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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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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1.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영원히 살다

 

매창. 그녀는 죽었으되 죽지 않았습니다. 삶의 끝머리까지 지극한 사랑을 놓지 않음으로써, 뭍 남성들의 가슴속에 펄럭이는 깃발로 살아있습니다. 헌데, 후세의 장삼이사 중 하나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그녀는 그만큼의 사랑으로 행복했을까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늘 공허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녀의 무덤에는 봄날의 병아리 같은 햇살이 곱게 내리고, 무덤의 주변은 소나무들이 각박하지 않은 표정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저만치 서 있는 아파트들이 눈에 걸리지만,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을 물릴 수는 없으니, 그 또한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매창의 무덤이 있는 매창공원은 부안군청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행정지역으로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 그녀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던 유일한 친구, 거문고와 함께 묻혀있습니다. 공원 곳곳에는 매창, 유희경, 허균의 시는 물론 후인들인 정비석, 이병기, 송수권 들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벤치에 앉습니다. 공원 한쪽의 정자에서는 거문고 소리 대신 노인들의 고함이 허공에 흩어집니다. 고스톱을 치다가 뭔가 어긋난 모양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배나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화우(梨花雨) 대신 노랗고 붉은 낙엽만 펄펄 날아다닙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축축한 갯내음이 따라왔습니다. 저만치 바다에서 온 소금바람입니다. 이 바람이야말로 봄마다 배꽃을 흩날리고, 매창의 숨죽여 우는 밤들을 지켜본 그 바람일 것입니다.

 

매창이 세상을 뜰 무렵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녀를 묻어 준 이들 역시 민초였습니다. 부안의 사당패와 아전들이 외롭게 죽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묻고 해마다 풀 뽑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물론 매창의 죽음을 애달파한 이들이 그들 뿐만은 아닙니다. 시인풍류객한량들도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슴 무너지는 아픔을 기록으로 남긴 이가 바로 허균입니다.

 

계생은 부안 기생이다. 시에 능하고 글도 알았으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깨끗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사귐이 오래 가도 변치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한 차례 울고 난 후, 율시 2수를 지어 그를 슬퍼한다.

 

哀桂娘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개암사 일주문

한 남자의 애도가 눈물겹습니다. 한 여인의 시재(詩才)를 그렇게 오래,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한 남자, 허균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부안의 기생 매창의 죽음은 그렇게 기억되기도 하고 또 잊히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무덤은 모진 비바람에도 스러지지 않고 세월을 견뎠습니다. 그 이면에는 또 숨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나무꾼들이 벌초를 하고 무덤을 돌봤다고 합니다. 근세에 들어서도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에 들어오면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으로 그녀의 넋을 기렸다지요. 그녀가 죽은 뒤 45년 뒤(1655)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그 비문의 글씨들이 희미해질 무렵인 1917년에는 부안의 시인들의 모임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긴 4척 높이의 비석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 뜻은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부안 사람들은 매창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은 시집의 발행입니다. 매창이 떠나고 58년 뒤인 1668, 그가 지은 수백 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던 58편을 모아 <매창집>을 간행합니다. 58년 뒤의 58편이라. 저는 또 우연한 일치에 괜히 집착합니다. 목판본 시집을 발행한 곳은 생전에 그녀가 자주 찾았던 개암사(開岩寺)였습니다. 아전들이 앞장섰다고 합니다. 절에서 기생의 시집을 만들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목판인쇄 기술을 가진 곳은 절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매창집의 간행은 아름다운 시편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행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여성 시집이 단행본으로 발간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시집이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너도나도 찍어달라는 바람에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판을 불태워버렸다고 하네요. 이렇게 아까울 데가. 지금 생각하면 개암사 스님들도 좀 그렇습니다. 형편이 그 지경이면 돈을 좀 받고 팔 든가 할 것이지 태워버릴 건 뭐란 말입니까. 매창집 한 권은 수십 년 전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됐습니다. 참 멀리도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개암사 매창집은 단 두 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버드 도서관에, 또 하나는 간송미술관에.

 

개암사 대웅전

이왕 매창과 개암사의 인연을 이야기했으니 그녀의 발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볼 일입니다. 그녀는 생전에 인근 사찰을 자주 찾았습니다. 소식 없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달래기에는 산사가 적격이었겠지요. 관기의 신분이었으니 허락 없이 멀리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까요. 그녀가 혼자 찾은 곳은 주로 개암사나 월명암 등이었습니다. <등월명암(登月明庵)>이라는 시도 그때 나왔겠지요. 가을이 터질 듯 무르익은 개암사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적요합니다. 지금은 땅을 뚫고 나오거나 장막을 열고 새 세상을 여는 계절이 아닙니다. 갈무리하고 덮고 묻고 이별의 편지를 쓰는 계절입니다. 희게 바란 손을 흔들어 안녕이라고 말할 때입니다. 사랑을 잃고 병들어가던 여인, 매창이 가장 사랑한 계절도 이쯤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400년 살았다는 매화나무

 

개암사는 내소사와 함께 능가산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고찰입니다. 유래는 아득한 삼한시절로 올라갑니다.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으며 왕궁의 전각을 짓고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 후 백제무왕 35(634)에 묘련대사가 궁전에 절을 지으며 동쪽을 묘암사, 서쪽을 개암사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남아있는 건물에도 궁전의 흔적이 담겨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통일신라 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수하면서 고려 때에는 건물이 30여 채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이라고 시절의 바람이 그냥 지나갔을까요. 지금은 대웅보전 등 몇 채의 건물만 있는 소박한 사찰일 뿐입니다. 매창도 이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걸음걸음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 유희경을 절절히 담았겠지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하나 가슴만 먹먹할 뿐입니다. 다리를 건너고 오래 산 나무와 그 잎들을 흔드는 바람 사이를 지나 계단을 오릅니다.

 

계단 끝에서 맨 먼저 만난 것은 산마루에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바위입니다. 바로 울금바위입니다.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고 하지요. 원래는 물이 없던 곳인데 원효대사가 수도를 시작하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이 울금바위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끝까지 항전한 백제군의 지휘본부가 있던 곳입니다.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한 우금산성(禹金山城)에서 백제 유민들이 항전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쩌면 매창도 저 바위를 보기 위해 절을 찾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세월이 가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변함없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가슴에 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대웅전은 단청을 하는지 쇠파이프에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절이라도 공사장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제 고집인지라 이만치에서 너른 마당을 서성거립니다.

 

마당에는 늙고 볼품없는 나무 한 그루가, 밭은기침이라도 토할 듯 허리를 구부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행려노인처럼 세상의 관심에 비껴나 있습니다. 건성으로 대놓은 부목이 나무를 더욱 초라하게 합니다. 하지만 기왓장에 써놓은 문구를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개암사에 오신 불자님께 감사드립니다. 4백년 된 매화꽃이 아름답지요. 들어가지 마세요. 아파해요이 초라한 매화나무가 400년을 살았다는 말이군요. 매창이 세상을 떠난 지 402. 그렇다면 어린 매화나무와 매창이 만났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매화의 이름을 빌어 호를 지은 매창으로서는 더욱 반갑지 않았을까요. , 인연이란. 쪼그리고 앉아 늙은 매화나무에게 묻습니다.

