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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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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저물어 가는 카쉬의 바다. 저 한 가운데의 파운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낮에 보았던 카펫 가게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터키의 유료화장실

이국 바닷가 마을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뱃가죽은 자꾸 등이 그립다고 아우성이다. 오래 전 헤어진 다큐팀은 어디서 무얼 하는 걸까. 섬 그늘로 굴 따러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목을 늘리고 두리번거려보지만 지나가던 바람만 뺨을 스칠 뿐이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눈 온데 서리가 또 온다(雪上加霜)’는 말을 믿지 않았건만, 이 참을 수 없는 요의(尿意)? 에구, 결국 올 게 왔구나. 터키에서는 거의 모든 공공화장실에서 돈을 받는다. 그래서 호텔이나 음식점을 갈 때마다 볼 일을 보는 게 좋다. 나 역시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 정도 돈이 없다거나 아낄 요량이라기보다는 돈 내고 볼일을 본다는 게 영 정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남의 집에 마실을 갔다가도 똥, 오줌 마려우면 집에 와서 처리했다는 전설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그 귀한 걸 주는데 돈을 내라니. 하지만 유료화장실에 대해서 별로 큰 소리 칠 건 없다. 우리나라도 몇 십 년 전까지 공중화장실 앞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 저들도 먹고 살아야지. 이번 한번은 인심을 쓰자. 두리번거리며 찾다보니 저만치 화장실 표시가 보인다. 골목을 한참 꺾어 들어가니 드디어 목적지. 들여다보니 노인이 안에 앉아서 돈을 받는다. 어느 곳은 밖에다 작은 책상 하나 달랑 놓고 돈을 받기도 한다. 입구에 가격을 써놓았다. SHOWER 6TL/3EURO, WC 0.50Cent.

내 주머니를 털어간 공중화장실. 돈을 받는만큼 관리가 잘돼 깨끗했다.

샤워는 6리라. 볼일만 보면 50센트.

, 여기서는 공중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수도 있구나. 바닷가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 이용은 50센트라니까, 300원이 조금 넘겠군. 돈을 내는데 노인이 내 얼굴을 보다 싱긋 웃는다. 저 미소의 의미는? 너처럼 불쌍하게 생긴 녀석은 말만 잘하면 공짜로 해줄 수도 있었다는? 그래, 이왕 돈 주고 들어온 거 본전이나 뽑자. 길고 길게 볼 일을 마친 뒤 화장실에서 나오니 다큐팀이 기다리고 있다. 야호! 이젠 호텔로 갈 수 있다. 호텔은 그리 멀지 않다. 헌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에구구! 신음이 절로 터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PRINCESS HOTEL. 이름도 좋고 전망도 좋은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객실은 3층에 있는데 거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없단다. 저기까지 캐리어를 들고(계단이니 끌고가 아니다)가야한다는 말인데, 지칠 대로 지친 몸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다. 그나마 나는 캐리어가 하나지만 촬영팀 친구들은 저 장비를 다 어쩐담. 하지만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벨보이들이 하나 둘 내려온다. 작은 호텔은 보통은 벨보이를 두지 않는데, 이 곳은 워낙 조건이 험하니 짐만 전문으로 옮기는 친구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신 1달러는 기본. 지금 1달러가 문제냐? 오케이!! 호기롭게 짐을 맡긴다. 하지만 키를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또 한 번 예사롭지 않은 풍경 앞에 망연해지고 만다.

카쉬에서 하루 신세를 졌던 호텔. 여인숙 수준이지만 밤풍경은 좋았다.

여인숙 같은 호텔

우리나라 70년대 여인숙에 들어선 느낌이 이럴까? 방은 엉덩이 큰 사람은 드나들기도 어려울 만큼 비좁은데 화장실에 물은 뚝뚝 떨어지고 샤워기는 아무리 돌려도 감감무소식이다. 이게 원래 장식용이었나? 답답해서 문이라도 열어둘까 했더니 발코니로 통하는 문은 황소고집이다. TV는 구식 중의 구식(사실 볼 일도 없지만)이라 켜질까 의문이고 냉장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다른 물건들도 방금 골동품가게의 창고에서 탈출한 듯 고색창연하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침대 다리는 네 개 모두 있다는 것. 그럼 됐지. 언제부터 고급스럽게 살았다고 투정이야. 그동안 너무 호강을 했던 게지. 방은 좀 그래도 한 층 아래에 있는 야외식당은 제법 괜찮다. 음식이야 별로 특별할 건 없지만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한다. 저만치 있는 바다는 어둠 속에 몸을 묻어 뭍과의 경계를 지웠고 작은 불빛들만 유난히 반짝거린다. 오랜만에 보는 어둠이다. 그래, 가끔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바라보기도 할 일이다. 세상살이가 이리도 험한 것은 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어둠 속에서의 안온을 잊어버렸다. 덕분에 별빛도 달빛도 잃었다. 그것들을 잃으면서 꿈조차도 희미해졌다.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많은 법이거늘.

호텔방에서 바라본 밤바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밤새 끙끙 앓았다. 그래도 여섯시 무렵에는 어김없이 잠에서 깬다. 하늘은 여전히 맑다. 아침 식사를 한 뒤 바로 호텔을 출발한다. 0830. 오늘은 안탈리아로 가는 날이다. 가다가 성 니콜라스(St. Nicholas) 출생지에 들를 계획이다. 성 니콜라스. 산타클로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타의 고향이 터키의 궁벽한 곳이라고? “에이~”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 산타클로스의 고향은 핀란드 아냐? 자신 있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다. 산타클로스는 지금의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의 남단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죽었다. 그런데 왜 산타의 고향이 북구인 핀란드라고 알려져 있을까. 그 배경은 이렇다. 2차 대전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핀란드 정부는 관광산업 육성에 집중 투자했다. 산타마을은 70여개 기업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건설한 인위적인 마을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 산타마을에서는 세계 어린이들의 편지를 받고 답장도 써준다. 물론 대역이다. 사연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산타가 그곳 사람인 줄 안다. 산타클로스, 즉 성 니콜라스의 고향은 지금의 터키 남쪽 지중해 연안의 안탈리아에서 144km 떨어진 소도시 뎀레(Demre)다. 그 당시 이름은 미라(Myra). 이곳이 바로 성서에 나오는 무라(Mura)’인데 AD 60년 사도 바울이 로마로 끌려갈 때 탔던 배가 이곳 항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카쉬에서 안탈리아로 가는 길에 만난 울트라마라톤 지원팀.

산타클로스 이야기

우리 일행은 카쉬에서 출발했으니 안탈리아의 반대쪽에서 내려가는 셈이다. 가는 길에 믿음 씨는, 철거됐던 산타클로스 동상이 다시 세워졌을지 모르겠다고 걱정이다. 자신도 오랜만에 가보는 지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는 이유는 지금 터키의 수상이 이슬람당이기 때문이란다. 이슬람당은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타 종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산타클로스 동상을 세우는데 관심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97%라는 이 나라에도 알게 모르게 종교적 갈등이 존재하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뎀레를 향해 달려가는 중에, 길에서 뜻밖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 엊그제 페티예에서 손을 흔들어 장도를 빌어줬던, 리키아 울트라마라톤 선수들을 지원하는 팀이 길에서 쉬고 있다. 선수들도 어제 카쉬에 도착해서 묵고 오늘 아침 안탈리아 쪽을 향해 출발했단다. 이런 인연이. 고향친구들을 만난 듯 반가워서 한참 수다를 떨다 헤어진다. 믿음 씨가 차 안에서 산타클로스가 된 성 니콜라스 주교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성 니콜라스의 생애를 기록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의 실재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터키사람들은 그들의 땅에서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 한 성인의 존재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분이 바로 산타클로스가 된 성 니콜라스.

성 니콜라스는 AD 280년 경 지중해 연안 리키아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파타라(Pt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곡물 상인이었다. 니콜라스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너그러운 미음과 따뜻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상속자가 된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파타라 시에 사는 몰락한 귀족에게 장성한 딸이 셋이나 있는데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곤궁에 처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그 당시는 지참금이 없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 귀족의 집에는 언제나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그 귀족을 몰래 돕기 위해서 가족들이 잠든 사이 큰 딸의 방 창문으로 금주머니를 던져 넣었다. 큰 딸은 그 돈으로 혼인을 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다른 두 딸들에게도 지참금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 창문이 모두 잠겨 있어서 금주머니를 전할 방법이 없었다. 궁리 끝에 그 집 굴뚝으로 금주머니를 던져넣었다. 여기서 드디어 산타클로스의 굴뚝 출입설에 대한 근거가 나온다. 니콜라스는 선원들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배를 기도로 구하고, 익사할 위기에 있는 선원들을 소생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성 니콜라스 동상이 서 있는 거리.

성 니콜라스의 행적을 적어놓은 것 같다.

