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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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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비잔티움 제국 시절에 세운 다리의 교각.

강변을 함께 거닐면서 압둘라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저건 뭐야?”

?”

저 절벽에 파인 개미집 같은 흔적

, 저거. 전에는 동굴이었어. 지진으로 바위 한 겹이 떨어지는 바람에 저렇게 반쪽만 남은 거지

동굴? 무슨 동굴을 저렇게 수직으로 파 내려갔지?”

저 바위산 위에서 살던 사람들이 강으로 물을 뜨러오기 위해서 뚫은 굴이야. 산 위에는 성까지 있는 걸

사람의 힘으로 저 바위에 굴을 뚫었다고? 그 꼭대기에서 강가로 물을 뜨러왔다고? 저렇게 험한 수직굴을 통해서? 어떻게 내려와? 밧줄 타고?”

내 질문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쉬지 않고 쏟아진다. 압둘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베어 문다.

약간 사선으로 굴을 뚫고 계단을 만든 거지

인간의 의지는 대체 어디쯤이 그 끝이란 말인가. 옛날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다니다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대체 왜 그러고 살아야 했을까?

왜 그 꼭대기에서 살았던 건데? 강가에서 살면 좋잖아. 물도 뜨기 쉽고 또 물고기를 잡기도 좋고.”

강이라는 게 꼭 좋은 때만 있는 건 아니잖아. 모든 걸 주지만 모든 걸 쓸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모든 걸 주지만 모든 걸 쓸어갈 수 있는 강. 인류의 젖줄 티그리스 역시 생명의 강이자 죽음의 강이었구나. 그래서 인간들은 살기 위해 강가로 오고 또 죽지 않기 위해 강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겠구나.

 

저 꼭대기에서 강까지 수직에 가까운 동굴을 통해 물을 뜨러 다녔다.

압둘라는 무너진 다리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옛날에 대상들이 건너던 다리야. 밀가루하고 건포도, 오렌지를 싣고 이라크 바스라에서 출발한 낙타와 상인들이 이 다리를 건너서 서쪽으로 갔어. 여기가 바로 실크로드의 중요한 루트 중 하나였거든

그땐 하산케이프가 엄청나게 번성해서 길가에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마치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마냥 설명해준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고향과 옛 사람들이 남긴 유산을 사랑하는지 절절하게 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지킬 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노력했던가. 부끄러움과 자괴심으로 잠시 망연해진다. 그는 사진 찍을 포인트와 사진 찍기에 적절한 시점까지 가르쳐 준다. 교각에 깃들여 살고 있는 비둘기들도 불러낸다. 내게 카메라를 준비하라고 이른 뒤 손뼉을 딱! 치면 비둘기들이 힘차게 솟아오른다. 훌륭한 모델이긴 하지만 쉬고 있는 비둘기들의 노고가 큰 것 같아서 그만 두라고 일러도, 내가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을 때까지 계속한다. 비둘기들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한 게 틀림없다.

 

 

압둘라가 띄워준 비둘기가 촬영감독의 뒤로 날아가고 있다.

압둘라가 장 선생을 통해 나에 대해 묻는다.

이 사람 아이가 몇 살이래요?”

스무 살 넘은 아들이 둘이나 돼? 정말요? 난 내 또래인 줄 알았는데

그가 뒤로 넘어갈 듯 과장된 몸짓을 한다. 원래 외국인끼리는 서로 나이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거야. 그래도 그렇지. 이제 마흔 살밖에 안 먹은 친구가 나를 또래로 생각한 건 좀 심했다. 하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나는 그에게 친구가 되자고 청한다.

우린 이제부터 친구야. 오케이?”

그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한 여인이 양을 몰고 온다. 많아야 열 댓 마리? 곁에는 손녀인 듯 작은 꼬마가 따른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그리고 무너진 교각, 그 아래에서 양을 몰고 천천히 다가오는 여인. 여행자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마음에 쳐놓은 모든 결계는 풀어지고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난다.

 

 

양들을 몰고 교각 아래로 나타난 할머니와 손녀.

양떼가 지나가고 나니 이번엔 강 위에 기묘한 보트가 나타난다. 커다란 타이어에 나무판자를 얼기설기 댄 말 그대로 수제보트다. 어라? 저건 또 뭐지? 압둘라에게 물었더니 티그리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란다. 아침에 그물을 쳤다가 점심 때 걷으러 오는데 지금이 마침 그 시간이라고 소상하게 설명해준다. 어부가 강가로 나오기를 기다려 얘기를 나눠본다. 그가 걷어낸 그물에는 물고기가 열 댓 마리 쯤 붙어있다. 마치 은어처럼 생긴 물고기의 이름은 인데 가시가 많아서 주로 튀겨먹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많이 잡힌 건가요?”

아뇨. 오늘은 조금 잡혔네요. 이 강에 있는 물고기가 어디 가겠어요? 내일은 많이 잡히겠지요

우와! 이런 달관의 답변이라니. 강 하나를 통째로 자신의 수족관으로 만들었구나.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먹고살기 힘들다고 징징거리기 마련인데. 옛날 강태공처럼 득도를 한 어부인가? 이렇게 잡은 고기는 1kg3리라에서 4리라 정도에 판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돈으로 2,000원 남짓인데, 생활이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부는 무슨 말이든 “No problem”이다. 그가 아는 유일한 영어다. 그런 마음이라면 그 이상 배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댐이 완공되면 강이 사라질 텐데 어떻게 할 거예요?”

이사 가야지 어쩌겠어요? No problem”

그래도 먹고살기 힘들어질 텐데

, 그렇다면 한국에 가서 살지요 뭐. No problem이라니까요

이 정도면 도인이 따로 없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이렇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순리대로 살아간다. 이들을 쫓아내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경지다. 그나저나 한국에 가서 산다길래 한국을 아느냐니까 잘 안단다. 그리고 정말 한국을 좋아한단다.

한국에는 물고기가 별로 없는데 어쩌지요?”

“No problem. 케밥 팔면 돼요케밥? 케밥도 만들 줄 알아요?”

그럼요. 사실은 안탈리아(지중해에 있는 도시)에서 케밥 장사를 한 적이 있어요. 물고기 많이 팔아서 한국으로 갈 겁니다.”

진짜 한국이 좋아요?”

그렇다니까요. 이탈리아, 그리스, 헝가리는 싫지만 한국은 좋아해요

그는 안탈리아에서 장사를 하다가 신물이 나서 중간에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왜 신물이 났느냐니까. 그곳은 너무 타락했단다.

술 마시고 헤로인 하고다른 건 다 용서하겠는데 정말 마약은 용서가 안돼요

 

티그리스 강의 '낭만 어부' 알리 씨.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젊은 남녀가 나타나더니 어부에게 인사를 한다. 누구냐니까 아들과 며느리란다. 20일 전에 결혼시켰다고 뿌듯해한다. 애개! 이 쪼그만 것들이 부부야? 기껏 해야 스물 남짓? 아직도 남은 조혼 풍습을 실천한 친구들을 만난 것이다. 결혼을 해도 애들은 애들이다. 저희들끼리 시시덕거리면서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철딱서니 없는 것들 같으니. 아들에게 묻는다.