부안 기생 매창을 보았는지요.”

매화나무가 바람도 없이 잎을 흔듭니다. 저는 그렇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곱더이까?

제가 이렇게 속물입니다. 기껏 묻는다는 게. 물음은 개떡 같아도 대답은 찰떡처럼 돌아옵니다.

사랑을 향한 마음이 참 장하더이다.”

 

사랑하는 여인, 매창. 그녀의 모습이 단풍 숲 사이 작은 길로 작아집니다. 뒤 한번 돌아보는 법 없더니 소실점을 지나면서 기어이 뒤태를 지웁니다. 저는 지독했던 사랑 하나에게 자꾸 손을 흔듭니다.

 

 

봄새라 치위는 가시지 않아

 

별드는 창가에 옷을 깁노니

 

숙인 머리에 눈물이 떨어져

 

옮기는 실귀가 말없이 젖는다

 

 

 

 

 

 

 

 

 

 

 

 

 

 

posted by sagang
2012. 12. 24.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매창의 묘

한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니,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게 낫겠군요. 이번에 빠진 늪은 너무 깊어,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고백하고 싶어도 고백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은, 절망이란 말조차 사치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녀의 무덤으로 향하는 걸음은 열병으로 달뜬 아이처럼 허정거립니다. 쓸쓸한 사랑이 묻힌 무덤에도 가을빛은 명주실처럼 풀어져 내립니다. 잔디 위로 떨어지는 햇살은 한 여름 그 창대 같던 날카로움이 누그러져 있습니다. 햇살은 무슨 말인가 전하려는 듯 자꾸 주변을 맴돌지만 둔감한 저로서는 요령부득일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은 매창입니다. 그녀를 말하기 전에 우선 시조 한 수를 소개합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를 다른 말로 하면 배꽃 비입니다. 심술궂은 바람에 배꽃이 펄펄 날리는 어느 봄날. 시를 읊조리며 눈을 감고 있으면 수백 년 전의 풍경 하나가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꽃비 아래에 서서 이별하는 연인. 시간은 무심해서 봄날의 꽃비는 순식간에 가을의 낙엽으로 바뀝니다. 달리는 건 시간뿐이 아닙니다. 그리운 마음에도 날개가 있어 천리의 공간을 뛰어 넘습니다. 하지만 몸은 늘 그 자리고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사랑의 덧없음으로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입니다. <이화우>는 교과서에도 실렸을 만큼 절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조를 지은 이가 바로 제가 서 있는 무덤의 주인 매창입니다. 절절한 시에 왜 사연이 없겠습니까. 지금부터 서른여덟 해를 살얼음 딛듯 살다 간 한 여인의 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매창이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제 짧은 지식 안의 매창은 <이화우>라는 시조를 지은 조선의 기생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그녀에 관한 글을 읽다가 천향(天香)이라는 자() 와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가진.‘이라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조선 중기의 여인에게 하늘 향기라는 자와 매화가 어른거리는 창이라는 호가 있었다고? 궁금증에 그냥 지나가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이 어떤 시대입니까. 가부장 중심의 견고한 틀 속에서 여성이 이름을 쓸 기회란 없었습니다. 사회활동은 극도로 제한돼서, 집 안에서 일하고 후대(後代)를 낳아 기르는 역할만 요구받았습니다. 비록 기생이라는 예외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시를 쓰고 호를 내세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궁금증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다 보니 결국 이 쓸쓸한 무덤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매창에게는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절대 사치스런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류시인이라고 말하고 보니 허난설헌도 생각납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지요.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상당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선 한 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매창이 1573년에서 1610년까지 38년을 살았고 허난설헌은 1563년에서 1589까지 27년을 살았습니다. 허난설헌이 10살 많았던 셈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허균이라는 당대의 풍운아가 그녀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나이고 매창은 허균과 정신적 사랑을 나눈 연인이었습니다. 또 비운의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점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천출의 기생과 사대부가의 여인, 그 점은 두 사람을 동일선상에 놓는 걸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겠지요. 그리고 보니 또 하나의 여류시인 황진이가 생각나는군요. 매창과는 기생과 시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황진이는 생몰(生沒) 연대가 불분명하고 매창은 분명한 족적이 기록돼 있습니다. 저는 조선중기가 부럽습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경직 속에서도 뛰어난 여류시인들을 셋이나 배출한 시대. 허난설헌, 매창, 황진이 셋을 일러 조선 3대 여류시인이라고 부릅니다. 얘기가 또 옆길로 샜군요.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이라는 이의 서녀로 태어났습니다. 아전이란 직업도 대우 받기 어려운 시대에 서녀, 즉 천출로 태어났으니 굴곡은 예고돼 있던 셈입니다. 계생(癸生) 혹은 계랑(癸娘, 桂娘)이라 불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뚜렷하지 않지만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굴레가 그녀를 자연스럽게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겠지요. 불우한 삶을 산 천재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 역시 어릴 적부터 영특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그녀는 열여섯이란 나이에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립니다.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으니 기생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겠지요. 요즘말로 데뷔를 하자마자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멀리서 시인 묵객들이 찾아올 정도였다고 하니 짐작이 갑니다. 그 시대라고 왜 질퍽거리는술꾼들이 없었겠습니까? 점잖은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있다가도 술에 취하면 일쑤 미친개가 되는 족속들이 있지요. 그런 정황을 그리듯 전해주는 시가 있습니다. 증취객(贈醉客)이라는 오언절구인데요.

 

醉客執羅衫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당겨

 

羅衫隨手裂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不惜一羅衫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어

 

但恐恩情絶 맺힌 정 끊어질까 두려워 그렇지

 

(신석정 역)

 

조금 전까지 문학이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하던 자가 치마를 들추고 옷고름을 풀려하니, 신분상 내칠 수도 없고 어쩌겠습니까. 어르고 달랠 수밖에. 시야말로 가장 품위 있는 거절 수단이 아니었을까요. 뛰어나다 한들 시골 관아에 속한 기생, 그렇고 그렇게 한 평생 살다갔으면 후세의 입에 오르내릴 일 없었으련만, 그녀에게도 결정적인 사랑이 찾아오고 맙니다. 사랑은 행복을 향한 찬가이기도 하지만 불행의 전주이기도 하지요. 매창의 사랑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생이 된지 2,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한양에서 유희경(劉希慶)이라는 이가 부안까지 놀러옵니다. 호는 촌은(村隱), 한양에서 이름 깨나 날리는 문인이었다고 하지요. 아니,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이와 함께 그 시대 최고의 시인이었습니다. 매창처럼 천민이었다고도 하는데, 아버지가 종7품의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핍박 받을 정도의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서자였는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매창보다는 스물여덟 살 많은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훗날 유희경의 증손이 간행한 <촌은집>에는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계생을 만나자 비로소 파계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랑의 불꽃이 튀었던 게지요. 촌음은 매창을 만난 날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贈癸娘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한성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허경진 역)

