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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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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1.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이른 아침, 바닷가를 걸어본 적 있으십니까?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누군가가 백사장에 크고 작은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간 그곳.

재채기라도 터질 듯 코끝을 간질이는 설렘과 누군가가 먼저 걸었다는 배신감(?)을 함께 추스르면서, 그래도 순수의 영역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 자꾸자꾸 걷게 되는.

얼마 전 도반(道伴)들과 모세의 기적으로 이름을 알린 무창포에서 하루 저녁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철 이른 바닷가는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이른 아침 누가 손짓이라도 하는 듯, 밤새 치룬 전쟁의 산물인 숙취를 대동하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말이 이른 아침이지 백사장은 이미 곳곳에 발자국이 찍힌 뒤였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이런 시간에 백사장을 걸어본 게 언제더라.

아마 젊었을 적, 그것도 청년기쯤이 아닐까.

애써 시간의 끈을 더듬거려 보지만 기억을 갈무리해둔 창고는 좀처럼 빗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머리 검은 젊은이가 걷던 곳을 반백의 사내가 걷고 있는 건 분명했습니다.

늙어간다는 것,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다가도 어느 특별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화두를 깨우치듯 전율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아직 머나먼 날의 이야기로 들리겠지요.

 

걷다보니 저 멀리 있던 흑섬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습니다.

생각에 휩싸이기도 하고, 예쁜 차돌을 줍고 버리다를 반복하다 보니 걸음은 자꾸 늦어졌습니다.

어느 순간, 발밑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물이 빠져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사장에 벌집처럼 나 있는 작은 구멍들.

//뽕이라는 의성어 겸 의태어가 수식어로 가장 잘 어울릴만한 그런 구멍들이 셀 수 없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채굴 과정에서 나왔음직한 콩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까지.

물론, 그 무엇 하나 우연히 생긴 것들이 아니란 사실쯤은 눈치 무디기로 소문난 저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백사장을 점령했던 바닷물이 빠져나간 뒤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만들어진 흔적들이 분명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척 없이 한참 서 있으려니 저만치 구멍에서 아주 작은 생명 하나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게였습니다.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게.

집을 수리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 낯선 낌새를 감지했는지 잽싸게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정말 번개 같은 동작이었습니다.

저 작은 몸 어디에 저런 경계와 속도가 숨어 있을까.

결국 카메라를 들고서도 한 마리의 게도 찍을 수 없었습니다.

 

숱한 구멍들은 바로 그 손톱만한 게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물이 빠진 뒤, 온 가족이 집수리에 나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게들의 은 바닷물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무심한 발자국이 그 위를 마구 밟으며 지나고, 그때마다 집은 메워지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면 게는 또 묵묵하게 그 집을 수리합니다.

작업은 끝없이 계속 될 것 같았습니다.

하루인들 바닷물이 오고가지 않은 적이, 사람이 지나가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요?

미련한 짓이라고요?

, 그런 말에도 별로 대거리할 방법이 없겠네요.

몇 시간 뒤면 무너질 게 분명한 집을 파내고 또 파내는 반복의 이면에는 분명 기계적 끈기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할 테니까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마치 시시포스(Sisyphus)를 연상시키는 노역.

하지만 정말 미련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미련보다는 순응쪽에 더 무게를 두고 싶어졌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일을 해야 할 거라는 걱정을 미리 하지 않는 순응.

애써 지은 집을 밤마다 타인의 영역으로 넘겨줘야하는 운명조차도 받아들이는 순응.

그렇게 해서 게는 바닷물이 쉬어갈 집을 내어주고, 바닷물은 먹을 것을 날라다주는 행복한 거래가 성립됐겠지요.

슬프고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화나고 짜증나고우리가 흔히 쓰는 이런 단어들 중에 혹시 스스로 만들어서 지고 다니는 것은 없을까요.

새삼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자연은 위대한 스승을 품고 있는 거대한 학교라는 깨달음 앞에서 반백의 사내가 자꾸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2. 5. 29.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모처럼 길로 나서지 않은 일요일.

곧 인쇄돼 세상에 나올 여행기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었습니다.

