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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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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성소피아 성당 앞의 노점상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예레바탄

예레바탄 입구

지하저수지 예레바탄에서

성소피아 성당에서 나오니 길에는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리어카에서 파는 군것질거리가 예사롭지 않다. 군밤과 구운 옥수수. 이건 코리아 콘셉트인데? 이 나라 사람들도 저런 걸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건너 예레바탄 지하저수지로 향한다. 소위 지하궁전이라고 일컫는, 이스탄불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다. Yerebatan에서 Yere땅에라는 뜻이고 Batan빠지다라는 뜻이란다. 결국 땅 속에 빠진 궁전이란 말인데 지하저수지 치고는 제법 호사스런 이름을 얻은 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가 물을 저장하기 위해 532년에 건설했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어 놓고 ! 솔로몬이여~” 어쩌고 하며 감격을 금치 못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지하 저수지는 궁전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길이가 140m, 70m, 높이 9m8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적에게 포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물 비축용으로 지었다는데, 당시 도시 규모와 인구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은 도시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이 저수지에는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병사들이 열병하듯 서 있는데, 기둥마다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재미있는 건 기둥의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예레바탄의 기둥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천형처럼 거꾸로 선 메두사의 머리

맨 오른쪽 '수공'이란 글씨가 보이는지.

성소피아 성당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 동네는 무엇을 지을 때마다 석재를 고대 신전에서 뽑아다 쓴 모양이다. 그러니 출신지에 따라 생김새가 모두 다를 수밖에. 이것도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 해야 하나? 바깥세상은 땀을 흘릴 만큼 더운데 안으로 들어서니 으스스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시원하다. 조명을 받은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지하세계에서 일평생을 마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조금만 나가면 태양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이 곳의 진짜 명물은 메두사의 머리다. 맨 안쪽으로 가면 돌로 조각한 2개의 메두사 머리를 만날 수 있는데 하나는 뺨을 바닥에 댄 채로, 또 하나는 아예 머리를 땅 쪽에 박은 채 서 있다. 저들은 왜 저런 모습으로 저 곳에 있는 걸까. 1984년 보수공사를 할 때 발견됐다는데, 지금도 왜 그곳에 그 모습으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듯, 마법에 걸린 메두사의 형상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하는 저주가 내려진다는 이야기만 그럴 듯하게 뒷받침해줄 뿐이다. 되짚어 나오다보니 입구에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재미있는 걸 발견한다. CD와 엽서 등을 판매하고 있는데 판매대에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대여섯 개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뜻밖에 한글도 있다. ‘수공손으로 직접 그렸다는 것이겠지. 우와! 심봤다. 그렇다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중 한국인들이 5~6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이거 좋은 일인가?

점심을 먹은 카페거리. 오른쪽 조금 흔들린 여인들이 바로 헤매던 동포

이스탄불의 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지하 저수지에서 나오니 더 이상 걷기 어려울 만큼 허기가 진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나온 게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가 이스탄불에 가면 꼭 들러보라고 추천해 준 음식점이 생각난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만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면.” 그렇다면 이 근처인데. 문제는 한참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음식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골목에는 카페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데 그 집이 그 집 같다. 에라, 모르겠다. 입구 쪽에 있는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찾아갈 힘이 없을 만큼 배가 고프다. 케밥과 맥주를 한 잔을 주문해 허겁지겁 점심을 때운다. 케밥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입에 더 반갑다. 서울 가면 이놈의 맥주 마르고 닳도록 마셔야지. 맥주회사들 잘 들어. 나 귀국하기 전에 여유분 좀 만들어놔야 할 거야. 입에 케밥을 구겨넣고 맥주를 들이키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왔다 갔다 한다.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어느 집이 마땅한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해서 느닷없이 이 집 음식 먹을 만 해요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온다. 친구들끼리 터키 중부를 돌고 와서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을 탐색하는 중이란다. “혹시 두 분은 안 싸웠어요?” 함께 온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유령마을 카야쾨이를 찾아왔던 아가씨가 생각나서 물었더니 싸울 일이 있어야지요.”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래,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좋은 경험 하자고 떠난 여행, 힘들고 피곤할수록 양보하고 배려하면 될 것을.

톱카프 궁전의 문들

그녀들과 헤어져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엔 톱카프 궁전. 내가 가고 싶은 모든 곳이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다. 트램이나 택시를 타고 다녀야 한다면 또 얼마나 번거로울까. 트램이 천천히 오가는 길을 따라 톱카프 궁전으로 간다. 이곳은 한 때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영토로 거느리며 대제국을 형성했던 오스만의 황제들이 살던 궁전이다. 1453년 우여곡절(배를 끌고 언덕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흐메트 2. 남이 지어놓은 궁전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새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세 대륙을 지배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 골든혼으로 둘러싸여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이 자리였다. 1472년 착공해서 1478년에 준공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저 궁전이라고 불렀는데 후대로 오면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이름이 톱카프로 굳어졌다. 70의 넓은 부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투르크 족 전통의 흔적이 배어 있다. 마치 유목민들이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게르를 치는 것처럼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건물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지었다. 많을 땐 이곳에 5000명 넘게 거주했다고 한다.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인 황제의 문을 지나서 만나는 곳이 제1정원. 이곳은 개방 공간이다.

톱카프 궁전 내부

톱카프 궁전을 거닐다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부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원에는 잘 손질된 녹색 잔디가 깔려 있다. 잔디 위에 큰 그늘을 내리고 있는 플라타너스에서 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 이젠 이곳에도 어쩔 수 없이 가을이 오려나보다. 그래, 명색이 10월인데. 그러보니 나뭇잎들도 조금씩 누런 색깔을 띠고 있다. 내 나라에는 지금쯤 가을이 깊겠다. 길지도 않은 여행에 벌써 향수병이 들었나? 잡념을 털어버리려 얼른 두 번째 문인 평안의 문을 지난다. 이곳에서 제2 정원을 만나는데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궁전의 시작이다. 이 정원에서는 출정식, 공주의 결혼식 등 각종 국가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또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한 디반 건물과 왕실 주방건물도 있었다. 왼쪽으로는 하렘 입구가 있다. 술탄의 어머니, 부인 등 여자들만 생활하는 하렘은 아랍어 하림이 어원으로 금지된 곳이라는 뜻이다. , 황제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 하렘에는 약 250개의 방이 있다. 한번 하렘에 들어간 여자는 죽어서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황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 희망치고는 참 비참한 희망이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슐레이만 시절에는 하렘에 머무는 여인이 1000여 명에 이르렀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가는 비밀 통로도 있었다고 한다.

궁전내부의 이곳 저곳. 맨 아래 사진 수도꼭지는 황제가 밀담을 할 때 보안을 위해 틀어놓았다지.

다시 걸음을 옮겨 지복의 문을 지나니 제3 정원이 나온다. 이곳에는 황제 알현실이 있다. 오스만의 황제들은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고 외교사절도 이 방에서 만났다고 한다. 오른쪽 건물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호박만한 금덩이라도 전시돼 있나? 얼른 쫓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가 바로 보물 전시실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이후 약탈을 당할 일이 없었던 터키는 각종 유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세계 최대의 에머랄드로 장식된 단검, 황금 의자, 보석이 촘촘히 박힌 주전자, 86캐럴짜리 다이아몬드 등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온갖 보물들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노래를 부르고 있다. 모조품이 아니고 전부 진품이라니 그 가치가 얼마며 이만한 보물을 모을 수 있었던 황제의 권세는 대체 얼마만큼 컸던 것인지. 문제는 워낙 보석이 많으니 어지간한 건 그저 돌처럼 보인다. 카메라를 든 내가 들어서면서부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발광을 시작하더니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셔터를 누르려는데, 병아리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내 팔을 잡는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셔터 소리에 보석이 경기라도 일으킨다더냐? 워낙 보석 같은 것에 흥미가 없는데다가 박절한 경비원의 눈초리가 싫어 건성으로 돌고 그냥 나온다. 3 정원을 벗어나니 제4 정원이 이어진다. 이곳은 황제와 가족들의 휴식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는데 왜 이곳에 궁전을 지었을지 바로 알아차릴 만큼 전망이 좋다. 마르마라해, 보스포루스 해협이 코앞에 있다.

