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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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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6. 08:54 카테고리 없음

세 번째 터키행입니다.

이번엔 좀 긴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돌아오면,

그곳의 생생한 겨울 이야기 들려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sagang
2012. 12. 31.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영원히 살다

 

매창. 그녀는 죽었으되 죽지 않았습니다. 삶의 끝머리까지 지극한 사랑을 놓지 않음으로써, 뭍 남성들의 가슴속에 펄럭이는 깃발로 살아있습니다. 헌데, 후세의 장삼이사 중 하나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그녀는 그만큼의 사랑으로 행복했을까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늘 공허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녀의 무덤에는 봄날의 병아리 같은 햇살이 곱게 내리고, 무덤의 주변은 소나무들이 각박하지 않은 표정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저만치 서 있는 아파트들이 눈에 걸리지만,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을 물릴 수는 없으니, 그 또한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매창의 무덤이 있는 매창공원은 부안군청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행정지역으로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 그녀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던 유일한 친구, 거문고와 함께 묻혀있습니다. 공원 곳곳에는 매창, 유희경, 허균의 시는 물론 후인들인 정비석, 이병기, 송수권 들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벤치에 앉습니다. 공원 한쪽의 정자에서는 거문고 소리 대신 노인들의 고함이 허공에 흩어집니다. 고스톱을 치다가 뭔가 어긋난 모양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배나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화우(梨花雨) 대신 노랗고 붉은 낙엽만 펄펄 날아다닙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축축한 갯내음이 따라왔습니다. 저만치 바다에서 온 소금바람입니다. 이 바람이야말로 봄마다 배꽃을 흩날리고, 매창의 숨죽여 우는 밤들을 지켜본 그 바람일 것입니다.

 

매창이 세상을 뜰 무렵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녀를 묻어 준 이들 역시 민초였습니다. 부안의 사당패와 아전들이 외롭게 죽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묻고 해마다 풀 뽑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물론 매창의 죽음을 애달파한 이들이 그들 뿐만은 아닙니다. 시인풍류객한량들도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슴 무너지는 아픔을 기록으로 남긴 이가 바로 허균입니다.

 

계생은 부안 기생이다. 시에 능하고 글도 알았으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깨끗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사귐이 오래 가도 변치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한 차례 울고 난 후, 율시 2수를 지어 그를 슬퍼한다.

 

哀桂娘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개암사 일주문

한 남자의 애도가 눈물겹습니다. 한 여인의 시재(詩才)를 그렇게 오래,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한 남자, 허균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부안의 기생 매창의 죽음은 그렇게 기억되기도 하고 또 잊히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무덤은 모진 비바람에도 스러지지 않고 세월을 견뎠습니다. 그 이면에는 또 숨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나무꾼들이 벌초를 하고 무덤을 돌봤다고 합니다. 근세에 들어서도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에 들어오면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으로 그녀의 넋을 기렸다지요. 그녀가 죽은 뒤 45년 뒤(1655)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그 비문의 글씨들이 희미해질 무렵인 1917년에는 부안의 시인들의 모임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긴 4척 높이의 비석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 뜻은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부안 사람들은 매창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은 시집의 발행입니다. 매창이 떠나고 58년 뒤인 1668, 그가 지은 수백 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던 58편을 모아 <매창집>을 간행합니다. 58년 뒤의 58편이라. 저는 또 우연한 일치에 괜히 집착합니다. 목판본 시집을 발행한 곳은 생전에 그녀가 자주 찾았던 개암사(開岩寺)였습니다. 아전들이 앞장섰다고 합니다. 절에서 기생의 시집을 만들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목판인쇄 기술을 가진 곳은 절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매창집의 간행은 아름다운 시편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행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여성 시집이 단행본으로 발간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시집이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너도나도 찍어달라는 바람에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판을 불태워버렸다고 하네요. 이렇게 아까울 데가. 지금 생각하면 개암사 스님들도 좀 그렇습니다. 형편이 그 지경이면 돈을 좀 받고 팔 든가 할 것이지 태워버릴 건 뭐란 말입니까. 매창집 한 권은 수십 년 전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됐습니다. 참 멀리도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개암사 매창집은 단 두 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버드 도서관에, 또 하나는 간송미술관에.

