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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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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4. 18:5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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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서커스라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산골을 벗어나 보지 못했던 아이에게, 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마냥 신기했다. TV라는 것도 처음 보았다. 아이의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하다 못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조차도 고향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였다. 서커스 천막이 쳐진 곳은 5일장 쇠전 옆의 공터였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햇살이 노루꼬리만큼 짧아지고 허술한 광목천의 교복을 파고드는 바람에 어깨가 움츠려들 무렵이었다. 그 작은 읍에 서커스가 들어온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서울 근교를 떠돌다가 겨울을 앞두고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이동하던 어느 서커스단이, 날개 부러진 철새처럼 중간에 짐을 풀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더니 공터에 높다란 천막이 들어섰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어쩌고 하며 궁벽한 고향동네까지 들어왔던 천막극장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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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는 천막이 완성될 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트럼펫과 북을 앞세우고, 얼굴에 온갖 칠을 한 어릿광대가 거리를 돌며 광고를 하고(전문용어로 '마찌마리'라고 한다), 벽마다 각종 쇼와 공연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나붙은 다음에야 상황을 대충 짐작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서커스가 무엇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과, 아이가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가 서커스를 구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좁쌀? 아니 누에씨만큼도 없었다. 손자를 가르치겠다고 읍내까지 나온 아이의 할머니에게는 하루를 연명할 양식과 땔거리가 급급한 판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지침은 엉뚱한 곳에서 아이 쪽을 가리켰다. 읍내에서 20년 넘게 여관을 운영해온 동성여관집 아들, 박상수를 짝으로 두었던 건 여러가지로 행운이었다. 점심마다 그 풍성한 도시락반찬을 얻어먹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한 판에 또 하나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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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단 수뇌부가 묵는 곳이 바로 상수네 동성여관이었다. 하긴 두어 곳 쓰러져 가는 여인숙을 빼고, 여관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소읍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서커스단 소속이라고 다 여관에 묶는 것은 아니었다. 오야지(단장)나 총무, 그리고 '에이스급'이거나 돈이 좀 있는 단원만 여관에 묶고 나머지 하급단원이나 지원조(후견이라 불렀다)는 천막 안, 무대 아래에 숙소를 만들어서 그 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상수는 학교에 오자마자 아이에게 서커스단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 일에 열중했던지 선생님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떠들다가 둘 다 벌을 섰을 정도였다. 상수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도서관에서 읽었던 아라비안나이트보다 더 재미있었다. 서커스단은 전국 어디 건 다니지 않는 데가 없다고 했다. 더구나 서커스단에는 아이 또래의 여자 애들(상수는 무지무지 예쁘다고 했다)도 많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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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결정적으로 설레게 한 것은 상수가 귀에 대고 은밀히 한 약속이었다. "기도 보는 아저씨가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그냥 넣어주겠대. 그 아저씨 우리 집에서 묵지도 않으면서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하거든…흐흐, 난 그게 우리 누나 때문이란 걸 알지. 뭐 아무렴 어떠냐? 너도 준비하고 있어." 단원 중에 누군가 상수의 누나를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데…. 또래 중에 서커스를 구경할만한 조건을 가진 아이들은 드물었다. 고등학교 형들 중 몇이 천막 뒤쪽을 찢고 몰래 들어갔다거나, 읍내를 휩쓰는 주먹들이 총무와 적당히 사바사바해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린 중학생들에게는 실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뿐이었다. 