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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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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8. 18:5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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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를 담당하는 후배기자가 찾아와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금세기 최후의 유림장…전통 사대부 장례 재현' 등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구미가 확 당기는 소식이었다. 그에게 출장 길에 상여행렬이 보이면 사진을 찍어다달라고 부탁했던 참이었다. 내가 쓰는 글에 필요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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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직접 찾아다니며 찍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만 전통장례, 특히 상여행렬만큼은 이 원칙을 지키기 쉽지 않았다. 시간에 쪼들리는 직장인의 애로 외에도, 요즘은 어디에서도 상여를 보기 힘들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후배는 사진 대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정보를 가져온 셈이었다. 최근 작고한 화재(華齋) 이우섭 선생의 장례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언론을 통해서 많이 보도됐지만 화재선생은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불리는 유학자다.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생전의 화재선생은 유림계의 종장 또는 큰 스승이라 불렸다. 어려서부터 부친 월헌(月軒) 이보림 선생으로부터 가학을 전수 받는 등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고, 약 40여권의 방대한 분량의 글을 저술하는 등 존경받는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알림글에는 장례식이 유월장(踰月葬 조선시대 전통적 사대부 장례형식과 절차)인 16일장으로 치러지는데, 금세기 마지막이 될 것이라 예고하고 있었다. 유월장은 초상난 달을 넘겨 치르는 장례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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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가 타계했을 때 전 유림차원의 유림장을 치르게 된다. 유림장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된다. 고인이 평소 유림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만한 덕행을 갖춰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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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학문적으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겨야한다. 현재 이런 조건을 갖춘 유림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번 장례가 마지막 유림장이 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치르는 장례식, 그리고 상여와 만장, 상두꾼 등을 규격대로 갖춰 치르는 장례행렬을 보는 것은 하늘이 돕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행사일 거란 생각이 결단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였다. 장례식이 평일에 치러진다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마침 장례일자는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엔 모임이 하나 있었지만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에 출근을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 분배를 잘 해야했다. 가기 쉽지 않은 먼길이니 달랑 장례장면만 보고 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해가 어디인가. 수로왕릉 등 유적이 즐비한 곳, 역사의 보석들이 곳곳에 묻힌 도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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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토요일 아침 여덟시였다. 서울에서 비를 맞으며 출발했는데, 김해의 하늘은 말짱했다.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시간은 빡빡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궁핍여행'을 고집하는 평소와는 달리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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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달린 곳이 김해시 장유면 덕정리 월봉서원(月峰書院). 택시비로 2만5천 원을 달라고 했다. 미터기에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액수가 찍혀있었다. 촌놈이라는 이유로 뒤집어써야하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었다. 월봉서원 입구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틈을 헤치면서 장례식이 열리는 마당으로 올라갔다. 마당에 눈처럼 하얀 상여가 놓여있었다. 상여에게도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능할까. 눈이 부셨다. 마침 붉은 천으로 둘러싼 관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 다음 카메라를 꺼냈다. 나 말고도 엄청난 카메라맨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보도진은 아닌 듯 한데, 좀 과장해서 조문객 반 카메라맨 반이라면 딱 맞을 듯 했다. 이번 유월장이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장례형식과 절차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점이었다. 