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2012. 6. 18. 08:28 카테고리 없음

 

 

 

 

 

지난 6개월간 블로그에 연재했던 터키 여행기가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애플미디어 刊)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부제는 '터키를 만나면 세상의 절반이 보인다'입니다.

 

모처럼 읽을만한 '길 위에서 쓰는 역사문화 에세이'가 나왔다는 점에 주목해주십시오^^

 

연재하는 동안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드립니다.

 

책 소개와 들어가는 글을 전해드립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

 -      터키를 만나면 세상의 절반이 보인다. –

 

 

“우리가 몰랐던 숨은 진주들을 접할 수 있는 진정한 터키 기행문”

- 산타클로스가 태어난 땅이자 클레오파트라의 흔적이 남아 있는 터키 지중해 소개

- 유럽의 편향된 시각으로 기술된 역사서나 겉핥기식의 기행문과 차별화

 

         *지은이: 이호준

*발행일: 2012 615

*출판사: 애플미디어

*판형: 170*210 / 336

*가격: 15,000

 


 

어린이들의 우상 산타클로스와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태어난 땅은 어디 일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곳은 또 어디 일까.

그곳은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두 가지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과연 어디 일까?

이 모든 물음의 정답은 터키다. 터키 땅 그 중에서도 지중해 연안이다.

 

풍부한 감성과 서정적인 글로 많은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했던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2’의 작가 이호준이 이번에는 터키 지중해 기행문을 펴냈다. 제목은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터키를 만나면 세상의 절반이 보인다’ (애플미디어 간: 336 P).

 

터키 땅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이 생각보다 많이 연관돼 있는 곳이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터키 영토에서 이루어진 풍부한 역사를 알게 된다면 ‘터키를 만나면 세상의 절반이 보인다’라는 이 책의 부제가 전혀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번 여행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물론 산타클로스나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등 역사 인물들과 터키 땅의 인연이나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던 마오솔로스 등 터키 지중해 인근의 인물과 유적들을 샅샅이 훑어낸다.

 

그 과정에서 고대에 이 땅에서 발흥했던 여러 나라들은 물론, 동로마와 십자군,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를 섭렵하고, 터키라는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자리 잡게 됐는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투쟁과 공존 등 그 동안 쉽게 다가설 수 없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쉬운 설명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역사 해설을 곁들인 역사서이자, 한편의 여행 문학서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번 지중해 기행 이후에도, 터키의 다른 지역을 탐방을 통해 터키 기행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책은 터키 기행 시리즈의 첫 번째에 불과하다. 저자는 앞으로 터키 중동부와 흑해 연안 등 우리에게 낯선 곳까지 터키 전역을 속속들이 몸으로 체험할 예정이다.

 

 

책 소개

 

이 책은 터키, 그 중에서도 그리스-로마-이슬람 역사의 살아 있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와 이스탄불 지역을 여행하면서 느낀 감동을 생생하게 담은 기행 형식의 에세이다. 저자는 현지인들과의 교류하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와 일상 생활에 대한 섬세한 고찰,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특별한 호의 등을 마치 독자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생생함을 책에 고스란히 담아 내고 있다.

아마추어 사진 작가이기도 한 저자의 사진은 글과 함께 풍부한 현장감을 담아 내는 훌륭한 매개가 되어 다른 여행서와 확연한 차별화를 보여 준다.

 

저자는 무엇보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이라는 틀을 빌려 터키 땅에서 부침을 거듭했던 다양한 문명과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 역사의 연결 고리를 기록, 재미와 지식을 함께 전해준다.

 

 

 

저자 소개

이 책의 저자 이호준은 사강(思江, sagang)이란 필명으로 전국을 돌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길 따라 바람 따라’ 등 국내외 여행기를 그의 개인 블로그 (sagang.blog.seoul.co.kr)에 연재하고 있다. 서울신문 기자, 인터넷부장, 뉴미디어 국장 겸 비상임 논설위원, 편집위원 등을 거쳐 편집국 선임기자로 재직 중이며, 2008년에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2009년에는 2권을 냈다. 특히 1권은 문화관광부 추천교양도서, 올해의 청소년도서, 교사들의 모임인 책따세 추천 도서로 선정됐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글과 사진이 실렸다.

 

 

- 목차 -

1. 숨겨진 세계사

내 생애 가장 긴 휴가

지상의 천국 보드롬에 도착하다

모스크에서 만난 무슬림들

보드롬성, 그리고 숨겨진 세계사

터키의 닭은 개처럼 울더라

마우솔레움, 그 허무한 욕망의 끝

 

4. 황홀한 지중해

터키에는 정말 터키탕이 있을까?

라라비치, 그리고 집시 이야기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로마의 목욕탕과 아고라를 가다

아폴론신전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추억하다

알란야의 비경과 늘어진 개 팔자

 

2. 홀로 보낸 한나절

유령도시 카야쾨이에 가다

리키아 고대무덤을 들여다보다

시골마을에서 홀로 보낸 한나절

하늘을 나는 사람들을 만나다

그녀가 페티예에 눌러 사는 이유

화요장터에 그들이 있었다

 

5. 이스탄불로 가는 길

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들

성소피아 성당에서 본 종교의 공존

톱카프궁전과 비극의 여인들

이스탄불의 ‘총알택시’

 

3.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샤클르켄트 협곡에서 만난 위기

유람선 위의 전직 어부 부부

카쉬의 아가씨는 예뻐요

산타클로스의 진짜 고향을 가다

도둑맞은 성 니콜라스의 유해

 

 

 

 

 

들어가는 글

 

원고를 마무리하는 날, 우연히 달력에 눈이 갔습니다. ‘오늘을 가리키는 숫자는 4월의 한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확하게 반년이 흘렀습니다. 터키를 다녀온 뒤, 정리와 기록에 걸린 시간입니다. 사진을 고르고 글을 쓰는 내내 저는 잘 벼려진 햇살이 창날처럼 내리박히는 지중해를 걷고 있었습니다. 낙엽 지는 가을이 지나고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뇌리 속에 다른 풍경들이 싹을 틔우고 자랄 틈은 없었습니다.

 

애당초 조금 무리한 여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터키, 그중에도 지중해 일대를 찍는 다큐멘터리 팀에 느닷없이 합류한, ‘얹혀가는신세였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길 위의 삶을 숙명처럼 지고 가는 제게, 터키는 늘 가봐야 할 곳 목록의 다섯 번째 안에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어디쯤에서 1년 쯤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중국 윈난(雲南)의 리장(麗江)에서 하릴 없이 배회하고 싶고, 중앙아시아의 쓸쓸한 마을을 떠돌고 싶고, 문화와 역사의 용광로라는 터키에서 지칠 때까지 걷고 싶었습니다.

