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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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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22. 18: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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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자는 유흥가로 애국자는 일터로

시간은 생명이다 일초라도 애껴쓰자

양담배 연기속에 사라지는 六십억환

넘쳐나는 왜노래에 흐려지는 민족정기

한 시대를 대표했던 계몽 표어들이다. 이런 구호를 보면서 실소를 머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1960년~70년대, 더 나아가 80년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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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노래' '양담배' '도박' 등은 나름대로 심각한 국가적 문제였다. 그래서 동네어귀, 골목마다 그런 '비애국적 행위'를 경계하는 벽보(표어 또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벽보는 일반 광고도 있었지만 정부부처나 관공서의 이름으로 나붙은 '공공목적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눈만 들면 '반공방첩'이었고 고개만 돌리면 '불조심'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정책전달이나 국민계몽을 위한 마땅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디오가 있다고 하지만 집집마다 보급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TV는 대중화되기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러다 보니 표어와 포스터는 중요한 의사전달 수단이었다. 학교에서도 미술시간에 자주 포스터를 그렸다. 소재는 주로 북괴타도나 남북통일이었다. 아이들은 한반도지도를 반으로 갈라 북쪽은 빨간색으로 칠하고 뿔 달린 도깨비나 늑대를 그려 넣었다. 남쪽은 파랗게 칠하고 순하게 생긴 아이들이나 양을 그려 넣었다. 그 그림에 "무찌르자 오랑캐… 때려잡자 괴뢰군…" 등의 문구를 써넣으면 선생님이 만족할 만한 포스터가 완성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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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계몽의 소재 중, 세월 따라 처지가 가장 많이 뒤바뀐 것은 '가족계획'이다. 60년~80년대에는 어디를 가도 '딸 아들 구별말고 둘만낳아 잘기르자'는 국민구호가 붙어 있었다. 산아제한은 애국이고, 아이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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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는 것은 '반사회적 행위'라고 할 만큼 눈총의 대상이 되었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뻔한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산아제한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 둘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나들이 가는 부부와, 많은 자식들에 치여 허덕거리는 부부의 모습이 비교되기 일쑤였다. 인구억제를 위한 계몽활동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루우프 피임법을 아십니까?'라는 주제로 피임방법을 교육하는 벽보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도 산아제한 교육은 끊임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형제가 많은 집 아이들은 괜히 주눅이 들기도 했다. 지금처럼 낮은 출산율이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고, 정당이나 정치인이 내세우는 공약의 단골메뉴로 '육아지원'이 떠오르는 세상이 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아이를 낳으면 눈총을 받던 세상에서 아이를 낳으면 지원금을 받는 세상으로의 변화, 불과 몇 십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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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오래 기억에 남는 포스터는 쥐잡기였다. '쥐잡기의 날'을 정해서 전국적으로 일제 소탕작전을 벌이던 시절이 있었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쥐가 들끓었다. 그들이 축내는 곡식도 곡식이려니와 쥐가 옮긴다는 전염병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도 주기적으로 쥐꼬리를 몇 개씩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 만큼 쥐잡기는 국가적 과제였다. 살찐 쥐를 그려 넣고 '모월 모일 모시에 쥐약 놓아 다같이 쥐를 잡자'라고 써 놓았었다. '이달의 할 일'이라는 계몽용 포스터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취학 적령자 등록을 빠짐없이 합시다-쥐를 잡읍시다-교통사고를 방지합시다' 등의 문구로 '쥐'는 빠지지 않는 단골이었다. 또 하나의 국가적 과제는 '혼식'이었다. 혼식의 날과 분식의 날을 정해놓고 학교에서 도시락을 검사하던 시절이었으니, 벽보가 나붙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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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문구가 '혼식으로 부강찾고 분식으로 건강찾차'였다. 이 포스터에는 혼식을 잘 지켜서 퉁퉁한(건강한) 사람과 쌀밥만 먹어서 빼빼 마른(병약한) 사람을 같이 그려 넣어 '혼식의 효과'를 강조하기도 했다. 쌀밥만 먹으면 **병에 걸린다느니 하는 교육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했다. 쥐잡기나 혼식이나 모두 먹고살기에 혼신을 다해야 했던 시대의 아픈 그림자였다.

