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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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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27. 18:5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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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서핑이라도 하듯, 빠른 물살을 너무 즐겼던 게 탈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태어난 지 1년도 안된, 어린 멸치에 불과한 내가 그 길이 가서는 안될 길이고, 그 곳이 들어서면 못 나올 곳임을 어찌 알았으랴. 너른 바다에서 노는 것도 심심해진 어느 날 엄마 몰래 친구들과 모험을 떠났다. 이곳 저곳 구경을 하다가 빠른 밀물을 타고 들어선 곳이 남해의 지족해협이었다. 모험은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인지. 신이 난 나와 친구들은 엄마가 걱정한다는 사실도 몽땅 잊어버렸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서 있는 나무말뚝들이었다.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반갑다고 저리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인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악동들은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물살이 빨라 헤엄칠 능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거나 멸치 떼를 노리고 뒤를 쫓는 농어나 숭어 때문에 쫓기듯 들어갔을 거라고 짐작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갔을 뿐이었다. 좀 좁긴 하지만 숨바꼭질하기엔 알맞은 곳이었다. 죽방렴이라 불리는 그 곳에서 우린 정말 즐거웠다. 어부 하나가 배를 타고 와 뜰채로 우릴 떠올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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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남반부를 달리다 보면 하동을 지나, 우리나라 네 번째 섬이었다가 다리(남해대교)를 놓은 뒤 육지가 된 남해를 만날 수 있다. (뒤에 사천과 연결되는 삼천포대교도 건설) 그리고 고구마 두 개를 나란히 놓은 것처럼 생긴 남해를 또 달려, 두 번 째 고구마 가슴쯤을 지나다 보면 물살 빠르기로 유명한 지족해협을 만날 수 있다. 그 곳엔 창선면 지족리와 삼동면 지족리를 연결해주는 바다 위의 다리, 창선교가 있고 그 다리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높다란 입간판에는 죽방렴의 본고장임을 자랑하는 글귀가 써 있다. '지족해협 청정해역의 명품-원시어업 남해 죽방렴멸치'. 자랑스레 '현존하는 가장 원시형태의 어로포획방식'이라 부르는 죽방렴. 그런데 죽방렴이야 말로 가장 첨단어업이었고,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원시적 어로라면 물고기를 손으로 잡거나 작살로 찍어내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죽방렴은 원시어업이라기보다는 '자연친화' 어업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돌로 담을 쌓아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잡는 서해의 '독살'과 함께,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가장 많이 투영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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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렴은 대나무를 발처럼 엮어(簾) 고기를 잡는다(防)는 뜻으로 '대나무 어살' 또는 '대나무 어사리'라고도 불렀다.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빠르며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에 설치하게 된다. 좁은 물목의 조류가 흘러 들어오는 쪽을 향해 길이 10미터 정도의 참나무 말목을 V자 모양으로 벌려 일정하게 박고 말목과 말목 사이에 대나무를 발처럼 엮어서 울타리를 만든다. 그리고 통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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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물을 엮어 넣으면 밀물 때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는 이 미로로 된 함정(임통, 불통)에 빠져 썰물 때가 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물고기는 후진을 할 줄 모르니 들어오는 길에 생각이 바뀐다 해도 다시 나갈 방법은 없다. 임통은 밀물 때는 열리고 썰물 때는 닫히게 된다. 죽방렴을 설치한 주인들은 하루 두세 차례 물때에 맞춰 후릿그물이나 뜰채로 물고기들은 건져 올린다. 고기잡이는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며, 5월에서 8월 사이에 멸치와 갈치를 비롯해 학꽁치·장어·도다리·농어·감성돔·숭어·보리새우 등이 주로 잡힌다. 