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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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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시데 아폴론신전의 황혼.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에서 바라본 파란 하늘.


'낙타소녀'와의 즐거운 시간

고대도시 페르게를 벗어난 버스는 아스펜도스를 향해 달린다. 안탈리아에서 동쪽으로 47km 떨어진 곳, 사라진 도시 아스펜도스는 한 때 항구도시 시데와 상권을 놓고 우열을 겨뤘을 정도로 번영을 이뤘다. 물론 지금은 페르게와 마찬가지로 폐허에 가까운 조그만 마을일뿐이다. 원형극장 등의 유적이 남아 과거의 영화를 노래하지만, 그래서 더욱 쓸쓸한지도 모른다. 지중해의 상업중심지였던 아스펜도스는 이미 BC 5세기부터 은화를 만들어 쓸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트로이 전쟁 뒤 몸소스라는 인물이 도시를 세웠다는 신화가 있다. BC 6세기 초에는 리디아왕국에 점령됐고 BC 546년부터 페르시아에 편입됐다.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를 정복한 BC 334년 이후에는 급격하게 그리스와 됐고 그 뒤 시리아와 이집트, 로마의 속주 사이를 오가지만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했다. BC 67년 이후 로마가 실질적인 주인이 되면서 상업중심지로 활짝 꽃을 피웠지만 AD 3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쇠퇴와 함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 파괴되는 운명에 처한다. 헌데, 몰락을 해도 어쩌면 그리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질 수 있을까. 1392년 오스만 터키가 팜필리아를 접수했을 때는 조그만 마을만 하나 남아있더란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아스펜도스에 남아있는 원형극장. 도시는 폐허가 됐지만 극장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어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낙타 일가족. 어미아비는 일하는데 새끼는 마냥 놀고 있더라.

나를 즐겁게 해줬던 바로 그 소녀.

원형극장 앞 주차장에 내려서 사방을 둘러보니, 왕년에 도시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들은 시침 뚝 떼고 들판이 되어 누워있다. 맨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극장 건물이 아니라 낙타 2마리(뒹굴 거리며 놀고 있는 새끼까지 합치면 3마리)와 조그마한 소녀다. 아이는 언뜻 보기엔 제법 성숙해 보이지만 초등학교 5~6학년 정도 됐을 것 같다.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일하는 아이들이 많은 거야. 소녀는 낙타를 태우고 사진을 찍어주는 걸 업으로 하는 아버지를 돕는 모양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돕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장사(?)를 혼자 다한다. 관광객이 지나가면 밝은 미소와 톡톡 튀는 목소리로 불러서 낙타를 타라고 권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하회탈 같은 미소를 띤 채 구경만 하고 있다. 저런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 광경을 놓칠 수 없어서 사진을 몇 장 찍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나를 부른다. 사진을 찍어줄 테니 카메라 내놓고 낙타 앞에 서란다. 낙타를 탈 생각이 전혀 없다고 손을 홰홰 내저었더니 걱정하지 말란다.(뭘 걱정하지 말란 거지?)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기념사진 한 장 없어서야 쓰겠냐고 어깨라도 두드려줄 태세다.(말을 알아들은 게 아니라 손짓 발짓이 그랬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사진 찍히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런 풍경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쯤 있는 거야 어떠랴 싶어 낙타 앞에 선다. 낙타는 아예 등에 태울 놈이 못 된다는 걸 알고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한다.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으로 들어가는 길.

돌아온 글래디에이터.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의 위용 


외모는 그럴듯 한데 목소리는 영 아니었다.

! 난 딱 거기까지만 행복했다. 카메라를 다시 받아드는데 아이의 얼굴에 숱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내가 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고생을 했는데 그냥 갈 거예요?” “모델을 서준(서준 것도 아니다. 그냥 앉아 있었다) 우리 낙타들의 사료 값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세요?” 천일야화인들 이렇게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을까. 물론 아이의 손은 내 쪽을 향해 내밀어 있다. 설령 심장에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그냥 돌아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호주머니에서 1리라짜리 동전이 저절로 기어 나온다. 하지만 나도 맨입으로 갈 수는 없지. “이번엔 네가 낙타 앞에 서봐. 모델료 받았다고 생각하고좀 치사하지만 이만한 모델을 또 어디서 구할까. 사진을 몇 컷 찍고 돌아서 나오는데 먼 발치서 바라보던 K가 한마디 한다. “당했지요? 얼마 줬어요?” 아니, 당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그러기에는 아이에게 완전히 반했다.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나는 비밀을 나눠가진 사람들처럼 환한 웃음을 베어 문 채 헤어진다. 그나저나 낙타를 타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내는 걸까? 낙타소녀와 헤어져 극장 쪽으로 들어가는데 또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풍경을 만난다. 누군가가 느닷없이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라도 한 걸까? 로마의 글래디에이터 하나가 극장 입구 쪽에 서서 손짓을 하고 있다. 고전적 복장에 둔중해 보이는 칼, 그리고 고() 율 브리너를 연상하게 하는 까까머리와 세 갈래로 멋을 낸 수염. 한 눈에 봐도 싸움 좀 할 것 같은 글래디에이터다.

원형극장 무대쪽의 벽.

원형극장 맨 꼭대기의 회랑.

하지만 이 친구(친구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해졌다)가 하는 일만큼은 그리 장엄하지 않다. 관광객에게 칼을 빌려주고 사진의 모델이 돼주는 게 그의 직업.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하도 여러 사람을 겪다보니 척 보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수준이 된 모양이다. 하나 둘 셋, 숫자도 셀 줄 안다고 자랑한다. 한국말은 딱 거기까지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각국의 말을 조금씩 공부한단다. 그래 참 장하다. 그런데 이 친구 특이한 게 하나 있다. 덩치와 외모는 근사한데 목소리는 완전 아이 목소리다.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다는 진리를 확인한다. 이제는 원형극장에 들어가 볼 차례. 대부분의 고대 원형극장이 훼손된 상태인데 이곳 원형극장만큼은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니 기대도 크다. 이 극장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명상록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년 재위)를 위해 만든 것으로 최대 2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객석과 무대, 배우 대기실 등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객석의 상단부는 그리스 전통 건축기법에 따라 언덕을 이용해 지어졌다. 객석은 상단 21, 하단 20열로 이뤄졌으며 맨 위층에는 회랑이 있다. 귀빈석은 아래쪽 객석 양 끝에 따로 마련돼 있는데, 그 이유는 무대 건물에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자리기 때문이란다. , ‘그들만의통로가 있었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뭘 좀 가졌다는 인간들은 장삼이사와 문을 같이 쓰는 것조차 싫었나 보다. 썩을 것들.

원형극장 전경.

지금도 재즈페스티벌 열려


이 극장 대단하긴 하다. 밖에서 봐도 엄청난 위용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우선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무대의 벽은 이오니아 양식과 코린트 양식이 혼합된 기둥으로 장식돼 있다. 객석 쪽에는 58개의 구멍이 있는데 이곳에 기둥을 박고 천막을 쳐서 그늘을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개폐식 지붕을 만들어 햇볕이나 비를 피했던 모양이다. 2000년 가까이 된 그 옛날에 장한 일이다. 객석에서 마주보이는 무대는 높이 25m, 길이 110m의 벽으로 이뤄져 있다. 이 벽 자체도 거대한 건축물이다. 무대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중앙 문으로는 연극 감독관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 아래로 다시 작은 문들이 줄지어 있는데, 검투사와 맹수들이 싸우는 날에는 이 문들을 통해 맹수가 드나들었다. 따지고 보면 죽음의 세계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문들이었을 것이다. 그 피의 향연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과, 운명적으로 피를 흘려야 하는 생명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무대에는 음향효과를 위해 나무 지붕이 드리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극장 역시 긴 세월을 버텨오면서 우여곡절과 시련이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교회로 개조된 적이 있었고 셀주크투르크 때에는 안탈리아에서 출발해서 실크로드를 오가던 카라반(대상 隊商)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당시 대상 숙소는 30km마다 하나씩 있었다. 13세기에는 술탄(알라딘 케이쿠바드 1)의 별장으로 쓰였다.

회랑의 창으로 본 원형극장

원형극장의 무대쪽.

터키공화국 건립 후인 1930년 아타튀르크가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복원 지시를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금도 여름 시즌엔 오페라 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데, 극장구조가 얼마나 잘 돼 있는지 마이크를 설치하지 않아도 객석 어디서든지 잘 들린다고 한다. 객석을 올라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기다시피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맨 위에서는 무대 쪽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형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그때 누군가가 가운데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 이럴 수가. 저 아득한 곳에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똑똑하게 귀에 들어온다. 이 정도면 설계의 승리다. 땀을 식힌 뒤 계단을 내려오다가 페르게에서 만났던 한국인을 또 만났다. 이번엔 부인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꽁꽁 싸맨 채 어느 그늘엔가 숨어 있겠지. 하긴, 허기와 내려 쪼이는 햇볕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무슨 말라비틀어진 구경. 그러든 말든 남편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탐색한다. 나는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한 극장 밖의 언덕까지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이제는 아스펜도스를 떠날 시간. 이 부부와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좀 섭섭하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가야한다. 부디 행복한 여행이 되길. 부인도 터키음식에 정 들일 수 있기를. 정말 먹을 만 한데. 점심은 시데로 가는 중간에 휴게소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참 독특하게 생긴 휴게소다. 외관은 몽골식 파오(게르)처럼 생겼는데 규모가 엄청나다. 안으로 들어가니 식당과 기념품, 식료품 가게가 한곳에 모여 있다.

아스펜도스에서 시데로 가는 길에 점심을 먹었던 휴게소. 독특한 모습이다.

