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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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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난 카펫수선 아저씨. “훌리아! 톱카프 궁전에 가면 예니체리 나무라고 있다거든? 관계자에게 물어봐서라도 꼭 좀 찾아줘요.”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에 훌리아에게 신신 당부했다. 그녀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떡인다. 하지만 성사 여부는 두고 봐야 한다. 훌리아와는 그새 제법 가까워져서 반은 내 개인 가이드가 돼버렸다. 역시 나는 사람 홀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단 말이야. 오해하지 마시라. ‘여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그녀도 예니체리는 알지만 예니체리 나무는 처음 들어본단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확인까지 한다. 하지만 역시 예니체리 나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일단 들어가 보면 감이 잡히겠지. 톱카프 궁전 앞에는 오늘따라 이상스러울 만큼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인지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진 것 같다. 카펫 수선하는 아저씨가 근사해 보이길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눈길 한 번 주더니 말없이 바느질만 한다. 터키 사람이라고 모두 상냥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그래도 특별히 거절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땐 그냥 찍으면 된다. 몇 마디 나눠볼까 하다가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고, 또 일행이 벌써 저만치 가 있길래 부리나케 쫓아간다. 현장에서는 혼자 다니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일단 매표소를 통과할 때까지는 함께 행동해야 한다. 톱카프 궁전 앞의 기념품 가게. 1472년 착공해서 1478년 준공. 1856년 돌마바흐체가 지어질 때까지 38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궁전으로 사용. 총 면적 70만m². 이런 이력을 가진 톱카프 궁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복잡하다. 아마 다섯 번 쯤은 와야 제대로 봤다고 큰소리 좀 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달쯤 머물면서 이 궁전만 연구해보리라 마음먹는다. 대문에 해당하는 커다란 문만 해도 세 개, 넓은 정원만 해도 네 곳이나 된다. 이것을 모두 한꺼번에 다 보려고 하면 체하고 말 건 당연지사. 그래도 일단은 들어가 봐야 곰을 잡든 법을 잡든 하겠지. 첫 번째 문(황제의 문)을 지나면 제1 정원이 나온다. 흔히 예니체리 정원 혹은 예니체리 마당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본거지에 들어왔으니 예니체리가 뭔지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나하고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다. 터키 역사서를 읽다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유난히 가슴을 헤집었을 뿐이다. 약간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긴장할 건 없다. 다 듣고 나면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테니까. ‘예니’는 ‘새로운’이라는 뜻이고 ‘체리’는 그 달콤한 이미지를 배신하고 ‘병사’란 뜻이 된다. 그러니까 ‘새로운 병사’가 바로 그들이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1세 때 만들어진 술탄 직할의 직업군인을 바로 예니체리라고 한다. 전쟁에서 대단한 용맹을 발휘해서 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전시에는 정예군으로 싸웠다. 톱카프 궁전의 첫번 째 문. 예니체리의 시작과 끝은 영광보다는 슬픔의 역사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잡힌 아이들과 점령지 발칸반도의 그리스도교 가정 소년들로 주축을 이뤘다. 전쟁터에서 졸지에 부모와 헤어진 것도 하늘이 무너질 일인데, 낯선 땅으로 보내진 아이들. 그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전쟁을 일으키고 패한 것은 어른들이지 아이들이 아니거늘. 이렇게 이스탄불로 데려온 아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뒤 일반 가정으로 보내 투르크 말과 이슬람에 관한 일상을 배우게 했다. 그 후 재능 있는 아이들은 궁정 일을 배우게 하고 나머지는 '예니체리 훈련부대'로 보냈다. 그곳에서 환관들의 감독 아래 6년 이상 엄격한 훈련과 무기 다루는 기술을 가르쳤다. 훈련을 마치면 바로 부대에 배치된다. 부대는 몽골군과 비슷하게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됐다. 재미있는 것은 부대 용어가 주방과 관련돼 있다는 것. 부대원 하나하나는 숟가락(Kaşık)으로 불렀다. 부대장은 수프 요리사라는 뜻의 초르바즈(Çorbacı), 소대 깃발에는 커다란 솥이 그려져 있었다. '한 솥에 음식을 끓여 먹는 동지'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깃발에 그려진 솥은 큰 상징성을 갖게 된다. 예니체리는 술탄에게 불만이 있을 때마다 솥을 뒤집어엎었다. 거지들이 빈 냄비를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듯, 뭔가 요구하는 도구로 솥을 활용한 셈이다. 그들은 특별한 군복을 입고 급여를 지급받았으며 다른 이슬람교도와는 달리 콧수염 외에 다른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또한 영외 거주는 물론 초기에는 결혼도 금지했다. 예니체리 정원. 예니체리는 전쟁터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 능력도 탁월했고 사기 역시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서유럽에서는 '악마의 군단'이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도 정예병으로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예니체리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16세기. 숫자도 1만 500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여기까지였다. 뭐든지 문제는 잘 나갈 때 일어나기 마련. 영향력은 커지고 늘 나가 싸우는 것도 아니다 보니 자꾸 다른 곳에 정신을 팔게 됐다. 또 초기와 달리 세습체제로 바뀐 것도 권력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눈을 돌린 게 바로 정치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그 괴물의 입에 통째로 머리를 넣었다가 신세를 망친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 재산을 쌓고 점차 이익집단화 돼갔다. 그에 비례해서 전투력은 약화됐다. 싸움판에서도 펑펑 나가떨어졌다. 배는 나오고 싸움은 못하는 일종의 괴물군대가 된 것이다. 그럴수록 무도함은 하늘을 찔러 술탄도 우습게보기 시작했다. 결국 17세기부터는 끄떡하면 반란을 일으켜 술탄을 살해하거나 자신들 입맛대로 갈아치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사람이 바로 마흐무트 2세. 참다못한 그는 예니체리를 뿌리 채 뽑아버리기로 했다. 1826년 술탄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예니체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탕을 위한 함정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반란을 유도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뻔한 결말로 갈 차례. 톱카프 궁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해 6월 14일과 15일 예니체리 반란군은 술탄의 군대에 밀려 자신들의 막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술탄은 막사에 포격을 명령했다. 15문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반란군 막사는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자도 대부분 유배되거나 처형됐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군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새삼스레 교훈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그저 그들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때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시신(혹은 머리라고도 한다)을 어느 나무 아래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무를 예니체리 나무라고 불렀다. 그 기록을 읽으면서 그 나무를 꼭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잘못을 떠나, 아비규환 속에 눈도 못 감고 죽었을 그들에게 묵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의 영혼 중 하나가 내게 손짓이라도 한 것일까. 결국 예니체리 나무는 찾지 못했다. 정말 그런 나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훌리아가 괜히 미안해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목 자르는 나무’가 있대요. 물 대신 피를 먹여 키웠다는데…. 혹시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따 보여드릴게요.” “아니야. 됐어요. 이젠 포기할래.” 호러물이 그리워서 예니체리 나무를 찾은 건 아니라네. 병사들이 훈련을 했을 법한 마당에는 잔디들이 파랗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세월을 듬뿍 머금은 나무들이 키를 자랑하고 있다. 저들 중 하나겠지. 예니체리 광장의 나무와 그 아래 잔디밭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아야 이레네.

 

