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당나귀를 타고 가는 아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었다.

샨르우르파로 가는 길의 황량한 광야.

샨르우르파로 가는 길. 산과 평원이 교대로 나타나 다양한 풍경화를 그려준다. 말라티아에서는 살구나무만 봤는데 이곳은 내내 밀밭이다. 조금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작물까지 이렇게 큰 차이가 난다. 밀은 벌써 수확을 끝냈다. 이 지역에서는 밀 수확을 할 때 이삭만 자른다고 한다. 나머지 밀짚은 그대로 양들을 풀어놓고 먹인다. 길 옆으로 가끔 당나귀를 탄 아이들이 지난다. 심심해서 타고 다니는 건 물론 아닐 테고. 가만히 보니 당나귀 옆구리에 물통 같은 게 달려있다. 먼 곳으로 물을 길러 다닐 정도로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그럼 양젖을 담는 통? 가는 곳마다 확인하는 것이지만 터키에는 일하는 아이들이 많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건강해보인다. 양떼를 몰고 가는 유목민들도 가끔씩 보인다. 차를 세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이 빠듯하다.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남들과 나눠 써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낮달이 계속 버스를 따라온다. 당나귀를 타고 가는 아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유목민, 낮달. 그림처럼 목가적인 풍경이다. 물속에서 치열하게 움직여야 하는 오리의 물갈퀴처럼, 일상의 고단함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샨르우르파에서 터키-시리아 국경까지는 65km. 말 그대로 엎어지면 배꼽이 닿고도 남을 만큼 접경이다. 우리 대사관에서 가지 말라고 문자를 보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시리아의 불안한 정국 때문에 국경을 넘어오는 피난민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주는 사람도 전쟁을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넓게 펼쳐진 밀밭.

아브라함 동굴이 있는 '흐즈 이브라임 할릴룰라흐 모스크'의 입구.

뭐라고 적어야하나. 쓸 말이 너무 많으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지금 내가 그렇다. 드디어 샨르우르파에 도착했다. 이곳이야말로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 먼 길을 거쳐야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말문이 턱! 막혀버린 것이다. 적절한 감상문 한 줄 정도는 남겨야하는데 뭐라고 하지? 예언자들의 도시, 성서의 무대, 종교의 고향, 종교 부화장, 아브라함의 땅, 세계 최초의 도시샨르우르파를 수식하는 말은 넘쳐흐른다. 그 어떤 말도 가볍게 흘릴만한 게 없다. 그리고 대부분 종교적 의미를 품고 있다. 그러니 이 도시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종교로 말문을 열 수밖에 없다. 특히 곳곳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행적을 읽을 수 있다. 구약성서를 보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이곳 하란에 머문다. 또 이설(異說)이 훨씬 더 지지를 얻고 있지만, 최소한 샨르우르파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고장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유적을 찾기 어렵지 않다. 대표적인 게 바로 아브라함이 태어났다는 아브라함 동굴과 사형 직전에 살아났다는 발르클르 연못, 성스러운 물고기의 연못이다. 이 유적들이 있는 곳을 아브라함 공원이라고 부른다. 이슬람교의 나라에 웬 아브라함 유적들이 이렇게 대우를 받느냐고 물으면 공부 좀 필요한 사람이다. 장차 더 설명하겠지만 아브라함은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공동 조상으로 일컬어진다.

 

 

아치 중 맨 오른쪽에 아브라함 동굴이 있다.

왼쪽 문이 여성 전용, 오른쪽이 남성 전용.

아브라함 공원을 찾아가기 위해 숙소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 숨이 턱 막힌다. 마치 냉장고에서 오븐으로 공간 이동을 한 느낌이다. 천지간을 가득 메운 열기. 역시 샨르우르파구나. 사막 국가인 시리아의 바로 이웃에 있는 이곳도 준사막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덕분에 사막이 되는 것을 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들도 태양의 영역까지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서두에서도 잠깐 밝혔지만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가장 걱정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살인적인 더위였다. 안내책자에는 터키에서 가장 더운 지역’ ‘여름 평균기온 섭씨 50등의 문구가 맨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랑이다. 기껏 자랑할 게 그것밖에 없나. 후배 하나가 나를 생각한다고, 아니면 이 얼마나 고소한 일이냐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보여준 터키의 평균 기온에도 50도를 가리키는 온도계 사진이 등장했다. 물론 이 사진의 제목은 터키의 평균 기온이 아닌 샨르우르파의 여름 평균 기온으로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50도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경험한 최고 기온이라 봐야 기껏 35? 오븐에 들어가 연습할 수는 없으니 사우나에서 적응훈련을 하는 수밖에. 역시 뜨겁긴 뜨겁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았나? 적응훈련의 효과를 보는 건가? 물론 실상은 그 게 아니다. 현지사람에게 물었더니 지난주까지는 평균 47도를 기록했단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37도밖에 안된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람도 선선하다고 이상기온이란다. 이 열풍이 선선한 바람이야?

 

동굴 안에서 '성수'를 받는 아이들.

저 안쪽이 아브라함 동굴인데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이왕 신기하게 생각한다면 생색 좀 내고 가야지. 이상기온 운운한 사람을 불러 진실을 가르쳐 준다.

이상 기온이 아니고요, 내가 와서 그래요. 도착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젠 날씨보다는 기운이 없는 게 더 걱정이다. 며칠 째 먹지를 못했으니 축적해둔 힘이 다 빠져나갈 수밖에. 아침도 과일 두어 조각으로 때운 참이다. 그래도 원하던 곳에 왔으니 힘차게 출발해봐야지. 아브라함 동굴은 흐즈 이브라임 할릴룰라흐 모스크 경내에 있는 석굴이다. 이 이름이 엄청나게 어려운 모스크는 오스만투르크 때 세워졌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탄생지를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기도와 명상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일 게다. 모스크 광장의 다섯 개 아치 중 하나가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다. 헌데 출입문이 두 곳이다. 오른 쪽은 남자만 들어가고 왼쪽은 여자가 들어가는 입구라고 한다. 굳이 남녀를 가려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예배공간조차 남녀를 구분하는 게 이슬람 전통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을 거쳐 들어가면 동굴이 나오는데 사전에 상상했던 동굴의 모습과는 영 다르다. ’믿음의 조상이 태어난 곳 치고는 초라한 편이다. 4각형의 조그만 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수도꼭지가 있다. 그곳에서 나오는 물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신성한 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냥 갈 수 있나. 나도 줄을 섰다가 물을 한 컵 마신다. 내 몸 안에 신성한 기운이 가득 차는 것 같다. 이젠 아브라함이 태어났다는 동굴을 들여다봐야 할 차례. 참배객이 많아서 순서를 기다려야한다. 동굴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4각의 틀에 유리를 끼워놓았는데 천장은 바위 형태가 그대로 살아있다.

 

동굴 속의 우물.

 

드디어 내 차례. 바짝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본다. 어라? 이게 뭐야? 유리창 안에는 샘 하나만 보일 뿐이다. 바닥과 벽을 돌로 쌓은 네모난 샘. 샘은 물론 그 바깥에도 물이 가득 차 있다. 더 안쪽에 무언가 있을 법도 한데 조명이 물에 반사되는 바람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허무하다. 이렇게 물이 가득 차 있으면 아기 아브라함과 그 엄마는 어디에 있었다는 거야? 카메라를 들고 X 마려운 강아지처럼 종종걸음을 쳐보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등을 살짝 친다? 열 받는데 이건 또 뭐야? 돌아보니 수염이 하얗고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쓴 노인 하나가 내게 뭔가 자꾸 설명을 한다. 우리말이 아닌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영어도 아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에라, 모르겠다. 나도 우리말로 마구 떠든다. 각자 할 말만 하지만 대화는 충분히 된다.

왜 이렇게 촐랑이처럼 방정을 떨고 댕겨?”

아브라함이 태어난 동굴이라고 해서 와봤더니 물만 있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왕 보라고 만들어 놨으면 뭐가 보이든지 말든지 해야 할 거 아뉴? 당최 뭘 보란 건지.”허어! 이 사람아. 동굴에 와서 동굴을 봤으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래. 보고 싶은 것은 스스로의 가슴 속에 있다네.”

노인이 껄껄껄 웃는다. 무슨 소리야? 아브라함이 왜 내 가슴에 있다는 거야. 헌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듯하기도 하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동굴에서 만난 노인.

동굴 바로 옆에 있는 기도실.

그나저나 아브라함이 이 동굴에서 태어나긴 한 것일까? 아니, 왜 하필 동굴에서 태어났을까. 샨르우르파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 의문은 속물적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궁금증은 풀고 가야지. 이 동네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두 구전에 의존한다. 아브라함이 구약에 등장하는 건 창세기 11장부터다. 이때의 아브라함은 이미 장년에 접어들어 있다. 그 이전의 행적은 어느 곳에도 적혀있지 않기 때문에 전설만 난무하는 것이다. 이제 그 전설의 샘으로 풍덩 빠져 보자. 전설 속에서 아브라함이 태어난 것은 BC 2100년이다. 그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이는 님로드(Nimrod) 왕이라는 앗시리아의 영주였는데, 그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인간이나 신이래. 진짜 신들 열 받았겠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님로드 왕의 우상(신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이 님로드가 꿈을 꾸는데 별 하나가 얼마나 빛나든지 태양 빛을 가릴 정도더란다. 어라? 이게 무슨 뜻이지. 왕은 점술사들을 불렀다. 그들의 해몽은 한결 같았다. ‘올해 이 도시에 한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가 당신의 자리를 빼앗고 당신의 왕국을 없앨 것이다.’ 왕은 정신이 번쩍 낫겠지. 그래서 우선 취한 조치가 임신을 원천봉쇄할 수 있도록 남자들을 도시에서 모두 내쫓는 것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아직 잉태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아브라함 어머니는 어떻게 임신을 했을까? 일이 그리 되려고 했던지 궁전에서 신상을 만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시내에 남을 수 있었다. 특수보직을 가진 셈이었다.

 

 

흐즈 이브라임 할릴룰라흐 모스크.

아브라함 동굴을 찾아온 참배객들.

