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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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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터키에서 첫날밤을 묵었던 KARIA PRINCESS 호텔.

KARIA PRINCESS 호텔

보드롬성 입구 한쪽 구석에, 쓰다 버린 휴지처럼 구겨져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다. 혹시 누가 동전을 던져주기라도 할까봐 눈에 힘을 준다. 보긴 이래도 저는 거지가 아니랍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으니 촬영을 마친 다큐팀이 내려온다. 이제 숙소로 가서 쉴 수 있다. 물론 저녁 일정이 잡혀 있으니 일과가 끝난 건 아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한참 달려 교외로 접어들고, 설마 이런 곳에 호텔이? 싶을 만한 곳에 접어드니 거짓말처럼 하얀색으로 칠한 호텔이 나타난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엔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호텔 이름은 ‘KARIA PRINCESS’. 생각보다 작은 호텔이지만 비교적 정갈해 보인다. 하긴 정갈하고 말고를 따질 처지는 아니다. 우선 샤워가 급하다. 하루 종일 흘린 땀이 적어도 한 됫박은 될 것 같다. 수속을 마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는데 언뜻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호텔은커녕 여행자숙소도 못 구해서 애타는 여행자들도 많을 텐데, 나는 누군가가 미리 준비해 둔 호텔에 그것도 독방을 차지하고 자는구나. 자고로 여행자는 먹고 자는 것이 편해서는 안 되는데.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던지고 욕실로 들어간다.

 

KARIA PRINCESS 호텔의 밤 모습.

옷을 벗는데 거울에 비친 몸에 낯선 문신이 눈에 띈다. 양쪽 어깨에 새로 생긴 저 빨간 띠는 무어란 말이냐. 자세히 보니 카메라배낭을 메었던 부분이 금세 벗겨지기라도 할 듯 빨갛게 부풀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우리 땅을 헤매고 다닐 때도 종종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타국에서 보니 더욱 안쓰럽다. 불쌍한 어깨, 주인을 잘못 만나는 바람에. 낮에 잠시 함께 걷던 후배 K가 한 말이 생각난다. “선배, 회사에서 부하직원들 피곤해하지 않아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비행기 안에서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하는 걸 보고 하는 말이다. 남들처럼 풍경을 즐겨야 할 시간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종종걸음 치는 내가 안타깝고 낯설어 보였던 게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저럴 테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까지. “글쎄, 윗사람이라는 건 원래 존재만으로도 피곤한 거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하지만 직원들을 크게 닦달해본 적은 없어. 나 자신에 대해서만 칼처럼 잘 벼린 자를 들이대고 타인에게는 무딘 잣대를 들이대는 걸 원칙으로 해서 살아왔으니까.

호텔 숙소의 창을 여니 고향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물러나 있지만, 10년 가까이 한 분야의 책임자를 맡았었다. 내 딴에는 가능하면 피곤한 상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찌 알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입었을지. 그나저나 난 왜 여행을 이 모양으로 하는 걸까. 나도 쉬고 싶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대개 그러하듯이, 그냥 보고 느끼고 즐기기만 하면 될 텐데. 게다가 난 여행글로 먹고살아야하는 프로 여행작가도 아니잖은가. 특히 이번 여행은 럭셔리하게 즐길 수도 있었는데. 편하게 여행해보자고 마음먹은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천해본 적은 없다. 팔자다. 내가 여행 떠난 걸 알고 있는 그 누군가가, 잔칫집에 간 할머니가 떡을 싸오기 기다리는 것처럼, 내 사진과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강박관념. 실제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내가 여행을 간다니까 몇 사람은 눈을 반짝거리며 여행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선배 한 분은 책 한권 낼 분량을 써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 나를 위해서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하는 자체보다, 뒤에 복기하고 기록하는 게 더 재미있어졌다. 그래서 나는 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 때문에.

보드롬 항구의 야경.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 여행

 상념은 샤워 물줄기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난 여행이 나 자신을 찾아 가는 과정임을 굳게 믿는다. 집에 걸린 거울에는 내 겉모습을 비춰볼 수 있지만, 여행은 내 깊숙한 내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삶터를 떠나 낯선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평소에 만나지 못하던 또 다른 자아가 느닷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물론 긍정적인 모습도 있고 추한 모습도 있다. 그것이 모두 나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아니 자주 외롭고, 어느 땐 엄청난 고통에 스스로의 발등을 깨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성큼 자란 자아와 함께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행은 큰 스승이다. 쓰라린 어깨를 달래며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한다. 내 여행 철칙 중 하나는 그날 입은 옷은 그날 빤다는 것이다.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라도 가능하면 이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어느 땐 아침에 드라이기로 옷을 말릴 때도 있다. 내 보따리에 땀에 전 옷들이 있다는 걸 못 견디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결벽증은 절대 아니다. 빨래를 널고 나니 식사시간까지는 조금 더 남았다. 창문을 연다. 전원풍경이 안길 듯 다가선다. 내 고향에 돌아간 듯, 아름답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다. 이 짧은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또 느닷없이 전신을 감싸는 행복감에 나른해진다.

보드롬성의 야경.

호텔에서 먹는 저녁식사는 여느 곳처럼 뷔페식이다. 준비된 음식은 제법부실하지만 먹는 환경은 예상보다 훌륭하다. 죽죽 뻗은 야자나무 숲(?)과 넓은 풀장. 그 곁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긴다. 다만 술이 없는 게 안타깝다. 에구, 난 왜 이렇게 술을 밝히는 거야. 약간의 닭고기와 과일을 고른다. 어딜 가든 과일은 지천이다. 특히 포도는 전혀 시지 않고 당분이 넘쳐난다. 신 것을 먹지 못하는 나로서는, 여행 내내 먹은 포도가 평생 먹은 포도보다 많을 정도다. 몸이 많이 피곤해서인지 입맛은 썩 좋지 않지만 이것저것 많이 먹어두기로 한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라는 여행자 수칙은 피곤하다고 예외일 수 없다.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출정이다. 호텔을 나서면서 내가 외다리라 부르는 모노포드를 챙긴다. 낮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바람의 언덕으로 오른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차에서 내리니 불어대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다. 무더위도 바람에 날아갔는지 시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예감은 불길해진다. 바람이 이 정도면 곤란하다. 모노포드가 아니라 튼튼한 삼각대를 세워도 날아갈 판이다. 이러면 사진이고 뭐고 어려워지겠는데. 이래서 잔머리를 굴리면 안 된다. 서울에서부터 찜찜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기념품가게들.


밤에는 돈을 인출할 수 있는 ATM기도 한 풍경 한다.

쓰디 쓴 잔머리의 결과

출발하기 전에 가장 큰 고민이 삼각대였다. 분명 야간촬영을 할 기회가 생길 텐데, 그렇다면 삼각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평소에 쓰는 삼각대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다. 간이삼각대로는 카메라와 렌즈의 무게를 버틸 수 없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모노포드를 새로 샀다. 그걸 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보조기능, 즉 간이 삼각대 기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모노포드로 쓰고 필요하면 안에 갈무리 했던 보조다리를 꺼내서 삼각대처럼 쓰게 만든, 일석이조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 꿩 먹고 알 먹고가 그리 흔하든가. 모노포드를 꺼내서 바람의 언덕에 세우는 순간 쓸데없는 짐만 지고 다녔음을 직감한다. 갈대처럼 속절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바람 앞에 등불이라더니 바람 앞의 모노포드다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는 수밖에. 카메라 ISO를 높여서 몇 컷 찍어봤지만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리 없다. 한 번의 잘못 생각이 낳은 참혹한 결과 앞에서 통렬한 반성을 한다. 여행 짐을 싸는 것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필수 조건이다. 갈 곳의 날씨를 면밀히 체크해서 필요없는 옷 같은 건 과감히 덜어내고, 꼭 필요한 것을 선택해 넣어야 한다. 이론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건 더 잘못이다.
 

보석 가게.

 

보석 노점상. 주인아가씨가 무척 예뻤다.