성 니콜라스의 기적들

성 니콜라스가 남긴 이야기는 그밖에도 강가의 모래 만큼이나 많다. 고향인 파타라에서 이웃 도시인 미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기적은 계속 일어난다. 미라지역에 기근이 들었던 어느 해,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비잔틴으로 곡물을 운반하는 배들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선장들에게 각 배에서 두 말씩의 곡식을 넘겨달라고 부탁했다. 선장들은 마지못해 응했는데 항해가 끝나고 돌아와 보니 그들의 곡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선장들이 남겨 두고 간 곡식은 미라 사람들이 2년 동안 양식을 하고도 씨를 뿌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고 한다. 흉년과 관련한 이야기는 또 있다.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어 끼니를 못 때우는 집이 속출했다. 니콜라스는 커다란 자루에 양식을 넣고, 이곳저곳 마을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집에 몰래 전했다. 어느 날 그는 어느 숲속에 있는 여관에 도착하였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영감을 받게 된다. 그 여관의 주인은 흉악한 강도였다. 소년들을 유괴해서 시체를 토막 내어 소금에 절였다가 그 고기를 나그네들의 특별 메뉴로 내놓고는 했다. 니콜라스가 그 여관에 도착했을 때에도 세 소년이 소금에 절여지고 있었다. 영감을 통해 그 사실을 안 니콜라스는 소년들을 절여 넣은 독 위에서 십자가를 긋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독을 두드리자 뚜껑이 열리며, 독 안에서 세 소년이 뛰어 나왔다.

거리엔 과일장수도 있고.

그 소년들은 소아시아의 부잣집 아들들로서, 공부하러 아테네로 가는 도중 흉악한 강도에게 걸려들게 됐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스에 의해 구원 받은 소년들의 이 이야기가 곳곳으로 퍼지면서, 그는 어린이와 학생들의 보호 성자로 숭배를 받게 됐다. 16세기의 그림과 조각에는 여관 주인이 식칼로 아이들의 몸을 자르는 것을 니콜라스가 다시 살려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그 미술품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산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나? 남의 얘기 빌어서 여행기 공짜로 먹으려고 한단 얘기 듣기 전에 그만 해야지. 그래도, 산타클로스가 아닌 주교 니콜라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니콜라스 역시 초대 교회 당시의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훗날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석방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쇄신과 선교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325년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를 때렸다가 투옥됐다. 옥중에 있던 그에게 한밤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는데, 예수는 그에게 성서를 건네주었고 마리아는 그에게 오모포리온(omophorion, 정교회 사제의 전례의상)을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간수가 보니 니콜라우스가 감옥 안에서 오모포리온을 두른 채 성서를 읽고 있었다.

성 니콜라스 교회로 들어가는 길.

상업주의가 만든 산타

그렇게 숱한 이적을 행하던 니콜라스는 65세가 되던 해 126일 미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의 산타클로스는 그가 남긴 여러 이야기에 숱한 전설이 결합돼서 창조된 것이다. 믿음 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버스는 어느 새 뎀레에 도착해서 광장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다행이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 쪽 어깨에 사내아이를 올려놓고 한쪽 손에는 조금 큰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봐 온 산타클로스의 모습과 하나도 안 닮았지? 하얀 수염에 빨간 옷을 입고 조금 뚱뚱하고 루돌프를 탄 산타클로스는 어디로 간 거야. 거기엔 이유가 있다. 성 니콜라스 이야기가 유럽 쪽으로 건너가면서 숱한 변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는 상업주의가 낳은 변종이라고 한다. 1931년 코카콜라의 겨울철 판매량이 감소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캠페인 전략으로 코카콜라 브랜드의 상징색인 붉은색 옷을 산타에게 입혀 홍보에 나선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흰 수염은 콜라 거품을 상징한다나? 결국 자본주의는 성인의 수염까지 팔아먹는구나. 아무튼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에 의해 친근하지만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재창조된 셈이다. 또 산타의 썰매를 끄는 루돌프는 오딘이라는 신이 순록을 끌고 다닌다는 것에서 착안해서 접목시켰다고 한다. 하긴 남부 지중해에 눈이 올 턱이 있나. 재주들도 참 좋다.

인도의 수행자 같았던 노숙인(?)

경찰관과 한바탕 하고 있다.

! 믿음 씨에게 성 니콜라스 동상 이야기를 들을 때 왜 철거했는지 묻지 못했는데, 원래 코카콜라 산타였기 때문이었구나.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해서.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흰 수염에 만만치 않은 눈빛, 마치 인도의 수행자 사두같다. 나무 그늘이 있는 화단 턱에 앉아있는데 바닥에 이불과 베개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그의 인가 보다. 결국 노숙인인 셈인데 입성이 깨끗하고 운동화는 하얗게 빛나서 절대 남에게 신세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는데 경찰관 한 사람이 다가와 노인에게 뭐라고 하더니 금세 언성이 높아진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여기서 나가라. 이러고 있으면 관광객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못 나간다. 여긴 내 자리다. 난 원래 여기에 있었고 관광객들은 스쳐가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무슨 권리로 앉아있는 것조차 못하게 하는가?”
사실 내가 경찰관이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경찰관은 진퇴양난이다. 칼은 빼들었는데 내리칠 호박은 없고 그냥 물러나자니 자존심 상하고. 한참 멋쩍게 서 있더니 결국 그냥 돌아선다. 경찰관이 간 뒤에도 노인은 분이 안 풀렸는지 큰 소리로 욕을 해댄다. 정부를 향한 욕이라고 한다.(궁금해서 엄상욱 씨에게 물어봤다) 그 잠깐의 해프닝에서 무질서나 불협화음보다는 자유를 느낀다. 경찰관에게 대놓고 나라 욕을 할 수 있는 나라. 그 나라는 국민이 존중 받는 국가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산타클로스 얘기를 신나게 하다 보니 성 니콜라스 교회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이번 회가 끝났다. 교회가 코앞이니 다음 회에 좀 더 충실히 전해드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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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골목길 카페

사람은 없고 게으른 고양이만

흡연 삼매경에 빠진 그녀 

배에서 내리자마자 카쉬 탐색에 나선다. 이곳은 작은 도시고 유적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돌아봐도 걸어서 3~4시간이면 족하다. 일행이 목표로 잡은 곳은 구시가지. 구시가지라고 해서 대단한 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자그마한 골목에 전통가옥과 기념품가게,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서울의 인사동쯤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여름이 지나서인지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끊겼다. 시끌벅적 호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좌판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소풍 간 날 학교 운동장처럼 조용하다.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행복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여행이란 완급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달려가서 봐야 할 것도 있지만, 음미하듯 느껴야 할 것들이 있다. 관광과 여행이 다른 점이 그것이기도 하다. 외국에 나가 보면 한국인의 고질인 우르르병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깃발을 따라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우르르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우르르 버스를 타고 떠나는 과정의 반복. 그러고서 집으로 돌아간 뒤에 사진을 보면서 아! 내가 이런 곳을 다녀왔구나. 어느 땐 그놈의 우르르병 때문에 볼 일도 제대로 못 보고 우르르 버스를 타고 떠나는 해프닝도 벌어진단다. 가이드 역시 고객이 원하는 빡빡한 일정을 채우려면 양떼를 모는 목동처럼 우르르 끌고 다음 행선지로 떠날 수밖에. 본전 생각이 나서 그럴까. 그러려면 왜 떠나는 것일까. 집에서 달력사진이나 보고 있는 게 훨씬 경제적일 텐데.

흡연 삼매경에 빠진 아가씨. 너무 멀리서 잡았나?

아름다운 집도 있고

잡설이 길어졌다. 저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하거늘. 골목을 걸어 올라가다 2층집의 발코니에서 흡연 삼매경에 빠져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발견한다. 일행의 눈길이 힐끔힐끔 그곳으로 향한다. 그저 사내들이란. 그러는 너는? 사실 그만큼 매혹적이다. 터키인들은 담배를 무척 즐긴다. 믿음 씨도 버스가 서면 달려 내려가 담배부터 빼문다. 터키의 흡연자는 대부분 체인 스모커다. 세계 7위의 담배소비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흡연에 대한 터부가 거의 없다. 한마디로 흡연천국이다. 실내는 물론 정류장이나 공원에서조차 쫓겨 다녀야하는 대한민국의 흡연자들이 부러워할만 하다. 여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23년 터키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여권(女權) 신장이 이뤄지면서 여성들도 담배를 피우게 됐다. 한 때는 흡연 여부가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다고 한다. 여성들의 흡연은 우리처럼 은밀하지 않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많지만 터키에서는 별 차별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당당해 보인다. 골목의 총 길이는 150m 정도? 카펫을 비롯한 기념품 가게들이 주종을 차지하고 있다. 골목의 끝 무렵에서 우뚝 솟은 리키아 석관을 만난다. 거리 한복판에 이런 석관이 있다니. 지금까지 본 석관 중에서 가장 우람하고 완벽한 모습이다.

고대 석관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청년-처녀들.

리키아 석관에 새겨진 고대 문자.

또 하나의 리키아 석관

아가씨의 저 당당한 모습을 보라.

그런데 석관보다 먼저 눈길이 가는 풍경이 있다. 석관과 그 옆 거대한 나무에 눕다시피 기댄 채 이야기를 나누는 청춘남녀. 남자 둘에 여자가 하나다. 이들은 아예 전용 카펫을 깔아놓고 한낮을 즐기고 있다. 이방인들은 먼 길을 찾아와서 봐야 하는 이 고대 유적이 동네 청년들에게는 그저 으슥함이 보장되는 휴식처에 불과한 모양이다. 아가씨는 무척 매력적이다. 이 동네는 미인들만 사나? 아랍풍의 푸른색 상하의에 포인트를 줘서 염색한 머리,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 어깨에는 문신까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여인? 옛날, 미국 드라마 중에 내 사랑 지니인가? 하는 게 있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연상되기도 한다. 촬영팀이 카메라를 들이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재미있게 나누는 걸까. 근처 상가에서 일한다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젊은이들의 휴식처로 바뀐 이 석관은 BC 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단 위에 석관을 얹은 전형적인 리키아 양식인데 기단 부분에 리키아 글씨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석관 상단의 둥근 부분에는 네 마리의 사자 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아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다. 나도 석관 옆 나무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해가 건물 뒤로 숨는 기색이더니 골목에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카펫도 있고 방석도 있고 옷도 있어요.

