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 문을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오스만 전통가옥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하드리아누스 문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은 말 그대로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년)가 130년에 안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이 세운 문이다. 황제의 위세가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살다 간 것도 아니고 다녀가기만 했는데도 이만한 기념물을 짓다니. 하지만 어떤 삶에도 빛과 그림자는 공존하는 법. 황제라는 자리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3세기 중반을 로마의 군인황제시대라고 하는데,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등극하고 사라졌다. 평균 2년도 못하고 죽거나 축출된 것이다. 그깟 거 안 하고 말지,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까. 죽은 사람들 걱정 그만하고 산 사람은 다시 하드리아누스 문으로 돌아가 보자. 대리석을 재료로 해서 2층으로 건축됐다는 이 문은 이오니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3개의 아치가 인상적이다. 아치 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가족의 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어느 마당에서 개집이나 지키는 석상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터키는 고대유물도 냇가의 돌처럼 굴러다닌다. 문 양 옆으로는 사각형의 성탑이 있는데 왼쪽 건물은 로마시대에 지어졌고 오른쪽은 13세기 셀주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가 세운 것이다. 알라딘 케이쿠바드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지 않은가? 바로 이블리 미나레트를 세운 그 술탄이다. 이 사람도 삽질하는 게 취미였던 모양이다.
하드리아누스 문의 양쪽 성탑. 호텔로 가던 길에 만난 개구리공원.
안탈리에서 묵었던 라마다호텔. 호텔 내부. 터키 체재 중에 만난 호텔 중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높다랗게 솟은 모자를 쓴 중년 사내가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이 정도 모자 높이면 주방장 쯤 되겠군. 한국에서 왔다니까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피어난다. 그러면서 몇 년 전에 부산에 가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밝힌다. 한국에 다녀왔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다. 몇 년 있었지만 한국말은 배우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면서 음식 고르는 것을 도와준다. 고향사람을 만난 듯 반갑다. 음식도 맛이 있다. 결국 몇 번 가져다 먹는 바람에 과식을 하고 말았다. 에구, 여행 와서 배만 더 나오겠다. 9월29일 아침. 여행도 이제 후반을 향해 달리고 있다. 편안한 잠자리였고 비교적 오래 잤는데도 피곤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남들보다 많이 움직이고 많이 기록하고 많이 찍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육체에게는 고통스런 짐을 지울 수밖에 없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젖었지만 빨래는 뽀송뽀송 잘 말랐다. 그나마 다행이다. 지쳤다고 누워 있을 수야 없지. 이 호텔에서 하루 더 묵을 계획이라니까 간단하게 배낭을 꾸려 또 길을 나선다. 오늘은 안탈리아 외곽에 있는 명승지들을 돌아보는 날이다. 지중해 쪽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안탈리아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땅이다. 리키아 산맥과 타우로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주고 있는데다 동쪽으로는 비옥한 평원이, 남쪽으로는 지중해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안탈리아 거리. 안탈리아 시가지.
쿠르순루 폭포 입구. 결국 저곳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폭포는 못 들어가고 강아지와 놀고 있는 다큐 출연자.
해가 뜨면서 대지는 금세 달아오른다. 내일모레면 10월인데 연일 30도를 웃도는 날씨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어제는 32도였고 오늘도 그 정도는 될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지금 서울은 비가 온다는데, 가을이 오고 있다는데…. 문득 그 회색빛 도시가 그리워진다. 오늘 맨 먼저 찾아갈 곳은 쿠르순루 폭포. 폭포라니까 우선 느낌부터 시원해서 좋다. 안탈리아 내륙에는 하천이 많기 때문에 곳곳에서 폭포를 볼 수 있다. 그중 쿠르순루 폭포는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데다 수량도 많아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모처럼 시원한 곳에서 땀 좀 식혀볼까. 폭포로 가는 길은 시내를 거쳐야한다. 이곳도 아침에는 도로 곳곳이 막힌다. 시내를 벗어나서 한적한 길을 조금 달리자 금세 폭포 입구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보통 유적지나 관광지는 믿음 씨의 ‘쯩(證)’ 하나면 무사통과다. 다큐촬영팀은 터키관광청이 자국의 관광산업을 홍보하기 위해 초청한 사람들이고, 믿음 씨는 관광청에 고용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르순루 폭포는 개인이 조성한 곳이기 때문에 공짜 입장은 어림도 없다는 반응이다. 촬영을 하려면 900리라를 내놓으라는데 그야말로 턱없는 가격이다. 믿음 씨가 난감하게 됐다. 체면도 말이 아니다. 일행은 하릴 없이 공터에 앉아 강아지하고 놀고 있는데 믿음 씨는 이리저리 분주하다. 아무리 개인 것이라고 해도 외국에 홍보되면 좋을 텐데 왜 그러지?
