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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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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행의 목적지인 악다마르 섬의 성십자가 대성당.

이번 여행의 출발지, 반에 있는 동안 묵었던 호텔에서 체크아웃 하는 날이다. 사연도 참 많았다. 샤워를 하면 물이 방으로 들어와 수상침대에서 잔 것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PD와 카메라감독이 머물렀던 방은 난방장치가 안 돼 급기야 전기난로까지 동원했다. 문제는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호텔 전체가 정전되는 원시적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그 뒤의 조치가 더 재미있다. 정전사태를 겪고 나서야 종업원이 벽에 걸려 있던 기존의난방장치를 가동하더란다. 왜 진즉에 안 하고?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로는 온전히 위안 받기 어려운 사태들이었다. 그래도 떠나려니 여러 번 돌아보게 된다. 몸은 여전히 터키 식 식사를 거부한다. 쉬지 않고 진행되는 촬영으로 체력소모가 심하다보니 이중고에 시달린다. 그나마 아침은 호텔에서 삶은 달걀, 오이, 토마토 등으로 때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구는 라면 스프를 챙겨줬고, 혹시나 싶어서 컵라면까지 싸들고 갔지만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전기포트는 물론이고 뜨거운 물조차 구할 방법이 없다. 결국 짐만 늘어난 셈이 되고 말았다.

 

샤키르 씨의 부인과 형수가 빵을 만들고 있다. 

반 시내를 지나가는데 맷돌을 돌리는 여인의 동상이 있다. 가만? 이곳에서도 맷돌을 썼나? 당연히 썼겠지. 한반도보다 훨씬 전부터 밀농사를 지었다니까. 메소포타미아의 밀이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 땅으로 들어왔다는 가설이 맞는다면 출발지가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때 맷돌도 함께 먼 길을 떠났겠지. 그리고 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인연의 끈들이 얽히고설켜서 인류라는 이름의 동류항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칼국수를 만들듯 홍두깨로 밀가루를 둥글게 민다.

지금 찾아가는 곳은 엊그제 한 나절을 보냈던 샤키르 씨의 농가. 오늘이 빵 굽는 날이라고 해서 들르기로 약속했었다. 잠깐 들른다고는 했지만 정말 잠깐으로 끝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곳 농가들은 보통 일주일 먹을 분량의 빵을 한꺼번에 구워놓는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온 식구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 샤키르 씨는 단벌 외출복이 틀림없어 보이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저씨, 그게 아니라니까요. 농부가 농부 옷을 입어야 방송에 어울리지요. 하긴 새 옷이라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분뇨로 질척거리는 마당을 몇 번만 오가면 새 옷인지 헌 옷인지 구분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집안은 잔칫집처럼 들떠 있다. 빵을 만드는 헛간에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기다리고 있다. 낯익은 이 집 안주인 외에도 또 한사람의 여자가 있길래 누구냐 물으니 동서라고 한다. 보통 빵을 구울 때는 이렇게 친척 두 세 명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한다.

 

 

둥글게 민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돌려 넓적하게 편다.

빵을 굽는 절차는 별로 복잡하지 않다. 밀가루에 소금과 이스트를 넣고 반죽해서 부풀리는 건 옛날에 우리네 빵 만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머지는 칼국수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넓게 편 다음, 피자 돌리듯 손으로 돌려서(이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더 얇게 만든다. 땅에 묻은 큰 항아리가 바로 빵을 굽는 화덕이다. 안에 불을 피워 미리 달궈놓고, 둥근 기구를 이용해서 넓게 편 반죽을 항아리 벽에 찰싹 붙이면 된다. 가마 형태의 화덕은 탄디르라고 하고 이처럼 항아리 형 화덕은 테젝이라고 부른다. 도시에서는 빵을 사다 먹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대부분 직접 빵을 구워먹는다. 특히 이 집의 화덕은 지진이 났을 때 인기를 누렸다고 자랑이 늘어진다. 다른 집 화덕이 전부 부서졌는데 이 집 것만 멀쩡해서 동네의 빵을 전부 여기서 구웠다나.

 

항아리 화덕.