하릴없이 다큐팀의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바람의 언덕을 내려온다. 다음 코스 역시 낮에 갔던 보드롬 해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그곳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낮과 밤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밤이 되면 짙은 화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는 여인을 보는 것 같다. 거리에는 낭만이 넘실거리며 흘러 다닌다. 화려한 조명이 거리의 속살까지 활짝 열어 놓았고, 통기타가수들의 공연이 이어지는 카페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모두가 행복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들이다. 젊은 경찰관도 예쁜 아가씨와 수다 떨기에 바쁘다. 하긴 뭐 신경 쓸 일이 없으니.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길가에는 난장(亂場)이 펼쳐져 있다. 낮에 보이지 않던 각종 좌판들이 환하게 불빛을 밝혔다. 보석을 파는 여인, 즉석에서 유리공예품을 만드는 남자 모두 동화 속 주인공처럼 환상적이다. 광장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있길래 가보니 커다란 스크린을 걸어놓고 공연을 중계해주고 있다. 그 앞에서 많은 이들이 환호하면서 춤추고 있다. 외국인들도 있지만, 낮과 달리 현지인이 더 많아 보인다. 술집의 테라스에는 연인이나 부부, 혹은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로 넘쳐난다.

 

저렇게 개까지 밤새 모여서 논다. 멀리 모스크 첨탑이 보인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넘었다. 한국은 새벽 다섯 시. 하지만 누구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열두시가 넘어야 본격적인 밤 문화가 시작된단다. 금요일은 밤을 꼬박 새우고 노는 게 보통이란다. 참 신명이 많은 사람들이다. 신명뿐일까. 터키사람들은 호기심도 많고 성격도 급하고 열정적이다. 오지랖은 또 얼마나 넓은지. 현지인 가이드가 그걸 증명하는 이야기를 해주며 웃는다. 누가 차를 몰고 가다가 한가한 도로 옆에 서면 보통 여섯 대 정도는 연달아 차를 댄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뒤에는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차를 댔는지 잊어버리고 두세 명씩 모여 수다를 떤단다. 오지랖만 넓은 게 아니라 정도 많다. 다큐팀이 자리를 빌려 촬영한 바닷가 카페에서는 장사에 방해가 될 텐데도 귀찮은 기색 하나 없다. 미안한 마음에 차이를 한 잔씩 주문해 마시고 나오는데 끝내 돈을 받지 않는다. 이거야 원, 신세 지고 공짜로 얻어 마시고. 그게 터키 사람들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뒤로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열두시가 다 됐다. 서울로 보면 여섯시. 평소 같으면 잠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밤을 꼬박 새웠다는 얘긴데.

한밤의 해변 카페. 저만치 보드롬성이 보인다.

터키의 닭은 개처럼 운다

다시 호텔로 향한다. 좁은 길 때문에 돌아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터키의 길은 무척 좁다. 그래서인지 거의 일방통행이다. 로마시대에 만들어놓은 길을 넓히지 않고 그대로 쓰기 때문이란다. 그 때는 적들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길을 좁게 만들었단다. 설상가상으로 그 좁은 길에다 주차를 해놓으니 운전이 아니라 곡예에 가깝다. 호텔로 돌아오니 몸은 물을 가득 머금은 솜. 기상할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 체질적 불면을 지병처럼 안고 살아온 몸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젊은 기자 시절에는 철야를 밥 먹듯 했는데 이제는 밤 한 번 새고 나면 후유증이 2~3일씩 간다. 샤워를 하고 비장의 무기위스키를 꺼내 조금 마신다. 이 피 같은 술을 수면용으로나 쓰다니. 가만히 누워있자니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창 틈을 파고든다. 기온으로 보면 아직 한 여름인데. 그나저나 터키의 귀뚜라미도 귀뚤귀뚤 우는구나. 잠은 오지 않는다. 위스키 한 모금으로 해결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게 시차적응의 고통이구나. 이리 저리 뒤척거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난 또 어떤 인연으로 지금 이 곳에서 불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어느 순간 깜박 의식을 놓는다.

호텔 수영장.

 간신히 붙잡은 잠에서 다시 깬 건 반복되는 소음 때문이었다. 짧은 잠이 안타까운 몸은 여전히 잠 끝을 붙잡고 발버둥 치지만 이미 정신은 제자리에서 똬리를 틀고 앉았다. 처음엔 개 짖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번 들어보니 닭울음소리다. 이상한 건 아무리 들어봐도 귀에 익숙한 꼬끼요~!! 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터키 말, 아니 터키 울음이다. 귀뚜라미는 만국공통어로 울던데. 그나저나 무슨 닭이 개처럼 울지? 그럼 운다고 해야 돼, 짖는 다고 해야 돼? 아무리 교외에 자리 잡은 호텔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 개는아니, 닭은 한두 마리가 아니다. 소음은 갈수록 심해진다. 동네 닭들이 모두 일어나 환영식을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새벽에 반상회를 하는지도. 이 동네는 수탉만 키우나? 시계를 보니 여섯시에 가깝다. 그래도 서너 시간은 잔 것 같다. 이 정도면 남은 잠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주섬주섬 일어나 머리맡에 둔 책을 집어 든다. 밖은 아직 컴컴하다. 조금 있자니 이번엔 고양이들의 반상회가 시작된다. 하필 내 방 창 밑에 와서 세레나데를 부를 건 뭐람. 다행이 고양이들은 만국공통어인 야옹야옹으로 운다. 닭만 터키 말을 쓰나보다.

 

호텔엔 이런 놀이시설도 있다.

호텔 담장의 나팔꽃. 파란색이 너무 짙어서 좀 징그럽기도 했다.

습자지에 먹물 번지듯
,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미명이 스탠드 불빛을 조금씩 지워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살기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말 다 나은 걸까.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고통 때문에 몸살 기운을 못 느끼는 걸까. 여기까지 와서도 일에 매달려 있는 내 스스로가 미워지려고 한다. 다시 누워봐야 헛일일 테니 차라리 산책을 가기로 한다. 어제 빨아놓은 옷은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문을 열고나오니 호텔은 정적에 싸여 있다. 밖에서 보기에 무척 작았던 호텔은 마치 호리병처럼 안으로 갈수록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저녁식사를 했던 나무숲과 수영장을 지나 담장을 따라 걷는다. 아무도 없는 길, 참 아름답다. 담장 가득 덮은 파란 나팔꽃들이 활짝 꽃잎을 벌려 새 아침을 맞아들이고 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게 빛나고 볼을 스치는 바람은 상쾌하다. 다행이다. 잠을 좀 빼앗긴 대신 이렇게 홀로 산책하는 시간을 얻었지 않은가. 우리네 삶이 그렇다. 완전하게 잃는 것도, 완전하게 얻는 것도 없는 것. 작은 일에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다.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진다. 오늘은 마우솔레움에 가는 날, 그리고 보드롬을 떠나는 날. 또 힘차게 시작하고 볼 일이다.


 

추천(view on)과 댓글 오늘도 그냥 지나치진 않으실 거지요?^^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의 바다. 배들이 평화롭게 떠다닌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엄마와 아들이 정겹게 사진을 찍길래 나도 찰칵!

헤로도토스를 불러내다

점심을 마치고 보드롬성으로 간다. 비행기에서 잠을 설친데다 이른 아침부터 이리 저리 걷고, 식사까지 늦어지다 보니 발이 납덩어리를 매달아놓은 듯 무겁다. 게다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리듬을 잃고 허청거린다. 아니면, 나이를 못 속이는 겐가. 아니야, 10kg이 넘는 카메라 장비를 메고 산을 들처럼 쏘아 다니는 체력인데. 스스로를 달래면서 성큼성큼 앞서 걷는다. 이제 보드롬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보드롬이 에게해의 끝이고 지중해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설명은 앞에서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좀 웃긴다. 누구 맘대로 어디부터가 무슨 해이고 어디까지가 무슨 바다라는 건지. 바닷물은 아무 경계도 없이 그저 오갈 뿐인데, 인간이 선을 긋고 금을 들이대며 너는 에게해고 너는 지중해란다. 그리고 그걸 두고 싸우기까지 한다. , 내가 책임 질 일은 아닌 것 같고. 보드롬에는, 보드롬이란 이름을 얻기 훨씬 전에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사를 쓰고 키케로에 의해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 헤로도토스(BC 484~420). 그래서 이 곳의 역사는 그를 통해 들을 수밖에 없다.