 

선녀가 떨쳐입고. 한 여인에 대한 찬사가 하늘에 닿습니다.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으며 꿈같은 열흘을 보냅니다. 내소사도 함께 거닐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달콤한 사랑은 짧고 쓰디쓴 이별은 길기 마련.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갈 날이 닥칩니다. 매창으로서야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첫사랑인데 어찌 그리 보내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잡을 도리도 없었습니다.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간 뒤 바로 임진왜란이 터지게 되고, 그는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나갑니다. 재회의 기약이 더욱 멀어진 것이지요. 유희경이 떠나고 지은 시조가 바로 첫머리에 소개한 <이화우>입니다. 그 구구절절한 정한이 긴 세월을 타고 넘어 바늘 끝처럼 서늘합니다. 홀로 남은 매창은 몸져눕습니다. 천리밖에 있는 한 남자를 모질게도 그리워한 것이지요. 그때 지은 시들은 그 자체로 눈물입니다.

 

自恨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허경진 역)

 

 

유희경도 어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매창을 생각하며 이런 시를 남깁니다.

 

懷癸娘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허경진 역)

 

그들의 그리움은 길고 깊었습니다. 무도한 적들이 국토를 유린한 7년간의 전쟁. 세상은 황폐하고 어수선했습니다. 10년 동안 유희경을 그리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 이귀(李貴)가 나타났으나, 그들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한 줄만 걸치고 가겠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남자를 향한 매창의 사랑이니까요. 하지만 허균과의 만남은 그냥 건너뛰기 어렵겠군요. 매창의 길지 않은 삶 중에 그가 차지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으니까요. 당대의 문호 중 하나였던 허균과 매창은 요즘 말로 플라토닉사랑을 합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썼다는 허균에게는 참 특별한 일입니다. 해운판관으로 1601년 부안에 들렀던 허균, 그때 남긴 조관기행에는 매창을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화답하였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들였는데, 이는 곤란함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황해도사로 있을 때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았다 해서 파직까지 당한 그였습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시골 기생 치마끈 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으련만 매창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혹자는 매창이 김제군수 이귀의 여자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기생을 두고 의리를 지켰다. 글쎄요. 저는 차라리 허균의 그릇이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비록 기생이지만 여자보다는 문우(文友)로 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래서 허균을 더욱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허균은 매창에게 이런 편지도 보냅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이어질 수 있었겠소. (후략)

 

유희경과 매창의 사랑과는 별도로 이들의 우정도 가슴에 닿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종말을 향해 달립니다. 유희경과 매창은 이별을 한 뒤 한 번도 못 만났을까요? 정설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그리움에 견디다 못한 매창은 어느 날 남장을 하고 길을 나섭니다. 그녀가 향한 곳은 한양. 관에 소속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기생이 먼 길을 떠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그가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입니다. 현감을 구워삶았든, 돌아와 치도곤을 당했든.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간 한양에서도 매창은 정인을 만나지 못합니다. 유희경은 그때까지도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결국 쓰러질 듯 허기진 사랑만 안고 부안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설령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녀의 사랑이 그만큼 절박했음을 전하고 싶었겠지요.

 

정설에 의하면 그들은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가졌을 뿐입니다. 헤어진 지 15년 만에 유희경이 다시 부안을 찾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15년이란 기나긴 공백이 필요했을까요? 물론 유희경에게 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10년 만에 만난 유희경은 시를 논하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노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머물다 한양으로 돌아갑니다. 매창으로는 눈물로 얼룩진 세월이 허무하고, 끝없는 사랑이 애통할 일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조선시대 관기는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고 양반도 아닌 유희경의 입장에서 매창을 소실로 맞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하지만 유희경이 그렇게 곤궁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史實)을 아는 저로서는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소실까지는 아니라도 오고가는 것조차 그리 힘들었을까요. 매창은 유희경이 떠난 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3년 뒤 그예 세상을 떠납니다. 1610.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이었습니다. 기다림조차 빼앗긴 사람에게, 생명은 붙잡을 가치가 없는 허허로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유희경이 다녀가지 않았다면 그리 쉽사리 스러지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열여덟에 만난 한 남자를 잊지 못해 스무 해 가까이 가슴앓이를 하다 세상을 뜬 여인.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슬픈 사랑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매창의 죽음을 듣고 유희경이 부안으로 달려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느 이름 없는 자는 옆에서 보기라도 한 듯 이렇게 적었습니다. “매창의 부음은 촌은에게 전해진다. 촌은은 망연자실 허공만 바라본다. 서둘러 부안으로 내려갔다. 유희경이 부안에 도착해 처음 맞이한 것은 그리운 매창이 아니었다. 매창은 이미 땅에 묻혀 보이지 않고 매창이 남긴 육필(肉筆) 시 한구절만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지나가듯 덧붙입니다. 누군가 사랑의 결말을 찰지게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유희경이 달려온 게 사실이라면, 그는 왜 그녀가 죽기 전에 올 수 없었을까요? 그녀를 사랑하는 후인(後人)은 그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와 따져 물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사랑은 늘 그렇게 조금씩의 어긋남으로 후세에 이야기 한 자락을 남기는 것이니. 참 심술스런 이름입니다. 사랑은.

 

유희경과 매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하지만 매창에 대한 뭇 사람들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사랑 역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숨어 있어서 더욱 슬픈 사랑 이야기는 다음 주로 미뤄둡니다.

 

 

 

posted by sagang
2012. 12. 17.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꽃살문에 담긴 뜻은

 

