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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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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PC방.

마을의 공동묘지.

흙집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니 현대식에 가까운 집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의 건물들은 흙이 아니라 시멘트로 치장하고 있다. 고대의 어느 공간에서 느닷없이 현대로 이동한 한 기분이다. 흙과 시멘트 사이가 천년쯤 되는 것 같은데 고작 5분 거리밖에 안되다니. 아까 흙집에서 만났던,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도 이 동네에서 사는 게 아닌가 싶다. 2층 슬래브 집 마당에는 오토바이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서 있고 1층 처마에는 ‘INTERNET CAFE’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쉽게 말해 PC방이란 뜻이겠지. 3,000년 전의 흙집과 PC방의 차이는 이렇게 지척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단어다. 게다가 평소에는 돌보지 않는 듯 풀들이 제각기 하늘까지 올라가보겠다고 아우성이다. 이곳도 추석 때만 벌초를 하러가나? 길가에서 당나귀 수레를 타고 가는 아이를 만난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레에서 내려 당나귀를 세우고 포즈를 취해 준다. 어라? 이 녀석 제법 프로 냄새가 나네? 헌데 포즈만 프로가 아니다. 사진을 다 찍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돌아서려고 했더니 옷깃을 잡으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외친 한마디!

“Give me money!!

그렇구나. 목적은 모델료였구나. 돈이 상투 끝에 올라앉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따지고 보면 마차를 세우고 포즈를 세워주는 것이야말로 대가를 받을만한 노역이지. 여행을 다니다 보면 늘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돈을 주지 말라는 머리를 따라야 하나, 측은지심을 강조하는 가슴을 따라야 하나.

 

 

당나귀 마차를 모는 소년.

마을 끝머리쯤에 야곱의 샘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별러서 온 곳이다. 일정에는 없었는데 내가 고집해서 끼워넣었다. 언제 다시 하란에 올 거라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간단 말인가. 하지만 샘 앞에 서자마자 한숨부터 나온다. 사방을 철제 담으로 둘러쳐놓고 문은 꽁꽁 잠가놓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전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 쓴 글에 관리는 안 하고 있는지 벌판 한 가운데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관리를 한다는 핑계로 아예 사람의 접근을 막아버렸다. 관리인이라도 있으면 문을 좀 열어달라고 졸라보겠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비루먹은 강아지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이걸 어쩌나. 저만치 안쪽으로 샘 같은 게 보이는데 너무 멀어서 사진조차 찍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기에는 너무 섭섭하다. 하릴없이 담을 따라 걷다보니 제법 낮은 곳이 보인다. 게다가 이건 뭐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발판 같은 게 놓여있다. 이런 땐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담으로 기어오른다. 하나, , ! 뛰어내리는데 뭔가 느낌이 안 좋다. 발이 삐끗한 모양이다. 난 아직도 내가 나이는 30대쯤, 몸무게는 60kg쯤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순간적으로 대퇴부까지 자극하는 통증에 멈칫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카메라를 바투 쥐고 샘을 향해서 달린다.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총탄 속을 누비는 병사의 각오가 이러했을까. 샘에는 4각의 쇠로 된 상자를 덮어놓았다. 이 동네는 쇠로 시작해서 쇠로 끝나는구나. 전에 우리 시골에 있던 샘과 비슷한 것 같은데, 상자를 덮어놓는 바람에 물이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마을엔 포장을 친 간이시장도 있다.

 

 

그래도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샘을 들여다보다 말고 셔터를 누르려는 참에 어디선가 새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말로 치면 어이, 어이~” 정도 되는 것 같다. 내게 소리치는 게 틀림없다. ‘거기 들어간 놈 잡히면 죽는다는 뜻이겠지? 후다닥 셔터를 몇 번 누르고 왔던 길을 향해서 다시 내달린다. 삐끗했던 발목은 여전히 아프지만 살아야겠다는 일념은 통증마저 유예시킨다.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지. 순간적으로 다시 담을 넘는다. 이게 몇 년 만의 담치기냐. 마지막 담치기를 할 무렵이 열일곱이던가? 열여덟이던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말 10대로 돌아간 듯 내 동작은 번개처럼 빠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절룩절룩 걸어가는 내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 한 가닥이 걸린다.

그래도 난 찍었어.’

그깟 샘 하나가 무엇이길래 목숨까지 거느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내겐 그만큼 중요하다. 어디 다녀왔다고 자랑이나 하려는 게 아니라, 옛사람들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먼 길을 온 것이다. 하란은 성서의 무대가 되는 땅이다. 그 무대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니 야곱의 샘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이다. 노총각 이삭이 리브가를 색시로 맞아 알콩달콩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이 집안 손이 귀한 건 내림인 모양이다. 아브라함도 100세나 돼서 이삭을 낳았으니. 결혼 후 30년이 지날 무렵 드디어 리브가에게 태기가 있었다.

 

 

야곱의 샘 안내판.

태어난 아이들은 쌍둥이였다. 이란성 쌍둥이였던 듯 형제는 완전 딴판이었다. 형은 온몸이 붉은 털로 뒤덮여 있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지었고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야곱이라고 지었다.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에서는 씩씩하고 거칠어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신 깊은 생각이나 자제력은 부족한 편이었다. 동생 야곱은 그와 반대여서 성격이 차분하고 주로 천막에서 지내는 것을 즐겼다. 그렇다고 야심까지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것부터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형제의 순서가 바꾸고 싶다고 바꿔지는 건 아닐 터. 여느 사람 같으면 그러려니 했으련만 야곱은 안 되면 되게 하라무대뽀 정신을 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하다가 뱃가죽이 등에 붙을 무렵 돌아왔다. 마침 그때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었다. 에서에게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만큼이나 반가울 수밖에. 죽 솥에 머리라도 박을 듯 달라 들면서 동생에게 사정을 했다.

사랑하는 동생 야곱아, 죽 한 그릇만 줘라

, 나 먹으려고 쑤는 건데. 이 죽 주면 내가 부탁하는 거 하나 들어줄래?”

부탁? 뭔데?”

장자권(長子權)을 내게 줘.”

장자권? 그거 복권 이름이냐? 뭔지는 모르지만 가져. 얼른 죽 한 그릇 주고

비록 장난 비슷한 일이었지만 야곱은 죽 한 그릇에 형에게서 장자권을 양도 받았다. 에서야 가볍게 생각하고 말았겠지.

 

 

담도 높고 문도 잠겨 있다.

결정적인 사건은 형제가 더욱 성장한 뒤에 일어났다. 야곱의 샘에 대해 알려면 이 정도 공부는 해야 하니 조금 지루해도 어쩔 수 없다. 하란까지 와서 야곱 이야기 한 자락 안 듣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법. 이삭도 어느 덧 늙어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어두워질 때가 되었다. 내가 얼마나 더 살랴 싶어서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상속을 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그 절차가 바로 축복을 내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에서를 부른다.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세기 272~4)

 

이삭의 말대로 진행됐으면 나도 예까지 올 일이 없었으련만, 아비와 아들의 대화를 리브가가 듣고 말았다. 아참, 그 얘기를 안 하고 지나갔구나.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부부 간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각기 달라 이삭은 큰 아들 에서라면 죽고 못 살았고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만 끼고 돌았다. 이복형제도 아닌데, 사건을 만들어야 이야기가 나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자간의 대화를 엿들은 리브가는 야곱으로 장자를 삼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음모’, 이 단어 참 쓸 만하다. 에서가 사냥을 떠난 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새끼 염소 두 마리를 잡아오게 한다. 다음에 그 고기로 이삭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고 에서의 옷을 입힌 다음, 털이 많은 에서처럼 염소새끼 가죽으로 손과 목을 둘러준다.

 

안쪽 돌 기둥 사이에 있는 게 야곱의 샘이다.

야곱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어머니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니 못 이기는 체 하고 아비 이삭에게 들어간다. 눈이 먼 이삭은 결국 리브가의 꾀에 속아 음식을 맛있게 먹은 다음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린다. 잠시 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지만 모든 건 끝난 뒤. 아비에게 울고 불고 난리를 쳐본다고 축복이라는 게 어디 스티커처럼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일을 꾸민 어미가 미웠지만 그 또한 어쩌겠는가. 죽여 버리겠다고 야곱을 찾았지만 이미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은 뒤였다.

