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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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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8. 18:53 길섶에서
대지의 즙을 흠뻑 빨아들인 은행나무 가지들은 몽글몽글한 잎을 금방이라도 터트릴 듯 부풀어 있다. 성급한 몇몇 나무들은 손톱만한 잎새를 내밀었고, 빌딩 앞 화단의 산수유도 노란 꽃잎을 토해냈다. 날카로운 바늘 끝을 감춘 바람은 솜사탕처럼 부드럽다. 모두가 봄이라고 소리치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듯하다.

좀 멀리 나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화창한 날씨에 반해 걸어보기로 한다. 이 계절에는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밝아졌고 발걸음들도 가볍다. 등이 휠 것 같은 짐들을 벗어버리고 훨훨 날기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결혼해서 섬에 사는 조카의 전화가 온다.“요즘은 어떠냐?” “좋아요. 지금 봄맞이 산책 중이에요. 운동도 할 겸…. 마음 붙이고 열심히 살기로 했어요.” 낯선 삶터에 적응하지 못해 힘겨워하던 아이다. 마음을 바꿨다는 목소리에도 봄의 생기가 듬뿍 묻어있다. 그래, 봄은 가슴에 새로운 희망을 담는 계절이지. 잘 생각했다. 어디서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니….
200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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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1. 19:0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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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뭔 일이라냐?" 방금 뽑아온 콩대를 마당에 널던 할머니가, 입 벌린 까치독사라도 본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마루에 엎드려서 숙제를 하던 아이가 덩달아 놀라 벌떡 일어난다. 주변을 두릿거려 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마당가에서 한가롭게 익어 가는 감과 대추 뿐, 특별한 게 없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우물가에서 허드레 양동이를 주워든 할머니는 마당을 가로질러 달음질친다. 할머니를 뒤를 따라서 시선을 옮기던 아이가 억! 하고 비명을 삼킨다. 마을 건너 밤산 어귀 외딴집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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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에 불을 지르거나 덤불을 태울 때의 연기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다면 불이 난 게 틀림없다. 밤산 외딴집이라면 용구네 집이 아닌가. 아이는 후닥닥 마루를 내려와 꿰지 못한 신발을 두 손에 든 채 할머니를 따라서 내달린다. 할머니와 아이뿐이 아니다. 양동이든 바가지든 그릇 하나씩을 손에 든 동네사람들이 용구네집을 향해서 달리고 있다. 초가을 오후의 황금 같은 햇살이 뒤를 따라 달음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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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용구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불길이 집을 꿀꺽 삼켜버린 뒤였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온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퍼다 끼얹어보지만 불길은 혀를 날름거리며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이라 사람들이 늦게 온 탓도 있지만, 나무로 엉성하게 지은 오두막은 불길 앞에 너무나 무기력했다. 화마가 집 한 채를 통째로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그 순간, 한 여자가 구를 듯 달려와 불타는 집으로 달려들어간다. 발빠른 동네 사람 하나가 쫓아가 간신히 잡는다. 용구 엄마다. 남의 집 밭일이라도 나갔다가 연기를 보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비명은 소름이라도 돋을 듯 날카롭다. "아악! 용구 좀 꺼내줘요. 내 새끼 용구가 저 안에 있단 말여!" 처절한 울부짖음이다. 그제야 집안에 거동을 못하는 아이가 있다는 생각이 난 동네사람들이 우왕좌왕 뛰어다녀 보지만 누구도 악마처럼 타오르고 있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불길로 들어가려다 여러 번 좌절당한 여자는 결국 거품을 물고 혼절하고 만다. 사람들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눈가를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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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구는 소위 앉은뱅이라고 불리는 하반신을 못쓰는 아이다. 태어날 땐 멀쩡했는데, 세 살 나던 해 크게 앓은 뒤 그리 되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돈을 벌러 집을 떠난 용구아버지는 몇 해 째 소식이 없었다. 용구엄마가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서 얻은 양식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언젠가 혼자 있던 아이가 방문을 열고 마루로 기어 나왔다가 토방에 떨어져 죽을 뻔한 사건이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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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용구엄마는 일을 나갈 때마다 방문 밖에서 빗장을 걸고 간다. 그게 탈이었던 모양이다. 심심했던 아이가, 등잔 옆에 놓아둔 성냥을 가지고 불장난을 하다가 불꽃이 옮겨 붙었을 것이다. 방안에서만 살던 아이, 용구는 그렇게 친구 하나 사귀어보지 못하고 떠났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탄생한 도구가 되레 어린 생명 하나를 빼앗아간 셈이었다. 그 시절 그런 비극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한참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에게 성냥은 최고의 보물이었다. 조금 큰 아이들은 호주머니에 몰래 성냥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어른들이 성화를 부려도 소용이 없었다. 늦봄이면 보리서리, 밀서리에 필수품이었고, 겨울이면 모닥불을 놓거나 쥐불놀이를 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다가 불을 내기 일쑤였다. 논둑에 놓은 불이 산불이 되기도 했고, 불장난을 하다가 집 한 채를 홀딱 태우기도 했다.