님로드 왕의 불행은 그렇게 예외를 인정함으로써 시작됐다.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집으로 퇴근한 날 아이가 잉태됐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투철한 저항정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별 생각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고. 점술가들은 곧 왕에게 달려가 이 도시에서 아이가 잉태됐다고 일러바쳤다. 이왕 그렇게 점괘가 용하면 누가 임신했다는 것도 알 법도 하련만. 이번에는 임신한 여자들이 모두 도륙을 당했다. 아브라함의 어머니는 배를 꽁꽁 동여매서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산달이 되자 그녀는 동굴로 들어가서 아이를 낳았다. 여기서 전설은 그 요건에 더욱 완벽성을 띠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어머니가 아기를 두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 보니 사슴들이 찾아와 젖을 주고 있더란다. 정말 신기한 건 지금부터다. 아기는 태어난 지 한 달 뒤에 한 살짜리 아이가 되고 다섯 달 뒤에는 다섯 살짜리 아이가 되었다. 15개월이 지나 15세가 될 무렵, 소년 아브라함은 동굴에서 나오다가 군사들에게 잡혔다. 15세나 됐으니 의심 받을 일은 없었다. 아브라함이 마음에 든 님로드는 그를 궁전에 머물도록 했다. 폭탄을 품에 안은 셈이었다. 궁전에 사는 아브라함은 신상들을 볼 때마다 투덜거렸다. 이따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무슨 신이야. 신이라면 힘이 있어야지. 그때 가브리엘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하늘에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계시거든. 그분도 널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열심히 해봐.“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조그만 녀석이 믿던 신을 바꾸라고 한다고 , 알았습니다.’ 할 사람이 어디 있나.

 

모스크 위를 나르는 비둘기들.

답답한 아브라함은 한 가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그때도 봄이 오면 야외로 나가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여의도 벚꽃축제 같은 것이겠지. 아브라함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그 축제의 행렬에서 빠졌다.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들로 나가고 궁전이 텅 비게 되자 이 야무진 청년은 도끼를 둘러메고 신전으로 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아버지가 만든 신상들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큰 신상에 도끼를 꽂아두고 슬쩍 빠져나갔다. 왕이고 신하고 신나게 놀고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와 보니 이렇게 기가 막힌 일이. 신상이란 신상은 몽땅 장작이 되고 멀쩡한 건 딱 하나 남았는데, 그나마도 도끼가 꽂혀 있으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 축제에 가지 않았던 아브라함이 의심 받을 건 뻔하다. 그를 잡아다 족치기 시작했다.

야 임마, 네가 그랬지?”

무슨 소리래요?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요.”

너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불어.”

아참!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당신네들의 신한테 물어봐요. 내가 볼 땐 그 도끼 들고 있는 신상(사실은 도끼에 맞은 신상)이 한 짓 같은데요? 그놈이 다른 놈들 몽땅 찍어버린 건 아닐까요?”

이 청년 천연덕스럽기도 하다. 그러면서 거기서 또 전도를 했다지.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무슨 신이냐.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을 믿어라.

 

사진 찍어달라고 조르던 아이들.

아브라함은 바로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신상이 전부 자빠져도 범인조차 제대로 못 잡는 님로드 왕의 권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더욱 미울 수밖에. 여기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성스러운 물고기의 연못에 가서 해야 한다. 가보면 안다. 전설이 조금 길어졌지만 이 정도는 알고 가야 이 고장에 대한 예의다. 동굴에서 나와 모스크를 천천히 돌아본다. 이곳도 아이들과 비둘기들의 세상이다.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논다. 아이들이 카메라의 뷰파인더 속에 여러 번 들어오면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의사표현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면 그 정도 눈치는 금세 생긴다. 사진을 찍어줄 테니 모이라고 했더니 좋아 죽겠단다. 저 환한 얼굴들. 아이들과 비둘기까지 어울려 한참 놀아준다. 모스크 밖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아 음료수를 마신다. 머리 위로 보이는 성채에는 빨간 터키 국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고대사람 아브라함과 현대의 터키 국기. 느닷없이 타임머신을 탄 듯 어지럽다. 화장실에 가려고 나서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청년 하나가 웃으면서 화장실을 가르쳐 주겠단다. 그럴 거까지 없는데? 내 정중한 사양을 못 들은 척 끝내 화장실 앞에까지 따라온다. 그러건 말건 입구에서 1리라를 내밀고 들어가려는데 그 청년이 손을 벌리고 서 있다. 어라? 너도 달라고? 이거 순 날강도일세 그려. 너 아니어도 화장실 알고 있으니까 필요 없다고 했잖아. 결국 1리라를 강탈당하고 만다. 영악한 것들.

 

모스크 위로 성채가 보인다.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앉을 때 보니 저만치 연못 하나가 있다. 저게 성스러운 물고기의 연못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다른 쪽에 있고 아인제리하 연못이란다. 아인제리하분명 여자다.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뭔가 마음을 끌어당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도 슬픈 사연이 하나 잠겨 있다. 제리하는 님로드 왕의 딸이었다. 헌데 이런 비극이. 그녀는 아버지인 왕의 신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인 하나님을 믿었다. 혹시 아브라함의 전략은 아니었을까? 적을 잡으려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기까지 알 방법은 없지만 둘은 사랑을 하는 사이가 됐다. 신상을 때려 부순 연인 아브라함이 아버지인 님로드 왕에게 사형을 당하는 순간, 그녀도 이 연못에 몸을 던졌다. 이거야.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여기에도 있었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다. 연못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한 여인의 눈물이 가슴에 닿는다. , 사랑이여! 그 덧없음이여! 끝내 궁금한 게 하나 있다. 하나님은 왜 그녀를 안 구해줬을까.

posted by sagang

넴루트산으로 가는 길에 만난 노인과 당나귀.

당나귀를 만난 건 넴루트산을 올라가던 중이었다. 2,150m의 산을 오르는 데는 버스도 허덕거리는 판이었다. 그런 길을 노인 하나가 당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올라가고 있었다. 노인의 체구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짐까지 가득 실었다.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몇몇 사진쟁이, 다른 이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버스를 세운다. 차에서 후다닥 뛰어 내려가 셔터를 누르는데 노인이 자꾸 손짓을 하며 뭐라고 한다. 아마 저리 가란 뜻인 것 같다. 에이, 사진 좀 찍는다고 뭘 그렇게 소리까지 지르시고. 버스에 올라와서 저 노인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으니, 가까이 가면 당나귀가 미쳐 날뛰는 수도 있으니 좀 떨어져서 찍으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투덜거렸네. 할아버지 죄송해요. 다시 바라보니 당나귀나 노인이나 유유자적이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별 수 있겠느냐는 달관적 포기가 얼굴에 그득하다. 이곳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들여다본 느낌이다. 넴루트산은 말라티아에서 차로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에는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인 시러강과 동행한다. 산은 황량하고 강바닥은 말라있다. 비가 많은 봄에는 물이 많지만 여름에는 곧잘 강바닥을 드러낸단다. 문제는 모래가 드러나면 건축업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퍼간단다. 이 동네도 모래라면 환장하는 인간들이 있었네 그려. 그래, 모래 퍼 먹고 잘들 살아라. 자연이 준 게 모두 공짜인 줄 알면 큰 코 다치느니. 함부로 퍼 쓰다가는 그보다 훨씬 큰 대가를 치를 날이 올 것이다. 자연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치유하려 애쓰지만, 정도가 넘으면 포기하는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건기라 강바닥이 말라있다.

 

강바닥은 말랐어도 주변엔 초지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낮게 자리 잡은 집들.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에 자주 시선을 빼앗긴다. 어디든 저렇게 생명이 태어나고 뿌리를 내려 살아간다. 차는 산악지대를 끝없이 달린다. 우리 대사관에서 보낸 문자가 생각난다. ‘접경 지역은 가지 마세요나는 지금 그 접경지역으로 자꾸 달려가고 있다. 이것도 반정부적 행동인가? 하지만 나는 그곳에 꼭 가야할 일이 있다. 차는 이제 본격적으로 넴루트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아래를 봐도 꼬불 꼬불, 위를 봐도 꼬불 꼬불. 저 길은 대체 어디까지 이어진 걸까. 이렇게 자꾸 올라가다가 느닷없이 하늘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가진 젊음과 도전하는 용기가 아름답다. 끊임없이 이어진 돌산은 잘 벼린 정()도 거부할 것 같다. 그만큼 단단해 보인다. 느닷없이 커다란 분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분지 안의 평원에서 뛰노는 소와 말들. 야생마는 아닐 텐데.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풍경은 경이와 행복감을 동시에 준다. 조금 더 올라가자 드디어 돌무덤이 자리 잡은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너진 석상들도 눈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몸을 잔뜩 움츠리고 만다. 서 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분다. 저 아래는 펄펄 끓는 여름인데 이곳은 아직도 늦겨울이다. 겉옷을 꺼내 입는다. 산정으로 올라가는 길, 바람은 더욱 거세진다. 이곳에 묻힌 안티오코스 왕이 나를 거부하는 건가? 하지만 나는 기어이 그대를 만나고 가리라. 곧 이 거대한 고대 묘지의 동쪽 테라스에 도착한다. 계단에 주저앉아 한숨을 몰아쉰다.

 

넴루트 산을 오르는 길.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

이제 이곳이 대체 어디며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설명하고 가야하겠지? 이곳에는 신이 되고자 하는 싸가지 없는꿈을 품었던 한 인간이 묻힌 무덤이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안티오코스 1. 옛날 아주 옛날에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해서 벌거벗은 임금님식의 우화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지금 얘기하는 건 분명히 실재했던 역사다. 옛날이야기 같은 역사. 아나톨리아 땅 카파도키아의 북쪽에 콤마네게라는 왕국이 있었다. 처음부터 왕국은 아니었고, 팔자 사나운 년 역마살 타고난 사내 따라다니듯, 이 나라 저 나라에 묻어가던 속국 쯤 됐었다. 히타이트의 변방으로도 살았고, 아시리아와 페르시아에 점령되기도 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에도 있었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셀레우코스 왕조가 임명한 콤마네게의 총독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사람이 나도 나라 하나 세워보자고 독립을 선언했다. BC 162년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에서부터 별로 길지 않았던 콤마네게 왕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을 가진 네 명의 왕과 미트리다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세 명의 왕이 다스리다 사라진 나라다보니 역사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다. 사실 이 나라는 넴루트산의 이 거대한 무덤이 아니라면 역사에 이름을 올릴 일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 왕국을 유명하게 한 사람이 바로 안티오코스 1세로 넴루트산 꼭대기에 무덤을 세운 주인공이다. 또 독립 왕국을 세운 프톨레마이오스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안티오코스 1세는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 되면서 스스로를 신과 동격이라고 선언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분지에는소와 말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돌무덤.