화덕에 불을 피울 때는 동물 배설물 말린 것을 연료로 쓴다. 손으로 연료를 던져넣고 그 손으로 빵을 구워도 더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두 여인은 연신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면서 깔깔거린다. 외간 남자에게 눈도 보여주지 않는 교조적 무슬림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개방적이다. 여자들이 빵을 굽는 사이에 샤키르 씨는 마당에서 차이를 마시며 희희낙락이다. 저런 건 여자들이 하는 건데 뭘 구경하느냐는 듯, 자꾸 나를 불러낸다. 이번에 자랑하고 싶은 건 자신의 가계도.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는데, 부모가 이란으로 강제 이주됐다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뒤 돌아왔다고 한다. 오스만은 제국의 땅이 넓어지자 효율적 지배를 위해 점령지에 투르크족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앞서 밝힌 대로 이 동네는 씨족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 전체가 샤키르 가문의 땅이다. 친인척도 무려 200명이나 된다. 샤키르 씨의 아버지는 두 명의 어머니에게서 모두 17명의 형제를 낳았다. 그 형제들 대부분이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 형제 축구팀을 만들어도 후보까지 무난하게 확보할 수 있겠다.

 

화덕에 붙인 모습.

다 만들어진 빵.

전통적으로 밀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이곳에서는 사람을 노동력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긴 우리 전통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며느리를 들이면 노동력이 증가한 것으로 본다. 딸을 시집보내는 집에서는 노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돈이나 재물을 받는다. 보통 열다섯 살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 정도 살림을 배우고 열일곱 살쯤 시집을 간다. 최근 이 지역에서는 열네 살짜리 딸을 소 한 마리와 바꾼 일이 있었다. 좀 심했다고 빈축을 샀지만 아비는 당당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아직도 친족 중심의 혼인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 , 결혼은 보통 4촌끼리 한다. 그러다보니 숙모가 느닷없이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일까? 빵을 구우면서 저렇게 다정한 동서지간이 어쩌면 자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왕 결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끔찍한 이야기도 해보자. 대부분은 장 선생이 틈틈이 해준 이야기다.

 

 

아내가 빵을 굽는 시간에 샤키르 씨는 손님들과 희희낙락.

이곳에서는 첫날밤을 보낸 뒤 신부가 숫처녀가 아니었을 경우 가차 없이 살해하는 풍습이 아직도 있다. 신랑이 친정에 연락하면 아버지가 알아서 죽인다. 이유는 집안망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명예스런 일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는 신부 30명이 한꺼번에 자살한 일도 있다. 오죽 비인간적 풍습이었으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조사를 나오기도 했단다. 아무튼 군에 간 오빠가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나와서 집안망신 시킨 동생을 죽였다는 기사를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정 선생이, 말이 나온 김에 들려주는 것이라며 복수살인 이야기도 해준다. 이것 역시 결혼에 얽힌 얘긴데 4년 전 마르딘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형에게 딸을, 즉 조카를 며느리로 달라고 했지만 형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 자신의 처가에 시집보내기로 한 것. 사건은 약혼식 날 터졌다. 총을 들고 나타난 동생이 형의 일가족을 난사한 것이다. 그 와중에 막내아들, 살인자로 보면 막내 조카만 살아남았는데, 잡혀가는 작은아버지를 향해 둘째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더란다. 그건 단순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기다려라는 뜻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 손가락질을 하는 순간 널 끝까지 쫓아가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바로 집안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일도 다혈질인 쿠르드족의 특성 중 하나일까?

 

샤키르 씨 멋지죠?

역시 샤키르 씨 가족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엊그제 한번 연습을 했는데도 절차는 마냥 늘어진다. 비슷한 작별 인사가 오가고 동네사람과 강아지들까지 모두 나와 손을 흔드는 일의 반복. 그래도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음 목적지는 다시 반 호수. 악다마르 섬을 찾아가는 길이다. 호수로 가는 길에는 미루나무들이 많이 서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무. 하늘을 흠모해 끝없이 오르는 나무. 왼쪽으로 거대한 설산이 따라온다. 이름을 물어보니 아르호스 산이란다.

 

멀리서 바라본 악다마르 섬.

악다마르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는 동네는 아탈란이란 곳이다. 이곳에서 섬까지는 4.8km. 유람선을 타고 15~20분 걸린다. 섬은 물 위에 떠 있는 듯 흐릿하게 흔들린다. 섬에 올라가 발을 구르면 푸욱! 혹은 퐁!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 같다. 배를 오르니 선장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지. 메르하바! 콜라이겔슨(수고하십니다) 어쩌고 친한 척 하면서 선장의 빵과 차이를 반쯤 빼앗아먹는다. 수다도 흐드러진다. 그런데 우린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를 나눈 걸까? 호수는 넓고 물은 맑다. 잠시 뱃놀이를 나온 사람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이 호수에도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냥 이야기로 그치는 것만은 아닌 듯, 한때는 일본 탐사대가 본격적으로 탐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카메라를 들고 뱃전에 서서 물속을 주시한다. 괴물이란 녀석이 불쑥 머리를 내밀지 알아? 이왕 온 거 세기적 특종이나 한번 해보자.

