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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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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성채로 올라가기 전 나는 자꾸 미루나무에 눈을 빼앗겼다.

새벽 두 세 시나 됐을까? 살얼음처럼 얇던 잠은 금세 금이 가고 만다. 민감한 신경줄을 가진 사람은 시차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 몇 시간 늦춰 산다는 것조차 이렇게 힘이 드는구나. 예외 없이 머릿속에는 ‘생각충’들이 바글거린다. 밑 짧은 잠으로는 다 털어내지 못한 피곤을 안은 채 몸을 일으키다 하릴없이 거울과 눈이 마주친다. 익숙하고도 낯선 사내가 하나 서 있다. 이 사람은 왜 이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일까. 근 9개월 만에 나선 긴 여행, 쉬는 동안 제멋대로 이완된 근육들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마음은 서울에서의 번잡을 그대로 껴안고 있다. 얼마 전부터 가슴에 자리한 은은한 통증은 지병으로 자리 잡을 모양이다. 비온 뒤 솟아나는 잡초처럼 자꾸 고개 드는 잡념을 누질러보지만 제멋대로 분열과 번식을 거듭할 뿐이다. 나는 얼마나 더 걸어야 마음에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 창공을 날 수 있을까.

멀리서 바라본 반 성채. 역광이라 별로 아름답진 못하다.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본 반 성채.

아침 일찍 찾아간 반 성채(Van Kalesi) 앞에서 잠시 문제가 생겼다. 영상카메라는 들어갈 수 없으니 수도인 앙카라에 가서 허가증을 받아오란다. 여기서 앙카라가 얼마나 먼 곳인데. 결국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는 것이다. 유연성 없는 관료주의에 기가 질린다. 내가 멘 스틸카메라는 되고 뒤를 따라오는 영상카메라는 안 된다? 요즘은 대부분 전문가용 스틸카메라를 영상용으로 쓴다. 다만 필요에 따라 보호용 외장 케이스나 마이크를 장착하기 때문에 커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외장만 벗기고 올라가면 되겠네? 아주 간단한 잔머리에도 무사통과다.

 

대부분은 흙벽이다.

반 호수의 동쪽이자 반 시 외곽 거대한 바위산에 쌓은 토성(土城). 하얀 눈을 머리에 쓴 반 성채는 마침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장엄하게 빛난다. 이 성은 고도의 문명을 구축했던 우라루트 왕국의 사르두르 1세에 의해 BC 825년에 세워졌다. 3,000년 가까이 된 고대의 유물이란 뜻이다. 너비는 70~80m에 길이 1.5km, 높이는 80m.

2월 말인데도 눈이 녹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관람객은 거의 없다. 두껍게 쌓인 눈 위에 어제 찍힌 발자국이 분분하게 남아있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저 아래로는 성냥갑처럼 작은 집들이 낮게 엎드려 있다. 마치 미니어처로 꾸며진 동네를 보는 것 같다. 반호수로 가는 길에는 키 큰 미루나무들이 그림처럼 서 있다. 하늘에 닿으려는 열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곳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가슴에 잔물결로 자리한다. 긴긴 세월 이곳이 전쟁터였다는 사실을 누가 일부러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셀 수없이 많은 왕국과 권력이 이곳에서 영욕을 맛보았다. 지리적으로 근접한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리스‧로마‧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셀주크와 오스만투르크. 그들은 이 성을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 각자의 흔적을 조금씩 남겼다. 그래서 각기 다른 건축자재가 섞인 복합적 구조의 성이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바위 위에 쌓은 흙벽. 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기도 했고 흙벽돌에 밀짚 같은 섬유질을 넣기도 했다. 과거 우리 땅에서 흙벽돌을 찍을 때 볏짚을 썰어 넣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튼튼하게 짓기 위해 흙에 타조알을 섞기도 했단다. 그런 다양한 공법들이 세월과 지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별 보호조치가 없기 때문에 날마다 비바람에 마모돼 가고 있다.

 

멀리 반 시내가 보인다.

성 꼭대기에 올라가도 특별히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다. 우라르트 왕 아르기스티 1세의 무덤 등 몇몇 유적이 있지만 특별한 감흥을 줄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반 시내와 반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경치가 일품이다. 내 시선을 잡고 오랫동안 놓지 않은 것은 남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원. 아니, 폐허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이는 거대한 공터다. 성에서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다. 성 위에는 가드레일 같은 것을 전혀 해놓지 않아서 나 같은 중증 고소공포증 환자는 언뜻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폐허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역사의 비극 속에서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기둥은 찬바람 속에 을씨년스럽다. 세상에는 살아 있어서 슬픔을 전하는 것도 있구나. 지금 내려다보이는 저 폐허가 바로 원래의 반이 있던 곳이다. 새로 세워진 반의 반대쪽인 셈이다. 그 도시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았다. 하지만 1915년 이후 이 인근에서 아르메니아인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3,000년 동안 번성했던 도시도, 그곳에서 누대로 살아온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저렇게 황량한 폐허만 남은 것일까.