저렇게 바다가 코앞에 있다.

세 갈래로 나눠진 바다

난 지금 유럽에서 아시아를 건너다보고 있다. 대륙과 대륙이 이리 지척이구나. 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질곡이 있었을지. 궁전의 해안 쪽 끝에는 규율을 어긴 하렘의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참 끔찍한 일이다. 자유와 희망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여인들. 아름다운 바다가 지척인데도 죽기 위해서나 갈 수 있었다니. 이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누가 발목에 납덩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2정원으로 다시 나와서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쉼을 한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쓸쓸해진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땐 얼른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한다. 톱카프 궁전에서 나와 그랜드바자르로 가고 싶었는데 마침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있나. 이스탄불까지 와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다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유럽의 물산이 아시아로 전해지고 아시아에서 온 물품들이 유럽으로 넘어간 곳이 바로 그랜드바자르다. 30의 거대한 면적에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입점한 점포가 5000개를 헤아린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그랜드바자르를 들른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거기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길 잃고 못나올 수도 있어요겁을 주길래 코웃음을 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본 풍경들. 저 갈라타 다리 1층에 한 많은 고등어 케밥집이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에미뇌뉘 선착장에 이르자 해협을 오가는 유람선과 광장을 오가는 인파, 그리고 해변에서 낚시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늦여름(?)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철없는 강아지처럼 길 위를 뒹굴뒹굴 구른다. ! 옷 버린다. 그 모습이 지친 몸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조금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이곳은 두 개의 해협과 하나의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다. 조금 전 다녀온 톱카프 궁전이 있는 쪽, 즉 오른 쪽은 마르마라해이고 앞으로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이 해협은 흑해로 연결된다. 그리고 저만치 갈라타 다리가 보이는 왼쪽으로는 골든혼이라는 바다의 지류가 뻗어있다. 굳이 말로 된 지도를 그리는 이유는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해를 조금 넓히기 위해서다. 이스탄불은 이렇게 바다에 의해 크게 세 쪽으로 나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 속한 구시가지, 그리고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다음이 아시아다. 지금까지 봐온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 지하궁전, 톱카프 궁전 등 대부분의 이름 있는 유적은 구시가지에 있고, 구시가지에서 골든혼 위의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신시가지가 시작된다. 신시가지에서 차를 타고 보스포러스 다리를 건너야 아시아에 닿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시가지에서 직접 배를 타고 아시아로 건너가는 방법도 있다. 무슨 도시가 이렇게 복잡한지 원. 갈라타 다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간다. 2층으로 되어 있는 다리는 아래 위 모두 인파로 북적거린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들. 저 아이 큰 낚시꾼 될게다.

갈라타 탑에서 본 이스탄불

다리 1층에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곳에서 그 유명한 고등어 케밥을 판다는데. 잠시 서서 입맛을 한 번 다셔보지만 결국 그냥 지나친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들를 만한 시간이 없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고등어케밥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석양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다음에 올 땐 오늘의 아픔을 반드시 보상 받고 말리라. 다리 한 가운데로는 트램 철로가 있고, 양쪽 난간에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남녀노소, 아니 여자는 없다. 암튼, 온갖 사람이 없이 쏟아져 나와 다리 아래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정말 물고기가 잡히는 것일까? 다가가 보니 숭어처럼 생긴 물고기들이 그릇마다 잔뜩 들어 있다. 어떤 꼬마 아이는 피라미를 닮은 작은 물고기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고 있다. 너 크면 큰 낚시꾼 되겠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서 찾아갈 곳은 갈라타 탑.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다.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걸어올라가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 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굳이 이 갈라타 탑을 찾은 것은 탑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528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항구를 지키기 위한 감시탑으로 세웠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됐다고 한다. 그걸 갈라타 지구를 차지한 제노바 자치구가 1348년에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으로 재건축했다. 한 때는 포로 수용수나 기상관측소로도 쓰였다니, 팔자가 드난살이로 평생을 마친 여인만큼이나 험했던 모양이다. 

갈라타 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풍경

탑 아래에는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들 역시 이스탄불 전경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겠지. 꽁무니에 서서 한 참 지난 다음에야 입구의 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11층 높이의 이 탑은 10층까지만 엘리베이터가 가고 맨 위층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10층은 전망대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이 들어서 있다. 발코니 난간에 서면 누구나 아! 하는 감탄사를 아끼지 못한다. 말 그대로 이스탄불 시내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기 조금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 저곳은 골든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보스포러스 해협 저기 어디에서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 골든혼으로 들어갔다지. 하지만 지금은 산도 언덕도 흔적조차 없다. 대신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성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등 조금 전에 다녀왔던 건물들도 저만치서 손을 흔든다. 우리의 남산타워처럼 최고의 전망대다. 문제는 난간이 너무 좁고 관람객은 너무 많다는 것. 줄을 서서 천천히 도는 게 아니라 먼저 온 사람 나중에 온 사람이 마구 섞여서 엉덩이를 비비고 새치기를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친 몸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얼른 다시 내려온다. 갈라타 탑을 빠져나와 광장의 벤치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이스탄불에서, 아니 터키에서 내 공식 일정은 끝났다. 이젠 공항으로 가야한다. 이율배반적인 감정, 허전함과 안도감이 전신을 엄습한다. 게 바로 시원섭섭하다는 건가? 그나저나 정말 여기서 끝일까?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석양을 받은 크즐쿨레가 붉게 빛난다.

조선소 쪽에서 바라본 크즐쿨레.

크즐쿨레의 꼭대기층. 가운데에 물 저장고가 있다.


크즐쿨레와 테르사네

오후 일정은 크즐쿨레와 테르사네에서 시작한다. 크즐쿨레는 높이 33m8각형 5층탑을 말한다. 단순히 기념물로 세운 탑은 아니고 직경이 29m나 되는 작은 성이다. 알란야 성이 산 위에 있는데 반해 크즐쿨레는 바다 곁에 세웠다. 두 곳은 서로 마주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셀주크 튀르크의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드 1세 때인 1226년에 지었다. 테르사네는 역시 셀주크 튀르크 지배시기인 1228년에 완공한 조선소다. 그 당시 지어진 조선소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두 곳은 위치도 가깝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크즐쿨레를 지은 목적이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조선소 테르사네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탑 내부에는 대포도 설치했었다고 한다. 시리아의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이 탑은 튼튼하기로도 유명하다. 두꺼운 곳은 벽 두께가 무려 12.5m나 된다. 어지간한 대포 정도로는 눈도 깜짝 안하게 생겼다. 단단하게 짓기 위해서 시멘트 반죽을 할 때 달걀을 섞었다는 말도 있다. 건축에는 문외한인지라 달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먹을 것 안 먹고 탑을 짓는데 썼다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겠다. 또 중간 기둥은 신전에서 뜯어다 썼다고 한다. 기둥이 탑보다 훨씬 오래된 셈이다. 1951년에 수리를 하면서 크즐쿨레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붉은 탑이란 뜻이다. 석양 무렵이면 탑 전체가 붉은 보석덩어리처럼 빛난다. 장관이다

.