굴건제복을 갖춰 입은 상주, 제자들을 보며 전통의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례뿐만 아니라 1년 뒤의 소상과 2년 뒤의 대상 등 3년상이 모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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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영구가 장지로 출발하는 절차), 견전(영구가 장지로 떠나기 전에 올리는 제), 운구(영구를 운반하는 것) 등 장례절차를 소상히 설명할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장례식은 전국에서 모인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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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고인의 문하생, 조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카메라맨들의 과열경쟁이 엄숙한 분위기를 깨트리기도 했지만, 나 역시 같은 모습으로 보일 테니 손가락질 할 수는 없었다. 장지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제를 올릴 때 터져 나온 상주들의 곡(哭)이 연신 가슴을 두드려댔다. 옛사람들은 천붕(天崩)이라 했던가. 그들의 슬픔이 보이지 않은 끈을 타고 와 가슴을 적셨다. 오래 전 할머니, 아버지를 여읜 뒤 갈무리해뒀던 눈물이 꿈틀꿈틀 살아 나왔다.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미망인의 슬픔은 그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 끝나고 상여가 출발했다. 사진에 담고 싶은 대상이 상여였기 때문에 부지런히 따라야 했다. 죽음을 그리 표현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상여행렬은 근사했다. 역설적으로, 고인이 태어나 평생 살았던 곳을 떠나는 마지막 행사가 축제처럼 근사해 보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상두꾼만 해도 족히 30명은 돼 보였다. 상주 및 복인(服人 상복을 입은 사람) 역시 100명이 넘어 보였다. 만장도 셀 수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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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위에 올라선 소리꾼의 소리가 구성졌다. 명인이라고 했다. 역시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귀에 담았다. 뭐니뭐니해도 맨 앞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붉은 색깔의 방상씨(方相氏)탈이 눈길을 잡았다. 방상씨탈은 사대부 장례행렬 맨 앞에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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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고 길을 열어나가면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 장례식에 선보인 방상씨탈은 탈 명인(名人) 이도열 고성 탈박물관 명예관장이 특별히 2점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악귀가 도망갈 만큼 무섭게 생겼다. 악귀야 도망가면 그만이겠지만, 한 여름 뙤약볕 아래 그걸 쓰고 춤을 춰야하는 '얼굴 없는 사람'의 노고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들은 바로는 하회탈 같은 예능탈은 많이 남아 있지만 방상씨탈은 장례에 사용한 뒤 태워서 묻기 때문에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월봉서원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동네를 천천히 지나서 큰길로 나갔다. 내심 바라던 시골길이 아니어서 섭섭하긴 했지만, 길이 넓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장지인 선산까지는 2㎞남짓이라고 했다. 운구 중간에 하촌마을 입구와 선영이 있는 화산정사에서 두 번의 노제를 지냈다. 김해에서 해야할 나머지 일정을 잡아놓는 바람에 하관까지는 보는 건 무리였다. 사람들 틈을 뚫고 내려오면서 아쉬움에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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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은 쇼가 아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거나 감동을 받았다고 쓸 수는 없다. 장례식에는 환호도 박수도 없다. 하지만 원래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 있고, 수천 년 우리 겨레의 곁을 지켜온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그리고 그 끈은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묶어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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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게 만든다. 그 곳에서는 슬픔도 기쁨도 하나로 이어진다. 그 자리에 선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 볼 기회를 얻게된다. 어차피 전통장례는 형식적인 요소가 많고, 형식이란 건 거추장스럽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식이란 틀 안에 있음으로서 내용이 지켜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건강한 육신이 있어야 영혼이 평안하게 깃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요즘은 시골에 가도 상여를 보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 집에서 절차를 갖춘 장례를 치르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이 사라진지도 오래다. 더구나 요즘 농어촌에는 상여를 멜 사람조차 없다. 그런 마당에 새삼  전통장례의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복원시키려 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지역축제 혹은 박물관이나 가야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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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1. 19:0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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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뭔 일이라냐?" 방금 뽑아온 콩대를 마당에 널던 할머니가, 입 벌린 까치독사라도 본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마루에 엎드려서 숙제를 하던 아이가 덩달아 놀라 벌떡 일어난다. 주변을 두릿거려 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마당가에서 한가롭게 익어 가는 감과 대추 뿐, 특별한 게 없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우물가에서 허드레 양동이를 주워든 할머니는 마당을 가로질러 달음질친다. 할머니를 뒤를 따라서 시선을 옮기던 아이가 억! 하고 비명을 삼킨다. 마을 건너 밤산 어귀 외딴집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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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에 불을 지르거나 덤불을 태울 때의 연기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다면 불이 난 게 틀림없다. 