고기잡이를 하지 않는 1~2월에는 임통만 빼서 말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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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잡힌 물고기 중에는 멸치가 80% 정도를 차지한다.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스트레스를 덜 받아 맛이 좋다고 한다. 또 잡는 과정에서 상처가 나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는다. '죽방멸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물로 잡은 멸치보다 최소 두 배에서 수십 배의 가격으로 팔려나간다. 잡은 멸치는 회로도 먹지만 대부분은 즉시 육지로 운반해서 솥에 삶아 말린다. 죽방렴 어업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자연친화적 어로법이다. 바다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고기는 맞아들이고 지나가는 건 갈 길을 가도록 놓아둔다. 놓친 물고기를 아쉬워하거나 더 많이 잡겠다고 아등바등 하는 법이 없다. 바다 밑까지 긁는 기계식 어로처럼 무지비한 싹쓸이를 꿈꾸지 않는다. 자연도 살리고 인간도 살자는 상생의 어로이다. 죽방렴의 혜택을 받는 건 사람뿐이 아니다. 갈매기란 놈도 지친 날개를 접어두고 참나무 말목에 앉았다가 은빛 멸치라도 한 두 마리 튀어 오르면 잽싸게 낚아채 배를 채운다. 잡히는 물고기가 많지 않더라도 매일 거둬들일 것이 있으니 어부의 마음은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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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부터라고도 하고 5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도 하는데 문헌상에는 조선조(1496년)부터 나타난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죽방렴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큰 조수간만의 차와 빠른 물살이 필수조건이며 수심 역시 적당해야 한다.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는 지족해협에는 20통이 넘는 죽방렴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남해군 창전면과 사천시 삼천포 사이에 있는 삼천포해협에 원형이 살아있는 죽방렴이 있다. 여수·완도 등에도 몇 통이 있었으나 철거되었다고 한다. 목포에는 해양유물전시관에 보관해놓았다. 죽방렴이 아직은 거액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는 것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는 어로법의 발달, 연안의 어업자원 감소, 관리하기 위한 노동력의 부재 등은 죽방렴을 석양 아래 세워놓았다. 아마도 새로운 죽방렴이 설치되는 것 자체가 끊길 날이 그리 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임통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죽방렴의 이름을, 가슴에서마저 지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취재를 하면서] 남해 지족해협은 석양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석양 속에 꿋꿋이 서 있는 죽방렴들과 그 곁을 지나는 작은 배들은 마치 꿈속인 양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지족해협 죽방렴을 남해 12경 중 4경으로 꼽습니다. 제가 지족해협을 찾았을 때는 장마철도 아닌데 날이 계속 흐렸습니다. 그래서 석양풍경을 잡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하늘에게 무언가 못 마땅하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반성했습니다. 훗날 다시 찾을 기회가 있다면 좋은 사진 많이 찍어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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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27. 18:49 길섶에서
점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지하도에 펼쳐진 색다른 풍경 하나가 눈길을 끈다. 할아버지와 손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발걸음이 분주한 계단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이긴 사람이 한 계단씩 먼저 올라가는 놀이다. 바쁘게 지나던 사람들도 잠깐씩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준다.

손녀아이가 연달아 이기는 모양이다.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터뜨리는 웃음이 구슬이라도 굴리는 듯 맑고 경쾌하다. 노인도 함박웃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조손(祖孫)이 펼치는 즉석 축제에 구경하는 사람들의 입가에도 웃음꽃이 핀다. 모처럼 도심에서 보는 색다른 풍경이 잠자던 동심을 두드려 깨운 듯, 밝은 얼굴들이다.

그러고 보면 우린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산다. 아이들은 별을 세는 대신 TV앞에서 만화영화를 본다. 팽이를 돌리고 숨바꼭질을 하는 대신 컴퓨터 속의 적을 쏘아 죽인다. 할아버지·할머니 무릎을 베고 견우직녀의 사랑 얘기를 듣는 대신 학원에 앉아 외국말을 배운다. 우리가 잃고, 잊은 것만큼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한다면 너무 큰 억지일까. 지하도에서 본 작은 축제의 잔상이 하루종일 떠나지 않는다.