식구들은 모두 외출하고 다래가을이차돌이(제 집 강아지들 이름입니다.)마저 낮잠에 빠져든 집안은 심해처럼 고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완전한 고요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

냉장고 소음? 세탁기가 혼자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떨어지는 소리? 아니면 두꺼비집? 그것도 아니라면 요즘 부쩍 늙어가는 다래가 코 고는 소리?

모두들 나는 아니라고 손을 홰홰 내젓습니다.

가만 귀를 기울이니 소리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있는 뒷문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살짝 다가가 문을 열었습니다.

! 그곳에 펼쳐진 풍경이란.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나뉜 큰 밭에 사람들이 김을 매고 수확물을 거두고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상추쑥갓은 벌써 풍성하게 잎을 펼쳤고 고추와 토마토는 지지대를 따라 힘껏 키를 늘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게으른 밭은 아직 텅 비어 있고, 어느 밭은 통째로 비닐을 씌워놓기도 했습니다.

소음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두런두런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곳에 주말농장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밤나무 산 아래에 있던 밭을 열심히 구획정리 하더니 두어 해 전부터 분양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작물이 가득 자란 밭을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주말이면 늘 돌아다니고 평일은 늦은 밤에나 집으로 돌아가는 반 떠돌이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요.

창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서울의 시골에 살다보니 누릴 수 있는 풍경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이 되는 이야기지만 저도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이었지요.

경기도 송추에 작은 밭을 하나 얻어놓고 주말마다 찾아갔습니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그 결과를 거두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가서 직접 딴 상추쑥갓풋고추와 함께 삼겹살을 먹는 호사를 누린 친구들도 있었지요.

어쩌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였습니다.

저처럼 흙에서 구르며 자란 사람들에게는 흙을 그리워하는 인자와 끝내 이별을 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밭에 가면 아이들도 아무렇게나 풀어놓았습니다.

개구리메뚜기도 잡고 밤도토리도 줍고 도랑에 들어가 저희들 맘대로 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강아지인지 아이인지 구분하기 힘들만큼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녀석들에게도 그 풍경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는 것 같았습니다.

 

심고 가꾸고 그 결과를 거두는 과정을 무척 좋아합니다.

생명에 숨을 불어넣는 일은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줍니다.

제 손으로 뿌린 생명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 나누는 대화는 저 자신을 순정(純正)의 세상으로 데려다 주고는 했습니다.

왜 내가 저걸 포기했지?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길 위의 삶을 선택하다 보니 그동안 누렸던 삶의 자락들은 뭉텅 뭉텅 잘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추나 쑥갓과 나누는 대화를 포기한 대신 글과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역시 행복한 일입니다.

지금도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판정 보류입니다.

삶 앞에는 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저는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신중하게 선택하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지 말자.

왜 후회할 선택들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다가 포기한 길에 대한 미련은 가능하면 일찍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느닷없이 다가온 텃밭의 향수도 얼른 덜어내야겠지요?

삶이 다하는 날까지 배낭을 메고 길 위를 걸어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sagang
2012. 4. 23.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3월하고도 24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달이 지났군요.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몇몇 지인과 나들이를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휴일인데도 일찌감치 부지런을 떨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방 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와!” 혹은 !” 정도까지는 들었는데 그 다음은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내의 목소리는 분명한데, 평소 그리 호들갑스럽지 않은 사람인지라,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어 후다닥! 달려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박했던 소리와는 달리 그니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뜻밖에 고요한 뒷모습에 대고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새삼스러워 제 시선도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향했지요.

그리고 저 역시 못이라도 박힌 듯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시야 속으로 기가 막힌 풍경이 달려 들어왔습니다.

인수봉과 백운대가, 아니 북한산 전체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도심에 하루 종일 내린 비가, 산 위에서는 눈이 됐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북한산에 눈 내린 거 처음 봤느냐고요?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 정도는 겨우 내내 봤지요.

하지만 겨울에 본 풍경과는 완연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딱 꼬집어 무엇이라고 표현하긴 어려웠습니다.

같은 눈인데 왜 저렇게 달라 보일까.

그러다 깨닫듯 발견한 게 있었습니다.

대비(對比)였습니다.

