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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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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18. 18:57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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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별러서 떠난 여행이었다. 팽팽하게 감아버린 기타줄처럼, 몸 안의 신경줄들이 어느 날 툭! 툭! 끊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남쪽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무언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그런 기대가 남아있다는 건 설렘이 있다는 것이고, 설렘이 있다는 건 내 안에 존재하는 희망의 불꽃이 다 사그라진 건 아니란 뜻일 게다. 시골버스를 타고 낯선 길을 달리는 건 행복한 일이다. 오랜 시간 섬이었다가 육지와 이어진 남쪽 어느 마을을 지나는 참이었다. 여름은 온 세상에 짙푸른 물감을 마구 뿌려놨다. 들과 산을 손에 쥐고 짜면 파란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처럼 눈부신 한낮. 초점 없는 동공으로 내내 창 밖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어느 순간 한 지점에 딱 멈춘다.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것. 작은 학교인 듯 싶다. 하지만 정상적인 학교는 아닌 것 같다. 주변에는 풀이 무성하고 퇴색하고 있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유한 색깔이 배어 있다. 폐교일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동네가 꽤 큰데다 한눈에도 부촌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번듯했기 때문에 쉽사리 수긍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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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한낮, 꽤 오래 전부터 버스 안의 손님이라고는 '철' 모르는 나그네 하나뿐이다. 운전사에게 다가가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운전사는 힘도 들이지 않고 대답한다. "걱정 마슈. 예가 종점이니 내리기 싫다고 해도 내려줍니다." 마음이 따뜻한 만큼 말이 딱딱한 이곳 사람들은 농담도 가끔은 화난 것처럼 한다. 차에서 내려 다가가 보니 한 눈에 폐교임이 확인된다. 곳곳에 쇠락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런 큰 동네도 아이들이 없어 폐교를 하다니…. 작지만 꽤 아름다운 학교였음이 틀림없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운동장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열병식을 하고 있다. 나무마다 검은 열매가 가득 열려 있어 군침을 돌게 한다. 땅에도 새까맣게 떨어져 있다. 몇 개 따서 입에 넣어보지만 어렸을 때 입안을 황홀하게 해주던 그 맛이 아니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걸까. 들큰하지만 시큼한 그리고 조금은 떫은, 그래서 슬프다고 할 수밖에 없는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개구리 한 마리가 낯선 나그네의 기척에 놀랐는지 펄쩍 뛰어 저만치 달아난다. 하릴없이 운동장을 걷는다. 어떤 아이가 언제 떨어트리고 간 것일까. 운동장 한가운데에 운동화 한 켤레가 뒹굴고 있다. 꺄르르, 꺄르륵…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둘러보지만 정적만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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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는 학교건물은 언뜻 본 것보다는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문에는 판자를 대 못질해놓고 '무단 출입 땐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문을 붙여놨다. 좀 으스스하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조금만 손질하면 훌륭한 삶터가 될 것 같다. 전부터 폐교를 활용해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꿈을 꿔온 터라 쉽사리 돌아 나오지 못한다. 텅 빈 게시판 앞에서 교적비를 발견한다. '1964년에 개교하여 졸업생 420명을 배출하고 1994년에 폐교…' 1994년이면 20년도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건물이 멀쩡한 것 보면 그동안 동네사람들이 중간중간 손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동네 주민 중에 이 학교 출신이 얼마나 많았으랴. 저만치 '책보(옛날에는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다녔다)를 든 아이상'과 '아이를 안은 선생님(?)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총 420명의 아이들이 뛰어 놀고 꿈을 키웠을 학교가 이젠 풀밭에서 쓸쓸히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학교 이야기를 듣고 싶어 동네를 어슬렁거려보지만 강아지 몇 마리만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저만치 노인 한 분을 보고 다가갈까 하다가 멈춰버린다. 부질없는 짓이다. 태어나 죽은 이야기를 들은들 무엇하랴. 