먹고사는 문제 이상으로 중요했던 과제는 '반공방첩'이었다. 이 땅을 휩쓸었던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뻘건 생살을 드러내놓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간첩신고는 113' '간첩을 잡아내자-**경찰서' 같은 벽보는 어느 동네나 없으면 섭섭했던 '담벼락 메뉴'였다. 반공방첩에 관련된 표어·포스터는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북괴남침 예고없다 자나깨나 총력안보' '반공방첩 철저하면 우리나라 부흥한다' '신고하여 부자되고 자수하여 광명찾자' '자수하여 자유찾고 신고하여 자유수호' 그런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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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반공방첩이라는 '국가적 지상과제'에 정권유지 수단으로 등장했던 '유신'이 슬며시 끼어 들기도 했다. '유신으로 굳게뭉쳐 북괴도발 분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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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왜 북괴도발을 분쇄하는데 유신이라는 망치가 필요한 것인지…. 물론 나라에서 그렇다면 모두 옳은 줄 알았던 민초들에게 큰 거부감 없이 먹히던 소재였다. 포스터도 반공방첩 분야로 가면 꽤 입체적이었다. 예를 들어 '간첩은 노린다. 눈조심, 귀조심, 입조심' 이란 포스터에는 눈과 귀와 입을 실감나게 그려 넣어, 백성 된 도리를 하기 위해서는 자나깨나 오감을 동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눈, 귀야 간첩을 알아보고 신고하는데 필요하겠지만 왜 입조심까지 나왔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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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방첩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재가 바로 선거와 투표였다. 대통령선거는 10월유신 이후 국민투표의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국회의원이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대통령 선거인단)을 뽑는 선거는 치를 때마다 요란했다. 선거 참여를 독려하거나 올바른(?) 투표를 계몽하는 벽보가 담벼락마다 나붙었다. 그 중 대표 적인 문구가 '내 한 표 바로 던져 평화통일 앞당기자'였다. 내 한 표와 평화통일의 상관관계 역시 풀리지 않는 숙제다. 여당에 찍어야 통일을 할 수 있다고 강변하고 싶은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또 '내가 찍은 바른 한표 이 나라 기둥된다' 와 같은 문구도 단골메뉴였다. 포스터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불조심이었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빨간 불꽃이 날름거리는 불조심 포스터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그림에 찰떡궁합으로 따라다니는 문구는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불도 다시보자'였다. 어느 시대나 불이 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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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마찬가지지만, 잠이 들어서도 불조심을 해야할 만큼 화재에 취약하던 시절이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한 때 직장에서도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잘 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물'을 먹고 한직에 앉게 되면 뒤에서 소곤거렸다. "저 양반 언제 부활할지 몰라. 꺼진 불도 다시 봐야지…."

세월은 쇳덩어리도 스러지게 할 만큼 무서운 존재다. 그 세월의 줄을 타고 나타났다 사라진 표어·포스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분을 준 채소를 먹으면 회충·12지장충에 걸린다'는 표어는 언제부턴가 필요가 없게 돼버렸다. '집집마다 의례준칙 바로 알고 실천하자' '미신을 타파하고 과학생활 이룩하자' 역시 별 실감이 나지 않은 옛이야기가 됐다. 글 초반에 예로 들었던 '넘쳐나는 왜노래에 흐려가는 민족정기'야 말로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일본노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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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만화, 일본패션에 열광하는 요즘 일부 청소년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구호일 것이다. 하긴 우리 대중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각 국을 누비는 마당에 '민족정기'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벽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공연 등을 알리는 상업적 목적의 벽보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인다. 또 선거나 계몽을 위한 현수막 역시 때만 되면 거리에 나붙는다. 하지만 벽보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이콘, 벽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민초들의 절뚝거리던 삶이 나란히 걸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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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22. 18:36 길섶에서
삼국지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장수는? 얼마 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에서는 “무력으로만 봤을 땐 여포가 최고”라는 분석을 내놨다. 기사를 읽으며 생각은 과거로 달렸다. 여남은 집에 불과한 산골에서 책이라고 부를 만한 걸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글 깨우친 값을 한다고 그랬는지 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는 했다.

오죽하면 누구 집 변소에 찢어진 책이 걸려 있다는 정보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을까. 삼국지를 처음 읽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박종화의 월탄 삼국지였다. 마을 유지 집에서 그 거대한(?) 한 질의 책을 발견했을 때의 심정이야말로 산삼을 본 심마니의 그것이었다.

