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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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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비잔티움 제국 시절에 세운 다리의 교각.

강변을 함께 거닐면서 압둘라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저건 뭐야?”

?”

저 절벽에 파인 개미집 같은 흔적

, 저거. 전에는 동굴이었어. 지진으로 바위 한 겹이 떨어지는 바람에 저렇게 반쪽만 남은 거지

동굴? 무슨 동굴을 저렇게 수직으로 파 내려갔지?”

저 바위산 위에서 살던 사람들이 강으로 물을 뜨러오기 위해서 뚫은 굴이야. 산 위에는 성까지 있는 걸

사람의 힘으로 저 바위에 굴을 뚫었다고? 그 꼭대기에서 강가로 물을 뜨러왔다고? 저렇게 험한 수직굴을 통해서? 어떻게 내려와? 밧줄 타고?”

내 질문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쉬지 않고 쏟아진다. 압둘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베어 문다.

약간 사선으로 굴을 뚫고 계단을 만든 거지

인간의 의지는 대체 어디쯤이 그 끝이란 말인가. 옛날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다니다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대체 왜 그러고 살아야 했을까?

왜 그 꼭대기에서 살았던 건데? 강가에서 살면 좋잖아. 물도 뜨기 쉽고 또 물고기를 잡기도 좋고.”

강이라는 게 꼭 좋은 때만 있는 건 아니잖아. 모든 걸 주지만 모든 걸 쓸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모든 걸 주지만 모든 걸 쓸어갈 수 있는 강. 인류의 젖줄 티그리스 역시 생명의 강이자 죽음의 강이었구나. 그래서 인간들은 살기 위해 강가로 오고 또 죽지 않기 위해 강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겠구나.

 

저 꼭대기에서 강까지 수직에 가까운 동굴을 통해 물을 뜨러 다녔다.

압둘라는 무너진 다리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옛날에 대상들이 건너던 다리야. 밀가루하고 건포도, 오렌지를 싣고 이라크 바스라에서 출발한 낙타와 상인들이 이 다리를 건너서 서쪽으로 갔어. 여기가 바로 실크로드의 중요한 루트 중 하나였거든

그땐 하산케이프가 엄청나게 번성해서 길가에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마치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마냥 설명해준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고향과 옛 사람들이 남긴 유산을 사랑하는지 절절하게 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지킬 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노력했던가. 부끄러움과 자괴심으로 잠시 망연해진다. 그는 사진 찍을 포인트와 사진 찍기에 적절한 시점까지 가르쳐 준다. 교각에 깃들여 살고 있는 비둘기들도 불러낸다. 내게 카메라를 준비하라고 이른 뒤 손뼉을 딱! 치면 비둘기들이 힘차게 솟아오른다. 훌륭한 모델이긴 하지만 쉬고 있는 비둘기들의 노고가 큰 것 같아서 그만 두라고 일러도, 내가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을 때까지 계속한다. 비둘기들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한 게 틀림없다.

 

 

압둘라가 띄워준 비둘기가 촬영감독의 뒤로 날아가고 있다.

압둘라가 장 선생을 통해 나에 대해 묻는다.

이 사람 아이가 몇 살이래요?”

스무 살 넘은 아들이 둘이나 돼? 정말요? 난 내 또래인 줄 알았는데

그가 뒤로 넘어갈 듯 과장된 몸짓을 한다. 원래 외국인끼리는 서로 나이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거야. 그래도 그렇지. 이제 마흔 살밖에 안 먹은 친구가 나를 또래로 생각한 건 좀 심했다. 하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나는 그에게 친구가 되자고 청한다.

우린 이제부터 친구야. 오케이?”

그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한 여인이 양을 몰고 온다. 많아야 열 댓 마리? 곁에는 손녀인 듯 작은 꼬마가 따른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그리고 무너진 교각, 그 아래에서 양을 몰고 천천히 다가오는 여인. 여행자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마음에 쳐놓은 모든 결계는 풀어지고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난다.

 

 

양들을 몰고 교각 아래로 나타난 할머니와 손녀.