200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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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20. 19:12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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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며칠 째 애가 달아있었다. 방학 때 내려왔던, 서울 사는 장부자네 손자가 신었던 운동화까지는 언감생심 바래본 적도 없었다. 백설기처럼 빛나는 흰고무신이 수시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정말 대책 없는 열병이었다. 지금까지 검은고무신으로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온 아이를 들쑤시고 있는, 흰고무신에 대한 열망은 몽유병이라도 든 것처럼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날마다 어머니를 졸라댔지만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였다. 아이들이 흰고무신을 신는다는 건 어른들이 입는 흰두루마기를 입는다는 것과 똑같았다. 아버지도 일을 할 때는 검은 고무신을 신다가, 나들이 할 때나 선반에 올려두었던 흰고무신을 꺼내 신고 나가지 않던가. 그러니 들로 산으로 천방지축 쏘다니는 아이들에게 흰고무신이란 개발에 편자를 대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흰고무신이 훨씬 비싸다는 점도 문제지만 그걸 날마다 누가 닦아댈 것인가. 금세 검은고무신과 구별이 안 될 만큼 더러워질 건 너무도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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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는 아이에게 던지는 어머니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지금 신은 것도 3년은 더 신겠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소 몰고 나가 풀이나 뜯겨 와라." 하지만 이미 열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그 말이 들릴 턱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이는 다른 아이들을 따돌리고 개울가 으슥한 곳에 앉는다. 몇 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돌로 신발의 옆구리 쪽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검은 고무신이 처단해야될 악마라도 되는 양, 마구 문질러댄다. 처음엔 질기게 저항하던 신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구멍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날 저녁, 아이의 집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에 이어 생고무신처럼 질긴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일부러 신발에 낸 구멍을 어른들이 못 알아차릴 리 없었던 것이다. 신발이 떨어지면 기우고, 그도 안되면 장에 나가 때워서라도 신던 시절에 일부러 구멍을 내다니. 결국 아이는 흰고무신은 구경도 못하고 구멍난 검은고무신으로 그 여름을 나야했다. 물론 여름이 지나고 추석이 되어 얻어 신은 새 고무신도 검정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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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가 되어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고 운동화라는 걸 너도나도 신을 수 있기 전까지 고무신은 대안을 찾기 어려운 '국민신발'이었다. 사실 고무신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땅의 백성들에게는 뒤로 자빠질 만큼 기가 막힌 물건이었을 것이다. 가죽이나 비단신이라도 신을 수 있었던 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하면, 민초들이야 기껏 짚신이나 나막신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을뿐더러 어느 정도 방한까지(짚신에 비해서) 가능한 신발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고맙고 신기했으랴. 그런 고무신이 이 땅에 첫선을 보인 게 1920년대였다고 하던가. 역설적이긴 하지만 고무신은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데도 한몫 했을 것 같다. 그 좋은 걸 양반이라고 외면하지는 않았을 테니, 발만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을 터. 어려웠던 시절, 고무신 한 켤레 값은 결코 만만치 안았다. 그래서 신발코에 구멍이 뚫리고 밑창이 너덜거리도록 기워서라도 신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떨어지고 찢어져서 못 신을 정도가 되면 장날에 들고 나가 때워다가 또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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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을 만드는 회사도 참 많았다. 고무신은 폐타이어가 주원료였는데, 생산의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왕자표, 말표, 범표, 타이어표, 진짜 다이아 등 헤아리기 힘들만큼 다양한 상표가 쏟아져 나왔다. 흰고무신은 표백제를 첨가해서 만들었는데 그만큼 검은고무신보다 비쌌고 고급 취급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외출용으로나 쓸 정도였다. 고무신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쓸모 있는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고무신 한쪽을 접어 다른 쪽에 구겨 넣고 모래밭에서 밀고 나가면 그게 자동차였다. 개미나 딱정벌레를 태워 냇물에 띄우면 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급류를 타고 신발이 떠내려가기라도 하면 울며불며 쫓아 내려갔다. 내나 둠벙(물웅덩이)에 신발을 잃어버린 집의 아이는, '칠칠치 못한 놈'이 되어 그 날 저녁  밥도 굶은 채 한바탕 경을 치르기도 했다. 고무신을 이용한 아이들의 놀이는 그밖에도 다양했다. 냇가에서 놀다가 물고기를 잡으면 신발 안에 보관했고, 꽃 위에 앉아있는 벌을 신발로 덮쳐서 뱅뱅 돌리기도 했다. 신발을 던지는 놀이인 '신발치기'라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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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틀에서 문수(사이즈)만 다르게 찍어내는 고무신이야, 따로 멋을 내서 만드는 것도 아니니 네 것 내 것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웃지 못할 일들도 참 많이 생겼다. 어른들은 잔칫집이나 초상집에 가려면 신발에 내 것이라는 표시부터 했다. 불에 달군 송곳으로 신발코 쪽에 작은 구멍을 내거나, 실로 꿰매 X자를 만들기도 했다. 새 고무신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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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고무신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색깔이 똑같아서 바뀌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양심불량'인 사람들은 일부러 헌 고무신을 신고 가서 새 고무신을 신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신발장 앞에서 내신이니 네 신이니 싸우다가 선생님에 불려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새로운 것을 갖기 힘들었던 시골아이들은 새 신발을 사거나 새 옷이라도 하나 얻어 입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고, 자랑을 못해 안달이었다. 다른 애들이 있을 때만 신발을 신고 혼자 있을 때는 벗어서 들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급하게 달릴 땐 헐떡거리다 벗겨지기 일쑤여서 벗어서 손에 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 달리기도 했다.

