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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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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야기, 그 두 번째 장정을 시작합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4월까지 연재했던 터키, 지중해를 따라 걷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산후 조리도 못한 채 이스탄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일종의 신고 의식이 필요했던 셈이지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번엔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블로그에 연재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냥 책으로 낼까.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는 오랜 원칙을 깰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부터 또 긴 여정에 들어갑니다. 읽은 뒤 그냥 가지 말고 한 줄 답글로 아는 척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권과 마찬가지로 댓글로 격려해주신 분들에게는 2권이 출간된 뒤 저자 사인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사진 왼쪽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오른쪽으로 꺾어진 해협이 흑해와 연결되는 보스포루스, 가운데 강 같은 곳이 골든혼이다. 육지는 맨 왼쪽 반도처럼 나온 곳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 골든혼을 건너 펼쳐진 땅이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그리고 앤 앞쪽에 보이는 것이 아시아 땅이다.

전쟁? 절대 안 나요.”

새벽 430.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두 명의 청년. 시리아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냐고 들이대듯 묻자, 모루에 해머를 내리치듯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 왜 안 난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쟁을 해서 이득을 보는 쪽이 아무도 없거든요. 시리아는 물론이고 터키 역시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나면 관광산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잖아요. 또 전쟁에서 이긴다고 땅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옛날하고는 달라요.”

으으음”(엄청나게 감탄했다는 듯 끄떡끄떡)

미국도 이스라엘도 이득 볼 게 없고중국 역시 반대하는데다 NATO도 전쟁에 참여할 생각 같은 건 아예 없어요.”

그렇구나. 전쟁이 안 일어나는구나. 헌데, 이 친구들 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해박하지? 내가 장군 출신의 군사평론가들을 만난 건가? 그나저나 안 물어봐줬으면 얼마나 섭섭할 뻔 했니? 나는 감탄을 지나 감동까지 하고 만다. 하늘의 점지로 우연히 만나게 된 터키 청년들. 한국에서 3년가량 일하고 돌아왔다는 그들과의 질펀한 수다가 시작된다. 너희들 딱 걸렸어. 내가 바로 그 유명한 호기심 사나이거든.

 

하늘에서 본 이스탄불.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이 가장 걱정한 게 더위전쟁이었다. 더위야 최종 목적지로 잡은 샨르우르파란 곳이 섭씨 50도를 넘나든다니 염려해주는 게 당연하지만 느닷없이 전쟁 걱정은 왜? 출발을 코앞에 두고 터키와 시리아 간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예고하는 사건이 터졌다. 먼저 시리아가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며 지중해 연안에서 터키 전투기를 격추했다. 불뚝 성질 하나만큼은 선불 맞은 멧돼지도 부럽지 않을 터키가 넙죽 엎드려 있을 턱이 있나. 반응은 즉각 나왔다. 국경에 접근하는 시리아 군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하고 대공포와 미사일 발사기 등을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여기까지가 출발 직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문제는 내가 갈 곳이 바로 잘못 넘어지면 배꼽이 국경선을 넘어갈 정도로 시리아에 가까운 접경지역이라는데 있었다. 몇몇 사람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고 몇몇 사람은 뭔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등을 떠밀었다. 이참에 날 치워버리겠다는 심보겠지? 나는 잘하면 종군기자 한번 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전혀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현실성 떨어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목표로 했던 지역을 가지 못할까봐 노심초사였다.  그러다보니 공항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전쟁’일 수밖에 없었. 터키 사람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공항이나 이스탄불, 그리고 훗날 접경지역에서 만난 그 누구도 전쟁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걱정 따위는 서리서리 접어 배낭에 넣어두고 어렵게 만난 청년들하고 놀아볼 일이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터키 청년들.

주로 이야기를 나눈 청년의 이름은 이브라힘이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유일신 3대 종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슬람식 표기가 바로 이브라힘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에는 드물지 않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한국에서 일했다는 경험이상의 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갔을 때 서울에서 일했어요?”

아뇨, 저는 주로 지방에 있었어요. 혹시 예산이라고 아세요?”

예산?(사람들이 놀라 돌아볼 만큼 목소리가 커진다) 아다 마다야? 그쪽이 바로 내 고향이에요. 수덕사라고 들어봤어요? 내가 거기서 자랐거든.”

정말요?(기특한 것. 한국식 추임새까지 넣을 줄 알고). 제가 바로 예산에서 일했어요. 수덕사도 당근 알지요. 덕산을 거쳐서 가는.”

어라? 어라?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야. 이 머나먼 곳에 와서. 이 정도면 고향 동생? 아니, 동생이라기에는 나이차이가 좀 나고. 아무튼 객지에서 고향의 조카쯤 만난 듯한 감동이 물밀 듯 몰려온다. 이야기는 거침없이 달려 나간다. 말투도 은근히 내려간다. 그의 소망은 한국에 가서 식당을 차리는 거란다. 전에 돈을 좀 벌어서 식당을 열었는데 망했다고 아쉬워한다. 터키에도 코리언 드림을 품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하고 약간은 불안하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공항 내부.

식당을 차리면 서울은 좀 어려울 것 같고. 대전이나 천안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저 개업하면 형이 신문에 내줄 수 있어요?”

그럼, 내주다마다. 신문이 문제야? ‘테레비에도 빵빵 때려줄 테니 차리기만 해.”

내가 준 명함에서 신문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 친구, ‘실속하나 챙긴다. 나는 훗날 걱정 같은 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덜컥 굳은 맹세부터 한다. 내가 무슨 재주로 음식점 개업 소식을 신문에 내고 TV에 때려준단 말이냐. 하지만 그 소망 가득한 눈망울 앞에서 차마 “No”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용기부터 주는 거야. 그나저나 언제부터 우리가 형 동생이 됐지? 아무렴 어떠랴. 터키에 어린 동생 하나 생겼으니 좋은 일이지. 우리는 공항 대합실 한 가운데 서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사진도 신나게 찍어댄다. 남들이야 흘끔거리건 말건. 그러다가 결국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말았다. 그의 뜨거운 피가 내게로 내 피가 그에게 흐르는 느낌이 선연하다. ! 너와 나 사이엔 원래 하나의 이름을 가진 강이 흐르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번 여행 일정에 넴루트 산이 있다니까 그쪽의 아드야만이 자기 고향이라고 또 한 번 팔짝 뛰며 반가워한다. 그래, 인연이라는 게 이렇다니까.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니 안내하고 싶다며 금방이라도 따라나설 기세다. 하지만 그도 직장생활을 하는 몸. 말만으로도 고맙지. 작별을 하기 전에 터키인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새벽 승객을 기다리는 공항택시들.

내 동생, 이브라힘아, 너는 네가 유럽인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해?”

유럽이든 아시아든 아무 상관없어요. 우린 터키사람이거든요.”

우문에 현답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물어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알다시피 터키는 국토의 97%가 아시아 땅(아나톨리아)에 있고 단 3%(트라키아)만 유럽의 끝 발칸반도에 걸쳐 있다. 영토의 비중으로 보면 아시아에 속한 국가라고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의 일원이 되고 싶은 열망을 오랫동안 품어왔다. 오스만 제국이 세계를 호령할 때, 동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삼고 아시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기억을 갖고 있는 투르크족. 그 위대했던 시절에 대한 미련일까. 세계 1차 대전에서 참패하고 1923년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에게해의 섬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스탄불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유럽 땅을 갖는다는 상징성과 서구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켜야 한다는.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는 아시아의 이름으로 살기보다는 영광이 대대손손 계속 될 것 같은 유럽에 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찬반 논란이 거세긴 했지만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도 ‘EU Style’이다. ‘준비된비회원국인 셈이다. 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에서는 달러보다 유로화가 주로 통용된다.

 

세상은 아직 박명 속에 잠들어 있다.

