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복잡한 탁심 광장.

트램에다가 빵을 파는 아저씨까지 마구 얽혀있다.

한 여름의 군밤장수.

나는 지금 이스티크랄 거리의 시작점인 탁심 광장으로 가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퇴근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거리에는 오가는 차들과 인파가 정신없이 얽혀있다. 이스티크랄 거리는 이스탄불 최고의 번화가다.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신시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등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금각만이라고도 불리는 골든혼을 건너면 바로 신시가지에 닿는다. 여기도 유럽에 속한다. 이곳에서 보스포루스대교를 건너면 아시아 땅이다. 신시가지라고는 하지만 구시가지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시가지가 조성된 건 제법 오래 전이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제노바 상인이 자치권을 쥔 칼라타 지구였으며 거리의 북쪽에 있는 탁심 광장 인근은 페라 지구였다. 지금은 베이오울르라고도 부른다. 탁심 광장에서 튜넬까지 1km가 조금 넘는 이스티크랄 거리를 걷기로 한다. 초입부터 넘치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거리를 걷는 것 같다. 거리 한 가운데로는 노면전차, 즉 트램(트란바이)이 지나다닌다. 물론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보행자들에게 전혀 위험요소가 되지 않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매달려 가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적, 동네에 자동차만 나타났다하면 쫓아가 매달리던 생각이 난다. 어른들은 성화를 부렸지만 얼마나 재미있던지. 개구쟁이들의 장난기는 동서나 고금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거리는 트램 외에 일반 차량은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보행자 천국이라고 부른다.

 

인파로 가득 찬 이스티그랄 거리.

반은 벗어버린 여자도 있고.

전신을 감싼 여자도 있다.

거리에는 온갖 사람들이 섞여있다. 서양인과 동양인, 백인과 흑인, 내국인과 관광객. 거의 벗다시피 한 서양 여자와 온몸을 감싼 채 걸어가는 무슬림도 재미있는 대비를 연출한다. 이스탄불이 국제도시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 거리에서는 무엇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다. 상업지구인지라 은행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명품 숍이나 화장품 가게도 즐비하다. 패스트푸드점, CD 판매점, 빵집, 피자가게. 입구에는 노점상들도 포진하고 있는데 역시 군밤장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더운 여름에 군밤을 팔고 사먹는 사람들은 또 뭐람. 돈두르마나 하나씩 먹으면 딱 좋을 것 같구먼. 한쪽에는 전단지 돌리는 청년도 있다. 얼른 돌리고 갈 심산인지 내게도 한 장 쥐어주길래 들여다보니 피자 할인문구가 들어있다. 곳곳에 좌판도 눈에 띈다. 가장 많은 것이 복권을 파는 노점이다. 장사가 제법 잘된다. 이 나라 사람들도 복권에 희망을 파종하는구나. 하긴 복권 없는 나라가 어디 그리 흔하랴. 모래 위의 집처럼 금방 무너질 꿈이라도 꾸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 조그만 함지 같은 곳에 생수를 대여섯 병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가 보인다. 저 노인은 또 어떤 사연이 있어 이 더위에 저리 나와 앉아있는지.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내 어머니의 얼굴과 오버랩 된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지근한 물이라 갈증 해소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얼른 한 병을 손에 쥐고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드린다. 오늘 가지고 나온 물을 모두 팔아도 내가 드린 돈만큼은 안 될 것 같다. 내 작은 돈이 저 노인의 한 끼 식사에 도움이 되기를.

트램에 매달려 가는 개구쟁이들. 

수박에 새긴 인물상.

케밥집 진열장의 수박 조각(彫刻)에 마음을 빼앗기는 바람에 유리창 앞에 서서 혼자 실실 웃는다. 얼굴을 새긴 주방장의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오래 이러고 있다가는 더위에 맛이 갔다는 소리를 듣기 딱 알맞겠다. 어디선가 아코디언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의 음악인이 곳곳에 있지만 이 아코디언 소리는 유난히 내 발목을 잡는다. 유모차를 앞에 세워둔 젊은 여자 하나가 유치원생이나 쓸법한 작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세련된 음악도 아닌데 왜 나를 이렇게 불러대지? 의지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할 땐 육신이 하는 대로 맡기는 수밖에. 가까이 가보니 유모차에는 아기가 잠들어 있다.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6개월이나 됐을까. 다행히 무더위 속에서도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천사 같은 모습에 또 마음을 뺏긴다. 대체 이 엄마는 무얼 어쩌자고 이 어린 것을 데리고 거리에 나온 것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이란 뜻일까? 여인과 아기를 싸고 흐르던 축축한 슬픔이 내게 전이된다. 그렇다고 추하다거나 비참해 보인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냥 지나가도 되련만 송진이라도 밟은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배낭을 내려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내고 마침 근처에 있던 일행에게 달려가 동전을 얻어온다. 여인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슬픔과 수줍음이 적절히 섞인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이왕 음악을 멈췄으니 한마디 물어나 보자.

아기가 참 예뻐요. 몇 개월이나 됐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만다. 그냥 돌아서는 수밖에.

 

복권 파는 아저씨.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소녀.

차마 사진을 찍지 못한다. 그저 가슴에 담는 수밖에. 저만치서 나 하는 짓을 바라보던, 그리고 동전을 빌려준 일행이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그런 마음으로 제대로 된 여행자가 되겠니?’ 그런 눈초리다. 아니다. 괜한 지레짐작일 뿐이다. 측은지심이야 말로 사람이 가진 근본 심성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여행 내내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챙긴 사람이다. 내가 특별히 갸륵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할머니의 미지근한 물을 사고 아기 엄마에게 동전을 털어준 것은 아니다. 그저 인연이 그리 이어졌을 뿐이다. 세상엔 지갑이 가난한 대신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 덕에 그나마 이 사회가 지탱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아흔아홉 개를 가진 사람 중에서 나온다. 그는 남의 한 개를 빼앗아 백 개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주변을 돌볼 틈이 없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건 자신이 가진 한 개를 어려운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이들이다. 그야말로 용기고 사랑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들 축에 끼어들기에는 반 푼어치의 자질도 없는 사람이다. 겉모습은 비슷해도 내가 호주머니를 터는 것은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서다. , ‘이기(利己)’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제발이 저려서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주고 나니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다. , 하필 이런 때 밀려오는 이 날카로운 요의(尿意)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내 방광이란 녀석은 눈치가 엄청 빠르다. 내 인생 최악의 안티 세력임에 분명하다.

 

 

특별 세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곳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괜한 호기심으로 뒷골목을 흘끔거린다. 과감하게 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니지 못하는 까닭은,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젊은 친구 몇 명이 아무 생각 없이 뒷골목에 들어갔다가 몽땅 털릴 뻔했던 걸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고도 내 뒷골목 탐사의 열망은 가시지 않고 있다. 어느 곳을 가든 뒷골목부터 기웃거린다. 그 나라, 그 도시의 진실은 뒷골목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먹는 음식이 그 나라의 진짜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그리 위험한 도시는 아니다.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완벽한 곳이 어디 있으랴. 어느 여행책자에서 이스티크랄 거리에 가면 술집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본 기억이 난다. 대충 더듬어 보면 그런 내용이었다. ‘이스티크랄 거리의 뒷골목에는 바와 클럽이 많은데 수상한 분위기의 술집에 들어가는 건 피해야 한다. 특히 여자 손님을 끌고 가려고 하거나 여자 직원이 있는 곳은 위험하다. 터키에서는 술집에 여성들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나는 술을 마실 것도 아니고 지금은 한낮인데 뭘. 골목은 아직 조용해 보인다. 그럼 별 재미가 없다. 나를 다시 큰 거리로 끌어낸 건 어디선가 들리는 묘한 소리다. 누군가 부르는 노래가 분명한데 정말 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음색이다. 저런 소리를 영혼의 울림이라고 하나? 발길은 끌려가다시피 그쪽으로 향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내면의 경고 따위는 무시한지 오래다. 길 한쪽 공터에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다. 이스탄불에도 약장수가 있나?

 

집시 여인.

