 지진은 터키 동부를 강타, 숱한 인명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이 지진 소식은 우리나라에도 세세하게 전해질만큼 엄청난 재앙이었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에서 양이나 키우며 순박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날벼락을. 사실 이 지역의 지진은 2010년이 처음은 아니다. 근래만 해도 20047월에 발생한 5.2도의 지진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해 11월에는 홍수로 많은 집들이 물에 잠긴 것은 물론 이 지역 사람들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가축을 숱하게 잃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이 땅에 기대어 산다.

 

일행이 묵었던 호텔.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진의 진앙지에 와 있는 셈이다. 하긴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내가 출국하기 전에 그쪽 분쟁 지역 아냐? 지진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염려해주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무심하고 무딘지. 분쟁이나 지진 같은 건 아예 걱정의 대상이 못된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제발 무슨 일이 좀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을 이번 여행의 코스에 포함시키는 데는 내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 워낙 급하게 일정을 잡는 바람에 목적지조차 결정할 틈이 부족했던 제작진에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차곡차곡 주입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제법 영악한 여행자인 셈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빈 자리가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이 있던 자리.

차는 삭막한 도시를 내처 달린다. 시내 도로는 대체로 2차선이다. 이곳도 도로 사정에 비해 차들이 많은 편이다. 퇴근 길 차들이 마구 엉킨 가운데 베이셀이 과감하게 유턴을 한다. 베이셀 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차들이 신호와 상관 없이 눈치껏방향을 바꾼다. 먼저 돌고 먼저 가는 놈이 임자다. 옆에서 달리던 경찰차가 스피커로 뭐라고 떠드는데도 씨도 안 먹힌다. “그러지 마세요가 아니라 적당히들 하세요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딱지 떼는 거 아냐? 불안한 건 나 혼자, 경찰차는 가던 길을 갈 뿐이다. 인심이 후한 거야? 아니면 이 정도는 일상인 거야? 어느새 거리에는 어둠이 주단처럼 깔렸다. 하나 둘 네온불이 켜지지만 화장독 깊은 늙은 들병이의 얼굴처럼 도시는 좀체 화려해질 줄 모른다.

 

새벽에 커튼을 여니 이런 새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의 간판에는 분명 HOTEL이라고 씌어있는데 방에 들어가 보니 옛날 우리의 여인숙과 다를 바 없다. 시나브로 늙어가는 여인네가 쟁반에 노란 주전자와 수건을 담아 오고 스위치를 누르면 흑백텔레비전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켜질 것 같다. 침대에 네 다리가 붙어있고 샤워부스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하지만 잠자리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룻밤 춥지 않게 등 기댈 곳이 있으면 호사인 게지. 기내식이 미처 다 소화되기 전이지만 이른 저녁을 먹자는 말에 따라나선다. 도심에는 젊은이들이 물고기 떼처럼 유영하고 있다. 언뜻 봐도 특별한 목적지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는것이다.

이 친구들은 왜 이러고 다녀요?”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대부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친구들이거든요. 특별히 시간 때울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 그냥 배회하는 거예요

이 정도면 배회족이라는 말도 나올 것 같다. 청년백수들이 물고기처럼 부유하는 도시. 인구비율로 볼 때 이 도시는 특이할 정도로 젊다. 45세 이하가 전체의 70%나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다니.

 

잠을 잤더라면 못 볼뻔한 하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검은색이나 회색 옷이 주조를 이룬다. 밝은 불빛으로도 음울한 기운을 다 지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렌지색 계열의 내 옷은 극도로 튄다’.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다. 반에서의 첫 식사는 모듬케밥. 어딜 가나 잘 모를 때는 일단 모듬을 시켜보는 것도 지혜다. 일종의 분산투자인 셈이지. 하지만 케밥이 나오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속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 조각도 먹을 수 없다. 특별히 못 먹을 음식은 없는데. 쇠고기, 닭고기, 양고기, 고추, 양파, 토마토 구운 것. 가만히 이유를 생각해보니 작년에 일어났던 사고의 여파다. 지난여름 터키 남동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심하게 체해서 일주일 가까이 먹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먹었던 음식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먹지 않으면 촬영이 무척 힘들어질 텐데.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맥주라도 한 잔 마실까 했지만 꿈도 꾸지 말란다. 하긴 골수 이슬람인 이 지역이야말로 술이 있을 턱이 없다. 결국 첫날 저녁은 굶주림으로 때울 수밖에.