 

개암사 대웅전

이왕 매창과 개암사의 인연을 이야기했으니 그녀의 발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볼 일입니다. 그녀는 생전에 인근 사찰을 자주 찾았습니다. 소식 없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달래기에는 산사가 적격이었겠지요. 관기의 신분이었으니 허락 없이 멀리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까요. 그녀가 혼자 찾은 곳은 주로 개암사나 월명암 등이었습니다. <등월명암(登月明庵)>이라는 시도 그때 나왔겠지요. 가을이 터질 듯 무르익은 개암사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적요합니다. 지금은 땅을 뚫고 나오거나 장막을 열고 새 세상을 여는 계절이 아닙니다. 갈무리하고 덮고 묻고 이별의 편지를 쓰는 계절입니다. 희게 바란 손을 흔들어 안녕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사랑을 잃고 병들어가던 여인, 매창이 가장 사랑한 계절도 이쯤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400년 살았다는 매화나무

 

개암사는 내소사와 함께 능가산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고찰입니다. 유래는 아득한 삼한시절로 올라갑니다.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으며 왕궁의 전각을 짓고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 후 백제무왕 35(634)에 묘련대사가 궁전에 절을 지으며 동쪽을 묘암사, 서쪽을 개암사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남아있는 건물에도 궁전의 흔적이 담겨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통일신라 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수하면서 고려 때에는 건물이 30여 채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이라고 시절의 바람이 그냥 지나갔을까요. 지금은 대웅보전 등 몇 채의 건물만 있는 소박한 사찰일 뿐입니다. 매창도 이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걸음걸음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 유희경을 절절히 담았겠지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하나 가슴만 먹먹할 뿐입니다. 다리를 건너고 오래 산 나무와 그 잎들을 흔드는 바람 사이를 지나 계단을 오릅니다.

 

계단 끝에서 맨 먼저 만난 것은 산마루에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바위입니다. 바로 울금바위입니다.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고 하지요. 원래는 물이 없던 곳인데 원효대사가 수도를 시작하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이 울금바위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끝까지 항전한 백제군의 지휘본부가 있던 곳입니다.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한 우금산성(禹金山城)에서 백제 유민들이 항전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쩌면 매창도 저 바위를 보기 위해 절을 찾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세월이 가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변함없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가슴에 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대웅전은 단청을 하는지 쇠파이프에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절이라도 공사장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제 고집인지라 이만치에서 너른 마당을 서성거립니다.

 

마당에는 늙고 볼품없는 나무 한 그루가, 밭은기침이라도 토할 듯 허리를 구부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행려노인처럼 세상의 관심에 비껴나 있습니다. 건성으로 대놓은 부목이 나무를 더욱 초라하게 합니다. 하지만 기왓장에 써놓은 문구를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개암사에 오신 불자님께 감사드립니다. 4백년 된 매화꽃이 아름답지요. 들어가지 마세요. 아파해요이 초라한 매화나무가 400년을 살았다는 말이군요. 매창이 세상을 떠난 지 402. 그렇다면 어린 매화나무와 매창이 만났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매화의 이름을 빌어 호를 지은 매창으로서는 더욱 반갑지 않았을까요. , 인연이란. 쪼그리고 앉아 늙은 매화나무에게 묻습니다.

부안 기생 매창을 보았는지요.”

매화나무가 바람도 없이 잎을 흔듭니다. 저는 그렇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곱더이까?

제가 이렇게 속물입니다. 기껏 묻는다는 게. 물음은 개떡 같아도 대답은 찰떡처럼 돌아옵니다.

사랑을 향한 마음이 참 장하더이다.”

 

사랑하는 여인, 매창. 그녀의 모습이 단풍 숲 사이 작은 길로 작아집니다. 뒤 한번 돌아보는 법 없더니 소실점을 지나면서 기어이 뒤태를 지웁니다. 저는 지독했던 사랑 하나에게 자꾸 손을 흔듭니다.

