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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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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30. 18:37 사라져가는 것들

청춘남녀가 사랑을 나누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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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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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계집은 손을 빼려고 하며, "점잖으신 어른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하면서도 그의 몸짓에는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 보였다. 영감은 계집의 몸을 끌어안더니 방앗간 뒤로 돌아 섰다. 계집은 영감 가슴에 안겨서 정욕이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보면서, "영감." 말 한번하고 침 한번 삼키었다. "영감이 거짓말은 안 하시지요?" "아니." 그의 말은 떨리었다. 계집은 영감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방앗간 속을 가리켰다. "저리로 들어가세요." 영감과 계집은 방앗간에서 이삼십 분 후에 다시 나왔다. (나도향의 '물레방아' 중에서)

우리 문학작품이나 옛이야기 속에는 물레방아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위에 예를 든 소설 외에 시나 노래에도 물레방아는 단골 메뉴다. 가수 조영남이 Proud Mary를 번안해서 불렀던 '물레방아 인생' 이라는 노래 중에 '세상만사 둥글둥글/호박 같은 세상 돌고 돌아/정처없이 이곳에서 저 마을로/기웃기웃 구경이나 하면서/밤이면 이슬에 젖는 나는야 떠돌이/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대목은 왜 물레방아가 우리네 백성과 왜 그리도 친했던지 단초를 보여준다. 어차피 삶이란 물레방아 같은 게 아니던가. 구비를 넘고 산모롱이를 돌고 돌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가진 것 없고 힘도 없던 이 땅의 민초들이 욕심을 내어본들 무엇하랴. 그저 주어진 여건대로 둥글둥글 살아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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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물레방아는 곡물을 찧는 것 외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레방앗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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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사랑'을 나누거나 '밀회'를 하는 장소로 주로 쓰여진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허생원의 하룻밤 사랑이 그랬고, '물레방아'의 신치규가 남의 여자를 상대로 욕망을 푼 곳 역시 물레방앗간이다. 문학작품뿐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런 일은 빈번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밀회를 위한 장소로 물레방앗간 만한 게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물레방아가 물길을 따라가다 보니 마을 어귀나 민가와 좀 떨어진 곳에 있기 마련이었다. 또 잔치 같은 게 있을 때나 쓰였고, 그것도 주로 낮에만 사람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남들의 눈을 피하는데는 안성맞춤이었을 터이다.

물레방아 구조는 크게 물레 부분과 방아 부분으로 나눠진다. 물레는 말 그대로 쏟아지는 물의 힘으로 돌아가는 수차를 말한다. 물레 좌. 우에 십자목을 설치하여 물레가 돌아가면서 생산한 에너지로 방아를 찧는 것이다. 방아공이와 곡식을 담는 돌확은 방앗간 안에 있다. 쏟아지는 물이 나무바퀴, 즉 물레를 돌리면 굴대에 꿴 넓적한 나무가 방아채의 한 끝을 눌러 번쩍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리면서 공이로 돌확에 담긴 곡물을 찧도록 되어 있다. 방아채와 공이의 동작이 자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방아를 찧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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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삶의 주변에서 물레방아를 볼 수 없게된 건 오래 전이다. 동네마다 기계식 도정시설인 방앗간이 들어오게 되면서 대부분 퇴출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은 물레방아를 보기 어렵지 않게 되었다. 지자체 등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하는 것은 물론, 장식물로 물레방아를 달아놓은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물레방아가 아니다. '방아'가 없이 수차인 '물레'만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물레도 물 대신 전기의 힘으로 돌아간다. 그거라도 볼 수 있으니 반갑다고 해야할지, 서글퍼 해야할지. 전시용 물레방아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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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많이 생긴다 해도 물레방앗간의 정서야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으슥한 물레방앗간에서 사랑을 나눌 돌이와 순이가 사라진지 오래이거늘.