사람들은 그 나무들 사이를 무심히 오간다. 잔디에 앉은 연인들의 얼굴엔 행복이라고 쓰여 있다. 저들에게 그 비극의 한 자락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떤 방식이든 생명은 늘 오고가는 것을. 두 번째 문을 통과하려면 오른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야한다. 아참, 자꾸 붙잡아서 미안하지만 제1정원에서 놓치지 말고 가야 할 건물이 하나 있다. 왼쪽 나무그늘에 수줍은 듯 숨어있는 아야 이레네(Aya irene). 성소피아 성당 이전에 세워진 초창기 교회의 하나로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다.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니카의 반란’ 때 불태워져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했다. 오스만 시대에는 예니체리의 무기창고로 쓰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고깔모자 기둥이 2개 우뚝 서있는 두 번째 문을 지난다. 전에는 오로지 술탄만 말을 타고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도 영화도 덧없는 것. 지금은 땀에 전 동양 사내 하나가 배낭을 메고 그 문을 지난다. 문을 나서면 바로 제2정원. 다섯 갈래의 길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져 있고 붓처럼 생긴 향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제2정원에는 대형 부엌이 있다. 궁전에서 일하는 5,000명의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예니체리들은 월급과 빵을 받을 때 궁전에 왔는데 이때 모든 빵은 무게가 같아야 했다. 만약 다를 경우 빵 만드는 사람의 손목을 댕강 잘랐다고 한다. 어디 괴기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예니체리와 관련된 얘기는 왜 이리 끔찍한 게 많지? 톱카프 궁전의 두 번째 문.  여기에도 ‘술탄의 여인들’이 사는 하렘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번엔 하렘도 꼭 돌아보고 싶었지만 역시 여의치 않다. 별도로 티켓을 끊어서 관람해야한다. 티켓이 문제가 아니라 30분마다 그룹을 지어 입장해야 한다. 그만큼 별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훌리아를 찾아서 물어보니 일정에 하렘 관람계획은 없다고 한다. 허탈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닐 때 가장 난감한 점이 이런 것이다. 조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포기하는 수밖에. 세 번째 문인 행복, 혹은 지복의 문을 지나 터덜터덜 제3정원으로 걸어들어간다. 오늘 관람객 정말 많다.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빽빽한 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거대 유람선이 들어왔단다. 바다를 낀 도시니 크루즈로 오는 관광객도 많다. 하필 그들과 톱카프 궁전에서 만난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 같다. 여기가 바로 인종 전시장? 제3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오른쪽에 있는 보석박물관. 내겐 쓰린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왔을 때 사진을 찍으려다가 경비원에게 끌려나오다시피 물러났던 그곳. ‘스트로보를 쓰는 것도 아닌데 사진 좀 찍는다고 보석이 경기를 하냐?’ 어쩌고 꿍얼거린 기억이 있다. 거길 들어가기 위해 뙤약볕 아래 엄청나게 긴 줄이 이어져 있다. 보석에 대한 원초적 열망일까? 아니면 남들이 서니까 얼떨결에? 보물박물관 위쪽이 바로 의상 전시실이다. 옛날에는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역대 술탄의 옷들을 전시한 곳이다. 제2정원. 톱카프 궁전의 세 번째 문. 보석박물관 앞의 긴 줄.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옷과 비슷한 터키 전통의상이 전시돼 있다는 기 록이 생각나 슬그머니 방향을 바꾼다. 고구려와 터키인의 조상 돌궐 사이의 엄청난 비밀을 발견할지 알아? 마침 줄을 선 사람도 없고 한가한 편이다. 그렇다면 둘러보고 가자. 하지만 들어가서 첫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아니나 다를까. 보석박물관의 ‘그’와 똑같이 생긴 경비원이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온다. 사진 찍으면 안 된다는 거지? 알았어, 알았어. 치사해서 안 찍고 만다. 그래도 한 장 찍은 건 안 지울 거지?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나무그늘에 의지해 더위를 식힌다. 유난히 얼굴을 가린 아랍계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히잡은 차라리 애교스러울 정도다. 아예 전신을 까만 통옷으로 덮은 여성들이 ‘Blackfish’처럼 정원을 유영한다. 심지어 한 여성은 까만 통가죽 옷을 입었다. 이 더운 여름에? 아주머니, 그러다 땀띠 나십니다. 평생 갇혀 살아야했던 하렘의 여인들이 오버랩 된다. 궁전에 갇혀 살든 검은 옷에 갇혀 살든 자유를 저당 잡힌 건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종교 가 어떻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여성을 이야기할 뿐이다. 헌데 좀 이상하다. 요즘 터키 여인들은 시골이나 아주 신앙심이 깊은 무슬림을 빼놓고는 히잡도 잘 안 쓰는데. 이들은 어디서 온 거지? 그나저나 그녀들이 입은 게 대체 차도른지 부르카인지 알 수 없다. 역시 책으로 배운 지식의 한계다. 무슬림 여성들의 몸을 가리는 옷이 한 가지인 줄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르다.  고구려 벽화의 옷과 비슷하다는 투르크족의 전통 의상. 우선 여성들이 밖에 나갈 때 머리에 쓰는 가리개를 히잡이라고 한다. 스카프나 두건과 비슷한데 얼굴과 가슴까지 가리는 것도 있고 머리에만 쓰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정작 구분하기 어려운 건 머리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망토 형 통옷이다. 페르시아 말에서 온 차도르(chador)는 이란 등의 시아파 여성들이 입는 검은색 옷을 말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입는 검은 망토는 아바야(abayah)라고 부르고 아라비아반도와 베두인족 일부 여성들이 입는 옷은 부르카(burqah)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뭐가 차도르고 뭐가 부르카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또 옷의 형태까지 다른 건지 이름만 다른 건지도 잘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전에는 눈 주변에만 작은 구멍이 트여져 있거나 베일을 댔는데 요즘은 짙은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이다. 그것 참 아이디어다. 멋도 내고 가리겠다는 목적도 달성하고. 어떤 여성은 DSLR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사진도 찍고 자기들끼리 수다도 떤다. 그래. 다를 게 무어람. 세상도 궁금하고 멋도 부리고 싶은 똑 같은 여성이겠지. 사진을 찍으려고 생각해보니 정면에서 셔터를 누르기가 민망하다.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익명 속으로 가두는 수밖에. 일부러 역광을 안고 서서 뷰파인더 안에 그녀들을 불러낸다. 내 사진 속에서 그녀들은 검은 실루엣일 뿐이다.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일가족 중에 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불쑥 묻는다. 톱카프 궁전의 제3정원. 

이슬람 고유 의상을 입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여성.

 

“Where are you from? Japan? Core?” Japan 다음에 China? 라고 묻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얼른 Core라고 대답한다. 물론 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그러는 너는 어디서 왔니?” “나? 제노바” 으음, 제노바. 굉장히 멀리서 왔네? 아니지? 난 지금 이스탄불에 있잖아. 그렇다면 내가 멀리서 온 거고 이 친구는 이웃에서 온 거지. 해외를 다니다 보면 가끔 그렇게 공간 개념을 분실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내 눈길을 잡아끄는 건 그의 아내다. 그녀는 부르카인지 챠도르인지로 전신을 완전 싸매고 있다. 예의 선글라스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내게 말을 건 남편이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차림을 했고, 부인을 따라가는 아이들 셋 역시 평범한 옷차림이다. 어찌 보면 부조화의 극치다. 제노바에도 저렇게 교리를 철저히 지키는 무슬림이 살고 있나? 아니면 아랍의 무슬림이 제노바에 가서 임시 거주 중일까. 유럽인과 아랍인은 쉽게 구분이 가능한데 이 친구는 좀 헷갈린다. 궁금한 걸 푸는 건 나중문제고 이렇게 특이한 가족을 만났는데 그냥 말 수 있나. 얼른 사진 한 장 찍어두자. 또 다른 걸 참견하려는 사내를 불러세운다. “이 사람들 몽땅 네 가족이냐?” “응. 맞아.” “그럼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No!! 절대 안돼.”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는 무슬림 여성들. 뭐야, 장난하는 거야? 말이나 걸지 말지. 조금 전에는 실실 웃으며 간이라도 빼줄 듯하더니, 사진을 찍는다니까 그렇게 펄펄 뛰냐? 에라이! 치사한…. 헌데 아직도 저런 남자가 있구나. 이 더운 날 통옷을 입고 버티는 아내에게 애들 셋을 혼자 맡기다니. 남자는 슬리퍼 끌고 마실 나온 사람처럼 이 참견 저 참견 다하며 지나가는데 여자는 아이들에 짐까지… 구경이고 뭐고 집에 있는 게 낫겠다. 하긴 한국에도 저렇게 간 큰 남자들이 없지는 않더라. 남들 걱정 그만 하고, 좀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봐야지. 카메라를 바투 쥐고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전장 속으로 돌진한다.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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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블루모스크. 6개의 미나레트가 모두 잡혔다.

블루모스크 입구의 'ㅅ'자 형태로 늘어진 쇠사슬.

나는 지금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혹은 술탄 아흐메트 1세 모스크앞에 서 있다. 오스만 투르크의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에 의해 지은 모스크다. 이름이 좀 복잡한가? 그럼 잘 알려진 이름 블루모스크로 부르자. 블루모스크의 정문인 남동쪽 문을 통해 들어가려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춘다. 문 상단에 굵은 쇠사슬이 자 모양으로 늘어져 있다. 조금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다행이 사람 키보다 높아서 머리에 걸리는 일은 없다. 대체 무슨 용도로 걸어놓은 쇠사슬일까? 사연이 없을 리가 없다. 이 문을 들어갈 때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바로 술탄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술탄이라도 유일신 알라의 성전에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말을 타기는 하되 쇠사슬이 늘어진 만큼 고개를 숙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순전히 내 짐작이지만 이 모스크를 지은 아흐메트 1세가 만들어놓은 게 아닐까. 스스로 낮추고 삼가는 자세. 나 역시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내정(內庭), 즉 안뜰로 들어서려는 찰나에 하늘이 우르르 내려앉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관람객들이 우왕좌왕 몰려다닌다. 나 역시 사진을 찍다말고 회랑으로 피해 비를 긋는다. 대체 이 비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너무 급하게 보려하지 말고 한숨 돌리라는 뜻일까. 하긴 그렇다. 먹는 것뿐 아니라 보는 것 역시 서두르면 얹히기 마련. 숨을 돌리고 나서 찾은 잠깐의 여유는 한담으로 이어진다. 먼저 명랑소녀, 아니 명랑처녀 훌리아가 바람을 잡는다.

 

블루모스크 정면.

블루모스크의 회랑들.

“(특유의 말투로) 저는 2008년 가이드 시작했는데, 실수 많이 했어요.”

쏟아지는 비에 빼앗겼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한번은 어떤 선생님(어지간하면 다 선생님이다)이 저 건물은 언제 지었냐고 물었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아세요?”

그걸 어찌 알아?’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입만 바라본다.

~팔새끼라고 했어요.”(이 문장을 받아 써도 되나? 고민 고민)

? 이게 무슨 잡탕밥에 파리 낙하하는 소리? 고객에게 그렇게 험한 말을.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모두 허리를 꺾는다.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이었거든요.”(두 발음이 거의 차별화가 안 된다)

흐흐. 훌륭한 유머였어. 한국에서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18세기 식 농담을 한다고 몰매 맞지 않는 게 다행이겠지만, 그대는 터키인 그리고 훌리아니까.

이젯은 재미있는 에피소드 없어요?”

한쪽에서 같이 웃고 있는 이젯의 허를 찔러본다. 하지만 이 친구 한 5분간 그저 눈만 돌리고 있다. 괜히 물었나. 한참 뒤 드디어 대어 하나 건졌다는 듯이 눈이 반짝거린다.

손님이 옷 시장 가자고 하는데, 해물탕 시장으로 잘 못 알아듣고 물고기 시장 갔어요.”

순간 주변의 공기라 싸늘해진다. 이거 웃자고 한 소리 맞아? 설마. 아무도 웃지 않는다. 이젯의 표정이 급격히 우울해진다.

 

회랑의 벽과 천장.

가만? 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잖아. 그리고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황당하고 오래 기억에 남았겠어. 나는 안 그런가? 미국 사람이 milk라고 하면 미역으로 들리더라. 내가 가이드였다면 우유 먹고 싶다고 하는데 미역줄기 사다 줬을 거 아닌가. 그래, 뭐든지 상대방 입장으로도 생각해봐야지. 사해동포라는 말도 있는데. 그제야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이젯의 표정이 더욱 우울해진다. 비는 줄기차게 쏟아진다. 위로도 할 겸 이젯을 불러서 부탁을 하나 한다.

지금 한국에는 비가 안 와서 큰일이거든요. 농사지은 게 다 타고 있어요. 이젯이 이 비를 한국에도 좀 오라고 기도해줘요. 여긴 모스크고 이젯은 무슬림이잖아요. 내가 부탁드리는 것보다 훨씬 잘 들어줄 것 같아서.”