아버지 일 이어받을 생각 없어요?”

싫어요싫어? 왜요?”

지금 하는 일이 좋아요. 물고기 잡는 일은 싫어요

그는 바트만의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어부보다는 상점 점원이 좋다는 젊은이. 그가 아버지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술과 마약은 안 되지만 담배는 괜찮은 모양이구나. 우리 어른들 봤으면 호통이 나왔을 텐데. 어부 알리 씨에게 타이어보트 좀 태워 달랬더니 오늘은 안 된단다. 강물이 무척 깊은데다 흙탕물이 흘러서 빠져도 건져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타고 싶어 태워 달랬나. PD가 그림이 될 거라니까 할 수 없이 탄다는 거지. 나는 속으로 야호!를 외친다. 별 걸 다 시키고 그래.

 

티그리스 강에서 잡은 물고기 '샤'.

이제 압둘라와도 헤어질 시간. 하지만 그는 아쉬움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교각을 가리키며 울분을 토한다.

저 구멍이 뭔지 알아? 옛날에 돌들을 납으로 연결해놓았는데 그걸 빼간 자국이야. 당신네 나라 같으면 저렇게 유적을 망가트리는 걸 놔두겠어? 저길 봐. 다리가 저렇게 무너질 지경인데도 보수할 생각을 안 한다고

그래,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떻게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을 저렇게 방치해 둘 수 있지. 압둘라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진다.

여긴 쿠르드 지역이라고 아무 관리를 안 하는 거야. 심지어는 물고기를 잡겠다고 다이너마이트까지 터트린다니까

그래 화가 날만도 하겠다. 내가 화나는데, 이곳에서 낳고 자란 너야 오죽하겠니.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악수를 청한다. 그가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든다. 잠깐이지만 정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모든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을 동반하는 걸.

 

자치기를 하는 아이들.

 

강에서 나오다가 주차장에서 자치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긴 막대로 작은 막대를 멀리 쳐내는. 옛날 우리가 하던 자치기와 도구나 방식이 똑 같다. 우리 아이들은 잊어버린 지 오래인 것을 이곳 아이들은 아직도 하고 있구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 들여다본다. 하산케이프 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다 장례행렬을 만났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장지로 간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물었더니 이 읍의 이맘(모스크에서 예배를 주재하는 사람)이 죽었단다. 종교지도자의 장례식이니 떠들썩할 수밖에.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3일 동안 조문을 받은 뒤 매장을 한다. 대부분은 남자들이지만 여성들도 검은 차도르를 쓴 채 행렬의 맨 뒤를 따른다. 다만 여성들은 매장이 진행되는 동안 뒤편에 떨어져서 애도를 해야 한단다. 하긴 여자들이 남자들과 섞이거나 앞장서는 경우는 절대 없는 나라니까.

 

다리 위로 장례 행렬이 지나간다.

티그리스 강 바로 옆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인류 문명을 낳은 강가에서서의 식사, 남다른 감회가 인다. 아래층에는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식사를 하고 있다. 어른들은 남녀구별이 엄격하지만 아이들은 별 상관이 없나보다. 남녀가 희희낙락하며 함께 먹는다. 그런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아직 식욕이 돌아오지 않는지라 중간에 포크를 놓고 차이를 한 잔 청해서 천천히 마신다. 터키에서는 밥을 먹은 뒤 나오는 차는 돈을 받지 않는다. 일부러 달라고 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 역시 2~3년 내에 물에 잠기겠지. 언젠가 다시 온다고 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다. 이왕이면 맨 꼭대기에 있다는 성까지 올라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통제를 한단다. 그렇다면 동굴이라도 찾아가보자 싶어서 길을 나선다. 최근까지 사람들이 살았다니까 흔적이 남아있겠지. 동굴살이야말로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했던 삶의 방식 아닌가.

옛성은 무너지고 그 사이로 소들이 오가며 풀을 뜯는다. 

바위 산에 온통 동굴집이다.

말이 읍이지 조금 걸어가니 마을의 끝이 나온다. 그 옛날 대상들이 지나가고 난전이 벌어졌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야기로만 남은 화려한 시절은 공허를 더할 뿐이다. 언덕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무너진 옛 성터가 나온다. 이곳 역시 완연한 봄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눈길을 헤맸는데 양탄자처럼 푹신푹신하게 밟히는 풀밭이라니. 겨울에서 봄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잠시 낯설다. 성벽은 멀쩡한 곳도 많은데 담 하나 쳐놓은 게 없고 그 사이를 소와 양들이 풀을 찾아 오가고 있다. 사람의 성이 동물의 성이 된 셈이다. 워낙 발에 채는 게 고대 유적이다 보니 저 정도는 옛날에 지은 돌집정도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바위산이 서 있고 곳곳에 굴이 뚫려있다. 바로 사람들이 살던 동굴집들이다. 이젠 본격적으로 탐험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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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게 남은 교각과 절벽 위의 성.

하산케이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압둘라는 아랍식 이름을 가진 40대 사내다. 이곳은 아랍과 가깝기 때문에 아랍인 투르크인, 쿠르드인들이 섞여 산다. 덕분에 아이들도 3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사내가 와서 자꾸 들여다본다. 그가 나중에 친해진 압둘라다. 이 정도면 그냥 지나갈 수 없지. “메르하바인사를 했더니 대뜸 “Are you professor?”. 어라? 네 눈에도 내가 교수처럼 보여? 한국에서도 가끔 듣는 말이긴 하다. 교수님들께는 무척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난 교수처럼 생겼다는 말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교수는 어떻게 생겨야한다는 정형도 없으려니와 조금은 고답적인 사람이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분방해 보인다는 말을 즐긴다. 아무튼, 교수가 아니라 여행가라고 나를 소개했더니 이번엔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다.

프로들이 쓰는 카메라네요?”

이 친구 프로라는 말을 제법 좋아하네? 요즘 프로, 아마추어가 따로 있나. 나는 한마디로 부러움을 끊어준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카메라만 프로고 찍는 나는 아마추어야

 

하산케이프 지킴이 압둘라.

압둘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친구다.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 중퇴. 직업은 무덤지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일은 재야 기록가이자 사진가다. 젊어서부터 고고학 발굴 현장을 쫓아다니며 역사에 대한 지식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하산케이프를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되뇐다. 이곳이 물에 잠기면 자신의 삶도 사라진다고 슬퍼한다. 그 때문에 그는 글을 배우고 사진 찍는 것을 배워서 하산케이프에 대한 기록을 시작했다. 그렇게 틈틈이 기록한 것들을 모아서 한 권의 작은 책자로 발간했다. 그걸 관광객에게 팔기 시작했는데 무려 2,000권을 팔았다. 다음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기록하겠다는 큰 꿈을 꾸고 있다. 나보다 젊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했어도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한길을 달려온 한 사내의 성취.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근무시간이라며 서둘러 돌아간다.

 

'개밥 주는 노인'이 저 길로 걸어왔다.