절대 더럽히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빌려온 책을 읽기엔 밤이 너무 짧았다.“기름 닳는다, 불 끄고 자라.”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얘기를 동료에게 하며,“요즘 애들은 삼국지 안 읽지요?”라고 묻자 뜻밖의 대답을 한다.“더 열심히 읽어요. 삼국지게임을 잘 하려면 책 읽는 건 필수랍니다.” 목적이야 어떻든 열심히 읽기만 한다면….

200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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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15. 18:2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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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미친놈이나 천둥벌거숭이가 아니고야 그 누가 재실영감네 참외밭에 들어간단 말인가. 차라리 참기름에 목욕한 뒤 아궁이에 기어들어 가거나, 부랄 밑 잘 씻고 호랑이 굴로 찾아가는 게 나을 일이지…. 일이 일어나게 된 자초지종은 그랬다. 한낮에 웃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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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에서 물장구를 치던 동네 악동들이 노는 것도 심심해지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런데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지, 기껏 낸 결론이 오늘밤에 재실영감의 참외밭을 털자는 것이었다. 참외밭으로야 동네에서 가장 군침 돌게 만드는 게 재실영감네 밭인 건 사실이다. 다른 집들은 식구들끼리 먹을 요량으로 손바닥만한 텃밭에 참외·수박을 심는 게 고작이지만. 재실영감은 내다 팔 목적으로 해마다 참외와 수박농사를 짓는다. 그러니 그 노랗게 때깔 좋은 참외에 아이들이 입맛을 다실 만도 했다. "오늘 돌격대장은 네가 해라." 두목격인 병구의 손가락이 아이의 눈앞에 멈춰 있었다. 아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게 온 것이다. 등에 땀이 흘렀다. 어떻게 쉽사리 대답한단 말인가. 재실영감은 동네의 '재실영감'이기 이전에 아이의 큰할아버지다. 즉,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형님이다. 비록 아이의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져, 왕래를 끊다시피 했다고는 하지만 족보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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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영감이 누구인가. 심술궂기는 얼마나 심술궂으며 무섭기는 얼마나 무서운지. 차라리 웃말 도깨비바위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씨름을 하자고 한다는 도깨비를 찾아가는 게 낫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병구가 아이를 지목한 것이야말로 아이와 재실영감의 그런 '특수관계' 때문이 아니겠는가. 재실영감보다는 심술영감으로 불리는 그인지라 아이들에게도 두려움과 복수심(?)이 교차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니 서리에 손자뻘 아이를 앞세우면 얼마나 재미있을 것인가. 게다가 재수가 없어 걸린다고 해도 차마 손자를 어찌하겠는가. 다른 집이 대상일 경우, 즉 겨울에 닭을 서리하거나 가을에 고구마 서리를 할 때 아이를 최전선에 세워본 적은 없었다. 진퇴양난의 국면이었다. 큰할아버지네 참외밭을 털러 갈 수도, 임무를 거절해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도 없었다. 시간은, 아이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마루 끝에 앉아 땅거미를 세던 아이는 어둡기 시작하자 힘들게 엉덩이를 떼었다. 집을 나서는 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엉기적거리기만 했다. 마을입구 정자나무 아래에는 아이들이 벌써 다 모여있다. 아이가 나타나자 솔개가 병아리를 채듯 끌어당겨 앞장세운다. 재실영감네 밭은 마을과 조금 떨어진 밤산 어귀에 있다. 그래서 재실영감은 참외가 노란  빛을 띄기 시작하면 아예 원두막에서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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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떠오르고 달빛이 질 좋은 비단처럼 매끄럽게 흐른다. "달빛이 좋은 날 서리를 하면 걸리기 십상인데…." 아이는 그동안 갈고 닦은 '서리수칙'을 되뇌어보지만 차마 내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비겁하다는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백전노장인 두목 병구가 달빛과 서리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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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무슨 심술인지 계획대로 강행할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가 재실영감네 집에서 머슴 살았는데… 그 영감은 내 원수여" 언젠가 병구가 신음처럼 뱉었던 말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병구는 그 말을 하면서 바닥에 침을 찍- 뱉었었다. 