내소사 일주문

내소사 가는 길, 걷는 자의 행복으로 온 세상이 빛납니다. 굴강(屈强)한 기세로 높다랗게 솟은 전나무들이 달려 나올 듯 반깁니다. 전나무는 주변 숲이 가을색으로 치장하든 말든 신경도 안 씁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암청(暗淸)의 무게를 더해갑니다. 그 타협 모르는 색()에 대한 고집은, 눈 내리는 한 겨울에 청청하게 빛날 것입니다. 걸음걸음에도 푸른빛이 뚝뚝 묻어날 것 같아 자꾸 돌아봅니다. 내소사 전나무 길은 광릉수목원, 오대산 월정사 길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으로 불립니다. 500m 정도 이어지는 이 길에는 수령 150년 이상, 높이 30~40m의 전나무들이 소풍 길의 아이들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일주문에서 내소사까지 10분 넘게 걸어야 하지만 전나무들의 열병식 덕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눈이 가는 곳마다 황홀한 풍경이 그림처럼 이어지는 변산반도지만, 내소사 전나무 숲이 없었다면 이 빠진 듯 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전나무 숲이 생겼을까요? 이 정도 숲이라면 일부러 심은 게 틀림없을 텐데. 이유가 없을 수 없지요. 원래 대가람이었던 내소사는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됐다고 합니다. 바다를 눈앞에 두었으니 왜적의 침탈을 피할 수 없었겠지요. 왜가 물러간 뒤 다시 절집을 짓기는 했지만 옛날의 위용을 되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전한 빈 자리에 전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나가면 되련만, 또 그놈의 궁금증이 발동하는 바람에 기어이 손을 꼽아보고 맙니다. 임진란에 이은 정유재란이 1598년에 끝났으니 지금으로부터 414년 전. 그런데 왜 나무의 수령은 150년밖에 안되지? 둘러봐도 어긋난 세월을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땐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 절집을 짓고 나무를 심은 걸까? 아니면, 저들은 원래 심었던 나무들의 두어 대() 후손일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절에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알밤을 혼자 주운 아이처럼, 모처럼 길을 독식한 행복을 만끽합니다. 큰 숨을 들이쉴 때 감긴 눈을 뜨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뗍니다. 전나무 특유의 향기가 온몸을 감쌉니다. 가슴을 활짝 열고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십니다. 향기가 모공마다 파고들어 가슴까지 푸르게 적십니다. 이곳은 여름밤이 되면 별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그 사이로 반딧불이 유영한다고 합니다. 그 풍경을 그려보는데 왜 자꾸 천국이 떠오를까요?

 

조금 걷다가 밑동만 남은 나무를 발견합니다. 천재지변을 당했는지 한 살이를 마치고 세상과 이별했는지 모르겠지만 싸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가로지릅니다. 세상에는 전설 한 자락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한 존재가 떠난 자리엔 슬픔이 고이기 마련입니다. 몸을 낮춰 그루터기를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하나 둘 셋. 어찌 그 긴 세월을, 가물거리는 눈으로 헤아리려 한 것인지. 조금 세다가 포기합니다. 나이테 속에는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방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간격과 모양. 조금 더 걷다가 또 걸음을 멈춥니다. 이번엔 더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베고 지납니다. 전나무 몇 그루가 뿌리를 온전히 드러낸 채 쓰러져 있습니다. 땅 속을 벗어나, 줄기와 잎을 키우지 못하는 뿌리는 더 이상 뿌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니 뎅겅뎅겅 머리를 잘린 나무들도 많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지난여름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이 저지른 짓이겠지요. 볼라벤이니 산바니, 이름도 낯선 큰 바람들은 이 작은 반도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마침 이곳이 바람이 지나가고 싶은 길이었나 봅니다. 안온하던 숲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나무들은 하나 둘 부러지고 쓰러졌겠지요.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그 많은 길을 두고, 바람은 하필 이 길로 지나갔을까요? 그걸 따져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바람이라 했거늘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바람이야 자신이 가는 곳이 곧 길이지요. 하필 그 길에 나무들이 서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기억이 지워져서 그렇지 이 숲이라고 시련이 왜 없었겠습니까? 어느 때인가는 더 무서운 바람이 지났을 수도 있고 우듬지의 눈을 이기지 못해 뚝뚝 가지를 잃은 날도 부지기수였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씨줄 날줄로 직조되고, 그 직조물을 인생이라 부릅니다. 느닷없이 바람이 들이쳐서 뺨을 때리거나 넘어트리거나 아예 부러트리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불행을 원망하며 울부짖어봐야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바람도 그냥 지나가는 그물에, 불행인들 걸리겠습니까? 원망이나 한탄보다는 추스르고 일어나는 게 먼저여야겠지요. 눈 속에 피어난 꽃을 칭송하는 건 시련을 이기고 선자에 대한 경의이기도 합니다.

 

태풍에 머리가 뚝뚝 꺾인 나무들

제겐, 유별날 정도로 젊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이제 젊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습니다. 그렇게 인연 속을 걷다 보니, 40대에 결혼식 주례를 10건 가까이 해치운어처구니없는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건 들을 이야기도 많다는 의미입니다. 행복한 이야기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불행하고 아픈 이야기가 더 많기 마련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제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합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의 불화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온 친구도 있습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생사의 문턱을 오락가락 하는 이도 있고, 이혼 뒤의 아픔을 안고 찾아오기도 합니다. 직장 문제는 가장 빈번한 소재입니다. 상사와의 불화, 막연한 장래, 이직의 유혹과 불확실성.

 

어떤 친구들은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을 안고 찾아옵니다. 애써 울음을 구겨 넣지만 통곡보다 더 아프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타나 편작 같은 명의(名醫)가 아닌 저로서는 그 고통 앞에서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 땐 그저 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아픔에 시정(市丼)의 잣대를 들이댈 일이 아니라는 것, 당의(糖衣) 같은 위로가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심력을 다해 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동조(同調)시키는 것입니다. 동조나 공감은 동정이나 연민과는 다르지요.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을 누군가가 이해하고 있다는, 혹은 공유하고 있다는 안도는 때로 큰 위로가 됩니다. 가끔은, 앓고 난 아이에게 미음 먹이듯 아주 조금씩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합니다.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지.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이도 어느 순간 조금씩 수긍하기 시작합니다. 새로 발견한 스스로를 낯설어하기도 합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하다고 절규하는 친구들에게는 한마디밖에 해줄 말이 없습니다.

고통이 거의 끝났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까.”

 

내소사 부도들

가장 힘든 건 고치 속에 갇힌 친구를 만났을 때입니다. 당신은 囚人(수인)이라는 한자를 기억하는지요. ()라는 글자의 모양을 보면 사람()이 사방을 둘러친 공간()에 갇혀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건 그 감옥을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감옥 속에 들어가 꼼짝도 안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곳은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으면 소멸의 시간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자신을 세상 밖으로 데려갈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뿐이거든요. 어떤 이들은 스스로 사랑받지 못했음을 한탄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일이지요? 이야기를 듣다보면 남들보다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살아온 이도 많습니다. 망각의 강이라도 건넌 듯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진정 가난한 이들은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 한 가닥에도 눈물겨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시 한 줄뿐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이해인 <어떤 결심>

 

내소사 벚나무길

쓰러진 나무 앞에서 서늘한 가슴을 추스른다는 게, 너무 멀리 나가고 말았습니다. 나무든 사람이든 쓰러지지 않는 세상이길 소망하지만 자주 어긋나고 맙니다. 설령 그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질서라고 하더라도 눈앞에 두고 보는 일은 고통입니다. 예까지 왔으니 내소사를 보고 가야겠지요. 전나무 숲을 벗어나면 늙은 벚나무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고운 가을빛 속에서 나무들은 이별의 예감으로 수런거립니다. 이들은 이별을 거스르려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봄부터 여름까지 애써 피워낸 융성을 지워 내년을 기약합니다. 이들의 이별은 존재의 존속을 위한, 새로운 탄생을 위한 합의입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한번 쥔 것을 절대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고 가는 숙명이겠지요.