그리고 서커스 천막 입구에는 힘깨나 쓸만하게 보이는 청년들이 지키고 있어, 고등학교 형들의 '전설'도 상당부분은 허풍일 거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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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극장조차 언감생심 구경하기 힘들었던 아이에게 서커스를 본다는 건 꿈과 같은 일이었다. 서커스는 보통 하루 3회 공연을 했다. 물론 손님이 없으면 2회로 줄거나, 대박이 터지면 4회로 늘기도 했다. 아이와 상수는 저녁공연에 맞춰 가기로 했다. 컴컴할 때 들어가야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띌 거라는 계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밖에서 보는 서커스 천막은 우람하고 당당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입구에는 얼굴에 칠을 하고 고깔모자를 쓰고 소매서부터 넓게 퍼져 올라간 옷을 입은 난쟁이 어릿광대가 연신 손님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그 옆에는 원숭이 한 마리가 어릿광대를 흉내내며 연신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아이가 넋이 빠져있는 사이 상수가 팔 소매를 잡아 끌었다. 아마 얘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둘은 누구 눈에 띌세라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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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사회자의 장황한 멘트가 이어진 다음에 서커스가 시작됐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가수의 노래가 첫 순서였다. 주인집 마루에서 언뜻언뜻 훔쳐 본, TV 속의 쇼무대처럼 무희들이 뒤에서 춤을 췄다. 이어서 나이 지긋한 사내가 마술을 선보였다. 아이에겐 쇼보다 마술이 훨씬 재미있었다. 모자에서 꽃이 나오고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마술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서커스가 시작됐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접시가 흔들리며 돌아가는  접시돌리기, 현란한 원반돌리기, 아슬아슬한 통굴리기, 비틀비틀 줄 위에서 자전거타기, 덤블링, 외줄타기…. 연속으로 이어지는 현란한 묘기에 아이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천막 안은 밝아 보이거나 들떠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 가슴마다 바윗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약간은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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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빨간 옷에 비단신을 신은 소녀가 작은 그릇을 들고 나왔다. 소녀는 그릇을 머리에 올리기도 하고, 발에 놓고 몸을 굴리기도 하고 남자의 손을 짚고 물구나무서서 온갖 동작을 펼쳤다. 활처럼 휘고 구르고…. 왜 그랬을까.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 속에 들어선 것처럼 눈이 매캐해지고 목이 칼칼해졌다. 그러더니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시작됐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소녀가 특별히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공연은 아이 또래 만한 어린 소녀들 중심으로 이뤄졌다. 매일 고된 훈련을 할 테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지만,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픔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눈물은 두 남자가 펼치는 공중그네타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흘러내렸다. 천막의 벌어진 틈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칼날을 내밀고 있었다. 바람은 가마니 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있는 관객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천막은 밖에서 보던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헤진 가마니처럼 낡아가고 있었다. 서커스에 대한 아이의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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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하는 것은 그 자체에 짙은 슬픔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한 아이가 서커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 이미 서커스는 끝없는 추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11년 일본인에 의해서 부산에서 첫 말뚝을 박았다는 서커스는, 이 땅의 놀이패였던 사당패가 몰락한 이후 최고의 볼거리로 부산부터 만주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는 서커스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70년대만 해도 소속 단원들만 250명이 넘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며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씨와 가수 정훈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스타가 배출됐다."(동춘서커스 홈페이지