보드롬 전경. 오른쪽으로 아주 작게 보드롬성이 보인다.

보드롬성 아래의 모스크와 바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그리스의 도리아인들이 먼저 등장한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인들의 식민지 건설이 시작됐을 때, 그중 도리아인들이 만든 6개 도시 연맹 가운데 하나가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 바로 오늘날의 보드롬이다. 이 지역은 훗날 마우솔레움의 주인이 된 마우솔로스(BC 376~353)가 통치하던 시절에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역사 이야기는 길게 하면 재미없다. 특히 남의 역사는 더 그렇다. 아무튼 이 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에게 패망하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BC 129년에는 로마의 영토가 됐다가 그 후 AD 654년부터 이슬람의 공격을 받는다. 꽤 오랫동안 이슬람의 영토였던 이곳은 1402년 십자군인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함락된다. 그 들이 그때 보드롬성을 짓고 베드로성이라 불렀다. 또 이 지역을 베드로의 성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페테리움(Peterium)이라 이름 지었다. 이것이 터키말로 보드롬이다. 1522년 오스만에 의해 다시 점령된 뒤에는 계속 터키 땅으로 남았다. 한 마디로, 팔자가 드세서 이놈저놈 드나들며 제 땅을 삼은 곳이 보드롬이란 얘기다.

출항대기 중인 배들.

보드롬성 입구.

보드롬성과 마우솔레움

조용한 어촌이던 보드롬이 주목을 받게 된 건 1923년부터였다. 그해 체결된 로잔 조약에 의해 다음 해 터키와 그리스가 인구를 교환할 때, 그리스영토 크레타에 살던 터키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제법 활기찬 도시로 발돋움했다. 보드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의 역사적 유물이다. 그 중 하나가 앞서 그 유래를 설명했던 보드롬성이고, 나머지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는 마우솔레움(Mausoleum)이다. 이제부터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 둘은 아무런 관련도 없고 또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하다. 말장난? 그렇진 않다. 마우솔레움이 BC35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했고 보드롬성이 1400년대에 세워졌으니 1800년 가까운 시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역사 공부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일단 궁금증을 심어놓고, 대답은 뒤로 미뤄 두는 것도 글 쓰는 자의 권리일 터. 사실은 둘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려면 마우솔레움부터 들러야 술술 풀리는데 방문 일정이 보드롬성부터 잡혀 있으니 거꾸로 가는 수밖에 없다.

보드롬성 망루.

보드롬성.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거의 훼손이 없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유럽 관광객들이 많았다.

보드롬을 상징하는 보드롬성은 양쪽에 항구를 거느린 곶의 끝부분에 제법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지금까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 성은 당시에도 에게해에서 가장 견고한 성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 입구에는 관광객이 제법 많다. 주로 유럽인들이다. 유럽의 연합군, 즉 십자군으로 한 때 이 도시를 점령했던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온 걸까. 일본인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오듯. 성 내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국을 상징하는 망루, 즉 성탑들이 남아있다. 성은 현재 인근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을 전시하는 수중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다시 바쁜 걸음들 속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걷는다. 우선 지친 몸도 달랠 겸 분위기 파악을 위해 벤치에 앉는다. 긴 세월을 머금은 우람한 나무들이 내리 쪼이는 햇빛을 잘 걸러준다. 땀이 좀 걷히면서 주변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래가 뾰족하고 토끼 귀처럼 손잡이가 달린 암포라들.

기사들이 예배드리던 교회. 지금은 배가 전시돼 있다.

교회 안에 전시된 배 모형. 항아리들이 가득하다.

좌측 뒤편으로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전시돼 있다. 바로 암포라(amphora)라고 부르는 항아리다 암포라는 '2개의 손잡이'라는 뜻인데 그릇마다 앙증맞게 달린 손잡이가 토끼 귀처럼 예쁘다. 포도주나 올리브유 또는 곡식의 운반저장용으로 썼다고 한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은 흙으로 만든, 밑이 뾰족하고 기다란 암포라다. 왜 굳이 아래를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고정을 위해 별도의 받침대가 필요했을 것 같다. 항아리들은 침몰된 배에서 통째로 건져 올린 듯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앞에는 십자군 기사들이 예배를 보던 교회건물이 서 있다. 물론 십자군들이 물러간 뒤에는 이슬람사원으로 쓰였을 것이다. 정복한 자들에 의해 교회도 되고 사원도 되고. 사람으로 친다면 참 기구한 팔자다. 신들도 인간의 부름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에 바빴을 것 같다. 지금은 교회 안에, 해저에서 건져 올린 침몰선을 10분의 1 크기로 복원해 전시해놓았다. ()의 배()에는 항아리가 가득 실려 있다.

보드롬성 입구에 놓인 대포.

십자군 전쟁이 남긴 이야기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왕 주저앉은 김에 십자군 얘기를 잠깐 하고 지나가자. 십자군전쟁은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이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슬람세계에 있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총 8회에 걸친 원정을 말한다. 셀주크 튀루크에게 압박을 받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의 황제가 교황인 우르바누스2세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그러잖아도 성지순례를 이교도들에게 방해받는 게 기분 나빴던 교황은 도랑치고 가재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성전을 선포한 것이다. 교황은 십자군을 모으기 위해 갖가지 당근을 내밀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면 모든 교회법상의 처벌이 면제되고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영혼은 곧 천국에 간다고 설파했다. 결국 상인들은 돈을 좀 만져볼까 하는 마음에, 농민들은 뼈 빠지게 일 해봐야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봉건영주의 등쌀에서 좀 벗어나볼까 하고 원정에 가담했다. 이러다 보니 성전은 약탈에 가까운 전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여덟 차례의 원정 중 1차 때인 1099년 단 한번 뿐이었다. 그마저도 1144년에는 전열을 정비한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빼앗긴다.

석문 위로 십자군에 참가했던 나라들의 문장이 보인다.

나머지 원정은 대부분 실패였다. 가다가 전멸당하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새기도 하고 같은 편을 약탈하기도 하고. 시쳇말로 당나라 군대짓을 하기 바빴다. 십자군 얘기를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저질렀던 잔인한 폭거. 지금 들어도 치가 떨린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그곳에 거주하던 무슬림, 유대인,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까지도 무차별 살해하기 시작했다. 만행은 무려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이 때 14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은 물론 이슬람사원까지 쳐 들어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 종교인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이리떼였다. 이 같은 대학살은 그동안 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며 살아온 무슬림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물론 보드롬성을 세운 십자군과 그때의 이리떼들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보드롬에 들어온 그들은 패잔병에 가까운 십자군 끝물이었다. 로도스에 근거를 두고 마지막 항전을 하던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제국과 티무르 제국이 전쟁을 하는 틈을 타고 보드롬을 차지했다.

보드롬성.

성은 바다와 이어져 있다.

보드롬을 점령한 십자군은 성을 건축하고 이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주변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때 앞에 기술했던 마우솔레움과 관계가 맺어진다. 성을 짓기 위한 석재를 찾던 그들은, 지진으로 무너진 옛 무덤 마우솔레움을 찾아내고 심봤다!!”를 외쳤다. 돌들은 즉시 건축현장으로 실려 가고 무덤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조각들은 늙은 거지의 유품처럼 버려지고 파괴됐다. 덕분에 고대 7대 불가사의는 그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고 말았다. 또 하나의 폭거가 그렇게 저질러 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저것도 모두 유적일 뿐이다. BC350년대에 건설된 마우솔레움의 돌들이 15세기에 건설된 보드롬성의 뼈대가 되어 지금까지 버티고 있으니, 그것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 아닐까. 성 요한 기사단에 관한 스토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뒷얘기가 재미있다. 느닷없는 역사 강의에 좀 지루하겠지만, 보드롬을 갔으니 이 정도는 알고 지나가야 한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잔인한 전쟁광으로 묘사돼온 이슬람교도들. 누가 정말 잔인한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여기에서 나온다.