시데를 향해 떠나다


점심을 먹고 다시 시데로 가는 길,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달린다. 이 지역은 로마시대에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고 한다. 옥수수의 주산지였는데, 이곳의 경제력이 로마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시데는 안탈리아에서 7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팜필리아의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다. 안탈리아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팜필리아 최고의 항구도시였다고 한다. 페르게, 아스펜도스 등 팜필리아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역사의 풍랑 속에서 부침을 거듭한 도시다. 기원전에는 그리스의 일부였다가 이집트의 영토로 편입된 적도 있고 BC 67년에는 로마의 속령이 된다. 그 후 노예 매매와 올리브기름의 교역 중심지로 번성을 거듭해 한 때는 인구가 6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 역시 7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략을 받으면서 급격하게 몰락한다. 10세기 들어 주민들이 안탈리아로 떠난 뒤 도시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곳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1895년부터였다고 한다. 크레타 섬에서 오스만터키에 항거하는 봉기가 일어나 그리스에 합병되면서 그곳에 살던 무슬림들이 시데로 이주한 것이다. 현재는 가장 각광받는 휴양지 중 하나이자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시데에 도착한 건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갈 무렵. 거리는 인파로 북적거린다. 시데는 남북 1km, 400m 정도에 세워진 작은 도시다.

양탄자를 짜는 여인.

시데의 거리.

식당과 기념품가게, 카페 등이 어우러진 쇼핑가를 걸어가다가 가게 앞에 앉아 카펫을 짜는 여인을 만난다. 카펫을 수리하는 건 봤어도 짜는 걸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얼핏 봐도 무척 꼼꼼하고 지루한 작업이다. 1m²를 짜는데 1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것도 쉬지 않고 하루에 아홉 시간씩 작업을 해서. 지금 걸어놓은 것도 10개월째 짜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 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짜다가 집어던지고 말 것 같다. 시데에는 남아 있는 유적이 꽤 많다. 대부분 번성기였던 로마시대에 세워진 것들이다. 곳곳에 남아있는 성벽은 물론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원형극장, 복원을 거쳐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공중목욕탕, 노예가 거래됐다는 아고라,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분수대와 성문 등이 남아있다. 하지만 시데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곳은 아폴론신전이다. 우리 일행도 다른 유적들은 주마간산으로 스쳐 지나고 최종 목적지를 아폴론신전으로 잡았다. 신전을 향해 가는 도중 곳곳에 굴러다니는 석조 유물의 잔해들을 만난다. 길거리 꽃밭에도 식당의 간판 앞에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저 예술의 정수들. 아깝다. 우리 같으면 박물관에 모셔질 것들일 텐데. 답답하게 늘어선 상점들을 지나면 어느 순간 앞이 탁 트이며 바다가 나타난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자 드디어 아폴론신전이 우뚝 서서 일행을 반긴다. 아아! 저것이. 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길거리 어디든 굴러다니는 고대 유적의 잔해들.

드디어 저만치 아폴론신전이 보인다. 그리고 무너진 신전의 잔해들.

신전 옆 폐허가 된 사원

아폴론신전을 만나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던 그 유명한 신전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짙푸른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얗게 빛나는 기둥들. 신전은 보통 도시를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짓기 마련인데 이곳은 바다를 보고 서 있다. 시데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안전한 항해를 염원하는 뜻으로 세운 것이겠지.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신전 뒤쪽의 모래벌판에 항구가 있었다고 한다. 바람 부는 날에는 파도가 혀를 내밀어 신전 기둥을 핥기라도 할 것처럼 바다가 가까이 있다. 폐허 위에 다섯 개의 코린트식 기둥들이 조금 남은 구조물을 받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을 자아낼 만하다. 근처에는 무너져서 폐허처럼 변한 사원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신전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이는 대리석 기둥과 돌덩이들이 그대로 누워 있다. 서 있는 것과 누워 있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서 있는 다섯 개의 기둥은 자태를 뽐내며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바닥에 누워 있는 것들은 그저 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할 일을 다 마치고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처럼 지중해의 가을 햇살에 몸이나 말리고 있을 뿐. 서 있는 다섯 개의 기둥도 폐허 속에서 골라내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기단을 시멘트로 만들었는데 침식에 의해 철근이 툭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보기 흉하다. 현대인의 기술이 옛사람들의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아폴론신전과 무너져 누운 기둥들.

아폴론신전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이곳은 석양 무렵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석양 무렵에 이 신전을 찾아와서 황홀경에 푹 빠졌다나 어쨌다나. 그렇다면 나도 그냥 말 수 있나. 예까지 왔는데 석양에 물든 신전 한번 보고가야지. 시간을 보니 해가 지려면 아직 한 두 시간 남았다. 이곳저곳 사진을 찍다가 잠시 쉴 겸 카페를 찾아든다. 지중해의 다른 도시라고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곳 시데야말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카페가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찾아든 카페의 간판은 ‘APOLLO CAFE BAR’ 아주 당당한 이름이다. 카페에 앉아 음료수를 시켜놓고 시간을 조금씩 접는다. 잠시도 쉴 틈 없이 돌아다니다가 하는 일 없이 앉아있자니 그도 나름 고역이다. 여행을 하는 중에 가만히 있는 시간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내 스스로 그렇게 떠들건만. 짙푸른 바다에는 유람선이 포말을 토하고 해변에는 낚시꾼의 고독이 정물화로 굳었다. 바닷가에 굴러다니는 돌도 최소한 문양 한 둘쯤은 새겨져 있다. 언젠가는 세월의 흔적조차 지워진 평범한 돌로 돌아가겠지.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며 가만 생각해보니 내 여행이야말로 저물어가고 있다. 두꺼운 수첩 한 권이 마지막 페이지를 드러냈고 카메라 메모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볼펜도 두어 개가 수명을 다했다. 신발도 제법 닳았겠지. 대신 내게는 누구에겐가 전해줄 이야기가 오롯이 남았다.

해가 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폴론신전.

마지막 정염을 불태우던 태양이 빠른 속도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서둘러 다시 신전으로 간다.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드는 것에 맞춰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기 시작한다. 저들도 이 시간을 즐기기 위해 어디선가 기다렸겠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신전 앞에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는다. 카메라 셔터소리가 요란하다. 바다는 해를 날름 삼키고 대신 붉은 노을을 토해놓는다. 여기저기서 신음과 구별하기 어려운 감탄사가 터진다. 그래, 아무리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이런 때까지 신음소리를 아끼는 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지. 내 앞에 선 부부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저들은 지금 무엇을 기원하고 있을까. 젊은 여인들은 감동에 겨워 포옹을 하고 아이들은 실루엣을 남기며 기둥 사이를 뛰어다닌다. 밀려온 어둠이 붉은 하늘을 조금씩 지우기 시작하자 신전에 조명이 들어온다. , 이건 또 다른 모습이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기둥의 조각들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코린트양식 특유의 문양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또 떠나야한다. 나그네의 운명이 그런 것을. 저만치 바다에서 떠오르던 초승달이 슬그머니 웃으며 이방인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멀리서 본 페르게 고대도시의 아고라.

고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의 안내판들.

지금은 폐허가 되어

930일 금요일 0830, 호텔 체크아웃. 오늘은 안탈리아를 떠나 지중해의 마지막 목적지인 알라니아로 가는 날이다. 도중에 페르게 고대도시,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아폴론신전 등을 들러야하기 때문에 역시 강행군이 예고돼 있다. 하지만 육체적 피로 따위에는 더 이상 쫄지 않기로 했다. 몸은 늘 엄살을 부리기 마련이다. 자꾸 걷고 움직이다보면 알아서 따라오게 돼 있다. 배의 기름기가 허벅지의 근육으로 둔갑하는 그날까지 가열 차게 걷고 또 걸을 일이다. 오늘 첫 번 째 목적지인 페르게는 팜필리아의 고대도시다.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현장에 가 보면 거대했던 도시의 규모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의 어원이 된 스타디온(stadion), 그리고 주거 도시로 나뉘어 있다. 우선 주거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로마의 문을 만난다. 바로 서울의 남대문에 해당하는 문이다. 지금은 거대한 돌덩이들의 집합체에 불과하지만 도시가 번성했던 시절의 위용을 전해주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 문을 지나자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옛 성문(hellenistic door)과 두 개의 탑이다. 탑들은 반쯤 무너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수리를 하는 중인지 구조물로 가려져 있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도시가 형성된 이후 계속해서 덧 지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비잔틴의 건축 양식들이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무너진 성곽.

옛 성문.

여기서 고대도시 페르게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를 하고 지나가자. 안탈리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 페르게는 안탈리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팜필리아의 수도였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12만 명이었다니 어느 정도 큰 도시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멀지않은 곳에 악수강이 흐른다. 이곳에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바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다. 그리스 신화에는 BC 1200년 경, 의사 모프소스와 예언자 칼카스가 여러 종족으로 이뤄진 무리를 에올리아 지방에서 이끌고 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BC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 페르게를 장악하고 인근 도시인 아스펜도스와 시데를 공략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의 지배를 거쳐 로마의 영토로 편입 됐으며 BC 129년에는 속주가 된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도 독자적으로 은화를 주조했다는 것으로 봐서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번영을 누린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페르게는 쇠퇴를 거듭한다.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중기까지는 그럭저럭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었지만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으로 수차례 초토화가 되는 참화를 겪는다. 결국 주민들은 페르게를 버리고 이웃도시인 안탈리아로 떠나기 시작했다. 1078년에 이 지역은 셀주크터키 제국에 편입되고 1392년에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두개의 탑. 하나는 수리중?

곳곳에 이런 조각들이 굴러다닌다.

바울과 마가의 애증

이 페르게에서 우리는 반가운 이의 자취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교 최고의 전도자 사도 바울(바오로, Paulus). 서기 47, 바울은 첫 번째 전도여행 중에 이곳을 방문했다. 성서에는 페르게를 버가라고 표기한다. 정작 유명한 건 바울의 전도활동이 아니라, 바울과 훗날 마가복음을 쓴 마가(요한)의 복잡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는 동역자였던 바나바, 그리고 마가가 순종자로 동행하게 된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이 마가는 철딱서니가 없는데다 무척 나약했던 것 같다. 문제는 타우르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산맥을 넘어야 목적지인 팜필리아(밤빌리아)로 갈 수 있는데 귀하신 도련님 마가가 해발 2,000m의 험준한 산맥을 보고 아 뜨거라, 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말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버렸다. (사도행전 13:13) 바울의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마찰은 2차 전도여행 때에 또 한 번 일어났다. ‘배신자에 대해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바울은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기면서까지 마가대신 실라를 데리고 떠났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훗날 마가는 다시 바울을 따랐으며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정성껏 돌봤다고 한다. 그 과정에 이러저러한 사연이야 없을까만은 우리는 종교가 내포한 본질을 보면 된다. 용서, 그리고 사랑.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아고라 외곽의 기둥들.