노인이 나타난 건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이다. 중절모에 단장, 구두까지 갖춰 신은 노신사 하나가 푸른 풀빛을 떨치며 저만치 교각 쪽에서 천천히 걸어온다. 내 눈엔 풍경에 점 하나 찍을 정도의 작은 변화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존재들에겐 엄청난 변화를 알리는 전주곡 쯤 됐던 모양이다. 노인의 모습은 아직도 까마득하게 먼데 배를 깔고 태평가를 부르던 개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만났다. 노인과 개들의 상봉 장면은 눈물겨울 정도로 극적이다. 사람과 사람끼리의 만남도 저리 반가울 수 있었으면. 노인이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서 나눠주자, 개들은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순서대로 받아먹는다. 마침 지나가는 청년에게 물어본다.

저 노인 누구야?”

, 개 밥 주는 노인

이름이 개 밥이야? 매일 저렇게 밥을 줘?”

, 그게 저 노인의 일이야

 

'개밥 주는 노인'과 개들이 오수를 즐기고 있다.

개들의 주인은 아니지만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나타나서 먹이를 준단다. 혼자 살고 있고 몸도 불편한 노인이라는데 이 일만큼은 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과 개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어울린 풍경이다. 고요하던 강변에 느닷없이 생명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먹을 걸 다 준 노인이 한 녀석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호박돌 하나를 베개 삼아 풀밭에 눕는다. 아무 욕심도 없는 사람이 내뿜는 평화로운 기운이 대지에 퍼진다. 노인과 자연은 금세 경계를 지운다. 개들도 노인의 주변에 누워 자연이 된다. 강가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포성은 멈추고 세상의 모든 철조망은 걷히고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 동물과 자연의 구분조차 모호해진다. 무엇을 욕심내고 그 무엇과 싸우랴. 강물은 가슴으로도 쿨렁쿨렁 흐른다.

 

오래된 교각에 지은 집. 사람이 살고 있다.

묘지를 지키러갔던 압둘라를 다시 만난 건 교각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말이 만나러 가는 길이지 약속이 안 돼 있으니 무조건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마침 저만치서 압둘라가 걸어오길래 덥석 부탁부터 한다.

저기 사는 저 사람들 인터뷰를 좀 하고 싶은데 네가 가서 좀 부탁해볼래?”

나도 참, 염치 하나는 하늘을 찌른다. 압둘라가 선선히 그 집으로 가더니 잠시 뒤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인터뷰 안하겠대. 카메라만 보면 울렁증이 솟는대

에구, 꼭 보고 싶은데. 하지만 억지로야 할 수 있나. ‘맨땅에 헤딩으로 하는 촬영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다. 거절당하면 그대로 물러나는 수밖에. 압둘라를 앞세워 강가로 내려간다. 워낙 오랫동안 이곳의 유적에 애정을 쏟아온 그야말로 최고의 안내자다.

 

탄디르라고 부르는 방 굽는 화덕.

압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부모와 조부모, 그 윗대도 여기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은 내려와 살지만 부모님 대까지는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왜 동굴에서 나왔어?”

유럽 사람들이 자꾸 흉을 본다는 거야. 터키에 가면 아직도 동굴에서 원시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정부가 열 받은 거지. 그래서 집을 지어주고 억지로 내려와 살도록 한 거야

별 걸 다 흉본다. 동굴에서 살든 나무에 매달려서 살든 제 맘이지. 그래서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사는 너희들은 날마다 하늘을 날 것 같더냐. 씽씽 달리는 자동차가 자랑스럽더냐. 동굴에서 나와 현대식 집에 입주한 사람들은 그 뒤로 행복해졌을까.

 

 

하산케이프 전경. 모두 물에 잠긴다.

인류 최조의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수메르 문명이 태어난 곳, 메소포타미아의 최북단에 자리한 하산케이프. 숱한 정복자들이 거쳐 가면서 로마, 아랍, 몽골, 오스만투르크 등의 유산이 혼재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쿠르드인들이 평생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마을 전체, 아니 구르는 돌 하나까지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하산케이프가 최근에 주목 받은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리수(Ilisu) 댐 건설 때문이다. 터키 정부는 남동부 아나톨리아 개발계획(GAP)에 따라 대규모 댐을 잇달아 건설하고 있다. 유프라테스 강 댐 건설이 대부분 끝나면서 이젠 티그리스 강 차례가 된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하산케이프 65km 하류에 쌓고 있는 일리수 댐이다. 이 댐이 완공되고 물이 차면 길이 100km에 달하는 호수가 생기고 하산케이프는 45m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인류문화의 원형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돌다리는 물론 인류의 조상들이 살았던 3,500개의 동굴도 물에 잠긴다. 동굴은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거니와, 다리 역시 해체해서 옮긴다고 해도 이미 그건 박제된 모형일 뿐이다.

 

강변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

터키 정부는 낙후된 쿠르드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댐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지만 쿠르드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기 위해 댐 건설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이곳에 건설하는 댐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댐을 통해 얻는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하필 인류 문명의 원형을 물에 가둔다는 것인지. 문명이 남긴 유산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 땅에 산다고 해서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범죄에 가까운 착각이다. 한번 파괴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산케이프 지킴이 압둘라가 남긴 말이 귓전을 맴돈다.

댐으로 생기는 호수는 나에게 또 하나의 지옥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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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인 하산케이프. 티그리스 강이 흐른다.

 

반과 이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일정보다 많이 늦어져 조금 서둘러야 할 판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트만(Batman). 하산케이프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 격인 큰 도시다. 반에서 바트만까지는 4~5시간 정도 걸린다. 조금 달리다보니 산마다 차양처럼 석양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갈을 오가는 차들은 거의 없다. 골골마다 박힌 집들은 하나 둘 등불을 밝히고, 차에게 질세라 걸음을 재게 놀리는 민둥산들은 황혼을 안고 황금빛으로 빛난다. 가는 도중에는 2000m가 넘는 고개도 있단다. 눈이 쌓였을지도 모르니 좀 더 서둘러야 했는데. 나귀를 몰고 재를 넘는 장돌뱅이처럼 마음만 자꾸 초조해진다. 차장 밖으로 눈길을 던지니 이 시간이 주는 특유의 쓸쓸한 기운이 천지간에 가득하다. 아냐, 아냐. 애써 머리를 털어낸다. 잘못하면 우울 속으로 빠져들기 쉽지. 한번 들어가면 헤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반에서 바트만으로 가는 길. 설산에 황혼이 드리우고 있다.

차는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건만 반호수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벗어났겠지 싶어 내다보면 여전히 바다 같은 물이 곁을 따라온다. 하긴 반에서 호수 건너편에 있는 타트완 항구까지 페리가 다니는데 가로지르는 데만 4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바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마치 서해안의 어느 한적한 해변 길을 달리는 기분이다. 그나마 가끔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 나타나서 덜 삭막하다. 이런 동네에 살면 옆 마을까지 가는데도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그런 고립된 삶은 상상만으로도 고독감과 행복을 동시에 준다. 이런 곳에 아무도 모르게 묻혀 살다 슬그머니 죽는 나를 그려본다. 하루 이틀 꿔온 꿈은 아니지만.

