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2007. 4. 23. 16:47 길섶에서
“혹시 기억하실지, 얼마 전에….” 전화를 받은 건 점심무렵이었다. 기어들어 갈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두어마디 들어보니 누군지 금방 기억이 난다.“그 날 하도 고마워서 잠깐 인사나….” 별일도 아닌데 그럴 필요없다고 몇차례 사양해보지만 결국 손을 들고 만다.

일이 좀 늦었던 날,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주름살 깊은 기사는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남의 얘기가 아닌지라 절로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그러다 잠깐 졸았던지, 눈을 떠보니 택시는 엉뚱한 곳을 달리고 있었다. 차를 돌려 집 앞에 도착한 뒤 미터기에 나온 대로 돈을 건네자 기사는 극구 손사래를 쳤다. 더 나온 만큼 빼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길 안내를 못한 죄도 있다며 끝내 거스름돈을 받지 않자, 명함이라도 한 장 달라는 것이었다.

회사 앞에서 만난 그는 환한 얼굴로 “손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일할 맛이 난다.”며 연신 고개를 숙인다. 그러더니 조그만 꾸러미 하나를 떠맡기다시피 하고는 바쁘게 사라진다. 바람이 차가울수록 서로 기대어 온기를 나누는 일은 결코 포기할 게 아니다.
2004.12.7

posted by sagang
2007. 4. 19. 18:26 길섶에서
헐떡이는 숨을 고르느라 다리쉼을 하는 참에 은은한 빛살 하나가 눈에 닿는다. 도봉산을 오르다 보면 원통사라는 오래된 절을 만난다. 절 한편에는 작은 채마밭이 있고 무, 배추가 김장을 기다리고 있다. 빛을 따라 눈을 돌려 보니, 밭둑 풀숲에 어린아이 주먹보다 더 작은 호박 하나가 숨어 있다. 솜털이나 벗었을까. 여리디여린 아기호박이다. 모두가 이별을 준비하는 이 늦가을에 태어난 새 생명이라니.

지금은 어느 식물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에 늦은 계절이다. 남들이 한살이를 마치고 내년을 기약하는 때가 아닌가. 하지만 아기호박은 찬바람 속에서도 밝게 빛난다. 겨울쯤이야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삶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줄기와 잎도 계절을 잊은 채 어린 생명을 위해 물을 길어올리고 날카로운 늦가을 햇살을 걸러준다. 그들은 여전히 푸르고 활기차다.

우리네 인간은 호박 하나만도 못하다는 생각에 쉽사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우린 얼마나 주변 탓을 많이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신보다 늦거나 못하다는 이유로 남을 비방하고 비웃기를 일삼는…. 극복보다는 걱정부터 하느라 밤을 지새우며 한숨이나 쏟아내는….
2004년11월10일

posted by sagang
2007. 4. 12. 19:05 길섶에서
같은 은행나무인데 왜 저건 파랗고 그 옆의 것은 노랗지?” 창밖을 내다보던 동료의 말을 듣다 보니 평소 무심하게 넘기던 풍경이 새삼 낯설다. 이즈음 도심 속 은행나무 잎들은 저마다 다르다. 어느 것은 샛노랗게 물들었고, 어느 것은 여전히 푸르다.

단풍은 가을에 물과 영양분의 공급이 둔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층’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이 떨켜층이 영양분의 이동을 막아 엽록소의 생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잎에 남아 있던 엽록소는 햇볕에 파괴되고, 대신 엽록소 때문에 보이지 않던 카로틴 같은 색소가 드러나면서 붉거나 노란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우리네 상식으로 보면 물이나 기온, 햇볕, 공해 등 환경이 같은 곳에서 자란 나무는 단풍도 같은 색깔로 드는 게 맞을 듯하다. 그런데도 제각각인 건 무엇 때문일까. 같은 색깔이면 훨씬 보기 좋을 텐데.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런 생각 자체가 괜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뭐든지 같아야 보기 좋다는 잣대야말로 인간의 억지가 아닐지. 진정한 평등과 조화는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지 않았나.  하물며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것이야….                                                                            
2004년 11월8일

posted by sagang
2007. 4. 9. 18:57 길섶에서
며칠 만에 전화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개어 놓은 이불을 펴듯 호소부터 풀어 놓는다. “갈수록 갑갑해 죽겠다. 어디 바람 한번 쐴 수 있나.전에 살던 집이 새록새록 그리워….”모시고 사는 형이 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 어머니의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어머니는 아파트 생활이 처음이다.아파트란 게 젊은 사람들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지만,노인에게는 유배지나 다름없다.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역시 입을 쩍 벌린 짐승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만큼 내키지 않을 것이다.

“남세스러우니 너만 알고 있어라.엊그제는 하도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겠다고 나갔다가 들어오려고 보니까 문이 열려야지….” 요즘 짓는 아파트는 대부분 1층 입구부터 원천봉쇄돼 있다.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으면 아무리 두드려도 콧방귀도 안 뀐다.첨단 문화에는 코흘리개에조차도 못 따라가는 노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셈이다.

“비밀번호인가 뭔가 아무리 눌러도 꼼짝 안 하니.날은 추운데 둘러봐도 사람은 없지,왜 뜬금없이 먼저 간 네 아버지 생각이 자꾸 나는지….”  이 시대에 진정한 효도는 무엇일까. 마음이 무거워지는 아침이다.
2004년 2월9일

posted by sagang
2007. 3. 29. 14:51 길섶에서
한겨울의 칼날을 미처 감추지 못한 바람 한줄기가 할퀴고 지나면서 엉성하게 둘러친 포장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하지만 포장 안쪽의 네 사람은 바람쯤이야 아랑곳없다는 듯 여전히 따뜻한 눈길을 나눈다.종로 2가 버스정류장,그 곳에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노점상 가족이 있다.

사내는 쉴 틈 없이 빵틀에 반죽을 붓고 다 익은 빵을 옮겨 담는다.여자의 눈길은 자주 남자의 얼굴에 머문다.그동안에도 익숙한 손길로 꼬치를 끼우고 떡볶이를 뒤집는다.부부의 뒤로는 의자가 두 개 놓여있고 딱히 맡길 데가 없어서 데리고 나온 듯,아이 둘이 앉아있다.분수대의 포말처럼 흩어지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이 싱그럽다.대여섯 살 먹었음직한 큰 아이는 어린동생이 의자에서 떨어지기라도 할세라 자주 손을 내민다.

잠시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던 부부의 눈길이 허공에서 만나더니 입가에 치약거품 같은 미소를 머금는다.무엇이 팍팍한 삶의 현장에서도 저들에게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들까.난방이 잘 된 사무실에 앉아 미소 한 가닥에 인색했던 나는,찬바람 속의 저들보다 훨씬 가난한 게 틀림없다.

posted by sagang
prev 1 ··· 3 4 5 6 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