멀리서 본 목욕시설.

로마의 문을 지나면서 관람객에게는 두 장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중앙의 큰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아고라(Agora), 왼쪽에는 목욕시설이 펼쳐져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가 눈치를 보니 관광객의 대부분이 목욕시설 쪽에 몰려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고라 먼저.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polis)에 형성된 광장을 말한다. 아고라라는 말은 시장에 나오다’, ‘사다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나왔다고 한다. , 아고라의 원래 의미는 시장인 셈이다. 하지만 시장의 기능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일상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게 됐다. 지금 나는 1500년도 넘는 아득한 옛날에 세워진 아고라 앞에 서 있다. 일렬로 선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장관이다. 4세기에 형성된 이곳 아고라는 한 변의 길이가 75m의 정사각형 구조다. 단순히 물물교환이 이뤄지던 시장이 아니라 경제 활동과 여론 형성의 중심지였음을 웅변해주는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외곽에는 월세로 점포를 얻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포진하고 중심부에는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물건을 파는 프리마켓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리고 맨 가운데에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움과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둥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가 어느 순간 환상의 문으로 들어가, 로마의 한 시민이 된다.

잔해조차도 아름답다.

아고라 한 가운데 있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

로마가 망한 이유는?

조금만 더 깎아 달라니까요” “이게 웬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여흥정하는 촌부와 장사꾼.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달뜬 표정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아이. 한 중년남자는 머리에 구멍 뚫린다는 쇠고기 수입이 웬 말이냐고 침을 튀기고, 또 다른 쪽에서는 머리 허연 노인 몇이 옹기종기 앉아 호민관 거시기란 놈이 뻘건 물이 들었느니 퍼런 물이 들었느니 열을 올린다. 지중해서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면서 문득 환상에서 깨어난다. 아아, 모든 것이 부질없다. 말없는 돌덩어리들만 폐허 속에 묻힌 아득한 시절을 노래한다. 발길을 돌려서 목욕시설 쪽으로 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얀 대리석들. 번성하던 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는 것. 로마가 왜 망했을까? 라는 질문에는 수십, 수백까지의 가설과 이유가 나온다. 훈족의 이동, 윤리적 퇴폐, 지도층의 질적 저하, 수도관 납중독, 페스트의 창궐. 혹시 목욕탕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치와 퇴폐의 극치를 달린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는 망했다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목욕시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목욕을 하기 위한 시설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찜질방 그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탈의실은 물론 냉탕, 온탕, 미지근한 탕, 증기탕, 마사지실까지 갖췄다. 구들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수영장보다 훨씬 큰 공중목욕탕의 욕조가 그 흔적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오수 배출시설도 보인다.

공중목욕탕.

목욕시설의 수로.

중앙도로의 가운데를 달리는 수로는 물이 철철 넘쳐흘렀으며 집집마다 물을 받아썼다고 한다. 그 아득한 옛날에 말이다. 화려함과 사치는 차치하고 우선 그런 시설을 만들고 유지한 기술력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벽마다 구멍이 뽕뽕 뚫려있다. 총탄이나 포탄자국은 아닌데 저게 뭘까, 믿음 씨에게 물어봤더니 대리석에 구멍을 뚫고 철판이나 납판을 붙였던 자리라고 한다. 그것 역시 화려한 도시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훗날 폐허가 되면서 너도 나도 훔쳐다 엿을 바꿔 먹었기 때문에 지금은 흉한 구멍만 남아 있단다. 궁금한 건 또 있다. 어떻게 주춧돌에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세울 수 있었을까. 기둥이 들어갈만한 구멍을 판 것도 아닌데. 그 궁금증도 믿음 씨가 풀어준다. 주춧돌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서부터 밖으로 조그만 길을 낸다고 한다. 기둥을 세운 뒤 그 홈으로 쇳물을 부어넣으면 쇠가 식어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직접 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데 말로 설명하려니 쉽지 않다. 큰 기둥을 붙일 때는 구멍을 여러 개 뚫었다고 한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구경 삼매경에 빠졌는데, 뭔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동양인 부부다. 이렇게 피가 끌리는 사람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국인이다.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해보니 45일 동안 터키를 일주하는 중이란다. 우와! 45. 부러워라. 앙카라에서 출발해서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내려와서 에페소 등 에게해 인근을 가쳐서 이스탄불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여기도 목욕시설.

이렇게 홈을 파고 길을 낸 뒤 쇳물을 부어서 주춧돌과 기둥을 접합시켰다.

한국인 부부를 만나다

대화는 주로 바깥 분과 나눌 수밖에 없다. 부인은 자외선차단제를 두껍게 바르고도 모자라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싸맨 채 그늘에 숨어있다. 구경이고 뭐고 화살처럼 햇살을 쏟아내는 태양에 수박만한 감자라도 먹이고 싶다는 표정이다. 이미 얼굴이 까맣게 타버려 흑백 구분이 안 되는 남편은, 아내가 그러건 말건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몸 동작이 다람쥐처럼 날래다. 터키는 20년 전에 배낭여행을 와보고 두 번째란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다. 20년 전에 유럽도 아니고 터키를 돌아다녔을 정도라면 그야말로 배낭여행의 선구자 아닌가. 그럼 그렇지. 얘기를 나누다보니 세계 구석구석 안 다녀본 곳이 없단다. 내가 늘 꿈꾸는 여행전문가를 만난 것이다. 부인은 이번에 처음 따라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끝마다 입이 두어 발씩 길어진다. ‘이럴 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도 집을 나서면 고생이거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여행 내내 과일만 먹었다고 하소연이다. 그나마 과일값이 싼 나라니 다행이지. 게다가 지적 호기심이 넘쳐나는 남편을 따라다니려니 지칠 수밖에. 그녀의 얼굴에 김치, 된장찌개, 갈비찜그리운 이름들이 둥둥 떠다닌다. “선생님은 점점 힘이 나는데 사모님은 갈수록 지치지요?” 물었더니 어쩌면 그렇게 잘 아느냐고 용한 점쟁이라도 만난 듯 반색을 한다. 내가 며칠 뒤 귀국한다니까 따라나서고 싶은 표정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대중교통만 이용하려니 힘들어 죽을 지경이란다.

물을 데우던 구들이 아닐까?

벽에 있는 저 구멍들이 바로 철판이나 구리판을 붙였던 흔적.

터키 여행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주로 오토뷔스(Otobus)와 돌무쉬(Dolmush). 오토뷔스는 우리로 치면 시외버스 혹은 고속버스. 터키의 면적은 우리 남한의 대략 8배 정도가 되는데 철도망은 낙후돼 기차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고속도로나 국도변의 휴게소주유소와 연계돼있는 마피아들의 방해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설마 하면서도 아니라고 할 근거도 없다. 대신 도로망은 잘 연결돼 있어서 어느 곳을 가더라도 큰 불편은 없다. 바로 그 길을 달리는 주인공이 오토뷔스인데 시스템이나 서비스가 무척 발달돼 있다. 운행편수가 많고 시간대도 다양하며 장거리는 밤에도 운행한다. 보통 남자차장 한 두 명이 차와 간식을 제공하며 일행이 아닐 경우 남녀를 따로 앉힌다. 장거리 요금은 정찰제로 돼 있지만 돈이 없다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깎아주기도 한다니 도전해볼 만하다. 오토뷔스를 타려면 오토가르라는 곳에 가야 하는데 바로 우리의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장거리 버스의 승차권을 빌렛(Bilet)이라고 하는데 오토가르의 버스회사나 시내 대리점에 가서 사면된다. 같은 구간을 운행하는 회사가 여러 곳이기 때문에 시간대가 다양하고 선택의 폭도 넓다. 요금은 버스회사마다 조금씩 다른데, 당연한 얘기지만 비쌀수록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 물론 장거리 이동을 할 때는 조금 비싸더라도 좌석이 편한 버스를 택하는 게 좋다.

노섬에서 파는 액세서리들.

각종 장신구를 파는 소녀. 제법 장사를 잘한다.

로마황제와 마주 앉아서

오토뷔스에서 내려서 좀 더 작은 지역으로 갈 때는 돌무쉬를 타면 된다. ‘봉고정도의 미니버스다. 이 돌무쉬의 뜻이 '다 차면 간다'라니 말 그대로 출발하는 시간은 운전사 마음이다. 대신에 내리고 싶을 때는 아무 곳에서나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니까 버스와 택시의 중간쯤 되는 존재? 직접 타본 건 아니지만, 차장이 없기 때문에 버스비를 앞사람에게 주면 앞사람이 자기 또 앞사람에게 전달해서 기사에게까지 간다고 한다. 잔돈이 없을 땐? 그냥 큰 돈 내면 된다. 기사가 거스름돈을 주면 뒤로 또 뒤로 전달해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간에 가로채는 사람은 없는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터키의 시골에서는 교통수단 그 이상으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이 돌무쉬다. 물건이나 편지를 전달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아무튼 터키에서 대중교통으로 여행을 하려면 바로 이 두 가지 교통수단, 오토뷔스와 돌무쉬를 잘 이용해야 한다. 다음에 이 땅에 오면 꼭 경험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45일이나 그런 식으로 여행하는 부부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부인은 자신을 그렇게 끌고 다니는 남편이 미운 모양이다. 남편을 보는 눈에 검은자위보다 흰자위가 더 많다. 그러건 말건 남편의 얼굴은 여행의 희열이 넘쳐흐른다. 역시 여행 체질은 따로 있는 법. 여행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고 했더니 먹을 것까지 아끼면서 알뜰하게 다닌다고 대답한다. 그래, 돈 보다 의지가 중요하지. 가장 부러운 건 건강과 시간이다.