 

남자 악사가 두 명, 그리고 한 여인이 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저 여자가 바로 집시야.” 어디선가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른 건 그녀의 노래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 우리네 창과도 다르고 영혼을 두드리던 마두금의 음색과도 다르다. 한때 마음을 빼앗겼던 중국 소수민족의 노래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핏속을 흐르는 슬픔만 골라내 세상을 향해 내던지는 듯한 소리. 콰지모도가 사랑한 여인, 에스메랄다의 영혼 색깔이 저랬을까. 집시라는 족속은 원래 무당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고 땅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무리. 아득한 옛날에는 그들이 제사장이고 세상의 지배자였다. 북을 치는 손놀림이 이별을 앞둔 연인을 향한 손길처럼 부드럽고 서럽다. 길게 길러 풀어헤친 머리, 선 굵은 귀고리, 멋 같은 건 고려하지 않은 하얀 색깔의 상의, 그리고 통 넓은 치마. 옆에 놓인 기타 케이스에 CD 몇 장이 놓여 있다. 그걸 팔기 위해 노래를 하는 모양이다. 내가 소스라치며 뒷걸음질을 친 건 그녀의 눈을 본 순간이다. 우물처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이, 어느 곳에도 초점을 두지 않은 눈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대체 이게 뭐지? 이런 걸 무슨 느낌이라고 하지? 첫 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정상적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다. 늪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의 소처럼 나는 혼신을 다해서 뒷걸음을 친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진 뒤에야 철퍼덕 주저앉는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음 한 쪽에서는 돌아가서 CD라도 사오라고 꼬드기지만 다른 한쪽은 극구 손사래를 친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온 것일까.

 

갈라타 탑 갈라타 탑 앞의 여인들.

케밥 사세요. 고등어케밥!!

고등어케밥 이렇게 만듭니다.

완성 직전.

이스티크랄 거리의 끄트머리에서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갈라타 탑을 만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의미가 있는 곳이다. 지난해 지중해 여행의 끝을 이곳에서 장식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사실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 바로 이 갈라타 탑이다. 하지만 한참 줄을 서고 좁은 곳에 올라가 엉덩이를 비벼야 하는 과정이 끔찍하다. 뭐 그냥 지나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한번 가봤다는 것이지만. 그리고 또 하나. 갈라타 다리로 얼른 가고 싶다는 조급증도 한몫했다. 걸음을 재게 놀린다. 갈라타 다리를 오가는 인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낚시꾼들은 여전히 바다에서 반짝거리는 물고기들을 건져 올린다. 잡상인은 작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 사이 실업자가 늘어난 건가? 이웃인 그리스의 재정파탄이 세계 경제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도 터키가 흔들린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이곳 사람들은 갈라타 다리를 백수다리라고도 부른다. 직업 없는 사람들이 새벽 다섯 시부터 나와서 낚싯대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공간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도 백수들에게 낚시터를 마련해주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진다. 복지가 뭐 별건가? 일단 다리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엔 벼르고 벼른 고등어케밥을 꼭 먹어볼 작정이다. 이곳은 고등어케밥의 천국이다. 다리가 2층 구조로 돼 있는데, 맨 위가 낚시꾼들의 영토라면 1층은 고등어케밥을 위해 존재한다. 다리를 따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은 물론 바다에도 큰 배에서 케밥을 판다.

 

이 배에서도 고등어케밥을 판다.

저무는 이스탄불.

다리 옆은 해산물 시장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해물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구경하는데도 한참 걸린다. 멀리 흑해에서 온 함시(멸치보다 조금 큰 생선으로 밀가루를 입혀 튀겨먹는다)도 보인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고등어케밥을 파는 리어카 좌판. 하얀 상의에 요리사 모자, 앞치마까지 둘러 그럴듯하게 보이는 아저씨가 고등어케밥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손님은 거의 없다. 대개 제대로 된, 에어컨이 나오는 음식점으로 찾아가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근사한 음식점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맥주 한잔 곁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좌판 아저씨에게 고등어케밥을 주문했더니 신이 나서 만들기 시작한다. 헌데 이것도 간단한 게 아니네? 빵을 반으로 갈라 잘 구워진 고등어를 얹고 그 위에 익힌 양파와 고추를 올리고 소스를 뿌리고 각종 채소를 얹고 다시 향신료를 뿌리고. 에구, 숨 가쁘다. 벼르고 벼르던 고등어케밥의 맛은? 그저 그랬다. 고등어의 비린 맛 때문에 거부반응이 일었다든가, 아니면 한 개쯤 더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든가 하는 특별함은 없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나라의 특별한 음식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니까. 이것으로 이번 여행 일정은 모두 끝났다. 다시 이스탄불과 이별을 해야 한다. 갈라타 다리 위에 서서 저물어가는 도시를 바라본다. 유람선이 오가는 바다 건너 저만치에는 석양을 비껴 안은 모스크들의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건물들은 하나 둘 불을 밝혀 12시간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는 한 사내를 전송한다. 작년에 했던 인사를 다시 반복한다. 다시 오리라. 내 형제, 내 친구의 땅이여.

posted by sagang

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원.

아타튀르크 댐이 만들어 낸 풍경.

이제는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한다. 터키의 숨겨진 속살을 관통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말라티아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샨르우르파에서는 깨달음을 준 옛 스승들을 만났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으로부터 갈대우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험난한 여정도 들었고, 선지자 욥을 만나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야기도 가슴에 담았다. 샨르우르파 공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아쉬운 눈길을 창밖에 고정시킨다. 여전히 황량한 벌판에는 나스카의 지상그림처럼 생긴 도형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그 한 가운에 있는 마을은 고립된 듯 외로워보인다. 저 안에 갇힌 저들은 무엇을 꿈꾸며 살까. 아니다. 그들은 저 광활함 속에서 한없이 자유롭거늘, 정작 갇혀 있는 사람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잠시 뒤에는 사방팔방으로 물길이 뻗어나간 거대한 늪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니 늪이지 사실은 엄청나게 큰 호수고 강이다. 댐에 막혀 길을 잃어버린 유프라테스강은 바다를 흉내 내고 있다. 정녕 인간이 자연을 이긴 것일까. 상념이 낳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이스탄불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스탄불 시내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분주하다. 이스탄불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역시 단 하루. 꼭 들르고 싶었던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아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찾아다닌 이스탄불의 유적들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에 몰려있었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갈라타 다리를 건너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올라가는 신시가지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곽 뜰. 바다와 아시아 땅이 코앞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제1문.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그만 만()을 메운 매립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 바다였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가득 찬 정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지금의 궁전이 들어서 있었던 건 아니고 17세기 초 아흐메드 1세가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돌마바흐체라 불렀다. 그때의 건축물들은 1814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궁전 외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전망 좋은 곳에는 넓은 야외 카페가 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건너편의 아시아 땅과 바다 위의 유람선들이 어울린 그림 같은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카페는 그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곳에 비비고 앉아 점심을 먹을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무 그늘이 드리운 잔디밭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는다. 궁전 앞의 점심식사도 제법 괜찮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볼까.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람하려면 표를 예매하는 게 좋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입하려면 줄을 서야 한다. 나는 미리 준비한 덕에 길게 늘어선 줄 옆을 자랑스럽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러게 누가 무작정 오래? 사람들이 말이야, 준비성이 있어야지. 쯧쯧! 입장료는 30리라. 환율을 700원 씩 계산해도 21,000. 궁전 구경 하다가 등뼈 휘어져서 가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와봐야 할 곳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문을 들어선다.

문 위의 조각들. 

안쪽 문.

 

궁전 본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걸어야 한다. 화려한 문도 두 곳이나 통과한다. 다른 오스만 건축양식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유럽풍인데 무척 호화롭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하니 까딱 잘못하면 파리쯤에 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일 것 같다. 이 궁전을 착공한 건 1843년이다. 압둘메지드 황제의 지시로 짓기 시작했는데 13년만인 1856년에 완공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가라베트 발안과 그의 아들 니코코스 발안이 설계했다. 이 궁전이 완공되기 전에는 술탄들이 톱카프 궁전에서 기거했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톱카프 궁전 역시 어느 곳 못지않게 크고 화려한 궁전이다. 그러니 살만한 궁전이 없거나 곳간에 돈이 남아돌아서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회복해보겠다는 염원이 투영됐을 것이다. 왕권시대에는 동서를 불문하고 나라의 기운이 쇠했다 싶으면 궁전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땅의 흥선대원군도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임진왜란 때 불 타 무너진 경복궁을 새로 짓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뭐하나. 그 역시 약발이 별로였던 것 같다. 새 궁을 지은 지 얼마 안 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으니. 건물 따위로 국운을 돌려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쓸모없는 삽질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셈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은 너도 나도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센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여려 가지 모습.