골목은 조용하다.

내려오는 길에 노천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주문한다. 하루가 저물 무렵 배낭을 내려놓고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걷는 건 제법 힘든 일이기 때문에 잠깐씩 찍는 쉼표는 달콤하기 짝이 없다. 터키의 맥주는 에페스라는 상표 하나뿐인데 내 입맛엔 잘 맞는 편이다. 하긴 맛이 없더라도 목마른 여행자에겐 감로수처럼 달 수밖에. 맥주의 이름이 된 에페스는 도시 이름이다. 성경 에배소서()’로 잘 알려진 에배소가 바로 그곳. 꼭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이번 여행 코스에는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에페스는 기독교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곳이다. BC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건설된 이 곳은 알렉산더대왕 이후 로마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면서 번창을 거듭했다. 철학과 문학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예술가와 상인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인구 25만 명의 큰 도시로 발전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도 이 곳에 함께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샀다고 전해진다. 에페스는 또 서기 53년에 바울이 설교를 한 곳이기도 하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연설을 하는 바람에 아르테미스 신을 섬기는 군중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지만 점차 기독교의 성지로 변해간다. 에페스가 유명하게 된 것은 성모마리아가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맥주를 서빙하는 노인. 저 깊은 눈, 득도를 한 것 같았다.

기독교 성지 에페스

에페스에서 1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에는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다. 독일인 수녀의 꿈속에 나타나는 경이로운 과정을 거쳐 1891년에 발견됐다. 그 전에는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떴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성모마리아는 예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을 따라 에배소로 갔으며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어쩌다가 시원한 에페스 맥주 한 잔이 성모마리아 이야기로 비약했지만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노천카페에서 음료수와 맥주를 서빙하는 이는 노인이다. 70세쯤 됐을까? 마른 몸피에 하얀 수염과 눈가의 짙은 주름. 그래도 노인에겐 궁상의 기운은 전혀 없다. 당당하고 빠른 동작으로 심해어처럼 손님들 사이를 유영한다. 그와 언뜻 눈길이 스쳤는데 오래 마주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깨달음을 얻은 성자의 눈이 저러할까. 일하는 노인, 아름답다. 일을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당당해서 아름답다. 맥주를 거의 마실 무렵에 다큐팀의 멤버 한 사람과 엄상욱 씨가 신발가게 앞에서 흥정을 하는 게 눈에 띈다.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가죽신을 이것저것 신어보고 있다. 내가 즐겨 신는 캐주얼 형태의 신들이다. 나도 반 장난삼아 한번 신어본다. 비단처럼 부드러운데다 내 발에 꼭 맞는다. 옆에서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고, 지갑을 열라고 충동질이다.

카페에서 차를 즐기는 사람들. 줄담배를 피워댄다.

리어카 노점상도 지나가고.

나는 외국에 나가서도 거의 물건을 사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산 물건이 유용하게 쓰인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덜컥 신을 사고 말았다. 엄상욱 씨를 중간에 내세워 흥정했지만 많이 깎지는 못했다. ‘거금’ 35달러가 지출됐다. 터키는 공업 수준이 그리 높지 않지만 가죽공예는 세계적 수준이라고 한다. 그 말에 솔깃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만큼 마음이 느슨해졌거나. 다큐팀과 헤어진 뒤, 땅거미가 더욱더 짙어진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아타튀르크 동상 아래 자리를 잡고 앉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터키는 경치 좋은 곳이나 공원에는 예외 없이 아타튀르크 동상이 서있다. 이곳도 코앞에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바다 위의 배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약간은 쓸쓸한 표정이 되어 앉아있는 내게 청년 하나가 슬며시 다가온다. 역시 시선은 사람보다 카메라로 먼저 간다. 터키의 청년들이여! 제발 카메라 좀 잊어주시게. 한참 카메라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손짓, 몸짓으로 뭐라 묻는다. 잘 못 알아듣는 표정이자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영어로 얼마 주고 샀느냐고 쓴다. 이상한 친구일세. 글씨를 쓸 줄 알면서 왜 말로는 못 물어봐? 혹시 말을 못하나? 얼마라고 가르쳐줬다니 아무소리 없이 가버린다. 싱겁기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한참 뒤 돌아오는데 손에 SLR카메라가 들려있다. 내게 오더니 그걸 자랑 하느라 침이 마른다. 어라? 이 친구 카메라를 손에 쥐니까 말 잘하네?

나를 위해 춤을 춰주던 아이.

저건 춤이지 절대 국민체조가 아니다.

그의 직업은 웨이터

그래, 그걸로 사진 열심 찍어. 남의 카메라 부러워할 거 없잖아. 자랑이 끝났는지 또 아무 말 없이 가더니 이번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을 데려온다. 자기가 일하는 음식점의 요리사란다. 자기는 웨이터고. “I’m waiter!!!” 눈이 별처럼 빛난다. 자신의 직업에 저 정도 자부심을 갖는 사람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쯤 돌아갔으면 아름다움만 남았으련만, 사진을 한번 찍어보겠단다. 그것도 내 카메라로. 그러라고 넘겨줬더니, !! 사진 실력이 엉망이다. 구도고 뭐고 깡그리 무시하고 모든 기력을 셔터 누르는데 쓰고 말았다.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 청년이 돌아가고 난 뒤 슬그머니 사진을 지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예쁜 아이 하나가 지나간다. 손을 흔들며 하이! 하고 인사했더니 새침한 얼굴로 그냥 지나간다. 에구, 민망해라. 아는 척 좀 해주지. 그런데 그 상황은 순간적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저만치 가던 아이가 돌아서 오더니 내게 손을 흔들며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조금 불쌍해 보였나? 반갑고 예뻐서 껴안아주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유아 희롱죄로 걸릴까봐)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이걸 어쩐담. 이 녀석, 온갖 예쁜 동작을 다 보여주며 춤을 춘다. 이게 웬 떡? 카메라 셔터는 혹사를 당하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서서 박수를 친다. 저만치 갔던 아이의 부모도 돌아와 웃고. 이건 선물이다. 터키가 내게 준 선물이다.

아타튀르크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

이제 어둠은 제법 짙어져 나무그늘 아래 머물던 빛을 거의 지웠다. 다큐팀은 어디로 갔는지 기척도 없다. 나는 아타튀르크 동상 아래에 또 다른 동상처럼 앉아 바다위의 배들을 바라본다. 그들도 이제 바다로 떠나고 싶은 열망을 잠시 접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상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타튀르크. 같은 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독재자를 생각한다. 아타튀르크 이야기를 모두 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에 대해 겉핥기로라도 알고 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독재자와 이 나라의 독재자가 어떻게 달랐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아타튀르크의 본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다. 아타튀르크는 아버지라는 뜻의 ‘ata'와 터키인이라는 의미의 ’tüurk'의 합성어다. 즉 터키인의 아버지, 국부(國父)를 뜻한다. 그밖에도 그는 케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그냥 아타튀르크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케말은 1881년 지금은 그리스 땅이 된 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케말이라는 이름은 중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지어줬다고 한다. 무스타파는 완벽하다’, 케말은 성숙하다라는 뜻이다. 케말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군사 중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스탄불의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어릴 적 군인의 뜻을 품고 정통코스를 밟은 셈이다. 이 땅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아타튀르크를 아십니까

이 분이 바로 아타튀르크이시다.

케말을 민족적 영웅으로 만든 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졌던 갈리폴리 전투다. 영국 연방군과 프랑스군 20만 명이 독일을 공격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로 상륙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군의 숫자는 불과 14000. 시쳇말로 새 발의 피였다. 하지만 사령관 케말은 군대를 갈리폴리 반대쪽의 차나칼레에 주둔시키고 연합군을 공격했다.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접전 끝에 케말은 결국 연합국 함대가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2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케말은 일약 영웅이 되었다.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오스만 제국이 서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게 되자, 터키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전쟁을 벌인 끝에 1923년 드디어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다. 그는 공화국이 창건된 1923년부터 세상을 뜬 1938년까지 15년간 초대 대통령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그동안 한 일은 일일이 손꼽기 어려울 정도다. 무엇보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이끌어나가면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의 긍지를 한껏 높였다. 또 새로운 문자를 도입해서 보급함으로써 문맹률을 제로에 가깝게 낮췄다. 이슬람 최상의 지도자를 나타내는 칼리프제를 폐지한 것은 물론 교육제도 개혁, 서양력 도입, 여성 참정권 부여, 라틴 숫자 도입 등이 모두 그의 시대에 이뤄졌다.

어두워져 가는 거리. 동상의 실루엣이 장엄하다.