그가 기도를 해줬는지는 모른다. 착한 사람이니까 해줬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저 빗물을 매개로 400,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빗물은 흐르고 스며들어 저 땅 밑 어디엔가 자취를 묻었을 옛사람에게 동양에서 온 한 사내의 뜻을 전하고 있을지도. 400년 전이라고 하니까 느닷없이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내 왼쪽은 히포드롬이고 오른쪽은 성소피아 성당인데 그럼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블루모스크 이전에 무엇이었을까.

 

블루모스크 내부의 샹들리에.

블루모스크의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들.비잔티움 제국 시절에는 지금의 블루모스크 자리에 황제의 궁전과 히포드롬의 관중석이 있었다고 한다. ! 왠지 전차경주를 했다는 광장에 관중석이 없다는 게 궁금하긴 하더라.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뒤에는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블루모스크를 세우기로 결정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그들의 저택을 구입하고 터를 닦는 일이었다. 비잔티움의 옛 궁전 일부는 그대로 모스크의 기초로 쓰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건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잔티움 궁전의 기초 위에 오스만의 모스크가 들어선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을 때도 곳곳에 있는 그리스 신전에서 기둥뿌리를 뽑아오지 않았던가.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되어 이복형의 반란 등 숱한 도전을 극복하고 24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다스렸던 아흐메트 1. 그는 무슨 심정으로 이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을까. 대개는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성전을 지어보겠다는 인간적 욕망으로 해석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신 알라를 통해 제국을 부흥시켜보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제국을 물려받았을 때 오스만은 이미 내리막길로 접어든 뒤였다.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쓴 맛을 보고 그때까지 무시하던 오스트리아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치욕스런 현실. 그럴 때 인간은 신을 찾는 법이다. 그래서 지은 게 이 거대한 건축물 아닐까.

양쪽의 육중한 기둥들이 '코끼리 다리'다.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은 여성들은 입장할 때 보자기 치마를 입혀준다.

이 블루모스크는 박제로 걸어둔 문화재가 아니다. 지금도 현역 이슬람사원으로 숱한 무슬림이 찾아온다. 그래서 성소피아 성당과 달리 입구에서 신발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들어가야 한다. 또 짧은 치마나 반바지를 입은 여성은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찾아온 손님을 박대해서 내쫓지 않으려 나름대로 준비를 해 놨다. 입구에서 한 여자가 파란 보자기를 둘러 입혀 들여보낸다. 줄줄이 서서 임시치마를 입는 모습 역시 장관이다. 적당히 할 것이지. 계속 그 모습을 찍다가 결국 눈총을 한 방 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한손에 신발을 넣은 비닐봉지를 들고 여자들 사이에 끼어서 죽어라 셔터를 누르는 꼴이라니. 안으로 들어가니 블루모스크 특유의 위용은 여전하다. 전에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거대한 샹들리에,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천장의 문양들만 눈에 보이더니 이번엔 중앙 돔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네 개의 기둥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온다. 5m짜리 기둥을 흔히 코끼리 다리라고 부른다. 성소피아 성당은 두꺼운 벽으로 돔의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했는데 비해서, 블루모스크는 중앙의 거대한 돔을 세계의 작은 돔이 받치고 또 이 돔들을 그보다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다. 그렇게 하중을 분산시킨 뒤 결정적으로 네 개의 육중한 기둥으로 받쳐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피아 성당보다 더 위대한 건축물을 짓겠다는 목적은 달성한 것일까. 워낙 거대한 건물들이다 보니, 언뜻 보면 규모나 높이 등이 비슷해 보여 그 궁금증은 더 한다.

 

 

여성 전용 예배공간.

행복해 보이는 무슬림 일가족.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 크기 면에서 차이가 난다. 블루모스크의 중앙 돔의 지름은 23.5m, 높이는 43m. 그럼 성소피아 성당은? 지름이 33m에 높이가 56m. 건물 전체로 봐도 블루모스크는 길이 51m에 너비가 53m고 성소피아 성당은 길이 77m에 너비 71.7m. 앞에서 하중을 견디는 설계를 예로 들었듯이, 건축술 역시 1000년 전에 지은 성소피아 성당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애당초 무엇을 이기기 위해, 혹은 무엇보다 나은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부터가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예술품에 우열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그리 바람직한 것일까. 성소피아가 낫느니 블루모스크가 낫느니 하는 내 잣대 역시 무지한 장삼이사의 안목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슬람의 모스크는 여성과 남성의 예배공간이 다르다. 블루모스크라고 다르지 않다. 여성을 2층에 배치하거나, 1층이라도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놓았다. 남녀차별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는 제도이기를. 밖으로 나와 카메라 메모리를 갈아 끼우다 말고, 아이들과 함께 온 무슬림 가족에 눈을 빼앗긴다. 여자는 하얀 히잡을 쓰고 있고 남자는 평범한 차림에 배낭을 메었다. 두 세 살쯤의 아기와 예닐곱쯤 보이는 형은 아직 천진무구하다.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답답했던지 밖으로 나와 아직 비가 그치지 않은 마당을 뛰어다닌다. 괜스레 내가 나른한 행복감에 빠진다. 저들은 무엇을 기원하고 돌아가는 길일까. 신은 저 아이들을 어느 방향으로 데려갈까. 블루모스크를 벗어난 뒤 광장을 가로질러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한다.

 

멀리서 본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 가는 길. 관광객과 상인들이 얽혀있다.

비가 그쳤다. 구름도 조금씩 벗겨져 파란색이 언뜻언뜻 드러나기 시작한다. 블루모스크에서 성소피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운동회 날처럼 인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벤치 위의 고양이들은 여전히 게으르게 누워 인종 품평회를 하고 있다. 성당 앞의 광장도 지난 가을보다 훨씬 복잡하다. 노점상도 많아졌다. 지도나 장난감을 파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 군옥수수와 밤을 파는 상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 눈에 봐도 한국인인 청년 두 명이 다가와 군밤이 든 봉투를 내밀면서 먹어보란다. 조금 전 누가 나눠준 옥수수도 영 맛이 별로여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다. 원래 이곳 옥수수가 그런 건지 미처 익지 않은 걸 구웠는지 모르지만 물컹물컹한 게 성에 차지 않았다. 군밤이라고 특별한 게 있으려고. 그런데, 청년이여! 왜 내게 이른 호의를? 이 친구들은 대답도 하기 전에 킬킬거리며 웃는다.

맛이 없어서요.”

!! 그럼 그렇지. 맛이 없다고 그걸 내게 주나?”

그게 아니라, 성소피아 성당 앞의 군밤은 맛이 없다는 걸 고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

흐흐,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그럼 못 쓰느니. 저들도 먹고 살아야지. 그리고 말이다. 청년들아. 우리만 속으면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 한국인들이 많다보니 느닷없이 마주쳐도 전혀 낯설지 않다. 아들 또래의 청년들과 자연스럽게 수다를 떤다.

 

성소피아 성당 정면.

성당 앞에서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노점상.

매표소를 지나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사각으로 움푹 파놓은 곳이 있다. 대개는 그냥 지나치는 그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돌들과 만난다. 어떤 돌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기둥의 잔해로 보이는 돌도 있다. 질서 없이 눕거나 서 있는 돌들이 지난 1500년을 이야기 해준다. 이들은 지금의 성소피아 성당 자리에 있었던 옛 성당의 잔해들이다. 저 돌들의 주인인 두 번째 성소피아 성당은 532년의 니카반란에 의해 불타버렸다. 당연히 첫 번째 성당도 있었다. 320년에 세워졌지만 404년 성난 군중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왜 성났는지까지 얘기하려면 너무 복잡해진다. 아무튼 기구한 운명이다. 타고 세우고 타고 세우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돌들이다. 초라한 퇴역군인의 모습이지만, 지금 이 건물을 받치고 있는 돌들보다 훨씬 선배들인 셈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를 어디에 둬야할지 조금 혼란스러워진다. 황제의 허영과 욕망은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건물을 짓기 위해 510개월 4일 동안 1,000명의 목수와 1만 명의 인부가 밤잠을 못 자고 흘린 땀과 눈물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자.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장엄한 건축물에 들어서면 내 안에 신성한 기운이 절로 깃드는 것을 느낀다. 내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알라의 이름이 적힌 원판, 그 옆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또 그 옆에 선지자 무함마드의 이름을 적은 원판. 그렇게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불타버린 두 번째 성소피아 성당의 잔해들.

성소피아 성당 내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섞여있다.

천장에 그려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사람 눈에 보였든 숨어있었든 그들은 그렇게 500년 이상을 어울려 살았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정말 인간의 의지로만 이뤄졌을까. 창으로 들어온 빛이 모두를 감싸 안고 신성을 노래한다. 2층으로 올라가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바닥에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곳.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대리석 바닥을 깨고 만든 무덤이다. 무덤은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 요한이 그려진 데이시스라는 이름의 성화 맞은편에 있다.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라는 사람이 묻혀 있었다. 그런데 황제나 정교회 수장도 아니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의 무덤이 어떻게 이 위대한 건축물 안에 있을까. 단돌로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던 사람이다. 다른 시각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약탈자이자 천하의 악인이다. 4차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 기독교 세력이 기독교 국가를 침략해서 약탈하고 파괴한 행위는 히포드롬에서 조금 비춘 적이 있다. 베네치아 출신의 단돌로는 십자군을 부추겨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게 한다. 12044, 십자군은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엄청난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한 뒤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때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3/8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서 가톨릭과 정교회로 나눠졌던 동서교회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비잔티움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무엇보다 큰 불행은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작품이 불타거나 약탈돼 밀반출됐다는 것.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도 저지르지 않았던 역사적 야만행위였다.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세례 요한이 그려진 '데이시스' 성화.

메카 방향으로 향한 황금색 미흐라브.