하지만 터키는 여전히 유럽연합의 외곽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회원국인 그리스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과 인권이나 키프로스 갈등’, ‘쿠르드족 문제등을 가입 거부 이유로 들지만 까놓고 말하면 유럽은 터키가 싫은 것이다. 과거의 정복자에 대한 공포의 잔해도 있을 테고, 어쩌면 기독교 문화권에 이슬람 문화를 끼어주기 싫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터키 경제에서 별로 덕 볼 것도 없으니 잘(?) 나가는 자기들끼리 놀아보겠다는 수작이기도 하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요즘은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 역시 유럽이 전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등 몇몇 나라의 경제가 도미노 게임이라도 하듯 무너지면서 세계 경제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판이니 그 아수라장에 무엇 하러 낄 것인가. 더구나 이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아시아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당신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 거야? ‘유럽이든 아시아든 상관없다. 우리는 터키 사람일뿐정답이다. 스스로의 자존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뒤에 몇몇 사람에게 물어봤을 때도,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듯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얘기가 잠시 무겁게 흘러갔다. 읽다가 덮은 독자는 없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임을 알아야 된다. ‘아빠 좋아? 엄마 좋아?’ 식의 선택지는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니. 아무튼 공항에서 금방 만난 동생 이브리힘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드디어 가이드들을 만났다. 맨 오른쪽이 이젯, 가운데가 훌리아.

한국에 오면 꼭 전화해. 알았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멀어지는 그의 어깨가 듬직하다. 근처에 서 있다가 잠깐 눈이 마주친 여행작가 P가 감탄사를 섞어 한마디 한다.

참 빠르시네요.”

뭐가 빠르다는 거지? 사람 사귀는 게? 내 삶이 그래요. 나는 오로지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여행을 하는 걸. 그리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또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걸. 이별은 상봉을 낳는 것일까? 이브리힘과 헤어지는 찰나에 가이드들이 허겁지겁 나타난다. 그들이 지각하는 바람에 일행은 잠시나마 공항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새로운 사람을 사귈 기회를 얻었지만. 가이드는 남녀 2명이다. 그들 눈에는 옆 사람과 내가 닮아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들 둘이 무척 닮아 보인다. 혹시 남매나 부부 아닐까? 뭐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둘 다 키가 크지 않고 아담하다.  내가 큰 키가 못돼놔서 작은 사람들을 만나면 형제애부터 느낀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큰 사람은 가까워지는 단계부터 약간 부담을 느낀다. 가끔은 터키 사람들이 유럽인처럼 키가 큰 줄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큰 사람은 크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작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생긴 것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짐작이긴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 몽골초원에서 돌궐족으로 살 때는 우리네 생김새와 많이 비슷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중앙아시아를 지나며 적절히 피를 섞고 또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또 다른 피를 섞으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의 멀고먼 여행 이야기는 터키 역사를 말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하자.

 

여자 가이드의 이름은 훌리아(Fulya). 이들의 한국말은 조금 전에 헤어진 친구들보다 어눌하다.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 훌랄라라고 할 때 훌리아예요.”라며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준다. 훌랄라? 이거 또 괴물 하나 나타난 거 아냐? 그 순간 그녀가 말한 훌랄라는 훗날 많은 사람의 입에서 울랄라가 되기도 하고 얼랄라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지만 한국에는 단 하루만 가봤다는 스물일곱의 그녀. 명물이다. 남자 가이드의 이름은 이젯 혹은 가제트를 연상시키는 이제트(Izzet). 어라? 이제트? 이집트에서는 여자 이름인데? 람세스 2세가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잖아. 이 친구는 비교적 과묵한 편이다. 스물여덟 쥐띠라고 한국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역시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포항에 있는 선린대에서 6개월 어학연수를 받았다. 그 역시 숱한 전설을 남겼다. 한국에 하루 가본 훌리아나 현지에서 6개월 공부한 이젯이나 말이 유창하지 못하긴 마찬가지. 나는 내가 터키말을 배우느니 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로 한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의 한국어 교사다. 하드트레이닝을 시킬 테니 각오하라. 속으로 하는 생각을 그들이 알 턱이 있나. 물론 암울한 미래도 알 수 없겠지. 비행기가 도착한 게 현지시간으로 4시 40분. 새로 만난 동생과 수다를 떨고 가이드들과 감격의 상봉을 해도 아침 먹을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다. 공항을 한 바퀴 돌아본다. 밖으로 나가니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맑은 날이 많은 터키에서는 보기 드문 하늘이다. 9개월 전에 만났던 폭주족 택시운전사가 생각난다. 생명을 담보로 유희를 즐기던 그, 잘 있겠지? 별 사람이 다 보고 싶다.

 

 

차 안에서 찍은 이스탄불의 주택가.

이스탄불 시내로 가는 길. 새벽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오욕칠정. 그리고 밝음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음습한 뒷골목 풍경. 사람 살이가 모두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이 아니던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게  느닷없이 생각 나 이젯에게 묻는. 이 느닷없음이야말로 나의 오랜 지병이다.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어요?”

? 무슨촌요?”

단어 자체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하긴 학교에서 그런 말을 가르칠 리 있나. 하지만 무슬림이 대부분인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이리 저리 설명해 보지만 성매매라는 단어조차 모르니 요령부득이다. 이게 어디 온갖 단어를 동원해 설명할 일이던가.

돈 주고 여자를 사는 곳, 몰라요?”

그 말은 효과를 본 모양이다. 잠시 얼굴이 붉어지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있어요.”

정부에서 인정하는 건가요?”

그렇구나. 있구나. 그것도 공식적으로. 하긴 인류역사와 함께 해온 게 그 직업이라지 않던가. 에페소에 가면 고대에 창녀촌을 안내하던 세계 최초의 광고도 있는 판인데.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동행자들의 눈초리가 약간 새치름해진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이건 순전히 학문적 궁금증이라니까요. 공부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이스탄불 시내.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새벽, 도시는 여전히 적막에 싸여있다. 그리고 모든 갈등은 평화라는 위장막에 덮여있다. 나는 지금 터키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푸듯, 이 도시에 수천 년동안 고인 이야기를 퍼내야 된다. 숙련된 백정처럼 도시의 정수리에 잘 벼린 펜과 카메라를 들이대야 된다. 느닷없이 불타오르는 전의로 온 몸이 뜨거워진다.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유령도시' 카야쾨이

페티예로 가는 길

페티예로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창문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굽이굽이 산길로 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해변이 나타나고, 그 해변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늦여름의 햇살을 온 몸으로 즐기고 있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산들은 고향에 온 듯 정겹다. 해변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조금 넓은 도로로 접어든다. 곳곳에서 길을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짙푸른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느린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언젠가 직접 운전해서 이 길을 달려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그러는 사이 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고원지대가 이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내륙 고속도로를 탄 것 같다. 중간에 주유소 겸 휴게소에 들러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간다. 터키의 기름 값은 한국보다 더 비싸다. 휘발유 값을 적어놓은 입간판을 보니 리터당 3000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차는 무척 많다. 그 중에는 현대자동차도 많이 눈에 띈다. 지난해에는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현대차에서 윈도우브러시 하나 공짜로 받은 적 없지만 괜스레 뿌듯하다. 터키인 가이드는 쓸데없이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볼멘소리다. 어딘들 안 그럴까.

보드롬에서 페티예로 가는 길에 곳곳에서 만난 비치. 9월말인데도 여름이다.