외채는 계속 늘어나고 국가의 재무 상태는 빈사 위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 창고 바닥 긁는 소리가 요란했을 것 같다. 참고로 궁전을 지은 압둘메지드 황제는 이곳에서 단 6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죽 쒀서 뭐 줬다고 하던가? 들어가는 길 내내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접시꽃이 활짝 웃는 얼굴로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특히 분수대가 있는 연못 앞에 서서 바라보는 궁전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궁전 입구에서는 덧신처럼 생긴 비닐봉지를 하나씩 나눠준다. 신발에 씌우라는 뜻이다. 터키 사람들이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하는 인원도 적절히 시간차를 두어서 복잡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문을 들어서면서 사진을 한 장 찍는데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No Photo!!!" 여기도 촬영금지야? 대체 그 비싼 돈을 받아먹고 사진 한 장 못 찍게 하는 건 무슨 심보야. 톱카프 궁전에서도 불만을 토로했지만,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한 유물이나 전시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상식이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이런 엄격한 규제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통째로 뭉개 버린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그 수단을 빼앗겨 버리면 존재가치가 희미해진다.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다니긴 하지만 흥미는 이미 반감된 상태다. 관람은 1층 입구에서 시작하는데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궁전의 본 모습이 펼쳐진다.

 

궁전에서 바라본 아시아 땅.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서 찍은 첫 번째 사진.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도둑 셔터로 찍었다.

고국에 뭔가 전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뷰파인더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셔터를 몇 번 눌러보지만 사진이 제대로 나올 턱도 없고 굳이 도둑 사진까지 찍어야 되나 싶어 그만 둔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경비원들이 서서 네가 무슨 짓 하려는지 다 알고 있으니 쫓겨나기 싫으면 그냥 구경이나 해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는 탓에 자꾸 움츠려든다. 사실 궁전은 바깥보다 내부가 더욱 화려하다. 곳곳의 천장마다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정도로 크고 호화롭다. 이 궁전을 지을 때 내부 장식에만 총 14t의 금과 40t의 은이 사용됐다고 한다. 총면적은 15,00m²인데 궁전 내부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셀람륵과 황제 외에 남성의 출입을 금하는 여성의 영역 하렘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렘지역은 파란방이라고 부른다. 방은 총 285개고 홀이 43개인데 그밖에도 68개의 화장실과 11개의 목욕탕이 있다. 방이나 홀의 장식도 제각각 다르다. 바닥에 깔린 수직 양탄자의 넓이는 4,455m²나 되며 벽에는 600점이 넘는 명화가 붙어있다. 많은 때는 5,320명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화려함의 극치다. 물론 내게는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곳 이상은 아니다. 잘 따라 다녀야지 괜히 잘난 체 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밤새 헤맬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이 궁전 내부를 전부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사실 내게는 그 방이 그 방 같고 그 홀이 그 홀 같아서 그저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보냈다는 샹들리에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찍었다.

아타튀르크를 기려 09시05분에 멈춰진 궁전 내부의 시계.

황제 일가의 일상생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궁전 내에는 황제의 아이들을 가르치던 작은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을 위한 교무실도 있다. 물론 황제가 썼다는 화장실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별게 다 기념물이 되는 세상이다. 또 궁전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전시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유럽에서 보내왔다는 수많은 보석과 도자기, 그릇들이 눈부시다. 거북 껍질로 만든 수저도 있다. 거대한 곰 가죽은 러시아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처럼 생긴 기둥은 진짜 대리석이 아니다. 밤나무에 석회를 바르고 대리석처럼 칠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다. 별 기술이 다 있구나. 정말 감쪽같다. 거대한 시계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다. 시계바늘은 95분에서 잠들어 있다. 태엽을 주지 않았거나 건전지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여기서는 참았던 도둑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 시계를 보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시계 자체야 별게 있을 턱이 없지만 아타튀르크라는 위대한 독재자가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궁전을 완공한 뒤 이곳에서 살았던 오스만 황제들은 모두 6명이었다. 1877년에는 오스만 제국 사상 처음 개원된 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터키공화국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1938111095분 집무 중에 이 궁전에서 사망했다. 건국의 아버지인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95분에 멈춰져 있다. 터키 사람들이 아타튀르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나라 전체가 존경할 사람을 가졌다는 건 무척 부러운 일이다. 드디어 그랜드 홀에 들어선다. 관람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

 

저 문을 나가 걸어가면 바다에 닿는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안내를 하던 훌리아가 멈춰서더니 눈을 감으란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 둘 셋을 세면 눈을 뜨고 천장을 보란다. 셋을 세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탁 트인 공간에 매달린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거대한 샹들리에도 한몫했다. 36m 높이에 매달려있는 이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무게만도 4.5t이나 나가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750개의 등이 달렸는데 1912년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수백 개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이 방에는 재미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원래 천장은 삼각형인데 그림으로 동그란 돔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삼각형의 흔적은 없다. 76개의 대리석 기둥역시 모두 나무다. 이곳에서는 대형 연회가 열렸다는데 2층에는 연주자들의 자리가 있다. 지금도 이 그랜드 홀은 결혼식장으로 대여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돈이다. 1년에 2~3회 정도 아랍의 부호들이 거액을 주고 빌려 쓴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황금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호사를 누리게 하는 셈이다.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연회를 열 수도 있구나. 괜한 심술로 혼자 중얼거려본다. 전투 장면 등을 그린 그림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눈이 시원해지니 섭섭함도 별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다에 푹 빠져 있다. 나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메마른 가슴에 꿈 씨 하나쯤은 파종하고 가야할 것 같다.

 

posted by sagang

구릉 위에서 바라보면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고대인들이 돌을 이용해 팠다는 물저장고.

다시 샨르우르파. 괴베클리테페로 가는 길에는 평원과 낮은 구릉이 교대로 출렁인다. 내 가슴도 함께 출렁거린다. 30분쯤 달렸을까. 포장도로를 벗어난 차가 심하게 덜컹거린다 싶더니 황량한 산악지대가 불쑥 다가선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제 저녁에 잠깐 있었던 해프닝이 생각난다. 함께 여행 중인 고참 기자 한 사람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샨르우르파의 관계자에게 농담 삼아 한 마디 던졌다. 아마 이지역의 유적, 특히 괴베클리테페에 대한 자랑을 잔뜩 들은 다음이었을 것이다.

너희들은 뭐든지 세계 최초, 인류 최고(最古).”

그 말이 통역을 통해서 전달되는 순간 그 친구의 얼굴 표정이 싹 바뀌었다. 싸늘하다 못해 푸르딩딩해지는 표정. 제법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느닷없이 가라앉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신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내색할 건 뭐람? 성질머리 하고는. 물론 그 말을 한 사람은 모욕을 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분위기를 띄우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워낙 대단한 유적들이 즐비하다 보니 배도 살짝 아프고 해서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괴베클리테페를 자랑스러워하는지 확인하기 딱 좋은 해프닝이었다. 샨르우르파 사람들은 심지어 세상의 모든 교과서는 바뀌어야 한다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괴베클리테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과문한 탓도 있지만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큰 바위 구덩이를 파는 과정. 작은 구멍을 계속 뚫어나간다.

너럭바위를 지키는 개.

차는 공사용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선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크고 작은 구릉, 끝이 안 보이는 평원이 저만치 엎드려 있다. 이곳은 아직 발굴 중이기 때문에 관광지로 개발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들었던 자랑에 비해서는 조금 초라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발굴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널따란 바위에 뚫린 크고 작은 구멍들이 눈에 들어온다. 안내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큰 바위구덩이는 물 창고로 쓰인 곳이라고 한다. 지하수가 없기 때문에 빗물을 받아 쓴 것 같다. 그럼 작은 구멍은? 큰 구멍을 만들기 위해 파놓은 것들이다. 금속은 구경도 할 수 없던 시대에 저렇게 큰 구멍을 어떻게 팠을까 궁금했는데 작은 구멍에 해답이 있었다. 단단한 돌을 정()으로 삼아 바위에 작은 구멍을 여러 개 뚫고, 구멍 이외에 남아 있는 부분을 자르고 또 구멍을 뚫고 자르고 해서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로 하니까 두꺼비 파리 잡듯 쉬워 보이지 실제로 하라고 하면 거품부터 물 일이다. 돌로 돌에 구멍을 내고 주변을 깎아내는 과정을 거듭해서 물탱크를 만든다고? 모르긴 몰라도 1~2년이 아니라 최소 수십 년이 걸리는 공사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12,000년이 흐른 지금, 그 위대한 작업의 흔적에는 토사가 쌓여있고 누군가 던진 종이컵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다. 헌데 이상한 일도 있지. 아까부터 개 한 마리가 깎아놓은 돌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있다. 사람들이 오고가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뭔가를 고집스레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저 개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눈인사로 작별을 하고 발굴 현장으로 간다.