양떼가 지나가고 나니 이번엔 강 위에 기묘한 보트가 나타난다. 커다란 타이어에 나무판자를 얼기설기 댄 말 그대로 수제보트다. 어라? 저건 또 뭐지? 압둘라에게 물었더니 티그리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란다. 아침에 그물을 쳤다가 점심 때 걷으러 오는데 지금이 마침 그 시간이라고 소상하게 설명해준다. 어부가 강가로 나오기를 기다려 얘기를 나눠본다. 그가 걷어낸 그물에는 물고기가 열 댓 마리 쯤 붙어있다. 마치 은어처럼 생긴 물고기의 이름은 인데 가시가 많아서 주로 튀겨먹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많이 잡힌 건가요?”

아뇨. 오늘은 조금 잡혔네요. 이 강에 있는 물고기가 어디 가겠어요? 내일은 많이 잡히겠지요

우와! 이런 달관의 답변이라니. 강 하나를 통째로 자신의 수족관으로 만들었구나.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먹고살기 힘들다고 징징거리기 마련인데. 옛날 강태공처럼 득도를 한 어부인가? 이렇게 잡은 고기는 1kg3리라에서 4리라 정도에 판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돈으로 2,000원 남짓인데, 생활이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부는 무슨 말이든 “No problem”이다. 그가 아는 유일한 영어다. 그런 마음이라면 그 이상 배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댐이 완공되면 강이 사라질 텐데 어떻게 할 거예요?”

이사 가야지 어쩌겠어요? No problem”

그래도 먹고살기 힘들어질 텐데

, 그렇다면 한국에 가서 살지요 뭐. No problem이라니까요

이 정도면 도인이 따로 없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이렇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순리대로 살아간다. 이들을 쫓아내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경지다. 그나저나 한국에 가서 산다길래 한국을 아느냐니까 잘 안단다. 그리고 정말 한국을 좋아한단다.

한국에는 물고기가 별로 없는데 어쩌지요?”

“No problem. 케밥 팔면 돼요케밥? 케밥도 만들 줄 알아요?”

그럼요. 사실은 안탈리아(지중해에 있는 도시)에서 케밥 장사를 한 적이 있어요. 물고기 많이 팔아서 한국으로 갈 겁니다.”

진짜 한국이 좋아요?”

그렇다니까요. 이탈리아, 그리스, 헝가리는 싫지만 한국은 좋아해요

그는 안탈리아에서 장사를 하다가 신물이 나서 중간에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왜 신물이 났느냐니까. 그곳은 너무 타락했단다.

술 마시고 헤로인 하고다른 건 다 용서하겠는데 정말 마약은 용서가 안돼요

 

티그리스 강의 '낭만 어부' 알리 씨.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젊은 남녀가 나타나더니 어부에게 인사를 한다. 누구냐니까 아들과 며느리란다. 20일 전에 결혼시켰다고 뿌듯해한다. 애개! 이 쪼그만 것들이 부부야? 기껏 해야 스물 남짓? 아직도 남은 조혼 풍습을 실천한 친구들을 만난 것이다. 결혼을 해도 애들은 애들이다. 저희들끼리 시시덕거리면서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철딱서니 없는 것들 같으니. 아들에게 묻는다.

아버지 일 이어받을 생각 없어요?”

싫어요싫어? 왜요?”

지금 하는 일이 좋아요. 물고기 잡는 일은 싫어요

그는 바트만의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어부보다는 상점 점원이 좋다는 젊은이. 그가 아버지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술과 마약은 안 되지만 담배는 괜찮은 모양이구나. 우리 어른들 봤으면 호통이 나왔을 텐데. 어부 알리 씨에게 타이어보트 좀 태워 달랬더니 오늘은 안 된단다. 강물이 무척 깊은데다 흙탕물이 흘러서 빠져도 건져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타고 싶어 태워 달랬나. PD가 그림이 될 거라니까 할 수 없이 탄다는 거지. 나는 속으로 야호!를 외친다. 별 걸 다 시키고 그래.

 

티그리스 강에서 잡은 물고기 '샤'.