밤산 외딴집이라면 용구네 집이 아닌가. 아이는 후닥닥 마루를 내려와 꿰지 못한 신발을 두 손에 든 채 할머니를 따라서 내달린다. 할머니와 아이뿐이 아니다. 양동이든 바가지든 그릇 하나씩을 손에 든 동네사람들이 용구네집을 향해서 달리고 있다. 초가을 오후의 황금 같은 햇살이 뒤를 따라 달음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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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용구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불길이 집을 꿀꺽 삼켜버린 뒤였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온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퍼다 끼얹어보지만 불길은 혀를 날름거리며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이라 사람들이 늦게 온 탓도 있지만, 나무로 엉성하게 지은 오두막은 불길 앞에 너무나 무기력했다. 화마가 집 한 채를 통째로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그 순간, 한 여자가 구를 듯 달려와 불타는 집으로 달려들어간다. 발빠른 동네 사람 하나가 쫓아가 간신히 잡는다. 용구 엄마다. 남의 집 밭일이라도 나갔다가 연기를 보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비명은 소름이라도 돋을 듯 날카롭다. "아악! 용구 좀 꺼내줘요. 내 새끼 용구가 저 안에 있단 말여!" 처절한 울부짖음이다. 그제야 집안에 거동을 못하는 아이가 있다는 생각이 난 동네사람들이 우왕좌왕 뛰어다녀 보지만 누구도 악마처럼 타오르고 있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불길로 들어가려다 여러 번 좌절당한 여자는 결국 거품을 물고 혼절하고 만다. 사람들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눈가를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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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구는 소위 앉은뱅이라고 불리는 하반신을 못쓰는 아이다. 태어날 땐 멀쩡했는데, 세 살 나던 해 크게 앓은 뒤 그리 되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돈을 벌러 집을 떠난 용구아버지는 몇 해 째 소식이 없었다. 용구엄마가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서 얻은 양식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언젠가 혼자 있던 아이가 방문을 열고 마루로 기어 나왔다가 토방에 떨어져 죽을 뻔한 사건이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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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용구엄마는 일을 나갈 때마다 방문 밖에서 빗장을 걸고 간다. 그게 탈이었던 모양이다. 심심했던 아이가, 등잔 옆에 놓아둔 성냥을 가지고 불장난을 하다가 불꽃이 옮겨 붙었을 것이다. 방안에서만 살던 아이, 용구는 그렇게 친구 하나 사귀어보지 못하고 떠났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탄생한 도구가 되레 어린 생명 하나를 빼앗아간 셈이었다. 그 시절 그런 비극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한참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에게 성냥은 최고의 보물이었다. 조금 큰 아이들은 호주머니에 몰래 성냥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어른들이 성화를 부려도 소용이 없었다. 늦봄이면 보리서리, 밀서리에 필수품이었고, 겨울이면 모닥불을 놓거나 쥐불놀이를 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다가 불을 내기 일쑤였다. 논둑에 놓은 불이 산불이 되기도 했고, 불장난을 하다가 집 한 채를 홀딱 태우기도 했다.

성냥이 그렇게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생활혁명을 가져왔다고 할 만큼 편리한 도구였다. 부싯돌이 아주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했다고 하지만, 편리성으로야 어찌 성냥의 발치나 따라갈 수 있었으랴. 특히 불씨를 누대로 보존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이 땅의 여인네들에게 성냥의 등장은 말 그대로 복음이었을 것이다. 성냥의 발명은 인류에게 진정한 의미의 불을 가져다 준 셈이었다. 그 전까지는 불이 필요하면 나뭇가지를 팔 아프게 비벼대거나 부싯돌을 여러 번 두드려야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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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까. 오죽했으면 조선시대에는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를 내쫓기까지 했을까? 최초의 성냥은 1827년 영국의 J.워커가 염소산칼륨과 황화안티몬을 발화연소제로 써서 만든 마찰성냥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이란 사람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 김홍집과 동행해서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바로 성냥의 혜택을 볼 수 있었던 건 아닌 듯 하다. 한일합방 후 일제가 인천에 '조선인촌(朝鮮燐寸)'이라는 성냥공장을 세우고 대량 생산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일반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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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인천 외에도 수원·군산·부산 등에 잇따라 성냥공장을 세웠는데, 조선사람들에게는 만드는 방법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시장을 독점하고, 조선인들에게는 쌀 한 되를 가져가야 성냥 한 통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게 팔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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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일종의 착취였던 셈이다. 아무리 비싸도 이미 그 편리함의 단맛을 알아버린 이상, 성냥은 어느 집을 막론하고 필수품이었다. 전기가 집집마다 들어오기 전인 1970년대까지도 등잔불을 켜거나 밥을 짓기 위해 성냥이 반드시 필요했으며, 담배 역시 성냥이 없으면 피우기 힘들었다. 그래서 양식이나 땔감 못지 않게 귀한 대접을 받은 게 성냥이었다. 성냥공장들은 한 때 최고의 호황산업으로 각광받았다. 만들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니 그보다 좋은 장사가 어디 있으랴. 그래서 지역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게 성냥공장이었다. 유엔·아리랑·향로·기린표·새표·복표·야자수·대한·비사표·제비표·두꺼비표·토끼표…. 