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갈라타 탑

이제 탁심(Taksim) 광장 방향으로 내려가 버스로 공항까지 가면 된다. 트램을 타고 전철로 갈아타는 방식, 즉 역순으로 되짚어 가도 되지만 멀기도 하려니와 환승이 귀찮아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저만치에서 재미있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어라? 저걸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지. 갈라타 탑 주변에는 늘 택시 몇 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헌데 택시와 지나가던 자가용 운전자 사이에 시비가 붙은 것이다. 우리 같으면 삿대질을 동원해 열심히 싸우다가 경찰을 부르거나, 지칠 때쯤이면 못이기는 체 서로 갈 길을 갈 텐데 이들의 싸움은 갈수록 거칠어진다. 재미있는 건, 처음엔 분명 둘 만의 싸움이었는데 조금 지나니 집단 싸움으로 판이 커졌다는 것이다.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고 다혈질인 터키 아저씨들은 싸움도 버라이어티하게 한다. 처음엔 관객이었던 사람들 중 한 둘이 심판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못 이겨 느닷없이 그라운드로 진입한다. 아저씨, 좀 참으시고요. 차분하게 말씀해 보세요. 조금 더 지나면 심판들끼리 시비가 붙는다. 네가 뭔데 저 아저씨 편을 드는 거야. 그러는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야. 택시기사가 먼저 잘못한 거잖아. 무슨 소리야 자가용이 잘못했지. 뭐야? 이게 어디다 대고. ? 이거 봐라? 한번 해보자 이거지. 싸움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판도 서너 개로 분화된다. 노인도 청년도 배불뚝이 중년남자도 최선을 다해 싸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원래 싸우던 두 사람은 각자 갈 길로 가버린 지 오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마치 축제현장 같다. 끝까지 지켜보고 그 결과를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께 전해야한다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저 노란 택시들 중 하나로부터 사건은 일어났다.

아쉬운 마음만 그 자리에 남기고 천천히 일어서서 길을 잡는다. 한걸음 한걸음이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여행 내내 땀을 배출한다는 기능성 등산복의 신세를 졌는데, 이스탄불에서는 워낙 많이 걷고 땀을 흘려서 그런지 별 도움이 못 됐다. 민감한 쪽의 피부가 옷에 쓸려서 벗겨지기라도 한 듯 쓰리고 아프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러니 걸음걸이는 당연히 똥 싼 놈 스타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스탄불의 미아가 되고 싶지 않다면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는 수밖에. 버스정류장인 건 분명한데 공항버스는 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 찾아왔나? 혹시 공항버스가 안 서는 정류장인가? 슬슬 걱정이 돼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 영어가 제법 잘 통용되는 나라고 더구나 여긴 국제도시 이스탄불인데. 잠시 망연히 서 있는데 택시 한 대가 내 앞에서 끼익~ 하고 급하게 서더니 운전사가 내린다. 어라? 날 바래주라고 이 나라 대통령이 보냈을 리는 없고.

탁심광장으로 가는 길에 만난 건물들

차에서 내린 기사는, 구겨진 여행자 정도는 쳐다보지도 않고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댄다. 택시를 보니 한마디로 가관이다. 이 나라에서는 이런 정체불명의 물건을 택시라고 부르는구나. 여기저기 벗겨진 거야 시간 탓이라고 돌린다지만, 물리고 긁히고 깨진 저 숱한 상처는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는 투견이나 투우처럼 택시싸움도 하나보지? 상처가 전부는 아니다. 그나마 흉내 내듯 남아있는 범퍼는 거의 떨어져 덜렁거리는 것을 대충 얽어놓았고 엉덩이 쪽은 페인트보다 테이프가 더 많은 면적을 차지했다. 지금도 어디서 사고를 당했거나 사고를 치고 온 모양이다. 전화 내용을 짐작하건대 보험사하고 뭔가 타진 중인 것 같다. 나는 돌아갈 길이 급하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택시기사가 하는 짓에 푹 빠져버린다. 특이한 건, 이 친구의 얼굴이나 목소리 어디에도 사고를 당한 사람 특유의 낭패한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고처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아침저녁으로 늘 하는 일을 하듯 자연스럽다. 통화를 끝낸 그가 범퍼 쪽을 발로 툭툭 차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서른 한 둘쯤 됐을까?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청년이다. 그가 길을 지나다 똥을 본 강아지처럼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온다. 어디 가슈? ? 공항 가려고 버스 기다리는 거야. 이왕이면 편하게 택시 타고 가지 그러슈? 돈이 얼마 없어. 사실 잔돈을 남기면 뭐하나 싶어 버스비+알파만 남겨놓고 다 써버렸다. 하지만 이 친구 이대로 물러날 기색이 아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요? 정말 별로 없다니까. 보라는 듯이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보지만 모두 동전뿐이다. 이 친구, 내가 세는 게 답답했던지 얼른 빼앗아 제 손으로 헤아려 본다. 돈 세기를 끝내더니 고개를 한참 갸웃거린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다. 돈을 돌려주더니 자기 차를 타라고 손짓한다. 그래? 나야 좋지만. 너 택시 사고 난 거 아니었어? 얼른 뒤처리를 해야지. 괜찮유. 일 끝내고 처리하면 되쥬 뭐. 이 정도면 미국도 가유. 이 친구 “No problem”을 연발하며 나를 뒷자리에 밀어 넣는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고양이