이제 압둘라와도 헤어질 시간. 하지만 그는 아쉬움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교각을 가리키며 울분을 토한다.

저 구멍이 뭔지 알아? 옛날에 돌들을 납으로 연결해놓았는데 그걸 빼간 자국이야. 당신네 나라 같으면 저렇게 유적을 망가트리는 걸 놔두겠어? 저길 봐. 다리가 저렇게 무너질 지경인데도 보수할 생각을 안 한다고

그래,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떻게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을 저렇게 방치해 둘 수 있지. 압둘라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진다.

여긴 쿠르드 지역이라고 아무 관리를 안 하는 거야. 심지어는 물고기를 잡겠다고 다이너마이트까지 터트린다니까

그래 화가 날만도 하겠다. 내가 화나는데, 이곳에서 낳고 자란 너야 오죽하겠니.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악수를 청한다. 그가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든다. 잠깐이지만 정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모든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을 동반하는 걸.

 

자치기를 하는 아이들.

 

강에서 나오다가 주차장에서 자치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긴 막대로 작은 막대를 멀리 쳐내는. 옛날 우리가 하던 자치기와 도구나 방식이 똑 같다. 우리 아이들은 잊어버린 지 오래인 것을 이곳 아이들은 아직도 하고 있구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 들여다본다. 하산케이프 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다 장례행렬을 만났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장지로 간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물었더니 이 읍의 이맘(모스크에서 예배를 주재하는 사람)이 죽었단다. 종교지도자의 장례식이니 떠들썩할 수밖에.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3일 동안 조문을 받은 뒤 매장을 한다. 대부분은 남자들이지만 여성들도 검은 차도르를 쓴 채 행렬의 맨 뒤를 따른다. 다만 여성들은 매장이 진행되는 동안 뒤편에 떨어져서 애도를 해야 한단다. 하긴 여자들이 남자들과 섞이거나 앞장서는 경우는 절대 없는 나라니까.

 

다리 위로 장례 행렬이 지나간다.

티그리스 강 바로 옆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인류 문명을 낳은 강가에서서의 식사, 남다른 감회가 인다. 아래층에는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식사를 하고 있다. 어른들은 남녀구별이 엄격하지만 아이들은 별 상관이 없나보다. 남녀가 희희낙락하며 함께 먹는다. 그런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아직 식욕이 돌아오지 않는지라 중간에 포크를 놓고 차이를 한 잔 청해서 천천히 마신다. 터키에서는 밥을 먹은 뒤 나오는 차는 돈을 받지 않는다. 일부러 달라고 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 역시 2~3년 내에 물에 잠기겠지. 언젠가 다시 온다고 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다. 이왕이면 맨 꼭대기에 있다는 성까지 올라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통제를 한단다. 그렇다면 동굴이라도 찾아가보자 싶어서 길을 나선다. 최근까지 사람들이 살았다니까 흔적이 남아있겠지. 동굴살이야말로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했던 삶의 방식 아닌가.

옛성은 무너지고 그 사이로 소들이 오가며 풀을 뜯는다. 

바위 산에 온통 동굴집이다.

말이 읍이지 조금 걸어가니 마을의 끝이 나온다. 그 옛날 대상들이 지나가고 난전이 벌어졌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야기로만 남은 화려한 시절은 공허를 더할 뿐이다. 언덕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무너진 옛 성터가 나온다. 이곳 역시 완연한 봄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눈길을 헤맸는데 양탄자처럼 푹신푹신하게 밟히는 풀밭이라니. 겨울에서 봄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잠시 낯설다. 성벽은 멀쩡한 곳도 많은데 담 하나 쳐놓은 게 없고 그 사이를 소와 양들이 풀을 찾아 오가고 있다. 사람의 성이 동물의 성이 된 셈이다. 워낙 발에 채는 게 고대 유적이다 보니 저 정도는 옛날에 지은 돌집정도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바위산이 서 있고 곳곳에 굴이 뚫려있다. 바로 사람들이 살던 동굴집들이다. 이젠 본격적으로 탐험을 시작해 보자.

 

 

posted by sagang