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 뭔지 아는가?” 법고
“사물이라…. 제가 아무리 무식해도 그 정도는 알지요. 꽹과리, 장구, 북, 징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 사물을 가지고 한 마당 어울리는 걸 사물놀이라고 하고요.”
소백산 자락의 희방사와 희방폭포를 보고 내려와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세상은 널브러지듯 사지를 내맡기고 있었다. 부석사로 올라가는 언덕길, 빗속의 사과과수원은 세상에서 가장 정겨운 풍경화가 되었다. 가슴이 온통 푸르게 물드는 기분이다. 질문을 했던 선배가 조금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왜요? 그게 사물이 아니던가요?”
“허참. 이 사람아, 절 밑에 와서 사물을 물었으면 적당히 눈치 챌 줄도 알아야지 기껏 꽹과리, 징을 안다고 자랑하고 있나?”
“…”
“절집의 사물은 범종‧법고·운판·목어 4가지를 말하는 걸세.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하지. 어지간한 절에서는 범종각이나 범종루에 이 사물을 같이 걸어둔다네. 공통점은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는 거고. 그런 면에서는 자네가 말한 사물하고 일치하긴 하네.”
“똑같이 두드려 소리를 내지만, 그 사물의 소리가 목적으로 하는 건 각기 다르다네.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고 법고는 가축이나 짐승을 제도한다고 하지. 또 운판은 공중을 떠도는 영혼, 그 중에 특히 새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목어는 물고기들을 제도한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제 무지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느냐하면, 요즘은 어지간한 절에서도 사물을 격식 갖춰서 치는 걸 보는 게 쉽지 않아. 그런데 이곳 부석사는 시간만 맞춰 가면 사물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단 말일세. 사물이 금세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기록해둘 필요가 있을 게야. 오늘 사물 소리를 직접 듣는다면 자네는 운이 좋은 거네.”
선배는 말이 나온 김에 어리석은 중생 하나 제도하겠다는 듯,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운판
목어(木魚)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물고기의 배 부분을 파낸 뒤 두드려 소리를 낸다. 어고(魚鼓) 또는 어판(魚板)이라고도 부른다. 처음에는 단순한 물고기 형태로 만들었으나 점차 용머리에 여의주를 문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절에서 목어를 치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물고기는 밤에도 눈을 뜨고 있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물고기처럼 늘 깨어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의미는 물속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목탁은 이 목어가 변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둥글게 깎은 것을 목탁이라 하고 길게 깎은 것은 목어라고 부른다. 운판(雲板)은 구름 모양으로 얇게 만든 청동판이나 철제 평판을 말한다. 대판(大版)이라고도 부른다. 판에는 보통 보살상이나 진언(眞言)을 새기고 가장자리에는 승천하는 용을 조각한다. 본래 공양간에 걸어두고 대중들에게 공양시간을 알릴 때 사용했으나 점차 의식 용구가 되어 예불 때 다른 사물과 함께 친다. 위쪽에 구멍을 두 개 뚫어 매달 수 있게 했다. 운판의 소리는 허공을 헤매는 고독한 영혼을 천도하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제도한다고 한다.
목어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오는 날도 사물을 칠까요? 새들도 날개를 접고 물고기도 잠들었을 텐데….”
“치겠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제도할 게 없겠나. 아마 여섯시쯤일걸? 그때까지 기다려보시게.”
안양루 계단을 지난 일행이 무량수전 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슬그머니 뒤로 빠진다. 어차피 초행도 아니니 오늘은 일행과 떨어져 사물 치는 걸 볼 셈이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덕분에 세상은 적막 속으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돌 벤치에 철퍼덕 앉아 비에 젖은 옛 절집을 감상하는 일로 시간을 줄인다. 여섯시가 가까워지는데도 누각은 텅 빈 채다. 오늘은 사물을 안 치려나?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잠시 뒤 어둑어둑한 누각 안에 희미한 움직임이 있다. 스님 한 분이 법고 앞에 서는가 싶더니 둥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대지를 안마하듯,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북소리가 절집을 한 바퀴 돌더니 산 아래로 구르듯 내려간다. 풍진에 찌든 중생 하나가 감동에 젖어 그 소리를 와락 끌어안는다.
범종
참고자료 : 두산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