세월을 말해주듯 성벽 돌틈에서 풀들이 자란다.

성내의 석문들. 석문들마다 문장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잔혹과 이슬람교의 관용

보드롬성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가던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의 슐레이만 1세의 등장에 의해 일장춘몽이 깨지고 만다. ‘위대한 술탄슐레이만에 대항하기에는 보잘 것 없는 힘이었다. 보드롬에서 성 요한 기사단을 몰아낸 슐레이만은 그들의 본거지 로도스에 항복 할 것을 권유한다. 이 권고가 거부되자 슐레이만은 공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성 요한 기사단은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도 6개월을 버틴다. 그저 내버려 두기만 해도 굶어죽을 형편이었지만, 슐레이만은 공격을 멈추고 항복을 권유한다. 그때 내세운 조건이 재미있다. “그동안 너희들이 쓰던 배는 물론, 그 배에 보물이든 무기든 원하는 것을 다 싣고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배가 더 필요하면 빌려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바보짓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관용이었다. 물론 그걸 거절하면 더 바보다. 152311일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이 내준 배에 무기와 보물, 가족을 싣고 섬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던 기독교인들과, 그 후예에게 배를 빌려주며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만든 무슬림. 이런 기가 막힌 역사는 늘 작은 모습으로 숨어 있게 마련이다.

박물관의 유리제품들.


문자를 새긴 석판.

박물관의 전시물들.

상념에서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성을 탐색하기로 한다. 계단을 오르면서 석문을 지나면서 곳곳에서 당시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의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마치 15세기로 돌아간 듯 생생하다. 기사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에 두리번거리기까지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유물들은 화려하다. 성이 감옥으로 쓰일 때 만들어진 목욕탕도 있고 곳곳에서 정교한 유리제품도 만난다. 석재 관()과 금관, 각종 장신구들, 금전들. 세월 따위는 아랑곳 안 한다는 듯 조명 아래 여전히 자태를 빛내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그저 갇혀버린 시대의 잔재들일 뿐. 사실 난 박물관이라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문화의 감옥이라고 폄훼하기까지 한다.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줄 잘 알면서도, 박물관에 갈 때마다 그들에게서 생명을 빼앗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짠하다. 모든 건 있을 곳, 아니 있던 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경주의 다보탑이 경복궁 마당으로 오는 순간 그저 돌덩이일 뿐이다. 하지만 바다 밑에 들어가 유물을 보고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성의 천장도 예술작품이다.

망루로 올라가는 길.

박물관에서 나와 성루로 올라가는 순간, ! 하는 탄성이 나온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짙푸른 바다와 그 위에 점점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 아래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집들. 햇살을 머금은 물비늘은 자반뒤집기를 즐기고 성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 이렇게 평화 속에서 풍경을 즐기지만 이 곳은 전쟁을 위해 지어진 성. 그들의 목적이야 어쨌든, 그리고 어느 편이었든 전쟁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을 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돌 위에 철퍼덕 앉아 성을 올라오면서 본 풍경들을 하나씩 되새겨 본다. 얼굴이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대리석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국인들이 머리만 가져가고 남은 몸통이라고 한다. 하긴 영국박물관에 있는 유물의 대부분이 약탈물들이라나. 사람의 욕심은 돌조차도 제 땅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 옛 사람들의 욕심이야 어떻든 내겐 지금 앉은 자리가 천국이다. 몸은 무너질 듯 지쳤지만 난 지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지 않은가.

목이 없는 대리석상. 훔쳐갔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후손(?)들이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다.


 

망루에서 바라본 보드롬.

나비가 장자더냐 장자가 나비더냐그들이 하나더냐 그들이 둘이더냐꿈인 듯 생시인 듯 나 자신을 풍경 속에 비벼 넣고 있는데 귓전을 파고드는 소음이 있다. 누가 누굴 부르는 소리다. 설마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늘어져 있는 나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돌아볼 생각도 안 하는데 그놈의 “Excuse me, Excuse me”가 멈출 줄 모른다. 에라, 어떤 부자 될 놈이. 돌아보니 터키사람은 아니고 허여멀건 한 유럽인(이 틀림없는)이 금발의 여자와 함께 날 바라보며 “Excuse me”. 야 임마. 내가 널 언제 봤다고 용서(excuse)’ 해달란 거야. 그러잖아도 너희 유럽인종들만 보면 내 나라를 침탈했던 왜족들이 생각나서 속이 뒤집어지는데. 귀찮은데 그냥 서로 갈 길 가자. 이 친구가 내 구시렁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턱이 있나. 당치도 않은 미소를 앞세워 한 발 더 다가선다. 보나마나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큰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사진을 찍으면 정종철(본인에겐 미안합니다)을 장동건으로 만들어 주는 줄 아는가보다. 가는 데마다 귀찮게 군다. 그래도 어쩌나. ! 하고 힘을 주며 일어서고 만다.

망루에서 바라본 바다.

망루에서 본 보드롬 시내.

카메라를 내게 넘긴 이 친구가 여자친구 손을 끌고 쫄래쫄래 가더니, 하필 햇볕이 등으로 쏟아지는 자리에 선다. 하긴 그쪽이 경치가 좋긴 하다. , 임마. 거기 서면 역광 땜에 사진 안 나와. 이쪽으로 서. 그나저나 역광이 영어로 뭐더라. 암튼, 너 거기서 찍으면 얼굴 시커멓게 나온다고. 짧은 말로 설명하는 성의 따위는 아랑곳없이 이 친구 “OK“를 연발한다. 네가 찍으면 잘 나올 테니 무조건 ”Try”해보란다. 트라이 좋아한다. , 무릎 아래만 찍어버릴라. 나도 늙어가나 보다. 심술이 느는 것이. 아무튼 오케이라니 찍을 수밖에. 제대로 안 나오는 건 제 팔자지. 셔터를 눌러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안 듣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나 간 다음에 뭐라 건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성에서 내려오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피곤이 전신을 휘감는다. 이제 누가 떠밀어도 그 자리에서 자빠질 뿐, 움직일 힘이 없다. 오뉴월에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늙은 개처럼 혓바닥을 빼어 문 채 벤치에 등을 의지한다. 일행들이 올 때까지 이러고 있는 수밖에. 에구구! 오늘은 팔자에 없는 세계사 공부만 실컷 하다 끝났다.

 

추천과 댓글 오늘도 그냥 지나치진 않으실 거지요?^^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 바닷가. 배들이 빽빽하게 정박해 있다.

보드롬 해변과 거리의 카페.

아잔, 그리고 무슬림의 예배

아주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이다.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와 좁은 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다 보니, 언덕 위에서 보았던 보드롬성 근처의 해변에 닿는다. 이곳은 아직 휴가의 여진으로 들끓고 있다. 벌거벗은 인파가 물고기 떼처럼 거리를 유영한다. 하긴 9월말이라고는 해도 30도를 웃도는 날씨니 바다를 떠나기는 아쉬울 것이다. 부두에는 호화롭게 치장한 요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몸을 부비고 있다. 부자들의 개인요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세용이다. 요트를 세 내어 인근 바다에 나가 수영도 하고 배에서 만들어주는 즉석 해물 요리로 점심식사를 하는 재미가 근사하단다. 말 그대로 저 바다에 누워평화로운 한낮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돈만 있다면. 대부분 유럽인들이 이용한다고 한다. 유럽에 비해서 비교도 안될 만큼 싼 가격에 호화로운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보드롬이다. 해안가를 따라 각종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부터 카페, 음식점, 바들이 나란히 서 있다.