 

그런 절실함으로 떠난 길이었지만 고단함은 숙명처럼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강행군, 다큐 팀과 같은 동선에 있되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일정은 입 안의 모래처럼 서걱거렸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습니다. 직접 걸어본 터키는 기대를 훨씬 웃돌았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동서 문물의 교차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가 공존하는 땅. 사전에 배웠던 어떤 수식어도 현장만큼 감동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에게해의 끝이자 지중해의 시작점인 보드룸을 출발해서 페티예, 카쉬, 안탈리아, 알란야를 거친 뒤, 혼자 이스탄불을 헤매고 다닌 짧지만 긴 시간들. 발자국 하나하나를 뗄 때마다 충격적인 각성을 맛보았습니다. 마주치는 풍경은 황홀했고 사람들의 눈빛은 따뜻했습니다. ‘코리아라는 말 한 마디에 껴안을 듯 반색하는 터키인들이 준 감동은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 온기가 되었습니다.

 

여행기를 쓴다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여행, 게다가 몇 달 다녀온 것도 아닌데 웬 여행기? 그런 뜻이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이런 것을 보고 듣고 왔다는 견문록을 쓰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제겐 어느 시골길에서 만났던 촌부의 향기가 거대한 건축물보다 더 귀한 존재였습니다. 역사를 기록한 이들에 의해 윤색된, 혹은 시간이 감춰둔 이야기를 캐내어 전하고 싶었습니다. 구르는 돌의 속살에 배인 옛사람들의 철학을 찾아내고, 고독한 걸음 어느 순간 전율처럼 머릿속을 울린 깨달음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여행 내내 지고 다녔던 책 몇 권 분량의 자료, 거친 글씨로 가득 채워진 수첩들, 수천 장의 사진. 그들은 둔감해져가는 기억을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블로그에 연재하는 동안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았습니다. 제 글을 여행담이 아닌 여행문학이라고 평해주신 어느 시인의 말씀은 격려를 넘어 가시 달린 채찍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들을 묶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제 손을 떠난 글은 더 이상 제 것이 아닙니다. 읽는 분들 안에서 꿈으로 또는 희망으로 거듭 태어나길 소망합니다. 저는 다시 두 번째, 세 번째 터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길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   호   준 

 

 

posted by sagang
2012. 6. 11.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이른 아침, 바닷가를 걸어본 적 있으십니까?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누군가가 백사장에 크고 작은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간 그곳.

재채기라도 터질 듯 코끝을 간질이는 설렘과 누군가가 먼저 걸었다는 배신감(?)을 함께 추스르면서, 그래도 순수의 영역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 자꾸자꾸 걷게 되는.

얼마 전 도반(道伴)들과 모세의 기적으로 이름을 알린 무창포에서 하루 저녁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철 이른 바닷가는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이른 아침 누가 손짓이라도 하는 듯, 밤새 치룬 전쟁의 산물인 숙취를 대동하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말이 이른 아침이지 백사장은 이미 곳곳에 발자국이 찍힌 뒤였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이런 시간에 백사장을 걸어본 게 언제더라.

아마 젊었을 적, 그것도 청년기쯤이 아닐까.

애써 시간의 끈을 더듬거려 보지만 기억을 갈무리해둔 창고는 좀처럼 빗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머리 검은 젊은이가 걷던 곳을 반백의 사내가 걷고 있는 건 분명했습니다.

늙어간다는 것,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다가도 어느 특별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화두를 깨우치듯 전율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아직 머나먼 날의 이야기로 들리겠지요.

 

걷다보니 저 멀리 있던 흑섬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습니다.

생각에 휩싸이기도 하고, 예쁜 차돌을 줍고 버리다를 반복하다 보니 걸음은 자꾸 늦어졌습니다.

어느 순간, 발밑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물이 빠져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사장에 벌집처럼 나 있는 작은 구멍들.

//뽕이라는 의성어 겸 의태어가 수식어로 가장 잘 어울릴만한 그런 구멍들이 셀 수 없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채굴 과정에서 나왔음직한 콩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까지.

물론, 그 무엇 하나 우연히 생긴 것들이 아니란 사실쯤은 눈치 무디기로 소문난 저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백사장을 점령했던 바닷물이 빠져나간 뒤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만들어진 흔적들이 분명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척 없이 한참 서 있으려니 저만치 구멍에서 아주 작은 생명 하나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게였습니다.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게.

집을 수리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 낯선 낌새를 감지했는지 잽싸게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정말 번개 같은 동작이었습니다.

저 작은 몸 어디에 저런 경계와 속도가 숨어 있을까.

결국 카메라를 들고서도 한 마리의 게도 찍을 수 없었습니다.

 

숱한 구멍들은 바로 그 손톱만한 게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물이 빠진 뒤, 온 가족이 집수리에 나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게들의 은 바닷물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무심한 발자국이 그 위를 마구 밟으며 지나고, 그때마다 집은 메워지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면 게는 또 묵묵하게 그 집을 수리합니다.

작업은 끝없이 계속 될 것 같았습니다.

하루인들 바닷물이 오고가지 않은 적이, 사람이 지나가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요?

미련한 짓이라고요?

, 그런 말에도 별로 대거리할 방법이 없겠네요.

몇 시간 뒤면 무너질 게 분명한 집을 파내고 또 파내는 반복의 이면에는 분명 기계적 끈기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할 테니까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마치 시시포스(Sisyphus)를 연상시키는 노역.

하지만 정말 미련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미련보다는 순응쪽에 더 무게를 두고 싶어졌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일을 해야 할 거라는 걱정을 미리 하지 않는 순응.

애써 지은 집을 밤마다 타인의 영역으로 넘겨줘야하는 운명조차도 받아들이는 순응.

그렇게 해서 게는 바닷물이 쉬어갈 집을 내어주고, 바닷물은 먹을 것을 날라다주는 행복한 거래가 성립됐겠지요.

슬프고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화나고 짜증나고우리가 흔히 쓰는 이런 단어들 중에 혹시 스스로 만들어서 지고 다니는 것은 없을까요.