 

새들이 첨탐 위로 까맣게 작아진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멀리 있다. 꼭 시차 때문은 아니다. 눕자마자 이 생각 저 생각이 해일처럼 뇌리를 덮치더니 저희들끼리 분열을 반복한다. 쓸쓸한 마음에 자꾸 이불을 끌어당겨보지만 달라질 기미는 없다. 전전반측, 이리 저리 돌아눕는 게 불면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다. 밤은 깊어 새벽이 가까워진 기색이다. 오지 않는 잠에 저항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낫다. 결국 침대에서 내려온다. 바닥의 양탄자를 밟는 순간 뭔가 질컥! 하는 게 밟힌다. 뭐지? 이런, 양탄자가 전부 물에 젖어있다. 이곳은 샤워한 물을 하수구로 보내는 대신 방으로 끌어들이는 모양이다. 결국 수상침대 위에 누워 있던 셈이네. 방바닥은 바다요 침대는 배라. 제법 낭만적인 걸.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연다. 내 눈길을 받은 세상이 부스스 깨어난다. 지진으로 무너진 빈집들이 유난히 클로즈업 된다. 텅 빈 도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어디선가 날아오른 새들이 모스크 첨탑 위로 까맣게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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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터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리즈의 제목은 제가 출연했던 EBS 세계테마기행의 제목에서 빌려와 [터키, 숨겨진 옛 도시를 걷다]로 잡았습니다. 2월과 3월에 걸쳐서 다녀온 이번 여행은 길고도 깊었습니다. 단순히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현지인 속으로 들어가 같이 웃고 떠들고 어울리는 여행객으로서 귀한 시간을보냈습니다. 연재하는 동안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행기의 고도가 조금씩 낮아진다. 열두 시간의 긴 비행 끝에 덤으로 얹은 두 시간의 추가비행. 그 끝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창을 가렸던 블라인드를 올리자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이 앞다퉈 쏟아져 들어온다. 가라앉아있던 기내 공기가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언뜻 넘겨다본 창밖으로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먼 곳까지 왔는지 실감나기 시작한다. 이곳은 터키 동부의 고원지대. 산도 들도, 아직은 성냥갑처럼 작은 집들까지도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단색(單色)으로도 이렇게 장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구나. 동부 아나톨리아의 특징답게 산들이 끝없이 달려 나간다. 해발 5,000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산들이 저마다 우쭐거리며 키를 재고 있다. 이스탄불에서부터 동승한 옆자리 청년들의 눈동자에 불안과 흥분이 짙게 채색된다. 이들은 무슨 일로 이 궁벽한 곳까지 왔을까. 오랜 비행으로 무거워진 머리를 잠시 등받이에 기댄다. 길 위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큰소리치는 나도,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면 여전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늙의 개의 혓바닥'처럼 늘어진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워 담배도 안 피우면서 흡연실을 들락거리렸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세 번째 터키여행 역시 당혹스러울 만큼 느닷없이 단초를 열었다. 2월 하순 목요일 오후, 나의 터키 여행기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와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를 낸 출판사의 전화를 받았다. EBS 다큐멘터리 ‘세계테마기행’ 제작팀에서 내 전화번를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자마다 터키관광청 한국홍보대행사에서도 전화가 왔다. EBS에서 터키 쪽을 잘 아는 여행작가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나를 추천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로서의 이호준이 아닌 여행작가로서의 이호준을 동시에 찾은 것이었다. 이게 웬 느닷없는 사태람.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곧 이어 제작사의 작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음 주 목요일 출발하는 세계테마기행 촬영에 맞출 수 있겠느냐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다. 일주일도 안 남은 기간 동안 대체 뭘 준비할 수 있다는 건지. 아무리 여행작가의 자격으로 떠난다지만 난 여전히 현역 기자이고 직장인인데. 휴가를 내는 것도 한도가 있고….