여기서부터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이 왕국의 역사는 안티오코스 1세의 역사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이 살아간 이야기는 로마의 역사에 종속변수로 존재할 뿐이다. 로마는 정권을 가진 자의 입맛에 따라 이 작은 나라를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 원정 전쟁에 불러내기도 하고 필요하면 왕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서기 59년에 벌어진 로마와 아르메니아의 전쟁 때에도 불려갔다. 이 전쟁에서 이기면서 안티오코스 4세는 아르메니아 일부를 얻었지만, 그 떡이 바로 쥐약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고 로마에 의해 왕위를 박탈당했다. 서기 72년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모두 로마로 불려갔다. 이로서 콤마네게 왕국은 역사에서 그 이름을 완전히 지우고 로마의 일부가 되었다. 다시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 안티오코스 1세가 무덤을 만들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그는 살아있을 때부터 자신의 왕릉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콤마네게 사람들은 신들은 하늘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에 신전을 만들었다. 안티오코스 1세도 자신의 왕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넴루트산의 꼭대기 바위에 자신이 사후에 들어갈 석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바위를 깨트려 만든 주먹만한 돌들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물론 비밀의 문도 만들었을 것이다. 봉분의 원래 높이는 60m였지만 조금씩 흘러내리고 또 석실을 찾으려는 후세 사람들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면서 50m로 낮아졌다. 지금도 돌들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덤에는 안티오코스 1세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미트리다테스 1세 등도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테라스의 석상 몸체들.

석상들의 머리가 따로 떨어져나와 있다.

이 능묘에서 챙겨봐야 할 것은 거대한 자갈 봉분이 아니라 석상들이다. 묘에는 동쪽과 서쪽, 북쪽 세 곳에 테라스를 만들었다. 테라스는 종교의식을 치르는 성스러운 장소, 히에로테시온이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제단 뿐 아니라 신상들이 서있다. 동쪽 제단에는 아폴로, 제우스, 안티오코스(자신이 신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끼어있다), 헤라클레스, 독수리, 사자의 석상 등이 있다. 반대쪽인 서쪽에는 사자와 독수리, 안티오코스(또 꼈다), 아폴로, 제우스, 헤라클레스 등이 있다. 안티오코스 자신과 신들을 함께 조각함으로써 신과 동격이라는 것을 못 박은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신들 사이에 사자와 독수리는 웬일일까. 사자는 들짐승의 왕을 상징하고 독수리는 날짐승의 왕이라 하여 모두 왕권을 나타낸다. 또 독수리는 제우스신의 신조(神鳥)이기도 한데, 바로 인간과 신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신상들은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크다. 대부분 높이가 8m 정도인데 무게로 치면 60t이나 된다. 아무리 둘러봐도 근처에는 60t 정도의 돌이 없다. 그렇다면 제법 먼 곳에서 바위를 옮겨왔다는 것인데 2000m가 넘는 이 산꼭대기까지 어떻게? 모든 게 신기할 뿐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신상들의 조각을 보면 대개 그리스 신과 페르시아 신들을 절충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대외적 환경이 낳은 결과물일 것이다. , 신상들의 얼굴은 그리스풍이지만 모습 자체는 헬레니즘의 유행과 맞아떨어진다. 모자, 의상, 신발, 헤어스타일은 페르시아풍이다. 각 신상의 뒷면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리스어 비문이 쓰여 있다.

 

북쪽 테라스에서 바라본 봉분.

북쪽 테라스에는 석판들의 잔해만 남았다.

문제는 이들 석상들의 모습이 온전치 못하다는데 있다. 대부분 머리가 굴러 떨어져 있다. 꼭 시간의 심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아나톨리아의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 지진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스교도들이 일부러 밀어 떨어트렸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코 부분이 주로 파손 된 것을 놓고 이 말 저 말이 많다. 설마! 그냥 지어낸 말이겠지. 과정이 어떻든 간에 신이 되고자 했던 한 인간의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 계단에 앉아 거친 숨을 가라앉히니 거대한 무덤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왕권이 대단하긴 했구나. 이 높은 곳에 저런 구조물들을 세우다니. 지금의 터키, 그리스인들이 살았고 로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한 때는 알렉산도르스와 페르시아의 점령지였고 투르크가 차지한 땅을 돌아다니다 보면 참 놀라운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과연 그 위대한 유산들이 인간의 힘으로 이뤄진 것일까.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역광 때문에 셔터 누르기가 두렵다. 정말 안 좋은 시간에 올라온 셈이다. 이곳은 일출과 일몰 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별러서 이곳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대개 새벽시간을 선택한다. 황홀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워낙 고지대이다 보니 한 여름에도 새벽에는 무척 춥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옷은 물론 담요를 챙겨서 와야 한다. 그런데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기 어려운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 광경을 놓치고 말았다. 조금 속상하다. 일출을 제대로 보려면 보통 새벽 3시쯤에 출발해야 한다. 넴루트산은 여름 한철만 개방한다.

 

서쪽 테라스로 가는 길.

 

동쪽 테라스에 있는 사자상.

다른 사람들이 동쪽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슬그머니 북쪽으로 간다. 이곳에는 테라스는 없고 몇몇 석판들의 잔해만 남아 있다. 적막만 감도는 이곳이야말로 진짜 무덤 같다. 맨 꼭대기에서 돌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내려온다. 아득한 옛날에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돌이 나를 반기듯 내려와 발치에 머문다. 이 돌과 나는 어떤 인연으로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을까. 이 돌은 내게 무슨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은 것일까. 하늘은 징그러울 정도로 파랗고 내 앞에 있는 돌의 침묵은 길어진다. 사실 이 거대한 돌무덤과 석상들은 오랜 세월 망각된 존재였다. 넴루트산 위에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는 게 알려진 것은 1881년 독일인 칼 세스터라는 사람에 의해서였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항구에서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통하는 길을 찾아달라고 고용한 사람이었다. 길을 찾던 그가 콤마게네 지역에서 아시리아 유적을 찾았다는 보고를 했다. 다음해에 터키 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했고 1883년 넴루트산 정상에 있는 돌무덤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발굴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38년 미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특히 테레사 고엘이라는 여성 학자의 이 유적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한 재를 무덤 인근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유언대로 그녀는 영원히 이 무덤 주변에 머물고 있다. 1986년부터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석실의 입구는 아직까지도 발견하지 못했다.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재로 지정됐다.

 

서쪽 테라스.

 

이제 서쪽 테라스로 넘어간다. 이곳의 모습은 대체로 동쪽 테라스와 비슷하다. 다만 석상들이 동쪽보다 훨씬 심하게 파손됐다. 동쪽테라스의 석상들이 몸은 몸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나란히 정리돼 있다면 이곳의 석상 머리들은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다. 이곳에는 콤마게네 왕조의 조상들을 새긴 석판이 잘 보존돼 있다. 나는 또 엉뚱한 상념에 빠진다. 이곳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묻혀 있을까. 신이 되고 싶었던, 지금 내 상식으로는 약간 머리에 이상이 있는, 왕 하나의 사후를 위해서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노예라는 이름으로 노역에 시달리고 죽어갔을 사람들. 그 모습을 보고 들었을 산천은 그저 무심하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환상적이다. 눈 아래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고 그 평원을 가로지른 길 하나가 끝없이 달려가고 있다. 아드야만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평원을 벗어난 산들은 산악지대 특유의 삭막함을 보여주고 있다. 계곡들은 바짝 말라있다. 예전에는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계곡마다 숲을 이루고 기름진 토양을 만들었다지. 무엇이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 기껏 해봐야 시간에 핑계를 미루는 수밖에. 서쪽 테라스를 벗어나 남쪽으로 간다.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봉분만 눈에 들어온다. 가늘게 풀어진 길 하나가 산 밑으로 더듬더듬 내려가고 있다. 올라온 쪽이 말라티야라면 내려가는 쪽은 아드야만이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만난 동생이브라힘의 고향이라는 곳. 길 끝에 건물 하나가 서 있다. 휴게소인가보다.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 안티오코스 1세.

석판에 새겨진 조각들.

눈을 들어보면 저 먼 곳에는 파란 물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물은 갇혀 있는 듯 움직임이 없다. 저게 뭐지? 훌리아를 불러 물어보니 오른쪽으로 보이는 게 아타튀르크댐이고 왼쪽이 카라카야댐이란다. 카라카야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아타튀르크댐은 익숙하다.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한 나도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댐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줄기에 댐을 세우고 메마른 대지에 물을 대서 옥토로 바꾸는, 터키 동남부개발프로젝트를 GAP라고 부른다. 그동안 낙후됐던 동남부 지역을 곡창 지대로 탈바꿈시킨다는 목표 아래 1974년부터 시작됐다. 특히 돌과 흙으로 채워진 8400만m²의 아타튀르크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댐의 물은 수로와 운하를 통해 남쪽의 170만ha의 평원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터키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농업, 교육, 관광 뿐 아니라 위생상태의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이 국제적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특히 시리아와 긴장관계의 이면에는 이 프로젝트가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티그리스 강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경계선에 있다. 따라서 이 두 나라는 터키가 물을 독점하려고 한다.”면서 문제를 삼아왔다. 상류에서 거대한 댐을 막아버리면 수자원 사용에 타격을 받는 것은 물론 수도꼭지를 남의 나라에 맡기는 꼴이 된다. 하지만 터키는 그 정도 문제 제기로 물러날 기미는 없는 것 같다. 내 땅을 흐르는 강을 내가 좀 막아서 써보겠다는데 왜 시비야. 그러고 보면 또 딱히 할 말도 없다.

 

저 길을 따라 아드야만 쪽으로 간다.