크즐쿨레 내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각종 사진과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탑으로 올라가는데 계단이 얼마나 좁고 가파른지 금세 등에 땀이 밴다
. 이 건물은 현재 민속 박물관으로 쓰고 있지만 그렇게 특별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각종 사진과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셀주크 튀르크제국의 인장도 눈에 띄는데 독수리 머리가 둘, 즉 양두독수리다. 하나는 소아시아를 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두 곳을 점령하면 세상 모두를 점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비잔티움제국 역시 양두 독수리를 인장으로 삼았다. 2층에는 산꼭대기에 있는 알란야 성채와 통하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비상시에는 이 길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맨 위층 한 가운데는 물탱크가 있다. 비상시에 대비해서 빗물을 받아서 보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장기간 농성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탑의 맨 꼭대기에서 보는 풍경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알란야 성채에서 절경에 취했던 끝이라 감동은 좀 무디다. 이번엔 조선소인 테르사네로 간다. 크즐쿨레에서 내려와 서쪽 성벽 끝 쪽을 보면 다섯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게 바로 테르사네다. 폐쇄된 상태로 있던 이 조선소가 수리를 거쳐 일반인에게 공개된 건 올 528일부터였다고 한다. 믿음 씨도 처음 가본다고 기대에 찬 표정이다.

크즐쿨레에서 내려다 본 알란야 언덕의 주택가.

동굴처럼 보이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조선소 테르사네다.

테르사네의 도크와 도크 사이.


세계 最古의 조선소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세계 최고(最古)의 조선소를 볼 수 있으니 나 역시 운이 좋은 편이다. 생각해 보면 독특한 의미를 지닌 조선소인 건 분명하다. 셀주크든 오스만이든 튀르크라는 이름이 붙은 민족이야 말로 근본이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이들 아닌가. 호수 정도에 배를 띄워봤을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전선을 타고 전쟁을 한다는 걸 꿈이나 꿔봤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만든 조선소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튀르크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조선술과 해전을 배웠다고 한다. 그렇게 확보한 배나 해전술로 그리스를 지배했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기는 하지만. 그런 역사를 거치다 보니, 두 나라는 지금도 원수나 다름없다. 아무튼 오스만 튀르크가 해양까지 장악하는 기초가 된 조선소가 바로 이 테르사네다. 키프로스를 정복하러 갔을 때도 바로 이곳에서 만든 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소로 가는 길 옆에는 올리브 열매가 소담지게 달려 있다. 오렌지 나무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고 풍성하게 자란 아주까리도 자주 눈에 띈다. , 아주까리.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것인데. 조선소는 다섯 개의 도크가 있다. 맨 첫 번째 도크에는 목제 기중기가 전시돼 있다. 세월의 때가 덜 묻어 있어 아직은 도크와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한다. 다음 도크에는 건조 중인 목선이 전시돼 있다. 이것 역시 최근에 만든 것이다. 여기서 건조된 배는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만조가 되면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테르사네 도크에서 바라본 지중해.

배를 만들 때 쓰던 기중기.

배의 골조.

조선소에서 나오니 날이 저물어가고 있다
. 일행과 합류한 뒤 호텔로 돌아간다. 이제 알랸야에서, 아니 지중해에서의 공식일정은 끝났다. 나는 내일 새벽 이스탄불로 떠나야 한다. 저녁을 마치고 일찌감치 다큐팀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들은 저녁 촬영 일정이 있어서 나가야하고 나는 일찌감치 쉬어야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이 같으니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공항이나 인천공항에서 잠시 만나기는 하겠지만 제대로 인사를 나눌 틈은 없을 것 같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서로 다른 일을 했지만 편치 않은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동지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어지간하면 알란야의 밤 문화도 함께 둘러보고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알란야는 지중해의 휴양지 중에 밤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차피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을 어쩌랴. 그것보다는 새벽에 안탈리아까지 가는 게 더 걱정이다. 알란야는 공항이 없기 때문에 다시 안탈리아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야한다. 아침 650분 비행기니까 새벽에 출발해야하는데 그 시간에는 버스가 안 다닌다. 택시를 타자니 너무 비싸고, 믿음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호텔 측과 얘기한 끝에 싼값에 미니버스를 내어준단다. 하지만 그 싼값이 내겐 거액이다. 그래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짐을 정리하다보니 올 때보다 많이 줄었다. 새로 추가된 거라고는 카쉬의 거리에서 산 가죽신 하나.

알란야의 부두.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안탈리아 외곽.

이스탄불로 가는 길. 바다, 산맥, 그리고 도시들이 교대로 나타난다.

지중해와 작별하다

일찌감치 누워보지만 이 생각 저 생각이 거미줄처럼 얽혀 잠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집을 떠나온 지 몇 년은 된 기분이다. 그렇게 뒤척이다가 깜박 잠에 들었나 했는데 알람이 울린다. 새벽 3. 부지런히 샤워하고 옷 입고 호텔 문을 나서니 작은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 혼자 버스를 전세 내보기는 처음이다. 출발하려는데 믿음 씨가 눈을 비비며 로비로 내려온다. 운전사와 내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안탈리아 공항까지 잘 태워다주라고 부탁하러 나온 것이다. 고마운 친구. 서울에 오면 내가 쏘가리 매운탕 곱빼기로 쏠게.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자 버스는 온통 캄캄한 새벽길을 달려간다. 안탈리아 공항에 도착해 보니 제법 시간 여유가 있다. 안도감 때문인지 그제야 미뤄뒀던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까딱 잘못 졸았다가 비행기 놓칠라. 캐리어를 인천공항까지 보내고 일찌감치 수속을 밟는다. 650분 이스탄불행 비행기 이륙. 지중해여, 안녕.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아나톨리아 땅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떠도는 영혼들, 그리고 바다, 나무, 바람 한 자락에게까지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내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안탈리아에서 이스탄불까지는 한 시간 남짓. 올 때도 그랬지만, 비행기가 비교적 낮게 날아가기 때문에 산과 바다와 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드디어 이스탄불에 도착.

낮은 집들도 보이고.

잠시 뒤, 눈에 익은 지형이 들어온다. ? 벌써 이스탄불이네. 보스포루스 해협이 저만치 보인다. 754분 아타튀르크 공항 착륙. 하늘은 시리도록 맑다. 기온은 지중해보다 제법 낮아서 비교적 청량하다. 이제부터 혼자 이스탄불을 탐험해야 한다. 저녁 이맘때까지는 공항으로 돌아와야 하니 주어진 시간은 열두 시간. 한정된 시간의 외출을 허락 받은 무기수가 이런 심정일까? 낯설고 설레는 것 투성이다. 출발선에 선 스프린터처럼 온 몸의 근육에 긴장을 불어넣고 눈을 부릅뜬다. 지금부터는 버스를 태워줄 사람도 없고 길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다. 조금 무식하고(솔직히 말하면 엄청나게 무식하고 전혀 준비가 안 된)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배낭여행자일 뿐이다. 이거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아무튼 힘차게 출발!! 공항서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구시가지의 술탄아흐메트(Sultanahmet)까지는 전철(metro)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트램으로 갈아타야 한다. 전철을 타러 가는 길도 만만찮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 물어물어 역에 도착한다. 어라? 여기는 아직도 토큰을 쓰네. 눈치를 보자 하니 우리처럼 전자식이 아니라 플라스틱 코인 같은 것을 넣고 전철을 탄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걸 제톤(Jeton)이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이건 웬 돌발 상황? 서울에서 표를 끊어서 전철을 탈 때처럼, 넣은 코인이 나와야 나갈 때 쓸 텐데 감감 무소식이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에 역무원이 있다. 객지에서 오촌당숙이라도 만난 듯 반갑게 부른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 메트로를 타러 가는 길이다.