결국 학교 다닐 아이들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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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그랬던 걸까. 또 다른 폐교를 발견한 건, 섬에서도 유명한 다랭이논을 찾아갔을 때였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터라 느린 걸음으로 혼자 어슬렁거리며 걷던 차에  건물 하나에 또 시선을 잡혀버리고 말았다. 풍경으로 치면 먼저 학교보다 훨씬 아름답다. 바다가 코앞에 있다. 운동장가에 만들어놓은 꽃밭에는 누가 가꿔놓았는지 붉고 노란 꽃들이 초여름 햇살의 애무를 받으며 까르르 숨이 넘어간다. 바다에서 올라온 바람이 등에 찬 땀을 거둬간다. 철퍼덕 주저앉아 배낭에 넣어온 맥주를 꺼낸다. 맥주는 미지근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청량해진다. 맥주를 다 마시고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운동장과 교실 사이의 언덕에는 이충무공의 동상이 우뚝 서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못 다 마친 전쟁을 아쉬워하는 걸까. 동상 앞에는 조회를 할 때 쓰던 교단이 아직도 의연한 자세로 서 있다. 머리가 조금 벗겨진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훈화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기둥이니 밝고 바르게…" 매번 듣는 훈화가 지루해진 아이들은 발로 흙을 툭툭 차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장난도 쳤을 것이다. 아아!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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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교실을 폐쇄하지 않아 드나드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어느 교실엔 아직도 책걸상이 가득 쌓여있고 어느 교실은 먼지들만 바닥에서 배밀이를 하고있다. 천장에서 내려온 알전구는 지금이라도 스위치를 올리면 세상을 명징하게 밝힐 것 같다. 칠판은 낙서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은수 왔다감' '경수·상래·호금 다녀감' '모두 모두 잘됐음 좋겠다' 이 학교를 마지막으로 다녔던 졸업생들일까? 안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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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안타까움이 백묵가루 대신 묻어있다. 열 명, 다섯 명, 세 명, 두 명… 학교에 아이들이 자꾸 줄어가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창문 쪽으로 돌아서니 파란 하늘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환한 색깔 속에서 공부했을 아이들. 그들의 가슴은 또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을까. 복도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반 이상은 내려 앉아있다. 삐걱거리며 걷는 내내 아이들이 남겼을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기울여본다. 뒤뜰에서 물이 끊긴 급수대와 무너질 듯 버티고 있는 화장실을 만난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화장실 문이 덜컹하고 소리를 지른다. 반갑다는 소린지, 그만 나가라는 소린지. 초여름의 싱싱한 해가 학교 건물에 레이저광선을 닮은 빛을 쏘아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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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듯, 오래된 화단에 앉아 턱을 괴고 상념에 빠진다. 본교가 분교가 되고, 그 분교마저 세월의 억센 손아귀에 휘둘리다 사라져가고…. 이 나라에 존재했던 분교라는 이름은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골마을이라도 숨듯이 서 있던, 하지만 그 마을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에 아침마다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던 건물은 잊혀질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가슴속의 그리움만으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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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18. 18:56 길섶에서
모처럼 찾아 뵌 어머니는 속이 불편하다며 연신 배를 쓸어 내린다.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 한다는 자괴감까지 겹쳐 마음이 편치 않다. 병원에 모시고 가 보지만 의사라고 금방 낫게 할 묘방이 있을 리 없다. 손이나 잡아드리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어릴 적처럼 슬며시 곁에 누워본다.

신음을 물면서도 노인의 얘기는 끝이 없다.“그 누구냐. 윗집 살던…. 영식인가? 애들 여윌 때 안됐더냐?” “됐지요. 장가를 일찍 갔으니….” “그렇구나. 그나저나 그 때 차 사고로 간 네 친구는 지금 생각해도 맘이 짠하다. 그 사람 처가 아직 젊을 텐데.” “아, 그 사람요? 아니에요. 거기도 사십이 넘었어요.” “뭐? 벌써? 서른이나 넘었나 했다. 원, 세월이 이렇게 쏜살같은지….”

나이는 시간조차 매어두고 싶게 만드는 걸까. 어머니의 손을 쓸어 본다. 평생 일을 놓아본 적이 없는 손은 기름기가 다 빠져 나무등걸처럼 거칠다. 이 손이 오늘의 날 만들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형님이 잘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끔씩 존재마저 잊어버리는 아들. 스스로 종아리를 걷고 매질을 해야 마땅할….