저 멀리 아타튀르크댐이 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댐 건설로 이주해야하는 주민만 해도 15,000명이 넘는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터전을 떠나야한다. 우리 땅에서도 댐을 막을 때마다 일어나는 비극이다. 더욱 논란이 되는 것은 이주해야하는 대상이 쿠르드족이라는데 있다. 쿠르드족의 분리 독립 운동을 막기 위해 댐 건설을 추진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사정이야 어떻든 2000m가 넘는 산정에서 바라보는 평원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다. 뱀의 등을 탄 듯, 구불구불 걸어 산 아래로 내려온다. 시간을 보니 630. 아쉽다. 일몰까지 1시간만 기다리면 되는데.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무겁다. 물론 혼자 버틴다고 해결될 될 일은 아니다. ! 다음에 꼭 혼자 와서 일출, 일몰 실컷 보고 갈 테다. 터키에서는 이곳 넴루트산을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부른다. 내가 봐도 그런 주장을 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대외 홍보물에도 안티오코스 왕의 머리나 독수리 상을 빼놓지 않는다. 이 높은 곳에 세워진 거대한 왕릉. 풀어내기 어려운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다 내려와서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본다.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 그의 무너진 꿈들이 자갈돌이 되어 자꾸 굴러 내려온다콤마네게 왕국의 흔적역시 모두 지워졌다. 수도였던 샴샤트의 위치를 표시하는 유적들은 아타튀르크댐에 모두 수장됐다. 지워진 왕국의  안티오코스 1, 그는 지금 물속에 잠긴 왕국과 거대한 무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각종 기념품을 파는 휴게소.

아래로 내려오니 위에서 짐작한대로 휴게소가 있다. 뒤뜰에는 당나귀가 매어져 있다. 당나귀를 타고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준비했겠지. 그렇게 편하고 싶으면 집에 그냥 있을 것이지. 여기서 좀 쉬고 샨르우르파로 떠나게 된다. 휴게소 기념품 가게에서 흥정이 벌어진다. 안티오코스 1세의 무덤에 있었던 석상들이 미니어처로 만들어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그걸 살까말까 망설이길래 터키어라고는 두 마디밖에 못하는 내가 오지랖 넓게 흥정에 나선다. 주인이 35리라를 부른다. 무슨 소리야. 너무 비싸. 그리고 그냥 팔면 아저씨도 재미없잖아.

조금만 깎아줘요.”

안 돼

조금만. 22리라면 딱 좋겠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돈이면 본전도 안 되거든? 29리라까지는 생각해볼게.”

에이, 그럼 안 사. (돌아서는 척 하다)저 혹시25리라는 어떨까? 그래봐야 10리라 깎는 건데.”

결국 25리라에 합의를 본다. 그 과정 내내 웃음이 질펀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은 없다. 거봐. 여행의 재미는 깎는 거라니까. 물건도 안 사는 주제에 큰 소리 치기는.

 

posted by sagang

 

바위 중간쯤 나무들이 있는 곳에 동굴집이 숨어있다.

동굴집에서 바라본 세상.

이마에 땀방울이 솟고 숨이 차오를 무렵 동굴집 마당에 도착한다. 산으로 보면 9부 능선 쯤 될까? 집이 이고 있는 큰 바위 바로 위가 정상이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헌데 기대(?)는 순식간에 절반 이상 무너지고 만다. 동굴집이라고 해서 컴컴한 동굴에서 짐승 가죽을 두르고 토끼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을 만날 줄 알았더니, 내가 만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동굴이라기보다는 바위를 벽과 지붕 삼아 지은 집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원래 있던 동굴이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반쪽만 남아서 덧대어 지은 것이란다. 그래서 동굴에 산다고 않고 동굴집에 산다고 했구나. 집안은 일반 살림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방 두 칸과 주방이 있다. 방에는 소파와 TV가 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다. 다만 부엌은 동굴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냉장고도 있는 현대식부엌이다. 일단 원시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이 지역에는 사람이 거주하던 동굴이 50개 정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은 잦은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이 살았다. 동굴에서는 지금도 쇠화살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된다. 4000~5000년 전 것들도 많다. 히타이트부터 로마, 비잔티움,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를 거치는 동안 계속 사람이 살아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동굴을 주거공간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기 때문에 굳이 떠날 이유가 없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동굴 하나 분양받아 볼까?

 

거대한 바위 아래 덧대어 지은 창고.

 

'동굴 사람' 슈크르 쿠르트 씨.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집 주인과 마주친다. 드디어 동굴사람을 만난 것이다. 헌데 집이 그렇듯이 사람 역시 동굴이라는 이름이 가진 기대치를 훨씬 못 미친다. 짐승 가죽을 허리에 두르고 토끼를 통째로 굽는 장면이야 벌써 포기했다고 해도, 대도시에 모셔다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외양을 갖추고 있다. 이름은 슈크르 쿠르트. 1949년생이니까 만 63. 이 동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의 조상은 8세기 경 셀주크 투르크와 비잔티움 제국의 전쟁 때 동굴로 피난을 온 뒤 계속 살아왔다고 한다. 이 산악지역에 쿠르트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는데 자신이 바로 그 왕족의 후예라고 자랑한다. 이름이 쿠르트니까 그럴 듯한 얘기긴 한데, 어디 증거가 있어야지. 아무리 둘러봐도 녹슨 왕관 하나 안 보인다. 나의 의심스런 표정을 읽었나? 자신도 1년 전까지는 규축 큐르네라는 이 마을의 촌장이었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것도 직선제로 뽑힌 촌장. 마을에는 70가구 400명 정도가 산다. 말이 마을이지 이 산 전체에 깃들어 사는 인구가 그 정도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촌장의 임무 중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마을에 변고가 없나 살펴보는 것도 있단다. 이번엔 증거가 있다. 고색창연한 쌍안경을 꺼내 보여준다. 알았어요. 왕족이라는 것도 믿어드릴게요. 그는 1년 내내 동굴집에 사는 것은 아니다. 겨울에는 말라티아 시내에서 살면서 1주일에 한번 씩 다니러 온다. 그의 설명으로는 애들 교육 때문에 나가서 살 수밖에 없단다.

 

방 안에는 TV, 소파, 카펫 등 있을 건 다 있다.

주방은 동굴 형태가 많이 남아있다.

재미있는 건 부인이 3명이나 된다는 사실. 이 나라는 그런 게 가능한 모양이다. 그러면 자식은? 19명이다. 10명은 딸이고 9명은 아들이란다. 그 자식들에게 낳은 손자는 28. 물론 계속 늘어나겠지. 자식 중 몇몇은 이스탄불이나 앙카라에 나가서 산다. 부인이 셋이나 된다니 부럽다고 해야 되나? 밤에는 어떻게 자느냐고 짓궂게 물었더니 대답이 명료하다.

차례대로!!!”

존경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이 동굴까지 도로가 깔리고 전기가 들어온 사연도 자랑한다.

“1985년에 수상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실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닌데 어느 날 말라티아의 공무원들이 찾아오더라고요. 수상이 주지사에게 지시를 했다면서. 그때 길을 만들고 전기도 들어왔지요.”

다시 한 번 그 당시 이 나라의 수상에게 경의를 표한다. 짚 옆으로 아직도 깊은 굴이 있고 안쪽에 커다한 우물이 있다. 물을 한 모금 떠서 마셔보니 굉장히 시원하다. 전기가 안 들어왔을 때는 동네의 먹을 것을 이곳에 보관했다고 한다. 공동 냉장고였던 셈이다. 여름이면 동네 열무김치 집합소였겠는데? , 이 나라는 김치 안 먹지. 슈크르 쿠르트 씨가 밖으로 나와 이곳저곳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다렌데의 토흐맛까지 연결되는 길이 있는데 대부분 동굴을 통해서 지나가게 돼 있다고 한다.

 

동굴 내부.

동굴 안의 샘.

동굴 길. 아주 먼곳까지 뚫려있다.

 

그 길을 역사의 길이라고 부른단다. 실제로 그는 지금은 막아놓은 문을 열고 동굴로 연결된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긴 설명을 뒤로 하고 그와 작별을 한다. 문을 나서는데 그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텃밭에 있는 시금치처럼 생긴 풀을 따서 내게 내민다. 먹어보라는 뜻이겠지? 성의를 무시할 수 있나. 덥석 입에 넣고 씹어본다. 이게 무슨 맛이야? 맛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덤덤한. 속았나?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그만의 작별의식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기대했던 원시적 동굴생활은 아니지만 참 특별한 경험이었다. 너도 나도 도시로 몰려들고 한없이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게 상식인 시대에,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내려오는 길에 연료로 쓸 쇠똥을 말리는 노인과 마주친다. 묻지 않아도 이곳에서 평생 농투성이로 살아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깊은 주름에 까만 얼굴, 그리고 환한 웃음.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와 정말 닮았다. 말을 안 걸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저 동굴 집에 사는 쿠르트씨, 어떤 분인가요?”

저 사람? 우리하고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야.”

평범한 사람에 대한 평범한 평가다. 나는 조금 다른 주거환경에서 사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온 것이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터키 노인들.점심식사 자리에서 뜻밖에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전혀 귀띔조차 없었는데 말라티아 주정부가 깜짝 선물을 준비한 셈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노인이 세 분이나 나와 있다. 이럴 수가. 가슴이 벅차 한참 말이 안 나온다. 어제 코레 가지손자와 만나면서도 이분들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제는 대부분 세상을 뜨고 남은 분들도 모두 80세가 넘었다고 한다. 몇 년 뒤에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분들이다. 한국 국민을 대신해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

여러 분들이 흘린 피 덕분에 저희 대한민국은 번영을 누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만수무강 하세요.“

노인들이 힘차게 박수를 친다. 만수무강의 뜻을 자세히 설명했더니 다시 한 번 박수를 치며 좋아들 하신다. 이분들도 자신들이 피를 흘린 나라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는 감동으로 식사조차 제대로 못한다. 그러면서 앞 다퉈 전쟁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말라티아주에서는 241명이 참전 했는데 그중 6명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지금 참전용사회에는 회원이 31명이란다.

“19527, 배를 타고 23일 걸려서 서울에 도착했어요. 한국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일본으로 가서 보급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가는데 7일이 걸렸습니다. 첫 번째 전쟁을 치른 곳은 전곡이라는 곳이었지요. 그 다음에 군우리에 투입돼서.