 

발굴 중인 신전

석상들이 둥그렇게 서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웅덩이. 이곳이 발굴 현장이다. 웅덩이 안에는 큰 돌들이 둥그렇게 늘어서 있고 주변에는 작은 돌을 담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발굴 작업을 위해 만들어 놓은 나무 발판들이 웅덩이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건 돌기둥들. 어느 건 T자형으로 어느 건 갓을 쓴 비석처럼 생겼다. 받침대 위에 점잖게 서 있는 것들도 있다. 사람으로 보면 양반의 씨를 타고 난 돌들인가 보다. 하지만 어느 건 중간에 잘려서 뭉뚝한 게 변방의 수자리를 살다 온 백성처럼 궁기가 흐른다. 대부분은 스스로 서 있거나 자기들끼리 어깨를 겯거나 지지대에 기대고 있지만 아예 누운 것도 없지 않다. 그런 돌기둥들이 회의라도 하는 듯 5~10m의 간격으로 원을 그리고 서있다. 선사시대 거석 유물들이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돌에는 각종 동물들이 양각돼 있다. 마모되는 바람에 제대로 알아보긴 어렵지만 소나 사자, , 뱀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도마뱀? 악어? 아니, 늑대나 여우를 닮은 형상도 있다. 그림들이 낯설지 않다 했더니 샨르우르파 박물관에서 본 것들과 닮아 있다. 어느 돌기둥에는 사람의 형상을 표현한 듯 손가락이 그려져 있고 허리 부분에 여우가죽 같은 것을 두르고 있다. , 사람이 여우 가죽을 벗겨서 허리에 둘러 치부를 가린 형상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결론적으로 사냥과 관련된 조각들이다. 마모되기 전에는 무척 정교했을 것 같다. 이 조각들을 새기기 위한 도구도 돌이었겠지.

 

멀리서 바라본 발굴지.

 

바위에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석기 시대 유물이라고 하면 기껏 돌도끼나 돌칼 정도만 봐온 나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석기라는 것들도 손에 쥐기 좋게 깨진 것을 골라 쓴 건지 정말 사람이 두드리고 갈아 만든 것인지 늘 의심스러웠다. 그런 수준의 원시인들이 이런 작품들을 남기다니. 상상을 해보자. 원숭이나 벗어났을 정도의 인간들(창조론자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그림일까?)이 겨우 앞이나 가리고 앉아 돌로 돌을 조각한다. 이 거대 유적이 조성된 건 BC 9500년에서 BC 8500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12,000년 가까이 된 까마득한 옛날이다. 그게 어느 정도의 옛날인지 감이 안 잡히는 이들을 위해 또 예를 찾아보자.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친절한 작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거석문화를 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은 서남아시아에서는 요르단 지역에 BC 4000년경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에 걸쳐 서부와 북부 유럽에서 많은 거석기념물이 건립되었다. (중략) BC 3000년대에 속하는 것이 많다.’ 여기에서도 거석문화의 기원을 기껏 BC 4000년으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거석문화의 대표 선수로 꼽히는 영국의 스톤헨지는 얼마나 됐을까. 이왕 불러온 김에 지식백과를 더 찾아보자. ‘선사 시대인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해서 기원전 1400년경에야 완성된 스톤헨지는여기도 BC 3100년이다. 그렇다면 BC 9500년에 세워졌다는 이 돌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려 6,0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12,000년 전, 인간들은 기껏 해야 동굴에서 살면서 채집과 수렵으로 연명했을 것이다. 샨르우르파 사람들의 말대로 나는 지금 인류사를 새로 써야 하는 혁명적 유물 앞에 서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곳.

 

사람의 형상을 새긴 돌. 손과 허리띠, 중요 부위를 가린 짐승 가죽 등이 보인다.

헌데 원시인들이 왜 이런 거대 유적을 만들고 동물들을 새겨 넣었을까. 이곳이 사원이나 신전이었을 것이라는 게 그 답이 될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접신(接神)을 위한 장소를 치장하는데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니까. 사원이나 신전이었다는 추정은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걸로 더욱 신빙성을 얻는다. 하늘에 제를 지낼 때나 장례의식 때만 찾아오는 신성한 곳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걸 확인해주는 조각도 있다. 새들이 시신을 먹는 장면이 표현돼 있다. 그렇다면 조장(鳥葬)을 치렀다는 얘기다. 지금도 티베트 등 일부에는 조장 풍습이 남아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다.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도 그런 장례 풍습을 지킨다고 한다. 더 이상 의심할 것도 없이, 나는 지금까지 확인된 세계 최초의 사원, 즉 최초의 종교건축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를 새로 써야한다는 말이 이제 조금 실감으로 다가온다. 그건 그렇고 12,000년 전의 사람들, 즉 원시인들은 아무런 도구도 없이 이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확보했을까. 가장 큰 것은 높이가 5.5m, 무게가 20t씩이나 한다고 한다. 또 길들인 동물도 없던 시절, 이 돌들을 어떻게 날랐으며 또 이 조각들은 어떻게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스터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도구라고는 우리가 봐온 돌도끼나 돌칼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기계를 동원할 수 있는 지금이라고 해도 쉬운 공사는 아닐 것 같다. 그 방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2년이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에 걸쳐 공사를 계속했을 거라는 짐작 외에는.

 

이 바위에도 동물이. 전갈처럼 보이는 게 새겨져 있다.아득한 구릉들과 평원.

괴베클리테페는 배꼽언덕이란 뜻이다. 괴베클리가 배꼽이고 테페가 언덕이다. 평원 위에 느닷없이 솟은 구릉이 배꼽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터키 사람들의 배꼽은 제법 높은 모양이다.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시야의 끝은 지평선이다. 애당초 신전 같은 것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지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만 년 넘게 길고 긴 잠에 빠져있던 괴베클리테페가 존재를 드러낸 건 1964년이다. 미국 고고학팀이 터키 남동부의 한 외딴 곳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이 언덕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 불쑥 솟아난 언덕이 수만 개의 깨진 돌조각들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발굴 작업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자연적인 지형은 아니지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 ‘비잔티움 시대의 무덤이 아닐까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덕분에 유적은 잠자는 시간을 조금 더 늘릴 수 있었다. 미국 고고학팀으로는 소위 큰 건을 놓친 셈이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괴베클리테페의 존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목동이 가축을 몰고 가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흙으로 뒤덮여 있던 낯선 모양의 돌들이 햇빛 속에 드러난 것이었다. 그 소식은 샨르우르파 박물관 큐레이터의 귀에 들어갔다. 박물관 측은 중앙 정부에 연락을 했고, 이스탄불에 있던 독일 고고학자들이 조사차 오게 된다. 1994년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 박사가 책임자가 되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다. 처음 발굴할 때만 해도 이런 거대한 유물이 묻혀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장하는 광경을 새긴 듯. 새가 보인다.

지금까지 밖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6개의 신전을 발굴했는데, 조사 결과 모두 24개의 신전이 더 묻혀 있다고 한다. 이 거대한 구릉 전부가 신전이었던 셈이다. 석상들 틈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올려다보니 정점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외로워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고고하다고? 그러니까 그런 그림이다. 끝없는 평원에 배꼽처럼 언덕이 하나 불쑥 돋아있고 그 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는. 나무 주위에는 돌로 담을 만들어 놨다. 가까이 가 봐도 언뜻 무슨 나무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뽕나무 같기는 한데 잎이 작아서 확신하기는 어렵고, 우리 땅에도 작은 잎 뽕나무가 있으니까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그렇다. 나무 이름을 물어보니 그곳에서는 드드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나 같은 문외한이 봐도 무척 경건한 풍경이다. 나무 옆에 서니 저 아래 낮은 구릉들과 세상 만물이 모두 한꺼번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 같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이 드드안 나무가 서 있는 장소는 유적이 발견되기 전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신성시 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도 이 자리에서 희생제를 치루는 등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인류가 탄생한 때부터 대대로 성스러웠던 이곳. 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묻혀 있는 것일까. 조사 결과 유적이 땅 속에 묻히게 된 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신전의 흔적은 두 개의 시대로 나눠진다. 1차는 BC 9500~8500. 그리고 약간의 공백기를 가졌다가 BC 8500~8000년에 다시 인공의 흔적이 나타난다. 문제는 그 뒤다. BC 8000년 뒤에는 사람의 손길이 완전히 사라진다.