새삼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자연은 위대한 스승을 품고 있는 거대한 학교라는 깨달음 앞에서 반백의 사내가 자꾸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2. 6. 4. 08:41 길따라 바람따라

희망천 굴다리에서 바라본 '오월'

5월 초순의 새벽길. 세상은 오월이라는 단어가 간직한 이미지만큼 푸르게 채색돼 있다. 죽령옛길을 걷기 위해 소백산으로 가는 중이다. 워낙 일찍 나선 터라 고속도로는 한산한 편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 그리고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 때까지 내 낡은 차는 콧노래라도 나올 듯 신이 났다. 단양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와 2차선으로 접어든다. 충북 단양에서 경북 영주, 정확하게 풍기로 넘어가는 길 주변은 금방 머리를 감고 나온 새댁만큼이나 싱그럽다. 소백산 자락을 타고 구불구불 달리는 길은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을 준비해놨다. 죽령 고개를 넘고 희방사 올라가는 길을 지나 조금 내려가다가 소백산역 쪽으로 우회전한다. 과수원 길을 끼고 조금 더 들어가니 바로 소백산역. 그 옆으로 죽령옛길이라는 이정표가 반긴다. 차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세워두고(이 녀석 오늘 호강이다) 행장을 둘러멘다. 산자락에 기대어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은 무척 안온해 보인다. 산촌이 흔히 갖기 쉬운 궁색의 기운은 어디에도 없다.

 

죽령옛길 표지석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도 들었단다.

소백산역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소백산역은 내려오다 둘러보기로 하고 죽령옛길이라는 이정표 쪽으로 내려가 걷기 시작한다. 마을과 소백산역 사이에 난 길이다. 조금 지나니 굴다리가 나온다. 길은 다리 아래로 이어져 있다. 한쪽으로는 맑은 물이 힘차게 흐르고 한쪽에는 사람 다니는 길을 냈다. 물과 사람이 함께 흐르는 셈이다. 내 이름이 희망천이란다. 다리 안쪽, 어둑한 곳에서 바라본 신록의 세상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다리를 빠져 나가니 조그만 공원이 나오고 세워놓은 돌에는 무쇠다리 옛터라고 새겨져 있다. ? 코스 안내에는 이런 곳이 없었는데?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이게 웬 떡이냐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길을 기록하는 자에겐 어디든 사연이 담긴 곳은 반가운 법이다. 높다란 느티나무가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한쪽에는 작은 다리형상을 만들어놓았다. 이 정도면 무언가 이야기가 묻혀 있다는 뜻이다. 무쇠다리라, 무쇠다리. 마징가Z의 다리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하여튼  낯선 이름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가보니 안내판에 익히 들어온 전설이 적혀있다.

 

신라 선덕왕 12년 서라벌의 호장 유석이 호랑이에게 잃은 딸을 구해준 희방골 스님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코자 희방사를 창건하고 나서 절로 통하는 앞개울에 무쇠로 다리를 놓은 사실이 희방사지에 전해지고 있다. 무쇠다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인 듯 근래까지 뚝다리로 있어오다가 중앙선 철도가 나면서 그나마 없어져 버렸다.(이하 줄임)’

 

무쇠다리 모형

나와 놀던 사과꽃. 잘 보면 벌도 있다.

무쇠다리 안내석

아하, 그 전설이 태어난 땅이 이곳이로구나. 희방골에 은거하던 두운조사란 분이 어느 날 산길을 가다 신음하는 호랑이를 만났는데 잘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걸렸더라지. 사람을 삼켰으니 고연 놈이긴 하지만 그 또한 생명이니 어쩌겠나. 비녀를 빼줬더니 은혜를 갚는다고 양가집 규수를 산채로 덥석 물고 왔더라네. 그래봐야 도 닦는 스님에게는 그림의 떡인 걸, 이 머리 나쁜 짐승이 알 턱이 있나. 아무튼 그 규수가 바로 경주호장의 무남 독녀였고 고이 집에 데려다 주었더니 호장이란 양반이 보답으로 절을 지어줬다는. 나는 지금 그 전설의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무쇠다리 터를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출발하려니 좀 막막하다. 어느 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없다. 저만치 간이다리가 하나 있고 과수원길이 보이길래 무조건 그쪽으로 길을 잡는다. 사과 꽃이 한창이다. 사과 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골길에 만난 여인처럼 검박(儉朴)한 맛이 있다. ,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호박벌을 사진 찍어준다는 핑계로 불러내 한참 놀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과수원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드디어 큰 길이? 아니, 길은 거기서 끝났다. 애당초 잘 못 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이 소백산역을 지나쳐 곧장 올라가던 게 생각난다. 그게 바로 죽령옛길로 향하는 길었구나. 왜 나는 그런 깨달음이 늦게 와서 늘 헤매고 다니는 걸까. 길 걷는 게 평생의 업이라는 자가 이렇게 둔해서야. 호를 도맹(道盲)’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자주 든다.

 

아름다운 곤충과도 놀았다. 이름을 아시는 분?

소백산역. 원래 이름은 희방사역이었다.

지도를 못 구해서 대신 사진으로

 

길을 되짚어 가다보니 그제야 소백산자락길-2자락이라는 자그마한 안내판이 보인다. 아무튼 중요한 건 늦게 찾는 게 내 특기다. 초등학교 때도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면 가장 못 찾는 아이가 나였다. 문제는 보물찾기 시간이 끝나고 도시락을 먹으러 갈 때면 쪽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더 행복했던 적도 많았다. 이번에도 길눈 어두운 덕분에 전설의 현장을 볼 수 있지 않았던가. 죽령옛길을 걷고 싶은 이들이여!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출발 전에 무쇠다리를 꼭 다녀오시길. 아 참, 말이 나왔으니 소백산자락길 이야기를 하고 가자. 죽령옛길은 18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독립된 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조성된 소백산 자락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자락길은 소백산둘레에 있는 3개 도 4개 시군(영주시, 단양군, 영월군, 봉화군) 170km를 잇는 길로 모두 12자락으로 돼 있다. 달밭길, 보부상길, 과수원길, 서낭당길정겨운 이름들이 많다. 이 자락길의 지도를 보면 마치 고깔모자에 둘러놓은 띠처럼 보인다. 물론 고깔모자는 소백산이다. 총 열두 자락 중 세 번 째 자락이 바로 오늘 걸어갈 죽령옛길이다.

 

 

이런 안내표지를 잘 봐야한다.

작은 폭포

길은 자꾸 산으로 꼬리를 감춘다.

누워 있는 장승, 근무 중에 뭐하는 겁니까?