야곱, 이 웬수 같은 놈. 아버지만 죽고 나면 그날부로 묻어버릴껴.”

야곱을 향한 에서의 화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잘못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리브가는 야곱을 친정으로 보내기로 한다. 여기서부터 야곱의 샘이야기가 시작된다. 리브가의 친정이 어디던가. 아브라함이 늙은 종을 시켜 리브가를 데려온 곳이 어디던가. 그러고 보니 내내 괴롭히던 궁금증이 쉽게 풀려버리고 만다. 아브라함이 내 고향에 가서 며느릿감을 데려오라던 곳은 하란이었음이 확인된다. 왜냐고? 리브가가 아들을 보낸 친정이 바로 하란이었으니까. 그리고 야곱이 라헬과 인연을 맺은 야곱의 샘이 지금 내 눈앞 하란에 있으니까. 결과가 맞았으니 나머지 궁금증은 그냥 묻어버리자. 외삼촌을 찾아가기 위해 집을 떠난 야곱이나 따라가 보자. 야곱은 걷고 걸어 어느 샘가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목동들이 양떼를 몰고 와서 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는 아무 때나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게 아니라 저녁 무렵이 돼서 목동들이 모두 모여야 샘을 덮은 큰 돌을 열고 물을 먹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담을 넘어 들어가보니 이렇게 덮어놓았다.

여기서 야곱과 그의 사촌 누이 라헬의 극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역시 우물가는 만남의 장이다. 샘에서 쉬고 있는 야곱 앞에 아리따운 처녀 하나가 양떼를 몰고 나타난다. 바로 라헬이다. 무엇에 끌렸는지 야곱은 샘을 덮은 돌을 열고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그러면서 족보 확인이 시작된다.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창세기 2911~12)

 

처음부터 입을 맞췄다는 게 좀 수상하긴 하다. 그리고 울긴 또 왜 울어. 그날부터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기거한다. 이쯤에서 야곱 이야기를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리되면 장가를 간 재미있는 사연을 전할 수 없으니 조금만 더하자. 야곱의 외삼촌이자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은 실속주의자였다. 약간의 사기성도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라반은 야곱을 불러 말한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지만 공짜로 일을 시킬 수야 있겠냐? 무엇으로 보수를 주면 좋을까?” 딱 보니 약점을 잡고 머슴으로 부려먹으려는 것이다. 야곱은 그때 이미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제가 어찌 외삼촌께 보수를 바라겠습니까? 약소하지만 라헬을 제게 주면 7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겠습니다.”

이런 이런, 너 그러다 크게 당한다. 야곱은 라헬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7년 동안 뼈 빠지게 일했다. 드디어 결혼하던 날, 야곱은 얼마나 좋았던지 완전 술독에 빠져 버리고 만다. 아니면 외삼촌 라반이 동네 건달들 시켜서 일부러 먹였는지도 모르지. 첫날밤을 치루고 새벽에 일어난 야곱은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곁, 색시의 자리에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닌 그녀의 언니 레아가 수줍게 누워 있었다. 뭐야, 이거. 이미 일은 치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얼랄라? 이것이 무슨 시추에이션이여? 왜 네가 내 옆에 누워 있어? 라헬은 어디 가고?”

나도 몰라요. 아버지가 들어가래서 들어왔단 말이에요.”

배신감에 미칠 것 같았던 야곱이 외삼촌인 라반에게로 달려가 따졌다. 라반의 대답이 걸작이다.

어이, 생질. 열 받지 말어. 이 동네가 말이여. 얼마나 고루한지 작은 딸을 큰 딸보다 먼저 시집보내면 난리도 아니여.”

이런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있나. 그러면서 라반은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니 참고 한 일주일 버텨봐. 내가 작은 딸도 생질에게 줌세. 대신 7년 머슴살이 추가는 옵션이여. 오케이?”

어쩌겠는가. 야곱은 또 7년간의 머슴살이를 한다. 그런 인고의 세월 덕분이었는지 야곱은 두 아내를 얻은 데다 그녀들의 몸종까지 첩으로 거느리게 된다. 몸종이 무슨 별책 부록이냐? 마누라로 삼게. 뭐 그 당시의 풍습이 그랬다는 것이겠지. 자식복도 많아서 아들 12, 딸 하나를 얻는다. 그의 아들 12명은 이스라엘 민족 12지파의 시조가 된다. 그건 훗날 얘기고. 아무튼 잔머리야곱이 더 잔머리외삼촌에게 속아 14년이나 머슴을 살면서 사랑을 완성한 얘기는 가볍게 넘길 일만은 아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희생과 노력,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시대에 한번쯤 되새겨볼 만 하지 않은가.

 

나오는 길에 잠시 둘러본 하란성의 하나 남은 성문.

성서의 땅 하란, 그곳에 있는 야곱의 샘에서 청량한 물을 한 잔 마시며 여행의 행복을 누려보겠다는 꿈은 쇠창살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꿈꾸던 하란에 왔고 성서의 인물들을 하나씩 만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라헬. 지금 그들이 저만치서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고 앞으로 늘 나 안에서 함께 할 것이다. 어느 땐 용기를 주고 어느 땐 질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젠 정말 하란을 떠나야 할 시간.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흙먼지 날리는 이 불모의 땅에 사랑담은 인사를 보낸다. 굿바이! 하란.

posted by sagang
2012. 11. 26. 08:4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첫 주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계절적 차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김기덕이 섰던 자리

 

새벽, 누군가 서성거리는 것 같아 후다닥 창문을 엽니다. 하지만 창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새 계절을 마중하느라 분주한 나무들과 미명 속을 몰려다니는 안개가 전부입니다. 안개는 대보름 밤의 들개 떼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들이 문을 두드려 살얼음처럼 얇은 잠을 들춰낸 모양입니다. 옅은 어둠과 안개가 얽혀있는 풍경은 백룡과 흑룡이 뒤엉켜 싸웠다는 신화적 무게를 은닉하고 있습니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섭니다. 낯선 곳에서 마주치는 안개는 가끔 사람을 홀리기도 합니다.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겁니다. 밤새 추위에 떤 낡은 차는 두어 번 쿨럭거리다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립니다. 오늘은 새벽안개를 포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천천히 달리다 보니 눈앞의 풍경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겹쳐집니다. 남한강이었을 겁니다. 지금보다 조금 늦은 초겨울이었던 것 같고요. 세상은 물론, 잠과의 불화가 극에 달할 만큼 심신이 피폐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날도 밤새 뒤척거리다가 끝내 몸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헌데,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입을 딱 벌리고 말았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이란. 강가는 안개 군단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습니다. 장수들은 호령을 하고 군사들은 기치창검 정연하게 진군 중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장한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넋을 놓았습니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린 저는 병사들을 헤치고 더듬거리며 강가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엔 안개군단의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강은 훈련된 보충병들을 쉬지 않고 배출했습니다. 아예 세상을 점령할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안개는 제가 머물던 숙소도 강가의 키 큰 미루나무도 삼켜 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나를 만난 건 그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이 사라진 공간,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안개가 데려다준 본질의 였습니다. 그 순간, 세상의 시간은 온전히 저 하나만을 위해 열려 있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내, 즉 객관화된 를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작은 난관 앞에서도 쉽게 절망하는 사내, 자주 남을 탓하는 사내, 세상은커녕 사람 하나 안아주지 못하는 사내. 하지만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치이고 다치고 아파도 늘 웃어야 하는 사내.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오래 전 울음을 잃어버렸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절실한 건 화해였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그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도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가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길고 긴 미로에서 길을 찾은 그 새벽은 안개의 선물이었습니다.