그런 개혁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거의 전권을 휘둘렀다. 보는 시각에 따라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세월이 흘러도 독재자로 불리고 아타튀르크는 여전히 민족의 영웅으로 남아 있을까? 나 역시 그 정답을 아는 건 아니다. 다만 그의 행적이나 개혁 과정을 되짚어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따뜻한 인간미를 간직했고 문화적 소양을 갖췄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바탕에 순수한 애국심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타튀르크주의라고 불리는 케말리즘은 터키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덕목이다. 세상을 뜬지 7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아타튀르크는 민중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해마다 그가 숨을 거둔 1110일 오전 95분이면 전국에 사이렌이 울린다. 모든 차와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기리는 묵념을 한다. 그의 초상화는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빠짐없이 동상이 세워져 있고 대도시의 큰 거리 대부분은 아타튀르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타튀르크, 이 위대한 독재자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그런 국부를 모셨던 터키가 부러웠다. 국민소득이 낮아도 삶의 만족도가 높은 건, 아타튀르크라는 영웅을 가졌다는 자부심도 한 몫을 하는 건 아닐까.

불을 밝힌 부두의 유람선.

영웅전을 쓸 게 아닌 바에야 남의 나라 국부 얘기가 더 길어지면 재미없을 터. 남은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자. 그나저나 나는 지금 지치고 배고프다. 다큐팀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완전히 어둠의 그물 속에 갇혀버렸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백두산 금강대협곡 사진.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도시 카쉬

협곡을 빠져나오니 흠뻑 젖었던 옷이 그새 거의 말랐다. 극한상황 뒤의 안도감 때문인지 온몸이 나른하면서도 가뿐하다. 속옷을 갈아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캐리어를 꺼내달라고 하는 것도 미안하려니와 갈아입을 곳도 마땅치 않아 포기한다. 버스가 샤클르켄트를 출발하려는 순간, 지난봄에 다녀왔던 백두산 금강대협곡이 생각난다. , 그게 왜 이제야 생각나지? 그러고 보니 금강대협곡이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멋있었다. 이곳이 조금 음울해 보인다면 금강대협곡은 훨씬 밝고 웅장했다. 금강대협곡은 백두산 아래쪽에 있는 V자의 협곡으로 화산 폭발 때 만들어진 것이다. 길이는 약 15km이며 절벽의 높이는 100m~200m. 협곡에 가기 위해 원시림을 통과해야 하는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신비롭고 장엄하다. 샤클르켄트가 계곡에서 트레킹을 직접 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면 그곳은 협곡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난간만 만들어놓았다. 아찔한 절벽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줄기란. 더구나 내가 갔을 땐 절벽 중간 중간에 진달래까지 만개했었다. 물론 그곳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는 중국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원래 땅주인인 우리는 외국 관광객이 되어 갈 수 밖에 없다.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텐데. 그래서 잘 지켜야 하거늘. 괜한 아쉬움으로 입맛이 쓰다.

페티예에서 카쉬로 가는 길. 산을 깎아서 도로를 만들었다.

카쉬에 내리자마자 내 마음을 빼앗았던 오래된 카펫가게.

카쉬로 가기 위해 버스는 해안도로를 달린다. 산을 깎아서 만든 길은 구절양장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구불구불 끝이 없다. 도로의 왼쪽으로는 산, 오른쪽으로 파란 바다가 이어진다. 산과 바다가 씨줄 날줄처럼 엮여 꿈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카쉬에 도착하니 오후 231. 아직 점심 전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오래된 것만 보면 자석 만난 쇠붙이처럼 끌려가는 이 고질병. 다큐팀은 부두 쪽을 향해 가는데 내 발길은 자꾸 그 고택을 향해서 간다. 그 건물이 있는 쪽을 옛날 카쉬라고 부른다고 한다. 집을 반으로 나눠 왼쪽엔 부동산사무실이 있고 오른쪽은 카펫가게가 자리를 잡았는데 마당까지 카펫을 널고 깔아놓았다. 세월을 듬뿍 담은 카펫과 오래된 건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 앞에서 한참 서성거린다. 한눈에 봐도 카쉬는 천혜의 관광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시는 크지 않지만 뒤쪽으로 거대한 바위산이 솟아있다. 그 산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안정감과 강한 인상을 준다. 산이 품은 골짜기마다 하얀 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옥색 바다와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부두에 빽빽하게 들어선 배들. 이런 풍경 때문에 사람들은 카쉬를 일러 터키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라고 하는구나.

바다에서 바라본 카쉬. 골짜기마다 하얀 집들이 들어서 있다.

일행이 탔던 유람선.

드디어 배를 타다


카쉬는 BC 6세기에 세워진 고대도시로, 그 때 이름은 안티펠로스(Antiphellos)였다. 지리적으로 리키아 연맹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대외 창구 역할을 했다. 항구도시로 누린 번영을 말해주듯이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 양식의 극장과 도리아 양식의 무덤들이 남아있다. 카쉬는 패러글라이딩, 암벽등반, 스쿠버다이빙과 트레킹, 래프팅 등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어 숱한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섬들을 돌아보는 보트투어의 거점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1인당 60리라 정도를 내면 아침에 출발해서 섬들을 돌아보고 오후에 돌아오는 코스다. 조금 길게 해상투어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Blue voyages를 이용하면 된다. Blue voyages란 배에서 며칠간 지내면서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해변에 중간 중간 들르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이용하면 육로로는 찾아가기 어려운 고대 리키아의 유적들을 둘러볼 수 있다. 다큐팀과 합류해보니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우리 일행도 보트투어를 한단다. 풀코스나 Blue voyages는 아니지만 근해에 나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코스가 예약돼 있단다. 야호! 철없는 아이들처럼 환호가 터진다. 저걸 못 타보고 가면 여행기가 앙꼬 없는 찐빵이 될 뻔했는데.

우리가 탔던 유람선 곁으로 지나던 다른 유람선.

유람선만 배냐? 요트도 지나간다.

우리가 탈 배는 일반적인 보트보다는 제법 크고 보드롬 해변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범선보다는 작다. 선미(船尾) 쪽에는 가운데에 놓인 식탁을 중심으로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고, 뱃머리 쪽에는 누워서 일광욕을 즐길 수 있도록 매트리스가 깔려 있다. 일광욕이라면 목을 매는 백인들이 참 좋아하게 생겼다. 선실에는 화장실과 주방이 있다. 작은 배지만 있을 건 모두 있는 셈이다. 근처에 정박된 다른 배들도 모두 고만고만한 모습이다. 배에서 일행을 맞은 사람은 40대쯤의 강건한 인상의 남자. 조금 뒤에는 선실 쪽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나와서 수줍은 미소로 반긴다. 선장의 아내인 모양이다. 남자가 배의 시동을 걸자 여자가 선미로 가서 말뚝에 매어 있는 줄을 푼다. 배는 답답했다는 듯이 파란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늘 바라만 보던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서니 색다른 기분이다. 바다는 맑고 푸르다. 배가 지나가고 있는 곳의 수심이 최소 7m라고 하는데 바닥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거짓말 좀 보태면 지나가는 물고기 눈 흘기는 모습이 보일 정도다. 지중해의 시원한 바람이 귓불과 뺨을 스치고 온 몸을 간질인다. 또 한 번 전신을 적시는 평화. 배 옆으로 하얀 돛을 단 요트들이 날치처럼 지나고 점, , 점 작은 섬들도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이 물빛을 보라. 에머럴드인들 이렇게 아름다우랴.

우리의 선장 아저씨. 물론 물고기도 굽는다. 전직은 어부.

배 끝에 이런 그릴이 마련돼 있다.

선장은 어부보다 행복할까?


카야쾨이를 돌아볼 때 이미 이야기 한 적 있지만, 터키로서는 볼 때마다 배가 아파도 한참 아플 섬들이다. 세계 1차 대전에서 괜히 독일 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터키.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1923년에 연합국과 맺은 로잔조약에 의해 이스탄불을 되찾는 대신 그동안 차지하고 있던 섬들을 그리스에 내줬다. 유럽에 한 발을 걸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섬을 내줬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터키의 앞바다인데도 섬 근처에서는 휴대전화에 그리스의 와이파이가 잡힌다고 한다. 와이파이도 제 국적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조금 더 나가니 물은 푸르다 못해 검은 색을 띤다. 햇살을 듬뿍 머금은 물비늘이 배가 지나가는 길 옆으로 잇달아 자지러진다. 부부는 항해 중에도 분주하게 오간다. 승객들이 시원한 바람과 검푸른 바다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아내는 주방장이 되어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선장인 남편은 선미의 그릴에서 생선을 굽는다. 투어코스의 하이라이트가 점심식사기 때문이다. 남편의 직업은 어부였는데 작년에 배를 사서 해상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건져 올리던 손으로 관광객이 탄 유람선을 몰고 물고기를 굽는다. 이 배는 그가 평생 키워온 꿈의 결정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꿈을 이룬 지금 그는 행복할까?

선장의 아내이자 부선장이고 주방장까지 겸하는 그녀. 카메라를 절대 피하지 않는다.

가끔은 발로 배를 모는 서비스 묘기를 보이기도.

선장이 구워낸 도미. 얌마! 눈 깔어.