http://circus.co.kr)고 그 시절의 서커스를 돌아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미 사양길의 짙은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었던 건 터져 나오는 기침처럼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밖에. 간단한 장비만으로 전국 어디나 돌아다닐 수 있는 활동사진이 판치고 시골마을에도 텔레비전 안테나가 불쑥불쑥 솟아오르던 시절, 찬바람을 맞으며 가마니가 깔린 서커스 천막 안에 앉아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럴수록 서커스단원들의 주름과 한숨은 깊어가고 어린 소녀들의 아픔도 한 여름 해바라기처럼 자꾸 커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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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27. 18:5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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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서핑이라도 하듯, 빠른 물살을 너무 즐겼던 게 탈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태어난 지 1년도 안된, 어린 멸치에 불과한 내가 그 길이 가서는 안될 길이고, 그 곳이 들어서면 못 나올 곳임을 어찌 알았으랴. 너른 바다에서 노는 것도 심심해진 어느 날 엄마 몰래 친구들과 모험을 떠났다. 이곳 저곳 구경을 하다가 빠른 밀물을 타고 들어선 곳이 남해의 지족해협이었다. 모험은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인지. 신이 난 나와 친구들은 엄마가 걱정한다는 사실도 몽땅 잊어버렸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서 있는 나무말뚝들이었다.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반갑다고 저리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인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악동들은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물살이 빨라 헤엄칠 능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거나 멸치 떼를 노리고 뒤를 쫓는 농어나 숭어 때문에 쫓기듯 들어갔을 거라고 짐작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갔을 뿐이었다. 좀 좁긴 하지만 숨바꼭질하기엔 알맞은 곳이었다. 죽방렴이라 불리는 그 곳에서 우린 정말 즐거웠다. 어부 하나가 배를 타고 와 뜰채로 우릴 떠올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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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남반부를 달리다 보면 하동을 지나, 우리나라 네 번째 섬이었다가 다리(남해대교)를 놓은 뒤 육지가 된 남해를 만날 수 있다. (뒤에 사천과 연결되는 삼천포대교도 건설) 그리고 고구마 두 개를 나란히 놓은 것처럼 생긴 남해를 또 달려, 두 번 째 고구마 가슴쯤을 지나다 보면 물살 빠르기로 유명한 지족해협을 만날 수 있다. 그 곳엔 창선면 지족리와 삼동면 지족리를 연결해주는 바다 위의 다리, 창선교가 있고 그 다리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높다란 입간판에는 죽방렴의 본고장임을 자랑하는 글귀가 써 있다. '지족해협 청정해역의 명품-원시어업 남해 죽방렴멸치'. 자랑스레 '현존하는 가장 원시형태의 어로포획방식'이라 부르는 죽방렴. 그런데 죽방렴이야 말로 가장 첨단어업이었고,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원시적 어로라면 물고기를 손으로 잡거나 작살로 찍어내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죽방렴은 원시어업이라기보다는 '자연친화' 어업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돌로 담을 쌓아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잡는 서해의 '독살'과 함께,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가장 많이 투영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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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렴은 대나무를 발처럼 엮어(簾) 고기를 잡는다(防)는 뜻으로 '대나무 어살' 또는 '대나무 어사리'라고도 불렀다.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빠르며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에 설치하게 된다. 좁은 물목의 조류가 흘러 들어오는 쪽을 향해 길이 10미터 정도의 참나무 말목을 V자 모양으로 벌려 일정하게 박고 말목과 말목 사이에 대나무를 발처럼 엮어서 울타리를 만든다. 그리고 통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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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물을 엮어 넣으면 밀물 때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는 이 미로로 된 함정(임통, 불통)에 빠져 썰물 때가 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물고기는 후진을 할 줄 모르니 들어오는 길에 생각이 바뀐다 해도 다시 나갈 방법은 없다. 임통은 밀물 때는 열리고 썰물 때는 닫히게 된다. 죽방렴을 설치한 주인들은 하루 두세 차례 물때에 맞춰 후릿그물이나 뜰채로 물고기들은 건져 올린다. 고기잡이는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며, 5월에서 8월 사이에 멸치와 갈치를 비롯해 학꽁치·장어·도다리·농어·감성돔·숭어·보리새우 등이 주로 잡힌다. 고기잡이를 하지 않는 1~2월에는 임통만 빼서 말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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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잡힌 물고기 중에는 멸치가 80% 정도를 차지한다.