미처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성냥의 종류도 많았다. 어느 집이든 부뚜막 위나 등잔 아래, 재떨이 근처에는 성냥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선반 위에도 몇 통의 성냥은 비축해둬야 안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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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월은 피붙이처럼 가까웠던 것도 내칠 만큼 비정한 것이다. 성냥은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구경하기 쉽지 않은 물건이 되어 버렸다. 굳이 위상이 결정적으로 추락하게 된 시기를 따지자면 1980년대 후반부터였을 것이다. 어느 골짜기라도 전기가 들어가고, 집집마다 전기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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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에 가스레인지에 전자레인지까지 성냥이 없어도 가동될 수 있는 도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찬밥신세가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순간 편리하고 값싼 1회용 라이터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부터는 담뱃불을 붙일 때 쓰는 일조차 뜸해졌다. 그나마 한 때는 판촉용 상품으로 명맥을 유지했었는데, 중국산 성냥이 들어오면서부터 실낱같던 숨통마저 끊어놓았다. 마당엔 아름드리 미루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아침저녁으로 수백 명의 여공들이 드나들던 성냥공장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그렇게 '위험한 물건' 성냥이 사라져갔으니 성냥 때문에 희생된 용구 같은 아이는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세상을 뜨고 있다. 어쩌면 성냥과 함께 살던 시절이 그나마 안전했던 건 아닌지…. 성냥이 다시 서민들의 부엌이나 호주머니로 돌아올 날이야 있을 수 없겠지만, 성냥과 함께 했던 시절의 기억은 먼 훗날까지 아련하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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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25. 19:3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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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시골 마을에 영화라는 '괴물'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가을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햇살이 쏟아져 내려 자글거리는 한낮이었다. 허름한 트럭 한대가 먼지를 피워 올리며 마을 앞 신작로를 느리게 달렸다. 잡음이 더 많은 스피커에서는, 뾰족한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 나와 온 동네를 달음질 쳤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면민 여러분… 방금 개봉된 따끈따끈한 영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로 오늘 밤 여러분을 모시고자…" 박노식, 장동휘, 허장강이 출연하는 '당대 최고'의 영화가 저녁에 상영될 예정이니 많이 왕림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영화를 보지 못하면 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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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거란 듯, 약간의 엄포까지 묻어 있었다. 트럭이 마을 앞을  지나간 순간부터 동네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맨 먼저, 열다섯의 나이에 가출을 단행한 뒤 서울 물 좀 마시고 귀향한 상필이형이 마을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는 스피커 속의 여자보다 더 말이 많았다. 마치 박노식, 장동휘와 호형호제라도 하고 지낸 양 침을 튀겼다. 아이들은 괜히 신이 나서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영화라는 것을 처음 보거나 한 두 번 본 게 고작인 어른들까지 저녁을 일찌감치 챙겨먹고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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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먼지로 꾀죄죄해진 채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결연한 태도로 어른들을 졸랐다. 영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동네 아이들이 단체로 웃골 방죽에 뛰어들기라도 할 듯 비장한 분위기였다. 아이들의 성화가 먹힌 건지 어른들의 인심이 후해진 건지, 그 날 꽤 많은 아이들이 천막극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천막은 벼를 벤 논 한 가운데에 세워졌다. 미처 물기가 다 빠지지 않은 바닥은 축축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촤르르 촤르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말로만 들어봤던 영화라는 건, 생각보다 더 신기한 물건이었다. 하얀 천(스크린) 안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말을 하는…. 그 뿐인가. 살아서 주먹질을 해대고 펄펄 날기도 했다. 스크린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목소리보다는 잡음이 더 극성을 떨었지만 신기함을 반감시키지는 못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악당들을 물리칠 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이의 영화와 관련한 첫 경험은 그렇게 얼떨결에 왔다가 갔다. 그리고 아이가 정말 영화관이란 곳을 처음 가본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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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이 끝나기 전 날 종례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무엇인가 썼다. '내일 영화관람'. 처음엔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했지만, 환호성이 터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읍내출신 아이들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골출신 아이들은 연신 탄성을 내 뱉었다. 쿼바디스였던가 벤허였던가…. 장대한 스케일의 서양영화였다. 영화는 가설극장에서 본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웅장했다. 대형(?)