 

 

봄새라 치위는 가시지 않아

 

별드는 창가에 옷을 깁노니

 

숙인 머리에 눈물이 떨어져

 

옮기는 실귀가 말없이 젖는다

 

 

 

 

 

 

 

 

 

 

 

 

 

 

posted by sagang
2012. 12. 24.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매창의 묘

한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니,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게 낫겠군요. 이번에 빠진 늪은 너무 깊어,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고백하고 싶어도 고백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은, 절망이란 말조차 사치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녀의 무덤으로 향하는 걸음은 열병으로 달뜬 아이처럼 허정거립니다. 쓸쓸한 사랑이 묻힌 무덤에도 가을빛은 명주실처럼 풀어져 내립니다. 잔디 위로 떨어지는 햇살은 한 여름 그 창대 같던 날카로움이 누그러져 있습니다. 햇살은 무슨 말인가 전하려는 듯 자꾸 주변을 맴돌지만 둔감한 저로서는 요령부득일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은 매창입니다. 그녀를 말하기 전에 우선 시조 한 수를 소개합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를 다른 말로 하면 배꽃 비입니다. 심술궂은 바람에 배꽃이 펄펄 날리는 어느 봄날. 시를 읊조리며 눈을 감고 있으면 수백 년 전의 풍경 하나가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꽃비 아래에 서서 이별하는 연인. 시간은 무심해서 봄날의 꽃비는 순식간에 가을의 낙엽으로 바뀝니다. 달리는 건 시간뿐이 아닙니다. 그리운 마음에도 날개가 있어 천리의 공간을 뛰어 넘습니다. 하지만 몸은 늘 그 자리고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사랑의 덧없음으로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입니다. <이화우>는 교과서에도 실렸을 만큼 절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조를 지은 이가 바로 제가 서 있는 무덤의 주인 매창입니다. 절절한 시에 왜 사연이 없겠습니까. 지금부터 서른여덟 해를 살얼음 딛듯 살다 간 한 여인의 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매창이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제 짧은 지식 안의 매창은 <이화우>라는 시조를 지은 조선의 기생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그녀에 관한 글을 읽다가 천향(天香)이라는 자() 와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가진.‘이라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조선 중기의 여인에게 하늘 향기라는 자와 매화가 어른거리는 창이라는 호가 있었다고? 궁금증에 그냥 지나가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이 어떤 시대입니까. 가부장 중심의 견고한 틀 속에서 여성이 이름을 쓸 기회란 없었습니다. 사회활동은 극도로 제한돼서, 집 안에서 일하고 후대(後代)를 낳아 기르는 역할만 요구받았습니다. 비록 기생이라는 예외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시를 쓰고 호를 내세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궁금증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다 보니 결국 이 쓸쓸한 무덤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매창에게는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절대 사치스런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류시인이라고 말하고 보니 허난설헌도 생각납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지요.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상당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선 한 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매창이 1573년에서 1610년까지 38년을 살았고 허난설헌은 1563년에서 1589까지 27년을 살았습니다. 허난설헌이 10살 많았던 셈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허균이라는 당대의 풍운아가 그녀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나이고 매창은 허균과 정신적 사랑을 나눈 연인이었습니다. 또 비운의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점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천출의 기생과 사대부가의 여인, 그 점은 두 사람을 동일선상에 놓는 걸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겠지요. 그리고 보니 또 하나의 여류시인 황진이가 생각나는군요. 매창과는 기생과 시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황진이는 생몰(生沒) 연대가 불분명하고 매창은 분명한 족적이 기록돼 있습니다. 저는 조선중기가 부럽습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경직 속에서도 뛰어난 여류시인들을 셋이나 배출한 시대. 허난설헌, 매창, 황진이 셋을 일러 조선 3대 여류시인이라고 부릅니다. 얘기가 또 옆길로 샜군요.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이라는 이의 서녀로 태어났습니다. 아전이란 직업도 대우 받기 어려운 시대에 서녀, 즉 천출로 태어났으니 굴곡은 예고돼 있던 셈입니다. 계생(癸生) 혹은 계랑(癸娘, 桂娘)이라 불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뚜렷하지 않지만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굴레가 그녀를 자연스럽게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겠지요. 불우한 삶을 산 천재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 역시 어릴 적부터 영특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그녀는 열여섯이란 나이에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립니다.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으니 기생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겠지요. 요즘말로 데뷔를 하자마자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멀리서 시인 묵객들이 찾아올 정도였다고 하니 짐작이 갑니다. 그 시대라고 왜 질퍽거리는술꾼들이 없었겠습니까? 점잖은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있다가도 술에 취하면 일쑤 미친개가 되는 족속들이 있지요. 그런 정황을 그리듯 전해주는 시가 있습니다. 증취객(贈醉客)이라는 오언절구인데요.