 

타트완이라는 조그만 도시를 지나다가 삼성디지털플라자 간판을 보고 반가움에 눈을 떼지 못한다. 큰 도시에서는 늘 보는 간판이지만 이런 작은 도시까지 진출해 있다니. 이런 턱없는 반가움도 국수주의의 일종일까? 아무튼 뿌듯한 기분은 감출 수 없다. 국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재벌문제가 그 위에 교차된다. 재벌을 해체해야한다. 그들의 패악이 크다…. 무슨 소리냐. 그나마 그들이 있어서 우리 경제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관점의 문제일 수 있는 이 해묵은 논쟁. 사실은 정도의 문제가 아닐까. 양심이라고 부르는 잣대를 들이대면 그 결과가 명확해지는…. 재벌이 도덕과 양심을 되찾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던가. 혜택 한번 본 적이 없는 나는 간판 하나로도 이렇게 반가워하는데.

 

휴게소에서 만난 일가족.

먼 길을 갈 때 동승자보다 운전자가 훨씬 더 고단한 건 당연한 이치. 저녁도 먹을 겸 휴게소에 들른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식당 안에 있던 예닐곱 먹은 꼬마가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다. 아이와 나 사이에는 넓은 통유리가 가로막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하얀 히잡을 썼는데 본래의 용도보다는 멋으로 쓴 것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얼굴을 드러내놓았다.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고 앉아있을까.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큰 아이의 사진을 찍어주며 놀고 있으려니 이번엔 엄마가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다. 작은아이도 찍어줬으면 하는 눈치다. 눈으로 OK 사인을 보냈더니 작은아이를 얼른 데려온다. 하지만 이 녀석 이방인들과 커다란 카메라를 보더니 느닷없이 울면서 몸부림을 친다. 엄마는 가자고 하고 아이는 안 간다고 하고…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이곳이 교조적인 무슬림들이 사는 동부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굉장히 개방적인 엄마임에 틀림없다. 이 가족에게 얼른 가장이 돌아오길.

 

바트만 시내의 아침 풍경.

다시 바트만으로 가는 길. 날은 온전히 저물어 온 세상이 잉크를 엎지른 듯 캄캄하다. 게다가 비까지 내린다. 어두운 빗길, 게다가 도로 사정도 그리 매끄러운 편은 아니다. 베이셀의 운전솜씨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불안한 눈치를 감추지 못한다. 오후 8시 15분, 드디어 바트만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휴우~ 3시30분에 출발했으니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온 셈이다. 딱 한 번 쉬고 내처 왔는데도 이만큼 걸렸으니 멀긴 먼 거리다. 비는 더욱 거세져서 앞이 거의 안 보일 지경이다. 내일까지 그치지 않으면 일정에 차질이 클 텐데. 제작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바트만 주의 주도인 바트만은 별 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도시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도 30만 명 전후로 그리 많지 않다. 주요 농산물은 목화이고 주민은 쿠르드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여기서부터 50분 정도 걸리는 하산케이프를 가려는 사람들은 보통 이 도시에서 하루 묵고 아침에 출발한다. 저녁을 일찍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은 스산하고 잠은 올 것 같지 않다.

 

하산케이프로 가는 길에 펼쳐진 밀밭.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는데, 장 선생이 안타키아(Antakya)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전해준다. 안타키아는 십자군 전쟁 등을 다룬 역사서에 안티오크 혹은 안티오키아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며, 성서에는 안디옥으로 나온다. 시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는데 최근 시리아가 내정에 빠지면서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피난민들을 겨냥한 테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다. 시리아 내전은 터키와 시리아 사이에도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분쟁지역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출발하기 전에 호텔 로비에 앉아있자니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서너 명이 나타나더니 탁자를 닦고 바닥을 쓴다. 한 사람이 해도 될 일인데 이렇게 여럿이 나눠서 한담? 역시 일거리가 없다는 뜻이겠지. 헌데, 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나를 흘끔거려가며 수줍게 웃는다. 에구, 이러다 마음 설레면 안 되지.

 

삭막해 보이는 산들도 만나고.

하산케이프로 가는 길. 다행이 비는 그쳤다. 비 그친 아침 특유의 싱그러운 공기가 세상에 그득하다. 특히 길옆으로 파란 밀밭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풍경이 눈길을 자꾸 당긴다. 겨울을 견뎌낸 생명들의 푸르른 노래. 고향의 청보리밭으로 돌아간 듯 한껏 흥겨워진다. 기분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하산케이프는 꼭 가고 싶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고대도시. 이번 촬영지를 정할 때 내가 꼭 들러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곳이기도 하다.

 

티그리스 강가의 동굴집들.

다리를 건너면 하산케이프다.

한참 달리니 굽이쳐 흐르는 강이 나타난다. 티크리스 강이다. 아!! 나는 또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처럼 감탄사를 아끼지 못한다. 또 하나 문명의 시원에 왔구나. 지난해 말라티아에서부터 샨르우르파로 가는 동안 내내 함께 했던 유프라테스 강에 얼마나 감동을 거듭했던지. 내가 무슨 팔자가 좋아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만들어낸 두 개의 강을 연달아 볼 수 있는지. 강의 뒤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서 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벌집처럼 뚫려 있는 동굴들. 인류의 조상들이 살기 시작해 대대로 주거 공간 역할을 했던, 원시적 형태의 ‘가옥’들이다. 다만 이 지역에서 만큼은 최근까지 동굴에서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원시적’이라는 말이 안 어울릴 지도 모른다.

 

비잔티움 제국 때 세웠다는 다리. 교각만 남았다.

나를 반겨주던 강아지. 주인 없는 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눈에 들어온 첫 인상은 ‘쓸쓸하다’는 것. 이 세계적인 유적지에 사람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관광시즌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 강아지 몇 마리가 반갑게 꼬리치며 달려와 내 다리에 머리를 부비더니 아무것도 나올 눈치가 없자 다시 돌아가 게으르게 눕는다. 떠돌이 여행자가 줄 게 뭐 있겠니. 얼마나 순한지 이방인에 대한 경계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다리 건너 마을은 무척 쓸쓸해 보인다. 인구가 줄고 줄어서 3,000명에 불과하다고 하더니 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류문명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도시 하산케이프가 이렇게 자꾸 쪼그라드는 것은 하류에 막고 있는 일리수 댐 때문이다. 댐 이야기는 차차 하겠지만, 좀 씁쓸한 농담이 이곳에 드리운 불안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댐 공사가 시작됐지만, 그리고 매년 “올해 말에는 잠긴다, 잠긴다” 하지만 티그리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이곳 주민들에게 언제쯤이나 마을이 잠기느냐고 물어보면 “모르지요. 이미 50년 전부터 잠긴다고 했거든요”라며 웃는다. 아무튼 일거리는 없고 물에 잠긴다는 마을에 투자할 일도 없으니 인구는 자꾸 줄고 빈집도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각 끝에 지은 집.