 

대답을 미루고 고민에 빠졌다. 그즈음 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날마다 풍랑 거센 강을 건너 듯 위태로웠다. 밤이면 깊은 심연 속으로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가나 이 땅에서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다가온 탈출 제안이라니. 이것 역시 누군가가 준비한 것일까? 격렬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OK”였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리라는 또 다른 나의 반발을 꾹꾹 씹어 삼키며 터키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올 내내 나눠 써야할 휴가를 희생하고라도 살고보자는 생각이 앞섰다. 사실 세계테마기행이 욕심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여행작가들에게는 꿈이라고 할 수 있는 로드다큐 . 나 역시 영상카메라와 함께 길을 떠나는 소망을 품어 온지가 오래였으니. 또 하나, 어느 정도는 내 입맛대로 여행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조건도 선택을 부추겼다. 아나톨리아 동부, 그리고 흑해. 쿠르드인들이 사는 그곳은 늘 가보고 싶은 여행지의 앞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조건을 미끼로 입천장을 파고들어간 미늘을 도저히 빼낼 방법이 없었다. 대답의 대가는 혹독했다. 여행 준비는 뒷전이고 내가 없는 동안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측하고 때워놓는데도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국을 떠났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반. 설산의 연속이다.

비행기 안에서는 계속 빗소리를 들었다. 종내는 수첩을 꺼내 이렇게 메모했다.

 

열두 시간 넘게 갇혀 있어야 하는 비행기 안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이코노미 석 ‘경제적인’ 자리에서, 가끔은 스튜어디스와 다리를 스치며 두 번의 식사를 하고 100번쯤 잠이 들고 101번쯤 잠에서 깨는 동안 내내 빗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이 비행기는 종이처럼 얇은 특수금속으로 동체를 만들었을지도 몰라. 터무니없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어릴 적 함석집 지붕 아래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기분에 온몸이 노곤해졌다. 몸이 굳어갈수록 잠은 아련하고 얕았다. 해남 미황사던가, 아니면 강진 무위사나 별내의 흥국사일지도 몰라. 하필 그곳을 찾아간 날 비가 내렸고, 쪽마루에 엉덩이를 걸친 채 아주 오랫동안 비를 그었다. 얼마나 쓸쓸하고 얼마나 행복했던 날이었는지. 남은 생애에 그런 날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 비는 계속 동체를 때렸고, 94번째쯤 잠 속에서 쓸데없는 계산이 잠깐 끼어들었다. 구름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에게 무슨 비가 내리지? 영하 60~70도를 오르내리는 속에서 비가 내린다고? 이런 종류의 이성은 얼마나 쓸모없고 잔인한 것인지. 하는 수 없이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비행기가 별들의 무덤 근처를 지나갔는지도 몰라. 병들었거나 혹은 버림받아 목을 맨, 그렇게 세상을 버린 별들의 주검이 우수수 쏟아져 비처럼 내렸을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비행기가 승객 몰래 은하수를 건넜겠지. 작은 나룻배가 강을 건널 때처럼 비행기가 자꾸 흔들린 게 그 증거일 거야. 나는 내 생각이 신통해서 으쓱해졌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늙은 개의 혓바닥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다시 두 시간을 비행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여전히 한겨울 문풍지처럼 흔들렸다. 깊은 상처는 도망친다고 치유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시간의 위대한 손으로만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공항 라운지에서 짐을 기다리는 동안 꼬마들과 사진찍기 놀이를 했다.

비행기 트랩 위에서 내려다본 반 공항은 작고 초라하다. 하긴 화물 심사 시설이 없어서 이스탄불에서 심사 받은 뒤 다시 부쳐야했을 정도니. 그래도 명색이 주도(州都)인데, 변두리의 설움이 활주로에도 까맣게 깔려 있다. 청년들 사이에 묻혀 대합실로 들어선다. 예상했던 만큼 춥지는 않다. 이런 경우에 ‘비교적’이란 단어가 적절한 역할을 한다. 서울이 엄청 추웠기 때문에 얻는 부수적 효과인 셈이다. 매스컴마다 체감온도가 영하 21도라며 하늘이라도 얼어붙을 듯 떠드는 걸 보고 출발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난감했던 것이 터키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대체 옷을 어떻게 준비해야 한담. 명색이 TV에 나오는 몰골인데 추워서 덜덜 떨거나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계속 땀이나 흘리며 다닐 수는 없는 법. 터키의 겨울은, 그리고 동부지역 여행은 처음이기 때문에 감을 잡기 어려웠다. 이스탄불에 사는 지인에게 SOS를 쳐봤지만 “한국 날씨와 비슷해요”가 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 비슷하다니. 그 정도 가지고 어떻게 판단하라는 거야. 그 친구 역시 동부는 안 가본 게 틀림없었다. 터키 날씨가 얼마나 들쭉날쭉 하느냐 하면 지중해 쪽은 겨울에도 어지간해서 영상 10도 이하로 안 내려간다. 하지만 동부 산악지역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게 예사다. 옷 보따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여자 아이가 떠나니 이번엔 남자 아이가 카메라 앞에 섰다.