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는 서양배우들을 보면서 아이는 넋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이에게 '진짜영화'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다닐 때는 얌전하게 학교에서 보내주는 영화만 봤지만, 고등학교 때는 '몰래 보는 영화'에 빠져들기도 했다. 돈만 생기면 친구들을 꼬여내서 극장을 찾고는 했다. 들킬세라 2층 영사실 옆 구석자리에 앉아 숨죽이고 영화를 봤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는, 오종종한 TV의 화면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렇게 극장을 드나들다가 결국 선생님에게 걸려 경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엉덩이에 맞는 '빠따' 몇 대 정도는 영화가 품은 매력을 하루아침에 포기시킬 만큼 위력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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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들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갔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한 아이가 몰래 숨어 영화를 보던 그런 모습의 극장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어느 날부터 '이것저것 틀어주던' 재재개봉관이란 것이 사라지더니 재개봉관도 속속 자취를 감추고, 영원히 남을 것 같았던 개봉관마저도 문을 닫는 곳이 많아졌다. 어느 곳은 새 단장을 해 음식점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 곳은 나이트클럽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체인점식' 극장이 채워나가고 있다. 세월 따라 극장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우선 극장건물 머리에 붙어있던, 페인트로 그린 간판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매끈하게 잘 빠진 실사포스터가 그 자리를 메웠다. 전에는 극장마다 간판을 전문으로 그리는 전속 '간판쟁이'가 있었다. '뼁끼(페인트)통'을 들고 뒤통수를 맞아가며 그림을 배우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한 사람도 있었다. 극장 한쪽 구석에는 허름한 작업실이 있게 마련이었다. 베니어판이나 온갖 도구 등 잡동사니들이 동거하는 그 안에서 '간판쟁이'들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세상을 꽃처럼 피워냈다. 그들의 그림에 따라 그 극장의 품격이 정해지기도 했다. 신성일이니 김지미니 얼굴을 실감나게 잘 그려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간판쟁이'는 그 극장의 보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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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팔고 사는 풍경도 세월 따라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매표구에 돈을 넣으면 표가 나왔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한 뒤 기계(자동발권기)가 주는 표를 받거나 창구에서 예매번호와 바꾼다. 물론 매표소에서 직접 표를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로 영화를 보기도 힘들뿐더러 꽁무니에 서 있노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눈총이라도 받을 것 같다. 입구에 앉아 약간은 위압적인 눈길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기도' 아저씨도 보기 어려워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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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도둑영화' 한번 보려다 기도에게 멱살을 잡혀 내동댕이쳐지는 껄렁쇠도 있었다. 반대로 기도를 잘 알면 공짜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극장 안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언제나 약간씩 지린내를 풍기던 극장 안은 불을 켜놔도 음침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찾아오는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야말로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상영시간이 되었는데도 소식이 없으면 쏟아지던 휘파람과 고함소리. 아마 영사기사는 그 순간 뭔가 문제가 생긴 필름과 씨름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 기사가 필름이 담긴 양철통을 영사기에 걸면 잠시 후 챠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극장 안은 조용해지고, 한줄기 빛이 부유하는 먼지 사이를 달려 스크린에 쏘아진다. 그리고 그 빛들이 그려내던 그림은  이루어지는 것 하나도 없는 현실과 달리 늘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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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얼마나 많이 돌렸는지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중간중간 끊어진 곳을 이어놓은 까닭에 내용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시대에서 저 시대로 건너뛰기 일쑤였다. 아직도 극장에 필름은 건재하지만 그 때의 그 맛은 나지 않는다. 더 아쉬운 건 그나마도 필름의 시대가 그리 길게 갈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영화에도 디지털 바람이 거세게 불 테니…. 영화를 상영하는 중간에 필름이 끊겨서 극장 안이 컴컴해지면 휘파람이 난무하고, 돈 거슬러달라는 고함이 천장을 찔렀다. 그래도 거슬러 받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 틈에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다 뺨을 맞고 눈을 부라리는 설익은 건달들도 있었다. 서울에서 개봉한 영화가 시골 읍내까지 내려오려면 몇 달씩 걸리기 일쑤였다. 요즘이야 수십 개의 카피본이 전국에 동시에 걸리는 세상이니 실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잊혀지지 않는 건 군것질거리를 파는 꼬마였다. 네모진 모판에 끈을 매어 목에 걸고 껌이니 과자니 팔던 아이. 극장측의 배려로 장사가 가능했겠지만, 컴컴한 그 곳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성인이 된 그 아이도 어느 날 휘황찬란한 현대식 극장을 찾을 것이다. 잘 꾸며진 매점에서 잘 튀겨진 팝콘과 콜라를 사서 아이에게 안기며 슬쩍 천장에 시선 한번 줄 것이다. 뭐, 눈물을 흘릴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영화처럼 명멸하며 지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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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보고 들은 것만 적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즐기긴 하지만 마니아급은 못되거든요. 