 

이 시간 안개 속을 달리는 건 저 혼자뿐입니다. 당신도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는 단어를 실감해본 적 있나요? 지금 이 길이 딱 그렇습니다. 얼마나 돌고 도는지, 얼마나 오르내리는지, 핸들을 잡은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갑니다. 지금 가는 길은 비교적 얌전한 편인데도 그렇습니다. 청송이란 곳이 그렇습니다. 청송을 말 그대로 풀면 푸른() ()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지명중에 가장 멋진 이름입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동쪽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세계란 뜻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선계(仙界)를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땅인 것은 확실합니다. 숲은 울창하고 골은 깊으며 물은 달고 맑습니다. 오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바람 한 자락까지 청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길을 달려 저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주산지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주차를 한 뒤 언덕길을 한참 오르고 나서야 작은 호수가 보입니다.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합니다. 해 뜨기 전에 사진 몇 장을 찍어두려는 요량에서입니다. 이곳에 당신이 함께 왔다면 약간 실망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금 미적거리다 고개를 끄떡거리겠지요. 호수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작고, 저수지라고 부르기에는 인정머리 없어 보이고, 못이라고 하기에는 깔본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 바로 이 주산지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꽁지 빠진 장닭마냥 추레한 얼굴이군요. 물이 많이 빠진데다 그 씩씩하던 왕버들이 지쳐 보이기 때문일까요? 앞서 걷던 여자가 여지없이 의문을 드러냅니다.

애개개! 여기가 거기 맞아? 영화하고는 영 다르잖아. 이렇게 조그맣지 않았는데?”

함께 가던 남자가 모든 걸 모든 것 이해한다는 듯 대답합니다.

그게 바로 영화 만드는 기술이야.”

그들이 말하는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입니다. 영화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오늘의 물안개는 기대만큼 짙지 않습니다. 약간 실망스럽지만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미농지처럼 엷은 햇살이 먼 숲 사이로 비껴들면서 안개가 수면 위를 유영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 실망스러울지라도 제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1721년에 축조된 길이 200m, 너비 100m의 작은 호수,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는 이곳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했던 왕버들 근처에 삼각대를 세웁니다. 지금은 삐걱거리는 문도, 물 위에 뜬 절도, 떠나거나 돌아올 사람도 없습니다. 한 때 스물 세 그루나 됐다는 왕버들은 한살이를 마치고 고목이 됐거나 수세(樹勢)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아직 저만치에서 주춤거리고 있어서 주산지의 자랑거리인 단풍은 보기 어렵습니다. 1~2주 더 지나야 물안개도 살을 붙이고 나뭇잎도 물이 들 것 같습니다. ‘감독 김기덕의 눈으로 작은 호수를 바라보며 일면식도 없는 그를 생각합니다. 그와 나의 유일한 접점이 있다면 영화겠지요. 그는 만들고나는 보는사람이지만. 저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게다가 예술가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이라면 손방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을 정도로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도 김기덕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의 심리를 궁금해 합니다. 그를 말할 때 곧잘 콤플렉스라는 단어가 동반되고는 합니다. 그러면서 그 언저리에 초등학교 학력(1년쯤 다녔다는 이름 없는 신학교까지도 생략하고 싶어 합니다.)이나 성장과정을 배치합니다. 저는 그의 콤플렉스가 과연 그런 환경이 만들어낸 건지 궁금합니다. 아니, 정말 그가 콤플렉스 덩어리인지 의심합니다.

 

<파란 대문> 등의 작업을 함께했던 촬영감독 서정민은 김기덕을 일러 신인 감독이었지만 두려움이 없고 대담했다.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밀고 나가는 뚝심이 대단하다.”고 했다지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쩌면 김기덕에게 콤플렉스는 존재했되 콤플렉스 따위에 시달린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궤적을 살짝 엿보며 혼자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파리로 건너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닭을 먹으며 버텼다는 강단, 듣도 보도 못한 화가가 되어 유랑 전시까지 했다는 두꺼운 낯, 귀국 후 느닷없이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나섰다가 결국 한 가락 하는 영화감독이 되는 그를, 콤플렉스 덩어리로 규정짓기에는 조금 석연찮습니다. 하긴 그런 뚝심 역시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저돌성일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콤플렉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요. 콤플렉스가 그의 독특한 세계를 일궜다면, 그건 약점이 아니라 삶을 키우는 자양분이었을 테니까요.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작용한 콤플렉스는 더 이상 콤플렉스라고 부르면 안되겠지요. 사실 제가 결론 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김기덕이 업보라는 돌을 지고 산을 기어올랐듯, 콤플렉스의 무게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오래 천착해보는 것뿐입니다. '콤플렉스야말로 그대를 키우는 에너지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놔두는 것도 지혜겠지요. 생각을 접은 뒤 부지런히 셔터를 누릅니다. 가을을 맞으러 새벽을 달려온 사람들이 분주히 오갑니다. 저는 당신에게 이곳 풍경을 전해줄 생각에 가슴이 뜁니다.

 

 

소로 돌아오는 길, 어느 과수원 길거리 판매대 옆에 차를 세웁니다. 사과 향에 취해 실컷 행복을 누려놓고 맨손으로 가기에는 염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의 첫 손님인 모양입니다. 아주머니가 사과 하나를 앞치마에 쓱쓱 문지르더니 불쑥 내밉니다. 보통은 칼로 깎아서 한 조각 권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건네주니 무람없고 좋습니다. 망설임 없이 덥석 베어 뭅니다. 와삭!! 하는 소리가 대기를 관통하는 순간, 날카로운 희열이 온몸을 감쌉니다. 나뭇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豁然大悟)했다는 고승의 경지는 분명 아닌데, 느닷없이 찾아온 이 환희는 무엇일까요. 제 안의 근심과 오욕이 사과를 베어 무는 소리에 놀라 몽땅 도망친 모양입니다. 생각을 탈탈 털어내고 사과에 탐닉합니다. 김기덕이 여전히 파열을 꿈꿔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영화를 100개쯤 만들고, 10년 내리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독식한다고 제게 뭐 그리 대단한 의미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만은 와삭, 하는 경쾌음과 입안에 고이는 달콤한 맛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걸요.

 

그러고 보니 과수원집 아주머니는 제 외숙모를 닮았습니다. 잘 마른 삭정이처럼 기름기 없는 얼굴에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그분을 봅니다. 그런 끌림이 있어 이곳에 차를 세우게 된 걸까요. 외삼촌댁에는 사과나무 몇 그루가 있었습니다. 외숙모는 제가 가면 갈무리해뒀던 사과를 앞치마에 정성스럽게 닦아 내밀었습니다. 그해에 딴 사과 중에 가장 실한 것이겠지요. 외숙모의 앞치마를 지나온 사과는 마당가의 샐비어꽃처럼 붉었고 갓 벌어진 석류알처럼 반짝거렸습니다. 전문 과수원이 아닌지라 작고 볼품없었지만 제 기억 속의 어떤 사과보다 예쁘고 맛있었습니다. 외숙모는 사과를 능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참동안 사과와 능금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면 외숙모가 준 사과는 능금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깨어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날들 위를 걸어왔지만, 그 흔한 사랑이 나만 외면한다고 원망하기도 했지만, 사랑은 늘 제 주변에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자주 잊었습니다.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부드럽게 안아주던 햇살 한 자락도 누군가의 사랑이라는 것을. 오래 열어보지 않았던 기억의 주머니, 그 안쪽 아디엔가 헌책처럼 던져두었던 사랑들을 꺼내 사과 무더기 옆에 차곡차곡 쌓아놓습니다. 이렇게 많은 돌봄 속에 살았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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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하란 평원.

하란의 흙집들.

울루자미에서 돌아서 나오는 길.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아득한 옛날사람들의 흔적이 있을 리 없지만 괜스레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 길을 아브라함도 걸었을까. 당연히 걸었을 것이다. 이곳 하란에서 꽤 오래 머물렀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행적을 잠깐 추적해보고 가자.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인 셈의 10대 후손이다. 본명은 ‘높임을 받는다’는 뜻의 아브람이었고, ‘아브라함’은 야훼와 계약을 맺은 뒤 ‘열국(列國)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얻은 새 이름이다.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최초로 살았던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긴 유랑에 나선 이야기를 하려면 구약성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데라가 아들 아브함(아브라함이 되기 전 이름)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사라가 되기 전 이름)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세기 11장 31~32절)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다. 아브라함 일가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일가를 이끌고 이곳 하란 땅에 도착한 데라는 대체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은 ‘이미 조상들의 죄악 속에서 태어나, 죄악 속에서 먹고 마시면서 자라고, 죄짓는 일이 온 몸에 배어 있었으므로 중간 정착지인 하란에서 그 죄악된 행실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체류하였다’고 악담을 퍼붓지만, 종교에 까막눈인 내가 대체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흙집 대문.