이젠 어디에서도 고무신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절에나 가야 고무신을 신은 스님네들을 만날까. 그나마 국내에서는 생산하는 곳이 없어서 중국산이 들어온다고 한다. 온 천지에 편하고 예쁜 신발이 넘쳐나는 마당에 고무신을 새삼 그리워할 일이야 뭐 있을까. 하지만 굿거리 장단처럼, 비오는 날 찌걱거리며 다닐 때의 그 묘하던 느낌, 가락. 송사리·붕어를 잡는다고 작은 냇물을 막고 고무신으로 물을 퍼낼 때의 그 신나던 손놀림이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머니가 호박잎 넣고 끓여주시던 된장국처럼, 베적삼 훌훌 걷어붙이고 고무신 신고 가르마처럼 길게 뻗은 논둑 길을 걷고싶다는 생각은 영 떨쳐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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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20. 19:12 길섶에서
가물가물한 의식 사이로 느닷없이 끼어드는 소음. 잠은 금세 저만치 달아난다. 겹친 피로를 못 이겨 무너지듯 누운 참이다. 찹쌀∼떡∼ 메밀∼묵∼ 소음의 진원은 찹쌀떡장수다. 잠시 짜증이 일지만, 소리쳐야 먹고 사는 그에게 일일이 사정을 헤아려 달라 할 수도 없으니 감수하기로 한다.

이젠 찹쌀떡을 외치는 소리가 제법 차지게 가락을 탄다. 동네에 처음 나타났을 땐 목청도 작고 구성진 맛이 없었다. 이왕 잠에서 깬 거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은근한 격려를 보낸다. 찹쌀떡이 풀어 놓은 회상의 끈은,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들던 과거 어느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소와 눈물이 동시에 베갯잇을 적신다.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동네를 흔든다.“야!조용히 못해?” 주민 하나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른 모양이다. 사위가 조용해지면서 쓸쓸히 돌아서는 젊은이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달아난 잠은 돌아올 기미가 없고 실현 안 될 생각만 꼬리를 문다. 조용한 환경에서 잠들고 싶은 주민과 팔기 위해 소리쳐야 하는 찹쌀떡장수, 둘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세상은 늘 모순덩어리다.