이스탄불에서 '어리버리'


어이~ 역무원 아저씨. 얘가 내 코인 삼키고 안 내놓는데? 헌데 이 친구 반응이 또 엉뚱하다. 가까이 와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질문은 못 들은 척하고 카메라를 얼마에 샀느냐고 자꾸 묻는다. , 인간아!! 묻는 것에 대답부터 해야지. 이젠 카메라 얼마냐 소리 아주 지겹다. 한참 뒤 설명을 듣고 보니 코인을 넣고 그냥 가면 되는 것이란다. 그럼 나갈 땐? 그냥 나가면 된단다. 하지만 이미 코인으로 인한 불행이 잉태됐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탄 전철,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구조 자체가 시쳇말로 대략 난감이다. 폭이 좁디좁아서 앞에 사람과 겸상 받듯 가까이 앉아야 한다. 잘하면 얼굴 맞닿겠다. 다행히 내 앞에는 예쁜 여자가 앉아있다. 물론 딱 거기까지만 다행이다. 그녀 옆에는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있다. 이들 역시 외국에서 온 여행객인 것 같다. 두 정거장을 간 뒤 내리더니 이번엔 아가씨가 탄다. 이번에야 말로. 어라? 이 아가씨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이게 웬 ㄸ…. 그런데 가만히 보니 눈의 초점이 내게서 약간 비껴나 있다. 그럼 그렇지. 내 옆에 그녀의 남자친구가 서 있다. ! 열차는 지상과 지하를 교대로 달린다. 내가 내려야하는 역은 가만, 가만, 굉장히 어려운 역인데? 맞다. 제이틴부르누(Zeytinburnu). 이 역에서 트램으로 갈아타고 구시가지까지 가야한다. 전철역과 트램이 붙어 있기 때문에 종점인 악사라이 역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것보다는 편리하단다.

메트로 정거장 풍경.

트램을 타고 가는 길.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다행히 하늘이 어여삐 여기고 순국영령이 보우하사 제이틴부르누 역을 안 놓치고 제대로 내렸다. 트램으로 갈아타기 위해 사람들을 졸래졸래 따라가는데, 또 한 번 문제가 터졌다. 모두가 거기서 다시 코인을 넣고 트램 쪽으로 넘어간다. ? 난 코인이 없는데? 아까 안받아왔단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코인을 갖고 있지? 그 역무원이 날 속인 거야?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없고 트램은 코앞에 서 있는데 게까지 갈 방법이 없다.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이번에도 착하게 산 덕분인지 역무원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 역무원 아저씨, 이차 저차 해서 코인을 못 받아왔는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면 좋겠수? 손짓에 발짓까지 섞어서 물어보니,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갈아타려면 제톤을 두 개 사야한단다. 전철과 트램의 코인이 각각 필요하다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당연한 얘기네. 알아들었으면 저쪽 가서 제톤을 다시 사오란다. , 무슨 국제 관광도시가 이래. 어디다 좀 써놓든가. 역무원에게 물어볼 때 카메라만 신경 쓰지 말고 그런 것도 알려주든가. 괜스레 등에 땀이 흐른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떠난 내 스스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책에 다 쓰여 있는 것을. 이스탄불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교통카드를 사는 것이다. 악빌(Akbil)이라고 부르는데 역 같은 곳에서 판다. 이거 하나면 버스, 지하철, 트램, 페리 등 뭐든지 만사 오케이라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한 개로 여러 명이 쓸 수도 있고 다 쓰면 충전할 수도 있다.

저 멀리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보인다.

저만치 블루모스크가


다 쓰고 난 악빌은 출국하기 전에 가까운 판매점에 반납하면 보증금도 돌려준다. 깨달은 진리 하나. ‘무식하면 용감하고, 용감하면 고생한다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트램으로 갈아탔다. 이제 구시가지의 술탄아흐메트역에서 내리는 것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좀 마음이 놓이니 별 쓸데없는 게 궁금해진다. 출근시간인데 왜 이렇게 트램이 한가하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떠오른 생각. 그래, 오늘 일요일이잖아. 왠지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많더라니. 요일이야 어떻든 나는 지금 로마 땅을 달리고 있다. 사는 사람들은 바뀌었지만 이곳은 1000년 넘게 로마의 수도였던 곳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대륙이 걸쳐 있는 도시이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터키 최대 도시다. 동양과 서양 문화, 고대와 현대, 기독교와 이슬람이곳에서는 무엇이든 만나고 융합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공화국의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갔지만 이스탄불은 여전히 이 나라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보노라니 가슴이 벅차게 뛰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에 유적들도 보인다. 내가 드디어 이스탄불 한 가운데에 발을 디뎠구나. 트램이 서고 드디어 술탄마흐메트 정류장에 나를 내려놓는다. 저만치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어서 오라고,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 손짓한다. 야호!! 나는 지금 이스탄불로 걸어들어간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페티예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유령도시' 카야쾨이

페티예로 가는 길

페티예로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창문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굽이굽이 산길로 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해변이 나타나고, 그 해변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늦여름의 햇살을 온 몸으로 즐기고 있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산들은 고향에 온 듯 정겹다. 해변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조금 넓은 도로로 접어든다. 곳곳에서 길을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짙푸른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느린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언젠가 직접 운전해서 이 길을 달려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그러는 사이 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고원지대가 이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내륙 고속도로를 탄 것 같다. 중간에 주유소 겸 휴게소에 들러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간다. 터키의 기름 값은 한국보다 더 비싸다. 휘발유 값을 적어놓은 입간판을 보니 리터당 3000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차는 무척 많다. 그 중에는 현대자동차도 많이 눈에 띈다. 지난해에는 판매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현대차에서 윈도우브러시 하나 공짜로 받은 적 없지만 괜스레 뿌듯하다. 터키인 가이드는 쓸데없이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볼멘소리다. 어딘들 안 그럴까.

보드롬에서 페티예로 가는 길에 곳곳에서 만난 비치. 9월말인데도 여름이다.

어느 순간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창밖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채색돼 있다. 잠시 뒤 멀리서 불빛들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금세 페티예 시내로 진입한다. 페티예는 전날 묵었던 보드롬보다 큰 도시로 인구도 5만 명이 넘는다. 물론 여름에는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10만 명이 넘게 북적거린다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슈퍼에 들러 술과 안주를 산다. 이왕 일행이 됐는데 정식 상견례 겸 술이라도 한잔씩 하자고 K가 바람을 잡았다. 나로서야 술 소리만으로도 저절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호텔에 도착하니 아홉시. 부지런을 떨어야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을 거 같다. 호텔 이름은 ‘Marina Vista’. 역시 자그마한 호텔이다. 어제 묵었던 곳과 달리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경관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페티예에서는 일정이 많아 이 호텔에서 3일 동안 묵을 예정이라고 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또 30분이 후딱 지나갔다.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은 지 오래다. 야외식당으로 가니 닭요리가 나온다. 뷔페식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찜닭 같기도 하고 백숙 같기도 하고…. 점심에도 닭고기를 먹었는데, 전생에 터키 쪽에 사는 닭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시장이 반찬’이라는 경구가 어디 틀려본 적 있던가.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닭 아니라 돌을 구워 와봐라. 내가 외면하나.

고속도로의 휴게소. 백화점처럼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터키의 주유소. 기름값이 우리나라보다 꽤 비싸다.

술병을 전멸시키다

식사를 하는데 인근 음식점에서 느닷없이 함성이 터진다. 저 정도 함성이면 축구중계를 하는 게 틀림없다. 이 나라 사람들의 축구사랑은 말 그대로 ‘광적’이다. 터키의 프로축구의 역사와 규모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깊고 크다. 1959년부터 리그가 시작됐고 팀은 1부 리그에 18팀, 2부에 20팀이 있다. 축구경기장은 늘 도가니처럼 뜨겁다. 열정적이고 급한 국민성이 그곳에서라고 달라지랴. 야유나 욕설이 난무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유명한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은 곳곳에서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음식점마다 응원열기로 들끓고, 경기가 끝나면 응원하는 팀의 깃발을 휘날리며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기도 한다. 우리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벌였던 그 ‘광란의 밤’을 상상하면 된다. 뒤에 소개하겠지만 우리의 사랑스런 터키인 가이드 이믿음 씨 역시 축구광이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콧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축구중계를 하는 시간에 일을 하자고 하면 표정이 헐크처럼 변한다. 식사를 마친 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되는지 확인해 본다. 호텔에서 준 ID와 비밀번호를 넣으니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르는 와이파이 표시. 우와! 고마운 것. 이것저것 체크하고 회사 일을 몇 가지 한다. 좋은 세상이다. 시작한 김에 카톡으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불러볼까 하다가 시간을 보니 거긴 새벽. 단잠을 깨울 수는 없으니 포기.