[취재를 하면서] 오리지널 물레방아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전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진짜'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강원도 정선 백전리라는 곳에 아직도 곡물을 찧는 물레방아(사진 맨 위)가 있다고 하여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곳의 물레방아 역시 '현역'은 아닌듯, 물줄기를 맞으며 세월을 관조하고 있었습니다. 물레는 힘차게 돌아가고, 방앗간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정작 방아는 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명절 같은 때만 가동할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진짜 물레방아가' 눈물겹게 반가워, 오래 그 앞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바람이 차갑게 부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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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23. 18:30 사라져가는 것들

얼씨구 좋구나~ 흥겨운 동네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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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가 열리기 여러 날 전부터, 마을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괜스레 이리저리 내닫고, 그 뒤를 동네 강아지들이 겅중겅중 따른다. 모듬으로 사는 전통 농경사회에서 혼인은 마을 전체의 잔치였다. 아니, 그 마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웃마을까지도 들뜨게 했다. 혼례 하루 전엔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다. 혼사가 있는 집엔 근동의 모든 아낙들이 몰려들어 전을 부치고 떡을 하느라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은 엄마를 찾는다는 핑계를 앞세워 이 곳 저 곳을 누빈다. 엄마들은 눈짓으로 타박을 주면서도 부쳐놓은 전 한 장을 얼른 집어 아이 호주머니에 찔러준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 혼주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눈을 질금 감기 마련이다. 어차피 나누기 위한 음식이니 말릴 일도 아니다.

밑이 찢어지도록 가난하지 않은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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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야, 혼사를 치르는 집은 빚을 내서라도 돼지 한 마리쯤은 잡게 마련이다. 딸이 장성한 집들은 아예 혼사용으로 미리부터 돼지를 키우기도 한다. 너른 마당에는 돼지를 잡기 위해 남정네들이 모여든다. 마당 한켠에 걸어놓은 무쇠솥에서는 물이 펄펄 끓는다. 힘깨나 쓰는 남자가 도끼를 잡고 돼지를 어르다가 어느 순간 두개골 깊숙이 박아 넣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당에 쓰러진 돼지가 파르르 떨다가 숨을 거둔다.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한쪽에서 서 있다. 어른들이 저만치 가서 놀라고 몰아대지만 주춤주춤 물러서는 척 하다가 다시 그 자리로 모여든다. 혹시 얻어먹을지도 모르는 몇 점의 고기(주로 내장 삶은 것이지만)와 돼지 오줌보를 기다리는 참이다.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으면 멋진 축구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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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례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치르게 된다. 즉,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가는 셈이다. 그래서 '장가간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과거에는 대례를 치르고 짧게는 3일 길게는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신부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요즘으로 보면 신혼여행을 처가에서 보내는 셈이다. 혼인날이 되면 날이 미처 밝아지기도 전에 동네사람들이 잔칫집에 모여든다. 먼 곳에 사는 친척들은 하루 전에 도착해서 묵기도 한다. 신랑이 도착할 시간이면 모두 마당에 나와 기다린다. 성미 급한 사람은 고개를 자라목처럼 몇 번 빼다가 동구까지 내쳐 나가 보기도 한다. 바닥에는 멍석과 돗자리를 깔고 위에는 차일(광목이나 삼베로 만든 천막)을 친 혼례청에는 괜스레 설레는 눈길들이 가득 차 반짝거린다.