흙집 외부에 놓여있는 앙증맞은 의자들.아무튼 뭉그적거리는 늙은 아비를 두고 내처 떠날 수도 없고 아브라함도 나름 고민이 컸을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 곁에 머물던 아브라함은 75세 되던 해 두 번째 야훼의 부름을 받는다. 역시 정착해서 살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장 1~2절)

 

아브라함의 하란에서의 삶은 그렇게 끝난다. 그렇다고 모든 인연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 뒤로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하란과의 다양한 인연의 끈을 이어간다. 계속 아브라함 이야기만 하면, 은근히 성서에 기대여 여행기 공짜로 쓰려고 한단 말이 나올 테니, 이쯤에서 이야기를 돌릴 일이다.

 

흙집 안뜰.

흙집 천장. 끝에 구멍이 뚫려있다.

흙집 주인.

이젠 흙집을 구경해보기로 하자. 이 고깔형 집들이야말로 하란을 하란답게 하는 결정적 요소다. BC 3000년쯤부터 짓기 시작했다고 짐작할 뿐 정확한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고대인들이 동굴살이를 마치면서 처음으로 지은 주택의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목재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이 지역에서는 흙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굳이 다른 집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흙집은 흙과 밀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을 햇볕에 말려서 쌓는 방식으로 짓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땅에서 짓던 흙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도 수십 년 전까지는 황토에 볏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로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벽돌을 30~40단까지 쌓아올리는데 고깔 부분은 높이가 5m나 된다. 맨 위는 뚫려 있어서 빛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집안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풍구 역할을 한다. 지붕을 그렇게 높이 세우는 것은 이 지역의 뜨거운 날씨 때문일 것이다. 굴뚝처럼 솟아오른 높은 지붕이 실내의 열기를 빨아들여 배출하기 때문에 5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이겠지. 지붕 끝에는 납작한 돌을 서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어놓았다.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역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집 표면이 자꾸 깎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수리해야 한다고 한다. 직접 들어가 본 집은 주거용이라기보다는 관광객들에게 장사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정원의 작은 나무의자들이 눈길을 끈다. 이 지역에서 자주 보는 의자인데 들고 오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흙집 아들. 옷도 빌려주고 모델이 돼준다.

 

집안은 작은 민속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다양하게 꾸며 놨다. 어느 방을 들어가 보니 아랍인들의 전통의상이 걸려 있다. 하란의 주민은 대부분 투르크족이 아니라 아랍인들이다. 18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했는데, 아직도 사막 부족인 베두인 족의 복장을 하고 그 풍습을 지키며 산다고 한다. 젊고 잘 생긴 주인집 아들이 관광객들에게 아랍풍의 옷을 빌려 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물론 옷은 돈을 받고 빌려준다. 뭐, 솔직하게 말하면 미끼인 셈이다. 어쩌면 아들이 아니라 일당을 주고 모델을 고용한 건지도 모른다.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거봐. 장삿속 확실하잖아. 나 질투하는 거 맞지? 응접실로 짐작되는 방에는 금방 손님을 맞기라도 할 듯 카펫과 방석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관광객들도 그곳에서 음료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집 처마에 신발을 매달아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왜 거기 걸어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거란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나자르본주의 대용품인 셈이다. 이곳에도 일하는 아이들이 있다. 형제로 보이는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길래 물어봤더니 큰 아이는 예비 중학생이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한다. 지도나 목걸이 등의 장신구를 판다. 이 동네에 사는데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란다. 얼굴에 구차함 같은 기색은 전혀 없다. 한 끼 밥 때문에 내몰린 아이들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하다. 아이들과 한참 어울려 논다. 큰 아이는 카메라를 들이대면 활짝 웃어주는데 작은 녀석은 영 수줍어해서 얼굴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다. 흙집에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은 시멘트 집에서 산다고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내가 보기엔 흙집이 훨씬 좋아 보이는데.

흙집 내부. 온갖 장신구들이 걸려있다.

응접실.

 

혼자 터벅터벅 동네 구경에 나선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고깔처럼 생긴 흙집들이다. 공터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쓰레기장에는 염소들이 종이 두어 장을 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 담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는데 누가 자꾸 부르는 느낌이 든다. 두리번거리다 저만치 담장에 기대어 “알로” “알로” 외치는 처녀와 눈이 마주친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분명 나를 부르는 것이다. 이게 몇 십 년만이냐. 마음은 달려가는데 몸은 제자리다. 처녀가 부르니 은근히 겁이 난다. 혹시 처녀귀신? 설마 대낮에 귀신이 나올리는 없고…. 난 고기가 좀 질겨. 좀 젊은 총각 꼬셔봐. 주민이라고는 그녀와 염소 떼에 묻어서 우우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전부다. 어른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이왕 지붕에 앉았으니 아까 중동무이한 성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하란이 다시 성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얻을 무렵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그의 처 사라가 90세 때 낳은 늦둥이었다. 가임기간이 어떠니 배란이 어떠니 하며 요즘의 상식으로 따지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아브라함은 이 늦둥이 아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이 그 어미와 함께 황야로 내쫓긴 것도 결국은 이삭이란 존재의 등장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파고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테니 궁금한 분은 구약성서 탐독을 권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가보내기로 한다. 이삭도 어언 나이 40이 넘은 ‘노총각’이 됐을 무렵이다. 아브라함은 가장 믿는 늙은 종을 부른다.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세기 24장 3~4절)

 

고깔 모양의 지붕 끝에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납작한 돌을 올려놓았다.

이때는 아브라함도 길고 길었던 유랑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책한지 오래였다. 고생하던 아내 사라는 먼저 세상을 떴고. 어지간하면 가까운데서 며느릿감을 고를 만도 하련만 그는 굳이 옛 고향에 가서 데려오라고 했다. 야훼의 명령으로 가나안 땅에 갔지만 그도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미리 찍어둔 참한 색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달랑 종 하나를 느닷없이 보내서 며느릿감을 데려오라니 배짱 한번 두둑하다고 할 수 있겠다. 까라면 까야지, 종 처지에 미주알고주알 따질 수 있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낙타 열 마리에 신붓감에게 줄 선물을 싣고 터덕터덕 길을 떠난다. 여기서 케케묵은 문제를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늙은 종이 향한 ‘아브라함의 옛 고향’은 어디란 말인가? 당연히 아브라함이 태어난 갈대아 우르가 1차 후보지가 된다. 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재 이라크의 남쪽에 있는 우르다. 헌데 늙은 종이 주인집 색싯감을 구하겠다고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아브라함의 이동로를 따라 되짚어 간다면 종은 늙어 죽어버리고 며느릿감으로 출발한 여자는 시어머니감이 돼서 도착하기 딱 알맞은 거리다. 그럼 어쩌라는 것이냐고? 그래서 나는 ‘하란 고향 설’, 더 나아가 ‘샨르우르파 출생 설’을 다시 들고 나오고 싶은 것이다. 가나안과 하란은 상식적인 거리 안에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두고 온 하란을 고향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학자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아주 생떼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지금 성서를 배경으로 추리물을 쓰고 있는 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궁금한 여행자일 뿐이다.

처마에 걸려 있는 신발.