Marina Vista 호텔의 수영장.

페티예에서 3일동안 묵었던 Marina Vista 호텔

방으로 돌아오니, 술자리가 준비됐다는 전갈이 온다.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이냐. (따지고 보면 사흘밖에 안됐다) 술 욕심이라면 이태백도 울고 간다는 내가 아니던가. 특히 라크(LAKI)라는 술이 손을 자꾸 끌어당긴다. 라크는 포도주를 증류한 뒤 향료를 첨가해 만든 술이다. 잔에 따르면 무색투명한데, 거기에 물을 붓는 순간 우유처럼 부옇게 변한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사자의 젖이란 뜻의 아슬란스투라고 부른다. 터키 아니면 감히 어디서 사자의 젖을 먹어보랴. 중국술이 그렇듯이 독특한 향이 있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 그 자리의 젊은 친구들도 한번 맛을 보더니 대부분 찡그리며 내려놓는다. 향도 향이지만 젖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것과 달리 알코올 도수가 40도다. 내가 언제 맛보고 도수 봐가며 술을 마셨더냐. 술이라면 온갖 미련을 떠는 나, 결국 그 한 병을 혼자 몽땅 해치우고 말았다. 그러고도 보너스로 맥주 몇 캔 추가. 이 정도면 차라리 걸신이다. 한두 명 빠지기 시작해서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그날 사온 술병들을 대부분 자빠트렸다. 눈을 비비고 보니 새벽 2시. 어제 잠을 설쳤으면 정신 좀 차릴 만하건만 또 일을 저질렀다. K가 화합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닷가니 ‘개닭’은 안 울 것 같다. 몇 시간이라도 자봐야지.

카야쾨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기념품가게. 산 사람은 또 저렇게 살아가는 법.

카야쾨이 마을로 올라가는 길.

카야쾨이로 가다

새벽, 알람에 의지해서 힘들게 눈을 뜬다. 아니나 다를까 몸은 천근만근 속은 울렁울렁이다. 과음한데다 기껏해야 네 시간 밖에 못 잤으니…. 하늘은 청명하고 바다는 저리 아름다운데 내 몸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뒤뚱거린다. 아침식사는 뷔페식. 아무리 찾아봐도 해장국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술도 안마시나. 이것저것 챙겨들고 식탁으로 갔지만 쓰라린 뱃속은 그 무엇이라도 거부할 태세다. 돌도 씹어 먹는다는 내가….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여행을 한다는 자가 그리 술에 욕심을 내다니. 체력을 비축하고 시간을 잘 나눠 써야 하는 여행자에게 과음은 금물이다. 마음껏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탐할 바에야 여행자보다는 여유로운 관광객이 되면 된다. 애당초 여행이 목적이었다면 여행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관광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에 맞게 즐기면 될 터이다. 이런 땐 라면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지만, 그래도 여행자의 철칙을 배신할 수 없어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야외식당은 바다에 이어 테라스처럼 만들어놓아서 풍광이 그만이다. 지중해의 아침은 괜히 배신감을 느낄 만큼 아름답다. 곤두박질친 햇살이 자맥질을 하더니 반짝이는 은빛 비늘들을 잔뜩 건져 올린다. 그 사이로 날렵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지중해는 거대한 수족관이다.

돌집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꽤 높은 건물이었던 듯.

식사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카야쾨이(Kayaköi)로 향한다. 일명 ‘유령도시(ghost town)’로 불리는 이곳은,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오래 전 주민들이 떠난 뒤 폐허가 된 마을, 사람 대신 빈집을 지키는 돌덩이마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곳. 카야쾨이의 슬픈 사연을 말하려면, 거창하게도 세계1차 대전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잠시 다리쉼 하면서 역사 공부를 좀 해보자.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터키의 주인이었던 오스만제국에서는 한쪽에서 구경하다 떡이나 얻어먹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러시아로부터 ‘유럽의 병자’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쇠약해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의 선택은 엉뚱하게도 독일 쪽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판단 잘못으로 나라를 거덜 낸 게 어디 한 둘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독일의 패망과 함께 사돈 따라 장에 갔던 터키 역시 집도 절도 잃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생떼같은 젊은이들 수십만 명을 잃은 채…. 결국 패망국으로서 연합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게 바로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잃고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반도만 달랑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실질적 주권조차 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마을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

교회로 가는 길.

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

이 대목에서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면 용맹한 돌궐의 후예 튀르크족이 아니다. 세브르 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분노는 곧 범국민적인 독립운동으로 승화된다. 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바로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이다. 조금 복잡해지니까 이 ‘위대한 독재자’를 해부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하자. 저항이 만만치 않자 연합국들은 스위스 로잔에서 터키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세브르조약을 파기하고 터키의 요구를 반영한 로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1923년 7월4일 새 조약은 체결됐지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의 비극적 이야기도 이날 시작된다. 로잔조약을 체결할 때, 연합국은 터키의 오랜 숙적인 그리스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스탄불이 있는 유럽 쪽 영토를 포기하고 에게해 섬들을 차지할 것인가, 이스탄불을 갖는 대신 인근 섬들을 그리스에게 양보할 것인가’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무스타파 케말은 고심 끝에 섬들을 포기하고 이스탄불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터키 연안의 모든 섬들은 그리스 영토가 된다. 곧 이어 그리스 땅에 살던 터키인은 터키로, 터키 땅의 그리스인은 그리스 땅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령이 떨어진다. 터키에 살고 있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강제로 터키를 떠나야 했고, 그리스에 있던 40만 명의 터키인이 눈물을 머금고 보따리를 싸야 했다.

17세기에 세워진 그리스정교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교회의 내부.

손가락을 꼽는 정도의 셈법으로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각자 제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으니.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그들은 그리스국민, 터키국민이라는 이름의 ‘국민’이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자연인이었다. 누대로 살아왔으며 낳고 자란 땅에서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구말대로, 국가가 뭐 해준 게 있다고 태를 묻은 땅을 떠나라는 것인지. 그들은 울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낯선 땅으로 떠나야 했다. 노인도 아이도 예외 없이 그 행렬 속에 포함됐다. 그렇게 해서 폐허가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카야쾨이다. 고증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서는 BC 3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5천년이나 이어온 마을이다. 터키니 그리스니 하는 국가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마을이 사라지기 전, 1922년까지는 3000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잘 살았다고 한다. 2개의 교회와 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한 마을이었다. 가서 살아야 할 나라, 그리스 말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떠난 뒤 아주 오랫동안, 카야쾨이 출신의 그리스 노인들이 찾아와서 울면서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여우도 죽을 땐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 했던가. 죽기 전에 낳고 자란 땅을 보고 싶었겠지.

부천에서 온 아가씨. 혼자 여행하는 용기가 아름다워 오래 바라보았다.

용감한 그녀를 만나다

차가 카야쾨이로 들어서면서, 원(怨)이 응결된 곳 특유의 음산함이 온몸을 감싼다. 산비탈 가득 회색빛 빈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 같다. 그들은 애당초 왜 넓은 땅을 두고 저 비탈에 집을 지었을까. 유령마을 입구에 두어 곳의 기념품 가게가 있다.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액세서리와 머플러 등을 판다. 남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난 자리가 있어 이들은 먹고사는구나.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남들보다 한발 앞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의 석조주택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무는 썩어 없어졌지만 돌들은 비바람 속에서도 긴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얼마나 단단하게 지었는지 페티예대지진도 견뎠다고 한다. 헉헉거리며 걸음을 재촉해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다. 어? 동양인 여자다. 우리 일행은 아닌데, 누구지? 도시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동양인을 이 골짜기에서 만나다니. 아니, 동양인이 아니라 분명 한국인이다. 아, 핏줄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느낌으로 단번에 알아본다. 직감을 믿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이리 신기할 데가. 젊은 아가씨가 혼자 이 골짜기에 와 있다니. 한OO. 26세. 부천 거주. 그녀의 신상명세서다.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을 모두 해외여행에 쓰기로 했단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터키였다. 그래, 잘했네. 세상이 학교지, 그 용기가 대단하다.