아이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자못 비장한 낯짝들을 하고 있다. 그 병사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 논둑을 행군한다. 아이의 그림자도 그 속에서 질질 끌려간다. 드디어 재실영감의 참외밭이 눈앞에 나타난다. 밭머리에 도착하자 병구가 아이 하나하나에게 임무를 맡긴다. 돌격조 세 개조에 감시조가 하나다. 아이에겐 역시 다른 아이 하나와 함께 돌격조의 임무가 떨어졌다. 일찌감치 돌격대장으로 점지 받았으니 그 중에서도 선두다. 돌격조에게 주어진 임무는 원두막 근처로 접근해서 잘 익은 참외를 자루에 넣어 오는 것이다. 저만치, 달빛을 받은 원두막이 꽤 위엄 있게 서있다. 아이는 큰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진저리 친다. 할아버지는 결코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승산 없는 도전이다. 하지만 물러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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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는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더니, 언제 준비했는지 숯을 꺼내서 얼굴은 물론 목까지 칠해준다. 모두 순식간에 검정개가 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는 같은 조에 편입된 용득이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간다. 밭 가장자리 부근에는 잘 익은 참외가 드물다. 대개 익은 참외는 원두막에서 먼 곳부터 따게 마련이다. 드디어 돌격조 아이들이 밭고랑을 기기 시작한다. 저만치 노란 참외가 달빛을 받아 언뜻언뜻 빛난다. 아이는 긴장감에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킨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웬놈들이냐!!!" 순간, 고함소리가 고요하게 내리던 달빛을 찢어발긴다. 천둥소리보다 더 크다. 재실영감의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소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원두막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올게 왔다. 아이가 벌떡 일어나 뛰기 시작한다. 자루니 뭐니 챙길 틈도 없다. 옆에 있던 용득이도 뒤를 따라 뛴다. 여기저기서 돌격조 아이들이 밭을 가로질러 달리는 게 어렴풋이 보인다. 아이의 머릿속엔 오로지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뿐이다. 밭 가장자리로 거의 나왔을 때 투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를 따라오던 용득이가 그대로 나뒹군다. 참외덩굴에 발이라도 걸린 모양이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달리면서 서리수칙을 다시 한번 되뇐다. 도망치다 넘어진 놈은 반드시 잡힌다. 구하려고 하다가는 같이 잡힌다. 망을 보던 아이들과 다른 돌격조는 이미 흔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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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쩐일이라냐? 그 양반이 참외를 다 보내고…? 그것도 이렇게 말짱한 놈들로…." 이제나저제나 떨어질 벼락을 걱정하며 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는, 할머니의 비명 같은 혼잣말에서 참외란 단어가 들리자 벌떡 일어나 문구멍으로 내다본다. 할머니는 심부름 온 사람으로부터 참외가 가득 든 함지박을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한다. 부엌에서 나오던 어머니를 보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반색을 띈다. "애, 이것 좀 봐라. 별 일도 다 있다. 재실양반이 이걸 다 보냈다." "예? 큰아버님이요?" 어머니는 할머니와 참외 함지박을 번갈아 보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방안에 있는 아이도 연신 고개를 내젓는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잡힌 용득이가 틀림없이 내 이름을 불었을 텐데. 재실할아버지가 충격으로 돌기라도 했나? 맞아죽지 않은 게 어딘데 참외까지…."  아이는 그 날 배가 터지도록 참외를 먹었다. 그리고 아이의 '서리시대'는 그날부로 마감됐다. 그 시절, 농사짓는 시골에는 흔해빠진 게 원두막이었다. 원두막은 참외나 수박을 훔쳐 가는 걸 감시하기 위해서 밭 가장자리에 만들어놓은 망루(?)를 말한다. 정자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원두막은 원두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원두는 참외,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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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박, 호박 따위를 통틀어 하는 말이다. 원두막은 굵은 기둥 4개를 세우고 서까래를 얹은 뒤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는다. 지붕 밑으로는 굵은 통나무로 틀을 만들고 판자를 깔아 누대를 만들면 완성된다.