 

醉客執羅衫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당겨

 

羅衫隨手裂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不惜一羅衫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어

 

但恐恩情絶 맺힌 정 끊어질까 두려워 그렇지

 

(신석정 역)

 

조금 전까지 문학이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하던 자가 치마를 들추고 옷고름을 풀려하니, 신분상 내칠 수도 없고 어쩌겠습니까. 어르고 달랠 수밖에. 시야말로 가장 품위 있는 거절 수단이 아니었을까요. 뛰어나다 한들 시골 관아에 속한 기생, 그렇고 그렇게 한 평생 살다갔으면 후세의 입에 오르내릴 일 없었으련만, 그녀에게도 결정적인 사랑이 찾아오고 맙니다. 사랑은 행복을 향한 찬가이기도 하지만 불행의 전주이기도 하지요. 매창의 사랑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생이 된지 2,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한양에서 유희경(劉希慶)이라는 이가 부안까지 놀러옵니다. 호는 촌은(村隱), 한양에서 이름 깨나 날리는 문인이었다고 하지요. 아니,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이와 함께 그 시대 최고의 시인이었습니다. 매창처럼 천민이었다고도 하는데, 아버지가 종7품의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핍박 받을 정도의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서자였는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매창보다는 스물여덟 살 많은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훗날 유희경의 증손이 간행한 <촌은집>에는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계생을 만나자 비로소 파계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랑의 불꽃이 튀었던 게지요. 촌음은 매창을 만난 날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贈癸娘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한성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허경진 역)

 

선녀가 떨쳐입고. 한 여인에 대한 찬사가 하늘에 닿습니다.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으며 꿈같은 열흘을 보냅니다. 내소사도 함께 거닐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달콤한 사랑은 짧고 쓰디쓴 이별은 길기 마련.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갈 날이 닥칩니다. 매창으로서야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첫사랑인데 어찌 그리 보내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잡을 도리도 없었습니다.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간 뒤 바로 임진왜란이 터지게 되고, 그는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나갑니다. 재회의 기약이 더욱 멀어진 것이지요. 유희경이 떠나고 지은 시조가 바로 첫머리에 소개한 <이화우>입니다. 그 구구절절한 정한이 긴 세월을 타고 넘어 바늘 끝처럼 서늘합니다. 홀로 남은 매창은 몸져눕습니다. 천리밖에 있는 한 남자를 모질게도 그리워한 것이지요. 그때 지은 시들은 그 자체로 눈물입니다.

 

自恨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허경진 역)

 

 

유희경도 어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매창을 생각하며 이런 시를 남깁니다.

 

懷癸娘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허경진 역)

 

그들의 그리움은 길고 깊었습니다. 무도한 적들이 국토를 유린한 7년간의 전쟁. 세상은 황폐하고 어수선했습니다. 10년 동안 유희경을 그리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 이귀(李貴)가 나타났으나, 그들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한 줄만 걸치고 가겠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남자를 향한 매창의 사랑이니까요. 하지만 허균과의 만남은 그냥 건너뛰기 어렵겠군요. 매창의 길지 않은 삶 중에 그가 차지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으니까요. 당대의 문호 중 하나였던 허균과 매창은 요즘 말로 플라토닉사랑을 합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썼다는 허균에게는 참 특별한 일입니다. 해운판관으로 1601년 부안에 들렀던 허균, 그때 남긴 조관기행에는 매창을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화답하였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들였는데, 이는 곤란함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황해도사로 있을 때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았다 해서 파직까지 당한 그였습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시골 기생 치마끈 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으련만 매창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혹자는 매창이 김제군수 이귀의 여자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기생을 두고 의리를 지켰다. 글쎄요. 저는 차라리 허균의 그릇이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비록 기생이지만 여자보다는 문우(文友)로 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래서 허균을 더욱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허균은 매창에게 이런 편지도 보냅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이어질 수 있었겠소. (후략)