어느 순간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창밖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채색돼 있다. 잠시 뒤 멀리서 불빛들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금세 페티예 시내로 진입한다. 페티예는 전날 묵었던 보드롬보다 큰 도시로 인구도 5만 명이 넘는다. 물론 여름에는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10만 명이 넘게 북적거린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슈퍼에 들러 술과 안주를 산다. 이왕 일행이 됐는데 정식 상견례 겸 술이라도 한잔씩 하자고 K가 바람을 잡았다. 나로서야 술 소리만으로도 저절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호텔에 도착하니 아홉시. 부지런을 떨어야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을 거 같다. 호텔 이름은 ‘Marina Vista’. 역시 자그마한 호텔이다. 어제 묵었던 곳과 달리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경관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페티예에서는 일정이 많아 이 호텔에서 3일 동안 묵을 예정이라고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또 30분이 후딱 지나갔다.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은 지 오래다. 야외식당으로 가니 닭요리가 나온다. 뷔페식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찜닭 같기도 하고 백숙 같기도 하고…. 점심에도 닭고기를 먹었는데, 전생에 터키 쪽에 사는 닭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시장이 반찬’이라는 경구가 어디 틀려본 적 있던가.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닭 아니라 돌을 구워 와봐라. 내가 외면하나.

고속도로의 휴게소. 백화점처럼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터키의 주유소. 기름값이 우리나라보다 꽤 비싸다.

술병을 전멸시키다

식사를 하는데 인근 음식점에서 느닷없이 함성이 터진다. 저 정도 함성이면 축구중계를 하는 게 틀림없다. 이 나라 사람들의 축구사랑은 말 그대로 ‘광적’이다. 터키의 프로축구의 역사와 규모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깊고 크다. 1959년부터 리그가 시작됐고 팀은 1부 리그에 18팀, 2부에 20팀이 있다. 축구경기장은 늘 도가니처럼 뜨겁다. 열정적이고 급한 국민성이 그곳에서라고 달라지랴. 야유나 욕설이 난무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유명한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은 곳곳에서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음식점마다 응원열기로 들끓고, 경기가 끝나면 응원하는 팀의 깃발을 휘날리며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기도 한다. 우리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벌였던 그 ‘광란의 밤’을 상상하면 된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우리의 사랑스런 터키인 가이드 이믿음 씨 역시 축구광이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콧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축구중계를 하는 시간에 일을 하자고 하면 표정이 헐크처럼 변한다. 식사를 마친 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되는지 확인해 본다. 호텔에서 준 ID와 비밀번호를 넣으니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르는 와이파이 표시. 우와! 고마운 것. 이것저것 체크하고 회사 일을 몇 가지 한다. 좋은 세상이다. 시작한 김에 카톡으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불러볼까 하다가 시간을 보니 거긴 새벽. 단잠을 깨울 수는 없으니 포기.

Marina Vista 호텔의 수영장.

페티예에서 3일동안 묵었던 Marina Vista 호텔

방으로 돌아오니, 술자리가 준비됐다는 전갈이 온다.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냐. (따지고 보면 사흘밖에 안됐다) 술 욕심이라면 이태백도 울고 간다는 내가 아니던가. 특히 라크(LAKI)라는 술이 손을 자꾸 끌어당긴다. 라크는 포도주를 증류한 뒤 향료를 첨가해 만든 술이다. 잔에 따르면 무색투명한데, 거기에 물을 붓는 순간 우유처럼 부옇게 변한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사자의 젖이란 뜻의 아슬란스투라고 부른다. 터키 아니면 감히 어디서 사자의 젖을 먹어보랴. 중국술이 그렇듯이 독특한 향이 있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 그 자리의 젊은 친구들도 한번 맛을 보더니 대부분 찡그리며 내려놓는다. 향도 향이지만 젖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것과 달리 알코올 도수가 40도다. 내가 언제 맛보고 도수 봐가며 술을 마셨더냐. 술이라면 온갖 미련을 떠는 나, 결국 그 한 병을 혼자 몽땅 해치우고 말았다. 그러고도 보너스로 맥주 몇 캔 추가. 이 정도면 차라리 걸신이다. 한두 명 빠지기 시작해서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그날 사온 술병들을 대부분 자빠트렸다. 눈을 비비고 보니 새벽 2시. 어제 잠을 설쳤으면 정신 좀 차릴 만하건만 또 일을 저질렀다. K가 화합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닷가니 ‘개닭’은 안 울 것 같다. 몇 시간이라도 자봐야지.

카야쾨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기념품가게. 산 사람은 또 저렇게 살아가는 법.

카야쾨이 마을로 올라가는 길.

카야쾨이로 가다

새벽, 알람에 의지해서 힘들게 눈을 뜬다. 아니나 다를까 몸은 천근만근 속은 울렁울렁이다. 과음한데다 기껏해야 네 시간 밖에 못 잤으니…. 하늘은 청명하고 바다는 저리 아름다운데 내 몸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뒤뚱거린다. 아침식사는 뷔페식. 아무리 찾아봐도 해장국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술도 안마시나. 이것저것 챙겨들고 식탁으로 갔지만 쓰라린 뱃속은 그 무엇이라도 거부할 태세다. 돌도 씹어 먹는다는 내가….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여행을 한다는 자가 그리 술에 욕심을 내다니. 체력을 비축하고 시간을 잘 나눠 써야 하는 여행자에게 과음은 금물이다. 마음껏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탐할 바에야 여행자보다는 여유로운 관광객이 되면 된다. 애당초 여행이 목적이었다면 여행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관광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에 맞게 즐기면 될 터이다. 이런 땐 라면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지만, 그래도 여행자의 철칙을 배신할 수 없어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야외식당은 바다에 이어 테라스처럼 만들어놓아서 풍광이 그만이다. 지중해의 아침은 괜히 배신감을 느낄 만큼 아름답다. 곤두박질친 햇살이 자맥질을 하더니 반짝이는 은빛 비늘들을 잔뜩 건져 올린다. 그 사이로 날렵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지중해는 거대한 수족관이다.

돌집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꽤 높은 건물이었던 듯.

식사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카야쾨이(Kayaköi)로 향한다. 일명 ‘유령도시(ghost town)’로 불리는 이곳은,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오래 전 주민들이 떠난 뒤 폐허가 된 마을, 사람 대신 빈집을 지키는 돌덩이마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곳. 카야쾨이의 슬픈 사연을 말하려면, 거창하게도 세계1차 대전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잠시 다리쉼 하면서 역사 공부를 좀 해보자.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터키의 주인이었던 오스만제국에서는 한쪽에서 구경하다 떡이나 얻어먹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러시아로부터 ‘유럽의 병자’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쇠약해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의 선택은 엉뚱하게도 독일 쪽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판단 잘못으로 나라를 거덜 낸 게 어디 한 둘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독일의 패망과 함께 사돈 따라 장에 갔던 터키 역시 집도 절도 잃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생떼같은 젊은이들 수십만 명을 잃은 채…. 결국 패망국으로서 연합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게 바로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잃고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반도만 달랑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실질적 주권조차 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마을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

교회로 가는 길.

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

이 대목에서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면 용맹한 돌궐의 후예 튀르크족이 아니다. 세브르 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분노는 곧 범국민적인 독립운동으로 승화된다. 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바로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이다. 조금 복잡해지니까 이 ‘위대한 독재자’를 해부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하자. 저항이 만만치 않자 연합국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터키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세브르조약을 파기하고 터키의 요구를 반영한 로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1923년 7월4일 새 조약은 체결됐지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의 비극적 이야기도 이날 시작된다.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연합국은 터키의 오랜 숙적인 그리스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스탄불이 있는 유럽 쪽 영토를 포기하고 에게해 섬들을 차지할 것인가, 이스탄불을 갖는 대신 인근 섬들을 그리스에게 양보할 것인가’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무스타파 케말은 고심 끝에 섬들을 포기하고 이스탄불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터키 연안의 모든 섬들은 그리스 영토가 된다. 곧 이어 그리스 땅에 살던 터키인은 터키로, 터키 땅의 그리스인은 그리스 땅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령이 떨어진다. 터키에 살고 있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강제로 터키를 떠나야 했고, 그리스에 있던 40만 명의 터키인이 눈물을 머금고 보따리를 싸야 했다.

17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정교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교회의 내부.