아직 갈색을 벗지는 못했지만, 온 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새 빛으로 떨쳐 일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하얀 색과, 아직은 느낌만으로 존재하는 푸른색의 대비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 히말라야 어디쯤에서 설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찬바람은 몰아치는데 추운 줄도 모르고, 베란다 창까지 활짝 열어 제친 채 오랫동안 산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기어이 제 입에서 한마디 터지고 말았습니다.

집값 손해 본 거 한꺼번에 다 뺐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가운데쯤에 사는 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곤 했습니다.

대체 왜 그 구석에 살아?”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은 첫 인사가 이랬습니다.

아직도 거기서 살아? 집값은 좀 올랐어?”

그럴 만도 했습니다.

교통이 편하길 한가, 집값이 오르길 하나.

집값? 시 경계를 벗어난 의정부보다도 더 싼 곳이 이 동네입니다.

바보들이나 사는 동네 취급을 당하기 딱 알맞았습니다.

그런데도 전 20년 가까이 이 동네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들이 집을 옮겨 다니며 매매 차익으로 쏠쏠한 재미를 볼 때, 저는 집값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입이 찢어지곤 했습니다.

아니, 사실 그것조차도 신경 써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참 무능한 가장입니다.

그러면서 늘 변명처럼 늘어놓는 말이 그거지요.

이 집 팔고 나가봐야 다른 곳에서는 전세도 못 얻어

애들 학교 때문에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제가 이사를 못 가는 이유는 이 동네가 좋아서입니다.

일상이 주는 행복과, 백운대와 인수봉이 눈을 뒤집어쓰고 짠! 하고 나타는 정도의 깜짝쇼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길 하나 건너면 북한산이든 도봉산이든 마음 놓고 오를 수 있습니다.

아파트 뒤가 바로 텃밭입니다.

개천에는 개구리와 도롱뇽이 지천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맹꽁이도 있습니다.

여름 내내 개구리 맹꽁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듭니다.

지척에 있는, 750년 묵은 은행나무는 아직도 여름이면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웁니다.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서울에서 얼마나 있을까요.

저 같은 도시부적응자에게는 하늘이 내린 길지(吉地)’나 다름없습니다.

 

이 정도면 20년 째 무능한 가장을 감수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는 여전히 이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1. 10. 4. 09:28 이야기가 있는 사진

 

혹시 그대, 임자도를 가려거든 특별한 기대 같은 건 버리고 떠나십시오.
늙고 젊은 남녀 주인공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며 돌담 사이를 걸어오는 장면이 보고 싶거든 아예 청산도로 가십시오.
그곳 임자도에는, 사람이나 풍경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고 임자 없는 시간만 널려 있으니까요.

임자도를 찾은 건 한반도에도 새로 생긴 우기
(雨期)의 끝 무렵이었습니다.
비는 그쳤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낮게 내려와 으르렁거리고 있었지요.
인생의 쓴맛이나 실연의 상처를 달래려 그 섬까지 찾아간 건 아니었지만, 가슴 근저(根柢)에 쓸쓸함마저 없었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임자도.
면적 39.18, 인구 4,076(1999), 해안선길이 56.5km이다. 사질토 토양에서 자연산 깨가 많이 생산되어 임자도라고 하였다. 목포시와의 거리는 66.6로 신안군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인터넷에서 백과사전을 살짝 베낀 내용입니다.
어딜 봐도 특별하다고 할 게 없는 섬입니다.
, 두어 가지 눈에 띄는 게 있긴 하네요.
하나는 인구조사연도가 1999년이라는 것.
10년도 훨씬 더 지났는데, 왜 수정하지 않았을까요?
모르면 몰라도 지금은 그 당시보다 인구가 많이 줄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깨가 많이 생산되어 임자도라고 했다는 설명입니다.
임자라는 단어가 글자가 되어 눈앞에 놓였을 때, 쓰임새가 제법 많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물건을 소유한 사람’, 즉 주인이라는 말로 쓰이지요.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였고, 나이가 비슷한 사람끼리 자네대신으로도 쓰였습니다.
이밖에도 임자(壬子)는 육십갑자의 마흔아홉째를 말하고, 또 다른 임자(妊子)는 임신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임자도의 임자는 들깨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임자(荏子)입니다.
옛날에는 유배를 온 사람들이, 사질토에서 절로 자라는 깻잎을 뜯어먹으며 연명할 정도로 척박한 섬이기도 했다지요.