아참, 단돌로가 죽은 이야기나 마저 해야지.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해인 1205년 사망했다. 그때 나이가 아흔 일곱이었다. 그 나이에 참나 같으면 조용히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겠다. 아무튼 힘이 있던 그는 성소피아 성당 내부, 지금 내가 내려다보는 곳에 묻혔다. 그럼 그걸로 끝? 아니다. 1261년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으면서 무덤은 파헤쳐지고 뼈는 개들에게 던져졌다. 개들도 자존심이 있지 그런 뼈를 먹을리가. 약탈자의 무덤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머물 기분도 아니다. 밖으로 나와 노천카페 의자에 앉아 땀을 들이며 이것저것 메모를 한다. 곧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다. 일행과 합류해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걸어간다. 도착한 곳은 ‘ETHNIC’이라는 간판이 붙은 레스토랑 겸 카페.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이젯이 메뉴설명을 한다.

오늘 소스는 거지예요.”

거지? 이게 무슨 소리지? 중국에서 거지닭은 먹어봤지만 소스가 거지라는 건 처음인데? 몇 번 확인하는 과정에서 거지가 아닌 가지임이 밝혀진다. 에구, 저 친구 언제 한국말 다 가르치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식당은 경치도 좋고 다른 손님들도 없어 비교적 안락하다. 식사도 푸짐하고 맛이 있다. 먹고 마시니 마음이 한껏 누그러진다.

 

에피타이저 샐러드 메인 요리 '케밥'

메뉴판 속의 비빔밥. 모든 메뉴 중에 가장 비싸다.

"빨리, 빨리"를 외치던 수박 파는 청년.

후식은 바클라바(Baklava)’라는 사탕과자. 버터와 벌꿀레몬시럽의 범벅으로 말 그대로 단맛의 종결자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먹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으니 주인이 다가와 “very very sweet”이란다 최고의 단맛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엄청 sweet”이라고 했더니 그도 엄청 sweet”이라고 따라한다. 그러면서 엄청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뭘 무슨 뜻? 당신 말대로 very very라는 뜻이지. 당신네 나라말로는 이고. 설명을 듣더니 나도 한국말 좀 안다고 으쓱거린다. 한번 해보라니까 삼성, 엘지, 현대란다. 기껏 배운 말이 그 세 단어였어? 그리고 엘지는 한국말도 아니잖아. 안되겠다. 한국어 교습 좀 하고 가야지. “내가 ‘Are you happy?’라고 하면 아저씨는 뭐라고 대답 해야지요?” "으음~ 엄청 happy!!” 그렇지, 그렇지. 참 말도 잘 들어. 하란다고 넙죽넙죽 따라 하냐? 결국 나는 느닷없이 생긴 제자에게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까지 완벽하게 교육했. , 그냥 이 나라에 남아서 한국어 교습이나 할까봐.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메뉴표가 보이길래 한국음식은 없나 싶어 차분차분 들여다본다. 그러다 기어이 낯익은 이름을 찾아낸다. ‘Bibimbap’ 옳지. 신선로까지는 아니어도 그 정도는 있어야지. 그런데 가격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진다. 무려 25리라. 한국 돈으로는? 환율을 700원씩만 쳐도 무려 17,500원이다. 길을 되짚어 나오다 좌판에 잘라놓고 파는 수박이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는데 수박 파는 총각도 한국말로 한마디 한다. “빨리~ 빨리~” 아냐!!! 이건 아니란 말이야! 누군지 좋은 것 가르쳤다.

 

posted by sagang

 

아침 식사를 한 ‘Simit Saray’.

카페 Simit Saray에 진열된 아침식사.

아침 식사를 위해 찾아간 곳은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한적한 골목. ‘Simit Saray’라는 간판이 붙은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너무 일러서일까, 주인의 눈이 화등잔 만해지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양에서 진출한 떼도둑이라도 든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런 판이니 음식준비가 제대로 돼 있을 턱이 있나. 사실 나는 아침식사가 그리 당기는 편도 아니다. 어디 가서 밤새 고아놓은 해장국 한 그릇 먹는다면 몰라도. 비행기에서 새벽에 먹은 기내식이 아직도 위장에서 저항군처럼 버티고 있다.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실내를 벗어나 옥상으로 올라간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순간, 이건 또 무슨 징조? 난데없이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늘이 내내 무겁더라니. 이스탄불은 비가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라 당황스럽기보다는 차라리 신기하다. 우리 땅이 가뭄으로 쩍쩍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온 터라 하늘에 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하긴 내가 뭐라 한들 눈 하나 꿈쩍 안 하겠지만.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차려진 아침 식사는 딱딱한 빵이다. 이름을 물어보니 시미트란다. 한국말로 하면 깨빵이라고 훌리아가 보충설명을 해준다. , 그래서 가게 이름이 Simit Saray였구나. 몇 조각 떼먹다가 그냥 내려놓는다. 있을 때 먹어두라는 내 여행수칙이 깨지는 순간이다.

 

 

Simit Saray에서 빵을 파는 아가씨.

하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다 보니 실내에도 손님이 여럿 앉아있다. , 이곳도 아침식사를 밖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홍콩이나 중국의 대도시에서 보았던 아침식사 대열이 생각난다. 문을 나서려는데 빵을 파는 아가씨가 자꾸 흘끔거리며 나를 훔쳐본다. 역시 내가 한 인물 하지? 헌데 자세히 보니 시선이 꽂힌 곳은 내가 아니라 카메라다. 그럼 그렇지. 수줍어하는 모습이 예쁘다. 터키 아가씨들 예쁜 거 한 두 번 보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나가기엔 아쉽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어도 돼요?” 물으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린다. 영어는 못 알아듣지만 너 하는 짓 보니 무슨 소린지 알만하다는 표정이다. 아무려나 땡큐다. 사진을 찍고 나니 얼른 보여 달란다. 수줍은 척 하면서도 할 건 다한다. 자기 얼굴을 확인하더니 “Good”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래, 내겐 그대가 Good이야. 식사를 마친 뒤 히포드롬(Hipodrome) 광장 쪽으로 걷는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하지만 우산은 캐리어에 들어있어 꺼낼 수 없다. 뭐 어때. 가끔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괜찮지. 어릴 적엔 매번 맞고 다녔는걸. 비를 무서워하지 않기는 길 위에서 뒹구는 고양이나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지나가는 트램도 마찬가지다. 이번 이스탄불 탐색은 히포드롬에서 시작해서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그리고 성소피아 성당으로 불리는 아야소피아 박물관 순으로 잡았다. 년에 혼자 돌아봤을 때와 똑같다.

  새벽 거리를 오가는 트램.

 

히포드롬에서 '깨빵' 시미트를 파는 청년.

9개월 만에 다시 찾은 이 위대한 유산들 앞에서 난 또 무엇을 배워야할까. 조금 고민스럽다. 그때 느닷없이 떠오르는 경구.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라. 모든 사물은 다른 각도로 볼 때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그래. 다른 시각으로 보면 되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스쳐간 곳들 중에는 미처 못 보고 지나간 것이 얼마나 많으랴. 놓치고 지나간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으랴. 비에 젖은 바닥에 엎드리는 한이 있어도 본질을 보려 애쓰리라.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전쟁 전인 1901년 오스만의 34대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게 기증했다는 육각정앞에 서 있는데 저만치 재미있는 모습의 청년 하나가 눈에 띈다. 키가 훌쭉하게 큰 청년이 꽤 높이 쌓은 무언가를 머리에 인 채 걸어오고 있다. 재주도 좋지. 멀리서 봤을 때 꽤 높이 쌓은 무엇이던 그것은 눈앞에 오면서 도넛으로 쌓은 탑이 된다. 재미있어서 사진을 몇 장 찍는데 그가 내 앞에 와서 선다. ! 탑은 도넛이 아니라 조금 전 카페에서 아침으로 먹은 깨빵, 시미트. 그러니까 이 청년은 탑처럼 쌓은 시미트를 이고 아침 굶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1개에 1리라, 1달러를 내면 3개를 준단다. 이거 미안해서 어쩐담. 사진을 찍었으니 몇 개 사주는 게 예의일 텐데 조금 전에 먹고 왔으니. 청년은 살 기색이 없는 걸 보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른 손님에게로 간다. 비가 내리는 히포드롬은 맑은 날과 또 다른 운치가 있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지 않아서 사람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광장을 오간다.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가 기증했다는 정자.

이쯤에서 히포드롬을 소개하고 가야 예의겠지? 히포드롬은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과 나란히 배치돼 있는 로마시대의 유산이다. 훗날 지어진 정식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지만 히포드롬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쓴다. 뜻은 말 운동장이란다. 말 운동장? 그럼 경마장? 말이 끄는 전차경주장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길이 130m, 너비 450m의 말굽모양으로 40열의 객석에 10만 명까지 수용했다는 굉장한 규모의 광장이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제국의 중심이었다. 주요 국가 행사는 여기서 치러졌다. 또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도 열렸다. 광장에는 갖가지 유물이 남아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리고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 뱀의 기둥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고 있는 기구한 운명들이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지금 높이의 세 배인 60m였고 무게도 800t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세 도막으로 나눠 윗부분만 가져왔다. 이산가족이 아니라 이산 몸통이 돼버린 셈이다. 뱀 기둥도 머리를 잃고 몸통만 남았다. 내 눈에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남긴 흉물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광장 자체가 무사했던 것도 아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제4차 십자군은 히포드롬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가톨릭)의 군사가 또 다른 기독교(정교회)의 나라를 철저하게 유린한 것이었다. 그 뒤로 광장에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역사는 신의 논리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쓰는 걸일까.

 

 

히포드롬 주변의 카페.