 

저 곳 어디쯤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곳을 인위적으로 덮어버리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부분 역시 미스터리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었으며 1,000년 이상 성스러운 곳으로 삼았던 곳을 왜 떠났을까. 그리고 왜 그냥 떠나지 않고 흙으로 덮었을까? 이 광대한 지역을 덮는 데만 해도 수십 년이 걸렸을 텐데. 느닷없이 또 추리소설을 써야말 할 것 같은 예감에 시달린다. 이 대답은 상상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보다 먼저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가장 그럴 듯한 상상을 한 사람은 톰 녹스(Tom Knox)라는 기자 출신의 소설가였다. 그는 어느 날 TV에서 괴베클리테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뭔가 을 받은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기획기사를 썼고 2년 뒤에는 <창세기 비밀(THE GENESIS SECRET)>이라는 팩션 소설을 내놓았다. 소설을 홍보하자는 건 아니고 그의 상상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내용을 좀 빌려서 이야기를 풀어보려는 것이다. 톰 녹스는 브라이트너 박사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단서를 풀어놓는다.

“1만 년에서 12000년 전에 이 지역은 지금처럼 메마른 땅이 아니었다오. 오히려 아름답고 목가적인 땅이었지. 사냥감들이 초원을 뛰놀고 나무에는 야생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강에는 물고기가 가득했을 거요. 조각상에 지금 이곳에 살지 않는 동물들이 조각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

지금은 황무지처럼 보이는 저 넓은 땅이 인류가 잃어버렸던 낙원이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저 들판 어디에 이곳을 신전으로 둔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이 지역이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상상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가까운 데다 석상에 새겨진 동물들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언덕 맨 꼭대기에 있는 '드드안 나무'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진다. 그들은 사냥감이 코앞에서 뛰놀고 열매가 입 안으로 뚝뚝 떨어지고 물 반 고기 반이었던 이 땅을 왜 떠났을까. 답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소설 속 브라이트 박사의 생각을 좀 더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는 성서 속의 에덴동산과는 조금 다른 에덴동산이다. 그는 에덴동산 이야기가 인간의 수렵채집 시대를 묘사한다고 전제한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 사는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로 형상화 됐다는 것이다. 그들의 풍요로웠던 삶은 채집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바뀌면서 훨씬 더 많은 노동과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삶으로 전락했다. 그 시기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시기로 규정한 것이다. 소설까지 인용하면서 이 괴베클리테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받은 충격이 크다는 것이다. 12,000년 전의 신전이라니. 우리가 단군 이래 반만년 어쩌고 하는 것도 신화쯤으로 치부하는데, 그보다 7,000년이나 앞선 시대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 지금 내 앞에 햇볕을 받고 서 있다니.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자. 그들은 왜 이 낙원을 버리고 떠났을까. 역시 채집수렵과 농경문화 어쩌고 하면서 얼렁뚱땅 덮어버려야 할까. 고고학적 지식이라고는 쌀 한 톨만치도 갖지 못한 나로서는 또 다시 소설가의 상상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톰 녹스는 외래인의 유입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난 이유로 제시한다. 기원 전 1만 년경, 한 인종이 북쪽에서 살기 좋은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들은 이곳에 사는 왜소한 사람들보다 몸집도 크고 힘도 세고 난폭했다.

 

어딘지 모르게 성스러운 풍경이다.

또 이곳에 살던 사람들보다 훨씬 똑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현지 종족과 어울려 살면서 건축, 조각, 종교 같은 첨단 문물을 가르친다. 따라서 괴베클리테페 역시 외래인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괴베클리테페는 이들 왜소한 수렵채집인들에게는 일종의 낙원이었을 겁니다. 말 그대로 신이 인간과 함께 거니는 에덴동산인 거죠. 그러나 어느 날,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자원이 줄어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 결과 북쪽에서 온 거인족은 열등한 현지 종족을 노예로 부려 쿠르드 평원의 야생 곡식을 거두게 했습니다.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농부 신세로 전락하게 된 거죠. 왜 갑작스럽게 농경문화가 시작되는지 그 수수께끼의 실체가 바로 이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 타락 신화의 정체라는 말이군요. 에덴동산에 추방당한 진짜 이유 말입니다.”

소설 속 대화를 빌려온 것이다. , 이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겐 그럴 듯한 이야기로 들린다. 게다가 소설에 의하면 북부인들은 왜소한 수렵채집인 여자들을 성적으로 타락시킨다. 여자들은 새로운 종족과의 성교를 통해 새로운 성에 눈을 뜨게 된다. 이종교배에 의한 후손들도 태어난다. , 이젠 땅에 묻힌 괴베클리테페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시달리다 못한 수렵채인민들은 북부의 침략자들에게 맞서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압도적인 숫자에 의지에 북부인들을 모조리 살육하는데 성공한다.

 

괴베클리테페는 엄청난 노력 끝에 땅에 묻히게 됩니다. 거인족과 수렵채집인 사이의 이종 교배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악의 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말이죠. 수렵채집인들은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의도적으로 땅속에 매장했습니다.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쓰라린 낙원 추방의 기억을, 악과 함께 참혹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개와 교대로 바위를 지키는 청년.

소설을 가지고 맞다, 그르다를 판정하려 드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내겐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 그렇다고 눈앞의 유적을 보면서 기껏 소설이나 인용하느냐고 타박해도 부끄럽지는 않다. 나 자신이 상당부분 소설 속 상상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훗날 이 가설을 뒤집을 수 있는 학술적 결과가 나오면 앞장서서 전하면 되겠지. 나는 지금 에덴동산에 서 있다. 사과나무가 서 있고 뱀이 이브를 유혹하는 장면은 없지만, 드드안 나무가 있고 뱀의 조각이 새겨진 거석들이 있는 그 에덴동산. 낙원을 잃어버린 인류의 후손으로 이 언덕에 서 있는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햇살이 사선으로 비껴들고 황막한 평원에서 올라온 바람이 슬며시 옷자락을 들춘다.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다. 나오는 길에 보니 들어갈 때 개가 있던 그 자리에 한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잠들은 걸까? 민가가 무척 멀리 떨어진 곳인데. 개가 사람으로 바뀌었을 리는 없고 저들은 무슨 사연이 있어 이곳을 교대로 지키고 있는 것일까.

 

posted by sagang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PC방.

마을의 공동묘지.

흙집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니 현대식에 가까운 집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의 건물들은 흙이 아니라 시멘트로 치장하고 있다. 고대의 어느 공간에서 느닷없이 현대로 이동한 한 기분이다. 흙과 시멘트 사이가 천년쯤 되는 것 같은데 고작 5분 거리밖에 안되다니. 아까 흙집에서 만났던,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도 이 동네에서 사는 게 아닌가 싶다. 2층 슬래브 집 마당에는 오토바이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서 있고 1층 처마에는 ‘INTERNET CAFE’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쉽게 말해 PC방이란 뜻이겠지. 3,000년 전의 흙집과 PC방의 차이는 이렇게 지척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단어다. 게다가 평소에는 돌보지 않는 듯 풀들이 제각기 하늘까지 올라가보겠다고 아우성이다. 이곳도 추석 때만 벌초를 하러가나? 길가에서 당나귀 수레를 타고 가는 아이를 만난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레에서 내려 당나귀를 세우고 포즈를 취해 준다. 어라? 이 녀석 제법 프로 냄새가 나네? 헌데 포즈만 프로가 아니다. 사진을 다 찍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돌아서려고 했더니 옷깃을 잡으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외친 한마디!

“Give me money!!

그렇구나. 목적은 모델료였구나. 돈이 상투 끝에 올라앉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따지고 보면 마차를 세우고 포즈를 세워주는 것이야말로 대가를 받을만한 노역이지. 여행을 다니다 보면 늘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돈을 주지 말라는 머리를 따라야 하나, 측은지심을 강조하는 가슴을 따라야 하나.

 

 

당나귀 마차를 모는 소년.