낯선 사람들과 만나 일하려니 힘들기도 하지만 즐거운 점도 있어요.” 말을 극도로 아끼는 그 대답에서 힘들기도 하지만이라는 부분에 좀 더 큰 무게가 실렸다고 생각하는 건 내 억지일까? 차라리 파도나 물고기와 씨름하는 게 낫지 낯선 이방인들을 태우고 고기를 잡던 바다를 돌고 도는 게 뭐 그리 신이 날까. 굳이 송충이와 솔잎까지 들먹일 생각은 없다. 돈을 벌기 위해 평생 꿈꾸던 것이겠지만, 난 그의 얼굴에서 보람대신 후회를 읽고 만다. 아무리 봐도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배를 모는 유람선 선장보다는 힘찬 몸짓으로 그물을 던지는 어부가 잘 어울릴 것 같다. 지금 굽고 있는 도미도 그가 직접 잡은 것이라고 한다. 잠시 뒤에는 아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하나씩 내오기 시작한다. 소박한 밥상이다. 감자, 치즈, 샐러드, 마카로니. 그리고 생선구이. 음식 솜씨를 일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배어 있는 정성만큼은 천하진미다. 그녀 역시 어부의 아내에서 어느 날 유람선의 주방장 겸 부선장이 됐을 것이다. 식사를 하는 중에 선장의 아내는 입가에 순박한 미소를 띤 채 이방인들을 살짝살짝 훔쳐본다. 그러다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대신 배를 몰기도 한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생각보다 능동적으로 포즈를 취해준다. 가끔은 배를 발로 운전하는 묘기도 보여준다. 얼굴에는 신산한 날들이 고랑으로 그려져 있지만 열심히 살아온 한 여자의 자긍심도 함께 배어있다.

수영 삼매경에 빠진 젊은 친구들. 물이 얼마나 파란지 사람까지 파랗게 물들 것 같다.

배 위와 앞머리에는 일광욕을 할 수 있도록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엄상욱 씨의 경우


지중해를 가르는 배에 비스듬히 누워 바람을 즐기는 시간,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다. 여행자로서는 조금 과분해서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마친 젊은 친구들은 언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는지 놀란 개구리처럼 바다로 풍덩풍덩 뛰어든다. 덩치 큰 믿음 씨도 멋진 수영솜씨를 자랑한다. 내가 3년만 젊었어도. 아참, 난 수영을 못하지. . 물이 얼마나 파란지 수영하는 사람들까지 파란색으로 물들 것 같다. 몇몇 사람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물이라는 듯 물끄러미 구경만 한다. 그 중엔 바다에서 용이 단체로 승천해도 모른 척 할 사람도 있다. 바로 앞에서 몇 번 언급했던 엄상욱 씨. 그는 주변 풍경엔 아랑곳 않고 양산을 쓴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일을 할 때는 철저한 프로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늘 양산을 쓰고 다니는 바람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가 양산맨이란 별명을 하사했다. 그러고 보니 양산과 관련해서 그가 해준 들려준 얘기가 생각난다. 이스탄불에서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무조건 한국 여성으로 보면 된단다. 혼자든 단체든 차에서 내렸다 하면 양산부터 펴들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은근히 흉보던 그대는 왜 우산도 아닌 양산을 그리 열심히 쓰고 다니는 거야.

이 분이 바로 양산맨 엄상욱 씨. 어디에 있든 양산과 함께 한다.

"용이 승천한들 휴대전화만 하랴"

그는 다팀의 코디네이터 자격으로 이스탄불에서 합류했다. 방송 내용에 맞는 주변 환경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코디네이터라고 하는 모양인데 스튜디오 작업만 주로 해온 내겐 조금 낯설다. 현지인 가이드인 이믿음 씨, 즉 규벤이 있으니 가이드라고 하긴 그렇고, 촬영을 좀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고용한 일종의 로드매니저 역할이다. 섭외는 주로 믿음 씨가 하고 엄상욱 씨의 일은 대부분 다큐팀 통역이다. 여행 당시 36세였으니 이제 37세가 됐다. 인물과 풍채는 훤하게 좋은데 아직 싱글. 그의 공식 직함은 FT TOUR라는 회사의 실장이다. 실질적으로는 대표지만(아주 작은 회사니 대표든 과장이든 별 차이가 없다) 실장이라는 직함을 쓴다. 회사를 차리고 처음 맡은 일이 이번 다큐팀의 코디네이터다. 그 전에는 가이드로 일했다. 터키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국내 여행 한번 변변히 가본 적이 없단다. 그런데 훗날 생각해보니 핏속에 역마살이 흐르더란다. 이스탄불에 있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터키행 비행기를 탔던 게 타국살이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눌러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 따라 장 구경 갔다가 장돌뱅이가 된 셈이다. 가끔 고국에 들르긴 하지만 아주 귀국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헥토르에이전시의 한국인 아가씨도 그렇고 이 엄상욱 씨도 그렇고. 그만큼 터키가 매력 있는 곳이란 얘기인지. 뭔가 핏줄을 당기는 게 있는 건지.

저 멀리 그리스 섬이 보인다.

이곳에서 배가 회항한다. 난 저 집이 무척 궁금했다. 아니 살고싶었다.

연락처를 알려드립니다

아무튼 그는 혼자 살지만 럭셔리한 생활을 한다고 자랑한다. 김치도 직접 담그고 우리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단다. 타향살이도 제대로 하려면 역시 음식 솜씨가 좋아야. 카야쾨이의 조용한 마을에서 배회로 한나절을 보낼 때, 나를 찾으러 왔던 사람이 바로 이 엄상욱 씨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어디에 어떤 끈으로 연결돼있을지 정말 알 수 없다.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와 나는 무관한 관계가 아니었다. 지금은 한국으로 들어와 살지만, 가까운 내 친구 하나가 그리스에서 여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와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엄상욱 씨의 말에 따르면 내 친구가 여행사 대표로 터키 관광시장을 개척할 당시, 자신은 가이드로 일했다는 것이다. 하긴 그리스와 터키는 보통 하나의 관광코스로 묶기 때문에 만나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어디 가서, 아는 사람 없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아무튼 이 엄상욱 씨는 무척 성실한 데다 터키어 실력도 뛰어나보였다. 다음에 전문적으로 터키를 탐구할 일이 있으면 꼭 이 친구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 혹시 독자들 중에 터키에 가실 분이 있으면, 가이드가 필요한 여행이라면, 슬그머니 비밀댓글로 연락하시길.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전액 무료로 팡팡!!!

절벽 위에 보이는 작은 구멍이 리키아 무덤이다. 저건 또 어떻게 만들었을까.

바다 위에서 보내는 꿈같은 시간은 길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 절벽에서 다시 리키아시대의 무덤들을 본다. 먼저 아민타스 석굴무덤에서도 그랬듯이 저 절벽에 어떻게 저런 무덤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몸을 던져 저 무덤 하나를 만들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와 그리스 간의 전설을 하나 얘기해준다. 지금은 그리스 땅으로 돼 있는 코스라는 섬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이란 뜻인데, 터키 땅의 카쉬는 눈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 하나였던 눈과 눈썹이 헤어져 있는 셈이다. 배는 나갈 때보다 더 빨리 돌아와 일행을 부두에 내려놓는다. 이제부터는 눈썹인 카쉬의 구시가지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시간. 낯선 땅은 늘 설렘을 먼저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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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샤클르켄트 협곡의 바위들. 저 틈으로 길이 있다.

멀리서 본 협곡. 두 개의 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산이 갈라져 협곡이 생겼다.

 

샤클르켄트 계곡으로

페티예에서 카쉬(Kaş)로 가는 길에는 트레킹의 명소 샤클르켄트(Saklikent) 계곡이 있다. 도시를 탈출한 버스는 신나게 시골길을 달린다. 버스를 운전하는 하산도 한적한 도로로 나오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휘파람이라도 나올 것처럼 밝은 표정이다. 하산은 결혼을 몇 달 앞둔 예비신랑이다. 운전을 하지 않을 때는 늘 휴대전화를 끼고 산다. 이스탄불에 있는 약혼녀와 밀어를 속삭이는 것이다. 믿음 씨는 그런 하산을 자꾸 놀린다. “너 그러다가 나중에 큰 문제 생긴다여행객을 태우고 며칠씩 돌아다니다 보면 아내와 떨어져 있는 날이 많을 텐데, 결혼한 뒤에도 지금처럼 전화를 하지 않으면 바가지를 긁힐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하산은 그런 말에 꿈쩍도 않고 틈만 나면 애인과 통화를 한다. 사람에게 적절치 않은 표현일지 몰라도, 이 청년은 갓 잡아 올린 꽁치처럼 날렵하고 싱싱하다. 성격도 깔끔해서 늘 하얀 셔츠를 입고 차도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해 놓는다. 늦은 저녁에 일행을 내려주고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아침에 약속시간이 되면 정확히 버스를 대기시킨다. 운전사들이 먹고 자는 숙소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긴 여행을 하다보면 불편하거나 불쾌할 일도 생길 텐데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어느 집 규수인지 시집 한 번 잘 가는 셈이다.

협곡에 들어가기 전 상가. 냇물이 제법 많이 흐른다.

협곡으로 들어가는 다리. 저곳은 수심이 무척 깊다.

길 옆에는 올리브나무와 옥수수밭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곳곳에서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관광입국을 실현하기 위해 온 나라에 삽을 들이댄 것 같다. 그래도 제발 마구잡이 개발은 하지 말기를. 자연의 선물은 한번 망가뜨리면 억만금으로도 되사기 어려운 법이니. 집집마다 심은 석류나무들이 농익은 여인네의 가슴 같은 탐스런 열매를 매달고 있다. 조금 더 달리자 드디어 샤클르켄트. 페티예에서 남동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페티예 여행자들이 꼭 들러 가는 코스기도 하다. 샤클르켄트 협곡은 황소처럼 길게 누운 타우르스 산맥이 중간에 뚝 끊어지면서 생겨났다. 마치 누가 거대한 칼로 내리친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전설이나 신화 몇 개쯤은 품고 있을 법하다. ‘옛날에 옛날에 하늘에서 큰 칼을 가진 장군이 내려와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산이 쫙 갈라지면서 그 자리에 알 하나가…' 하지만 그런 전설이나 신화를 얘기하는 사람도 써놓은 곳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옛날 리키아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 살던 시절에는 분명 전설이 입을 타고 전해졌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튀르크인들이 들어와 살다 보니 전설조차 땅속에 묻혀버린 게 아닐까. 낯선 땅에 정착해서 삶터를 일구는 사람들에게 남의 전설 보다는 한 끼의 밥에 더 관심이 갈 수도 있을 테니.