혹시 사실관계와 다른,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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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18. 18:57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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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별러서 떠난 여행이었다. 팽팽하게 감아버린 기타줄처럼, 몸 안의 신경줄들이 어느 날 툭! 툭! 끊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남쪽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무언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그런 기대가 남아있다는 건 설렘이 있다는 것이고, 설렘이 있다는 건 내 안에 존재하는 희망의 불꽃이 다 사그라진 건 아니란 뜻일 게다. 시골버스를 타고 낯선 길을 달리는 건 행복한 일이다. 오랜 시간 섬이었다가 육지와 이어진 남쪽 어느 마을을 지나는 참이었다. 여름은 온 세상에 짙푸른 물감을 마구 뿌려놨다. 들과 산을 손에 쥐고 짜면 파란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처럼 눈부신 한낮. 초점 없는 동공으로 내내 창 밖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어느 순간 한 지점에 딱 멈춘다.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것. 작은 학교인 듯 싶다. 하지만 정상적인 학교는 아닌 것 같다. 주변에는 풀이 무성하고 퇴색하고 있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유한 색깔이 배어 있다. 폐교일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동네가 꽤 큰데다 한눈에도 부촌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번듯했기 때문에 쉽사리 수긍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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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한낮, 꽤 오래 전부터 버스 안의 손님이라고는 '철' 모르는 나그네 하나뿐이다. 운전사에게 다가가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운전사는 힘도 들이지 않고 대답한다. "걱정 마슈. 예가 종점이니 내리기 싫다고 해도 내려줍니다." 마음이 따뜻한 만큼 말이 딱딱한 이곳 사람들은 농담도 가끔은 화난 것처럼 한다. 차에서 내려 다가가 보니 한 눈에 폐교임이 확인된다. 곳곳에 쇠락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런 큰 동네도 아이들이 없어 폐교를 하다니…. 작지만 꽤 아름다운 학교였음이 틀림없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운동장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열병식을 하고 있다. 나무마다 검은 열매가 가득 열려 있어 군침을 돌게 한다. 땅에도 새까맣게 떨어져 있다. 몇 개 따서 입에 넣어보지만 어렸을 때 입안을 황홀하게 해주던 그 맛이 아니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걸까. 들큰하지만 시큼한 그리고 조금은 떫은, 그래서 슬프다고 할 수밖에 없는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개구리 한 마리가 낯선 나그네의 기척에 놀랐는지 펄쩍 뛰어 저만치 달아난다. 하릴없이 운동장을 걷는다. 어떤 아이가 언제 떨어트리고 간 것일까. 운동장 한가운데에 운동화 한 켤레가 뒹굴고 있다. 꺄르르, 꺄르륵…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둘러보지만 정적만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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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는 학교건물은 언뜻 본 것보다는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문에는 판자를 대 못질해놓고 '무단 출입 땐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문을 붙여놨다. 좀 으스스하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조금만 손질하면 훌륭한 삶터가 될 것 같다. 전부터 폐교를 활용해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꿈을 꿔온 터라 쉽사리 돌아 나오지 못한다. 텅 빈 게시판 앞에서 교적비를 발견한다. '1964년에 개교하여 졸업생 420명을 배출하고 1994년에 폐교…' 1994년이면 20년도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건물이 멀쩡한 것 보면 그동안 동네사람들이 중간중간 손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동네 주민 중에 이 학교 출신이 얼마나 많았으랴. 저만치 '책보(옛날에는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다녔다)를 든 아이상'과 '아이를 안은 선생님(?)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총 420명의 아이들이 뛰어 놀고 꿈을 키웠을 학교가 이젠 풀밭에서 쓸쓸히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학교 이야기를 듣고 싶어 동네를 어슬렁거려보지만 강아지 몇 마리만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저만치 노인 한 분을 보고 다가갈까 하다가 멈춰버린다. 부질없는 짓이다. 태어나 죽은 이야기를 들은들 무엇하랴. 결국 학교 다닐 아이들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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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그랬던 걸까. 또 다른 폐교를 발견한 건, 섬에서도 유명한 다랭이논을 찾아갔을 때였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터라 느린 걸음으로 혼자 어슬렁거리며 걷던 차에  건물 하나에 또 시선을 잡혀버리고 말았다. 풍경으로 치면 먼저 학교보다 훨씬 아름답다. 바다가 코앞에 있다. 운동장가에 만들어놓은 꽃밭에는 누가 가꿔놓았는지 붉고 노란 꽃들이 초여름 햇살의 애무를 받으며 까르르 숨이 넘어간다. 바다에서 올라온 바람이 등에 찬 땀을 거둬간다. 철퍼덕 주저앉아 배낭에 넣어온 맥주를 꺼낸다. 맥주는 미지근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청량해진다. 맥주를 다 마시고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운동장과 교실 사이의 언덕에는 이충무공의 동상이 우뚝 서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못 다 마친 전쟁을 아쉬워하는 걸까. 동상 앞에는 조회를 할 때 쓰던 교단이 아직도 의연한 자세로 서 있다. 