손가락을 꼽는 정도의 셈법으로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각자 제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그들은 그리스국민, 터키국민이라는 이름의 ‘국민’이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자연인이었다. 누대로 살아왔으며 낳고 자란 땅에서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구말대로, 국가가 뭐 해준 게 있다고 태를 묻은 땅을 떠나라는 것인지. 그들은 울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낯선 땅으로 떠나야 했다. 노인도 아이도 예외 없이 그 행렬 속에 포함됐다. 그렇게 해서 폐허가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카야쾨이다. 고증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서는 BC 3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5천년이나 이어온 마을이다. 터키니 그리스니 하는 국가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마을이 사라지기 전, 1922년까지는 3000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잘 살았다고 한다. 2개의 교회와 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한 마을이었다. 가서 살아야 할 나라, 그리스 말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떠난 뒤 아주 오랫동안, 카야쾨이 출신의 그리스 노인들이 찾아와서 울면서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여우도 죽을 땐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 했던가. 죽기 전에 낳고 자란 땅을 보고 싶었겠지.

부천에서 온 아가씨. 혼자 여행하는 용기가 아름다워 오래 바라보았다.

용감한 그녀를 만나다

차가 카야쾨이로 들어서면서, 원(怨)이 응결된 곳 특유의 음산함이 온몸을 감싼다. 산비탈 가득 회색빛 빈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 같다. 그들은 애당초 왜 넓은 땅을 두고 저 비탈에 집을 지었을까. 유령마을 입구에 두어 곳의 기념품 가게가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와 머플러 등을 판다. 남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난 자리가 있어 이들은 먹고사는구나.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남들보다 한발 앞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의 석조주택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무는 썩어 없어졌지만 돌들은 비바람 속에서도 긴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얼마나 단단하게 지었는지 페티예대지진도 견뎠다고 한다. 헉헉거리며 걸음을 재촉해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다. 어? 동양인 여자다. 우리 일행은 아닌데, 누구지? 도시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동양인을 이 골짜기에서 만나다니. 아니, 동양인이 아니라 분명 한국인이다. 아, 핏줄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느낌으로 단번에 알아본다. 직감을 믿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이리 신기할 데가. 젊은 아가씨가 혼자 이 골짜기에 와 있다니. 한OO. 26세. 부천 거주. 그녀의 신상명세서다.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을 모두 해외여행에 쓰기로 했단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터키였다. 그래, 잘했네. 세상이 학교지, 그 용기가 대단하다.

시간은 집 안에도 저만한 나무들을 키워놓았다.

돌담을 뚫고 자란 무화과나무.

혼자 다니기 무섭지 않느냐고 물으니, 원래는 일행이 있었단다. 인터넷 여행 사이트에서 만나 같이 떠났는데 몇 곳을 거쳐 오면서 각자 다니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긴 낯선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려면 혼자 다니는 게 최고다. 버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외로움 정도는 감수해야 씁쓸달콤한 ‘나만의 시간’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는 것. 17세기에 지어진 그리스정교 교회 앞에서 서울에서 온 남자와 부천에서 온 여자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긴 얘기를 나눈다. 내 나라, 내가 사는 도시에서 만났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사람들. 인연은 장소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돌담 사이 오솔길로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뒷모습이 아름답다. 평생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여행을 하길. 또 홀로 되어 언덕을 오른다. 깃대가 우뚝 솟은 저 건물은 학교였을까? 아니면 촌장이 살던 집? 공회당? 혼자 걸으며 상상 속에 빠진다. 작은 집도 있고 제법 큰 집도 있다. 저쪽, 아슬아슬한 축대 위에 세워진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저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빈 집은 슬픔이다. 슬픔만 차 있는 게 싫었던 걸까. 시간은 집 안 곳곳에 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심어 키워냈다. 방이었던 곳에서도 부엌이었던 곳에서도 홀로 열려 익어가는 무화과들, 강제로 떠나야했던 그리스인들의 눈물인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도마뱀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이들이 마을의 주인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많이 눈에 띈 식물. 에델바이스인 줄 알았다.

난 유령을 만나고 온 걸까?

내친 김에 마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보기로 한다. 곳곳에서 낯선 식물들을 만난다. 에델바이스 같기도 한 이 식물의 이름은 무얼까? 어느 집 벽에서 놀던 무지갯빛 도마뱀이 낯선 나그네를 향해 잔뜩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마을의 주인이구나. 너희들은 강제로 쫓겨나지 말고 오래 오래 이곳을 지키렴. 옛날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했을 골목길. 이제는 오솔길이 되어 나그네의 허허로운 발길 아래 게으르게 누워 있다.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걸음을 멈춘다. 이리 저리 둘러보지만 잔뜩 야윈 내 그림자만 어서 가자고 재촉이다. 문득 내려다본 저 아래 세상이 아스라하다. 원래 이곳이 세상이었거늘. 뒤따라 올라왔던 사람들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나 보다.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분명 내 이름인데도 처음 듣는 듯 낯설다. 그 낯선 이름이 유령처럼 웅웅웅 울며 빈집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뛰다시피 언덕을 내려온다.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기도 어렵다. 그대로 돌 위에 주저앉는다. 온몸이 목욕이라도 한 듯 땀에 젖었다. 과음과 수면부족 때문이겠지? 아니, 그게 전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정말 저곳에서 유령들을 만나고 온 것일까?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마우솔레움 입구. 표를 끊어서 전철 개찰구 같은 저곳으로 들어간다.

초스피드로 성장하는 벨라솜라. 29년 자랐다는데 300년쯤 된 나무 같다.


마우솔레움으로 가는 길

 터키, 그 중 보드롬에서의 두 번째 날이 시작됐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고 길을 나선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바투 잡으니 언제 잠을 설쳤느냐는 듯 힘이 솟는다. 역시 나는 길바닥 체질. 마우솔레움으로 가는 길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곡예운전의 스릴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래도 명색이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 어찌 이 모양인지. 그나마 카페들은 그 좁은 길을 살짝 점유한 채, 탁자까지 내놓고 장사를 한다. 거기서 차를 마시는 분들은 배짱도 좋으시지. 마우솔레움 입구 역시 한숨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있다. 안내간판도 눈에 띄지 않아서 가이드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갈 뻔했다. 주차장? 물론 없다. 결국 우리 일행이 내리기 위해서는 차를 그 좁은 골목에 세울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뒤로 자동차가 10대 이상 밀리고, 그들이 제각기 빵빵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섞여 골목은 금세 아수라장이 된다. , 성질 급한 터키사람들. 그래도 우리의 운전사 하산’(멋지다라는 뜻을 가진 아랍 이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어느 절에서 수행하다 하산’(下山)했기에 저리 도가 높은지. , 느긋한 터키 사람

마우솔레움 터. 지금은 빈 자리에 돌들만 굴러다닌다.


 

박물관에 전시된 마우솔레움 모형. 맨 위에 보이는 저 마차는 대영박물관으로 가고 나머지는 산산히 흩어졌다.

사실, 내게는 길이나 주차장이 문제는 아니다. 나는 지금 고대 7대 불가사의 앞에 서 있다. 티켓을 끊고 안으로 들어간다. , 잠깐 짚고 넘어가야할 것 한 가지. 터키에서 유적지나 관광지에 들어갈 때 입장료는 꽤 비싸다. 예를 들어 이스탄불에서 고궁이나 유적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우리 돈으로 십만 원 이상 깨지는 건 금방이다. 가난한 여행자들은 안 먹고 안 타고 아낀 돈을 입장료로 쏟아 부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게까지 가서 그냥 올 수는 없지 않은가. 터키는 2차 산업이 발달돼 있지 않고 농업이나 관광수입이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갑이 얇아질 때마다 ! 남의 유적 가지고 사람 골을 빼는군.”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스-로마의 유물과 튀르크인들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돌덩이 몇 개밖에 없는 마우솔레움도 한 사람에 8리라씩 받는다.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 그래서인지 표를 끊지 않고 입구에서 사진 몇 장 찍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 다녀간 증거만 있으면 된다 이거지?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 돌을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가야 하는 것이다. 돌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다음에야 그곳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껍데기만 볼 거라면 집에서 사진을 보면 되지. 