마을 끝머리쯤에 야곱의 샘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별러서 온 곳이다. 일정에는 없었는데 내가 고집해서 끼워넣었다. 언제 다시 하란에 올 거라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간단 말인가. 하지만 샘 앞에 서자마자 한숨부터 나온다. 사방을 철제 담으로 둘러쳐놓고 문은 꽁꽁 잠가놓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전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 쓴 글에 관리는 안 하고 있는지 벌판 한 가운데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관리를 한다는 핑계로 아예 사람의 접근을 막아버렸다. 관리인이라도 있으면 문을 좀 열어달라고 졸라보겠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비루먹은 강아지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이걸 어쩌나. 저만치 안쪽으로 샘 같은 게 보이는데 너무 멀어서 사진조차 찍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기에는 너무 섭섭하다. 하릴없이 담을 따라 걷다보니 제법 낮은 곳이 보인다. 게다가 이건 뭐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발판 같은 게 놓여있다. 이런 땐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담으로 기어오른다. 하나, , ! 뛰어내리는데 뭔가 느낌이 안 좋다. 발이 삐끗한 모양이다. 난 아직도 내가 나이는 30대쯤, 몸무게는 60kg쯤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순간적으로 대퇴부까지 자극하는 통증에 멈칫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카메라를 바투 쥐고 샘을 향해서 달린다.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총탄 속을 누비는 병사의 각오가 이러했을까. 샘에는 4각의 쇠로 된 상자를 덮어놓았다. 이 동네는 쇠로 시작해서 쇠로 끝나는구나. 전에 우리 시골에 있던 샘과 비슷한 것 같은데, 상자를 덮어놓는 바람에 물이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마을엔 포장을 친 간이시장도 있다.

 

 

그래도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샘을 들여다보다 말고 셔터를 누르려는 참에 어디선가 새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말로 치면 어이, 어이~” 정도 되는 것 같다. 내게 소리치는 게 틀림없다. ‘거기 들어간 놈 잡히면 죽는다는 뜻이겠지? 후다닥 셔터를 몇 번 누르고 왔던 길을 향해서 다시 내달린다. 삐끗했던 발목은 여전히 아프지만 살아야겠다는 일념은 통증마저 유예시킨다.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지. 순간적으로 다시 담을 넘는다. 이게 몇 년 만의 담치기냐. 마지막 담치기를 할 무렵이 열일곱이던가? 열여덟이던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말 10대로 돌아간 듯 내 동작은 번개처럼 빠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절룩절룩 걸어가는 내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 한 가닥이 걸린다.

그래도 난 찍었어.’

그깟 샘 하나가 무엇이길래 목숨까지 거느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내겐 그만큼 중요하다. 어디 다녀왔다고 자랑이나 하려는 게 아니라, 옛사람들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먼 길을 온 것이다. 하란은 성서의 무대가 되는 땅이다. 그 무대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니 야곱의 샘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이다. 노총각 이삭이 리브가를 색시로 맞아 알콩달콩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이 집안 손이 귀한 건 내림인 모양이다. 아브라함도 100세나 돼서 이삭을 낳았으니. 결혼 후 30년이 지날 무렵 드디어 리브가에게 태기가 있었다.

 

 

야곱의 샘 안내판.

태어난 아이들은 쌍둥이였다. 이란성 쌍둥이였던 듯 형제는 완전 딴판이었다. 형은 온몸이 붉은 털로 뒤덮여 있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지었고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야곱이라고 지었다.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에서는 씩씩하고 거칠어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신 깊은 생각이나 자제력은 부족한 편이었다. 동생 야곱은 그와 반대여서 성격이 차분하고 주로 천막에서 지내는 것을 즐겼다. 그렇다고 야심까지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것부터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형제의 순서가 바꾸고 싶다고 바꿔지는 건 아닐 터. 여느 사람 같으면 그러려니 했으련만 야곱은 안 되면 되게 하라무대뽀 정신을 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하다가 뱃가죽이 등에 붙을 무렵 돌아왔다. 마침 그때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었다. 에서에게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만큼이나 반가울 수밖에. 죽 솥에 머리라도 박을 듯 달라 들면서 동생에게 사정을 했다.

사랑하는 동생 야곱아, 죽 한 그릇만 줘라

, 나 먹으려고 쑤는 건데. 이 죽 주면 내가 부탁하는 거 하나 들어줄래?”

부탁? 뭔데?”

장자권(長子權)을 내게 줘.”

장자권? 그거 복권 이름이냐? 뭔지는 모르지만 가져. 얼른 죽 한 그릇 주고

비록 장난 비슷한 일이었지만 야곱은 죽 한 그릇에 형에게서 장자권을 양도 받았다. 에서야 가볍게 생각하고 말았겠지.

 

 

담도 높고 문도 잠겨 있다.

결정적인 사건은 형제가 더욱 성장한 뒤에 일어났다. 야곱의 샘에 대해 알려면 이 정도 공부는 해야 하니 조금 지루해도 어쩔 수 없다. 하란까지 와서 야곱 이야기 한 자락 안 듣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법. 이삭도 어느 덧 늙어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어두워질 때가 되었다. 내가 얼마나 더 살랴 싶어서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상속을 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그 절차가 바로 축복을 내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에서를 부른다.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세기 272~4)

 

이삭의 말대로 진행됐으면 나도 예까지 올 일이 없었으련만, 아비와 아들의 대화를 리브가가 듣고 말았다. 아참, 그 얘기를 안 하고 지나갔구나.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부부 간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각기 달라 이삭은 큰 아들 에서라면 죽고 못 살았고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만 끼고 돌았다. 이복형제도 아닌데, 사건을 만들어야 이야기가 나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자간의 대화를 엿들은 리브가는 야곱으로 장자를 삼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음모’, 이 단어 참 쓸 만하다. 에서가 사냥을 떠난 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새끼 염소 두 마리를 잡아오게 한다. 다음에 그 고기로 이삭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고 에서의 옷을 입힌 다음, 털이 많은 에서처럼 염소새끼 가죽으로 손과 목을 둘러준다.

 

안쪽 돌 기둥 사이에 있는 게 야곱의 샘이다.

야곱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어머니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니 못 이기는 체 하고 아비 이삭에게 들어간다. 눈이 먼 이삭은 결국 리브가의 꾀에 속아 음식을 맛있게 먹은 다음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린다. 잠시 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지만 모든 건 끝난 뒤. 아비에게 울고 불고 난리를 쳐본다고 축복이라는 게 어디 스티커처럼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일을 꾸민 어미가 미웠지만 그 또한 어쩌겠는가. 죽여 버리겠다고 야곱을 찾았지만 이미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은 뒤였다.

야곱, 이 웬수 같은 놈. 아버지만 죽고 나면 그날부로 묻어버릴껴.”

야곱을 향한 에서의 화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잘못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리브가는 야곱을 친정으로 보내기로 한다. 여기서부터 야곱의 샘이야기가 시작된다. 리브가의 친정이 어디던가. 아브라함이 늙은 종을 시켜 리브가를 데려온 곳이 어디던가. 그러고 보니 내내 괴롭히던 궁금증이 쉽게 풀려버리고 만다. 아브라함이 내 고향에 가서 며느릿감을 데려오라던 곳은 하란이었음이 확인된다. 왜냐고? 리브가가 아들을 보낸 친정이 바로 하란이었으니까. 그리고 야곱이 라헬과 인연을 맺은 야곱의 샘이 지금 내 눈앞 하란에 있으니까. 결과가 맞았으니 나머지 궁금증은 그냥 묻어버리자. 외삼촌을 찾아가기 위해 집을 떠난 야곱이나 따라가 보자. 야곱은 걷고 걸어 어느 샘가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목동들이 양떼를 몰고 와서 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는 아무 때나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게 아니라 저녁 무렵이 돼서 목동들이 모두 모여야 샘을 덮은 큰 돌을 열고 물을 먹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담을 넘어 들어가보니 이렇게 덮어놓았다.

여기서 야곱과 그의 사촌 누이 라헬의 극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역시 우물가는 만남의 장이다. 샘에서 쉬고 있는 야곱 앞에 아리따운 처녀 하나가 양떼를 몰고 나타난다. 바로 라헬이다. 무엇에 끌렸는지 야곱은 샘을 덮은 돌을 열고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그러면서 족보 확인이 시작된다.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창세기 2911~12)

 

처음부터 입을 맞췄다는 게 좀 수상하긴 하다. 그리고 울긴 또 왜 울어. 그날부터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기거한다. 이쯤에서 야곱 이야기를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리되면 장가를 간 재미있는 사연을 전할 수 없으니 조금만 더하자. 야곱의 외삼촌이자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은 실속주의자였다. 약간의 사기성도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라반은 야곱을 불러 말한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지만 공짜로 일을 시킬 수야 있겠냐? 무엇으로 보수를 주면 좋을까?” 딱 보니 약점을 잡고 머슴으로 부려먹으려는 것이다. 야곱은 그때 이미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제가 어찌 외삼촌께 보수를 바라겠습니까? 약소하지만 라헬을 제게 주면 7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겠습니다.”

