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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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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게 남은 교각과 절벽 위의 성.

하산케이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압둘라는 아랍식 이름을 가진 40대 사내다. 이곳은 아랍과 가깝기 때문에 아랍인 투르크인, 쿠르드인들이 섞여 산다. 덕분에 아이들도 3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사내가 와서 자꾸 들여다본다. 그가 나중에 친해진 압둘라다. 이 정도면 그냥 지나갈 수 없지. “메르하바인사를 했더니 대뜸 “Are you professor?”. 어라? 네 눈에도 내가 교수처럼 보여? 한국에서도 가끔 듣는 말이긴 하다. 교수님들께는 무척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난 교수처럼 생겼다는 말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교수는 어떻게 생겨야한다는 정형도 없으려니와 조금은 고답적인 사람이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분방해 보인다는 말을 즐긴다. 아무튼, 교수가 아니라 여행가라고 나를 소개했더니 이번엔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다.

프로들이 쓰는 카메라네요?”

이 친구 프로라는 말을 제법 좋아하네? 요즘 프로, 아마추어가 따로 있나. 나는 한마디로 부러움을 끊어준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카메라만 프로고 찍는 나는 아마추어야

 

하산케이프 지킴이 압둘라.

압둘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친구다.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 중퇴. 직업은 무덤지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일은 재야 기록가이자 사진가다. 젊어서부터 고고학 발굴 현장을 쫓아다니며 역사에 대한 지식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하산케이프를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되뇐다. 이곳이 물에 잠기면 자신의 삶도 사라진다고 슬퍼한다. 그 때문에 그는 글을 배우고 사진 찍는 것을 배워서 하산케이프에 대한 기록을 시작했다. 그렇게 틈틈이 기록한 것들을 모아서 한 권의 작은 책자로 발간했다. 그걸 관광객에게 팔기 시작했는데 무려 2,000권을 팔았다. 다음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기록하겠다는 큰 꿈을 꾸고 있다. 나보다 젊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했어도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한길을 달려온 한 사내의 성취.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근무시간이라며 서둘러 돌아간다.

 

'개밥 주는 노인'이 저 길로 걸어왔다.

노인이 나타난 건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이다. 중절모에 단장, 구두까지 갖춰 신은 노신사 하나가 푸른 풀빛을 떨치며 저만치 교각 쪽에서 천천히 걸어온다. 내 눈엔 풍경에 점 하나 찍을 정도의 작은 변화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존재들에겐 엄청난 변화를 알리는 전주곡 쯤 됐던 모양이다. 노인의 모습은 아직도 까마득하게 먼데 배를 깔고 태평가를 부르던 개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만났다. 노인과 개들의 상봉 장면은 눈물겨울 정도로 극적이다. 사람과 사람끼리의 만남도 저리 반가울 수 있었으면. 노인이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서 나눠주자, 개들은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순서대로 받아먹는다. 마침 지나가는 청년에게 물어본다.

저 노인 누구야?”

, 개 밥 주는 노인

이름이 개 밥이야? 매일 저렇게 밥을 줘?”

, 그게 저 노인의 일이야

 

'개밥 주는 노인'과 개들이 오수를 즐기고 있다.

개들의 주인은 아니지만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나타나서 먹이를 준단다. 혼자 살고 있고 몸도 불편한 노인이라는데 이 일만큼은 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과 개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어울린 풍경이다. 고요하던 강변에 느닷없이 생명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먹을 걸 다 준 노인이 한 녀석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호박돌 하나를 베개 삼아 풀밭에 눕는다. 아무 욕심도 없는 사람이 내뿜는 평화로운 기운이 대지에 퍼진다. 노인과 자연은 금세 경계를 지운다. 개들도 노인의 주변에 누워 자연이 된다. 강가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포성은 멈추고 세상의 모든 철조망은 걷히고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 동물과 자연의 구분조차 모호해진다. 무엇을 욕심내고 그 무엇과 싸우랴. 강물은 가슴으로도 쿨렁쿨렁 흐른다.

 

오래된 교각에 지은 집. 사람이 살고 있다.

묘지를 지키러갔던 압둘라를 다시 만난 건 교각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말이 만나러 가는 길이지 약속이 안 돼 있으니 무조건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마침 저만치서 압둘라가 걸어오길래 덥석 부탁부터 한다.

저기 사는 저 사람들 인터뷰를 좀 하고 싶은데 네가 가서 좀 부탁해볼래?”

나도 참, 염치 하나는 하늘을 찌른다. 압둘라가 선선히 그 집으로 가더니 잠시 뒤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인터뷰 안하겠대. 카메라만 보면 울렁증이 솟는대

에구, 꼭 보고 싶은데. 하지만 억지로야 할 수 있나. ‘맨땅에 헤딩으로 하는 촬영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다. 거절당하면 그대로 물러나는 수밖에. 압둘라를 앞세워 강가로 내려간다. 워낙 오랫동안 이곳의 유적에 애정을 쏟아온 그야말로 최고의 안내자다.

 

탄디르라고 부르는 방 굽는 화덕.

압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부모와 조부모, 그 윗대도 여기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은 내려와 살지만 부모님 대까지는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왜 동굴에서 나왔어?”

유럽 사람들이 자꾸 흉을 본다는 거야. 터키에 가면 아직도 동굴에서 원시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정부가 열 받은 거지. 그래서 집을 지어주고 억지로 내려와 살도록 한 거야

별 걸 다 흉본다. 동굴에서 살든 나무에 매달려서 살든 제 맘이지. 그래서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사는 너희들은 날마다 하늘을 날 것 같더냐. 씽씽 달리는 자동차가 자랑스럽더냐. 동굴에서 나와 현대식 집에 입주한 사람들은 그 뒤로 행복해졌을까.

 

 

하산케이프 전경. 모두 물에 잠긴다.

인류 최조의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수메르 문명이 태어난 곳, 메소포타미아의 최북단에 자리한 하산케이프. 숱한 정복자들이 거쳐 가면서 로마, 아랍, 몽골, 오스만투르크 등의 유산이 혼재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쿠르드인들이 평생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마을 전체, 아니 구르는 돌 하나까지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하산케이프가 최근에 주목 받은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리수(Ilisu) 댐 건설 때문이다. 터키 정부는 남동부 아나톨리아 개발계획(GAP)에 따라 대규모 댐을 잇달아 건설하고 있다. 유프라테스 강 댐 건설이 대부분 끝나면서 이젠 티그리스 강 차례가 된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하산케이프 65km 하류에 쌓고 있는 일리수 댐이다. 이 댐이 완공되고 물이 차면 길이 100km에 달하는 호수가 생기고 하산케이프는 45m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인류문화의 원형 중 하나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돌다리는 물론 인류의 조상들이 살았던 3,500개의 동굴도 물에 잠긴다. 동굴은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거니와, 다리 역시 해체해서 옮긴다고 해도 이미 그건 박제된 모형일 뿐이다.

 

강변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

터키 정부는 낙후된 쿠르드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댐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지만 쿠르드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기 위해 댐 건설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이곳에 건설하는 댐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댐을 통해 얻는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하필 인류 문명의 원형을 물에 가둔다는 것인지. 문명이 남긴 유산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 땅에 산다고 해서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범죄에 가까운 착각이다. 한번 파괴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산케이프 지킴이 압둘라가 남긴 말이 귓전을 맴돈다.

댐으로 생기는 호수는 나에게 또 하나의 지옥일 뿐이지요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