 

유희경과 매창의 사랑과는 별도로 이들의 우정도 가슴에 닿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종말을 향해 달립니다. 유희경과 매창은 이별을 한 뒤 한 번도 못 만났을까요? 정설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그리움에 견디다 못한 매창은 어느 날 남장을 하고 길을 나섭니다. 그녀가 향한 곳은 한양. 관에 소속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기생이 먼 길을 떠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그가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현감을 구워삶았든, 돌아와 치도곤을 당했든.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간 한양에서도 매창은 정인을 만나지 못합니다. 유희경은 그때까지도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결국 쓰러질 듯 허기진 사랑만 안고 부안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설령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녀의 사랑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전하고 싶었겠지요.

 

정설에 의하면 그들은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가졌을 뿐입니다. 헤어진 지 15년 만에 유희경이 다시 부안을 찾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15년이란 기나긴 공백이 필요했을까요? 물론 유희경에게 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10년 만에 만난 유희경은 시를 논하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노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머물다 한양으로 돌아갑니다. 매창으로는 눈물로 얼룩진 세월이 허무하고, 끝없는 사랑이 애통할 일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조선시대 관기는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고 양반도 아닌 유희경의 입장에서 매창을 소실로 맞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하지만 유희경이 그렇게 곤궁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史實)을 아는 저로서는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소실까지는 아니라도 오고가는 것조차 그리 힘들었을까요. 매창은 유희경이 떠난 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3년 뒤 그예 세상을 떠납니다. 1610.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이었습니다. 기다림조차 빼앗긴 사람에게, 생명은 붙잡을 가치가 없는 허허로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유희경이 다녀가지 않았다면 그리 쉽사리 스러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열여덟에 만난 한 남자를 잊지 못해 스무 해 가까이 가슴앓이를 하다 세상을 뜬 여인.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슬픈 사랑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매창의 죽음을 듣고 유희경이 부안으로 달려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느 이름 없는 자는 옆에서 보기라도 한 듯 이렇게 적었습니다. “매창의 부음은 촌은에게 전해진다. 촌은은 망연자실 허공만 바라본다. 서둘러 부안으로 내려갔다. 유희경이 부안에 도착해 처음 맞이한 것은 그리운 매창이 아니었다. 매창은 이미 땅에 묻혀 보이지 않고 매창이 남긴 육필(肉筆) 시 한구절만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지나가듯 덧붙입니다. 누군가 사랑의 결말을 찰지게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유희경이 달려온 게 사실이라면, 그는 왜 그녀가 죽기 전에 올 수 없었을까요? 그녀를 사랑하는 후인(後人)은 그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와 따져 물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사랑은 늘 그렇게 조금씩의 어긋남으로 후세에 이야기 한 자락을 남기는 것이니. 참 심술스런 이름입니다. 사랑은.

 

유희경과 매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하지만 매창에 대한 뭇 사람들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사랑 역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숨어 있어서 더욱 슬픈 사랑 이야기는 다음 주로 미뤄둡니다.

 

 

 

posted by sagang

복잡한 탁심 광장.

트램에다가 빵을 파는 아저씨까지 마구 얽혀있다.

한 여름의 군밤장수.

나는 지금 이스티크랄 거리의 시작점인 탁심 광장으로 가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퇴근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거리에는 오가는 차들과 인파가 정신없이 얽혀있다. 이스티크랄 거리는 이스탄불 최고의 번화가다.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신시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등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금각만이라고도 불리는 골든혼을 건너면 바로 신시가지에 닿는다. 여기도 유럽에 속한다. 이곳에서 보스포루스대교를 건너면 아시아 땅이다. 신시가지라고는 하지만 구시가지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시가지가 조성된 건 제법 오래 전이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제노바 상인이 자치권을 쥔 칼라타 지구였으며 거리의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 인근은 페라 지구였다. 지금은 베이오울르라고도 부른다. 탁심 광장에서 튜넬까지 1km가 조금 넘는 이스티크랄 거리를 걷기로 한다. 초입부터 넘치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거리를 걷는 것 같다. 거리 한 가운데로는 노면전차, 즉 트램(트란바이)이 지나다닌다. 물론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보행자들에게 전혀 위험요소가 되지 않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매달려 가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적, 동네에 자동차만 나타났다하면 쫓아가 매달리던 생각이 난다. 어른들은 성화를 부렸지만 얼마나 재미있던지. 개구쟁이들의 장난기는 동서나 고금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거리는 트램 외에 일반 차량은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보행자 천국이라고 부른다.