아크로폴리스. 역시 폐허다.

스타디온이라 불렀던 원형경기장. 마차경기와 검투가 벌어졌다.

스타디온에 흩어져 있는 돌들.

길의 끝에서 아크로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에 있는 언덕)를 만난다. 이 곳 역시 폐허가 된지 오래. 잡초만 무성하다. 페르게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폐허 속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함께 왔던 일행은 지금 어디쯤 있는지. 폐허의 영향일까. 조금은 쓸쓸한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온다.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노점상들이 길게 진을 치고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나 머플러 등을 판다. 노점을 펼쳐놓은 소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엊그제 안탈리아의 마리나항구시장에서 만난 소년이 다시 생각난다. 하지만 이 소녀는 그 소년보다 훨씬 씩씩하다. 수완이 좋은지 물건도 제법 잘 판다. 먼 발치에서,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가난이 온몸에 미농지처럼 배어 있는 소녀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혼자 터벅터벅 스타디온으로 간다. 구르는 돌마다 새겨진 조각들이 자꾸 발걸음을 붙잡고 늘어진다. 뭐 하나 예술품 아닌 게 없다. 길이 234m에 폭 34m인 이 경기장은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결투가 주로 이뤄진 곳이라고 한다. 12000명 정도를 수용했다니 대단히 큰 경기장이다. 객석은 지금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갖추고 있어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스타디온으로 꼽힌다. 객석 아래에는 30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다. 아치 안을 들여다보니 하나하나 독립된 공간으로 돼 있다. 도대체 이 아치는 왜 필요했을까. 나중에 물어보니 세 개마다 하나씩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스타디온을 드나드는 출입구로 쓰였고 나머지 스무 개는 물건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스타디온의 아치들. 뒤가 트여 있는 것은 출입구, 막힌 것은 가게들이었다.

가게로 쓰이던 아치의 내부모습.

원형극장. 발굴이 덜 돼서 출입금지란다.

경기도 보고 쇼핑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다목적 경기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그렇게 즐길 때 글래디에이터(gladiator)라 불리던 검투사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수없이 오갔겠지. 설령 이긴다 해도 살육에 불과한, 그런 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했던 검투사들. 튀어 오르는 피를 보며 환호성을 질러댔을 로마시민들. 인간은 애당초 잔인하게 태어난 동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역시 카메라가 부서질까봐 두 손을 번쩍 든 우스운 꼴. 돌무더기 위로 넘어졌으니 등뼈가 부러져도 할 말이 없을 뻔 했다. 평소에 착하게 살았기 망정이지. 원형극장에 가봤지만 발굴이 덜 돼서 입장 불허란다. 울타리 밖에서 까치발 몇 번 하다가 포기하고 돌아온다. 이곳은 어디를 파건 유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이 스타디온도 발굴이 덜 돼서 어디가 정문인지 아직 확인이 안됐단다. 로마인들이 마차경기와 검투사들의 혈투에 열광하던 스탠드에 앉아 지중해의 바람을 만끽한다. 돌은 무너지고 깨어졌지만 바람은 여전히 그때 그 바람이겠지. 검투사의 피에 흥분하는 로마의 귀족이 돼보기도 하고 칼 하나에 목숨을 맡긴 검투사가 돼 보기도 한다. 그 두 계급 사이를 흐르던 강은 그 얼마나 멀었던 걸까. 두두두두~ 말이 달리고 와와와~ 함성이 들린다. 좋은 세상이다. 동양의 끄트머리, 반도에 사는 한 사내가 지금 로마황제와 마주앉아 있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듀덴 폭포.

듀덴 폭포 앞을 지나는 해적선을 닮은 배.

듀덴 폭포의 위용

터키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 대한 믿음 씨의 품평은 계속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한국인 흉도 보겠지? 외국에 나가서는 품행을 더욱 방정하게 해야겠다는 갸륵한 생각이 든다. 사고를 쳤을 때는 일본에서 왔다고 해야지. 국위선양이 따로 있나. 이 한 몸 바쳐서 나라 욕 안 먹이는 게 애국이지. 좀 특이한 건, 광수입 의존도가 높으면서도 터키의 관광호텔에는 카지노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한 때 카지노를 허가한 적이 있었는데 내국인들이 드나들면서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속출하더란다. 노름에 미치면 마누라까지 팔아먹는다더니, 터키라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카지노를 없애고 말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정선카지노 생각이 난다. 언젠가 지나다가 본, 사람이 사는 집보다 전당포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이던 풍경. 그리고 어깨를 늘어트리고 걷던 군상들. 그 뒤 그들은 잭팟이 터져서 태평양에 요트라도 띄웠을까? 카지노를 차려 손 짚고 헤엄치듯 거둔 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얼마나 쓰이고 있을까? 버스는 시내를 다시 거쳐 일행을 듀덴(Duden)폭포에 내려놓는다. 듀덴 폭포는 시내와 붙어있는 지중해 쪽에 있다. 꿩 대신 닭? 쿠르순루 폭포에서 물 먹은 대신 듀덴 폭포라도 보라는 뜻인가? 하지만 폭포 앞에 서는 순간잠시 비비 꼬였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와!!! 하는 탄성이 터진다. 대체 저 폭포가 어떻게 생긴 것이란 말인가?

폭포는 저렇게 건물 아래에서 느닷없이 솟아나온다.

폭포의 하단. 가운데쯤 아주 작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시는지.

폭포 위에는 그저 평범한 건물들에다가 잔디가 깔린 공원뿐인데, 느닷없이 허연 물줄기가 나타나 엄청난 물을 시퍼런 바다에 쏟아 붓는다. 이 물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안탈리아를 감싸고 있는 타우르스산이 출발지라고 한다. 그곳에서 발원한 물이 30km를 땅 밑으로 달려와 도시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단 한번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폭포는 해적선을 닮은 유람선과, 개구쟁이들처럼 바다를 질주하는 작은 쾌속정들과 어울려 한편의 풍경화를 그려놓는다. 헌데 속물근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혼자 드는 생각. 저 엄청난 물이야말로 오염되지 않은 천연수인데. 그냥 바다로 흘려보내지 말고 병에 넣어 팔면 돈 좀 될 텐데. 아무튼 삶을 위해서라면 눈먼 돈 한 푼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별 상상을 다 하고 있다.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햇볕이 쏟아지는데도 심신이 모두 시원하다. 다음 행선지는 안탈리아 고고학박물관. 터키 최고의 고고학 박물관 중 하나라니 기대될 만도 하건만 폭포 곁을 떠나기 싫다. 믿음 씨의 재촉에도 뭉그적거리고 있다가 느릿느릿 삐거덕거리는 몸을 일으킨다. 예까지 와서 박물관을 들르지 않을 수는 없지. 박물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까지 거쳐 오면서 본 어떤 박물관들보다 규모가 크다.

안탈리아 고고학박물관.

안탈리아 박물관 입구의 깨진 석상들 중 하나.

안탈리아 박물관에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품인가.

섬세한 옷주름을 보시라.

안탈리아 인근의 페르게와 아스펜도스에서 출토된 고대 유물들이 전시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한다. 시대별로는 선사시대에서 오스만 제국까지 모두 아우른다. 이곳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머리 없는 석상들. 머리가 있으면 팔이나 다리를 잃었고,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는가 싶어서 가까이 가보면 코가 깨져있다. 전쟁터의 부상병동이 따로 없다. 어매, 어쩔거나. 이 아까운 예술품들을. 하지만 그렇게 몸의 한 조각씩을 잃고서도 석상들은 여전히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좀 억지스런 역설일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상실의 미()’, 그런 조어(造語)도 가능할까? 그런 말이 가능하다면 지금 이 순간 딱 어울릴 만한 말이다. 특히 눈길을 자꾸 끌어당기는 건,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 옷의 주름 하나하나가 바람이 불면 팔랑거리기라도 할 것 같다. 이들이 정말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특히 관람객을 가장 많이 불러 모으는 건 4~8번 전시관의 로마시대 유물들이다. 로마 황제는 물론 여러 신들의 석상, 그리고 웅장하고 세밀한 조각을 온 몸에 두른 대리석관들은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 로마의 영광을 웅변해주고 있다. 박물관 2층에는 뎀레에서 만났던 산타클로스, 즉 성 니콜라스의 초상과 성모마리아의 성화 등도 전시돼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보고 찍어야할 유물이 너무 많다는데 있다. 이 박물관은 사진 촬영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 미처 반도 돌아보기 전에 지치기 시작한다.

고대의 각종 도자기들.

사람의 손으로 빚은 게 맞나?

엄청난 유물들 앞에서 괜스레 심통이 나기도 한다. 원래 그리 많지도 않았던 유물을 일제의 도둑놈들에게 이리 저리 약탈당하고, 잔챙이들까지 소중하게 전시해 놓은 우리나라의 박물관이 생각나서다. 빼어난 작품들이 워낙 많다보니 나중엔 뭘 봐도 그저 돌덩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박물관은 문화의 감옥이라는 내 지론은 바꾸지 말아야할 것 같다. 이들이 수천 년 동안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면 질릴 틈이 어디 있으랴. 결국 후반부는 건성건성 본 뒤 남들보다 먼저 전시실을 빠져 나온다. 나야말로 문화인으로 훈련받지 못한 무식한 여행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저 소중한 인류의 유산들을 이렇게 처삼촌 묘 벌초하듯 대충 대충 훑다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진리지만,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교육된 자만이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진리다. 야외전시장으로 나가는 길에 입구 쪽에 비치해둔 방명록을 들여다보다 외국어들 사이에서 한글 이름 몇 개를 발견한다. 한국인들도 제법 많이 오는 모양이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 때문에 비껴지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곳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동료애(?) 느낀다. 나는 물론 나는 사인을 생략한다. 어디 가서 흔적을 남기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다. 박물관 뜰로 나와 보니 그곳 역시 또 다른 박물관이다. 마치 둘 곳이 없어 마당에 세워둔 것처럼 각종 석상과 석주들이 이곳저곳에 서 있다.

