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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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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키르 세케 씨의 딸과 아들. 아이들부터 사진을 찍어주면 그 집에서 환영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샤키르 세케 씨의 농가를 찾은 건 애당초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저 시골길을 지나던 중이었을 뿐이다. PD의 제안이었겠지. 그는 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니까.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얼마나 양을 많이 찾아다녔든지 양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양을 사고파는 시장에 가봤으니 이왕이면 목축 농가도 들러보자는 PD의 주장을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내 일만 많아진 거지 뭐.

 

샤키르 씨네 집. 왼쪽이 정부에서 새로 지어줬다는 집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고백하고 가자. 방송이 나간 뒤에도 여러 번 들은 질문이지만 세계테마기행에는 각본이 없다. 오로지 무대뽀 정신만 갖고 다닌다. 촬영기간 내내 대본을 받거나 연출 지시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든 걸 맨땅에 헤딩으로 해결하라니. 촬영장소를 미리 헌팅한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출연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길을 지나다가 저만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럼 정 PD가 말한다. “그림 괜찮지 않아요?” , 말은 쉽지. 안 괜찮다면 안 찍을 거야? 이미 익숙해진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한번 올라가볼까요?” 그러면 카메라가 따라오고 나는 안녕하세요보다 더 익숙해진 인사 메르하바!(안녕하세요)”를 외치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워낙 방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미리 섭외할 틈도 없고, 그럴 인력도 없다. 또 섭외를 해놓으면 찍을 때 뭔가 어색하다는 카메라감독의 지론도 한몫을 했다. 그래, 출연자 피 짜내서 좋은 영상 실컷 만들어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피디나 카메라 감독, 코디까지 호흡이 척척 맞는 촬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는 없다.

 

비닐하우스 속의 양들.

이쯤에서 본론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길을 가다 무작정 찾아들어간 농가가 샤키르 씨의 집이었다. 알라쾨이라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양은 봄부터 가을까지 방목을 하지만 겨울에는 우리에 두고 먹이를 주기 때문에 그림이 될지 여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도 무대뽀 정신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구멍가게에 들러 양치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뒷집을 가리킨다. 그걸 말로 하면 이 동네는 모든 집이 목축을 한다는 얘기다. 무조건 찾아가 기척을 하니 초로의 사내가 나온다. 사내 뒤로는 남녀 꼬마 둘이 따라 나온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첫 인상이 할아버지 같았던 사내, 샤키르 씨는 기껏 50대 초반이었고 손자손녀 같던 아이들은 아들과 딸이었다. 아무튼 어김없이 메르하바”, “호쉬 겔디니스”(어세오세요) 인사가 오간 뒤 사정을 얘기하니 타맘”(OK) “타맘이 터져 나온다. 아무 약속도 없었는데도 마치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거리낌이 없다. 아니, 슬쩍 훔쳐보니 이게 웬 떡이냐하는 표정이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통째로 내 집에? 알라신에게 감사기도라도 드릴 태세다.

 

지진의 흔적. 여기도 갈라지고 저기도 무너지고.

앞장서서 걷는 샤키르 씨의 걸음걸이에 신명이 붙는다. 이거, 일이 커지겠는 걸. 그를

따라가 보니 안마당에 사과나무까지 심어놓은 꽤 넓은 집이다. 이곳도 마당이든 어디든 가축의 배설물로 도배를 했다. 마른 데를 골라 디디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했던가. 밟자, 밟아! 샤키르 씨가 먼저 축사로 안내한다. 비닐하우스 같은 가건물의 문을 열자 꽤 추운 날씨인데도 열기가 확 밀려나온다. 어디 열기뿐이랴. 기다렸다는 듯 코끝으로 달려드는 잘 발효된 분뇨 냄새.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축사에 몸을 들이미는 순간 헉! 하는 비명이 터진다. 생각해 보라. 컴컴한 곳에서 수백 쌍의 눈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장면을.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좁은 곳에 서 있는(누울 틈이 없어서인지 원래 그런 건지 모두 서 있다) 양의 숫자가 무려 150마리라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당나귀도 있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아무튼 그들도 주인과 낯선 사람을 구별할 줄 안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밥 때도 아닌데 느닷없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온 이상하게생긴 사내.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입만 터졌다면 가축시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동이 벌어졌을 뻔 했다. 아무튼 양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든 말든 나는 그곳에 들어가야 했다. ?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오니까. 분뇨, 열기, 냄새, 그리고 경계를 담은 300개의 눈동자.