200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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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11. 18:4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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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되어있는, 좁고 긴 논' (국어연구원 표준국어 대사전)
다랑논에 대한 해석은 간단하다. 하지만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다락논, 다랭이, 다랑전, 다랑치, 논다랑이, 다랭이논, 다락배미, 삿갓배미…. 이름만큼 사연도 구구절절 많다. 그 중 삿갓배미란 말이 생기게 된 일화는 다랑논을 구경조차 못한 사람에게도 금세 뚜렷한 그림 한 장을 그려준다. "옛날에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 보니 딱 한 배미가 부족했단다. 세어보고 세어봤지만 끝내 사라진 논을 찾을 수 없었다는구나.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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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영감이 마을을 찾아 든 것은 참혹했던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전쟁의 상흔은 조금씩 아물어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던 상이군인들의 모습도 뜸할 무렵이었다. 영감 하나가 보따리 두어 개와 솥단지 하나를 얹은 지게를 지고 앞장서고, 그 뒤에는 다리를 저는 젊은 아낙과 작은 아이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논에는 찬바람이 제법 날카로운 손톱을 내세워 쌓아놓은 볏단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냇둑의 미루나무는 빈 가지를 흔들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마을에 들어온 그 낯선 일가는 미리 알고 왔다는 듯이 곧장 장부자네 집으로 향했다. 하긴 누구라도 그 마을을 찾은 나그네라면 기와를 번듯하게 올린, 그 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 날부터 그 일가는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장부자의 눈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침 비어있던 행랑채에서 번듯하게 한 살림을 차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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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바우영감이라고 불렀다. 원래 이름이 바우였는지, 그가 그렇게 불리길 원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이의 이름이 용식이였으니 용식아버지라고 부를 법도 하건만 어른이나 아이나 하나같이 바우영감이라고 불렀다. 하긴 그가 '용식 아버지'가 되기에는 너무 늙어 보였다. 차라리 용식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성싶었다. 바우영감은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의 젊은 아내는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한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했다. 아니, 두세 배 일했다. 그들이 쉬는 것을 구경하기란 개의 머리에 뿔이 돋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어린 용식이도 한가하게 앉아서 노는 적이 없었다. 갓 올라온 찔레순처럼 여리게 생긴 아이였지만 꼴머슴 몫을 제법 해냈다. 장부자로서는 똥누다 개똥참외를 발견하듯, 앉아서 복덩이를 주운 셈이었다. 전쟁 이후 쓸만한 머슴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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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바우영감 덕분이라고 못박기는 어렵겠지만, 장부자네 논밭은 갈수록 늘어났다. 눈처럼 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장죽을 문 장부자가 논둑 위에 서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일 역시 더욱 잦아졌다. 하긴 어딜 둘러봐도 자기 땅 뿐인 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찌 감추랴. 그 일은, 그들 일가가 동네에서 몇 년을 지낸 뒤 시작됐다. 어느 날부터 바우영감이 용골 들머리의 조부자네 산자락을 파헤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용골은 골짜기가 꽤 깊어 평소 나무꾼 외에는 잘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조그만 내가 흐르고 그 냇물이 모이는 곳에 용소라는,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연못이 있어 선계(仙界)에라도 든 양 제법 신비스런 곳이었다.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바우영감이 파헤치기 시작한 곳은 햇빛이 제법 반반하게 드나들고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산자락이었다. 산을 어느 정도 파헤친 뒤에는 돌로 둑을 쌓아 올렸다. 그러면 제법 넓직한 '계단'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꽤 지나고서야 바우영감이 목적하는 게 모습을 드러냈다. 쌓은 돌은 논둑으로, 파헤쳐진 곳은 작은 논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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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바우영감이 만드는 것이 다랭이논이라고 했다. 바우영감이 그 일을 하게 된 뒷얘기도 입을 타고 전해졌다. 장부자 집에서 행랑아범 겸 머슴살이를 시작하고 1년이 지나 추수가 끝난 뒤 간곡하게 요청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가족이 일한 새경을 받지 않을 테니, 몇 년이 걸려도 땅값만큼만 되면 용골에 있는 산자락을 떼어 자기 이름 앞으로 해달라고…. 장부자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어차피 용골에 있는 산은 빚 대신 받은 것이었고, 그 깊은 골짜기를 가본 적도 없으니, 내 땅이라는 애정이 있을 턱도 없었다. 