드디어 신랑이 도착해서 혼례청에 들어서면 혼례식이 본격 시작된다. 신랑 뒤에는 나무기러기를 든 기럭아비가 따른다. 동네의 존경받는 어른이 주례(집례)가 되어 식을 이끌어간다. 가장 먼저 신랑이 기러기를 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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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의식인 전안례를 하게된다. 다음으로 신랑신부가 손을 씻은 다음 맞절을 하는 교배례가 있다. 신랑은 2번 신부는 4번 절을 하게된다. 옛날에는 이 때 신랑·신부가 처음 얼굴을 보게되었다고 한다. 교배례는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랑 신부가 한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의례인 합근례를 치른다. 합근례 뒤에 하객 및 어르신들께 감사의 절을 하는 보은보배와 주례의 덕담 등 몇 가지 절차를 마치면 혼례식은 정리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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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 끝나면 기다리던 잔치가 시작된다. 어찌 보면 혼례의 진정한 하이라이트이다. 마당 가득 깔린 멍석 위로 잔칫상이 놓여지고 이웃끼리 친구들끼리 둘레둘레 앉아 음식과 술을 나눈다. 술이 어느 정도 돌아가면 흥에 겨워 노랫가락을 쏟아내는 이도 생기고 한쪽에서는 윷놀이판이 벌어진다. 저녁 어스름이 몰려올 때쯤에는 신부를 짝사랑하던 동네 청년 하나가 굴뚝모퉁이에 숨어서 끼억~ 끼억~ 숨죽인 울음을 토해놓기도 한다. 잔치는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된다. 마당에 화톳불이 놓아지고 등이 걸린다. 혼례의 후속행사도 계속된다. 동네 청년들은 자기 동네 색시 데려간다고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고, 장모는 귀한 사위 살살 다뤄달라고 새로 술상을 들이고… 그렇게 힘든 과정 끝에 놓여난 신랑·신부가 신방에 들어도 마지막 시련은 남아있다. 신방에 불이 꺼지면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서 창호지에 구멍을 내는 아낙들의 장난기 가득한 눈… 그렇게 혼인날의 밤은 깊어간다.

[취재를 하면서] 전통혼례식 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시골에서 직접 하는 혼례식을 취재하고 싶었는데, 요즘 시골에 결혼할만한 젊은이들이 있던가요. 최선이 안되면 차선이라고, 알아보니 서울이나 근교에서 전통혼례식을 볼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남산 한옥마을입니다. 이 곳에서는 일반인들의 신청을 받아서 주말에 공개 혼례식을 진행합니다. 진짜 결혼식이지만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한국민속촌과 인사동에서도 주말이면 전통혼례식이 열립니다. 민속촌에서 하는 혼례식은 진짜 는 아니고 모델(?)들이 나옵니다. 어찌나 빨리 진행하는지 건성건성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사동 혼례식은 외국인이 많아서인지 몇 개 국어로 진지하게 설명하는 게 약간은 지루할 정도였습니다. 전통방식대로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볼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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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16. 18:45 사라져가는 것들

민초들의 삶을 보듬었던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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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이미 훤하게 밝았지만 아이의 잰걸음은 늦춰질 줄 모른다. 거북고개는 대낮에도 조금 컴컴해서 혼자 넘어가기에는 여간 무서운 게 아니다. 그러니 그 길을 이른 아침에 넘는 것은 오밤중에 뒷간을 혼자 가는 것보다 더 싫은 일이다. 학교에 일찍 가야하는 당번이 아니라면 등을 떠밀어도 도망쳤을 것이다. 고개를 넘어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에 거의 도착해서야 아이는 멈춰 서서 턱까지 찬 숨을 고른다. 논과 밭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모습이, 보리밥의 강낭콩처럼 띄엄띄엄 박혀있다.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고 느티나무 가지에는 울긋불긋한 천들이 늘어뜨려져 있다. 서낭당이다.