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스트레스를 덜 받아 맛이 좋다고 한다. 또 잡는 과정에서 상처가 나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는다. '죽방멸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물로 잡은 멸치보다 최소 두 배에서 수십 배의 가격으로 팔려나간다. 잡은 멸치는 회로도 먹지만 대부분은 즉시 육지로 운반해서 솥에 삶아 말린다. 죽방렴 어업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자연친화적 어로법이다. 바다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고기는 맞아들이고 지나가는 건 갈 길을 가도록 놓아둔다. 놓친 물고기를 아쉬워하거나 더 많이 잡겠다고 아등바등 하는 법이 없다. 바다 밑까지 긁는 기계식 어로처럼 무지비한 싹쓸이를 꿈꾸지 않는다. 자연도 살리고 인간도 살자는 상생의 어로이다. 죽방렴의 혜택을 받는 건 사람뿐이 아니다. 갈매기란 놈도 지친 날개를 접어두고 참나무 말목에 앉았다가 은빛 멸치라도 한 두 마리 튀어 오르면 잽싸게 낚아채 배를 채운다. 잡히는 물고기가 많지 않더라도 매일 거둬들일 것이 있으니 어부의 마음은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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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방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부터라고도 하고 5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도 하는데 문헌상에는 조선조(1496년)부터 나타난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죽방렴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큰 조수간만의 차와 빠른 물살이 필수조건이며 수심 역시 적당해야 한다.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는 지족해협에는 20통이 넘는 죽방렴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남해군 창전면과 사천시 삼천포 사이에 있는 삼천포해협에 원형이 살아있는 죽방렴이 있다. 여수·완도 등에도 몇 통이 있었으나 철거되었다고 한다. 목포에는 해양유물전시관에 보관해놓았다. 죽방렴이 아직은 거액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는 것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는 어로법의 발달, 연안의 어업자원 감소, 관리하기 위한 노동력의 부재 등은 죽방렴을 석양 아래 세워놓았다. 아마도 새로운 죽방렴이 설치되는 것 자체가 끊길 날이 그리 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임통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죽방렴의 이름을, 가슴에서마저 지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취재를 하면서] 남해 지족해협은 석양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석양 속에 꿋꿋이 서 있는 죽방렴들과 그 곁을 지나는 작은 배들은 마치 꿈속인 양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지족해협 죽방렴을 남해 12경 중 4경으로 꼽습니다. 제가 지족해협을 찾았을 때는 장마철도 아닌데 날이 계속 흐렸습니다. 그래서 석양풍경을 잡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하늘에게 무언가 못 마땅하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반성했습니다. 훗날 다시 찾을 기회가 있다면 좋은 사진 많이 찍어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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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20. 19:12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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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며칠 째 애가 달아있었다. 방학 때 내려왔던, 서울 사는 장부자네 손자가 신었던 운동화까지는 언감생심 바래본 적도 없었다. 백설기처럼 빛나는 흰고무신이 수시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정말 대책 없는 열병이었다. 지금까지 검은고무신으로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온 아이를 들쑤시고 있는, 흰고무신에 대한 열망은 몽유병이라도 든 것처럼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날마다 어머니를 졸라댔지만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였다. 아이들이 흰고무신을 신는다는 건 어른들이 입는 흰두루마기를 입는다는 것과 똑같았다. 아버지도 일을 할 때는 검은 고무신을 신다가, 나들이 할 때나 선반에 올려두었던 흰고무신을 꺼내 신고 나가지 않던가. 그러니 들로 산으로 천방지축 쏘다니는 아이들에게 흰고무신이란 개발에 편자를 대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흰고무신이 훨씬 비싸다는 점도 문제지만 그걸 날마다 누가 닦아댈 것인가. 금세 검은고무신과 구별이 안 될 만큼 더러워질 건 너무도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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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는 아이에게 던지는 어머니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지금 신은 것도 3년은 더 신겠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소 몰고 나가 풀이나 뜯겨 와라." 