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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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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20. 19:12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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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며칠 째 애가 달아있었다. 방학 때 내려왔던, 서울 사는 장부자네 손자가 신었던 운동화까지는 언감생심 바래본 적도 없었다. 백설기처럼 빛나는 흰고무신이 수시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정말 대책 없는 열병이었다. 지금까지 검은고무신으로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온 아이를 들쑤시고 있는, 흰고무신에 대한 열망은 몽유병이라도 든 것처럼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날마다 어머니를 졸라댔지만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였다. 아이들이 흰고무신을 신는다는 건 어른들이 입는 흰두루마기를 입는다는 것과 똑같았다. 아버지도 일을 할 때는 검은 고무신을 신다가, 나들이 할 때나 선반에 올려두었던 흰고무신을 꺼내 신고 나가지 않던가. 그러니 들로 산으로 천방지축 쏘다니는 아이들에게 흰고무신이란 개발에 편자를 대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흰고무신이 훨씬 비싸다는 점도 문제지만 그걸 날마다 누가 닦아댈 것인가. 금세 검은고무신과 구별이 안 될 만큼 더러워질 건 너무도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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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는 아이에게 던지는 어머니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지금 신은 것도 3년은 더 신겠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소 몰고 나가 풀이나 뜯겨 와라." 하지만 이미 열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그 말이 들릴 턱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이는 다른 아이들을 따돌리고 개울가 으슥한 곳에 앉는다. 몇 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돌로 신발의 옆구리 쪽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검은 고무신이 처단해야될 악마라도 되는 양, 마구 문질러댄다. 처음엔 질기게 저항하던 신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구멍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날 저녁, 아이의 집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에 이어 생고무신처럼 질긴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일부러 신발에 낸 구멍을 어른들이 못 알아차릴 리 없었던 것이다. 신발이 떨어지면 기우고, 그도 안되면 장에 나가 때워서라도 신던 시절에 일부러 구멍을 내다니. 결국 아이는 흰고무신은 구경도 못하고 구멍난 검은고무신으로 그 여름을 나야했다. 물론 여름이 지나고 추석이 되어 얻어 신은 새 고무신도 검정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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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가 되어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고 운동화라는 걸 너도나도 신을 수 있기 전까지 고무신은 대안을 찾기 어려운 '국민신발'이었다. 사실 고무신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땅의 백성들에게는 뒤로 자빠질 만큼 기가 막힌 물건이었을 것이다. 가죽이나 비단신이라도 신을 수 있었던 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하면, 민초들이야 기껏 짚신이나 나막신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을뿐더러 어느 정도 방한까지(짚신에 비해서) 가능한 신발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고맙고 신기했으랴. 그런 고무신이 이 땅에 첫선을 보인 게 1920년대였다고 하던가. 역설적이긴 하지만 고무신은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데도 한몫 했을 것 같다. 그 좋은 걸 양반이라고 외면하지는 않았을 테니, 발만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을 터. 어려웠던 시절, 고무신 한 켤레 값은 결코 만만치 안았다. 그래서 신발코에 구멍이 뚫리고 밑창이 너덜거리도록 기워서라도 신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떨어지고 찢어져서 못 신을 정도가 되면 장날에 들고 나가 때워다가 또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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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을 만드는 회사도 참 많았다. 고무신은 폐타이어가 주원료였는데, 생산의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왕자표, 말표, 범표, 타이어표, 진짜 다이아 등 헤아리기 힘들만큼 다양한 상표가 쏟아져 나왔다. 흰고무신은 표백제를 첨가해서 만들었는데 그만큼 검은고무신보다 비쌌고 고급 취급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외출용으로나 쓸 정도였다. 고무신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쓸모 있는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고무신 한쪽을 접어 다른 쪽에 구겨 넣고 모래밭에서 밀고 나가면 그게 자동차였다. 개미나 딱정벌레를 태워 냇물에 띄우면 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급류를 타고 신발이 떠내려가기라도 하면 울며불며 쫓아 내려갔다. 내나 둠벙(물웅덩이)에 신발을 잃어버린 집의 아이는, '칠칠치 못한 놈'이 되어 그 날 저녁  밥도 굶은 채 한바탕 경을 치르기도 했다. 고무신을 이용한 아이들의 놀이는 그밖에도 다양했다. 냇가에서 놀다가 물고기를 잡으면 신발 안에 보관했고, 꽃 위에 앉아있는 벌을 신발로 덮쳐서 뱅뱅 돌리기도 했다. 신발을 던지는 놀이인 '신발치기'라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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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틀에서 문수(사이즈)만 다르게 찍어내는 고무신이야, 따로 멋을 내서 만드는 것도 아니니 네 것 내 것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웃지 못할 일들도 참 많이 생겼다. 어른들은 잔칫집이나 초상집에 가려면 신발에 내 것이라는 표시부터 했다. 불에 달군 송곳으로 신발코 쪽에 작은 구멍을 내거나, 실로 꿰매 X자를 만들기도 했다. 새 고무신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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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고무신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색깔이 똑같아서 바뀌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양심불량'인 사람들은 일부러 헌 고무신을 신고 가서 새 고무신을 신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신발장 앞에서 내신이니 네 신이니 싸우다가 선생님에 불려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새로운 것을 갖기 힘들었던 시골아이들은 새 신발을 사거나 새 옷이라도 하나 얻어 입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고, 자랑을 못해 안달이었다. 다른 애들이 있을 때만 신발을 신고 혼자 있을 때는 벗어서 들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급하게 달릴 땐 헐떡거리다 벗겨지기 일쑤여서 벗어서 손에 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 달리기도 했다.

이젠 어디에서도 고무신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절에나 가야 고무신을 신은 스님네들을 만날까. 그나마 국내에서는 생산하는 곳이 없어서 중국산이 들어온다고 한다. 온 천지에 편하고 예쁜 신발이 넘쳐나는 마당에 고무신을 새삼 그리워할 일이야 뭐 있을까. 하지만 굿거리 장단처럼, 비오는 날 찌걱거리며 다닐 때의 그 묘하던 느낌, 가락. 송사리·붕어를 잡는다고 작은 냇물을 막고 고무신으로 물을 퍼낼 때의 그 신나던 손놀림이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머니가 호박잎 넣고 끓여주시던 된장국처럼, 베적삼 훌훌 걷어붙이고 고무신 신고 가르마처럼 길게 뻗은 논둑 길을 걷고싶다는 생각은 영 떨쳐버릴 수 없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