1720년에 지은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

해변 탐색은 뒤로 미루고, 일단 빵집이 있다는 바자르(이슬람 특유의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 보통 시장을 이르며 상점이나 공방이 늘어선 골목도 그렇게 부른다)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보드롬성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쇼핑타운이다. 바자르로 들어가기 직전, 광장에서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소리와 마주친다.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불경을 외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한.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거리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구나. 그러면 저곳이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그나마 공부 좀 했다고 바로 눈치를 챈다. 이슬람교도들은 아침에 해 뜨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 정오를 넘긴 낮, 오후, 해가 질 무렵,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도(聖都)인 메카 쪽을 향하여 모두 다섯 번의 기도를 한다. 그 기도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리는 소리가 아잔이다. 물론 새벽에도 아잔은 울린다. 전에는 모스크 한쪽에 높은 미나레트(첨탑)를 세워 담당 무슬림, 즉 무아진이 육성으로 기도시간을 알렸다는데 지금은 모두 확성기를 이용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이 아잔은 노래에 가까울 정도로, 특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러 번 들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뜻은 알라는 지극히 크시도다. 우리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맹세하노라. 예배하러 오너라. 구제하러 오너라. 알라는 지극히 크도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라고 한다. 과연 조금 있으니까 무슬림들이 모스크를 향해서 꾸역꾸역 모여든다. 바자르나 인근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이리라. 모스크 입구에는 1720년에 지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긴 세월에 감탄하고 있는데, 누군가 저 정도면 그리 오래된 모스크는 아니라고 일러준다. 무슬림들을 따라 슬그머니 모스크로 들어가 본다. 일찍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 기도 준비를 하고, 미처 못 들어간 사람들은 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묵묵히 기도를 준비할 뿐, 누구도 이방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오른쪽 마당으로 가보니 수도꼭지들이 있고 그 앞에 나란히 의자들이 놓여 있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거기서 손발을 씻는다. 젊은이들이 제법 많은데, 그 중엔 곱상하게 생긴 친구도 우락부락한 친구도 있다.

모스크 실내가 차면 자리를 깔고 바깥에서 기도한다.

튀르크족, 즉 지금의 몽골 땅에서 살던 돌궐족이 언제부터 이슬람교를 접했는지는 딱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아나톨리아로 땅으로 들어오기 훨씬 전인 8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돌궐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아바스왕조(7501258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칼리프조)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터키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다.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아타튀르크가 1928년 헌법을 수정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히잡을 쓰는 등 종교적 특성을 나타내는 행위는 금지된다. 이를 세속주의라고 하는데 종종 저항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세속화와 서구화에 대한 반대하고 이슬람으로 복귀하자고 주창하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세속화의 영향으로 터키에서 교리의 적용은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그리 엄격하지 않다. 음주도 비교적 자유롭다. 일부 터키사람은 농담 삼아 스스로를 사이비 이슬람교도라고 칭하기도 한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길.


바자르에서 만난 사람들

기도를 더 이상 방해하면 안 되지. 모스크에서 나와 바자르로 들어간다. 햇볕을 막기 위해 친 하얀 차양이나 나무 넝쿨이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관광객들은 느긋하게 거리를 오가고 갖가지 상품들이 손짓을 한다. 나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길을 걷는다. 동양인이 신기해서일까? 장사를 하는 사람마다 “Where are you from”을 아끼지 않는다. 하긴 보드롬을 돌아다니는 내내 동양인들을 본 적이 없다. 대답을 안 하면 물건 파는 건 뒷전이고 따라오면서까지 국적을 캐묻는다. 재팬? 차이나? 그러다 코리아라는 대답이 나오면 곧바로 “My brother!!!“가 튀어나온다. 17년 전에 헤어진 형이라도 상봉한 듯 호들갑스럽다. 물론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네가 코리언이고 내 형제니까 특별히 ‘Good price’로 줄 테니 물건 하나 보고 가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는다. 그쯤이면 궁금해진다. 정말 한국인이 반가운 거야, 아니면 누구에게나 하는 장삿속이야. 설령 장삿속이라고 해도 불쾌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귀찮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거니와,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낄낄거리며 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을 치는 아저씨도 있고 달랑 저울 하나 밑천 삼아 몸무게를 재주고 돈을 받는 아이도 있다. 자유와 활기가 넘치는 거리다.

바자르를 오가는 관광객들.

오래된 빵집은 골목 중간쯤에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서는 순간 실망감이 앞선다. 화려한 겉모습이 여느 현대식 빵집과 다르지 않다. 종업원들도 세련된 모습이다. 허름한 가게에서 늙어 꼬부라진 영감님이 빵을 굽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들어가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마침 내가 서 있던 집이 음식점 앞이었나 보다. 돌아보니 음식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입에 환한 웃음을 베어 물고, 얼음을 가득 채운 오픈형 냉장고를 가르친다. 얼음 속에는 문어나 각종 생선이 터키 맥주 에페스와 함께 묻혀 있다. 그걸 먹고 가라는 것이다. 얼음 속에서 문어를 꺼내 싱싱하다고 흔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 냉장고에 생선과 맥주를 동거시키다니 참 특이하다. 먹을 생각이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 아저씨도 그냥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카메라를 보더니, 식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굉장한 풍경이 있다면서 “Take photo”를 외친다. 떠밀리다시피 들어가 보니 식당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차양 아래 관광객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며 한낮을 즐기고 있다. 유유히 떠다니는 배들, 저만치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보드롬성. 자랑할 만도 하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음식점. 맥주와 생선이 한공간에...

맥주와 음료를 즐기는 관광객들. 저만치 보드롬성이 보인다.

135년을 이어온 빵집을 가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눈치 없는 종업원이 다가와 ‘One beer’를 외친다. 콜라 한 잔이라도 팔겠다는 결의가 얼굴에 가득하다. 사진 찍으러 들어온 거라고, 사양하면서 나오는데 굳이 따라 나오면서 말을 건다. 당연히 “Where are you from”이다. 코리아라는 대답에 반색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혹시 터키 초등학교 교과서에 동양인을 보면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나와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이 친구 끝내 따라 나오면서, 자기네 사장이 태국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코리아와 방콕이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의 이웃인 줄 아나보다. 결국 나를 사장에게 데려가더니, 이 사람이 한국에서 왔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사장 역시 반색을 하면서 자신이 애인과 함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라는 걸 거듭 강조한다. 그래, 좋겠다. 네 번 다녀오면 확성기 들고 돌아다니겠다. 별로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수다를 떨다 작별하고 나오는데, 그제야 빵집 간판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SINCE 1876’. 가만 계산해보니 135년이다. 참 오래도 됐다.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빵장사 하나로 버텼다니, 뭔가 들을 만한 얘기가 있을 것 같다.

135년 된 빵집 내부. 너무 현대식이라 세월을 실감할 수 없다.

빵집 간판

빵집 주인은 친절이 뼛속까지 배어있다. 장사에 방해가 될 법도 한데 다큐팀이 영상장비를 들고 들쑤시고 다녀도 마냥 웃는 얼굴이다. 어쩌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터키인의 주식은 빵이다. 쌀농사도 조금 짓기도 하지만 소비가 많지는 않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에는 대부분 기계가 만든 빵을 사다 먹는다. 이 빵집도 전에는 식사용 빵만 만들다가 요즘은 케이크나 다이어트용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고 한다. 그 말을 뒷받침 하듯 수백 가지의 빵들이 진열돼 있다. 그런데 운영방침이 좀 독특하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여름을 중심으로 6개월 동안은 24

빵집 주인. 전형적 낙천주의자다.

시간 장사를 하고 겨울시즌에는 문을 닫고 논단다
. 그거 참 괜찮다. 아예 눌러앉아 취직을 해버려? 주인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빵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일종의 가족기업이다. 지금 함께 일하는 종업원들도 모두 친척이란다. 빵은 공장에서 새벽 3시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손으로 빵을 만들던 시절은 이제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는 걸 그의 말에서 읽는다. 그래도 한 장소에서 135년 동안 대대로 빵을 파는 사람들, 그 또한 장인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케밥을 만들기 위해 돌려가면서 구운 고기를 자르고 있다.