이런 이런, 너 그러다 크게 당한다. 야곱은 라헬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7년 동안 뼈 빠지게 일했다. 드디어 결혼하던 날, 야곱은 얼마나 좋았던지 완전 술독에 빠져 버리고 만다. 아니면 외삼촌 라반이 동네 건달들 시켜서 일부러 먹였는지도 모르지. 첫날밤을 치루고 새벽에 일어난 야곱은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곁, 색시의 자리에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닌 그녀의 언니 레아가 수줍게 누워 있었다. 뭐야, 이거. 이미 일은 치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얼랄라? 이것이 무슨 시추에이션이여? 왜 네가 내 옆에 누워 있어? 라헬은 어디 가고?”

나도 몰라요. 아버지가 들어가래서 들어왔단 말이에요.”

배신감에 미칠 것 같았던 야곱이 외삼촌인 라반에게로 달려가 따졌다. 라반의 대답이 걸작이다.

어이, 생질. 열 받지 말어. 이 동네가 말이여. 얼마나 고루한지 작은 딸을 큰 딸보다 먼저 시집보내면 난리도 아니여.”

이런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있나. 그러면서 라반은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니 참고 한 일주일 버텨봐. 내가 작은 딸도 생질에게 줌세. 대신 7년 머슴살이 추가는 옵션이여. 오케이?”

어쩌겠는가. 야곱은 또 7년간의 머슴살이를 한다. 그런 인고의 세월 덕분이었는지 야곱은 두 아내를 얻은 데다 그녀들의 몸종까지 첩으로 거느리게 된다. 몸종이 무슨 별책 부록이냐? 마누라로 삼게. 뭐 그 당시의 풍습이 그랬다는 것이겠지. 자식복도 많아서 아들 12, 딸 하나를 얻는다. 그의 아들 12명은 이스라엘 민족 12지파의 시조가 된다. 그건 훗날 얘기고. 아무튼 잔머리야곱이 더 잔머리외삼촌에게 속아 14년이나 머슴을 살면서 사랑을 완성한 얘기는 가볍게 넘길 일만은 아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희생과 노력,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시대에 한번쯤 되새겨볼 만 하지 않은가.

 

나오는 길에 잠시 둘러본 하란성의 하나 남은 성문.

성서의 땅 하란, 그곳에 있는 야곱의 샘에서 청량한 물을 한 잔 마시며 여행의 행복을 누려보겠다는 꿈은 쇠창살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꿈꾸던 하란에 왔고 성서의 인물들을 하나씩 만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라헬. 지금 그들이 저만치서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고 앞으로 늘 나 안에서 함께 할 것이다. 어느 땐 용기를 주고 어느 땐 질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젠 정말 하란을 떠나야 할 시간.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흙먼지 날리는 이 불모의 땅에 사랑담은 인사를 보낸다. 굿바이! 하란.

posted by sagang

폐허로 변한 하란 평원.

하란의 흙집들.

울루자미에서 돌아서 나오는 길.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아득한 옛날사람들의 흔적이 있을 리 없지만 괜스레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 길을 아브라함도 걸었을까. 당연히 걸었을 것이다. 이곳 하란에서 꽤 오래 머물렀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행적을 잠깐 추적해보고 가자.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인 셈의 10대 후손이다. 본명은 ‘높임을 받는다’는 뜻의 아브람이었고, ‘아브라함’은 야훼와 계약을 맺은 뒤 ‘열국(列國)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얻은 새 이름이다.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최초로 살았던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긴 유랑에 나선 이야기를 하려면 구약성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데라가 아들 아브함(아브라함이 되기 전 이름)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사라가 되기 전 이름)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세기 11장 31~32절)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다. 아브라함 일가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일가를 이끌고 이곳 하란 땅에 도착한 데라는 대체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은 ‘이미 조상들의 죄악 속에서 태어나, 죄악 속에서 먹고 마시면서 자라고, 죄짓는 일이 온 몸에 배어 있었으므로 중간 정착지인 하란에서 그 죄악된 행실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체류하였다’고 악담을 퍼붓지만, 종교에 까막눈인 내가 대체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흙집 대문.

흙집 외부에 놓여있는 앙증맞은 의자들.아무튼 뭉그적거리는 늙은 아비를 두고 내처 떠날 수도 없고 아브라함도 나름 고민이 컸을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 곁에 머물던 아브라함은 75세 되던 해 두 번째 야훼의 부름을 받는다. 역시 정착해서 살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장 1~2절)

 

아브라함의 하란에서의 삶은 그렇게 끝난다. 그렇다고 모든 인연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 뒤로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하란과의 다양한 인연의 끈을 이어간다. 계속 아브라함 이야기만 하면, 은근히 성서에 기대여 여행기 공짜로 쓰려고 한단 말이 나올 테니, 이쯤에서 이야기를 돌릴 일이다.

 

흙집 안뜰.

흙집 천장. 끝에 구멍이 뚫려있다.

흙집 주인.

이젠 흙집을 구경해보기로 하자. 이 고깔형 집들이야말로 하란을 하란답게 하는 결정적 요소다. BC 3000년쯤부터 짓기 시작했다고 짐작할 뿐 정확한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고대인들이 동굴살이를 마치면서 처음으로 지은 주택의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목재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이 지역에서는 흙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굳이 다른 집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흙집은 흙과 밀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을 햇볕에 말려서 쌓는 방식으로 짓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땅에서 짓던 흙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도 수십 년 전까지는 황토에 볏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로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벽돌을 30~40단까지 쌓아올리는데 고깔 부분은 높이가 5m나 된다. 맨 위는 뚫려 있어서 빛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집안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풍구 역할을 한다. 지붕을 그렇게 높이 세우는 것은 이 지역의 뜨거운 날씨 때문일 것이다. 굴뚝처럼 솟아오른 높은 지붕이 실내의 열기를 빨아들여 배출하기 때문에 5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이겠지. 지붕 끝에는 납작한 돌을 서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어놓았다.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역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집 표면이 자꾸 깎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수리해야 한다고 한다. 직접 들어가 본 집은 주거용이라기보다는 관광객들에게 장사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정원의 작은 나무의자들이 눈길을 끈다. 이 지역에서 자주 보는 의자인데 들고 오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흙집 아들. 옷도 빌려주고 모델이 돼준다.

 

집안은 작은 민속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다양하게 꾸며 놨다. 어느 방을 들어가 보니 아랍인들의 전통의상이 걸려 있다. 하란의 주민은 대부분 투르크족이 아니라 아랍인들이다. 18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했는데, 아직도 사막 부족인 베두인 족의 복장을 하고 그 풍습을 지키며 산다고 한다. 젊고 잘 생긴 주인집 아들이 관광객들에게 아랍풍의 옷을 빌려 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물론 옷은 돈을 받고 빌려준다. 뭐, 솔직하게 말하면 미끼인 셈이다. 어쩌면 아들이 아니라 일당을 주고 모델을 고용한 건지도 모른다.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거봐. 장삿속 확실하잖아. 나 질투하는 거 맞지? 응접실로 짐작되는 방에는 금방 손님을 맞기라도 할 듯 카펫과 방석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관광객들도 그곳에서 음료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집 처마에 신발을 매달아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왜 거기 걸어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거란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나자르본주의 대용품인 셈이다. 이곳에도 일하는 아이들이 있다. 형제로 보이는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길래 물어봤더니 큰 아이는 예비 중학생이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한다. 지도나 목걸이 등의 장신구를 판다. 이 동네에 사는데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란다. 얼굴에 구차함 같은 기색은 전혀 없다. 한 끼 밥 때문에 내몰린 아이들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하다. 아이들과 한참 어울려 논다. 큰 아이는 카메라를 들이대면 활짝 웃어주는데 작은 녀석은 영 수줍어해서 얼굴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다. 흙집에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은 시멘트 집에서 산다고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내가 보기엔 흙집이 훨씬 좋아 보이는데.

흙집 내부. 온갖 장신구들이 걸려있다.

응접실.