하지만 이미 열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그 말이 들릴 턱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이는 다른 아이들을 따돌리고 개울가 으슥한 곳에 앉는다. 몇 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돌로 신발의 옆구리 쪽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검은 고무신이 처단해야될 악마라도 되는 양, 마구 문질러댄다. 처음엔 질기게 저항하던 신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구멍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날 저녁, 아이의 집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에 이어 생고무신처럼 질긴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일부러 신발에 낸 구멍을 어른들이 못 알아차릴 리 없었던 것이다. 신발이 떨어지면 기우고, 그도 안되면 장에 나가 때워서라도 신던 시절에 일부러 구멍을 내다니. 결국 아이는 흰고무신은 구경도 못하고 구멍난 검은고무신으로 그 여름을 나야했다. 물론 여름이 지나고 추석이 되어 얻어 신은 새 고무신도 검정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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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가 되어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고 운동화라는 걸 너도나도 신을 수 있기 전까지 고무신은 대안을 찾기 어려운 '국민신발'이었다. 사실 고무신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땅의 백성들에게는 뒤로 자빠질 만큼 기가 막힌 물건이었을 것이다. 가죽이나 비단신이라도 신을 수 있었던 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하면, 민초들이야 기껏 짚신이나 나막신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을뿐더러 어느 정도 방한까지(짚신에 비해서) 가능한 신발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고맙고 신기했으랴. 그런 고무신이 이 땅에 첫선을 보인 게 1920년대였다고 하던가. 역설적이긴 하지만 고무신은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데도 한몫 했을 것 같다. 그 좋은 걸 양반이라고 외면하지는 않았을 테니, 발만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을 터. 어려웠던 시절, 고무신 한 켤레 값은 결코 만만치 안았다. 그래서 신발코에 구멍이 뚫리고 밑창이 너덜거리도록 기워서라도 신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떨어지고 찢어져서 못 신을 정도가 되면 장날에 들고 나가 때워다가 또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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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을 만드는 회사도 참 많았다. 고무신은 폐타이어가 주원료였는데, 생산의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왕자표, 말표, 범표, 타이어표, 진짜 다이아 등 헤아리기 힘들만큼 다양한 상표가 쏟아져 나왔다. 흰고무신은 표백제를 첨가해서 만들었는데 그만큼 검은고무신보다 비쌌고 고급 취급을 받았다. 농촌에서는 외출용으로나 쓸 정도였다. 고무신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쓸모 있는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고무신 한쪽을 접어 다른 쪽에 구겨 넣고 모래밭에서 밀고 나가면 그게 자동차였다. 개미나 딱정벌레를 태워 냇물에 띄우면 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급류를 타고 신발이 떠내려가기라도 하면 울며불며 쫓아 내려갔다. 내나 둠벙(물웅덩이)에 신발을 잃어버린 집의 아이는, '칠칠치 못한 놈'이 되어 그 날 저녁  밥도 굶은 채 한바탕 경을 치르기도 했다. 고무신을 이용한 아이들의 놀이는 그밖에도 다양했다. 냇가에서 놀다가 물고기를 잡으면 신발 안에 보관했고, 꽃 위에 앉아있는 벌을 신발로 덮쳐서 뱅뱅 돌리기도 했다. 신발을 던지는 놀이인 '신발치기'라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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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틀에서 문수(사이즈)만 다르게 찍어내는 고무신이야, 따로 멋을 내서 만드는 것도 아니니 네 것 내 것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웃지 못할 일들도 참 많이 생겼다. 어른들은 잔칫집이나 초상집에 가려면 신발에 내 것이라는 표시부터 했다. 불에 달군 송곳으로 신발코 쪽에 작은 구멍을 내거나, 실로 꿰매 X자를 만들기도 했다. 새 고무신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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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고무신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색깔이 똑같아서 바뀌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양심불량'인 사람들은 일부러 헌 고무신을 신고 가서 새 고무신을 신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신발장 앞에서 내신이니 네 신이니 싸우다가 선생님에 불려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새로운 것을 갖기 힘들었던 시골아이들은 새 신발을 사거나 새 옷이라도 하나 얻어 입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고, 자랑을 못해 안달이었다. 다른 애들이 있을 때만 신발을 신고 혼자 있을 때는 벗어서 들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급하게 달릴 땐 헐떡거리다 벗겨지기 일쑤여서 벗어서 손에 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 달리기도 했다.