 

내소사 경내의 당산나무절 마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시선을 당기는 게 커다란 느티나무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요? 그냥 느티나무가 아니라 분명 당산나무입니다. 금줄을 칭칭 동여맨 것도 그렇지만, 당산나무는 나름의 특별한 기운을 갖고 있거든요. 절에 당산나무가? 그러고 보니 일주문 앞에서도 당산나무를 본 기억이 납니다. 둘이 참 많이 닮았네요. 모를 땐 물어볼 수밖에. 그렇답니다. 당산나무가 맞는다는군요.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는 할아버지 당산나무고 일주문 밖의 나무는 할머니라는데, 할아버지는 1000년을 살았고 할머니는 700년을 살았답니다. 절 안의 당산나무, 좀 낯설지 않은가요? 믿음의 대상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제 눈에는 왜 이리 보기 좋지요? 네 신(), 내 신 따지며 싸우는 것보다 이렇게 함께하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쓴 터키 여행기에서 여러 번 한 소리지만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안에는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교 문화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제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풍경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공존이 있었군요. 미신이라고, 그 구박을 받던 당산나무가 절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모습. 이거야말로 포용이고 어울림이고 사랑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렇게 조화롭게 흐른다면 싸우고 미워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에서는 해마다 스님과 주민이 어울려 당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날짜를 알아봐서 꼭 참가해야겠습니다.

 

내소사 대웅전

내소사 경내

능가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곳에 자리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633) 창건됐다고 전해집니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내소사를 한국의 5대 사찰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산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이 매력이라고 했던가요? 내소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절을 중창할 때 단청을 하기 위해 화공이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나올 때까지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하지만 한 달이 되도록 화공이 나오지 않자 궁금증을 못 견딘 사미승 하나가 살짝 법당 문을 열었다지요,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은 이렇게 곳곳에 전설을 낳습니다. 사미승이 보니 화공은 없고 영롱한 새(觀音鳥 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더랍니다. 사미승을 본 새가 날아간 건 예견된 결과. 그래서 지금도 단청 한 부분이 미완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전설은 두 가지 교훈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인간의 천박한 호기심에 대한 경계겠지요. 다른 하나는 비움의 미학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는 미완성을 아쉬워하지만, 제게는 그 비움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붓질처럼 보입니다.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되레 아름답다는말도 안 되는 역설인가요?

 

내소사 대웅전 꽃살문

비어있음은 대웅보전 외양에서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보물 291호인 내소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단청을 안 한 건지, 세월이 벗겨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다른 절들이 화려함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일 때, 나무 고유의 색깔로 비바람을 견뎌왔다는 게 또 하나의 비움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소사를 상징하는 두 가지를 꼽는다면 전나무 숲과 꽃무늬 문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양 중의 으뜸은 꽃 공양이라고 했던가요? 여덟 짝의 꽃무늬 문살은 막 피어나는 꽃잎의 요철을 반영한 정교한 조각으로 마음을 당깁니다. 나무의 질감은 세월에 씻겨 무뎌졌지만, 꽃들은 아침이슬에 피어난 듯 생생합니다. 모란과 연꽃 수천 송이를 연년세세 피워내어 사바세계의 어리석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꽃 하나하나엔 깨달음을 희구하는 서원이 담겨 있을 테지요. 저도 꽃살문 앞에 서서 서원 하나 세워봅니다.

 

말로 말하지 않고, 바람으로 듣지 말고, 밥으로 마음 부르지 않도록.

posted by sagang
2012. 12. 10. 08:5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소금 꽃이 필 때까지

 

염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큰길 옆 휴게소 마당에 눈처럼 소금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염전에서 대파(소금물을 미는 고무래)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보다는, 소금도 팔고 대처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테니까요. 하지만 제 말은 괜한 억지입니다. 염부에게 소금을 만드는 일은 내림굿과 같아서,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태양도 바람도 염부도 기다리는 시간일 뿐입니다.

 

 

이곳은 전남 부안읍 진서면 진서리. 보통은 그냥 곰소라고 부릅니다. 부안읍에서 서남쪽으로 6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 마을입니다. 원래 곰소염전으로 이름을 좀 날렸지만 최근에는 지척에 있는 곰소젓갈단지가 더 유명해졌습니다. 대처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젓갈을 사러 올 정도니까요. 저는 곰소염전의 석양에 반해서 이곳을 가끔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풀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왜 곰소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설마 산에 사는 곰 때문에? 충남 공주의 옛 이름이 곰나루(熊津), 곰재니 웅산(熊山)이니 이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있으니 한번 넘겨짚어 보는 것입니다. 헌데, 확인을 해보니 그 설마가 맞는답니다. 지금은 육지인 곰소가 옛날에는 세 개의 섬이었다고 하네요. 그중 한 곳에 곰 두 마리가 살았답니다. 섬에 곰이 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청구부터 앞세울 일은 아닙니다. 전설은 현실보다 더 너른 품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다가 섬이 육지가 됐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전설이 아닌 역사의 영역입니다. 이곳 역시 일제의 수탈기지였다고 합니다. 농산물을 반출하는 항구로 쓰기 위해 진서면 연동마을과 곰소, 작도마을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고 도로를 만들었답니다. 그 와중에 곰은 어디론가 떠났겠지요.

 

오늘은 일진이 썩 좋지는 않은 날입니다. 날씨조차 확인하지 않고 길을 떠나는 제 준비성 탓이지요. 우선 하늘이 저를 반기지 않습니다. 구름이 저렇게 잔뜩 끼었으니, 염전으로서는 뒷짐이나 지고 있을 수밖에요. 오늘따라 바람도 마뜩치 않고 철도 어긋나 있습니다. 염전이라고 사시사철 소금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보통 4월 중순에 시작해서 9월말까지 바닷물을 졸이는데 지금은 이미 10월입니다. 하지만 곰소염전은 아직 소금걷이를 끝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을 햇볕도 잘만 거둬 쓰면 소금가마나 만들어내니까요. 그 증거로 결정지에는 막 엉기고 있는 소금이 보입니다. 염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염창(소금창고) 옆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기다려볼 심산입니다. 원래 염전은 기다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이곳에서 바다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타래 풀 듯 길길이 뻗어 나간 수로들이,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염분 가득 머금은 바닷물을 데려 오겠지요.

 

바닷물을 가둬두면 소금이 생기는 줄 알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복잡한 절차와 숱한 땀이 필요합니다. 먼저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저장지에 가두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저장지의 바닷물은 곧 증발지로 갑니다. 1차 증발지에서 어느 정도 졸여진 소금물은 또 2차 증발지로 보내집니다. 갈수록 수분이 증발하면서 염도가 높아지지요. 2차 증발지를 거쳐 염도가 정점에 오른 바닷물은 마지막으로 결정지에 도착합니다. 볕이 좋은 날 새벽에 결정지로 들어간 소금물은 하루 종일 졸이고 졸여져 저녁 무렵이 되면 하얗게 엉기기 시작합니다. 이걸 일러 소금 꽃이 핀다고 하지요.