박물관 복도에 전시돼 있는 마우솔레움의 잔해들.

돌마다 저런 조각들이 있다.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미뤄뒀던 마우솔레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시간이다
. 마우솔레움은 마우솔로스(Mausolos BC 376~353)의 영묘다. 묘를 뜻하는 영어 ‘Mausoleum’의 어원이기도 하다. 유익한 여행기를 읽다보니 졸지에 영어단어 하나 외우지 않았는가. 마우솔로스는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있던 카리아 지방 총독을 지냈으며 수도를 밀라스에서 지금의 보드롬인 할리카르나소스로 옮기고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사후에는 그의 부인이자 누이동생인 아르테미시아가 공사를 계속했다대부분의 고대사회처럼, 그곳도 누이와 결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 것 같다. 그의 동생인 이드레이우스도 또 다른 누이와 결혼했다. 그렇다면 큰 누이는 아내, 작은 누이는 제수. , 족보 꼬인다. 시집 장가 잘 보내려면 애들도 남녀 골고루 많이 낳아야 했겠다. 아무튼 영묘 건설은 아내인 아르테미시아가 죽는 3년 뒤까지도 끝나지 않았다가 동생 이드레이우스가 이어 받아 완성했다. 이왕 나온 김에 그 집안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이드레이우스가 죽은 뒤 그의 부인이자 여동생인 아다가 알렉산더의 도움을 받아 여왕이 된다. 그러나 4년 뒤에는 역시 동생인 피크소도로스가 왕좌를 빼앗아 아다를 유배 보낸다. 콩가루 집안의 종결자들이다.

마무솔레움이 있던 자리.

기둥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리석들.


절대자의 흩어진 꿈은 허허롭고

족보 얘기는 이쯤하고 마우솔레움으로 들어가 보자. 마우솔레움은 높이가 46m, 가로 36m, 세로 37m의 정방형 기단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 무덤을 짓기 위해 3t짜리 돌 16만개가 사용됐다. 3t이면 자동차만 했을 텐데 그게 16만개라. 기단 위에 모두 3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서 있었다. 지붕은 24개 계단으로 이뤄진 피라미드 형태였는데 꼭대기에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이륜전차가 놓여 있었다. 그 전차는 지금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무리 전차라고 해도 혼자 바다를 건넜을 리는 없고 그게 왜 영국에 가 있을까. 보존을 위해 잘된 일인지, 약탈의 전형을 보는 것인지. 또 마우솔레움에는 총 300여 개의 조각(彫刻)들이 6층으로 배치돼 있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지진으로 무너진 뒤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석재는 대부분 보드롬성을 짓는데 들어갔고, 조각들은 깨진 채 어디론가 굴러가거나 대영박물관으로 입양되었다. 입구로 들어서니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남들의 시선은 무덤자리로 가는데 내 눈길은 나무에 머문다. 무슨 인연이 있어 날 이리 잡아당기는 건가. 나무의 이름을 물으니 벨라솜라라는데 심은 지 29년밖에 안됐단다. 29? 290년이 아니고?

돌, 돌, 또 돌이다.

성장속도도 놀랍지만, 머금고 있는 수분이 워낙 많기 때문에 불이 나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 2300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은 저리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는데 29년밖에 안 된 나무는 저리 하늘을 찌르는구나.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들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박물관부터 보기로 한다. 박물관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전시물 중에는 완전한 모습의 돌덩이 하나 보기 어렵고 깨져서 구르던 것들을 모아 놓은 게 대부분이다. 마치 부상병 같은 돌들이 신음을 깨문 채, 박물관 밖이나 안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있다. 그 옛날의 영화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대는 그냥 돌아서면 안 된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돌마다 새겨진 조각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에서는 유물 외에도 마우솔레움에 대한 자료 등이 전시돼 있고 비디오로 설명해주기도 한다. 천천히 한 바퀴 돈 뒤 특별한 감흥을 담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다. 이제 건물이 있던 자리를 볼 차례다. 계단을 내려가니 무덤 자리는 폐허와 다름없는데, 그래도 그 곳에서 2000년을 넘게 버텨온 돌들이 세로 가로로 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돌은 대부분 하얀 대리석이다. 하얀 대리석은 그냥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돌 틈으로 저런 굴이 길게 나 있다. 전실로 가는 길이었던 듯.

고대에는 근처에 대리석 산이 있느냐 없느냐가 도시를 세우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밖에 바다와 지하수, 적을 막을 수 있는 산맥도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만큼 석재건축물이나 조각의 재료로서 대리석이 중시됐던 것이다. 터키는 지금도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대리석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존재할 수 있었겠지. 돌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둥글게 깎은 것도 있고 네모난 것들도 있고. 저들이 한 때는 높이 46m짜리 거대한 건축물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와 비극을 함께 지켜봤을 것이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1500년을 제 모습으로 서 있었다는 이 거대 건축물. 깨어져 구르는 돌들이 세상사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살아서 누리는 부귀와 명예도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부질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죽음 이후까지 영화를 누려보겠다는 욕심이야말로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한 절대자의 흩어진 꿈이 발길마다 허허롭다. 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그럴 땐 다음 목적지로 떠나는 게 상책이다.

아타튀르크 공원의 나무들. 저 그늘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공원 옆의 택시기사들. 손에 차이잔을 들고 있다.

아타튀르크공원의 택시기사

다큐팀의 다음 목적지는 바자르. 어제 본 빵집 근처에서 보충 취재할 게 있단다. 거기에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나는 해변 옆의 아타튀르크공원에 홀로 남는다. 여행은 무조건 부지런히 다닌다고 많이 보고 많이 얻는 건 아니다. 가끔은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관조할 때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한번쯤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야자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있자니 바람이 장난스럽게 주위를 배회한다. 녀석이 온 몸을 간질이니 솔솔 잠이 온다. 카메라를 갈무리해 넣은 배낭을 베고 그 자리에 눕는다. 벤치에서 잠 좀 잔다고 누가 잡아가기야 하겠는가. 떠돌이 여행자의 권리라는 게 이런 거지. 조용한 방에서도 잠 드는데 애쓰는 내가, 사람들이 오가고 자동차 경적소리까지 덤으로 요란한 거리의 공원에서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든다. 역시 진정한 평화는 저잣거리에 숨어 있는 법.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세상은 그림처럼 같은 모습으로 걸려있다. 배낭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만치 택시기사들이 둘러서서 차이를 마시고 있다. 아까도 마시더니. 터키사람들은 저렇게 몇 시간에 한번 씩 차이를 마신다. 다방에 커피처럼 주문하면 배달해준다.

깊 옆에 설치해 둔 전화를 받고 운행을 다녀온 택시는 기둥에 매달아 둔 일지에 기록하게 된다.

택시 정류장에서 만난 부녀. 도시락을 먹으며 뭔가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앉아있는 공원 앞쪽이 택시와 기사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이곳 택시는 일종의 조합콜택시로 운영되는 것 같다. 길가 전봇대 같은 곳에 전화기가 걸려 있고 그곳으로 콜이 오면, 순서대로 운행을 다녀와서 몇 시에 어디를 운행했다고 기록한다. 대기 중에는 차이를 마시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기사들 틈에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띈다. 아이가 택시 운전을 할리는 없고 심심한 딸이 기사인 아버지를 찾아왔나보다. 딸에게 점심을 사준다고 나오라고 했을지도.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인다. 아주 예쁘게 생겼다. 다른 기사들과도 스스럼이 없다. 아버지가 도시락을 주문한다. 그런데 도시락이 도착하자마자 마침 아버지의 운행 콜이 온다. 딸은 도시락을 앞에 놓고 기다린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부녀는 도시락을 펼치고 다정스럽게 함께 먹는다. 부럽다. 저런 게 진정 행복 아닐까. 터키사람들은 국민소득이 높지 않은 편인데도 전체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인다. 물질적인 부보다는 정신적 행복에 가치를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여유로움이 내게 전염된 것일까. 뭔가 모를 포만감이 가슴에 가득 찬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 자유여. 지중해의 부드러운 바람이여!!