머리가 조금 벗겨진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훈화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기둥이니 밝고 바르게…" 매번 듣는 훈화가 지루해진 아이들은 발로 흙을 툭툭 차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장난도 쳤을 것이다. 아아!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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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교실을 폐쇄하지 않아 드나드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어느 교실엔 아직도 책걸상이 가득 쌓여있고 어느 교실은 먼지들만 바닥에서 배밀이를 하고있다. 천장에서 내려온 알전구는 지금이라도 스위치를 올리면 세상을 명징하게 밝힐 것 같다. 칠판은 낙서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은수 왔다감' '경수·상래·호금 다녀감' '모두 모두 잘됐음 좋겠다' 이 학교를 마지막으로 다녔던 졸업생들일까? 안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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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안타까움이 백묵가루 대신 묻어있다. 열 명, 다섯 명, 세 명, 두 명… 학교에 아이들이 자꾸 줄어가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창문 쪽으로 돌아서니 파란 하늘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환한 색깔 속에서 공부했을 아이들. 그들의 가슴은 또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을까. 복도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반 이상은 내려 앉아있다. 삐걱거리며 걷는 내내 아이들이 남겼을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기울여본다. 뒤뜰에서 물이 끊긴 급수대와 무너질 듯 버티고 있는 화장실을 만난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화장실 문이 덜컹하고 소리를 지른다. 반갑다는 소린지, 그만 나가라는 소린지. 초여름의 싱싱한 해가 학교 건물에 레이저광선을 닮은 빛을 쏘아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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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듯, 오래된 화단에 앉아 턱을 괴고 상념에 빠진다. 본교가 분교가 되고, 그 분교마저 세월의 억센 손아귀에 휘둘리다 사라져가고…. 이 나라에 존재했던 분교라는 이름은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골마을이라도 숨듯이 서 있던, 하지만 그 마을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에 아침마다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던 건물은 잊혀질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가슴속의 그리움만으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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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11. 18:45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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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되어있는, 좁고 긴 논' (국어연구원 표준국어 대사전)
다랑논에 대한 해석은 간단하다. 하지만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다락논, 다랭이, 다랑전, 다랑치, 논다랑이, 다랭이논, 다락배미, 삿갓배미…. 이름만큼 사연도 구구절절 많다. 그 중 삿갓배미란 말이 생기게 된 일화는 다랑논을 구경조차 못한 사람에게도 금세 뚜렷한 그림 한 장을 그려준다. "옛날에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 보니 딱 한 배미가 부족했단다. 세어보고 세어봤지만 끝내 사라진 논을 찾을 수 없었다는구나.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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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영감이 마을을 찾아 든 것은 참혹했던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전쟁의 상흔은 조금씩 아물어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던 상이군인들의 모습도 뜸할 무렵이었다. 영감 하나가 보따리 두어 개와 솥단지 하나를 얹은 지게를 지고 앞장서고, 그 뒤에는 다리를 저는 젊은 아낙과 작은 아이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논에는 찬바람이 제법 날카로운 손톱을 내세워 쌓아놓은 볏단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냇둑의 미루나무는 빈 가지를 흔들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마을에 들어온 그 낯선 일가는 미리 알고 왔다는 듯이 곧장 장부자네 집으로 향했다. 하긴 누구라도 그 마을을 찾은 나그네라면 기와를 번듯하게 올린, 그 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 날부터 그 일가는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장부자의 눈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침 비어있던 행랑채에서 번듯하게 한 살림을 차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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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바우영감이라고 불렀다. 원래 이름이 바우였는지, 그가 그렇게 불리길 원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이의 이름이 용식이였으니 용식아버지라고 부를 법도 하건만 어른이나 아이나 하나같이 바우영감이라고 불렀다. 하긴 그가 '용식 아버지'가 되기에는 너무 늙어 보였다. 차라리 용식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성싶었다. 바우영감은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의 젊은 아내는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한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했다. 아니, 두세 배 일했다. 그들이 쉬는 것을 구경하기란 개의 머리에 뿔이 돋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어린 용식이도 한가하게 앉아서 노는 적이 없었다. 갓 올라온 찔레순처럼 여리게 생긴 아이였지만 꼴머슴 몫을 제법 해냈다. 장부자로서는 똥누다 개똥참외를 발견하듯, 앉아서 복덩이를 주운 셈이었다. 전쟁 이후 쓸만한 머슴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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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바우영감 덕분이라고 못박기는 어렵겠지만, 장부자네 논밭은 갈수록 늘어났다. 