 

흙벽들이 세월에 녹아가고 있다.

입에서 꺼내기조차 저어돼 미뤘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여기서 털고 가야겠다. 바다처럼 넓은 반 호수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5,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한때 번성을 누렸던 우라루트 왕국이 사라진 다음, 이곳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그 사이에 숱한 왕조가 명멸했던 사연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때는 페르시아와 로마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고 비잔티움 제국을 거친 뒤에는 이슬람시대가 열렸다. 1045년 셀주크투르크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한 아르메니아 왕국의 1,000년 역사는 기록 속으로 사라진다. 셀주크투르크의 뒤는 오스만투르크가 이었다. 왕국이 사라진 뒤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이곳에 삶터를 잡고 살아갔다. 사람살이에 왕국이나 제국이나 공화국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참담한 비극이 닥친 건 근세 들어서였다.

 

저 아래 보이는 공터가 원래 반이 있던 곳.

1877년 발발해 2년 동안 계속된 오스만투르크-러시아 간 전쟁에서 오스만이 패한 게 화근이었다.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에 사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투르크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더욱 증폭됐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 격이지 뭐. 그런 와중에 1894년 오스만투르크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세금을 고의적으로 무겁게 매기자 반란이 일어났다. 오스만과 쿠르드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학살을 시작했다. 1894년 이후 2년 동안 10만 명에서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4년 오스만은 러시아를 재차 침공했지만 역시 지고 말았다. 오스만은 국경지대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1919년 4월20일 반에서 군인들에게 희롱당하는 여인을 구하려던 아르메니아 청년 둘이 사살 당하자 또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빌미로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들이 줄줄이 체포되고 모든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법이 입안됐다. 강제 수용되는 과정에서 숱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범죄와 기아, 질병으로 죽어갔다. 수용소 안에서도 조직적인 학살이 이뤄졌다. 3,000년 역사의 반 시는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미나레트만 을씨년스럽다.

한마디로 증오와 광기가 난무한 인종청소였다. 이 과정에서 죽은 사람을 터키 측에서는 30만 명이라고 강변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은 150만 명이이라고 주장한다. 제 3자적 시각으로도 최소한 50만에서 60만 명 정도는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주 먼 옛날이 아닌 190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세기의 비극이다. 어떤 설명으로도 그 같은 범죄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스만투르크를 이어받은 터키에게도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일 수밖에 없다. 내 역시 아무리 터키에 우호적이라고 해도 이 비극을 외면하고 갈 수는 없다. 반 호수를 둘러싼 너른 평야에서 양떼를 몰고 밀농사를 지으며 평화의 노래를 불렀을 아르메이아인들. 그들은 간데없고 기둥 몇 개만 남아 비극을 애기해주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가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아득한 절벽은 또 아득한 세월이기도 하다.

성의 맨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반 호수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풍경 앞에서는 역사가 흘렸던 숱한 피조차 무색해진다. 성의 맨 꼭대기에 올라 넋을 놓고 사방을 바라본다. 그러다 선글라스를 쓰고 언덕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운전사 베이셀과 눈이 마주친다. 이 친구는 선글라스만 씌워놓으면 영화배우 부럽잖게 멋있다. 느닷없이 장난기가 돌아 손가락을 치켜들며 “You look great” 했더니 이 친구 “Thank you” “Thank you” 어쩔 줄 모른다. 짧지만 영어를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대화는 문제가 없다. 베이셀은 칭찬 받아 마땅한 친구다. 터키에 갈 때마다 보는 것이지만 운전사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차 안에서 쉬거나 본인의 볼일을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친구는 늘 제작팀을 따라다닌다. 그것도 그냥 구경 삼아 가는 게 아니라 트라이포드나 렌즈 가방을 들고서.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Thank you”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 친구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고백하듯 말한다. “I am happy” 그래, 그래. 나로 인해 네가 행복하다면 나야말로 행복하다. 사실은 나도 너를 볼 때마다 행복해. 세상에 성실한 청년만큼 아름다운 존재가 어디 있으랴. 아르메니아인 인종청소가 떠오르는 바람에 마음에 드리워졌던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저 멀리 반 호수가 보인다.

양지바른 언덕 쪽엔 벌써 봄이 푸르게 깔려있다. 땅은 젖가슴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틈틈마다 작은 풀들을 밀어올리고 있다. 아, 먼저 살다간 이들이여. 그대들의 욕망이 아무리 하늘을 찔러도 이 풀잎 하나만도 못한 것을. 그대들은 사라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해매다 싹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 홀로 미리 온 봄을 만끽한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