하지만 눈 밝은 바우영감에게는 그 산자락이 금맥 만큼이나 값져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다랭이논을 만들면서도 틈틈이 장부자네 일을 해주기로 약조까지 했으니 장부자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다랭이논을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산자락 초입이야 이럭저럭 깎아 내리면 땅을 얻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난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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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은 바윗덩이 만치 큰돌부터 작은 돌 순으로 쌓아 올라가는데, 얼마나 촘촘한지 그야말로 '물샐 틈' 하나 없어 보였다. 위로 갈수록 석축은 높아질 수밖에 없어서 어느 곳은 어른 두어 길 폭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해도 얻는 땅은 말 그대로 '삿갓으로 덮을 만큼' 작았다. 큰돌은 주로 산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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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걸 썼지만 작은 돌은 대부분 지게로 져 날랐다. 그의 아내도 장부자네 부엌을 벗어날 틈만 있으면 달려와 돌을 머리에 이어 날랐고, 용식이도 망태에 돌을 날랐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쉬지 않았다. 일은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계속되었는데 사람들 눈에는 볼 때마다 똑같아 보일 만큼 느리게 진행됐다. 그러는 동안에, 그러잖아도 늙어 보이던 바우영감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백발이었고 얼굴에는 고랑이 깊게 패었다. 그렇게 한 두 해가 지나고 제법 꼴을 갖춘 논배미들이 몇 개 태어났다. 어느 논에는 황소 만한 바위가 그대로 들어앉아 있고 어느 논은 손바닥보다 클 것도 없었지만, 그 속에 땀과 눈물이 어느 만큼 들어있다는 건 누구든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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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논에 첫 모를 내던 해 봄, 바우영감네는 용골에 움막처럼 작은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살림살이는 여전히 지게로 져 나를 만큼 보잘것없었다. 그제야 장부자네집 행랑아범과 행랑어멈, 꼴머슴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 해 가을 다랑논에 벼가 익어 깊이 고개를 숙인 어느 날, 동네사람들은 모두 낫 하나씩을 들고 용골로 갔다. 반은 벼를 베고 반은 논두렁에 앉아 놀았지만, 추수는 순식간에 끝났다. 첫 해라 소출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바우영감은 끝내 볏단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의 소리 없는 통곡에 그의 아내도 울었고 그의 아들도 울었고 동네 사람들도 울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사람들은 신발도 꿰지 못한 채 다리를 절며 고꾸라지듯 동네로 달려오는 그의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빈 논마다 무서리가 하얗게 그림을 그린 이른 새벽이었다. 이틀 뒤 그의 지친 육신이 잠들어 있는, 장식 없는 상여는 동네를 천천히 돌아, 용골로 돌아갔다. 상여가 지나가는 동안 텅 빈 들녘엔, 처음 보는 갈까마귀 한 마리가 허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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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며] 다랑논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다랑논은 이미 논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밭으로 바뀐 곳은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풀과 잡목으로 뒤덮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때 다랑논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논들도 묵어 나자빠지는 마당에 다랑논까지 챙길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현실을 감안하면 지리산 피아골 자락에서 만난, 잘 가꾸어진 다랑논은 눈물겹게 반가웠습니다. 그 안에 배어있을 어느 촌부의 땀과 피, 그리고 눈물을 생각하며 논둑에 한참 쪼그리고 앉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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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4. 18:5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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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서커스라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산골을 벗어나 보지 못했던 아이에게, 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마냥 신기했다. TV라는 것도 처음 보았다. 아이의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하다 못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조차도 고향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였다. 서커스 천막이 쳐진 곳은 5일장 쇠전 옆의 공터였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햇살이 노루꼬리만큼 짧아지고 허술한 광목천의 교복을 파고드는 바람에 어깨가 움츠려들 무렵이었다. 