느티나무 주변으로 제단처럼 쌓여진 돌무더기 위에는 탐스러운 시루떡이 올려져 있다. 김이라도 모락모락 올라올 것 같다. 밤새 누가 치성이라도 드린 모양이다. 떡 옆에는 사과와 곶감 같은 과일도 놓여져 있다. 아이가 꼴깍 침을 삼킨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온 터라, 횟배 요동치듯 시장기가 기승을 한다. 얼론 하나만 집어먹어? 누구 보는 사람도 없잖아. 스스로를 달래고 다그쳐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만다. 서낭당의 치성떡을 몰래 먹었다가 동티가 나서 어찌어찌 됐다는 이야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는 고개를 한번 내젓고 도망치듯 내쳐 걷는다. 잠시라도 떡에 대해 욕심을 부렸다는 걸 누가 알기라도 할세라 걸음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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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어지간한 마을이면 입구마다 서낭당이 있었다. 보통 고갯마루나 큰 길 가 등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자리잡게된다. 민초들이 마을과 토지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낭신인데, 그 서낭신이 붙어 있는 오래된 나무(神木, 神樹)나 돌무더기를 서낭당이라고 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서낭신이 머물 사당을 짓기도 했다. 이를 당집이라고 불렀다.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잡귀나 병을 막아주는 역할 외에도 먼길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을 마중하고, 먼 길을 떠나는 가족들을 배웅하는 만남과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난 사람이 있는 집 식구들이 마을 어귀의 서낭당 입구까지 나가 하염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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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지나던 나그네가 서낭당을 만나면 돌을 하나 얹거나 침을 뱉기도 했다. 돌을 얹는 것은 원하는 것이 이뤄지도록 해달라고 염원하는 의식이며 침을 뱉는 것은 길 위를 떠돌아다니는 악령의 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서낭당에는 매년 정초에 동네사람들이 왼새끼로 꼰 금줄을 쳐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농사가 풍년이 들도록 제를 지냈다. 당나무에는 아이들의 장수를 위해 부모가 걸어 놓은 헝겊조각, 먼 길을 가는 장사꾼이 장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달아놓은 짚신 등이 걸리기도 했다.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남편의 노름이나 바람기를 재워달라고, 부모님이 무병장수 하게 해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도 서낭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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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고락을 같이했던 서낭당을 보기 힘들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불길처럼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던 새마을운동은 서낭당에게 이중포화를 퍼부었다. 길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아름드리 당나무가 뽑혀나갔고 돌무더기가 사라지기도 했다. 또 다른 시련은 '미신(迷信)타파'라는 이름으로 공개재판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서낭당은 그렇게 하나 둘 사라져갔다. 반드시 그래야 했을까. 마을 길을 넓힌 것이야 살기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쳐도, 미신이란 이유로 처단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공감하기 어렵다. 오랜 세월 풍성한 수확과 마을의 안녕을 빌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던 서낭당이 백성들을 미혹했다는 게 정말 타당한 주장인지. 어차피 '미신이 아니라는' 종교 역시 마음의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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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서낭당을 보라. 기댈 곳 없는 우리네 민초들이, 가려운 소가 나무에 몸을 비비듯 외로움과 슬픔과 따뜻함을 나누던 존재가 바로 서낭당이었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 그런 존재를 과연 그렇게 쉽게 쓸어내야만 했는지.
'개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뼈다귀가 움츠러드나 보다, 하고 내가 넌짓넌짓이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김유정의 '봄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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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보통 토종의 '서낭당'과 중국출신의 '성황당(城隍堂)'을 동일한 개념으로 여기지만,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물론 중간에 그 개념이 많이 섞였겠지만, 저 역시 이 둘의 근원이 다르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서낭당을 찾기 위해서, 그나마 제대로 보존됐음직한 강원도지역을 많이 헤맸습니다. 정선 땅에 갔더니 여기저기 당집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만들어 세운지 지 얼마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일종의 관광상품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태백을 걸쳐 삼척 땅 신리 너와마을을 찾았다가 고개를 넘어가는 길, 갑자기 시선이 멈춰 섰습니다. 길가에 아주 작은 당집이, 금줄을 두른 채 고즈넉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때의 반가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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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9. 18:50 사라져가는 것들