 

소금 꽃은 홀로 피어나는 게 아닙니다. 햇볕은 물론 적당한 바람과 염부의 땀과 시간을 품어야 피는 꽃입니다. 염전에서는 바닷물만 졸이는 게 아니라 시간도 함께 졸입니다. 시간의 정수(精髓)가 순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요. 그래서 6각형의 작은 결정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탄을 아낄 수 없습니다. 소금은 계절, 햇볕, 바람은 물론 만들어지는 시간에 따라 굵기와 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북서풍이 부는 날 엉긴 소금은 입자가 단단하고 굵으며 동풍이 부는 날 거둔 소금은 밀가루처럼 곱습니다. 조건에 따라 맛이 쓴 소금도 있고 짜기만한 소금이 있는가 하면 짜면서 향기로운 소금도 나옵니다. 좋은 소금을 만들려는 염부의 일상은 고단합니다.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바닷물과 씨름합니다. 그들이 흘리는 땀은 소금만치나 짭니다. 염부의 몸이 까맣게 탈수록, 더욱 하얗고 맛좋은 소금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소금을 만드는 과정이 매번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비라도 내리면 염부들은 마음까지 까맣게 탑니다. 애써 조린 소금물에 빗물이 섞이면 만사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해도 바닷물을 열 말 가두면 한 되의 소금밖에 안 나온다고 합니다. 한여름 햇볕이 좋을 때는 사나흘 만에 거두기도 하지만 봄가을은 보통 열흘에서 스무 날까지 걸립니다.

 

엉기기 시작한 소금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발췌)

 

강화도에 삶터를 튼 시인 함민복은 소금 한 되를 300원짜리 싸구려 인세에 비했지만, 시도 소금도 눈물 겹게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소금 속에 담겨 있는 열 말의 바닷물도 기억해야 합니다. 소금은 생명입니다. 얼마나 귀했으면 하얀() ()이라고 불렀을까요. 고대 중국이나 로마에서는 국가 전매품으로 아무나 거래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사에서 소금 전쟁도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지요. 제 할머니 역시 소금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어렵게 소금 한 포대를 들여놓으면 토방 기둥에 기대놓고 간수를 받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쓴맛 나는 간수를 빼야 소금이 제 맛을 내거든요. 물론 그렇게 받아놓은 간수도 두부를 만들 때 응고제로 긴요하게 쓰였습니다. 요즘은 무기약품의 중요한 자원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오가는 길에 소금포대를 한 번씩 쓰다듬었습니다. 사랑만 주면 소금포대가 쑥쑥 자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많던 염전도 보기 어려워진지 오랩니다. 소금의 질이 좋기로 소문난 곰소염전도 새우양식장으로 둔갑하고 80ha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싼값으로 무장한 중국산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사양길의 염전들, 오래 묵은 존재 특유의 진득함으로 시대의 격랑에 맞서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요. 자신의 역할을 방기(放棄)해본 적 없는 그 진득한 존재들이 생명을 보듬어왔다는 사실은, 자주 망각의 늪 빠져 존재를 지웁니다. 그게 안타까워 저는 저무는 염전에 오랫동안 시선을 담가두고 있습니다.

 

 

염부는 끝내 오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파질이 들어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건 포기한지 오래지만,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달콤하고도 쌉쌀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염전에 비친 구름과 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 전부입니다. 누군가 제 기다림을 헤아린 걸까요?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마치 이불 개듯 차곡차곡 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저로서야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반가운 일이지요. 기다림은 이렇게 예기치 않는 행복을 주기도 합니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벌건 해가 얼굴을 내밉니다. 고대하던 곰소염전의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정지에서 혼자 자맥질하는 저녁 햇살이 수돗물을 그냥 틀어놓은 듯 아깝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저녁나절의 햇볕은 바닷물을 졸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쪽 하늘이 벌겋게 타오르면서 염전에도 황금빛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저도 분주해집니다. 얼마나 별렀던 풍경인데요. 부리나케 둑으로 올라가 셔터를 누릅니다. 산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키를 부풀립니다. 먼 산들은 자꾸 흔적을 지워가고 붉은 해는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어느 순간 주변 공기가 팽팽해지더니 붉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빈 하늘에 대고 마지막 셔터를 누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공복이 전신을 훑습니다.

 

작고 허름한 식당을 골라 들어갑니다. 오래 떠돈 자들은 호화로운 음식점을 피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허름해 보이는 집에서 의외로 입에 맞는 음식을 만날 가능성이 높거든요. 이 동네는 젓갈백반이 유명합니다. 1인분이라는 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야 없지요. 손님은 저 하나뿐입니다. 젊은 여자와 허리 굽은 안노인이 단 하나의 손님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고부간일까, 모녀간일까? 심심한 저는 괜한 걸 점쳐봅니다. 저만치 서서 밥 먹는 걸 지켜보던 노인이 다가오더니 젓갈을 고루고루 더 얹어놓습니다. 젊은 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노인의 마음이 음식의 맛을 더합니다. 이런 경우도 악순환이라고 하나요? 즐거운 악순환이겠지요. 먹으면 또 채우고, 준 사람 실망할까봐 또 열심히 먹고. 입안이 짜고 매운 기운으로 얼얼할 지경입니다. 노인과 나그네의 은밀한 거래는 젊은 여자의 등장으로 끝나고 맙니다. 주방에서 나오던 여자의 눈동자가 고등어 뱃바닥처럼 하얗게 변합니다. 노인은 생선전의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 칩니다. 아마 초범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혼자 오는 손님만 보면 저러신다니까.” 젊은 여자가 입속에서 웅얼거립니다.

 

그녀 역시 야박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혼자 먹는 밥상에 짜디짠 젓갈을 자꾸 얹으면 결국 남지 않겠느냐는 걱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노인들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자식 같은 사람은 자식이나 진배없고, 그 입에 밥이 들어가면 흐뭇한 것이지요. 옛날 제 할머니가 그랬고, 지금의 제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괜히 무람해진 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혼자 서 있던 가로등이 씨익 웃습니다. 밤은 까만색으로 자꾸 무게를 더합니다. 숙소로 가는 길, 바람은 차갑지만 마음은 포근합니다. 새 울음소리가 제법 깊어졌습니다. 숙소의 창문을 조금 열어놓습니다. 희미하게 비껴드는 달빛을 당겨 덮고 모처럼 꽃잠에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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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조기가 우는 까닭

 

왕포마을 전경. 바다가 저만치 멀다.

