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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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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 밤거리는 조금 음울하다.

입영장정들의 무운(武運)’을 빌며 차에 오른다. 다치지 말고 마음 상하지 말고 부모 품으로 무사히 돌아가렴. 이 세상에서 싸움과 분쟁이 사라지면 무기상들이 모두 굶어 죽을까봐 그렇게 부지런히들 싸우는 걸까? 이쯤에서 다큐 제작팀의 인원점검을 하고 갈 필요가 있겠지. 우선 한국에서 출발한 사람은 나 외에도 정 모 PD, 조 모 카메라 감독이 있다. 그리고 현지에서 합류한 코디 장 선생과 운전사 베이셀. 총 다섯 명이다. 덩치 큰 사람들이 장비까지 들고 앉으니 차는 몸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빡빡하다. 이 상태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야하다니. 대장정인지 대고생인지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반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45. 노란색 커튼이라도 치는 듯 벌써 석양 기운이 곳곳에 드리우기 시작한다. 저 멀리에서는 어둑어둑한 산그림자도 걸어 나온다. 아무리 고원지대라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일찍 먹고 일찍 자기경진대회라도 열리는 날인가? 장 선생 말로는 평상시 해지는 시간이 이렇단다. 그 와중에도 나는 여행자 특유의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없다. 예상보다 더 삭막해 보이는 도시다. 눈이 덮인 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 터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삭막한 풍경을 많이 봐왔지만 여긴 정도가 좀 더 심하다. 어떻게 저렇게 솔직한 민둥산이 있을 수 있담. 차가 시내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낯선 풍경이 눈으로 들어온다. 저녁안개처럼 희끄무레한 기운이 일시에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스모그인가? 아니면 해발 1,700m 고원 특유의 현상? 이런 때 물어보라고 장 선생을 모신 것이지.

 

번화가. 배회하는 청년들이 많다.

지금 깔린 게 뭡니까?”

난로연기예요

? 난로연기가 이렇게 일시에 온 도시를 덮어요?”

연기라고 사연이 없을 까닭은 없지. 2011년 지진을 복구하면서 가스가 보급됐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값싼 석탄난로를 땐단다. 어느 곳이든 가난은 사람을 불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우리네 시골 어른들이 기름보일러를 설치하고도 화목보일러를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도 낮에는 냉기 속에서 견디다가 저녁 무렵이 되면 일제히 난로를 피우는데, 그때 나오는 연기가 온 도시를 덮는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후줄근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도시를 덮은 회색연기. 마음이 무겁다. 이쯤에서 반이란 도시를 좀 들여다봐야겠지. 대체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이길래.

 

터키 동부 중에서도 맨 끝에 있는 반(VAN)은 반주()의 주도로 반 호수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BC 9~6세기에 번영을 누렸던 우라르투 왕국의 수도였다. 왕국의 역사는 BC 2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때는 아르메니아 고원 전역을 지배할 정도로 강성했다. 이 왕국은 아라라트라는 이름으로 구약성서에도 등장한다. 한 마디로 지금은 변두리의 초라한 도시에 불과하지만 왕년엔 한 가닥 했다는 얘기다. 반은 그 후 아르메니아 왕국의 중심지로 시대에 따라 숱한 영욕을 겪는다. 그리스, 로마를 거쳐 동로마(비잔티움)제국에 의해 합병됐다가 1045년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이를 기점으로 1,000년 이상 맥을 이어온 아르메니아 왕국은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나라는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 법이니 아르메니아인들은 계속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비극은 1900년대 초에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벌어지면서 그들의 터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금의 도시 반은 1920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는 뒤에 다시 이야기 하자. 박제된 역사를 더 이상 캐어본들 무엇하랴. 로마 시대 살았던 장삼이사나 오스만 시대에 잘 나갔던 갑남을녀도 이제 한 줌 흙으로 스러진 것을.