지도(智島) 점암선착장에서 배(철부선)를 타고 20분쯤 걸려, 임자도 진리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배안에서 본 첫 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착장 주변에 음식점이나 가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우기라지만, 휴가철이 끝나지 않았고 피서지마다 청춘의 열기로 뜨거운 판인데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목적지를 해수욕장으로 잡게 했습니다.
사람구경을 좀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입니다.
백사장의 길이가 12km, 30리로 걸어서 가면 1시간20분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쓸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넓은 해수욕장에 점, , 점 박힌 몇 사람.
백사장이 워낙 넓다보니 썰렁함은 더해보였습니다.
상가도 철시분위기였습니다.
비가 워낙 많았던지라, 해수욕장이 하나같이 낭패를 겪은 여름이었지만 대광해수욕장이야말로 개점휴업이었습니다.
텅 빈 해수욕장을 얼른 빠져나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우젓 집산지를 찾아가볼 심산이었습니다.
임자도는 병어나 민어 같은 어류가 많이 잡히기도 하지만 새우젓으로도 유명합니다.
해마다 1천여t의 새우를 건져내 전국 새우젓 어획고의 60%를 담당한다고 합니다.
새우젓배가 오간다는 전장포로 가면 사람 구경을 좀 하겠지.
사람을 떠나고 싶어 섬까지 찾아간 자가 왜 그리 사람을 그리워하는지 당사자인 저도 잘 모를 일입니다.

전장포로 향하는 중에도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가도 사람 그림자 하나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인구감소를 피할 방법이 없는 다른 섬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임자도는 좀 특별한 것 같았습니다.
시야의 끝에서 선이 하나가 되는 길 위에도, 논에도 밭에도 심지어는 바다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넓게 펼쳐진 마늘밭, 밭가의 소나무 서너 그루, 그리고 이어지는 바다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가 밭 가운데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한 것입니다.
대광해수욕장을 떠난 뒤 처음으로 만나는 주민이었습니다.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구나.
그 뒤로 천천히, 자전거 속도만큼이나 천천히 차를 몰았지만 사람 없는 풍경은 계속됐습니다.
드디어 새우젓의 고향이라 불리는 전장포.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새우 부리는 배와 새우젓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강아지 한 마리 없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새우젓마트라는 간판을 단 가게 앞에서 얼씬거려 봐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습니다.

빨랫줄에 빨래들이 그득하게 널린 집이 있길래 가까이 가 봐도 지붕 위의 둥근 박 두어 덩어리가 길손은 맞이할 뿐이었습니다.
동네를 빠져나오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7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 아직도 수천 명이 땅을 파거나 바다에 기대에 살아가고 있는 섬.
그곳에서 만난 주민이라고는 마늘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한 분.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 몰래 모여서 운동회라도 하는 걸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모습이 임자도의 매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는 섬, 그래서 조금 고독하고 쓸쓸한 섬.
하루 종일 앉아서 사색에 빠져도 방해할 이 없는 섬.
따지고 보면 섬이라는 게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아무 것도 본 것 없는 제 안에 무언가 가득 담겨있다는 사실이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시간은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녀도 누군가 호주머니에 자꾸 시간을 넣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마저 임자가 없는 섬에서 맞은, 제 생애 가장 길고 평화로운 날은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갔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1. 9. 19. 10:13 이야기가 있는 사진