그 작은 읍에 서커스가 들어온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서울 근교를 떠돌다가 겨울을 앞두고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이동하던 어느 서커스단이, 날개 부러진 철새처럼 중간에 짐을 풀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더니 공터에 높다란 천막이 들어섰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어쩌고 하며 궁벽한 고향동네까지 들어왔던 천막극장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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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는 천막이 완성될 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트럼펫과 북을 앞세우고, 얼굴에 온갖 칠을 한 어릿광대가 거리를 돌며 광고를 하고(전문용어로 '마찌마리'라고 한다), 벽마다 각종 쇼와 공연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나붙은 다음에야 상황을 대충 짐작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서커스가 무엇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과, 아이가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가 서커스를 구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좁쌀? 아니 누에씨만큼도 없었다. 손자를 가르치겠다고 읍내까지 나온 아이의 할머니에게는 하루를 연명할 양식과 땔거리가 급급한 판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지침은 엉뚱한 곳에서 아이 쪽을 가리켰다. 읍내에서 20년 넘게 여관을 운영해온 동성여관집 아들, 박상수를 짝으로 두었던 건 여러가지로 행운이었다. 점심마다 그 풍성한 도시락반찬을 얻어먹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한 판에 또 하나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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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단 수뇌부가 묵는 곳이 바로 상수네 동성여관이었다. 하긴 두어 곳 쓰러져 가는 여인숙을 빼고, 여관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소읍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서커스단 소속이라고 다 여관에 묶는 것은 아니었다. 오야지(단장)나 총무, 그리고 '에이스급'이거나 돈이 좀 있는 단원만 여관에 묶고 나머지 하급단원이나 지원조(후견이라 불렀다)는 천막 안, 무대 아래에 숙소를 만들어서 그 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상수는 학교에 오자마자 아이에게 서커스단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 일에 열중했던지 선생님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떠들다가 둘 다 벌을 섰을 정도였다. 상수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도서관에서 읽었던 아라비안나이트보다 더 재미있었다. 서커스단은 전국 어디 건 다니지 않는 데가 없다고 했다. 더구나 서커스단에는 아이 또래의 여자 애들(상수는 무지무지 예쁘다고 했다)도 많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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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결정적으로 설레게 한 것은 상수가 귀에 대고 은밀히 한 약속이었다. "기도 보는 아저씨가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그냥 넣어주겠대. 그 아저씨 우리 집에서 묵지도 않으면서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하거든…흐흐, 난 그게 우리 누나 때문이란 걸 알지. 뭐 아무렴 어떠냐? 너도 준비하고 있어." 단원 중에 누군가 상수의 누나를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데…. 또래 중에 서커스를 구경할만한 조건을 가진 아이들은 드물었다. 고등학교 형들 중 몇이 천막 뒤쪽을 찢고 몰래 들어갔다거나, 읍내를 휩쓰는 주먹들이 총무와 적당히 사바사바해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린 중학생들에게는 실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뿐이었다. 그리고 서커스 천막 입구에는 힘깨나 쓸만하게 보이는 청년들이 지키고 있어, 고등학교 형들의 '전설'도 상당부분은 허풍일 거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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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극장조차 언감생심 구경하기 힘들었던 아이에게 서커스를 본다는 건 꿈과 같은 일이었다. 서커스는 보통 하루 3회 공연을 했다. 물론 손님이 없으면 2회로 줄거나, 대박이 터지면 4회로 늘기도 했다. 아이와 상수는 저녁공연에 맞춰 가기로 했다. 컴컴할 때 들어가야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띌 거라는 계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밖에서 보는 서커스 천막은 우람하고 당당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입구에는 얼굴에 칠을 하고 고깔모자를 쓰고 소매서부터 넓게 퍼져 올라간 옷을 입은 난쟁이 어릿광대가 연신 손님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그 옆에는 원숭이 한 마리가 어릿광대를 흉내내며 연신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아이가 넋이 빠져있는 사이 상수가 팔 소매를 잡아 끌었다. 아마 얘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둘은 누구 눈에 띌세라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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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사회자의 장황한 멘트가 이어진 다음에 서커스가 시작됐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가수의 노래가 첫 순서였다. 주인집 마루에서 언뜻언뜻 훔쳐 본, TV 속의 쇼무대처럼 무희들이 뒤에서 춤을 췄다. 이어서 나이 지긋한 사내가 마술을 선보였다. 아이에겐 쇼보다 마술이 훨씬 재미있었다. 모자에서 꽃이 나오고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마술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서커스가 시작됐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접시가 흔들리며 돌아가는  접시돌리기, 현란한 원반돌리기, 아슬아슬한 통굴리기, 비틀비틀 줄 위에서 자전거타기, 덤블링, 외줄타기…. 