나는 이 히포드롬에 서면 각종 사연을 지닌 유적들보다는 사람 이야기가 먼저 난다. 특히 심약한 범부에서 위대한 황제가 된 한 남자, 그리고 매춘부에서 황후가 되어 위대한 황제를 만든 여자. 이왕 왔으니 그들을 잠깐 만나고 가자. 1000년 이상 로마의 수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정도는 기본 예의다. 그렇다고 절대 딱딱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니 긴장할 건 없다. 유스티니아누스 1.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고 잃어버렸던 로마의 영토를 회복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긴 황제의 이름이다. 그가 황제가 되는 자체에 우여곡절 있었다.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는 그의 외삼촌이다. 트라키아의 가난한 농민출신이었던 유스티누스는 말 그대로 ()’으로 군에 입대했다. 밥이라도 실컷 먹으려고 병졸이 된, 내 땅의 옛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서 멈출 사람은 아니었다. 운이 좋았던지, 아니면 피눈물 나게 노력했던지 황실 경비사령관이 되었고 결국 518년에 황제가 되었다. 공부할 틈이 없어 까막눈이었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던 황제는 누이의 아들인 사바티우스를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나라 일을 맡긴다. 또 제법 일을 꼼꼼하게 한다 싶으니 양자로 삼았다. 그 조카가 바로 외삼촌이자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 이름까지 바꾼 유스티니아누스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자신이 죽기 몇 달 전에는 조카를 공동황제로 임명해 황제의 길을 열어준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런 과정을 거쳐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의 인생은 배우자 테오도라를 만나면서 또 한 번 바뀐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남자에 달렸다고? 테오도라는 그걸 뒤집어서 남자 팔자가 여자에 달렸다는 걸 증명한다. 그녀는 원래 전차경기장인 히포드롬에서 곰을 관리하던(말을 관리했다는 설도 있다) 사내의 딸이었다. 신분으로 보면 바닥 중의 바닥이었을 것이다. 경기장에서는 전차 경기 뿐 아니라 검투사나 맹수들의 싸움, 연극, 서커스가 열렸다. 서커스에 출연하는 동물들의 사육사가 필요했던 건 당연한 일. 가설이긴 하지만 서커스에서 공연을 하는 여인들은 화류계에도 몸을 담았을 것이다. 테오도라도 그 중 하나였지 않을까. 소속이 어디였든 그녀는 유명한 매춘부 혹은 무희였다고 전해진다. 매춘부니 집창촌이니 자꾸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 되는데. 이러다가 점잖은 독자 다 떨어지겠네. 그래도 전할 건 전해야지.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 히포드롬 광장을 누비던 그녀는 어느 날 느닷없이 그쪽 생활을 청산하고 양모를 짜서 생계를 꾸리는 요조숙녀로 변신하더라는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걸까? 크게 될 사람은 그렇게 뭔가 다른 점이 있는 법. 유스티니아누스가 조신한 여자테오도라를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남자, 즉 유스티니아누스는 여자의 미모와 정숙함에 반해서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하단에 새겨진 부조들.

그렇다고 모든 게 일사천리는 아니었다. 당시 로마법으로는 귀족과 평민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콩 껍질로 이중 도배했는데 그냥 물러날 총각이 있나.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인 삼촌을 졸라 귀족도 하급계층과 결혼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하도록 한다. 일은 술술 풀려 그들은 마침내 결혼에 이른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 또 한 번 히포드롬이 등장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외삼촌과 테오도라를 만난 것에 이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찾아온 세 번째 전환점은 532년에 일어난 니카반란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전차경주팀이 2개 있었다. 지금의 인기 프로축구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듯.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둘로 나뉘어져 청색당과 녹색당으로 부르게 됐다. 전차 경기의 팀들이 입는 옷 색깔에서 시작됐지만 시민들까지 두 당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귀족들이 지지했고, 녹색당은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지지 세력이었다.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청색당을 지지했다. 532110일 드디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히포드롬의 전차경기에서 두 당파의 충돌이 있었는데 결국 싸움으로 번지게 됐다. 황제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주동자 7명을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됐는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그 가운데 각 당의 한 명씩이 칼을 맞고도 살아남는 일이 생겼다. 이때 민중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인들은 냉정하게 다시 사형을 집행해서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양당이 합세해 폭동을 일으켰다.

 

세 마리의 뱀 기둥.

3일 뒤인 113. 황제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히포드롬에 들어서자, 폭도들은 황제를 향해 전차경주 선수들을 격려하는 응원 구호 니카!(이겨라!)’를 외쳤다. 번역하면 황제 타도? 이쯤 되면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겠지. 사실 이 폭동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배경이 있었다. 그 시대 비잔티움의 황제들은 벼슬을 팔아 축재를 하는 매관매직을 밥 먹듯 했다. 그렇게 쌓인 돈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각종 축제와 운동경기를 열어주면서 황제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이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런 관행을 폐지했다. 빵과 전차경주에 중독된 시민들로는 그런 황제가 '빵을 빼앗은 놈' 정도로 보일 수밖에. 밥 한 술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게 민초들 아니던가. 공짜로 먹고 즐기던 걸 빼앗았으니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그래도 좀 그렇다. 황제가 상대방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들여온 쇠고기를 먹고 백성 몇 사람 두개골에 구멍이 났다든가, 황제의 친인척이 물불 안 가리고 해먹다 보니 나라가 거덜나게 생겼다든가, 강이란 강은 전부 파헤쳐 비만 오면 '노아의 방주'를 사겠다는 주문이 빗발친다면 몰라도 빵 좀 안 줬다고 폭동까지 일으킬 거야. 폭동은 급기야 반란으로 확대돼 폭도들이 황궁에까지 몰려들었다. 그게 바로 니카반란이다. 잠깐. 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배경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고 왔다 갔냐 하냐고?

 

십자군이 발가벗긴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

생각보다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교를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니카반란이 일어난 532년 전후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신라가 금관가야를 복속했고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가 공인됐다. 백제는 사비성으로 천도했다. 그런 사실을 적은 기록들이라 봐야 몇 줄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이든 서든 자세한 건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히포드롬에서 시작된 폭동은 결국 새 황제를 뽑는 데까지 이어지고 만다. 성소피아 성당도 불길에 휩싸인다. 그 소용돌이 속에 서 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래 담이 그리 크지 못한 사내였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함성이 담을 넘어오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황제는 어마, 뜨거라!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다.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기는데 담 큰 마누라님, 아니 황후인 테오도라의 호통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어딜 가신다는 겝니까? 황제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 황궁입니다. 어의(御衣=황제의 옷)보다 더 좋은 수의(壽衣=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는 없습니다. 지금 도망치면 다시는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을 겝니다.” (대부분은 내가 재구성한 문장이다. 대충 그랬을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죽어도 여기서 싸우다 죽으라는 것이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혹은 마누라가 무서웠던 황제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벨리사리오스라는 장군을 불러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진압은 성공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폭동에 참여했던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6분의 1이라는 엄청난 숫자였다.

 

히포드롬 주변에 활짝 핀 자귀나무 꽃.

폭동과 진압. 지금 내가 서 있는 히포드롬에는 핏물이 냇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황제의 기록으로 보면 위대한 승리일지 모르지만 민초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적인 역사다. 더구나 빵 때문에 죽었다는 건 가장 슬픈 일이다. 아무튼 니카반란 진압을 계기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결국 위대한 황제로 훗날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가 이룬 업적들을 새삼 나열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지금 나는 정의와 불의, 혹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자는 게 아니라 히포드롬 이 품은 이야기를 하나 전하고 싶은 것이다. 광장을 밑천으로 미천한 삶을 살던 한 여자가 황후가 되고 황제의 지위를 잃을 뻔한 남편을 호통 쳐서 위대한 황제가 되게 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너무 길었나? 그래도 딱 히포드롬 이야기 하나만 더. 광장의 남쪽 끝에는 흉물스런 외관을 갖고 있는 탑이 하나 서 있다. 이름도 길기도 하지.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라는 이름의 탑이다. 원래 32m 높이로 쌓은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물을 입힌 아름다운 기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제 4차 십자군의 폭거로 인해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했다. 성전이라기보다는 난전이 되어버린 전쟁,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처음의 뜻은 오간데 없이 같은 기독교의 나라로 쳐들어온 그들은 이 탑조차 발가벗기고 말았다. 무기를 만든다는 영분으로 탑에 있는 청동을 몽땅 떼어낸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리석만 남은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비잔티움의 황제, 즉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옛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히포드롬의 관광객들. .

다른 사람들이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세 마리 뱀의 기둥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나는 흉물스러운 형태의 오벨리스크 앞을 홀로 서성거린다. 역사는 미명(美名)만 기록하는 게 아니라 악명(惡名)도 기록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쥐고 잠시 고뇌한다. 탑 옆에는 비 맞은 자귀나무 꽃이 탐스럽다. 여기서는 이 꽃을 무어라고 부를까. 잠시 나무에 기대어 말 없는 역사를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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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야기, 그 두 번째 장정을 시작합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4월까지 연재했던 터키, 지중해를 따라 걷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산후 조리도 못한 채 이스탄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일종의 신고 의식이 필요했던 셈이지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번엔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블로그에 연재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냥 책으로 낼까.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는 오랜 원칙을 깰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부터 또 긴 여정에 들어갑니다. 읽은 뒤 그냥 가지 말고 한 줄 답글로 아는 척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권과 마찬가지로 댓글로 격려해주신 분들에게는 2권이 출간된 뒤 저자 사인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사진 왼쪽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오른쪽으로 꺾어진 해협이 흑해와 연결되는 보스포루스, 가운데 강 같은 곳이 골든혼이다. 육지는 맨 왼쪽 반도처럼 나온 곳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 골든혼을 건너 펼쳐진 땅이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그리고 앤 앞쪽에 보이는 것이 아시아 땅이다.

전쟁? 절대 안 나요.”

새벽 430.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두 명의 청년. 시리아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냐고 들이대듯 묻자, 모루에 해머를 내리치듯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 왜 안 난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쟁을 해서 이득을 보는 쪽이 아무도 없거든요. 시리아는 물론이고 터키 역시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나면 관광산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잖아요. 또 전쟁에서 이긴다고 땅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옛날하고는 달라요.”

으으음”(엄청나게 감탄했다는 듯 끄떡끄떡)

미국도 이스라엘도 이득 볼 게 없고중국 역시 반대하는데다 NATO도 전쟁에 참여할 생각 같은 건 아예 없어요.”