석관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오스만터키 시대의 생활상.

외계인이 만든 유물들

석상에 새겨진 저 조각들을 보라.

거대한 관들은 화려하고도 위압적이다. 죽은 뒤 드러누울 관 하나에까지 저렇게 신경을 썼다는 건 내세를 그만큼 기대했다는 것이겠지.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유물들이 지닌 아름다움은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진부할 정도다. 그럼 무슨 말이 어울릴까. 누군가가 말했듯 사람의 솜씨만은 아닌 것 같다. 전에 그 말을 들을 땐 황당하다고 웃고 말았지만 정말 외계인들이 만들어놓고 떠난 건 아닐까. 사실 유럽 사람들이 침이 마르게 자랑하는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작품이란 게,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의 작품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악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한꺼번에 눈앞에 있을 땐 두 눈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오감으로 느끼려고 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야 가슴 속 깊이 담아갈 수 있다. 카메라를 아예 배낭에 갈무리 하고 햇살이 명주실처럼 가닥가닥 흘러내리는 벤치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잠시 뒤 내 곁으로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작은 내로 졸졸졸 흐르기도 하고 커다란 강이 되어 도도하게 흐르기도 하고 폭포가 되어 우르르 쾅쾅 떨어지기도 한다. 시간의 곳곳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리스 사람, 로마 사람, 터키 사람그들과 대화하고 밥을 먹고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본다.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거리를 걷는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조그만 장애물에 불과할 뿐이다.

마당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돌들 중에도 예술품 아닌 게 없다.

오스만 시대(?)의 가옥.

이슬람시대 이후의 유물은 아예 보는 걸 포기하고 만다. 이 이상의 예술을 담아가기엔 내 안의 그릇이 너무 작다. 언젠가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박물관을 떠날 무렵, 길게 키를 늘인 햇살이 땅 위에 비껴 내리기 시작한다. 다음 목적지는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라알리오을루(Karaalioglu) 공원. ‘가장 아름답다는 수식어만으로도 가슴은 부풀어 오르는데 그 이름이 문제다. 외우려다가는 날을 새야할 것 같아서 믿음 씨에게 수첩을 내밀고 써달라고 부탁한다. 공원의 위치는 어제 탐색했던 칼레이치 구역 남쪽 끝에 바다와 잇닿아 있는 곳. 역시 아름다운 공원이다. 아니, 공원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공원 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파랗게 빛나는 지중해와 그 건너편으로 펼쳐진 산들은 어느 명장의 손을 거친 듯 조화롭다. 마침 석양이 조금씩 짙어지면서 풍경은 조금씩 채색을 바꿔나간다. 공원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산책하기에는 딱 좋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그예 콧노래까지 불러낸다. 공원에는 산책 삼아 나온 동네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찾아온 관광객들도 많이 눈에 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의 발자국마다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가 고여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경계 삼아 쌓아놓은 담장에 기대거나 올라앉아 저물어 가는 하루를 눈에 담고 있다.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라알리오을루 공원

연인들? 그냥 여자들.

한 남자에 마음을 빼앗기다

그 중 한 남자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저런 걸 아우라라고 하나?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서 앉아 있는데 다른 이들하고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 무엇이 있다. 처음에는 역광 속의 뒷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워 도촬을 하려고 접근했다. 헌데 뷰파인더 속에 들어온 그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다. 사진을 찍고서도 눈을 떼기 힘들다. 맨발에 소매 없는 셔츠만 걸친 가벼운 옷차림, 금빛 나는 갈색 수염과 잘 빗어서 묶은 긴 머리. 옆에 놓인 배낭과 물통은 그가 홀로 떠도는 나그네임을 설명해준다. 청년이라기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중년이라는 표현은 당치도 않고. 하나씩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데 왜 내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놓는 것일까. 어쩌면 그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고독? 인연을 내려놓고 떠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잘 걸러진 고독이 침몰된 어선을 숙주로 삼은 따개비들처럼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저런 고독을 가진 이에겐 고독과 행복이 각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을 터. 나는 지금 그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에 시선을 깊이 박아 넣고 있다. 어쩌면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다가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질 것 같다. 물론 그는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는다. 천천히 일어나 배낭을 어깨에 멘 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다.

내가 반했던, 아니 부러워했던 사내.

태양은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고.

그의 모습을 저녁 어스름이 지워버리자, 구름 한 자락에 매달려 있던 해가 바다 속으로 몸을 담근다. 날이 어둑어둑해져가면서 공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저만치서 누군가가 부르는 노랫소리도 들린다. 제법 듣기 좋아서 가까이 가보니 한 청년이 기타를 치고 다른 하나는 신나게 노래를 한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이 청년들 더욱 신났다. 잠시 뒤에는 노래를 멈추고 콜라를 한 잔 가져와 내민다. 오늘의 첫 청중이 돼줘서 고맙다는 뜻이리라. 고맙긴 뭐, 사진을 찍게 해줬으니 내가 더 고맙지. 그나저나 여행지에서는 남이 주는 음료를 함부로 마시지 말라는 여행자 수칙을 어쩐담.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다. 청년들의 눈빛을 보니 절대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못된다. 그들은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나는 콜라들 마시면서 노래를 듣고. 난데없는 호강이다. 노래를 마치고 잠시 쉬는 동안 그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터키 사람 특유의 호기심으로 눈까지 반짝거린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이번에는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에 'I love core'를 넣어서 후렴구처럼 부른다. 이런 환영이 있나. 공원에 나온 사람들이 청년들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자연스레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청년들은 토크쇼를 하듯 중간 중간 관중과 이야기도 나눈다. 관광객에게는 안탈리아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접대성 멘트도 아끼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저물어간다.

공원서 노래하는 청년들.

 공원에서 노래하는 청년들

청년들은 콜라는 마시지만 술은 절대 사양이다. 소위 말하는 공원에서 껄렁대는청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왼쪽에 기타 치는 청년은 열아홉 살로 고등학생이라고 한다. 노래를 하는 청년은 스물 셋이라는데 바에서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둘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절친이란다. 함께 공원서 노래를 한 건 2년 째. 노래를 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느냐고? 그런 건 없고 그냥 노래가 좋을 뿐이란다. 앙코르 신청을 했더니 혼신을 다해 불러준다. 목소리 톤이 아까보다 한 옥타브 올라갔다. 어이, 청년들. 무리는 하지 말어. 그러다 목 상할라. 지나가던 외국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쳐준다. 안탈리아의 저녁은 그들의 노래가 있어 한층 빛난다. 세상은 아직 온전히 저물지 않았다. 청년들과 헤어져 다시 바닷가 쪽으로 걷다가 어느 순간 몸을 낮춰 앉는다. 사물은 조금씩 희끄무레 하게 자취를 흐려간다. 나는 이런 시간이 좋다. 특히 여행을 할 때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즐긴다. 몸을 한껏 낮추고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엔 요술나라처럼 신기한 것들로 그득 차 있다.

안탈리아 밤거리는 화려하다.

호텔 창문을 통해 바라본 지중해.

신의 안배는 얼마나 절묘한지. 뛰어갈 때보다는 천천히 걸어갈 때 훨씬 많은 것을 보기 마련이다. 물론 걷는 것보다 서 있을 때, 서 있을 때보다는 앉아 있을 때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몸을 한껏 낮추고 고개를 숙여야 드디어 보이는 것들도 있다.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다. 눈으로 보는 걸 포기할 때도 있어야 한다.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을 열어 세상을 보는 순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여행은 좋은 스승이다. 어느 순간 살아가는 이유가 궁금해지거나, 스스로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 배낭을 꾸려볼 필요가 있다. 나그네가 되어 떠돌다 보면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잃어버렸던 자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다큐팀의 저녁 풍경 촬영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간다. 안탈리아 시내는 대도시답게 화려하다. 느닷없이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에 괜스레 눈을 크게 떠본다. 절대 그럴 리 없지.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다른 날보다 일찍 끝난 일정 덕분에 안탈리아의 두 번째 밤은 비교적 여유롭다. 식사를 한 뒤 야간 촬영을 나간다는 다큐팀과 떨어져 혼자 남는다. 이렇게 버는 시간은 얼마나 행복한지. 책을 읽다 창문을 열어보니 멀리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배 하나 꼬박꼬박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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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하드리아누스 문을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하드리아누스 문에서

오스만 전통가옥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하드리아누스 문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은 말 그대로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130년에 안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이 세운 문이다. 황제의 위세가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살다 간 것도 아니고 다녀가기만 했는데도 이만한 기념물을 짓다니. 하지만 어떤 삶에도 빛과 그림자는 공존하는 법. 황제라는 자리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3세기 중반을 로마의 군인황제시대라고 하는데,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등극하고 사라졌다. 평균 2년도 못하고 죽거나 축출된 것이다. 그깟 거 안 하고 말지,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까. 죽은 사람들 걱정 그만하고 산 사람은 다시 하드리아누스 문으로 돌아가 보자. 대리석을 재료로 해서 2층으로 건축됐다는 이 문은 이오니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3개의 아치가 인상적이다. 아치 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가족의 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어느 마당에서 개집이나 지키는 석상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터키는 고대유물도 냇가의 돌처럼 굴러다닌다. 문 양 옆으로는 사각형의 성탑이 있는데 왼쪽 건물은 로마시대에 지어졌고 오른쪽은 13세기 셀주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가 세운 것이다. 알라딘 케이쿠바드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지 않은가? 바로 이블리 미나레트를 세운 그 술탄이다. 이 사람도 삽질하는 게 취미였던 모양이다.

하드리아누스 문의 양쪽 성탑.

호텔로 가던 길에 만난 개구리공원.