이젠 어디에서도 고무신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절에나 가야 고무신을 신은 스님네들을 만날까. 그나마 국내에서는 생산하는 곳이 없어서 중국산이 들어온다고 한다. 온 천지에 편하고 예쁜 신발이 넘쳐나는 마당에 고무신을 새삼 그리워할 일이야 뭐 있을까. 하지만 굿거리 장단처럼, 비오는 날 찌걱거리며 다닐 때의 그 묘하던 느낌, 가락. 송사리·붕어를 잡는다고 작은 냇물을 막고 고무신으로 물을 퍼낼 때의 그 신나던 손놀림이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머니가 호박잎 넣고 끓여주시던 된장국처럼, 베적삼 훌훌 걷어붙이고 고무신 신고 가르마처럼 길게 뻗은 논둑 길을 걷고싶다는 생각은 영 떨쳐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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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13. 13:39 사라져가는 것들

꼭 필요한 만큼만 밝혀주던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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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들기름 콩기를 더 많이 넣지 않아서/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넘치면 나를 태우고/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내 마음의 등잔이여/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거뜬히 읽을 수 있는/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도종환의 '등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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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전기라는 존재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였다. 아이는 훗날 도시인으로 편입된 뒤에도 그 날의 충격을 영 떨쳐내지 못하고 살았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올렸을 때, 팟!!! 하고 눈을 찌를 듯 달려들던 불빛. 그건 쇠망치로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아니, 어쩌면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순간이었다. 전기를 만나기 전까지 밤, 즉 어둠은 딱지를 몰래 숨겨둔 뒷산의 작은 굴처럼 적당한 은밀함이 있었다. 그래서 땅거미가 물고 와 마당을 지나 토방, 마루를 거쳐 방으로 입장하는 밤은 새아씨의 뒷자태처럼 매일매일 설렘을 동반했다. 밤은 좀 너른 품으로 맞는 게 제격이었다. 어둠 속에서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설렝이' 한 두 마리쯤은 받아들여 같은 잠자리를 쓸 줄 알아야 하고, 개복숭아에 들어있는 벌레쯤은 영양식으로 알고 그대로 삼켜야했다. 아이는 전기의 충격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런 시절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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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불이란 게 그랬다. 아무리 심지를 돋궈도 어느 정도 이상의 빛을 내어주진 않았다. 그을음만 신경질적으로 뿜어낼 뿐이었다. 등잔이 특별히 인색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과도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걸 몸짓으로 가르쳤다. 인간에게는 어쩌면 그 정도의 빛이 삶을 영위하는데 적절한 것인지도 몰랐다. 인위적으로 내는 빛은 등잔불만큼이어야 밤하늘의 별도 제 빛으로 반짝이고, 달도 아름답게 빛나고, 반딧불도 소중해지는 것이었을 게다. 어쩌면 전기가 발명된 뒤로 인간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것, 그걸 꿈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어머니는 그 침침한(전깃불을 만나기 전까지는 침침함이라는 말을 잘 몰랐다.) 불빛 아래서 바느질을 했다. 어머니가 그 불빛 아래서 꿰맨 옷을 보면, 재봉틀로 바느질한 것처럼 한 땀 한 땀 간격이 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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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초저녁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되었다는' 옛날 이야기처럼, 어머니도 돌이 되어 굳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불러보고는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꿈꿨냐? 오줌 누고 어여 자라" 한 마디를 남기고 또 바느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바느질로 살아온 어머니는 훗날 고백했다. "전깃불이 들어온 뒤로는 당최 바늘이 헛먹어서 고생했지 않겠냐?" 아이도 아이의 형도 친구들도 등잔불빛 아래서 숙제를 하고 연도 만들고 딱지왕 용식이에게 복수전을 벌일 새 딱지도 접었다. 그래도 공책 안의 글자는 제법 반듯했고 연도 하늘을 펄펄 날았다. 그렇지만 아이는 '인간은 눈만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이들이 밤에 자지 않고 오래 놀고있으면, 할머니는 걱정이 백태처럼 낀 목소리로 일렀다. "지름(기름=석유) 닳는다. 어여 불끄고 자라." 그 말은 "배 꺼진다. 어여 이불 속에 들어가 자라."라는 말과 가끔 교대됐지만 아이는 그 두 가지 말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등잔보다 조금 밝은 것은 남포등이었다. 밝기로야 촛불도 등잔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제사를 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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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들었다. 아이의 집에도 남포등이 하나 있었지만 그것 역시 아무 때나 켜지는 않았다. 늦게까지 마당에서 일을 할 때나,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났을 때만 내걸었다. 아버지가 올 때가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으면, 할머니는 꼭꼭 숨겨두었던 병을 꺼내 남포에 석유를 담았다. 불을 켜고 처마 밑에 매달면서 주문인지 기원인지를 쉬지 않고 외웠다. 그래야 길 떠난 아들이 그 불빛을 보고, 자갈길에 넘어지지 않고 냇물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는 듯 했다.