깊은 곳은 물이 퍼렇지만 우윳빛이 섞여있다.

협곡으로 들어가다

계곡에서 나온 물은 인근의 큰 하천인 에센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협곡의 길이는 총 18km. 수량은 계절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갈수기인 여름에는 물이 거의 없고 가을부터 불어나기 시작해서 많을 때는 사람의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다. 그래서 수량이 많을 때나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는 혼자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는 권고도 한다. 잘 알다시피, 계곡 트레킹은 물속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물에 젖어도 상관없는 옷을 입어야 한다. 춥지 않은 계절엔 짧은 반바지가 좋다. 신발은 미끄럼 방지 처리가 된 샌들이 좋은데, 만약 준비가 안됐으면 근처 가게나 식당에서 유료로 빌릴 수도 있다. 나는 그냥 긴 바지 등산복에 여행 내내 신고 다닌 간이샌들을 신고 들어가기로 한다. 엄상욱 씨는 그런 복장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싸구려 샌들임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치란) 고개를 흔들지만, 무식과 깡다구로 뭉쳐진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리고 만다. 정 안되면 맨발로 걸으면 되지. 여름의 끝인데도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수량이 제법 많고 우유처럼 뿌옇다. 석회질이 많이 섞여서 그런 게 아닐까. 저런 물은 미끄럽기 쉬운데. 그래도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야.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전의를 불태워본다.

곳곳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저 다리를 내려서면 본격적인 트레킹 코스가 시작된다.

이곳도 예외 없이 입장료를 받는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절벽 옆으로 나무다리가 이어진다. 협곡으로 들어가는 사람, 트레킹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연신 엇갈린다. 조금 더 올라가니 매점이 나온다. 거길 지나자 냇물이 기세 좋게 흐른다. 저 내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량은 걱정할 정도로 많지는 않다. 입구에는가이드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협곡에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지만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라고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바지를 둥둥 걷어붙이고 물에 발을 살짝 넣어보니 냉기가 짜르르 흐른다. 온 몸의 세포들이 움찔, 아우성친다. 하지만 물이 차다고 돌아설 수는 없는 일. 저벅저벅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느닷없이 청년 하나가 나타나더니 뒤를 따라온다. 딱 보니 동네청년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부유해 보이는 유럽인도 많은데 하필 왜 나를 따라오지? 그가 이것저것 말을 붙이기 시작한다. 약간의 무안과 약간의 뻔뻔함을 적절히 버무린 미소도 가끔 버무려 넣는다. 영어도 제법 한다. “100m쯤 올라가면 폭포가 있는데 풍경이 기가 막히다” “그런데, 그 카메라는 얼마냐?” 여보게 청년, 나도 자네처럼 관광지에서 자랐다네. 거기서 세상의 쓴 맛을 배운 대신 함부로 호주머니를 열지 않는 법도 알게 되었지. 선수끼리는 이러는 게 아니네.

 

트레킹의 시작. 저 물을 건너는 게 첫 시험이다.

나를 따라온 동네 청년

청년은 관광객을 안내해주고 푼돈을 챙기는 걸 취미 겸 업으로 하는 게 틀림없다. 특별히 안내가 필요한 곳도 아닌데 장사가 될까? 아무튼 자네는 사람 잘못 골랐네 그려. 선구안을 좀 길러야지. 돈 많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을 잡아야지, 하필 나처럼 젊고(?) 튼튼한데다 돈까지 없는 최악의 카드를 선택하다니. 이번에도 카메라가 문제였을 것이다. 이렇게 큰 카메라를 가졌으니 푼돈 정도야 쉽사리 내놓지 않으랴, 라고 혼자 결론을 내린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건 그대의 선택일 뿐. 난 그가 뭐라고 하던 묵묵부답으로 걸음을 재게 놀린다. 물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 차고 더 탁하고 더 깊다. 느닷없는 냉기는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조금씩 깊어지니까 약간의 공포감마저 인다. 하지만 맞은편에 닿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왜 위험해보이기까지 하는 이곳에 다리를 놓지 않을까. 수량 등을 감안한 물리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처음에 쉽지 않은 고비를 넘기게 해서 경각심을 북돋워줄 생각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어차피 버릴 옷, 처음부터 젖게 만들어 옷 따위에 연연하지 않게 하려 했는지도.

우윳빛 물이 쏟아지는 계곡. 이 곳을 지나가면 검은 빛 물이 흐른다.

아무튼 수량이 많을 때나 비가 오는 날은 함부로 뛰어들 건 아닌 것 같다. 트레킹도 좋지만 목숨을 걸 필요야 있나. 건너편에 도착할 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따라오던 청년은, 내가 반응이 없자 몇 번 아쉬운 눈초리를 던지더니 쩝쩝 입맛을 다시며 돌아선다. 몇 리라라도 쥐어줄 걸 그랬나? 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호주머니를 열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지갑은 편하지 않다. 지금의 내가 그런 처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겐 동정심마저도 사치가 될 때가 많다. 유료화장실을 안 가려고 소변조차 참는 게 여행자다. 동정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특이한 건 터키를 돌아다니는 내내 거지를 못 봤다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장애인도 저울로 몸무게를 재주고 돈을 받거나 엽서라도 들고 나와 팔지, 그냥 적선해 달라는 경우는 없었다. 우연히 내 눈에만 띄지 않은 걸까. 아니면 거지가 없을 정도로 나누는 사회가 된 걸까. 청년도 가버렸겠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협곡탐험이다. 처음 깊은 물을 건너고 나니 그 다음엔 수월한 코스가 이어진다. 첨벙첨벙, 어린아이처럼 물길을 헤치면서 걸어가다 보니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진다. 빛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본다. 황금색 햇살이 연신 쏟아져 내리는데 그 끝은 어디쯤인지 아득하다.

하늘에서는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들어온다.

위기의 순간을 맞다

바닥엔 시커먼 진흙이 깔려있어서 물은 탄광촌의 그것처럼 시커멓다. 물과 대조적으로 바위는 하얀 빛으로 반짝거린다. 하지만 바위 군데군데에 낙서를 해놓거나 진흙 손도장을 찍어 놔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냥 보기만 하면 어디 부러지나? 그 중에 한자로 써놓은 낙서가 있길래, 혹시나 해서 가까이 가 봤더니 다행히 간자체가 섞였다. 먼 이국 땅에 가죽 대신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중국인이 다녀간 모양이다. 제발 세계 어느 곳의 유물에서도 한글로 된 이름 석 자는 볼 수 없기를. 앞으로 나갈수록 오가는 사람이 적어진다. 처음에는 다큐팀 카메라맨도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다. 꽤 오래 함께 걷던 K도 중간에 돌아갔다. 이젠 우락부락한 청년들만 씩씩한 걸음으로 오고간다. 으슥한 곳을 지날 땐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한다. 홀로 걷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저 젊은이들 중에 누군가가 안 좋은 마음을 갖고 달려들면 나는 속수무책이다. 빈 몸으로도 힘겨운 길을 카메라 장비가 든 배낭을 메고 땀에 절어 걸어가는 자그마한 동양인 사내. 한번 불안한 생각이 드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혹시 다른 마음을 먹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른 시선을 비킨다. ,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 허약하구나. 두려움은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거늘.

본격적으로 트레킹 코스에 접어들었다. 검은 물이 흐른다.

나름대로 수양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궁핍한 처지가 되니 의심부터 하려드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저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읽는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할까. 길이 많이 험해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간에 돌아선다. 나도 진퇴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어느 책에선가 샤클르켄트 협곡을 끝까지 가봤다는 한국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 때문에 더욱 오기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물론 나 역시 18km를 끝까지 가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상으로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는 데까지는 가봐야 할 것 아닌가.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겠다는 욕심도 한몫을 했다. 가도 가도 비슷한 길의 연속이다. 위기는 아무런 징후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한 순간 몸이 허청, 기울더니 깊은 웅덩이에 쑥 빠지고 만다. 물이 탁하기 때문에 깊고 얕은 걸 구분할 수 없던 게 화근이었다. 급하게 균형을 잡는 바람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옷은 몽땅 젖었다. 속옷까지 물들이는 흙탕물의 축축한 감촉. 그 와중에도 카메라를 보호하려는 본능은 두 손은 높이 치켜들게 만들었다. 허리 가까이까지 차는 물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허둥대는 사내. 내가 생각해도 참 우스운 꼴이다.

하얀 바위에 써놓은 낙서와 손 도장. 한자 이름이 눈에 띈다.