원두막이 참외나 수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각박함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다. 원두막 주인은 동네아이들이 참외 몇 개쯤 따 가는 건 본 척하고 눈감아주기도 했다. 애들 역시 재미로 서리를 할 뿐, 참외나 수박농사를 망칠 만큼 따 가는 경우는 없었다. 남의 집 수박에 말뚝을 박는단 말도 있었지만, 그런 건 정말 엉덩이에 뿔 난 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대부분이 친척이고 이웃인 시골동네에서 그런 짓은 용납되지 않았다. 스릴을 즐기기 위한 일종의 놀이가 서리었다. 원두막은 동네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쉬는 참에 원두막에 모여 앉아 막걸리 한잔을 나누기도 했다. 들판에서 일을 하다 비가 쏟아지면 달려들어가 비를 긋기도 했다. 원두막은 사방이 뚫려있어 시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손들이 참외며 수박을 사먹으며 땀을 들이며 쉬어 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원두막을 언제부터인가 보기 쉽지 않게 되었다. 농사가 줄어드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원인은 참외·수박이 대부분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서리라는 단어도 거의 잊혀졌다. 인심이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진 지금, 서리는 도둑질과 동일어가 된지 오래다. 무엇보다도 농촌에는 참외나 수박밭에 몰래 기어 들어갈 할 아이들이 없다.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려고 원두막을 지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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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15. 18:12 길섶에서
버스 안, 옆자리의 여자는 쉬지 않고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응, 학교 마치자마자 영어학원에 가야 되고…. 그 다음은 컴퓨터학원이라니까. 학습지 선생님은 여덟시쯤 오시기로 했어. 뭐?그전? 그 시간엔 중국어학원에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선생님 오시면 잘 지켜봐 줘. 첫날이니까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보고 판단해야….”