세상사야 그러든 말든 강가에는 봄이 아주 깊숙이 와 있다. 아니, 아예 겨울이 다녀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둑에는 파란 풀들이 아우성으로 자라고 작은 꽃들도 앞 다퉈 봉오리를 맺고 꽃잎을 연다. 어제 그악스레 내리던 비는 티그리스 강에 누런 황톳물을 선사했다. 저만치 무너진 다리가 보인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라고 한다. 한때는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과 낙타들이 지났던, 말 그대로 세계적 유적이다. 물론 댐을 막으면 저 다리도 잠긴다. 지금은 무너진 교각만 남았지만 천 년의 세월을 이야기해 주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내 눈길을 계속 잡아끄는 건 강가의 절벽마다 빽빽하게 들어앉은 동굴집들. 그리고 무너진 다리의 교각 끝에 덧대어 지은 흙집. 흙집에는 TV안테나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 사람이 사는 게 틀림없다. 저들은 길고 긴 세월에 기대어 먹고 자고 싸고 빨래하고 아이들을 키우는구나. 이방인의 눈으로는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왜 저런 삶을 선택했을까. 외롭진 않을까. 무엇보다 머릿속에는 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우성친다. 낯선 땅에 와서 낯선 방식의 삶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여행자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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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행의 목적지인 악다마르 섬의 성십자가 대성당.

이번 여행의 출발지, 반에 있는 동안 묵었던 호텔에서 체크아웃 하는 날이다. 사연도 참 많았다. 샤워를 하면 물이 방으로 들어와 수상침대에서 잔 것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PD와 카메라감독이 머물렀던 방은 난방장치가 안 돼 급기야 전기난로까지 동원했다. 문제는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호텔 전체가 정전되는 원시적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그 뒤의 조치가 더 재미있다. 정전사태를 겪고 나서야 종업원이 벽에 걸려 있던 기존의난방장치를 가동하더란다. 왜 진즉에 안 하고?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로는 온전히 위안 받기 어려운 사태들이었다. 그래도 떠나려니 여러 번 돌아보게 된다. 몸은 여전히 터키 식 식사를 거부한다. 쉬지 않고 진행되는 촬영으로 체력소모가 심하다보니 이중고에 시달린다. 그나마 아침은 호텔에서 삶은 달걀, 오이, 토마토 등으로 때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구는 라면 스프를 챙겨줬고, 혹시나 싶어서 컵라면까지 싸들고 갔지만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전기포트는 물론이고 뜨거운 물조차 구할 방법이 없다. 결국 짐만 늘어난 셈이 되고 말았다.

 

샤키르 씨의 부인과 형수가 빵을 만들고 있다. 

반 시내를 지나가는데 맷돌을 돌리는 여인의 동상이 있다. 가만? 이곳에서도 맷돌을 썼나? 당연히 썼겠지. 한반도보다 훨씬 전부터 밀농사를 지었다니까. 메소포타미아의 밀이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 땅으로 들어왔다는 가설이 맞는다면 출발지가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때 맷돌도 함께 먼 길을 떠났겠지. 그리고 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인연의 끈들이 얽히고설켜서 인류라는 이름의 동류항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칼국수를 만들듯 홍두깨로 밀가루를 둥글게 민다.

지금 찾아가는 곳은 엊그제 한 나절을 보냈던 샤키르 씨의 농가. 오늘이 빵 굽는 날이라고 해서 들르기로 약속했었다. 잠깐 들른다고는 했지만 정말 잠깐으로 끝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곳 농가들은 보통 일주일 먹을 분량의 빵을 한꺼번에 구워놓는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온 식구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 샤키르 씨는 단벌 외출복이 틀림없어 보이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저씨, 그게 아니라니까요. 농부가 농부 옷을 입어야 방송에 어울리지요. 하긴 새 옷이라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분뇨로 질척거리는 마당을 몇 번만 오가면 새 옷인지 헌 옷인지 구분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집안은 잔칫집처럼 들떠 있다. 빵을 만드는 헛간에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기다리고 있다. 낯익은 이 집 안주인 외에도 또 한사람의 여자가 있길래 누구냐 물으니 동서라고 한다. 보통 빵을 구울 때는 이렇게 친척 두 세 명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한다.

 

 

둥글게 민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돌려 넓적하게 편다.

빵을 굽는 절차는 별로 복잡하지 않다. 밀가루에 소금과 이스트를 넣고 반죽해서 부풀리는 건 옛날에 우리네 빵 만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머지는 칼국수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넓게 편 다음, 피자 돌리듯 손으로 돌려서(이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더 얇게 만든다. 땅에 묻은 큰 항아리가 바로 빵을 굽는 화덕이다. 안에 불을 피워 미리 달궈놓고, 둥근 기구를 이용해서 넓게 편 반죽을 항아리 벽에 찰싹 붙이면 된다. 가마 형태의 화덕은 탄디르라고 하고 이처럼 항아리 형 화덕은 테젝이라고 부른다. 도시에서는 빵을 사다 먹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대부분 직접 빵을 구워먹는다. 특히 이 집의 화덕은 지진이 났을 때 인기를 누렸다고 자랑이 늘어진다. 다른 집 화덕이 전부 부서졌는데 이 집 것만 멀쩡해서 동네의 빵을 전부 여기서 구웠다나.

 

항아리 화덕.

화덕에 불을 피울 때는 동물 배설물 말린 것을 연료로 쓴다. 손으로 연료를 던져넣고 그 손으로 빵을 구워도 더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두 여인은 연신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면서 깔깔거린다. 외간 남자에게 눈도 보여주지 않는 교조적 무슬림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개방적이다. 여자들이 빵을 굽는 사이에 샤키르 씨는 마당에서 차이를 마시며 희희낙락이다. 저런 건 여자들이 하는 건데 뭘 구경하느냐는 듯, 자꾸 나를 불러낸다. 이번에 자랑하고 싶은 건 자신의 가계도.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는데, 부모가 이란으로 강제 이주됐다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뒤 돌아왔다고 한다. 오스만은 제국의 땅이 넓어지자 효율적 지배를 위해 점령지에 투르크족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앞서 밝힌 대로 이 동네는 씨족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 전체가 샤키르 가문의 땅이다. 친인척도 무려 200명이나 된다. 샤키르 씨의 아버지는 두 명의 어머니에게서 모두 17명의 형제를 낳았다. 그 형제들 대부분이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 형제 축구팀을 만들어도 후보까지 무난하게 확보할 수 있겠다.

 

화덕에 붙인 모습.

다 만들어진 빵.

전통적으로 밀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이곳에서는 사람을 노동력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긴 우리 전통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며느리를 들이면 노동력이 증가한 것으로 본다. 딸을 시집보내는 집에서는 노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돈이나 재물을 받는다. 보통 열다섯 살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 정도 살림을 배우고 열일곱 살쯤 시집을 간다. 최근 이 지역에서는 열네 살짜리 딸을 소 한 마리와 바꾼 일이 있었다. 좀 심했다고 빈축을 샀지만 아비는 당당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아직도 친족 중심의 혼인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 , 결혼은 보통 4촌끼리 한다. 그러다보니 숙모가 느닷없이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일까? 빵을 구우면서 저렇게 다정한 동서지간이 어쩌면 자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왕 결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끔찍한 이야기도 해보자. 대부분은 장 선생이 틈틈이 해준 이야기다.