여음곡(女陰谷)’에서 돌아서다

길이 이곳밖에 없을까? 웅덩이를 빠져나와 차분하게 살펴보니 바위 뒤쪽으로 샛길이 있다. 그럼 그렇지. 마음이 흐트러지니 쓸데없이 허둥대다 길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왕 옷도 버렸는데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절경을 구경할지 알아? 혹시나 혹시나여태껏 걸어온 인생길과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너무도 닮았다. 길은 갈수록 험해진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물을 피해 돌아가다 또 한 번 아뜩한 일이 생긴다. 뭔가 적으려고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수첩이 사려졌다. 조금 전까지 메모를 하고 꽂아두었는데.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행 내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수첩. 내 여행의 전부가 사라진 것이다. 어디쯤에서 흘린 걸까? 물에 떠내려갔거나 진흙에 묻혀버린 건 아닐까? 다스리기 힘든 공포가 머리를 타고 내려와 등골을 지나 발끝까지 훑는다. 세상이 다 아득하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지난 며칠이 고스란히 지워지는 것이다. 기록하는 걸 낙으로 삼는 자가 기록할 기회를 잃는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절감한다. 차라리 지갑을 잊어버리는 게 낫지.

마지막으로 돌아서며 '여음곡'이라 이름 붙여준 거대한 바위.

허둥지둥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아무리 둘러봐도 수첩은 없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 조급해도 안 된다. 높은 바위를 낑낑거리며 넘어왔던 기억이 나서 그곳을 다시 힘들게 올라간다. ! 있다. 내 수첩이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잃어버렸던 가족이라도 만난 듯 부둥켜안는다. 남들이 보면 우습겠지만, 내겐 둘도 없는 환희의 순간이다. 온 몸을 팽팽하게 당기던 긴장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이젠 정말 내려가야겠다. 시간도 꽤 흘렀고, 무엇보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또 미친병이 발동한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안 될까? 마음 약한 나는, 고집스런 또 다른 나에게 두 손을 들고 만다. 없는 힘까지 끌어내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번엔 수첩을 꼭꼭 여며둔다.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가다 거대한 바위 앞에서 멈춘다. 바위 사이로 좁은 틈이 있긴 한데, 아무리 봐도 그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바위들로 구성된 골짜기의 구조가 참 특이하게 생겼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 골짜기는 오늘부터 여음곡(女陰谷)’이야. 그럴 듯하다.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할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거의 다 내려올 무렵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행과 만난다. 초로의 한 사내가 내 얼굴을 유심하게 보더니 느닷없이 곤니찌와를 외친다. 곤니찌와? 이 시간에 무슨 곤니찌와야, 그리고 난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고생 끝이라 그랬을까, 돌아오는 길은 이렇게 평탄했다.

코리언이란 말에 더욱 반가운 표정이 된 이 아저씨, “아프다, 아프다를 연발한다. 아프다고? 당신 아픈 걸 왜 내게 말해. 나도 여기저기 아파 죽겠거든. 그런데 얼굴엔 아픈 기색이 조금도 없다. 가만, 아프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예쁘다구나. 어디선가 한국인을 만나 한마디 배운 말이 예쁘다인데, 그걸 아프다로 기억한 모양이었다. 이런 때 그냥 지나가면 안 되지. 저만치 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예쁘다라는 발음을 확실히 교육시킨다. 그리고 아저씨. 그건 인사가 아니라 ‘pretty’‘beautiful’이란 뜻으로 쓰는 말이거든요. 한국식 인사는 안녕하세요라고 해요. 앞으로 곤니찌와 같은 천박한 말은 쓰지 말고 안녕하세요라는 우아한 말만 쓰세요. 알았지요? 에구, 오지랖도 넓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뛰다시피 협곡을 빠져나온다. 출발지점까지 오니 일행들이 음료수를 마시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걷다가 돌아간 K를 빼고는 협곡을 제대로 들어간 사람이 없단다. 난 다들 따라오는 줄 알았지. 그렇다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담.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홀로 걷는 길.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먹고 섭섭했던 마음을 싹 지워버린다. 이래봬도 난, 당신들이 못 본 거 다 보고 온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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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예 화요장터 들어가는 길. 관광 삼아 나온 외국인들도 많다.

화요장터 초입. 온갖 과일과 채소들이 나와 있다.

거대한 규모
에 놀라다

927일 화요일. 지중해는 아직 여름의 잔양(殘陽) 아래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서울은 지금쯤 가을 기운이 완연할 텐데. 쏟아지는 햇살은 날카로운 창날처럼 대지에 박힌다. 오늘은 페티예를 떠나는 날. 3일 동안 신세진 호텔에서 체크아웃 한다. 며칠 지나면서 다큐팀 스텝들과 제법 친해졌다. 작업과 행동반경이 다르다고 오고가는 정이 없으랴. “저희 때문에 깊이 봐야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시는 거 아닙니까?” 이런 기특한 인사를 해주는 젊은 친구도 있다. “책을 쓰시게 되면 저를 주인공으로 해주세요. 감자튀김 좋아하는 투덜이PD." 이런 인사도 한다. 그럼, 그럼. 세상에 주인공 아닌 사람이 있나.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믿음 씨가 터키의 한국인 우대 이야기를 해준다. ”한국 사람들은 한 달에 1, 2달러만 내면 장기체류비자를 내줘요,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거지요이거 제법 쓸 만한 정보다. 하긴 부자에게 이 나라는 천국이다. ”휴양지 호텔은 하루 숙식비가 80달러에서 300달러까지 해요. 그것만 내면 세끼 식사는 물론 술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거든요유럽인들 중에는 호텔서 꼼짝 않고 먹고 마시고 수영을 하다 돌아가는 사람도 많단다. 그래, 돈만 있으면 어딘들 천국이 아니더냐.

고추도 각양각색

옥수수를 보니 고향생각이

가지도 가지각색.

오늘의 종착지인 카쉬까지 가기 전에 몇 가운데 들러야 한다. 맨 먼저 들를 곳은 페티예 화요장터. 매일 열리는 바자르와 달리 말 그대로 화요일마다 열리는 장이다. 우리의 5일장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면 된다. 장터는 수량이 제법 많은 큰 내를 낀 넓은 공터에 펼쳐져 있다. 우리네 장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규모는 상상 밖으로 크다. 터키인,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간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코스 중 하나이기도 한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장터로 들어가니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포장이 쳐 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건들이 나와 있다. 물건의 양과 종류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입구 쪽에는 채소와 과일 등이 주로 진열돼 있다. 사과복숭아자두수박토마토멜론에구, 숨차다. 따뜻한 기후, 축복받은 땅이라서 그런지 여름 과일, 가을 과일 없는 게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과일은 모두 다 있어서 정겹기까지 하다. 채소도 마찬가지. 마늘감자양파배추고추호박강낭콩오이상추김장을 담가도 되겠다. 상추를 보니 느닷없이 삼겹살 생각이 나고 호박을 보니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진다. 고추의 모양도 각양각색, 가지의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덩어리 치즈와 가루 치즈.

올리브 파는 아저씨.

치즈와 올리브 가게에서


조금 안쪽엔 치즈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덩어리로 된 것도 있고 가루로 된 것도 있고. 큰 놈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설악산 울산바위 만하다. 치즈의 세계에도 양반 상놈이 있는지 고급치즈는 동물의 가죽으로 싸놓았다. 그래야 잘 보관된단다.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장터는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 생긴 것만 조금 다르지 고향의 5일장을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다. “아따, 그러지 말고 일루 점 와봐. 싸게 줄 테니께손님들을 부르는 소리, “워매, 뭐가 요래 비싸대유. 좀만 깎아줘유물건 값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장터 한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고 수첩에 뭔가 적고 있으니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 동네도 별 살 것도 없이 사돈 따라 장 구경 나온 사람들이 있나보다. 돋보기가 없는 게 한이라는 듯, 내 수첩에 코를 박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이 글씨 아세요?” “……????” 그럴 줄 알았답니다. 그놈의 호기심이 죄지 아저씨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정말 사돈을 만난 건지 장터 한 가운데에 자전거를 세우고 수다에 빠진 아저씨들도 있다. 옆집 강아지 새끼 몇 마리 낳은 얘기까지 해야 길을 비켜줄 모양이다. 그렇다고 큰 소리 치거나 짜증내는 사람은 없다.

곡물 파는 아저씨. 전형적인 튀르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남편 보고 "챔피언"이란다.

올리브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점잖게 생긴 주인이 쓰레받기 같은 걸 들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걸로 주문에 따라 올리브를 담아주는 것이다. 올리브도 종류가 무지하게 많다. 수확한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다르기도 하고 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도 한단다. 우리의 장아찌처럼, 소금이나 레몬으로 간을 해서 시장에 낸다. 맛을 본다는 핑계로 먹어 보지 않으면 장터가 아니지. 살 것도 아니면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본다. 우웩!! 역시 짜다. 호텔서 한번 당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이 선천성 기억상실증이란. 이번엔 곡물 파는 아저씨 가게. 여기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곡물이 있다. 명색이 촌놈인데도 아는 건 쌀달랑 하나? 아니다. 고춧가루도 있구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함께 장사를 하는데 두 분이 전형적인 터키사람이다. 그 옛날 몽골초원에 살던 돌궐족이 중앙아시아를 지나면서 적당히 피를 섞은 뒤, 아나톨리아 땅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가장 근접한 얼굴 아닐까? 아주머니는 남편 보고 챔피언이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무슨 챔피언이란 걸까? 무얼 잘하면 마누라한테 저런 소리 듣고 살까? “어이구, 이 화상아. 잘할 생각 접어두고 허구헌날 싸돌아댕기지나 말어.“ 왜 요즘 환청이 이렇게 자주 들릴까?