하드리아누스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이 문은 우리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처럼 박제로 전시돼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통행로 사용되고 있다. 문의 한가운데 유리(?)가 깔려있고 그곳을 통해서 큰 도로와 구시가지 사이를 사람들이 오간다. 관리만 잘하면 우리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 따지고 보면 하드리아누스 문이 훨씬 긴 풍상을 견뎌왔다. 거긴 돌이고 우리는 나무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할까? 또 홀라당 타는 꼴을 보고 싶어 이도 안 들어가는 소리를 하느냐고 할까? 아무튼 나는 박제가 싫다. 문 앞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있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저만치서 걸어온다. 똑같이 터키풍의 시원한 옷을 입고 있다. 인사를 했더니 지쳐서 사진 찍을 힘도 없다고 하소연이다. 나도 그대들과 대화 나눌 기력도 안 남았소. 이제 한국인을 만나도 그러려니 한다. 하드리아누스 문을 떠나 안탈리아 도심을 걷는다. 오늘 묵을 호텔이 지척에 있다고 해서 걸어가기로 한 참이다. 석양이 커튼을 드리우기 시작한 거리는 터키 최고의 관광지답게 화려하다. 10분쯤 걸어가서 만난 호텔도 지금까지 묵었던 어떤 호텔보다 크고 화려하다. 로비로 들어가니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체크인 하고 들어간 방도 마찬가지다. 샤워와 간단한 빨래를 한 뒤 식당으로 내려간다. 이런! 식당 역시 지금까지 본 곳 중 최고급이다. 규모도 크려니와 음식의 수도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호텔 것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이렇게 느닷없이 호강해도 되는 거야?

안탈리에서 묵었던 라마다호텔.

호텔 내부. 터키 체재 중에 만난 호텔 중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주방장은 부산 사람?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높다랗게 솟은 모자를 쓴 중년 사내가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이 정도 모자 높이면 주방장 쯤 되겠군. 한국에서 왔다니까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피어난다. 그러면서 몇 년 전에 부산에 가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밝힌다. 한국에 다녀왔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다. 몇 년 있었지만 한국말은 배우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면서 음식 고르는 것을 도와준다. 고향사람을 만난 듯 반갑다. 음식도 맛이 있다. 결국 몇 번 가져다 먹는 바람에 과식을 하고 말았다. 에구, 여행 와서 배만 더 나오겠다. 929일 아침. 여행도 이제 후반을 향해 달리고 있다. 편안한 잠자리였고 비교적 오래 잤는데도 피곤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남들보다 많이 움직이고 많이 기록하고 많이 찍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육체에게는 고통스런 짐을 지울 수밖에 없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젖었지만 빨래는 뽀송뽀송 잘 말랐다. 그나마 다행이다. 지쳤다고 누워 있을 수야 없지. 이 호텔에서 하루 더 묵을 계획이라니까 간단하게 배낭을 꾸려 또 길을 나선다. 오늘은 안탈리아 외곽에 있는 명승지들을 돌아보는 날이다. 지중해 쪽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안탈리아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땅이다. 리키아 산맥과 타우로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주고 있는데다 동쪽으로는 비옥한 평원이, 남쪽으로는 지중해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안탈리아 거리.

안탈리아 시가지.

이 지역은 한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은 물론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관광지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안탈리아도 다양한 역사적 부침을 거친 도시다. 고대에는 이곳을 팜필리아(Pamphylia, ‘모든+민족의 합성어)라고 불렸다. 지금의 안탈리아에서 시데, 킬리키아까지 아우르는 해안지대를 말한다. 팜필리아는 BC 7세기에 리디아에 점령된 뒤 BC 546년에 페르시아의 속국이 됐으며 BC 334년에는 알렉산더의 영토가 됐다. BC 323년 알렉산더가 사망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로 편입됐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귀속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누렸다. 안탈리아에 최초로 도시를 세운 사람은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2세였다. 그때부터 아탈로스의 도시라는 뜻의 아탈레이아(Attalea)로 불렀는데 그것이 훗날 안탈리아가 되었다. 페르가몬 왕국은 바다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항구에 성을 쌓았는데, 로마시대에 재건축을 거쳐 지금까지 일부가 남아있다. 이 곳에는 기독교가 일찍부터 들어와 주요 기독교 도시 중 하나가 됐고, 7세기에는 아랍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십자군전쟁 때에는 동부로 진출하는 십자군들의 중간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078년에는 셀죽터키의 영토가 되었고 1932년에는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로마시대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한 팜필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거나 조그만 시골마을로 변했는데, 오로지 안탈리아만 관광도시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쿠르순루 폭포 입구. 결국 저곳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폭포는 못 들어가고 강아지와 놀고 있는 다큐 출연자.

쿠르순루 폭포에서 을 먹다

해가 뜨면서 대지는 금세 달아오른다. 내일모레면 10월인데 연일 30도를 웃도는 날씨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어제는 32도였고 오늘도 그 정도는 될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지금 서울은 비가 온다는데, 가을이 오고 있다는데. 문득 그 회색빛 도시가 그리워진다. 오늘 맨 먼저 찾아갈 곳은 쿠르순루 폭포. 폭포라니까 우선 느낌부터 시원해서 좋다. 안탈리아 내륙에는 하천이 많기 때문에 곳곳에서 폭포를 볼 수 있다. 그중 쿠르순루 폭포는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데다 수량도 많아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모처럼 시원한 곳에서 땀 좀 식혀볼까. 폭포로 가는 길은 시내를 거쳐야한다. 이곳도 아침에는 도로 곳곳이 막힌다. 시내를 벗어나서 한적한 길을 조금 달리자 금세 폭포 입구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보통 유적지나 관광지는 믿음 씨의 ()’ 하나면 무사통과다. 다큐촬영팀은 터키관광청이 자국의 관광산업을 홍보하기 위해 초청한 사람들이고, 믿음 씨는 관광청에 고용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르순루 폭포는 개인이 조성한 곳이기 때문에 공짜 입장은 어림도 없다는 반응이다. 촬영을 하려면 900리라를 내놓으라는데 그야말로 턱없는 가격이다. 믿음 씨가 난감하게 됐다. 체면도 말이 아니다. 일행은 하릴 없이 공터에 앉아 강아지하고 놀고 있는데 믿음 씨는 이리저리 분주하다. 아무리 개인 것이라고 해도 외국에 홍보되면 좋을 텐데 왜 그러지?

해변에는 이런 으리으리한 호텔도 있다.

이곳도 호텔.

믿음 씨는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여기저기에 전화를 한다. 관광청장과 직접 통화까지 했지만 우리는 끝내 폭포를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더럽다 더러워. 그깟 폭포 우리나라에도 많다. 너희들이 구곡폭포를 알아? 천지연폭포라고 들어나 봤나? 박연폭포는 또 어떻고? 홍보를 해주겠다는데 그깟 문 한번 못 열어 주냐? 열김에 꿍얼거려보지만 돌아가는 길의 분위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다. 미안해진 믿음 씨가 이 얘기 저 얘기로 분위기를 띄워보겠다고 애 쓴다. 그 중 러시아 사람들이 호텔을 이용하는 습관은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하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호텔에는 객실마다 미니바라는 게 있다.(물론 없는 호텔도 있다.) 미니바라고 대단할 건 없다. 우리나라 여관에도 있는 조그만 냉장고일 뿐이다. 거기에 물, 음료, , 가벼운 안주, 초콜릿까지 넣어놓고 일종의 장사를 하는 것이다. 호텔에서는 그 객실에 묵었던 손님이 체크아웃 할 때 뭘 먹었는지 조사해서 비용에 추가시킨다. 그런데 이 미니바가 가끔은 사람을 당혹시킬 때가 있다. 타인의 부담으로 간 여행이라도 미니바 이용 요금은 개개인이 부담해야한다. 문제는 가격이 시중보다 훨씬 비싸다는데 있다. 술 가운데 양주는 보통 미니어처 병에 들어있는데, 서비스로 넣어둔 줄 알고 마구 마셨다간 주머니를 털리는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미니바를 공짜로 이용하는 특출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러시아 사람들이다.

거리의 작은 공원.

저곳도 러시아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는 호텔이다.

집시 여인을 만나다

그들의 수법 중 가장 흔한 게 물을 마시고 빈 병에 수돗물을 채워 넣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술병에 물을 채워 넣기도 한다. 단체 관광객이 오면 객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손님을 내보내기에는 시간이 벅차다. 그러니 물병 뚜껑까지 돌려볼 틈은 없을 수밖에. 또 어떤 여자들은 가방에 미니바의 내용물을 몽땅 쓸어 넣고 간다고 한다. 하긴 미니바를 통째로 메고 가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떠난 다음 호텔 측에서 연락을 하지만 쓸어갔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니 호텔에서도 대비책을 세울 수밖에. 최선의 수단이 바로 러시아인들이 예약을 한 날에는 미니바에 있는 걸 몽땅 치우는 것이란다. 관광을 다니고 호텔을 이용할 정도면 가난 때문에 가져가는 건 아닐 텐데, 견물생심이겠지. 무한한 인간의 욕심에 대해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물론 러시아 관광객이라고 모두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버스는 다시 시내를 달린다. 출근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도로는 아까보다 한산하다. 어라? 저게 뭐야? 당나귀 달구지를 몰고 천천히 지나가는 고색창연한 여자가 시선을 잡는다. 높은 빌딩, 달리는 차들 속에 흡수되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풍경이다. 믿음 씨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집시란다. , 집시들이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터무니없는 동지의식(?)에 눈길은 자꾸 지나온 길을 더듬는다. 사실 직접 집시를 보는 건 처음이다. 그들이라고 머리에 뿔이 돋았으랴만 늘 궁금했던 터였다.

당나귀 달구지를 몰고가는 집시여인. 버스와 멀어서 선명하게 찍을 수 없었다.

라라비치의 모래조각들. 어떤 영화인지는 각자 알아맞혀 보시길.