 

 

반 주 전체에는 약 100만 명, 주도인 반에는 30만 명이 산다. 앞에서 밝힌 대로 대부분이 쿠르드족이고 투르크족은 약 15%를 차지한다. 산악지역에 사는 일부 주민은 터키어를 모른다. 골짜기마다 별도의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쿠르드족끼리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동부의 이슬람은 교조적 색채가 강해서 서부의 유연한이슬람과는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다. 경전이고 뭐고 무대포로 믿는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동부지역이 대부분 그렇지만, 반도 쿠르드족과 투르크족 간의 괴리가 심각하다. 15%의 투르크족이 관료교사은행원 등 소위 고급 직종을 차지하면서 상류사회를 독점하고 있다. 이곳의 투르크족은 쿠르드족을 검둥이’(쿠르드족의 피부가 좀 까만 편이긴 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고 부르면서 무시하기도 한다.

 

청년들이 길거리에 모닥불을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목축이나 농사에 참여하지 않는 쿠르드족 중에는 실업자가 많다. 산업화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오고서도 빈둥빈둥 놀거나 일자리를 찾아 서부의 대도시로 흘러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서부 사람들이 동부 사람들은 할 일이 없으니까 아이만 낳는다고 농담을 할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어서 아이를 7~8명씩 낳는 건 보통이다. 극심한 취업난을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운전을 맡은 베이셀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안 돼 여행사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 그나마도 일이 없으면 놀아야 하는 임시직이다. 그래도 베이셀은 나은 편이다. ‘반 사람들은 생업이 밀수라는 말도 있다. 말 그대로 헤로인무기기름(석유) 밀수가 판치는 곳이 반이다. 기름 밀수는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수법은 이렇다. 먼저 트럭의 연료탱크를 최대한 크게 개조한다. 국경을 넘어 기름이 싼 이라크로 간다. 탱크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돌아와서 싸게 판다. 제재는 없느냐고? 말리기는커녕 교통경찰도 밀수해온 기름을 파는 곳에서 주유를 한단다. 또 이 나라에서는 개인도 총기 소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무기 반입도 빈번하다. 동부에 가서 운전할 사람은, 교통사고가 나면 성격 죽이고 바짝 엎드리는 게 좋다. 괜히 열 받게 했다가 총을 빼드는 수도 있다. 자나 깨나 몸조심이 최고지.

 

저녁으로 먹은, 아니 먹으려고 했던 모듬케밥.

운전을 하던 베이셀이 장 선생에게 뭐라고 말을 건넨다. 제작팀 일행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얘기란다. 대단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 떼도둑인지 사기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초대부터 하겠다니. 베이셀은 부모님과 함께 산다. 위로 형이 하나 있는데 분가한 상태다. 앞으로 계속 겪을 일이지만 이슬람교도들의 손님 접대는 유난하다. 손님을 신과 동급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가장 좋은 자리, 요즘으로 보면 난로 옆에 모신다’.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먹을 것을 내오고 차를 끓인다. 숙소로 가는 길 곳곳에 공터나 비어있는 건물이 눈에 띈다. 20111023일 일어났던 반 지진의 잔해다. 1년도 훨씬 넘었지만 복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반의 북동쪽 19km를 진앙지로 해서 일어났던 반 지진은 터키 동부를 강타, 숱한 인명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이 지진 소식은 우리나라에도 세세하게 전해질만큼 엄청난 재앙이었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에서 양이나 키우며 순박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날벼락을. 사실 이 지역의 지진은 2010년이 처음은 아니다. 근래만 해도 20047월에 발생한 5.2도의 지진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해 11월에는 홍수로 많은 집들이 물에 잠긴 것은 물론 이 지역 사람들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가축을 숱하게 잃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이 땅에 기대어 산다.

 

일행이 묵었던 호텔.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진의 진앙지에 와 있는 셈이다. 하긴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내가 출국하기 전에 그쪽 분쟁 지역 아냐? 지진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염려해주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무심하고 무딘지. 분쟁이나 지진 같은 건 아예 걱정의 대상이 못된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제발 무슨 일이 좀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을 이번 여행의 코스에 포함시키는 데는 내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 워낙 급하게 일정을 잡는 바람에 목적지조차 결정할 틈이 부족했던 제작진에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차곡차곡 주입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제법 영악한 여행자인 셈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빈 자리가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이 있던 자리.