 

모두 80세가 넘었다.이분은 세월 탓에 기억나는 게 많지 않다고 미안해한다. 미안하긴요. 정말 미안한 건 저희들인데요. 낯선 땅에 와서 싸워줬다고 언제 제대로 한번 챙겨드려 본 적이 있었던가요. 내 옆에 앉은 노인이 맞은편의 노인을 가리키며 아직도 어깨에 총탄이 박혀있다고 설명한다. 다른 분이 경험담을 이어간다. 자신들은 가는 도중에 배 안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런데도 배는 계속 한국을 향해서 갔고 휴전협정이 맺어진 한참 뒤인 1954년까지 머물다 귀국했다고 한다. 이분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한 분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한 분이 중간에 끼어들기도 하고. 유치원생이 따로 없다. 이거 순서를 정해 드릴 수도 없고 난감한데. 훌리아는 밥도 못 먹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통역을 하느라 바쁘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빨리 잊는 건 아닐까. 이분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가슴에 두고 사는데, 당사자인 우리는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가뭇가뭇 잊어버리고 산다.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억할 건 기억해야 한다. 머나먼 나라의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 15,000명을 파병해 3,200명이 죽거나 다친 사람들. ‘코레 가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을 바탄(조국), 스스로를 코렐리(한국인)라 부르는 사람들. 이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산다면 그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머리 검은 짐승과 무엇이 다를까.

  시장에 진열된 살구.

기쁘고 또 무거운 마음으로 참전용사들과 작별한다. 뙤약볕 아래에 미동도 없이 서서 손을 흔드는 노인들에게 나 역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꾸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젠 다시 만나지 못하리. 오후에는 말라티아 구리시장에 들렀다. 물론 구리제품만 파는 건 아니고 우리의 오일장과 비슷한 재래시장이다. 시장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역시 살구와 체리. 조금 걸어가다가 느닷없이 발걸음을 멈춘다. 구두 수선가게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 어떻게 한꺼번에 모여 있을 수가 있지? 서울역 뒤 염천교에 구둣방들이 줄지어 있는 것은 봤지만 수선가게들이 한꺼번에 있는 건 처음 본다. 카메라를 들고 다가서자 일을 하던 사람이나 놀고 있던 사람이나 웬 구경거리냐는 듯 나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조금 당황스러운데? 내가 구경하는 거야, 이 사람들이 날 구경하는 거야. 젊은이도 있고 나이 지긋한 사람도 있는데 공통점은 앞에 재봉틀을 하나씩 끼고 있다는 것. 카메라를 피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두 활짝 웃어준다. 모델 출신들인가? 골고루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 중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짓을 한다. 바쁜데 왜 부르는 거야. 그래도 뭐가 있을지 모르니 안 가볼 수 없지. 이 친구가 나를 수선가게로 안으로 잡아끈다. 안은 제법 넓고 여러 가지 기계들이 있다. 간단한 수선집들이 아니었구나. 청년이 아무 말 없이 신발을 하나 들고 기계 앞에 서더니 작업을 시작한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 자신이 작업하는 걸 찍으라는 거구나. 전에 어떤 사진쟁이가 와서 연출을 시켰던 게 들림 없다.

 

한 곳에 모여있는 신발수선집들.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누가 뒤에서 툭툭 친다. 이번엔 나이 지긋한 사람이다. 이 가게의 사장쯤 되는 모양이다. 손짓 발짓을 보니 저 녀석을 찍어봐야 별 볼일 없을 테니, 차라리 자기를 찍으란다. 이 동네 사람들. 사진 찍히는 거 정말 좋아하네. 시간이 없어서 대충 몇 장 찍고 도망치듯 나오려니까 청년이 마구 소리치며 따라 나온다. 말은 몰라도 뜻은 금세 알아차린다.

묘기는 시작도 안했는데 어디 가?!!!”

바빠서 너하고만 노닥거리고 있을 수는 없거든. 미안해. 손님도 없고 심심했던 구둣방 아저씨들, 허겁지겁 뛰어가는 동양인을 보고 가만히 있을 턱이 있나.

헤이~ 재키 찬!!”

재키 찬이라면 영화배우 성룡(청룽)을 말하는 거잖아. 내가 배우처럼 잘 생긴 건 사실이지만, 중국인처럼 보였다는 건 별론데? 약간 목소리를 높여서 한마디 던진다.

재키 찬 죽었어!!!”

멀쩡하게 살아있는 재키 찬 씨, 미안해요. 나도 잠깐 화가 나서 그런 거지 진심은 아니었어요. 내가 당신 영화 얼마나 좋아하는데.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어느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뭐지? 뭐지? 까치발을 하고 들여다보니 커피 가게다. 원두커피를 직접 가루로 만들어서 봉지에 담아 팔고 있다. 커피를 끓이는 도구들도 진열돼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줄을 서서 커피를 사는구나.

 

커피 가게. 가루커피를 담아서 판다.

수작업으로 그릇을 만들고 있다.

터키하면 차이, 즉 진한 홍차를 떠올리기 쉬운데 커피야 말로 터키 사람들이 애호하는 차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터키 커피 이야기를 좀 하고 갈까. 터키 커피는 곱게 빻은 가루를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작은 잔에 따른 다음 위에 뜬 액체만 마신다. 바닥에 남은 가루로는 점을 치기도 한다. 터키인들은 오스만 제국 시대인 16세기부터 커피를 즐겼다. 커피를 터키어로 카프베라고 하는데 커피를 마시는 장소 역시 카프베라고 부른다. 1544년 이스탄불에 문을 연 카프베가 바로 오늘날 보통명사로 굳어진 카페의 원조가 되었다. 터키 사람들이 얼마나 커피를 즐겼으면 금지령까지 내렸을까. 마약이나 술도 아닌데. 금지령이 내린 이유는, 종교적 차원에서 커피의 흥분작용을 경계한 것도 있지만 카프베가 정치적으로 불온분자의 온상이 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라트 4세 때인 1633년의 금지령은 계엄령보다 더 무서웠던 것 같다. 오스만 제국령 내의 모든 카프베가 폐쇄됐고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커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금지령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터키 사람들이 특히 즐긴 것은 커피 자체보다는 카프베라는 휴식 장소였다. 그곳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지식인, 시인 등이 모이는 카프베, 예니체리의 카프베, 신비주의자들의 카프베 등으로 분화되어 각각의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스탄불의 카프베 수는 16세기 말 600개를 넘었다고 한다.

 

 

대장간의 다정한 형제.

새로 사귄 친구 세레프.

커피가게 구경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구리시장을 돌아본다. 허름한 가게에서 각종 구리 그릇이 만들어져 나온다. 컵 같은 소품에서부터 주전자, 커다란 물통까지 턱턱 만들어낸다. 장인들은 모두 노인이다. 이곳 젊은이들도 이런 궂은일은 배우려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젠가는 결국 맥이 끊기겠지. 노인 둘이 벌겋게 달군 쇠에 메질을 하며 낫을 만드는 대장간을 구경하다가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 늙수그레한 사진사 하나가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길래 말을 걸었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한다. 이스탄불에서 온 사진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프리랜서로 잡지와 계약해서 사진을 찍어 보낸단다. ? 내가 하고 싶은 일이잖아. 느닷없이 솟아오른 동료애에 손을 맞잡고 한참 흔든다. 헌데, 이 사람 동양인 하면 전부 일본인인줄 아나보다. 몇 마디 아는 일본말로 연신 뭐라고 한다.

난 한국 사람이라니까. 이제 일본말 잊어버리고 한국말을 배워요.”, 머리 아파요. 이 나이에 어떻게 남의 나라 말을 배워.”

오케이, 오케이. 그럼 내가 터키 말을 배우지 뭐.”

나이를 물어봤더니 59세란다. 무슨 50대가 이렇게 늙었어? 나는 아저씨벌인 줄 알았네. 객지 벗은 15년까지 맞먹어도 된대. 우린 지금부터 친구야. OK? 유쾌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시장바닥을 누빈다. 그렇게 이 지구에는 또 하나의 친구가 생긴다. 그의 이름은 'Seref'. 새로 사귄 친구 두 명 때문에 구리시장이 잠시 시끄러워진다.

 

 

시장에 있는 솜틀집.

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들.

나는 장터만 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는다. 솔직히 말하면 반 미친놈이 된다. 어쩌면 내 전생이 장돌뱅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시장에는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도 많다. 솜틀가게 앞에서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는데 한 사내가 서서 내 카메라와 자기를 번갈아 가리킨다. 사진 찍어달라는 거지요? 오케이, 오케이. 얼마든지. 사진을 몇 장 찍었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이번엔 친구를 데려온다. 둘이 같이 찍어달라는 얘기다. 내가 좀 이상하게 생겼나? 아니면 재미있게? 길을 지나다 보면 말을 붙이고 같이 놀자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실실 웃으며 걸어 다녀서 그러는 건가? 여행이 행복해서 그래요. 이번엔 가족과 서 있던 여인 하나가 계속 나를 주시하더니 눈길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메르하바를 외친다. 사양할 리 없지. 나도 즉각 메르하바. , 말라티아. 정말 마음에 드는 도시다. 떠나기 싫다.

 

 

posted by sagang

 

토흐맛 강이 있는 다렌데.

다렌데로 가는 길에 만나는 산들은 황량하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이 지역엔 10년 전보다 눈()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막화는 분명 아닌데. 신기한 게 하나 있다. 아나톨리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삭막한 땅 천지다. 그런데 이 나라는 7,0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먹고 남을 정도의 식량대국이다. 비옥한 토지는 대체 어디에 숨겨놓은 것일까. 다렌데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 이곳은 말라티아주 서쪽 끝에 있는 조그만 읍이다. 말라티아 시내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토흐맛강 주변에 형성된 유원지 덕분. 버스에서 내리니 조그만 광장이 인파로 북적거린다. 마침 인근의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마친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활기가 넘쳐서 좋다. 동네 한 가운데로 토흐맛강이 힘차게 흐른다. 물은 석회 성분이 섞인 듯 뿌연 색을 띄고 있다. 산은 나무 한 그루 품지 못하는데 어디서 이런 물이 나올까? 아마 지하에서 솟은 물이겠지.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강변마을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아니, 음식점 빼면 별게 없다. 커다란 모스크와 우뚝 선 미나레트가 차라리 이질적으로 보인다. 강 위엔 엄청나게 큰 수차가 돌아가고 있다. 지금은 구경거리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물방앗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밀을 찧어 가루를 만들고 그 밀가루로 빵을 만드는 빵집이 생기고 동네 사람들은 아침마다 빵을 사러오고. 사는데 없으면 안 되었던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그저 풍경으로 남거나 등을 돌려 떠나야 한다. 사람이라고 안 그럴까.