그렇구나. 전쟁이 안 일어나는구나. 헌데, 이 친구들 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해박하지? 내가 장군 출신의 군사평론가들을 만난 건가? 그나저나 안 물어봐줬으면 얼마나 섭섭할 뻔 했니? 나는 감탄을 지나 감동까지 하고 만다. 하늘의 점지로 우연히 만나게 된 터키 청년들. 한국에서 3년가량 일하고 돌아왔다는 그들과의 질펀한 수다가 시작된다. 너희들 딱 걸렸어. 내가 바로 그 유명한 호기심 사나이거든.

 

하늘에서 본 이스탄불.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이 가장 걱정한 게 더위전쟁이었다. 더위야 최종 목적지로 잡은 샨르우르파란 곳이 섭씨 50도를 넘나든다니 염려해주는 게 당연하지만 느닷없이 전쟁 걱정은 왜? 출발을 코앞에 두고 터키와 시리아 간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예고하는 사건이 터졌다. 먼저 시리아가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며 지중해 연안에서 터키 전투기를 격추했다. 불뚝 성질 하나만큼은 선불 맞은 멧돼지도 부럽지 않을 터키가 넙죽 엎드려 있을 턱이 있나. 반응은 즉각 나왔다. 국경에 접근하는 시리아 군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하고 대공포와 미사일 발사기 등을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여기까지가 출발 직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문제는 내가 갈 곳이 바로 잘못 넘어지면 배꼽이 국경선을 넘어갈 정도로 시리아에 가까운 접경지역이라는데 있었다. 몇몇 사람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고 몇몇 사람은 뭔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등을 떠밀었다. 이참에 날 치워버리겠다는 심보겠지? 나는 잘하면 종군기자 한번 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전혀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현실성 떨어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목표로 했던 지역을 가지 못할까봐 노심초사였다.  그러다보니 공항에서 만난 청년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전쟁’일 수밖에 없었. 터키 사람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공항이나 이스탄불, 그리고 훗날 접경지역에서 만난 그 누구도 전쟁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걱정 따위는 서리서리 접어 배낭에 넣어두고 어렵게 만난 청년들하고 놀아볼 일이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터키 청년들.

주로 이야기를 나눈 청년의 이름은 이브라힘이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유일신 3대 종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슬람식 표기가 바로 이브라힘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에는 드물지 않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한국에서 일했다는 경험이상의 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갔을 때 서울에서 일했어요?”

아뇨, 저는 주로 지방에 있었어요. 혹시 예산이라고 아세요?”

예산?(사람들이 놀라 돌아볼 만큼 목소리가 커진다) 아다 마다야? 그쪽이 바로 내 고향이에요. 수덕사라고 들어봤어요? 내가 거기서 자랐거든.”

정말요?(기특한 것. 한국식 추임새까지 넣을 줄 알고). 제가 바로 예산에서 일했어요. 수덕사도 당근 알지요. 덕산을 거쳐서 가는.”

어라? 어라?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야. 이 머나먼 곳에 와서. 이 정도면 고향 동생? 아니, 동생이라기에는 나이차이가 좀 나고. 아무튼 객지에서 고향의 조카쯤 만난 듯한 감동이 물밀 듯 몰려온다. 이야기는 거침없이 달려 나간다. 말투도 은근히 내려간다. 그의 소망은 한국에 가서 식당을 차리는 거란다. 전에 돈을 좀 벌어서 식당을 열었는데 망했다고 아쉬워한다. 터키에도 코리언 드림을 품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하고 약간은 불안하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공항 내부.

식당을 차리면 서울은 좀 어려울 것 같고. 대전이나 천안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저 개업하면 형이 신문에 내줄 수 있어요?”

그럼, 내주다마다. 신문이 문제야? ‘테레비에도 빵빵 때려줄 테니 차리기만 해.”

내가 준 명함에서 신문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 친구, ‘실속하나 챙긴다. 나는 훗날 걱정 같은 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덜컥 굳은 맹세부터 한다. 내가 무슨 재주로 음식점 개업 소식을 신문에 내고 TV에 때려준단 말이냐. 하지만 그 소망 가득한 눈망울 앞에서 차마 “No”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용기부터 주는 거야. 그나저나 언제부터 우리가 형 동생이 됐지? 아무렴 어떠랴. 터키에 어린 동생 하나 생겼으니 좋은 일이지. 우리는 공항 대합실 한 가운데 서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사진도 신나게 찍어댄다. 남들이야 흘끔거리건 말건. 그러다가 결국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말았다. 그의 뜨거운 피가 내게로 내 피가 그에게 흐르는 느낌이 선연하다. ! 너와 나 사이엔 원래 하나의 이름을 가진 강이 흐르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번 여행 일정에 넴루트 산이 있다니까 그쪽의 아드야만이 자기 고향이라고 또 한 번 팔짝 뛰며 반가워한다. 그래, 인연이라는 게 이렇다니까.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니 안내하고 싶다며 금방이라도 따라나설 기세다. 하지만 그도 직장생활을 하는 몸. 말만으로도 고맙지. 작별을 하기 전에 터키인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새벽 승객을 기다리는 공항택시들.

내 동생, 이브라힘아, 너는 네가 유럽인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해?”

유럽이든 아시아든 아무 상관없어요. 우린 터키사람이거든요.”

우문에 현답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물어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알다시피 터키는 국토의 97%가 아시아 땅(아나톨리아)에 있고 단 3%(트라키아)만 유럽의 끝 발칸반도에 걸쳐 있다. 영토의 비중으로 보면 아시아에 속한 국가라고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의 일원이 되고 싶은 열망을 오랫동안 품어왔다. 오스만 제국이 세계를 호령할 때, 동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삼고 아시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기억을 갖고 있는 투르크족. 그 위대했던 시절에 대한 미련일까. 세계 1차 대전에서 참패하고 1923년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에게해의 섬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이스탄불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유럽 땅을 갖는다는 상징성과 서구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켜야 한다는.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는 아시아의 이름으로 살기보다는 영광이 대대손손 계속 될 것 같은 유럽에 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찬반 논란이 거세긴 했지만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도 ‘EU Style’이다. ‘준비된비회원국인 셈이다. 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에서는 달러보다 유로화가 주로 통용된다.

 

세상은 아직 박명 속에 잠들어 있다.

하지만 터키는 여전히 유럽연합의 외곽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회원국인 그리스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과 인권이나 키프로스 갈등’, ‘쿠르드족 문제등을 가입 거부 이유로 들지만 까놓고 말하면 유럽은 터키가 싫은 것이다. 과거의 정복자에 대한 공포의 잔해도 있을 테고, 어쩌면 기독교 문화권에 이슬람 문화를 끼어주기 싫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터키 경제에서 별로 덕 볼 것도 없으니 잘(?) 나가는 자기들끼리 놀아보겠다는 수작이기도 하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요즘은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 역시 유럽이 전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등 몇몇 나라의 경제가 도미노 게임이라도 하듯 무너지면서 세계 경제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판이니 그 아수라장에 무엇 하러 낄 것인가. 더구나 이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아시아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당신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 거야? ‘유럽이든 아시아든 상관없다. 우리는 터키 사람일뿐정답이다. 스스로의 자존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뒤에 몇몇 사람에게 물어봤을 때도,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듯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얘기가 잠시 무겁게 흘러갔다. 읽다가 덮은 독자는 없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임을 알아야 된다. ‘아빠 좋아? 엄마 좋아?’ 식의 선택지는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니. 아무튼 공항에서 금방 만난 동생 이브리힘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드디어 가이드들을 만났다. 맨 오른쪽이 이젯, 가운데가 훌리아.

한국에 오면 꼭 전화해. 알았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멀어지는 그의 어깨가 듬직하다. 근처에 서 있다가 잠깐 눈이 마주친 여행작가 P가 감탄사를 섞어 한마디 한다.

참 빠르시네요.”

뭐가 빠르다는 거지? 사람 사귀는 게? 내 삶이 그래요. 나는 오로지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여행을 하는 걸. 그리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또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걸. 이별은 상봉을 낳는 것일까? 이브리힘과 헤어지는 찰나에 가이드들이 허겁지겁 나타난다. 그들이 지각하는 바람에 일행은 잠시나마 공항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새로운 사람을 사귈 기회를 얻었지만. 가이드는 남녀 2명이다. 그들 눈에는 옆 사람과 내가 닮아보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들 둘이 무척 닮아 보인다. 혹시 남매나 부부 아닐까? 뭐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둘 다 키가 크지 않고 아담하다.  내가 큰 키가 못돼놔서 작은 사람들을 만나면 형제애부터 느낀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큰 사람은 가까워지는 단계부터 약간 부담을 느낀다. 가끔은 터키 사람들이 유럽인처럼 키가 큰 줄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큰 사람은 크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작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생긴 것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짐작이긴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 몽골초원에서 돌궐족으로 살 때는 우리네 생김새와 많이 비슷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중앙아시아를 지나며 적절히 피를 섞고 또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또 다른 피를 섞으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의 멀고먼 여행 이야기는 터키 역사를 말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하자.

 

여자 가이드의 이름은 훌리아(Fulya). 이들의 한국말은 조금 전에 헤어진 친구들보다 어눌하다.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 훌랄라라고 할 때 훌리아예요.”라며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준다. 훌랄라? 이거 또 괴물 하나 나타난 거 아냐? 그 순간 그녀가 말한 훌랄라는 훗날 많은 사람의 입에서 울랄라가 되기도 하고 얼랄라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지만 한국에는 단 하루만 가봤다는 스물일곱의 그녀. 명물이다. 남자 가이드의 이름은 이젯 혹은 가제트를 연상시키는 이제트(Izzet). 어라? 이제트? 이집트에서는 여자 이름인데? 람세스 2세가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잖아. 이 친구는 비교적 과묵한 편이다. 스물여덟 쥐띠라고 한국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역시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포항에 있는 선린대에서 6개월 어학연수를 받았다. 그 역시 숱한 전설을 남겼다. 한국에 하루 가본 훌리아나 현지에서 6개월 공부한 이젯이나 말이 유창하지 못하긴 마찬가지. 나는 내가 터키말을 배우느니 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로 한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의 한국어 교사다. 하드트레이닝을 시킬 테니 각오하라. 속으로 하는 생각을 그들이 알 턱이 있나. 물론 암울한 미래도 알 수 없겠지. 비행기가 도착한 게 현지시간으로 4시 40분. 새로 만난 동생과 수다를 떨고 가이드들과 감격의 상봉을 해도 아침 먹을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다. 공항을 한 바퀴 돌아본다. 밖으로 나가니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맑은 날이 많은 터키에서는 보기 드문 하늘이다. 9개월 전에 만났던 폭주족 택시운전사가 생각난다. 생명을 담보로 유희를 즐기던 그, 잘 있겠지? 별 사람이 다 보고 싶다.