시간은 집 안에도 저만한 나무들을 키워놓았다.

돌담을 뚫고 자란 무화과나무.

혼자 다니기 무섭지 않느냐고 물으니, 원래는 일행이 있었단다. 인터넷 여행 사이트에서 만나 같이 떠났는데 몇 곳을 거쳐 오면서 각자 다니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긴 낯선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려면 혼자 다니는 게 최고다. 버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외로움 정도는 감수해야 씁쓸달콤한 ‘나만의 시간’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는 것. 17세기에 지어진 그리스정교 교회 앞에서 서울에서 온 남자와 부천에서 온 여자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긴 얘기를 나눈다. 내 나라, 내가 사는 도시에서 만났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사람들. 인연은 장소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돌담 사이 오솔길로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뒷모습이 아름답다. 평생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여행을 하길. 또 홀로 되어 언덕을 오른다. 깃대가 우뚝 솟은 저 건물은 학교였을까? 아니면 촌장이 살던 집? 공회당? 혼자 걸으며 상상 속에 빠진다. 작은 집도 있고 제법 큰 집도 있다. 저쪽, 아슬아슬한 축대 위에 세워진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저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빈 집은 슬픔이다. 슬픔만 차 있는 게 싫었던 걸까. 시간은 집 안 곳곳에 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심어 키워냈다. 방이었던 곳에서도 부엌이었던 곳에서도 홀로 열려 익어가는 무화과들, 강제로 떠나야했던 그리스인들의 눈물인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도마뱀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이들이 마을의 주인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많이 눈에 띈 식물. 에델바이스인 줄 알았다.

난 유령을 만나고 온 걸까?

내친 김에 마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보기로 한다. 곳곳에서 낯선 식물들을 만난다. 에델바이스 같기도 한 이 식물의 이름은 무얼까? 어느 집 벽에서 놀던 무지갯빛 도마뱀이 낯선 나그네를 향해 잔뜩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마을의 주인이구나. 너희들은 강제로 쫓겨나지 말고 오래 오래 이곳을 지키렴. 옛날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했을 골목길. 이제는 오솔길이 되어 나그네의 허허로운 발길 아래 게으르게 누워 있다.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걸음을 멈춘다. 이리 저리 둘러보지만 잔뜩 야윈 내 그림자만 어서 가자고 재촉이다. 문득 내려다본 저 아래 세상이 아스라하다. 원래 이곳이 세상이었거늘. 뒤따라 올라왔던 사람들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나 보다.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분명 내 이름인데도 처음 듣는 듯 낯설다. 그 낯선 이름이 유령처럼 웅웅웅 울며 빈집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뛰다시피 언덕을 내려온다.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 있기도 어렵다. 그대로 돌 위에 주저앉는다. 온몸이 목욕이라도 한 듯 땀에 젖었다. 과음과 수면부족 때문이겠지? 아니, 그게 전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정말 저곳에서 유령들을 만나고 온 것일까?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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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분은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에게해. 바다의 깊이에 따라 색깔이 다양하다.


이스탄불에서 환승하다


비행장의 가로등들이 조금씩 존재를 지워가더니,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활주로를 점령한다. 시간은 늙은 개처럼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데 공항 내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경우는 없는 법. 어느덧 0820, 보드룸(bodrum)행 국내선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이 다 차고 출발 예정시간 0840분이 지났는데도 비행기는 꼼짝을 안한다. 50분이 지나도 안내방송 한마디 없다. 그러다가 아홉시가 조금 넘으면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활주로도 이 시간은 러시아워인가?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한 시간만 날아가면 첫 번째 목적지인 보드롬이다. 잠시 뒤 수런수런 하더니 기내식이 나온다. 국제선에서 먹은 게 아직도 뱃속에 고스란히 남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둔다. 여행자의 수칙, ‘언제 또 먹을지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채워둬라에 충실해야 한다. 살찌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채운다.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 지중해를 따라 가는 내내 이런 도시와 함께한다.


터키를 아십니까?

비행기는 비교적 낮은 고도를 유지한다. 맑은 하늘 덕분에 아나톨리아반도의 생생한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와 집들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넓은 평야와 도시들이 스쳐 지나고. 짙푸른 바다도 간간히 동행한다. 이 땅이 품고 있는 긴 세월을 실타래 풀 듯 한 가닥씩 풀어본다. 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터키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터키? 거기가 아시안가? 유럽인가? 여하튼, 축구는 좀 하더라고. 전에 한일월드컵 때 4강전에서 우리나라를 이겼잖아.” ‘축구는 좀 하는정도가 아니다. 축구광(?)들이 모여 사는 나라다. 우리나라 축구 열기 정도는 새발 의 피. 혹은 어떤 사람은 터키? 잘 알지. 6.25때 우리나라에 파병했던 나라잖아? 그 친구들은 우리나라를 형제국이라고 한다던데크게 고마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얘기는 더 이상 진전을 못 보기 마련이다.

보드롬의 바다. 실제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하얀 포말을 그리는 건 쾌속선.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터키의 10%도 설명할 수 없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동양과 서양의 교차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가 혼재된 땅,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 문화의 용광로이 정도의 키워드는 들어가야 터키의 실체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터키는 동서양의 역사를 한 공간에 켜켜이 담고 있는 떡시루 같은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을까. 유럽을 중심으로 기술된(혹은 왜곡된) 세계사를 비판적 안목 없이 배운 탓이다. 로마하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만 기억하도록 공부한 우리에게, 330년에 비잔티움으로 부르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후 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가 아닌 지금의 터키였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고개를 갸웃 할 수밖에 없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게 로마 역사의 종지부라고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이후에도 동로마가 1000년간이나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비잔티움제국라는 이름의 포장에 가둬 그곳에서 로마의 이름을  탈색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유럽의 한 페이지는 상실됐다지우개로 역사를 바꾸거나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의 7대교회가 깃들었던,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땅이라는 사실도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기억할 뿐이다.

뱀처럼 흐르는 보드롬의 수로들.

차차 설명하겠지만, 현재 터키라는 국명으로 튀르크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그들의 땅은 아니었다. 흑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이 곳에는 고대부터 다양한 인종이 거쳐 가고 숱하게 많은 국가가 명멸했다. 기원전 6500~5800년 무렵에 존재했던 신석기 주거지 차탈화위크,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집단주거지 중 하나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트로이목마로 잘 알려진 트로이 등에서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했던 히타이트 문명이 발달했다. 무엇이든 만지면 황금이 된다는 미다스왕의 프리기아왕국도 이곳에 있었고 기원전 8~7세기 무렵부터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폴리스를 건설하고 살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될 때까지 이 땅에서 성쇠를 거듭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제대로 보려면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아닌 터키를 가야한다는 말은 괜한 수사가 아니다. 굴러다니는 돌도 우리로 보면 문화재급이다.

보드롬공항. 한 여름이면 이곳이 미어진단다.


보드롬공항에 도착하다

맛있는 음식도 단번에 먹으면 체하는 법. 멀고 먼 나라의 역사공부를 어찌 하루아침에 다 하랴. 785000로 남한면적의 7.8배에 달하는 이 땅, 한 때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품었던 이 땅이 간직한 긴 얘기는 조금씩 나눠서 소화할 일이다. 기내식을 마쳤는가 싶었는데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입이 떡떡 벌어진다. ,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이렇게 징그럽게 파란 바다가! 저것이 바로 터키블루의 실체? 투명한 잉크를 엎질러 놓은 것 같은 쪽빛 바다가 한없이 달려 나가고 그 위에서는 작은 배들이 하얀 포말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황홀한 그림이다. 갈래갈래 흐르는 수로들은 환영이라도 본 듯 현실감마저 무디게 만든다.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지도 못했는데 비행기가 착륙한다. 1030. 보드롬 공항은 비교적 한산하다. 아직 태양은 이글거리는 햇살을 토해내고 있지만 휴가철 피크가 지났기 때문이리라. 짐을 찾은 뒤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와 합류했다. 다큐멘터리 촬영팀을 태우고 다닐 버스다.