사람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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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삼불산 너머 용골에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느니라. 하루는 저 건너 양짓말에 사는 조씨라는 사람이 나무를 하러갔다가…" 막내손자를 무릎에 앉힌 할머니가 옛날얘기를 시작한다. 큰손자와 둘째도 눕거나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건만 아이들의 눈망울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또랑또랑 빛난다. 마당 한편에 놓은 모깃불에서는 연기와 풀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막내는 얘기를 듣다 잠들었는지 쌕쌕 숨소리가 고르다. 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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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아이의 얼굴에 천천히 부채질을 한다. 도깨비가 등장하는 옛날얘기가 절정에 달하면서 큰아이와 둘째는 할머니 곁으로 바투 당겨 앉는다. 그렇게 여름밤은 깊어간다. 이런 풍경이 펼쳐지는 곳은 주로 마당에 깔아놓은 밀방석(밀대로 짠 넓은 방석. 짚으로 짠 멍석보다 시원하지만 수명이 짧음)이나 멍석이었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안 한다'라는 우리네 속담이 있다. 그만큼 멍석은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한 기본도구였다. 옛날에는 놀이를 하거나 굿판을 벌이기 위해 가장 먼저 멍석을 깔아놓았다. 그래서 이런 속담이 나왔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노는 곳이라면 어디든 멍석이 따라다녔다. 멍석은 짚으로 촘촘하게 짜기 때문에 두껍고 탄력이 있으며 내구성도 좋다. 무엇보다도 맨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는 기능이 탁월하다. 멍석과 관련된 속담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강아지에게 메주멍석 맡긴 셈' '앉을 자리를 보고 멍석을 깔아라' '멍석구멍에 새앙쥐 눈뜨듯' '덕석이 멍석이라고 우긴다' 그만큼 우리 생활에 밀접해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멍석은 '휴대용 주거시설'이라고 할 정도로 필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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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잔치가 있거나 상을 당했을 때는 가장 먼저 동네의 멍석을 모았다. 마당 가득 깔고 그 위에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상을 놓았다. 혼례 때는 마당에 차려지는 혼례청에 먼저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돗자리를 깔았다. 머리 위에는 차일, 땅에는 멍석이 기본이었다. 윷놀이 판에서도 멍석은 요긴하게 쓰였다. 멍석의 탄력성이라야 윷가락이 튀거나 제멋대로 구르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도 멍석이 쓰이지 않는 곳은 없었다. 고추나 알곡을 널어 말리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었다. 추운 겨울이면 작은 멍석(덕석)을 소 잔등이에 덮어주어 따뜻함을 유지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장판을 할 만한 여력이 없는 가난한 집에서는 맨흙이 드러난 구들장 위에 깔기도 했으며, 뒷간에 걸어놓으면 훌륭한 문 대역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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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이 반드시 좋은 일에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골골마다 서민의 애환과 서글픈 사연도 많이 품고있다. 소위 양반이라는 이름의 권세가들이 자행한 집안 내 사형(私刑)인, 멍석말이에도 멍석은 요긴하게 쓰였다. 멍석말이는 한 집안 뿐이 아니라 마을 단위로 이뤄지기도 했다. 마을의 규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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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거나 어지럽힌 자를 벌하는 집단구타가 멍석말이이다. 거기에 왜 억울한 사연이 없으랴. 사람을 멍석에 말아서 때렸던 이유는 외상(外傷)이나 뼈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골병이 들거나 불구가 되는 것을 막아야 노동력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멍석말이를 당하면 뼈가 부러지는 건 막을 수 있지만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고 한다. 그 고통 또한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멍석은 또, 죄를 지은 자가 엎드려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라는 석고대죄에도 쓰였다. 그 때 바닥에 까는 거적이 바로 멍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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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은 대개 장방형으로 짜는데 길이는 약 3미터, 폭은 보통 1.8미터 정도가 보통이었다. 네 귀퉁이에 손잡이 모양의 고리를 만들기도 했다. 다소 굵은 새끼줄을 세로로 길게 늘어뜨린 뒤 가로로는 짚을 넣어가며 촘촘하게 엮는다. 그 작업이 쉽지 않아 능숙한 사람이라도 한 장을 완성하려면 여러 날이 걸린다. 때로는 둥근 형태의 멍석을 짜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작은 것은 맷방석이라고 하여 맷돌질을 할 때 밑에 까는 용으로 사용한다. 