딴소리 늘어놓다 늙은 종 놓칠라.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가는 늙은 종은 긴 여행 끝에 ‘나홀의 성’에 도착했다. 성서에는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라고만 돼 있다. 이왕 쓰는 거 좀 성의껏 쓸 것이지. 메소보다미아야 메소포타미아를 이른다는 걸 알겠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온 나홀의 성은 대체 또 어디란 말이냐. 괜히 지명 가지고 시비를 거는 바람에 끝까지 골치 아프게 돼버렸다. 나홀, 나홀이라…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면 사람의 이름인데…. 성서를 뒤져보자. 아! 창세기 초반에 나오네. 바로 아브라함의 동생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을 셋을 두었는데 장자가 바로 아브라함, 둘째가 나홀, 셋째가 하란이다. 하란은 아들 롯을 낳고 일찍 죽는다. 이제 이야기가 조금 풀린다. 이 나홀이 어디에서 살았느냐만 밝히면 되니까. 궁금한 건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가 일가족을 이끌고 나올 때 나홀도 동행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걸 확인하려면 저 앞에 언급한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창세기 31절) 눈을 씻고 스무 번을 읽어봐도 어린 롯의 이름은 나오는데 삼촌씩이나 되는 나홀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럼 여기서 지명 찾기를 그만 둬야할까?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당한 짐작도 필요하다. 나는 나홀 역시 하란으로 갔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살다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땅으로 떠날 때 남아서 아비 데라를 모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그나마 늙은 아비를 두고 떠나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나홀의 성’, 즉 나홀이 사는 곳으로 찾아간 것이다. 신경 안 쓰고 성경에 쓰인 대로 지나가면 되련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 문제다. 몇몇 책들은 늙은 종이 찾아간 곳을 아무런 고민의 흔적도 없이 하란으로 적고 있다.

 

방학 중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나홀의 성에 거의 도착할 무렵 샘터에서 다리쉼을 한다. 그러면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쯧쯧, 본인 장가는 가셨는지 모르겠네. 그는 나름대로 아브라함의 며느릿감이 될 여자의 기준을 정했다. 종 치고는 조금 오버한 셈이다. 그 기준은 ‘자신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아가씨가 바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그냥 떠먹어도 되련만. 기도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각본에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듯 리브가라는 처녀가 샘 곁으로 나온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창세기 24장 16~17절)

 

이쯤 되면 ‘목마른 놈이 샘 판다’는 말은 말짱 헛소리다. ‘목마른 늙은 종 처녀 오기 기다린다’ 쯤으로 바꾸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튼 성서에도 ‘아리따운’ 여자를 언급했으니 아름다음을 추구하는 여자들을 속물 취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연이 맞으려고 그랬던지 리브가는 목마르다는 늙은 종에게 정성들여 물을 준다. 그것뿐이겠는가.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부어 낙타를 마실 수 있게 하더니, 물을 더 길어와 낙타들의 갈증도 풀어준다. 착하다. 참 착하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못된 사람 본 적 없다.

 

밖에서 본 흙집 대문.그러고 보면 우물이라는 게 남녀를 맺어주는 특별한 기능이 있는 게 틀림없다. 고려 태조 왕건도 장화왕비 오씨를 우물가에서 만났다지. 물 한 모금 달랬더니 바가지에 버들가지를 띄워주더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물 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고 했다나. 아가씨들이여. 좋은 신랑감 구하려거든 우물가로 갈지니. 그나저나 어느 시골에 우물이 있으며 그럴 만한 아가씨는 또 있을까. 물을 얻어 마시고 타고 온 낙타들이 갈증을 푸는 것을 본 늙은 종은 감격할 수밖에. 그래서 묻는다. “네가 누구의 딸이뇨?”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부두엘의 딸”이라고 리브가가 대답함으로써 족보가 밝혀진다. 등장인물도 많고 말도 복잡하지만,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라는 뜻이다. 누가 미리 짜놓은 각본 같지 않은가. 아무튼 늙은 종은 리브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이야기를 모두 서술해서 무얼 하랴. 그래도 결정적인 것 하나는 전하고 가야지.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세기 24장 57~58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니 리브가에게 “거시기 땅에 40 넘은 총각이 하나 있는데 시집갈래?” 하고 물었더니 군말 없이 간다 하더라는 얘기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늙은 종을 따라간 리브가는 이삭과 오래 오래 잘 살았다.

 

쓰레기장을 뒤지는 염소들.

하란의 흙집 지붕에 홀로 앉아 시선을 아주 멀리 던져본다. 이삭은 저물녘에 들판에 나가 묵상을 하다가 낙타들이 오는 것을 봤다지. 말이 묵상이지 색시 될 처녀가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겠지. 낙타들 중 한 마리의 등에 아내가 될 리브가가 탔더란다. 늙은 총각 이삭은 한 눈에 자기 사람임을 알아봤겠지. 색시를 구하러 갔던 늙은 종이 따라오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을까? 내 눈 앞에 그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다. 아득한 시절에 살았던 그들과 내가 한 공간에서 만난 것 같다. 이곳 하란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만날 수 있는 땅.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담장에 기대 앉아 “알로, 알로”를 외치던 처녀는 아니다. 번뜩,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래, 이제 지붕에서 내려갈 때가 됐구나. 아직 이삭과 리브가의 만남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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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9. 08:55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첫 주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계절적 차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시 내원마을에 서다

 

들판을 달려온 길은 산의 늑골 사이로 고단한 몸을 뉩니다. 여름과 가을을 양손에 쥐고 있는 산은 여전히 푸르고 헌헌(軒軒)합니다. 천천히 걷다보니 조금 불편했던 마음은 다림질을 한 듯 활짝 펴집니다. 대전사(大典寺)에는 눈길 한번 흘끗 주고 내처 지나온 참입니다. 이 절집 역시 새 건물을 세우느라 진흙구덩이에 구른 강아지 꼴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 땅의 절들은 언제부터 새집 짓기 경연대회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름 좀 있다는 산마다 망치소리로 몸살을 앓습니다. 저를 정녕 불편하게 하는 것은, 대개 부처를 위한 집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모퉁이를 하나 도니 속세는 저만치 아득하고 길은 흔연하게 펼쳐집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트래킹이나 산책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편안한 걸음입니다. 이런 길은 중턱까지 이어집니다.

 

급수대

당신은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지금 저는 청송 주왕산(周王山)을 오르는 중입니다. 주왕산은 단풍이 무척 고운 산이지요. 아직은 일러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게 서 있습니다. 선운사 동백꽃대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취해버린 미당(未堂), 그 경지를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저는 터벅터벅 걸음을 뗄 뿐입니다. 사실은 일부러 조금 빠른 계절을 택한 것도 없지 않습니다. 단풍철에는 말 그대로 나무 반(), 사람 반이기입니다. 단풍이 없다고 주왕산의 아름다움을 내려 보는 이가 있으면 그야말로 헛눈을 가졌음을 한탄해야 합니다. 맨 먼저 시선을 잡는 건 급수대라고 이름 붙인 거대한 바위입니다. 721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왕산은 어느 산 못 않게 자랑거리가 많은 산입니다. 특히 전설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위마다 동굴마다 얽혀있는 전설이 얼마나 자주 발걸음을 잡는지요. 물론 급수대에도 전설은 있습니다. 신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린 김주원(金周元)이란 왕족이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해서 대궐을 세운 게 바로 저 거대한 바위 위였던 모양입니다. 게서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썼다고 해서 급수대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입니다. 바위 위의 성이라. 그림은 그럴 듯한데 현실감은 좀 떨어집니다. 그래서 전설이겠지요.

 

자하성. 내 눈엔 그냥 너덜겅이다.

길가의 꽃에도 마음을 얹어보고 주방천 맑은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과도 놀다 보니 걸음은 자꾸 더뎌집니다. 주왕이 쌓았다는 자하성(紫霞城)이 또 옷깃을 당깁니다. 자하성. 이름이 제법 멋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올려보고 둘러봐도 제 눈에는 한때 30 리나 됐다는 성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깨진 바위가 흘러내리는 돌내(石川), 즉 너덜겅에 성이라는 이름만 붙인 것만 같습니다. 제가 또 이렇습니다. 전설은 그저 전설이라고 해놓고 따지려 드는 건 뭔지. 주왕이 대체 누구길래 이 명산의 주인이 됐는지 궁금할 법도 합니다.

 

시루봉. 내 눈엔 심술 궂은 할매바위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일패도지(一敗塗地), 요동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그가 바로 주왕(周王)입니다. 쫓기던 주왕은 멀리 신라 땅 석병산(石屛山, 지금의 주왕산)으로 피신합니다. 중국에 모래알처럼 많은 게 산인데 예까지 온 게 신기합니다. 그는 협곡에 자하성이란 성을 쌓고 재기를 노립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신라에 그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나당연합에서 을()의 입장에 있던 신라는 마일성 장군이 이끄는 진압군을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시킵니다.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게 되지요. 한 때 중원대륙의 주인을 꿈꿨던 그의 최후는 좀 허무합니다. 굴 입구로 세수를 하러 나왔던 주왕은 마장군의 화살을 맞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물들인 뒤 다음 해 붉은 꽃을 피웠다는 데 바로 주왕산에만 핀다는 수달래입니다.