올리브나무. 지중해 지역은 어디를 가나 지천이다.

올리브 열매들. 언뜻 보면 대추처럼 생겼는데 서서히 자색으로 익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구릉이나 산마다 낮게 엎드린 낯선 나무들이었다. “사막지대인가?” 누군가 터트린 혼잣말을 터키인 가이드이드가 냉큼 수정해준다. 모두 올리브나무란다. 에게해와 지중해는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가이드는 올리브의 효용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터키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60, 여자는 65세라는데 지중해 쪽에 사는 남자들은 100세 이상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단다. 그게 다 올리브 덕이라는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심은 지 10년 정도가 지나야 열매를 맺는데 보통 200~300년을 산단다. 수확은 보통 3월과 9~10월 두 번씩 한다. 수확철에는 터키 동부 사람들이 품을 팔려고 몰려온다. 하도 좋다고 강조하길래, 호텔에서 여러 번 절인 올리브에 도전해봤는데 내 입에는 영 아니었다. 얼마나 짠지. 그냥 명대로 살다 가는 수밖에.

언덕 위의 하얀 집들. 파란 하늘-바다와 어울려 환상적 풍경을 연출한다.

올리브나무도 나무지만 단연코 눈길을 잡고 놔주지 않는 건 하얀 집들이었다. 집들은 주로 언덕에 터를 잡았는데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얗게 칠했다. 바다와 나무만 빼놓고 어딜 둘러봐도 하얀색이다. 하얀색도 어울려 있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이곳 페인트 장사들은 간편해서 좋겠다. 하얀 페인트만 팔아도 되니. 처음엔 보기 좋으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햇볕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란다. 흰색은 햇볕을 반사하고 검은 색은 흡수하고.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이 그제야 떠오른다. 대부분 여름별장용 빌라들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보드롬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모두 현대식으로 바뀌어 옛날 같지 않다고 슬그머니 한탄이다.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인 이곳은 휴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외국인, 특히 유럽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다. 오죽하면 유럽의 침실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을까. 인구 3만의 작은 도시가 여름만 되면 6만 명을 웃도는 인파가 북적거린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별장이든 터키인 고유주택이든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언덕위의 하얀집들은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게 해준다. 천국이 정말 있다면 이런 모습 아닐까?

보드롬 시내의 풍경. 천국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본 보드롬성.

'바람의 언덕에 서다

보드롬에서 처음 목적지로 잡은 곳은 귬벳(Gumbet)이라는 곳. 해변을 포함한 지역 이름인지 언덕의 고유명사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보드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서울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 남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다. 공항을 떠나 40분쯤 달려서 언덕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또 한 번 아! 하는 감탄사를 갈무리 하지 못한다. 둥그렇게 형성된 만()을 따라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다. 그리고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들. 저만치에 십자군들이 세웠다는 보드롬성이 우뚝 솟아있다. 날카롭게 벼려진 햇살들이 바다로 떨어져 내려 깔깔거리며 자맥질을 한다. 수없이 일어났다 눕는 물비늘들이 보석처럼 황홀하다. 바다에서 올라온 한줄기 바람이 낯선 나그네를 기웃거리다 기어이 옷깃을 헤친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누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이 언덕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로 한다. ‘여기는 오늘부터 바람의 언덕이야제법 그럴싸하다. 바다에서 눈을 돌리니 언덕 꼭대기에 허물어져 가는 둥근 건물들이 하얀 칠을 덮어쓴 채 서 있다. 방앗간으로 쓰던 건물들이란다. 그렇다면 풍차?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바람의 언덕이라니까.

세월에 치여 이제는 쓸쓸히 스러져가는 언덕 위의 풍차들.

풍차방앗간 안쪽에서 본 하늘.

다큐팀이 바다와 해변의 풍경에 풍덩 빠져있는 사이에
,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언덕을 오른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풍차의 잔해가 더 궁금하다. 어차피 나는 혼자 쏘아 다니는 체질이니. 언덕에 올라서니 사방의 풍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언덕 너머 반대쪽에도 짙푸른 바다와 하얀 집들이 펼쳐져 있다. 궁금했던 건물들로 다가가 들여다보니 풍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세월에 쫓겨 날개도 잃고 방앗간도 반쯤 무너져 버린 풍차들. 이제는 초라한 몸짓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풍차에게 보고 들었을 세월을 묻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언덕의 중간쯤에 낙타 두 마리가 앉아있고 그 옆에서 노인과 장년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에 하얀 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부른다. 그런데 부르는 소리가 헬로~’가 아니라 까메라~’. 아마도 거기 카메라 들고 설치는 놈, 이리 좀 와 봐라정도의 의사 표현인 것 같다. 동방예의지국의 자손으로서 노인이 부르는데 안 가보면 도리가 아니지. 뛰다시피 내려가니 손짓 발짓으로 낙타를 찍으란다. 에이, 나중에 모델료 달라고 하려고?

낙타와 노인. 이 노인의 얼굴에서 고향 어른들을 보았다.

다큐팀의 여주인공을 태운 낙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이 큰 소리로 외친다. “노 페이~!!” 돈을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찍기나 하란다. 그렇다면 사양할 내가 아니다. 카메라 셔터에서 불이 난다. 노인의 눈길이 내 카메라에 고정돼 있다. ! 혹시 내 카메라에 눈독을? 턱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역시, 세파에 닳고 닳아 의심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나그네의 억측일 뿐.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노인의 밭고랑 같은 주름과 거친 피부흰 수염, 그리고 잇몸까지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오래 전 내 고향 땅의 어른들을 본다. 평생 땅을 뒤지며 농투성이로 늙어간 그들. 닮았다. 정말 닮았다. 사는 곳도 먹는 것도 말도 다른 그들이 내 땅의 그 장삼이사들과 닮아있다. 그래, 어느 나라든 민초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지. 이 노인도 낙타를 앞세워 관광객들의 푼돈이나 거두는 일이 천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노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 그런데 터키 말이라면 밥 줘소리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었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들은 “Where are you from”이 아닌 터키 말이 분명한데. “코리아라고 대답했더니 ! 꼬레, 꼬레하면서 반색한다. 그러더니 아예 노래 부르듯 꼬레를 반복한다. 이 아저씨, 한국을 정말 알긴 알고 이러는 거야?

벌거벗다시피 한 남녀가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여행 내내 물리도록 본 모습이다.

노인의 신명은 그게 끝이 아니다. 조금 뒤에는 아직도 바다풍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큐팀까지 불러올린다. “까메라, 까메라아예 자진모리 가락으로 넘어간다. 촬영팀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낙타 옆에서 진을 치고, 다큐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여배우는 난생 처음 타보는 낙타 위에서 꺄아~ 꺄아~ 신이 났다. 이 정도 서비스를 하고도 정말 노 페이일까? 역시, 끝내 돈을 안 받는다. 말없이 낙타를 끄는 장년의 사내가 눈을 곱지 않게 뜨는데도. 대체 카메라의 위력이었을까? ‘꼬레의 위력이었을까? 사람들이 모여드니 또 그 자리를 뜨고 싶다. 그들이 난장 펼친 곳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내려오는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중년 남녀와 마주친다. 늦휴가를 온 유럽인들인 모양인데, 늦여름의 잔양이 그들의 몸을 붉게 붉게 태워놓았다. 그들과 스쳐 지난 나는 이국땅의 한낮을 허청허청 걷는다.

 

추천과 댓글을 잊지않은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이번 주부터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카메라 배낭에 밴 땀이 하얀 소금 꽃으로 피어날 정도로 많이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떠난 일행이 있었지만, 각자의 일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혼자 걷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을 제 여행길에 모십니다. 읽고 나서 댓글도 남겨주시고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의 모습. 여긴 조금 변두리?