원점으로 돌아와 소백산역에서 다시 출발한다. 역 앞마당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한참동안 철도와 나란히 달린다. 그리고 머리 위를 지나는 거대한 고가도로. 저게 바로 중앙고속도로겠지. 다닐 땐 편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멘트 구조물은 괴물이라도 되는 듯 이질감이 든다. 길은 금세 숲속으로 몸을 누인다. 느린 걸음으로 올라가다보니 조그만 폭포도 보이고 장승들도 만난다. 장승 중 한 분은 피곤했던지 아예 누워서 이리 저리 뒹굴 거린다. 이왕 만들어놓은 길, 관리 좀 잘하시지. 그래도 산길에 들어서니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거기까지 차를 끌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사람이 다닐 좁은 길을 차들이 달리니 피하는 것도 곤욕스럽다. 먼지는 또 어떻고. 조금 올라가니 세상이 느닷없이 환해진다. 갑자기 나타난 사과과수원 덕분이다. 우와! 이 산속에 이렇게 넓은 과수원이. 나무들은 하나같이 작고 하얀 등을 내어걸었다. 밤이라면 더욱 예뻤을 텐데. 흥에 겨워 과수원 길을 걷는다. 사과나무는 물론이고 길 옆에 싶어놓은 호두나무 자두나무 산수유나무. 꽃이 피었건 졌건 하나하나가 조화고 아름다움이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도랑물에 손을 담가본다.

 

산속에서 느닷없이 만난 사과과수원

나무 아래는 민들레 영토다.

과수원에는 이런 연못도 있다.

사과나무 아래는 민들레의 영토다. 지금까지 살면서 본 민들레보다 더 많은 민들레를 한꺼번에 보는 것 같다. 신기한 건 노란 민들레와 하얀 민들레가 어울려 피어있다는 것이다. 노란 꽃의 민들레는 외래종, 하얀 꽃은 토종으로 함께 어울리지 않는 걸로 아는데. 산속에서 만나는 공존과 평화의 현장이다. 결국 또 그들과 어울려 한참 놀아버리고 말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더냐, 예가 바로. 가만, 복숭아꽃이 지천인 곳이 무릉도원이니 사과꽃이 지천인 여기는 무릉사()일까? 떼기 싫은 걸음을 옮겨 깊은 숲으로 꼬리를 감춘 길을 찾아 나선다. 신록의 계절은 황홀하다. 특히 가만히 서서 눈을 감으면 온갖 생명의 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조금 올라가니 조그만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누군가가 소원을 빌면서 쌓은 것일 게다. 아니면 나그네가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 하나 둘 던진 게 쌓였을지도.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호환(虎患)을 피하게 해달라고 도적떼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댈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게다.

 

자! 다시 걸어보자.

이게...으음, 으름나무 꽃이던가?

중간 중간 역사와 전설을 적어놓은 안내판들이 있다.

이왕 옛날얘기가 나온 김에 이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고 가보자. 지금은 소로로 변했지만 과거에는 곳곳에 마방(馬房)과 주막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큰 길이었다.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이 길이 열린 건 신라 때였다. 죽령 일대는 신라고구려백제가 치열하게 영토싸움을 벌이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 마디로 죄 없는 3국의 병사들이 피를 섞은 역사적 장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158)에 춘사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고, 고구려 장수왕(450년경)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 진흥왕(551)때 다시 신라가 회복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왜 대나무()가 하나도 없는데 죽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대나무와는 무관하게 죽죽이라는 이가 길을 열었다고 해서 죽령이 된 것이다. 큰일을 한 사람이니 죽죽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보고 가자.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신라의 죽죽이 왕명을 받아 죽령 길을 만들고 기력이 다해 숨졌으며,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력이 다해 죽을 때까지 혼신을 다한 1854년 전의 한 인물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그를 위해 세웠다는 사당은 지금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길 옆의 돌무더기가 품은 뜻은?

나뭇잎과도 놀았다.

이 길을 지날 땐 황홀했다.

이 길은 삼국시대 뿐 아니라 그 뒤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물론 온갖 장사꾼들이 넘나들었다. 재미있는 건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 해서 과거를 보러가는 이들은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럼 그들은 어디로? 문경 새재(조령)를 넘었겠지. 아무튼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길손들을 위한 주막과 마방이 들어서서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얼마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산적까지 횡행해서, 그들을 소탕하는데 일조했다는 다자구할머니 전설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떠나던 마의태자가 걷던 길이고 풍기 군수 주세붕이 낙향하던 선배 이현보와 회포를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길도 계속 각광만 받은 건 아니었다. 무엇이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1940년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고갯길을 넘나드는 발길이 점점 줄어들더니 1960년대에는 포장도로가 신설되고 2001년 국내 최장터널인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고갯길은 숲으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까맣게 지워졌다. 그러다가 근래 들어 시작된 걷기 열풍으로 다시 발길이 잦아진 것이다.

 

낙엽송길

바람과 머리 풀어헤치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중간중간에 있는 쉼터

공부는 이쯤 하고, 다시 길을 잡아보자. 길 주변에는 다래넝쿨이나 온갖 잡목이 얽히고설켜 마치 원시림을 걷는 것 같다. 중간 중간에 안내판을 세워 길에 얽힌 이야기와 전설들을 자세히 적어 놨다. 왕건도 나오고 다자구할머니도 나오고 주세붕도 나온다. 또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놓았다. 길을 걷는 재미중 하나는 길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기대어 사는 생명들을 만나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길을 꾸민 이들은 꽤 사려가 깊어 보인다. 새로운 길을 여는 단체나 자치단체들이 참고 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쉼터를 마련해놓아서 아이들과 힘께 걷기에도 좋도록 해놓았다. 조금 더 올라가니 느닷없이 낙엽송(일본 잎갈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활엽수 숲을 걷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침엽수들을 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아마 인공조림으로 생긴 숲일 것이다. 길은 걷기에 숨차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옹달샘

생명

길옆에서 조그만 옹달샘을 발견한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서 물을 마실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에 쌓아놓은 돌들은 무너지지 않고 샘을 지키고 있다. 잘만 손질하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감로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에는 얼마나 반가운 존재였을까. 샘을 지나 다리쉼을 하고 있는데 청춘남녀가 내 앞을 지나다가 그 중 남자가 주뼛거리며 다가온다.

저기, 물을 좀 얻을 수 없을까요? 제 친구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그럼요. 그런데마시던 건데 괜찮아요?”

, 괜찮습니다.”