지금은 썰물때,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멀고 파도소리 오랜 추억처럼 아득합니다. 작은 배 몇 척이 갯벌에 누워 쪽잠을 청합니다. 지난 밤 제법 먼 길을 다녀왔는지 온몸에 고단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바닷가 마을엔 가을이 일찍 와 있습니다. 은행에서 저금 찾듯, 나무에서 갖가지 색깔을 인출해 치장한 잎들이 훨훨 날아오릅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허공에 가득합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이별의 아픔은 없습니다.

 

 

왕포(旺浦)마을. 한때는 왕포(王浦)라고 불렸다니, 왕에 어울리는 무언가 있을 법해서 한 바퀴 돌아보지만 그저 조용한 어촌일 뿐입니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전북 부안군 진서면 문호리.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속한 조그만 마을입니다. 제가 이 마을을 찾은 건 마실길을 걷기 위해서입니다. 마실길은 서해의 진주라 부르는 변산반도를 따라 걷는 해안 둘레길입니다. 개복숭아 꽃 곱던 지난봄, 3구간 1코스인 아홉구비 돌아가는 길을 걸은 뒤 그 풍경에 반해 오늘은 3구간 2코스의 출발점에 섰습니다. 왕포에서 곰소염전까지 이어진 길의 이름은 제방 따라 청자골 가는 길이랍니다. 이름들도 참 예쁘게 짓습니다. 12km 거리에 3시간 걸린다고 써놨는데 걸어봐야 알 일입니다.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고통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 그림자와 대화하며 걷는 시간은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가 존귀한 충만의 시간입니다. 출발 직전, 느닷없이 정적을 깨는 소리에 풍경은 저만치 물러나고 각박한 삶이 코앞에 섭니다. 골목 안쪽에서 주민들끼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가는데 걸리적거렸던 모양이지요? 그런 것도 싸움이 될까 싶은데도 목소리는 갈수록 날이 섭니다. 퍼붓는 쪽은 원주민인 듯 하고, 수세에 몰린 쪽, 염치없이 나뭇가지를 담 밖으로 내보낸주민은 타지에서 들어온 모양입니다. 시골살이를 꿈꾸고 있는 제게는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싸움 구경이 발목을 잡아도 갈 길은 가야지요. 낮은 담 사이 골목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납니다. 길은 언덕을 향해 굼실굼실 앞서 갑니다. 사람 대신 늙은 감나무가 나그네를 전송합니다. 누군가 감춰뒀던 보석을 달아 놓은 듯, 작은 감들이 가지마다 반짝거립니다. 언덕에 오르자 저만치 바다가 보입니다. 바닷물은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저 바다를 칠산바다라고 부릅니다. 연평어장과 함께 우리나라 2대 조기어장으로 이름을 날렸지요. 그리 오래지 않은 날인데도 지금은 전설처럼 멀기만 합니다. 전설, 이라고 소리 내어 말했더니 갑자기 조기울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칠산바다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조기가 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저는 설마 했는데, 관해기(주강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라는 책을 보니 정말로 조기 우는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산란 때면 시끄러워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지요. 그 울음의 정체는, 참조기가 부레 근육을 움직여서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신호라는데, 그걸 운다고하는 것이지요. 어부들은 그 조기울음을 고기 잡는데 이용했다고 합니다. 구멍 뚫린 대나무 통을 바닷물에 넣은 뒤 울음소리로 위치를 파악해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겐, ‘부레음이라는 과학적 설명이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그저 울음으로 기억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요. 조기들은 왜 우는 것일까요?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아 바다를 짜디짠 눈물로 적셨을까요.

 

영광굴비 혹은 법성포굴비라는 불세출의 이름을 남긴 칠산바다는, 법성 근역의 칠뫼(七山)부터 변산반도 앞 위도까지 아우르는 넓은 바다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그 북쪽 끝에 가까운 곳이지요. 칠산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조기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 증거로 일찍이 신안 지도군수를 지낸 오횡묵(吳宖默)이라는 이는 1897년에 제작한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칠산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고기를 사고팔며 오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연평어장이 그렇듯 칠산어장도 지금은 쓸쓸한 바다일 뿐입니다. 영광굴비, 법성포굴비도 칠산바다 출신들은 아니지요. 잠을 앗아갔다는 조기의 울음소리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을 <풍장소리>도 그저 바람결에 몸을 싣고 빈 바다나 오갈 뿐입니다.

 

얼시구 좋다. 절시구 좋와, 얼시구나 좋네.

헤헤 허야허아 허어 허어허어 좋와요.

칠산바다에 들어온 조구

우리배 망자(網子)로 다 들어왔다.

에헤 좋네. (중략)

들물에 천냥, 썰물에 천냥

안안팟 네물에 사오천냥 실었다.

에헤 좋와요.

에헤 허아허아 허아 허아허아 좋와요. (하략)

 

조금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면 여러 길들이 각기 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게 선명합니다. 어느 길은 술 취한 50대 가장의 넥타이처럼 풀어져 있고 또 어느 길은 사관생도의 바지 주름처럼 절도 있게 뻗어나갑니다. 세상은 낮잠에라도 든 듯 조용합니다. 낯선 발자국소리에, 노란 햇살이 놀란 꺼병이처럼 갈대숲으로 숨습니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을 나눈 강아지

길은 긴 제방과 만납니다. 제방 옆 작은 집 마당에서 꼬박꼬박 졸던 개 한 마리가 나그네를 보더니, 사위 맞는 장모 걸음으로 달려옵니다. 아까 동네에서 만났던 개들의 앙칼진 경계는 애당초 배운 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봄 이곳에서 보았던 강아지들 중 한 마리인 것 같습니다. 조막만 하더니 제법 커서 걸음마저 으쓱거립니다. 어미와 형제는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모양입니다. 달려들어 비비고 뛰고 온갖 재롱을 다 떱니다. 만남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몸짓입니다. 개와 저 사이의 벽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경계를 지우고 마음을 내려놓은 만남만큼 편안한 게 있을까요. 소통이니 화합이니 하는 수사의 번거로움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아무리 행복해도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지요. 아쉬운 걸음을 떼는데 녀석이 졸졸 따라옵니다. “애야, 그러다가 길 잃을라.” “걱정 마세요. 동네에서 길 잃는 개 봤어요?” 그도 그렇군요. 제방 중간쯤에서 쓸쓸하게 돌아가는 녀석을 인사 차 불렀더니 금세 돌아서서 달려옵니다. 저도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안 부르고 그냥 갔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그런 반복이 여러 번 계속되다 제방 끝쯤 닿아서야 진짜 이별을 합니다. 사람이나 개나 외로움이 주는 고통은 뼈에 각인되는 것 같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라고, 숙명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해도, 행복으로 치환하는 경지는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관선마을 전경