제게 여름은 좀 난감한 계절입니다.
휴가철이 시작되면 도로마다 동맥경화에 걸려 끙끙 앓아대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제 차를 하나 더 얹자니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휴식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과 일을 하러 가는 사람일 때문에 길을 나서야 하는 제가 더 절박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들 역시 1년에 한번, 벼르고 벼른 휴가길이니 늘 길 위를 떠도는 제가 한 수 접는 게 옳을 것 같기도 합니다.
몰론 제게도 휴가는 있습니다.
휴가를 받으면 하루 이틀로는 갈 수 없었던 오지나 섬을 떠돌기 마련입니다.
이번에는 전남 신안군 증도에 다녀왔습니다.
그밖에도 몇몇 섬을 돌아다녔지만, 제가 최종적으로 잡았던 목적지는 역시 증도였습니다.
염전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염전이라면 부안의 곰소염전을 비롯해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국내 최고라는 증도는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벼르던 곳입니다.
아시아 최대의 단일염전이라는 태평염전을 중심으로 국내 소금 생산량의 60% 이상을 맡고 있는 염전단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비옥한 갯벌과 풍부한 일조량,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은 수온과 적절한 바람이 소금의 탄생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소금은 금()만큼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생존을 위해서는 금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지요.
동물에게 소금은 생명유지를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소금은 체내, 특히 체액에 존재하면서 삼투압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체내에 칼륨이 많고 나트륨이 적어지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또 땀을 많이 흘려 급격하게 염분을 잃게 되면 현기증·의식혼탁 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다 보니, 옛날에는 소금의 확보 여부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기도 했습니다.
소금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했지요.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소금을 얻는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얻는 천일염이나 바닷물을 퍼서 솥에다 넣고 끓여 졸이는 자염 등이 가장 일반적이었습니다.
지각변동으로 바닷물이 갇혀 굳어진 고체 소금을 파내 얻는 암염이나 소금기 있는 지하수를 증발시켜 채취하는 정염도 있습니다.

방법이야 어떻든 쉽게 얻어지는 소금은 없습니다.
천일염만 해도 바닷물을 햇볕 아래 가두기만 하면 소금이 생길 것 같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얀 금, 소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저장지에 가둔 다음 증발지로 보냅니다.
1차 증발지에서 어느 정도 증발시킨 뒤 2차 증발지로 보내집니다.
저장지에서 1, 2차 증발지로 갈수록 수분은 증발하고 염도는 높아집니다.
2차 증발지를 거쳐 염도가 최고조에 달한 바닷물은 마지막으로 결정지로 보내집니다.
볕이 좋은 날 새벽나절 결정지로 들어간 소금물은 한낮 내내 졸이고 졸여져 저녁 무렵이 가까워지면 하얀 소금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열 말의 바닷물을 가두면 소금 한 되가 나온다고 합니다.
봄가을은 열흘 정도, 여름은 한 사나흘이면 소금이 됩니다.
소금 꽃을 만드는 건 햇볕뿐이 아닙니다.
적당한 바람과 염부의 땀과 적절한 시간이 버무려진 결과입니다.
계절, 햇볕, 바람은 물론 결정지에 머무는 시간에 따라 소금의 굵기와 맛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입니다.
소금은 어쩌면 생명의 어머니인 바다가 우리에게 주는 젖일지도 모른다는.
바다는 소금을 통해 우리가 잊어버린 시원(始原)의 사랑을 끊임없이 보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금이 귀하다는 걸 강조하다 보니 얘기가 옆길로 새고 말았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소금을 찾아갔던 이번 증도 여행은 별 소득이 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섬 어디를 가도 염전은 비어 있고, 땀 흘리는 염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염전은 바다풀이 솟아올라 폐염전과 다름없었고, 소금창고 옆에는 장비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한참 소금을 만들어야하는 여름, 소금을 만들던 사람들은 모두 어딜 간 걸까요.
벌써 짐작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비 때문입니다.
여름 내내 쏟아진 비가 소금을 만드는 사람도 장비도 꼼짝 못하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비가 오면 염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140만평을 자랑하는 광활한 태평염전 역시 염부 대신 관광객들만 기웃거릴 뿐이었습니다.
67개의 소금밭에서 연간 약 15천여t의 천연소금을 생산한다는 그곳, 3km에 걸쳐 도열한 소금창고만 해도 66개나 되는 그곳이 두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마침 조금 열려있는 소금창고가 있길래 들여다봤더니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천일염은 1년 내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보통 4월 중순에 시작해서 9월말이면 끝납니다.
그런데 소금이 가장 많이 생산 되는 여름 중 두어 달을 공쳤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증도뿐이겠습니까.
섬을 돌아다니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올 겨울에는 소금 값이 금값의 뺨을 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값싼 중국산 소금이 지천으로 흘러들어온다니,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미천한 입맛은 달게 짜다는 우리 소금맛과 쓰게 짜다는 중국산 소금 맛을 구분할 줄도 모르니까요.
그리 생각하니, 태생적으로 걱정 많은 나그네의 괜한 기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염부는 관광객입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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