 

토흐맛 강.

소문주 바바 사원의 미나레트.

점심식사로 나온 송어구이.

풍경이 좋은 강가에 앉았지만 내게는 어떤 음식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곳 역시 송어구이가 나온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송어요리와 다른 점은 양념을 안 하고 구웠다는 것. 아마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요리인 모양이다. 귀한 손님은 아무나 하나? 내 위장에 앉은 커다란 바위덩어리 하나는 꿈쩍도 안 한다. 소화제를 먹고 응급조치를 취해보지만 나아질 기색이 없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음식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물이나 마시자니 보통 고역이 아니다. 정말 걱정되는 건 체력이 급격이 떨어지면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데 타격이 크다는 것. 차차 나아지겠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강 건너편에는 잘 지어진 정자들이 서 있는데 가족이나 친구들과 소풍을 온 사람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남자들은 불을 피우느라 연기와 싸우고 있고 여자들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불을 피우는데 영 재주가 없는 가장도 있다. 30분 째 부채질을 하지만 여전히 연기에게 쫓겨 다니기 바쁘다. 저러다 저 가족 굶는 거 아냐? 공공기관에서 세운 정자들은 이용료를 받지 않는단다. 이곳 사람들은 좋겠다. 유원지에 돗자리 하나 까는데도 돈을 내느니 마느니 싸워야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은 부럽기만 하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길에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코레가지의 손자와 만났다. 이름은 이 나라에 흔한 메흐메트. 15살의 고등학생이다. 물론 그냥 평범한 동네 아이들 중의 하나다.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온 할아버지는 18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토흐맛 강의 수차.

토흐맛 강에 소풍 나온 연인들.

한국전에 참전한 '코레가지'의 손자.

아이가 코레라는 나라를 어찌 알 것이며, 설령 안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60년도 더 지난 과거에 그 나라에 가서 싸웠다는 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아이에게는 반가움보다 어색함이 더 크다. 하지만 내 감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산골에서 내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던 한 촌부의 손자를 만난다는 게 우연에 기대는 것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아이와 악수를 나누고 훌리아를 불러 통역을 부탁한다.

네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우리는 영원한 형제다.”

느닷없이 형제라고 우기는 낯선 사내가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아이와 헤어져 소문주 바바 박물관으로 간다. 소문주 바바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 테니 잠깐 설명하고 가자. 소문주 바바(Somuncu Baba)는 사람의 이름이다. 투르크족의 정복 전쟁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소아시아로 이주한 그의 집안은 오스만 제국을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훗날 이슬람의 저명한 학자가 된 그는 긴 여행 끝에 부르사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는 빵을 구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선행이 계속되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는 빵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보시만큼 큰 보시가 어디 있으랴. 그의 큰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사원을 짓고 박물관을 만들었다.

 

 

소문주 바바 박물관에 전시된 빵.

소문주 바바 사원의 아름다운 뜰.

소문주 바바 사원 내부.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니 이 나라, 아니 최소한 이 지역 사람들이 소문주 바바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땅에서 꽃피운 그리스-로마에 비해 문화나 인물의 빈곤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터키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큰 자부심을 주는 지도 짐작이 간다. 박물관은 소문주 바바를 기리는 사원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모스크는 지금까지 본 어느 사원 못지않게 아름답다. 특히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서 토흐맛강을 내려다보는 미나레트가 장엄하다. 파란 물빛을 자랑하는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다. 소문주 바바의 후손이 지금도 이 모스크의 이맘(이슬람교에서 예배를 선도하는 사람)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 또한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겠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는 작지만 무척 짜임 새 있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한 가운데에는 소문주 바바의 유해를 안장한 목제 구조물이 있고 그 앞에서 무슬림들이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온 무슬림 여인의 간절한 얼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재미있는 건 실내에 토흐맛강의 근원이라는 수원(水源)이 있다는 것. 조그만 틈으로 들여다보니 정말 물이 흐르고 있다. 또 옆방에는 소문주 바바의 후손들을 안장한 무덤도 있다. 모스크에서 나오니 말라티아 주정부에서 토흐맛강 래프팅을 준비했다고 한다. 래프팅? 물속에 들어가는 거잖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건 아무리 재미있어도 무효. 나만 남기로 한다.

 

 

한국-터키인 혼성 래프팅 팀.

인공폭포.

내가 래프팅을 안 한다니 훌리아도 그냥 남겠단다. 오해할라. 내가 안 하겠다고 해서 남은 게 아니라 원래 그녀도 물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게다. 이렇게 말하면 더 변명 같은가? 래프팅 팀은 강의 상류로 올라가고 훌리아와 나는 점심을 먹었던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로 한다. 래프팅 팀이 내려오는 걸 볼 수 있는 위치다. ! 이제 청춘(?) 남녀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공간에 남았으니 뭔가 비밀스런 일이라도 일어나야 되지 않을까? 훌리아가 내 곁으로 바투 당겨 앉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선생님, 제가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호오! 비밀? 좋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훌리아는 자꾸 뜸을 들인다. 사랑 고백을 하려고 그러나?

그만 뜸들이고 얼른 말해봐.”

사실은요.”

, 그래. 그래.”

저 폭포짝퉁이예요.”

? 그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망설인 거야? 멋대가리 없이 험악하게 생긴 바위산에서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가 하나 있다. 소문주 바바 사원 바로 옆인데 음식점에서 바로 코앞이다. 나는 처음 보는 순간 물을 퍼 올려서 내려 보내는 가짜 폭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훌리아가 아주 엄청난 비밀을 가르쳐준다는 듯이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난 또. 애가 순진한 거야? 키들거리고 있는데 저만치 래프팅 팀이 내려온다. 모두들 흠뻑 젖어있다. 거봐. 안 가길 잘했지.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찾아온 꼬마손님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일행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동네 아이들과 사진놀이를 하면서 논다. 너도 나도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아우성이다. 제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가져온 녀석들도 있다. 맨 처음엔 초등학교 고학년 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려와 수줍게 모델 노릇을 하더니 잠시 뒤에는 수염까지 듬성듬성 난 녀석들이 와서 줄을 선다. 웬 아저씨들? 나이를 물어보니 열여덟 살이란다. 방학을 맞이해서 집에 내려온 학생들이다. 녀석들~ 아들벌도 안 되는 것들이 수염은 많아가지고 사람 쫄게 만들고 있어. 그 중 하나는 아까 길에서 살구 팔던 녀석이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갓 따온 오이처럼 싱싱한 표정들이다. 방학이고 뭐고 공부에 치여서 파김치가 다 돼 있을 우리 아이들이 생각난다. 아무튼 동네 아이들 다 모였다. 하나 둘 셋 카운터에 들어갔다가 카메라 배터리 떨어졌다고 집으로 달려가는 녀석, 전화 왔다고 셔터 누르는 걸 잠깐 유예해 달라는 녀석. 가지각색이다. 아무렴 어떠랴. 행복한 시간이다. 이번엔 이 동네 사는 유치원부터 초등학생들이 다 모였다. 녀석들 줄 세우는 것도 일이다. 제대로 됐나 싶으면 딴전 피우는 놈, 저는 왜 안 찍어주느냐고 징징거리는 녀석. 얌마! 너희들이 가만히 있어야 찍지. 그걸 못 기다리고 그냥 집으로 가는 녀석은 또 뭐람. 작은 동네에 이렇게 아이들이 북적거리니 활기가 가득하다. 이 아이들이 터키의 미래다. 사진을 다 찍고 강을 따라 가는 협곡 트래킹을 하기로 한다. 내가 래프팅은 싫어도 트래킹은 자신 있다.

 

동굴 수영장.

음식을 조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강가의 화덕.

지난해 폐티예에서 카쉬로 가던 길, 샤클르켄트 협곡에서 트래킹을 하다가 웅덩이에 빠지고 수첩을 잃어버렸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번엔 물속으로 가는 길이 아니니 위험할 게 없다. 경치는 샤클르켄트보다 훨씬 아름답다. 길도 안전을 고려해서 제대로 만들어놓았다. 노인이든 아이든 누구나 갈 수 있을 것 같다. 강변에는 음식을 해먹으며 쉴 수 있도록 정자를 세워두었다. 물론 이용료는 없다. 정자에는 전기 콘센트까지 달아두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화덕을 세워놓았다. 음식재료만 싸오면 한곳에서 모든 게 해결되도록 했다. 그것 뿐 아니다. 곳곳에 어린이 놀이터도 만들어놓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주민복지가 뭐 별것인가.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제대로 쉬게 해주는 게 최고지. 국격(國格)이 어떠니 하는 거창한 구호 한마디보다 이런 배려가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조금 내려가니 수영장이 나온다. 이곳의 물이 바로 소문주 바바 사원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천연동굴 수영장도 있는데 동굴에서 나오는 물은 항상 22도라고 한다. 동굴 속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수영을 즐긴다. 수영장이라기보다는 온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잖아도 신경통을 앓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내려갈수록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절벽에는 5000~7000년 전에 쌓았다는 다렌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 그 옛날에도 이 골짜기에 사람이 살았구나. 단 하나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면 곳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 여기 사람들도 좀 문제가 있다.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각자 가져가면 얼마나 좋을까.

 

까마득한 절벽에 놓인 길.

폭포 앞의 음식점.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넥타이처럼 좁은 길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힐끗 쳐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누가 저 길을 지나간단 말이냐. 나는 돈을 지게로 담아준다 해도 못한다. 무섭고도 아름다운 협곡이다. 협곡을 벗어나 균프나르라는 동네로 간다. 계곡 사이로 들어가니 바위 사이로 거대한 폭포가 굉음을 내며 쏟아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풀 한포기 깃들 여지도 없는 바위산에 어떻게 저런 폭포가 생겨났을까. 저 물 역시 지하에서 용출한 것이겠지. 폭포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단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의 아름다운 곳은 모두 음식점이 차지했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은근히 겁이 난다. 도대체 몇 끼를 굶은 거야. 여행자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래도 남들보다 더 돌아다니고 사람을 더 만나는 걸 보면 아직은 견딜만 하다는 것이겠지? 뭐 안 먹고 일하면 경제적인 거지. 남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하염없이 폭포나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저 거대한 폭포도 내겐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 스토리가 없는 풍경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촌로의 깊은 주름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저 기념사진 몇 장 찍을 거리에 불과하다. 먹는 것도 없이 폭포 앞에 앉아 있으려니까 몸에 한기가 든다. 한낮의 폭염은 기억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저녁을 먹고 나니까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부탁했던 동굴 사람들의 인터뷰가 성사됐단다. 내일 새벽에 그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배고픈 게 싹 가시며 몸에 기운이 솟아오른다.