 

혼자 터벅터벅 동네 구경에 나선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고깔처럼 생긴 흙집들이다. 공터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쓰레기장에는 염소들이 종이 두어 장을 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 담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는데 누가 자꾸 부르는 느낌이 든다. 두리번거리다 저만치 담장에 기대어 “알로” “알로” 외치는 처녀와 눈이 마주친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분명 나를 부르는 것이다. 이게 몇 십 년만이냐. 마음은 달려가는데 몸은 제자리다. 처녀가 부르니 은근히 겁이 난다. 혹시 처녀귀신? 설마 대낮에 귀신이 나올리는 없고…. 난 고기가 좀 질겨. 좀 젊은 총각 꼬셔봐. 주민이라고는 그녀와 염소 떼에 묻어서 우우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전부다. 어른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이왕 지붕에 앉았으니 아까 중동무이한 성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하란이 다시 성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얻을 무렵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그의 처 사라가 90세 때 낳은 늦둥이었다. 가임기간이 어떠니 배란이 어떠니 하며 요즘의 상식으로 따지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아브라함은 이 늦둥이 아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이 그 어미와 함께 황야로 내쫓긴 것도 결국은 이삭이란 존재의 등장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파고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테니 궁금한 분은 구약성서 탐독을 권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가보내기로 한다. 이삭도 어언 나이 40이 넘은 ‘노총각’이 됐을 무렵이다. 아브라함은 가장 믿는 늙은 종을 부른다.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세기 24장 3~4절)

 

고깔 모양의 지붕 끝에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납작한 돌을 올려놓았다.

이때는 아브라함도 길고 길었던 유랑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책한지 오래였다. 고생하던 아내 사라는 먼저 세상을 떴고. 어지간하면 가까운데서 며느릿감을 고를 만도 하련만 그는 굳이 옛 고향에 가서 데려오라고 했다. 야훼의 명령으로 가나안 땅에 갔지만 그도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미리 찍어둔 참한 색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달랑 종 하나를 느닷없이 보내서 며느릿감을 데려오라니 배짱 한번 두둑하다고 할 수 있겠다. 까라면 까야지, 종 처지에 미주알고주알 따질 수 있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낙타 열 마리에 신붓감에게 줄 선물을 싣고 터덕터덕 길을 떠난다. 여기서 케케묵은 문제를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늙은 종이 향한 ‘아브라함의 옛 고향’은 어디란 말인가? 당연히 아브라함이 태어난 갈대아 우르가 1차 후보지가 된다. 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재 이라크의 남쪽에 있는 우르다. 헌데 늙은 종이 주인집 색싯감을 구하겠다고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아브라함의 이동로를 따라 되짚어 간다면 종은 늙어 죽어버리고 며느릿감으로 출발한 여자는 시어머니감이 돼서 도착하기 딱 알맞은 거리다. 그럼 어쩌라는 것이냐고? 그래서 나는 ‘하란 고향 설’, 더 나아가 ‘샨르우르파 출생 설’을 다시 들고 나오고 싶은 것이다. 가나안과 하란은 상식적인 거리 안에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두고 온 하란을 고향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학자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아주 생떼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지금 성서를 배경으로 추리물을 쓰고 있는 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궁금한 여행자일 뿐이다.

처마에 걸려 있는 신발.

딴소리 늘어놓다 늙은 종 놓칠라.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가는 늙은 종은 긴 여행 끝에 ‘나홀의 성’에 도착했다. 성서에는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라고만 돼 있다. 이왕 쓰는 거 좀 성의껏 쓸 것이지. 메소보다미아야 메소포타미아를 이른다는 걸 알겠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온 나홀의 성은 대체 또 어디란 말이냐. 괜히 지명 가지고 시비를 거는 바람에 끝까지 골치 아프게 돼버렸다. 나홀, 나홀이라…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면 사람의 이름인데…. 성서를 뒤져보자. 아! 창세기 초반에 나오네. 바로 아브라함의 동생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을 셋을 두었는데 장자가 바로 아브라함, 둘째가 나홀, 셋째가 하란이다. 하란은 아들 롯을 낳고 일찍 죽는다. 이제 이야기가 조금 풀린다. 이 나홀이 어디에서 살았느냐만 밝히면 되니까. 궁금한 건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가 일가족을 이끌고 나올 때 나홀도 동행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걸 확인하려면 저 앞에 언급한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창세기 31절) 눈을 씻고 스무 번을 읽어봐도 어린 롯의 이름은 나오는데 삼촌씩이나 되는 나홀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럼 여기서 지명 찾기를 그만 둬야할까?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당한 짐작도 필요하다. 나는 나홀 역시 하란으로 갔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살다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땅으로 떠날 때 남아서 아비 데라를 모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그나마 늙은 아비를 두고 떠나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나홀의 성’, 즉 나홀이 사는 곳으로 찾아간 것이다. 신경 안 쓰고 성경에 쓰인 대로 지나가면 되련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 문제다. 몇몇 책들은 늙은 종이 찾아간 곳을 아무런 고민의 흔적도 없이 하란으로 적고 있다.

 

방학 중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나홀의 성에 거의 도착할 무렵 샘터에서 다리쉼을 한다. 그러면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쯧쯧, 본인 장가는 가셨는지 모르겠네. 그는 나름대로 아브라함의 며느릿감이 될 여자의 기준을 정했다. 종 치고는 조금 오버한 셈이다. 그 기준은 ‘자신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아가씨가 바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그냥 떠먹어도 되련만. 기도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각본에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듯 리브가라는 처녀가 샘 곁으로 나온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창세기 24장 16~17절)

 

이쯤 되면 ‘목마른 놈이 샘 판다’는 말은 말짱 헛소리다. ‘목마른 늙은 종 처녀 오기 기다린다’ 쯤으로 바꾸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튼 성서에도 ‘아리따운’ 여자를 언급했으니 아름다음을 추구하는 여자들을 속물 취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연이 맞으려고 그랬던지 리브가는 목마르다는 늙은 종에게 정성들여 물을 준다. 그것뿐이겠는가.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부어 낙타를 마실 수 있게 하더니, 물을 더 길어와 낙타들의 갈증도 풀어준다. 착하다. 참 착하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못된 사람 본 적 없다.

 

밖에서 본 흙집 대문.그러고 보면 우물이라는 게 남녀를 맺어주는 특별한 기능이 있는 게 틀림없다. 고려 태조 왕건도 장화왕비 오씨를 우물가에서 만났다지. 물 한 모금 달랬더니 바가지에 버들가지를 띄워주더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물 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고 했다나. 아가씨들이여. 좋은 신랑감 구하려거든 우물가로 갈지니. 그나저나 어느 시골에 우물이 있으며 그럴 만한 아가씨는 또 있을까. 물을 얻어 마시고 타고 온 낙타들이 갈증을 푸는 것을 본 늙은 종은 감격할 수밖에. 그래서 묻는다. “네가 누구의 딸이뇨?”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부두엘의 딸”이라고 리브가가 대답함으로써 족보가 밝혀진다. 등장인물도 많고 말도 복잡하지만,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라는 뜻이다. 누가 미리 짜놓은 각본 같지 않은가. 아무튼 늙은 종은 리브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이야기를 모두 서술해서 무얼 하랴. 그래도 결정적인 것 하나는 전하고 가야지.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세기 24장 57~58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니 리브가에게 “거시기 땅에 40 넘은 총각이 하나 있는데 시집갈래?” 하고 물었더니 군말 없이 간다 하더라는 얘기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늙은 종을 따라간 리브가는 이삭과 오래 오래 잘 살았다.

 

쓰레기장을 뒤지는 염소들.

하란의 흙집 지붕에 홀로 앉아 시선을 아주 멀리 던져본다. 이삭은 저물녘에 들판에 나가 묵상을 하다가 낙타들이 오는 것을 봤다지. 말이 묵상이지 색시 될 처녀가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겠지. 낙타들 중 한 마리의 등에 아내가 될 리브가가 탔더란다. 늙은 총각 이삭은 한 눈에 자기 사람임을 알아봤겠지. 색시를 구하러 갔던 늙은 종이 따라오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을까? 내 눈 앞에 그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다. 아득한 시절에 살았던 그들과 내가 한 공간에서 만난 것 같다. 이곳 하란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만날 수 있는 땅.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담장에 기대 앉아 “알로, 알로”를 외치던 처녀는 아니다. 번뜩,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래, 이제 지붕에서 내려갈 때가 됐구나. 아직 이삭과 리브가의 만남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했는데….

posted by sagang
prev 1 2 3 4 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