 

인파로 가득 찬 이스티그랄 거리.

반은 벗어버린 여자도 있고.

전신을 감싼 여자도 있다.

거리에는 온갖 사람들이 섞여있다. 서양인과 동양인, 백인과 흑인, 내국인과 관광객. 거의 벗다시피 한 서양 여자와 온몸을 감싼 채 걸어가는 무슬림도 재미있는 대비를 연출한다. 이스탄불이 국제도시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 거리에서는 무엇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다. 상업지구인지라 은행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명품 숍이나 화장품 가게도 즐비하다. 패스트푸드점, CD 판매점, 빵집, 피자가게. 입구에는 노점상들도 포진하고 있는데 역시 군밤장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더운 여름에 군밤을 팔고 사먹는 사람들은 또 뭐람. 돈두르마나 하나씩 먹으면 딱 좋을 것 같구먼. 한쪽에는 전단지 돌리는 청년도 있다. 얼른 돌리고 갈 심산인지 내게도 한 장 쥐어주길래 들여다보니 피자 할인문구가 들어있다. 곳곳에 좌판도 눈에 띈다. 가장 많은 것이 복권을 파는 노점이다. 장사가 제법 잘된다. 이 나라 사람들도 복권에 희망을 파종하는구나. 하긴 복권 없는 나라가 어디 그리 흔하랴. 모래 위의 집처럼 금방 무너질 꿈이라도 꾸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 조그만 함지 같은 곳에 생수를 대여섯 병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가 보인다. 저 노인은 또 어떤 사연이 있어 이 더위에 저리 나와 앉아있는지.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내 어머니의 얼굴과 오버랩 된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지근한 물이라 갈증 해소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얼른 한 병을 손에 쥐고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드린다. 오늘 가지고 나온 물을 모두 팔아도 내가 드린 돈만큼은 안 될 것 같다. 내 작은 돈이 저 노인의 한 끼 식사에 도움이 되기를.

트램에 매달려 가는 개구쟁이들. 

수박에 새긴 인물상.

케밥집 진열장의 수박 조각(彫刻)에 마음을 빼앗기는 바람에 유리창 앞에 서서 혼자 실실 웃는다. 얼굴을 새긴 주방장의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오래 이러고 있다가는 더위에 맛이 갔다는 소리를 듣기 딱 알맞겠다. 어디선가 아코디언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의 음악인이 곳곳에 있지만 이 아코디언 소리는 유난히 내 발목을 잡는다. 유모차를 앞에 세워둔 젊은 여자 하나가 유치원생이나 쓸법한 작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세련된 음악도 아닌데 왜 나를 이렇게 불러대지? 의지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할 땐 육신이 하는 대로 맡기는 수밖에. 가까이 가보니 유모차에는 아기가 잠들어 있다.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6개월이나 됐을까. 다행히 무더위 속에서도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천사 같은 모습에 또 마음을 뺏긴다. 대체 이 엄마는 무얼 어쩌자고 이 어린 것을 데리고 거리에 나온 것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이란 뜻일까? 여인과 아기를 싸고 흐르던 축축한 슬픔이 내게 전이된다. 그렇다고 추하다거나 비참해 보인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냥 지나가도 되련만 송진이라도 밟은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배낭을 내려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내고 마침 근처에 있던 일행에게 달려가 동전을 얻어온다. 여인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슬픔과 수줍음이 적절히 섞인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이왕 음악을 멈췄으니 한마디 물어나 보자.

아기가 참 예뻐요. 몇 개월이나 됐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만다. 그냥 돌아서는 수밖에.