 

기어이 2층까지 올라가 지진피해를 설명한다.

양과 염소들은 하루 종일 축사에 있다가 밥 때만 하루 두 번 바깥 구경을 한다. 원래는 축사가 따로 있었다는데 2011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거의 무너지는 바람에 이곳에 임시 축사를 지었다고 한다. 축사는 건성건성 소개하던 샤키르 씨가 나를 끌고(나 하나만 움직이면 수행원들이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허름한 건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곳을 일일이 설명해준다. 여기는 이렇게 갈라졌고 저기는 저렇게 무너졌고. 정작 샤키르 씨가 내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정부에서 새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내가 그 은혜로운 사실을 잊을까봐 여러 번 반복한다.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새 집이 생겼으니 그에겐 불행이 행운이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양에 올인하고 싶은 제작진의 소망과는 반대로 샤키르 씨는 오로지 지진에 올인할 태세다. 원래는 인부들의 숙소였다는 2층까지 데리고 올라가 일일이 피해상황을 브리핑한다.

 

건초더미에서 건초를 내리는 샤키르 씨.

그렇게 다니는 사이에 나는 이 집 막내아들과 친구가 돼 버렸다. 귀염둥이로 자라서인지 별 거침이 없는 이 녀석은 계속 나를 졸졸 따라 다닌다. 카메라 감독 좀 피곤하겠는 걸. 이 집으로는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 위로 딸만 넷이 있었는데 끝없는 노력 끝에 이 아이를 낳았다고 자랑한다. 아직 아들 선호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반증이다. 유목민들의 피가 흐르는 이곳 사람들이야말로 아들을 귀하게 여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들을 바라보는 샤키르 씨의 눈길은 귀한 보석을 보는 듯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

 

건초를 저렇게 싣고 가서 눈 위에 뿌린다.

2지진피해현장에서 내려와 잠시 쉴까했더니 샤키르 씨가 또 은밀한 몸짓으로 다가오더니 손목을 잡아끈다. 카메라 따위는 오든지 말든지. 주인이 다큐멘터리의 진행에 연출까지 다 맡아버리니 PD는 할 일이 없어진다. 창고의 문을 여는 그의 얼굴에 환희가 꽃으로 피어난다. 대체 뭐가 있길래 보물창고를 여는 표정이지? 들어가 보니 커다란 트랙터가 점잖게 앉아있다. 얼마나 아끼는지 겨우내 닦고 문질러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롤스로이스도 이 정도로 빛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끼고 아끼던 걸 보여줄 때의 그 희열에 가득 찬 몸짓. 하긴 농부에게 이만큼 소중한 재산이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2대 보물, 즉 아들과 트랙터를 모두 본 셈이다.

 

마당에서 딴 사과. 정말 맛있다.

카메라가 스케치를 하는 동안 샤키르 씨가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쟁반에 사과를 가득 담아 내온다. 지난 가을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수확한 거란다. 한 조각 입에 넣어보니 이럴 수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지금까지 먹어본 사과 중에 가장 맛있다. 어떻게 사과에서 이런 맛이 나지? “촉 레젯틀리, 촉 레젯틀리”(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저절로 나오는 나의 예찬에 샤키르 씨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다. 그가 또 뭘 보여줄 게 없나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 손을 잡아끌자 이번엔 정 PD가 과감하게 막아선다. 계속 끌려 다니다 보니 작업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이젠 양 먹이 주는 걸 찍고 싶은데.”

타맘(OK), 타맘

그의 사전에 ”(안 됩니다, 없습니다), “하이으르”(아니요) 같은 단어는 없다.

 

양들이 풀을 맛있게 먹고있다. 그 사이에 한 녀석은 탈출을 감행한다.