케밥과 맥주 한 잔의 기쁨

빵집에서 나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뱃가죽이 등으로 달라붙은 지 오래다. 차를 통한 이동이나 식사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니 별 수 없다. 기내식을 제외하면 터키에서 먹는 첫 번째 식사다. 기대가 크니 더욱 배가 고프다. 프랑스와 중국에 이어 터키음식을 세계 3대 음식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터키 대신 인도를 앞세워 4대 음식에 넣기도 한다. 3대면 어떻고 4대면 어떠랴. 맛있다는 얘기겠지. 특히 다양한 종류와,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케밥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야외 음식점에 자리를 잡은 뒤 케밥을 시킨다. 터키에서는 글과 말을 몰라도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찾기 어렵지 않다. 식당 앞 큰 메뉴판에 음식 사진과 가격을 함께 적어놓은 곳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들어가서도 메뉴판을 달라고 해서 맛있어 보이는 걸 가리키면 된다. 음료는 터키의 전통요구르트 아이란(Ayran) 외에도 콜라나 스프라이트, 과일주스 등이 있다. 보통 생맥주도 파는데 당연히 가격은 음료수보다 비싸다. 음식점을 찾는 또 하나의 팁은, 가능하면 화덕이 있는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다양한 음식을 맛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 화덕은 보통 입구 근처에 있기 마련이다.

터키에서 첫 식사로 먹은 케밥.

불에 구운 요리를 뜻하는 케밥은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일일이 구분하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 고기를 매달아놓고 돌려가면서 구운 뒤 얇게 잘라서 야채와 함께 빵 사이에 끼워 먹는 되네르(Döner)케밥이다. 국민요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케밥은 길거리 노점에서부터 카페, 식당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양도 제법 많아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잘 알려진 대로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송아지고기나 양고기를 재료로 쓴다. 닭고기를 재료로 하는 음식도 제법 많다. 케밥은 음료수와 함께 먹기도 하지만, 앞에 말했듯이 보통 아이란을 곁들인다. 터키의 요구르트는 걸쭉하기 때문에 보통은 떠서 먹는데, 아이란은 여기에 시원한 물을 타서 묽게 만든 것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해물 요리도 먹을 수 있다. 나는 단 한 번 먹어봤는데 가격은 그리 싼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회는 없었다. 또 유명한 터키음식 중의 하나가 이스탄불 갈라타다리 부근에서 파는 고등어샌드위치. 일정 마지막에 이스탄불에 갔지만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이것 역시 먹어보지 못했다. 다음엔 꼭 먹어보리라 다짐하며 돌아섰던 아픈 기억이 있다.

터키식 피자인 피데를 만드는 청년.

다 만든 피데를 화덕에 넣고 있다.

조금 뒤 나온, 되네르케밥은 역시 맛있다. 허겁지겁 먹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남기는 사람도 있다. 막입인 나만 맛있는 걸까? 남들이 콜라나 생수를 시킬 때 눈총을 무릅쓰고 맥주를 시킨다. 흘린 땀이 얼만데. 몇 시간 전부터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가이드와 몇몇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점심 먹으며 술 마시는 사람도 있네? 혹은, 기자라는 족속들은 역시그런 눈초리. 아무렴 어떠랴. 이 황홀한 순간을 포기할 수 없는 걸. 잠시 뒤 화덕 쪽에서 수런수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청년이 나와서 터키식 피자인 피데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식사를 해 준 이방인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피데쇼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밀가루를 두드리는 장단이 아주 경쾌하다. 미안하게도 밀가루 반죽을 허공에 던져서 넓히는 장면은 한국에서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신기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쳐다봐준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청년의 동작에 신명이 붙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른 아침 샘물처럼 맑은 얼굴이다. 하루 동안 만난 터키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욕심이나 원망보다는 긍정과 희망이 가득 찬 얼굴들. 거기서 힘을 얻는다. ! 일어나자. 또 걸어야지. 어쩌자고 하늘은 저렇게 푸르단 말이냐.

 

추천과 댓글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처음 읽는 분은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에게해. 바다의 깊이에 따라 색깔이 다양하다.


이스탄불에서 환승하다


비행장의 가로등들이 조금씩 존재를 지워가더니,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활주로를 점령한다. 시간은 늙은 개처럼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데 공항 내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경우는 없는 법. 어느덧 0820, 보드룸(bodrum)행 국내선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이 다 차고 출발 예정시간 0840분이 지났는데도 비행기는 꼼짝을 안한다. 50분이 지나도 안내방송 한마디 없다. 그러다가 아홉시가 조금 넘으면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활주로도 이 시간은 러시아워인가?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한 시간만 날아가면 첫 번째 목적지인 보드롬이다. 잠시 뒤 수런수런 하더니 기내식이 나온다. 국제선에서 먹은 게 아직도 뱃속에 고스란히 남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둔다. 여행자의 수칙, ‘언제 또 먹을지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채워둬라에 충실해야 한다. 살찌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채운다.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 지중해를 따라 가는 내내 이런 도시와 함께한다.


터키를 아십니까?

비행기는 비교적 낮은 고도를 유지한다. 맑은 하늘 덕분에 아나톨리아반도의 생생한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와 집들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넓은 평야와 도시들이 스쳐 지나고. 짙푸른 바다도 간간히 동행한다. 이 땅이 품고 있는 긴 세월을 실타래 풀 듯 한 가닥씩 풀어본다. 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터키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터키? 거기가 아시안가? 유럽인가? 여하튼, 축구는 좀 하더라고. 전에 한일월드컵 때 4강전에서 우리나라를 이겼잖아.” ‘축구는 좀 하는정도가 아니다. 축구광(?)들이 모여 사는 나라다. 우리나라 축구 열기 정도는 새발 의 피. 혹은 어떤 사람은 터키? 잘 알지. 6.25때 우리나라에 파병했던 나라잖아? 그 친구들은 우리나라를 형제국이라고 한다던데크게 고마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얘기는 더 이상 진전을 못 보기 마련이다.

보드롬의 바다. 실제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하얀 포말을 그리는 건 쾌속선.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터키의 10%도 설명할 수 없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동양과 서양의 교차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가 혼재된 땅,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 문화의 용광로이 정도의 키워드는 들어가야 터키의 실체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터키는 동서양의 역사를 한 공간에 켜켜이 담고 있는 떡시루 같은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을까. 유럽을 중심으로 기술된(혹은 왜곡된) 세계사를 비판적 안목 없이 배운 탓이다. 로마하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만 기억하도록 공부한 우리에게,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부르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후 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가 아닌 지금의 터키였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 없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게 로마 역사의 종지부라고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이후에도 동로마가 1000년간이나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비잔티움제국라는 이름의 포장에 가둬 그곳에서 로마의 이름을  탈색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유럽의 한 페이지는 상실됐다지우개로 역사를 바꾸거나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의 7대교회가 깃들었던,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땅이라는 사실도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기억할 뿐이다.

뱀처럼 흐르는 보드롬의 수로들.

차차 설명하겠지만, 현재 터키라는 국명으로 튀르크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그들의 땅은 아니었다. 흑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이 곳에는 고대부터 다양한 인종이 거쳐 가고 숱하게 많은 국가가 명멸했다. 기원전 6500~5800년 무렵에 존재했던 신석기 주거지 차탈화위크,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집단주거지 중 하나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트로이목마로 잘 알려진 트로이 등에서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했던 히타이트 문명이 발달했다. 무엇이든 만지면 황금이 된다는 미다스왕의 프리기아왕국도 이곳에 있었고 기원전 8~7세기 무렵부터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폴리스를 건설하고 살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될 때까지 이 땅에서 성쇠를 거듭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제대로 보려면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아닌 터키를 가야한다는 말은 괜한 수사가 아니다. 굴러다니는 돌도 우리로 보면 문화재급이다.

보드롬공항. 한 여름이면 이곳이 미어진단다.