연속으로 이어지는 현란한 묘기에 아이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천막 안은 밝아 보이거나 들떠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 가슴마다 바윗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약간은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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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빨간 옷에 비단신을 신은 소녀가 작은 그릇을 들고 나왔다. 소녀는 그릇을 머리에 올리기도 하고, 발에 놓고 몸을 굴리기도 하고 남자의 손을 짚고 물구나무서서 온갖 동작을 펼쳤다. 활처럼 휘고 구르고…. 왜 그랬을까.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 속에 들어선 것처럼 눈이 매캐해지고 목이 칼칼해졌다. 그러더니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시작됐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소녀가 특별히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공연은 아이 또래 만한 어린 소녀들 중심으로 이뤄졌다. 매일 고된 훈련을 할 테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지만,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픔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눈물은 두 남자가 펼치는 공중그네타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흘러내렸다. 천막의 벌어진 틈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칼날을 내밀고 있었다. 바람은 가마니 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있는 관객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천막은 밖에서 보던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헤진 가마니처럼 낡아가고 있었다. 서커스에 대한 아이의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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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하는 것은 그 자체에 짙은 슬픔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한 아이가 서커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 이미 서커스는 끝없는 추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11년 일본인에 의해서 부산에서 첫 말뚝을 박았다는 서커스는, 이 땅의 놀이패였던 사당패가 몰락한 이후 최고의 볼거리로 부산부터 만주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는 서커스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70년대만 해도 소속 단원들만 250명이 넘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며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씨와 가수 정훈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스타가 배출됐다."(동춘서커스 홈페이지
http://circus.co.kr)고 그 시절의 서커스를 돌아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미 사양길의 짙은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었던 건 터져 나오는 기침처럼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밖에. 간단한 장비만으로 전국 어디나 돌아다닐 수 있는 활동사진이 판치고 시골마을에도 텔레비전 안테나가 불쑥불쑥 솟아오르던 시절, 찬바람을 맞으며 가마니가 깔린 서커스 천막 안에 앉아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럴수록 서커스단원들의 주름과 한숨은 깊어가고 어린 소녀들의 아픔도 한 여름 해바라기처럼 자꾸 커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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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2007. 7. 4. 18:58 길섶에서
눈길이 저절로 멈춰진다. 소녀티를 갓 벗은 듯한 아가씨 하나가 길 옆의 우체통에 하얀 봉투를 집어넣는다. 모처럼 본 편지를 보내는 광경이, 길에서 예기치 않게 옛 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갑고 새삼스럽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써본 지가 언젠지 아득하다. 아니, 우체통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살았다. 우표 한 장에 얼마나 하는지도 모른다.

편지. 젊은 날의 추억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만큼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이름은 없다. 전화가 발달하고, 이메일이 등장하면서 편지를 쓸 일이 없어졌다고 흔히들 말한다. 따지고 보면 문명의 이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설렘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셈이다.

일전에 은퇴 후의 삶을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는 선배 한 분이 선언하듯 말했다. “고향에 내려가 살게 되면 내가 아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편지를 쓸 거야. 특별히 할 얘기야 있겠나. 날 잊지 않도록 사는 소식이나 전하는 거지.”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산과 들과 내, 그 곳에 등을 대거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생명들의 이야기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200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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