 

성십자가대성당.

섬은 가까이 가면서 바윗덩어리에 불과한 실체를 보여준다. 멀리서는 환상적이었는데. 섬이든 사람이든 조금 떨어져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한다. 길이 700m, 너비 600m의 이 돌섬은 둘레의 연장길이가 2km밖에 안 되지만 사연은 하와이만큼이나 많다. 이 작은 섬에도 역사의 굴곡은 큰 흔적을 남겼다. 이곳에 왕궁을 지은 사람은 아르메니아 바스푸라칸 왕국의 초대 왕 기긱1. 915년부터 921년에 걸쳐 궁전과 성당을 지었다. 궁전은 세월 따라 지워졌지만 교회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 교회의 정식 명칭은 성 십자가 대성당’. 수도사들은 간데없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 교회는 1116년부터 1895년까지 아르메니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대성당이었다. 1915년까지도 수도원으로 썼는데 바로 그해 이곳의 수도사들이 모두 학살되고 교회는 파괴됐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였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검은 손이 이 섬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현재 서 있는 건물은 2007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설의 섬.

잠시 교회 마당에 앉아 이 섬에 얽힌 전설을 떠올려본다. 옛날 이 섬에 작은 왕국이 있었다. 왕에게는 타마르라는 이름의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건너편에 사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건너편이라면 배가 출발한 곳쯤 되겠지. 아무리 작은 왕국이라지만 공주와 평민의 사랑이라니. 전설이나 옛날이야기가 선호하는 비극의 조건을 충분히 품고 있는 셈이다. 청년은 밤이면 헤엄을 쳐 섬까지 건너와 공주와 밀회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길수 없었다. 왕이 둘의 관계를 눈치 챈 것이다. 어느 비바람이 거센 밤. 왕은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흔들었다. 공주가 부르는 것으로 안 청년은 폭풍우 속에서도 힘차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왕은 등불을 들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등불을 따라 계속 방향을 바꾸던 청년은 얼마 뒤 힘이 빠져 더 이상 헤엄을 칠 수 없었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 타마르, 타마르였다. 그 사실을 안 공주도 호수에 몸을 던졌다. 지금도 폭풍우가 치는 밤이면 아! 타마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물론 이 섬의 이름 악다마르는 그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 외부의 부조들.

교회 내부의 돔형 천장. 프레스코화들이 대부분 지워졌다.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방. 거의 무너졌다.

이젠 교회 구경을 해보자. 이 교회가 유명한 건 외부 벽에 새겨진 부조들 덕분이다. 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벽의 맨 오른쪽에는 한 남자가 서 있고 사자 두 마리가 거꾸로 서서 발을 핥는 그림이 있다. 우상숭배를 거부했다가 사자 우리에 던져졌다는 다니엘 성인이다. 금단의 열매를 따는 아담과 이브, 사자를 죽이는 삼손, 세례 요한,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 일일이 머리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은 끝없이 이어진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 부속 교회, 기도실 등을 지나 중앙 홀로 들어가게 돼 있다. 중앙 홀의 벽에는 다양한 프레스코화들이 있다. 외부 벽이 구약이라면 내부 프레스크화들은 신약성서를 소재로 했다. 성화들이 상당부분 지워져 있는데다 워낙 등장인물이 많아 나처럼 종교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한 가운데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뒤에서 본 교회. 

언덕에서 바라본 교회와 건너편의 설산.

 

밖으로 나와 교회를 한 바퀴 돌아본다.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던 방들은 거의 다 무너져 있다. 그러든 말든 나무들은 저희들끼리 키를 키우고 열매를 맺으며 세월을 헤아리고 있다. 교회를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간다. 토끼들이 놀던 자리, 양지바른 곳에는 흙들이 부드럽게 풀어져 봄맞이를 하고 있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섬과 눈을 뒤집어 쓴 알투스 산의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수도사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마음 다스리는 일도 쉽지 않았겠다.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세상을 바라본다. 욕심도 미움도 한 뼘의 땅도 부질없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