보드롬공항에 도착하다

맛있는 음식도 단번에 먹으면 체하는 법. 멀고 먼 나라의 역사공부를 어찌 하루아침에 다 하랴. 785000로 남한면적의 7.8배에 달하는 이 땅, 한 때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품었던 이 땅이 간직한 긴 얘기는 조금씩 나눠서 소화할 일이다. 기내식을 마쳤는가 싶었는데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입이 떡떡 벌어진다. ,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이렇게 징그럽게 파란 바다가! 저것이 바로 터키블루의 실체? 투명한 잉크를 엎질러 놓은 것 같은 쪽빛 바다가 한없이 달려 나가고 그 위에서는 작은 배들이 하얀 포말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황홀한 그림이다. 갈래갈래 흐르는 수로들은 환영이라도 본 듯 현실감마저 무디게 만든다.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지도 못했는데 비행기가 착륙한다. 1030. 보드롬 공항은 비교적 한산하다. 아직 태양은 이글거리는 햇살을 토해내고 있지만 휴가철 피크가 지났기 때문이리라. 짐을 찾은 뒤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와 합류했다. 다큐멘터리 촬영팀을 태우고 다닐 버스다.

올리브나무. 지중해 지역은 어디를 가나 지천이다.

올리브 열매들. 언뜻 보면 대추처럼 생겼는데 서서히 자색으로 익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구릉이나 산마다 낮게 엎드린 낯선 나무들이었다. “사막지대인가?” 누군가 터트린 혼잣말을 터키인 가이드이드가 냉큼 수정해준다. 모두 올리브나무란다. 에게해와 지중해는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가이드는 올리브의 효용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터키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60, 여자는 65세라는데 지중해 쪽에 사는 남자들은 100세 이상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단다. 그게 다 올리브 덕이라는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심은 지 10년 정도가 지나야 열매를 맺는데 보통 200~300년을 산단다. 수확은 보통 3월과 9~10월 두 번씩 한다. 수확철에는 터키 동부 사람들이 품을 팔려고 몰려온다. 하도 좋다고 강조하길래, 호텔에서 여러 번 절인 올리브에 도전해봤는데 내 입에는 영 아니었다. 얼마나 짠지. 그냥 명대로 살다 가는 수밖에.

언덕 위의 하얀 집들. 파란 하늘-바다와 어울려 환상적 풍경을 연출한다.

올리브나무도 나무지만 단연코 눈길을 잡고 놔주지 않는 건 하얀 집들이었다. 집들은 주로 언덕에 터를 잡았는데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얗게 칠했다. 바다와 나무만 빼놓고 어딜 둘러봐도 하얀색이다. 하얀색도 어울려 있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이곳 페인트 장사들은 간편해서 좋겠다. 하얀 페인트만 팔아도 되니. 처음엔 보기 좋으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햇볕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란다. 흰색은 햇볕을 반사하고 검은 색은 흡수하고.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이 그제야 떠오른다. 대부분 여름별장용 빌라들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보드롬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모두 현대식으로 바뀌어 옛날 같지 않다고 슬그머니 한탄이다.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인 이곳은 휴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외국인, 특히 유럽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다. 오죽하면 유럽의 침실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을까. 인구 3만의 작은 도시가 여름만 되면 6만 명을 웃도는 인파가 북적거린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별장이든 터키인 고유주택이든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언덕위의 하얀집들은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게 해준다. 천국이 정말 있다면 이런 모습 아닐까?

보드롬 시내의 풍경. 천국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본 보드롬성.

'바람의 언덕에 서다

보드롬에서 처음 목적지로 잡은 곳은 귬벳(Gumbet)이라는 곳. 해변을 포함한 지역 이름인지 언덕의 고유명사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보드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다. 공항을 떠나 40분쯤 달려서 언덕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또 한 번 아! 하는 감탄사를 갈무리 하지 못한다. 둥그렇게 형성된 만()을 따라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다. 그리고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들. 저만치에 십자군들이 세웠다는 보드롬성이 우뚝 솟아있다.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들이 바다로 떨어져 내려 깔깔거리며 자맥질을 한다. 수없이 일어났다 눕는 물비늘들이 보석처럼 황홀하다. 바다에서 올라온 한줄기 바람이 낯선 나그네를 기웃거리다 기어이 옷깃을 헤친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누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이 언덕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로 한다. ‘여기는 오늘부터 바람의 언덕이야제법 그럴싸하다. 바다에서 눈을 돌리니 언덕 꼭대기에 허물어져 가는 둥근 건물들이 하얀 칠을 덮어쓴 채 서 있다. 방앗간으로 쓰던 건물들이란다. 그렇다면 풍차?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바람의 언덕이라니까.

세월에 치여 이제는 쓸쓸히 스러져가는 언덕 위의 풍차들.

풍차방앗간 안쪽에서 본 하늘.

다큐팀이 바다와 해변의 풍경에 풍덩 빠져있는 사이에
,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언덕을 오른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풍차의 잔해가 더 궁금하다. 어차피 나는 혼자 쏘아 다니는 체질이니. 언덕에 올라서니 사방의 풍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언덕 너머 반대쪽에도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펼쳐져 있다. 궁금했던 건물들로 다가가 들여다보니 풍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세월에 쫓겨 날개도 잃고 방앗간도 반쯤 무너져 버린 풍차들. 이제는 초라한 몸짓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풍차에게 보고 들었을 세월을 묻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언덕의 중간쯤에 낙타 두 마리가 앉아있고 그 옆에서 노인과 장년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에 하얀 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부른다. 그런데 부르는 소리가 헬로~’가 아니라 까메라~’. 아마도 거기 카메라 들고 설치는 놈, 이리 좀 와 봐라정도의 의사 표현인 것 같다. 동방예의지국의 자손으로서 노인이 부르는데 안 가보면 도리가 아니지. 뛰다시피 내려가니 손짓 발짓으로 낙타를 찍으란다. 에이, 나중에 모델료 달라고 하려고?

낙타와 노인. 이 노인의 얼굴에서 고향 어른들을 보았다.

다큐팀의 여주인공을 태운 낙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이 큰 소리로 외친다. “노 페이~!!” 돈을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찍기나 하란다. 그렇다면 사양할 내가 아니다. 카메라 셔터에서 불이 난다. 노인의 눈길이 내 카메라에 고정돼 있다. ! 혹시 내 카메라에 눈독을? 턱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역시, 세파에 닳고 닳아 의심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나그네의 억측일 뿐.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노인의 밭고랑 같은 주름과 거친 피부흰 수염, 그리고 잇몸까지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오래 전 내 고향 땅의 어른들을 본다. 평생 땅을 뒤지며 농투성이로 늙어간 그들. 닮았다. 정말 닮았다. 사는 곳도 먹는 것도 말도 다른 그들이 내 땅의 그 장삼이사들과 닮아있다. 그래, 어느 나라든 민초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지. 이 노인도 낙타를 앞세워 관광객들의 푼돈이나 거두는 일이 천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노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 그런데 터키 말이라면 밥 줘소리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었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들은 “Where are you from”이 아닌 터키 말이 분명한데. “코리아라고 대답했더니 ! 꼬레, 꼬레하면서 반색한다. 그러더니 아예 노래 부르듯 꼬레를 반복한다. 이 아저씨, 한국을 정말 알긴 알고 이러는 거야?

벌거벗다시피 한 남녀가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여행 내내 물리도록 본 모습이다.

노인의 신명은 그게 끝이 아니다. 조금 뒤에는 아직도 바다풍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큐팀까지 불러올린다. “까메라, 까메라아예 자진모리 가락으로 넘어간다. 촬영팀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낙타 옆에서 진을 치고, 다큐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여배우는 난생 처음 타보는 낙타 위에서 꺄아~ 꺄아~ 신이 났다. 이 정도 서비스를 하고도 정말 노 페이일까? 역시, 끝내 돈을 안 받는다. 말없이 낙타를 끄는 장년의 사내가 눈을 곱지 않게 뜨는데도. 대체 카메라의 위력이었을까? ‘꼬레의 위력이었을까? 사람들이 모여드니 또 그 자리를 뜨고 싶다. 그들이 난장 펼친 곳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내려오는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중년 남녀와 마주친다. 늦휴가를 온 유럽인들인 모양인데, 늦여름의 잔양이 그들의 몸을 붉게 붉게 태워놓았다. 그들과 스쳐 지난 나는 이국땅의 한낮을 허청허청 걷는다.