전기가 안 들어가는 곳이 거의 없는 지금, 등잔을 보기란 쉽지 않다. 사냥꾼의 총에 넘어진 짐승처럼, 잘 박제된 등잔들이 박물관이나 카페의 장식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희미한 불빛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가슴속의 등잔은 성인이 된 아이에게 항상 말한다. "두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남포를 꺼내 닦던 할머니와, 할머니가 밝혀준 불빛으로 무사히 돌아오시던 아버지…. 할머니도 남포도 아버지도 세월 속으로 걸어들어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어떤 바람도 가슴속의 불빛까지 끌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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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아직까지 등잔을 켜고 사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까닭이겠지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은 분명히 있습니다. 등잔을 구하려고 벼룩시장을 뒤졌습니다. 등잔+등잔대 가격이 만만치 않더군요. 이제 물량이 거의 나오지 않는 까닭이겠지요.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비교적 싼 등잔만 샀습니다. 남포를 하나 사려했는데 등잔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미제라 비싸고…" 어쩌고 하는데, 아아!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남포 하나 만들 기술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잔과 남포를 찾아 좀 더 헤매겠습니다. 찾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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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6. 17:19 사라져가는 것들

줄 위의 재담에 웃고 울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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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텅 비었기 때문에 더욱 가득 차 보인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높다랗게 물러선 하늘은 돌이라도 던지면 쨍! 하고 금이 갈 것 같다. 추수가 끝나면서 한숨 돌리나 싶었던 장부자네 너른 마당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새통이다. 장부자가 손녀딸 순심이보다 더 아끼고 좋아한다는 놀이마당이 벌어지는 날이다. 그 중에서도 줄타기는 행사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줄타기는 준비하는 과정부터 지켜볼 만 하다. 우선 나무 네 개를 두개씩 X자로 묶는다. 이를 작수목이라 한다. 작수목의 머리를 안으로 향하게 다리를 벌려 뉘어놓고 마당 양쪽에 박아놓은 말뚝에 줄을 맨다. 그런 다음 작수목을 세워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한다. 줄은 질긴 삼(麻)을 삶아 말려 세 가닥으로 꼰 굵은 동아줄이 쓰인다.