밥을 먹이긴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그는 서슴없이 마른풀을 손수레에 싣는다. 여름에 베어서 말린 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풀이다. 겨우내 먹여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모든 식구가 꼴을 베는데 동원된다고 한다. 이래서 식구가 많은 집이 부자라니까. 양들은 겨우내 이렇게 들어앉혔다가 들판에 봄을 알리는 아지랑이가 깔릴 무렵 교배를 시키고 풀이 자라서 방목을 시킬 무렵 새끼를 낳게 한다. 초유를 아기양이 먹은 다음부터 상품이 될 수 있는 젖을 짠다. 절차상의 실수로 겨울에 낳는 새끼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그 원칙을 따른다. 샤키르가 풀을 거의 날랐을 무렵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양을 풀어서 길가로 몰아간다. 바깥구경에 얼마나 신이 났는지 가끔 엉뚱한 길로 새는 녀석도 있기 때문에 한곳에 모으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나도 카메라와 배낭을 벗어던지고 양몰이에 나선다. 결국 흥에 겨워 샤키르 씨의 손에서 풀 나르는 손수레까지 빼앗는다. 헉헉! 이것도 쉽지 않은 걸. 그래도 이 녀석들아. 너희는 운이 좋은 줄 알아. 나 같은 스타에게 밥 얻어먹는 게 쉬운 줄 아냐?

 

 

샤키르 씨네 가족. 동네 아저씨 하나 동네 꼬마 둘도 끼어있다.

양들이 먹이를 다 먹고 나니 이번엔 사람이 출출하다. 그걸 눈치 못 챌 샤키르 씨가 아니다. 어느 새 마당에는 점심이 한 상 차려졌다. 집에서 직접 구운 빵, 뒤뜰에서 뜯은 약초를 넣어 만들었다는 치즈, 조금 거칠지만 개운한 차이까지. 차려진 건 점심뿐이 아니다. 제작팀이 왔다는 게 벌써 소문이 났는지 동네 사람들이 슬슬 모여든다. 내가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아니지. 잘만 하면 TV에도 나올 텐데모두의 얼굴에 그런 결의가 씌어있다. 헌데 재미있는 건 서로 아저씨 아니면 조카다. 샤키르 씨에게 물어보니 이 동네 사람 모두가 일가친척이란다. 한 마디로 씨족사회의 원형을 보고 있는 셈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수다는 가능하다. 그 사이에 셋째 딸, 넷째 딸과도 친구가 됐다. 특히 학교에 다니는 셋째 딸은 무척 똑똑하다. 나를 선망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더니 장 선생에게 저 사람이 한국의 유명한 앵커냐고 묻는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걸 보니 커서 훌륭한 방송인이 될 것 같다.

 

차이를 다 마시고 잔을 놓는 순간 샤키르 씨가 또 은근하게 나를 부른다. 나도 이쯤 되니 그의 부름이 조금 겁난다. PD 역시 은근히 피하는 눈치다. 이번엔 뭘 자랑하려고? 버텨봐야 소용없다. 결국 따라가는 수밖에.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지진 피해농가에게 정부에서 지어줬다는 새 집. 아까 피디가 방해하는 바람에 자랑의 순서에서 빠진 게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집의 형태는 거의 갖췄다. 샤키르 씨가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내게 들이대고 이것저것 설명한다. “여기는 큰 방이고, 여기는 애들 방, 주방도 멋있지?” 결국 화장실 앞에서 촉 귀젤!(엄청 멋져요)”을 선언하고서야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먼 나라 사람에게 자신의 새 집을 보여주고 싶어서 가슴 졸이는 소박한 마음이라니.

 

헤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가족사진. 이번엔 동네 사람이 좀 더 많이 섞였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이별은 오는 법. 이젠 정말 떠나야할 시간이다. 목축 농가를 살짝 스케치 한다는 게 거의 한 나절 이상을 머물렀으니. 하지만 아무리 짧은 정이라도 이별이 그리 쉬운가. 동네 사람들은 물론 아이들, 강아지까지 모두 나와 손을 흔든다. 저 순박하고 선량한 눈들.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는데 막내가 달려와 내 손을 꼭 잡고 자꾸 뭔가 이야기한다.

? 뭐라고?”

사진! 사진 꼭 보내달라고요

, 사진! 보내주고 말고. 당연히 보내줘야지. 아이와 약속을 하느라고 이별의식은 좀 더 연장된다.

호쉬차 칼른”(안녕히 계세요)

귤레 귤레”(안녕히 가세요).

이 길고 긴 이별의식 오늘 중에 끝날 수 있을까?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