길은 길을 밟으며 자꾸 앞으로 갑니다. 관선(觀仙)마을이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면서 자꾸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풍경이 낯설지 않은 걸 지나서, 언젠가 이 길을 걸어간 것 같다는 기시감마저 듭니다. 무엇 때문일까? ! 순간 떠오른 기억 한 자락에 무릎을 치고 맙니다. 정말 그렇군요. 어릴 적 할머니와 걷었던 그 길을 꼭 닮아 있습니다. 할머니와 걷던 길수룽구지로 가던 길. 그 길이 수십 년 만에 제 앞에 돌아와 있습니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제게 애써 가벼움을 두른 한마디를 던집니다. “수룽구지 안 갈라냐?” 저는 달다 쓰다 따라 나섭니다. 가부 간을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만한 아이였으니까요. 그런 때 할머니 곁에 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수룽구지는 조그만 포구였습니다. 조금 전 지나온 왕포나 관선마을과 비슷했지요. 어촌보다는 산촌에 가까웠던 제 고향에서는, 손이 잠시 남으면 그곳으로 새우젓이나 비린 것을 사러갔습니다. 돈은 밭에서 거둔 푸성귀나 시금털털한 과일이면 충분했습니다. 농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과 어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쉽게 교환이 됐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빈손이었습니다. 속바지에 달아놓은 호주머니에는 아끼고 별렀던 동전 몇 닢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소주 두어 잔 값, 어린 손자이자 동행인 제 입에 물릴 사탕 두어 개 값. 그것만 가지고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저도 그 뒤를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워낙에 말이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그런 날에는 침묵이 길었습니다. 그렇게 걸은 길이 십리였는지 이십 리였는지는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는 조금 벅찬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들을 지나고 산을 넘어 걷다보면 갯내음이 먼저 달려와 코를 찌르고, 곧 이어 저만치 작은 포구가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수룽구지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할머니는 갯것을 사고파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두어 평쯤의 허름한 가게, 그 시절엔 그런 곳을 송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소주를 시켰습니다. 제 입엔 ‘10리사탕이라고 부르던, 단단하고 하얀 사탕을 물렸습니다. 가게 주인이 병마개를 빼고 작은 유리 잔 가득 소주를 부어주면, 할머니는 조금 전 다급했던 시간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마셨습니다. 대포나 다모토리(선술집에서 큰 잔으로 파는 소주를 가리키는 우리 말)에는 어림도 없는 눈깔만한 잔. 가슴에 일렁이는 불길을 잡기에는 턱도 없었겠지만 그 순간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약이었을 겁니다. 저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쪽마루 끝에 앉아 작은 사탕 하나를 아끼면서 빨았습니다. 안주는 가게에서 내놓는 새우젓이 전부였습니다. 소주와 새우젓, 지금 생각하면 어색한 조합이지만 갯가에서는 별로 낯설 것도 없었습니다. 10리는커녕 앉은 자리에서 녹아버린 사탕 때문에 허무함에 시달리던 저는 새우젓을 곧잘 집어먹었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라며 웃었습니다. 농담이라도 빌려 손자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송방에서 나와 할머니가 가는 곳은 작은 배 몇 척이 노고를 내려놓는 포구였습니다. 그곳이라고 당신을 기다려주는 게 있을 리는 없습니다. 바다 쪽에 시선을 두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가끔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확인하려고 애써봤지만 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무심하게 오가는 갈매기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 떠가는 배나 구름을 보고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울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조바심으로 저는 애먼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울지 않았고, 대신 갈매기가 머리 위를 맴돌며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당신도 어린 손자의 초조를 알고 있었겠지요. “이젠 그만 가자.” 어느 순간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생솔가지를 태운 듯 매캐한 내음이 묻어있었습니다. 비린 것 한 손 들지 않은 가난한 귀가는 쓸쓸했습니다. 소주 두어 잔 외에 하루 종일 빈 속이었을 할머니의 걸음은 자주 허청거렸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게 흔들리는 걸음과 달리 당신의 표정은 조금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소풍이 할머니에게는 설움 받힌 가출이었고 최소한의 일탈이었고 오욕을 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방탕과 방랑 사이를 오가다 빚더미만 남겨놓고 떠난 남편, 현실에 무너진 큰 아들, 집을 떠나 소식조차 없는 작은 아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잊지 않는 빚쟁이들. 무엇보다 남들이 씨를 뿌리고 거두는 수많은 논과 밭이, 한때 자신의 소유였다는 기억이 가장 큰 절망이었겠지요. 하지만 할머니는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습니다. 소라껍질 같은 단단함이 그나마 집을 지탱하는 힘이었으니까요. 저를 불러 수룽구지에 가는 날은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었겠지요. 소리 없는 통곡을 위해 나선 길이었겠지요. 산길 하나 넘으며 화를 삭이고 들길 하나 건너며 원을 내려놓고나머지 찌꺼기는 바다에 떨치는. ! 늦은 깨달음은 더욱 큰 아픔입니다.

 

수룽구지가 수룡동이라는, 의외로 멋진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먼 훗날 알았습니다. 차를 타고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을 지나는데, 길가의 수룡동이라는 입간판이 시선을 당겼습니다. 저는 그 수룡동이 과거 할머니와 가던 수룽구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음운변천을 거쳐 수룡동이 수룽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느낌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수룽구지의 실체에 대해 약간의 의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어릴 적 꿈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까. 가족 중에도 수룽구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수룡동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송방이라 부르던 가게와 갈매기 날던 선창과 설움 가득하던 하늘을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지만, 그냥 미뤄두기로 했습니다. 첫 사랑은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듯이, 환상 같은 기억 하나쯤은 남겨둘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은 절망이 온몸을 조일 때, 비린내 나는 선창에서 보았던 할머니의 처연한 눈을 생각합니다.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 이명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마음을 기댑니다.

 

어쩌다 보니 길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하필 오늘 같이 기분 좋은 걸음에 왜 그 칙칙하던 날이 떠올랐을까요. 살다 보면 이를 악물고 갈무리해서 삭혀야 하는 아픔이 있고 털어놓아서 덜어지는 아픔도 있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또 절실하게 그리운 역설의 먼 시간. 오늘은 수십 년 지고 다니던 짐 하나 내려놓고 갑니다. 짐 내려놓기는 여행길 내내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진정한 목적 중 하나가 내려놓고 가벼워지기이고, 가벼워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치유니까요.

 

논길을 지나고 억새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는 모롱이를 도니 다시 바다가 나옵니다.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만치 보이는 작은 항구가 곰소항이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젓갈단지, 그리고 곰소염전이 나옵니다. 작은 항구, 손이 아닌 눈으로 만져보기 위해 이만치 떨어져 앉습니다. 혼자 걷다보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바다는 멀리 있습니다. 긴 이별에 지친 갯벌은 침묵으로 엎드려 있습니다. 침묵으로아니군요. 침묵만 본 건 제가 부주의한 탓이었습니다. 갯벌은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폐타이어, 플라스틱 조각, 슬레이트, 가스통까지 온갖 쓰레기가 진을 치고 있는 이 죽은 듯한 갯벌에도 작은 생명들의 화려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손톱만한 게, 짱뚱어,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이 전해주는 충만과 열락(悅樂). 힘을 내어 다시 휘적휘적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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