 

 

아내가 빵을 굽는 시간에 샤키르 씨는 손님들과 희희낙락.

이곳에서는 첫날밤을 보낸 뒤 신부가 숫처녀가 아니었을 경우 가차 없이 살해하는 풍습이 아직도 있다. 신랑이 친정에 연락하면 아버지가 알아서 죽인다. 이유는 집안망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명예스런 일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는 신부 30명이 한꺼번에 자살한 일도 있다. 오죽 비인간적 풍습이었으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조사를 나오기도 했단다. 아무튼 군에 간 오빠가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나와서 집안망신 시킨 동생을 죽였다는 기사를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정 선생이, 말이 나온 김에 들려주는 것이라며 복수살인 이야기도 해준다. 이것 역시 결혼에 얽힌 얘긴데 4년 전 마르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형에게 딸을, 즉 조카를 며느리로 달라고 했지만 형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 자신의 처가에 시집보내기로 한 것. 사건은 약혼식 날 터졌다. 총을 들고 나타난 동생이 형의 일가족을 난사한 것이다. 그 와중에 막내아들, 살인자로 보면 막내 조카만 살아남았는데, 잡혀가는 작은아버지를 향해 둘째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더란다. 그건 단순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기다려라는 뜻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 손가락질을 하는 순간 널 끝까지 쫓아가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바로 집안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일도 다혈질인 쿠르드족의 특성 중 하나일까?

 

샤키르 씨 멋지죠?

역시 샤키르 씨 가족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엊그제 한번 연습을 했는데도 절차는 마냥 늘어진다. 비슷한 작별 인사가 오가고 동네사람과 강아지들까지 모두 나와 손을 흔드는 일의 반복. 그래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음 목적지는 다시 반 호수. 악다마르 섬을 찾아가는 길이다. 호수로 가는 길에는 미루나무들이 많이 서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무. 하늘을 흠모해 끝없이 오르는 나무. 왼쪽으로 거대한 설산이 따라온다. 이름을 물어보니 아르호스 산이란다.

 

멀리서 바라본 악다마르 섬.

악다마르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는 동네는 아탈란이란 곳이다. 이곳에서 섬까지는 4.8km. 유람선을 타고 15~20분 걸린다. 섬은 물 위에 떠 있는 듯 흐릿하게 흔들린다. 섬에 올라가 발을 구르면 푸욱! 혹은 퐁!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 같다. 배를 오르니 선장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지. 메르하바! 콜라이겔슨(수고하십니다) 어쩌고 친한 척 하면서 선장의 빵과 차이를 반쯤 빼앗아먹는다. 수다도 흐드러진다. 그런데 우린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를 나눈 걸까? 호수는 넓고 물은 맑다. 잠시 뱃놀이를 나온 사람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이 호수에도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냥 이야기로 그치는 것만은 아닌 듯, 한때는 일본 탐사대가 본격적으로 탐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카메라를 들고 뱃전에 서서 물속을 주시한다. 괴물이란 녀석이 불쑥 머리를 내밀지 알아? 이왕 온 거 세기적 특종이나 한번 해보자.

 

성십자가대성당.

섬은 가까이 가면서 바윗덩어리에 불과한 실체를 보여준다. 멀리서는 환상적이었는데. 섬이든 사람이든 조금 떨어져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한다. 길이 700m, 너비 600m의 이 돌섬은 둘레의 연장길이가 2km밖에 안 되지만 사연은 하와이만큼이나 많다. 이 작은 섬에도 역사의 굴곡은 큰 흔적을 남겼다. 이곳에 왕궁을 지은 사람은 아르메니아 바스푸라칸 왕국의 초대 왕 기긱1. 915년부터 921년에 걸쳐 궁전과 성당을 지었다. 궁전은 세월 따라 지워졌지만 교회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 교회의 정식 명칭은 성 십자가 대성당’. 수도사들은 간데없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 교회는 1116년부터 1895년까지 아르메니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대성당이었다. 1915년까지도 수도원으로 썼는데 바로 그해 이곳의 수도사들이 모두 학살되고 교회는 파괴됐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였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검은 손이 이 섬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현재 서 있는 건물은 2007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설의 섬.

잠시 교회 마당에 앉아 이 섬에 얽힌 전설을 떠올려본다. 옛날 이 섬에 작은 왕국이 있었다. 왕에게는 타마르라는 이름의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건너편에 사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건너편이라면 배가 출발한 곳쯤 되겠지. 아무리 작은 왕국이라지만 공주와 평민의 사랑이라니. 전설이나 옛날이야기가 선호하는 비극의 조건을 충분히 품고 있는 셈이다. 청년은 밤이면 헤엄을 쳐 섬까지 건너와 공주와 밀회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길수 없었다. 왕이 둘의 관계를 눈치 챈 것이다. 어느 비바람이 거센 밤. 왕은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흔들었다. 공주가 부르는 것으로 안 청년은 폭풍우 속에서도 힘차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왕은 등불을 들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등불을 따라 계속 방향을 바꾸던 청년은 얼마 뒤 힘이 빠져 더 이상 헤엄을 칠 수 없었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 타마르, 타마르였다. 그 사실을 안 공주도 호수에 몸을 던졌다. 지금도 폭풍우가 치는 밤이면 아! 타마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물론 이 섬의 이름 악다마르는 그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 외부의 부조들.

교회 내부의 돔형 천장. 프레스코화들이 대부분 지워졌다.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방. 거의 무너졌다.

이젠 교회 구경을 해보자. 이 교회가 유명한 건 외부 벽에 새겨진 부조들 덕분이다. 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벽의 맨 오른쪽에는 한 남자가 서 있고 사자 두 마리가 거꾸로 서서 발을 핥는 그림이 있다. 우상숭배를 거부했다가 사자 우리에 던져졌다는 다니엘 성인이다. 금단의 열매를 따는 아담과 이브, 사자를 죽이는 삼손, 세례 요한,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 일일이 머리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은 끝없이 이어진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 부속 교회, 기도실 등을 지나 중앙 홀로 들어가게 돼 있다. 중앙 홀의 벽에는 다양한 프레스코화들이 있다. 외부 벽이 구약이라면 내부 프레스크화들은 신약성서를 소재로 했다. 성화들이 상당부분 지워져 있는데다 워낙 등장인물이 많아 나처럼 종교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한 가운데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뒤에서 본 교회. 

언덕에서 바라본 교회와 건너편의 설산.