 

 

 

제1폭포 아래의 소.

전설을 머금은 풍경은 계속 이어집니다. 백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구경을 하였다는 망월대, 멀리 동해가 보인다는 왕거암. 떡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시루봉이란 이름을 얻은 바위는 아무리 봐도 심술궂은 할멈처럼 생겼습니다. 거대한 바위들은 전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장군도 되고 임금도 되어 천하를 호령합니다. 부드러운 햇살이 그들의 얼굴과 가슴을 어루만집니다. 지금은 위안의 시간, 산속 세상은 부모 죽인 원수라도 끌어않을 듯 평화롭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제가 가진 언어의 한계에 절망합니다. 풍경은, ‘아름답다는 수사 따위는 눈에 차지 않는 듯, 형용이 닿지 않는 저만치에 서 있습니다. 아픈 아이 죽 떠먹이듯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주왕산에서는 그렇게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꽃이 웃어주고 새가 말을 걷고 흐르는 물이 노래를 하는 것을 듣볼 수 있습니다. 걷다보면 어느 순간 청량한 기운이 가슴 가득 찰랑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3폭포 아래의 소.

주왕산 구경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폭포입니다. 세 개의 폭포는 저마다 개성을 자랑합니다. 어느 것은 우르르 쾅쾅, 바위의 견고함을 실험하고 어느 것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립니다. 사람들은 그 황홀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걸음을 빼앗깁니다. 3폭포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느닷없이 한가해집니다. 여기서부터는 저만의 길입니다. 주 등산로가 아닌 덕분에 고적한 길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이 깨질까봐 모르는 체 하고 걷습니다. 원래는 마차까지 다니던 길이었다는데 사람이 떠나고 산짐승들이나 가끔 오가다보니 길의 영역은 갈수록 좁아집니다. 노래도 부르고 주저앉아 땀도 들이면서 30분쯤 걷고 나면 눈에 익숙한 느티나무가 나타납니다. 느티나무. 어쩐지 깊은 산 속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름입니다. 사람 사는 동네 어귀에 당산나무나 정자나무로 서서 한 여름 너른 그늘을 드리워주는 게 주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에는 돌무더기가 제법 봉긋하게 쌓여있습니다. 오가며 돌을 던졌거나 일부러 쌓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 정도면 당산나무의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당신을 더 이상 궁금하게 하면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사는, 아니 사람이 살던 마을의 들머리이고, 오늘 제 산행의 목적지이기도 합니다.

 

이런 숲길을 지나.내원마을. 10~20년 전만 해도 전기 없는 마을로 곧잘 잡지 같은 곳에 오르내리던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해줄 이 없는, 그저 흔한 산자락에 불과합니다. 좁은 길을 지나 모롱이 하나 꺾어들면 어? 이런 곳이? 할 만큼 꽤 넓은 개활지가 펼쳐집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호리병 속에 들어앉은 듯 안온한 기운이 전신을 감쌉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다른 주인이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마을 입구의 서낭당 자리.

내원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부터입니다. 몇몇 가족이 임진왜란 때 피난삼아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고 하지요. 많을 때는 70가구 500여명까지 모여 살았습니다. 마을에 양조장과 학교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은 벼농사·담배농사·숯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976년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나무를 팔 수 없게 됐고, 생계가 곤란해진 주민들은 소액의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환경보호를 이유로 강제 이주정책이 시행되면서 결국 2006년에 6가구 20여 명이 마을을 떠났고 2007년에는 마지막 3가구가 떠났습니다. 마을이 철거된 결정적 이유는 수질보호입니다. , ‘국립공원 한가운데서 관광객을 상대로 무허가 음식점과 민박업을 하는 바람에 주방천의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마을 하나를 통째로 들어낸 것입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음식점들이 아직도 성업 중인 게 신기합니다.

 

마을은 간데없고 목책만.

200711월 처음 내원마을을 찾아갔을 때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원마을은 쓸쓸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었을 곳이 자꾸 지워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집터나 논밭이었던 곳에는 늦가을 억새들만 어깨를 비비며 서걱서걱 울고 있었다. 골짜기이긴 하지만, 포근하게 펼쳐진 배산임수 지형은 인간이 깃들여 살기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유일하게 남은 주민, 내원산방의 이상해씨(44)는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뒤를 다리 하나를 못 쓰고 눈도 보이지 않는다는 흰 개가 어슬렁거리며 따랐다. 차나 음식도 못 팔게 하기 때문에 달리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단풍철이 지나면 이 집도 철거한답니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그 담담함은 막막함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황금빛으로 농익은 햇살이 내원분교의 교실 안팎을 덧칠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한 칸짜리 교실로 들어가니 풍금 두 대와 낡은 난로, 손바닥만 한 책걸상 몇 개와 칠판 같은 것들이, 아이들 대신 지난 세월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폭포처럼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276P

 

2007 내원마을 모습. 내원분교와 내원산방이 보인다.

2012년. 마을은 숲이 되었다.

제가 다녀온 다음 달인 200712월 내원분교와 내원산방도 헐렸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811월에 찾아갔을 때 내원마을은 완전히 낯선 곳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선이 제대로 가 닿기도 전에 신음부터 터진다. 이럴 수가……! 아무 것도 없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찻집 내원산방이 있던 자리, 흰 개가 해바라기를 하던 곳에는 억새들이 무성하게 키를 재고 있다. 새로 둘러친 목책만이 이곳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걸 강변하고 있다. ‘환경저해시설 철거 안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때 수백 명이 깃들어 살던 동네라는 게 상상조차 안 될 것 같다.

                                      <월간 에세이 20101월호(통권 273)> 66~67P

 

억새 사이로 오솔길은 남고.

지금은 201210. 4년 만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젠 뭐라고 쓸지 제 스스로도 궁금합니다. 사실은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라지고 숲이 돌아온 것이 아득한 날의 전설처럼 멀어 보입니다. 마을도 집도 살던 이들도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듭니다.

 

이제 어둠이 밀려온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그리고 내원산방과 흰 개가 있던 자리, 아니 있었다고 짐작 되는 자리에 서서 망연한 눈길을 던집니다. 목책마저 없었다면 여느 산자락과 구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에게 내줬던 고토(古土)를 초목이 완벽하게 회수한 것입니다. 걸음을 천천히 옮겨 억새의 땅으로 가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나무들이 저렇게 빨리 영토를 넓히는 데도, 한 때 사람의 밭이었던 억새의 영역엔 잡목 하나 얼씬하지 못합니다. 먼저 차지한 게 임자라는 말은 여기에 딱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억새들은 시간을 베고 게으르게 잠들어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를 묻고 싶은데 나그네의 안달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바람이 돌아와 흔들어 깨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산중에는 흔전만전 남아도는 게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나눠쓰던 시간은 나무와 풀과 새와 냇물의 소유가 돼버렸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오고 가는 것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내려오는 길은 컴컴했다.

억새들의 긴 잠에 지쳐 냇물 한가운데 너럭바위에 철퍼덕 몸을 맡깁니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새 주인인 초목의 영토가 마주 보이는 곳입니다. 이젠, 이곳의 절대자가 망각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을 줍고 물고기를 잡던 78(내원분교 졸업생 수) 아이들의 고향이 사라지든, 마지막 주민들이 몇 푼 쥐어진 보상금을 까먹고 도시의 잉여인간으로 떠돌든 누구도 마음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자의 뜻에 기대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가을이 깊을수록 햇빛은 떡가루처럼 곱게 부서지고 냇물은 묵()빛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물고기들은 살을 찌우고 계절을 포식한 새들의 울음은 윤택해질 것입니다. 나무들은 잎을 떠나보내고 긴 잠을 청할 것입니다. 순환과 순리 앞에 덧없는 미련과 인연을 내려놓습니다. 초가을이 깊숙이 들어앉은 풍경화 속에서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저도 어느덧 그 그림 속으로 녹아듭니다. 풍경인 제가 풍경이 된 저를 바라봅니다. 살풀이굿이라도 치른 듯, ‘가 없는 풍경 속에서 가없는 자유를 만납니다.

posted by sagang

당나귀 수레를 타고 평원을 지나가는 일가족.