성냥이 그렇게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생활혁명을 가져왔다고 할 만큼 편리한 도구였다. 부싯돌이 아주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했다고 하지만, 편리성으로야 어찌 성냥의 발치나 따라갈 수 있었으랴. 특히 불씨를 누대로 보존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이 땅의 여인네들에게 성냥의 등장은 말 그대로 복음이었을 것이다. 성냥의 발명은 인류에게 진정한 의미의 불을 가져다 준 셈이었다. 그 전까지는 불이 필요하면 나뭇가지를 팔 아프게 비벼대거나 부싯돌을 여러 번 두드려야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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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까. 오죽했으면 조선시대에는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를 내쫓기까지 했을까? 최초의 성냥은 1827년 영국의 J.워커가 염소산칼륨과 황화안티몬을 발화연소제로 써서 만든 마찰성냥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이란 사람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 김홍집과 동행해서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바로 성냥의 혜택을 볼 수 있었던 건 아닌 듯 하다. 한일합방 후 일제가 인천에 '조선인촌(朝鮮燐寸)'이라는 성냥공장을 세우고 대량 생산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일반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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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인천 외에도 수원·군산·부산 등에 잇따라 성냥공장을 세웠는데, 조선사람들에게는 만드는 방법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시장을 독점하고, 조선인들에게는 쌀 한 되를 가져가야 성냥 한 통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게 팔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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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일종의 착취였던 셈이다. 아무리 비싸도 이미 그 편리함의 단맛을 알아버린 이상, 성냥은 어느 집을 막론하고 필수품이었다. 전기가 집집마다 들어오기 전인 1970년대까지도 등잔불을 켜거나 밥을 짓기 위해 성냥이 반드시 필요했으며, 담배 역시 성냥이 없으면 피우기 힘들었다. 그래서 양식이나 땔감 못지 않게 귀한 대접을 받은 게 성냥이었다. 성냥공장들은 한 때 최고의 호황산업으로 각광받았다. 만들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니 그보다 좋은 장사가 어디 있으랴. 그래서 지역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게 성냥공장이었다. 유엔·아리랑·향로·기린표·새표·복표·야자수·대한·비사표·제비표·두꺼비표·토끼표…. 미처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성냥의 종류도 많았다. 어느 집이든 부뚜막 위나 등잔 아래, 재떨이 근처에는 성냥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선반 위에도 몇 통의 성냥은 비축해둬야 안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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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월은 피붙이처럼 가까웠던 것도 내칠 만큼 비정한 것이다. 성냥은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구경하기 쉽지 않은 물건이 되어 버렸다. 굳이 위상이 결정적으로 추락하게 된 시기를 따지자면 1980년대 후반부터였을 것이다. 어느 골짜기라도 전기가 들어가고, 집집마다 전기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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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에 가스레인지에 전자레인지까지 성냥이 없어도 가동될 수 있는 도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찬밥신세가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순간 편리하고 값싼 1회용 라이터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부터는 담뱃불을 붙일 때 쓰는 일조차 뜸해졌다. 그나마 한 때는 판촉용 상품으로 명맥을 유지했었는데, 중국산 성냥이 들어오면서부터 실낱같던 숨통마저 끊어놓았다. 마당엔 아름드리 미루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아침저녁으로 수백 명의 여공들이 드나들던 성냥공장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그렇게 '위험한 물건' 성냥이 사라져갔으니 성냥 때문에 희생된 용구 같은 아이는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세상을 뜨고 있다. 어쩌면 성냥과 함께 살던 시절이 그나마 안전했던 건 아닌지…. 성냥이 다시 서민들의 부엌이나 호주머니로 돌아올 날이야 있을 수 없겠지만, 성냥과 함께 했던 시절의 기억은 먼 훗날까지 아련하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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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1. 19:03 길섶에서
남녘에는 동백꽃이 한창이고 보리밭이 푸르다던데…. 햇살이 눈부신데도 산기슭의 바람은 잘 갈린 칼날처럼 날카롭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등에 땀이 흐르고 입에서 단내가 난다. 몸 안의 노폐물뿐 아니라 마음에 쌓인 찌꺼기까지 모두 털어내고 싶다.

산행 내내 얼마 전 선배와 나눴던 얘기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요즘은 새벽에 깨면 영 잠을 이룰 수 없어.” “어? 선배도? 저도 그래요. 뒤척거리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생각이 많아서 그래. 책에서 봤는데 그런 땐 운동이 최고래. 몸을 혹사시켜 잡념을 몰아내는 거지.”