보드롬에서 폐티에로 넘어가다 만난 해수욕장.

해수욕장 건너편의 빌라(?)촌.

나는 페티예로 간다

다큐팀과 합류한 뒤 늦은 점심을 먹고 보드롬을 떠난다. 이젠 패러글라이딩의 명소 페티예(Fethiye)로 간다. 버스는 해변과 산길을 교대로 지난다. 자리 잡은 나무는 달라도 산세는 우리나라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 정겹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들이 이어진다. 바다 쪽을 바라보는 집집마다 빨간 꽃들이 담장을 덮었다. 덩굴장미는 아닌데, 뭐지? 궁금증을 참지 못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작쿰(Zakkum)이라는 꽃이란다. 이 나라, 아니 지중해 쪽에서만 자라는 꽃인 것 같다. 달리던 버스가 어느 한적한 동네에 선다. 다큐팀이 터키 전통가옥을 찍고 갈 계획이라고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던 한적한 마을에 웬 거대한 휴양지가? 산길에서 느닷없이 큰 짐승을 만난 듯 놀랍기까지 하다. 보드롬과는 바로 이웃인데도 풍경이 많이 다르다. 비치엔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치라봐야 모래사장은 거의 없고 나무로 덱(deck)을 만들어 파라솔 등을 세워 놓았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모래사장은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그런데도 바늘 꽂을 틈 하나 없다. 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노인들이다. 굉장히 많다. 아마 한 여름에는 젊은이들이 즐기고 휴가철이 끝나면 노인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9월말인데도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해수욕장에는 노인들이 많았다.

해수욕장 옆 '작쿰'이 환하게 핀 집

뭔가 보드롬과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노인들이 많다는 것이었구나. 비틀거리는 유럽 경제가 세계 경제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지만 아직은 먹고 살만 한 모양이구나. 그러니 노인들까지 이렇게 해변으로 올 여유가 있겠지. 우리나라의 노인들이 생각난다. 평생 뼈가 휘도록 일하고도 경제력이 상실되는 순간 뒷방늙은이로 전락하는 그들. 더구나 ‘58개띠로 상징되는 베이비부머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은 그런 현실을 더욱 비극으로 색칠한다. 지중해의 이름 모를 해변에서 만난 밝은 표정의 유럽 노인들을 보노라니 마음이 더욱 쓸쓸해진다. 언제쯤이나 우리나라의 해변에서도 허리 구부정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여유와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는 희망은 있는 걸까. 괜히 우울한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걸음이 늦어진다. 다큐팀은 전통가옥을 찾지 못했다고 바로 출발한단다. 이제 정말 보드롬과 안녕이다. 지금 시간 오후 430. 페티예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린다. 오밤중에나 도착하겠군. 한숨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만 잠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해변길이 너무 아름답다. 마치 꿈속을 달리는 듯.


추천과 댓글, 잊지는 않으셨지요?^^


 

posted by sagang


*처음 읽는 분은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에게해. 바다의 깊이에 따라 색깔이 다양하다.


이스탄불에서 환승하다


비행장의 가로등들이 조금씩 존재를 지워가더니,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활주로를 점령한다. 시간은 늙은 개처럼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데 공항 내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경우는 없는 법. 어느덧 0820, 보드룸(bodrum)행 국내선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이 다 차고 출발 예정시간 0840분이 지났는데도 비행기는 꼼짝을 안한다. 50분이 지나도 안내방송 한마디 없다. 그러다가 아홉시가 조금 넘으면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활주로도 이 시간은 러시아워인가?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한 시간만 날아가면 첫 번째 목적지인 보드롬이다. 잠시 뒤 수런수런 하더니 기내식이 나온다. 국제선에서 먹은 게 아직도 뱃속에 고스란히 남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둔다. 여행자의 수칙, ‘언제 또 먹을지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채워둬라에 충실해야 한다. 살찌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채운다.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 지중해를 따라 가는 내내 이런 도시와 함께한다.


터키를 아십니까?

비행기는 비교적 낮은 고도를 유지한다. 맑은 하늘 덕분에 아나톨리아반도의 생생한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와 집들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넓은 평야와 도시들이 스쳐 지나고. 짙푸른 바다도 간간히 동행한다. 이 땅이 품고 있는 긴 세월을 실타래 풀 듯 한 가닥씩 풀어본다. 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터키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터키? 거기가 아시안가? 유럽인가? 여하튼, 축구는 좀 하더라고. 전에 한일월드컵 때 4강전에서 우리나라를 이겼잖아.” ‘축구는 좀 하는정도가 아니다. 축구광(?)들이 모여 사는 나라다. 우리나라 축구 열기 정도는 새발 의 피. 혹은 어떤 사람은 터키? 잘 알지. 6.25때 우리나라에 파병했던 나라잖아? 그 친구들은 우리나라를 형제국이라고 한다던데크게 고마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얘기는 더 이상 진전을 못 보기 마련이다.

보드롬의 바다. 실제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하얀 포말을 그리는 건 쾌속선.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터키의 10%도 설명할 수 없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동양과 서양의 교차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가 혼재된 땅,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 문화의 용광로이 정도의 키워드는 들어가야 터키의 실체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터키는 동서양의 역사를 한 공간에 켜켜이 담고 있는 떡시루 같은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을까. 유럽을 중심으로 기술된(혹은 왜곡된) 세계사를 비판적 안목 없이 배운 탓이다. 로마하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만 기억하도록 공부한 우리에게,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부르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후 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가 아닌 지금의 터키였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 없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게 로마 역사의 종지부라고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이후에도 동로마가 1000년간이나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비잔티움제국라는 이름의 포장에 가둬 그곳에서 로마의 이름을  탈색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유럽의 한 페이지는 상실됐다지우개로 역사를 바꾸거나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의 7대교회가 깃들었던,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땅이라는 사실도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기억할 뿐이다.

뱀처럼 흐르는 보드롬의 수로들.

차차 설명하겠지만, 현재 터키라는 국명으로 튀르크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그들의 땅은 아니었다. 흑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이 곳에는 고대부터 다양한 인종이 거쳐 가고 숱하게 많은 국가가 명멸했다. 기원전 6500~5800년 무렵에 존재했던 신석기 주거지 차탈화위크,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집단주거지 중 하나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트로이목마로 잘 알려진 트로이 등에서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했던 히타이트 문명이 발달했다. 무엇이든 만지면 황금이 된다는 미다스왕의 프리기아왕국도 이곳에 있었고 기원전 8~7세기 무렵부터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폴리스를 건설하고 살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될 때까지 이 땅에서 성쇠를 거듭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제대로 보려면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아닌 터키를 가야한다는 말은 괜한 수사가 아니다. 굴러다니는 돌도 우리로 보면 문화재급이다.

보드롬공항. 한 여름이면 이곳이 미어진단다.


보드롬공항에 도착하다

맛있는 음식도 단번에 먹으면 체하는 법. 멀고 먼 나라의 역사공부를 어찌 하루아침에 다 하랴. 785000로 남한면적의 7.8배에 달하는 이 땅, 한 때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품었던 이 땅이 간직한 긴 얘기는 조금씩 나눠서 소화할 일이다. 기내식을 마쳤는가 싶었는데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입이 떡떡 벌어진다. ,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이렇게 징그럽게 파란 바다가! 저것이 바로 터키블루의 실체? 투명한 잉크를 엎질러 놓은 것 같은 쪽빛 바다가 한없이 달려 나가고 그 위에서는 작은 배들이 하얀 포말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황홀한 그림이다. 갈래갈래 흐르는 수로들은 환영이라도 본 듯 현실감마저 무디게 만든다.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지도 못했는데 비행기가 착륙한다. 1030. 보드롬 공항은 비교적 한산하다. 아직 태양은 이글거리는 햇살을 토해내고 있지만 휴가철 피크가 지났기 때문이리라. 짐을 찾은 뒤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와 합류했다. 다큐멘터리 촬영팀을 태우고 다닐 버스다.