200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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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13. 13:39 사라져가는 것들

꼭 필요한 만큼만 밝혀주던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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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들기름 콩기를 더 많이 넣지 않아서/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넘치면 나를 태우고/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내 마음의 등잔이여/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거뜬히 읽을 수 있는/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도종환의 '등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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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전기라는 존재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였다. 아이는 훗날 도시인으로 편입된 뒤에도 그 날의 충격을 영 떨쳐내지 못하고 살았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올렸을 때, 팟!!! 하고 눈을 찌를 듯 달려들던 불빛. 그건 쇠망치로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아니, 어쩌면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순간이었다. 전기를 만나기 전까지 밤, 즉 어둠은 딱지를 몰래 숨겨둔 뒷산의 작은 굴처럼 적당한 은밀함이 있었다. 그래서 땅거미가 물고 와 마당을 지나 토방, 마루를 거쳐 방으로 입장하는 밤은 새아씨의 뒷자태처럼 매일매일 설렘을 동반했다. 밤은 좀 너른 품으로 맞는 게 제격이었다. 어둠 속에서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설렝이' 한 두 마리쯤은 받아들여 같은 잠자리를 쓸 줄 알아야 하고, 개복숭아에 들어있는 벌레쯤은 영양식으로 알고 그대로 삼켜야했다. 아이는 전기의 충격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런 시절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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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불이란 게 그랬다. 아무리 심지를 돋궈도 어느 정도 이상의 빛을 내어주진 않았다. 그을음만 신경질적으로 뿜어낼 뿐이었다. 등잔이 특별히 인색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과도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걸 몸짓으로 가르쳤다. 인간에게는 어쩌면 그 정도의 빛이 삶을 영위하는데 적절한 것인지도 몰랐다. 인위적으로 내는 빛은 등잔불만큼이어야 밤하늘의 별도 제 빛으로 반짝이고, 달도 아름답게 빛나고, 반딧불도 소중해지는 것이었을 게다. 어쩌면 전기가 발명된 뒤로 인간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것, 그걸 꿈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어머니는 그 침침한(전깃불을 만나기 전까지는 침침함이라는 말을 잘 몰랐다.) 불빛 아래서 바느질을 했다. 어머니가 그 불빛 아래서 꿰맨 옷을 보면, 재봉틀로 바느질한 것처럼 한 땀 한 땀 간격이 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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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초저녁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되었다는' 옛날 이야기처럼, 어머니도 돌이 되어 굳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불러보고는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꿈꿨냐? 오줌 누고 어여 자라" 한 마디를 남기고 또 바느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바느질로 살아온 어머니는 훗날 고백했다. "전깃불이 들어온 뒤로는 당최 바늘이 헛먹어서 고생했지 않겠냐?" 아이도 아이의 형도 친구들도 등잔불빛 아래서 숙제를 하고 연도 만들고 딱지왕 용식이에게 복수전을 벌일 새 딱지도 접었다. 그래도 공책 안의 글자는 제법 반듯했고 연도 하늘을 펄펄 날았다. 그렇지만 아이는 '인간은 눈만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이들이 밤에 자지 않고 오래 놀고있으면, 할머니는 걱정이 백태처럼 낀 목소리로 일렀다. "지름(기름=석유) 닳는다. 어여 불끄고 자라." 그 말은 "배 꺼진다. 어여 이불 속에 들어가 자라."라는 말과 가끔 교대됐지만 아이는 그 두 가지 말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등잔보다 조금 밝은 것은 남포등이었다. 밝기로야 촛불도 등잔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제사를 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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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들었다. 아이의 집에도 남포등이 하나 있었지만 그것 역시 아무 때나 켜지는 않았다. 늦게까지 마당에서 일을 할 때나,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났을 때만 내걸었다. 아버지가 올 때가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으면, 할머니는 꼭꼭 숨겨두었던 병을 꺼내 남포에 석유를 담았다. 불을 켜고 처마 밑에 매달면서 주문인지 기원인지를 쉬지 않고 외웠다. 그래야 길 떠난 아들이 그 불빛을 보고, 자갈길에 넘어지지 않고 냇물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는 듯 했다.

전기가 안 들어가는 곳이 거의 없는 지금, 등잔을 보기란 쉽지 않다. 사냥꾼의 총에 넘어진 짐승처럼, 잘 박제된 등잔들이 박물관이나 카페의 장식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희미한 불빛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가슴속의 등잔은 성인이 된 아이에게 항상 말한다. "두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남포를 꺼내 닦던 할머니와, 할머니가 밝혀준 불빛으로 무사히 돌아오시던 아버지…. 할머니도 남포도 아버지도 세월 속으로 걸어들어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어떤 바람도 가슴속의 불빛까지 끌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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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아직까지 등잔을 켜고 사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까닭이겠지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은 분명히 있습니다. 등잔을 구하려고 벼룩시장을 뒤졌습니다. 등잔+등잔대 가격이 만만치 않더군요. 이제 물량이 거의 나오지 않는 까닭이겠지요.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비교적 싼 등잔만 샀습니다. 남포를 하나 사려했는데 등잔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미제라 비싸고…" 어쩌고 하는데, 아아!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남포 하나 만들 기술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잔과 남포를 찾아 좀 더 헤매겠습니다. 찾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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