농촌에서조차 '우리 것'들이 거의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지금도 멍석은 아직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만큼 쓸모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멍석 역시 수명이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아이 울음이 그친 지 오래인 농촌에서 멍석을 짤 이는 누구이며, 쓸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조곤조곤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존재처럼, 갈수록 기억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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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2. 19:08 사라져가는 것들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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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의 붉은 대추만큼이나 물씬 익은 가을이, 하늘 가득 그림을 그렸다. 말·기린·코끼리·원숭이… 아이가 든 주전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 화살처럼 빠른 빛을 되 쏜다. 아이의 발길은 날기라도 할 듯 가볍다. 하지만 주전자 속에 든 막걸리가 새어나오기라도 할세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아이의 집에서 지붕을 올리는 날이다. 아버지는 추수가 끝나면서부터 마당 한켠에 쌓아둔 짚단 옆에서 이엉을 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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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다. 그렇게 엮은 이엉둥치들이 마당을 그득하게 메울 무렵, 동네아저씨들이 이른 아침부터 아이 집에 모여들었다. 농투사니(농투성이)라면 이엉쯤 혼자 엮는 건 일도 아니지만, 지붕을 올리는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는 지붕 올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붕을 올리는 날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부침개 몇 쪽은 부치게 마련이다. 학교에 가서도 선생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토요일이었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 막걸리 심부름부터 한 참이었다. 아버지와 동네아저씨들은 어느새 이엉을 다 얹고 용마름 덮는 작업을 한다. 용마름은 이엉이 맞닿는 마루를 덮는 것으로서 초가를 이는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짚을 틀어서 터진 갓처럼 만들어 올린다. 아저씨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손발이 척척 맞는다. 용마름을 다 덮으면, 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고삿을 맨다. 다 올린 지붕이 보름달처럼 밝게 빛난다. 집이 새로 지은 듯 훤하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져서 집 주변을 뺑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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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백성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던 초가집은 1970년대 '새마을노래' 2절과 함께 우르르 사라졌다. 그래서 농촌도 둥그런 초가집 대신 울긋불긋한 함석집이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편리하기야 매년 바꿔줘야 하는 초가집이 반영구적인 함석집을 따를 수 있으랴.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찌 편리함으로만 재단될 수 있을까. 초가집은 잘난 체 하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둥그런 앞산·뒷산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산이 지붕이고 지붕이 산이 되어 서로 얼싸안고 내닫던 우리네 고향풍경. 초가나 산이나, 고난 속에서도 둥글둥글한 심성을 잃지 않았던 이 나라 백성을 닮았다. 초가집은 배타적이지 않았다. 모든 걸 품어 안을 줄 알았다. 초가지붕 속에는 참새가 둥지를 틀었으며, 어느 집은 업이라 불리는 구렁이가 상주하기도 했다. 몇 년씩 묵은 지붕은 굼벵이들의 삶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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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성으로 따져도 뛰어난 점이 많았다. 속이 비어 있는 볏짚은 공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햇볕의 뜨거움을 덜어주고 겨울에는 집 안의 온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준다. 그리고 볏짚은 겉이 비교적 매끄러워서 빗물이 잘 흘러내리므로 두껍게 덮지 않아도 비가 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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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초가집은 생각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어머니의 흰머리 같은 존재였다. 때론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과도 같아서, 도시에 있어도 가슴속에서 항상 펄럭대던, 그래서 뜨겁게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존재였다. 고향으로 가는 길, 언덕에 올라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초가지붕을 보노라면 가슴이 울컥 뜨거워졌던 기억이 어찌 몇 사람만의 소유일까.

강제적 지붕개량사업이 아니었더라도 지금까지 초가집이 남아있을 리는 없다. 해마다 갈아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그러잖아도 일손이 없는 농촌에서 초가집을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운 건 그리운 것이다. 초가지붕의 그 따뜻한 발색. 부드러운 곡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