차는 삭막한 도시를 내처 달린다. 시내 도로는 대체로 2차선이다. 이곳도 도로 사정에 비해 차들이 많은 편이다. 퇴근 길 차들이 마구 엉킨 가운데 베이셀이 과감하게 유턴을 한다. 베이셀 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차들이 신호와 상관 없이 눈치껏방향을 바꾼다. 먼저 돌고 먼저 가는 놈이 임자다. 옆에서 달리던 경찰차가 스피커로 뭐라고 떠드는데도 씨도 안 먹힌다. “그러지 마세요가 아니라 적당히들 하세요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딱지 떼는 거 아냐? 불안한 건 나 혼자, 경찰차는 가던 길을 갈 뿐이다. 인심이 후한 거야? 아니면 이 정도는 일상인 거야? 어느새 거리에는 어둠이 주단처럼 깔렸다. 하나 둘 네온불이 켜지지만 화장독 깊은 늙은 들병이의 얼굴처럼 도시는 좀체 화려해질 줄 모른다.

 

새벽에 커튼을 여니 이런 새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의 간판에는 분명 HOTEL이라고 씌어있는데 방에 들어가 보니 옛날 우리의 여인숙과 다를 바 없다. 시나브로 늙어가는 여인네가 쟁반에 노란 주전자와 수건을 담아 오고 스위치를 누르면 흑백텔레비전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켜질 것 같다. 침대에 네 다리가 붙어있고 샤워부스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하지만 잠자리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룻밤 춥지 않게 등 기댈 곳이 있으면 호사인 게지. 기내식이 미처 다 소화되기 전이지만 이른 저녁을 먹자는 말에 따라나선다. 도심에는 젊은이들이 물고기 떼처럼 유영하고 있다. 언뜻 봐도 특별한 목적지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는것이다.

이 친구들은 왜 이러고 다녀요?”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대부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친구들이거든요. 특별히 시간 때울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 그냥 배회하는 거예요

이 정도면 배회족이라는 말도 나올 것 같다. 청년백수들이 물고기처럼 부유하는 도시. 인구비율로 볼 때 이 도시는 특이할 정도로 젊다. 45세 이하가 전체의 70%나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다니.

 

잠을 잤더라면 못 볼뻔한 하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검은색이나 회색 옷이 주조를 이룬다. 밝은 불빛으로도 음울한 기운을 다 지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렌지색 계열의 내 옷은 극도로 튄다’.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다. 반에서의 첫 식사는 모듬케밥. 어딜 가나 잘 모를 때는 일단 모듬을 시켜보는 것도 지혜다. 일종의 분산투자인 셈이지. 하지만 케밥이 나오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속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 조각도 먹을 수 없다. 특별히 못 먹을 음식은 없는데. 쇠고기, 닭고기, 양고기, 고추, 양파, 토마토 구운 것. 가만히 이유를 생각해보니 작년에 일어났던 사고의 여파다. 지난여름 터키 남동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심하게 체해서 일주일 가까이 먹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먹었던 음식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먹지 않으면 촬영이 무척 힘들어질 텐데.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맥주라도 한 잔 마실까 했지만 꿈도 꾸지 말란다. 하긴 골수 이슬람인 이 지역이야말로 술이 있을 턱이 없다. 결국 첫날 저녁은 굶주림으로 때울 수밖에.

 

새들이 첨탐 위로 까맣게 작아진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멀리 있다. 꼭 시차 때문은 아니다. 눕자마자 이 생각 저 생각이 해일처럼 뇌리를 덮치더니 저희들끼리 분열을 반복한다. 쓸쓸한 마음에 자꾸 이불을 끌어당겨보지만 달라질 기미는 없다. 전전반측, 이리 저리 돌아눕는 게 불면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다. 밤은 깊어 새벽이 가까워진 기색이다. 오지 않는 잠에 저항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낫다. 결국 침대에서 내려온다. 바닥의 양탄자를 밟는 순간 뭔가 질컥! 하는 게 밟힌다. 뭐지? 이런, 양탄자가 전부 물에 젖어있다. 이곳은 샤워한 물을 하수구로 보내는 대신 방으로 끌어들이는 모양이다. 결국 수상침대 위에 누워 있던 셈이네. 방바닥은 바다요 침대는 배라. 제법 낭만적인 걸.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연다. 내 눈길을 받은 세상이 부스스 깨어난다. 지진으로 무너진 빈집들이 유난히 클로즈업 된다. 텅 빈 도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어디선가 날아오른 새들이 모스크 첨탑 위로 까맣게 작아진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