직장에 다니는 주부인 것 같았다. 자신이 못 챙기는 아이의 공부를 언니에게 부탁하는 모양이었다. 회사에서 늦을 수밖에 없는데, 마침 학습지 선생님이 바뀌는 날이라 누가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학습지 회사에, 언니에게, 아이에게…. 그녀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어서, 시끄럽다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직장은 그만둘 수 없고, 아이의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고. 때문에 학원순례에 학습지까지 시키는 것일 게다. 아이들이란 자칫하면 게임에 빠져 숙제도 놓치기 일쑤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댁의 아이는 언제 하늘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고, 언제 친구들과 손잡고 노래라도 불러보나요? 댁의 아이는….”
20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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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8. 18:5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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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를 담당하는 후배기자가 찾아와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금세기 최후의 유림장…전통 사대부 장례 재현' 등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구미가 확 당기는 소식이었다. 그에게 출장 길에 상여행렬이 보이면 사진을 찍어다달라고 부탁했던 참이었다. 내가 쓰는 글에 필요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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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직접 찾아다니며 찍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만 전통장례, 특히 상여행렬만큼은 이 원칙을 지키기 쉽지 않았다. 시간에 쪼들리는 직장인의 애로 외에도, 요즘은 어디에서도 상여를 보기 힘들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후배는 사진 대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정보를 가져온 셈이었다. 최근 작고한 화재(華齋) 이우섭 선생의 장례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언론을 통해서 많이 보도됐지만 화재선생은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불리는 유학자다.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생전의 화재선생은 유림계의 종장 또는 큰 스승이라 불렸다. 어려서부터 부친 월헌(月軒) 이보림 선생으로부터 가학을 전수 받는 등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고, 약 40여권의 방대한 분량의 글을 저술하는 등 존경받는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알림글에는 장례식이 유월장(踰月葬 조선시대 전통적 사대부 장례형식과 절차)인 16일장으로 치러지는데, 금세기 마지막이 될 것이라 예고하고 있었다. 유월장은 초상난 달을 넘겨 치르는 장례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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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가 타계했을 때 전 유림차원의 유림장을 치르게 된다. 유림장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된다. 고인이 평소 유림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만한 덕행을 갖춰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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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학문적으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겨야한다. 현재 이런 조건을 갖춘 유림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번 장례가 마지막 유림장이 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치르는 장례식, 그리고 상여와 만장, 상두꾼 등을 규격대로 갖춰 치르는 장례행렬을 보는 것은 하늘이 돕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행사일 거란 생각이 결단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였다. 장례식이 평일에 치러진다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마침 장례일자는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엔 모임이 하나 있었지만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에 출근을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 분배를 잘 해야했다. 가기 쉽지 않은 먼길이니 달랑 장례장면만 보고 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해가 어디인가. 수로왕릉 등 유적이 즐비한 곳, 역사의 보석들이 곳곳에 묻힌 도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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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토요일 아침 여덟시였다. 서울에서 비를 맞으며 출발했는데, 김해의 하늘은 말짱했다.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시간은 빡빡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궁핍여행'을 고집하는 평소와는 달리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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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달린 곳이 김해시 장유면 덕정리 월봉서원(月峰書院). 택시비로 2만5천 원을 달라고 했다. 미터기에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액수가 찍혀있었다. 촌놈이라는 이유로 뒤집어써야하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었다. 월봉서원 입구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틈을 헤치면서 장례식이 열리는 마당으로 올라갔다. 마당에 눈처럼 하얀 상여가 놓여있었다. 상여에게도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능할까. 눈이 부셨다. 마침 붉은 천으로 둘러싼 관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 다음 카메라를 꺼냈다. 나 말고도 엄청난 카메라맨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보도진은 아닌 듯 한데, 좀 과장해서 조문객 반 카메라맨 반이라면 딱 맞을 듯 했다. 이번 유월장이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장례형식과 절차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점이었다. 굴건제복을 갖춰 입은 상주, 제자들을 보며 전통의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례뿐만 아니라 1년 뒤의 소상과 2년 뒤의 대상 등 3년상이 모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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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영구가 장지로 출발하는 절차), 견전(영구가 장지로 떠나기 전에 올리는 제), 운구(영구를 운반하는 것) 등 장례절차를 소상히 설명할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장례식은 전국에서 모인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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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고인의 문하생, 조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카메라맨들의 과열경쟁이 엄숙한 분위기를 깨트리기도 했지만, 나 역시 같은 모습으로 보일 테니 손가락질 할 수는 없었다. 장지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제를 올릴 때 터져 나온 상주들의 곡(哭)이 연신 가슴을 두드려댔다. 옛사람들은 천붕(天崩)이라 했던가. 그들의 슬픔이 보이지 않은 끈을 타고 와 가슴을 적셨다. 오래 전 할머니, 아버지를 여읜 뒤 갈무리해뒀던 눈물이 꿈틀꿈틀 살아 나왔다.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미망인의 슬픔은 그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 끝나고 상여가 출발했다. 사진에 담고 싶은 대상이 상여였기 때문에 부지런히 따라야 했다. 죽음을 그리 표현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상여행렬은 근사했다. 역설적으로, 고인이 태어나 평생 살았던 곳을 떠나는 마지막 행사가 축제처럼 근사해 보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상두꾼만 해도 족히 30명은 돼 보였다. 상주 및 복인(服人 상복을 입은 사람) 역시 100명이 넘어 보였다. 만장도 셀 수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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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위에 올라선 소리꾼의 소리가 구성졌다. 명인이라고 했다. 역시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귀에 담았다. 뭐니뭐니해도 맨 앞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붉은 색깔의 방상씨(方相氏)탈이 눈길을 잡았다. 방상씨탈은 사대부 장례행렬 맨 앞에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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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고 길을 열어나가면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 장례식에 선보인 방상씨탈은 탈 명인(名人) 이도열 고성 탈박물관 명예관장이 특별히 2점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악귀가 도망갈 만큼 무섭게 생겼다. 악귀야 도망가면 그만이겠지만, 한 여름 뙤약볕 아래 그걸 쓰고 춤을 춰야하는 '얼굴 없는 사람'의 노고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들은 바로는 하회탈 같은 예능탈은 많이 남아 있지만 방상씨탈은 장례에 사용한 뒤 태워서 묻기 때문에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월봉서원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동네를 천천히 지나서 큰길로 나갔다. 내심 바라던 시골길이 아니어서 섭섭하긴 했지만, 길이 넓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장지인 선산까지는 2㎞남짓이라고 했다. 운구 중간에 하촌마을 입구와 선영이 있는 화산정사에서 두 번의 노제를 지냈다. 김해에서 해야할 나머지 일정을 잡아놓는 바람에 하관까지는 보는 건 무리였다. 사람들 틈을 뚫고 내려오면서 아쉬움에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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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은 쇼가 아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거나 감동을 받았다고 쓸 수는 없다. 장례식에는 환호도 박수도 없다. 하지만 원래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 있고, 수천 년 우리 겨레의 곁을 지켜온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그리고 그 끈은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묶어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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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게 만든다. 그 곳에서는 슬픔도 기쁨도 하나로 이어진다. 그 자리에 선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 볼 기회를 얻게된다. 어차피 전통장례는 형식적인 요소가 많고, 형식이란 건 거추장스럽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식이란 틀 안에 있음으로서 내용이 지켜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건강한 육신이 있어야 영혼이 평안하게 깃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요즘은 시골에 가도 상여를 보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 집에서 절차를 갖춘 장례를 치르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이 사라진지도 오래다. 더구나 요즘 농어촌에는 상여를 멜 사람조차 없다. 그런 마당에 새삼  전통장례의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복원시키려 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지역축제 혹은 박물관이나 가야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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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