 

 

차 안에서 찍은 이스탄불의 주택가.

이스탄불 시내로 가는 길. 새벽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오욕칠정. 그리고 밝음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음습한 뒷골목 풍경. 사람 살이가 모두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이 아니던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게  느닷없이 생각 나 이젯에게 묻는. 이 느닷없음이야말로 나의 오랜 지병이다.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어요?”

? 무슨촌요?”

단어 자체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하긴 학교에서 그런 말을 가르칠 리 있나. 하지만 무슬림이 대부분인 터키에도 집창촌이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이리 저리 설명해 보지만 성매매라는 단어조차 모르니 요령부득이다. 이게 어디 온갖 단어를 동원해 설명할 일이던가.

돈 주고 여자를 사는 곳, 몰라요?”

그 말은 효과를 본 모양이다. 잠시 얼굴이 붉어지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있어요.”

정부에서 인정하는 건가요?”

그렇구나. 있구나. 그것도 공식적으로. 하긴 인류역사와 함께 해온 게 그 직업이라지 않던가. 에페소에 가면 고대에 창녀촌을 안내하던 세계 최초의 광고도 있는 판인데.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동행자들의 눈초리가 약간 새치름해진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이건 순전히 학문적 궁금증이라니까요. 공부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이스탄불 시내.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새벽, 도시는 여전히 적막에 싸여있다. 그리고 모든 갈등은 평화라는 위장막에 덮여있다. 나는 지금 터키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푸듯, 이 도시에 수천 년동안 고인 이야기를 퍼내야 된다. 숙련된 백정처럼 도시의 정수리에 잘 벼린 펜과 카메라를 들이대야 된다. 느닷없이 불타오르는 전의로 온 몸이 뜨거워진다.

 

posted by sagang
2012. 7. 9. 08:30 길따라 바람따라

3호선 원당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여기서 출발. 도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길이 나온다.

경기도 고양시. 3호선 원당역 6번 출구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며느리 친정나들이 보낸 시어머니 얼굴처럼 편안하지 않다. 그렇다고 금방 비가 올 기세도 아니다. 기상청 예보에도 비 얘기는 없었다. 요즘 예보는 신경통 앓는 노인보다 훨씬 정확해졌다. 믿자, 믿어. 오늘 걸어야 할 길은 서삼릉(西三陵)누리길. 지금까지 걸었던 길 중에서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길 소개는 천천히 하고, 일단 출발이다. ? 그런데 어디로 가지? 늘 그렇듯이 첫 걸음을 떼는 게 문제다. 전철역을 뒤로 하고 직진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내판이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조금 망설이다가 일단 직진해서 큰 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는 고가도로가 오른쪽 하늘에는 전철이 다니는 길이 걸려있다. 저 길을 계속 가면 우주정거장이 나올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버릇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조금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작은 길이 보인다. 맞아. 저 길이었어. 얼른 밭을 가로질러 그 길로 접어든다. 걷는 이에게 찻길은 늘 부담이다. 조금 가면 첫 번째 경유지인 배다리술박물관이 나올 것이다. ‘이라는 단어에 입에 침이 고인다. ,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길로 가야되는데 처음엔 큰 길로 갔다. 길치 같으니...

여기서 다리 쪽으로 좌회전

! 최소한 코스는 숙지하고 가야지. 서삼릉누리길은 총 8.28km로 여유롭게 걸으면 2시간15분가량 걸린다. 전철 3호선 원당역과 삼송역 사이에 있어서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코스는 원당역배다리술박물관수역이마을서삼릉종마목장농협대학솔개약수터삼송역 순이다. 물론 반대로 삼송역에서 출발해도 뭐라는 사람은 없다. 걷는 도중에 세계문화유산인 서삼릉과 원당종마목장 등을 경유하기 때문에 역사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따라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너무 이른 시간인가? 그렇지도 않은데. 시계를 보니 10. 혼자면 어때? 길을 걷는다는 건 배낭에 외로움을 지고 가는 것이다. 자꾸 동반자를 찾기 시작하면 길의 참맛을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이다. 조금 벗어나니 서삼릉누리길이라는 첫 번째 알림기둥이 보인다. 거기서 조그만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접어든다. 길가의 텃밭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키를 재고 있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와 새 생명들을 저만큼 키워놓았다.

 

배다리술박물관 전경

증류주를 만들고 있다.

곳곳이 박물관

5분쯤 걸었을까. 저만치 배다리술박물관 간판이 보인다. 그냥 지날 수 없지. 마당에 들어서니 여기 저기 놓여있는 술독부터 예사롭지 않다. 한 바퀴 돌아보다가 마당가에 허술하게 지은 작은 집을 들여다본다. 노인 한 분이 술을 빚고 있다. 아궁이에서는 장작이 끄느름하게 타고 있고 소줏고리의 주둥이를 타고 내려온 맑은 술이 유리병으로 들어간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제사장처럼 경건해 보이는 노인의 뒷모습에 말도 못 붙이고 조용히 물러나온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말 그대로 박물관이다. 1, 2층으로 구성돼 있는데 현관에서부터 유물들이 빽빽하게 전시돼 있다. 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빚기에서부터 보관까지 온갖 도구들이 다 있다. 술 뿐 아니라 제례혼례 와 관련된 각종 전통용구와 옷들도 진열돼 있다. 이 집 주인의 관심과 취미가 보일 듯하다. 하긴 전통 관혼상제 어딘들 술이 빠지던가. 특히 눈에 띄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한 자료들. 막걸리를 마시는 밀랍인형도 있고 벽에는 생전의 사진도 붙어있다. 배다리술도가의 막걸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애용주로 이름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거기서 확인한다.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는 박관원 관장

옛날에 썼던 술 빚는 도구들

각종 전시물들

관혼상제 때 쓰던 옷들

1층으로 내려오다가 술을 빚던 노인과 마주친다. 언뜻 봐도 장인들이 가진 꼿꼿한 기운이 전신에서 풍겨 나온다. 적어도 80은 돼 보이는데 석양에 든 세대가 갖기 쉬운 열패의 기운은 조금도 없다. 묻지 않아도 배다리술도가의 4대 가주(家主)이자 박물관을 세운 박관원 씨라는 걸 알 수 있다.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묻는다.

지금도 술을 직접 빚으세요?”

그럼요. 내년이 우리 술도가 100주년이거든. 직접 100년 주를 만들 거예요. 외국에 가보면 몇 백 년 된 술, 코냑 그런 게 있잖아. 그런데 우린 그런 전통술이 없어요. 일제 때문에 전통주가 모두 사라진 거지.”

그냥 지나갔으면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말문이 터지자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지금은 5대째인 아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지만 손자가 합류해 6대로 이어질 거라고 자랑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긍심이 묻어있다.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배다리막걸리 한 잔 하시려우?

너무 오래 지체했나싶어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갑자기 우르르 쾅쾅!!! 소리가 나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진다. 어라? 천하의 술꾼이 술도가에 와서 술 한 잔 안 마시고 간다고 하늘이 노했구나. 이러니 내가 술을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가 없지. 배낭에 맥주를 충분히 넣어갖고 왔는데 어쩐담. 그래도 하늘의 뜻을 무시할 수 있나. 점심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박물관 한쪽에는 술과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비가 장엄하게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막걸리와 안주를 시킨다. 어차피 마음 한켠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내가 술도가를 그냥 지나친다는 건 개가 X을 보고 그냥 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막걸리 맛은 자랑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맛이 좋다. 하긴 지금 내 입에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는 내 손도 좀처럼 쉴 줄 모른다. 에헤야~ 데헤야~ 길이 늦어지면 어떠랴.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지. 역시 술이 좋긴 좋다.

 

비가 그친 뒤의 싱그러운 숲길

위의 숲길을 가지고 장난도 치고

숲길을 벗어나니 동네가

저곳이 바로 주꾸미로 유명한 수역이마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던 비는 내가 마지막 술잔을 비우자 거짓말처럼 그친다. 역시 술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뜻임이 확인됐다. 비가 그친 대지는 싱그럽다. 진흙길을 피해 조심스레 걷다가 숲길로 접어든다. 카메라로 줌인 샷 놀이도 하고 동네 개들과 메롱놀이도 하면서 가다보니 골프장을 끼고 도는 길이 나타난다. 높은 담장너머 골프장의 잔디들이 비를 맞아 푸른 보석처럼 빛난다. 하지만 공이 날아올지 모르니 출입을 삼가 달라는 입간판 앞에서 살짝 정이 떨어진다. 내가 그곳을 들어갈 일도 없겠지만, 저런 류의 경고문은 늘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날아오는 공에 안 맞으려면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골프장을 지나니 수역이마을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식당들이 나란히 서있다. 그 유명한 주꾸미 마을이다. 수역이마을의 어원은 수역(水域)이 마을이라고 한다. ‘물의 경계. 뭔가 있어보인다. 원래는 넓은 들을 낀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 식당들이 한 둘 들어서면서 지금은 유명한 먹거리촌이 됐다고 한다. 특히 주꾸미 요리로 유명하다. 하지만 배부른 자는 주꾸미 아니라 낙지로 미끼를 삼아도 유혹당하지 않는 법. 배고플 때 찾아오리라 다짐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다시 숲길이 이어지고

여기서 우회전

이제부터 능역이다. 또 우회전

맞으면 너만 손해니 알아서 피하라는 거야?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2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만난다. 깊 옆에는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왜 나는 찔레꽃만 보면 소복 입은 여인이 생각나는지. 가객(歌客) 장사익의 찔레꽃을 흥얼거리며 한국스카우트 연맹이라는 알림기둥을 따라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아스팔트길을 걸어야한다. 걷기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구간이 나타난 것이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참 걷다보니 저만치 넓은 숲이 보인다. 이제 서삼릉 언저리에 들어선 셈이다. 그렇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한국스카우트연맹 중앙훈련원을 지난 뒤에도 서삼릉은 까마득하다. 도중에 비닐하우스도 만나고 골프장도 만난다. 역시 골프공을 조심하라고 써 놨다. 언젠가는 골프공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오겠다. 왕릉 유역에 골프장은 또 뭔지. 조상님들이여. 얼마나 속상하십니까? 날이면 날마다 굿 샷!” 소리 들으며 잠에서 깨시는 건 아닌지요. 다행이 길 옆으로 인도를 만들어 놓아서 걷기는 수월하다. 드디어 허브랜드 간판과 만난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만큼 아스팔트길을 걷는 건 피곤하다. 이제부터 서삼릉 들어가는 길의 시작이다.