남자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여자는 내가 건네준 물을 달게 마신다. 자신의 여자를 위해 낯선 사내에게 물을 얻으러 온, 용기 있는 젊은이에게 한마디 한다.

이런 산속에서는 흘러가는 냇물을 그냥 마셔도 아무런 문제없어요. 그리고 저쪽에 가면 옹달샘도 있고

청년이 조금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는다. 물이 아깝다거나 냇물을 꼭 마시라는 뜻은 아니었다. 나 어릴 적엔 밤을 따러 갔다가 땔감을 모으다가 아무 물이나 마셔도 별 탈 없었다. 하긴 페트병에 들어있는 물만 생명을 지켜준다고 믿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흐르는 물이나 옹달샘 물을 마시라면 독을 마시라는 말로 알아듣겠지. 남녀는 목례를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숲이 된다.

 

드디어 죽령루가 보이고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선

죽령주막

낙엽송들이 뜸해질 무렵부터 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죽령마루에 거의 다다랐다는 신호다. 숨이 턱에 찰 무렵 저만치 우뚝 선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도 현판이 또렷하게 보인다. 죽령루(竹嶺樓). 보수공사를 시작하려는 것인지 파이프로 비계를 설치하고 있다. 헐떡거리며 고갯마루로 올라선다. 거친 숨을 가라앉힌 뒤 시간을 본다. 안내에는 총 2.5km40분 혹은 50분이 걸린다고 돼 있었지만 이것저것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하긴 길을 걷는데 시간이 무슨 문제가 되랴. 둘러보니 아까 차를 타고 지나간 길이다. 저만치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영주와 단양의 경계임을 알리는 안내판들이 매달려 있다. 내친 김에 여기서 단양 쪽으로 내려가서 보국사지, 죽령분교, 용부사를 거쳐 죽령터널 입구까지 걷는 사람들도 많다. 하긴, 그 정도 걸어야 트레킹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아쉽지만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한다. 죽령루에 올라가 풍기 쪽을 굽어보기도 하고 죽령주막의 장독대를 구경하기도 한다. 이젠 다시 내려가야 한다. 출발지까지 가면 5km 남짓 걷는 셈이다.

 

소백산 산신령님이 감춰둔 비밀의 화원

주막터. 무너져가는 담장만 쓸쓸하다.

담장 위로 자꾸 기어오르는 손들.

내려가는 길에 올라 올 때 보지 못했던 주막 터를 발견한다. 고백하건대 남몰래 소변을 보려고 올라갔다가 우연히 안내판을 본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노상방뇨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고개 정상에서 본 주막거리가 가장 컸고 이곳은 좀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담장이 남아있고 구들장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구멍도 있다. 하지만 , 여기 탁배기 한 잔 하고 국밥 한 그릇 말아 달라니까.” “, 조금만 기다려요. 애를 배기도 전에 내 놓으래.” 떠들썩하던 광경은 아련한 옛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고요 속에 잠겼다. 넝쿨들이 담장으로 자꾸 손을 뻗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까지 오를 수 없음을 그들은 알까. 비껴드는 햇살이 쓸쓸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내려오는 내내 길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 가득 찬 느낌이다. 나는 1800년의 시간 속을 다녀온 것이다.

내려오다 만난 집. 이번엔 저 집에서 살고 싶었다.

 

 

 

 

 

 

꼬리) 소백산을 끼고 있는 경상북도 영주는 다양한 이야기와 볼거리를 지닌 곳입니다. 죽령옛길 가까운 곳에 희방사가 있고 또 천년고찰 부석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등은 꼭 가봐야 할 문화유산입니다. 소수서원 옆의 선비촌은 다양한 전통생활공간을 재현해 놓아서 아이들과 함께 가볼만 합니다. ‘잊혀진 고장순흥은 한 때 영주 풍기를 아우르던 큰 고을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단종의 삼촌인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 복위운동으로 고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수면 쪽으로 가면 제가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모래강, 내성천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류에 댐을 쌓는 바람에 지금은 망가진 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영주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osted by sagang
2012. 5. 29.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모처럼 길로 나서지 않은 일요일.

곧 인쇄돼 세상에 나올 여행기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었습니다.

식구들은 모두 외출하고 다래가을이차돌이(제 집 강아지들 이름입니다.)마저 낮잠에 빠져든 집안은 심해처럼 고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완전한 고요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

냉장고 소음? 세탁기가 혼자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떨어지는 소리? 아니면 두꺼비집? 그것도 아니라면 요즘 부쩍 늙어가는 다래가 코 고는 소리?

모두들 나는 아니라고 손을 홰홰 내젓습니다.

가만 귀를 기울이니 소리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있는 뒷문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살짝 다가가 문을 열었습니다.

! 그곳에 펼쳐진 풍경이란.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나뉜 큰 밭에 사람들이 김을 매고 수확물을 거두고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상추쑥갓은 벌써 풍성하게 잎을 펼쳤고 고추와 토마토는 지지대를 따라 힘껏 키를 늘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게으른 밭은 아직 텅 비어 있고, 어느 밭은 통째로 비닐을 씌워놓기도 했습니다.

소음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두런두런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곳에 주말농장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밤나무 산 아래에 있던 밭을 열심히 구획정리 하더니 두어 해 전부터 분양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작물이 가득 자란 밭을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주말이면 늘 돌아다니고 평일은 늦은 밤에나 집으로 돌아가는 반 떠돌이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요.

창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서울의 시골에 살다보니 누릴 수 있는 풍경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이 되는 이야기지만 저도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이었지요.

경기도 송추에 작은 밭을 하나 얻어놓고 주말마다 찾아갔습니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그 결과를 거두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가서 직접 딴 상추쑥갓풋고추와 함께 삼겹살을 먹는 호사를 누린 친구들도 있었지요.

어쩌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였습니다.

저처럼 흙에서 구르며 자란 사람들에게는 흙을 그리워하는 인자와 끝내 이별을 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밭에 가면 아이들도 아무렇게나 풀어놓았습니다.

개구리메뚜기도 잡고 밤도토리도 줍고 도랑에 들어가 저희들 맘대로 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강아지인지 아이인지 구분하기 힘들만큼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녀석들에게도 그 풍경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는 것 같았습니다.

 

심고 가꾸고 그 결과를 거두는 과정을 무척 좋아합니다.

생명에 숨을 불어넣는 일은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줍니다.

제 손으로 뿌린 생명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 나누는 대화는 저 자신을 순정(純正)의 세상으로 데려다 주고는 했습니다.