 

복권 파는 아저씨.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소녀.

차마 사진을 찍지 못한다. 그저 가슴에 담는 수밖에. 저만치서 나 하는 짓을 바라보던, 그리고 동전을 빌려준 일행이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그런 마음으로 제대로 된 여행자가 되겠니?’ 그런 눈초리다. 아니다. 괜한 지레짐작일 뿐이다. 측은지심이야 말로 사람이 가진 근본 심성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여행 내내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챙긴 사람이다. 내가 특별히 갸륵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할머니의 미지근한 물을 사고 아기 엄마에게 동전을 털어준 것은 아니다. 그저 인연이 그리 이어졌을 뿐이다. 세상엔 지갑이 가난한 대신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 덕에 그나마 이 사회가 지탱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아흔아홉 개를 가진 사람 중에서 나온다. 그는 남의 한 개를 빼앗아 백 개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주변을 돌볼 틈이 없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건 자신이 가진 한 개를 어려운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이들이다. 그야말로 용기고 사랑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들 축에 끼어들기에는 반 푼어치의 자질도 없는 사람이다. 겉모습은 비슷해도 내가 호주머니를 터는 것은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서다. , ‘이기(利己)’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제발이 저려서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주고 나니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다. , 하필 이런 때 밀려오는 이 날카로운 요의(尿意)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내 방광이란 녀석은 눈치가 엄청 빠르다. 내 인생 최악의 안티 세력임에 분명하다.

 

 

특별 세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곳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괜한 호기심으로 뒷골목을 흘끔거린다. 과감하게 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니지 못하는 까닭은,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젊은 친구 몇 명이 아무 생각 없이 뒷골목에 들어갔다가 몽땅 털릴 뻔했던 걸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고도 내 뒷골목 탐사의 열망은 가시지 않고 있다. 어느 곳을 가든 뒷골목부터 기웃거린다. 그 나라, 그 도시의 진실은 뒷골목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먹는 음식이 그 나라의 진짜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그리 위험한 도시는 아니다.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완벽한 곳이 어디 있으랴. 어느 여행책자에서 이스티크랄 거리에 가면 술집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본 기억이 난다. 대충 더듬어 보면 그런 내용이었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뒷골목에는 바와 클럽이 많은데 수상한 분위기의 술집에 들어가는 건 피해야 한다. 특히 여자 손님을 끌고 가려고 하거나 여자 직원이 있는 곳은 위험하다. 터키에서는 술집에 여성들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나는 술을 마실 것도 아니고 지금은 한낮인데 뭘. 골목은 아직 조용해 보인다. 그럼 별 재미가 없다. 나를 다시 큰 거리로 끌어낸 건 어디선가 들리는 묘한 소리다. 누군가 부르는 노래가 분명한데 정말 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음색이다. 저런 소리를 영혼의 울림이라고 하나? 발길은 끌려가다시피 그쪽으로 향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내면의 경고 따위는 무시한지 오래다. 길 한쪽 공터에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다. 이스탄불에도 약장수가 있나?

 

집시 여인.

 

남자 악사가 두 명, 그리고 한 여인이 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저 여자가 바로 집시야.” 어디선가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른 건 그녀의 노래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 우리네 창과도 다르고 영혼을 두드리던 마두금의 음색과도 다르다. 한때 마음을 빼앗겼던 중국 소수민족의 노래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핏속을 흐르는 슬픔만 골라내 세상을 향해 내던지는 듯한 소리. 콰지모도가 사랑한 여인, 에스메랄다의 영혼 색깔이 저랬을까. 집시라는 족속은 원래 무당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고 땅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무리. 아득한 옛날에는 그들이 제사장이고 세상의 지배자였다. 북을 치는 손놀림이 이별을 앞둔 연인을 향한 손길처럼 부드럽고 서럽다. 길게 길러 풀어헤친 머리, 선 굵은 귀고리, 멋 같은 건 고려하지 않은 하얀 색깔의 상의, 그리고 통 넓은 치마. 옆에 놓인 기타 케이스에 CD 몇 장이 놓여 있다. 그걸 팔기 위해 노래를 하는 모양이다. 내가 소스라치며 뒷걸음질을 친 건 그녀의 눈을 본 순간이다. 우물처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이, 어느 곳에도 초점을 두지 않은 눈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대체 이게 뭐지? 이런 걸 무슨 느낌이라고 하지? 첫 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정상적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늪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의 소처럼 나는 혼신을 다해서 뒷걸음을 친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진 뒤에야 철퍼덕 주저앉는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음 한 쪽에서는 돌아가서 CD라도 사오라고 꼬드기지만 다른 한쪽은 극구 손사래를 친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온 것일까.