 

차도를 줄여 인도를 만들어놨다. 나야 고맙지 뭐.

이곳이 바로 허브랜드

허브랜드에 핀 꽃들

핀 꽃을 그냥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지. 허브랜드에 들러 이 꽃 저 꽃을 둘러본다. 허브 향기가 피로를 한결 덜어준다. 힘을 얻었으니 이제 서삼릉으로 갈 차례.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차와 사람이 엉켜 무척 혼잡하다. 조금 들어가니 오래된 은사시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은사시 나무. 이름만 들어도 뭔가 있을 것 같은 이 느낌은? 은사시나무는 잎의 뒷면이 하얀 솜털로 덮여 있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마치 사시나무가 떠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 은색 사시나무다. 하지만 은사시는커녕 사시나무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시나무처럼 떤다는 표현이 실감이 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또 자연공부를 좀 하고 갈 일이다. 사시나무는 한자로 백양(白揚)이라고 한다. 나뭇잎이 팔랑팔랑 움직인다고 '팔랑버들' 또는 '파드득나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왜 이 나무는 떠는 나무로 알려져 있을까. 사시나무는 생장이 무척 빠르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물을 뿌리에서 잎으로 빨아올린다고 한다. 그렇게 생긴 수분을 공기 중에 빨리 방사하기 위해 잎을 마구 떨어댄다는 것이다. 우리가 손에 물이 묻으면 탈탈 터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과학 공부를 꽤 열심히 한 나무인 것 같다.

 

서삼릉 들어가는 길

종마목장의 풀밭

사시나무 잎이 팔랑거리는 이유를 독특한 구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사시나무 잎은 커다란 부채 모양으로 생겨서 바람을 잘 받는다. 또 잎자루가 가늘고 길기 때문에 탄력성이 뛰어나다. 그러니 조그만 바람에도 민감하게 움직일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과학의 시대라도 나무에 전설이 빠질 수는 없는 법. 중국 주나라에는 묘지에 심는 다섯 가지의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지에는 측백, 고급관리는 회화나무, 학자는 모감주나무를 심었다. 그렇다면 장삼이사 서민들의 무덤에는? 바로 사시나무를 심었다. 문제는 한번 서민은 죽어서도 서민이라는 것. 서민 무덤에서 자란 사시나무들은 높은 사람만 지나가면 말 그대로 사시나무 떨 듯떨었다는 것이다. 에구,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은 죽어서도 불쌍한 존재다. 고개를 넘으니 눈앞에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다. 종마목장(경마연수원)에서 가꾼 초지(草地). 방금 풀을 베어낸 듯,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풀들이 흘린 피 냄새다.

 

표부터 끊으세요.

난 이런 숲이 좋더라.

 

먼저 서삼릉에 들르기로 한다. 현재 이곳 능역은 관리주체가 나뉘어져 있어서 허가 없이 서로 통행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지. 그래서 일반 시민들은 효릉을 뺀 예릉과 희릉, 즉 서이릉만 볼 수 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서삼릉에 대해 공부 좀 하고 지나가자. 서삼릉은 앞에 밝힌 대로 효릉과 예릉, 희릉을 일컫는 말이다. 효릉(孝陵)은 중종의 아들인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의 능이다. 이 능에는 슬픈 사연이 배어있다. 인종은 단명한 왕이었다.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했는데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는 소망대로 아버지 중종과, 자신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에 요절한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곁에 묻혔다.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그의 계모였던 문정왕후가 훗날 지아비 중종의 능을 한양으로 이장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간절한 소망은 한 여인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철종과 철인왕후가 누운 예릉

봉분이 잘 안보인다.

정자각 내부. 제례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 놓았다.

희릉(禧陵)은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능이다. 장경왕후는 태종의 능인 헌릉에 안장됐다가 지금의 장소로 이장됐다. 중종이 승하하자 비()가 묻힌 이곳에 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그 상태로 두었으면 아무 일 없었으련만, 앞에서 나온 문정왕후의 왕릉 이장이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었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 질투였는지 자신의 죽음 이후를 계산했는지 중종의 능을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으로 이장해 버렸다. 결국 부부를 떼어놓아 장경왕후만 남은 희릉이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이장의 이유로 중종의 능자리가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점을 들었지만, 옮긴 곳은 지세가 낮아 홍수가 나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조금 더 계속된다.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문정왕후 역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의 단릉(單陵)에 안장됐다. 결국 중종은 시샘 많은 두 번째 계비 탓에 죽어서도 쓸쓸히 지내고 있는 셈이다. 예릉(睿陵)은 농투성이에서 졸지에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된 비극의 왕 철종과 철인왕후 안동김씨가 묻힌 능이다. 철종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은 생략한다.

 

장경왕후가 혼자 누워있는 희릉

 

효릉은 가볼 방법이 없으니 건너뛰고 먼저 예릉에 들른다. 철종을 생각해본다. 강화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원범으로 살았으면 훨씬 행복하지 않았을까. 안동김씨의 세력에 눌려 뜻 한번 펼쳐볼 새 없이 살다가, 30대 중반에 승하하고 말았으니 그 또한 신데렐라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능은 잘 가꿔져 있다. 하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다.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과 신도비가 안치된 비각을 둘러보고 먼발치에서 봉분을 휘휘 둘러보고 돌아설 뿐이다. 장경왕후가 혼자 누워있는 희릉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이곳 서삼릉에는 지금까지 본 능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만행은 이곳에도 숨어있다. 강점자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던 왕들의 태실과 후궁왕자공주들의 묘들을 서삼릉의 경내로 이장했다. 집중 관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조선 왕릉의 격을 훼손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공통된 해석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만 제 가치를 발한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서삼릉엔 3개의 능과 효창원의령원 등 3개의 원, 후궁들과 왕자 공주의 묘 46, 태실 54기가 있는 커다란 능역이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의 회묘도 이곳에 있다.

 

종마목장 들어가는 길

말 팔자가 상팔자

홍당무를 얻어먹겠다고...

능을 벗어나 종마목장으로 향한다.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마연수원은 경주마와 종마의 육종보호를 위해 만든 곳이다. 질 좋아 보이는 말들이 푸른 초원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다. 저 정도면 개 팔자가 아니라 말 팔자가 상팔자다. 하지만 그리 흔쾌하지만은 않다. 왕릉 곁에 종마장이라니. 지하에 묻힌 왕들은 골프 치는 소리로도 모자라 배설물의 냄새까지 맡아야 할 것 같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법 치고는 좀 고약스럽다. 종마목장에는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 많다. 설렁설렁 둘러보고 되짚어 나온다. 서삼릉 입구에서 다시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역시 아스팔트길이다. 더구나 인도를 따로 내놓지 않아서 영 불편하다. 가족단위로 걷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서삼릉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농협대학을 지나고 솔개약수터를 가리키는 알림기둥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여기서 좌회전해야 할 것 같은데 확신이 안 선다. 길 입구에 홍익교회 큰숲비전센터라는 간판과 돌문이 서 있어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에라, 일단 가고 보자. 게다가 교회인데 누군들 못 들어가랴. 다행이 길은 교회 옆으로 이어져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솔개약수터라고 쓴 작은 알림기둥이 서있다.

 

다시 걷는다. 위험한 이차선 도로를.

농협대학

교회라고 겁내지 말고 그냥 들어가시길.

이제 거의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느닷없이 도로공사현장이 나오면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삼송역으로 방향을 잡아야하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산등성이를 넘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등성이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거야말로 낭패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길을 잃었으니 뭐라고 전해줘야 한단 말인가.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내 길눈이 어둡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안내된 길에서 길을 놓친 경우는 없다. 길이 제대로 돼 있는데 못 찾은 것이라면 안내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길 찾기의 천재들만 걷는 게 길이 아니다. 또 도로공사 때문에 지형이 바뀌었다면 임시 안내판이라도 설치했어야 했다. 길을 만들고 사람을 초청한 이들의 예의다. 이리저리 헤매는데 빗방울까지 떨어진다. 아무도 없는 공사장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다. 굴러다니는 토관에라도 들어가 비를 피할까 하다가 무슨 험한 꼴인가 싶어서 큰 길로 방향을 잡아 뛰듯이 걷는다. 도로공사 뿐 아니라 곳곳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도로공사현장. 이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

드디어 삼송리. 야호!!

길의 종점인 삼송역. 제법 복잡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허덕거리며 걷다보니 조그만 도시가 나온다. 다행이 오늘의 종착점인 삼송리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만난 삼송역. 전철역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역사로 들어가 젖은 옷을 말리며 오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아스팔트 구간이 꽤 길고 마지막에 길을 못 찾아 불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서울 근교에 이만한 길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특히 곳곳에 이야기를 품고 있는 길은 보석보다 더 귀한 존재다. 심신에 배인 길의 향기가 흩어질세라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전철에 오른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