왜 내가 저걸 포기했지?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길 위의 삶을 선택하다 보니 그동안 누렸던 삶의 자락들은 뭉텅 뭉텅 잘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추나 쑥갓과 나누는 대화를 포기한 대신 글과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역시 행복한 일입니다.

지금도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판정 보류입니다.

삶 앞에는 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저는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신중하게 선택하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지 말자.

왜 후회할 선택들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다가 포기한 길에 대한 미련은 가능하면 일찍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느닷없이 다가온 텃밭의 향수도 얼른 덜어내야겠지요?

삶이 다하는 날까지 배낭을 메고 길 위를 걸어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sagang
2012. 5. 21. 08:32 길따라 바람따라

 

 

 

통점절길. 이곳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하나일 뿐이다.

충남 보령시 주산면 금암리. 그 동네에 도착 때만 해도 딱히 을 걸어야겠다는, 아니 길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형님 한 분의 고향이 그 동네였고, 그가 고향에 가는 길에 지인 몇이 봄 소풍 차 따라나선 터였다. 헌데 누군가 예비한 듯, 그곳에서 통점절길을 만났다. 우선 통점절길이라는 발음조차 잘 안 되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릴 분도 많을 테니 소개하고 가기로 하자. 미리 고백하건대 통점절길이란 이름은 내가 붙인 것이다. 통점절은 주산에서 바라보이는 산 중턱(산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에 있는 용주사(龍珠寺)라는 작은 절을 그 동네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용주사보다는 통점절이 훨씬 정감이 있지 않은가. 왜 통점절인지는 그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형님도 설명해 내지 못했다. 아무튼 통점절길은 요즘 흔히 부르는 둘레길이나 마실길, 자드락길 같은 이름을 얻지 못한, 이름 없는 산길이었다. 그리고 꽃이 김춘수를 만나듯, 산길이 나를 만나 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별 볼 일 없는 길이겠지? 라고 예단을 한다면 그리 생각한 사람만 손해일 뿐이다. 가보면 안다.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지.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인지. 이 길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세상 어느 길도 소개할 자신이 없다.  

주차의 신세를 졌던 주산초등학교.

주산초등학교를 나와 오른쪽으로. 여기서부터 벚꽃길이다.

조금 더 걷다보면 이런 전원풍경이...

예로부터 자원이 풍부하며 산 좋고 물 맑은 땅에 대대손손 평강을 누리며 산다는 뜻으로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던 보령. 내 낡은 기억에 의하면,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장항선 열차를 타는 게 가장 좋다. 특히 우리가 목적지로 정한 주산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자동차를 택하고 말았다. 주산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주산초등학교.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차를 위해서다. 차를 놓고 학교 정문을 나와 오른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도로 옆에는 청년기의 짱짱한 벚나무들이 미처 꽃을 다 떨어내지 못한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초봄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다. 지난주 내린 비에 꽃들과 조금 일찍 이별했나보다. 벚나무 길을 따라 올라가다 오른쪽 철길로 방향을 잡는다. 그곳에서 내 개인의 앨범 속에 있는 바로 그 역과 만난다. 아니, 그 역이 아니다. 간이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모습. 서너 사람 비를 그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시멘트 구조물이 달랑 서 있다. 쓰레기가 쌓인 지저분한 바닥. 버림받은 것 특유의 쓸쓸한 모습이다. 내 기억에 특별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다면 이 근처엔 분명 역사가 있었다. 주산역.

 

철길을 따라 걷다.

간이역의 기능마저 잃어버린, 초라한 주산역.

안내판도 저렇게 쓸쓸히 늙어간다.

주산에 딱 한 번 와본 것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우리를 가르치던 국어선생님이 본인의 행동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로 좌천(?) 당해 이 동네까지 전근을 온 적이 있었다. 문예반을 이끌던 선생님이라 그랬는지 제법 친근의 염()을 품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을 뵙겠다고 어느 날 장항선 열차를 타고 내린 게 이 곳이었다. 하지만 역은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폐역, 역으로서의 역할을 잃은 지 오래인 모양이다. 추억 한 자락이 뭉텅 잘려나간 느낌에 가슴 속의 강물이 거친 소리를 내며 흐른다. 철길 걷는 것을 중동무이하고 주산산업고등학교로 들어간다. 전에는 주산농업고등학교였다. 전근 온 국어선생님이 재직하던 학교라 아직도 기억 속에 있다. 세월은 기차역 하나를 지운 것뿐 아니라 농업학교를 산업학교로 바꿔놓기도 했다. 농업실습장이 있던 곳들은 새 건물이 들어서서 식품가공실습장의 이름표를 달았다. 이쯤 해야지. 길을 안내하는 자가 개인의 추억에 오래 휩싸여 있으면 안 된다. 학교 정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니 작은 차도로 이어진다. 길 주변에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빨갛고 파란 함석지붕을 덮고 서 있다.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풍요로운 기색도 내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다. 모처럼 고향을 찾은 형님은 여기저기서 추억을 캐내느라 여념이 없다. 저 집에는 도장 파는 이가 살았고, 저긴 내가 좋아하던 아이가 살던 집이고.

 

주산산업고등학교에서 나오면 나타나는 마을. 이곳이 바로 '형님'의 고향동네다. 저집이 도장집?

마을이 안온하다.

'형님'이 어릴 적 살던 집 맞을 걸?

저만치 서 있는 앞산에는 산 벚꽃이 한창이다. 산 벚은 꽃이 늦게 피어 늦게 지는 편이니 제법 세찬 비에도 별 탈이 없었나보다. 산 벚꽃이 있는 산은 파스텔 그 자체다. 우리는 지금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통점절 역시 저 벚꽃 사이 어딘가에 숨어있다. 길가 도랑에서 돌미나리를 캐는 할머니와 만난다. 일행 중 한 분이 몇 마디 말을 건네더니 미나리를 한 줌을 산다. 2천원을 드렸단다. 팔려고 뜯은 건 아니겠지만 할머니에게는 용돈이 생겨서 좋고 우리는 싱싱한 저녁 찬거리를 얻어서 좋다. 열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기서 저 속도면 역시 주산역에서는 서지 않은 것이다. 알고 있는 것도 눈앞에서 확인 되면 섭섭함은 배가 된다. 차도를 버리고 냇둑 길로 접어든다. 금암3(통점), 그리고 그 아래 용주사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서 있다. , 동네의 속칭이 통점이라 통점절이라고 불렀구나. 이제야 궁금증을 푼다. 여기서부터는 차도 없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이도 없다. 걸음이 한없이 늘어진다. 온 세상에 참견할 것들이 널려있다.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쑥, 노란 꽃 하얀 꽃을 피워 낸 민들레, 보기만 해도 입맛 도는 씀바귀, 주인 없는 머위. 너도 나도 봄이 차려낸 성찬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누구는 냇가로 내려가 돌미나리를 뜯어온다. 아까 할머니에게 산 미나리보다 훨씬 실하다. 이렇게 지천인데 괜히 샀나? 하지만 그것도 이것도 선물이다. 오늘 저녁 식탁에는 풀 잔치가 벌어지겠군.역을 무시하고 달리는 열차. 서! 섰다 가란 말야!!!