공항 라운지는 우리네 시골 장날 버스정류장의 풍경을 빼다 박았다. 사람과 소음이 마구 뒤섞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처음 서울역에 내렸던 날처럼 두리번거리다 낯선 동양인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장빌립 선생. 인파 속에서도 단번에 사람을 찾아내는 혜안이라니. 하긴 동양인은 PD와 카메라 감독, 그리고 내가 전부였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장 선생은 몇 안 되는 반 교민 중 하나다. 이번 촬영 내내 동행하며 코디(coordination, 현지 촬영을 위해 가이드, 통역, 조사 등을 맡은 사람) 역할을 해줄 분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코디의 역할은 지대하다. 장 선생과 인사를 하자마자 일단 한 수 접어드리고 만다. 이번 제작팀 중에 내가 나이로 좌장인 줄 알았더니 이분이야말로 나보다 한참 연배다. 동방예의지국에서는 나이가 벼슬 아니던가.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배회하고 있다.

세상에 갓 나온 병아리들처럼 장 선생의 뒤를 졸졸 따라 라운지를 벗어난다. PD나 촬영감독은 터키가 처음이다. 자기 분야에서는 베테랑이라지만 초행길은 누구나 어리바리하기 마련. 공항을 나서자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들이 도로까지 가득 메웠다.

“대체 이 친구들 정체가 뭡니까? 저를 환영한다고 나온 건 아닐 테고….”

장 선생에 대한 첫 질문이 청년들의 정체를 묻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아까 비행기에서부터 입을 맴돌았던 질문이기도 하다.

“군대 가는 친구들입니다. 오늘이 입영하는 날이거든요”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 근처에 훈련소가 있다는 것이고, 이 친구들은 입영을 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거구나. 느닷없이 마음이 짠해진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약간의 흥분…. 입영을 앞둔 청년들 특유의 기운이 그들 주변에 흐른다.

 

입영장정들.

반은 이라크, 이란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즉, 잠재적 적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최전방인 셈이다. 그뿐이랴. 주로 쿠르드족이 살고 있으며 특히 과격단체인 PKK(쿠르드 노동자당)가 활동하는 지역이라 터키 정부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입영장병으로도 달가운 이름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스탄불이나 이즈미르, 앙카라 같은 대도시를 두고 멀고 먼 최전방으로 입영해야 하니.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라, 이곳 청년들도 입영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환호하거나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한다. 터키군제에 대해서는 터키기행 두 번째 시리즈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에서 상세히 밝힌 적이 있는데 좀 묘한 데가 있다. 일반 병사들은 복무기간은 15개월이다. 헌데 대학졸업자는 6개월이면 땡! 이다. 못 배운 것도 서러운데….

 

민둥산과 그 위를 덮은 눈.

이들을 보고 제작팀이 그냥 지나갈 턱이 없다. 졸지에 첫 촬영 대상이 입영장정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카메라는 내 전신을 훑고 나는 쫓기듯 입영장정 틈으로 섞여 들어간다.

“오늘 입영하는 심정이 어때요?”(뭐가 어떻겠어. 물어보는 내가 한심한 거지.)

이 동네에서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교과서에 나와 있나보다.

“다른 나라에서는 돈을 위해 군대를 가지만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입대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어이구! 장하다. 하지만 너무 국민교육헌장 같잖아. 나도 그렇지.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한 것일까. 잠시 뒤 차 한 대가 일행 앞에 선다. 촬영기간 내내 타고 다녀야 할 차다. 유럽에서 만든 차이긴 하지만 우리로 치면 경차를 간신히 벗어난 수준. 운전석이 열리더니 약간 까무잡잡한 청년이 내린다. 잘 생겼다. 이름은 베이셀(Veysel).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친구다. 이제 출발이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