 

밖으로 나와 교회를 한 바퀴 돌아본다.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던 방들은 거의 다 무너져 있다. 그러든 말든 나무들은 저희들끼리 키를 키우고 열매를 맺으며 세월을 헤아리고 있다. 교회를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간다. 토끼들이 놀던 자리, 양지바른 곳에는 흙들이 부드럽게 풀어져 봄맞이를 하고 있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섬과 눈을 뒤집어 쓴 알투스 산의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수도사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마음 다스리는 일도 쉽지 않았겠다.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세상을 바라본다. 욕심도 미움도 한 뼘의 땅도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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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호수의 하늘.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점심은 반 시내로 다시 돌아가 해결하기로 한다. 반 성채 인근에는 눈을 씻고 봐도 구멍가게 하나 없다. 오늘 찾아가는 집은 피데 전문점. 피데는 밀가루 반죽을 둥글고 납작하게 만들어 화덕에 구운 터키의 전통 빵이다. 어디 가나 쉽게 이 피데를 볼 수 있다. 야채와 고기, 치즈 등을 올려서 굽기도 한다. 타원형과 원형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피자와 사촌 쯤 돼 보인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인 피자가 터키의 피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꽤 설득력을 얻는다. 피데 굽는 광경을 한참 구경하는데 주인이 한번 해보겠느냐고 나를 살살 꼬인다. 피데는 밀가루 반죽을 긴 주걱에 얹은 다음 화덕 안쪽에 던져서 굽는다. 제대로 위치를 잡아야하기 때문에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마다할 내가 아니지. 주인이 시켰으니 잘못된들 내 책임이랴. 화덕 앞에 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밀가루 반죽을 던진다. 그럼 그렇지. 초보자가 잘 할 리가 있나. 여기저기 불시착의 연속이다. 하지만 주인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는다. 결국 먼 나라 사람끼리 친구가 되는 걸로 ‘피데 사건’은 마무리 된다.

 

피데집 사장님. 잘 생겼지 않은가.

느닷없이 만난 눈밭.

상치 못했던 상황과 부딪힌 것은 반호수를 찾아가는 길에서였다. 반 호수를 간다 간다 해놓고 이틀 째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제야 고개를 넘는 중. 어느 고갯마루에 오르자 느닷없이 풍경이 바뀌어버린다. 어라? 이게 무슨 조화지? 눈앞에는 끝을 헤아리기도 힘든 설원이 펼쳐져 있다. 조금 전에 ‘맨땅’을 지나왔는데…. 그리고 이 높은 곳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다니. 아나톨리아가 예측 불허의 상황을 곳곳에 감춰두고 있는 땅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상상을 한참 초월하는 상황이다. 눈도 그냥 눈이 아니다. 최소 20cm는 쌓여있다. 일본의 홋카이도가 부럽지 않은 눈의 세계. 나는 신이 났는데 운전하는 베이셀은 영 걱정스런 눈치다. 차를 세우더니 저만치 걸어간다. 이 정도 눈이면 앞길이 막혔을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 들어갔다가는 인가도 없는 곳에 꼼짝없이 갇힐 판이다. 한참 있다 돌아온 베이셀이 다행히 차가 못갈 정도는 아니라고 전한다. 그럼 잘됐다. 차에서 내린 김에 눈밭에서 좀 놀다가야지. 나는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고 카메라는 웬 떡이냐, 따라다니고. 알고 보니 이 넓은 평원은 밀밭이라고 한다. 고원지대인지라 겨울에는 눈에게 자리를 내주고 봄이나 돼야 밀의 영역을 되찾는 것이다.

 

눈길을 헤치고. 저만치 쉬판 산이 보인다.

길을 내려오다가 고즈넉하게 숨어 있는 마을 하나를 만났다. 왼쪽에는 고대 우라루트 왕국이 자리를 잡았다는 우라루트 성이 남루를 외피로 두른 채 남아 있다. 반 성채와 같은 시기에 축조됐다고 하니 3,0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그리고 저만치에는 거대한 산이 하나 서 있다. 쉬판 산이라는 이름의 4,000m급 고산이다. 산이 호수에 들어앉아 있는 듯 산과 호수의 경계가 흐릿하게 지워졌다. 여기서부터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짐작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모호하고 신비로워 보일뿐이다. 신이 사는 산의 모습이 저러할까? 마을이 하도 정감 있게 생겨서 이름을 물어보니 아야느스쾨이라고 한다. 왜 밑도 끝도 없이 이 작은 마을에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 눈이 쌓인 마을 어귀를 기웃기웃 돌아다닌다. 이 마을은 모든 것이 작다. 아주 작은 학교, 작은 과수원들, 작은 모스크…. 개 짖는 소리와 양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시도 때도 모르는 닭울음소리도 간간히 끼어든다. 거기에 아이들 노는 소리. 아이들은 눈 위에서 간이 썰매를 탄다. 우리로 보면 비료부대 썰매를 타는 것이다. 모든 게 ‘너무’ 평화롭다. 이렇게 당혹스러울 정도로 평화로워도 되는 거야? 안온한 기운이 올가미가 되고 덫이 되어 내 발목을 꽁꽁 묶는다. 나는 그동안 너무 삭막하게 살아왔구나.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다.

 

내 발길을 잡았던 아야느스쾨이. 쾨이는 마을이란 뜻이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명태 덕장 꼴이 되는 바람에 반 호수를 둘러싼 길은 엉망이다. 차가 하도 덜컹거려서 엉덩이가 아플 지경이다. 그래도 베이셀은 능숙하게 앞으로 나간다. 왼쪽에는 반 호수가 차를 따라 달리고, 오른쪽에는 과수원과 작은 집들이 푸른 물빛에 그림자를 담그고 있다. 호수가 곁으로 바짝 다가서는 순간, 바다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누가 이 넓은 물을 호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은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맑고 잔잔하다. 반 호수는 거대한 호수지만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는 바람에 파도가 거의 일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저나 대체 이런 걸 무슨 색이라고 하지? 파랑? 녹색? 아니면 비취? 사파이어? 아! 부질없다. 구별하고자 하는 마음은, 세상의 모든 색을 자신들이 만든 분류 안에 포함시키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일 뿐. 반 호수의 물은 일곱 가지 색깔을 띤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한 단어로 표현하려는 오만이라니. 그냥 호수의 색깔일 뿐이다. 반 호수의 색깔… 호숫가에는 새알처럼 생긴 돌들이 한없이 깔려 있다. 돌들도 색깔이 제각각이다.

 

반 호수에 깔린 자갈들.

이쯤에서 반 호수에 대해 소개를 하고 가는 게 예의겠지? 이 호수는 해발 1,646m의 고원에 위치하고 는 터키 최대의 호수다. 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 고도가 설악산 대청봉(1708m)에 근접하는 셈이다. 호수를 둘러싼 호안선이 약 500km나 되는데 쉽게 풀어보면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가 다섯 시간은 걸려야 호수 한 바퀴를 구경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호수 주변의 도로사정을 감안한다면 하루 종일 달려도 끝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평균 깊이는 171m, 가장 깊은 곳은 451m나 된다고 한다. 이 호수는 세계 최대의 염호(鹽湖)로 소금의 농도가 매우 높다. 물이 들어오는 하천은 있는데 물이 나가는 하천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즉, 대부분의 물이 증발된다는 얘기다. 호수 밑바닥에서는 물이 계속 솟아오르기 때문에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다. 곳에 따라 염도가 달라 상류 쪽 강 부근에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반 호수와 쉬판 산의 아련한 풍경.