 

균프나르 폭포.

숙소로 가는 길에 훌리아가 터키에서 운전면허 따는 법을 들려준다. 먼저 학원에 등록해서 석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비행기나 탱크 면허 따는 것도 아니고 석 달씩이나 걸린담. 2개월은 집중 교육을 받는데, 차가 고장이 날 경우 직접 고칠 수 있도록 엔진구조까지 가르친단다. 모든 국민을 정비사로 만들 생각 아닐까? 그래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면 각국에 취업을 시키는 거지. 물론 나 혼자만의 상상이다. 그러고 보면 장점도 꽤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차가 고장 나도 보닛조차 열지 못하고 발을 구르는 경우가 한 두 번인가. 두 달의 공부가 끝나면 남은 1개월은 진짜 운전 연습을 한다. 필기와 기능은 우리처럼 학원에 위탁해서 시험을 본다. 시험에 합격하면 학원에서 국가에 기록을 보내고 면허증이 발급된다. 절차가 길고 복잡해서인지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우리나라보다 적은 것 같다. 최소한 직진만 3시간짜리 초보운전자는 없을 것 같다.

 

 

동굴로 가는 길가의 양귀비꽃.

아침 다섯 시. 부랴부랴 일어나 샤워를 한다. 오늘 아침에도 코피는 어김없이 흐른다. 뱃속에 들어앉은 돌멩이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힘차게 숙소를 나선다. 동굴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말라티야 시내에서 한 시간 넘게 달려가야 한다. 지대가 높아지면서 차도 헐떡거린다. 가드레일도 없는 절벽 길의 연속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차 안에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렇게 돌고 또 돌아 산정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아래서는 위가 까마득해 언제 가나 싶더니, 이제는 저 아래가 까마득한 세상이 돼버렸다. 이 길이 생기게 된 데도 사연이 있다. 꽤 오래 전 동굴에 사는 가장이 수상에게 편지를 썼단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최소한 길은 뚫어줘야 할 것 아니냐고. 그 수상 착하기도 하지. 주 정부에 지시를 내려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어줬단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편하게 올라간다. 하지만 어느 지점쯤 가니 차도 주저앉는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야한다. 차에서 내려 보니 모든 게 저 아래 엎드려 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저절로 왕이 될 것 같다. 세상이여, 내게 경배하라! 중간 중간에 집들이 보이고 손바닥만큼 작은 밭들도 여기 저기 박혀있다. 척박한 환경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의지가 읽혀진다. 이른 아침이고 2000m가 넘는 고지대다 보니 제법 쌀쌀하다. 배낭에 넣어뒀던 점퍼를 꺼내 입는다. 엉겅퀴와 꽃양귀비가 햇살에 꽃잎을 널어놓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양귀비, 고독해 보여서 더욱 아름답다. 사람도 가끔은 그렇게 홀로 서 볼 일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대중 속에서 떠나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posted by sagang

 

유프라테스 강가의 전망 좋은 자리.

유프라테스강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황금 빛 밀밭이 바람의 속삭임에 연신 자지러지고 강가의 미루나무들이 실눈으로 훔쳐보며 키들거리고 있다. 그 미루나무 잎을 사랑하여 큐피드 화살을 연신 쏘아대고 있는 태양. 황홀한 저물녘이다. 드디어 차가 멈추고 깊고 느리게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어머니의 강 유프라테스. 석양 아래 가로 누운 강은 장엄하다. 역시 강가의 좋은 자리는 음식점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건 세계 공통인가? 사람들이 강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사람은 없다. 황혼을 품은 유프라테스에서는 사람마저 풍경 속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 식사는 송어 양념구이. 이 나라 사람들은 생선을 잘 안 먹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 강에서 잡은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고 만다. 시원(始原)의 강 유프라테스가 살찌운 물고기 맛 좀 보고가나 했더니 그럴 팔자는 아닌 모양이다. 한번 떠난 입맛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바람 부는 강가에 앉았으니 평소 같으면 돌구이가 나와도 허겁지겁 먹을 판인데 어떤 음식이든 거부반응부터 일어난다. 몸이 지쳐서 그런 것일까.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거참.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을 안마시면 대체 어디서 마신다는 거야. 운치 같은 건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양반들 같으니라고. 포크를 들고 깨작거리고 있는 나를 보고 옆에 앉은 사람이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느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 이런 땐 어떻게 해야 되지? 그래, 억지로 좀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냐.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국위선양일 거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것 같다는 표정으로 송어구이를 구겨 넣는다. 속에서는 아우성이지만 국위선양의 길이 어디 그리 쉬우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식사를 즐긴다.

덕분에 더욱 무거워진 속을 달래며 어둠이 내리는 강가에 선다. 이곳에서 쇠유트라고 부르는 버드나무 가지들이 여위어 가는 강바람에 머리를 감는다. 사람이여, 사람들이여. 나른한 서글픔과 행복이 동시에 밀려온다. 깜빡거리는 작은 불빛들을 보며 대상도 없이 그립다라고 속삭여 본다. 그리워하는 건 여행자의 특권이려니.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에 가득 차는 저녁이다. 내가 이 강 앞에 설 것이라고 짐작이나 했던가. 그저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강인 줄 알았다. 유프라테스강의 발원지는 아라랏산까지 올라간다. 아라랏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신은 공부 좀 한 사람이다. 바로 대홍수로 떠내려가던 노아의 방주가 멈췄다는 전설의 산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북동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이란과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쯤에 있다. 높이가 무려 5137m. 그 아라랏산에서 발원해서 722km를 흘러 내려오는 무라트강과 에르주름 북동쪽에서 발원한 카라강이 만나서 유프라테스강이 된다. 무라트강과 카라강의 합수머리에서, 유프라테스강이 그 짝인 티그리스강을 만나는 이라크 바스라 항구까지는 총 2,289km나 된다. 유프라테스는 잘 갖다 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잘 갖다 주는 것만큼 고마운 존재가 어디 있으랴. 당연히 문명 하나쯤은 탄생시킬 만한 이름이다. 그리스어로는 풍요롭다는 뜻을 가졌다니 금상첨화다. 이보다 동쪽에서 흘러내려와 만나게 되는 티크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지역이 바로 우리가 익히 들어온 메소포타미아다. 대단한 뜻은 없다. 그저 강 사이의 땅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집트, 인더스, 황하문명과 함께 인류 4대 문명이라 일컫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잉태한 위대한 땅이다.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되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BC 5000년부터 인류가 정착했으며 우르와 우루크, 아카드와 바빌로니아 제국과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고대 도시들이 이곳에서 명멸했다. 이 글을 읽은 분은 오늘 인류 문명사까지 공부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강, 미루나무, 강 위를 나르는 새, 그리고 구름.

말라티아 시내로 돌아온 건 제법 이슥한 시간. 남들이 시내 구경을 간 사이에 훌리아에게 한국말 교육을 시킬 겸 잡담을 나눈다. 말이 잡답이지 내겐 터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시간이다. 어쩌다 보니 남자들 군대 가는 얘기부터 나온다. 사방에 적이 많은 터키는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하는 모병제를 택하고 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건 복무기간이 뒤죽박죽이라는 것. 대학졸업자는 6개월만 복무하면 군대생활 끝이다. 그럼 고졸은? 무려 15개월을 복무해야한다. 대학 못 간 것도 서러운 데 이런 치사한 경우가. 그게 끝이 아니다. 부자들은 1000달러만 내면 한 달 훈련으로 군대생활 종친다. 한마디로 무전(無錢) 뺑뺑이, 유전(有錢) 집으로. 너도 나도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돈을 벌려고 할 것 같다. 훌리아가 다른 얘기를 꺼낸다.

터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숫자가 뭔지 아세요?”

글쎄, 413이겠지.”

!! 7이랍니다.”

? 그 좋은 숫자를 왜?”

그냥 안 좋아해요. 그래서요. 터키 사람들은 이혼을 해도 결혼한 지 7년은 넘어야 잘 산다고 믿어요. 그래서 꾹꾹 참고 있다가 7년 되는 해 잽싸게 이혼해요.”

거참, 별 일도 다 있다. 그나저나 잘 살겠다는 놈이 이혼은 왜 한담? 터키 여자들은 보통 23~24세에 결혼을 하고 아이는 보통 2명 정도 낳는다.

동쪽 지방은 아직도 7~8명에서 11~12명까지 낳아요. 그래서 공장도 없고 할 일이 없으니까 애기나 낳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어요.”

 

해는 지고 강은 쓸쓸해진다.

저녁 식사로 나온 송어구이.

그냥 우스갯소리는 아닌 것 같다. 지역 간 경제력의 차이가 심각하다는 말이겠지. 그런 현실을 반영해서인지 쿠르드족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디야르바르크 등에서는 일거리를 찾으러 이스탄불로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터키도 요즘엔 결혼 안 하는 여자 많아요. 터키 남자들 바람 많이 피거든요. 저도 5년 사귄 제 남자 친구가 바람 피워서 헤어졌어요.”

흐흐, 얘는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려, 자랑이다. 한국 남자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도 덤으로 얘기한다.

한국 남자들 터키에 여행 왔다가 다른 여자 만나면 저는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터키 남자들은 절대 안 밝혀요. 그런 때 여자 친구에게서 전화 오면 배터리 떨어졌다고 하고 끊어요.”

훌리아야, 그건 오해야. 한국 남자도 배터리 떨어지는 사람 많단다. 어디 가나 남자들은 비슷하지 뭐. 옆에서 이젯이 귀를 쫑긋 세우고 얘기를 듣고 있길래 둘이 사귀어 보는 건 어떠냐고 슬그머니 중매쟁이를 자청했더니 먼저 훌리아가 팔팔 뛴다.

아무리 없어도 죽을 때까지 이젯하고는 안 살아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는데 혹시? 이젯이라고 그런 말을 듣고 가만있을 턱이 있나.

저도 마찬가지예요. 훌리아! 너 왜 그래. 내가 너 쳐다본 적 한 번도 없잖아.”