올리브나무. 지중해 지역은 어디를 가나 지천이다.

올리브 열매들. 언뜻 보면 대추처럼 생겼는데 서서히 자색으로 익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구릉이나 산마다 낮게 엎드린 낯선 나무들이었다. “사막지대인가?” 누군가 터트린 혼잣말을 터키인 가이드이드가 냉큼 수정해준다. 모두 올리브나무란다. 에게해와 지중해는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가이드는 올리브의 효용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터키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60, 여자는 65세라는데 지중해 쪽에 사는 남자들은 100세 이상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단다. 그게 다 올리브 덕이라는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심은 지 10년 정도가 지나야 열매를 맺는데 보통 200~300년을 산단다. 수확은 보통 3월과 9~10월 두 번씩 한다. 수확철에는 터키 동부 사람들이 품을 팔려고 몰려온다. 하도 좋다고 강조하길래, 호텔에서 여러 번 절인 올리브에 도전해봤는데 내 입에는 영 아니었다. 얼마나 짠지. 그냥 명대로 살다 가는 수밖에.

언덕 위의 하얀 집들. 파란 하늘-바다와 어울려 환상적 풍경을 연출한다.

올리브나무도 나무지만 단연코 눈길을 잡고 놔주지 않는 건 하얀 집들이었다. 집들은 주로 언덕에 터를 잡았는데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얗게 칠했다. 바다와 나무만 빼놓고 어딜 둘러봐도 하얀색이다. 하얀색도 어울려 있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이곳 페인트 장사들은 간편해서 좋겠다. 하얀 페인트만 팔아도 되니. 처음엔 보기 좋으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햇볕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란다. 흰색은 햇볕을 반사하고 검은 색은 흡수하고.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이 그제야 떠오른다. 대부분 여름별장용 빌라들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보드롬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모두 현대식으로 바뀌어 옛날 같지 않다고 슬그머니 한탄이다.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인 이곳은 휴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외국인, 특히 유럽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다. 오죽하면 유럽의 침실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을까. 인구 3만의 작은 도시가 여름만 되면 6만 명을 웃도는 인파가 북적거린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별장이든 터키인 고유주택이든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언덕위의 하얀집들은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게 해준다. 천국이 정말 있다면 이런 모습 아닐까?

보드롬 시내의 풍경. 천국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본 보드롬성.

'바람의 언덕에 서다

보드롬에서 처음 목적지로 잡은 곳은 귬벳(Gumbet)이라는 곳. 해변을 포함한 지역 이름인지 언덕의 고유명사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보드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다. 공항을 떠나 40분쯤 달려서 언덕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또 한 번 아! 하는 감탄사를 갈무리 하지 못한다. 둥그렇게 형성된 만()을 따라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다. 그리고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들. 저만치에 십자군들이 세웠다는 보드롬성이 우뚝 솟아있다.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들이 바다로 떨어져 내려 깔깔거리며 자맥질을 한다. 수없이 일어났다 눕는 물비늘들이 보석처럼 황홀하다. 바다에서 올라온 한줄기 바람이 낯선 나그네를 기웃거리다 기어이 옷깃을 헤친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누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이 언덕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로 한다. ‘여기는 오늘부터 바람의 언덕이야제법 그럴싸하다. 바다에서 눈을 돌리니 언덕 꼭대기에 허물어져 가는 둥근 건물들이 하얀 칠을 덮어쓴 채 서 있다. 방앗간으로 쓰던 건물들이란다. 그렇다면 풍차?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바람의 언덕이라니까.

세월에 치여 이제는 쓸쓸히 스러져가는 언덕 위의 풍차들.

풍차방앗간 안쪽에서 본 하늘.

다큐팀이 바다와 해변의 풍경에 풍덩 빠져있는 사이에
,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언덕을 오른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풍차의 잔해가 더 궁금하다. 어차피 나는 혼자 쏘아 다니는 체질이니. 언덕에 올라서니 사방의 풍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언덕 너머 반대쪽에도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펼쳐져 있다. 궁금했던 건물들로 다가가 들여다보니 풍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세월에 쫓겨 날개도 잃고 방앗간도 반쯤 무너져 버린 풍차들. 이제는 초라한 몸짓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풍차에게 보고 들었을 세월을 묻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언덕의 중간쯤에 낙타 두 마리가 앉아있고 그 옆에서 노인과 장년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에 하얀 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부른다. 그런데 부르는 소리가 헬로~’가 아니라 까메라~’. 아마도 거기 카메라 들고 설치는 놈, 이리 좀 와 봐라정도의 의사 표현인 것 같다. 동방예의지국의 자손으로서 노인이 부르는데 안 가보면 도리가 아니지. 뛰다시피 내려가니 손짓 발짓으로 낙타를 찍으란다. 에이, 나중에 모델료 달라고 하려고?

낙타와 노인. 이 노인의 얼굴에서 고향 어른들을 보았다.

다큐팀의 여주인공을 태운 낙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이 큰 소리로 외친다. “노 페이~!!” 돈을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찍기나 하란다. 그렇다면 사양할 내가 아니다. 카메라 셔터에서 불이 난다. 노인의 눈길이 내 카메라에 고정돼 있다. ! 혹시 내 카메라에 눈독을? 턱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역시, 세파에 닳고 닳아 의심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나그네의 억측일 뿐.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노인의 밭고랑 같은 주름과 거친 피부흰 수염, 그리고 잇몸까지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오래 전 내 고향 땅의 어른들을 본다. 평생 땅을 뒤지며 농투성이로 늙어간 그들. 닮았다. 정말 닮았다. 사는 곳도 먹는 것도 말도 다른 그들이 내 땅의 그 장삼이사들과 닮아있다. 그래, 어느 나라든 민초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지. 이 노인도 낙타를 앞세워 관광객들의 푼돈이나 거두는 일이 천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노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 그런데 터키 말이라면 밥 줘소리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었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들은 “Where are you from”이 아닌 터키 말이 분명한데. “코리아라고 대답했더니 ! 꼬레, 꼬레하면서 반색한다. 그러더니 아예 노래 부르듯 꼬레를 반복한다. 이 아저씨, 한국을 정말 알긴 알고 이러는 거야?

벌거벗다시피 한 남녀가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여행 내내 물리도록 본 모습이다.

노인의 신명은 그게 끝이 아니다. 조금 뒤에는 아직도 바다풍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큐팀까지 불러올린다. “까메라, 까메라아예 자진모리 가락으로 넘어간다. 촬영팀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낙타 옆에서 진을 치고, 다큐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여배우는 난생 처음 타보는 낙타 위에서 꺄아~ 꺄아~ 신이 났다. 이 정도 서비스를 하고도 정말 노 페이일까? 역시, 끝내 돈을 안 받는다. 말없이 낙타를 끄는 장년의 사내가 눈을 곱지 않게 뜨는데도. 대체 카메라의 위력이었을까? ‘꼬레의 위력이었을까? 사람들이 모여드니 또 그 자리를 뜨고 싶다. 그들이 난장 펼친 곳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내려오는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중년 남녀와 마주친다. 늦휴가를 온 유럽인들인 모양인데, 늦여름의 잔양이 그들의 몸을 붉게 붉게 태워놓았다. 그들과 스쳐 지난 나는 이국땅의 한낮을 허청허청 걷는다.

 

추천과 댓글을 잊지않은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이번 주부터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카메라 배낭에 밴 땀이 하얀 소금 꽃으로 피어날 정도로 많이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떠난 일행이 있었지만, 각자의 일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혼자 걷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을 제 여행길에 모십니다. 읽고 나서 댓글도 남겨주시고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의 모습. 여긴 조금 변두리?