엄마를 조르더니 도넛 하나 얻었다. 그러나 또 조를 태세.

멜론을 준 아저씨. 제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나요?

멜론을 얻어먹다


근처 가게에서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대여섯 살 쯤 된 아들이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 저 녀석 봐라. 안 먹어도 퉁퉁 불어있구먼.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아이의 손에 큼직한 도넛이 쥐어진다. 옛날 생각이 난다. 그 먼 길,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면 풀빵도 먹고 싶고 사탕도 먹고 싶고그냥 돌아서는 할머니가 얼마나 야속했던지. 냉정하게 돌아서야 하는 당신은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것이 얼마나 측은하고도 야속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머니가 손자의 군것질거리와 바꿀 수 있는 건 눈물밖에 없었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그 속죄 언제나 다 하고 이 소풍을 마칠 수 있을까. 그렇게 혼을 내려놓고 서 있는 나를 과일가게 아저씨가 부른다. 아이 손에 들린 도넛이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줄 알았나보다. 멜론 한 조각을 쑹덩 잘라서 손에 쥐어준다. 아무래도 멜론을 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동양에서 온 거지쯤으로 여긴 것 같다. 하긴 여행 내내 수염 한번 깎은 적 없고, 걸친 옷이라 봐야 추레하기 그지없으니, 그렇게 봐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는데 인사 하나는 제대로 차려야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제가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나요? 멜론을 우물거리며 과일채소전을 벗어난다.

전통과자 5상자를 사면 1상자는 거저 준단다.

빗자루. 참 곱게도 엮어놨다.

빵장수 아저씨.

세제설탕휴지치약칫솔생활필수품 가게를 거쳐, 젤리에 가까운 터키 전통과자를 파는 곳을 지난다. 다섯 상자를 사면 한 상자는 공짜로 준단다. 그래도 전 안사요. 어느 집 앞에는 곱게 짠 빗자루들을 세워놓았다. 옛날 우리네 빗자루와 비슷하게 생겼다. 솜씨도 좋지. 너무 고와서 방을 쓸기에는 아까울 것 같다. 좀약이나 바퀴벌레 약을 파는, 70년대가 생각나게 하는 난전도 있다. 그럼 그렇지, 왜 없겠어.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빵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니 반가움이 울컥 솟는다. 어릴 적 풀빵이나 호떡을 팔던 아저씨를 만난 셈이다. 이제부터는 공산품공예품 가게들이다. 가방 가게에는 물건도 다양하게 많고 다른 곳보다 손님도 많다. 터키는 다른 산업에 비해 가죽공예가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신발가게도 샌들부터 운동화까지 다양한 품목을 갖춰놓았다. 그곳을 그냥 지나쳐 공예품가계로 들어가 본다. 부채나 보석함 등 온갖 공예품들이 그걸 만들었을 사람의 정교한 솜씨를 말해준다. 그중에서도 유리공예품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각종 등()이나 터키 특산물인 물담배 파이프에 특히 눈길이 간다. 내가 들어서자 종업원 청년의 눈은 카메라에 가서 꽂혀버린다.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린 눈치다.

각종 유리공예품들.

공예품 가게의 사장님.

공예품 가게의 사장과 종업원


자꾸 와서 들여다보고 관심을 보이길래, “한번 찍어볼래?” 하며 손에 쥐어줬더니 입이 쭈욱 찢어지면서 카메라를 들고 온갖 폼을 잡는다. 찍힐 놈이 폼을 잡아야지 왜 네가 폼을 잡니? 또 다른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제 동료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걸 보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내 어깨에 팔을 얹는다. 한 방 찍어보자 이거지? 그래, 카메라 든 친구 기분이나 좋게 해주자. 나도 덥석 어깨동무를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리 키가 큰 거야. 잠시 뒤 들려오는 셔터소리. 뒤에 조명이 너무 강해서 분명 시커멓게 나왔을 거다. 아무렴 어떠랴. 그런 얘기를 수첩에 적고 있자니, 카메라를 내게 넘겨준 청년이 곁에 와서 들여다본다. 이 나라 사람들 호기심은 정말 못 말린다. “, 이 글자 알아?”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제 팔을 어깨까지 둥둥 걷어붙인다. 일본어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친구 생각으로는 같은 동양인이고 글자가 낯설긴 마찬가지니 같은 나라 말인 줄 알았나보다. “그건 일본 글씨야. 난 한국 사람이거든. 코리아라고 들어는 봤나?” 영어와 한글로 코리아라고 써주니 뭘 좀 알아들었는지 수첩에다 자기들 말로 코리아라고 써준다. 에구, 귀여운 것. 앞으로는 한국을 많이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하면 지금 문신은 지우고 한국 만세!’ 이런 걸로 새로 새겨봐.

내 카메라에 '눈독'을 들였던 청년. 잘 생겼다.

공예품 가게 사장의 이름은 야곱이이라는 장돌뱅이다. 가게 규모가 하도 커서 말뚝 박고 장사하는 사람인가보다 했는데, 매일 매일 장 따라 옮겨 다닌단다. 그는 다큐팀이 자기네 가게를 들러준 걸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코리언이라니까 곧바로 “Brother”가 터져 나오면서 특유의 잃어버린 형제를 상봉한표정을 짓는다. 이런 식의 반응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여러 번 겪어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야곱은 한국인에 대한 우의로 스텝들이 산 기념품 값을 끝내 받지 않는다. 가게를 나오는데 사진을 찍었던 청년이 따라 나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Nice Korea”를 연발한다. 그래, 열심히 살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일본어 문신은 지워. 터키사람들은 왜 그렇게 한국인들을 환대할까. 진심일까? 장담하건대 진심이다. 어딜 가나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의 칸카르데시라고 부르는 터키인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만큼 두 나라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인연의 뿌리를 찾자면 제법 아득한 과거까지 올라가야 한다. 우리 땅이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있을 때, 돌궐족은 튀르크제국을 세워 몽골 땅을 호령했다. 그때 튀르크 제국과 고구려가 연합해서 수나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튀르크의 무한 카간이 사망했을 때는 고구려에서 조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신발 가게.

한국인을 형제로 부르는 이유

고려 때에는 튀르크계의 일족인 위구르족이 개경에서 살기도 했다. 그때 지어진 야한 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가 바로 그들이다. 한국과 터키가 진짜 피를 나눈건 물론 6.25전쟁 때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터키는 1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이는 유엔군 가운데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터키군이 중공군을 맞아 싸웠던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돌궐의 후예들은 백병전에 특히 능해서 일당백의 위용을 보였다. 5배 이상 되는 적에게 막혀 자신들도 위험한 상황이었던 터키군 1여단은 예상을 깨고 전멸 위기에 처한 미 2사단을 구하려 중공군 진지로 뛰어들었다. 착검을 한 채 알라후 아크바르(Allāhu Akbar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돌격하는 터키군을 맞아 중공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에게 터키군은 공포의 군대로 새겨졌다고 한다. 터키군은 한국전을 통해 750여명이 전사했고 3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터키인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코레 가지라고 부른다. 코레 가지들은 한국을 조국이라는 뜻의 바탄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는 뜻의 코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악기점 주인 아저씨.

타국에서 희생한 그들은 그렇게 한국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데, 피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진정 고마워하고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칠 자신이 없다. 터키는 멀리 있는 그렇고 그런 나라일 뿐이고, 터키인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여행 내내 환대를 해주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반대로 터키인들은 한국인이라면 일단 감동할 준비부터 한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이 거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터키 국민들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했고, 2002년에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니 나라가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더욱 감격한 건 한국과 치른 3, 4위전이었다. 한국인 응원단이 펼친 터키국기, 그리고 자국 선수들을 향한 응원과 박수에 그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들이 바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야. ‘형제의 나라는 다시 한 번 뼛속 깊이 다시 각인됐다. 우연이었든, 의도한 일이었든 경기에 지면서도 박수를 쳐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변하지 않는 우의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었으니.

아으, 셔!!! 석류 주스를 짜고 있다.

즉석에서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할아버지. 원탁 위에 진열된 것들이 바로 새총이다.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공예품 가게를 나와 옷 시장 입구에서 전통악기를 파는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는 “Happy birthday”를 연주하며 유혹한다. 에이, 아저씨 사람 보실 줄 모르네. 살 사람을 꼬여야지요. 악기 이름은 듀라’. 박수까지 치며 함께 놀다가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뜬다. 천변에는 카페가 늘어서 있다. 우리가 장터에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듯이 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음식도 먹고 음료수도 마신다. 석류주스를 갈아 파는 가게 앞에 멈춰 선다. 신 음식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저만치 도망가는 나지만 예쁜 색깔이 자꾸 유혹한다. 혹시 달콤하지 않을까? 그래, 도전!!! 내 인생에서 혹시역시로 바뀌지 않던 적이 있던가. 나는 그날 울면서 석류주스를 마셨다. 무려 3리라나 투자하고서. 장터 날머리에서 트럭을 세워두고 나무로 공예품을 깎아 파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수저머리빗홍두깨참 솜씨도 좋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새총. 어릴 적엔 겨울마다 저걸 들고 들이고 산이고 얼마나 쏘아 다녔던지. 터키 아이들도 저걸 갖고 노는구나. 동질성은 곳곳에 숨어있다. 이제 장구경도 끝났고 페티예를 떠날 시간이다. 안녕! 페티예. 3일 동안 행복했어.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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