집시(Gypsy), 흔히 인도 북서부에서 9~10세기에 출발한 유랑민족이라고 말하지만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히말라야산맥의 산록이나 평야가 고향일 거라는 설은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들이 왜 그곳을 떠나서 세상을 유랑하는지에 대해서도 이거다라고 설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고유의 언어를 지키는 등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초에 동유럽을 거쳐 유럽 각지에 퍼졌는데 지금은 유럽·소아시아·아메리카 대륙 등에 흩어져 있다. 인구는 약 180~4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지금의 터키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를 소아시아라 부르니 이곳에 집시가 있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들은 포장마차를 집 삼아 여기저기 떠돌며 음악사, 땜장이, 점술사 등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요즘은 우리의 봉고차 같은 미니버스에 거주하는 집시도 많다고 한다. 집시란 이름은 영국에서 그들의 발상지를 이집트(, Egyptian)라고 오해한 데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보헤미안이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문학작품 등을 통해 알려져 있다. 특히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콰지모도가 사랑하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는 세월이 가도 가슴에 눈물로 각인돼 있다. 난 그들의 정착하지 않는 삶이 아닌 정착할 수 없는 삶을 동경한다. 대대손손 핏 속을 흐르는 그 역마살. 몸이 타버릴 것을 알면서도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구속 없는 세상을 향해 끝없이 방랑하는 그 유전자를 사랑한다. 느닷없이 만난 집시 덕분에 이야기가 옆길로 샜다.

역시 모래조각 퍼레이드.

누드비치 아닌 샌드비치

지금 일행이 가는 곳은 라라비치. 안탈리아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모래해변이다. 그중에서도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땐 입장료를 받는다. 대체 이곳에 무엇이 숨어 있길래 사방에 담을 두르고 돈까지 받지? 혹시 말로만 듣던 그 누드비치? 후르륵! 일단 가출하는 침부터 단속하고. 믿음 씨를 따라 문을 들어서니 아! 바로 sand land, 모래천국이다. 물론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남녀는 없다. 한 눈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숱한 모래조각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재연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눈에 들어오더니 그 옆에는 킹콩과 타잔이 금방 밀림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한 모습으로 서 있다. 다른 쪽에는 스타워즈 군단과 토이스토리의 주인공들이 추억을 자극하고, 터미네이터의 주인공은 모래가 되어서도 “I will be back”을 외치고 있다. 벽에는 커다란 글씨로 ‘lara SANDland HOLLYWOOD’라고 새겨놓았다. 그런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비가 오면 어쩌지? 뭘 어쩌겠어, 완전히 날 새는 거지. 워낙 넓어서 지붕을 씌우기도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잖아도 한쪽에서 수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반바지를 입은 한 여성이 물을 뿌려가며 무너진 모래를 다듬고 있다. 손길이 무척 섬세하다. 최근에 비가 왔기 때문에 수리하는 것이란다. 조금 더 나가니 이번엔 전쟁시리즈가 기다리고 있다. 비교적 최근 영화인 ‘300’을 지나고 라이언일병과 반갑게 조우한다.

비로 망가진 모래조각을 수리하는 여인.

화려한 호텔 문. 러시아인들은 저런 호텔을 통째로 전세 내기도 한단다.

이 모래조각공원이 만들어진 건 2006년부터라고 한다. 안탈리아가 천혜의 관광지이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테마공원을 만든 것이다. 휴가철이면 각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올 여름만 해도 20만 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1인당 입장료가 8리라니까 대체 얼마를 번거야. 라라비치를 나와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믿음 씨의 러시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창밖을 스쳐가는 화려한 호텔들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동기가 됐다. 이번엔 부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는 전세 비행기로 안탈리아에 와서 호텔이나 빌라를 통째로 세내서 즐기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모텔이나 펜션도 아니고 저 으리으리한 호텔을 통째로? 기가 막힌 내가, 대체 누구길래 그리 돈이 많으냐고 물으니 믿음 씨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마피아 아니겠어요?” , 마피아. 나도 진즉에 그런 직업이나 해볼 걸. 아무튼 어떤 부자는 하루 저녁에 6500달러 씩 하는 빌라를 빌려서 92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그럼 대체 얼마지? 대충 계산해 봐도 숙박비만 7억 원이 넘는다. !! 러시아에도 밥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한 때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다는 거 맞아? 앞에서도 안탈리아가 터키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밝힌 적이 있지만, 참 다양한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중 가장 많은 건 역시 러시아사람들이란다. 격세지감이란 말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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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노면전차 트램의 외관

트램의 객차 내부. 느린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트램을 타다

모두들 조금씩 상기된 얼굴로 트램에 오른다. 터키 여행 내내 버스만 타고 다녔으니 다른 탈것이 신기할 법도 하다. 트램은 노면전차 또는 시가(市街)전차라고 부르는데 도로 위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전동차를 말한다. 하지만 믿음 씨는 트램이란 단어를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터키에서는 트램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고 있는 이건 뭔데? 그야 전철이란 뜻의 트란바이(tranvay)라고 하지요. 그럼 기차는? 그건 트렌(tren)이고요. 한국의 터키 관련 책자에는 모두 트램이나 트렘으로 썼던데? 그게 잘못된 거라니까요.(버럭!!) 그려, 그려. 누가 뭐라고 했남? 아무렴, 여기 사는 네가 맞겠지. 두 손을 들고 가만 생각해보니 트램이란 단어 자체가 국제적 통용어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터키에 와서도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트램은 주로 유럽에서 운행되는데 독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세계 약 50나라의 400개 정도 도시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189812월 서울 서대문-청량리 구간에 처음 개통돼 1968년까지 운행되던 노면전차가 바로 트램이다. 터키에서 트램이라는 단어를 낯설어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차라고 하는데 외국인이 와서 트램이라고 하면 이질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아무튼 믿음 씨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트램으로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믿음 씨 배신해서 미안해요.

안탈리아의 상징, 이블리 미나레트.

이블리 미나레트 근처에 있는 시계탑.

트램의 운임은 1~1.5리라. 돈은 차 안에서 받는다. 안탈리아는 해발 35m의 석회석 지반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에 땅을 팔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지하철을 놓을 수 없다. 트램의 외부에는 광고가 붙어 있고 객차에는 나무의자를 놓았다. 쌩쌩 달리며 사람을 위협하는 병기가 아닌, 사람에 맞춰 움직이는 친구 같은 존재라는 느낌에 정이 간다. 트램이 천천히 해변을 따라 달린다. 모처럼 느린 속도가 주는 안도감을 만끽한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꼭 봐야할 것을 놓치고 마는지도. 트램이 일행을 내려놓은 곳은 이블리 미나레트와 시계탑을 볼 수 있는 광장. 이블리 미나레트는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있다. 높이 38m. 안탈리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미나레트는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모스크, 즉 이슬람사원에 세운 첨탑을 말한다. 이블리는 ’ ‘홈이 파인이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 미나레트의 외벽에 붉은 벽돌로 여덟 줄의 세로 홈이 파여 있다. 이블리 미나레트는 룸 셀주크의 술탄이었던 알라딘 케이쿠바드1세가 1219년에 세웠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고 이 미나레트를 세운 것이다. 안탈리아의 구시가지를 칼레이치(Kaleiçi)라고 부르는데 이블리 미나레트는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시계탑과 함께 칼레이치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미나레트를 지나 마리나 항구로 가는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다시 한번 소개하는 유료 화장실.

유쾌 상쾌한 화장실 할아버지. 코리언이라는 말에 경례를 붙여줬다.

터키탕에 대한 오해

때가 되면 찾아오는 생리현상을 어찌하랴. 도살장 들어가는 소걸음으로 유료화장실에 들렀다가 유쾌 상쾌한 어른들을 만난다. 노인 두 분이 화장실을 지키고 있는데 노인들이 갖기 쉬운 지치고 음울한 기색이 전혀 없다. 특히 수염을 멋지게 기른

이블리 미나레트.

노인은 코리아에서 왔다는 말에 멋지게 경례까지 붙여준다. 이분들도 혹시 참전용사인 코레 가지’? 그렇지만 화장실 요금은 절대 깎아주지 않는다. 활짝 웃으며 헤어진 뒤 본격적인 이블리 미나레트 탐색에 나선다. 당연한 일이지만 미나레트 옆에는 모스크가 있다. 원래 그리스정교회 성당이었다는 바로 그 모스크다. 안을 들여다보니 청년 하나가 창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약간은 어두운 실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빛과 실루엣에 가까운 청년의 모습이 경건함을 넘어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 풍경이 날아갈 것 같아서 자꾸 망설인다. 모스크 앞에는 대형 쇼핑몰이 있는데 옛날에는 신학교였다고 한다. 쇼핑몰이 되어버린 신학교.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 희극이라고 해야 하나. 세월의 짓궂은 장난이겠지. 미나레트에서 시계탑 쪽으로 가다보면 옛 터키 목욕탕인 하맘을 개조한 도자기 가계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못 찾았기보다는 일행과 보조를 맞추다 보니 찾을 기회를 놓쳤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은 혼자나, 혹은 비슷한 시각을 가진 친구와 단출하게 다니는 게 좋다. 외로움을 충분한 탐색으로 바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블리 미나레트 옆의 모스크 내부.

슬그머니 내 사진도 하나 끼워넣고.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긴 수염과 까맣게 탄 얼굴이 특징이다. 클릭 절대 금지.

이왕 하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터키탕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터키에 간다니까 은근한 목소리로 다녀와서 재밌는 얘기어쩌고 하는 친구도 있었다. 대체 뭘 기대하고 하는 소릴까. 아직도 터키탕에 대한 오해가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터키에는 당연히 터키탕이 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엉뚱한 오해속의 터키탕은 없다. ‘하맘(Hamam)’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전통의 목욕탕이 있을 뿐이다. 아직도 터키탕과, 매춘을 연상시키는 증기탕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터키탕은 일부가 상상하는 것처럼 야한 곳이 절대 아니다. 어쩌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그렇게 음습한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 여기에 사연이 없을 수 없다. 오랜 동안 터키탕에 오명을 씌웠던 증기탕(1996년에 이름이 바뀌었다)은 일본에서 온 퇴폐문화라고 한다. 남성이 탕에 들어가면 지목된 여성이 따라 들어가 목욕과 사우나·마사지 등을 한꺼번에 서비스 하는 것은 물론 매춘까지 이어지는 곳이다. 지금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지 나는 한 번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터키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굳이 인연을 따지자면 남녀 혼욕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에도 오해가 있다. 터키에서 혼욕은 우리가 생각하는 탕 안에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작은 하맘일 경우 남녀가 시간을 나누어서 오전-오후 교대로 탕을 쓰는 걸 말한다는 것이다. 함께 목욕을 하는 온천도 있다는데, 그곳도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니 수영장이나 다름없다.