산허리, 양지 바른 곳에서 얼굴을 내미는 새싹 하나를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에 한참 들여다본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구나…. 하산길로 잡은 반대쪽은 아직 한겨울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며 평범한 진리를 거듭 새긴다. 그래, 인생도 그럴 뿐이야. 볕이 드는 곳이 있으면 응달이 있게 마련. 바람이 분다고 오던 봄이 돌아가기야 할까. 봄의 씨앗은 강남제비가 물고 오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서 싹트는 건지도 모른다.
20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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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25. 19:3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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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시골 마을에 영화라는 '괴물'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가을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햇살이 쏟아져 내려 자글거리는 한낮이었다. 허름한 트럭 한대가 먼지를 피워 올리며 마을 앞 신작로를 느리게 달렸다. 잡음이 더 많은 스피커에서는, 뾰족한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 나와 온 동네를 달음질 쳤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면민 여러분… 방금 개봉된 따끈따끈한 영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로 오늘 밤 여러분을 모시고자…" 박노식, 장동휘, 허장강이 출연하는 '당대 최고'의 영화가 저녁에 상영될 예정이니 많이 왕림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영화를 보지 못하면 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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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거란 듯, 약간의 엄포까지 묻어 있었다. 트럭이 마을 앞을  지나간 순간부터 동네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맨 먼저, 열다섯의 나이에 가출을 단행한 뒤 서울 물 좀 마시고 귀향한 상필이형이 마을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는 스피커 속의 여자보다 더 말이 많았다. 마치 박노식, 장동휘와 호형호제라도 하고 지낸 양 침을 튀겼다. 아이들은 괜히 신이 나서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영화라는 것을 처음 보거나 한 두 번 본 게 고작인 어른들까지 저녁을 일찌감치 챙겨먹고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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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먼지로 꾀죄죄해진 채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결연한 태도로 어른들을 졸랐다. 영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동네 아이들이 단체로 웃골 방죽에 뛰어들기라도 할 듯 비장한 분위기였다. 아이들의 성화가 먹힌 건지 어른들의 인심이 후해진 건지, 그 날 꽤 많은 아이들이 천막극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천막은 벼를 벤 논 한 가운데에 세워졌다. 미처 물기가 다 빠지지 않은 바닥은 축축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촤르르 촤르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말로만 들어봤던 영화라는 건, 생각보다 더 신기한 물건이었다. 하얀 천(스크린) 안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말을 하는…. 그 뿐인가. 살아서 주먹질을 해대고 펄펄 날기도 했다. 스크린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목소리보다는 잡음이 더 극성을 떨었지만 신기함을 반감시키지는 못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악당들을 물리칠 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이의 영화와 관련한 첫 경험은 그렇게 얼떨결에 왔다가 갔다. 그리고 아이가 정말 영화관이란 곳을 처음 가본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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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이 끝나기 전 날 종례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무엇인가 썼다. '내일 영화관람'. 처음엔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했지만, 환호성이 터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읍내출신 아이들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골출신 아이들은 연신 탄성을 내 뱉었다. 쿼바디스였던가 벤허였던가…. 장대한 스케일의 서양영화였다. 영화는 가설극장에서 본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웅장했다. 대형(?)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는 서양배우들을 보면서 아이는 넋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이에게 '진짜영화'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다닐 때는 얌전하게 학교에서 보내주는 영화만 봤지만, 고등학교 때는 '몰래 보는 영화'에 빠져들기도 했다. 돈만 생기면 친구들을 꼬여내서 극장을 찾고는 했다. 들킬세라 2층 영사실 옆 구석자리에 앉아 숨죽이고 영화를 봤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는, 오종종한 TV의 화면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렇게 극장을 드나들다가 결국 선생님에게 걸려 경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엉덩이에 맞는 '빠따' 몇 대 정도는 영화가 품은 매력을 하루아침에 포기시킬 만큼 위력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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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들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갔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한 아이가 몰래 숨어 영화를 보던 그런 모습의 극장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어느 날부터 '이것저것 틀어주던' 재재개봉관이란 것이 사라지더니 재개봉관도 속속 자취를 감추고, 영원히 남을 것 같았던 개봉관마저도 문을 닫는 곳이 많아졌다. 