 

갈라타 탑 갈라타 탑 앞의 여인들.

케밥 사세요. 고등어케밥!!

고등어케밥 이렇게 만듭니다.

완성 직전.

이스티크랄 거리의 끄트머리에서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갈라타 탑을 만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의미가 있는 곳이다. 지난해 지중해 여행의 끝을 이곳에서 장식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사실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 바로 이 갈라타 탑이다. 하지만 한참 줄을 서고 좁은 곳에 올라가 엉덩이를 비벼야 하는 과정이 끔찍하다. 뭐 그냥 지나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한번 가봤다는 것이지만. 그리고 또 하나. 갈라타 다리로 얼른 가고 싶다는 조급증도 한몫했다. 걸음을 재게 놀린다. 갈라타 다리를 오가는 인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낚시꾼들은 여전히 바다에서 반짝거리는 물고기들을 건져 올린다. 잡상인은 작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 사이 실업자가 늘어난 건가? 이웃인 그리스의 재정파탄이 세계 경제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도 터키가 흔들린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이곳 사람들은 갈라타 다리를 백수다리라고도 부른다. 직업 없는 사람들이 새벽 다섯 시부터 나와서 낚싯대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공간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도 백수들에게 낚시터를 마련해주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진다. 복지가 뭐 별건가? 일단 다리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엔 벼르고 벼른 고등어케밥을 꼭 먹어볼 작정이다. 이곳은 고등어케밥의 천국이다. 다리가 2층 구조로 돼 있는데, 맨 위가 낚시꾼들의 영토라면 1층은 고등어케밥을 위해 존재한다. 다리를 따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은 물론 바다에도 큰 배에서 케밥을 판다.

 

이 배에서도 고등어케밥을 판다.

저무는 이스탄불.

다리 옆은 해산물 시장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해물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구경하는데도 한참 걸린다. 멀리 흑해에서 온 함시(멸치보다 조금 큰 생선으로 밀가루를 입혀 튀겨먹는다)도 보인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고등어케밥을 파는 리어카 좌판. 하얀 상의에 요리사 모자, 앞치마까지 둘러 그럴듯하게 보이는 아저씨가 고등어케밥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손님은 거의 없다. 대개 제대로 된, 에어컨이 나오는 음식점으로 찾아가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근사한 음식점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맥주 한잔 곁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좌판 아저씨에게 고등어케밥을 주문했더니 신이 나서 만들기 시작한다. 헌데 이것도 간단한 게 아니네? 빵을 반으로 갈라 잘 구워진 고등어를 얹고 그 위에 익힌 양파와 고추를 올리고 소스를 뿌리고 각종 채소를 얹고 다시 향신료를 뿌리고. 에구, 숨 가쁘다. 벼르고 벼르던 고등어케밥의 맛은? 그저 그랬다. 고등어의 비린 맛 때문에 거부반응이 일었다든가, 아니면 한 개쯤 더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든가 하는 특별함은 없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나라의 특별한 음식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니까. 이것으로 이번 여행 일정은 모두 끝났다. 다시 이스탄불과 이별을 해야 한다. 갈라타 다리 위에 서서 저물어가는 도시를 바라본다. 유람선이 오가는 바다 건너 저만치에는 석양을 비껴 안은 모스크들의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건물들은 하나 둘 불을 밝혀 12시간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는 한 사내를 전송한다. 작년에 했던 인사를 다시 반복한다. 다시 오리라. 내 형제, 내 친구의 땅이여.

posted by sagang
2012. 12. 21. 08:00 카테고리 없음

연재를 잠시 멈춥니다.

춥고 어두운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한줄기 빛을 건져올리면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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