비행기 안에서 잠이 깨다

뭔가 불편한 느낌에 자꾸 몸을 뒤척인다. 요의로 하복부가 묵지근한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잡은 잠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본능으로 조금씩 돌아오려는 의식을 향해 자꾸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손짓 정도로 막을 상황은 아니다. 꿈이 가득 찼던 자리를 의식이 대체하기 시작한다. 혼미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 여기가 어디지? ! 그래. 비행기 안이었구나. 그래. 난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어. 내 생애에 가장 긴 휴가를 가고 있는 중이야. 콧물이 흐른다. 머리도 띵하고 몸도 무겁다. 감기몸살 기운은 엊그제부터 찾아왔다. 며칠 무리한 탓이리라. 열흘 넘게 자리 비우는 턱을 한다고 불난 집 며느리처럼 대중없이 종종걸음을 치다보니 자연스레 얻은 전리품이다.

저 아래 경기장이 보인다. 터키 사람들도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애당초 무리한 여행이었지만

열흘 이상 자리를 비운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처음 터키 여행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팀을 이끄는 후배가, 내 개인작업(여행, 사진촬영, 쓰기)과 성격이 맞으니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물론 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저은 건 아니었다. 아니, 내 평생 가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그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로 달리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몇 달 쯤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중국의 윈난성(雲南省) 리장(麗江)에 가서 하릴 없이 배회하고 싶고, 터키에 가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지났던 실크로드를 걷거나 세계사의 용광로에 몸을 담그고 싶고. 늘 꿈꾸는 것들이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는 얼마나 터키에 대한 열병을 앓게 했던지. 고통과 위험에 가득한 그 길이. 비록 제안 받은 곳이 실크로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땅에 가고 싶었다.

그런 열망에도 터키행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1주일에 한번 씩 하는 방송이었다. 케이블TV 시사뉴스의 앵커, 대체요원조차 없는 그 자리는 내가 마음에 내킨다고 함부로 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방송을 맡은 뒤로는 감기 한번 마음 놓고 앓아보지 못했다. 목이 상할까봐 노래방 가는 것조차도 참았다. 게다가 기자 또는 신문사 뉴미디어 분야의 책임자로 평생 일하면서 3~4일 이상의 연속휴가를 가본 적이 없던 내게, 11일이란 숫자는 느닷없이 등에 날개가 솟는 것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방송부서 데스크를 맡은 후배 부장에게 슬그머니 의중을 털어놓았다. 찔러나 보자는 심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OK가 떨어졌다. 이 참에 늙은 기자가 아닌 젊은 대타 한번 써보자는 심리였을까? 이거, 이러다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앵커 자리 날아가는 거 아냐?

역시 이스탄불의 모습. 가운데 흐르는 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후반 '이스탄불편'에 나온다.

그건 훗날 닥칠 문제. 그 순간 내 등에는 정말 날개가 돋았고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바빠졌다. 방송 외에 맡은 일도 이것저것 챙겨야 하고, 신문의 인터뷰 기사도 써놔야 하고 블로그 연재물도 미리 채워놔야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취재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맡은 잡지 편집도 잠을 줄이는 걸로 해결했다. 출발 전에 꼭 만나봐야 할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자 진리의 신봉자로서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자료만도 책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렇게 13~4역을 했지만 몸은 핑핑 날아다녔다. 나는 터키 땅으로 간다. 그러다 얻은 몸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11922일 금요일. 정신없이 방송녹화를 마치고 메이크업을 지울 새도 없이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115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야, 내가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함께 떠나는 일행과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눴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해준 K뿐이었다.

이스탄불 주택가. 높은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잦은 지진의 영향일까?

비행기는 실크로드 위를 날고

잠은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밥 먹으라고 깨울 텐데 뭐. 장거리 비행은 식사시간이 문제다. 먹고 싶든 아니든 잠에서 깨는 수밖에 없다. 남들 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퍼져 잘 만한 배짱이 없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앞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2시간 남짓 남은 것으로 표시돼 있다. 이스탄불공항에서 갈아타고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을 합하면 열 두 시간이 넘는 긴 비행이다. 배낭에서 몸살 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는다. 이 약으로 깨끗이 나아야 하는데. 감기몸살 정도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비행 항로를 보니 실크로드와 거의 비슷하게 날고 있다. 실제로는 많이 다른 길이겠지만 축약된 길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니터 화면의 지도는 끊임없이 광활하고 황량한 산악지대 위를 달리고 있다. 아니, 지도가 아니라 비행기가. 언젠가 저 길을 가리라. 시속 746km, 바깥기온 섭씨 56.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이 저 쪽에 있다.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장사를 위해, 또 누구는 말을 타고 정복을 위해 지났을 저 길. 나는 비행기를 타고 쉽게도 지나고 있다. 내 나라 땅은 신발이 몇 켤레 닳을 정도로 돌아다닌 나지만 이렇게 해외로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빗소리처럼 귀를 파고든다. 어느 산사에서 빗소리를 듣는 듯 나 혼자 고즈넉하다. 가만히 개인 등을 켜고 책을 꺼내 읽는다.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한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이다. 처음 읽을 때처럼 프랑스의 퇴역기자와 고통과 기쁨을 공유한다.

여명 속의 아타튀르그국제공항. 환승을 위해 기다리는 중에 찍었다.

조금 있으니 아침 식사가 나온다. 잠을 깨우는 건 불편하지만 밥 먹는 걸 불편해 할 내가 아니다. 어디 가든지 안 줘서 못 먹는타고난 식성 덕분에 주는 몫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뭘 찾아먹을 땐 평소와 달리 영어까지 유창하게 나온다. 이름도 모르는 식사를 하고 없어 못 마시던 와인까지 두 번이나 주문한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곧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니 준비하라는 멘트가 나온다. 창문 블라인드를 올리니 이스탄불 시내의 불빛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터키 하늘에 진입한 것이다. 저 아래에 수천 년의 영욕이 잠들어있겠지. 내내 잠을 자던 터키 사내(로 보이는)가 비행기에서 지급한 양말에 슬리퍼까지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텅!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다. , 나도 몰라. 이젠 돌아가라고 해도 못가. 방송 펑크 나든 말든 내 책임 아냐!!

이 비행기가 보드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줬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환승하다

이스탄불공항의 공식명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이다.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말 그대로 터키의 국부(國父)인데 앞으로 제법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한다. 시간을 보니 0552. ? 이것밖에 안됐어? 당연하지, 시차를 계산해야지. 한국과 터키는 여섯 시간의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몸을 적응시키는데 애 좀 먹어야한다. 하지만 아직 어리바리해서 시차고 뭐고 느낄 틈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하는데 척 봐도 한국인인 수녀님들이 뒤에 서 있다. 대체로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얼굴에 설렘이 이스탄불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한국 떠난 지 몇 시간 안됐지만 이국땅에서 듣는 우리말이 반가운 모양이다.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한다.
수녀님들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성지순례 왔어요. 맨 먼저 소피아성당을 갈 거예요.”
소피아성당, 그 역사의 도가니. 마치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이름이다.

입국수속은 빠르고 간단하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터키에서 형제의 나라’ KOREA가 찍힌 여권은 대부분 무사통과란다. 무비자 체류기간은 90일인데 연장도 그리 어렵지 않단다. 수녀님들과 눈짓으로 작별을 하고 다시 간단한 검색과정을 거친 뒤 국내선으로 이동해 휴게실에 자리 잡는다. 몇 시간 뒤에 보드롬(Bodrum)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이번 여행은 에게해(Aegean Sea)의 맨 끝에서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따라 쭉 내려가는 코스다. 맨 먼저 가보고 싶던 곳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위안한다. 일행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다 그저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비행장에 깔렸던 어둠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불빛이 옅어져 간다. 나는 지금 이국땅에서 새 아침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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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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