아침부터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앉은 아이들은 꼼짝 않고 준비하는 과정을 구경한다. 고추잠자리가 손에 잡힐 듯 마당 위를 유영하건만 어느 녀석 하나 눈을 돌리지 않는다. 작업이 다 끝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무렵이 되면 아이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거린다. 이제부터 신나는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놀이패를 불러 흥겹게 한마당을 노는 것이 장부자의 연례행사다.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드나들 수 없을 만큼 큰 지주인 장부자가 소작인들이나 동네사람을 위해 베푸는 선심이었다.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장부자가 부른 단골 놀이패가 마을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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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는 시골에서는 보기 쉽지않은 구경거리라, 자리보전하고 있는 노인들까지 지팡이를 들고나선다. 어찌 동네사람 뿐이랴. 장부자네 줄타기는 소문이 제법 나서 근동 몇 개 동리의 사람들까지 몰려든다. 조용하던 시골마을은 몰려든 사람들로 저잣거리처럼 북적거린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로 준비가 끝나면 고사를 지낸다. 다음으로 장구·해금·피리 등을 부는 악사(삼현육각잡이)들이 줄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연주를 하고 줄광대가 음악에 맞춰 줄에 오른다. 한 손에 쥘부채를 쥔 줄광대는 작수목에 오르자마자 쉬이~ 하는 소리로 연주를 중단시키고 관중을 둘러본 뒤 재담을 시작한다. 줄 아래에 있는 어릿광대가 추임새를 넣고 재담을 받으면서 마당에는 서서히 열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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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장생  :  휴~ 저기서 보기엔 얼마 안 되는 거 같아 마음 푹 놓고 왔다 죽을 똥 쌀 뻔했네.
내 이번엔 네년이 남의 집 서방하고 붙어먹다 들켜 허겁지겁 도망가는 걸음을 뵈줄테니 한번 볼테냐?
하고는 아낙네들 치맛자락을 잡듯 도포자락을 잡고 잰걸음으로 쪼르르 달려 맞은편 끝에 가 선다.
공길 :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 똑 떨어져 뒤질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장생 : 내 이제 신나게 한판 놀아 볼 것인데, 이 모습을 보면 처녀 할미 할 것 없이 정신이 팔려 사내가 아랫도리를 훔쳐도 모르니 네년도 아랫도리 단속 단단히 하고 보거라.
공길 얼른 아래춤을 손으로 가린다.
구경꾼들 웃는다.
장생 성큼성큼 줄 위를 걸어 가운데로 와 허궁제비(줄을 튕겨 다리사이로 앉았다 오르기)를 한다.
공길 : 아이고 이놈아, 니 다리사이 두 동네가 한 동네 되것다. 
장생 : (멈추더니) 아이고, 이년아. 두 동네고 한 동네고 간에 똥꼬가 저릿저릿한 것이 오줌이 마려워 못 놀것다. 내 오줌이나 한번 싸고 계속 놀련다.(바지춤을 풀고 내릴 시늉한다) (후략)
[영화 '왕의 남자' 도입부 대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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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광대가 줄 위에서 하는 동작은 다양하다. 걷는 것은 기본이며 뒤로 걸어가기, 한 발로 뛰기, 걸터앉고 드러눕기…. 때로는 재주를 넘고 떨어지는 척 해서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또 중타령, 새타령, 왈자타령 등 갖가지 노래를 곁들이거나 파계승이나 타락한 양반을 풍자한 이야기를 풀어내어 관객을 웃긴다. 또 바보짓이나 화장하는 모습들을 흉내내기도 한다. 놀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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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진 구경꾼들은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한다. 오줌보가 탱탱해져도 발을 동동 굴러가면서 자리를 지킨다. 줄광대의 재담에 배꼽을 잡기도 하고, 떨어지는 흉내라도 내면 가슴을 쓸어 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줄타기 마당은 자지러지는 웃음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이 어우러지며 고비를 넘는다.

줄타기는 원래 서역(西域 중국의 서쪽, 현재의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수·당 시대에 성행하였고, 한반도에는 신라 때 전래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사당이라는 떠돌이 예능인이 혼인·생일·환갑잔치 등에 불려가 줄타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들어와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특별한 행사 때 공연되거나 보존단체를 통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긴 지금은 줄타기가 어울리는 시대는 아닐 것이다. 볼거리가 넘쳐나니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 힘든 수련과정을 견딜만한 지원자도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이긴 했지만, 2005년 말에 개봉된 영화 '왕의 남자'가 히트한 것을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세월을 따라 줄타기가 무대 뒷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지만 줄 위에서 흘렸던 광대들의 땀과 눈물이야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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