마리나 항구시장.

골목시장엔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

터키탕에는 물이 없다

터키로서는 자국의 이름이 붙은 듣도 보도 못한 목욕탕 때문에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전통 문화가 외국에 가서 섹스문화로 둔갑한다면 얼마나 화가 날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9961129일자 연합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보건복지부는 29일 입법예고한 공중위생법시행령 개정안을 통해 건전한 목욕문화의 정착을 위해 터키탕업의 명칭을 증기탕업으로 변경키로 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기사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터키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정부 측에 터키탕 명칭변경을 끈질기게 요구해왔으며 특히 지난 8월 딩겔테페 대리대사가 신문 독자투고문를 통해 한국에서 터키탕은 사실상 매춘행위를 하는 장소인데 이런 목욕탕은 터키에서 유래되지 않았고 존재도 하지 않는다고 강력히 항의했었다.’ 결국은 터키의 항의에 의해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터키탕을 증기탕으로 바꾼 것이다. 쓸데없이 목욕탕 얘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 조금 민망하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터키의 목욕탕 하맘에 대해 조금 알고 가자. 물론 나는 터키에서 대중목욕탕을 갈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걸 전할 수밖에 없다는 걸 고백한다. 터키탕은 로마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중동을 정복한 로마인들이 자신들 방식의 욕탕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터키탕이 됐다는 것이다. 터키탕은 증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밀실에 열기를 가득 채우는 건조욕으로 땀을 내고 나서 몸을 씻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의 한증막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기념품 중엔 가면도 많았다.

온갖 기념품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 터키탕을 잠깐 들여다보고 가자. 우선 터키의 목욕탕에는 물이 없다. 사방이 온통 건조한 대리석이다. 뜨끈하게 덥혀진 대리석 방에 앉아 열기로 땀을 내고, 수건으로 때를 밀고 물을 받아 바가지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 터키 사람들이 목욕하는 방식이다. 또 하나 터키탕에서는 옷을 홀딱 벗지 않는다.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인지라 동성 간에도 중요부위는 노출하지 않는다. 괜히 한국에서처럼 속옷까지 홀라당 벗고 들어갔다가는 구경거리가 되기도 전에 쫓겨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목욕탕에 가려면 때수건보다 수영복을 챙겨야 한다. 한 여성의 터키탕 경험담을 들어보자. 입구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고르는데 30리라면 필링(피부의 각질층을 얇게 벗겨내는 것. 남자가 할 일이야 있을까 만은)과 전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을 끼얹은 뒤 사우나실에서 10분 정도 몸을 불리면 때밀이가 순서가 됐다고 부른다. 중앙 홀에 있는 널찍한 대리석 평상에 천을 깔고 누우면 때밀이 아주머니가 터키식 때밀이 타월로 작업을 시작한다. 때를 다 밀면 간단한 샤워 후에 터키식 거품 마사지가 이어지고 두세 차례 물을 끼얹는 것으로 마무리. 개인적으로 샴푸하고 나오면 끝. 터키에는 동네마다 몇 백 년 묵은 터키탕도 많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한번쯤 들러서 이색적인 경험도 해보고 마음의 묵은 때까지 벗기고 나오는 건 어떨지.

25년동안 양탄자만 수선한 아저씨.

비록 계단에 점포를 열었지만 그는 당당했다.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어차피 터키탕 구경은 팔자에 없는 모양이니 포기하고 골목 탐색이나 열심히 하기로 한다. 조금 내려가니 온갖 기념품을 파는 골목시장이 나온다. 마리나 항구시장이다. 맨 먼저 입구에서 양탄자를 수선하는 아저씨를 만난다. 길 옆 계단에 앉아서 일하지만 당당한 풍모가 도인을 보는 것 같다. 뭐든지 한 가지 일을 지극정성으로 오래 하면 득도를 하는 모양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이것저것 질문을 던진다. 10세부터 양탄자 수선하는 일을 해서 25년 동안 이 일만 했단다. 전 세계 어디서 만든 카펫이라도 척 보면 한 눈에 출신지를 알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면서 터키 카펫은 두 번을 묶기 때문에 한 번만 묶는 다른 나라 카펫보다 튼튼하단다. 그런데 두 번 묶는다는 게 뭐지? 지금 수선 중인 카펫은 25년 된 것인데 이 정도면 새것 축에 들어간단다. 25년 쓴 게 새것이면 대체 얼마나 오래 쓴다는 거야.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보통은 100~200년은 써야 앤틱(antique)’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단다. 오래 쓸수록 골동품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100~200년은 좀 심하다. 몇 대를 이어 쓴다는 것인지. 수선하는 사람이야 일거리가 많아 좋겠지만 새로 만드는 사람은 누구에게 판담. 쓸데없이 별 걱정을 다하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다 좌판에 장신구를 파는 사내아이를 발견한다. 열 살쯤 됐을까? 부모를 대신해 좌판을 잠깐 봐주는 게 아니라 생업인 것 같다.

장신구를 파는 아이. 열심히 권하고 있다.

손님이 그냥 가자 실망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다른 손님마저 그냥 가자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힘내라, 아이야.

보석이라고 내놓은 것들이라 봐야 조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아이의 얼굴에는 절실함이 눅진눅진 달라붙어 있다. 간이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다가 누가 물건을 들여다보면 눈을 반짝이면서 달려간다. 목걸이를 걸어줘 보기도 하고, 어울릴만한 걸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처럼 온 손님은 살 듯 살 듯 하다가 그냥 가버린다. 아이는 상심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시선을 허공에 묻는다.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와 한참 흥정을 하더니 그냥 돌아선다. 아이가 좌판에 얼굴을 묻는다. 우는 걸까? 꼭 쥔 작은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대체 저 아이는 무슨 사연으로 이 골목에 좌판을 펼쳤을까. 장사를 하던 부모님이 병이라도 난 것일까?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저렇게 절실한 몸짓을 하는 것일까. 와르르 무너지려는 가슴을 추스르며 돌아선다. 조금 더 내려가다 장신구 틈에 숨어있는 남색 돌들에게 발길을 잡힌다. 눈동자처럼 생긴 흰 돌이 남색 돌 안에 박혀 있다. , 저게 굿 럭(Good Luck)’이구나. 굿 럭을 지니고 다니면 그 눈이 악귀를 다 지켜보기 때문에 나쁜 것들이 범접하지 못하다고 한다. 터키 사람들은 그 영험함을 굳게 믿어서 테이블보에서부터 그릇까지 굿 럭의 문양을 곳곳에 새겨놓는다. 또 가게나 집, 관공서 등 출입문이 있는 곳에는 대개 하나씩 매달려 있다. 마음이 넉넉한 터키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 굿 럭을 달아주고 행운을 빌어준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것이 바로 굿 럭.

쫀득쫀득 아이스크림 장수. 온갖 쇼를 한다.

쫀득쫀득 아이스크림

골목이 거의 끝나고 마리나 항구에 다다를 무렵 한 무리의 동양인들을 만난다. 안탈리아는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그런지, 그동안 스쳐온 도시와 다르게 동양인들이 꽤 많다. 중국인도 있고 일본인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인들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분명 한국인이다. 그 느낌을 믿고 한 마디 던져본다. “안녕하세요?” 길을 가던 그들이 그제야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는다. 역시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피가 피를 당기는 법. 그쯤 되면 길거리 수다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들 일행은 뉴욕에서 왔다고 한다. 터키 땅에서 뉴욕 교포들을 만난 셈이다. 반가워라. 터키에 와서, 타큐팀을 제외하고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또 헤어져야 한다. 그들과 작별하고 해변을 걷는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다. 그동안 보드롬이나 페티예, 카쉬에서 워낙 아름다운 바다를 많이 봤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리나 항구는 안탈리아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2세기부터 지중해를 오가던 배들이 쉬어가던 일종의 정거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콘얄트 해변 쪽에 새로운 항구가 생겨 고유의 기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안탈리아의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1980년대 복원돼서 유럽연합이 주는 황금사과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항구는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하다.

까마득한 성벽.

오스만 시대에 지은 오래된 집들.

늑골이 드러났지만 정겹다.

거의 몸을 비비 듯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낯설고 익숙한목소리가 들린다. “쫀득쫀득 아이스크림!!” 어라? 이게 웬 쫀득? 돌아보니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이 한국말로 우리를 부른다. 저 사람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어딘가 표가 난다는 건데, 그게 뭘까. 그나저나 한국말로 아이스크림을 팔 정도면 이 동네는 정말 한국인이 많이 오는 모양이다. 아이스크림은 쫀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찰떡처럼 생겼다. 우리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신나는 몸짓으로 아이스크림을 늘렸다 줄였다 온갖 쇼를 한다. (귀국한 뒤 인사동에서도 아이스크림을 파는 터키 사람을 봤지만 쇼를 보기는 어려웠다) 우리로 보면 찹쌀떡쇼쯤 되겠다. 항구 구경을 건성건성 마치고 다시 옛시가지 쪽으로 길을 잡는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성곽의 가파른 길을 헐떡거리며 오른다. 옛날, 배를 타고 오는 적들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일 테다. 원래 칼레이치는 성내(城內)라는 뜻으로 항구를 둘러싼 4.5km의 성벽 전체를 걸어서 돌 수 있다고 한다. 성곽을 지나고 구불구불 미로 같은 길을 지나니 오래된 집들이 나온다. 오스만 시대의 전통가옥들이다. 늙은 말의 잔등이처럼 헐벗었거나, 늑골을 다 드러낸 집들도 있지만 내 눈엔 그래서 더욱 정겹다. 해가 잠자리를 찾는 듯,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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