네 갈래길에서 동네가 보이는 왼쪽 길로 들어섰다.

밭에서 일하는 아낙들에게 쓸데없이 말도 걸어보고.

그렇게 느리게 걷다가 네 갈래 길을 만난다. 어느 길이 좋을까? 이곳을 고향으로 둔 형님도 어릴 적에 떠난지라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어차피 모든 길은 산으로 향하는 것. 별 망설임 없이 동네가 있는 왼쪽 길로 접어든다. 개천을 따라 가는 길이다. 사람 없는 길을 내쳐걷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늘 순박한 이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동네 이름을 물어보니 안태란다. 누군가가 ? 우리 고향에도 안태가 있는데하며 반가워한다. 돌아다니다 보면 이 안태라는 마을 이름은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작명의 근원은 알 수는 없지만 그만큼 안온한 동네라는 뜻이겠지. 마을 입구 사래 긴 밭에서 고랑을 일구는 아낙들을 만난다. 저 넓은 밭을 둘이 언제 다 일구나, 별 도움도 안 되는 걱정을 한다. 걱정은 기어이 큰 목소리가 된다.

거기에 무얼 심으실 거예요?”

, 고추 모종내려고요

그럼 비닐도 씌우셔야겠네요?”

, 고랑 다 만든 다음에요.”

써놓고 보니 참 알맹이 없는 대화였다. 가던 길이나 내처 갈 것이지 별걸 다 참견한 셈이다. 하지만 내가 길을 걷는 이유는 길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이 품은 존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람도 그들 중 하나다.

내가 살고 싶었던 바로 그 대숲집.

일하는 사람보다는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군데군데 빈 집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 길에서 조금 떨어진 빨간 함석집(원래 빨간 색인지 녹이 슬어서 빨간 색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이 자꾸 시선을 잡아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한 칸인 일자집이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다. 사람이 떠난 지 제법 된 듯, 부엌 문짝도 덜렁거리고 쇠락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원래 지녔던 기품은 꼿꼿하게 남아 집을 지킨다. 저 곳에 살던 주인을 닮았을 것이다. 어쩌다 집을 떠나게 됐을까. 노랗게 여문 햇살이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핥는다. 저런 곳에 살고 싶다. 누구에게도 잊힌 이름이 되어, ‘이름 없는 이름으로 살고 싶다. 친구를 두고 가는 듯,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돌아본다. 동네는 조용하고 평화롭다. 늙은 개조차 화적 떼처럼 찾아온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기색이 없다. 안태라는 이름이 왜 지어졌는지 알 것 같다. 조금 더 올라가다가 모판 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소독한 볍씨가 뿌려진 모판을 논에 나란히 설치하는 작업이다. 저기서 난 싹이 모가 되고, 벼가 되고 쌀이 된다. 온 가족이 모두 논으로 나왔나보다. 그냥 가족이 아니라 도시에서 온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이 틀림없다. 아이들까지 섞이다 보니 노는 건지 일하는 건지 좀 애매하지만 그래도 보기 좋다. 아이야, 지금 너는 더불어 사는 것과 생명에 숨을 불어넣는 걸 배우고 있는 중이란다.

 

나무, 빨간 함석집... 평화롭다.

일하는 어른에게 통점절 가는 길을 물으니 논두렁을 가로지르는 길을 가르쳐 준다. 일하는 이들에게 방해될까봐 조심조심 논둑을 지난다. 그리고 다시 닿은 동네. , 조용하다. 농사철이 시작됐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농촌에 노인들만 남아서일까. 어느 집 밭둑에 두릅이 탐스럽게 순을 내밀었다. 일행들이 입맛을 쩝쩝 다신다. 자연이 품은 맛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밭둑에 있다는 것은 주인이 있다는 뜻이다. 쑥이나 씀바귀와 달라 함부로 따면 안 된다. 마침 중년 사내가 지나길래 길도 물을 겸 말을 건넨다. “통점절이 아저씨 길은 안 가르쳐 주고 엉뚱한 농담을 한다. “저 두릅, 사진 찍는 건 돈을 내야하고요, 따가는 건 공짭니다.” 이쯤에서 낚시 밥 물듯 밭둑으로 달려가면 바보가 된다. 통점절을 모르는 걸 보니 이 동네 사람이 아니다. 외지에 오래 나가 있다가 다니러 온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런 때는 그저 껄껄 웃고 돌아서는 게 최선. 이름이 정해지고 공식 길로 지정된 길들은 안내판도 있고 지도도 있지만, 이렇게 이름을 얻지 못한 길은 물어물어 가는 수밖에 없다.

여기부터 통점절 올라가는 길. 통점절에 핀 동백꽃. 화려하다.

통점절 마당의 우물. 물맛이 달았다.

그 와중에도 일행의 눈은 이곳저곳 풍경에 푹 빠져 있다. 까치집을 이고 있는 키 큰 나무 아래 빨간 양철집이 보기 좋다. 적당히 낡아서 더욱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도 낡을수록 정감 있고 보기 좋아지면 좋겠다. 물론 이 집은 주인이 살고 있다. 다시 길을 잡는다. 동네를 벗어나니 드디어 통점절로 올라가는 외길이 나타난다. 길은 여느 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해 놓았다.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더욱 고즈넉하고 편안하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산길을 오른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잠시 자리를 펴고 배낭에 넣어온 술을 한 잔씩 나누는 호사도 누린다. 휴식 끝!! 조금 가팔라진 길을 따라 가쁜 숨을 내쉬며 오르니 드디어 통점절, 즉 용주사가 나타난다. 위치는 좋은데 절 자체는 시멘트로 지어놔서 특별히 볼 건 없다. 대처승이 거처하고 있는 개인 절이라고 한다. 꽃들이 아름답다. 대체로 대처승이 거처했거나 거처하고 있는 절은 꽃밭이 잘 가꿔져 있는 편이란다. 부인들이 심심하니까 꽃밭에 전념한다나? 물을 한잔 씩 마시고 절을 나와 반대쪽 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본격 트레킹. 꽃인지 보석인지.