해변에는 이런 으리으리한 호텔도 있다. 이곳도 호텔.
거리의 작은 공원. 저곳도 러시아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는 호텔이다.
그들의 수법 중 가장 흔한 게 물을 마시고 빈 병에 수돗물을 채워 넣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술병에 물을 채워 넣기도 한다. 단체 관광객이 오면 객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손님을 내보내기에는 시간이 벅차다. 그러니 물병 뚜껑까지 돌려볼 틈은 없을 수밖에. 또 어떤 여자들은 가방에 미니바의 내용물을 몽땅 쓸어 넣고 간다고 한다. 하긴 미니바를 통째로 메고 가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떠난 다음 호텔 측에서 연락을 하지만 쓸어갔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니 호텔에서도 대비책을 세울 수밖에. 최선의 수단이 바로 러시아인들이 예약을 한 날에는 미니바에 있는 걸 몽땅 치우는 것이란다. 관광을 다니고 호텔을 이용할 정도면 가난 때문에 가져가는 건 아닐 텐데, 견물생심이겠지. 무한한 인간의 욕심에 대해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물론 러시아 관광객이라고 모두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버스는 다시 시내를 달린다. 출근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도로는 아까보다 한산하다. 어라? 저게 뭐야? 당나귀 달구지를 몰고 천천히 지나가는 ‘고색창연’한 여자가 시선을 잡는다. 높은 빌딩, 달리는 차들 속에 흡수되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풍경이다. 믿음 씨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집시란다. 아, 집시들이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터무니없는 동지의식(?)에 눈길은 자꾸 지나온 길을 더듬는다. 사실 직접 집시를 보는 건 처음이다. 그들이라고 머리에 뿔이 돋았으랴만 늘 궁금했던 터였다.
당나귀 달구지를 몰고가는 집시여인. 버스와 멀어서 선명하게 찍을 수 없었다. 라라비치의 모래조각들. 어떤 영화인지는 각자 알아맞혀 보시길.
역시 모래조각 퍼레이드.
지금 일행이 가는 곳은 라라비치. 안탈리아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모래해변이다. 그중에서도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땐 입장료를 받는다. 대체 이곳에 무엇이 숨어 있길래 사방에 담을 두르고 돈까지 받지? 혹시 말로만 듣던 그 누드비치? 후르륵! 일단 가출하는 침부터 단속하고. 믿음 씨를 따라 문을 들어서니 아! 바로 sand land, 모래천국이다. 물론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남녀는 없다. 한 눈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숱한 모래조각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재연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눈에 들어오더니 그 옆에는 킹콩과 타잔이 금방 밀림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한 모습으로 서 있다. 다른 쪽에는 스타워즈 군단과 토이스토리의 주인공들이 추억을 자극하고, 터미네이터의 주인공은 모래가 되어서도 “I will be back”을 외치고 있다. 벽에는 커다란 글씨로 ‘lara SANDland HOLLYWOOD’라고 새겨놓았다. 그런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비가 오면 어쩌지? 뭘 어쩌겠어, 완전히 날 새는 거지. 워낙 넓어서 지붕을 씌우기도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잖아도 한쪽에서 수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반바지를 입은 한 여성이 물을 뿌려가며 무너진 모래를 다듬고 있다. 손길이 무척 섬세하다. 최근에 비가 왔기 때문에 수리하는 것이란다. 조금 더 나가니 이번엔 전쟁시리즈가 기다리고 있다. 비교적 최근 영화인 ‘300’을 지나고 ‘라이언일병’과 반갑게 조우한다.
비로 망가진 모래조각을 수리하는 여인. 화려한 호텔 문. 러시아인들은 저런 호텔을 통째로 전세 내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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