 

추천과 댓글을 잊지않은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이번 주부터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카메라 배낭에 밴 땀이 하얀 소금 꽃으로 피어날 정도로 많이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떠난 일행이 있었지만, 각자의 일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혼자 걷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을 제 여행길에 모십니다. 읽고 나서 댓글도 남겨주시고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의 모습. 여긴 조금 변두리?

비행기 안에서 잠이 깨다

뭔가 불편한 느낌에 자꾸 몸을 뒤척인다. 요의로 하복부가 묵지근한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잡은 잠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본능으로 조금씩 돌아오려는 의식을 향해 자꾸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손짓 정도로 막을 상황은 아니다. 꿈이 가득 찼던 자리를 의식이 대체하기 시작한다. 혼미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 여기가 어디지? ! 그래. 비행기 안이었구나. 그래. 난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어. 내 생애에 가장 긴 휴가를 가고 있는 중이야. 콧물이 흐른다. 머리도 띵하고 몸도 무겁다. 감기몸살 기운은 엊그제부터 찾아왔다. 며칠 무리한 탓이리라. 열흘 넘게 자리 비우는 턱을 한다고 불난 집 며느리처럼 대중없이 종종걸음을 치다보니 자연스레 얻은 전리품이다.

저 아래 경기장이 보인다. 터키 사람들도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애당초 무리한 여행이었지만

열흘 이상 자리를 비운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처음 터키 여행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팀을 이끄는 후배가, 내 개인작업(여행, 사진촬영, 쓰기)과 성격이 맞으니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물론 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저은 건 아니었다. 아니, 내 평생 가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그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로 달리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몇 달 쯤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중국의 윈난성(雲南省) 리장(麗江)에 가서 하릴 없이 배회하고 싶고, 터키에 가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지났던 실크로드를 걷거나 세계사의 용광로에 몸을 담그고 싶고. 늘 꿈꾸는 것들이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는 얼마나 터키에 대한 열병을 앓게 했던지. 고통과 위험에 가득한 그 길이. 비록 제안 받은 곳이 실크로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땅에 가고 싶었다.

그런 열망에도 터키행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1주일에 한번 씩 하는 방송이었다. 케이블TV 시사뉴스의 앵커, 대체요원조차 없는 그 자리는 내가 마음에 내킨다고 함부로 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방송을 맡은 뒤로는 감기 한번 마음 놓고 앓아보지 못했다. 목이 상할까봐 노래방 가는 것조차도 참았다. 게다가 기자 또는 신문사 뉴미디어 분야의 책임자로 평생 일하면서 3~4일 이상의 연속휴가를 가본 적이 없던 내게, 11일이란 숫자는 느닷없이 등에 날개가 솟는 것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방송부서 데스크를 맡은 후배 부장에게 슬그머니 의중을 털어놓았다. 찔러나 보자는 심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OK가 떨어졌다. 이 참에 늙은 기자가 아닌 젊은 대타 한번 써보자는 심리였을까? 이거, 이러다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앵커 자리 날아가는 거 아냐?

역시 이스탄불의 모습. 가운데 흐르는 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후반 '이스탄불편'에 나온다.

그건 훗날 닥칠 문제. 그 순간 내 등에는 정말 날개가 돋았고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바빠졌다. 방송 외에 맡은 일도 이것저것 챙겨야 하고, 신문의 인터뷰 기사도 써놔야 하고 블로그 연재물도 미리 채워놔야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취재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맡은 잡지 편집도 잠을 줄이는 걸로 해결했다. 출발 전에 꼭 만나봐야 할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자 진리의 신봉자로서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자료만도 책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렇게 13~4역을 했지만 몸은 핑핑 날아다녔다. 나는 터키 땅으로 간다. 그러다 얻은 몸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11922일 금요일. 정신없이 방송녹화를 마치고 메이크업을 지울 새도 없이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115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야, 내가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함께 떠나는 일행과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눴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해준 K뿐이었다.

이스탄불 주택가. 높은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잦은 지진의 영향일까?

비행기는 실크로드 위를 날고

잠은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밥 먹으라고 깨울 텐데 뭐. 장거리 비행은 식사시간이 문제다. 먹고 싶든 아니든 잠에서 깨는 수밖에 없다. 남들 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퍼져 잘 만한 배짱이 없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앞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2시간 남짓 남은 것으로 표시돼 있다. 이스탄불공항에서 갈아타고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을 합하면 열 두 시간이 넘는 긴 비행이다. 배낭에서 몸살 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는다. 이 약으로 깨끗이 나아야 하는데. 감기몸살 정도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비행 항로를 보니 실크로드와 거의 비슷하게 날고 있다. 실제로는 많이 다른 길이겠지만 축약된 길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니터 화면의 지도는 끊임없이 광활하고 황량한 산악지대 위를 달리고 있다. 아니, 지도가 아니라 비행기가. 언젠가 저 길을 가리라. 시속 746km, 바깥기온 섭씨 56.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이 저 쪽에 있다.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장사를 위해, 또 누구는 말을 타고 정복을 위해 지났을 저 길. 나는 비행기를 타고 쉽게도 지나고 있다. 내 나라 땅은 신발이 몇 켤레 닳을 정도로 돌아다닌 나지만 이렇게 해외로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빗소리처럼 귀를 파고든다. 어느 산사에서 빗소리를 듣는 듯 나 혼자 고즈넉하다. 가만히 개인 등을 켜고 책을 꺼내 읽는다.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한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이다. 처음 읽을 때처럼 프랑스의 퇴역기자와 고통과 기쁨을 공유한다.

여명 속의 아타튀르그국제공항. 환승을 위해 기다리는 중에 찍었다.

조금 있으니 아침 식사가 나온다. 잠을 깨우는 건 불편하지만 밥 먹는 걸 불편해 할 내가 아니다. 어디 가든지 안 줘서 못 먹는타고난 식성 덕분에 주는 몫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뭘 찾아먹을 땐 평소와 달리 영어까지 유창하게 나온다. 이름도 모르는 식사를 하고 없어 못 마시던 와인까지 두 번이나 주문한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곧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니 준비하라는 멘트가 나온다. 창문 블라인드를 올리니 이스탄불 시내의 불빛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터키 하늘에 진입한 것이다. 저 아래에 수천 년의 영욕이 잠들어있겠지. 내내 잠을 자던 터키 사내(로 보이는)가 비행기에서 지급한 양말에 슬리퍼까지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텅!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다. , 나도 몰라. 이젠 돌아가라고 해도 못가. 방송 펑크 나든 말든 내 책임 아냐!!

이 비행기가 보드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줬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환승하다

이스탄불공항의 공식명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이다.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말 그대로 터키의 국부(國父)인데 앞으로 제법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한다. 시간을 보니 0552. ? 이것밖에 안됐어? 당연하지, 시차를 계산해야지. 한국과 터키는 여섯 시간의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몸을 적응시키는데 애 좀 먹어야한다. 하지만 아직 어리바리해서 시차고 뭐고 느낄 틈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하는데 척 봐도 한국인인 수녀님들이 뒤에 서 있다. 대체로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얼굴에 설렘이 이스탄불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한국 떠난 지 몇 시간 안됐지만 이국땅에서 듣는 우리말이 반가운 모양이다.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한다.
수녀님들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성지순례 왔어요. 맨 먼저 소피아성당을 갈 거예요.”
소피아성당, 그 역사의 도가니. 마치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이름이다.

입국수속은 빠르고 간단하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터키에서 형제의 나라’ KOREA가 찍힌 여권은 대부분 무사통과란다. 무비자 체류기간은 90일인데 연장도 그리 어렵지 않단다. 수녀님들과 눈짓으로 작별을 하고 다시 간단한 검색과정을 거친 뒤 국내선으로 이동해 휴게실에 자리 잡는다. 몇 시간 뒤에 보드롬(Bodrum)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이번 여행은 에게해(Aegean Sea)의 맨 끝에서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따라 쭉 내려가는 코스다. 맨 먼저 가보고 싶던 곳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위안한다. 일행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다 그저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비행장에 깔렸던 어둠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불빛이 옅어져 간다. 나는 지금 이국땅에서 새 아침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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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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