그런데 나 정말 이런 차 타도 괜찮은 거야? 테이프로 때워놓은 차가 굴러가긴 하고? 온갖 생각이 빛의 속도로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금방 의혹을 놓아버리고 만다. 그래, 설마 공항까지 못 가겠나. 편하게 한번 가보자. 편하게. 그 기대가 얼마나 오산이었는지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머플러를 떼놓은 오토바이처럼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하면서 내 입에선 비명이 저절로 터진다. ? ? 이거 뭐야. 총알 택시였어? 이 친구 차는 차가 아니듯이 운전도 운전이 아니다. 마치 뱀장어가 장애물경주를 하듯 지그재그로 도심을 헤엄쳐 나간다. 마침 퇴근시간이라 길이 제법 복잡한데 어떻게 이렇게 달릴 수 있는 건지. 차선을 바꿀 때도 깜박이를 켜는 법이 없다. 아마 이 차에는 아예 깜박이가 안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겁이 슬슬 나기 시작한다. 슬쩍 계기판을 들여다봤더니 시속 120~130km를 오르내린다. 물론 다른 차, 특히 택시들은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다. 두 손은 저절로 손잡이에 매달리고 잠시 뒤에는 흥건하게 고였던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오늘 저 세상으로 가는구나. ! 어머니. 이 못난 자식은 낯선 땅에서 이렇게 떠납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이 나라 교통경찰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파트

그가 공포의 시간을 위해 마련된 이벤트는 그걸로 끝이 아니다. 대체 뭘 얼마나 준비한 거야. 최대볼륨으로 라디오를 켜더니 노래에 맞춰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대체 운전을 하는 건지, 클럽에 왔다고 생각하는 건지. 잠시 뒤에는 끊임없는 통화가 시작된다. 그것도 슬쩍 슬쩍 나를 돌아보면서 슬슬 웃기까지 한다. 아마 자기 친구에게 나 지금 파김치처럼 후줄근하게 늘어진 촌놈 하나 태우고 겁을 주고 있는데, 엄청 쫀 거 같아. 아마 오줌을 지리지 않았을까? 에이, 시트 닦으려면 큰 일 났네.” 어쩌고 중계방송을 해주는 모양이다. 한참 통화하다가 나를 돌아보더니 내 친구가 아저씨한테 hello라고 말해달래!!! 그런 건 안 전해줘도 되거든. 제발 운전이나 똑바로 해. 하지만 그는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리며 통화를 계속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았다는 것. 공포에 질린 내 눈으로 저만치 아타튀르크 공항이 들어온다. 아아, 이렇게 반가울 데가. 밤새 산속에서 헤매다 아침을 맞은 기분이 이럴까. 차에서 뛰듯이 내려서 동전 한 푼까지 몽땅 털어줬더니, 얼른 챙겨 넣고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내 덕분에 스릴 있지 않았어?” 묻기라도 하듯이. 헌데, 나도 묘하지. 그 웃음이 밉지 않다. 그래, 수고했다. 다음에는 널 만나지 않도록 기도 할게.

돌고 돌아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오다.

총알택시를 탄 덕에 예정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지? 우선 먹을 걸 좀 찾아봐야겠지? 집에 갈 때가 돼서 그런지 따뜻한 국물이 있는 면이 먹고 싶다. 아무리 잡식성인 나지만, 그래도 수십 년 먹어온 가락이 있지. 케밥은 이제 질렸다. 잔치국수가 가장 좋겠지만 언감생심일 테고, 혹시 일본식 우동집이라도 있을까 싶어 공항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지만 파스타 파는 집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돌아다닐 힘도 없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계속 아우성이고 온 몸의 에너지는 전부 빠져나갔다. 밥이야 참았다가 기내식으로 때우면 되지. 돌고 돌아 다시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돌아온 지금, 절에 간 새색시처럼 얌전히 앉아서 터키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본다. 몇 년이 흐르기라도 한 듯 지나온 날들이 아득하다. 소태처럼 쓰디쓴 날도 있었고 솜사탕처럼 감미로운 날도 있었다. 숱한 것을 배웠고 가슴에 퍼 담았다. 그 아름답던 풍경들,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귀에 목이 박히게 들었던 “Where are you from” “my brother!!!” 그 따뜻한 음성이 환청처럼 여전히 귓전을 맴돈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이 기다리고 있는 12시간 저쪽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콩나물시루 같은 공항에 서서, 나만의 작별 의식을 치른다. 터키여, 내 형제들의 땅이여! 나는 지금 떠나지만 끝내 이별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일 뿐. 멀지 않은 날 그대의 대지에 엎드려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것이니.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작년 9~10월에 걸쳐 여행을 다녀와서 1010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여행기가 이제야 끝났습니다. 손을 꼽아보니 정확하게 반년이 지났군요. 1주일에 1,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글을 올리는 동안 전 무척 행복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을 보내주셨고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행복한 일은 또 있습니다. 연재가 진행되는 중에 출판사가 선정되고, 또 그곳에서 출판 펀딩에 성공해서, 안정된 조건으로 출간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 책이 시장에서 팔릴 것이라는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는 측면에서 무척 고무적인 일입니다. 물론 이번 여행은 이게 시작입니다. 머지 않은 날 다시 터키 땅을 밟을 것입니다. 그만큼 매력이 넘치는 곳 터키, 저는 그곳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제 여행을 만들어주신 분들, 그리고 응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의 가슴에 이 봄, 행복이란 꽃 하나씩 피어나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sagang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