빛은 화가다.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이제부터 걷는 길은 임도(林道). 본격적인 트레킹은 여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산림관리나 나무를 실어내기 위해 설치한 차도가 걷기 좋은 트레킹 코스로 변신했다. 구불구불 모롱이를 따라 돌고 도는 길은 일일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길은 차의 통행이 끊기고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아서인지 온갖 식물을 키워내고 있다. 특히 작은 돌 틈 사이로 군집을 이룬 민들레꽃들은 보석처럼 빛난다. 카메라를 든 일행이 한참동안 떠나지 못한다. 아무리 잘 찍어도 본래의 모습만큼 나올까. 오후의 햇살이 연초록 나뭇잎을 투과하면서 그린 빛 그림이 황홀하다. 자연 그 자체가 최고의 화가다. 이곳의 색들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대들지 않는다. 봄이 되면 그저 옅은 물감을 너도 나도 조금씩 내어 공동의 그림을 그릴 뿐이다. 이곳 저곳에서 연신 감탄사가 터진다. 산 벚꽃 그늘 아래를 걷는 이들의 표정이 마치 어린아이 같다. 그들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이런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황홀하다.

잘 보면 길을 걷는 여인이 있다. 

 

여길 돌면 끝일까? 글쎄...

길 옆에는 유난히 두릅나무가 많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두릅나무들의 목이 전부 잘려져 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그리 된 걸 보니 누군가가 일부러 잘라간 게 확실하다. 누굴까. 이건 만행이다. 살아 있는 나무의 목을 댕강댕강 자르는 심보라니. 전에 들었던 두릅 이야기가 생각난다. 두릅은 봄이 되면 척박한 땅 속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물로 소담스런 새순을 만들어 낸다. 겨우내 입맛을 잃었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싹을 달랑 잘라간다. 세상을 향해 피어보고 싶은 꿈을 포기할 수 없는 두릅은 다시 한 번 새순을 낸다. 그 순이라고 가만 놔둘 리 있을까. 또 한 번의 수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두릅은 포기하지 않는다. 잎을 펼쳐보고 싶다는 염원 하나로 다시 한 번 싹을 낸다. 하지만 그렇게 낸 세 번째 새순마저 잘라내면 삶 자체를 포기한다. 그래서 내년에도 두릅 먹기를 원하는 농부는 마지막 순은 절대 자르지 않는단다. 이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의 것을 얻으려면 최소한의 양심과 배려는 필수라는 것만

가슴에 두면 된다.

저만치 논밭이 보이니 이제 마을이 나오겠지.

그래. 이젠 살았다.

누군지 모를 가 두릅의 목을 댕강 잘라갔다고 먹을 게 아주 없을 리는 없다. 봄은 지천에 온갖 선물을 마련해두고 오가는 사람에게 조금씩 나눠준다. 우리의 걸음은 여전히 느리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한참. 모두들 시장기가 도는 눈치다. 하지만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다. 워낙 행복한 걸음을 걷다보니 마음이 불러서? 길이 그리 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먹을 걸 안 싸온 게 문제였다. 휴게소에서 라면이나 우동 한 그릇씩 먹은 게 전부인데 시간은 두 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다. 종국에는 나물이고 뭐고 걸음을 재촉한다. 모롱이를 돌고 또 돌고. 이제 끝이겠지 싶으면 또 다른 모롱이가 나타나고. 풍경만 아름답지 않았으면 일행 중 두어 명은 넉장거리를 놓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걸어가서야 저만치 산 아래로 동네와 논과 밭이 보인다. 산을 내려와 동네에 들어설 무렵, 안도감과 아쉬움이 같은 비중으로 교차한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기도 하지. 영화 세트장처럼 조용한 동네의 한 가운데쯤 들어서니 서서히 아쉬움의 비중이 커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년 봄에 찾아올 수 있을까. 또 찾아오면 똑같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돌아가야 할 회색빛의 냉정한 도시가 가슴에 무지근하게 얹힌다.

주산의 번화가? 영화 세트장처럼 조용했다.

이번 길 여행, 통점절길 걷기는 따로 안내하거나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길은 으로 시작해서 으로 끝나는 게 가장 적절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감춰두고 남 몰래 야금야금 걷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그 동네, 그 길, 그곳 사람들, 모든 것을 대표하는 말은 평화한 단어면 충분했다. 걷는 내내 카메라를 들이대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사진들이 별로 없다. 셔터 누를 시간을 모두 풍경에 할애한 셈이다. 세상살이가 유난히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의 아우성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당신느닷없이 충남 보령 주산으로 가볼 일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통점절 가는 길을 물어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볼 일이다. 걷기가 끝나는 순간 몸 안에 충만한 그 무엇이 채워졌음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통점절길에 중독된 것이다.

기대하시라, 허벌냉면.

꼬리)그날 점심은 그 동네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님이 냈습니다. 길을 안내하고

점심까지 내고. 저는 제 고향에 지인들을 절대 데리고 가지 말아야겠습니다. 말이 점심이지 진정 호화로운 밥상이었습니다. 밥을 먹은 곳은 허벌냉면이라는 간판을 크게 내세운 평화냉면촌이란 식당이었는데, 헛개나무와 벌나무를 넣은 육수를 쓰기 때문에 허벌

세숫대야만에 나온 허벌냉면. 들어간 게 없어도 최고의 맛.

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허벌나게 맛있다고 그리 이름을 지은 줄 알았습니다. 헛개는 알지만 벌나무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냉면 정도 먹고 나서 호화로운 밥상이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님다. 그날의 진정한 주인공은 소고기였습니다. 주산은 한우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합니다. ‘주산한우마을이라는 공동상표도 있습니다. 마침 형님의 친구 분이 평화냉면촌 앞에서 정육점(황률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는 터라,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온갖 종류의 고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했던 게지요. 그곳도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다 식당에서 구워먹는 시스템입니다. 그날 먹은 고기를 일일이 열거하기는 좀 벅찹니다. 등심, 안심, 치마살, 살치살혹시 침 넘기다 익사하는 분이 생길까봐 상세 묘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그날 태어나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를 포식했습니다. 냉면요? 두 말 하면 잔소립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광고는 절대 아닙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