비행기 안에서 잠이 깨다

뭔가 불편한 느낌에 자꾸 몸을 뒤척인다. 요의로 하복부가 묵지근한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잡은 잠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본능으로 조금씩 돌아오려는 의식을 향해 자꾸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손짓 정도로 막을 상황은 아니다. 꿈이 가득 찼던 자리를 의식이 대체하기 시작한다. 혼미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 여기가 어디지? ! 그래. 비행기 안이었구나. 그래. 난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어. 내 생애에 가장 긴 휴가를 가고 있는 중이야. 콧물이 흐른다. 머리도 띵하고 몸도 무겁다. 감기몸살 기운은 엊그제부터 찾아왔다. 며칠 무리한 탓이리라. 열흘 넘게 자리 비우는 턱을 한다고 불난 집 며느리처럼 대중없이 종종걸음을 치다보니 자연스레 얻은 전리품이다.

저 아래 경기장이 보인다. 터키 사람들도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애당초 무리한 여행이었지만

열흘 이상 자리를 비운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처음 터키 여행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팀을 이끄는 후배가, 내 개인작업(여행, 사진촬영, 쓰기)과 성격이 맞으니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물론 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저은 건 아니었다. 아니, 내 평생 가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그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로 달리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몇 달 쯤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중국의 윈난성(雲南省) 리장(麗江)에 가서 하릴 없이 배회하고 싶고, 터키에 가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지났던 실크로드를 걷거나 세계사의 용광로에 몸을 담그고 싶고. 늘 꿈꾸는 것들이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는 얼마나 터키에 대한 열병을 앓게 했던지. 고통과 위험에 가득한 그 길이. 비록 제안 받은 곳이 실크로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땅에 가고 싶었다.

그런 열망에도 터키행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1주일에 한번 씩 하는 방송이었다. 케이블TV 시사뉴스의 앵커, 대체요원조차 없는 그 자리는 내가 마음에 내킨다고 함부로 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방송을 맡은 뒤로는 감기 한번 마음 놓고 앓아보지 못했다. 목이 상할까봐 노래방 가는 것조차도 참았다. 게다가 기자 또는 신문사 뉴미디어 분야의 책임자로 평생 일하면서 3~4일 이상의 연속휴가를 가본 적이 없던 내게, 11일이란 숫자는 느닷없이 등에 날개가 솟는 것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방송부서 데스크를 맡은 후배 부장에게 슬그머니 의중을 털어놓았다. 찔러나 보자는 심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OK가 떨어졌다. 이 참에 늙은 기자가 아닌 젊은 대타 한번 써보자는 심리였을까? 이거, 이러다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앵커 자리 날아가는 거 아냐?

역시 이스탄불의 모습. 가운데 흐르는 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후반 '이스탄불편'에 나온다.

그건 훗날 닥칠 문제. 그 순간 내 등에는 정말 날개가 돋았고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바빠졌다. 방송 외에 맡은 일도 이것저것 챙겨야 하고, 신문의 인터뷰 기사도 써놔야 하고 블로그 연재물도 미리 채워놔야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취재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맡은 잡지 편집도 잠을 줄이는 걸로 해결했다. 출발 전에 꼭 만나봐야 할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자 진리의 신봉자로서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자료만도 책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렇게 13~4역을 했지만 몸은 핑핑 날아다녔다. 나는 터키 땅으로 간다. 그러다 얻은 몸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11922일 금요일. 정신없이 방송녹화를 마치고 메이크업을 지울 새도 없이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115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야, 내가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함께 떠나는 일행과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눴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해준 K뿐이었다.

이스탄불 주택가. 높은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잦은 지진의 영향일까?

비행기는 실크로드 위를 날고

잠은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밥 먹으라고 깨울 텐데 뭐. 장거리 비행은 식사시간이 문제다. 먹고 싶든 아니든 잠에서 깨는 수밖에 없다. 남들 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퍼져 잘 만한 배짱이 없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앞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2시간 남짓 남은 것으로 표시돼 있다. 이스탄불공항에서 갈아타고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을 합하면 열 두 시간이 넘는 긴 비행이다. 배낭에서 몸살 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는다. 이 약으로 깨끗이 나아야 하는데. 감기몸살 정도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비행 항로를 보니 실크로드와 거의 비슷하게 날고 있다. 실제로는 많이 다른 길이겠지만 축약된 길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니터 화면의 지도는 끊임없이 광활하고 황량한 산악지대 위를 달리고 있다. 아니, 지도가 아니라 비행기가. 언젠가 저 길을 가리라. 시속 746km, 바깥기온 섭씨 56.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이 저 쪽에 있다.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장사를 위해, 또 누구는 말을 타고 정복을 위해 지났을 저 길. 나는 비행기를 타고 쉽게도 지나고 있다. 내 나라 땅은 신발이 몇 켤레 닳을 정도로 돌아다닌 나지만 이렇게 해외로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빗소리처럼 귀를 파고든다. 어느 산사에서 빗소리를 듣는 듯 나 혼자 고즈넉하다. 가만히 개인 등을 켜고 책을 꺼내 읽는다.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한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이다. 처음 읽을 때처럼 프랑스의 퇴역기자와 고통과 기쁨을 공유한다.

여명 속의 아타튀르그국제공항. 환승을 위해 기다리는 중에 찍었다.

조금 있으니 아침 식사가 나온다. 잠을 깨우는 건 불편하지만 밥 먹는 걸 불편해 할 내가 아니다. 어디 가든지 안 줘서 못 먹는타고난 식성 덕분에 주는 몫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뭘 찾아먹을 땐 평소와 달리 영어까지 유창하게 나온다. 이름도 모르는 식사를 하고 없어 못 마시던 와인까지 두 번이나 주문한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곧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니 준비하라는 멘트가 나온다. 창문 블라인드를 올리니 이스탄불 시내의 불빛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터키 하늘에 진입한 것이다. 저 아래에 수천 년의 영욕이 잠들어있겠지. 내내 잠을 자던 터키 사내(로 보이는)가 비행기에서 지급한 양말에 슬리퍼까지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텅!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다. , 나도 몰라. 이젠 돌아가라고 해도 못가. 방송 펑크 나든 말든 내 책임 아냐!!

이 비행기가 보드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줬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환승하다

이스탄불공항의 공식명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이다.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말 그대로 터키의 국부(國父)인데 앞으로 제법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한다. 시간을 보니 0552. ? 이것밖에 안됐어? 당연하지, 시차를 계산해야지. 한국과 터키는 여섯 시간의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몸을 적응시키는데 애 좀 먹어야한다. 하지만 아직 어리바리해서 시차고 뭐고 느낄 틈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하는데 척 봐도 한국인인 수녀님들이 뒤에 서 있다. 대체로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얼굴에 설렘이 이스탄불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한국 떠난 지 몇 시간 안됐지만 이국땅에서 듣는 우리말이 반가운 모양이다.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한다.
수녀님들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성지순례 왔어요. 맨 먼저 소피아성당을 갈 거예요.”
소피아성당, 그 역사의 도가니. 마치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이름이다.

입국수속은 빠르고 간단하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터키에서 형제의 나라’ KOREA가 찍힌 여권은 대부분 무사통과란다. 무비자 체류기간은 90일인데 연장도 그리 어렵지 않단다. 수녀님들과 눈짓으로 작별을 하고 다시 간단한 검색과정을 거친 뒤 국내선으로 이동해 휴게실에 자리 잡는다. 몇 시간 뒤에 보드롬(Bodrum)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이번 여행은 에게해(Aegean Sea)의 맨 끝에서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따라 쭉 내려가는 코스다. 맨 먼저 가보고 싶던 곳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위안한다. 일행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다 그저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비행장에 깔렸던 어둠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불빛이 옅어져 간다. 나는 지금 이국땅에서 새 아침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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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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