어느 곳은 새 단장을 해 음식점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 곳은 나이트클럽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체인점식' 극장이 채워나가고 있다. 세월 따라 극장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우선 극장건물 머리에 붙어있던, 페인트로 그린 간판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매끈하게 잘 빠진 실사포스터가 그 자리를 메웠다. 전에는 극장마다 간판을 전문으로 그리는 전속 '간판쟁이'가 있었다. '뼁끼(페인트)통'을 들고 뒤통수를 맞아가며 그림을 배우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한 사람도 있었다. 극장 한쪽 구석에는 허름한 작업실이 있게 마련이었다. 베니어판이나 온갖 도구 등 잡동사니들이 동거하는 그 안에서 '간판쟁이'들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세상을 꽃처럼 피워냈다. 그들의 그림에 따라 그 극장의 품격이 정해지기도 했다. 신성일이니 김지미니 얼굴을 실감나게 잘 그려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간판쟁이'는 그 극장의 보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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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팔고 사는 풍경도 세월 따라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매표구에 돈을 넣으면 표가 나왔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한 뒤 기계(자동발권기)가 주는 표를 받거나 창구에서 예매번호와 바꾼다. 물론 매표소에서 직접 표를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로 영화를 보기도 힘들뿐더러 꽁무니에 서 있노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눈총이라도 받을 것 같다. 입구에 앉아 약간은 위압적인 눈길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기도' 아저씨도 보기 어려워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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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도둑영화' 한번 보려다 기도에게 멱살을 잡혀 내동댕이쳐지는 껄렁쇠도 있었다. 반대로 기도를 잘 알면 공짜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극장 안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언제나 약간씩 지린내를 풍기던 극장 안은 불을 켜놔도 음침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찾아오는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야말로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상영시간이 되었는데도 소식이 없으면 쏟아지던 휘파람과 고함소리. 아마 영사기사는 그 순간 뭔가 문제가 생긴 필름과 씨름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 기사가 필름이 담긴 양철통을 영사기에 걸면 잠시 후 챠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극장 안은 조용해지고, 한줄기 빛이 부유하는 먼지 사이를 달려 스크린에 쏘아진다. 그리고 그 빛들이 그려내던 그림은  이루어지는 것 하나도 없는 현실과 달리 늘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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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얼마나 많이 돌렸는지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중간중간 끊어진 곳을 이어놓은 까닭에 내용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시대에서 저 시대로 건너뛰기 일쑤였다. 아직도 극장에 필름은 건재하지만 그 때의 그 맛은 나지 않는다. 더 아쉬운 건 그나마도 필름의 시대가 그리 길게 갈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영화에도 디지털 바람이 거세게 불 테니…. 영화를 상영하는 중간에 필름이 끊겨서 극장 안이 컴컴해지면 휘파람이 난무하고, 돈 거슬러달라는 고함이 천장을 찔렀다. 그래도 거슬러 받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 틈에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다 뺨을 맞고 눈을 부라리는 설익은 건달들도 있었다. 서울에서 개봉한 영화가 시골 읍내까지 내려오려면 몇 달씩 걸리기 일쑤였다. 요즘이야 수십 개의 카피본이 전국에 동시에 걸리는 세상이니 실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잊혀지지 않는 건 군것질거리를 파는 꼬마였다. 네모진 모판에 끈을 매어 목에 걸고 껌이니 과자니 팔던 아이. 극장측의 배려로 장사가 가능했겠지만, 컴컴한 그 곳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성인이 된 그 아이도 어느 날 휘황찬란한 현대식 극장을 찾을 것이다. 잘 꾸며진 매점에서 잘 튀겨진 팝콘과 콜라를 사서 아이에게 안기며 슬쩍 천장에 시선 한번 줄 것이다. 뭐, 눈물을 흘릴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영화처럼 명멸하며 지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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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보고 들은 것만 적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즐기긴 하지만 마니아급은 못되거든요. 혹시 사실관계와 다른,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sagang
2007. 7. 25. 19:30 길섶에서
그가 모처럼 찾아왔다. 눈에 이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연락도 없이 회사앞까지 와서 불쑥 전화를 했다.“비가 오니 빈대떡 생각이 나서….” 비 때문에, 선배가 보고 싶어서 그가 무작정 버스를 탄 곳은 대전이었다. 그 곳이라고 빈대떡집이 없을 리 없다. 그는 마주앉아서도 별 말이 없다.“일은 어때? 추운데 괜찮아?” 검게 탄 얼굴과 거친 손이 안타깝다.“할 만해요. 추울 땐 추운 대로 더울 땐 더운 대로….”

그는 줄에 매달려 빌딩유리를 닦는다. 대학 때 산을 오르던 인연으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삶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높은 곳에서 익힌 관조의 시선으로 노래하면 그만이다.

세월에 목마른 사람은/떠나가는 계절에 기대어/노랫가락 한 소절을 흥얼거린다(중략)//여윈 가지 힘없이 흔드는 바람으로/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불현듯 떠오르는 그리움마저 떨칠 수 있을까.

그는 삶을 따뜻하게 껴안는데 인색하지 않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 양지에 깃든 새만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다.
2005.2.25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