저만치에 배들이 정박해 있다. 언뜻 봐도 어선들이다. 어선 중에서도 통통배를 벗어난 중급 어선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정말 바다의 풍경을 그대로 닮았다.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마침 고기잡이를 마치고 온 어부들로 늦은 오후의 호숫가가 시끌벅적하다. 아니, 아무리 봐도 호숫가라는 생각은 안 들고 우리나라 서해안 어느 항구쯤에 도착한 기분이다. 오늘 잡은 물고기들을 배에서 내리는데 어황은 썩 좋지 않은 것 같다. 물고기를 담은 빨갛고 파란 플라스틱 상자의 수가 몇 개 안된다. 반 호수에서 잡히는 고기는 단 한가지다. 바로 ‘임지케파르’라고 부르는 청어처럼 생긴(크기는 좀 작다) 물고기다. 보통은 물고기라는 뜻의 ’발륵‘이라고 부른다. 이 호수의 어종이 단 한가지이기 때문에 그저 ’물고기‘인 것이다. 소금호수에서 아무 물고기나 살 수 없는 건 자명한 일. 결국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다른 말로 독한 녀석들만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도 바다가 아닌 바다에서 물고기가 산다는 게 신기하다. 이 물고기는 주로 바비큐용으로 쓰인다.

 

반 호수 유일한 물고기인 임지케파르.

어부들은 눈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2011년 지진으로 16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부터 해준다. 진앙지가 이 호수였던 것이다. 아픈 기억은 뼈에 깊이 각인 되는 법. 이들에게는 아직까지도 그 끔찍했던 재앙이 가장 큰 화제일 수밖에 없다. 눈을 들어 어림해본다. 땅이 통째로 흔들렸을 그때 이 잔잔한 호수는 얼마나 크게 뒤채였을까. 어부 하나가 저쪽 산허리까지 물이 치고 올라갔다고, 할머니에게 악몽을 하소연하는 손자의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어부들의 이야기는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현실로 이어진다. 우리네 바다처럼 이 호수도 어자원이 말라가고 있는 걸까. 애써 잡은 물고기도 값이 싸서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이들이 받는 값은 1kg에 1.5리라다. 우리 돈으로 치면 미처 1,000원도 안 되는 액수다. 그걸로 살 수 있는 게 빵 두 개에 불과하다고 늙은 어부는 주름을 더욱 좁힌다. 그 얼굴엔 삶의 기대나 희열 대신 피곤이 그득하다. 게다가 기름 값이 갈수록 오른다고 또 한숨이다. 터키의 기름 값은 우리보다 비싼 편이다. 배에 쓰는 디젤연료가 1리터에 4리라인데 한번 나가면 30~40리터 씩 쓴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밑지는 장사인데 이들은 또 날마다 호수로 나간다. 어로행위는 겨울에 주로 하는데 4월15이면 끝난다. 이후에는 산란기이기 때문에 금어기간으로 정했다. 호수로 나가지 않을 때는 양을 키운다.

 

멀리 나갔던 어선들이 속속 들어온다.

외국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에게 하소연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부들은 뭔가 자꾸 털어놓고 싶은 눈치다. 이들은 정부에서 아무 지원도 안 해 주는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쿠르드족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흑해 쪽 어부들은 기름 수급 등에서 편의를 봐주는데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바로 그 증거란다. 더구나 외부에서 오는 후원조차 중간에 가로채서 폭탄 만드는데 쓴다고 이구동성이다.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들의 낡은 배만큼 서글픈 현실이다. 어쩌면 이들의 눈물로 호수가 자꾸 짜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고기가 담긴 상자를 나르는 어부들.

배는 계속 들어온다. 이번에 들어온 배에서 나온 상자는 여섯 개. 아까 다른 배에서 나온 세 상자보다는 낫다. 늦게 들어오는 배는 물고기를 찾아 좀 더 멀리 나갔다 오는 것이다. 저만치 마지막 배가 들어온다. 저 배는 만선의 꿈을 이뤘을까? 굳이 부두에서 서성거리다가 상자수를 헤아려 본다. 하나, 둘, 셋. 기껏 세 상자라니…. 결국 또 헛수고를 한 셈이다. 9척의 배가 모두 돌아온 게 3시50분. 부두는 벌써 파장 분위기다, 중간상에게 넘길 건 넘기고 오늘 저녁 먹을 것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하나둘 떠나는 어부들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꼭 석양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니 호숫가는 적요만 맴돈다. 배 위를 맴돌던 갈매기들도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하나 둘 자취를 감춘다. 호수는 여전히 유리처럼 매끄럽다.

 

배들이 정박한 부두.

다섯 시가 가까워지면서 호수 저쪽에서부터 검은 카펫을 깔듯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짐승 하나가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것 같다. 서둘러 출발했지만 차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어둠이 사위를 점령한 뒤다. 헌데, 이게 웬일? 총을 멘 몇 명의 청년들이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다. 가슴이 덜컥한다. 시골길에서, 더구나 밤에 총을 멘 젊은이들이라니. 여기는 강성 쿠르드족이 사는 지역 아닌가. 그런 분위기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닌 듯 차안의 공기가 일순 무겁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베이셀은 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그대로 차를 몰아 지나친다. 무엇을 하는 젊은이들이냐고 물어봤더니 사냥꾼들이란다. 휴우~

 

설산 위로 갈매기가 나르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부군과 반정부군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렇게 시골에서 총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코루즈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단다. 쿠르드족이지만 정부에 고용돼서 동족 게릴라를 잡는 사람들이다. 옛날 ‘일제 앞잡이’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쿠르드족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월급을 받아서 쿠르드족의 투쟁자금으로 넘기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 참…. 쿠르드족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씨족단위의 개념이 강해서 단합이 쉽지 않다. 어쩌면 그런 특성이 아직도 나라를 세우지 못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쿠르드족이 잘하는 건 싸움과 목축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을까. 실제로 쿠르드족은 싸움에 있어서 발군이다. 6.25때도 터키군의 쿠르드족이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쿠르드족의 용병 역사는 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 부시가 치른 걸프전이나 아들 부시가 치른 이라크전(전쟁이라기보다 일방적 공격이었지만)에도 쿠르드족이 용병으로 고용됐다.

 

호수에 어둠이 깃든다.

차가  덜컹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장 선생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다. 이런 시골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건 아주 간단하다고 한다. 콜타르를 대충 뿌리고 나서 그 위에 콩자갈(아주 작은 돌)을 쓰윽 뿌리면 그걸로 끝이란다. 우리처럼 롤러로 밀고 다지고 하는 과정은 그 위를 다니는 차들이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아스팔트를 깐 길을 지나간 차들은 바닥이 콜타르 범벅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공사를 대충 하니 겨우내 도로는 누더기가 되고 여름에는 다시 ‘콩자갈 공사’를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며 웃고 떠드는 동안 차는 반 시내에 도착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이 어두운 색깔의 옷에 둘러싸여 유령처럼 배회하는 도시 반. 반의 밤이 깊어간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