지워진 도시, 하란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시원하게 뚫려 있다. 샨르우르파를 벗어나면 그 끝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들판이 펼쳐진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시퍼런 물빛을 자랑하는 수로. 풍부한 수량과 빠른 유속을 자랑한다. 이 수로들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걸까. 인간의 끝없는 도전 정신에 새삼 혀를 내두른다. 이게 바로 GAP프로젝트의 결과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실핏줄처럼 이어진 수로로 보내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것이다. GAP프로젝트가 미치는 범위는 터키 땅의 10%나 된단다. 관계자들은 이스라엘 땅보다 더 크다고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지금 지나고 있는 이 하란 평원은 터키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지만 비가 많지 않아서 농사에 애로가 많았지만 물이 풍부하게 공급되면서 터키 제1의 곡창지대로 우뚝 섰다. 특히 이곳에서는 목화가 많이 난다.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은 파란 목화밭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다. 목화가 벌기 시작하면 장관일 것 같다. 버스는 당나귀 마차를 타고 밭 사이를 지나는 일가족을 지나친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선 듯 평화롭다. 조금 더 내려가면 같은 나라 사람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하란은 샨르우르파에서 남쪽으로 44km쯤 떨어져 있다.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와는 접경을 이루고 있다. 계속 달리던 차가 느닷없이 좌회전을 한다. 훌리아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듯이 급하게 말한다.

지금 좌회전한 데서 10km만 더 가면 시리아 국경이 나와요.”

, 조금만 일찍 말해주지. 이정표라도 찍어놨어야 하는데.”

 

하란으로 가는 왕복 4차선 도로.

구경이 아닌, 뭔가 기록해야한다는 목적을 가진 취재여행은 고통을 동반한다. 신경줄을 팽팽하게 당겨놓고 챙긴다고 챙기지만 뭔가 놓치는 것 같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늘 하는 소리지만, 혼자 온 여행이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시리아 국경선으로 갔을 것이다. 곡창지대를 벗어나 하란으로 가까이 갈수록 조금씩 황량해지는 느낌이다. 마치 사막에 들어선 것 같다. 푸른색보다는 누런 황토색이 더 많아지고 먼지마저 풀풀 날린다. 조금 더 달리니 길옆으로 하란성이 나타난다. BC 4000년부터 있었던 성이라고 하니 그 역사를 헤아려본다는 게 부질없어진다. 세월 탓인지 사람 탓인지, 지금은 거의 폐허가 돼 있다. 8개의 문이 있었는데 다 무너지고 1개만 남았다. 곧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옛 도시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말이 옛 도시지 어딜 가나 쓸쓸한 풍경뿐이다. 둘러보기도 전에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그 유서 깊은 고대도시가 이렇게 몰락하다니. 하란이 얼마나 오래된 곳인가 하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정착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물론 전설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방증으로 삼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또 하란은 구약성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그의 며느리가 되는 리브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리브가의 아들인 야곱은 모두 이 하란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그 이야기는 뒤에 천천히 하기로 하자. 하란 여행에서 구약성서를 빼놓으면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으니까.

 

하란에 들어서면 이런 폐허들이 나타난다.

역사에서도 하란은 중요한 도시였다. 히타이트 제국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탄니 왕국의 중심지였다. 히타이트에 패망한 뒤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뒤 바빌로니아, 파르티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알렉산도르스왕에게 점령당한다. 한때는 시리아에 흡수되기도 했고 에데사, 즉 지금의 샨르우르파에 수도를 둔 오스로에네 왕국의 주요 거점이 된다. 지금은 침묵하는 땅, 하란평원이 품은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부족할 만큼 많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끈 인물 중 하나인 크라수스가 이 평원에서 최후를 마친 이야기는 듣고 가야한다. 크라수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 공화국을 주무르던 실세였다. 그런 그가 왜 이곳에서 죽어갔을까. 따지고 보면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사업가지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부동산에 특히 능력을 보였는데, 그것으로 로마 최고의 부호가 될 정도였다. 지금 태어났으면 땅값 좀 올려놨을 것 같다. 크라수스는 돈을 모으는 데 물불을 안 가렸다. 상도? 그런 건 개에게 던져줘 버렸다. 카이사르가 집권하기 이전의 로마에는 경찰서나 소방서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치안대 같은 게 만들어진다. 여기서 크라수스의 도적질에 가까운 재능이 발휘된다. 어느 부호의 집에 불이나면 크라수스가 치안대를 이끌고 나타난다. 그리고는 집 주인을 불러 그 집을 팔라고 한다. 물론 불에 타고 있는 집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후려친다. 판다고 하면 불을 꺼주고 싫으면 그냥 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결국 주인은 두 손을 들고 그렇게 산 집을 비싸게 되판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 뺨을 칠 사람이다. 혹시 직접 불을 지른 건 아닌지 모르지.

 

무너진 성 위엔 전봇대 뿐.

그런 그가 집정관으로 당선되면서 로마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된다. 헌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폰토스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폼페이우스나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해 전쟁 공훈이이 없었다. 지도자로서 엄청난 콤플렉스였다. 그렇게 비극은 시작된다.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로마 시민이 인정하는 승리를 얻겠다는 열망으로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다. 이 원정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유능한 장군으로 성장의 아들 푸블리우스도 큰 몫을 했다. 물론 원정에 나서게 된 가장 큰 목적은 한 몫 잡아보자는 것이었다. 시리아에서 크라수스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예루살렘신전을 비롯한 곳곳의 신전에서 보물을 약탈하는 것이었으니 더 말해 무얼 하랴. 예나 지금이나 있는 것들이 더한다니까. BC 53년 크라수스는 총 6개 군단에 약간의 오리엔트 용병, 그리고 아들 푸블리우스가 이끄는 갈리아 기병대 1천기까지 약 4만 명을 이끌고 원정을 나선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승패가 군인의 수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당시 하란 지방의 군주였던 오스로에네 왕국의 아브가루스 2세가 파르티아와 내통하고 있었지만 크라수스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길잡이가 된 아브가루스는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가는 대신 하란 평야로 로마군을 유인했다. 길 안내를 맡은 사람이 아브가루스가 아닌 아랍의 귀족이란 설도 있다. 로마군을 사막지대로 유인하는 임무를 띤 첩자였다고 한다. 안내자가 누구였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크라수스는 애초부터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배회하는 소들.

한편 하란 평야에는 물자와 무기를 넉넉히 챙겨둔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덫은 단단했고 그물은 촘촘했다. 파르티아에는 수레나스라는 젊고 유능한 장군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파르티아 기마병 2만여 기와 로마군이 만났다. 짜식들~ 2만이야? 4!! 크라수스는 로마군 특유의 정사각형 형태의 밀집대형으로 군사들을 배치한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순식간에 기마병을 활을 쏘는 궁기병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낙타들을 이용해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화살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파르티아의 궁기병은 돌격해서 맞장을 뜨는 대신 멀리서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문제는 파르티아 군의 활이 워낙 강해서 로마군의 방패가 그대로 뚫린다는데 있었다. 속수무책.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크라수스는 아들 푸블리우스에게 파르티아 궁수들의 뒤를 쫓으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궁기병들은 퇴각하면서 몸을 180도로 비틀어 활을 쏘는 파르티아군 특유의 공격(파르티안 샷)을 퍼붓는다. 용맹을 자랑하던 갈리아 기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푸블리우스는 추격을 자제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적들에게 우롱 당했다는 분노로 머리에서 김이 풀풀 날 지경이었다. 결국 퇴각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다. 아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크라수스는 전군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역시 독 안으로 찾아 들어가는 쥐 꼴이었다. 황무지 한가운데서 로마군은 완전 포위되었다. 로마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이번엔 파르티아 보병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무너진 옛 신전.