눈처럼 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장죽을 문 장부자가 논둑 위에 서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일 역시 더욱 잦아졌다. 하긴 어딜 둘러봐도 자기 땅 뿐인 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찌 감추랴. 그 일은, 그들 일가가 동네에서 몇 년을 지낸 뒤 시작됐다. 어느 날부터 바우영감이 용골 들머리의 조부자네 산자락을 파헤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용골은 골짜기가 꽤 깊어 평소 나무꾼 외에는 잘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조그만 내가 흐르고 그 냇물이 모이는 곳에 용소라는,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연못이 있어 선계(仙界)에라도 든 양 제법 신비스런 곳이었다.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바우영감이 파헤치기 시작한 곳은 햇빛이 제법 반반하게 드나들고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산자락이었다. 산을 어느 정도 파헤친 뒤에는 돌로 둑을 쌓아 올렸다. 그러면 제법 넓직한 '계단'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꽤 지나고서야 바우영감이 목적하는 게 모습을 드러냈다. 쌓은 돌은 논둑으로, 파헤쳐진 곳은 작은 논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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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바우영감이 만드는 것이 다랭이논이라고 했다. 바우영감이 그 일을 하게 된 뒷얘기도 입을 타고 전해졌다. 장부자 집에서 행랑아범 겸 머슴살이를 시작하고 1년이 지나 추수가 끝난 뒤 간곡하게 요청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가족이 일한 새경을 받지 않을 테니, 몇 년이 걸려도 땅값만큼만 되면 용골에 있는 산자락을 떼어 자기 이름 앞으로 해달라고…. 장부자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어차피 용골에 있는 산은 빚 대신 받은 것이었고, 그 깊은 골짜기를 가본 적도 없으니, 내 땅이라는 애정이 있을 턱도 없었다. 하지만 눈 밝은 바우영감에게는 그 산자락이 금맥 만큼이나 값져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다랭이논을 만들면서도 틈틈이 장부자네 일을 해주기로 약조까지 했으니 장부자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다랭이논을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산자락 초입이야 이럭저럭 깎아 내리면 땅을 얻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난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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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은 바윗덩이 만치 큰돌부터 작은 돌 순으로 쌓아 올라가는데, 얼마나 촘촘한지 그야말로 '물샐 틈' 하나 없어 보였다. 위로 갈수록 석축은 높아질 수밖에 없어서 어느 곳은 어른 두어 길 폭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해도 얻는 땅은 말 그대로 '삿갓으로 덮을 만큼' 작았다. 큰돌은 주로 산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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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걸 썼지만 작은 돌은 대부분 지게로 져 날랐다. 그의 아내도 장부자네 부엌을 벗어날 틈만 있으면 달려와 돌을 머리에 이어 날랐고, 용식이도 망태에 돌을 날랐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쉬지 않았다. 일은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계속되었는데 사람들 눈에는 볼 때마다 똑같아 보일 만큼 느리게 진행됐다. 그러는 동안에, 그러잖아도 늙어 보이던 바우영감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백발이었고 얼굴에는 고랑이 깊게 패었다. 그렇게 한 두 해가 지나고 제법 꼴을 갖춘 논배미들이 몇 개 태어났다. 어느 논에는 황소 만한 바위가 그대로 들어앉아 있고 어느 논은 손바닥보다 클 것도 없었지만, 그 속에 땀과 눈물이 어느 만큼 들어있다는 건 누구든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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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논에 첫 모를 내던 해 봄, 바우영감네는 용골에 움막처럼 작은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살림살이는 여전히 지게로 져 나를 만큼 보잘것없었다. 그제야 장부자네집 행랑아범과 행랑어멈, 꼴머슴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 해 가을 다랑논에 벼가 익어 깊이 고개를 숙인 어느 날, 동네사람들은 모두 낫 하나씩을 들고 용골로 갔다. 반은 벼를 베고 반은 논두렁에 앉아 놀았지만, 추수는 순식간에 끝났다. 첫 해라 소출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바우영감은 끝내 볏단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의 소리 없는 통곡에 그의 아내도 울었고 그의 아들도 울었고 동네 사람들도 울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사람들은 신발도 꿰지 못한 채 다리를 절며 고꾸라지듯 동네로 달려오는 그의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빈 논마다 무서리가 하얗게 그림을 그린 이른 새벽이었다. 이틀 뒤 그의 지친 육신이 잠들어 있는, 장식 없는 상여는 동네를 천천히 돌아, 용골로 돌아갔다. 상여가 지나가는 동안 텅 빈 들녘엔, 처음 보는 갈까마귀 한 마리가 허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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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며] 다랑논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다랑논은 이미 논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밭으로 바뀐 곳은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풀과 잡목으로 뒤덮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때 다랑논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논들도 묵어 나자빠지는 마당에 다랑논까지 챙길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현실을 감안하면 지리산 피아골 자락에서 만난, 잘 가꾸어진 다랑논은 눈물겹게 반가웠습니다. 그 안에 배어있을 어느 촌부의 땀과 피, 그리고 눈물을 생각하며 논둑에 한참 쪼그리고 앉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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