이거 괜히 중매 한번 했다가 애들 싸움 시키겠네. 하지만 은근히 재밌는데? 내가 볼 땐 둘이 딱 어울리는데 뭘 그렇게 정색하니? 더구나 너희는 같은 대학 같은 과 동문 아니냐. 그만한 인연이 어디 있어.

 

 

석양 그리고 강가의 여인.

말라티아 시내에 뜬 달.

터키에 한국어과가 있는 대학은 2곳이다. 지난해 만났던 규벤이라는 친구가 다녔던 수도 앙카라의 앙카라대학이 있고, 이젯과 훌리아가 다닌 카파도키아의 에르지에스(Erciyes)대학이 있다. 에르지에스 대학은 2003년에 한국어과를 개설했는데 훌리아가 이젯보다 1년 먼저 입학했다. 나이하고는 거꾸로 선후배가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밥 먹듯이 티격대격 거린다. 물론 주도권은 훌리아가 쥐고 있지만. 훌리아가 대학에 들어가던 사연이 재미있다.

입학해보니까 25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첫 학기가 끝나자마자 5명 튀었어요.”

? 그 좋은 과에 들어가서 중도에 포기해?”

한국말이 힘드니까요. 그리고 취직에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이 나라 젊은이들도 취직에 목숨을 걸은 건 우리와 마찬가지다.

그러는 훌리아는 왜 취직 안 되는 과를 선택했어?”

그게.”

거기에 기구한 사연이 있다. 처음 대입시험을 치렀는데 점수가 영 아니더란다. 맞아. 네가 공부 잘하게 생긴 스타일은 아니야. 그래도 한번만 더 하면 뭔가 될 것 같아서 재수를 했는데 역시 점수는 제자리였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가보자 싶어서 대학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선택 자체가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터키에서는 대학을 25개까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 이곳저곳 무작정 넣을 수밖에. 훌리아가 가고 싶은 과는 영어과였다. 하지만 커트라인이 높았다. 가고 싶은 대학에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순서대로 선택한 뒤 10번째까지는 이 도시 저 도시에 분산해서 넣었다.

 

 

척박한 산에도 조금의 틈이 있으면 살구나무를 심는다.

 

레벤트 협곡.

그러다가 15번째 선택한 게 한국어, 16번째가 일본어. 어차피 거기까지 갈 일은 없겠지 싶어 별 생각 없이 20번째까지 아시아 국가들을 선택했다. 20~24번째는 비워두느니 아랍국가를 지원했다. 같은 이슬람 국가인데도 아랍은 가기 싫어하는 모양이다.

전 최소한 이탈리아, 프랑스어과는 될 줄 알았거든요. 한 달 뒤에 인터넷에 들어 가보니 한국어문학과 합격을 축하합니다이 문구 딱 하나만 있는 거예요. 한국어과를 썼는지조차 몰랐거든요.”

한심하고 당혹스럽더란다. 집에 갔더니 아빠와 엄마가 행복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더라지. ‘진실을 말했더니 , 정신 차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하는 반응부터 나오더란다. 한국어가 뭐 어때서. 기분 안 좋은데? 그녀의 아빠는 딸이 영어선생 되는 게 소망이었단다. 그러니 한국어과는 정신 차려야 할 대상밖에 안 된 것이겠지. 그래도 어쩌나. 3수는 정말 하기 싫고. 입학을 반대하는 아빠와 싸우고 가출한 뒤 할머니 집에서 2주일을 살고 나서야 OK가 떨어졌단다. 이제 이젯에게 기대를 걸어보자. 설마 이 친구는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과를 택했겠지? 하지만 혹시는 역시로 끝난다. 재수 끝에 24번째로 선택한 과가 한국어과였단다. 어휴! 난 왜 이렇게 공부 못하는 애들하고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이 친구들의 한국 사랑은 각별하다. 한국에서 터키의 한국어과에 지원해주는 제도 같은 게 있으면 훨씬 활성화 될 것이라고 애정 어린 충고도 한다. 입학특전 같은 것을 좀 더 확대해도 좋고. 터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레벤트 협곡의 바위들. 자세히 보면 수많은 굴이 뚫려있다.

 

어느 노인이 내게 줬던 kenger이라는 풀. 감기, 냉방병에 직효란다.

대학 졸업생들은 한국기업에 취업하는 걸 선호한단다. 지금은 현대, 포스코, 금호, 효성 등이 진출해있다. 또 터키 사람들은 한국 전자제품을 무척 좋아한다. 믿을 수 있어서 좋다나. 기업 하는 분들이여, 제발 실망시키지 말기를. 훌리아의 이야기는 거미줄 뽑아내듯 술술 풀어진다. 참 명랑 유쾌한 처녀다. 터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순위는 1위가 군인, 2위가 경찰, 3위가 공무원이란다. 여자들은 교사를 가장 선호하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오후에는 살림이나 육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야기를 하라면 밤새라도 하겠지만 시간도 늦었고 해서 아쉽게 헤어진다.

 

 

산상화원.

184m 절벽에 세우고 있는 공중 테라스.

아크챠다흐는 레벤트 협곡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나는 동네다. 버스는 평원 지대를 씽씽 달린다. 역시 살구밭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돌산이라도 흙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개간해서 살구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지대가 높고 물이 귀하기 때문에 성장이 무척 늦다고 한다. 헐떡거리며 산정을 향해 오르던 차는 어느 순간 너른 언덕바지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려 보니 고원지대 특유의 작은 꽃들이 바람을 피해 엎드려 있다. 모든 생명은 자연이 야박하게 굴수록 더욱 힘을 발휘하는 법. 그렇게 낮은 자세로도 온갖 색깔의 꽃들을 피워냈다. 바람이 엄청나게 분다. 잘못하다가는 날아갈 것 같아 허리를 잔뜩 구부린다. 조금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레벤트 협곡을 조망할 수 있는 공터가 나타난다. ~!! 다들 입을 다물 줄 모른다. 1400m의 고원지대에서 바라보는 골짜기는 갖가지 예술작품의 경연장처럼 화려하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의 광활한 땅에 카파도키아의 기기묘묘한 바위를 심어놓은 듯한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 협곡은 6500만 년 전까지 바다였다고 한다. 물이 빠지고 난 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서 요즘도 물고기 화석이 발견된다. 28km 계곡에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128곳이나 된다. 헌데 신기한 일이다. 자세히 보면 마치 쌀밥에 박힌 강낭콩처럼 곳곳에 집들이 박혀 있다. 어떻게 이런 척박한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지? 하지만 이 협곡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을 품어왔다. 무려 9500년 전에 동굴살이가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여러 문명이 이 땅을 거쳐 갔다. 히타이트, 로마,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자연과 시간이 만든 기기묘묘한 바위들.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무덤.

이곳에서는 주로 밀과 살구농사 등을 짓는데 옛날에는 벼농사도 지었다. 석회질 땅이라 척박한 것은 물론 물도 없었지만 눈 녹은 물을 받아 벼를 심었다. 인간의 끝없는 의지에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 협곡은 무척 중요한 도로도 품고 있다. 일종의 교역통상로인데 말라티아에서 페르시아로 넘어가는 상품은 이 길을 거쳐서 갔다. 물건이 있으면 군침을 흘리는 사람도 있는 법. 전에는 동굴에 거주하는 산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는 산중왕이다. 가진 것 다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만화 같은 상황을 상상하며 혼자 웃는다. 지금도 동굴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세 가족이나. 이거 그냥 갈 수 없겠는데? 동행한 말라티아주 관계자에게 인터뷰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한다. 만약 성사가 안 되면 협곡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말라티아주에서는 이곳을 자연스포츠의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무덤으로 가는 코스’(48km)강 따라 가는 코스’(28km) 등 트래킹 코스들을 만들었고 곧 25m짜리 번지점프대도 설치한다. 지금은 184m의 절벽에 공중테라스를 설치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폐교를 펜션으로 꾸며놓았다. 좋은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으니 최대한 활용해야겠지. 하지만 너무 많은 삽질은 하지 마시길.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에만 인간의 욕심을 틈입시키도록. 이만큼 소망했으면 알아서 하겠지. 하긴 내 나라 강산도 못 지키는 주제에 오지랖 넓은 짓이다.

 

바위 무덤의 내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바위 꼭대기에 있는 숱한 동굴무덤들.

차를 타는데 저만치서 노인 한 분이 손짓하며 부른다. 차는 떠나려고 하고. 그래도 어른이 부르시는데. 뛰어가 봤더니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풀을 하나 뽑아든다. 엉겅퀴처럼 생겼는데 가시는 훨씬 더 날카로워 보인다. Kenger이라는 이름의 풀이란다. 꺾어서 하루정도 놔두면 수액이 나오는데 껌의 원료로 쓴다고 한다. 약재로도 쓰는데, 레몬과 설탕을 넣고 끓여서 먹으면 냉방병이나 감기에 즉효라나. 혹시 소화에는 도움이 안 되려나? 유프라테스강에서 국위선양을 한다면서 저녁을 억지로 먹은 뒤 속이 영 좋지 않다. 단단히 얹힌 모양이다. 아침을 건너뛰었는데도 마치 뱃속에 돌덩이 하나를 얹어놓은 듯 단단하고 무겁다. 내겐 전혀 소용없는 풀이지만 노인의 성의가 고마워서 얼른 받아들고 차에 오른다. 고지대에서 자라서일까. 손을 콕콕 찌르는 가시.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이리 강한 가시를 지녔을까. 협곡 아래로 내려가 탐험을 계속한다. 28km의 계곡은 차를 타고서도 한참 걸린다. 가는 도중에 곳곳에 숨어있던 깜짝 놀랄만한 풍경들을 만난다. 여행자들을 위한 샘도 있다. 비바람과 시간이 빚은 기기묘묘한 바위들. 카파도키아에 있는 요정의 굴뚝은 높이가 5~10m에 불과하지만 이곳엔 40m~210m의 거대한 바위들도 있단다. 산위에는 로마시대 석관무덤도 있다. 큰 바위를 파서 시신을 안치했던 곳들이다. 로마시대 귀족들의 공동묘지였던 듯 주변엔 이런 석관무덤이 110개나 있다. 기독교가 생기기 전인 파가니즘(paganism, 무종교주의) 시대, BC3000~4000년경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무덤 앞에 서니 수천 년의 시간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posted by sagang
prev 1 2 3 4 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