로마군이 대패하고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수레나스는 크라수스에게 화평을 제의한다.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넘기라는 조건이었다.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했지만 로마 병사들은 회담장에 나가라고 압력을 가했다. 개죽음 당하기 싫다는 것이었겠지. 크라수스는 만약 자기가 죽더라도 적의 속임수 때문이지 아군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혼자 적을 향해 걸어갔다. 참 쓸쓸한 뒷모습이다. 총사령관을 혼자 보내는 게 못할 짓이라 생각한 참모장 옥타비우스가 장교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수레나스는 크라수스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는 강가에 따로 장소를 마련해두었으니까 거기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면서, 마부를 시켜 말을 끌고 오게 했다. 말이 한 마리뿐인 것을 본 옥타비우스는 수레나스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아챘다. 즉각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 마부를 찔러 죽였다. 놀란 수레나스와 수행 장교들도 칼을 빼들었다. 그 때 옥타비우스가 소리쳤다.

"우리는 로마군이다! 총사령관을 빼앗기는 설욕을 참을 수 없다!!"

파르티아의 장교들과 로마 장교들의 칼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 옥타비우스가 숨지면서 크라수스도 숨을 거뒀다. 그를 찌른 건 아군이었다. 총사령관을 적의 포로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갸륵한 생각이었겠지. 찌른 자가 적의 편으로 갔다면 나쁜 놈이겠지만 같이 죽었다면 그 또한 충정일 터. 그런 과정을 거쳐 지휘관을 잃은 로마군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울루자미로 가는 길은 쓸쓸하다.

장신구를 파는 아이들.

BC 53년 크라수스의 나이 62세였다. 장군으로서 무능했든 오로지 돈만 알았든 삼두정치의 한 축이 그렇게 황야에서 숨진 건 충격이었을 것이다. 돈에 살고 돈에 죽는 걸 좌우명으로 삼았던 한 사내의 욕심 끝은 그렇게 비참했다. 나는 전쟁사를 읽을 때마다 빛나게 혹은 부끄럽게 죽어간 장군들보다는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병사들을 생각한다. 크라수스나 푸블리우스, 옥타비우스가 아닌 장삼이사란 이름의 집단에 묻힌, 기억되지 않는 숱한 생명들. , 잊고 갈뻔한 뒷얘기가 하나 있다. 그 싸움에서 포로가 된 로마인들은 지금의 한나라와의 국경에 수비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얼떨결에 중국인들을 만난 최초의 유럽인이 아니었을까. 기원전, 그것도 멀고먼 나라의 집정관이 죽은 이야기를 너무 길게 썼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하란 평야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찌 그를 만나지 않고 갈 수 있으랴. 버스는 삭막한 땅 한가운데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왜 이곳을 이렇게 내버려 둘까. 샨르우르파 주에서는 이곳 자체를 야외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의 신축이나 도로 포장을 허가하지 않는다. 반문명적인 내 시각으로는 무척 잘하는 일이다. 비까번쩍하는 건물이 들어서는 순간 풍경이 얼마나 망가질까. 눈앞에는 커다란 건물 하나가 서 있다. 말이 건물이지 거의 무너져가고 있기 때문에 황량한 들판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의연함이 있다. 8세기에 만들어진 신전이라고 한다. 금화 1000만개를 들여서 지었다고 하니 그 당시로는 엄청난 건물이었을 것이다. 한 때는 대상들의 숙박시설, 즉 카라반사라로 쓰였다고 한다. 이곳은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저 낙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득한 옛날이 돌로 남았다.

하란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서졌으면 신전조차 폐허로 변했을까. , 크라수스 이야기를 먼저 하다 보니 하란의 역사를 건너뛰었구나. 로마의 치욕은 크라스수의 죽음 정도로 끝날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296년에는 로마의 갈레리우스 황제가 이곳 하란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한판 벌였다가 참패를 당했다. 때문에 651년 이슬람군이 차지할 때까지 하란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세월이 흐른 뒤 유럽과 이슬람이 부딪힌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104년 제1차 십자군과 이슬람군이 하란성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는데 유럽의 참패였다. 바로 이웃인 에데사는 별 문제 없이 점령해서 나라까지 세웠는데 망신살이 뻗친 셈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하란의 역사가 끝난 건 아니다. 잘 나가던 도시가 왜 이렇게 폐허로 남았는지는 얘기하고 가야지. 셀주크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던 1259. 몽골에서 일어난 정복자 징키즈칸의 손자인 홀레구가 이끄는 원정군이 이곳에 도착했다. 셀주크군은 그들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함락되고 만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주거 역사를 자랑하는 땅, BC 20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던 고대도시, 한 때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은 말굽 아래 짓밟히고 사람들은 죽어갔다. 건물은 기둥뿌리까지 뽑혀 폐허가 되었다. 몽골군이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던지 길고 긴 세월이 흘러도 하란은 다시 도시로 피어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마을일 뿐이다. 어찌 사람만 죽어갔으랴. 그 긴 역사가 키워낸 문명과 유적들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흔적만 남은 울루자미.

 

무너진 모스크를 구경하고 있는데 흙집과 돌무더기 사이에서 나타난 송아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일행을 구경한다.

아저씨들은 어디서 왔어요?”

짜식,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이 동네에서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만 통제받지 않고 돌아다니는 동물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소와 염소가 많다. 땅 위에 거뭇거뭇 한 것은 모두 소똥이라고 보면 된다. 귀에 인식표가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이 있는 녀석들이다. 모래뿐인 이곳에서 저들은 대체 무엇을 찾아다니는 걸까. 몇몇 녀석은 별 것도 없는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한다. 하란 특유의 고깔모양의 흙집을 지나 황량한 벌판을 걸어간다. 너무 쓸쓸하다. 인간이 인간의 흔적을 이렇게 파괴할 수도 있구나. 한낮의 기온은 기어이 온도계를 깨트려버리겠다는 듯 계속 치솟는다. 바로 시리아의 이웃이니 사막의 기온을 제대로 맛보는 셈이다.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 한 그루 없는 대지,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걸어가며 나는 자꾸자꾸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른 건지, 마음이 마른 건지. 울루자미로 가는 길에 대여섯 살 쯤 돼 보이는 아이들을 만난다. 손에는 역시 목걸이 같은 조잡한 기념품을 들고 있다. 내가 만난 일하는 아이들중 가장 어려 보인다. 사라는 말도 없이 그저 관광객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 저 아이들을 이 뜨거운 햇살 아래 세웠을까.

 

저 문으로 누군가 드나들었겠지.

폐허에 쳐놓은 철조망은 무엇을 의미할까.

루자미, 아니 그 잔해는 평원에 누워있다. 그 와중에 저 홀로 우뚝 선 33.3m의 미나레트가 생뚱맞다. 나머지는 대부분 무너지고 깨어졌다. 흔적만 남은 담장, 아치형의 문. 그게 전부다. 누가 이곳이 소아시아에서 최초로 지어진 모스크였을 거라고 짐작이나 할까. 모스크를 중심으로 엄청나게 큰 도시가 형성됐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모스크는 우마이아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 때 지었다고 한다. 혹자는 이슬람 세계에 지어진 최초의 대학이라고도 한다.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기 전 이 자리에는 고대 세계의 점성가와 석학들이 모여들어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원이 있었다. 주로 의학, 수학,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이곳은 뜻밖에도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 야훼 하느님은 그 때문에 아브라함을 이 땅으로 인도한 것일까? 하란은 세계 최초로 파가니즘이 생겨난 곳이라고 한다. BC 1100년경 신(SIN이라는 달의 신을 숭배하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을 사비라고 부르고 종교는 사비아교라고 불렀다. 이 종교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이슬람 세계에 전해주었다.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그들의 신전을 이슬람 양식의 모스크로 개조하고 신학교를 만들었다. 그렇게 세상살이는 교대를 하는 것인가 보다. 누군가 살던 땅을 타인이 점령하고, 또 누구는 점령자들의 문화를 초토화시키고. 철조망 사이로 아무리 안쪽을 들여다봐도 사람 사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이는 없다. 쓸쓸히 몸을 돌려 돌아가는 수밖에.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